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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총에 맞는 거... 이렇게 아픈 건 지 몰랐어. 하지만... 지금 날 더 아프게 하는 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동혁씨가 이렇게 죽었다는 거야. 가슴에 총을 맞고 철철 흘러 넘치는 피를 하고 은성은 그녀가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를 가장 사랑해준 남자를 향해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총알이 관통을 했는지 그에게서는 그녀만큼의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윤대위가 쏜 한방의 총에 이렇게 싸늘히 식어 누워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눈이 자꾸만 눈물 때문에 앞을 가렸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그를 봐야하는데... [아직 살았습니다. 장군님] 그렇게 말하는 윤대위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아니 슬픔이었다. [내버려둬. 곧 죽을 거야] 죽어서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는 은성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연인이었던 강 동혁 소령의 손을 잡으면서 은성의 의식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동혁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알아내지만 않았어도... 당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원망스러워요. 제대로... 제대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는데...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꼭 사랑한다고 말해 줄께요 당신.... 정말 사랑해요. 지하창고의 어두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의식은 눈부신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는 이미 포위 됐다] [제기랄 이게 무슨 소리야? 밖으로 새 나간 거야?] 창고 위쪽으로 난 쪽문으로 밖을 확인한 윤대위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장군님... 헌병대가 쫙-- 깔렸습니다. 그리고.... 기무사까지...] [뭐야? 그 자식들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별을 두개 달고 있는 김장군은 벌개진 얼굴로 화를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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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총에 맞는 거... 이렇게 아픈 건 지 몰랐어. 하지만... 지금 날 더 아프게 하는 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동혁씨가 이렇게 죽었다는 거야.

가슴에 총을 맞고 철철 흘러 넘치는 피를 하고 은성은 그녀가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를 가장 사랑해준 남자를 향해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총알이 관통을 했는지 그에게서는 그녀만큼의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윤대위가 쏜 한방의 총에 이렇게 싸늘히 식어 누워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눈이 자꾸만 눈물 때문에 앞을 가렸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그를 봐야하는데...

[아직 살았습니다. 장군님] 그렇게 말하는 윤대위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아니 슬픔이었다. [내버려둬. 곧 죽을 거야]

죽어서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는 은성은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연인이었던 강 동혁 소령의 손을 잡으면서 은성의 의식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동혁씨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알아내지만 않았어도... 당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원망스러워요. 제대로... 제대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는데...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꼭 사랑한다고 말해 줄께요 당신.... 정말 사랑해요.

지하창고의 어두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의식은 눈부신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는 이미 포위 됐다] [제기랄 이게 무슨 소리야? 밖으로 새 나간 거야?] 창고 위쪽으로 난 쪽문으로 밖을 확인한 윤대위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장군님... 헌병대가 쫙-- 깔렸습니다. 그리고.... 기무사까지...] [뭐야? 그 자식들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별을 두개 달고 있는 김장군은 벌개진 얼굴로 화를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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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지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 버려 이미 게임은 끝났어]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은 기겁을 하고 돌아보았다. 분명 총을 맞고 쓰러진 강동혁 소령이 그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윤대위는 귀신처럼 서 있는 그를 보고 덜덜덜 떨리는 손에서 그만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김장군도 포기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지시한 거야. 이미 당신에 대해 기무사에서는 6개월 전부터 조사에 들어갔었어. 그 결정적인 증거를 안소위가 건네준 거고.] [강소령 자네 분명 총에 맞았는데...] [요즘은 방탄조끼가 아주 성능이 좋습니다. 장군님]

무장을 한 헌병들이 창고로 들이닥치고 김장군과 윤대위는 수갑이 채워진 채 그곳을 나가고 있었다.

[은성아... 은성아...]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요. 아직 숨이 남아 있습니다. ] 구급요원들이 그녀를 들것에 싣고 나가는 모습에 동혁은 자신의 무력함에 절규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동혁씨... 나도 군인이 될 거야. 여군장교에 지원했거든. 그럼 동혁씨랑 좀더 자주 볼 수 있잖아]

[동혁씨... 나 ... 너무 힘들어]

[동혁씨... 내일 100키로 행군이야. 이것만 끝나면 훈련은 끝이야. 나 내 전공 부서로 발령 났으면 좋겠어]

[동혁씨... 축하해 줘.... 와우!~ 전산실이야. 전산장교라고... ] [동혁씨... 내가 어디로 발령 난 지 알아? 동혁씨 부대야. 우린 이제 맨 날 볼 수 있어. 나 너무 행복해]

1장

[저... 소위님 거기는 가시면 안 되는데요] [이 자식이 지금 날 여자라고 깔보는 거야? 이제 겨우 일병 주제에 가도 된다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거야? 건방지게.!일병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지? 가면 안 된다고?]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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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올 때까지 토끼뜀 뛰고 있어]

은성은 있는 대로 구겨지는 일병의 얼굴을 보고 계곡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상병은 도대체 하라는 프로그램 정리는 안하고 왜 여기와 있는 거야? 조금 더 올라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은성은 그제서야 김상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땡볕에 상관이 부하를 찾아다니는 꼴이 너무 우습긴 했지만 아쉬운 놈이 뭐 한다고 당장 내가 아쉬우니 어쩔 수가 없지. 동혁씨는 왜 하필 김상병을 이리 보낸 거야.

최초의 병사 한 명이 그녀를 보자 조금 전에 본 일병보다 더 당황하며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

[안됩니다.] [지금 뭐라고? 자네 계급이 뭔지 알기나 하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압니다 하지만 소위님. 올라가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그건 내가 결정해] [전.... 잘 못 없습니다.]

바위하나를 끝으로 올라선 그녀는 조금 전 그녀를 말리던 사병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당황한 것은 모두 발가벗고 계곡에서 어린애들처럼 목욕을 하던 사병들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자신의 물품하나씩을 찾아 중요한 곳을 가리며 훤히 드러나는 엉덩이를 그녀를 향해 돌리는 모습들이 처음엔 당혹스러웠다가 나중에는 참을 수 없는 웃음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누드 장병들을 보고서도 돌아서지도 않고 당황해 하지도 않는 그녀를 보고 남자들은 어이없어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여자의 출현으로 간만에 짜릿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음흉한 시선으로 노골적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있었으며, 슬금슬금 옆걸음으로 나무 뒤에 숨는 사람도 있었다. 은성은 재밌다는 얼굴로 뒷통수만 보이고 있는 사병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김상병의 이름을 불렀다.

[김 종철 상병] [예 상병 김 종 철] [빨리 옷 입고 따라와. 2분 주겠다. 실시] [실시]

벌거벗은 남자들 틈에서 유독 몽고반점이 큰 남자 하나가 우렁차게 그녀의 명령에 대답을 하고 중요한 부분만 가린 채 벗어둔 옷가지들로 뛰어가는 걸보고 은성은 돌아서서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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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내려섰다.

귀여운 녀석들...

계곡 아래서 그녀를 막아서던 병사는 그녀가 '엄마야'라는 비명이나 혹은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내려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려서는 그녀를 보고 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병에게 은성은 상관으로서 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했다.

[장정훈 상병] [상병 장 정 훈] [감히 날 막아서. 넌 위아래도 없어? 말 해봐]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따라와. 완전군장. 연병장 10바퀴야] [저... 안소위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지금?] [아닙니다.] [그럼... ]

갑자기 은성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흐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부터는 사병들이 어디서 목욕하는 지 알려주면 그 채벌은 면하게 해주지] [네?] [싫어?] [저 이 사실을 저희 소대장님께서 아시면... ] [됐어. 연병장 10바퀴야]

은성은 허겁지겁 얼굴을 붉히며 달려오는 김종철 상병을 보고 본부로 걸음을 돌렸다. 김상병은 그녀의 뒤에서 한 걸음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김상병 왜 내가 하라는 일은 안하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거지?] [저... 강소령님께서 시간 날 때 같이 부대원들하고... ] [누가 직속 상관인지 자네 알고 있나?] [예 소위님] [오늘은 자네 덕에 좋은 구경했으니 봐주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장정훈 상병 완전군장하고 연병장에 나오면 그냥 들어가라고 해 알았지? 나 먼저 간다. 그리고 시킨 일 오늘 6시까지 마무리 해. 내가 6시 10분 확인 할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수고]

군기가 잔뜩 들은 종철을 먼저 내려보내고 계곡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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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좀 전까지 발가벗고 목욕을 하던 병사들이 줄줄이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야유 비슷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은성은 오른 손 가락 다섯 개를 좌-------악 펴서 흔들다가 먼저 엄지를 구부리고 그 다음 둘째손가락. 그리고 넷째 손가락 마지막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고 하나 남은 중지 셋째손가락을 더 길어 보이게 하늘을 찌르듯이 보여주고는 터벅터벅 내려왔다.

'여자도 아니야'라는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 것 흘려보내며 은성은 그 귀여운 장병들의 탱탱 엉덩이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동혁은 방금 들은 이야기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웃었다가 화를 냈다 가를 반복했지만 결국은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전산실 안 은성소위 오라고 해] [예 소령님]

두 번의 노크소리가 들리고 은성이 활짝 웃으며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동혁은 그런 그녀를 모른척하며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서류만 뒤적이고 있었다.

[불렀어? 난 동혁씨가 부하 시켜서 부를 때가 젤 무섭더라... 왜 불렀는데?]

동혁은 애교가 가득 담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더니 서서히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겠니?] [내가 뭘?]

뭘? 남자들 목욕하는 데 가서 얼굴도 안 돌리고 볼 거 다보고 내가 뭘? [아 ... 그거... 그게 다 동혁씨 때문이지 김상병 거기 안 보냈으면 내가 그런 좋은 구경거릴 볼일도 없었을 테고... 그런데 말이야. 젊은애들이라 엉덩이가 탱탱하던데... 이제 30줄에 접어든 동혁씨거랑은 왠지 비교가 될 것 같은데... 안 봐서 알 수가 있어야지..]

은성의 말에 동혁의 눈이 가늘어지는 듯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안아 갑자기 그에게 끌어 당겼다.

[왜.... 왜 그래?]

갑작스런 동혁의 행동에 은성은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몸에서 나는 열기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동혁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더니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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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알아? 네 말만 들으면 온갖 경험 다한 여자 같은데... 이렇게 막상 몸으로 부딛치면 도망가기 바쁘다는 거?]

은성은 눈을 감았다. 그가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 때문에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혁은 그녀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풀어버려 그녀가 휘청 이도록 내버려 둬 버렸다.

[벌이야. 남의 남자 엉덩이나 보고 다닌 벌]

동혁이 뒤돌아서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걸 은성은 뒤에서 힘껏 그의 허리를 껴안아 버렸다.

[동혁씨.... 자기야... ]

부드럽고 가는 팔이 동혁의 허리를 휘감아 오자 언제나 늘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욕망이 그를 힘겹게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체 이렇게 쉽게 남자를 뒤에서 앉는 게 얼마나 참기 힘들게 만드는지... 당장 책상에 눕혀 사랑을 나누고 싶게 만드는 충동인지 그녀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바보...

[미안해... 다음엔 동혁씨꺼 보여주면 되잖아. 응? 미안해. 이젠 사병들 목욕하는데 안 갈거니까... 나 용서해 주라? 응 자기야... ]

동혁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껄 보여달라고? 무슨 의미로 하는 거야 그 말? 이 둔탱아...

[보여 달라... 뭘? ]

그녀의 손을 푸르며 동혁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여줬던 보호자 같은 시선을 접고 남자로서의 욕망을 가득 품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햇빛에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커다란 손이 부드러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검지도 않고 그렇다고 염색한 머리처럼 갈색도 아닌... 자연스런 다갈색 머리색은 그녀만이 가지는 매력 중에 하나였다 . 위협적으로 점점 그녀에게 다가서는 동혁 때문에 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으로 물러서다 벽에 부딛 쳐서야 걸음을 멈추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왜...... 왜..... 그래... 오빠... ]

동혁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에 깊고 진한 키스를 오랫동안 감미롭게 해주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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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서 받아 냈다. 그가 입술을 떼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아직도 은성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그의 가슴에 두 주먹을 꼭 쥐고 서있었다.

[너 그거 아니 꼬맹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은성은 그를 보았다.

[넌 내가 꼭 키스하려고 다가갈 때마다 호칭이 오빠로 바뀌는 거.]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동혁은 있는 힘껏 그녀를 꼭 껴안았다.

2장

[아--- 또야? 왜 맨 날 내 앞에서 걸리지... 나까지 오면 내가 나는 건데...아깝다..]

은성은 벌써 두 시간째 한게임에 접속에 고스톱에 심취해 있었다.

[기다려라. 내 돈 다 따고 너희들이 무사할 줄 알았다면 아주 크게 착각한 거지. 기다려라. 서비스가 두 장이나 들어왔지롱. 너희들 죽었다. 쓰리고에 피박에 광박까지 죽여주마...]

자신에게 들어온 화려한 패에 은성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신나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귀찮은 듯 그 손을 털어 낼 뿐이었다.

[방해하지마. 중요한 판이란 말이야]

도대체 누가 건드는지 알기나 하고 저러는 거야? 그녀를 제외한 기타 장교와 3명의 사병은 거의 마네킹과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거봐라. 내 말이 맞지? 어... 저 녀석은 여시 같이 피박을 면했잖아. 아깝다. 깡통 채워서 내보낼 수 있었을 텐데...] [음...흠 --.흠-----]

절대 젊은 사람의 헛기침이 아니어서 은성은 잔뜩 긴장을 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별네개가 눈에 들어오자 허겁지겁 그 작은 몸짓으로 모니터를 가렸지만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본 육군참모총장은 굳어진 얼굴을 펴지 않고 있었다.

[충성!]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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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육참의장은 돌아섰다.

[안소위 따라와]

그 한마디에 은성은 쓰러질 것처럼 창백해져서 선배 장교들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오히려 그녀에게 도끼가 되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너 때문에 진급에 문제 있으면 알아서 해'라고 말하는 듯해 얼른 다시 그 도끼눈에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복날 보신탕 집에 끌려가는 개 마냥 은성은 잔뜩 두려움에 떨며 참모총장 옆에 주렁주렁 서있는 보좌관들의 제일 끝으머리에 서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난 죽었다. 어디 강원도 꼴짜기에 콕 쳐박히게 전보만 안 나면 다행이겠는데...

접견실에 들어서자 참모총장은 보좌관들을 물리치고 그녀만 그의 사무실로 들였다 .

[자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한참 바쁠 때 오락이나 하고 있고... 참... 일개 육군장교가...] [아버지 한번만 봐주세요. 죄인들도 한번은 훈방조치 해주잖아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들려온 동혁의 목소리에 은성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활짝 웃었지만 동혁의 험한 표정을 짓고있는 얼굴을 보고 다시 우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 우리 에비며느리하고 만남은 늘 이런지 모르겠구나] 동혁의 아버지 철형은 은성을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이차 번호판 좀 봐. 발상이 너무 유아틱 하지 않냐? 빨간판에 육이라고 쓰고 별 세개만 떡 그려넣고 어째 이북스러운 느낌도 나고.... 차는 죽여주게 좋은데 번호판에서 베렸다. 차가 아깝다.] 차안에 있던 동혁의 얼굴이 그녀의 그 철없는 행동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선텐 좀 봐. 너무 찐해서 안이 보이지도 않아.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거 보니까 안에 사람은 없겠지?] 얼굴을 납짝 붙여서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짙은 선텐으로 인해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 창문에 코가 돼지처럼 납짝 눌리게 바싹 붙여서 안을 관찰하는 그녀의 엽기적인 모습에 철형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즘 젊은애들은 정말 못 말리겠단 말이야. 설마 네가 말한 아이가 저 정도는 아니겠지?]

철형은 창문에 달라붙던 그 돼지코가 자꾸 생각이 나는지 참았던 웃음이 계속해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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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고 있었다.

[야.. 그냥 가자. 안에 사람 있으면 어떡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무도 안나오는 거 보면 아무도 없는 거지. 이렇게 맨들 한 차 보면 괜히 긁고 싶지 않냐?] 그러면서 은성은 벌써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뒤적이고 있었다. [야 하지마] 곁에 있던 친구는 잔뜩 겁을 먹은 채 그녀를 말리고 있었지만 은성은 그 백원 짜리로 슬금슬금 차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동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백원 짜리를 들고 서 있던 은성은 동혁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서 한참을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걸로 뭐 하려고?] [어 이게 뭐지?] [딴 소리 말고 어서 타기나 해] [그러니까 이 유치한 번호판을 단 차가 오빠 차야?] [아니 아버지 차야] 헉!~ 설마 타고 계신 건 아니겠지?

