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 tour.chosun.comtour.chosun.com/review/201702-ajy.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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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국가 일본 기 간 2017.12.10.~ 2017.12.15(5박 6일) 과제부여 기관 경기도교육청(교육부), 조선일보 공무 국외 출장 보고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이동중학교 11111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늠바위 1길 13 ☏ 031) 532-4511 / FAX 031) 533-4199 http://www.idong.m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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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문국가 일본

    기 간 2017.12.10.~ 2017.12.15(5박 6일)

    과제부여 기관 경기도교육청(교육부), 조선일보

    공무 국외 출장 보고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이동중학교

    11111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늠바위 1길 13

    ☏ 031) 532-4511 / FAX 031) 533-4199

    http://www.idong.m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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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외 출장 운영의 개요

    1. 출장 개요

    출장목적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출장기간 2017․ 12 ․ 10 ~ 2017 ․ 12 ․ 11 (5박 6일간)방 문 국 일본

    방문기관인천(항공)-후쿠오카-다자이후-다마나-아리타-가라쓰-시모노세키-세토내해-오사

    카-나라-아스카-교토-오사카-인천(항공)

    여 행 자

    소 속 직 급 성 명 성 별 연 령여 행 경 비(천원)금액 부담기관

    이동중학교 교사 안주연 여 28

    개인비용

    300,000원

    이외의 일체

    비용은

    조선일보에서

    부담

    조선일보

    2. 출장일정

    월 일

    (요일)출발지 도착지 방문기관

    업무수행내용

    (수집할 자료목록, 질의할

    내용 등)

    접촉예정인물

    (직책포함)

    12월

    10일(일)서울 인천

    인천국제공항공사청

    사 서관 1층 대강당

    학술강연 및

    오리엔테이션손승철(강원대

    교수),

    서정석(공주대

    교수),

    엄기표(단국대

    교수) 등.

    12월

    11일(월)-

    12월

    15일(금)

    인천공항 일본

    인천(항공)-후쿠오카

    -다자이후-다마나-

    아리타-가라쓰-시모

    노세키-세토내해-오

    사카-나라-아스카-

    교토-오사카-인천(항

    공)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및 답사

    3. 출장 효과 : 한반도의 찬란한 문물이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를 따라 현지를

    답사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에 뿌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학교 현장에

    돌아와 이를 학생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 제고에 기여.

  • Contents

    Ⅰ. 출장의 개요 ··································································· 3 1. 필요성 ···································································································· 3

    2. 목적 ·········································································································· 3

    3. 문제 의식 ································································································ 4

    Ⅱ. 역사적 배경 ··································································· 4 1.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 다자이후 ·········································· 4

    2. 일본 도자기의 원류 이삼평 도예지 ···················································· 5

    3. 조선 침략의 전진 기지 나고야 성터 ·················································· 6

    4. 한반도의 농경문화가 전래된 요시노가리 유적 ································ 7

    5. 백제와의 연결고리 후나야마 고분 ······················································ 9

    6.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카마 신궁 ················································ 10

    7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현장 청일강화 기념관 ································· 10

    8. 일본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 ······························································ 11

    9.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도다이지 ·················································· 11

    10. 삼국시대 문화의 종합판 호류지 ······················································ 12

    11. 가장 확실한 고구려 문화의 흔적 다카마쓰 고분 ························ 13

    12. 백제 왕흥사를 모델로 한 아스카 테라 ·········································· 14

    13. 신라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류지 ······················································ 15

    14. 일본 권력의 변혁과 함께한 니조성 ················································ 16

    15.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의 성 오사카성 ································ 17

    16. 재일 한인 학교 백두학원 건국학교 ·················································· 19

    Ⅲ. 나의 탐방기 ································································· 19

    Ⅳ. 제언 ··············································································· 21

  • 사 진 목 차

    다자이후 탐방 ························································································ 5

    이삼평 도예지 탐방 ·············································································· 6

    나고야 성터 탐방 ·················································································· 7

    요시노가리 유적 탐방 ·········································································· 8

    휴나야마 고분 탐방 ·············································································· 9

    아카마 신궁 탐방 ··············································································· 10

    청일강화 기념관 탐방 ······································································· 11

    세토나이카이 탐방 ············································································· 12

    도다이지 탐방 ····················································································· 12

    호류지 탐방 ························································································· 13

    다카마쓰 고분 탐방 ··········································································· 13

    아스카 테라 탐방 ··············································································· 14

    고유지 탐방 ························································································· 15

    니조성 탐방 ························································································· 16

    오사카성 탐방 ····················································································· 18

    백두학원 건국학교 탐방 ··································································· 19

  • - 3 -

    Ⅰ. 출장의 개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일본은 유구한 한민족사 역사 속에서 한순간의 누락 없이

    함께해온 국가이다. 그리고 이토록 가깝고도 밀접한 관계 속에서 양측의 국가적 관계

    는 그 긴 역사 만큼이나 깊고 진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기저

    에는 크게 역사왜곡문제,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등 역사적 문제가 얽혀있는 만큼, 한

    일 양측 국민에게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적 인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리고 이처럼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 독도

    문제에서 보듯 일본인들은 한일간의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관민이 하나가 되어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감정이 앞설

    뿐 치밀한 자료 준비나 연구에는 소홀한 측면이 있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아픈 역

    사이기에 더욱 철저히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픈 역사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하는

    본능일까? 한국에서는 일본사를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사에 치중하는 면이 있

    다.

