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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the Christian Life 12 충성된 삶을 사는 성도 개혁교회 기본생활 시리즈 세 개가 하나 되는 네 쌍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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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the Christian Life

12

충성된 삶을 사는 성도

개혁교회 기본생활 시리즈

세 개가 하나 되는 네 쌍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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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삶을 사는 성도 ② (고전 4:1-2)

복습

오늘도 지난 번에 이어서 ‘충성된 삶을 사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지난 번 설교를 요약해 보자면, 성도가 충성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범사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

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은혜의 방도로 역사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인데, 부정적으로 보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

다’ 하고 상투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적어도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명제에 다 동의하지, 그렇지 않

은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

다 하는 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참으로 엄

청난 의미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제3문답이 아주 좋은 빛이 됩니다. 거기에 보면,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후,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

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문답이 나왔는가 하면, 바로 그 앞에 제2문답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지도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주신 준칙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하는 것을 지도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준칙은 구약과 신

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

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이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러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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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정리한다면, 성경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

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준칙입니다. 이때 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있다’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보통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라고 할 때의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성경의 권위 문

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권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

다. 성도란 이 권위에 순종하여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

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 앞에서 인간은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성경이 선포하는 위대한 구속의 진리에 성립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경에 순종하며 살아나가는 일은, 인간 본연의 의지나 능력으로써

는 어림없는 일이고, 반드시 성신께서 역사해 주셔야만 하는데, 이것에 대해

‘성신의 인도’라는 말을 쓴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반드시 ‘은혜의 방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성신께서

말씀을 쓰시는 역사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성신께서 말씀을 쓰셔서 성도에

게 은혜의 방도가 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의 ‘인도(o`dhge,w, 호데게오)’라는 말에서 보는 것으로(요 16:13), 성도의 지성에 빛, 곧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형식이었고, 둘째는 로마서에 있

는 ‘인도(a;gw,, 아고오)’라는 말이 나타내는 좀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롬 8:14), 마치 부모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형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신

께서 말씀을 쓰시는 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어집니다. 반드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말씀을 대할 때마다, 먼저는 어떠한 내용의 말씀에

직면할지라도 무조건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를 위해서

는 성신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신께

서 인도하시는 역사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성도에게 은혜

의 방도 또는 은혜의 수단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

경이 은혜의 수단이나 은혜의 방도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 마

디로 말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에서 한 지체의 자리에 정상적으로, 또는

최상의 상태로 서 있게 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인격과 품위를 최상의 상태

로 펼쳐내게 함에 있어서의 에너지 역할, 곧 에너자이저(energizer)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항간에 보여지듯이 에너주민(energumen)의 모습은 아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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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보통 열렬한 신자인 듯이 보이는 사람이 도를 넘어 거의 광신도인 듯이

보일 때 에너주민이라고도 합니다.

현대 교회가 제도적으로 빠져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오류가 이 문제입

니다. 그들 속에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쓰이는 모습을

보기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신께서 쓰시는 모습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뽑아내는 인본주의 종교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먹는 형식인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은 엄청난 차이, 곧 천양지차(天壤之差)여서, 어떠한 방식으

로도 일치를 이룰 수 없고, 어떠한 모습으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이 문제 앞에서 전투

적 교회가 되기 마련입니다. 원칙적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은 굳이 전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정작 문제는 거짓 교회 또는 사이비 교회와의 싸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움을 잘 갖추어야겠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 개개인이

제자답게 잘 서있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살펴보다

가 시간상 마친 것입니다.

