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 德)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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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과 동덕(同德) 157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 )과 동덕( 同德 ): 천도교 영성 교육의 회복을 위하여 김 남 희 가톨릭대학교, 비교종교학 1. 들어가는 말 2. 천의 역동적인 존재성, 지기 3.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 4. 천도교 영성의 나눔, 동덕 5. 결론 1. 들어가는 말 천도교는 한국 종교사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획을 그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중엽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조선의 상황 속에서 한국인에 의해 창도되었다는 것이며, 번째는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 창도를 기점으로 한국 신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 이다. 즉 천도교는 한국인에 의해 새롭게 창도된 한국의 신종교라 할 수 있다. 신종교는 말 그대로 새롭게 일어난 종교로서 기성 종교와 구별되는 종교를 일컫는다. 기성종교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에게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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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천도교 영성 교육의 회복을 위하여

    김 남 희

    가톨릭대학교, 비교종교학

    1. 들어가는 말2. 천의 역동적인 존재성, 지기 3.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 덕 4. 천도교 영성의 나눔, 동덕5. 결론

    1. 들어가는 말

    천도교는 한국 종교사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획을 그었다. 첫 번째는 19세기 중엽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조선의 상황 속에서 한국인에 의해 창도되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 창도를 기점으로 한국 신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

    이다. 즉 천도교는 한국인에 의해 새롭게 창도된 한국의 신종교라 할 수 있다. 신종교는 말 그대로 새롭게 일어난 종교로서 기성 종교와 구별되는 종교를 일컫는다. 기성종교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중들에게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특집: 종교영성과 교육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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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신종교는 창교자의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기성 종교의 전통을 비판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사유와 종교 신념을 민중들에게 제시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래지향적 종교로 체계화시켜 나간다. 신종교는 기성 종교로부터의 일탈(逸脫, significant break)을 전제로 하되, 기성 종교의 전통적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롭게 그 개념을 변용(acculturation)시키는 것이다. 천도교는 최제우의 종교체험을 토대로 당시 종교 전통이었던 유교, 불교, 도교, 무교, 민간신앙으로부터 일탈하였다. 나아가 기존의 종교적 개념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재구성 하고 재해석을 했다. 창교자인 최제우가 “우리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한 일이요. 지금도 비교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교할 수 없는 법”1)이라고 한 바와 같이, 그는 기성 종교 전통을 단순히 혼합하거나, 종합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최제우의 창발적 종교사상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1861-1922)에 의해 고유한 천도교의 사상체계로 발전해 나갔다. 천도교는 한국 땅[역사적 상황]에서 한국인에 의해[종교적 체험] 창도된 고유한 한국의 종교[창발적 해석]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제우가 동학과 유학의 관계에 대해 “크게 보아서는 같지만 작은 차이가 있다”2)라고 말한 것은 동학과 유학의 사상적 개념이 사전적인 의미에서 엇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학의 개념을 수용하되[大同], 그 개념을 창발적으로 재해석[小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시의 동학(東學)은 단순히 서학(西學)에 맞서기 위한 ‘개량화된 유교’3)가 아니라 그 개념을 포월(包越)하여 궁극적으로 ‘대동학(大同學)’이 되고자 한 종교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천도교의 기성 종교 전통에 대한 사상적 수용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천도교가 창발적으로 해석했던 종교 개념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이러한 고유한 창발적 개념을 통해 인간을 궁극적으로 지향하게 하는 힘, 즉 천도교의 영성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천도교 영성이 덕(德)으로 드러남을 살필 것이다. 덕(德)은 지기(至氣)를 통한 상향적 합일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 바, 성(誠), 경(敬), 신(信)의 덕으

    1)『東經大全』「論學文」, “吾道 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2)『東經大全』「論學文」, “大同小異”. 3) 이길용,「수양론적 시각에서 바라본 동학의 신 이해」, 변선환 아키브·동서종교신학연구소 편,『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07),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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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고유한 영성의 회복은 영성의 나눔인 동덕(同德)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살펴볼 것이다.

    2. 천(天)의 역동적인 존재성, 지기(至氣)

    2.1. 천(天), 인(人) 그리고 상향적 천인합일(天人合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적 존재자로서 천(天)과의 관계성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해왔다. 이러한 정체성을 찾는 사유는 천인합일 사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도교 또한 최제우의 천(天)에 대한 체험을 근간으로 하면서 천(天)과 인(人)과의 관계성을 정립시켜 나간 종교라 할 수 있다. 천도교의 천인합일 사상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최시형의 양천주(養天主),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천도교의 하늘[天]과 사람[人]의 관계성은 최제우의 신비체험에서 비롯된다. 처음 그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통해 경험한 천(天)은 ‘상제(上帝)’, ‘천주(天主)’ 또는 ‘님’이라고도 불리며, 인간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主宰天]였다. 그러나 여러 달에 걸친 신비체험 속에서 그는 천(天)이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곳으로 지극히 높은 어떤 꼭대기에 있는 존재거나 어떤 형상을 가진 인격적 지고신(至高神)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개념으로 집약된다. 천(天)이 자신의 마음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게 된 최제우는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

    가”4)라고 하면서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안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5)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도 인격적이며,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이러한 천(天)은 인간의 몸 안에서 공경하며 모셔져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이로써 초월적이면서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天)은 이제 인간 안에서 내재시켜야 할 ‘시천주(侍天主)’ 개념으로 정립된다.6) 이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합일을 위해 몸

    4)『龍潭遺詞』「道德歌」 5)『龍潭遺詞』「敎訓歌」 6) 김경재,「최수운의 신 개념」, 이현희 엮음,『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서울: 청아출판사, 1984), 125-1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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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 내재한 천(天)을 마치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듯이 공경’7)하고 지극히 모실 것을 강조한 개념이다. 이후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해 천(天)이 아무리 지고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모시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한 천(天)을 길러내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 사상으로 발전된다.8) ‘천(天)을 모심[侍天主]’이 곧 ‘천(天)을 키움[養天主]’으로 해석된 것은 최시형에게 있어 ‘모심[侍]’은 살아계시는 것을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천(天)을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천(天)이 자신의 마음에 모셔져 있다’는 현상유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천(天)을 ‘키워내야 할(養)’ 의무를 지닌 존재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천(天)이 자신의 마음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간에 내재시켜야 할 존재’로서 개념화했다면, 최시형은 한 걸은 더 나아가 이미 모든 사람을 천(天)을 모시고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하고, 내 안의 천(天)을 길러내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써 시천주(侍天主) 사상에서 나타났었던 초월적 인격적 신관을 극복하고 범재신론(panentheism)적 신관을 형성하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에서 천(天)과 인(人)의 관계가 여전히 상대적이었다면, 양천주(養天主) 사상에서는 ‘내 마음이 곧 한울’이고 ‘사람 외에 따로 한울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 자질을 키워’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천(天)과 인간이 비로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가 형성되었다.9) 천(天)과 인(人)의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는 ‘향아설위(向我設位)’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10) 나를 향해 신위를 모시는 이러한 ‘향아설위법’은 ‘나’를 중심으로 잃어버렸던 오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천을 모신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구체적 행위의 표현이다. 한울님을 모신 ‘지금 여기’에서 제사 지내는 내가 내 안에 살아있는 한울님을 자각할 때 천(天)과 인(人)의 궁극적 합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7)『東經大全』「論學文」,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8)『海月神師法說』「養天主」, “한울을 養할 줄 아는 者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나니라. 한울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 마치 種子의 生命이 種子속에 있음과 같으니, 種子를 땅에 심어 그 生命을 養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道에 依하여 한울을 養하게 되는 것이라.”