    물론, 교사의 역사적 배경지식 고양 필요성을 인지한 지금, 임용고사 응시 자격 요건

    으로 한국사 자격증이 필수로 요구되고 있지만, 그 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탐방한 교사의 확고함은 그 양과 질 차이가 클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이번 일본 문화

    탐방을 통해, 교사로서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 유산을 확인하고, 한일고대사에

    진하게 남아있는 문화교류의 실체와 함께 한국인의 진취적인 개척정신을 재발견하는

    측면에 이번 탐방의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찬란한 문물이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를 따라 현지를 답사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에 뿌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학교 현장에 돌아와 이를 학생들

    에게 전파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 제고에 기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목적을 설정

    했다.

    첫째, 한반도의 문화전파를 확인하고 고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확립한다.

    둘째, 근현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취할 자세를 생각

    1 필요성

    2 목적

  • - 4 -

    해본다.

    셋째, 앞으로의 한일양국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본다.

    이번 출장을 통해 재발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문화사 및 역사를 객관적으로 조망했을 때, 역사 왜곡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이가?

    둘째, 근현대사를 조망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셋째, 한일 양국 간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가?

    Ⅱ. 역사적 배경

    1. 신라 고엮에 대비한 방어 거점 다자이후

    탐방단이 방문한 첫 방문지는 다자이후였다. 흔적과 터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는

    공간은 교수님의 강의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했다. 나

    당 연합군의 공세에 백제 유민들이 불안에 떨며 바다를 바라봤을 것을 상상하자

    감정이입이 되면서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배가 되었다.

    다자이후는 백제를 생각나게 하는 유적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왜의 사이메이 천황은 백제를 구원하려고 한다. 백제부흥 운동을 이끌

    던 복신의 요청을 받은 여제는 661년 1월 오사카 항을 출발, 중간에 여러 곳을

    들러 군사를 모으며 츠쿠시에 도착한다.

    백제로부터 구원요청이 있은지 두 달도 안 돼 참전을 전격 결정하고, 예순이 넘

    은 나이에 몸소 규슈까지 출정했던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백제와 왜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이메이 천황

    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현지에서 급사하고 만다. 이에 황태자 나카

    노오오에가 어머니의 시신을 해로를 통해 아스카로 옮기고 상을 치른 뒤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하카다 연안에 전진기지를 구축한 텐지 천황은 그 해 9월 우

    선 5천의 군사를 백제에 파견, 현지의 백제 부흥 세력과 연합 전선을 편다. 이후

    3 문제 의식

    1 답사지역 관련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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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과 나당 연합군 간에 공방이 계속된다. 그러나 백촌강에서 왜는 참패하고 만

    다.

    현대에 이르러 융성했던 다자이후는 현재 그 주춧돌만이 남아있지만, 그 크기로

    융성함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자이후는 한때 나라와 교토처럼 북쪽 중앙

    의 정청을 중심으로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융성했었다. 다자이후가 언제 만

    들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다자이후의 건축과 수성의 축성은

    백촌강 전투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자이후 터에는 정청인 거대

    한 집무소 자리가 남아있다. 지금도 그 규모를 알 수 있게 하는 초석들이 산재해

    있다.

    다자이후 (강의) 다자이후 터 (초석)

    다자이후 탐방

    2. 일본 도자기의 원류 이삼평 도예지

    이삼평이 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 나베시마의 영지 일대를 전전하다가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태토(胎土- 도자기를 만드는데 바탕이 되는 흙)가 되는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하고,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기를 생산했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유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이 요(窯-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를 연지 300주년이 되던 1917년에 이삼평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을 시작으로 아리타 지역에는 자기

    가마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에 나베시마번 측은 어지러워진 생산 체계를 정리

    하고 자기의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자기장들을 중심으로 13개의 가마로 재편했

    다. 또한 가마들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하고 효율적인 분업 체계를 만들었다.

    이삼평의 첫 자기 생산 이후 나베시마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

    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ㆍ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

    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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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도조 이산평 비 14대 도조 이산평님과 함께 도조 이산평 작품

    이산평 도예지 탐방

    3. 조선 침략의 전진 기지 나고야 성터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로 출병을 하기 위해 가라

    쓰 히젠(肥前)을 출병지로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쌓은 성이다. 성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와 터만 남아있다.

