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시대, 구다라 한류(韓流)에 길을...

9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기 공존의 시대, 구다라 한류(韓流)에 길을 묻다. 경기 여주 세종중학교 장위숙 I. 출발에 앞서 1. 여정 ‘교사를 해외로’ 라는 기치 아래 한일 고대사를 재조명해 보는 조선일보의 현지답사 프로그 램, ‘日本속의 韓民族史’. 이 프로그램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일본 고대국가 국가 형 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우리 한반도(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찾아, 610여 년 전부터 다시 한 번 한류를 전해 주던 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는 교사 현지답사 연수이 다. 일본 역사에 무지하다시피 한 나는 이 분야의 권위자인 교수님의 설명과 계속되는 세미나 가 있다는 말에 더욱 더 기대가 되었다. 역사 담당 교사로서 자신이 먼저 역사에 대한 재미를 느끼고, 올바른 歷史觀으로 과거 사실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이번 탐방은 더 큰 의미가 있다. 공존의 시대에 점점 심해지는 일본의 우경화 문제, 독 도문제, 교과서 왜곡문제 등을 이 번 탐방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통 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이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通信士), 막부장군이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한다. 그림1.백제인의 솜씨에 대 한 교수님의 끝없는 찬사 -구다라관음(百濟觀音) 후쿠오카의 하다카 항 여객 터미널 2. 사전 세미나 - 부산 롯데백화점 문화홀 단국대 정영호 석좌교수님의 백제인들이 발달된 문물과 함께 일본으 로 건너가 일본열도를 주름잡았다는 위트 넘치면서도 열정적인 강의는 일본 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과 함께 일본 탐방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하였다. 또한 강원대 손승철 교수님의 차분하지만 흡입력 있는 강의를 통해 조선통신사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을 통해 일본의 역사의 뿌리는 역시 우리 한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교수님의 현 재의 한류보다 어쩌면 훨씬 컸을 더 고대로부터의 한류에 대한 강의-조 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5시간이라는 강의를 들으며, 우리나라의 문물 전파로 인해 고대국가 기틀을 갖추고 강성해진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없이 침략하며 괴롭혔던 것을 들으며 분노하기도 했고, 문물을 전해 준 우리 조상의 현명한 지혜와 뛰어난 기술력이 자랑 스럽기도 했다. 이 번 탐방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은혜와 배반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가 일본을 대할 우리 자세 등을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구다라(クタラ)'란 큰 나라, 즉 백제를 의미한다. 고대 일본에서 백제의 열풍, 한류(韓流)의 원조 ‘구다라나이’ (無い) : (백제의 것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라는 찬사가 이미 지금부터 1360년 전부터 일본 땅에 퍼져 있었다. 출처 : 세계일보 홍윤기의 역사기행 3. 공존의 시대에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포인트 5 이 번 탐방은 사전 세미나에서 손승철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것처럼 5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 추려고 한다. 첫째는 고분(古墳)의 나라 일본, 둘째는 신사(神社)나라 일본, 셋째는 절(寺院)의 나라 일본, 마지막 넷째는 성(成)의 나라 일본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과 일본, 나아가 세계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구다라의 한류를 찾아가는 길 1.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 뉴 카멜리아를 타고 밤 바다에서 처음 대하는 서먹서먹함과 교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새 얼굴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뉴 카멜리아에 올랐다. 모두가 처음 만났지만, 만나고 헤지는 직업이 교사인지라 모두가 10년지기라도 된 듯 그렇게 떠들고 웃고 잠자는 사이 뉴카 멜리아는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후쿠오카에 닿았다.

Transcript of 공존의 시대, 구다라 한류(韓流)에 길을...

  •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기

    공존의 시대, 구다라 한류(韓流)에 길을 묻다.