그런데 무심히도 창문이 스르르 내려지더니 무를 썰어도 될 만큼 주름이 칼처럼 잡힌 군복을 입은 근엄한 남자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반갑구나. 어서 타거라]

맙소사... 은성은 그런 속마음과 달리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님!~~~~~ 제 쇼가 맘에 드셨어요?]

그것이 이 천방지축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첫 만남이었다.

3장

재고조사겸 무기창고에 앉아 은성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K5<<권총-국내에서 개발된 세계최초 FA(fast action)방식의 권총>>을 들고 벽을 향해 조준을 했다가 다시 안전핀을 풀러보기도 했다가 하며 장난감을 가진 어린애 마냥 좋아라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좋지 않냐? 총알도 13발이야. 여기 위에 예비용 한발도 있고. 죽여주는데.... 누가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안전핀도 양쪽으로 다 있고... 이런 거 나도 하나 가지고 다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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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겠는데...] [자꾸 그렇게 만지지 마십시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k5하나가 분실 되서 난리가 났는데 아직도 못찾고 있어서 헌병대 애들이 불을 켜고 찾고 있거든요] [정말이야? 나 말고 누가 또 이런걸 탐내지? 동작도 잽싸라...] [여기요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탄약 남은 재고하고 현재 보유하고 총기류 다 종류별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목록은 훈련 끝나면 미국 애들이 놓고 갈 무기 종류구요.]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장비를 우리가 그런 거금을 주고 사야한 다는 게 억울 하긴해. 지네 나라로 가져가는 비용이 더 들텐데... 우리가 사주는 것도 어디야. 그런데 왜 맨 날 그렇게 많은 돈을 퍼주는지... 도대체 무기구매 담당은 누구야? ] [모르셨어요? 김 왕성 중장님요. 소문은 별로 좋지 않아요. 무기거래상들이랑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신다나요... 그럼 뻔하죠] [그래...] [그리고...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 들여오기 시작한 수류탄이 좀 이상해요. 오발이 많이 나와서 부상자들이 늘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수입 재 계약을 했거든요. 아무래도 문제가 있긴 있어요] [얼마나 많이? 알아봐 줄 수 있어? 부상병들 숫자와 사고발생 건수등등...] [그거야 쉽지만...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십시요. 그러다가 휴전선으로 간 사람 몇몇 있으니까요. 의문사도 한껀 있었어요. 김중장님은 안 건드리는 게 나아요.] [그래도 부탁해. 자료 고마워. 자주 들를께. 가끔 k5가지고 놀게 해줘] [안녕히 가십시요 충성]

무기저장고의 최병장은 몇 안 되는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수류탄 오발 사고라... 그렇게 빈번하게 사고가 나는데도 왜 기무사(사회로 따지면 감사과)에서는 가만히 있는 거지... 내가 알아봐야 겠어.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은성이 아니지. 간만에 스릴 넘치는 일을 좀 하겠는데...

처음 재고조사를 시작할 때는 단순한 정의감에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컴퓨터에 기록된 물품구매 금액과 무기의 수가 제대로 맞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종종 탄환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고 최근에는 최병장이 말한 k5등의 소형권총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야 컴퓨터에 입력만 하고 무기 입출고에 관한 단순한 프로그램만 작성하면 됐지만 서서히 한가지씩 밝혀지는 사실들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체계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걸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동혁씨에게 말 해야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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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있다가 문제가 터지면 아버님이 더 곤란해 질 거야. 아니지... 내가 좀더 구체적으로 증거를 확보해서 동혁씨에게 주는 게 나을 거야. 동혁씨가 움직이는 거는 너무 사람들의 눈에 띄니까...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그 일이 은성과 동혁의 앞날에 엄청난 불행으로 닥쳐올지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해?]

갑작스런 사람소리에 은성은 컴퓨터의 파워를 거칠게 눌러 꺼 버렸다. 모두들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들어서던 동혁은 무척 당황해 하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동혁씨... 아직 안 갔어?]

뭔가를 애써 감추려는 듯 그녀는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많은 종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요일이야. 사무실에도 안 찾아오고... 설마 바람피우는 거 아니지?]

농담을 건넸지만 평소 같으면 길길이 날뛰며 무슨 말이냐며 수다를 한 바가지는 했을 그녀가 오늘은 너무나 조용히 아니라고만 부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잠깐만..]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다가 은성은 그녀가 이제까지 찾아놓은 자료를 서랍에 넣어 열쇠를 잠그고 다시 한번 더 잠겼는지 확실히 확인을 한 다음 사무실을 나섰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없어지면 제일 먼저 내 책상부터 뒤져] [뭐?] [내 정부 사진 넣어 뒀거든] [이 녀석이...] [나 술 먹고 싶어.] [또 울려고?] [뭐야?]

있는 대로 눈을 흘기며 은성은 동혁을 노려보았지만 그런 그녀의 얄궂은 흘김에도 불구하고 동혁은 그저 웃기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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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안나? 너 20주 훈련 중 겨우 첫주인 가입교<<훈련소에 들어가서 혹독하게 받는 1주일간의 기간-이 기간 동안 훈련을 포기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기간에 내가 잠깐 찾아갔을 때 교관들에게 어렵사리 허가 받아서 너 만난 것도 다행이었는데 갑자기 술 먹고 싶다고 해서 술 먹여줬더니 교관들 이름 줄줄이 대며 얼마나 욕을 해대던지... 내가 이 날 평생 그때처럼 진땀난 적은 아마 없을 거다]

비겁하게 지나간 과거를 들먹이다니...

[그래도 동혁씨는 내 그런 살풀이 다 들어 줘야 해. 나 아니었으면 누가 그렇게 오래 동혁씨 기다리겠어. 벌써 고무신 거꾸로 신었지. 육사 4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3년. 거기다가 귀국해서 DMZ(비무장지대)에서 1년... 내가 독수공방하면서 기다린 거 생각하면... 내가 바보였지. 그때 실컷 즐겼어도 감시자도 없고 좋았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럴 능력은 되고?] [어쭈? 날 무시해? 보여줄까? 내 손짓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쓰러지는지?] [인석아. 여자애 말투가 그게 뭐야?] [그래서 술 사주겠다는 거야? 뭐야?] [집에 가자 집에서 중국 음식 시켜서 먹고 비디오나 보자.] [아---- 재미없어.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를 죽자 따라다녔나 몰라. 난 양장피 하고 깐풍기 시켜 줘. 그거 아니면 안 먹어...]

돼지...

저녁을 먹고 은성은 가득한 포만감에 배를 통통 두드리며 쇼파에 누워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동혁씨 나 커피 타 줘. 설탕 듬뿍 넣어서...] [알았어. 냉커피로 해 줄까?] [응!. 얼음 많이 넣어 줘...]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는 그 잠깐 사이 은성은 포만감에서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혁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부엌에서 나올 무렵엔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이 스스르 빠지더니 마루바닥에 툭!~ 떨어져 버렸다. 은성의 옆에 앉아 쿠션으로 머리를 괴어주고 짧게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선 동혁은 복잡한 얼굴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바보야. 함부로 움직이지마. 네 일이 아닌 것에 손대지 마라고... 네가 다칠까 겁이나 죽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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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그의 군복 셔츠를 빨아 베란다에 널면서 은성은 그 평화로운 일상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뭐해?]

젖은 손을 난간에 올려놓고 햇볕에 말리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동혁은 못 견디게 그리운 듯 감싸고 있었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따가운 햇볕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야]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향기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날씨가 좋아서 빨래가 금방 마를 거야. 난 이렇게 막 빨래를 해서 널었을 때 나는 그 싱그러운 냄새가 너무 좋아.] [너의 향기도... 나를 미치게 할만큼 좋아.] [말로만... ] [내가 널 안기라도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갈 거면서...] 하얀 셔츠 안으로 그녀의 속옷이 환히 비치는 그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조금씩 흥분되어 가는 그녀의 작은 몸을 느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 ] [쉬---- 아무 말도 하지마. 지금은...]

비스듬히 얼굴을 돌려 그녀의 가냘픈 목에 자국을 낼 것처럼 키스하는 그에게 몸을 돌려 상큼한 작은 입술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언제나 자제력을 잃지 않으며 보호자 같은 눈을 하던 그가 오늘은 지나치리 만큼 그녀에게 흥분해 있었다. 두개의 단추가 풀려져 있던 셔츠를 어느새 벗겨내 버리고 동혁은 그녀를 안으며 자신의 넓은 침대에 눕히면서도 잠깐씩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사라진 곤 했다. 어린아이에서 이미 성인으로 커버린 그녀의 아름다운 몸에 정신이 아찔해져 갔고 아쉬움만 가득 남기던 키스에서도 만족스러울 만큼 진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그의 흥분의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베게에 아름답게 펼쳐진 머리카락이며 그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에선 입술을 댈 때마다 꿀처럼 달콤함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의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서 바지 마저 벗겨 내버리고 그의 손은 길게 뻗은 부드러운 다리를 만지며 점점 그녀의 그곳으로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충분한 전희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이미 촉촉히 젖혀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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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입술에 매달려 그가 움직이는 손길마다 신음을 쏟아내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 안에 가두고 싶다.

[동혁씨 오늘 ... 평소와 다른 거 같아]

열에 들뜬 사람처럼 그녀를 탐하다가 동혁의 움직임이 얼어붙은 듯 멈추어 버렸다.

[싫어? 내가 이러는 거...]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을 간질이며 성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언제나 조심스러웠잖아. 식 올릴 때 까진 지켜주고 싶다고... 늘 보호자 같은 태도였으면서... 이상하잖아. 갑자기...]

동혁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런 그의 태도에 은성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 답지 않다.

[너.... 갖고 싶어. 어서 빨리... 내 아이 가져서 배부른 모습도 보고 싶고... 아침마다 네 따뜻한 몸을 안고 깨고 싶고... ]

갑자기 은성이 작은 소리로 웃음을 웃었다. 듣기 좋은 그 맑은 소리가 동혁의 가슴에 깊숙히 와 닿는 듯 했다.

[그거 있잖아... 몇 년 동안 내가 한 대사 아니야? 야한 옷 입고 침대에서 기다려도 꿈쩍도 안 했던 사람이 누군데... 후후~] 땀으로 가득한 그의 등을 매만지며 은성은 그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가져도 되니?]

그의 그 진지한 눈빛에 전염된 듯 은성은 그가 지금 하는 말에 당황함으로 긴장되어 짐을 느꼈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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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이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워버리면서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또... 그 소리... 너 겁나니...녀석아? 오빠가 뭐야, 오빠가...] 그가 갑자기 웃어버리는 바람에 그 순간적인 긴장감이 해소되긴 했지만 동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것에 은성은 적잖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던 그가...

[아저씨라고 안 하는 것만도 고맙다고 해... 어쩔 수 없지 뭐. 나 6학년 때 위문편지에 답장해주면서 알게 됐는데... 그러고 보니까 우리 되게 오래 됐다 그치? 몇 년이지?]

조금 전에 그들을 휩쓸던 열정 대신 이젠 둘만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에 미소지을 뿐이었다.

[딱 10년 됐어] [정말 되게 오래됐다.] [난 너 군인 된 거 여전히 맘에 안 든다. 졸업하고 바로 사회취직을 하던지 하지 학사장교<<일반대학 4년을 졸업하고 장교로 가는 것>>가 뭐야... ] [뭐...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 같이 있잖아 부대에서도 얼굴 볼 수 있고... 좋잖아. 안 그래?] [하나도 안 좋아. . 늑대들 소굴에서 남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맘에 안 들고...] [동혁씨가 언제 내가 하는 거 맘에 들어 한적 있어?] [네 행동 생각해 봐. 조마조마해서 눈뜨고 볼 수 있는지...] [그래서 신께서는 나에게 동혁씨를 보낸 거지.... '이 아이를 줄 터이니 간수 잘 하거라...'라고 말이야] [조심해 항상... 군대라는 거... 단순해 보이면서도 엄청 복잡하고 무서운데니까... 니 일이 아닌 거엔 손대지 마. 절대로.] 착 가라앉은 동혁의 말에 은성은 순간적으로 뜨끔했지만 그녀의 일에 대해 그가 알리 없다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서로의 몸을 안은 채 추억에 빠져드는 동안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하늘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로 기분 좋을 만큼 바삭하게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동혁의 충고를 무시한 채 은성은 김장군의 사무실을 뒤지고 있었다. 모두들 퇴근한 시간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한참을 히든 파일과 삭제한 파일들을 검색하다가 교묘하게 다른 이름으로 파일 속에 또 다른 히든 파일로 숨겨 놓은 것을 발견하고 주민등록 생성기로 만든 가짜 실명 아이디로 그 파일들을 전송했다. 전송이 완료됨을 확인한 후 누군가 침입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돌려 그 방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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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기분 나쁠 만큼 고요한 정적 속에서 커다랗게 들린 그 쇳소리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공포에 질려야 했다. 그 소리에 천천히 돌아서는 그녀의 시선에 들어 온건 윤대위였다.

[물러설 기회는 많이 줬어.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K5. 어쩌면 그녀가 가장 좋아한 저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은성은 윤대위의 표정이 자신에게 적의에 찬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믈 받고 있었다.

[들어가]

그에게 떠밀려 다시 들어간 김장군의 방은 불이 켜지면서 그녀가 보지 못했던 고급스런 가구와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자 앉아]

여전히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사늘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 보시지. 여기서 뭘 찾았는지...] [아무 것도... 소득 없이 나왔습니다. ]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윤대위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곧 장군이 올 거야. 네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럼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도대체 그들은 정보망은 어디까지일까... 내가 한일...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였을지 모르지...

[윤대위님이 김중장님 일에 관여되었다는 것에 실망입니다.] [사람은 늘 누구나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지.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 그리고 진짜 나의 모습. 순순히 자백하는 것이 네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일테니까 그 좋은 머리로 잘 생각해 보길 바래] [윤대위님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돈?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 저 작은 여자가 자신의 꿰뚫고 있다는 것에 윤대위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김장군의 집에 자신이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이 엄청난 일에 희생양으로 관련이 되 버렸는지 모르지만 저 작은 여자가 그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보고 있다는 것에 충격처럼 다가왔다.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저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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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직한 눈이 윤대위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심장에 작은 불꽃이 이는 것 같아 급히 시선을 돌렸다.

후후 이젠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할 정도인가..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사람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저 정직한 눈을 가진 여자는... 그에게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작은 듯해 보이는 입술을 축이는 모습에 그의 온 세포가 뜨겁게 반응하는 것 같았고 군복 안에 감추어져 있을 가냘프지만 아름다울을 몸매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몸으로 어떻게 20주 훈련을 견디었는지 궁금하군... 제일 먼저 포기하고 나가게 생겼는데 말이야...] [목표가 있으면... 꼭 해야할 이유가 있으면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죠] [목표? 그래... 그렇지...]

윤대위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다시 얼굴을 들고 은성을 바라보는 눈에서 은성은 이제까지와 다른 시선을 느끼며 막연히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도 못하면서 맞 바라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너의 목표가 내가 되게 해주마.

5장

그의 감시 하에 둔다고 어이없어..

야비한 얼굴에 배는 나올 대로 나온 김장군의 집으로 복날 보신탕 집으로 끌려가는 개 마냥 그녀는 그렇게 그의 집으로 끌려오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안 놀라운 사실... 윤대위가 김장군의 집에서 같이 지낸다는 사실이었다 .

그에겐 아마 다른 말하지 못한 그만의 사정이 있는 듯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단순히 김장군의 수족 노릇이나 하기엔 윤대위는 너무 아까운 인제였다. 왜 일까?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감시 잘 해] [예 장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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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가 안내된 곳은 윤대위의 방과 그녀의 방 사이에 복도를 거치지 않고도 통하는 보조문이 있는 곳이었다.

[이건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넌... 말할 자격이 없어. 여기까지 살아서 데려온 것 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누군가 죽는다면 일이 커질텐데요...] [죽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사고사... 자살... 등등 말이야... 넌 어느 경우에 해당이 될까?]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현기증이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휘청이며 벽에 기대는 은성을 안아든 윤대위의 얼굴에서 표정 하나 조차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가면처럼 무표정 그 자체였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녀를 휩싸고 돌았다. 윤대위의 몸에 닿은 부드러운 그녀의 몸짓에 그의 온몸의 세포가 긴장으로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아찔한 향기... 그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 사람...