    성채의 내성에 속하는 혼마루[本丸]는 일본성(日本城)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역인데 천수각이 북쪽 바다를 바라보는 모퉁이에 위치했다. 니노마루(二の丸)는 혼마루 서쪽 옆에 있는 중요한 구역으로 무기고와 군량미 등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산노마루(三の丸)는 성채를 경비하는 구역으로 혼마루와 니노마루로 출입을 관리하고 성을 수비하는 구

    역이었다. 단조마루는 성채 남서쪽에 있는 외성에 속하는 구역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

    의 인척인 아사노 단조 나가마사가 거주했던 공간이며 그의 이름을 따서 단조마루라고

    부른다. 야마자토마루에는 고타쿠지라는 사찰이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용하는

    어전과 다실이 있었다. 유케키마루는 명나라의 사절인 심유경이 이곳을 방문하여 머물

    렀던 곳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곳이다. 다이도코마루, 가미야마자토마루, 시

    모야마자토마루 등 성내 여러곳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성채의 면적은 약 17만

    제곱미터였는데 일본 에도시대 최고의 성이라고 불렸던 오사카성과 함께 당시 최대 규

    모의 성채로 지어졌다. 당시 조선으로 출병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다이묘들이 이곳 나

    고야 성 주변으로 모여들었으며 반경 3킬로미터 이내 약 130개 소의 다이묘 진영이

    발견되었다.

    가라쓰 히젠의 앞바다는 가베시마(加部島)가 앞에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내항이 보이지 않도록 숨을 수 있었고 조선 침략을 위해 집결한 선박이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천혜의 항구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가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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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운 항구였기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고니

    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발대가 부산포를 공격하여 임진왜란이 일으키며 승승장구 했던 왜군이 남해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을 만나 고전하면서 울산과 거제 등지에서 왜성을 쌓아 버텼지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군하였다. 이후

    히젠 나고야 성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여러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철군하였

    고 히젠 나고야 성은 황폐화되었다. 이곳에서 뜯어낸 부재는 가라쓰 성(城)을 축성하는데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성터로 들어오는 입구 남쪽에 나고야성박물관이 있으며 당

    시 유물과 유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나고야 성터 나고야 성터의 지리 모형(박물관) 조선 통신사 방문지였던 나고야 성터(박물관)

    나고야 성터 탐방

    4. 한반도 농경문화가 전래된 요시노가리 유적

    요시노가리는 70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 야요이 시대 환호집락(環壕集落:주변에 호를 파서 외부의 공격으로 부터 방어하는 형태의 집단 주거지)으로 세후리 산지에서 츠쿠

    시 평야의 혓바닥 모양으로 뻗은 대지에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야요이 시대의 전성기

    라고 할 수 있는 후반기인 약 기원전1세기~ 3세기 경의 모습을 복원하여 역사공원으

    로 개방하였다.

    일본은 야요이 시대에 들어서 널리 벼농사가 행해지자 물의 이용과 그밖의 권익을 둘

    러싸고 싸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외부 적으로부터 취락을 지키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참호를 만들고 통나무를 뾰족하게 깍아만든 목책을 둘러친 모습인데 이것은 일본 성

    (城)의 기원으로 여겨지며 성채 내에 넓은 환호집락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곽과 외곽으로 구분되는데 내곽은 북내곽과 남내곽으로 구분되어 서로 연결된다. 남내곽은

    왕과 귀족들의 주거지였으며, 북내곽은 제사를 지내고 정사를 돌보는 가장 핵심적인

    장소였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들의 규모가 다른 집터에 비해 크고 웅장하다. 그리

    고 요시노가리 유적지 외곽은 후기의 환호에서 돌출부가 만들어지고 파수 성루를 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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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키는 '홋타테바시라'라는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이는 《기시와진덴(魏志倭人傳)》에 씌어진 야마타이코쿠(邪馬台國)를 방불케 하여 주목받았다. 현재는 파수 성루와 제사를 지내는 제전, 거주용 건물 등이 복원되어 있다. 주거지 북

    쪽에는 길이 약 300m의 옹관묘가 있는데 이곳에는 500여 기의 옹관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북분구묘에는 당시 왕족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14기의 옹

    관묘에서 청동검과 유리관옥이 발견되었다. 유적지 남쪽에는 게코라고 불리는 일반인

    들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당시의 집과 창고들이 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생

    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야요이 생활관이 만들어져 있으며, 그외 고대식물관, 놀이

    동산과 들판 등이 만들어져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역할한다.