    경기 여주 세종중학교 장위숙

    I. 출발에 앞서

    1. 여정

    ‘교사를 해외로’ 라는 기치 아래 한일 고대사를 재조명해 보는 조선일보의 현지답사 프로그

    램, ‘日本속의 韓民族史’. 이 프로그램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일본 고대국가 국가 형

    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우리 한반도(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찾아,

    610여 년 전부터 다시 한 번 한류를 전해 주던 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는 교사 현지답사 연수이

    다. 일본 역사에 무지하다시피 한 나는 이 분야의 권위자인 교수님의 설명과 계속되는 세미나

    가 있다는 말에 더욱 더 기대가 되었다. 역사 담당 교사로서 자신이 먼저 역사에 대한 재미를

    느끼고, 올바른 歷史觀으로 과거 사실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이번 탐방은 더 큰 의미가 있다. 공존의 시대에 점점 심해지는 일본의 우경화 문제, 독

    도문제, 교과서 왜곡문제 등을 이 번 탐방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통

    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이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通信士), 막부장군이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한다.

    그림1.백제인의 솜씨에 대

    한 교수님의 끝없는 찬사

    -구다라관음(百濟觀音)

    후쿠오카의 하다카 항 여객 터미널

    2. 사전 세미나 - 부산 롯데백화점 문화홀

    단국대 정영호 석좌교수님의 백제인들이 발달된 문물과 함께 일본으

    로 건너가 일본열도를 주름잡았다는 위트 넘치면서도 열정적인 강의는

    일본 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라는 것과 함께 일본 탐방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하였다.

    또한 강원대 손승철 교수님의 차분하지만 흡입력 있는 강의를 통해

    조선통신사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미친 어마어마한 영향을 통해 일본의

    역사의 뿌리는 역시 우리 한반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교수님의 현

    재의 한류보다 어쩌면 훨씬 컸을 더 고대로부터의 한류에 대한 강의-조

    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5시간이라는 강의를

    들으며, 우리나라의 문물 전파로 인해 고대국가 기틀을 갖추고 강성해진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없이 침략하며 괴롭혔던 것을 들으며 분노하기도

    했고, 문물을 전해 준 우리 조상의 현명한 지혜와 뛰어난 기술력이 자랑

    스럽기도 했다. 이 번 탐방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은혜와 배반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가 일본을 대할 우리 자세 등을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구다라(クタラ)'란 큰 나라, 즉 백제를 의미한다. 고대 일본에서 백제의 열풍, 한류(韓流)의 원조 ‘구다라나이’

    (無い) : (백제의 것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라는 찬사가 이미 지금부터 1360년 전부터 일본 땅에 퍼져 있었다.

    출처 : 세계일보 홍윤기의 역사기행

    3. 공존의 시대에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포인트 5

    이 번 탐방은 사전 세미나에서 손승철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것처럼 5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

    추려고 한다. 첫째는 고분(古墳)의 나라 일본, 둘째는 신사(神社)나라 일본, 셋째는 절(寺院)의

    나라 일본, 마지막 넷째는 성(成)의 나라 일본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과 일본, 나아가 세계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구다라의 한류를 찾아가는 길

    1.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 뉴 카멜리아를 타고 밤 바다에서

    처음 대하는 서먹서먹함과 교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새

    얼굴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뉴 카멜리아에 올랐다. 모두가

    처음 만났지만, 만나고 헤지는 직업이 교사인지라 모두가

    10년지기라도 된 듯 그렇게 떠들고 웃고 잠자는 사이 뉴카

    멜리아는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후쿠오카에 닿았다.

  • 아카시대교. 고베와 아와지섬을 연결하는

    연륙 현수교. 391m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1600여 년 전 우리조상님들은, 또 600여 년 전 조선의 통신사들은 며칠을 배에서 흔들렸을

    까? 그 때는 지금만큼 크고 빠른 배도 없었을 테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훨씬 더

    심한 흔들림에 시달렸겠지.