    9)『海月神師法說』「天地父母」, “人不離天天不離人故 人之一呼吸一動靜一衣食 是相與之機也”.10)『海月神師法說』「向我設位」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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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시형의 ‘양천주’ 사상은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른다’라는 의미는 억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천(天)은 원래가 온전한 존재이므로 잘 키워 발현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온전하게 발현하면 그 천(天)은 바로 하늘(의 성품)이 되는데, 이것이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11)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손병희는「無體法經」에서 “시천주의 모실 시 자는 한울님을 깨달았다는 뜻이요, 천주의 님 주자는 내 마음의 님이라는 뜻이니라. 내 마음을 깨달으면 상제가 곧 내 마음이요, 천지도 내 마음이요, 삼라만상이 다 내 마음의 한 물건”12)이라 하였다. 여기서 ‘한울님을 깨닫는 것[覺天主]’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이 되도록 하라’는 주체자로서의 인간의 결단과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깨달음이 행위로 이어질 때, 즉 “한울님을 모시고(侍天), 한울님 행위(行天)를 함으로써 이제 한울님을 체현”13)하게 되는데 이것이 체천(體天)이다. 여기서 손병희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모신다’는 의미로 더 이상 ‘시천주(侍天主)’가 아니라 ‘시천(侍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손병희에게 ‘시천(侍天)’은 ‘천주(天主)’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천(天)’을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신다’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의 본성을 타고 났다’는 것을 뜻한다.14) 인간이 하늘의 본성을 타고난 존재이기 때문에 손병희에게 있어 ‘사람은 곧 한울(天人)’이 된다.15)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것은 ‘사람은 모두 하늘이 낸’ 것, 즉 ‘사람이 본래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늘의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손병희는 ‘인내천’은 곧 ‘자기 마음을 스

    11)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면서 종지(宗旨)를 ‘인내천’으로 선포하였다.

    12)『義菴聖師法說』「無體法經」, “侍天主之 侍字 卽覺天主之意也 天主之主字 我心主之意也 我心覺之 上帝卽我心 天地我心 森羅萬相 皆我心之一物也”.

    13)『義菴聖師法說』「三戰論」, “侍天行天故 是曰體天”.14)『義菴聖師法說』「覺世眞經」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물건은 다 성품이 있고 마음이 있으

    니 이 성품과 이 마음은 한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한울을 모셨다(侍天)고 말하는 것이니라(物有是性 物有是心 是性是心 出於天故 曰 侍天也)”; 류병덕 편저,『동학·천도교』, (서울: 시인사, 1987), 332 참조.

    15) 이에 대해 손병희는「授受明實錄」에서 ‘사람이 바로 한울 사람[人是天人]’이라고 한 것은 “한울이 만물을 화생함에 뜻을 형체에 부쳐 임의로 활용한다는 것(天以化生萬物意屬形體 任意用之者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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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로 숭배하는 것’16)을 뜻한다고 했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 그 몸이 천(天)이고 그 마음이 곧 천(天)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모시고 있는 천(天)을 깨달으면 곧 자기 자신이 천(天)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내천’ 사상이다.17)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천도교의 천인합일은 각자의 성(性) 속에 한울을 모시고 있는 존재[侍天主]로서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한울(天)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으면[養天主] 자신이 곧 한울이 된다[人乃天]는 사상이다. 여기서 “천(天)이나 ‘천주(天主)’의 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근대화해감에 따라서 보다 인간화되고 마침내

    는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내천’까지 ‘천’의 인간화과정”18)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천과 인의 합일에 있어 천도교는 아래로부터 위로 한울님과 합일하는 데 있어 인간

    을 주체로 삼았고,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이러한 상향적 천인합일 사상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마련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2.2. 천(天)의 역동적인 존재성, 지기(至氣), 일기(一氣) 그리고 기화(氣化)

    천도교 천인합일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상향적 천입합일의 역동성은 바로 천도교의 기(氣) 개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최제우는 하늘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한 적이 없다. “수운에게 있어서 천주는 그 정체에 대한 물음이 필요 없는 당연한 존재였지, 새롭게 무언가를 물어서 그 속성을 파악하고 분석해야 할 낯선 대상은 아니었던 것”19)이다.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신에 대한 속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하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였다. 그렇다면 시천주(侍天主) 사상에서는 ‘어떻게 하늘을 내 안에 모실 것인가[侍天主]’에 대한 수양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는 21자 주문, 즉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20)

    16)『義菴聖師法說』「性靈出世說」, “大神師吾敎元祖 其思想 博從約至 其要旨 人乃天 人乃天敎客體成 人乃天認心 其主體位占 自心自拜敎體 天眞素的極岸立 此人界初創大宗正義謂足”;『義菴聖師法說』「性靈出世說」, “大神師 嘗 呪文之意解釋曰「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是 指稱以靈之有機的表顯 道破人乃天定義也”.

