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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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1 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 광복 5 0주년을 맞이한 한국음악계를 진단하며 2 1세기를 향한 몇가지 조언 - 1) . 미리 읽어 보는 글 광복 50주년 기념 경 축행사를 보면서, 대통령의 축사에 광복 5 0년은 미완성의 광 복(미완성의 독립) 이며, 이제부터 진정 한 의미의 광복을 준비하는 그 시 발점이 된다는 치사는 매우 의미심 장함을 갖게 하였다. 광복 50년은 바로 분단 5 0년이 되는 해이며, 외세에 의한 독립은 바 로 분단 5 0년이 되기 때문에 정부 스스로 50년 세월이 흐른 광복을 진단하고 이제부 터 통일을 향한 국가 정책수립을 타의에 의한 민족분단의 역 사에서 자의에 의한 민족화합의 역사로 바꾸어 가겠다는 의지를 표방 한 것과 여타 어 떤 정부보다 민족통일 의 지표를 향해 나아가겠 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은 희망을 갖게 한다. 이제서야 광복을 바라보는 안목이 참다운 사실 위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늦 은 시점이나마 민족통일을 위한 바른 식견을 정부 자체가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광복절 기념행사 치사에서 시사하 는 것 중 하나는 문화대국의 면모를 갖 춘다는 것이였다. 정치와 경제의 선진대열에 들어선 나라 중 자국문화를 세계 속에 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지구상 에 이룩된 인류의역사는 최종적으로 문화의 힘겨루기 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일차 적 생존여건이 갖추어지고 나면 곧이어 어떤 지역사회에 이룩된독특한 문화 형태가 타문화권으로 이입하려는 노력과 타문 화를 자신의 문화권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하여 왔다. 문화의 이동 이란 말이 사용된다. 문화이 동의 여건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루어 지며 다각도에서 이를 규명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지난 시대의 역사가 살아 있는 현 재의 역사로 존립할 수 있다. 199 5년 광복 50주년 기념 축전행사와 기념음악회는 이 런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하게 된다. 대통령 스스로 광복 5 0년은 미완성의 것이며 이제부터 완전한 광복을 위해 우리들 스스로 노 력을 경주할 때 라고 우리정부의 입장 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축하하는 문화축제에 사용 된 행사의 내 용들이 외제 일색이였음을 지적하게 된 것은 매우 가슴아픈 일이다. 문화가 무엇이며, 문화가 어떻게 형 성되어지고, 문화의 식 민지가 어떤 것이며, 1 ) 연구는 <숙명여자대학> 교비연구비에 의한 연구발표 논문이다. . 미리 읽어 보는 글 . 머릿글 . 본문 1. 해방 이전부터 해방 이후 ( 1950∼1960년대) 2.4.19 세대의 작곡가들 3.4.19 이후의 세대 ( 1970년 중엽∼1980년대 초) 4. 1980∼1990년대 . 맺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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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1

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한국음악계를 진단하며 21세기를 향한

몇가지 조언 -1)

이 만 방

Ⅰ. 미리 읽어 보는 글 광복 50주년 기념 경축행사를 보면서, 대통령의 축사에 광복 50년은 미완성의 광복(미완성의 독립)이며, 이제부터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준비하는 그 시발점이 된다는 치사는 매우 의미심장함을 갖게 하였다. 광복 50년은 바로 분단 50년이 되는 해이며, 외세에 의한 독립은 바로 분단 50년이 되기 때문에 정부 스스로 50년 세월이 흐른 광복을 진단하고 이제부터 통일을 향한 국가 정책수립을 타의에 의한 민족분단의 역사에서 자의에 의한 민족화합의 역사로 바꾸어 가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과 여타 어떤 정부보다 민족통일의 지표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은 희망을 갖게 한다. 이제서야 광복을 바라보는 안목이 참다운 사실 위에 서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늦은 시점이나마 민족통일을 위한 바른 식견을 정부 자체가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광복절 기념행사 치사에서 시사하는 것 중 하나는 “문화대국의 면모를 갖춘다”는 것이였다. 정치와 경제의 선진대열에 들어선 나라 중 자국문화를 세계 속에 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지구상에 이룩된 인류의 역사는 최종적으로 “문화의 힘겨루기”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일차적 생존여건이 갖추어지고 나면 곧이어 어떤 지역사회에 이룩된 독특한 문화 형태가 타 문화권으로 이입하려는 노력과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권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을 하여 왔다. “문화의 이동”이란 말이 사용된다. 문화이동의 여건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루어지며 다각도에서 이를 규명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지난 시대의 역사가 살아 있는 현재의 역사로 존립할 수 있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축전행사와 기념음악회는 이런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 스스로 “광복 50년은 미완성의 것이며 이제부터 완전한 광복을 위해 우리들 스스로 노력을 경주할 때”라고 우리정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축하하는 문화축제에 사용된 행사의 내용들이 외제 일색이였음을 지적하게 된 것은 매우 가슴아픈 일이다. 문화가 무엇이며,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지고, 문화의 식민지가 어떤 것이며,

1) 본 연구는 <숙명여자대학> 교비연구비에 의한 연구발표 논문이다.

Ⅰ. 미리 읽어 보는 글 Ⅱ. 머릿글 Ⅲ. 본문 1. 해방 이전부터 해방 이후 (1950∼1960년대)

2. 4.19 세대의 작곡가들 3. 4.19 이후의 세대 (1970년 중엽∼1980년대 초) 4. 1980∼1990년대 Ⅳ. 맺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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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음악과 민족 제12호

등등과 같은 것들에 관해선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이 바로 문화식민지의 한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찬란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의 긍지 운운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 사실 우리는 빛나는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 이번과 같은 문화행사를, 그것도 문민정부에서 치루는, 정부의 수장이 “문화대국”을 주창하며 분단 50년을 되돌이켜 보고, 이제는 우리들이 주역이 되는, 살아 있는 역사의 주인이 되자고 확언하는 마당에서 주객이 전도된 기념음악회를 주관하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참담함을 넘어 울분과 통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음악만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주객이 전도된 내용으로 하는 광복 50주년 기념 축하 음악회가 그렇게 대단하고 떠들석하여야 할 일인지 “역사의 시간대와 장”에 정말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납북인사와 월북인사의 작품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했던 과거 정부라면 이렇게 울분을 터뜨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광복 50년을 맞아 외국에서 순국한 그 많은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축복받은 조국 땅에 영입하는 이 시점에서 어디 그 분들의 영령에 한 번 물어보라! 이와같은 문화행사가 독립된 조국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 분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기념식 전에 연주된 이건용의 짧은 기념 식전행사용 곡과 안익태의 「코리아 환상곡」을 제외하면 모두가 외국작품으로 축하 기념음악회를 이루고 있다. 얼마전 매스컴을 통하여 ‘문화개방의 폐쇄국인 한국’이란 외국의 의견이 보도된 바 있어 이에 우리 정부가 문화개방 차원에서 이러한 음악회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면 이는 정말로 기가 막힐 일이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문화의 개방 운운은 동일 문화권 내에서의 문화교류나 문화의 상호공존이라는 입장이지 그네들과 우리들처럼 전혀 이질적인 문화의 상호교류나 공존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는 서구 문화원 중 그 어느 것이 우리문화를 제대로 그네들 나라에 소개하려고 노력하는 곳이 있던가? 그네들이 말하는 문화의 개방이 자국에서 과연 아시아 문화권에 대해서도 서구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처럼 - 결국 이들은 동일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 문화의 차이점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입장이지만 - 그렇게 개방적인가? 그리고 그네들 전체 문화의 몇 퍼센트가 개방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또한 그들이 표방하는 문화개방은, 그네들 동일 문화권에 속한 국가들간의 상호교류에 의한 것으로, 우리와 그들처럼 이질적인 문화가 그들 동일 문화권에서 행해지는 것과 같은 동등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방된 문화교류가 아님을 우린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가지 자명한 것은 우리나라처럼 외국음악을 온 나라가 정말 미친 것처럼 공연하는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음악대학과 음악공연장들은 완전히 외국음악을 공연하기 위한 곳과 준비하는 곳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세금으로 우리가 만들어 놓은 곳에서 외국인의 것만을 공연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연주한다. 이와같은 주체의식이 결여된 사회의식과 국민 개개인의 잘못되어진 문화의식과 인식은 국가가 스스로 앞장서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아갈 때 문제의 해결점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혀진다. 이번과 같은 국가행사와 공연에서 우리 것을 우선하고, 우리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하여 오늘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작품들이 주인이 되어 연주되어 질 때, 자타가 공인하는 긍정적인 기념음악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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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3

글의 전개가 너무나 도약한 감이 없지 않지만, 문화행사 대부분의 내용이 외국 작곡가들의 작품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흔히들 우리나라 작곡가들의 작품이 이들 외국 작곡가들의 작품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란 상투적인 물음과 답변에 이제는 식상할대로 식상한 상태이고 이러한 의견 자체가 우리 것들에 대한 천대의식의 발로이며 외국문화에 자신의 마음과 혼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까지도 철저하게 침투당하여 무엇이 자기를 지탱하게 하는 것까지도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게 되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차적으로는 우리 정부에 이러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우리들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고 또한 그들로 인해 가슴 뿌듯해야 할 이번 행사에 초청된 “세계를 빛낸 한국의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곡이 과연 외국작품만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우리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에게 오래전부터 이를 위해 작품을 위촉할 수 없었는지 정말로 심각하게 물어 보아야 할 일이다. 말로만 하는 찬란한 찬사, 광복 50년! 현란하기 조차한 광복 50년과 해방둥이! 과연 어디에 그 어디에 그 해방둥이들을 위한 진정한 기념행사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을 위한 축복의 준비가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최소한 이러한 행사를 준비하는 실무요원과 준비위원들은 해방둥이들이거나 그 후배들이 미래의 한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계기와 자리를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제발 문화계 일선에서 일하는 해방 이전의 세대, 식민지 교육을 받아 도저히 새로운 앞날을 준비할 능력에 결함이 있는 도덕성의 문제인사들은 이제는 제발 문화계 일선에서 물러나 해방 이후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 주길 간곡하게 당부하는 바이다. 아울러 정부 당국자들에게도 당부할 말은 민족과 국민의 심장인 문화를 가지고 더 이상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하지 말길 부탁드린다. 문화는 바로 우리들이며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고 우리들의 혼이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문화 그 자체이며 나와 당신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광복과 분단의 50년 역사를 가진 1995년 8월 15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음악문화의 한 일면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며 작곡가의 입장에서 여러가지의 착잡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번 기회에 21세기를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 작곡계의 현 실정을 한 번 짚어보고 앞으로의 우리들의 문제를 예견하며 이에 긍정적인 측면의 조언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에 한국 작곡계의 현상을 과거, 즉 20세기 초엽에서 현재까지를 진단하며 아울러 앞으로의 우리 작곡계의 미래상에 대해 미력하나마 조언을 할까 한다. 이러한 조언을 하는 나 자신이 한국의 한 작곡가이며 또한 대학에서 음악 교육을 담당한 교육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진단이 없이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선은 나 자신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진단이 될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하게 되며, 또한 이러한 진단이 자연히 학벌과 학연, 계보와 동인이란 명목으로 스스로들을 보호하는 창작동인들, 그리고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있는 평론가들과 그 그룹들에 대한 진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글은 어떤 특정인이거나 또는 어떤 특정단체를 그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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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분명히 하고자 하며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앞으로의 글을 읽어 주길 바란다.