    2. 한큐 페리와 함께 일본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內海)를

    세토나이카이는 일본을 이루는 4개의 큰 섬 중 3

    개(큐슈, 혼슈, 시코쿠)를 둘러싸고 있는 내해(內海)

    로 조선 통신사가 뱃길로 이용하던 일본의 지중해이

    다. 내해이기 때문에 파도가 없어서 대한해협처럼 배

    가 흔들리거나 폭풍우를 만날 염려는 없다.

    우리 탐방단 역시 통신사의 길을 따라 한큐 페리

    를 타고 이 바다를 가로 지르는 명물, 구루시마 해협

    대교와 세토대교를 보면서 오사카를 향해 하룻밤을

    나아갔다.

    III. 고분(古墳)의 나라 일본

    1. 큐슈를 호령했던 정청(政廳), 일본 제일의 관문 - 다자이후(大宰府)

    다자이후(大宰府)는 일본이 외국과 교류하는 제일의 관문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한 복신을

    도왔다가 참패한 사이메이(齊明) 여제(女帝)의 뒤를 이은 텐지(天智)천황이 신라 공격에 대비하

    여 방어거점으로 건설한 정부청사이다. 지금은 그 흔적만 볼 수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멀리 백

    제까지 대군을 이끌고 기꺼이 도와주러 온 고대 일본인들의 백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부산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우리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규슈 여기저기에서 우리나라의 유물과

    같거나 유사한 것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자이후 모형도- 정전과 중문을 회랑으로

    연결시켰다. 한국 전통 건축 기법인 회랑이 있다.

    혹자는 제2의 사비성이라고도 한다.

    깜짝 놀랐다, 왜 한국의 귀면기와가 여기 와 있

    지? 백촌강 전투 참패 후 백제인들이 함께 건너

    와 함께 쌓은 다자이후(大宰府).

    -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큐슈

    큐슈의 하카타만은 일본 열도 중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부산에서 200km,오히려 큐

    슈에서 도쿄(東京)는 1000km로 부산보다 더 멀다. 1916년 후쿠오카 남쪽에서 옹관과 청동칼,

    청동창 등이 발굴되고 이마즈(今津) 패총에서는 같은 옹관과 마제 돌도끼가 함께 발굴됐다. 이

    어 큐슈에서는 적색 무문토기도 나오고 상식석관도 발굴됐다. 우리나라 김해에서 발굴되는 것

    들과 똑 같은 것인데, 김해 유물이 고식(古式)으로 큐슈보다 앞선 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보여

    준다. 큐슈의 민속에도 우리 것과 닮은 것이 많다고 한다. 큐슈의 휴가(日向)와 다카치호(高千

    穗)는 일본 신화의 발상지라는 곳인데, 요카구라(夜神樂)에 나오는 천조신(天照神)이라는 여신

    (女神)의 춤은 우리나라 무당춤과 흡사하다고 한다. 큐슈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태백산(太白

    山)ㆍ묘향산(妙香山)ㆍ고조산(高祖山)ㆍ구지봉(龜旨峰) 등 우리 이름과 똑 같은 것들도 많다.

    우리나라 충남 당진(唐津)과 똑같은 이름의 가라쓰(唐津)가 기타큐슈에도 있다. 출처 :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안내책자

    2. 백제와의 연결고리-후나야마(船山) 고분

    고분의 양식(전방후원분-앞은 각지고 뒤는

    둥근 형태)과 출토된 부장품들이 우리나라 백

    제 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후나야마 고분. 후

    나야마 고분군 내에서도 전방후원분은 가장

    높은 곳,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며, 부

    장품이나 규모도 남다르기 때문에 그 지방의

    최고 지배자로 추정한다.

    사진설명 :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무덤을 둘러싼

    해자이고 설명하시는 교수님 뒤로 보이는 언덕

    같은 곳이 후나야마 고분이다. 나무들 사이로 석

    실 귀퉁이가 보인다.