은성은 있는 힘을 다해 윤대위를 그녀에게서 밀어 내 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잡아 놓은 물고기에게 장난을 좀 친 거야. 별로 맘에 안 들었나?] 그 싸늘한 미소에 얼어붙듯 서 있을 뿐 그의 표정에서 자아지는 그 서늘함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같이 지낼 수 있을까? 그 동안 만이라도 편히 지내라고]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 윤대위가 사라지자 은성은 쓰러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동혁씨 도와줘요. 제발... 나 너무 무서워.

서류를 뒤적이던 동혁은 바로 가까이에서 그를 부르는 것 같은 은성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피식 웃어 버렸지만 왜 다른 말도 아닌 도와 달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렸는지 맘에 걸렷다 . 결국 하던 일을 책상 위에 내버려 둔 채 동혁은 그녀가 있어야 할 전산실로 발길을 움직였다. 곧 시행될 팀스피리트<<76년부터 연례적으로 실시된 미국과 연합 야외기동훈련, 94년 이후 중단>> 훈련을 대신해 실시되는 을지포커스연습 때문에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부서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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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인 그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적인 불길함이 제발 기우이길 마음으로 빌 뿐이었다 .

[안소위는?] [예... 김장군님께서 개인적으로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서 차출해 가셨습니다.]

동혁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는 듯 하더니 주먹의 핏줄이 터질 만큼 세계 움켜쥐고 있었다.

[언제?] [어제까지 근무하셨구요. 오늘 바로 그곳으로 출근하신 것 같습니다. 김중장님의 보좌관이라면서 아침에 전화가 왔었거든요] [어디라고는 말 않고?] [예.] [그래... 알았어.]

빌어먹을...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을 했는데.. 바보가...

사무실로 돌아온 동혁의 얼굴이 폭풍 전야처럼 마치 누가 건들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심히 선 듯 비장한 얼굴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

[난데 작전 들어간다. 준비해.]

그의 그 한마디에 움직임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소리 죽여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내일 한 사람 집에 초대해도 되요?]

김장군의 딸인 소영은 그녀만의 특유의 애교로 아버지의 팔에 안기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그녀의 시선은 무뚝뚝한 채 신문만 펼쳐 보고 있는 윤대위에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들으라는 듯이 평소보다 한 톤을 높여 말하며 그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를 부르려고?] [아빠 사윗감. 어제 근사한 사람을 만났거든. 아빠도 아는 사람이야.] [누군지 말해봐라. 누군지 알아야 초대를 허락할지 결정할게 아니냐?] [보면 절대 실망 안 하실 거에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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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애교에 김장군은 벌써 넘어간 듯 했다. 27살인 딸애가 은근히 윤대위에게 맘이 있는 것 같아 불편하던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그 말은 그 동안의 걱정을 모두 씻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부르거라. 대신 아빠 마음에 안 들면 깨끗이 포기하는 거다?] [그런 게 어딨어요? 내가 결혼하는 건데...]

소영의 애교를 보며 은성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연락을 안 드린지도 오래됐는데... 걱정하시겠지... 대기업의 전무로 재직하다가 최근 정년퇴직하셔 어머니와 단둘이 서울의 외곽에 위치한 전원주택에서 생활하시는 아버지. 많은 말썽에도 사람은 밝아야 한다며 언제나 감싸주시던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맺힐 것 만 같았다 .

은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장군은 윤대위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곳에 온지 3일... 그녀가 여기서 한 일이라고는 윤대위의 감시하에 단순한 워드 작업이 전부였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뭐든... 찾아 낼 수 있는 건 찾아내야 하는데... 저 진득이 같은 윤대위만 없으면... 머리를 굴려... 머리를... 생각을 하란 말이야 안은성...

방으로 돌아와서 정신적인 피곤으로 은성은 침대에 엎드려 머리를 묻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 해]

갑작스런 윤대위의 목소리에 은성은 기겁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곳에 온 첫날 이후 그녀가 느끼는 그의 시선에 점점 부담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포로를 감시하는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불을 담아 그녀를 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대위의 눈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이 한낮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서늘함으로 굳어지는 듯 했다.

[무슨 일...]

이젠 그의 존재감 만으로도 두려워... 첫날 이후 손을 댄 적은 없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를 언제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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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가도, 심지어 식사를 할 때까지도 그는 항상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 삼일 후면 다시 본부로 돌아 갈 거야. 네 실력이 뛰어나서 그 이상 붙잡아 두는 건 무리니까... 희망을 가지는 건 무리겠지... 항상 내가 곁에 있을 테니... 생각도 하지마.. 이곳에 있는 동안은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그가 나가고도 은성은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동혁씨 제발... 내가 여기 있는 거 알기나 하는 거야? 밤이 되면 그녀 쪽에서 잠글 수도 없는 보조문이 제발 밤새 열리지 않기를 바라며 노려보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고 나면 어김없이 소리 없이 문일 열리고 괴로움을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하필 너지? 왜 너인 거냐고? 왜...]

소영이 초대한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은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미래의 남편 될 사람을 초대한 사람의 얼굴이 왜 저렇게 어두울까... 소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가끔씩 은성을 노려보는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힘들다... 내일이면 본부로 돌아가니... 그 때 생각하자.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아니야 먼저 내가 수집한 자료를 정리해서 넘기는 게 중요해 빼앗기면... 이-메일도 검색해야 할 텐데... 컴퓨터에서 빼난 것에 뭐가 들어 있을까... 히든-파일로 만들어 숨겨둘 정도면 분명 뭔가가 있긴 할텐데...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주방으로 몸을 감춘걸 보니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한껏 치장한 소영의 모습은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그런 소영을 넋이 나간 듯 쳐다보다가 문득 은성은 자신의 몸매를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 가슴도 부실하고... 울룩불룩하지도 않고... 이러니 동혁씨가 안고싶다는 말을 안 하지.. 나두 가슴확대 수술이라도 할까... 가슴이 무지하게 크고 탱탱해 보이네....

그렇게 넋 나간 듯 소영을 쳐다보는 은성을 보는 윤대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소영은 놓치지 않았다. 저 냉혈한을 저렇게 웃게 만들다니... 갑작스런 분노가 소영을 휘감자 들어서는 남자에게 보란 듯이 다정한 척 안기다 시피 인사를 하며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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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영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던 얼굴이 석회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녀의 시선... 방금 들어선 남자에게 고정이 되어 있는 시선을 따라 윤대위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자신의 끊임없는 시선에도 흔들림 없던 그녀가 방금 소영의 열열한 환영을 받는 남자를 보는 순간... 충격으로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다가 난간을 잡고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남자의 시선도 순간이지만 그녀에게 머물렀던 그 순간 비춰진 당황함에 표정이 흐려졌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윤대위의 머릿속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표... 목표가 있으면 견딜 수 있다는 그녀의 말... 혹시... 그녀를 견딜 수 있게 만들었던 목표가 .저기 저 강 동혁이란 말인가? 강동혁 그를 향해 끓어오르는 생소한 분노에 윤대위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악몽을 꾸고 났을 때 깨어나는 그 순간 나는 늘 그것이 꿈이었던 것에 너무 감사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일어나는 이 많은 일들이 꿈이길 바라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기에 깨어나도 변함없음이 너무 절망스럽다.

동혁은 놀라 서 있는 그녀를 보고도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소영과 식당으로 사라졌다. 마치 이제까지 그녀가 알던 동혁이 아닌 듯 했다. 내가 잘 못 본 걸까... 하늘하늘한 커텐으로 가져진 식당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그녀가 지난 10년 동안 질리도록 보아온 모습 그대로 였다. 그런 그가... 지난 3일 동안 한번의 연락도 없이 그녀가 사라졌는데... 이곳에 다른 여자의 미래의 남편 될 사람이라며 나타나다니... 그럼... 우리 둘에 약속은... 어른들 앞에서 한 우리들에 약혼식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단 말인가?

아닐 거야... 동혁씨는 .... 가는 금줄에 걸려 목에 매달려 있는 반지를 무의식중에 매만지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듯 아니라고만 외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너의 목표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군...]

갑작스런 윤대위의 목소리도 그녀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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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가 주세요 윤대위님. 지금은...]

흐느낌 때문에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은성은 문에 기댄 채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준호... 그게 내 이름이야.]

준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구부리며 앉아 눈 높이를 맞추었다.

[왠지 공평해진 기분이야...]

준호는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올리며 가볍게 끌어 당겼다. 은성은 힘없이 그의 넓은 어깨에 기대어 터져 나오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매달려 울고만 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동혁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온통 충격으로 창백해져 있던 은성에게 정신이 쏠려 대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윤준호... 그의 시선이 못 견디게 맘에 걸렸다. 그 자... 은성을 바라보던 그 시선...

부디... 언제나 처럼 절대적으로 자신을 믿어주던 그 마음으로 은성이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준호의 어깨가 축축히 젖어 오고 있었다. 강동혁 그의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를 향한 그 마음의 반 만이라고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면... 흐느낌으로 떨리는 어깨가 느껴질 때마다 준호의 마음도 슬픔으로 젖는 것 같았다.

[강동혁... 그 자가 죽으면 내게 맘이 돌려질까?]

높낮이 없이 뱉어 낸 그 건조한 한마디에 은성은 소영의 몸이 동혁에게 안겨 들 때보다 더한 충격으로 준호를 보았다.

[윤대위님 지금 한 말...] [준호... 네 입에서 그 이름이 불려지는 걸 듣고 싶어]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죠?] [살아있다면 마음 돌리기가 어렵겠지.]

준호는 백짓장처럼 하애진 은성의 턱을 치켜올리며 엄지손가락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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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매만졌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은성은 거칠게 그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그를 살리고 싶어? 그건... 네 행동에 달렸어. 사랑스런 아가야...] 짧게 그의 입술이 은성의 목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내버려둬도 어차피 네 사람이 될 건 아니지만... 후후..]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윤준호... 가만 두지 않겠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은성은 그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6장

을지포커스연습<<전쟁초기 정부위기 관리 및 연합위기 관리 연습-54년 유엔군 사령부 주도로 시작했으나 68년 이후 정부주관>>에 사용될 WAR GAME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은성은 작전을 짤 군사령부 전략팀과 프로그램밍의 실질 참여자인 전산실 및 외부참여자들 앞에서 프로그램에 필요한 소스인 무기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김중장과 윤대위의 시선이 번뜩이며 여전히 감시의 눈을 풀지 않고 있었다.

[육군은 육군본부와 3개 군사령부, 항공작전사령부, 특수전사령부와 이를 지원하는 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11개 군단. 49개 사단. 19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군은 주요 전력으로 56만여 명의 병력, 전차 2360여대, 야포 5180여문, 장갑차 2400여대 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군과 3군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수도권을 포함하는 책임지역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각 군은 군단사령부 및 사·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군의 기습 및 고속 기동 전에 대비하여 북한지역으로부터 수도 서울에 이르는 축선에 각종 전력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번 을지포커스에서는 이 1군과 3군의 전력을 이용 집중 훈련에 들어갑니다. 프로그래밍에 집중 투자되어야할 부분은 마일즈 훈련시 정확한 상황의 파악에 따른 신속한 전략의 변경과 작전의 지시 능력입니다. 마일즈 장비를 이용한 소부대 훈련은 실전과 유사한 상황하의 훈련으로 실제 피·아 교전 결과를 각개병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전장의 실상 체험과 개인 전투기술을 숙달 할 수 있는 과학과 장비를 이용한 전술 훈련입니다. 이번 을지포커스에서 적군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지는 이 마일즈 장비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면 됩니다. <<마일즈 장비-각종 화기에 레이저 발사기를 장작하고 장비 및 인원에 감지기를 부착하여 공포탄 및 레이져 사격시 레이져 빔이 발사되어 명중시 신호음과 섬광이 발생되는 훈련장비 : 작전 지휘 본부에서 순간순간 사망자수와 부상자 수를 파악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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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요지를 꼭 집어 설명하는 그녀에게 모든 사람들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준호의 입에 그도 모르게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엔 그녀가 언젠가 제거되어야 할 포로일 뿐이라는 사실이 망각되어 지는 것 같았다. 다만.., 그 망각되어지는 사실의 자리에 그의 여자로 만들어야겠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득 메꿔지고 있을 뿐이었다 .

이렇게 가까이 두고도 동혁은 그저 그녀를 보고만 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똑부러지게 브리핑을 하는 은성의 얼굴은 지난 10년 동안 보아온 얼굴 중에 가장 어두운 얼굴이었다. 제발... 오해 말기를... 그저 그렇게 바랄 뿐이었는데...

자신이 소영의 집에 들어선 순간 여린 은성의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 지 동혁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맘을 알려줄 기회가 좀처럼 그에게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윤준호의 존재가 더 동혁의 맘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흐뭇해하는 참모진들의 격려를 받으며 은성은 회의실을 나왔다. 지친다. 아무도 없는 그녀만의 공간에서 쉬고 싶다. 하지만 준호 그는 그림자처럼 언제나 그녀의 옆에 있었다.

[은성아]

동혁이었다.

동혁씨... 나 동혁씨 믿어... 이유가 있을 거야. 동혁씨가 그곳에 온 거. 은성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감히 그녀를 감시하는 준호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부름에도 은성은 눈을 내리 깔았다 나... 동혁씨 다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언제 다가왔는지 준호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은성의 어깨에 마치 연인처럼 팔을 둘렀다.

[오늘 브리핑 훌륭했어.]

대번 동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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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령님 계섰군요.]

서둘러 팔을 내리는 척 했지만 그의 손은 다시 보란 듯이 은성의 허리에 둘러졌다 . 그 거북스런 손을 밀어 내리려 했지만 준호의 차갑게 번득이는 눈빛을 보는 순간 은성은 그녀의 손을 다시 힘없이 늘어뜨렸다.

[윤대위 여긴 부대야. 그런 행동은 삼가 하도록] [시정하겠습니다. 소령님]

듣는 사람을 엄청 기분 나쁘게 만드는 한껏 비아냥이 가득한 투였다. 동혁은 그런 준호를 당장 이 자리에서 패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끌어 올랐지만 잠깐 파리해진 은성에게 시선을 줄 뿐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은성아... 조금만... 제발 조금만 견뎌 줘. 조금만... 제발...

윤대위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몸은 거칠게 벽에 몰아 붙여졌다. 쿵--하는 충격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지만 그 고통보다 지금 준호의 태도가 더 그녀를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준호의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 . 서있기 조차도 힘들 정도로 그녀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한번만 더 그런 눈으로 보면 강소령 제명에 못 죽을 줄 알아]

그의 얼굴이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와 음산한 목소리의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죠? 왜.. ] [바보 아니야?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모른 척 하고 싶은 거겠지? 안 그래 사랑스런 아가야... 이건 남자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거야. 여자를 안고 싶은...] 억샌 그의 몸이 그녀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밀어붙이며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덥쳤다. 순간 갑작스럽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소영이 들어섰다. 좀 전까지의 욕망으로 들끓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돌변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소영에게 돌아섰다.

은성의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흐느낌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만 그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고 말았다. 밖으로 뛰어 나가려는 은성에게 준호의 싸늘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행동 조심해. 누가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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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실로 들어서는 그녀를 반가움에 반기는 병사들의 얼굴이 걱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겁니까?]

울었는지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으며, 마치 유령이라도 보고 온 것 같은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은 그녀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 하지만 그 걱정스런 눈길에도 은성의 마음은 이 사람들 중에 있을지도 모를 김장군의 끄나풀이 누굴까 하는 의심뿐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니...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의자에 주저앉자 마자 전산실 문이 열리며 동혁이 들어섰다. 동혁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섰지만 은성은 그런 그를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안소위 할 말 있으니 내방으로 와]

그의 목소리...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그의 목소리를 듣자 애써 참고 있는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맘을 다져 먹고 은성은 되도록 냉랭하게 그게 말을 꺼냈다.

[지금은... 자리를 뜰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십시요] 순간... 동혁 뿐만 아니라 전산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은성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차갑게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언제나 장난끼 넘치며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던 그녀가...

은성이 나가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히는 순간 소영은 차가운 남자 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별일이군요. 준호씨가 사무실에서 여자랑 키스를 하다니...]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시비 걸러 온 거면 당장 나가.] [내가 저 볼품없는 여자보다 못한 게 뭐죠?] [글세... 못한 건 없겠지. 네 몸 상품 가치로 따지면 상당하니까... 강소령은 얼마 쳐준다고 하지?] [이... 이 나쁜...]