교회인가, 종교단체인가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정작 교회의 표식과 속성들은 드

러내지 못하고, 그냥 종교 집단으로 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자칭 교회들이 많

습니다. 이들의 자기 주장이란 것이, 기껏해야 세상 앞에서 똘똘 뭉쳐 있는 자

기네 집단의 힘의 과시나 혹은 이런 저런 구제 사업을 한다거나 또는 각종

도덕 운동을 펼쳐 나가는 것에 불과한 경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천시 부

평구에 가보면 아예 바자회를 매월 행사로 여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 마당

과 바깥에 마치 5일 장 서듯이 해서 온갖 생활용품을 파는 행사를 매월 해나

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지역 주민들과 전도의 기회를 만든다 하는

명분으로 예배당에 커피와 간단한 빵을 파는 카페를 만드는 붐을 이루고 있

습니다. 그런 형식들을 통해서 자기네가 교회인 것을 자랑하지, 하나님의 말씀

을 우직하게 받들어 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며,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해주신 바,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삶의 열

매들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모습을 제시하는

교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복종시키는 성도들이 많은 데서 신앙의 실력을 드러내

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가 써먹는 종교 욕구 발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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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 결국에는 온갖 세속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세상과

벗이 되어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이율배반적인 신앙심을 발

휘해 나가는 정도의 의식이라면, 이런 사람들이 제아무리 많이 모여 있다 한

들 무슨 교회다운 실력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런 교회들이 결코 적지 않다 하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와 성도들은 기도라

는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다 하려고 합니다. 기도만 하면 사업이 형통해지고

병마도 물러가며 이런 저런 문제들도 다 해결되고 교회도 부흥된다고 생각합

니다.

이렇게 근본적인 신앙의 방향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

랑을 위한 데 있는 한 제아무리 말씀에 능통하고 이런 저런 말씀을 구구절절

이 외운다 할지라도 도무지 성령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

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

대 교회가 처해 있는 실제적인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잘 직시하고, 온갖 미혹

으로 역사하는 사탄의 어두운 궤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죄 가운데 빠져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되면, 곧 성령께서 그를 중생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시

게 되고, 그는 그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한 자가 아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죽음

과 사망의 법의 지배 하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한결 같이

죽음과 심판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것이

고,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이상 육신을 좇지 않고, 도리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이 거듭난 새사람인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을 때에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인 대표적인 증거들

이 있습니다.

첫째, 먼저 생각이 변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더 이상 이 세상을 향하지 아

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 世代를 本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變化를 받아 하

나님의 善하시고 기뻐하시고 穩全하신 뜻이 무엇인지 分別하도록 하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생각

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음(nou/j, 노우스)은

“주님을 따르지 않으려면, 주님을 빙자하지 말고, 내게서 배우지 않으려면, 나를 들먹이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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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고방식에 변화를 받아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항상 세상을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중

생한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고, 이 사실을 전제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생명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특징이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중심으로 사고해 나온 성도의

생각이 방향을 전환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이 무엇인가를 늘상 추구하기 시작합

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지금 나를 향하여 어떠한 뜻을 가지고 계시

겠는가 하는 데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솟아나게 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사랑을 베푸심으로 자기를 구원하셨는가에 대

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에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주신 데 대하여 감격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직

접 뵙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충분히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

나 믿고 말할 수 없는 榮光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도다”라고 한 말씀이 나

옵니다. 보아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비록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

풀어주신 그 크신 사랑에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솟아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 바로 이것도 중생한 사람

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중요한 증거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중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에 영원히 변치 않는 새 생

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내가 저희에게 永生을 주

노니 永遠히 滅亡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者가 없느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도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을 가리키니, 곧 성도와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성도가 생생하게 알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와 같은 새 생명이 있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도는 항상 이 사

랑에 붙잡혀 살고, 그렇게 살 때에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

을 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잘 살펴보아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고

고쳐야지, 그냥 주문을 외우듯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만을 되뇌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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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셋째,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질로 나타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

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성도의 사랑은 실질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 사랑의 실질을 과연 어떤 식

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충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때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심이야말로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충성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아니하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고 맡은 者들에게 求할 것은 忠誠이니라”(고전 4:2)고 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가 어떻게 당신께 충성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친히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충성으로써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

리서 3장 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忠誠하셨도다”라고 했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십니다(계 1:5). 충성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데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것은 윗사람의 권위와

힘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충성이야말로 자원하는

복종의 행위, 곧 윗사람께 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아래 사람의 입장에서 윗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충성 밖에는 달리 뾰

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충성의 핵심이 무엇일까 하는 데 대한 것

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말씀들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으

나, 중요한 핵심은 신실한 제자가 되라고 하신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어 끝까지 충성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성도가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님의 인도를 소멸하지 않고, 근심시키지도 않으며, 오직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

로 적극적으로 좇아가는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서 예수 그

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다워지는 것입니다.