Ⅱ. 머릿글 “미리 읽어보는 글”에서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와 목적이 이 글의 연구결과를 알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학술논문이 아님을 이미 밝혔다. “양악과 국악”으로 구분된 우리나라 음악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이의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보면 이는 분명 우리 정부나 음악인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양악 작곡가와 국악 작곡가로 구분되는 우리나라 음악계는 상호 유대관계를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서로가 양악과 국악으로 우리나라 음악현상을 이분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극단화되어 상대 분야의 음악에 대한 무지를 첨예화시키고 있다. 양악은 국악을, 국악은 양악에 관한 일반 상식수준에도 못 미치는 지식과 이해를 하고 있는 결과, 음악 전문가의 집단이 일반 음악애호가의 지식과 이해도에도 못 미치는 상대분야의 음악에 대한 지식을 소지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곡을 쓰려는 태도는 음악을 수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웃음거리만 제공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시대성과 기술 및 사상과 문화적 특성까지도 잃어버린 양악 작곡가들의 작품이 범람하고 있는 반면, 전통음악의 보급이란 명목하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돈키호테적 신국악 창작행위와 우리문화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일기 시작한 우리음악에 대한 관심을 국악인의 치부의 행위로 연결한 상업주의적 병폐는 치료불능의 선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음악 양식의 발전과 전개 및 계승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서양음악의 양식들에 우리 전통음악을 이입시키려는 시도들은, 20세기 초엽 서양음악의 유입과정에서 우리나라 서양음악 작곡가들이 시도하였다가 참담하게 실패를 보았던 방법론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으로, 시간과 경제적 손실을 막대하게 입게 되는 행동을 국악인들이 반복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이러한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는 주된 원인은 양악과 국악인들 서로가 학문과 예술의 교류를 통한 유대관계를 맺지 않은 결과로 상호 정보가 차단되어 우물안 개구리 신세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언급코자 하는 것은 음악 전 분야에 걸친 것이 아니라 창작음악 분야로 한정하여 다루고자 한다. 앞서 “미리 읽어보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8.15 광복 50주년 기념음악회 내용이 독립된 나라의 국가적인 음악회 프로그램 내용으로는 심히 자존심이 상하고 또한 이를 인식하지 못한 정부 기관과 원로 음악인들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엽에 흥행했던 식민주의 사관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발견하고 우리 젊은 음악인들 스스로가 이에 대한 제언과 제안 및 새로운 제시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게 되는 만큼, 과연 왜·무엇이·무엇 때문에 광복 50년이 되는 현 시점에까지 우리의 음악회 내용이 외국인들 것만이 주역이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들 한국의 작곡가들 스스로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고로 이 글은 한국 창작음악계가 그 주 대상이며 때에 따라 이와 연관된 주변 여러가지 제반 문화·경제·교육·정책 및 방송을 포함한 매스컴이나 기업에 관해 일부 언급이 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해방 이전부터 해방이후 1950∼1960년대까지의 작곡계와 1970∼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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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5

초엽, 1980년 중엽∼1996년인 현재까지 우리나라 작곡계가 이룩하였던 성과를 알아보고 이의 긍정과 부정적인 면을 조명하면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작곡계를 위한 몇 마디 조언을 하게 될 것이다.

Ⅲ. 본 문 1. 해방 이전부터 해방 이후 1950∼1960년대 음악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은 1885년을 그 시초로 보는 것과 이보다 1세기 전인 1784년을 시초로 보는 견해가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서양음악이 보급되고 이 때를 시발점으로 서양음악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1890∼1910년 사이에 초등학교 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던 창가의 시대를 거쳐 홍난파의 “봉선화”를 그 기점으로 하는 1920년대의 “예술가곡”의 시대, 192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불려졌던 유행가 시대와 동요가 널리 불려졌던 시대를 거치면서 음악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다. 1885년경부터 개신교를 통해 활성화된 신교육에서 음악교육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때의 음악교육이 제대로 된 음악교육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었다. 1909년 9월 15일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 1912년의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가 발족되어 음악 교육기관으로 활동을 하여 전문음악인들의 양성에 힘썼다. 이 때를 전후로 하여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이상준(李尙俊 1884∼1948)·김영환(金永煥 1893∼1978)·김형준(金亨俊 1884∼?)·홍난파(洪蘭坡 1898∼1941)·현제명(玄濟明 1902∼1960)·채동선(蔡東鮮 1901∼1953)·박태준(朴泰俊 1900∼1986)·안익태(安益泰 1906∼1964)·이인선(李寅善 1906∼1961) 등과 같은 전문음악인의 탄생과 이들의 활동으로 교육·연주·창작 및 평론 등에 걸친 다방면의 음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25년에는 음악계(音樂界)의 창간과 이의 기념음악회가 있었고, 1928년 4월에 <경성 방송국 관현악단>의 창단과 민간 오케스트라인 <조선 교향악단>이 1940년에 창단되었다. 1929년에 홍난파의 『동요 100곡집』 상권과 박태준의 첫 동요곡집 『오빠생각』·『오뚜기』·『맴맴』·『중중 때때중』 등이 출판되었으며 조두남(趙斗南)의 오페레타 「어린이 전경」과 정순철의 「엄마앞에서 짝자꿍」이 작곡되었다. 1930년 <조선 음악가협회> 창립, 1932년 채동선·김동진·이홍렬·홍난파 등의 작품발표회, 1943년 김성태의 동요곡집과 이홍렬의 독창 가곡집 제 1권이 출판되었다. 1933∼1935년 사이에 <이화여자전문순회연주단>의 전국순회연주로 음악보급의 지방화를 시도하였고, 1936년 6월 안익태의 「애국가」와 12월에는 「코리아 환상곡」을 비롯하여 김세형의 연가곡집 『먼길』, 김재훈의 『바이올린 곡집』, 박태현의 동요곡집 『동요일기』, 1937년 채동선의 『작곡집』, 김성태의 가곡 「말, 호수, 산넘어 저쪽, 바다」와 조두남의 「제비」작곡과 이홍렬의 「꽃동산」이 출간되었다. 이 해 1월에는 안병소 귀국 바이올린 독주회와 <백조합창단>의 창단이 있었다. 1938년부터 연주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제1회 신인 음악회에 김동진·이순희·김형로·이관옥·오경심·이해남·이경희·이범준·초영해·김신덕 등의 출연이 있었으며, 5월 10일에는 경성 음악 전문학원의 창립기념 연주회가 있었고, 이 해에는 연희전문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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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1939년에 <동아일보사> 주최 전 조선 창작곡 발표회가 있었고, 이 때 현재명·홍난파·김세형·채동선·박경호·이홍렬·김성태 등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1940년 신춘 음악회에 최영호·김인수·윤락순·안성교 등에 의한 현악 4중주 연주와 <조선교향악단> 창단 기념연주회에서 베토벤의 「에그몬드 서곡」과 김성태의 「흥부와 놀부」가 연주되었으며, 1941년 이유선·한복덕·김자경의 독창회와 전봉초·조윤옥·안성교의 3중주·김생려·정희석·최규영·브라이스에 의한 모차르트 연주회와 윤기선·정희석·이강령에 의한 <경성 3중주단>은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와 금수현의 「심봉사의 슬픔-오페라 심청전 중에서-」를 연주하였고, 1942년에는 <만주 신경교향악단>이 김동진의 「제례악과 만가」를 초연하였으며, 1943년에는 조두남의 칸타타 「농촌」이 작곡되었다. 1944년에는 김성태의 교향곡 「카프리치오」, 김동진의 「양산가」가 <신경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고, 김순애의 가곡 「네잎클로버」와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소품」 등이 발표되었다. 1945년에는 조두남의 오페렛타 「에밀레종」과 금수현의 개창노래 「새노래」가 8월 15일 작곡되었다.1) 해방이전까지 우리나라 음악계는 서구음악을 유입하고 이의 정착을 위한 시기였고, 이후 음악교육이 학교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 창작음악을 중심으로 본 음악계의 활동 상황은 1945년 <고려교향악단>의 발족과 <경성음악전문학교>의 설립 55년 <한국 작곡가협회>의 활동 58년 <창악회> 발족 60년대 정부 주관으로 개최된 <국제음악제>·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68년 <한국 음악협회> 주관의 <서울음악제> 개최·60년대 중반의 <세계 문화자유회> 한국본부 주최 현대음악 발표회 후반기 악회의 발족(후에 20세기 <작곡연구회>로 개칭, 1995년 6월 이후 <21세기 작곡연구회>로 개칭)·70년대의 <미래악회>·<한국 작곡가회>·<아시아 작곡가연맹>·<대한민국(국제)음악제>·대한민국작곡상 제정 80년대 각 시.도의 시립 및 도립 교향악단의 발족과 <코리아심포니>·<서울심포니>·<린나이합주단> 등의 창단 및 발족·<제3세대 동인>·<한국 여성작곡가 협회>·<작악회>·<현대음악교류회>의 <새마당>(FORUM NEUE MUSIC)·PANMUSIC FESTIVAL·<대구 현대음악제>·<영남음악제>·<한국 페스티발 앙상블>·<한국 작곡가협회>·<안익태 작곡콩쿨>·<KBS 작곡콩쿨> 및 <민족민중 예술 총연합> 등과 같은 단체들의 창작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활동들이 있어 왔다. 이와같은 외적 실태만을 보았을 때 창작음악과 그 주변 상황이 매우 고무적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우후죽순처럼 창단·발족한 동인형태 단체들의 활동은 그 세가 매우 활발하며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70년대 이후 많은 단체들의 탄생과 이들에 의한 창작음악 발표회가 그 전에 비해 빈번했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이전보다 창작음악은 그 세와 질 및 활성의 장에서 도리어 그 빛이 바래진 느낌이다. 70년대 이전에는 연주자 개인이나 연주단체의

