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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이매뉴얼 월러스틴(1930~ )

Immanuel Wallerstein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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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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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소비하지 않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우리는 매일같이 방송과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에 관하여 신속하고 방대한 뉴스를 접한다. 그렇지만 중요

한 시사적인 문제들을 매일 먹는 음식처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친다.

현재는 단순히 현재인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집적이요 미래의 가능성

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식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단순히 현재의 찰나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역

사의식을 결여한,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것이다.

일례로,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자극적

인 ‘사건’이 터지면 모든 매체의 관심사가 그쪽으로 쏠린다. 대중은 언

론이 보도하는 그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은 다시 그쪽으로 쏠리고 대중은 앞의 사건을 잊

어버린다. 대중매체와 대중의 이런 태도는 일회적이고 소모적이다. 게

다가 이런 성향에 물든 국내 언론사들은 해외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

들을 다각도로 조명하기보다는 그 사건이 국내에 미칠 현재의 영향에

만 주로 관심을 쏟는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2008년의 미국의 월가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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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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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 세계 금융위기와 2011년의 중동의 민주화 바람, 2012년의 유럽의 재정위

기 등)에 대하여 단기적이고 협소한 사건 분석과 신속한 소비에서 벗어

나려면,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 사건들이 지닌 중요한 의미

들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이란 이른

바 ‘뉴스의 소비’가 아니라 ‘사건의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에 도달하려

면 변증법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서 우

리는 사건에 대한 분석 ‘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제시한 ‘세계체제론’은 이런 시대적인 필요성

에 부합하는 이론이다.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역사학자 페

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사건을 ‘먼지’라고 불렀다. 여기

서 먼지는 ‘부수적 현상’이자 ‘시각적인 장애물’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월러스틴의 역사적이고 총체적인 분석은 ‘먼지’와 같은 뉴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소비를 비판적인 성찰로 바꾸어준다

는 데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월러스틴의 독창적인 이론인 ‘세계체제론’의 핵심은 본인이 직접 쓴

입문서인 《세계체제 분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책자는 20세기 마지

막 사반세기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 이에 대한 반작용

인 테러리즘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시각에서

보여주려는 월러스틴의 이론을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세계체제론은 세계를, 단순히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

인 틀로 이해하는 대신 하나의 역사적인 체제system로 이해하려고 한다.

세계체제론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기존의 폐쇄된 대학의 연

구 방식인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이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

이 아니다. 이 상자들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이

렇게 현상들을 전문화해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하고 새롭게 부상

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이다. 왜냐하면 사회 현실은 단순

히 기본 단위를 조립한 기계가 아니라 신과학 운동에서 말하는 복잡성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여러 학문들을 병렬로 연결해서

연구하는 다多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통섭적이고 융합적인 방식인 단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

서 ‘세계체제 분석’이다. 세계체제 분석에서는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

학과 ‘현대’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에 관해 세 개의 영역에서 글을 썼다. 그

세 영역은 근대세계

체제의 역사적 발달

과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현대적인 위

기, 그리고 지식의 구

조이다. 그의 대표 저

서 중에서 《근대세계

체제 3부작》은 역사

에, 《유토피스틱스-21

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들》은 현대의 위기와 요동하는 정치적인 반反체제 운동에,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 월러스틴은 동구권 몰락이라는

사건은 오히려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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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을 지닐 때 사건에 대한 분석 '틀'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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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들》은 지식의 구

조에 각각 상응한다.