제자의 도리 세 가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소욕을 좇아 제자의 도리에

신실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야말로 예수님을 지극히 사

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충성할 수가 없고, 겨우겨우 종

교인 행세만 하기에도 벅찰뿐더러, 아예 심할 경우 가룟 유다와 같이 배반자

밖에 달리 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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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을 세 가지로 말씀하신 것을 봅

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앞에서 이것은 중생한 영혼에게서 나오는

기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스승께 대

한 사랑과 존경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오는 者가 自己 父母와 妻子와 兄弟와 姉妹와 및 自己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

니하면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를 사

랑하지 말고 예수님만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부모와 처자 등을 사랑하는

그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예수님에게까지 더 연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

다. 이런 정도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만일 성도에게 예수님보다도 더 사랑하

는 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 비록 부모와 처자식이라 할지라도,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절대적 가치로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사랑이란 공중에 붕 떠 있는 무슨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그냥 말씀으로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

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실 때, 친히 당신의

몸을 우리의 죄값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역동적이며 실제적

인 자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스승의 바로 이러한 사랑에

감복된 자여야 할 것을 전제하고,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7절에서 “누구든지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능히 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과

연결시켜 해석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이 둘이 연결되어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自己를 否認하고 날마다 제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자기를 부인

하는 자요,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지워

주시는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께

교회란, “하늘에 좌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므로,

구원 받음은 ‘교회 바르게 이루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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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쓰시는 큰 그릇이 되어 세상 앞에서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군병 노릇을

능히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머리 속에 잠깐 가져본 것을 가

지고 실제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지워주시는 짐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것을 실제로 짊

어지고 나가는 자여야 합니다. 성도는 이 일에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는 이런 생각을 명확하게 가져야 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종교 운동을 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

다. 성도의 삶이란 종교 운동이 아닙니다. 어떤 규례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하는 종교 운동을 하는 것을 통하여 성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

로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제자로서의 기본적인 생활 태도, 혹은 중생한

자에게서 본성적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을 어떻게 좀더 구체적이

며 현실적으로 구현해 나가야 하겠는가 하는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지, 이런

저런 규례와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해 나가는 식의 종교 운동을 통해

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운동이란 것은 기본적으

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의 모습과 대치되는 것입니다.

셋째, 제자로서 예수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려면 세상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中에 누구든지 自己

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

다. 여기서 자기의 소유란 재물에 대한 대응어인데 이것은 세상의 대명사입니

다. 사탄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재물을 이용하여

사람을 자기에게 속하게 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까닭에 재물의 문제 앞에서

항상 단호하게 예수님을 택하는 능력을 드러내는 성도의 모습은 예수님께 충

성하는 제자의 특징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영적 생활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다른

것을 계획하고, 거기에 마음을 쏟으면서 어찌하면 재물을 더 많이 소유하겠는

가 하는 데 정신을 파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예수님께 충성하는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업을 여전히 꽉 움켜쥐고, 자기의 취미 생활을 한치도 양

보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이 더 좋아서 시간만 나면 쫓아다니는 사람으로서는, 예수님께 충성하여 그의 뜻을 받들어 섬기기는 고사하고 제자로서의 기본적

인 도리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들로서 형성되어야 이상적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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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원칙에 대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제자의 도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

의 말씀의 강요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말씀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예수 그

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일, 곧 구원 받은 자다운 생명력을 발휘하며 사는 데

온통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고, 만사형통하고, 교회를 크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하는 등의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

지 자라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라간다는 것이 중요합

니다. 성도가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그리 쓸모 있는 것이 되지도 못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더욱 성숙하고 자라가는 일이요, 이렇게 자라가려면 말씀의 젖을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먹