소영은 그를 향해 탁자 위에 놓여진 재떨이를 던져버렸다 . 하지만 재떨이는 그에게서 멀직이 떨어져 벽에 부딛치며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처음부터 그를 다치게 할 의도 없이 던져진 것이었기에 그 어설픈 행동이 오히려 준호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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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가. 난 잘난 네 아버지에게 개 취급당하기 싫으니까... 아마 지금도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내 심장에 총구멍이 날지 모르지. 안 그래?] [당신 잔인하다는 거 알아요?] [당연히 알고 있지... 좋게 말할 때 돌아가. 그 얼굴에 상처 나기 싫으면] [난 절대 당신 포기 안 해요.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쏠리는 거 지금은 봐주죠. 하지만... 그 여자들이 무사할거라고는 장담 못하겠군요. 당신에게 쏟고 싶은 분노를 그쪽에라도 돌려야 하니까요.]

소영은 준호 못지 않은 독기를 품고 그를 보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군. 대단한 집안이야. 해... 말리는 사람 없으니까....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소영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준호의 사무실 문을 부셔져라 닿으며 거칠게 밖으로 나왔다. '나쁜 자식... 언젠간 내 앞에 무릎꿇고 빌게 만들 거야. 네가 감히 날 거절해? 쥐뿔도 없으면서 감히 날 거절해... '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기회주의자. 언제부터인가 군인의 월급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옮겨지는 횟수가 잦아지고 골프회원권, 목 좋은 콘도 회원권, 그리고 웬만한 사람은 살 수도 없다는 대 저택이 그의 재산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지금의 부... 그런 아버지를 죽도록 싫어하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준호의 입에서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소릴 듣는 순간 땅속으로 꺼져 사라져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은성아... 날 보고 이야기 해. 날 보란 말이야.

[글세 여기서 하긴 곤란한 이야기라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은성의 차가운 목소리 비해 그의 목소리는 다정함이 묻어나는 듯 했지만 얼굴만큼은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령님...]

달깍하고 문이 열리고 준호가 전산실로 들어섰다.

[급하신 일 아니면 나중에 찾아 뵙겠습니다. 저는 일이 너무 밀려서요...죄송합니다. ]

바쁜 척 책상 서랍을 뒤지던 그녀가 다시 작은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텅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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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을 보는 순간의 그 당황함과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에서 동혁은 서서히 준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혁의 얼굴이 분노로 차갑게 굳어 있음을 준호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짭게 경례를 해 보였지만 동혁은 꼼짝도 않고 그를 노려 볼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문 옆에 서 있었기에 그를 향해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준호의 옆에 섰을 쯤 동혁은 낮은 목소리로 그만이 들리게 조용히 한마디했다.

[게임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 [누가 포기만 하면 게임은 아주 단순해지죠. 소령님] [네가 무엇에 손대는지 안다면 그 가면 같은 얼굴이 그렇게 태평스럽지 만은 않을 거야. 윤대위 몸 조심하라고]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잡아 놓은 물고기를 구경하는 게 더 재밌어서 몸조심에 신경 쓸 겨를이 없군요] [잡아 놓은 물고기의 가치를 안다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지. 그게 현명한 사람이니까... 보석은 때론...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숭고해 보이거든... 그게 그 물고기의 가치야] [보석은 어느 누가 가졌냐에 따라 가치가 틀려지죠. 보기만 한다면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없죠. 잘 손질을 해줘야 그게 보석이죠. 사랑스런 손길로 애정을 담아서 말이죠...] [그 손질이 잘 못 되면 영원히 빛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럼... 새로운 보석을 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소령님] [네 목숨은 내가 잠시 너에게 맡겨두지. 알겠나? 윤대위] 동혁이 사라진 문을 향해 준호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동혁을 그렇게 보내고 은성은 그를 향한 미안함으로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죽이고 싶도록 미운 준호는 전산실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느긋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가 저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시간이 얼마나 될까... 길어야 5분... 충분해... 시작하자. 이러고 넋 놓고 앉아 있을 시간 없어.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든 간에 알아내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 거야... 두고봐. 내가 너희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텅 비어있는 책상... 그 많은 그녀의 자료들을 누가 가져갔을가... 동혁? 아니면 준호?

[소위님 이거 여기서부터 자꾸 버그가 잡히는 데요... 이 시점까지 오면 미사일이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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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상병이 그녀에게 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을 가지고 빨간 줄로 표시해 놓은 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알고리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 [알고리즘엔 문제가 없는데요.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 됐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 ] [그럼 프로그램에서 AND 와 OR를 검색해봐. 두 단어를 써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썼으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예... ] [혼자 하지마. 혼자 하면 같은 딜레마에 계속 빠지니까..] [예 소위님,]

김상병이 자리로 돌아가자 은성은 준호의 눈치를 살피며 이-메일 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찾은 히든의 압축을 풀기 시작했다. 압축이 풀리는 그 짧은 시간이 은성에게는 너무나 길고 초조하기만 했다. 완료 메시지가 뜨고 같은 이름으로 붙여진 파일명에 1, 2, 3.... 이렇게 숫자만 달리한 수많은 파일들이 내용을 확인해 달라는 듯 이 배열되어 있었다.

디데이? 이름도 촌스럽게 지었군. 파일명이 디데이라고... 뭔가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되지... 김장군 그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얼굴에서 기름끼를 쫙 빼는 돈 안는 드는 다이어트를 내가 시켜주지 감방에서 말이야...

준호가 신문을 접고 일어서자 은성은 얼른 화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작은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 그녀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사람들의 시선에도 볼테면 보라는 듯이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속삭였다.

[살살해... 내 여자 몸 축나는 거 그냥 두고 볼 만큼 나 그리 맘이 넓지 않으니까... 그 힘 아껴서 나를 위해 쓰는 게 어때?]

갑자기 은성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전산실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그에게 한마디하며 얼굴을 끌어 당겼다.

[지금 있는 여자들을 다 정리하면 한번 고려해 보죠. 그러기 전엔 절대 제 침대에 한발도 들여놓을 수 없어요. 윤대위님. 하지만 이건 서비스라고 해두죠]

은성은 그의 입술에 어린아이의 뽀뽀처럼 가볍게 한번 툭 치듯 입술을 부딛 치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시켰다. 당황한 준호는 한참을 어쩌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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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야리한 시선을 피해 자신의 사무실로 도망치듯 돌아와 버렸다.

하하!~ 멋지게 당했군...

준호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은성은 자신의 입술에 더러운 것이라도 뭍은 것처럼 휴지를 뽑아 박박 문질렀다. 그런 김상병이 아까부터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김상병] [네 상병 김종철] [너도 뽀뽀해 줄까? 하라는 일은 안하고 왜 딴 짓이야?] [예? 아닙니다.]

종철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급히 돌려 열심히 일하는 척 했지만 좀 전의 그 상황이 그에겐 너무 쇼킹했다. 이런 공공장소에서... 그런 장면을 연출하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안소위 정말 대단한 여자야. 그런데... 강소령님은... 강소령과 사귀는 거 아니었나?

곁눈질로 안소위를 훔쳐보는 종철의 시선엔 온갖 궁금증으로 안달이 나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벙찐 준호가 전산실에서 사라졌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알아낸 것은 실로 엄청난 것들이었다. 그 동안의 무기... 실제 구매 대금과 무기의 수가 맞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그 사이에 비는 금액은 당연히 김장군의 호주머니로 들어갔겠지? 그래... 그 으리으리한 집을 생각해봐 그걸 유지하려면 월급 가지고는 턱도 없지... 그리고 그녀가 알아낸 또 하나의 사실은 이미 군내부에서도 공공연하게 형성되어있는 파벌에 힘 실어주기의 일환이었다. 동혁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여든 육사출신의 정통파 수뇌부와 김중장을 중심으로 모여든 학사출신 ROTC출신, 그리고 삼사관학교 출신, 이 무기 거래의 부정을 교묘히 동혁의 아버지에게로 뒤집어씌우려는 듯 꾸며낸 가짜 서류들이 진짜인냥 워드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빼내서 기무사에 넘길 수만 있다면... 훈련까지 1주일도 안 남았어. 아마 그들은 훈련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이 일을 꾸미겠지.. 하지만 내가 이 모든 기밀문서를 가졌다는 걸 모르는 이상 아직까진 내가 유리해.

다시 준호가 문을 열고 전산실로 들어섰다.

저 작자부터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정말.... 안은성 머리를 굴리자. 당하지만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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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죽어 있는 거 너 답지 않아. 그는 절대 동혁에게 손대지 못 해. 김장군이 뒤에 있다고 해도 그가 가진 파워로는 동혁의 머리카락 하나 대지 못하지... 그의 질투심을 이용해 이성을 잃게 만들어 볼까? 재밌겠군...

준호가 다가오자 은성은 자연스럽게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야근하려면 식사를 해야 할텐데... ] [장교식당에서 그냥 했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많습니다. ] [그래... 같이 갈까?] [예 대위님]

은성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은성은 이제까지의 경계의 표정 대신 그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호의 심장이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저렇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 미소가 지금은 그를 향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장교식당에 들어서면서 은성은 재빨리 동혁이 있나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식당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녀의 맘을 애닯게 했다.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

[식사하러 온 모양이지? 잘 됐군. 같이 먹지]

동혁은 은성을 향해 늘 그녀를 향해 지어주던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성은 전산실에서 그에게 보여줬던 싸늘한 태도를 접고 그에게 사랑을 담아 미소를 보여주었다. 준호의 손이 보이지 않게 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세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갑자기 은성이 동혁에게 달려들어 거칠고 정열적으로 입술에 키스를 했다. 100여명 넘는 장교들이 몰려 있던 식당은 두 사람의 그런 열정적인 행동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은성의 갑작스런 행동에 잠시 놀라던 동혁은 지난 며칠동안 그녀의 안전에 대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던 마음을 은성의 입술에 쏟아 붙고 있었다. 그의 팔에 안겨 있는 자신의 파랑새 은성... 이제서야 겨우 안전한 그의 팔 안에 그녀를 가두고 안고 있지만 그 오래 가지 못할 안전 때문에 동혁의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뿐인 그의 어린 연인을 위해 그가 보여줄 있는 모든 열정을 여기서 보여주고 싶었다. 안심하라고... 은성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믿으라고... 동혁은 진한 키스로 그렇게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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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은 그 팔을 풀며 은성의 눈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동혁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며 이슬을 닦아주었다. 그런 그의 손에 살포시 은성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아야 하는 그 끔찍한 상황에 멀어지는 그의 손끝에 은성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동혁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떠나는 순간 세게 움켜쥐어졌다.

걱정하지마... 곧... 널 안전하게 해줄 거니까...

무언의 말에 은성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7장

[후후!~ 너란 여자 말이야. 내가 너무 과소평가를 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왜일까?]

준호의 사무실에 나란히 마주앉아 은성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다리...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기도 해요. 준호씨] 그녀의 입에서 준호의 이름이 불려지자 그의 몸이 움찔했지만 워낙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라 그런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오더니... 키스를 할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

[경고 했을텐데...] [하루에 두 남자를 상대하는 게 좀 버겁긴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겠네요] [자꾸 말을 돌리려 하는데... ] [아--- 깜빡 했는데... 디데이 아시죠? 디데이 원에 뭐가 있었더라... 생각이 잘 안 나네요... ]

준호의 온몸이 긴장으로 뻗뻗하게 굳어졌다 . 설마 하는 눈빛이었다.

[너무 눈에 띄게 빼먹으면 나 같은 피래미에게 까지 꼬리가 밟히게 되어 있어요. 너무 길었죠] [뭘 가졌지?] [전부] [그래,.. 명을 재촉하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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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공이 뭔지 아시죠? 내가 사라지면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아 제가 말씀 안 드렸죠?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었어요. 일정시간이 지나면 문서들이 하나씩 모르는 사람들의 컴퓨터로 배달이 되게요. 뭘까 하고 궁금하며 열어보면... 대부분이 삭제해 버리겠지만 호기심 왕성한 누군가에게 걸리면 기사화 되는 건 시간문제겠죠..] [이젠 협박인가?] [나도 살고 싶으니까요. 지금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거든요. 난 동혁씨와 결혼해서 그를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거구요] [그는... 소영이와 결혼할 거야] [아뇨... 절대.. 그렇게 되진 못할 거예요. 그는 내 사람이에요 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엔 모든 게 세상에 드러날 거예요. 내가 죽는다 해도... 그만은 다치지 않게 할 거예요]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다른 여자의 팔에 감싸여 들어온 남자를 보고도 어떻게 이 여자는 그를 향해 이런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거지?

[전 이만 전산실로 가봐야겠어요. 제가 필요하시면 그리 연락 주세요. 하지만 워낙 바빠서 불러도 오지는 못할 거예요. 미사일이 자꾸 사라져서 살려놔야 하거든요. 시뮬레이션 WAR GAME 프로그램은 매년 말썽이라면서요? 올해는 제가 그 말썽을 없애 육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싶네요. 그리고 뭐... 잘 하면 최초의 여자 장군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럼 전...]

속사포처럼 쏟아대는 여자의 말을 준호는 멍한 얼굴로 듣기만 하다가 그저 나가는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뛰 그의 명민한 머리가 재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모든 게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가 한말 ... 사실일지 모른다. 거짓협박이라고 하기엔 너무 당당했다. 아깝지만... 제거해야 하는 것일까...

전산실에 돌아온 은성은 자신의 모든 파일을 인터넷 하드에 저장을 하고 자신의 컴퓨터에서 모든 흔적을 지웠다. 그래 흔적을 찾았다 해도 그 방대한 인터넷에서 그녀가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기란 서울에서 이서방 찾기나 마찬가지지...

[건질 만한 것 없었나?] [예 소령님. 아직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그래... 그리고 한 군데 더 설치해. 윤준호 대위 방에. 조심해서 해.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까] [예 소령님] [그리고... 윤소위 한테 사람 하나 붙여..] [예... 참 그리고 조금 전에 안소위님 컴퓨터가 인터넷에 접속이 된 걸로 확인 됐습니다. 조사할까요?] [그래... 뭐든 찾아내는 대로 자료 저장하고 흔적 남기지 말고 다 지워. 안소위 책상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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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깨끗이 청소해 알았지? 안소위가 가진 자료 모두 치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작전 2조 소집 명령한다고 연락 취하고] [예]

윤대위... 김중장 간수 잘해라. 전쟁 놀이 시간이다.

윤대위에게 위협반 협박반을 하고 왔지만 은성은 지금 두려움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위협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언제 어느 순간에 그녀의 목숨이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 이젠 어떻게 해야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머리를 굴리자... 만약 우리 전산실 안에도 그자와 협력하는 자가 있다면... 그래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는 전산으로 간단한 숫자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걸리지 않고 해먹었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누구일까?

그래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부터 차곡차곡 살펴보면 되겠지... 여기에 가장 오래 근무한 사람은 누구지? 사무실 안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일병 김인우가 시끄럽게 울려대던 전화를 받고는 사색이 되는 얼굴로 일어서서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무슨 일이지? 집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다고 연락이 온 건가? 아... 지금 딴 생각 틈 없어. 하지만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지 얼굴만 보고 누군지 찾는 다는 게 가능하기나 하겠어...

김일병이 한적한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악스런 힘에 밀려 정신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순간 찰칵하는 안전핀이 풀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사...사... 살려주세요] [이 자식이 왜 말은 버벅대고 그래..? 짜증나게...] [전 시키는 대로했을 뿐이에요] [일어서 임마.]

군화에 옆구리를 한대 채이고는 김일병은 겁을 잔뜩 먹은 채 계급장도 붙어있지 않은 두 명의 남자에게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두 눈을 가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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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한 공기가 훅--하니 올라오는 걸 보니 지금 김일병이 향하고 있는 곳은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인 것 같았다. 그 조용한 곳을 눈을 가린 채 걸어가고 있는 지금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커다랗게 공명이 되어 울릴 뿐 두렵도록 조용한 적막만이 김일병의 공포심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듣기 싫은 끼---이---익 하고 울리는 철문 소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김일병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애원조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자식 완전히 쫄았잖아... 야... 우리가 사람 잡아 먹는 귀신으로 보이냐? 왜 아까부터 살려달라고 지랄이야 지랄이....] 눈이 가려진 김일병의 복부를 누군가가 거칠게 걷어차자 순간적으로 내장의 어딘가가 파열됐는지 입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저 나왔다.

