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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창문여자중학교 김난경 들어가며 연구부장님의 추천으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11월 교육청에 지원 했었다. 쓴 고배의 잔을 마셨지만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생각했다. 2015년까지 고등학교에서 사회와 지리를 가르치다가 2016년 중학교에 오게 되어 역사를 지도하게 되었다. 주 전공이 아닌 터라 어려움을 많이 겪은 한 해였다. 워낙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라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깊이 있는 역사 연구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였다. 이에 이번 탐방은 나에게 있어 매우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추첨이고 50세 이하라 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방학이라면 학교에 폐도 안 끼치고 너무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도전한 결과 너무 행복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이를 생 각하면 마음 한 켠이 무거워 크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대학교 때 답사를 떠나기 전 이것저것 짐을 꾸리며 기대하던 설레임은 여전하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조선일보사, GS, 신한은행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일본속의 한민족사를 바르게 가르쳐주신 교 수님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보고서 작성의 형식은 교수님들의 강의 내용과 느낀점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교재에 있는 내 용은 중복 기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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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창문여자중학교 김난경

들어가며

연구부장님의 추천으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11월 교육청에 지원했었다. 쓴 고배의 잔을 마셨지만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생각했다. 2015년까지 고등학교에서 사회와 지리를 가르치다가 2016년 중학교에 오게 되어 역사를 지도하게 되었다. 주 전공이 아닌 터라 어려움을 많이 겪은 한 해였다. 워낙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라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깊이 있는 역사 연구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였다. 이에 이번 탐방은 나에게 있어 매우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추첨이고 50세 이하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방학이라면 학교에 폐도 안 끼치고 너무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도전한 결과 너무 행복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무거워 크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대학교 때 답사를 떠나기 전 이것저것 짐을 꾸리며 기대하던 설레임은 여전하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조선일보사, GS, 신한은행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일본속의 한민족사를 바르게 가르쳐주신 교수님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보고서 작성의 형식은 교수님들의 강의 내용과 느낀점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교재에 있는 내용은 중복 기재하지 않았다.)

1일째(2/19) - 인천

1. 탐방대학너무 긴장한 탓에 지나치게 일찍 와서 호텔에서 교재를 훑어보았다.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탐방대학은 손승철 교수님, 서정석 교수님, 엄기표 교수님, 선우정 논설위원의 강의로 정말 꽉 채워진 연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체험하게 해주시려고 그러셨는지 답사를 다녀와 보니 정말 중요한 말씀들을 빼곡이 전해주신 것이 느껴진다. 역사에 있어 부족한 나이기에 연수하시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받아적다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잘못 적은 것도 있어 보고서를 작성할 때 검색을 하며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래도 오류사항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래의 내용은 연수 내용을 그대로 적어 정리한 것이다.

① 손승철 강원대 교수 - “조선 통신사왜, 일본으로 갔을까?”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역사는 점, 선, 면으로 설명된다. 당시의 사실이 점이라면 사건의 연결이 선이고 전체적인 모습이 면이다. 그러므로 500년을 그림 그리듯 설명할 수 있다. 손승철 교수의 말은 인상적이었다. 일본 문화는 성, 절, 신사, 고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총 15곳을 답사할 예정이다. 15곳 답사 지역은 규슈-시코쿠-오사카-교토-나라 지역에 걸쳐있다. 조선 한일 관계사에서 통신사는 왕복 9~12개월간이 소요되며 4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고대(만남), 중세(적대), 근세(공존), 근대(대결), 현대(재회)1392년 무로마치시대 신도의예 중시 왜구의 약탈을 막고자 3포를 개항하여 구리, 은, 유황, 수우각, 후추 등을 들여오고 쌀, 콩, 비단, 인삼 등을 수출하여 교역하였다. 이후 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조선 전기에 3차례, 조선 후기에 11차례 통신사를 보낸다. 1592년 임진왜란 20일도 안되어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1598년 정유재란 20만개의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 전과보고하였다는 부분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교토 귀무덤이 그 결과이며 이로써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1604년 강화교섭 탐적사, 1607년 회답 겸 쇄환사 3회 파견, 1636년~1811년 통신사를 9회 파견하며 평화의 시대를 연다. 328~500명의 통신