세계체제론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사건이 다르게 이

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

소련의 해체는 통상적으로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로 간주되었다.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이것의 이념적인 적수敵手 자유주의가

더 공세적으로 활개를 펼칠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는 기존의 타협적인 복지국가(수정 자유주의 또는 중도 자유주)

의 모델을 훌훌 벗어던지고 신자유주의라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

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IT혁명이라는 기술적 혁신과 결합하면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전까지 현실 해석의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

니 주도권를 장악했다. 이러한 주도권을 이해해야 비로소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나 한국의 노무현 참여정부의 제3의 길이 왜 신자

유주의 프레임에 포섭되어버렸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1995년 저작인 《자유주의 이후》에서 이러한 신

자유주의적 해석은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오류라고 대담하게 주장

한다. 이 동구권 몰락이라는 사건은 오히려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

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에 따르면 오늘날 자유주의는 그 자신의 논리 때문에 자승자박自繩自縛

의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자유주의는 인권의 정당성과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만약 자유

주의의 약속대로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된다면, 항

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유지

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면 이익이 많이 줄어들거나 손해 보

는 계급들에게 이 체제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체제의 정당성이 사라지면 체제는 존속하지 못

한다. 그런데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는 총체적인 것이어서 가까운 시기

에 기존의 근대체제가 새로운 역사적인 체제로 탈바꿈을 일으키는 임

계적인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의 단호한 예측에 따르면 자본주의

적인 세계체제를 극복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만들 새로운 역사체제

는 아마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체제는 아닌 것이다. 이러

한 그의 예측이 나올 당시에는 망상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2008년 이

후 세계 자본주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1대 99로 상징되는 극

심한 양극화로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 월러스틴의 주

장은 다시 주목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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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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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 노트
적수인-접미사가 빠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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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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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커 노트
주도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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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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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라는 단어 버리기아프리카 연구에서 세계체제 분석으로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951년에 컬럼

비아대학에서 아프리카 연구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유명

해진 것은 전공과는 무관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발상과 ‘근대세계체

제’라는 개념 덕분이었다. 이 개념들은 1968년에 일어난 세계혁명에 근

원을 두고 있다.

1968년 세계혁명은 서방의 주요 국가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

규모 반체제 운동을 말한다. 학생들은 기존의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그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며 기존 체제와 사상에 대

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급진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프랑스에

서는 드골 정부에 항의해 400여 만 명이 파업에 돌입해 이듬해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드골 정부가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월러스틴은 1958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고, 1968년 세계혁명이 일어

날 당시에는 컬럼비아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면서 아프리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제가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아프리

카 신생국들에 대한 연구여서 그는

항상 신문 표제(신문이나 잡지 기사

의 제목)을 뒤쫓아 다니는 기분을 느

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연구가

시사적인 성격이 지나치게 강한 것

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더욱

깊이 있는 역사적 시야에서 볼 필요

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국가들도 신생국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래서 그는 신생국이던 시대의 서유럽 국가들을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기는 대략 16~17세기로 근대국가 구조가 형성되던 시대였다. 이

런 생각에서 출발하자, 그는 비非유럽 지역을 통틀어 ‘제3세계’라고 일

방적이고 획일적으로 규정해버리는 유럽 중심적이고 지역 구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근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서 분

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동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가 연구에 몰두한 때는 정치적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서

방 세계에서 대규모 사건이 최초로 터진 곳이 그가 재직하던 컬럼비아

대학이었다. 이 사건은 파리의 학생 봉기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났다.

그때, 학생들이 내세운 주된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베트남 전

쟁 문제였는데, 대학이 국방부와 다른 정부기관을 위한 베트남 전쟁 관

미국에서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는 등 1968

년에는 세계 곳곳에서 혁명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월러스틴의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근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의 역사적 역동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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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연구를 수행하는 등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이었다. 둘째는 인

종차별과 관련된 내용으로, 컬럼비아대학이 흑인 지역 사회가 사용하

는 공원 땅을 사들여 체육관을 지었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었다. 이 사

태를 해결하려고 여러 교수들이 재빨리 모임을 만들어 중재 노력을 했

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당시, 월러스틴은 이 모임의 공동 의장

이었다. 일주일 뒤 학교 당국은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이 학생들

을 대학 건물에서 내쫓았다. 그러자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고 사태는 더

욱 악화되었다.