    17) 노길명,『한국신흥종교연구』, (서울: 경세원, 1996), 129-130 참조.18) 신일철,『동학사상의 이해』, (서울: 사회비평사, 1995), 47.19) 이길용,「수양론적 시각에서 바라본 동학의 신 이해」, 변선환 아키브 ․ 동서종교신학연구소 편,『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07),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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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자 주문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람이 모셔야[侍] 할 존재[天主]는 ‘지극한 기[至氣]’로 명명된다. 최제우는 이 ‘기(氣)’의 특징을 “허령(虛靈)이 창창(蒼蒼)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한 한 기운”21)

    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영(靈)이 비어있다[虛]’라는 의미는 글자 그대로 ‘비어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음’ 나타내므로 ‘역동적인 존재성이 되기를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최시형은 “그릇이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집이 비었으므로 사람이 능히 거처할 수 있으며, 천지가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용납할 수 있고, 마음이 비었으므로 능히 모든 이치를 통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22)

    이처럼 ‘비어있는 곳’에서 움직이는 ‘영’은 결국 살아있는 생명력을 뜻하며, ‘허령이 창창’하다는 것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창조적인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창창한 허령’이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기(至氣)인 영(靈)이 우주 속에서 생명의 창조를 진행할 뿐 아니라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23) 따라서 ‘혼원한 일기(一氣)’란 천지에 가득한 기운을 뜻하는 것으로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변치 않는 본바탕의 기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지기와 천은 궁극자의 양면으로서, 지기를 통해서 우주와 인간이 하나로 통전되고 인간은 곧 우주표현이 된다.24)

    우주와 인간이 하나로 통전되는 이 지기(至氣)를 최시형은 일기(一氣)라고 명명하고, 그 개념을 더욱 구체적으로 해석하였다. “우주에 가득 찬 것은 도시 혼원한 한 기운”25)이고, “천지는 한 기운 덩어리”26)이므로, “천지, 음양, 일월, 천지만물의 화생한 이치가 한 이치 기운의 조화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 나누어 말하면 기란 것은 천지 귀신 조화 현묘를 총칭한 이름이니 도시 한 기운”27)이라 하였다. 하나의 기운은 우주의

    20) Ibid., 240.21)『東經大全』「論學文」, “虛靈蒼蒼 無事不涉 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渾元一氣”.22)『海月神師法說』』』「虛와 實」, “器虛故能受萬物 室虛故能居人活 天地虛故能容萬物 心虛故能通萬理也”.23) 권진관,「기독교와 동학의 만남: 영과 지기를 중심으로」, 변선환 아키브·동서종교신학연구소 편,『동

    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07), 322.24)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서울: 혜안, 2001), 107-108.25)『海月神師法說』「誠敬信」, “宇宙間 充滿者 都是渾元之一氣也”.26)『海月神師法說』「天地人·鬼神·陰陽」, “天地一氣塊也”.27)『海月神師法說』「天地理氣」, “天地 陰陽 日月於千萬物化生之理 莫非一理氣造化也 分而言之 氣者 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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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적 실재로서 만물을 생성하고 화육하는 기운을 뜻한다. 기는 하나이므로 우주에 편만한 기는 곧 지기와 연결되며,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신적인 가치를 지닌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이 신적인 것의 그림자가 아니라 하나의 기[至氣]와 연결되어 있어 곧 우주만물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28) ‘우주에 가득 차 있으면서 만물을 화생하는 기운’으로서의 ‘지기(至氣)’와 ‘일기(一氣)’, 곧 천주(天主)를 모신다[侍]는 것은 결국 영(靈)과 기(氣) 개념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최제우가 풀이한 바와 같이 ‘천주’를 ‘모신다(侍)’는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작용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어기지) 않는 것”29)이다. 이는 인간의 몸 안에서는 천주가 신령(神靈)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체험하고, 몸 밖에서는 기(氣)의 작용, 즉 기화(氣化)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천주’는 우주 만물 속에서 생명의 ‘영’ 혹은 ‘지기’로 작용하고 있으며, ‘기화’는 사물과 인간들이 자신의 생명을 실현하도록 하는 모든 우주적, 사회적 작용을 뜻한다.30) 이러한 기화의 작용으로 인간은 ‘천주를 내적으로 체험[內有神靈]’할 수 있으며, 나아가 ‘깨달음으로 변화된 주변 환경을 새롭게 인식[外有氣化]’할 수 있다. 즉 인간 안에 내재시켜야 할 “신령은 우리의 건강한 내적인 본질을 가리킨다면, 기화는 우리와 다른 존재들과의 올바른 관계”31)로 해석될 수 있다. 다른 존재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최시형이 해석한 바와 같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구성원들을 일기(一氣)의 소산이며, 기화작용에 의해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修養]’이다. 즉 모든 존재가 내유신령(內有神靈)이라면 며느리, 어린이, 남녀노소,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땅마저도 모두 한울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울을 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안다’라고 한 양천주(養天主) 사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천도교는 지기(至氣) 또는 일기(一氣)를 천(天)과 같은 궁극자의 양면으로 인식하고, 우주와 인간이 하나로 통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천(天)의

    鬼神 造化 玄妙之總名 都是一氣也”.28) 권진관,『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331.29)『東經大全』「論學文」,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30) 권진관,『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 328-329 참조.31) Ibid.,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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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화(氣化)작용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외재적 존재인 천(天)을 지기(至氣) 또는 일기(一氣)의 작용[氣化]을 통해 내재적 존재로 인간에 내면화시키고자 한 천도교의 상향적 천인합일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즉 천도교는 기화(氣化)를 통해 본체계[形而上]와 현상계[形而下]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이원적 세계를 극복하고, 절대적이고 정태적인 세계중심의 본체론적 사유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세계중심의 현상론적 사유로 인

    식을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수직적인 위계질서에 갇힌 당시의 사회체제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평등한 수평적 세계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 시천주자(侍天主者)의 열망이며, 나아가 시천주자(侍天主者)가 지향해야 할 영성이라 할 수 있다.32)

    2.3. 아래로부터의 영성수련, 수심정기(守心正氣)

    천도교에서 천을 영(靈)인 동시에 기(氣)이기도 한 역동적인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은 사람이 ‘도에 들어 처음으로 지기에 접함[今至]’을 사변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화(氣化)를 통해 실천적으로 자각하고 체험하는 것[願爲大降]’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도교에서의 천(天)은 물음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나의 한 기운[一氣]이 천지 우주의 원기와 한 줄기로 서로 통했으며, 나의 한 마음은 조화 귀신의 소사(所使)와 한 집의 활용이니, 그러므로 한울이 곧 나며 내가 곧 한울”33)이라 하더라도, 궁극적 천인합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에게 내재한 영(靈)과 기(氣)를 간절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염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수양이 바로 수심정기(守心正氣)이다. 즉 ‘시천주’의 구체적인 수양법은 곧 ‘수심정기’인 셈이다. 최제우는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34)이라고 역설하였다.35) 그는 당시 조선의 도덕윤리가 실천윤리로서 그 생명력을 상실한 것

    32) 박경환,「동학의 신관」, 동학학회 편저,『동학과 동학경전의 재인식』, (서울: 신서원, 2001), 178-188 참조.