2) 이상은 『한국 음악총론 상권』 제1부 ‘양악의 유입과 일제 국권 침탈기의 음악활동’, 제1장 ‘시대적 배경과 양악의 유입’;이유

선, 제2장 ‘최초 양악 교육과 양악인의 활동’;이상만, 제3장 ‘창작활동’;유신·서북진, 초판:1991년 4월 30일, 초판발행:1991년 5월 30일, 발행인:정화갑, 발행처:사단법인 한국 음악협회, 8-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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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품 발표가 많았으나, 70년대 이후부터는 작곡가들이 만든 동인단체의 창작발표회가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더 심화되어 창작품 발표는 작곡 동인단체만을 위한 쓸쓸한 잔치마당이 되어 버렸다. 작곡 동인단체의 결성은 원래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던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그나마 보다 나은 작품발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작곡가들의 주의 주장이나 동일한 목적의식을 가진 작곡가들이 모여 결성하게 된 동인단체가 아님으로 우리나라 작곡 동인단체가 문화사에 등장하는 예술가의 동인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사적 운동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긴 하나 작곡 동인단체들의 경직성으로 보다 나은 발표의 장을 만들기 위해 발족한 동인단체가 도리어 작곡가들의 작품이 일반인이나 음악가들 대부분에게 접근을 어렵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 버렸다. 이들 동인단체들의 권익이 우선하는 주장들 때문에 새로운 정책적 접근도 어렵게 하는 세력들이 되어 버렸고 또한 우리나라 음악계를 경직되게 하는 한 세력권이 되어 버렸다. 연주자나 연주 단체들의 우리 창작음악에 관한 관심과 태도 또한 70년대 이전의 열악했던 음악계의 실정보다 못한 입장이다. 이러한 현상의 일차적 책임을 작곡가에게 지우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정책, 그 중 음악정책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므로 이 장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단지 창작음악 활성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급되는 문예지원금을 타기 위한 수단으로 불량품의 작품을 불량으로 연주해 버리는 파렴치한 행동들을 일삼는 연주단체나, 즉흥연주회나 초견읽기 경연대회 같은 연주를 해 버리는 개인 연주자들의 횡포는 예술가의 양식문제가 아니라 문화시민의식 부재인 도덕성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창작품 발표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련된 우리나라 문화정책과 음악인들에 관련된 제반 음악환경에 관해 얘기를 하려면 총체적 문제의식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제반 문제해결을 위해 국가의 바른 문화정책이 수립되어야겠고, 현 문예진흥 기금의 창작활성화 지원금 중 일부를 작곡가와 창작품만 연주하는 단체나 개인 및 그러한 음악회를 계획하는 모든 연주와 음악회 자체에 직접 지원을 한다면 이러한 동인단체 발표회에만 의존하는 창작품 발표는 점차 그 빛을 잃게 되고 연주의 질적인 향상도 이루어질 것이며 연주자나 연주단체 또는 기획프로그램에 의한 음악회가 지속적이고 탈 지엽적인 창작품 발표를 가질 수 있도록하는 개선책도 생각해 봄직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악보출판과 음반의 출반 역시 작곡가와 동인단체에게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문예진흥 기금에서 창작품의 출판과 출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구한다면 창작품 활성화는 더욱 활발해 질 것이다. 해방이후 정부수립과 6.25전쟁, 4.19혁명과 5.16쿠테타, 그리고 제3공화국의 군사독재 정권으로 대별되는 이 시기는 한국 창작음악계의 르네쌍스와 같은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소위 우리나라 양악 제1세대로 통칭되는 세대들에 의해 음악 교육기관들이 세워지고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그 전 시대의 창가나 동요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음악들이 다방면에서 작곡되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의 세계적인 흐름이였던 근대와 현대음악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정보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던 때로 지난 몇 세기에 걸친 서구 음악사조와 음악 및 그 작품의 기법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공존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서구의 (16)17·18세기 음악에서부터 20세기의 초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사조와 작품의 경향이 함께 공존함으로 이를 추구하는 동인그룹이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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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활동함으로 시대를 달리한 사조와 기법·작품경향의 차이에서 야기된 첨예한 대립과 반목이 발생하게 되었다-개개 동인그룹들 간에 형성된 반목된 갈등은 자연스럽게 학연과 인연으로 뭉쳐 그들만으로 구성된 계보를 형성하여 고질적 병폐를 만들어 이제는 그 어느 한 쪽에라도 속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사람과 경우라도 작품발표를 가질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창작계의 활발한 원동력이 되어 서구사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 도약의 발판을 짧은 시간대에 만들 수 있었고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곡가들이 이 시기에 대부분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해방을 전후로한 때처럼 음악회에서 우리 창작곡들이 빈번히 연주되었다. 이 때에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한 작곡가들은 김동진·김성태·현재명·이홍렬·나운영·정연주·정회갑·이성제·김달성·조두남·금수현·이상근·구두회·김순애·(윤이상) 등과 같은 해방을 전후로 등장한 신진작곡가들이였고, 이들에게 교육을 받은 강석희·김용진(양악)·김용진(국악)·나인용·조복열·박재열·공석준·김정길·안일웅·장일남·최인찬·이영자·최영섭·박은회·윤해중 등과 같은 소위 제2세대 작곡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창가와 동요 및 국민가곡풍의 작품에만 머물러 있던 창작곡이 이들 2세대들의 등장과 함게 다양한 장르에 걸친 음악들이 작곡되었고 국내 음악교육만이 아닌 외국유학을 통한 서구음악의 직접적 유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상기 이들을 가리켜 ‘양악 제2세대’란 말을 한다. 이의 타당성 여부에 관한 문제는 음악학자와 사가들의 소관이라 생각된다. 단지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큰 물결을 이룬 사조와 경향에 의한 활동과 그 의의는 언급이 되어져야만 한다. 1955년을 기점으로하여 60년을 전후로 한 세대와 그 이전 세대로 세분할 수 있는 이들을 편의상 4.19 이전 세대와 4.19 세대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는 아직까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이들에 대한 음악사적 평가와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고 양악 1.2세대로 언급되는 것도 음악사적 의미로 보았을 때 타당한 정의가 아니므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4.19를 그 대상으로하였을 때, 마침 강석희·김정길·나인용·백병동·박재열 등과 같은 작곡가들의 세대를 4.19세대라 우리의 현대사에서 지칭하고 더구나 현재 우리나라 모든 분야에서 바로 이들 4.19세대들에 의해 우리사회가 운영되고 있는 실정임으로 4.19전과 4.19세대라는 용어가 매우 타당하게 쓰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4.19이전 세대는 그들 모두가 해방 이전에 전문교육을 받은 세대들로 우리나라 음악교육과 음악의 정착에 중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들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4.19세대들의 음악교육을 담당하였던 세대들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해방 전 일본유학을 통하여 음악공부를 하였고 그 중 일부는 미국과 유럽 제 나라에서 음악을 공부한 세대이다. 4.19이전 세대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성과는 성악곡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는 전 분야의 성악곡들이 창작되어 연주되었고, 이들 세대 이후 현재까지 성악곡 분야에서는 이들의 업적을 뛰어 넘을만한 것이 없다. 현제명·금수현·윤용하·이홍렬·나운영·김성태·김동진·조두남·하대응 등과 같은 작곡가들이 이루어 놓은 한국가곡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백병동을 제외한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이들이 이룩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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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서정적 전통을 이어온 작곡가는 나오지 않았다. 이들 세대에서 다루었던 작품의 양식적 경향은 서구 고전주의와 전기 낭만주의 음악양식에 나타나는 단순한 3화음의 사용과 약간의 비화성음과 변화화음 및 전조악절이나 차용화음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극히 일부에서 근대음악 양식을 사용한 작품들도 있었다. 그 당시로는 혁신주의자들로 인식되었던 나운영·윤이상·이상근 등을 제외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는 대부분이 고전주의 및 초기 낭만주의 작품의 경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 작곡가들의 작품은 시적 세계의 표현보다는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일차적 외적 운율을 성악파트에서 노래하고 피아노는 단순한 3화음의 반주만(?) 하게 하였다. 이렇게 쓰여진 상당수 작품들의 3화음은 화성적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선율에 포함된 화음의 배경음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에 비해 나운영과 같은 작곡가들의 가곡들은 한국음악의 현대화와 토착화라는 기치 아래 매우 근대적 화성의 사용과 한국 전통음악의 장단을 활용한 파격적인 리듬들을 피아노와 성악 파트에서 사용하여 아방가르드적 경향이라는 다분히 비판적 시각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이와같은 경향은 우리나라 가곡분야에서 아방가르드로 인식되고 있다. 「고풍의상과 달무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윤이상의 가곡에서는 우리 전통음악이 가지고 있는 강한 색채와 격정이 화성과 리듬에서 나타나며 소위 “신 조성주의의 음악”인 Polytonality와 복잡한 다성주의 음악의 경향을 이미 이 때에 그 일부나마 찾아 볼 수 있다. 이상근은 기악 앙상블과 인성을 함께 사용한 가곡을 작곡하여 피아노가 아닌 기악합주와도 성악곡이 쓰여질 수 있다는 표현 매체선택의 다양성과 기악 앙상블을 통하여 시의 깊은 내면세계를 현대화하여 표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들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가곡의 경향은 아직까지 이들이 주창하고 벌여왔던 작품의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고 현재까지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김동진·조두남·김성태·현제명·이홍렬과 같은 작곡가들이 추구하였던 고전과 낭만주의 양식의 가곡형태이다. 단 백병동이 60년대 말부터 특히 70년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구하였던 한국가곡의 새로운 경향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경향을 이어오지 못하고 있지만 백병동이 추구했던 새로운 가곡의 경향은 젊은 작곡가들에 의해 지속적인 맥을 이어가야만 한다. 오페라 창작의 가장 활발했던 시기도 이 때로 「춘향전」(1958 현제명), 「콩쥐팥쥐」(1951 김대현), 「사랑의 신곡」(1953 김대현), 「왕자호동」(1954 현재명), 「왕자호동」(1962 장일남), 「춘향전」(1966 장일남) 등의 작품이 작곡되어 공연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4.19세대들에 의해 단막과 소편성의 오페라들이 쓰여지기 전까지 4.19 이전 세대들이 만든 이들 대형 오페라가 우리나라 오페라의 주종을 이루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그랜드 오페라로 이태리의 오페라 양식을 모방하였고 아름다운 선율, 특히 수려한 오페라의 영창은 단순하고 미숙한 관현악법의 처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오페라 운동의 초시에 해당하는 이 때의 오페라들이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이태리 정가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가곡의 경우와 매 한가지로 극적전환의 묘미를 담고 있거나 근·현대의 사조나 양식을 내포한 곡들이 아님으로 아리아를 제외한 것들은 매우 단순·미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오페라에 비해 실내악곡들의 발전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이전 즉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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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세대들은 대부분 창가 또는 동요곡 장르에 한정된 곡들을 작곡하였음에 비해 이들 4.19이전 세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장르의 전분야에 걸친 작품들을 취급하였으며 특히 실내악과 대규모 앙상블 음악 및 관현악 곡들에도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나운영·정윤주·이상근 등과 같은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가곡이나 오페라에 비해, 그 현대적인 사조나 양식적 접근을 매우 강하게 하고 있음을 이들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작곡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현상 중 하나는 실내악의 경우 소위 한국음악에의 모색을 너나없이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색의 방향과 경향은 작곡가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이야기 될 수 있다. 1. 한국 전통음악 요소를 원형대로 사용하여 서구 전통화음을 이용한 형태. 2. 한국 전통음악적 요인을 원용하고 이를 서구의 음악과 접목시키려는 형태. 3.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추구하려는 형태. 4. 서구 전통음악의 양식을 고수하려는 형태. 특히 4번의 경우 한국에 살고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은 그 어떠한 것을 추구하더라도 직·간접으로 한국의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서구 전통화성에 뿌리를 둔 조성음악의 양식을 강하게 주장했다. 1.2번의 경우 그들의 주장은 비슷하나 1번을 주장하는 이들은 한국민요를 주로 사용하고 이를 서구의 전통적인 음악형식에 대입시켜 단순히 화성화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음에 비해 2번의 경우는 한국 전통음악의 제반 요인들을 활용하여 서구음악의 제반요인들과 함께 사용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3번의 경우는 화성·선율·형식 등에서 독특한 한국 전통음악적인 요인과 그 특성들을 찾아 이를 바탕으로 작품화하는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4번을 추구하는 작곡가들은 자연히 서구 현대음악기법과 사조들을 유입하고 소개하며 그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서구 현대음악적 요인들을 매우 강하게 나타냈다. 당대 우리의 음악사회는 이들 서구음악의 전통적 양식과 사조를 추구하는 그룹과 현대적 사조나 양식을 추구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양분되어 서로가 반목하게 되었고 이같은 성향은 후에 출신학교와 계보에 의해 작곡계를 구분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두드러진 실내악 운동 경향 중 하나는 너나없이 ‘한국적 음악의 추구’라는 것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4.19세대들의 주 활동무대가 된 ‘70년대 이전까지 지속되었으며 4.19세대의 강력한 초현대주의적 작품경향이 나타나면서부터 한국적 음악, 한국음악의 현대화 및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의 접목이라는 운동들의 맥이 갑자기 끊어지게 된다- 이와같은 경향은 ‘80년대 말에 들어와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지만 4.19이전 세대들과 같은 그렇게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 4.19이전 세대들 작업의 결과는 이후 한국작곡계를 두가지의 뚜렷한 작품경향과 인맥을 구축하게 되는데 첫번째는 고전적 양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룹과 현대적 양식을 고수하는 그룹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들은 또한 그들 사이에 서울대를 중심으로한 인맥과 비서울대 인맥으로 나누어지고,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비서울대 인맥은 다시 연세대와 비연세대 인맥으로 세분화되어 오늘에 이르러게 된다. 