학생운동 사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월러스틴은 컬럼비아대학

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지금은 예일대 석좌교수이자 뉴욕주립대학 산

하의 ‘경제, 역사 체제 및 문명들의 연구를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 소

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03

사회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월러스틴이 1968년에 일어난 대규모 사태를 ‘세계혁명’이라고 부른

가장 큰 이유는 근대체제에 대항하여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미국을 비롯해 서유럽과

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그 사건의 표현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되풀이되는 두 가

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이, 외견상으로는 대단한 적대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모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반항하는 모든 사람의 주된 과

녁이 자유주의적 보수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적 진보좌파’라는 점이

었다. 곧 1968년의 혁명 세력은 구 진보 세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들은 구 진보가 모두 실패했

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통 주제는, 그의 표현대로 하면

‘세계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세계문화geoculture(전 지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도전’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변종들로는 보편주의(세계화와 자유무역)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와 성차별)를 들 수 있다. 후자의 특수주의(소수자를 차별하는 이데올로기)

는 과거의 인종 혐오주의나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

적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

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자유주의적 세계문화에 대한 도전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

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곧 그들이 체제를 의미

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실제

로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의 세계 지도에는 아주 많은 나라에서 진보

를 대표하는 공산당 아니면 사회민주당이나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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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을 잡았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결국 1968년

사태는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아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

과로 단순히 진보 세력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진보 세력조차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적 합의(복지국가)에 금

이 가 버렸다.

그런데 이때 현실에서는 기이하게도 사라진 구

舊자유주의가 다시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출

현했다. 신자유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

먼(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방임주의와 시장 제도

를 통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은 1968년 이전만 해도 미국 학계의 우스갯거리였

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더니

1976년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그 이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

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프리드먼과 관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1980년대 말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에 부활한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월러스틴

은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진보 세력이 새로 대두할 공간도 열렸다고 주

장한다. 그가 제기한 ‘세계체제 분석world-systems analysis’ 작업이 호응을 얻

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에서 30년 동안 계속해온 자신의 작업

자유방임주의와 시장 제도를 통

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1968년 이전만 해도 그는 미국

학계의 우스갯거리였지만 1970

년대에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그

를 진지하게 대하더니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다.

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들에 대해 간략하지

만 종합적으로 반대 입장을 제기한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는 일련의 지적 개념들이 기존의 사회과학 전반을 지배하

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런 사회과학을 ‘탈사고unthink’

해야 한다고 말한다. 탈사고란 기존의 지배 관념에서 사회과학을 해방

시키자는 의미로, 진보적 사회과학의 출발점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 ‘세계체제 분석’ 작업에서 월러스틴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분석 단

위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종전의 이론들은 하나하나의 민족국

가를 분석의 단위이자 별개의 실체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각각의 나라가 일종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 중

심적인 발전 단계론에 알맞은 전제였다. 낮은 계단에 있는 비유럽 국가

들이 위에 있는 서유럽 선진국을 학습하면서 위쪽으로 올라가게 된다

는 것이다. 이 생각이 근대화와 선진화 논리의 핵심이 된다.

이와 달리 월러스틴에 의하면 어떤 국가들이 아래에 있는 이유는 다

른 국가들이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위아래가 모두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므로, 국가 단위

의 분석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다.

월러스틴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자본주의 경제체제

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연구했다. 더 나아가 세계체제에는 경제 외에

그 나름의 정치적인 구조, 곧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있고 주도

권hegemony의 발흥과 쇠퇴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런 이론적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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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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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 더불어 그는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 운동들도 연구 대상으로 삼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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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 세계체제론

1) 역사적인 주기론

월러스틴이 이론적으로 영향을 받은 가장 중요

한 인물은 카를 맑스와 더불어 페르낭 브로델이

다. 브로델은 현대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프

랑스 아날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아날학파

(‘아날annales’은 연보라는 뜻)는 1929년 뤼시앵 페브르

와 마르크 블로크가 처음 만든 역사 잡지인 《경제

사회사 연보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를 중

심으로 모인 역사학자 집단을 가리킨다. 아날학파

는 정치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근대의 전통적인

역사학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학

문 분야를 통합해 생활사 중심으로 역사를 장기적

인 관점에서 기술하려고 시도했다.