    33)『海月神師法說』「其他」, “我의 一氣 天地宇宙의 元氣와 一脈相通이며, 我의 一心이 造化鬼神의 所使와 一家活用이니, 故로 天卽我이며 我卽天이라”.

    34)『東經大全』「修德文」, “仁義禮智 先聖之所敎 守心正氣 惟我”之更定.35) 1863년 8월 14일 새벽,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파악한 최제우는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

    제자 최경상(崔慶翔)에게 “사시(四時)의 차례에 성공한 자는 가는 법이다”라고 말한 뒤 붓을 들어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글자를 써줌으로써 그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천도교의 중요한 교의라 할 수 있다(최무석,「최수운의 교육사상」,『신인간』, 397(1982), 22 참조).

  • 166 신학과 철학 제24호

    을 비판하면서,36) 외재적 규범에 따르는 타율적이고 형식적인 수양 방법을 지양하고 개개인에 부여된 천성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강조하였다. 즉 외재적 도덕률에 인간 자신의 행위를 피동적으로 일치시키는 데에서 벗어나 각자 내면에 대한 성찰

    과 자각을 먼저 회복해야 함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제우가 “수심정기 하여 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37)라고 강조한 바와 같이, 인의예지의 도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수심정기였던 것이다.38)

    이와 같이 최제우가 외재적 진리나 규범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성찰을 강조할 수 있었던 계기는 자신의 종교체험에 있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임을 체험한 신비는 그가 ‘하늘[天]’이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곳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 존재하거나 어떤 형상을 가진 인격적 지고신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건이었다. ‘하늘[天]’은 단순히 믿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시켜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수심정기’를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39)이라 풀이하였다. 누구나 자신의 본래의 마음이 곧 한울님 마음임을 깨달으면 ‘수심정기’를 수양하고 있는 것이며, 이 수양의 끈을 놓지 않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생겨 나온다

    는 것이 바로 천도교의 심법(心法)이라 할 수 있다.40)

    각자 한울님을 모셨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곧 한울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을 계속 보전해 나갈 때, 한울님은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이나 구복(求福)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본체’가 됨으로써 결국 인간 자신은 ‘본래의 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수심정기의 경지라 할 수 있으며, 최시형은 이러한 경지를 다음과 같지 묘사하였다. “잘 때에 ‘잡니다’고 하고, 일어날 때에 ‘일어납니다’고 하고, 물 길러 갈 때에 ‘물 길

    36)『龍潭遺詞』「敎訓歌」,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龍潭遺詞』「勸學歌」,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있지마는 人心風俗 怪異하다.”.

    37)『龍潭遺詞』「도덕가」, “守心正氣하여 내어 仁義禮智 지켜 두고”.38)『海月神師法說』,「守心正氣」, “경에 말씀하시기를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하셨으니, 만일 수심정기가 아니면 인의예지의 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니라”(經曰「仁義禮智先聖之所敎 守心正氣惟我之更定」若非守心正氣則 仁義禮智之道 難以實踐也).

    39)『東經大全』「論學文」, “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40) 김춘성,「해월사상의 현대적 의의」,『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서울: 예문서원, 1999), 68 참조.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67

    러 갑니다’고 하고, 방아 찧으러 갈 때에 ‘방아 찧으러 갑니다’고 하고, 정하게 다 찧은 후에 ‘몇 말 몇 되 찧었더니 쌀 몇 말 몇 되 났습니다’고 하고, 쌀그릇에 넣을 때에 ‘쌀 몇 말 몇 되 넣습니다’고 하옵소서.”41)

    매사에 자신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고하는 ‘심고(心告)’는 자신에게 내재한 한울님[內有神靈]에게 자신이 행한 것을 항상 고하여 자신의 진심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생생하게 한울님을 징험함으로써 한울님을 분명히 믿을 수 있는 심적(心的), 신적(身的) 수양이다. 여기서 수심(守心)은 한울님을 맞을 수 있는 마음을 다지는 것을 뜻하고, 정기(正氣)는 한울님을 맞을 수 있는 신적인 자세를 바로 잡는다는 것을 뜻한다.42) 따라서 한울님을 모심으로써 징험한다는 것은 최시형이 비유를 든 바와 같이, 자신의 진심[心]과 자신의 행동(身)이 일치하는지를 알아 궁극적으로 하늘[天]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43) 나아가 천(天)이 사람성 무궁[사람성과 신성이 일치됨]이 된 경지라 할 수 있다.44) 이와 같이 ‘수심정기’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하늘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천(天)과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절대적 경지를 열고자 한다는 점에서 천도교의 ‘수심정기’는 바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강조한 수양법이라 할 수 있다.

    3.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 덕(德)

    최제우가 신비체험을 통해 한울님[天]으로부터 영부, 주문과 함께 받은 사명은 ‘포덕천하(布德天下)’였다. 당시 동학 창교의 목적은 악질이 퍼져 백성이 불안해하고 있으며 서양

    41)『海月神師法說』「內修道文」42) 류병덕 편저,『동학·천도교』, 206.43)『東經大全』「歎道儒心急」에 “맑은 기운을 어린 아기 기르듯 하라”고 비유한 바와 같이, ‘시천주자’의

    ‘수심정기’는 궁극적으로 ‘한울님을 길러내는 것[養天主]’이고, 나아가 ‘한울님을 깨닫는 것[覺天主]’이 되는 수양인 것이다.

    44) “無所不在한 한울님의 法性은 사람性과 달리 存在한 것이 아니요, 사람性 無窮이 곧 한울님의 法性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天으로서 보면 사람性 無窮은 곧 天이 되는 것이요 人으로서 보면 天은 곧 사람性 無窮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한울님을 虛空에 求하지 않으며 名色에서 求하

    지도 않고 오직 사람性 無窮에서 求하는 信仰인 것이다”(이돈화,『人乃天要義』, (서울: 천도교중앙총부, 1966), 31-32).