1350 왜구 약탈자1407 무로마치 공존 통신사, 국왕사1428 삼포 경상도(부산,염,제포)1592 도쿠가와 전쟁 임빈왜란, 불구대천의 원수1607 평화 통신사 부활(통할 통, 믿을 신)1872 배신 침략전주곡

사는 수행인원을 합하면 3000~4000명에 다다르며 행렬의 길이가 3~4km나 되었다고 한다. 다녀오는데 9개월 이상이 소요되며 부산까지는 조선이 비용을 부담하고 그 후로는 일본이 비용을 부담하였는데 막부 1년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부담이었다고 한다. 통신사 관련 333점의 그림과 글씨는 세계문화유산 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였다.

② 서정석 공주대 교수 - “백제와 왜”선사시대를 지나 4세기 물적 교류와 5세기 인적교류, 6세기 사상 교류 후 7세기 백제 멸망 후까지 이어지는데 4000여 명에 달하는 엘리트 계층의 유민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7세기말 일본이란 국호가 생겼으며 8세기 서기라는 역사책이 만들어진 것이 그 예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환호, 목책 토성이 나타났다. 고대국가는 성곽이 출현하고 고분이 나오는데 고구려의 어원을 보면 알 수 있다. 구루는 성을 의미하며 한자로 구려라고 표현했으며 가장 큰 구려다 하여 고구려가 된 것이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농사짖기 좋은 땅이다. 후쿠오카, 사가현 나가사키, 벳부 오이타, 구마모토, 마아자키, 가고시마도 그러하다.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권력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이 원형주거지이며 충남, 전북, 전남 일대의 마한 지역에서 보인다. 삼각형의 석돌과 홈자귀, 송곡리형 토기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지방의 벼농사와 원형주거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 이주과정에서 금속기인 청동기, 청동검, 석기를 가져온 것이다. 조몬 시대에서 야요이 시대에 청동기와 벼농사는 자포니카 품종으로 볼 때 한반도 이주민이 전래한 것으로 본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남내곽에 권력자가, 북내곽에 제사를 관장하는 자가 거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는 5세기부터 철기를 제작하였는데 백제가 선진 문물을 전래해주는 것은 신라과 고구려가 친밀하므로 이를 견재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6세기 백제는 우수한 문화를 전래해주고 왜로부터 용병을 지원받는 관계 형성의 증거로 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이나 금동 신발을 들 수 있는데 백제의 지배층이 준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삼촌인 곤지와 어머니가 일본으로 건너가던 중 가카라시마 섬 쓰시마이끼 동굴에서 출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523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면 461년 6월 1일 탄생으로 짐작하기 때문이다.

③ 엄기표 단국대 교수 - “일본으로의 불교 전래와 고대 문화”아는만큼 보인다, 본만큼 알게 된다라는 유홍준님의 말처럼 사전 인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6.25까지 932회의 전쟁을 겪어 역사이래 1년에 2번의 꼴로 전쟁이 있었음은 놀라운 정보였다. 현재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으나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문화재 유실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기에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전쟁이 적은 일본은 불교 전래 이후 문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서기 원흥사 기록에 의하면 538년 성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과 552년 노리사치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제에 의해 오사카, 나라, 교토에 이은 본토까지 불교가 전파되었다. 중국은 전탑,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은 목탑이 주를 이루는데 일본 법륭사 5층 목탑은 우리나라가 제작하였거나 설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 인해 경주 황룡사 9층목탑를 복원한다면 참고할 것으로 보인다. 아스카 지역에 사찰이 많이 분포하는데 성덕태자 관련 사찰이 많다. 동대사는 백제 후손