페르낭 브로델. 그는 ‘구조’라는 개

념을 제시해 역사와 구조의 이분

법을 넘어서려고 했다. 월러스틴

은 이러한 브로델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날학파가 출범한 당시에 현대의 주류 역사학과 사회과학은 사건

과 구조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아래에 갇혀 있었다. 아날학파의 2세대

를 대표하는 브로델은 ‘사건’을 ‘먼지’에 비유했다. 그는 사건이라는 짧

은 시간보다 더 훨씬 긴 장기 지속의 관점에서 ‘구조’라는 개념을 제시

하여 역사와 구조의 이분법을 넘어서려고 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

다. 구조주의에서 구조는 통상적으로 공시태로서 영원불변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브로델의 구조는 장기적으로 지속할 뿐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브로델의 장기 지속적인 구조라는 개념에서 영감을 얻은 월러스틴

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분석한 세계

체제론을 펼치게 된다. 체제와 구조는 유사한 말이지만 구조가 주로 정

태적인 특성을 보여준다면 체제는 발생적인 특성도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구조’보다는 ‘체제’라는 개념이 시간을 탐구하는 역

사학과 구조를 탐구하는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시도에 적합하다.

구조는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는 법칙 정립적인

형식주의적 사회과학을 상징한다. 반면 역사는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

를 기술하는 개성 서술적인 실증주의적 역사를 나타낸다. 이러한 이분

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조와 역사의 변증법적인 결과가 주기cycle라는

개념이다. 월러스틴은 이 주기 개념으로 19세기 사회과학의 기본 전제

인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발전이나 진보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이 개념

으로 구조를 역사로 파악하고 특히 근대세계체제(자본주의적 세계 경제)

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및 위기와 소멸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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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19

역사와 관련된 네 가지 시간 개념이 있다. 단기적인 사건, 영원불변

의 구조, 장기 지속적인 구조, 중기적인 콩종크튀르(conjoncture, 상승과

하강의 한 주기에 해당하는 시간 개념)이 그것이다. 실증주의적인 사건은

부수적이어서 진정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매우 단기적인

시간 개념이다. 이러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 일화episode중심적인 역사이

다. 반면 영원불변의 구조라는 시간 개념은 신화에 불과하다.

대신 월러스틴은 브로델을 본받아 단기적이거나 영원한 시간 개념

대신 장기적인 시간과 중기적인 시간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기

적인 시간 개념은 초역사적이고 불변적인 구조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장기 지속하는 구조적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세계 경제로 대변

되는 근대세계체제의 탄생(월러스틴에 따르면 1450~1640년간의 기나긴 16

‘콘드라티예프 파동’은 이 주기 이론을 정립한 러시아 경제학자인 콘드라티예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개념

은 세계 경제의 팽창과 수축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콘드라티예프 주기 자체도 장기(50~60년 단위)적

이고 중기(대략 10년 단위)적이고 단기(2~6년 단위)적인 삼중적인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기)과 소멸(월러스틴에 따르면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가까운 미래)이

일어난 수세기의 기간이 구조적인 시간을 대표한다. 그리고 중기적인

시간의 대표적인 형태는 그 장기 지속적인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주기

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주기적 과정으로서 중기적인 시간으로는 ‘콘드

라티예프 주기’가 있다.

‘콘드라티예프 파동’은 이 주기 이론을 정립한 러시아 경제학자인 콘

드라티예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개념은 세계 경제의 팽창과 수축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콘드라티예프 주기 자체도 장기(50~60년

단위)적이고 중기(대략 10년 단위)적이고 단기(2~6년 단위)적인 삼중적인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콘드라티예프 주기나 파동이라고 불리

는 것은 50~60년간의 장기 파동에 해당한다. 이 파동의 주기는 30년 정

도의 호황기와 30년 정도의 불황기로 이루어져 있다. 일례로, 프랑스가

‘영광의 30년(1943~1973년)’으로 불리는 호황기는 콘드라티예프 주기의

A국면(상승기)에 해당하고, 1970년대부터 2012년 이후까지의 30~40년

동안의 ‘영광스럽지 못한’ 장기 경기 침체의 시대는 콘드라티예프 주기

의 B국면(하강기)으로 간주된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보통 ‘콩종크튀르’

라고 부르는 시간 단위는 바로 콘드라티예프 주기의 상승 국면과 하강

국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파동 주기(60년 정도)를 가리킨다.