  • 168 신학과 철학 제24호

    세력이 침략하여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도교는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을 널리 알리는데[布德] 있었다.45) 그러나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道則天道 德則天德)”46)이라 한 바와 같이, 천도교 포교의 목적은 조화와 술법으로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천(天)의 순리대로 천의 덕(德)을 펼치는데 있었다. 천도(天道)가 만물의 이치이자 하늘의 마음[天心]이므로 천덕(天德)은 인간 자신에게 내재한 천심(天心)을 회복하고자 끊임없이 ‘수심정기’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천도교의 덕(德)은 ‘한울의 뜻을 얻는 것[得]’으로써 인간이 한울과 일치하려는 인간의 곧은 마음[直心], 인간의 의지이다.47) 따라서 천도교에서의 덕(德)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한울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수심정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실천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천도(天道)를 밝히고 천덕(天德)을 닦는 행위는 신(信)의 덕, 경(敬)의 덕, 성(誠)의 덕으로 드러난다. 최제우는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 경, 신 석자니라. 이 속에서 공부하여 터득한 뒤에라야 마침내 알 것이니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48)고 함으로써, 천덕(天德)의 실천은 곧 신(信), 경(敬), 성(誠)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3.1. 신(信)의 덕(德)

    천도교는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信]을 근본으로 하여 가르침을 전파하는 종교다. 최제우는 “세상 인도 중에 믿은 신자 주장일세”49)라고 함으로써, 믿음의 회복을 역설

    45)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東經大全』「布德文」);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요.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

    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曰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東經大全』「論學文」); “한울의 신령한 변화 중에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 되었으니, 그러므로 우리 도의 포덕천하·광제창생은 한울의 명하신 바니라.”(天의 神化中에 一大開闢의 運이 回復되었나니, 故로 吾道의 布德天下 廣濟蒼生 天『의 命해하신 바니라.『海月神師法說』「其他」).

    46)『東經大全』「布德文」47) 실제로 득(得)과 덕(德)이 혼용되었다는 것은 덕(德)을 ‘얻는다[得]’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得”, 張三植 編,『大漢韓辭典』, (서울: 博文出版社, 1975), 501; “悳”, “㥁”, Ibid., 530 참조.

    48)『東經大全』「座箴」, “吾道博而約 不用多言義 別無他道理 誠敬信三字”.49)『龍潭遺詞』「道修詞」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69

    하였다. 이는 최제우가 강수와 나눈 문답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제자인 강수가 수도의 절차를 묻자 그는 ‘신(信)-경(敬)-성(誠)’의 순으로 답했다고 한다.50) ‘성-경-신’의 순서가 아니라 ‘신-경-성’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신(信)이 경(敬)과 성(誠)에 앞선다는 것으로, 당시의 동학이 단순히 사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로 체계화되는 데 있어 중요한 토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제우가 “대저세상大抵世上 인도 중人道中에 믿을 신信자 주장主張일세”51)라고 강조한 바와 같이, 천도교는 “믿음에서 깨달음의 기초를 마련하여, 이로부터 점차 닦아 나가야 하는 신해적(信解的) 믿음”52)으로 체계화한 종교라 할 수 있다.

    “이 도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되느니라. 믿을 신 자를 풀어 보면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을, 그 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어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이와 같이 닦아야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루느니라. 정성과 믿음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말로 이루었으니 먼저 믿고 뒤에 정성하라.”53)

    최제우에게 있어 신(信)은 옳고 그름을 아는 가운데 옳은 것을 취하고 그 취한 바를 거듭 생각하고, 한번 마음을 정한 뒤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믿음은 변하지 않는 꾸준한 정성[誠]을 위해 선행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최제우는 믿음이 없으면 ‘어떠한 의기범절도 나올 수 없고, 정한 바를 변치 말아야 군자도 될 수 있다’54)고 역설하였다. 최시형 또한 “사람의 닦고 행할 것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정성을 드리는 것이니, 만약 실지의 믿음이 없으면 헛된 정성을 면치 못할 것”55)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천도교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믿는 덕행[信]’은 경(敬)과 성(誠)의 근본이 되며, 한울과 인간을 맺는, 즉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이어주는 “관계의 바탕”56)이 된다.

    50) 표영삼,「동학경전 편제와 내용」,『신인간』, 438(1986.4), 124.51)『龍潭遺詞』「道修詞」52)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282.53)『東經大全』「修德文」, “大抵此道 心信爲誠 以信爲幻 人而言之 言之其中 曰可曰否 取可退否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如斯修地 乃成其誠 誠與信兮 其則不遠 人言以成 先信後誠”.54)『龍潭遺詞』「道修詞」, “대장부 의기범절 信 없으면 어디 나며… 作心으로 불변하면 乃成君子 아닐런가”.55)『海月神師法說』「誠敬信」, “人之修行先信後誠 若無實信卽 未免虛誠也”.56) 최무석,「동학의 도덕사상에 관한 고찰」,『學生生活硏究所報』, 9(1983, 12), 68.

  • 170 신학과 철학 제24호

    3.2. 경(敬)의 덕(德)

    믿음으로부터의 덕이 한울과 인간을 이어주는 관계의 바탕이 될 때 드러난다면, 경(敬)의 덕은 그 관계성에서 파생되는 덕행으로서, 관계의 조화를 지향하는 덕이라 할 수 있다.57) 이는 최시형의 ‘삼경(三敬)’사상에 잘 드러나고 있다.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개념을 통해 모든 사람이 시천주자(侍天主者)이지만 천(天)을 길러내야 하는 적극적인 실천을 역설하면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 대상, 즉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인간을 공경[敬人]할뿐만 아니라 물건까지 공경[敬物]할 것을 강조했다.

    “사람은 첫째로 敬天을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先師의 創明하신 道法이라. 敬天의 原理를 모르는 사람은 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 하면 한울은 眞理의 衷을 잡은 것임으로써이다. 그러나 敬天은 결단코 虛空을 向하여 上帝를 恭敬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恭敬함이 곧 敬天의 道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吾心不敬이 즉 天地不敬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敬天함으로써 自己의 永生을 알게 될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의 全的理諦를 깨달은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남을 爲하여 犧牲하는 마음, 世上을 爲하여 義務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敬天은 모든 眞理의 中樞를 把持함이니라.”58)

    천도교에서 천(天)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이다. 한울을 공경함은 모든 진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움켜잡는 것과 같다. 하지만 경천(敬天)은 사람을 공경하는 행위에 의지하여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시형은 “敬天만 있고 敬人이 없으면 이는 農事의 理致는 알되 實地로 種子를 땅에 뿌리지 않는 行爲와 같으니, 道 닦는 자 사람을 섬기되 한울과 같이 한 後에야 처음으로 바르게 道를 實行하는 者”59)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스승의 시천주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만이 천(天)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모든 개별 사물도 공경해야 한다는 경물(敬物) 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모든 사물에 한울님이 내재하여 있으므로 사물을 대할 때에도 한울님이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스러

    움을 놓지 말라는 ‘대인접물(待人接物)’ 사상, ‘물건마다 천 아닌 것이 없고 일마다 천

    57) Ibid., 66 참조.58)『海月神師法說』「三敬」59) Ibid.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71

    아닌 것이 없다’는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 그리고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60)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천도교에서의 경(敬)은 근본적으로 “한울님에 대한 몰입과 한울님의 발현”61)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몰입과 발현을 위해서는 한울만을 공경해서도 안 되며, 사람을 공경함으로써만 덕의 극치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개별 사물까지도 공경할 때 진정으로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德)에 합일”62) 될 수 있다. 즉 이는 경(敬)을 통한 천인합일에 이르는 경지라 할 수 있다.