[야... 살살해... ] [짜식이 신경을 건들잖아...]

거칠은 누군가를 같이 온 한사람이 달래는 듯 김일병에게서 멀리 떼어놓았다.

[순순히 말 할 생각은 있는 거지?]

김일병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난... 난....]

그리고는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자식이 재수 없게 눈물은 왜 짜고 난리야] [그만둬. 가만히 있어 보라구] 한대 더 걷어 찰 것처럼 하던 그가 멀찌감치 그에게서 떨어졌다. [엄마 수술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 다 알고 있었어요. 저희 어머니 병명도, 엄청난 수술비도.... 살리고 싶었어요. 저희 엄마 살리고 싶었어요]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길일병은 거의 통곡에 가깝게 울어 대고 있었다.

[녹음 시작해 ] [예 소령님]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엄마의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해서... 망설였지만 그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고... 어떤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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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더니... 매달... 보고서를 주는대로 입력만 하면 된다고... 정말 저는 그게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 [너에게 보고서를 넘겨준 사람이 누군데?] [군수 참모부의 이정호중위입니다. ] <<군수참모부란? --군수물자의 조달 및 보급 등 군수품에 대한 여러 가지를 책임지는 부서>>

[됐어. 다음은 이정호 중위야. 목은 서서히 조이는 게 더 두렵게 만들지... 팔다리 수족을 모두 잘라 냈을 때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지] [김일병은 어떻게 할까요?] [돌아가면 당할게 분명하니까... 사고를 위장해서 안전가옥에 데려다 놔. 아 참... 그리고 김일병 어머니 병원도 옮겨. 김장군 모르게...] [예.. ] [당장. 지금부터 한시간 이내 모든 상황을 끝낸다. 보고 해] [알겠습니다.]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이정호 중위님] [뭐야 이자식들... 너희는 위아래도 없어? 소속을 밝혀!!] [죽기 싫으면 조용히 하시지. 우리? 계급 없어. 너보다 더 높을 수도 혹은 낮을 수도 있지... ]

비아냥거리는 그들의 말에 순간 이중위는 뭔가 잘못 되 가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젠장 걸린 거야? 설마 내가 옴팡 뒤집어쓰는 건 아니겠지...

[너희들 어디 소속이야?] [이게 그래도 입을 나불거리고 있어. 재수 없게... 난 너처럼 입만 살은 놈 보면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서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다 쏟을 것 같거든]

그 성질 급한 최중사가 이중위를 안 죽을 만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만...] [그만? 누구 맘대로 그만이야? 이 자식이 아직도 지가 중윈줄 알고 있나... 이런 자식은 확 밟아 죽여버려야 해. 총알도 아까워] 최중사에게 발로 정신없이 걷어 채이던 이중위는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좀 심한 거 아니야?]

최중사에 비해 매우 냉철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문중사가 최중사를 향해 꾸짓 듯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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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뭐가? 이런 자식 때문에 팔 병신 다리 병신 된 사람이 몇 명인데... 저도 다리 하나쯤 없어져 봐야 그 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이런 놈들은 말로 해봤자 소용없어.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도 찝찝할 정도야. ] [소령님 오기 전에 정신이나 차리게 해] [물 한빠게스 퍼다 부으면 정신 차릴 거야.] [빠게스가 뭐냐 빠게스가...] [빠게스가 빠게스지 뭐냐 난 너 처럼 고상한 말 못한다.] [물 한양동이라고 해. 무식이 철철 넘친다 임마] [그래 너 잘났다. 유식한 놈이 왜 이런데 쳐 박혀 이런 일이나 하고 있냐?] [너 같은 녀석 욱하는 성질에 사고치는 거 미리 막으려고 그런다. 됐냐?]

재수 없는 놈. 지나 나나 특전사 출신인 거 뻔하면서 잘난 척은 혼자 다해...

뭔가가 이중위의 턱을 톡톡치는 느낌에 게슴치레 눈을 떴지만 눈 위로 바로 놓여진 백열등에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도로 감아버렸다.

[누구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가 시킨 일이지?]

그래도 이중위는 눈을 꼭 감고 있고 눈만큼이나 입도 꾹 다물고 있었다.

[차명 계좌에 중위 월급치고는 꽤 많은 돈이 들어있더군. 차도 아주 좋던데...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아파트도 42평으로 옮기셨던데... 집들이는 언제 할거야?] [말로는 안되겠는데요 제가 손 좀 볼까요?]

좀 전의 그 우악스런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이중위의 몸이 바싹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병신만 만들지 마라]

이런 제기랄....

[자...잠 헉--]

이중위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이미 최중사의 커다란 발에 걷어 채이고 있었다.

[퍽-- 퍽-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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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으--헉...]

그 짧은 잠깐동안의 시간동안 이중위의 온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말... 말 할께]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군... 아 자식아 이제서야 상황판단이 되냐? 진작에 불었으면 이렇게 안 얻어 터졌을 거 아니야... 멍청한 놈] [누구지?]

협박하고 몸으로 폭력을 가하는 그 무식한 놈보다 싸늘한 어투로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사람을 죽여버릴 것 같은 이 사람이 이중위를 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공병감실 최소령입니다.] <<공병감실-시설 계획 수립 및 집행 군용 부동산을 관리하는 부서>> 하나씩 족치기 시작하면서 드러나는 연결 될 고리들에 동혁은 서서히 간단히 무기에 관한 비리 이상의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8장

[전산실 김일병이 사라지고... 군수참모부의 이중위도 사라지고... 기무사에서 시작했다 이거지...]

김장군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강소령의 약점이 뭔지 알아봤나?]

윤대위는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자네 요새 왜 그래? 전보다 일 처리도 늦고 행동도 느려지고... 영 맘에 안 들어] 김장군은 책상 위에 있는 식은 커피를 물 마시듯 한번에 털어 마셨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설치더니... 젠장 할... 그 계집애 제거해. 총기 오발사고를 가장하던지 알아서해서 시선을 딴 데로 돌려. 막바지에 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알아들어? 그 계집에 없애버리라고]

차가운 얼굴로 묵묵부답인 윤대위를 짜증스럽게 쳐다보다가 김장군은 이내 소리를 질러버렸다.

[계집이 그년 밖에 없는 거 아니니까 ] [안소위를 이용하면 강소령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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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야? 강소령은 우리 소영이와 만나고 있는데...] [장군님도 자식일 앞에서는 판단이 흐려지시는 군요. 아쉬울 것 없는 강소령이 갑자기 소영씨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강소령이 소영씨와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조각이 맞춰진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준호의 말에 김장군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 했다.

[그래서... 자네 계획이 있다는 건가?] [물론 입니다. 강소령의 최대 약점. 그건 바로 안소위입니다. 안소위가 살아 있는 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걸 이용해야 합니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한번만 더 자넬 믿어 보지. ] [먼저 강소령의 시선을 흐려놔야지요. 그럼 강도가 한 단계 낮아질 것입니다.]

[밖이 왜 이리 시끄러워?] [중학교 애들이 병영 체험하러 왔어요. 어제] [훈련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애들은 왜 불러들인 거야? 짜증나게...] 김상병은 안소위의 괜한 짜증에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제네들 어디 가는 거야?]

창가에 붙어 서서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는 사열을 맞춰 움직이는 학생들이 향해가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김상병에게 물었다.

[훈련장요. 수류탄 훈련하는 거 견학한데요. 비디오 촬영까지 해서 육군 홍보자료에 쓴다고 준비가 장난 아니에요] [수류탄? 지금 수류탄이라고 했어?] [예.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야. 나 찾으면... 훈련장에 있다고 해 알았지?] [저... 저...소위님.. 소위님...]

그러나 이미 은성은 밖으로 바람처럼 뛰어나가 뒤였다. 그녀가 숨이 차도록 달려서 간 곳은 무기 저장고였다. 최병장을 서둘러 찾아 훈련장으로 가져간 수류탄의 이름을 알아보고 그녀는 거의 사색이 되어 훈련장을 향해 달려갔다. 훈련교관들의 설명을 들으며 얌전하게 앉아 있는 중학생들... 처음 보는 실제 무기들에 신기한 듯 눈까지 반짝이며 학생들은 교관들의 시범에 푹 빠져 있었다.

[자 보는 바와 같이 수류탄의 무게는 약 400∼900g 정도 되며 신관, 폭약, 탄체로 이루어져 신관이 작동하여 2∼5초 에 도화약이 타면 폭약에 점화가 됩니다. 이 수류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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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점화식으로 던지는 순간부터 신관이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누가 한번 직접 해보겠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제발 틀리길 바랬지만 대표학생으로 나온 학생이 잔뜩 얼어 수류탄을 들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보고 은성은 교관을 향해 달려갔다. 수류탄을 멀리 던지려는 학생들을 향해 거칠게 달려오는 안소위를 보고 교관도 놀라고 있었으며 학생 또한 그런 그녀를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안돼. 던지지 마]

정상대로 라면 2∼5초 가 지나 터져야겠지만 불량이 많은 이 수류탄은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공중에서 폭발이 자주 일어나 많은 병사들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제발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달려드는 순간 놀란 학생의 손에서 수류탄이 떨어졌고 학생을 향해 달려가던 은성은 재빨리 그 수류탄을 집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 순간 거칠게 그녀의 몸이 누군가에게 밀쳐지면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머리가 단단한 땅바닥으로 부딛쳐 버렸다.

아... 머리야... 그런데 그녀의 얼굴위로 뜨거운 액체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녀의 몸 위에 있는 무거운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그러나 그녀에게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은성의 온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설마... 동혁씨?

[동혁씨?]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뜨겁게 다시 떨어진 또 한방울의 액체... 붉은 액체... 설마...

[비켜요..빨리... ]

의무병들이 몰려오고 그녀의 몸 위에서 강소령을 내려 들것에 싣는 동안 은성은 충격으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

[안돼... 나도 가겠어] [소위님도 같이 가세요. 다친 곳이 없나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니 강소령을 따라가겠다고] [됐다 위생병. 안소위는 내가 병원으로 데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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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등뒤에서 들려온 윤대위의 목소리에 은성은 화가나 거칠게 돌아섰다.

[아니요. 전 강소령님은 따가 가겠습니다. 윤대위님의 친절은 필요 없습니다.] [안소위. 지금 자넨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야. 강소령님은 무사할 테니 자네도 치료를 받아야지.] [필요 없다고 말씀...]

갑자기 윤대위가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그녀를 자신에게 바싹 끌어당겨 음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요즘은 의료사고도 빈번하지 아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쁜 놈.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절대로... 이가 다 부서질 것처럼 앙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으며 들것에 멀어져 가는 강소령의 모습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윤대위를 노려보는 은성의 시선에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 [내버려둬요. 살이 썩어 문드러지든 그게 윤대위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독기를 가득 품은 눈으로 윤대위를 바라보는 은성은 동혁에 대한 걱정으로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의무실을 뛰어나가려는 그녀를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는 준호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이 나쁜 놈아. 이거 놔] 준호에게 붙잡힌 팔을 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 내기란 그녀에겐 너무 역부족이었다.

[군의관 뭐해? 빨리 진정재 주사해] [예 대위님] [필요 없어. 저리 가. 동혁씨에게 갈 거야. 너도 한패지? 너도 한패거리지? 나쁜 놈들... 다 꺼져버려 다..]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은 사이 군의관은 재빨리 그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맞고서도 한참동안 동혁에게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그녀를 보면서 준호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10여분의 시간이 흐른 뒤 은성은 약효가 온몸으로 퍼졌는지 서서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사이를 틈타 여기저기 생채기처럼 나있는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자는 모습은 조금 전에 보였던 살기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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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퍼 보였다.

[군의관 잠깐 나가 있어] [예]

많은 생각을 했다. 왜 너인지... 왜 네가 강소령의 연인인지... 만약... 네가 강소령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을... 왜 하필 너인 거야. 왜 하필 사랑이란 걸 처음 느낀 대상이 너 인 거냐고... 넌 대답해 줄 수 있어? 지금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감정을 너는 설명할 수 있냐고... 알고 있다면... 대답해 줘.

잠든 그녀의 입술에 준호는 절실하게 느껴보고 싶었던 그 입술을 도둑처럼 몰래... 그렇게 탐할 수 밖에 없었다.

[은성이는...?]

수류탄이 폭발할 때의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던 동혁은 깨어나자 마자 은성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어서 부대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 ] [저... 그런데... 윤대위가 같이 있습니다.] [운전병 불러.] [소령님] [입 닥쳐]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혁은 자신에게 입혀져 있는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그녀가 있는 부대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의무실로 달려가는 동혁을 다들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동혁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한 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 재쳤다. 준호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 그런 동혁을 맞이했다. 그런 준호를 동혁은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날리며 죽일 것처럼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런 동혁의 공격에도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 맞아 죽었을 지도 모르게...

[진정하십시요 소령님. ] [저 자식... 당장 여기서 끌어내. 내 눈에 안 띄게 말이야] 군의관과 위생병들은 서둘러 준호를 부축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파리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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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있는 은성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동혁의 가슴이 뭉클하면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가슴이 아려오고 있었다.

언제나 지켜주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랜 시간 자신을 기다려주고, 자신이 이 자리에 올 수 있겠금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었는데.... 그런 그녀를 이런 위험에 노출시켜 버린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은성아...]

지혈하고 붕대를 감아 놓았던 상처들이 다시 터져 여기저기서 붉은 기운이 베어 나오고 있었으나 동혁은 은성에게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은성아... 날 사랑한다면 제발... 네 자신을 아껴 소중히 해줘. 그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말고...

9장

[강소령님 전화 받으십시요] [급한 거 아니면 다음에 하라고 해]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그 한마디에 동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은성을 보면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군의관] [네 소령님] [의식 돌아오는 대로 연락해. 그리고 윤중위 출입 못하게 해. 명령이다. 어길 경우 최전방으로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해] [예]

※준호사무실

퍽!

[이 자식 진작에 없애버리라니까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부감사라도 나오면 어떡할 거야? 왜 일을 이따위로 크게 만들고 있어. 방송사에서 동행취재 나온 거 몰라? 이 개자식. 요즘 정신상태가 썩어 먹었어. 꺼져. 당분간 행동 잘하고. 2틀 뒤 작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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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군의 거친 군화발에 준호의 얼굴 여기저기가 피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정말 개 같군. 복날 맞은 개 같아. 여기저기서 먼지가 나도록 얻어터지기만 하는 군. 사무실 바닥에 뒹굴며 맞아대던 모습이 여름날 아이들의 부풀이 대상이 된 개 같았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원본 회수 못했습니다.] [죽여버려] [원본은 회수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럼 이틀 내로 회수해. 안 그러면 너도 죽어] [에]

바닥에서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준호를 경멸하듯 쳐다보고 김장군은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뒤 밖에 있던 소위가 걱정이 되었는지 뛰어 들어와 준호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의무실에...] [나가] [대위님] [나가!!!!!]

은성의 머리맡에 동혁이 두고 간 듯한 쪽지가 놓여져 있었다. 준호는 그 쪽지를 펴면서 의자에 앉아 차분히 읽어 내렸다.

[기다리다가 간다. 연락해. 그리고 이젠 날 위해서라도 네 몸 좀 아껴라. 10년의 기다림을 헛되게 만들 작정이니? 사랑한다]

10년이라고 10년의 시간동안 다져진 믿음이라... 그걸 내가 깨주겠어. 어떤 굳은 믿음도 질투 앞에서는 무너지게 되어 있지. 동혁이 남긴 메모를 구겨 휴지통에 집어넣고 준호는 워드로 작성한 작은 메모를 다시 그녀의 머리 맡에 놓아두었다.

머리가 멍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동혁... 그이는 어떻게 된 거지? 갑작스럽게 몸을 벌떡 일으키자 여기저기 쑤시고 결렸다. [일어났나 소위?] 군의관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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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령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질문에 군의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다녀가셨어. 자네 깨어나는 것보고 가려고 하시던 거 같았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 [많이 다친 건 아니구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해. 그리고 이거 두고 가신 거야] 곱게 접혀진 쪽지 하나를 받아 들고 은성은 거기에 적힌 내용을 살폈다.