    전북 익산시 웅포면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좌)과 후나

    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우)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발굴된 5C 전반의 백제 금동과

    (좌)과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5C후반~6C 전반의

    금동관(우)

  • 3. 백제계의 실력자 소가노우마코의 무덤-이시부타이(石舞臺)

    이시부타이는 옛날부터 봉분의 흙이 벗겨지고 거대한 덮개돌이 노출되어 있어서, 그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시부타이(石舞대臺)라고 한다. 봉토(盛土) 상부가 벗겨졌기 때문에 그 무

    덤모습은 명확하지 않고, 39개의 거대 암석으로 된 석실고분이다.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정원이 있었다는 곳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소가우마코 무덤으로 추정하며, 묘가 파 헤쳐진

    것은 소가씨에 대한 징벌은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커다란 두 개의 덮개돌은 주인공의 생전 권력을 짐작케 하며, 한 쪽 어깨가 살짝 올라가 변화미를 준다. 무덤안의 석실은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있다. 사진 : 네이버 블로그

    IV. 신사(神社)의 나라 일본

    일본은 신사(神社)의 나라이고, 일본사람들의 신사참배는 일상생활이다. 신사에는 자신의 조상신이나

    마을신, 호국영웅신 등을 모시며, 일본 천황가의 일원을 신으로 모시는 곳은 특별히 신궁이라고 한다. -

    교수님의 강의 중에서-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의 고구려 약광왕을 모신 고려신사, 백제

    성왕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가 있다.-네이버 블로그-

    실제로 우리가 갔을 때, 아카마 신궁에서는 결혼식 직전의 신혼부부와 그 가족이 와서 참배를 하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특히 정초에는 이름난 신사마다 참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1. 우사신궁(宇佐神宮)-신라의 범종이 있는, 4만 여개 하치만(八幡) 신궁(神宮)의 총 본궁

    우사신궁은 대륙문화를 수입하여 산업을 일으킨 오진천황(應神, )을 모시는 신궁으로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4만 여 개의 하치만(오진천황의 신령) 신궁의 총 본궁이다. 신궁 입구에는

    일본 특유의 양식 ‘도리’와 ‘고구려 개’라는 ‘코마이누’가 있다. 도리는 H자 모양의 구조물로 신

    사나 신궁의 앞에 있어 우리나라의 솟대와 같은 개념으로 하늘(에 계시는 神)과 땅(에 있는 사

    람)을 이어준다고 한다. 특히 도리 양쪽에 있는 코마이누(고구려 개라는 뜻)는 신역(神域)을 보

    호하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우리나라의 해태와 아주 비슷해서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

    라의 삽살개〈삽(액운)살(쫓는) 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우사신궁에는 조성연대가 확

    실한(신라 효공왕 8년, 904년 9월 20일 송산촌 대사(大寺)의 종) 신라의 범종이 있다. 이 종은

    음통을 비롯한 우리나라 삼국시대 종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사람)을 이어주며, 풍년을 기

    원하는 새 중의 새 오리(鴨), 삼한의 솟대

    일본(우사)신궁 출입문 도리-지붕은 새를 형상화하

    였으며, 기둥은 신궁을 뜻하는 짙은 주황색이다.

    우사신궁에 있는 신라종 - 신라

    혜공왕 8(904) 년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으며, 한국 종의 특징

    인 음통이 뚜렷하다.

    삽살개 – 귀신이나

    액운(살)을 쫓는(삽) 개

    라는 뜻을 지닌

    한국 고유의 토종개

    도리의 양쪽 옆에 앉아 있는 코마이누 –고(구)려의 개라는 뜻. 고구

    려 도래인이 이 지역의 실력자이었을 것이다.