    3.3. 성(誠)의 덕(德)

    최제우는 성(誠)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정성 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들어맞고 도덕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겠는가”63) 위의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울님께 정성을 들인다는 표현으로 인하여, 정성[誠]을 드리는 행위는 마치 절대적 존재 앞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태도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다.64) 그러나 천도교에서 한울에 대한 인간의 ‘정성[誠]’은 한울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라 참된 진리이자 순일(純一)한 천(天)의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천의 본래의 모습이 곧 성(誠)이기 때문에 “천하만사가 그 본이 있고 그 果가 있는 것인데 초목에 있어서 뿌리가 있는 것은 그 가지가 있고 그 仁이 있는

    자는 果가 생하는 법이다. 하늘은 古今往來에 하루 한시라도 휴식 없이 사계절을 순환하나 무위이화한다. 誠이 있어 그 果로부터 誠을 感”65)하는 것이다. 즉 성(誠)은 “사시

    60) 天道敎史編纂委員會 編,『天道敎百年略史』, (서울: 未來文化社, 1981), 129, “以天食天은 天地의 大法이라 모든 물건이 또한 나의 同胞이며 모든 물건이 또한 한울의 표현이니 물건을 공경함은 한울을

    공경함이며 한울을 향하는 것이니 天地神明이 물건과 더불어 推移하는지라 제군은 物"을 食함을 天을 食하는 줄로 알며 人이 來함을 天이 來하는 줄로 알라.”

    61)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289.62)『海月神師法說』「三敬」63)『東經大全』「布德文」, “誠之又誠 至爲天主者 每每有中 不順道德者 一一無驗 此非受人之誠敬耶”.64) 최동희,『동학의 사상과 운동』,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0), 95 참조.65) 오지영,「시일강단」,『천도교회월보』, (1920, 3);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274에서

    재인용.

  • 172 신학과 철학 제24호

    의 차례가 있음에 만물이 생성하고, 밤과 낮이 바뀜에 일월이 분명하고, 예와 지금이 길고 멀음에 이치와 기운이 변하지 않는 것, 천지의 지극한 정성이 쉬지 않는 도”66)라 특징지을 수 있다. 천도교의 성(誠)이 끊임없이 순일하게 쉬지 않는 것, 곧 진실이라고 한다면, 천도교에서 인간은 이 진실하고자 하는 자, 진리가 되고자 하는 쉬지 않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시형은 “순일한 것을 정성이라 이르고 쉬지 않는 것을 정성이라 이르나니, 이 순일하고 쉬지 않는 정성으로 천지와 더불어 법도를 같이 하고 운을 같이 하면 가히

    대성 대인”67)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천도교에서 인간은 성(誠)과 합치하고 그 성(誠)을 쉼 없이 길러내야 할 의무를 지닌 존재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나라 임금이 법을 지음에 모든 백성이 화락하고, 벼슬하는 사람이 법으로 다스림에 정부가 바르며 엄숙하고, 뭇 백성이 집을 다스림에 가도가 화순하고, 선비가 학업을 부지런히 함에 국운이 흥성하고, 농부가 힘써 일함에 의식이 풍족하고, 장사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노고함에 재물이 다하지 않고, 공업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일함에 기계가 고루 갖추는 것”68)이다. 따라서 ‘정성[誠]’을 들인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천(天)의 순일(純一)한 본체인 성(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이 참을 지키면 한울이 사랑하고 망령되면 한울이 미워한다. 진실이라는 천지의 생명체요, 거짓과 망령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을 깨쳐 없애는 쇠뭉치”69)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한 진리, 순일(純一)한 천(天)의 본래의 모습은 “인간이 신령한 존재를 대할 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의 태도”70)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성(誠)의 마음은 천도(天道)를 밝히고 천덕(天德)을 닦기 위한 수심(守心)체계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최제우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도성덕립이 되는 것은 정성에 있고 사람에 달렸느니라. 혹은

    66)『海月神師法說』「誠敬信」, “四時有序萬物盛焉 晝夜飜覆日月分明 古今長遠理氣不變 此天地至誠無息之道也”.67)『海月神師法說』「誠敬信」, “ 純一之謂誠 無息之謂誠 使此純一無息之誠 與天地 同度同運則 方可謂之大聖

    大人也”.68)『海月神師法說』「誠經信」, “國君制法 萬民和樂 大夫治法朝廷整肅 庶民治家家道和順 士人勤學國恩興焉

    農夫力穡衣食豊足 商者勤苦 財用不竭 工者勤業機械俱足”.69)『海月神師法說』「虛와 實」, “守眞則 天愛之 妄之則 天惡之故 眞實者天地之生命體也 欺妄者 人身之破

    滅椎也”.70) 최동희,「동경대전의 종교철학적인 이해」, 동학학회 편저,『동학과 동학경전의 재인식』, (서울: 신서

    원, 2001), 48.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73

    떠도는 말을 듣고 닦으며 혹은 떠도는 주문을 듣고 외우니, 어찌 그릇된 일이 아니며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안타까운 나의 심정은 날로 간절치 않은 날이 없고, 빛나는 거룩한 덕을 혹 그르칠까 두려워하노라. … 어진 그대들은 삼가 나의 말을 들을지어다.”71)

    4. 천도교 영성의 나눔, 동덕(同德)

    4.1.‘나눔의 영성’의 이상적 인간상 - 동덕(同德)

    최제우가 “우리 도는 다만 성·경·신 세 글자에 있느니라. 만일 큰 덕이 아니면 실로 실천하고 행하기 어려운 것이요, 과연 성·경·신에 능하면 성인되기가 손바닥 뒤집기 같다”72)라고 하였듯이, 실로 모든 천도교인은 한울님을 모시고[侍天主] 한울님 본래의 참된 마음이 자신 안에 잘 내재화되어 실천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한울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信], 한울과 인간 그리고 사물까지도 한울처럼 공경[敬]할 줄 알며, 자신에게 내재한 천심을 지킬[守心] 수 있도록 꾸준히 수양하면서 지속적으로 실천[誠]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을『東經大全』「布德文」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다섯 황제 이후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

    탄하지 않으리오.”73)

    그렇다면 천도를 밝히고 천도를 닦는 수양의 완성이자 모범된 존재를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범을 동덕(同德)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천도교에서는교인을 ‘동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선생!’, ‘최선생!’ 부르듯이, ‘김동덕!’, ‘최동덕’

    71)『東經大全』「修德文」, “道成德立 在誠在人 或聞流言而修之 或聞流呪而誦焉 豈不非哉 敢不憫然 憧憧我思 靡日不切 彬彬聖德 或恐有誤 … 賢我諸君 愼聽吾言”.