R-호텔 3045호 금요일 8시. 기다릴께. 동혁

비슷한 시간차를 두고 준호는 선영의 화장대 위에도 같은 메모를 남겨 두었다. R-호텔 3045호 금요일 7시 50분 기다릴께 준호

오늘은 이상하리 만큼 감시가 소홀하다. 찰거머리 같던 준호도 좀체 보이지 않는다. 은성은 준호가 보이지 않는 사이에 그녀가 숨겨둔 인터넷 주소와 화일명 그리고 그 화일에 비밀번호까지 암호로 만들어 쪽지에 적었다.

주소:16.15.16.4.5.19.11 암호:4.15.14.7.8.25.5.7 화일명:4-4.1.25 내가 가진 그들의 계획 원본 파일이야. 만약을 대비해서 암호로 만들었어. 행운을 빌어 준호씨

준호의 감시를 벗어나 은성은 택시를 타고 동혁이 적어둔 호텔로 향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 위험 속에 동혁 혼자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동혁이 적어준 객실 방문 앞에서 길게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한번... 다시 또 한번... 다시 세 번째의 벨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듯 해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안에서 나온 사람을 보고 은성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안소위께서 여기까지 웬일이죠?] [그러는 소영씨야 말로... 왜 여기에...] [누구지?] 소영의 등뒤로 동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소위가 왔는데요] 소영의 대답에 동혁의 얼굴이 잔뜩 긴장이 된 채로 급하게 문 앞으로 뛰어 나왔다. [은성아...]

[다... 다음에... 아니.. 아니 미안해요.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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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샤워를 했는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샤워차림의 동혁. 처음 동혁이 선영과 김장군의 집으로 들어설 때도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그를 믿었었는데...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왜 그가 선영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까지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인지... 무얼 보여주기 위해... 뭘 확인시켜주려고... [은성아] [듣기 싫어. 말하지 마.] [오해하지 마] [어디까지가 오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은성아] [듣고 있기가 거북하군요. 그만 가주세요 은성씨. 동혁씨는 저와 결혼할 사람이에요] 문 가에 서 있던 선영이 은성을 향해 얼음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처럼 차갑고 비꼬듯이 말을 했다. [안소위가 여기 와서 끼어 드는 게 오히려 그림이 더 이상해 보인다는 거 알기나 하는 거예요?] 은성은 할 말을 잃었다. 선영이 너무도 결혼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다. 그 동안 한번도 동혁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가 육사 생이던 시절 중학생인 내가 정문 앞에서 기다리며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며 힘들게 할 때도 동생취급이었지만 이렇게 믿음이 흔들리도록 만들진 않았었다. 3년이란 긴 시간동안 웨스트포인트로 날아갔을 때도 은성은 그를 믿었다. 돈 많은 교포 여자를 만날 수 있었겠고 혹은 은성 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연인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그 기간 동안에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온전히 그녀의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에 와서 다른 여자의 입에서 당당히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김장군의 딸에게서... 어떻게 그럴 수가...

선영의 집에 다녀간 뒤로 은성에게 보여준 모습들이 전부 위선이었던 거야? 은성의 시선이 다시 한번 동혁에게 머무르는 순간 선영의 손이 보란 듯이 동혁의 팔에 둘러졌다. 뿌리치지 않는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내가 보고 있는데 뿌리치지 않는다.

[제가... 실례가 많았군요] [은성아] [동혁씨 하려던 이야기 마저 해야하지 않아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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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잘 가세요 안소위. 윤대위는 잘 있죠? 요즘 두 사람 가까이 지낸다고 소문이 짜하던데... 잘 해봐요. 우리 집에서 지내는 사람이라 잘 아는데 괜찮은 사람이에요. 준호씨] [남의 애인까지 만들어주려는 배려가 참 깊기도 하군요.] 돌아서서 가는 은성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팔이 뻗어지는 동혁을 선영은 힘을 주어 붙잡았다.

[흔들리지 마세요 강소령님. 어디까지나 안소위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동혁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며 선영은 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 동혁을 위해 술을 한잔 따랐다 . [하려던 이야기 마저 듣고 싶어요] 그에게 선영이 컵을 내밀자 동혁은 말없이 받아 들고 길게 남김없이 들이켰다. 선영은 그의 촛점 없는 시선을 마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모습도 저럴까... 내가 준호를 떠올릴 때마다 내 모습도 동혁과 같을까...

[윤대위가 당신과 은성을 이곳으로 다 오도록 만든 모양이군. 내가 이 호텔에 묵으며 세미나를 하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래... 그랬단 말이지] [강소령님께 협조하는 대신 준호씨 내게 주세요] 선영의 말에 동혁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 선영을 보았다.

선영 그녀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나 있는 것일까?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고는 있소?] [물론이에요. 사람들 다치는 거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요. 준호씨 아마... 이번일 끝나면 대표적으로 제거 당할 거예요. 아버지는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죠] [난 당신의 도움 없이도 이미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소. 지금 시작해도 얼마든지 모두 잡아들일 수 있지] 그 말에 선영이 적잖이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선영은 두 손을 비틀듯 꼭 쥐고 동혁을 똑 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안소위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동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지어졌다.

김장군의 딸 선영은 김장군에 비해 협상에는 약한 듯 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뭔가를 얻으려면 그런 저 자세로 나가면 안되지. 손에 가진 게 없어도 다 가진 듯한 모습을 보여야 승리할 수 있거든.] [안소위 쉽게 죽이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와 준호씨가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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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위가 아버지가 꾸미는 일의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직도 그걸 찾아내지 못하고 있구요. 하지만 ... 준호씨가 마음을 바꿔 먹으면 안소위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어요. 그 사람 그만큼 잔인한 사람이니까요] 은성의 안전에 관한 말이 나오자 동혁의 눈썹이 씰룩였다. [내게 원하는 건?] [준호씨요. 이번 일이 마무리 되도 그를 살려 주세요] [그건 내 손 밖의 일이오] [아뇨 당신은 가능해요. 당신 아버지가 육군참모총장이잖아요.] [당신이 내미는 카드에 의해 달라지겠지] [아버지와 비밀리에 만나는 사람들의 명단요.] [약해. 당신이 그 원본 파일을 찾아 주는 건 어떨까?] [애석하게도 전 컴퓨터를 잘 몰라요. 그리고... 그건 준호씨가 관리해요. 그 사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해요. 그는 마치 날...] 선영의 눈가가 젖어 오고 있었다.

동혁의 머리 속이 복잡하다. 아버지를 배신하는 딸. 그 딸이 얻으려는 건 준호라는 남자. 그리고 은성을 보호하려는 자신. 그들의 약점을 가진 은성. 너무 복잡하다.

[당신 역활이 생겼군.] 동혁은 담배를 한대 피워 깊에 빨아 들였다가 또 다시 길게 불어 내었다. [윤대위가 은성이에게 관심이 있는 한 죽이지 않는다. 당신은 내게 그 말을 했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준호씨 저희 집에서 오래 같이 지냈어요. 여자에게 절대 그런 사적인 감정을 내 보이는 사람 아니죠. 여자 때문에 일처리가 늦어질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요즘 자구 아버지께 타박을 듣고 있어요. 안소위 때문이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별의별 이유를 다 대서 죽이지 않고 있는 거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은성이와 잘 지내는 걸 보면 아마 맘이 변할지도 모르겠군.] 동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제 당신이 정말 내 연인이 되면 되겠군. 명단은 오늘 중으로 받아 볼 수 있겠지?] [준호씨가 무사할 거라고 약속만 해주면요] [약속하지. 윤대위 당신 손에 넘겨주지] [좋아요. 오늘 중으로 넘겨주죠.]

10장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간 전산실은 밤 10시가 다되어 가는 데도 사람들로 복잡했다. 을지훈련이 끝나는 한달 동안은 계속 이런 북적거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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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병이 충격 먹은 얼굴로 돌아온 은성을 걱정스런 눈으로 흘끔거리며 쳐다보다가 기어이 옆에 새로 온 최주용상병을 툭툭 건드렸다. [야... 뭔 일이 있는 거 같지 않냐?] 최상병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종철을 쳐다보았다. [너 그거 몰라? 지금 윤대위하고 안소위하고 강소령하고 삼각 관계인 거? 내가 알기로는 강소령하고 안소위 꽤나 오래 사귄 거 같은데 윤대위의 등장으로 요즘 이상하거든. 근데 저 얼굴 봐라. 분명 강소령하고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 [너 안소위한테 관심 있냐?] [뭐?] [사실 내가 여기 온지 며칠 안됐지만 너 맨 날 몰래몰래 안소위 쳐다보는 거 여러 번 봤다. 좋아하지 않고서 그럴 리 없지. 안 그래?] 헉... 노련한 놈 [너 뭐 먹고 싶냐?] [뇌물이냐?] [아니 그냥...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라 고나 할까] [초코파이] [그거 먹고 너 입 다물어] [하나 가지고 안 되]

정말로 김상병이 PX로 초코파이를 사러간 사이 특전사 문중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안소위 특별 보호 명령이다. 2, 3일 내로 제거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잘 보고하고. 최대한 윤대위 눈치 재게 못하게 안소위에게 네 신분을 알려. 안소위가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다.] [알겠습니다.] [조심해] [예]

믿을 수 없어. 아닐 거야. 그럴 사람이 아니야. 동혁씨 절대 그럴 사람 아니야. [안소위님 전화 받으십시요] 하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그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안소위님] [어?] 갑작스런 최상병의 목소리에 은성은 멍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 봤다. [전화 왔는데요] [아 그래. 고마워] 전화기를 집어들자 너무 반가운 목소리에 은성은 그만 감정이 복받치고 말았다. [은성이니? 아가 나다.] 동혁의 어머니였다. 한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 전화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그래서 였는지 동혁의 어머니가 직접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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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머니.] [요즘 바쁘지? 훈련한다는 이야기 아버님께 들었단다. 저번에 너 오락하다 들켰다며? 아버님이 어찌나 웃으시던 지...] 아마 동혁의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또 재밌어 하며 어머니께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는지 웃음이 묻어나는 말투로 은성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성은 동혁의 어머니의 그 기분을 맞춰 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가끔 전화 좀 해. 너희 둘 다 요즘 너무 뜸해서 내가 심심하구나. 네가 군대 가니까 쇼핑할 사람도 없고... 몸은 어떠니? 동혁이가 그러던데... 사고가 있었다면서 많이 다친 건 아니고?] [네 어머니. 괜찮아요. 조금 긁힌 정도에요. 어머니 건강하시죠?] 결국 그 질문 끝에 눈물이 베어 나오고 말았다. 수화기를 손으로 힘껏 막고 은성은 입술을 깨물며 흐느낌을 감추려 했지만 쉽게 멈추어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아가... 은성아. 무슨 일 있는 거니? 은성아..] 그 다정한 부름이 더욱 더 은성의 힘겨움을 부채질 한 꼴이 되 버렸는지 은성은 한참을 그렇게 전화기를 붙잡고 울고 말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해요. 다음에 제가 다시 전화 드릴께요] [아가 무슨 일이니 응?] [어머니 죄송해요] 은성은 결국 동혁의 어머니 보다 먼저 전화를 내려놓고 아무도 보지 않는 깜깜한 어두운 곳을 찾아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준호는 나무 뒤에서 은성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눈물짓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짜증이 먼저 치밀어 올랐었다.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감상에 치우친 한가한 녀석들의 듣기 좋은 말이라고 치부하곤 했었다. 그런 듣기 좋은 감언이설을 뿌리며 여자의 마음을 후리려는 간사한 녀석들이 말이라고 비웃었었다. 그런데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울고 있는 은성을 보는 동안 준호의 마음이 계속해서 아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이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지면서 은성이 선영과 동혁이 호텔에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온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울어댈 여자가 아니니까... 아무리 굳건한 믿음도 그런 의심스런 장소에 남녀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은성도 그저 한 여자에 불과하니까...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날씨가 많이 시원해 졌지?] 준호가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은성은 서둘러 눈물을 지우며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만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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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 기분이 좀 나아 질 거야] 은성의 손에 따뜻한 캔커피 하나가 놓여졌다. [커피 좋아하잖아. 너무 오래 있지마. 곧 프로그래밍 회의 있다고 했거든.] [대위님은 대위님 부서 일이 아닌데도 자세히도 알고 계시는 군요] 준호는 여전히 얼굴을 돌리고 앉아 있는 은성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 낮게 아니 그도 모르게 잠겨든 목소리로 한마디하고 일어섰다.

[너의 일이니까...]

은성은 준호가 남긴 말에 묘한 여운을 받았다. 딱 집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준호의 말에 은성의 기분이 묘했다. 나의 일이기 때문이라니...

가끔 비춰지는 알 수 없는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의 감정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아... 아니야. 아니야. 내가 지금 그 나쁜 놈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있어. 난 동혁씨 일만으로도 정신없단 말이야.

은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준호 말대로 회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전산실에 들어서니 준호가 회의실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들어오는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묘한 그 한마디를 던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로... 내가 착각한 거 였어. 절대 그런 말 할 인간이 아니지. 캔 커피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커피를 한번보고 은성은 보란 듯이 김상병 옆으로 다가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셔. 피곤할 텐데...]

순간 준호의 입매가 대번에 굳어저 버렸다. [저... 소위님 정말 마셔도 되는 겁니까?] [그래. 마셔. 독약 안 탔으니까 안심하고 먹어] 아무 것도 모르는 김상병은 그저 좋아서 입이 벌어질 정도 였다. 그러다가 무섭게 노려보는 준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놀라서 커피를 그냥 다시 은성에게 내밀었다. [아니에요. 저 금방 마셨습니다. 소위님 드세요] [그래? 그럼 최상병 너 마셔라] 김상병 옆에 앉은 최상병에게 내밀어 주자 최상병은 고맙다며 냉큼 받아서 마시고 있었다. 그런 최상병을 윤대위는 눈빛만으로도 찔러 죽일 것처럼 바라봤고, 김상병은 배신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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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은성은 보란 듯이 준호의 앞자리에 마주 앉아 회의 자료를 넘기기 시작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아니었으면 동혁씨랑 내가 이렇게 어긋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동혁씨가 왜 나에게 그 호텔로 오라고 한 것일까. 정말 선영과 즐기고 싶었다면 나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을 텐데... 즐긴다... 갑자기 동혁이 선영에게 키스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 저절로 눈이 질끈 감아지며 진저리가 쳐졌다.

미칠 것 같아... 아니야...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리고 쪽지 왜 워드로 작성이 된 거지? 의무실에 컴퓨터가 있었던가.? 메모지에 손으로 쓰는 게 더 편했을 텐데...왜 워드지.. 설마 그 메모 동혁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거 아니야 일부러 우리 두 사람 사이 갈라놓으려고... 아니 동혁씨를 내가 포기하길 바라는 누군가가... 선영씨? 아니면 준호?

회의 자료에만 눈을 두고 있던 은성은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천천히 설마 하는 눈으로 얼굴을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성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준호도 얼굴을 들어 은성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신이 그런 거야? 내게 일부러? 은성의 눈섶이 파르르 떨렸다 앙다문 입술마저 떨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났다는 외부지원 팀장의 말이 끝나 모두들 일어나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중에도 은성과 준호는 제 자리에서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래 그렇게 비열한 짓을 할 사람은 준호 당신 밖에 없지.

은성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걸 확인하는 순간 준호의 온 몸이 긴장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의 몸짓 눈짓 하나하나가 그를 긴장시킨다. 은성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조롱하듯 준호를 노려봤다. 당신이 뭘 원하는 지 모르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준호가 사무실을 나가자 은성은 조심스럽게 일어서 그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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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상에 앉으려다 문이 열리며 은성이 들어오는 걸보고 준호는 어정쩡하게 앉으려던 자세를 고쳐 다시 일어섰다. [별일이군. 안소위가 부르지 않아도 여길 오고]

[소령님 안소위님이 윤대위 사무실로 왔는데요] 선영이 넘겨준 명단에 들어 있던 사람들에 대한 뒷조사 자료를 훑어보던 중 은성이 준호에게 갔다는 말을 듣고 동혁은 벌떡 일어서 도청 장치를 통해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 이해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소리 크게 해.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최상병 보내] [예]

[최상병 나다.] [예 문중사님] [지금 안소위님이 윤대위 사무실에 있으니 지금 당장 사무실 밖 복도에 대기하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하면 들어가] [예]

은성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메모를 꺼내 준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준호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으며 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던져졌던 종이를 펴 보다가 굳어진 얼굴로 은성을 보았다. [이 따위짓 다시 하지 마세요. 3류 드라마 보다 더 유치해서 역겨우니까요] 은성은 다시 크게 숨을 들이키고 준호를 향해 더한 악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한 짓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반응은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만 포기하시죠.] 준호는 자꾸만 힘들어 지는 것 같았다.