  • 2. 조선 통신사의 숙소 – 아까마(赤間) 신궁(아미타지), 청일강화기념관

    교통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시모노세키(아카마세키)는 한반도와도 중요한 교류지였다. 시

    모노세키에 있는 아카마(빨간) 신궁은 조선 통신사의 숙소로도 이용된 아미타지에 1185년부터

    8살의 비운의 어린 천황 안토쿠를 모신 신궁이다. 조선통신사 시절 한 외국인의 목격담에 의

    하면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데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손승철 교수님의 강의에서). 또한 시모

    노세키는 1905년 경부철도가 부설되고 부관연락선의 정기 운항으로 일제의 강제징용 대부분

    이 이 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 곳 시모세키에 있는 청일강화기념관은 일본이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한반

    도를 세력권에 넣기 위해 벌인 청일전쟁 직후 청과 강화조약을 맺은 곳으로 이래저래 슬픈 역

    사를 가진 곳이다.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발판으로 제국주의로 대륙진출을 하게 된다.

    조선 통신사 상륙 기념비-시모노세키 앞 바다.

    통신사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이

    곳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

    어서 접객담당자는 숙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청일강화기념관-실제로 가보면 정면의 으리으리

    한 건물은 예식장이고, 한 쪽 옆의 초라한 건물

    이 청일조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건물 위쪽에 작

    은 안내판이 달려있다.

    건물의 모든 기둥을 빨간색으로 칠한 아카마 신

    궁. 기둥옆에 코마이누도 있다. 조선통신사의 숙

    소로 사용한 아미타지이다. 1185년 아카마신궁으

    로 바뀜

    할머니 치마폭

    에 쌓여 바다

    용궁으로 가는

    8살 비운의 안

    토쿠천황을 기

    리는 자그마한

    조각상도 바닷

    가에 있다.

    조 선 통 신 사

    상륙기념비 옆

    에 있지만 눈

    여겨 보지 않

    으면 지나치게

    된다.

    V. 사원(寺院)의 나라 일본

    1. 일본 최대의 석불군(石佛群)-우스키 석불군

    우스키 시에는 12~13세기에 조성한 60여 개의 석불(일본 전체의 80%)이 있다. 이는 바위

    를 쪼아서 양각한 것으로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과 유사한 모양이 많았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

    은 우리나라의 마애불에는 없는 무사들이 양각으로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무사

    의 나라라는 것을 석불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상과 같은 것도 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복원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전문가들의 섬세한 손

    길과 일본인의 문화재 복원․보존을 위한 노력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었다.

    산 전체가 석불로 조각되어 있다. 채색을 한 것도 있고, 자연석인

    것도 있다. 문화재 담당자가 면봉으로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2. 신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고류지(廣隆寺)

    오사카에는 일본 고대국가(문화)를 형성하였던 나라․헤이안시대의 전통 깊은 수도의 도시가 있다. 30년을 살아도 교토(京都, 헤이안 시대의 수도)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전통 깊은 수도

    의 도시 쿄토(京都).

    일본 불교를 확립한 쇼토쿠태자의 7대 가람 중 하나인 고류지(스이코 천황11, 603에 건립한

    교토 최고(最古)의 사찰)에는 일본의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롯한 이국적인 불상

    들이 유리관이 없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재료만 다를 뿐 삼국시대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모양이어서 정말 신기했다. 그뿐 아니라 몇 년 전 반가사유상

    의 손가락이 부러진 사건 때 그 재료로 쓰인 나무가 우리나라 동해안에서만 자라는 적송이라

    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드러내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내가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태자의 개인 고문이자 당대의 실력자였던 하타(秦)씨 가문의 하타노 가와

    카쓰(秦河勝)가 자진해 불상을 받았으며, 코류지의 전신인 호코지(蜂岡寺)를 창건해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하타씨는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일본에 양잠과 견직, 농업 등 선진 문물을 전해 준 사람이

  • 며, 당시 큐슈(九州)ㆍ시코쿠(四国)ㆍ주코쿠(中国)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에 퍼져 살고 있을 만큼 번성했다. 일본 최대의 호족이었을 것이다. 818년 화재 떼 희생됐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친 재앙에도 불

    구하고, 코류지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비롯해, 십이신장상(十二神將像)ㆍ아미타