월러스틴은 브로델과 마찬가지로 초역사적인(극히 장기적인) 구조는

진정한 시간 개념이 아니므로 이를 사회적 시간 개념에서 배제한다. 또

한 그는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의 전기傳記에서도 단기적인 사건은 먼지

에 불과하므로 장기 지속적인 구조와 중기적인 콘드라티예프 주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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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21

콩종크튀르의 결합에 의한 설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브로

델이 《지중해와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라는 책에서 구조, 콩

종크튀르, 사건의 순서로 사회적 시간을 다루는 것에 대해 월러스틴은

브로델의 실수라고 간주한다. 설명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사건(단기)으

로 시작해 구조(장기)를 다룬 다음 콩종크튀르(중기)로 끝을 맺어야 한

다고 말한다. 일례로, 그는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사건

(단기)을 우선 역사적인 근대세계체제인 자본주의적인 세계 경제라는

구조적인 관점(장기)에서 다룬다. 그다음으로 그는 결정적으로 현재의

콩종크튀르인 콘드라티예프 주기의 하강 국면에 해당하는 1970년 이

후의 세계 경제의 침체기라는 관점(중기)에서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단기적인 사건)이 지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이렇게 삼중의 사회적 시간 개념 중에서 구조라는 장기 지속적인 시

간 개념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서 역사적인 세계체제라는 개념으

로 구체화된다. ‘역사적인 체제’라는 말로 그는 구조와 역사의 이분법

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역사적인 것은 체제적인 것

이요, 모든 체제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이라

도 구조를 갖는다. 이 구조라는 개념은 그 복잡한 현상 자체의 발생 규

칙과 조건 요인이며 현상 자체의 추세나 벡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참다운 구조는 발생에서 기인하는 자체의 특수성,

다시 말하면 자체의 생활사life history나 자체의 환경을 지니고 있다. 그

래서 구조는 그 작동 방식에서 기인한 중심적인 역사를 갖는다. 구조가

복잡할수록 그 역사도 복잡해진다. 그는 세계의 역사를 이러한 역사적

인 체제들의 연속과 공존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역사적인 체제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역사적인 체제

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둘째, 시간적인 경계를 지니므로 역사적인

체제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셋째, 역사적인 체제는 공간적인 경계도

지니지만 이것의 생활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 경계는 고정되어 있

지 않고 유동적이 된다. 특히 두 번째의 시간적인 경계와 세 번째의 공

간적인 경계는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다. 그래서 역사적인 체계는 시

간과 공간을 별도의 분리된 실체로 보지 않는 시공간Time Space적인 것

이다.

역사적인 체제는 이렇게 공간적인 경계도 지니므로 세계라는 말이

반드시 전체 지구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세계’나

‘동아시아의 세계’라는 말처럼 공간적인 경계가 유동적일 수 있다. 그

래서 ‘세계체제’는 우리의 그야말로 ‘전체 세계의 체제’가 아니라 공간

적인 경계를 갖는 ‘하나의 세계라는 체제’를 뜻한다. 역사적인 세계체제

로는 근대의 자본주의적인 ‘세계 경제’가 있고, 전근대의 무굴제국이나

청나라의 ‘세계 제국’이 있다. 세계 제국은 다양한 문화가 있지만 그 정

치적 중심은 하나일 뿐이다. 반면 세계 경제는 비록 (19세기의 영국과 20

세기의 미국처럼) 헤게모니 국가는 있지만 다양한 정치적 중심과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일례로, 15세기 이전에는 여러 세계 제국이 번성한 반면에 세계 경제

는 취약했다. 반면 15세기 이후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세계 제국의

힘을 능가하는 역사적인 시기가 출현한다. 이를 월러스틴은 기나긴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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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23

세기(1450~1640년)라고 부르며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탄생하는 시기라

고 규정한다.