작곡가의 활동상항에 따라 형성된 단체나 동인은 자연스러우며 또한 긍정적인 현상이나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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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작품경향과 개개인의 세계관에 의해 그들의 계보와 인맥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출신 학교와 사제지간의 개인적 인연으로 작곡가들의 성향(?)이 구분되고 그 결과로 인맥에 의한 계보와 형성되어진 비정상적 사회현상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직·간접으로 인맥을 형성하지 못한 많은 작곡가들, 특히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될 공간이 없어진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70년대에 들어와 4.19세대 작곡가들이 우리 음악계에 중요한 작곡가로 부각되어지면서 “소수 엘리트 의식의 작곡가 그룹”이 강하게 대두되고 이들 외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정부와 개인 및 사회단체 연주회에서 직·간접으로 제외됨에 따라 제도권과 비제도권 작곡가들로 구분되어졌다. 이와같은 현상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이들 제도권 작곡가들은 우리나라 작곡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가지 지적되어져야 할 점은 4.19이전과 이후 세대 작곡가들 중에는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80년대의 “격동의 시대”에 그 중심부에 동참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2. 4.19세대의 작곡들 ’60년대 중반 이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당시까지 미세한 세력으로 존재했던 현대음악 추구세력을 강한 세력으로 우리 음악계에 부각시킨 이들로 그 이전 세대에게 정규적 음악교육을 대학에서 받은 자들이다. 강석희·김정길·김용진·공석준·나인용·박재열·박중후·백병동·조복열(작고)·이영자·윤해중 등이 이 세대에 속한다. 이들의 작품은 한결같이 초현대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실험음악 무대·전자음악·무조음악(이들 이전에 나운영·윤이상·이상근 등에 의해 무조음악의 경향은 우리 작곡계에 소개되고 그들의 작품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4.19세대들에 의한 것처럼 작곡계에 그렇게 넓게 확산되지는 아니했다). 음악과 인접 타예술과의 조우·음악평론(강석희·백병동 등)·음악서적 저술과 번역서 출간 등과 같은 활동을 통하여 이들이 벌여온 일들은 가히 기념비적인 것들이었다. 자연 이들 세대에 의해 다루어진 음악분야는 모든 장르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들 세대에 의해 모든 음악분야가 개척·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고 특히 소편성의 “실내 오페라” 분야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 음악수업을 하였고, 유럽(특히 서부독일)과 미국에서 유학한 그룹으로 양분되며 이들의 영향으로 이후 세대들에 유학지역의 구분에 의해 작곡가 그룹이 형성되고 구분되어지고 있다. 이들의 양대구분, 즉 미국과 독일로 구별되는 작곡가들의 인맥형성은 그들의 작품 경향에도 뚜렷하게 구별되어 나타난다. 한국 실정에 비추어봤을 때 초극단적 실험정신이 강하게 내포된 작품경향을 보이는 쪽은 미국에서 유학한 그룹이다. 이들은 다시 서울대 출신과 연세대 출신으로 나누어지며 강석희·나인용·박재열·조복열들은 연세대 출신들이며 연세대 출신들은 조복열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미국에서 유학을 하였다. 이들 개인별 작품의 경향과 그들 작품들을 일일이 구분하여 분석 및 그 경향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단 이들 출신학교별 작곡가들의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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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작품의 경향이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최소한의 언급은 할 필요성을 느낀다(물론 이들 외에도 대부분의 한국의 작곡가들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였고 ’80년대말 이후 일부 유럽지역-특히 독일을 중심으로-유학을 가기도 한다. 하나 이러한 추세는 현제까지 미국으로 떠나는 유학생의 수에 비하면 그 비율은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연세대 출신과 김용진·박중후·윤해중의 작품은 근·현대적인 기법을 사용하되 음악형식은 전통적인 것을 대체적으로 고수하는 입장이다. 다시말해 3부 형식과 소나타 형식을 매우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이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들이 대체적으로 서구음악의 미적세계(대체로 미국적인 것이긴 하지만)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함에 비해 연세대 출신들의 작품경향은 다소 한국의 전통음악적인 요인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편이며 그 중에서 박재열의 작품들에서 이러한 의지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 이들 연세대 출신들 경향에서 확연하게 보이는 것 중 하나는 동과 서, 즉 서양과 한국음악의 절충적 편의주의 경향이 심하게 부각되어 한국 전통음악에 내포되어 있는 제반 음악적 특성과 묘미가 회실되는 결과를 초래한 점이다. 이들 연세대가 한국 전통음악을 직·간접으로 깊게 이해하고 있음에 비해 이들 세대의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도는 그 전 세대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서울대 출신들의 작품경향은 연세대 출신들보다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미국에서 유학한 이들은 전반적으로 미국적인 음악관에 깊게 예속되어 있는 실정이고 구라파에 유학한 이들은 극단적인 구라파 음악관에 속한 작품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 윤이상에게 공부한 강석희·김정길·백병동들이 이와같은 경향이 매우 심하며(유학 후 이들이 한국에서 작품활동을 제개하였을 당시의 작품은 매우 유럽적인 실험정신-?-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이들은 각기 제나름의 매우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들의 작품활동은 현대 한국음악사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리란 생각을 한다). ’70년대 말을 기점으로 그들 나름의 매우 독특한 작품경향이 나타나기 전까지 박재열과 함께 한국 아방가르드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다. 이들이 하였던 작업들은 음악의 구조적 자료들을 한국의 전통음악적인 것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한국적인 사고의 틀, 또는 한국적인 관념들을 서구의 초현대적 작곡기법과 수법에 맞추어 작업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건축의 조형물처럼 소리들, 즉 음향이나 합성선율들의 축적에 의해 쌓여져가는 소리들의 연결에서 찾을 수 있거나 또는 모든 소리들의 균형적인 밸런스에서 미적 묘미를 발견하는 음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와같은 표현은 ‘50∼60년대를 풍미했던 구라파 음악운동의 일환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박재열을 중심으로한 연세대 출신들의 작품은 미국의 엘리어트 카트나 에드가 바레스·본 윌리암스 및 동구권의 루토스 라브스키와 펜드레스키 등의 작품세계를 추앙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에 비해 서울대 출신들은 김용진·윤해중·박중후 등이 중심이된 미국유학을 한 작곡가들과 강석희·백병동·김정길의 독일에서 공부한 작곡가들의 작품경향은 판이하게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박중후의 작품은 조지 크램의 작품세계에 깊이 빠져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김용진과 윤해중은 미국의 보수주의적 작곡가들의 작품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반면 강석희·김정길·백병동은 윤이상의 작품경향에 매우 깊게 빠져있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관념적 한국 전통음악의 간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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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표현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점을 생각할 때 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초기의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적 관념세계를 서구화하는 데 일몫을 하였다 할 수 있다. 4.19세대들의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7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가히 우리나라의 모든 음악회는 이들의 작품들이 연주되는 공연장이라고 할만큼 이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또한 그들의 영향이 막대한 만큼 이들세대에 의해 추진되었던 “탈한국적 범세계적” 음악관이 우리나라에 뿌리깊게 자리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약세에 있었던 현대음악의 경향은 급격히 반전되어 우리 창작계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이와같은 음악활동은 이강숙의 귀국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소위 엘리트주의 음악관을 형성하게된 한국 작곡계에 작가가 속해있는 사회적 현상과 무관한 음악적 행위는 그것이 어떠한 순수지향적 의미를 지니고 있더라도 그 지역사회 음악현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논거가 대두됨으로 점차 4.19세대가 벌여 왔던 음악적 행위들이 그 빛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획일화되어 가던 한국작곡계는 서서히 다양화와 다변화되어 가는 길목에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이강숙부터 본격화된 음악학 분야의 확산과 발달 및 여파로 급격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음악평론 분야가 대학에서 이를 전공으로 이수하게 되었다. 음악학과 음악평론 분야의 대두로 음악을 이해하고 이를 향유하는 것이 사회구성원들 전체의 것이란 인식이 확연하게 굳어지면서 창작분야도 서서히 세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를 수용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소위 구세대들의 기득권에 의한 권위의식과 이에 의한 세력의 판도가 하루아침에 와해되는 현상을 가져왔으며 일반인들의 음악에 대한 인식과 이를 평가 및 판단하는 척도가 작곡가들 본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4.19세대들에 의한 한국음악계, 특히 창작음악 분야는 눈부신 발전과 그 세대를 확장시켜 왔으며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품들은 음악의 전 분야에 걸쳐 괄목할만한 성과를 초래하였다. 이들은 어느 면에서 예술지상주의자들이며 그러한 일면 때문에 이들이 한 작업들은 한 번도 그들의 주관주의적인 틀을 벗어난 적도 없으며 그로 인하여 객관적인 평가나 비판을 받아 본 일도 없었다. 이들이 한 작업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탈한국적인 것(비록 그들의 작업중 한국적 음악의 새로운 모색이라고 볼 수 있는 한국음악의 현대화나 한국과 서구음악의 모색-즉 동서의 만남-등과 같은 작업도 극단적인 서구우선주의적인 현대화로 인하여 도리어 가장 한국적인 것들을 잃거나 파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는 이들 세대의 전반적인 현상으로 한국의 음악분야에만 국한된 점이 아니며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결과는 나타난다)의 극심한 파괴나 회실의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었다. 극단의 기술적인 발달은 이룩하였으나 본질적인 것들을 잃어버린 현상은 외국음악의 지점국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비해 신창작 국악곡의 경우 1930년내지 ‘40년대부터 ’50년대에서 ‘60년대 초에 한국의 양악창작계가 하였던 것과 같은 오류를 하기 시작하여 오늘에까지도 이러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다시말해 협주곡 양식이나 교향곡 양식을 아무런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국의 전통음악에 사용함으로써 신국악 창작음악을 심한 불균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8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양악창작계는 양악계가 어떠한 형태든지 간에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을 음악화하려는 경향에 비해 도리어 국악계는 양악계가 하였던 오류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기현상에 처해 있다. 음악학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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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이들 4.19세대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아래 세대들에 의해 음악의 현상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음악학 분야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며 이러한 면에서 이제 출발단계에 있는 한국 음악학 분야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김순애와 이영자·조병옥이 여성작곡가로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김순애는 4.19이전 세대로 가곡과 기악곡에서, 이영자는 4.19세대 보다 조금 위세대로 전분야에 걸쳐 4.19세대와 함께 활동한 작곡가로, 조병옥은 4.19세대로 급진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비록 극소수이긴 하나 이들 여성작곡가들은 매우 활동적이었고 그들의 작품의 경향도 매우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고 오늘의 <한국 여성작곡가협회> 발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3. 4.19 이후의 세대 (1970중엽∼‘80년대 초) 이들은 4.19세대와 ‘80년대 초반 이후에 나타난 작곡가들의 중간 세대로서 수적으로 별로 많지 않다. 이 세대의 특징은 남자작곡가들보다 여성작곡가들이 태반을 이루고 있고, 이들은 <한국 여성작곡가회>의 주된 멤버로 매우 근실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김혜자·서경선·오숙자·허방자 등이 이에 속하며 이들 외에 남성으로서는 공석준·김정길(대구)·백의현·우종억·이영조·임우상·최동선 등과 같은 작곡가들이 이 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4.19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 즉 ’80년대에 나타난 세대들간의 인적인 교량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1980∼199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출발한 1980년대는 제7공화국의 문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전반의 흑백논리로 양분화된 선택이 강요되어진 시절이였다. 첨예하게 대립된 신구집단들의 극단적 반목과 정치·사회집단들의 연대, 노사쟁의에 의한 사회, 경제 불안과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급격한 신진세력의 진출, 학생운동과 연계한 정치권과 종교집단의 연합으로 형성된 개혁 집단들, 전교조와 같은 순수 개혁집단들의 교육개혁 주창, 전대협과 북한과의 연대, 임수경의 방북과 북한에 대한 새로운 시각, 통일문제의 다양한 시각과 대북정책에 관한 일반인의 관심, 문화제 자리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일기 시작한 전통문화 열기의 고조와 한국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 박종철과 이한열군의 죽음이 몰고온 반독재운동의 출발과 군사정권 반대투쟁, 대학 교수협의회 중심의 교수 서명운동과 반군사정권 타파를 위한 대학생들의 연합시위, 민예총의 발족과 남북통일문제의 주체화의식, 그리고 날마다 일어났던 학생들, 교단을 떠나야만 했던 교사들 .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사건의 연속이었던 ’80년대를 보내며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는 민주화를 위한 고통들이 있었다. 첨예하게 대립된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신구세력들의 대결은 정치적인 결말에 의해 너무나도 허무하게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사회의 사회적 역성혁명이 각자 이익집단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성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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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15