    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ㆍ십일면천수관음상(十一面千手觀音像) 등 국보가 즐비하다. 출처:탐방안내책자

    직접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지 않은 관계로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매우 귀한 사

    진을 찾았다. 뒷모습조차 사람을 전율케 하는 우리나라 국보83호 금동미륵반

    가사유상 http://page1207.tistory.com/460

    재료가 신라 적송으로 밝

    혀진 후부터 국보1호를

    강조하지 않는 고류지 목

    조미륵반가사유상

    고류지에서는 건물안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밖에서도 건물을 향해서 사진을 허용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이 곳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덕분에 나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굉장히

    놀라운 글을 발견하게 된다. 아래 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 32기 참가자 삼각산고등학교 조동근(2013. 12. 28.)선생님의 탐방기이다.

    2)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씨의 글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

    술하다(1편 2009.10.14.)’ 이다. http://blog.daum.net/pine19/17951094

    3. 백제 왕흥사(王興寺)를 모델로 한 아스카테라(飛鳥寺)

    아스카테라(飛鳥寺)는 596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세워진 절로 백제계 소가노 우마코(蘇我

    馬子) 대신의 발원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1탑 3금당식의 이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 . 서쪽 .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배치하고 중문(中門)의 좌우에서 뻗어나간 복도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고구려의 청암리폐사(금강사 유적)의 양식과 매우 흡사하다. 또

    한, 축조에는 백제에서 선진 기술을 가지고 건너온 승려, 사공(寺工), 와박사(瓦博士)등이 활약

    하였으며 본존인 아스카대불(飛鳥大佛)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백제계 도래인인 구

    라쓰쿠리노 도리(止佛利師)가 제작하였다. 또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서 출토된 기와

    와 매우 흡사한 수막새도 비조사에서 출토되어 백제와의 친연성을 잘보여준다. 최초의 주지는

    백제의 고승 혜총과 고구려의 고승 혜자의 2인이었으며 불교전파의 거점으로서 크게 번영을

    누렸다. 현재에도 충청남도에 위치하고 있는 수덕사와 자매사원의 결연을 맺어 고대 백제와 일

    본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아스카 청동대불. 낙뢰와 화재로 얼굴의 일부, 왼쪽 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만 원래 것이다. 세련된 연꽃 문양과 당초문양

    백제식 막새기와 쇼토쿠태자 상

  • 4. 삼국 고대 문화의 종합판-호류지(法隆寺)

    호류지는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이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의 문화를 종합했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와 중국의 불교 건축과 예술이 일본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

    는 동아시아 문화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사라져버린 백제의 목조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서

    는 여기 이 호류지를 봐야 한다고 한다. 호류지는 쇼토쿠(聖德) 태자와 스이코(推吉) 천황이 요

    메이(用明)천황의 병이 낫기를 발원하여 607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670년 벼락을 맞아

    전소되고 711년 금당과 오층탑 등 주요건물을 지금과 같은 배치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호류지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너무나도 닮은 오층탑과 구세관음, 백제관음, 담징이 그렸다고

    잘못 알려진 금당벽화가 있다(화재로 인해 원본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까지 남은 부분은 다른

    곳에 보관되고 다시 그렸다고 한다). 정영호교수님의 말씀으로는 담징이 호류지에 갔던 것은

    사실이나 금당벽화를 담징이 그렸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

    이 떨린다. 볼수록 빨려

    드는 표정과 유려한 선의

    구다라관음.출처:네이버블로그

    법주사 팔상전(553, 좌)와 호류지 5층탑(607, 우)

    스이코 천황 옥충주자와 그 옆에 그려진 사신사호도

    아스카 땅에서 백제불교를 눈부시게 꽃피운 인물이

    셋 있다. 백제계 후손 소가노우마코 (蘇我馬子

    550~626)대신과 그의 조카딸 스이코 여왕, 그리고

    그의 외손자 쇼토쿠(聖德 574~622)태자이다. 이 세

    사람은 불교를 기본이념으로 일본 고대국가의 초석

    을 다진 사람들이다. 아스카테라(飛鳥寺)는 처음에는

    백제의 왕흥사를 모델로 법흥사(法興寺)라는 이름으

    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 주조한 석가여래좌상은

    백제인 조각가로 유명했던 사마지리(司馬止利)가 주

    조한 아스카대불이 남아있다.