이처럼 월러스틴에게 세계체제는 장기 지속하는 구조적인 과정이

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은 별도의 분리된 실체가 아닌 시공간의 복합인

것이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세계 경제든 세계 제국이든 세계체제의 중

심 구조를 통합하는 요소는 그 기축基軸에 해당하는 노동의 분업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에게 미친 맑스 이론과 제3세계의 맑스주의 버전인

종속이론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2) 중심과 주변의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에 대한 재규정을 위해 맑스로 다시 돌아가기

를 시도한다. 그가 보기에 맑스도 여전히 19세기 사회과학의 주역인 만

큼 그 패러다임의 지배적인 전제인 발전 진보 개념을 당연시하면서 시

공간의 개념을 배제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진정한 관심사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다

시 말해서 맑스는 고전적인 경제학인 정치경제학, 즉 당대의 사회과학

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월러스틴은 맑스를 ‘자기

시대의 한계들을 뛰어넘고자 한 그 시대의 사상가’로 규정한다.

월러스턴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맑스의 모든 저작에서

긍정적으로 발견한 여섯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월러스틴은 이 여섯 테

제를 사용해서 지난 150여 년간의 역사(두 번의 콩종크튀르적인 순환주기

에 해당하는 역사)와 400여 년간의 역사(장기적인 근대세계체제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가까운 미래의 커다란 위험과 희망적인

가능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 여섯 가지 테제는

다음과 같다.

①사회 현실은 오로지 변증법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는 모순의 과정이다.

②.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본의 축적 과정이며, 이러한 특성으로 인

해 전前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들과 구분된다.

③역사적인 체제로서 자본주의는 자본 축적을 위해 자본가가 잉여

가치를 전유專有하는 방식으로 생산과정들을 변형한다.

④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된

다. 자본가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부유해지며, 노동자 수는 점점 더 많

아지고 빈곤해지는 극심한 양극화가 일어난다.

⑤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자본가의 억압 수단이며, 사회주의는

국가의 쇠퇴를 동반한다.

⑥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移行은 점진적인 진화가 아니라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이러한 생각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유

토피아적인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맑스의 긍정적인 유산으로 돌아가기를 시도하면

서 기존의 임금노동 중심의 생산 일변도적인 분석과 교환관계라는 유

통 중심의 일면적 분석을 탈피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제3세계 종속

이론의 영향을 받아 핵심적인 생산과정과 주변적인 생산과정으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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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25

분업을 기준으로 삼아 세계체제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틀에 의해 그

는 기존의 일국 중심의 국민국가적인 분석틀에서 벗어난다.

월러스틴에 의하면 상품은 독점적일수록 핵심에 속하고 경쟁적일수

록 주변에 속하게 된다. 상품이 독점적일수록 자본가에게 돌아갈 잉여

가치의 몫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브로델과 마찬가지로 자본

주의를 시장경제와 동일시하지 않고 독점경제와 동일시한다. 자본주

의는 본질적으로 반反시장이다.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자유 경쟁 시

장이란 ‘인민의 아편(기만적인 환상)’에 불과하고 현실의 시장은 그런 모

습을 띠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심과 주변은 고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처럼 IT 서비

스와 교육 서비스처럼 중심적인 상품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자동차처

럼 주변화되는 상품도 있다. 반면 농산물처럼 주변적인 상품이 많기는

하지만 자동차와 핸드폰처럼 중심적인 상품도 늘어가는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사례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이

해관계도 일률적이지 않다. 같은 나라에서도 중심적인 생산과정에 속

하는 사람과 주변적인 생산과정에 속하는 사람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

돌하기 마련이다. 한미 FTA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갈등(반도체와 자동차로

대변되는 중심 영역과 농업으로 대변되는 주변 영역 사이의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은 이러한 중심과 주변의 유동적인 측면을 잘 예증한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맑스의 이러한 여섯 가지 생각을 현대 사

회과학에서 가장 잘 구현한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총체적이고 역

사적인 시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의 세계체제론은 맑스의 변증법처럼 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

고 변혁하려고 시도한다.