너무 단단하다. 처음 만남부터 그리 좋은 시작이 아니었기에 더 힘들 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 여자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틈은 바늘구멍만큼도 없어 보였다. 화가 난다. [뭘 보여주고 싶어서 내게 이 따위 장난을 한 거죠?] [사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강소령에 대한 환상을 깨주려고] [하... 그래요? 참 속도 깊군요. 하지만 어떡하죠 내 환상은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데]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군. 그런데 왜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펑펑 울고 있었지 응?]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영웅처럼 생각하는 강소령도 보통 남자일 뿐이야.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육체적으로 쾌락을 즐기고 싶은 남자일 뿐이지. 그곳에서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을까? 선영이 어떤 여자인지 알지? 그렇게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자와 호텔에서 같이 있었다면 너무 뻔한 거 아닌가? 그런데도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는다. 아...하.. 이건 믿음을 넘어서 거의 종교 수준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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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은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 [그만해요. 그만 말해요] [두 사람은 어떻게 즐겼을까? 강소령은 널 어떻게 즐겁게 해줬지? 너에게 했던 것처럼 소영에게도 했을까?] [그만해!!!] 은성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들어. 아무리 귀를 막아도 사실은 사실이야] [그만해. 제발 그만해. 아니야 사실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하지마. 전부다 당신이 꾸며낸 일이야.] [그렇게 믿고 싶겠지?.그런데 어떡하지 사실인데] [아니야. 아니야]

이미 준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은성은 준호에게 지고 있었다. 동혁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약해지고 마는 은성이었기에 동혁을 물고 늘어지는 준호 때문에 은성의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그만 잊어버려.] 은성은 손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저 남자 앞에서는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아니. 난 절대 동혁씨 포기 안 해요. 당신 말대로 선영씨 매력적인 여자예요. 하지만 내면에 가진 게 없으면 그 매력도 오래가지 못하죠. 지금...그래요 지금은 선영씨의 매력에 육체적으로 끌렸을지 모르지만 그는 다시 내게 돌아올 거예요. 난 믿어요. 절대 날 떠날 사람이 아니니까.] [웃기는 군] [설혹 날 떠난다 해도...... 내 맘은 변하지 않아요. 영원히] 그 말이 준호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 버렸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래... 그런데 말이야. 난 이런 소리도 들은 적이 있거든. 여자는 아무리 미워하는 남자도 한번 살을 섞으면 맘이 바뀐다고 말이야. 그대는 어떨까?]

준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지어지면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11장

은성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치다가 재빨리 문을 향해 달리려 했지만 준호가 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뼈를 부서질 것처럼 한 손으로 움켜쥐면서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입을 가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귓가에 거칠게 들려오는 것이 느껴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며 한기가 들었다. [나도 여자를 강제로 안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대는 늘 날 자극하지. 견디지 못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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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로 말이야.] 그녀의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 코끝을 가져다 대며 그녀가 썼을 샴푸의 향을 음미하듯 들이키기도 하며 어깨를 움켜쥐던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작지만 탄력 있는 가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질 때 너의 입에서 나는 탄성을 듣고 싶은데...그건 무리겠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소름끼친다. 눈을 질끔 감는 순간 입을 막고 있던 손이 풀어졌다. 그리고 등뒤에서 그녀를 꼭 안으며 깊은숨을 내쉬고 있었다. [믿어주지 않겠지만... 널... 널... ] 준호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건 아니다... 내가 바란 건 이건 아니다.

[돌아가. 내가 정말로 네 몸에 손대기 전에...] 너무 쉽게 그녀를 놓아주는 준호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은성은 뒤돌아보았다. 이젠 그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원본 파일이 어딨는지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말하지 않으면 강소령 정말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널 가지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할거니까] [한가지만 묻고 싶어요] 은성의 물음에도 준호는 여전히 뒤 돌아서서 이젠 아예 창가로 다가가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려 하지도 않았다. [나를 원하는 건가요? 원본 파일을 원하는 건가요?] 준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르게 질문을 하죠. 어떻게 하면 동혁씨를 살릴 수 있죠?] 준호는 그제서야 은성을 향해 돌아섰다. 여전히 가면 같은 얼굴이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남자인데... 넌 억울하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선택한 사랑이니까요.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했으니까... ]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느냐고 물었나?] [네] 준호는 말이 없었다. 은성의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널 주면 살려주지. 아니 손가락 하나 대지 않지] 은성의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내 마음까지 원하는 거라면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원하는 게 몸뿐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갑자기 준호가 웃어버렸다. [껍데기만 주겠다. 날 마치 발정난 짐승 취급하는 군. 상당히 불쾌해] 준호가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돌아가. 방금 있었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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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위님. 김장군 같은 사람하고 일하기엔 아까운 분이에요. 지금이라도 맘을 돌리세요] 은성의 말에 준호는 비웃음 같은 웃음을 지었다. 누굴 향한 비웃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준호는 이제 버릇처럼 나오는 비웃음이 너무 익숙했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윤대위님께 맘을 열 수 있는 거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군요. 내 맘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요] [오늘처럼 강소령이 부러운 적이 없군. 그의 뭐가 널 이렇게 만들었지?] [그의 모든 것]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동혁의 마음이 너무 아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준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그 상황이 동혁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절대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은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은성은 창가에 서서 엄청나게 쏟아 붙고 있는 비를 보고 있었다. 준호... 정말 알 수 없는 남자. 동혁...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최상병이 타준 뜨거운 커피 한잔을 들고 비 때문에 서리가 낀 창문에 낙서처럼 손으로 동혁과 준호의 이름을 썼다가 다시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그런 그녀의 곁에 최상병이 새벽녁에 이르러다들 지쳐 책상에 혹은 간이 침대에 누워 자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 피곤하세요?] [그냥 잠이 안 와] [강소령님께서 걱정 많이 하십니다.] 동혁의 이야기를 꺼내가 은성은 그를 돌아보았다. [자넨 누구지?] [전 강소령님이 안소위님 보호하라고 보낸 사람입니다.] 은성은 김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해.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 [절... 믿지 못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넨 날 믿나?] [물론입니다.] [대단한 용기군. 사람을 믿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자꾸 딴 생각이 들어 흔들리기 쉽거든. 내가 믿을 수 있게 해봐. 자네가 윤대위가 보낸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니까]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는 안소위를 보며 최상병은 그녀가 가진 마음의 고통이 얼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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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만 ... 빨리 그녀가 자신을 믿어 줌으로 해서 모든 사건 해결의 열쇠인 파일을 넘겨주는 일을 신속히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 파일만 있으면 소위님도 안전해 지십니다. 강소령님도 지금 그걸 찾고 있구요] [그 파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지? 윤대위, 김장군. 그리고... 동혁씨까지... 그런데 자네도 알고 있군. 동혁씨와 연락되나?] [네] [그럼 한가지 부탁 좀 들어줄래?] [물론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은성은 언제나 한번도 빠짐없이 목에 차고 다니던 약혼반지를 꺼내 최상병의 손에 올려놓았다. [전해 드려. 그럼 알 거야] [이건...] [이게 그의 손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걸 알면 널 믿지]

김장군의 집으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13명이었다. 장군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대를 움직이는 실질 책임자들인 대령급들이었다. [내일 훈련이 시작되면 그 동안 준비해 온 것을 시행한다.] [기무사에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터뜨리면 곤란한 건 그쪽이야. 그러니 서둘러서 차질 없이 잘 해야지. 어때 준비는 잘 되가나?] [예] 그러나 이미 그 사람들 중에서는 이 엄청난 계획에 결심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 놈들 뒤에서 뒤치닥거리나 하며 보낼 수 없지 않나? 우리도 한번 힘을 잡아 봐야지] [예 장군님] [모쪼록 여기까지 와줘서 다들 고맙군. 성공하면 다들 별을 달아준다고 내 약속하지. 알았나?] [예] [우리도 권력의 중심에 한번 서 보자고]

새벽에 급하게 동혁의 사무실에 뛰어 들어온 최상병이 내민 반지를 보고 동혁은 손에서 피가 나도록 손바닥에 반지를 올려두고 세계 움켜쥐었다. [안소위님에게 제가 강소령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게 필요합니다.]

[내가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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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용한 새벽... 동쪽의 하늘이 부옇게 밝아 오도록 은성은 창가에 서 있었다 오히려 이젠 머리가 맑다. 며칠동안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이 전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밝아오는 새벽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롭다. 창 넘어 화단에 이제 막 봉우리가 맺힌 국화에 이슬이 올라앉아 있었다. 은행나무도 가을을 맞이하려는 듯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의 잎은 점점 노란빛을 띄어가고 있었다. 그 은행잎도 이슬을 머금고 있다. 투명한 이슬이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처럼 아름다운 아침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의 등뒤로 형광등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다가왔다. 익숙한 향기다. 그리운 향기였다. 하지만 이젠 그 향기에 반가운 보다 낯설음이 더 많이 느껴진다. 그의 향기에 자신의 향기가 섞여 편안했던 그 안락함에 이젠 선영의 향기가 섞여 은성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

[은성아] 마음을 울리는 그 낮은 부름에 너무 가슴이 아파 눈을 감았다 그를 보낼 수 없다. 동혁의 손이 어깨에 올려지자 은성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최상병 동혁씨가 보낸 사람이 맞는가 보군요. 그리고 사람을 이렇게 보낼 정도라면 내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당신은 이일을 알고 있었겠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이...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생겼어요. 선영씨에게 마음이 가 있는 당신이 제대로 객관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을지... ] [은성아 그건...] [동혁씨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공과 사를 혼돈하지 않겠죠? 믿을게요. 아버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여자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을 거라고 믿을게요.] 은성은 은행잎에 맺힌 이슬에 시선을 두고 동혁을 보려 하지 않았다. [전에 당신이 했던 말 들을 것 그랬어요. 그러면 어쩌면 우리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내일이 아닌 것엔 손대지 말라던 그 말요. 후회가 되네요]

너무나 가라앉은 은성의 모습이 동혁을 가슴 아프게 했다.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은성은 미리 준비해 둔 메모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 [암호에요. 전에 내 작은 머리로 암호라며 장난치던 그 어설픈 암호에요. 너무 쉬워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암호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암호에요. 동혁씨가 잊지 않았다면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10년을 기다려준 것처럼 잠깐만... 잠깐만 더 나를 기다려 줘] [난... 언제나 기다려요. 같은 곳에서]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은성을 두고 동혁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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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16.15.16.4.5.19.11 암호:4.15.14.7.8.25.5.7 화일명:4-4.1.25

동혁은 그녀가 적어둔 암호를 풀기 위해 영어 알파벳 26개에 일일이 숫자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abcdefghij12345678910klmnopqrst11121314151617181920uvwxyz

212223242526

주소 : POPDESK 암호 : DONGHYEG 화일명 : D-DAY

암호... 동혁... 그녀는 언제나 동혁과 함께였다.

그녀가 알려준 주소는 인터넷 하드주소 였으며 그곳에서는 디데이라는 암호의 파일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디데이 을지훈련

작전 1 을지훈련 시작과 동시에 작전참모부 벙커에 수류탄 오발 사고를 가장 육군참모총장이 들어서면 폭파시킨다.

작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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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1이 성공하면 언론에 육군참모총장 및 그의 보좌관과 육사출신 이름으로 제작된 비리 문서를 전달한다.

작전 3 기무사 및 헌병의 진입을 막기 위해 미리 준비한 부대가 그들의 진입을 통제한다.

그 뒤로 작성된 다른 문서에는 이제까지의 무기 구입에 관한 여려가지 비리 서류와 돈의 이동이 모두 동혁의 아버지와 그 측근들이 자신들의 개인구좌에 입력이 된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13명이 김장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도 있었다.

동혁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니... 이일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전쟁에 준 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걸 역이용하면... 폭탄이 터지면 김장군이 다음 계급자로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그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그대 연행한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맘을 돌리지 않게 단속을 하는지 김장군 집에서 다들 한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다들 그들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두 잡아 들여. 여기에 그들이 이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보낸 메일들도 있으니까 충분히 잡아들이는 빌미가 되] [에.]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여] [그리고.. 김장군... 순순히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 같은 안도감이 들게 해야 하니까 8명 정도 꾸며서 육군참모총장 및 그 보좌관 복 입혀서 원래대로 그곳에 보내. 대신 재빨리 피신시키는 퇴로 미리 확보하고. 빨리 해 두 시간 남았어] [안소위님은요?] [내가 책임진다.]

사무실이 부산스럽다. 은성은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을지훈련의 시작을 알리기 전에 육군참모총장인 동혁의 아버지가 전산실에 들러 그 동안의 노고를 격려하며 훈련 마지막까지 빈틈이 없어야 함을 주의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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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에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성의 앞에 서서 잠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고생 많은가 보군. 얼굴이 상한 거 보니] [작전참모부에 가지 마십시오] 갑작스런 말에 그녀를 감시하던 준호가 잔뜩 긴장이 되서 은성을 노려보기 시작했으면 동혁의 아버지 강장군의 뒤에 있던 김장군도 은성을 죽일 것처럼 쏘아보기 시작했다. [어허... 내가 거길 안가면 누가 가겠나? 왜 다른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저기...]

[말씀 중 죄송합니다. 프로그램 작동이 시작되어 안소위가 필요합니다.] 준호가 끼어 들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래... 안소위는 컴퓨터에 아주 유능하다고 했지. 잘해주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등을 돌리는 강장군을 향해 은성은 제발 그곳에 가지 말라고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전산실을 나서는 순간 각자 맡은 훈련 작전참모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와중 김장군은 준호를 불러내었다.

[안소위 끌고 와 내가 직접 처리한다.] [안소위가 사라지면 금방 찾을 겁니다.] [여기 전산장교가 안소위 뿐이야? 어차피 작전참모부에 일이 생기면 더 이상 필요 없어. 어서 끌고 와] 준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전산실 문을 열며 은성을 보았다.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나 가슴깊이 와 박힌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은성은 얼굴을 들었다. 사무실 문 앞에서 들어오지도 않은 채 은성을 보고 있는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준호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12장

준호의 얼굴이 너무 무표정하다. 늘 그런 얼굴이었지만 그의 표정 없는 표정이 더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은성은 그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두 사람을 최상병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사색이 되어 가는 은성을 보고 재빨리 동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가 준호와 눈이 마주쳐 당황하고 말았지만 다음의 준호의 행동에 더 놀라서 움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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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있었다.[비보창으로 갈 거다] 비보창 : 비밀 보호 문서창고 준호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장소를 말해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소령님께 늦지 마라고 전해. 안소위 살리려면...]

준호의 말에 은성의 다리가 휘청이면서 두 손으로 겨우 책상을 짚고 버티고 서 있었다. 이게 끝이야? 이렇게... 안돼. 안돼 그럴 수 없어. 너무 억울해. 내가 뭘 잘 못해서... 은성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니야..

준호의 그림자가 은성의 책상에 닿았다. 힘없이 고개를 드는 은성을 쳐다보는 그 눈도 너무나 표정이 없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갈 ...... 시간인가요?] 준호의 입이 무언가 말할 것처럼 열렸다가 다시 닫히며 고개만 끄덕였다.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파일이 이젠 필요 없어졌나요?] [어차피 그건 ...] 널 살리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야... 라는 뒷말을 준호는 잇지 못했다. 은성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아니 앞으로 일어날 일이 제발 현실이 아니길 빌고 또 빌었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준호의 얼굴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그와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문 옆에 탁자에 올려진 난 하나... 저 난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댄싱 난 이라는 병명이 있었던 거 같던데... 노란 나비처럼 활짝 핀 난에 은성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복도 벽에 걸린 그림에도 시선이 갔다. 아... 저 그림... 전산실 오중위님이 친구 전시회에서 어쩔 수 없이 샀다고 했던 추상화인데...후후 다들 무슨 그림이냐구 물어봐서 진땀빼던 중위님 생각도 나네... 건물 밖으로 나서자 햇볕이 너무나 눈이 부셔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 은성의 얼굴로 그림자가 지는 것 같아 눈을 들어보니 준호의 손이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마지막이라 잘 해주고 싶은 거예요?] [마지막이란 없어.] [지금...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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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죽지 않아. 걱정하지마]

준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준호의 손도 그의 시선도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에게 한걸음 물러서 힘없이 따라 걷고 있는 순간 은성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오직 한가지 동혁이었다. 이렇게... 오늘인 줄 알았다면 새벽에 그의 얼굴을 조금만 더 잘 봐둘걸...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에 걸려...... 이왕 보내려고 마음먹었다면 좀 더 편하게 가게 해줄걸 그랬는데...... 동혁씨......