위안부 관계 조사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 장관 담화 헤세의 5.8.4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하고 왔지만 이번에 그 결과가 나온 것으로 발표하였다.이 번 조사 결과 장기에, 또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한 것이 인정됐다.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체가 주로 이에 나섰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서 모아진 사례가 많이 있고,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던 것인지 밝혀졌다.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에서 아픈 것이었다.또한 전쟁터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떠나면 조선 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조선 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고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한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뤄진.어쨌든,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을 깊은 상처를 준 문제

도래인과 관련이 있으며 세계 최대 목조 건출물인 대불전과 세계 최대 청동대불이 있다. 또한 신국신사가 위치해 있어서 같은 공간에 신도(도리, 건물, 기와×)와 불교(사찰, 기와○)가 건물을 달리하여 입지함으로써 신불융합정책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나라 민간 신앙과 불교가 통합되어 산신각, 칠성각 등 통불교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닮아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아미타불, 극락을 염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나눈 팔상도를 간직한 곳으로 통일신라 이후에 건축되었으나 기단부만 남아있다가 1605년 재건된 것으로 대형 목조건물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법륭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금당의 금당벽화는 아미타불 극락염원을 담았으며 백제관음은 동양의 비너스라 불린다. 쇼토쿠 태자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몽전에 있는 구세관음상은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해 제작하여 왜 왕실에 보낸 것으로 성왕의 모습을 닮아있으며 쇼토쿠 태자가 성왕의 환생으로 통하는 것에서 매우 의미있다고 하겠다. 더불어 옥충주자는 불상을 넣은 작은 법당으로 불교 이상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궁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모습이 닮아있다. 비조사는 588년 백제로부터 부처의 사리를 헌납받아 596년 건축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다. 비조사의 백제기와는 백제가 직접 만들어 준 것으로 이로써 백제의 수덕사와 자매결연을 맺었으며 부여의 왕흥사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로써 비조사의 원형이라는 설이 확실해지고 있다. 광륭사는 쇼토쿠 태자가 가지고 있던 불상을 모신 절로 하타씨 가문이 자진하여 건설하였다. 이곳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1호로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닮았다. 특히 적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 제작설이 유력해진다.

④ 선우정 조선일보 논설위원 - “오늘의 한일 관계”1965년 한일기본협정에서 법적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고노담화에서는 군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또한 1995년 민간모금인 아시아여성기금을 조성하여 50억원을 모금, 61명이 개별 수용하였으며 이로써 반성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당시 전시 여성 성적 착취 문제가 세계 인권 문제의 주요 테마로 떠오르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UN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친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지워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말씀을 드린다. 또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표현할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 등도 지시고,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오래 기억하는 실수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재차 표명한다.또한 본 문제에 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쏠리고 있어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하여 충분히 관심을 주고 가고 싶어.

무라야마 내각 총리 담화"전후 오십 주년 종전 기념일을 맞아" 헤세의 7년 8월 15일 으로의 대전이 저물고부터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지금 다시 전쟁에 희생된 안팎의 많은 사람들 생각을 하다 때, 만감이 가슴 아픈 것이 있습니다.패전 후 일본은 그 허허벌판에서 수많은 곤란을 넘어서서, 오늘 평화와 번영을 쌓아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부심이자 그 때문에 쏠린 국민 여러분 개개인의 예지와 꾸준한 노력에 나는 마음으로부터 경의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여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국가에서 접수된 지원과 협력에 대한 새삼 심심한 사의를 표명합니다.또한 아시아 태평양 인근 국가, 미국, 심지어 유럽 국가 사이에 오늘 같은 우호 관계를 구축에 이른 것을 마음에서 우러나고 싶습니다.평화롭고 풍부한 일본과 된 오늘날 우리는 자칫하면 이 평화의 고귀함, 고마움을 잊기 쉽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밟지 않도록 전쟁의 비참함을 젊은 세대로 전해져야 하죠.특별히 주변 여러 나라 사람들과 손잡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세계의 평화를 확실한 것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 국가 사이에 깊은 이해와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를 쌓아 나가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정부는 이 생각을 토대로 특히 근현대의 일본과 근린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와 관련된 역사 연구를 지원하고 각국과의 교류의 비약적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를 골자로 한 평화 우호 교류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또 현재 힘쓰고 있는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와 이들 국가와의 신뢰 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때문에 나는 계속 성실하게 대응하겠습니다.지금 전후 오십 주년의 고비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과거를 찾아 역사의 교훈을 배우면서 미래를 원하고 인류 사회의 평화와 번영의 길을 사과하지 않는 것입니다.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 한 시기에 국책을 잘못, 전쟁의 길을 걷고 국민을 존망의 위기