    아스카 문화시대 유골 아스카 문화 삶 석기(반달돌칼) 농경문화의 흔적

    당대 의복 재현 움집 마을 공동체 부족회의 모형 복원

    제사 모형 복원 발굴 당시 유골과 부장품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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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노가리 유적 탐방

    5. 백제와의 연결고리 후나야마 고분

    일본에서는 그 화려한 출토유물로 유명해 1965년에 일괄 출토품이 국보로 지정된 대

    단히 중요한 고분이다.

    분구(墳丘)는 변형이 심하지만, 방패형의 주호(周濠)에 둘려진 즙석, 원통형 하니와(埴輪)열을 갖춘 전방후원분으로서 3단으로 축성되었고 길이 63m, 후원부(後圓部) 직경 41m, 높이 10m이고, 전방부(前方部)는 남서향이며 폭 40.1m, 높이 7.5m로 양쪽에 돌출부가 있다. 내부주체부는 앞트기식집모양돌널(橫口式家形石棺)로 후원부 중앙의 제2단 성토상에 설치되었다. 널 뚜껑은 평탄면을 가진 기동형으로 주변 돌대는 없으며 내

    부에는 붉은 칠(丹)이 발려있었다.1983년에 출토된 중요 유물로는 중국경(中國鏡) 5점, 방제경(倣製鏡) 1점, 금동투조관모(金銅透彫冠帽), 금동관 2점, 수식부금제귀고리(垂飾附金製耳飾), 금동허리띠장식(金銅帶金具), 금동신발(金銅飾履), 은상감큰칼(銀象嵌大刀), 판갑옷(橫신板短甲), 투구(衝角付胄), 발걸이(鐙子), 재갈(비) 등이 있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출토유물은 금동관, 관모, 신발 등인데 그 화려함 뿐 아니라 고분 피장자의 주인이 삼국시대 가야의 수장과 깊은 관련

    이 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한 은상감큰칼에는 75자의 명문이 있는데 埼玉縣 稻荷山 고분의 명문이 있는 큰칼(大刀)과 함께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고분 앞에서의 강의 고분 백제문화를 반영한 고분내 부장품1

    백제문화를 반영한 고분내 부장품2 백제문화를 반영한 고분내 부장품3 후나야마 고분

    후나야마 고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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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카마 신궁

    여덟 살 나이로 죽은 안토쿠[安德王:재위 1180∼1185] 왕을 모신다. 안토쿠 왕은 헤이안시대의 무장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외손자로, 무사집단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檀ノ浦]에서 헤이시 일파가 패하자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단노우라에 가까운 간몬해협[關門海崍]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조선통신사의 객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며, 건너편에 있는 공원에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남아 있다. 신

    사의 상징인 빨간 문은 1958년에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안토쿠 왕릉, 헤이시 일파를 모

    시는 시치모리즈카[七盛塚] 등이 있다. 매년 5월 안토쿠 왕을 기리는 센테이사이[先帝祭]가 열린다. 이 신궁은 한때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 통신사의 시가 남

    아 있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우호적 관계가 아픈 역사의 기간보다도 길었음을 반증

    하는 여러 사료 중에 하나였다.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 아카마 신궁 주지스님과 조선통신사가 남긴 시조와 함께

    아카마 신궁 탐방

    7.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현장 청일강화기념관

    1895년 4월 17일에 하관에서 조인, 5월 10일 발효되었다. 정식명칭은 ‘청ㆍ일양국강화

    조약’이다. 1894년 8월에 시작된 청ㆍ일전쟁의 강화조약. 본문 14개조로 이루어져 있

    다. 청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체결하였다. 내용은1.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2. 청국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및 평후섬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4. 청국의 사스(沙市)ㆍ충칭(重慶)ㆍ쑤저우(蘇州)ㆍ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선박의 양쯔강(揚子江) 및 그 부속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ㆍ영업ㆍ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등이 규정되었다. 이 중 랴오둥반도의 할양에 대해서는 러시아, 프랑

    스, 독일의 3국이 그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여(이른바 3국 간섭), 일본은 3000만 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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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으로부터 수령하고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역사를 글로 배울 때는 어렴

    풋한 안타까움이었는데, 그 현장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청일 강화 당시 회담장 복원 청일 강화 회담 청일강화기념관

    청일강화기념관 탐방

    8. 일본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

    세토나이카이는 예로부터 규슈와 교토[京都] 지방을 잇고, 나아가서는 기타큐슈[北九州]를 거쳐 들어오는 대륙문물이 교토 지방에 도달하는 항로로 중요시되어, 각처에 많은

    항구취락이 발달하였다. 우리 탐방단은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경로를 따라 직접 유람선

    에서 하루를 묵으며 이 부근을 지날 수 있었다.