고 자라야 하며,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기까지 장성해야 합니다. 여기서 단

단한 식물을 먹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말하

기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先生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初步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食物을 못 먹을 者가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지각을 사용한다고

했고, 연단을 받는다고 했으며, 선악을 분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표현들은 무엇과 관계되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

씀과 관련하여 지각을 사용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연단을 받

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선악을 분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

을 깨닫고, 말씀을 훈련받으며, 말씀으로 분변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을 성도의 장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장

성해 나가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나가는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말씀을 잘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도리에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이루어나

가고 계시는 그의 나라의 거룩한 경륜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예수님의 제

자들로서 형성되어야 하는 교회의 분자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가 이러한 삶을 산다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고, 성도 자

신을 위해서는 슬픈 일이며 심지어 불행하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형성될 때

에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됩니다.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한은, 제아

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으며,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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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기껏해야 자기네라고 하는 단체 하나는 잘 유지해 나가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런 저런 종교 운동에 열심을 내며 만족해 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지, 성령의 거룩한 인도를 받으면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릇 노릇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나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있

는가, 제자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사는 삶, 곧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서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확실한 대답

을 할 수 있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명의 본능이요, 자연스러

운 생명 활동으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종교 운동을 하듯이

해서, 규칙에 따라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하며, 정해놓은 시간에 맞추어 어김 없

이 기도하고, 주일날만 되면 어김 없이 예배당에 나오고 하는 등의 일들에 기

계적으로 충실하는 것 그 자체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성경 말씀으로써 명확하게 확증해보지도 않은 채,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니 옳은 것이려니 하는 심정으로 자기 시대에 유

행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적인 문화와 분위기에 속하여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

라가는 식의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도, 결코 장려할만한 신앙의 모습은 아닙

니다.

신앙생활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활동이어야 하고, 이때 이것은 반드시 하나

님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생명활동이요, 그러나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좇는 방식이며, 그러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

운 중생한 생명의 본성적 활동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그리움이 자기 심정에 실제로 있는 까닭에, 이런 마음으로써 성

경을 읽어야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 아뢰고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고, 이런 심정이 자기 속에서 실제로 뜨겁게 솟아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규칙이나 규정을 만들고서는 마치 운동을 하듯이

추진해 나가는 식이 되어서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이루어내지 못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움 속에서 드러내는 제자다움의 능력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전도 행사를 위한 전도 운동, 기도 행사를 위한 기도 운동 기타 등등의 온갖

종교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복음의 큰 원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 생활에 물든 현대인들인지라,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설혹

전한다 한들 도무지 생명이 없고, 형식과 모방에 치우치게 됩니다. 세상 사람

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조차 깊이도 없고 좌충우돌하여, 도무지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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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감동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너나 잘 믿어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림만 받는 경우들이 더 많습니다.

복음을 전한다 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 사람의 성도요 예수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 자기 자신부터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삶이 얼마

나 복되고 영광스러운가를 실제로 누리고 아는 까닭에, 자기와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고도 확신 있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삶으

로써 보여주고 제시하는 전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

는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에,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실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가 전하는 복음은, 세상 사람이 볼 때에 논리가 정연하

고, 능력이 확연하며, 흠모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한 중에 성령께서는 주권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쓰시어

그가 구원 받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증거, 곧

중생한 증거가 있는가를 주도 면 하게 살펴서, 확증이 서면, 세례나 침례를

베풀어서 한 식구로 맞아 들이는 절차를 밟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

랬던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먼저 부러워한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 속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고 당당히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여하튼 세상이 교회를 바라볼 때

에, 흠모할 수밖에 없는 가치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로서 이루어지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한 단계 더 높게 또 다

시 성숙해지고 교회다운 속성들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게 되면서 세상 앞에

하나님의 나라의 자태를 확연하게 견지해 나가게 됩니다. 즉 세상과 더불어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자세를 확실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과의 전