식민지 배상, 사죄와 관련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은 승전국인 연합국에 대한 패전국의 배상권을 규정한 것으로 전쟁 배상에 대한 것이지 식민지에 대한 배상이 아니었다. 필리핀은 당시 배상권이 인정되어 5억 5천만 달러를 받았으며 우리나라는 4조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적용하여 경제 협력이란 이름으로 5억 달러를 받게 된다. 영국은 아직까지도 식민지였던 인도에 한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1989년 히로이토 일왕이 죽자 국왕 문제에 대한 족쇄가 사라지도 90년대에 이르러 역사적 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고노 담화에 이어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사죄와 반성의 표현을 하였다.

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 없이 부르게 하도록 하게 때문에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리고 이 역사가 초래한 국내외 모든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올립니다.패전의 날에서 오십 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나라는 깊은 반성을 포함,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배제하고 책임 있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 공조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서, 평화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범위를 넓혀야 하죠.동시에 우리나라는 유일의 핵폭격 피해국으로서 체험을 바탕으로 핵무기의 궁극의 폐기를 목표로 핵 비확산 체제의 강화 등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에 대한 이 그나 이로 희생되신 분들의 영혼을 잠재우는 이유가 되자 나는 믿습니다."지팡이의 우는 믿음이 상책은 막시 "라고 합니다. 이 기념할 때가 있어서 신의를 시정의 근간으로 하는 것을 대내외에 표방하면서 제 말로 하겠습니다. 고이즈미 내각 총리 담화 에세이 십칠 년 팔월 십오일 나는 종전 육십 년을 맞아 다시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목숨을 떨어뜨린 많은 분들의 값진 희생 덕분임에 생각을 드리고, 다시 우리나라가 전쟁의 길을 걷고는 안 된다고 결의를 다질 것입니다.(일본은 3백만여 동포가 고국을 생각하고 가족을 걱정하고 전장에 지고, 전화로 쓰러지고 혹은 전후 머나먼 타향 땅에 돌아가고 있습니다.또한 우리나라는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이러한 역사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함과 동시에 앞의 대전에서의 국내외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비참한 전쟁의 교훈을 풍화 시키지 않고 다시 서로 싸우지 않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결의입니다.전후 우리나라는 국민의 꾸준한 노력과 많은 국가의 지원으로 폐허를 딛고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을 받아들이고 국제 사회 복귀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어떤 문제도 무력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 해결 입장을 고수하며 ODA, 유엔 평화 유지 활동 등을 통해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물적·인적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우리나라의 전후의 역사는 바로 전쟁에 대한 반성을 행동으로 나타낸 평화의 육십 년입니다.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전후 세대의 세대가 인구의 칠 할을 넘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은 한결같이 자신의 체험과 평화를 지향하는 교육을 통해서 국제 평화를 진심으로 희구하고 있습니다이번 세계 각지에서 청년 해외 협력체 등 많은 일본인이 평화와 인도적 지원 때문에 활약하며 현지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 아시아 국가 사이에서도 전례 없는 경제 문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교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일의대수 사이에 있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아시아 제국과의 상호 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미래 지향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국제 사회는 지금 개도국의 개발과 빈곤의 극복, 지구 환경 보전, 대량 살상 무기 비확산 테러 방지·근절 등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서, 부전의 맹세를 견지하고, 유일의 핵폭격 피해국으로서 체험, 전후 육십 년의 걸음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나갈 생각입니다.전후 육십 년이라는 전기의 이해에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나라는 뜻을 같이 하는 모든 국가들과 함께 인류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을 재차 표명합니다.