    아카시 대교 세토 대교 대교와 함께

    세토나이카이 탐방

    9.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도다이지(대불전)

    토다이지는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고 건축물이다. 그 안에는 역시 세계에

    서 가장 큰 청동 대불(盧舍那佛)이 자리 잡고 있다. 무게만 425t, 높이가 16m나 되는 거대 불상 앞에 서면 그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8세기 들어 일본 열도는 율령체제가 성립되고 천황제가 확립됐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부에서 유력한 호족들 간의 투쟁이 격화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도호쿠(東北)지방은 아직 개척이 진행 중이었으며 그 외에도 각 세력이 지방에 흩어져서 독자적인 권

    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더구나 백제ㆍ고

    구려 유민들의 집단 이주로 중앙지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작이 거듭되고 질병이 창궐했다. 위기에 처한 신흥국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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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국가적으로 민심을 수습해야 했고, 왕실의 존엄성도 높여야 했다. 특히 적대관계인

    신라에는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쇼무(聖武) 천황이 741년 칙령을 내려 토다이지 조성을 지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쇼무는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와 이데올로기의 통일을 위해 전국에 사찰을 지었고, 토다

    이지는 천황가의 우지테라(氏寺)로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국분사(国分寺)의 총본산이었다. 토다이지와 대불의 완성은 신흥 일본국의 탄생을 대내외에 알리는 의미 깊은 사업

    이었다.

    대불전 문 (강의) 대불전 (정면) 청동대불 중건 이전의 대불전(모형)

    도다이지(대불전) 탐방

    10. 삼국시대 문화의 종합판 호류지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고찰로 요메이천황(用明天皇)의 아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601∼607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이다. 금당(金堂).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院)과,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東院)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인 호류지 5층탑은 백제의 정

    림사지 5층석탑과 매우 유사하다. 호류지에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과 함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있는데 ‘성예초’라는 일본 고대 문헌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모습을 그리워하여 만든 것이 구세 관음상이다. 이 관음상은 성왕의 모습을 모

    방했기에 흐트러진 머리와 그 위에 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호류

    지는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교류를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유명하다. 본 호류사[法隆寺]에 그린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혔는데, 1949년에 불타 소실되고 현재는 모사된 벽화가 있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사 5층탑 벽화의 덧사진 밑에서 그가 그

    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

    인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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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류지 5층 목탑 백제의 목조 건물 양식 처마

    호류지 탐방

    11. 가장 확실한 고구려 문화의 흔적 다카마쓰 고분

    벽화는 석실의 동벽·서벽·북벽·천정의 4면에 있으며, 다듬어진 돌 위에 두께 수 mm의

    회반죽을 바른 위에 그려져 있다. 벽화의 소재는 인물상, 해와 달, 사신과 별자리이다.

    동벽에는 앞에서부터 남자 군상, 청룡과 그 위로 해, 여자 군상이 그려졌고, 서벽에는

    이와 대비되어 앞에서부터 남자 군상, 백호, 그 위에 달, 여자 군상이 그려졌다. 남자·여

    자의 군상은 모두 4인으로 구성되어, 모두 16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서벽

    의 여자 군상이 발견 당시에는 색체가 선명하여 역사 교과서 앞쪽에 '아스카 미인(飛鳥美人)'이라는 명칭으로 컬러 사진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인물 군상이 지닌 것들은 죠우간 의식(貞観儀式)에서 보이는 신년 하례의 의식에 참석하는 시중 드는 사람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신년 하례의 의식에는 해와 달, 사신의 기(幡)도 세워진다.안쪽의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졌고, 천정에는 별자리가 그려졌다. 남벽에는 주작이 그려

    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가마쿠라 시대의 도굴시 소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장의

    사진은, 원형의 금박으로 별이 표시되고, 별과 별의 사이에는 붉은 선으로 이어진 별자

    리가 표시되었다. 중앙에는 북극오성과 사보성, 그 주위로 이십팔수가 표시되어 있다.

    다카마쓰 고분 여인 군상 벽화 남자 군상

    별자리 벽화 원본 예상도 발견 당시 고분 내부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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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마쓰 고분 탐방