토대로 그들의 권익이 보장됨에 비해 그렇게 오랫동안 투쟁하여 온 우리나라의 자유를 위한 쟁취는 결국은 지극히 독단적 소집단주의에 의한 자기본위주의적 개인의 권익만을 부르짖는 것이 되어 버렸다. ’80년대가 가고 ‘90년대를 맞이하는 한국인들은 우선 지난 세월, 그 참담했던 시절의 역경이 과연 그 무엇과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고 어디를 향한 몸부림이었는지를 파악하기 힘들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는 여태까지 막혔던 물꼬를 터놓은 것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조짐을 보여 왔으나 문화·예술 특히 음악쪽에서는 ’80년대 이전이나 그 이후, 조금도 그 사회적 역할과 기능 및 이들에 대한 인식과 정책적 변동이 없었다. 문화는 프로파간다의 한 일종으로 취급하는 집단들의 정치적인 자리바꿈논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 ’90년대 우리나라 음악계의 실정이다. 현재까지도 트로트풍 대중음악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이를 가리켜 우리의 진정한 가곡(?)이라는 망발을 하는 방송국이 국민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며 역사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개인적 감정의 대립이나 집단이기의 억지로 몰아가는 현실, 또한 이들을 공익집단이나 정부의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국민을 집단으로 ‘문화의 문맹인 만들기 운동’을 정부가 앞장서서 벌이고 있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음악인들 스스로도 과연 음악이 왜,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하여 필요한가를 되물어 보는 자성의 기회를 자진하여 갖지 않는 한, 일제시대 항일투사를 잡아 들였던 일본순사 보조원이 해방 후 민주경찰로 둔갑하여 항일 독립투사의 후손들을 핍박하였듯이 우리 원로음악인들이 민주화와 자유를 위한 운동은 않고 그들의 권익만을 추구하는 맹목적 행동만을 일삼은 결과 우리나라 음악계는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는 작업만을 일삼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행동의 결과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순수 예술음악 정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것이 되며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는 젊은 음악인들이 음악의 순수한 열정과 참된 아름다움을 영원히 잃게 할 뿐이다. 이제 음악은 우리나라 음악인들에게 직장을 얻는 방편이거나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여 대학에 입학시키는 과외수업 선생의 입장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를 넘기며 우리의 사회문화적 문제를 음악 쪽에서 유일하게 제기한 것은 제3세대 동인뿐이다. 이들 동인 개개인이 추구하는 음악적 세계관은 별개로 취급하더라도 ’80년대에 들어와 그들이 주장한 문화선진국의 그 어떠한 영향으로부터의 해방은 마치 제3세계의 물결처럼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결국 이들의 작품은 보다 서구 예속적이며 집단이기화된 작품을 만드는 집단이 되어 버렸지만, 그들의 개혁정신은 앞으로 우리나라 음악인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80년대에 주창되었던 주장과 이때 일어났던 음악운동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민족 음악이어야 한다. 대중, 즉 민중 음악이어야 한다. 일상 생활 속에 내재된 음악이어야 한다.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어야 한다. 실용 음악이어야 한다. 극단적인 서구의 현대 음악처럼 기교와 기술이 앞선 음악이어야 한다. 초 현대적이어야 한다. 선율을 되찾아야만 한다. 참여 음악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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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체의 음악이어야 한다. 운동권 음악이어야 한다. 순수 예술음악의 일반화와 생활화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일명 “노찾사”)의 활발한 운동에 의해 80년대를 지나면서 하나의 시민운동 효과를 가져왔고, 이제는 확고한 일반 대중문화운동으로 자리를 굳혔다. ’80년대의 여러 운동중 가장 성공한 문화운동의 하나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를 위한 시민연대 모임 의 형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전통음악의 일반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한국 전통음악 연주단체들의 발족과 전통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연주회, 강연 회 및 음반과 카셋트 테이프의 생산과 판매가 활발해졌다. 한국 음악극을 위한 오페라 운동 전반적인 한국 전통문화 되찾기 운동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운동과 음악적인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었다. 이러한 운동들이 일어났었던 시기는 소위 ‘80년대의 민주화의 열풍과 그 계기를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이 정점에 달하게 되었을 때 4.19 또는 4.19이후 세대와 이들의 은사들이던 원로세력의 음악인들은 -특히 4.19세대의 활발했던 음악활동이 갑자기 뜸하여지는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Post Modernism이 풍미했던 시대, 서구 원로음악인들의 이러한 운동에 대한 대처한 내외적인 형태와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 원로음악인들의 의식구조는 매우 고정화되어진 것을 보여준다. 이들 원로세력의 이와같은 음악운동에 대한 대처는 시대사조나 사상적인 대응이 아닌 이러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음악인 개개인의 성격적 결함에 관한 공격이거나 비공식 또는 비공론화된 비판이거나 그들 작품의 질(?)에 관한 개인적이고 소집단화되어진 그룹들에 의한 비판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에 대해 적극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를 통한 음악운동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 아닌 너·나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변환과 변천에 무감각하고 또한 비 사회적 집단으로 행동들을 하여 왔다. 이와같은 결과를 낳은 기본원인은 사회운동 (Social Movement), 사회정책 (Social Policy), 사회현상 (Social Phenomenon)들에 의한 인류사회학 (Human Socialogy)이나 사회 인류학적인 문제에는 전혀 접근을 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창작과 연주의 행위를 그저 막연하게 아무런 의식의 흐름없이 평탄하게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처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 바로 이러한 점에서부터 우리나라 음악계나 창작음악의 문제점들에 관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야 만 우리음악의 확립과 새로운 음악문화의 창조와 확립이라는 대 명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한가지 심각하게 생각하여야만 하는 불가사의하면서도 웃지 못할 일은 ’80년대에 이러한 다양한 주장을 펴왔던 대부분의 음악가나 동인들 또는 단체들의 실제적인 음악내용은 그 전시대의 원로음악가들이 하여 왔던 것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원로들이하던 작업들에서 하등의 발전이나 변환, 그리고 새로운 작업의 성과도 없이 주장만 크게 외친 현상을 초래하였고, 전통 음악분야에서는 1960년대 한국의 서양음악인들(이 말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아주 묘한 어휘임)이 했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로 인해 많은 종류의 전통음악이 획일화되어지면서 형편없는 저급 뽕짝류의 대중음악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에 처해 있게 된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수의 전통음악인들과 전통문화인들은 이러한 현상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전통적인 것들의 세 확장으로 인식, 상업주의적 부의 축적에 만족하고 있는 실정이다. 획일화된 전통음악의 상업화로 지속·보존·연구해야만 하는 분야의 것들 - 학술·문화·예술 및 사회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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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측면에서 보존 및 보호되어야만 할 음악들- 까지도 대중화와 보급이란 명목으로 파괴와 변형 및 변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하겠으나, 적어도 한 세기 이상 경과된 특수분야들은 그것이 전문화되어진 관념의 축적과 기술의 발달과 발전으로 문헌적 연결고리를 세대간에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변천에 따라 변화되어 온 시간대의 축적물인 사조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과 발달에 의한 축적물의 고리들이 시대를 통하여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 공간에서 그 계기를 달리했던 다양함과 사조나 관념에 따라 서로가 달리했었던 외적현상, 즉 기술과 형태의 차이점에 의한 다양성과 이들이 서로 비교·검토될 수 있는 세부적 현상들의 구별과 그 차이점들은 더욱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현상의 원인은 창작·연주·평론 및 교육, 모든 분야에서 자체 개발에 의한 학술 및 기술의 집결과 이들 상호간의 비교 및 차이 등에 관한 과학적 자료의 수집과 이를 위한 연구업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나 그 지역 사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현상과 이에 의해 형성되어진 전통의 유산이 있게 마련이며, 이들 전통문화 유산에 의한 현실적인 모든 현상들이 앞으로 올 시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가장 근원적 사회현상의 형성에 기조가 되는 내·외적 변천과 발전 및 발달의 내용들은 창조적 산물들의 자기 지역화의 특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같은 견지에서 유추할 수 있는 우리사회의 단일화와 획일화의 현상들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 지역사회의 근간이 되는 정신문화의 지속적 창조의 연계가 제대로 보급하며 평가와 비교·비평을 하는 것과 이들을 종합하고 정리 및 분류하여 기본자료의 전달과 보관에 힘을 기울여야 할 각 부분 종사자들의 자주적 주체의식의 기반이 없음을 뜻한다. 기술개발의 급진화와 자본주의 경제의 급격한 확장으로 예술품도 시장경제 원리에 맞추어 상품화된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이에 일반인들에게 상품화되어질 수 있는 작품들, 즉 일반대중의 구매취향에 맞지 않은 작품들은 그것이 대단한 예술적인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라도 대량구매 충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출판이 되지 않고 음악회장에서 연주되질 않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에 이미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상업화되어 가는 현장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들은 이미 선진화된 기술의 발달과 모든 면에서 타지역 또는 이질적 문화를 수용할 능력을 가진 것이거나 지배할 힘을 소유한 문화들 뿐이다. 결국 독특한 지역사회의 특성이 보편적 공통의 특성으로 찾게 될 때 이것은 공통의 문화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며 이입·전위되어진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지니게 되며 이러한 문화들만이 최종적으로 생존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우리의 음악문화 전반에 걸친 제 문제들을 생각하고 이를 위한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80년대를 지나면서 이러한 변화에 -즉 문화예속 또는 문화의 종속으로 부터의 탈출과 독자적 문화형성을 위한 적극적 대응력을 키우게 되는 것 - 대응할 능력을 소유 및 보전할 수 있었던 것들은 독자적 성격의 독립된 문화들 뿐이었다. 예술작품을 객관적 상황에서 평가할 때 그 작품의 뿌리인 지역사회와 구성원의 특성이 살아있는 지역문화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된 작품들만이 공개적인 평가를 통하여 그 작품이 지닌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80년대를 통하여 강준일·이영조·이만방·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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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권순호·박정선·진규영·김규태·정태봉·박인호·이종구·이건용·유병은 등이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였다. ’80년대에 활동을 한 작곡가들은 우리의 독자적 음악문화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4.19이전 세대들이 전반적으로 추구했던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를 통한 토착화를 위한 작품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80년대의 일반적인 추세이긴 하였지만 음악에서도 우리 것 되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특히 ’80년대의 작곡가들은 학교 교육을 통한 우리 전통음악 문화의 활성화와 보급 및 우리 창작음악의 독자성을 갖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인맥과 혈연관계로 맺어진 계보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시도 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고 엘리트 의식의 작곡가들에 의해 확립된 예술지상주의 경향의 음악관에 대처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이들이 이룩한 성과라면 출신학교와 계보에 의한 음악계의 고질적 병폐를 다소나마 희석시킨 것을 들 수 있고 아울러 20대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80년대 작곡가들의 발언은 당대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여건상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들 스스로의 주장처럼 예술이 우리들 일상생활의 한 일부로 존재하는 것, 즉 일상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은 일반 생활인들로부터 특별히 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 스스로 음악을 대중화 하는데에 앞서 나아갔다. 결국 이들이 예술음악을 일반인의 생활과 함께하는 생활음악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이러한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두게 되었다. ’90년대에는 구본우·구좌만·김준홍·박용실·이경화·임주섭·홍수연·조인선들과 같은 신진 작곡가들의 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작곡가들을 대상으로 볼 때 ’80, 90년대만큼 우리 창작음악이 국제무대에 알려진 경우는 없었다. 각종 국제콩쿨과 국제음악제에 한국작곡가들의 작품이 당선 및 위촉되어 연주되고 몇몇 작곡가들의 작품은 국제음악제나 전통있는 국제하기 음악학교 같은 곳과 방송음악제 등에서 그 해의 주제 작곡가 및 작품으로 채택되어 국제적인 모임에서 공개적인 토론과 학술 테마로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제는 꽤 많은 한국 작곡가들이 국제무대에 알려져 있는 실정이고 이들의 작품이 주목을 받고 있는 실정으로 이러한 여건의 출발점이 된 시기가 바로 ’80∼’90년대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활약은 연주분야에 견주어 절대로 그 업적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80∼’90년대를 통해 시도된 작업들이 그 종류와 양이 매우 많음에도 그전 세대들에 비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창작품만을 그 평가의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국내 창작계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것은 ’80년대 작곡가들의 활동 결과가 미진했기 때문으로 그 원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작품에 대한 태도와 우리 음악의 성격과 우리의 음악문화에 대한 정의가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은 이러한 주의·주장을 뒷받침할 만큼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질 못했으며 대부분 그들의 주의·주장도 구태의연한 것으로 일반 음악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없었다 - 80년대 작곡가들의 주의·주장이란 우리 음악이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음악현상과 음악현장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제3세대의 주장처럼 타음악권의 어떠한 간섭과 영향 및 모방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우리의 음악문화를 굳건하고 튼튼하게 확립하며 자립하여 독특한 음악문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 점이 4.19 및 그 이전 세대에게 ’80∼’9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한 작곡가들의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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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그 전 세대에 비해 미국만이 아닌 유럽에서 유학했으며 이들은 일반적으로 음악의 사회화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다. 사회개혁과 한국인의 의식개혁의 시대가 ’80년대였으며 독재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위한 열기로 온 나라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시기가 바로 ’80년대였다.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개혁의지를 불태우고 새로운 의식전환을 위한 강한 움직임이 일어났었다. 음악분야도 이와같은 전반적인 사회의 열풍을 비켜 갈 수는 없었으리라! 한국음악사회의 개혁! 한국 음악인의 의식구조의 개혁! 음악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인식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80년대가 음악인들의 용기있는 실천의식과 의지의 결여로 개혁의 시기를 잃고 말았다. ’80년대를 넘기며 수많은 개혁들이 다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유독 음악분야만이 새로운 의식전환에 의한 개혁의 물결을 탈 수 없었던 것은 당시대를 맞이했던 음악가들의 확신에 찬 확고부동한 개혁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80년대에 활동한 젊은 음악인들의 우리 음악사회에 대한 외침은 구태의연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존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수구세력들이 수용할 리가 없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지난 군사독재 정부시대에 횡행했던 악습들을 개혁·개선하였으나 음악분야에선 어느 것 하나 개선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구세대의 악습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들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를 제시할 젊은 세대의 의식이 새로운 세대에 발 맞추어 앞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대에 역행하는 방관자로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자신에게 돌아올 권익만을 챙기겠다는 안일한 의식의 세계에만 안주하려고 했기 때문에 개선과 개혁이 전혀 일어날 수 없었다. 도리어 오늘의 우리 음악계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문화 식민지의 전형을 이루는 현상을 가져오고 있는 실정이며 전 세대보다 한발 더 나아가 소수가 아닌 대다수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선진 외국의 음악(?)을 보급하고 생산·교육하는 위치에 스스로 서고자 하고 있다. ’80∼’90년대에 행해진 음악활동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볼 수 있다. 1) 민중음악: 민중이나 운동권의 집회, 또는 노동과 산업현장에서 불리어졌던 음악으