투는 기본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이름을 사칭하고 있는 거짓 교회

들과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교회의 정체성과 성숙성이 찾

아지는 것이지, 무슨 운동을 요란하게 전개하여, 각 구역별로 목표를 할당하고, 거기에 ‘기도’라고 하는 것을 마치 ‘자본’이나 ‘에너지’처럼 투입하고, 그리하여

성도들을 재촉하면서 선동하듯이 몰아가는 식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

“설교자가 말씀의 학생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면,

강단에 올라갈 때에 목이 부러지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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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것은 부흥되면 되는 만큼 불행한 일이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지만, 덴마크의 실존주의 신학자인 키엘케골이 이

런 말을 했다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에 화려하게 성공하고

부흥한 것 때문에 실상은 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일하게 기독교이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옮겼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의미는 분명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은 할 마음이 없는데 교회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

에 하는 것이 되어지면, 이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의 원리에 적응하는 것이

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사방에 미혹이 난무하고 있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좀 더 깊게 하고 신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바쁘게 움직이느라 허둥대고, 열심이라는 명분 하에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시행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도리어 “나는 아무 것

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의 힘으로는 선다운 선도 행할 수 없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극복해보기

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이요 이내 다시금 죄에 빠지고 마는 존재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해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려는 때부터 스스로 우쭐거

리고 자신을 위대하게 보며 사람들 앞에 과시하기 시작하는 존재이다. 설혹

선행을 성취해도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는지 확신할 자신이 없다. 이렇게 나는 철저하게 무능력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그러니 오직 성령께서 나

를 인도하셔야 한다. 나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때가 아니고는 진정 참다운 선

을 행할 수 없다. 정말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정신에 항상 지배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성신을 좇아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냐 하는 것

인데, 우리 교회로서는 이미 확고부동한 대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품위를 본래의 가치대로 영광스럽게 드러

내는데 있어서, 나 자신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는

데 있다’ 하는 대답 말입니다. 성도는 이런 마음과 자세와 생활 태도를 일평생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제자들로서 형성되는 데서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

지게 됩니다.

정리와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그로 하여

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신실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

니다. 성도는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 행함으로 신령한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신령한 교회를 이루어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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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도는 기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심정이 있어야 제자로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심정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제자가 되어 충성하

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충성하는 제자, 곧 신령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사는

특징을 현저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여러

가지 규례를 만들고는 운동을 하듯이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

니다. 기독교는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일 때에 가장 기독교답지, 일종의 종교

운동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것은 지극히 부자유스럽고, 종국에는 인본주의 신

앙 체제로 굳어질 것입니다. 성도는 자발적이로되 당위를 좇아서 행하는 사람

입니다. 성령께서 그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쓰셔서 지각에 깨우침을 주실

때, 그렇게 깨달음에 이른 당위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좇아가는 데서 성도에게

서 예수님을 믿는 실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가 이 실력을 더 충만하게 드

러내기를 원하면 원하는 만큼 더더욱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

님께서는 그러한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그를 쓰셔서, 그가 속한 교회로 하여

금 당신의 경륜에 따라 당신의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데 적절히 이바지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나가는 데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위치에서

누리는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3개 1조 4쌍의 신앙고백

시작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정착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 21개조 (Geneva Church Confession, 1536)

제네바 교회 신앙교육서 33개조 (Geneva Church First Catechism, 1537)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문답 373문답 (Geneva Church Catechism, 1542, 1545)

벨기에 신앙고백 37개조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129문답 (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신조 5개 교리 (Canons of Dort, 1618/9)

형성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종결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프랑스 (갈리아) 신앙고백 40개조 (France [Gallican] Confession,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25개조

(Scots Confession, 1560) 스위스(헬베틱) 신앙고백 30개장

(Swiss [Helvetic] Confession, 1536, 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개장 (Westminster Confession, 1643-9)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 196문답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3-9)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107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3-9)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主言敎會

교회의 ‘설교문’은 목사의 생활을 지지해주는 교회의 위임 아래 수행된 것이므로, 설교자 개인이 아닌 교회에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주언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 보편의 참된 교회를 섬기는 일환으로 본 설교문을 이익과 결부된 책으로 판매치 아니하고 공개리에 배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