간 나오토 총리 담화 전문 올해는 한·일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 보는 것에 솔직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多大)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わびの氣持)을 표명합니다. 이러한 인식 하에 향후 100년을 바라보면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해 갈 것입니다. 또한, 실시해 온, 이른바 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봉환 지원이라는 인도적 협력을 금후에도 성실히 실시해 갈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하여 반출되어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조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까운 시일에 이를 넘기고자 합니다. 일본과 한국은 2천년에 걸친 활발한 문화 교류 및 인적 왕래를 통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문화와 전통을 깊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양국의 교류는 매우 중층적이며 광범위하고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양국 국민이 서로에게 느끼는 친근감과 우정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국의 경제관계 및 인적교류의 규모는 국교정상화 이래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고, 서로 절차탁마하면서 그 결합은 극히 공고해졌습니다. 한·일 양국은 이제 금번 21세기에 있어서 민주주의 및 자유,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하며 긴밀한 이웃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는 양국관계에 그치지 않고, 장래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염두에 둔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 세계경제 성장과 발전, 그리고 핵군축 및 기후변화, 빈곤 및 평화구축 등과 같은 지구규모의 과제까지,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폭넓게 협력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파트너 관계입니다.저는 이러한 커다란 역사의 전환점을 계기로, 한·일 양국의 유대가 보다 깊고, 보다 확고

간 나오토 담화(2010) 정부 공식 담화이다. 고노 담화(1993), 무라야마 담화(1995), 고이즈미 담화(2005), 간 나오토 담화(2010) 4차례에 걸침 담화의 공식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미일 동맹의 목적이 한국방어 및 보호라면 한미, 한일 동맹으로 바꾸어 대등한 관계로 변화시켜 나가야한다. 방어 위주의 일본이 헌법을 바꾸면 공격체계를 갖춘 군사 강국이 될 수 있는 시대이다.

해지는 것을 강하게 희구함과 동시에, 양국간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결의를 표명합니다.

과거를 보면 나라, 헤이안 시대 608년 무리사키 시키부가 지은 겐지이야기는 4800매에 달하는 일본 문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또한 19세기 중반 만국박람회를 통한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던 유럽에서 다른 동양과 다르게 국력과 문화 수준을 유지한 일본의 자포니즘이 또한 유행하였다. 또한 대학 서림이라는 외국어사전을 일본어로 번역한 사전을 제작하는데 무려 113개 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심지어 부산어 사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2500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다양성이 존재하므로 학문의 깊이가 남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벨상 수상 경력을 살펴보면 물리9, 화학7, 생리의학4, 문학2, 평화1이다. 황우석 박사는 난자 체취라는 빠른 길을 선택한 반면 나까야마 신야교수는 난자없이 하는 인권의 벽을 뛰어넘는 연구로 먼 길을 선택한다. 피부에서 얻은 세포로 난자를 만들어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다나카 고이치는 평범한 기업의 연구원으로써 2002년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다. 시노무라 고이치는 녹색형광단백질을 발견하여 20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를 위해 해파리를 85만 마리나 해부하였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거리의 가로수 주변 도로포장 하나를 보아도 그들이 어떤 정신 세계를 가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은 우리의 문화를 전수받아 발전해 왔듯 오늘날에 우리 또한 일본의 문화를 배워 발전의 도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저녁식사와 호텔 투어당일 저녁과 아침 식사로 2만원을 지원해주셔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호텔 부대시설 이용에 나섰다. 수영으로 저녁운동을 마무리하고 사우나로 심신의 피로를 풀었다. 편안한 숙소는 내일의 설레임을 잠재워 쉴 수 있게 해주었다.