로 민중 민주주의 운동을 추진하던 단체나 집단에 의해 불리어졌던 음악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모임’과 초창기 그 성격이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아 혼선을 빚기도 하였으나 ‘노찾사’가 대학을 중심으로 순수 노래찾기 운동으로 그 한계를 설정한 것에 비해 이 민중 민주주의 음악은 노래를 통하여 보다 강하게 집단의 권익을 주창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여 한때는 이 운동이 재야단체와 연계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했었다. 이제 이들 운동은 다분히 연례행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운동권 및 학생운동 현장과 기념축제와 예술제 등에 구색을 갖춘 형태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2) 참여음악: ’80년대 중반 일어났던 음악활동의 하나로 크게 부각을 받지 못했다. 참

여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는 이러한 음악이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많이 띠게 된다는 오해에서 출발하였다. 참여음악의 개념은 뒤에 운동권이나 재야 및 일부 소외 음악가들의 구호로만 외쳐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음악, 즉 예술의 현실참여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의 부족에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3) 한국 전통음악에로의 환원: 한국 전통음악의 구조와 구성 및 선율과 형식, 미적 감

각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제반 요인을 한국 전통음악의 틀에서 찾아 창작음악을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한국 전통음악을 양악기로 편곡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서구 국민주의 악파의 작품 범주 -특히 드보르작- 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시대착오에 빠져 있는 극우주의적 망상이 빚어 놓은 값어치 없는 작업이며 후자의 경우도 20세기 초 우리의 선배 세대들이 너나없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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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했었던 국민주의 음악운동으로 동서의 만남 또는 동서의 연계 등과 같은 주제로 이미 실험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운동이 실효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전통음악은 서구의 국민주의와 같은 음악과 조우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개성을 가진 오랜 전통 문화유산으로 20세기초의 국민악파가 시도했었던 음악의 기법으로 우리 전통음악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4.19이전의 세대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동일한 운동이 당시에는 범 세계주의적 경향과 탈한국주의라는 강한 시대적 욕구 때문에 동서의 조우가 비록 서구 중심적인 경향의 작품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나 1980년과 ’90년대에 와서는 그와 같은 작품의 것은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우리 사회의 요구와 맞지도 않을뿐더러 서구 중심적 동서 음악의 조우나 서구 지향 내지 서구의 지난 시대 음악을 다시금 재연하는 것은 그 역시 그러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의 주장처럼 문화 식민주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80년대를 지나면서 문화식민주의 사관이란 어휘를 사용할 만큼 우리 사회 젊은이들의 역사관이 낡은 것이 아님으로 이러한 작풍을 낳게 한 결과는 작품을 만드는 기술적 문제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제시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젊은 음악가들의 예술가로서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철학관의 빈곤과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이를 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관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의 빈곤과 허약함에 그 원인이 있다.

4) 한국 전통음악의 보편화와 대중화: 전통음악의 여러가지 장르 중 우선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음악부터 소개하며 이를 근간으로 전통음악의 새로운 창작분야를 개척하려는 것으로 전통음악인들이 주축이 된 음악활동과 양악인이 주축이 되어 벌이는 음악활동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전통음악인들이 벌이는 운동은 전통음악의 보급과 일반화에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통음악의 민속악 분야만 활발하게 부흥시킨 반면 정악계열은 전보다 더 미약한 위치에 처하게 된 기이한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양악인들이 벌이는 운동은 예술음악보다는 대중 또는 영화나 연극 같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용이 되고 있다. 전통음악인이나 양악음악인이 벌이는 이같은 운동 결과는 결국 전통음악 예술성의 질적인 저하를 심각하게 초래하게 되었다.