    72)『海月神師法說』「誠敬信」, “吾道只在 誠 敬 信 三字 若非大德 實難踐行 果能誠敬信 入聖如反掌”.73)『東經大全』「布德文」, “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券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

    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 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修其

    德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

  • 174 신학과 철학 제24호

    이라 호칭했다고 한다.74) 오늘날에도 천도교에서는 ‘동덕’이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천도교에서 ‘동덕’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양 완성의 모범으로써 천도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동덕은 자신에 내재화되어 있는 한울님을 믿고, 공경하고 정성을 들임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한울이 되어가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두 번째는 상대방에게 ‘동덕’이라 부름으로써 천도를 밝히는 것이며, 또한 그 덕을 함께 나누겠다는 실천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수덕(修德)을 하는 데 있어 재산, 권력, 지식의 유무(有無)가 중요하지 않다.『해월신사법설』「篤工」에서 “부귀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겠는가,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비록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느니라”75)고 한 바와 같이, 오직 함께 천도(天道)를 밝히고 천덕(天德)을 정성으로 닦기만 하면 된다. 즉 ‘동덕’은 한울을 자기 안에 내재화 해 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라는 점에서 미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함께 동덕을 지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

    다. 따라서 동덕은 개인적 범주에서 자신만 천도를 밝히고 천덕을 닦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천덕을 함께 나누고 실천하겠다는 의지, 사회적 범주로까지 확대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천도교를 널리 알리는 것을 ‘포덕’(布德)이라 명명하고, 천도교 음악을 ‘천덕송’(天德頌)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누구나 덕을 완성할 수 있는 길, 관계성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천도교는 당시 조선시대 신분제의 불평등, 반상의 불평등, 적서의 불평등, 남녀 간의 불평등을 도덕적 관계성의 회복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도덕적 관계성의 회복은 개인의 수덕을 바탕으로 ‘온 천하에 그 덕을 널리 알릴 때’[布德天下] 실현될 수 있다. 동덕은 바로 각자 수덕(修德)을 하면서도 덕(德)을 함께 나누고 실천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아가 생명과 무생명, 즉 모든 존재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까지도 확대하여 그들과 평등한 관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74) 최준식,『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2』, (서울: 사계절, 2000), 163.75)『海月神師法說』「篤工」, “富貴者修道乎 有權者修道乎 有文者修道乎 雖貧賤者有誠可以修道也”.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75

    4.2. 천도교 교육의 이상적 인간관 - 동덕인(同德人) 조선시대 후기 전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한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한 천도교의 노력은 교육운동으로 이어진다.76)

    천도교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이돈화(1884-1950)는 ‘사람성주의’ 개념을 통해 ‘천-인간[人乃天]’의 관계성을 ‘개인-사회’의 관계로 접맥을 시도하였다.77) 그는 인간이 사람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인간 개체는 잎과 같은 것으로 잎이 나무 전체의 생명력에 의하여 지지됨과 같이 개인의 생명적

    영은 사회적 생명의 발아요 사회적 생명은 대우주 대생명의 발아’라고 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나무에 비유하였다.78) 김형준(1908-1953)은 ‘한울我’ 인간관을 통해 ‘전체와 부분’,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고, 인간본위로 복귀를 주장하였다.79) 김기전(1894-1948)은 천도교 인간형성을 건축에 비유하여 구체적인 천도교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리는 일종의 건축업자! 사람의 일생은 한 개의 훌륭한 건축업이다. 남을 위하여 건축하고 그 대신 임금을 받는 건축업이 아니라 오직 자기로서 건축하고 자기로서 살

    기 위하여 한 개의 건축자”80)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의 도안에 따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자기의 행동을 규율할 때,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위해 모든 정성을 열정을 다할 때 참된 ‘인간건축’의 길이 된다고 설파하였다.81)

    76) 1900년대를 초기부터 천도교는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개벽],『신여성』,『어린이』,『조선농민』등의 잡지를 발간하였고, 정규교육기관인 학교와 준교육기관인 강습소를 운영하면서 문화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천도교인들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농민들을 위하여 소규모로 운영되는 교육기관으로 강습소는 가장 적합한 교육의 장이었다. 강습소는 운영시간에 따라 주간에 운영되던 주학과 야간에 운영되던 야학이 있었으며, 강습 내용에 따라 천도교 교리를 주로 하는 교리강습소와 조선어와 일반적인 상식을 가르치는 강습소로 나뉘어 운영되

    었다. 또한 강습 기간에 따라 장기 강습소와 단기 강습소, 강습 대상에 따라 농민 강습소, 노동 강습소, 부인 강습소로 구분되었다.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강습소는 점차 증가하여 1912년에 358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천도교는 각 지역에 정규학교, 초·중등교육기관 및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도 양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 및 보성초등학교, 동덕여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1910년 말에는 용산에 있는 양덕학교, 마포의 삼호보성소학교 및 청파에 있는 문창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이동초,『천도교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해』,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0), 115-122; 조규태,『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문화운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6), 167-197 참조.

    77) 허수,『이돈화 연구-종교와 사회의 경계』, (서울: 역사비평사, 2011), 119-150 참조.78) 이돈화,『水雲心法講義』, (서울: 천도교중앙총부, 1966), 96 참조.79)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338-352; 정혜정,「천도교 교육론 연구」, 한국종교교육학

    회,『종교교육학연구』, 12(2001), 331-343 참조.80) 김기전,「일상생활의 의식적 건축」,『別乾坤』, 7(1929), 144.