3) 세계체제론의 실천적 지향점

변증법적인 관점, 즉 역사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구조는 영

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변동이 가능한 역

사적인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세계체제론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세

계를 설명하려는 이론적인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존의 세계체

제가 다른 세계체제로 변혁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

에서 실천적이면서 정치적인 성격도 지닌다. 이런 그의 실천 지향적인

이론은 맑스의 실천적 학문관과 파농의 반체제 운동관에서 영향을 받

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체제론의 주요한 이론적인 문제들은 주기적인 순

환 운동, 장기적인 추세와 이행, 그리고 그 이행을 확인할 수 있는 파열

의 위기를 식별하는 것이다. 그는 현대의 주기적 순환과 장기적이 추세

를 밝힘으로써 이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위기들을 예시로 들어 근대의

세계체제인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몰락하고 다른 세계체제가 등장하

는 분기점을 예측해보려고 시도한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기다란 16세기(1450~1640년)에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가 탄생한 이후 세 번의 역사적 전환점이 있었다. ① 16세기 자본

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② 1789년 프랑스대혁명 ③ 1968년 세계혁

명(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즉 중도 자유주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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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27

세 번째의 전환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콩종크튀르이다. 68혁

명이라는 역사적인 전환점은 콘드라티예프 주기의 상승 국면이 하강

국면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상징한다. 이런 콩종크튀르적인 시각이 있

어야 우리는 ① 1989년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몰락이 실은 자유주

의가 몰락하는 증후라고 읽어낼 수 있고 ②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를 자유주의가 대표하는 근대세계체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증으로 제시할 수 있다.

월러스틴이 말하는 근대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는, 기존 체제 안에

서 지구적인 잉여가치를 공유하는 인구(즉, 자본가)의 수가 늘어나고 자

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져 그들이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기 어려

울 때 나타난다. 일례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는 세계 경제의 침체기

에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

락과 정보기술혁명을 빌미로 해서 이미 낮아지고 있는 수익률을 높이

려는 보수주의적인 전략의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위

해 그들은 경제 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국

민국가(개발도상국)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고

초국적인 금융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서 잉여가치의 수탈을 손쉽

게 하려는 일련의 정책(일명 IMF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월러스틴의 확고한 주장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제 근대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기존의 세계체제가 무너졌지

만 어떤 형태의 세계체제로 변형될지는 아직 모르는 결정적 이행시기)에 도달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분기점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근대세

계체제의 모든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몰沒역사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경향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현실적이면서 역사적인 대안체

제를 성찰함으로써 (물질적인 불평등의 해소라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유

토피아를 모색하는 유토피아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05

21세기의 역사적 선택

이처럼 월러스틴의 학문적 활동의 결론은 우리에게 정치적 실천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

는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실천적인 변혁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우선 지적인 분야에서 19세기 사회과학의 한계를 탈피해야 한다고 생

각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의 ‘복잡성 연구

complexity studies’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복잡성 연구를 자연과

학, 곧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지식 운동이

라 불렀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역사

적인 사회과학의 작업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한 체제가 균형 상태에서 멀리 움직였을 경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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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29

체제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작동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진동이 너무 커

져서 분기bifurcation가 일어난다. ‘분기’란 갈

라지면서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저쪽으로

갈 수도 있어서 어느 쪽으로 갈지 예측 불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

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쪽이나 저쪽으

로 약간의 힘을 더하기만 하면 현 체제를 아예 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월러스틴의 진단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체제와 그 핵심에 있는 자본