5) 제3세대의 음악: 경제개발 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문화독립 또는 문화

의 자립화 운동은 뒤늦은 감은 있지만 ’80년대 초 결성된 제3세대 동인그룹의 제3세대 선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있게 되었다. 이 선언문의 골자는 어느 누구로부터는 물론이고 어떠한 간섭도 불허하고 예속되어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선언이 뜻하는 것은 확고한 자국문화의 독립을 뜻한다. ’80년대까지 한국 창작음악의 위치와 현주소는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서구 열강의 음악에 예속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진 바는 없지만-이 때문에 서구의 음악문화에서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은 당시로서는 과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언의 내용은 제3세대 동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보편적 의식의 경향이 매우 짙었음으로 젊은 세대들이 음악에 대한 인식의 틀을 과감하게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90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하게 이러한 자립을 위한 자국 음악문화의 창달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제3세대의 운동은 그들 동인들만의 것이 아닌 보편화되어진 일반적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지대한 관심과 주의를 끌었던 제3세대의 의식은 이러한 인식을 함께 하는 이들의 작품 속에서 개별적인 특성을 띠고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제3세대 동인그룹이나 또는 그들과 계를 같이하는 작곡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결과는 그들 역시 용두사미와 같았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우선 우리의 전통음악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싹 텄다고 볼 수 있다. 전문인의 전통음악에 대한 지식이 일반 애호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소위 음악 전문인이라는 그들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에서부터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음악에 대한 인식의 틀뿐 아니라 음악을 형성하는 구성체들 자체도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주적 문화의 한국 창작음악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제3세대들에 의한 제3의 물결은 그들이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음악작업의 결과는 전 세대들의 작품과 비교하였을 때 별반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아마도 ’80·’90년대의 가장 큰 특성은 제3의 물결로 흘러가려는 강한 경향이었을 것이다. 인식의 전환은 이루어졌으나 기술적 낙후성으로 이러한 인식의 발전을 뒷받쳐줄 힘의 근원을 상실한 것이 ’80년대 말부터 ’90년대의 방향을 상실한 세대들의 무감각한 패션을 위한 음악인 도덕성 상실과 미래를 점치려고 하지 않는 신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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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음악이 싹트게 된다. 6) 방향을 상실한 세대들의 음악: 매우 조심스럽게 언급되어져야 하는 것이겠지

만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엽을 지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일련의 음악 활동들은 그 이전 모든 세대들의 음악활동이 어떠한 경우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던 것에 비해 이들 젊은 - 실은 젊은 나이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30대의 음악인들을 신인 또는 젊은 세대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기에 이 어휘를 사용한다 -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도대체 그 방향을 파악하기 힘들고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의식도 파악하기가 매우 혼란스럽다. 이들이 벌이고 있는 음악작업은 그 전 세대들의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작곡가들의 경향은 억지스럽지만 한국화 또는 한국적이라는 다분히 어색한 어휘나마 적용시킬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이들 ’90년대에 작업을 하는 젊은 세대들은 그 전 세대들이 추구했던 지향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부정적인 것은 한국이라는 지역사회의 특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우리 문화나 음악의 사회적 관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작업을 다국적 또는 탈 한국적이라거나 일명 세계화의 경향이라는 등의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각설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음악의 예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작업이나 활동의 현상은 한결같이 자신이 공부하였던 지역, 즉 그들이 유학한 지역의 음악을 그대로 모방하여 이곳 한국에서 작품화하고 있다. 작곡가라는 명칭에 먹칠하는 짓거리를 하는 이와같은 이들에게는 명인제도(Maestro)를 도입해, 대학의 작곡과나 서구 제 나라에서 유학만 하였다고 해서 작곡가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이와같은 이들이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 수적인 증가로 인해 하나의 큰 집단을 형성하여 그들의 주장(?)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말 개판인 음악계, 서구열강의 음악만을 쫓아가는 음악 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자들의 주장인 음악의 식민지화- 이 하나의 큰 압력 집단화한다면 이는 극히 위험한 사회 파괴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다. 해방을 전후로 한 세대·1950∼’60년대·4.19이전과 4.19세대·4.19이후 세대(1970중엽∼’80년대 초)·1980∼’90년대로 나누어 본 우리나라 작곡계의 상황은 해방 이전 세대와 6.25를 전후로한 음악세대·4.19와 5.16군사혁명 및 새마을운동 세대·’80년대의 노사·학생 및 재야 운동권 세대·90년대의 신세대와 같이 현대 우리나라의 사회·정치사적 변천에 따른 한국 음악사회 변화를 살펴볼 수 있고 또한 이들을 서구음악을 유입하는 시기였던 20세기 초엽의 한국 근대 사회계몽의 시기·해방후 ’60대까지 교육을 통한 서구음악의 보급과 생활화를 위한 시기·한국 음악 낙후성 탈피와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한 시기·세계속의 한국, 세계인으로서 한국인을 표방한 탈 한국화와 범 세계화를 위한 시기들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다. 위에서 구분하여 본 그 어떠한 경우에 해당되더라도 서양음악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1세기가 경과한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타문화권의 음악인 서구의 음악만이 우리 땅에 강하고 넓게 퍼져있는 반면 우리의 음악은 그 전통과 역사적 사실들까지 잃어 버렸고 현재도 잊혀져 가고 잊는 실정에 있다. 우리의 독특한 음악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고 이를 거울삼아 앞으로의 지향점을 찾아나아가야 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와 유사한 과정을 겪어 왔음에도 현재 그들이 우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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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앞선 음악문화와 음악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연구해야 할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중국계열의 창작음악을 흔히들 수준이 낮다거나 유치하다는 평가를 하는데, 이와같은 언급은 과연 어떠한 입장과 위치, 즉 음악을 대하는 주체가 어떠한 문화권과 사회권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문화 수행자, 즉 문화를 창당케 하는 주체는 그 문화가 속한 지역 구성원으로 그가 속한 지역권 위치에서 자신과 타문화를 비교·검토한 결과 새로운 지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지역사회의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장구한 시간에 걸쳐 이러한 과정을 지나서 만들어진 전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되고 더불어 타전통문화권과 연계될 때 이질적인 것과의 유대를 갖게 되며 상호보완적 역할을 담당하는 교류를 통한 문화의 공유가 이루어지게 된다. 때문에 장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문화의 산물인 우리의 음악이 오늘과 같이 참담하게 우리의 전통적 맥락을 회실하게 된 것에는 너나를 막론하고 이에 대한 자성의 소리를 더 높여야만 하고 아울러 지금이라도 전통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란 생각을 한다. 양악을 유입한 세대에서부터 현 ’90년대의 신세대 작곡가들까지 한결같이 작곡가들이 추구했던 것은 우리의 전통음악 뿌리위에서 서구음악을 수용할려는 입장보다는 서구음악의 뿌리위에서 우리음악을 수용시키려고 했거나 숫제 서구음악만을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게 하려고 했었다. 물론 이것은 우리 근대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인 현 시점에도 이러한 변명만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선 작곡가들부터 우리 전통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난후 우리 음악의 특성이란 개념들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적 음악”, “한국의 정서”, “한국적 또는 한국의 서정”과 같은 말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어휘를 사용하기 전에 우선하여 위와같은 것을 위해 어떤 것들을 구체적으로 이행하였는지 반문하고 싶다. 한국에 관한 것들 중 과연 어떠한 것을 자신이 사용하는 한국이라는 어휘에 사용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였는지? 그저 막연히 하루의 일과를 무료하게 보내면서 단지 한국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가 한국적이거나 한국인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반문하여 보자. 이러한 일상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은 일반 애호가가 아닌 전문가인 예술가에게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작품에서 거론되는 “한국적 또는 그와같은 내용의 것”들은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거론되어져야만 전문가나 전문분야의 입지(立志)를 세울 수 있다. 우리가 한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려면 먼저 그에 부응할 수 있는 조건부터 갖추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합당하고 적절한 조건의 형성”에서부터 우리는 재출발을 하여야 할 것 같다.

Ⅳ. 맺 는 글

우리 정부가 우리 음악의 창달과 확립을 위한 바른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무척 의심스럽다. 때로는 정부가 앞장서서 서구음악의 보급에 매진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결국 한 나라와 민족의 문화는 옛부터 지금까지 정책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이에 문화정책·음악학·음악철학·음악사회학 등 인문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음악정책수립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여 우리나라 음악이 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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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23

점이 되는 정책수립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정책수립에 참고하길 권고한다. · 정부 주관의 모든 행사에 우리음악의 연주를 의무화하고, 우리 창작음악이 다른 나

라 작품의 들러리가 아닌 음악회의 구심점이 되게 프로그램을 의무화한다. · 방송 및 신문과 같은 매스컴에 우리 창작음악 전담부서를 상설하고 전문기자를 두

어 기획기사를 다루어 음악정책 및 우리 창작음악의 활성화를 꽤하도록 한다. · 국·공·사립의 문화나 공연단체 및 공연장에서 우리 창작음악 연주를 의무화한다. · 국·내외에 우리음악의 홍보와 보급을 한국 음악가협회가 주도적으로 참여케 한다. · 주외공간 또는 한국 문화원에서 우리음악의 보급·소개·홍보 및 교육을 위한 프로그

램을 개발하며, 이를 위한 지원을 적극 장려 및 수행하도록 한다. · 우리나라 창작음악 지원에 문예진흥기금 지원의 우선권을 둔다. · 창작음악 활성화를 위한 지원금은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에 지원하여 작곡가가 안

심하고 창작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지원을 한다. · 창작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나 개인의 음악회나 출반 및 출판을 하는 것에 창작음악

활성화 지원금을 지원토록 한다. · 학교교육을 통해 우리음악과 창작음악에 대한 인식을 유발시키도록 한다. · 음악대한 교육내용이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하며 입학정원제가 아닌 능력

별 졸업정원제를 위한 제도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 · 음악대학 교수의 자기전공별 세부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각 시·구청·군·읍·면단위 문화사업부에서 자체적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우리 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능력과 자리를 마련하여야 한다. · 기업의 문화지원을 적극 장려하고 우리음악에 대한 지원을 적극 유도하도록 한다. · 국·공·사립의 연주단체는 반드시 우리 창작음악의 연주를 의무화하며 문화단체들의

우리 창작품 공연을 적극 지원하도록 한다. 이상과 같은 제 문제들의 전반적인 정책적 배려가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선진국과 같이 타문화를 폭넓고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민족문화로서 음악이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선진국일수록 위와 같은 문화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고 있으며 자국문화의 보급과 보호를 위해 외국의 이질적 문화의 유입에 폐쇄적 문화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과 독일 및 프랑스문화원에서 펼치고 있는 문화행사인 프로파간다를 생각하면 외국 정부 스스로가 직·간접으로 자국문화 보급을 위해 앞장서서 나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우리 음악인들 스스로의 자각은 말할 필요 없이 절실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우리음악의 보급과 진흥을 위한 문화진흥책의 확고한 수립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것들을 정책입안시 정부가 고려하였으면 한다. · 교육 및 교과과정의 세부개혁을 통해 우리음악과 창작음악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만남이 교육의 장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음악교육 개혁이 있어야 한다. · 매스컴의 우리음악과 창작음악에 대해 홍보·지원·보급을 위한 실행을 위해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 · 창작 활성화를 위한 지원금은 실제적 지원이 되도록 지원금의 인상과 전 창작기간

동안 지원하도록 하는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 예술가 마을과 집이 실제적 지원이 되도록 전 창작기간 동안 체제의 허용과 숙식전

반에 걸친 전폭적 지원을 하도록 한다. · 문예진흥원 원장은 정치적 배려에서 임명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 모든 공공 및 공익단체나 기관에는 반드시 음악정책 전문가가 상주해야 하며 우리