  • 176 신학과 철학 제24호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반 천도교 교육사상가들은 각자 고유한 교육이론 정립을 통해 한울과 인간의 합일은 죽음 이후 초월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세계에서 실현되는 것이라 보았다. 즉 한울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현실세계에서 자신과 타인, 나아가 자신과 자연만물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천도교 사상가들의 다양한 교육관, 교육목적은 결국 ‘동덕’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도교는 ‘상향적 천인합일’을 위해 수심정기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강조하고, 신(信), 성(誠), 경(敬)이라는 구체적 수양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덕을 세우도록[德立]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도교의 교육목적은 ‘동덕’이라 할 수 있으며, 천도교 영성 교육의 이상적 인간상은 ‘동덕인’이라 할 수 있다. 김기전의 표현대로라면, 동덕인은 “인간 각자가 세운 한울의 대아적 표준을 실천하고 더불어 타인도 자신의 무궁성을 실현하도록 타인의 인간건축을 도와가면서 하는 것이지 자신만

    의 인간건축이란 따로 없다는 것”82)을 자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존재라 할 수 있다.

    V. 결론

    시천주에서 양천주 그리고 인내천 사상으로 완성되는 천도교의 천인합일 사상은 하늘 중심의 천명사상을 넘어 땅 중심으로 한 천인합일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늘이 도덕이고 의리이고 논리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면, 땅은 생산이고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고, 수평적인 나눔이다. 천도교의 영성은 바로 땅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천도교의 영성은 수평적인 영성이고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며 땅 중심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명(命)이나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땅에 대한 자각, 수평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천도교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 한 이후, 교회제도를 재조정하고,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도교는 7개에 달하는 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는데, 천도교가 자금이 충분하여 경영난에 있는 학교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열의 때문이었다. 당시 천도교의 교

    81) 정혜정,『동학·천도교의 교육사상과 실천』, 352-358, 343-348 참조.82) Ibid., 356.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77

    령이었던 박인호는 1923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학교운영에 대해 “20년 천도교의 대표자인 관계로 교내 학교를 관리케 된 것을 비롯하여 경영곤란에 빠진 사립학

    교 10여개를 건져 낸 것 밖에는 별다른 사업이 없다. 앞으로 포부를 말한다면 학교가 사회의 공기(公器)인 만큼 개인의 독단적 관리를 떠나서 공공의 재단을 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실행하고 또 남에게 권하고 싶다”라고 교육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천도교는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면서 교육기관 운영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종립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천도교 내부에서도 제기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공교육으로서의 천도교 종립학교는 없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다만 종단에서 운영하는 ‘천도교종학대학원’, ‘동학시민강좌’, 청소년,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캠프’ 등이 있다. 천도교 사상가인 이돈화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교육하는 본능, 즉 신을 자각할 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천도교의 영성이 ‘땅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이었듯이, 천도교 영성교육 또한 한울을 모시고 사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현실세계에서 자신과 타인, 나아가 자신과 자연만물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 나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천도교가 한국의 민족종교이자 신종교로만 인식되어 오면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천도교의 종교적 역할과 그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 해야 할 것이다. 천도교가 종교로서의 정체성도 굳건히 하고, 이돈화의 표현을 빌리면, ‘직접 자기의 실천 자각에 의한 자기로서 자기를 교육’을 할 수 있는 영성교육을 토대로 천도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동덕인(同德人)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운영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또한 기대해 본다.

  • 178 신학과 철학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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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 신학과 철학 제24호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천도교 영성 교육의 회복을 위하여

    김남희

    본 논문은 천도교의 기성 종교 전통에 대한 사상적 수용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천도교가 창발적으로 해석했던 종교 개념을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천도교 고유의 창발적 개념으로 ‘상향적 천인합일’ 사상을 살펴보았다. ‘상향적 천인합일의 의지’, 즉 천도교의 영성은 ‘천(天)의 기화(氣化)’ 개념과 ‘수심정기(守心正氣)’를 통해 고찰하였다. 이어서 천도교 영성이 덕(德)으로 드러남을 살펴보고, 덕(德)은 지기(至氣)를 통한 상향적 합일의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 바, 성(誠), 경(敬), 신(信)의 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고유한 영성의 회복은 영성의 나눔인 동덕(同德)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고찰하였다. 이로써 본 논문에서는 천도교 사상가들의 다양한 교육관, 교육목적은 결국 ‘동덕’으로 귀결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천도교는 ‘상향적 천인합일’을 위해 ‘수심정기’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강조하고, 신(信), 성(誠), 경(敬)이라는 구체적 수양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덕을 세우도록[德立]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도교의 교육목적 또한 ‘동덕’이며, 천도교 영성 교육의 이상적 인간상은 곧 ‘동덕인’ 임을 본 논문에서 고찰하였다.

    주제어 : 천도교, 영성, 천인합일, 수심정기, 성경신, 덕, 동덕

    초 록

  • 천도교 영성의 드러남과 나눔, 덕(德)과 동덕(同德) 181

    Revealing and Sharing, Virtue and Dongduk(同德, Companion) of Cheondogyo Spirituality:

    for Restoring Education of Cheondogyo Spirituality

    Kim, Nam-Hui

    In this paper, it aims to consider religious emergent-concepts of Cheondogyo rather than to focus on ideological acceptance of religious tradition of pre-existing religions. For this purpose, first, the ‘upwarding Unity of Heaven and Man’ is examined as an unique emergent concept of Cheondogyo. Cheondogyo Spirituality so called ‘The will of the upwarding Unity of Heaven and Man’, is considered as concept of ‘Chi-Vaporization(氣化)’ of Heaven and ‘Sushimjeonggi(守心正氣)’. Then it looks in to revealing of Cheondogyo Spirituality followed by ‘Virtue(德)’. The ‘Virtue’ can be understood as ‘the will of the upwarding Unity of Heaven and Man’ so it is viewed in ‘Sincerity(誠)’, ‘Respect(敬)’, and ‘Belief(信)’ separately. Finally, it is investigated that the recovery of spirituality is followed by ‘Dongduk’, sharing of spirituality. Therefore, in this paper it is emphasized on ‘Dongduk’ that produces various educational views and purposes of Cheondogyo thinkers. It is because the ultimate purpose of Cheondogyo lies on establishing Self's ‘Virtue’ with concrete training ‘Belief’, ‘Sincerity’, and ‘Respect’ as well as Other's ‘Virtue’ for ‘the upwarding Unity of Heaven and Man’ from the bottom through ‘Sushimjeonggi’. Therefore, in the study it is considered that the educational purposes of Cheondogyo is ‘Dongduk’, and the ideal humanity of Cheondogyo spirituality education is also ‘Dongduk’ Human.

    Abstract

  • 182 신학과 철학 제24호

    Key Words: Cheondogyo, Spirituality, Sushimjeonggi(Guarding mind correcting vitality), Sincerity, Respect and Belief, Virtue, Dongduk(Companion)

    논문 접수일 2014년 4월 1일

    논문 수정일 2014년 5월 11일

    논문게재 확정일 2014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