2일째(2/20) - 후쿠오카, 다자이후, 다마나, 간자키- 다자이후, 후나야마 고분, 후쿠오카 타워

1. 이동숙소 8시 집합, 공항으로 이동, 수속을 마치고 탑승장으로 이동하여 KE745 11시5분 비행기를 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와 버스에 짐을 싣고 올라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향한 곳이 다자이후이다.

2. 다자이후일본의 행정구역은 도도부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제부는 6만5천명이 거주하는 곳으로 내륙의 관청(~904)이 있던 곳이다. 수성은 차창 지리로 대신할 예정이며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만들어 신라식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고대 다자이후는 9주를 총괄하며 일본의 외교를 담당하던 곳으로 우리가 답사할 곳은 관청터이다. 선사시대 벼농사, 도장, 청동기, 철기 문화 도래지이며 많은 문화가 드나드는 곳이다.

3. 후나야마 고분구마모토에 선산 고분으로 전방후원분이며 고분에는 집모양의 석관이 있다. 무령왕릉 유물과 비슷한 부장품이 대량 출토되었으며 백제양식과 비슷한 금동관이 나와 사실 상 우리가 조사 연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후나야마 고분 내 역사전시관을 둘러보았는데 실물을 도쿄박문관이 있으며 전시품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4. 후쿠오카 타워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바쁜 일정 속에 몸이 많이 지쳐갔다. 처음에 앞섰던 의욕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하루가 이렇게 긴지, 이렇게 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지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샤브샤브로 저녁을 먹고 모모치 해변에 위치한 힐튼 호텔로 향하였다. 짐을 방에 올려다두고 마음 맞는 선생님들과 시내 관광을 나가기로 하였다. 그 중 일본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후쿠오카 타워에 갈 수 있었다. 타워 정상에서 보는 시내의 모습은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아름다웠다. 특히 위에서 바라본 마린존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내려가 보았는데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서 모모치 해변을 잠시 둘러보고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3일째 – 아리타, 시모노세키– 이삼평 도예지, 요시노가리 유적, 시모노세키, 아카마 신궁, 청일강화기념관

1. 이삼평 도예지(아리타)전국 시대 내란기에 영주인 다이묘들은 사무라이 신분으로 차마시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주들은 각종 기술자들을 납치하기에 이르는데 그중 사기장, 도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잡혀온 민간인을 피루인이라 하는데 5만~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중 7000여 명이 후에 사명대사 강화 시 본국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1597년 정유재란 시 충남 공주

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철수할 때 이삼평을 일본으로 데려오는데 이 사람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든 사람이다. 도자기는 흙, 나무, 물의 3요소가 필요한데 이 때문에 20년을 헤맨 이삼평은 이곳 아리타에서 백토를 발견한다. 도기는 1200도, 자기는 1200도 이상의 열이 필요하며 그것을 견디는 흙의 질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즈미산의 백자광 채굴터가 이를 보여주며 이후 아리타 백자는 최고로 꼽히고 있다. 유럽수출 시 이 백자를 포장한 포장지의 그림이 후에 피카소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 14대 이삼평이 명맥을 잇고 있으며 우리 탐방 일정 중에 방문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13대 이삼평의 상중에도 참석하여 우리를 맞이해준 정성이 감명 깊었다.