    12. 백제 왕흥사를 모델로 한 아스카테라

    아스카(飛鳥)시대 최초의 불사인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소가우지(蘇我氏)에 의해서 야마토(大和)평야 남쪽 아스카(飛鳥)지방에 건설된 것이다. 아스카데라(飛鳥寺) 유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은 백제의 고도(古都)인 부여(扶餘)에서 출토된 와당과 매우 흡사하며, 그 당시 백제에서 도래(渡來)한 와공(瓦工)이 만든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아스카데라(飛鳥寺)의 본존불(本尊佛)의 조소(彫塑) 특징과 당초의 것으로 생각되는 출토와당(出土瓦當)의 문양 및 노반명(露盤銘: 原形)의 문체(文體) 등에서는 서로 공통된 간소하고 고졸(古拙)한 힘있는 멋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스카(飛鳥)시대 초기 문화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3) 탑의 심주(心柱)를 세웠을 때는 다이진(大臣)들이 백제의 의상을 입고 의식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이 『후소랴쿠키(扶桑略記)』에 나타나 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백제문화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이상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아스카데라(飛鳥寺)의 가람배치는 1956~1957년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곤도(金堂)의 기단(基壇)은 2중기단으로 되어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시대의 사지(寺址)와 같은 양식을 가졌다. 아스카데라(飛鳥寺)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야마시로(山城)에 고라이지(高麗寺)가 건설되었으며, 그 곳에서 출토된 와당(瓦當)들은 아스카데라(飛鳥寺)의 것과 같은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아스카 테라 정문 아스카 테라 아스카테라 금동불

    아스카테라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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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신라의 순결이 살아있는 고류지

    신라에서 건너온 하다노 카와카쓰[秦河勝]가 창건하였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쇼토쿠[聖德] 태자가 '나는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이 불상을 모실 자가 없는가'라고 묻자 하다노 카와카쓰가 자진하였으며, 고류사의 전신인 호코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똑같이 생긴 일본 국보 제1호인 미륵보살

    상이 있는데, 이 불상을 만든 재료가 국내에서 나는 적송임이 밝혀지면서 한반도의 장

    인이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이곳에는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우는상투미륵상'으

    로 불리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이는 616년에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

    며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국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불상에 대해 “지구상의 모든 시간적 속

    박을 초월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사장 정결하고 원만하여 영원한 모습의 상

    징”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바친바 있다. 그는 “이 불살만큼 인간실존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확실히 구현한 예술품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미륵보상반가사유상은 그 형태나 솜씨가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쏙 빼닮았다.

    실제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반도로부터 도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코류지에 남아 있

    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은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가 불상의 재료가 적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라 제작설에 비중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일본에서 제조된 목조상들이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적송이 일본에는 없고 춘양을 비롯한 한반도에

    서 많이 자라는 나무라는 사실이 이 설을 뒷받침한다.

    고류지 문 앞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반가상 코류지 소장 목조미륵반가상

    고류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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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일본 권력의 변혁과 함께한 니조성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건립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도쿄에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세웠으나, 일본의 왕은 여전히 수도인 교토에 머물고 있었다. 1603년 3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예식을 행하고 1605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가 같은 예식을 이 니조성에서 시행한다. 또한 이후에는 교토 방문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거하던 성이다.

    동서로 500m, 남북으로 400m 규모의 성벽을 쌓고, 그 둘레에는 해자를 축조하였다.

    일본의 다른 성들과 달리 내부가 화려하다. 여러 건물 가운데 성의 중심인 니노마루

    가 가장 훌륭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성에는 '우구이수바리'라는 마루가 있는데, 마루 위

    를 걸으면 새 울음소리가 나서 외부에서 적이 침입할 경우 알아차리기 쉽다.

    1624년 확충공사를 시행하여 니조성의 구성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1750년 천수는 낙뢰

    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고 1788년 교토의 대화재로 인하여 핵심 구역의 전사와 모서리

    에 서 있던 창고 등이 소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핵심 구역의 전사는 1847년 건립되었던 공가전사를 옮겨 세운 것으로

    본래의 무가전사가 아니다. 이 성은 격식, 규모, 완성도, 예술성, 호화로움에 있어서 최

    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교토시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평성으로 윤곽은 돌출된

    형태를 띠고 있으나 돌출부의 폭은 넓고 깊이도 깊은 사각형에 가깝다. 핵심 구역과

    제2 구역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사방 주변 모두가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성곽이면서 거

    주를 목적으로 한 거관이라는 구조를 갖는 드문 예로 정원도 잘 정비되어 있다.

    성곽의 기능으로서는 방비도 불완전하고 평면구조도 단순하다. 잔존유적으로 현존하는

    전사는 그 수가 매우 적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니조성에 있다. 니조성에는 근세 성곽

    의 전사(殿舍)에 부속하는 정원이 존재한다. 이것은 다른 성곽에 있어서는 매우 드문 경우이며, 현재 제2 구역에 남아 있는 정원은 복원된 것이다. 창고시설로는 제2 구역에

    쌀 창고가 1동 남아 있으며,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시설도 남아 있다.

    니조성 내부 (정원) 막부시대 짚을 섞어 만든 담벼락 니조성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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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조성 탐방

    15.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의 성 오사카성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천하 쟁탈의 거점

    을 마련하기 위한 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이것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이다. 1585

    년에 5층 8단, 검은 옻칠을 한 판자와 금박 기와, 금 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

    형 천수각을 완성했다. 이것으로 히데요시는 천하 권력자의 권위를 마음껏 과시

    했다. 그러나 1615년 에도막부가 도요토미를 쓰러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 '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린다.