[지금도 강소령 생각하나?] 은성은 대답 대신 긴 숨을 내쉬었다. [아마... 말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 동안 힘들게 했던 것 사과하고 싶어.] [거봐요. 마지막이니까... 내게 그런 말을 하죠.] [가끔은 진심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지. 그걸 평생 말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 준호의 발걸음이 어느새 느려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따라 은성의 시선이 따라갔다가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해 준호의 팔을 움켜쥐었다.

비보창 그런 은성의 몸을 준호가 감싸며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진심을 전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윤대위님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지만 지금은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빙빙 돌리지 말고 쉽게 말해주세요] [널......... 사랑한다고]

세상이 멈춘다. 준호의 세상이 멈추고 있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주기만이라도 했으면 바랬다.

[널.... 사랑한다고.......]

은성은 그 간절한 고백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하고 싶지만 그 말에 베어 나오는 간절함이 너무 절절해서 은성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란 거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안으로 들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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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다 잊어버려. 내가 말한 것도, 나란 존재도, 다 잊어주길 바랄 뿐이야]

그의 그 한 마디에 은성은 다시 죽음으로 가는 발걸음을 내 딛었다 윤준호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비열한 김장군의 곁에서 수족 노릇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 한 고백도 믿을 수 없었다. 왜 그 한마디의 고백에 미안해지는 걸까...

그러나 그 짧은 혼란스러움도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듣기 싫은 끼이익-----하는 철문이 열리는 지하실의 울림. 그녀의 어깨 위에 윤대위의 손이 올려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어서 오게나 안소위. 내가 축하소식을 전해도 되겠나?] [안 듣고 싶습니다. 장군님] [그래? 난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데... 작전참모부에 폭탄이 터져 엉망이 됐다는 군... 아직 생존자가 있는지 조차 확인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니...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적이겠지?] 김장군이 그 지하실이 떠나갈 것처럼 큰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내가 필요할 테니 빨리 일 끝내고 가야겠군]

은성의 얼굴이 충격으로 더욱더 창백해 졌다. 아버님이 그럼.... 역시...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었단 말인가? 동혁씨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넘겨준 자료에 다 있었을 텐데... 왜...

[대위 처리 해. 시간 없어] 그러나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빨리 없애 버려...] 김장군의 말에 은성의 손도 입술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그들을 피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뒷걸음질 쳤지만 서류들로 가득 찬 앵글에 걸려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을 거야. 나쁜 놈. 죽어서 귀신이 되서 네 후손들까지 괴롭혀 줄 거야 김장군의 다그침에도 준호가 움직이지 않자 맘이 급해졌는지 준호의 옆구리에서 김장군이 권총을 뺏어 들었다. [네가 못하면 내가 하지. 어차피 처음부터 여기까지 끌고 올 일도 아니었어. 네놈이 정신이 쏠려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었는데... 멍청한 놈. 내가 처리하지]

[움직이지마. 총 버려] 두 사람이 방심한 사이 동혁이 어느 새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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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동혁의 출현에 김장군은 당황한 눈치였다. [총 버리시지요 장군님] [우습군. 내 딸과 사귄다더니... 자네가 여길 나타나다니.. 자네 아버지가 어떻게 된 줄 알기나 하는 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도 있는데 말이야] 그 말로 동혁의 주의를 홀려보려고 했지만 동혁은 침착하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와 김장군에게 총을 겨누며 은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해 윤대위 강소령 쏴버려...]

은성은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준호가 쏘지 않기를... 그녀에게... 아니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동혁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주머니에서 또 다른 총을 꺼냈다. 은성은 믿을 수 없었다. [윤대위님... 윤대위님을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나 준호는 동혁을 향해 총을 들었다. [제발요 부탁이에요. 윤대위님..제발...]

그 간절한 외침에 준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은성을 보았다. 그가 죽으면... 내게로 올 수 있나? 아니 영원히 못 오겠지.... 네 사랑을 죽인 사람일 테니... 하지만... 널 보낼 수 도 없다. 내게 오지 못하면 그에게 가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준호의 눈에서 비치는 눈빛에 은성은 얼어붙었다. 그는 동혁을 죽일 것이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안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를 살려주세요. 제발...] 준호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리고 찰칵하며 안전핀을 풀고 동혁을 향해 조준했다.

동혁은 불리했다. 김장군이 겨누는 총과 준호가 겨누는 총... 자신이 가진 하나의 총으로 둘을 견제할 수는 없다. 이대로 은성이까지 죽게 만드는 건가...

네 사람의 숨소리까지 죽여 숨을 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착각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 순간 준호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은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가득 지하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동혁이 쓰러졌다.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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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가..이렇게 어이없게 쉽게 쓰러질리 없어...

준호의 총소리와 함께 동혁이 공처럼 튕겨 벽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맞았다면 관통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심장을 노렸다.

김장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안소위 저 주십시오] 준호의 말에 김장군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 순간 김장군이 자신이 가진 권총의 안전핀을 풀렀다.

은성의 눈에 동혁이 쓰러지면서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네놈에게 더 이상 일을 맡긴다는 모든 게 엉망이 되겠어. 일이 이만큼 꼬인 것도 다 저 년 때문이야. 저년은 내가 보내주지.] 조금만... 조금만 더... 은성의 시선이 발치 끝에 놓인 총에 고정이 되면서 그걸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난 포기하지 않아. 절대... 나 혼자 안 가. 김장군 당신도 데려 갈 거야...

은성은 시야가 자꾸만 뿌옇게 흐려졌다. 안돼...저걸 잡아야 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김장군의 몸이 준호에 의해 서류더미에 확 밀쳐지는 게 보여 은성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총을 집어들었지만 그 순간 가슴이 너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자꾸 힘이 빠져 너무 아쉽게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은성의 얼굴이 차가운 바닥에 서서히 닿아가기 시작했다. 아프다...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안돼] 절규 같은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개자식... 너도 보내주지. 그렇게 안타까우면 말이야] 김장군의 목소리도 들렸다.

가슴에 총을 맞고 철철 흘러 넘치는 피를 하고 은성은 그녀가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를 가장 사랑해준 남자를 향해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총알이 관통을 했는지 동혁에게서는 그녀만큼의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윤대위가 쏜 한방의 총에 이렇게 싸늘히 식어 누워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눈이 자꾸만 눈물 때문에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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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그를 봐야하는데...

준호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니 살아야 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널 살려줄 사람들이 올 거야 은성아... 제발... 준호의 얼굴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내버려 둬. 곧 죽을 거야. 너 이 자식... 날 밀었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김장군은 씩씩대고 있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밖의 상황이 너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는 이미 포위 됐다] [제기랄 이게 무슨 소리야? 밖으로 새 나간 거야?] 창고 위쪽으로 난 쪽문으로 밖을 확인한 윤대위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아주 잠깐 사이 미소가 걸렸다 사라진 걸 김장군이 눈치채지 못할 뿐이었다. [장군님... 헌병대가 쫙-- 깔렸습니다. 그리고.... 기무사까지...] [뭐야? 그 자식들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개기름이 번지르르 흐르는 별을 세개 달고 있는 김장군은 벌개진 얼굴로 화를 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 버려 이미 게임은 끝났어]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은 기겁을 하고 돌아보았다. 분명 총을 맞고 쓰러진 강동혁 소령이 그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윤대위는 귀신처럼 서 있는 그를 보고 덜덜덜 떨리는 손에서 그만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김장군도 포기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지시한 거야. 이미 당신에 대해 기무사에서는 6개월 전부터 조사에 들어갔었어. 그 결정적인 증거를 안소위가 건네준 거고.] [강소령 자네 분명 총에 맞았는데...] [요즘은 방탄조끼가 아주 성능이 좋습니다. 장군님]

무장을 한 헌병들이 창고로 들이닥치고 김장군과 윤대위는 수갑이 채워진 채 그곳을 나가고 있었다.

[은성아... 은성아...]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아직 숨이 남아 있습니다. ]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는 윤대위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 다만 아직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은성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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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살아날 것이다. 아니 살아야 한다.

13장

은성이 산소호흡기에 의지에 숨을 유지하는 동안 동혁은 복수심에 김장군과 윤대위의 사건을 군사재판에 넘기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전해진 김장군의 비밀문서... 그리고 그 창고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가 녹음 된 테이프... 그 자료들 덕분에 김장군은 살아서는 날 올 수 없을 정도로 군감옥에 있어야만 했다.

누가 그 많은 자료들을 보냈을 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중에 한가지... 동혁에게 쏘아졌던 그 총알 껍떼기 뿐인 공포탄... 준호가 동혁에게 쏜 총알은 공포탄이었다.

왜... 아니면 일부러 누군가 총알을 바꿔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모든 사건이 마무리가 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은성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러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동혁은 병원에서 그녀와 지냈으면 김장군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기면 마치 출근하는 남편처럼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용조용 대화하듯 말해주었다.

똑! 똑! 두 번의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동혁의 사무실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섰다. [일이 잘 마무리가 되었더구나] 동혁이 상석을 아버지에게 내주고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누가 보낸 지 알 수 없는 장부가 맘에 걸립니다. ] 그의 말에 동혁의 아버지 철형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김장군 측근으로 심어둔 사람이 있었다.] 동혁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보자 빙긋이 웃음을 웃어 보였다. [내가 높은 곳에 앉아서 수발이나 받는 허수아비 장군으로 보였냐? 짐작하고 있던 바가 있어서 내 나름대로 조사하고 있었다. 하긴 그 사람이 먼저 찾아와서 시작한 일이지만...] 철형은 처음 그를 찾아왔던 그 때를 떠올리며 동혁에게 지난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친구형이 우리보다 먼저 김장군 무기에 대해 조사하다가 죽었지. 다들 사고라고 했지만 의심하기 시작한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와 그 동안 자신의 형이 조사해오던 것에 대해 언급했고 나는 그 사실을 가지고 약간의 조사를 한 후 그 말이 사실일 거라는 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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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졌단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를 김장군의 심복으로 숨겨두었지. 한 2년 됐다. ] [왜 제게 말씀 안 하셨어요?] [은성이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는 거 알고 있었다.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 수사에 혼란이 올까봐 말못했단다...그 사람 만나보겠느냐?] [궁금합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집에 들르거라. 다른 곳으로 전속명령이 내려져 곧 떠날거라 오늘 집으로 인사를 온다는 구나] [예.] 그러나 동혁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은성이는 ... 좋아질 게다...] [아직도 의식이 없습니다. ] [은성이 강한 아니까 금방 웃으며 깨어날 거야.]

동혁이 피곤에 지친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집 거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동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피곤에 지쳐 헛것을 보는 것인가? 동혁을 본 남자도 서서히 일어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면 자네가 윤대위가 확실하겠군] [오랜만입니다.]

서로를 향하는 두 사람의 긴장이 너무도 팽팽해 불이라도 붙이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안소위는...] [아직 의식이 없어] 준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가지만 묻지. 그 총알...처음부터...] [소령님 올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이었지?] 준호의 입이 굳게 다물어 졌다가 또 다시 가면 같은 얼굴이 되 버렸다.

[답답하군요.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은 정원으로 나가 별이 반짝이는 하늘아래 섰다. [안소위... 언제나 소령님 생각뿐이더군요.] 그렇게 말을 하고 답답해져 오는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 보냈다. [그저 지우고 싶었습니다. 안소위 기억에서 저에 대한 모든 것을. 내 초라한 모습을 분노라는 것으로 지우게 하고 싶었습니다. 소령님을 쏜 남자. 그렇게만 기억한다면 내가 안소위에게 가졌던 그 알량한 감정에 대한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난 김장군에게 살인교사라는 하나의 죄목을 더 추가하기 위해 녹음을 하면서 결국 안소위를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준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 내내 이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 그를 괴롭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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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진심인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총을 쏘는 그 순간만큼은... 강소령님이 죽게 된다면... 10년 20년을 기다려서도 그녀를 얻고 싶었습니다. 죽게된다면 혹시... 언젠가는 내게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끝에 준호는 허탈한 웃음을 웃어버렸다. [그러나... 역시... 은성이... 다친 몸을 하고서도 소령님께 다가가는 은성이를 봤을 때 소령님이 죽어도...아니 세상이 바뀌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내게 오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이 죽었을 때도 이만큼의 상실감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한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동혁은 준호의 고백들을 묵묵히 듣고 만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준호의 두 어깨에 초라하게 쳐져 보였다. [행복하십시오. 소령님 말씀대로 은성이... 안소위... 내가 손댈 수 없는 만큼 너무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

떠나가는 준호를 보면서 동혁의 마음도 편하지 만은 안았다. 남자대 남자로서 남자가 남자에게 가지는 연민이 그를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성이 있는 병실로 향해 가는 도중 많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갑자기 몰려 뛰어가는 것을 보고 동혁의 마음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의 병실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 사람들을 밀쳐내고 동혁이 그녀의 침대에 다가갔을 때 파리한 얼굴에 눈썹이 가늘게 파닥이고 있었다.

[은성아...] 그의 목소리가 들려서 일까? 그 무겁던 눈꺼풀이 올려지면서 촛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동혁을 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 모양이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산소마스크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그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분리했다. [내가 보이니?] [내가 뭐 봉사야. 동혁씨가 안보이게] 이제 막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의 말치고는 너무 황당했지만 동혁은 안도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안 죽은 거야?] [그래] [어쩐지... 천당에서 동혁씨 찾는데 안보이잖아. 혹시 지옥에 갔나해서 지옥문으로 들어섰는데... 눈뜨니까 여기네. 그럼 여기가 지옥인 거야?] [사람 사는 데가 지옥이지. 녀석아...] 그 몇 마디에 벌써 숨이 차 오르는지 그녀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의사가 다시 마스크를 가져가자 그녀가 눈을 찡그리며 거절의 표시를 했다. [동혁씨 내가 움직이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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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임마 어서 일어나기나 해] [그 말 후회하게 할 거야] 그러나 이젠 정말 숨이 차 올라 호흡이 곤란해지는지 의사가 씌워주는 마스크를 곱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고마워 은성아... 고맙다.

뒷이야기

[어딜 그렇게 서둘러서 가는 거야?] [윤대위 염장 지르러] [뭐?] [재밌잖아.] [너... ] 동혁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벌써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나 있었다. 은성의 손엔 약혼반지가 아니라 하얗고 투명하게 모든 각도에서 눈이 부시게 빛이 나는 다이아몬드가 빛이 나고 있었다. [너 농담하지?] [우리 결혼식에도 안 오고... 괘씸하잖아... 지금쯤 새파란 훈련병들 교육시키고 있겠지?] [나 안 간다.] [그래? 뭐 그럼 나 혼자 갔다 오지 아~ 쉬어터진 30대만 보다가 탱탱한 20대 훈련병들을 보러 가는 마음이 설레는 구나] 그 한마디에 동혁은 바보처럼 그녀를 위해 운전을 하고 말았다. 감시하기 위해...

대구영천에 위치한 3군사관학교에서는 이제 막 입교한 예비장교훈련병들의 우렁찬 기압소리가 퍼져나오고 있었다. [이봐. 윤준호 대위 어디 있지?] [저 그게... 훈련병에 문제가 생겨서 거기 가셨는데요] [거기가 어딘데?] [고공낙하 훈련장입니다.] 은성은 아예 팔짝팔짝 뛰면서 소풍 나온 어린애 마냥 기분이 들떠 있었다. [아...이 반지를 어떻게 자랑해야 우아해 보일까?] 나...참... 유치하긴...

그런데 두 사람은 고공낙하 훈련장 밧줄에 주렁주렁 매달린 준호와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여군장교 훈련병을 보면서 할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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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가세요. 난 안 내려 갈 거예요] [한혜빈 생도. 지금 장난하나?] [나 훈련 안 받아요. 난 군인 되기 싫다구요. 울 아빠 불러줘요. 난 군인 안 할 거예요 엉엉엉....엄마...]

[저기요 동혁씨...왠지 느낌이 좋은데요] [뭐가?] [윤대위 저 표정... 왠지 전에 한번 본 기억이 나서요] 은성은 자신을 보던 알 수 없던 그 눈빛이 생각이 나 그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분명 앞으로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은성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