2. 요시노가리 유적요시노가리는 농사짓기 좋은 들을 의미한다. 야요이시대 600년 전 기간의 마을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유적으로 초대의 환호 취락과 독널 무덤이 나타난다. 남내곽은 지배자의 공간이고 북내곽은 의식행사를 주관하는 곳이며 뒤에는 무덤이 분포한다. 일본은 100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원주민이던 조몬인은 약 3만명 가까이 홋가이도로 쫏겨났다. 외래인이 도래하였는데 쌀농사, 청동기, 무문토기가 이를 말해준다. 인도와 중국 남경 즉 양자강

이남에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직접 건너오거나 한반도를 거쳐왔다고 하는데 한반도를 거쳐온 것이 정설이다. 그 증거로는 4가지가 있는데 세형동검, 지석묘, 주거지 형태, 석기가 그것으로 마한 지역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고대사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5세기 가야, 백제, 왜 연합이 신라와 광개토대왕 5만 군사에 패하여 금관가야가 초토화되는데 이때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엄청나게 넓은 유적지를 한두시간 안에 본다는 것은 탐방 면에서나 체력 면에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많은 곳을 보고 담아내려고 노력하였다.

3. 아카마 신궁아미타지를 수리하여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이용된 아카마 신궁은 시모노세키에 있다. 3세에 천황의 자리에 올랐으나 원평전투에서 평씨가 패하자 조모와 함께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에 8세 안덕천황의 모습을 진흙 조각으로 만들어 안치하였다. 이후 통신사

들이 아카마 신궁에 들러 이를 조문하는 글과 시를 남겼다.

4. 청일강화기념관시모노세키는 하관으로 마지막 검문소를 의미한다. 이토히로부미는 5명의 근대화를 주도한 개화파의 하나로 우두머리이다. 동학농민운동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마관)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다. 청나라의 리홍장과 이토히로부미가 슌판로에서 청일전쟁 강화회담을 열어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또한 배제시킨 후 1907년 이토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는 시작되었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를 배제한 두 국가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역사였다.

5. 훼리 승선

<사진으로 보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4일째 – 오사카, 나라, 아스카- 도다이지, 호류지, 아스카테라, 다카마쓰 고분

1. 도다이지(동대사)

2. 호류지

3. 다카마스 고분

4. 아스카테라

5. 저녁 식사와 리가 로얄 호텔

5일째 – 교토, 오사카- 고류지, 니조성, 아라시야마, 오사카 시내 관광

1. 니조성

2. 아라시야마 산책

3. 고류지

4. 오사카

6일째 – 오사카- 오사카성, 오사카 백두학원 건국학교

1. 오사카성

2. 백두학원 건국학교

3. 귀국

마무리하며

지원은 하였으나 정말 추첨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는데 정말 엄청난 행운이 함께 하여 기뻤다. 소중한 인연과 경험을 만들어주신 주최 측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육체적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바쁜 일정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라도 더 보려는,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는 우리의 열정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과거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배우는 것도 의미있었지만 선우정 기자 강의가 시사하는 바는 컸다. 현대사에 있어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정리해 왔으며 앞으로 한일 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지가 중요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를 만들어 갈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 나가야 할지 큰 숙제로 다가오는 대목이었다. 과거를 바르게 이해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역사의 목적에 맞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실리가 앞서는 지금의 시대에 과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과거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사회인으로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보다 깊이있는 토론을 전개해볼 생각이다. 현재 하브루타라는 유태인식 학습법을 역사 수업에 적용하고 있으며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약에 ~라면의 형식으로 질문을 만들어와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 받으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에 배우고 느낀 주제들의 정리하여 수업 시간에 활용할 생각이다.배울 점이 참 많은 탐방이었다. 일본의 문화재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 일본의 주변국과의 역

사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법, 일본인의 사람을 대하는 예의, 생활습관, 표현방법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교훈을 남겼다. 백두학원 건국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떠올려본다. 입구에서부터 왠지모를 벅차오름에 눈물이 흘렀다. 우리가 익숙하여 소홀이 여기는 것들을 그들은 소중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감동이었다. 학교를 운영하는데 있어 세심함과 학생 자치적인 활동 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사물놀이 공연은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하였으며 그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완성도 높은 공연이었다. 마지막 일정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게 다가왔으며 의미있는 마무리가 되었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의 기회를 만들어주신 관계자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모든 과정 과정에 감사하며 보고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