    쇼토쿠태자 : 6세기 후반에 용명천황(用明天皇)의 아

    배흘림기둥과 금강역사상 : 기둥과 서까래

    사이의 소로는 고구려 특유의 건축기법이다.

    들로 태어나, 일본이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

    寺:593년 창건)에서 고구려승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용명천황이 죽자

    배불파와 숭불파간에 투쟁이 벌어졌는데, 숭불파인 소가씨를 지원하여 승리하였다.

    스이코 천황 : 일본의 33대 천황.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제(女帝)로 조카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를 섭

    정으로 등용하여 조정을 개혁하였다. 중국 수나라와 백제,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꽃피웠다.

    5.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토다이지(東大寺)

    일본 화엄종의 총본산인 단일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 있는 토다이지에는

    신흥 일본국의 상징인 청동대불(비로자나불-이 있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지 20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에 있었던 불상의 눈을 그려 혼을 집어넣는 개안 공양때 신라를 비롯한 발해,

    당, 인도로부터 축하사신들이 갔다고 한다. 거대한 불상의 크기를 짐작케 하기 위하여 법당 한

    쪽에 불상 코구멍과 같은 크기의 구멍을 파 놓은 해탈기둥이 있다. 이 코구멍을 온 몸으로 통

    과하면 극락 간단다. 토다이지 한 켠에는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백제계 씨족들에게 감

    사의 뜻으로 건설한 가라쿠니 신사있다. 그 규모와 유지 상태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 마음 아

    팠다.

    총 3차례의 개보수가 있었는데, 처음에

    는 투구모양의 지붕처마가 아니다.

    16m 청동대불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손과 해탈기둥 – 손에는 16명이

    올라갈 수 있고, 해탈기둥은 코구멍 크기로 어른도 통과할 수 있다.

  • 6. 시텐노지-한반도 고대양식을 간직한 사원

      시텐노지는 우리나라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쇼토쿠 태자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사찰이다. 경내는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나카몬, 고주노토, 곤도, 고도를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그것을 회랑으로 연결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 중

    하나로 시텐노지 형식이라 불린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기업인 사찰 건설업체 '곤고구미(금강조)'와 연관된 사찰이기도 하다. 이

    곳에 가면 옛 백제사찰이 어떻게 생겼을지 비교하며 상상해 볼 수 있다.

    시텐노지 금당과 5층탑

    VI. 성의 나라 일본

    1. 일본 권력 변화와 함께 한 니조성

    임진왜란 이후 다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시의 권력을 과시

    하듯 호화롭게 짓고 꾸민 니조 성은 16세기 쇼군 시대 권위의 상징이었다. 1603년, 세키가하

    라 전투–100년 이상 일본에서 계속되어 온 끊임없는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전투였다–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에야스가 황제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막부정부를 에도로 옮긴 이에야

    스는 교토에 있는 천황을 배알하러 올 때 머무를 장소로 니조성을 짓었다. 공식적으로는 성이

    라 불리지만 으리으리한 니조 성은 요새화된 궁전에 가까웠으며, 일본 서부에서 쇼군 정치의

    사령부 구실을 했다. 건축 양식과 화려한 장식을 통해 보란 듯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것은

    명확한 정치적 언명이었으며, 이는 교토 황실 귀족들이 지닌 세련된 취향과는 정반대였다.

    돌을 하나하나 깎아서 맞춘 해

    자 성벽. 기하학적 무늬처럼 보

    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조각보

    같기도 하다.