주의 세계 경제가 이미 위기와 혼란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와 관

련해 우리는 벌써 갖가지 영역에서 위기의 증후들을 목격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대한 영화 같은 공습은 물론, 미국

이 곳곳에서 벌인 반테러 전쟁과 같은 높은 수준의 폭력,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투기 세력이 조장한 2008년의 세계 경제위기 등

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자유주의자들은 매우 공세

적인 태도로 IMF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강요하며 기존의 대타협 산물

인 복지국가 틀을 전면적으로 깨부수고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2차 세

계대전 이후 반복적인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자본

가들이 노동자와 맺은 대타협의 산물이었다. 물론 복지국가 모델도 한

계점에 도달하면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대타협마저도 포기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는 체제

안에 존재하던 위기를 더욱 극대화할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런 이유로

조만간 체제의 이행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위기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

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위기의 구조적인 원인은 경제적인 압박과 정치

적인 압박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압박의 삼중적인 과정인데, 최근에

는 경제적인 압박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 경제적 압박이란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들에서 기인한다. 한편으

로 개별 기업가들의 똑똑한 행위가 결국 자신들의 이윤 실현에 장애가

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개별 기업가는 자사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구

조조정이나 인력 감축 등 노동유연화 전략을 편다. 그러나 사회와 세계

전체로는 실업률과 비정규직의 비율이 늘어나 소비자의 소득이 줄어

유효 수효가 급격하게 감소한다. 이로 인해 세계 경제 안에서 개별 기

업가들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결국 자신들의 이익 실현에 장애가 생

긴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생산이 이루

어지지 않는 무정부성을 지닌 탓에 투자 및 생산의 중복과 과잉이 일어

나 개별 기업들 간에 경쟁이 치열해진다. 이처럼 개별 기업가들도 자신

의 계급적인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행동들을 보이는 모순이 있다. 현재

의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로 인한 극심한 경제위기와 심각한 양극화

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들이 극에 도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재의 세계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는 이러한 위기의 전조일

수 있다. 이 위기로 인해 근대에 탄생했던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를 중

심으로 하는 근대세계체제는 가까운 미래에 패러다임의 교체가 일어

월러스틴은 러시아 태생의 벨기에 과학자

로 197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리야

프리고진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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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031

나는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의 위기 속에서 미래에

다가올 분기점의 (아직 확정되지 않은) 진행 방향과 관련해서 바람직하다

고 생각하는 쪽으로 체제 변형이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실천적인 운

동의 전략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월러스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이 뜻하는 바이다.

참고문헌

이매뉴얼 월러스틴 저서

《세계체제 분석》, 이광근 옮김, 당대, 2005. World-Systems Analysis: An Introduction, Duke

University Press, 2004

《근대세계체제 1》, 나종일 옮김, 까치, 1999. The Modern World-System, vol. I: Capitalist

Agriculture and the Origins of the European World-Economy in the Sixteenth Century, Academic

Press, 1974

《근대세계체제 2》, 유재건, 서영건, 현재열 옮김, 까치, 1999. The Modern World-

System, vol. II: Mercantilism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European World-Economy 1600-1750,

Academic Press, 1980

《근대세계체제 3》, 이동기, 김인중 옮김, 까지, 1999. The Modern World-System, vol.

III: The Second Great Expansion of the Capitalist World-Economy, 1730-1840’s, Academic

Press, 1989

《유토피스틱스 또는 21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들》, 백영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9.

Utopistics: Or, Historical Choic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New Press, 1998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5. Unthinking Social Science:

The Limits of Nineteenth Century Paradigms, Polity, 1991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After Liberalism, New Press, 1995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사이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도래한다.”(월러스틴의 학문관)

“영향을 준 인물들을 물으신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분들을 거론하고 싶다. 카

를 맑스, 페르낭 브로델(아날 학파), 요셉 슘페터, 칼 폴라니, 일리야 프리고진(신

과학운동) 그리고 프란츠 파농.”(월러스틴의 지성사적인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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