    그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 영역에 석벽을 다시 쌓아올려 성을 새롭게 구축한다. 이에 도요토미의

    천수각보다 더 큰 규모로 1626년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각이 완성되었다. 그

    러나 이 천수각도 1665년에 소실된다. 이후 세번 째 천수각은 1931년에 도요토

    미가 축성한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본떠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대 위에 세워

    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사카 성의 당당한 주탑은 16세기의 원래 건물을 20

    세기에 복원한 것이며, 이 또한 21세기에 들어 한 차례 보수된 것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사카 성은 여러 차례의 변모를 겪었으며, 이는 건축적인 면만

    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오사카 성에는 두 가지 버

    전이 있다. 도요토미 오사카 성과 도쿠가와 오사카 성이 그것이다.

    1583년, 봉건 군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옛 이시야마 호간사가 서 있던 부지에

    권력의 상징으로 오사카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

    즈치 성을 모델로 삼았지만, 보다 더 웅장한 규모에 금으로 덮여 번쩍였다. 이

    성은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원정을 나가는 데에 본거지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

    가 죽고 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일으켜 1603년 쇼군 정치를 열었다.

    도쿠가와가 이끄는 세력은 오사카에서 '오사카 포위 공격'이라 알려진 일련의 전

    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했고, 도요토미 가문과 그 성을 멸망시켜 버렸

    다. 1620년 제2대 도쿠가와 쇼군 히데타다 하에서 오사카 성의 재건축이 시작되

    었으며, 이는 먼젓번 건물의 화려함을 능가했다. 그러나 새로 쌓은 주 탑은 1665

    년 벼락을 맞았고, 1931년 복원 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은 탑이 없는 채였다.

    현재의 돌로 된 성벽은 쇼군 시대의 것으로, 쇼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가장 정

    교한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결국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던 내전 동안 성의 대부분은 전소해 버렸

    고, 도쿠가와 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후에 오사카 성의 동쪽 편에 무기 공장이

    지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은 집중 폭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의 피해는 콘크리트를 이용해 복구했으며, 오늘날 성 안에 있는 박물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와 성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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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성 (강의) 오사카성 (정면) 임진왜란 직전 내란 (모형/내부)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생

    (동영상/내부)

    도요토미 히데요시(초상화/내부)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본 오사카 시내

    오사카성 탐방

    16. 재일 한인학교 백두학원 건국학교

    오사카에 위치한 건국학교는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1세대 어르신들 및 학생들이 1946년

    에 뜻을 모아 '건국공업학교' 및 '건국고등여학교'로 세운 학교이다. 이듬해인 1947년에 '건국

    중학교'로 개칭했으며, 1948년에는 '건국고등학교', 1949년에는 '건국소학교', 그리고 1997년에

    는 '건국유치원'을 설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에 민족학교로 인정을 하고 지원을 해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한·일 양국의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고 있지만, 일본의 공립학교의 무상교육과 건국학교의 낙

    후된 시설 등에 따라 현재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건국학교에는 재일동포 자녀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학교에는 당당히 태극기가 걸려있고

    애국가와 이곳 저곳에서 한글을 볼 수 있을 만큼 일본 속에서 한국의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

    일본 학습 지도요령에 따라 한국어와 한국사 시간을 제외한 수업의 대부분이 일본어로 진행

    되고, 일본 정부의 검정 교과서로 수업을 하며 일본인 학생도 입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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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학원 건국학교(간판) 교실(교내) 풍물놀이 학생공연

    재일 한일 백두학원 건국학교 탐방

    Ⅲ. 나의 탐방기 일본은 가깝지만 먼 나라. 즉 우리나라에 있어,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한없이 먼 나라이다. 그 기저에는 고대사에 문화적 교류와 전수를 이른바 ‘베풀었음’에

    도 근현대사에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아픈 역사를 남긴 국가, 그러면서도 사

    과나 보상에는 한없이 소극적인 국가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한

    일 문제에 있어 끊임없이 대두되는 뜨거운 감자는 ‘역사왜곡, 독도문제, 위안부문제’로

    압축·요약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근현대사적인 문제가 고대사적인 자긍심과 맞물릴

    때 국민적 감정은 한없이 뾰족해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대사적인 자긍심은 묻어두고라도, 지구촌 시대가 된 지도 어언 1

    세기가 되어가는 요즈음,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과 한국은 서로 문화적 교류가 활발

    하고 오가는 여행객의 수가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르름에도 이러한 3가지 뿐인 예민한

    문제를 그저 ‘방치’할 뿐인 일본 국가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나 같은 전범

    국가로서 그 대응 방식이 크게 대비되는 독일의 국가적 태도를 고려했을 때 말이다.