    니조성 출입문-성 전체가 이렇게

    휘황찬란하다. 곡선은 무사의 투구

    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지붕 옆의 박공에도 화려하고

    섬세한 갖가지 조각과 장식을

    하였다.

    2. 오사카성-토요토미의 권력의 상징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유린했던 토요토미 히데요

    시(豊臣秀吉). 주군(主君)인 오다가 1582년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암살당한 뒤 최고 권력자

    가 되자 극도의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절과 신사를 위시하여 가는 곳마다 화려한 건축물이

    세웠고, 건축물 내부도 멋진 그림과 조각으로 채웠다.

    일본 쇼군-니조성 안에서 사진촬영 금지여서 공

    항의 쇼윈도 것을 찍었는데 가장 위의 쇼균과 그

    부인의 머리가 잘리고 일부분만 나왔다.

    도요토미 앞에서 히데요리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오사카 성을 공격하

    고, 수세에 몰린 히데요리는 성 뒤편에서 자살한다.

  • VII. 공존의 시대 – 우리의 길을 찾아

    1. 꿋꿋하게 민족의 기상을 지키는 사람들-오사카 민단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1946년 건립하여 2006년 창

    립 60주년을 맞아 상부상조의 정신을 기본으로 단

    원에게 신뢰 받은 민단 지역사회에 필요한 민단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정부가 공인한

    일본 내 유일한 민족단체로서 재일동포를 위한 단체

    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오사카 한국

    민단본부이다.

    2. 한민족(韓民族)의 자부심으로 자라는 학생들-금강학원

    한국정부와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인가 받은 오사카 건국학교와 금강학교. 금강학교는 초중고

    등학생 292명이 재학하고 있다. 해방직후 귀국하지 못한 동포들이 2세 교육을 위해 1946 최

    초로 설립한 한국인 학교이다. 기본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고, 주2시간 한국어 시간이 있다.

    교사들은 한국과 관련이 있어야 하고, 한국말로 능통하다. 사회선생님 중 한 분은 한국에서 교

    직생활을 하시다가 2013년도에 금강학원으로 옮기셨다고 한다.

    초등학생 활동지-독도와 울릉도가 분명히 있다. 청소시간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주변을 쓸어 담는 모

    습이 이색적이다.

    3. 21세기의 바람직한 한일관계 - 배광웅 교수님의 특강

    정성껏 만든 PPT와 서투른 우리말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열강하신 배광웅 교수님의 강의

    를 통하여 가해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사실 숨기려고만 하는 일본, 피해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특히 최근 일본 우파집권자들에 의해 악화되는 양국관계의 실마리를 어디

    서 찾아야할지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김소운님의 글이 새삼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하나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백성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고도 너그러이 잊어버리는 것과 흐지부지 소가지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만치 다르다.” 그렇지만 내 귓가를 맴도는 또 한마디, 8호차 가이드님의 ‘깍이고 깍여서 이

    젠 정말 날만 서있는 우리 재일교포.’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며, 또 앞으로 힘들지 않다는

    보장은 있는가?

    VIII. 탐방기를 마치며

    일본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친절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보도를 통해 심심찮게

    나오는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독도문제, 교과서 왜곡문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둘이 아니다. 배광웅 교수님의 강의에서 말씀하셨듯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사실 숨기려

    고만 하는 일본, 피해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특히 최근 일본 우파집권자들

    에 의해 악화되는 양국관계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할지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하루 빨

  • 리 일본은 과거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고, 우리는 그러한 사죄

    를 진심으로 용서하여 인류발전을 위해 함께 나아가는 공존의 시대에 진정한 이웃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참고자료

    1. 일본속의 한민족사(여행소책자)

    2. 인솔 교수님들의 강의

    3. http://www.segye.com/content/html/2006/08/08/20060808000852.html

    4. 네이버 지식 백과

    5. 네이버, 다음 등 인터넷 블로그

    6. 가이드님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