음악과 창작음악을 위한 정책 수립과 이행 및 프로그램 개발을 하도록 한다. 이상과 같은 것들이 정부의 정책 입안에 기본적 사안으로 다루어져 실제적인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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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지원과 실행이 이루어질 때 선진국들과 같은 문화정책을 이룩할 수 있고 결과 또한 매우 바람직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정책적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기본적 사안들 외에 음악인들 스스로가 이행해야만 할 사안과 의식개혁을 위한 인식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서구 음악의 유입과 바른 인식을 위한 음악교육의 확장과 보급 및 서구 음악의 자기화란 기치 하에 시행되어 온 우리의 음악적 행위들은 원로·구세대·기성세대 및 신세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음악의 형태와 세계관 및 서구의 음악관을 유입하고 이를 이해하며 그것을 만드는 기술습득을 위해 시간을 보내왔다. 서구음악의 자기화를 위해 시간을 투자한 결과는 우리가 서구음악인이 된 것이다. 이 결과 당연히 우리의 음악관이 정립될 수 없었고 우리 사회에 우리 음악의 자취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서구음악의 형태나 기술의 습득과 그것의 활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관을 어떻게 정립하는가에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음악이 정립되고 이를 심을 수 있는 방법들이 거론되어져야만 우리 음악이 탄생된다. 이를 위해선 우리의 현실과 시대 및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사회적 관점을 키워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철학적 안목이 싹터야 한다. 이로 인한 철학적 안목과 관점 위에서 새로운 예술, 즉 새로운 음악의 세계가 열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시대관과 사회관을 키우는 능력과 역사의식 및 역사관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음악관을 키울 수 있는 사회관과 역사관을 위한 음악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음악인들 스스로의 노력이 이루어져야만 우리 음악의 정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와같은 의식개혁외에 우리 음악인들이 이행해야 할 개선책들은 지금까지 행하여 왔던 개별적 자구책에서 벗어나 우리 음악사회 전체를 그 대상으로 우리의 음악과 음악인들의 자생을 위한 모든 음악적 행위를 해야만 한다. 음악동인 단체나 연주단체 및 학술과 평론단체들은 존립 자체만을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의 대가를 치러 왔으므로 우리의 음악사회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한 제반 문제들을 진단하고 이의 대책을 위한 협의나 개혁을 위한 계획안을 내놓을 여력이 없었다. 음악교육도 급변하는 국내외의 음악적 상황과는 무관한 것으로 학교와 교수를 중심으로 한 비음악적 상황으로 교육이 이행되어 왔다. 예술을 만드는 행위자, 즉 예술가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습득하고 자질과 덕목을 키울 수 있는 음악교육은 요원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문화, 그리고 역사라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 의해 오늘, 현 시점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다.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자신을 되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문화와 예술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함에 비해 우리들의 관심은 “열린 음악회나 주부 가요열창”에 기울이는 관심의 도를 크게 넘어서는 것 같지가 않다. 또한 음악대학은 “음악교육의 장이라기 보다는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방편 이상의 관심을 넘어 서는 것 같지가 않다. 음악대학 재학생들의 관심사 역시 기술적 개발과 정진이나 새로운 음악관을 위한 탐구와 자신의 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업주의에 물들은 일반 대중음악 분야의 동향과 그 경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이것은 전문분야의 세분화와 기초분야 학문이 응용분야 학문보다 우선하여 깊고 폭 넓게 대학에서 교육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제반 여건이 취약한 입장에 있는 우리의 음악환경과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음악인들 모두가 개인과 동문 및 파벌의식이 강한 의도적 자기본위주의적 보호의식과 자기방어본능 의식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 전체를 조감하고 이를 위해 서로가 의견을 모아야만 한다. 계보에 의한 동문과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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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25

벌의식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 각종 상벌과 콩쿨의 경우이며 대학의 전공 실기 평가에서 이와같은 개인위주의 자기방위 본능에 의한 획일화된 편협주의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 중론에 의한 도덕성 상실이 가져온 적당주의의 책임회피성·의타성이 만연되어 있다. 소위 작품의 평가에 최고와 최하점수를 제외하고 전체 평가자의 평균 점수에서 10점 상하의 점수를 제외한 점수가 평가점수로 채택되는 근거가 특정 대상자거나 자신의 학생(?)에게 좋은 점수나 또는 특정인에게 아주 나쁜 점수를 주려는 의도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 매우 타당한 것(?)같으나 이 방법의 채택에서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다. 그것은 그러한 평가를 하는 당사자는 교육을 담당할 자격과 인격을 소유하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가 교육현장에 있게 된 우리의 현실이 참담한 심정을 갖게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러한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의 교육은 회생불능의 시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이미 그러한 조짐이 만연된 실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한 시정 안의 제출이나 사정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즉 모든 상벌의 공정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동문과 파벌주의에 의한 병폐는 우리 음악계 도처에 만연되어 있으며 이의 시정을 위한 노력은 바위에 계란 던지기와 같아 많은 사람들을 의욕 상실증에 빠지게 한다. ’90년대에 들어와 수없이 탄생한 동인 단체들, 특히 성격 미상인 작곡가 동인 단체들의 난립은 이러한 음악계의 파벌주의가 낳은 결과로 동인단체와 음악대학은 많으나 음악인과 음악교육은 부재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작곡가와 연주자 및 음악교육자에 대한 평가도 작품과 연주 및 교육의 질과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출신학교나 계보 및 학연과 지연에 의한 인맥에 의해 평가가 되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신의 노력과 정진에 의한 수련의 결과로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줄 잘 서기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식의 파행적 행위들이 만연되어 있어 음악계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된다. “한국 교수들의 작품이나 연주회는 들을 것이 없고 학생들의 작품과 연주회는 탁월한 것이 많다.”라는 외국 교수들의 촌평에 우리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구미의 음악회 기간인 가을부터 초여름까지에는 국내에 있다가 여름방학 기간에만 구미 여러 나라의 하기학교나 특별강습회-교수나 전문 음악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학생이나 재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습회-에 참가하여 새학기에 학생들에게 그곳에서 강습받은 것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한심한 작태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우리의 음악과 우리의 음악사회가 바람직하게 이룩되기에는 매우 요원한 입장에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 서구음악을 처음으로 유입한 세대에서부터 오늘의 신세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하나 오늘의 우리 음악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하게 인정받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지난 한 세기 동안 열악하기만 했던 우리의 실정에서 그나마 오늘과 같은 위치의 음악적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우리들 교육현장의 부정적인 일이 많다 하더라도 이와같은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음악계가 그나마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게 된 것에 관해선 그 공을 높이 치하해야만 한다.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듯이 오늘의 우리 음악계도 긍정적인 면 외에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고 이들 부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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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이의 시정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더구나 이들 부정적인 면이 매우 심각한 것일 때에는 개선을 위한 방법도 매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기존의 여러 가지 음악적 환경에 심한 마찰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보다 더 나은 긍정적 개혁을 위해 음악인들 모두가 각자 자신들의 세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돌이켜 보고 이의 시정을 위해 각자가 실행해야 할 개혁안과 의식개혁을 위한 자각이 필요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위에서 거론한 신문이나 주간지의 가십난이나 방송의 뉴스꺼리가 될 만한 일들까지도-실은 이들이 매우 심각한 우리 사회의 음악적 환경의 실상으로 부각된지 오래된 병폐이지만-사실대로 거론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의식의 개혁을 위해 우선 하여야 할 것은 · 우리의 음악관을 세울 수 있는 안목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 우리 전통음악의 연구에서부터 새로운 음악관을 위한 안목이 싹터야 한다. · 우리음악의 뿌리 위에서 서구의 음악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우리문화의 음악으로 음악과 우리사회, 음악과 인간이란 측면을 깊게 생각하고 고

민하여야만 한다. ·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의 내용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그 속에서 예술과 예술가가

담당할 수 있는 몫을 찾고 음악가의 몫과 장에서 올바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들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 역사적 사실들 위에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우리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에서부터 음악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외에 음악가들이 실행해야 할 개혁의 실천 사항들은 · 동문과 파벌주의 및 계보는 타파되어야 한다. · 상벌의 공정화와 정당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 동인단체의 연주는 지양되어야 한다. · 20대 젊은 음악인들의 장을 마련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 지원해야 한다. · 음악분야의 전문화와 세분화가 이루어져야만 된다-특히 음악대학에서 전공분야의

세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교수들 상호간에 세분화된 전문분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해야만 된다-.

· 작품과 연주만으로 작곡가나 연주가를 평가해야 한다. · 우리 음악인들 스스로가 우리나라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교·분석·연구하고 그 자료

들을 교육에 활용해야 한다. · 원로 음악인은 일선 현장에서 물러나 원로의 위치에서 후배 음악인들을 힐책할 수

있는 역할과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 한 세기 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나 우리나라 음악사회는 원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음악인이 별로 없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의 주관이 확립되질 않고 우왕좌왕하는 시대에 우리들 모두에게 회초리를 들고 우리를 꾸짖을 수 있는 원로음악인이 없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를 무척 슬프게 한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음악계는 서구음악의 관점에 우리 음악의 모든 것들을 수용시키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여 왔고 그 결과 우리의 음악과 우리의 음악사회가 혼란의 와중에 빠졌으며 이제는 우리 문화로서의 음악이 완전히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국악이 있질 않은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국악의 경우는 더 한심한 위치와 입장에 놓여 있으며 국악인들의 자성이 매우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세대들이 외쳐 되었던 “우리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배우질 않았어요.”라는 외침이 더 이상 변명이 될 수만은 없다. 이러한 때일수록 모두가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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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계의 제문제와 전망 27

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갈 때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리기 마련이며 당연히 각자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새로움의 기회가 열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현상을 익히 알고 있다. 이에 우리는 우리 음악계에 원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일선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음악계 대 선배의 자리를 지키며 후학을 지도 편달하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탁견과 식견을 제시하며 현재를 진단하고 후학들을 꾸짖을 수 있는 원로음악인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지난 2∼3세대에 걸쳐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음악관을 제시하고 이를 작품을 통해 증명하며 굳건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던 대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기성음악가들의 필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신세대의 탈을 벗어버리고 기성세대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새로움과 희망에 찬 새로운 사회 척도를 제시하며 이를 작품을 통해 증명하려는 강한 힘과 정의와 인류애의 밝고 맑은 정신과 영혼을 소유한 중간 세대 음악가 또한 우리에게는 절실히 요구된다. 신선함만으로도 우리를 들뜨게 하는 신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은 우리들 모두의 미래이다. 이들의 등장이 없다면 그 사회는 죽음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계도 분명 이와같은 전(全)세대에 걸친 음악가들이 필요하며 그러한 사회계층으로 이룩되어져야만 튼튼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세대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지 또는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음악가로서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 자성하여 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원로와 기성세대는 접어 두고라도 중간 세대와 특히 신세대의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우물안 개구리식의 자아의식만 앞세운 덜 깨어 있는 자들로 꿈을 잃어버린 세대로 개인의 자긍심에만 의존한 세대이며 매사에 도덕성과 정의 및 역사의식을 앞세우나 그 이전 세대들에 대해 부정만을 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국수주의자들의 세대는 아닌지 한번쯤 반성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 또한 겁없이 설쳐대는 신 식민지화를 향해 매진하는 세대로서 기성세대들을 답습한 세대로 모방과 탈 한국화가 세계화와 국제화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아닌지 깊이 생각하여 볼 필요성을 아울러 느낀다. ’90년대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음악계가 걸어왔던 길은 개인위주의 개별화되어진 방향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음악 사회적 견지에서 음악을 생각하고 교육과 정책을 입안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현 시점에서 우리들 스스로 전환기적 인식의 변화와 이를 위한 제도의 개선과 개혁을 음악인들 스스로 이룩하질 않는다면 급변하는 세계의 속도와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계의 물결에는 동참할 수가 없게 된다. 교육을 통해 우리음악에 대한 관심과 학술적 자료의 토대를 우리들 스스로 이룩하게 될 때 우리의 음악이 세계의 흐름 속에 살아 남을 수 있다. 다시말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 음악인들 스스로의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 음악이 자립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책의 지원이 국가에서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음악인들 스스로 우리음악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종국에는 독자적이며 자립적인 음악문화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음악의 정책적인 배려에 앞서 우리들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