    그래서 더욱이 이번 탐방을 통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는

    지 모른다.

    그래서 한반도의 찬란한 문물이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를 따라 현지를 답사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에 뿌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학교 현장에 돌아와 이를

    학생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 제고에 기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목적을

    설정했다.

    첫째, 한반도의 문화전파를 확인하고 고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확립한다.

    둘째, 근현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취할 자세를 생각해

    본다. 셋째, 앞으로의 한일양국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본다.

    이러한 목적 하에 여러 탐방지를 돌며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고 배웠다. 다자이후에

    서 현재로서는 꿈도 꾸기 힘들 정도로 백제와 왜의 유래없이 친밀한 국가적 관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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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연합군이 쳐들어올 바다를 바라보며 초조하게 애태웠을 백제와 왜 백성들의 마음

    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고, 이삼평 도예지에서는 끌려온 백제 유민에 대한 씁쓸함과

    그들에 대한 예우를 배워야겠다는 부러움을 느꼈다.

    한반도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잘 보존되고 있는 요시노가리 유적, 후나야마 고분, 호

    류지, 다카마쓰 고분, 아스카 텔, 고류지, 그리고 아카마 신궁에서는 아쉬움을 느꼈다.

    평소 역사책이나 수업에서 그저 여러번의 ‘전란으로 소실’이라는 몇 단어로 인지되었

    던 것들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실제로 보고,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는 조금 분노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소실된 대부분의 목조 유물, 파괴된 유적

    지라는 결과를 야기한 대부분의 원인 제공 국가인 일본에서는 정작 이토록이나 잘 보

    존되고 유지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부러움과 분노였을까.

    조선 침략 과정의 흔적과 그 당시 정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청일강화 기념관과 니

    조성에서는 오히려 씁쓸했던 것 같다. 난 인간이라면 한없이 많은 실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직업으로 교사를 선택한 이후 더욱더 확고하게 믿고

    있다. 세상에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실수를 할 수 있기에 발전하는

    것 인간의 학습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실수는 피하거나 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드시 해서 배우고, 발전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요즈음, 역사 속에서

    막부시대, 그리고 근현대사에까지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고 이에 대한 충분한 사과나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저 너무 슬펐다. 사과와 보상이 예전 정부에

    서 있었다 한들, 사과와 보상이란 가해자가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납

    득할 때까지라고 가르치는 교단의 일인으로서 이 역사과정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용서

    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사람은 용서하는 법을 배우며 자란다. 그것이 관용이라는 덕목이다. 때로 그 실수가

    치명적일 때조차, 진심으로 사과하고 안타까울 정도로 조심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볼

    때, 그 모습을 진정으로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대로 사과는 어영부영,

    핑계를 대며 책임을 회피하려하고 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

    나 될 것인가?

    일본은 매력적인 국가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한반도의 문화전파를 확인하고 고대사

    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를 보고 배웠다. 그러면서 그 문화와 풍습이 아름답고, 수용한

    문화를 토대로 더욱더 발전시키는 모습이 감탄스럽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근현대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취할

    자세, 그리고 앞으로의 한일양국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생각해봤을 때, 만약 역사왜

    곡문제,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만 명백하게 해결이 된다면, 그 예전 백제와 왜의 친밀

    한 관계가 우리의 또다른 반복의 역사, 추구해야할 미래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

    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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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 인식과 후손에게의 바른 교육이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교단의 일인으로서 이를 위해 책임감과 긍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Ⅳ. 제언 제 40회 일본속 한민족사 탐방은 일본 문화 탐방을 통해, 교사로서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 유산을 확인하고, 한일고대사에 진하게 남아있는 문화교류의 실체와 함께

    한국인의 진취적인 개척정신을 재발견하는 측면에서 매우 유효한 프로그램이다. 이러

    한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주신 조선일보 관계자, 신한은행 관계자, 경기도 교육청 및

    출장을 허가해주신 이동중학교 모두에게 너무 감사하다. 이러한 감사함을 바탕으로 보

    다 발전된 다음 기수 프로그램에 기여하기 위해 한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고대사에 대한 충북한 숙지 이후에는 군함도와 같은 근현대사 관련된 탐방지와 설명

    으로 진행되면 어떨까 싶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재에서 예전과 같이 우호적인

    관계로 일본과 대한민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여러가지 역사적 문제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세 분의 교수님의 풍부한 설명 덕분에 고대 일본사와 일본 속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고취되었다. 그래서일까, 이처럼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근

    현대사 관련된 설명과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갖추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교수님도 세

    분 중 한분정도는 근현대사 관련 교수님이 설명해주시면 평소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풍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들었다.

    물론 이 자체로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참여시켜주신 것 자체가 무한한 영광이라 첨언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교단의 일원으로서 배우고자 하는 욕심을 후기로나마

    살짝 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