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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号は、2014 年 10 月に行われた日本民俗学会・国際シンポジウム「“当たり前”を問う!―日中韓・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方とその生活世界」での議論をもとに、それを再編集したものである。 本号の刊行には、公益財団法人平和中島財団アジア地域重点学術研究の研究助成金のほか、科研基盤 A「東アジア〈日常学としての民俗学〉の構築に向けて」(研究代表者・岩本通弥)及び科研基盤 B「市民的教養としての歴史学―国際比較研究」(研究代表者・外村大)の費用が用い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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発刊の辞

本研究雑誌は、研究課題「東アジア〈日常学としての民俗学〉の構築に向けて:日中韓と独との研究協業網の形成」を遂行するため、日中韓 3 カ国の〈日常学〉としての民俗学の「地ならし」を行い、相互の学術交流をより活性化させることを目指して刊行する。

その基盤となる本研究は、UNESCO「無形文化遺産条約」の成立により、その規定や制度に平準化されることで変質の激化した東アジアの民俗学が、もう一方の極に位置するドイツ民俗学の、市民運動的実践との協働性や、その鍵概念である〈日常〉= Alltag を、いかにして包摂できるか、日中韓でそれぞれ特性の異なる民俗学の方法や、その研究蓄積を組み合わせ、かつ「協業」することで、新たな展望を拓く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観光資源化や国家ブランド化に「動員」「回収」される傾向の強い東アジアの学的状況に対し、ドイツを参照に、リージョナルに分散する市民本位の文化政策や住民主体のガバナビリティを築く〈社会 - 文化〉= Soziokultur 概念など、何処の民俗学にも本在する、柔らかな抵抗としてのヴァナキュラー(Vernacular:風土的 / 日常疎通的)な市民実践や生活改善という〈野の学問〉的意義を再創造し、国際的な「多文化共生」の研究協業網を構築する。

2015 年 1 月 14 日 研究代表者:岩本通弥

发刊辞

 为了实施《面向构筑东亚“作为日常学的民俗学”:中日韩与德国的研究协力网的形成》课题,中日韩三国

进行了作为“日常学”的民俗学研究的事前基础准备,以将三国间的学术交流局面更为活泼化为目的而发行了

此刊。

 作为其基盤的本研究的目的是探究由于《非物质文化遗产协约》的签订,被相关规定、制度平准化而发生

了急剧变化的东亚民俗学,如何能达到与处于另一极端的德国民俗学的市民运动的实践进行协力互动,如何包

摄作为其关键概念的“日常”(Alltag),更进一步,日中韩各自有着不同特点的民俗学方法、以及已有的研究

积蓄如何进行有效地配合、协作,以拓展新的研究展望。面对有着很强的被旅游资源化、国家品牌化“动员”、“回

收”倾向的东亚学术状况,以德国为参考,分散于地方(regional)的市民本位的文化政策,及以居民为主体

的自治力(governability)的构筑 < 社会 - 文化 > = Soziokultur 概念等,再创造任何地方的民俗学都原本具

有的、作为软抵抗的(Vernacular: 风土的 /日常沟通的)的市民实践及生活改善这样的“在野的学问”的意义,

构筑国际性的“多文化共生”的研究协力网。

2015 年 1 月 14 日 研究课题主持人 : 岩本通弥

발간사

이 학술지의 간행목적은 연구과제 ‘동아시아 “일상학으로서의 민속학” 구축 : 한중일과 독일의 연구 협업

망 형성’ 을 수행하기 위해 한중일 3 개국에서 ‘일상학’ 으로서의 민속학의 ‘발판’ 을 다지고 상호 학술교류

를 보다 활성화시키는 데 있다 .

그 기반을 이룰 본 연구는 유네스코 (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의

성립과 그 규정 및 제도로 인한 평준화로 말미암아 변질이 격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민속학이 대극에 위치하

는 독일 민속학의 시민운동적 실천의 협동성과 독일 민속학의 핵심개념인 ‘일상 (Alltag)’ 을 수용할 수 있

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해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한중일 민속학의 방법과 축적된 연구성과를 모아 ‘협업’

함으로써 새롭게 전망해 보고자 한다 . 관광자원화와 국가브랜드화라는 조류에 ‘동원 ,’ ‘회수’ 되는 경향이

강한 동아시아의 학문적 상황을 인식하고 독일 민속학을 참조함으로써 지역적으로 분산된 시민중심의 문

화정책이나 주민이 주체가 된 통치능력 (governability) 의 구축을 뜻하는 ‘사회―문화 (Soziokultur)’ 라는

개념 등과 같이 모든 나라의 민속학에 본디 내재되어 있는 부드러운 저항으로서의 풍토적 • 일상소통적인

(Vernacular) 시민실천 및 생활개선이라는 ‘재야의 학문’ 으로서의 의의를 재창조하고 국제적인 ‘다문화공

생’ 을 실천하는 연구 협업망을 구축하고자 하는 바이다 .

2015 년 1 월 14 일 연구대표: 이와모토 미치야 ( 岩本通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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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特集 日中韓 ・ 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方とその生活世界

【日本語】問題提起―民俗学と当たり前

岩本通弥(東京大学)「" 当たり前 " と " 生活疑問 " と " 日常 "」[1]

周  星(愛知大学)「平民・生活・文学―周作人の民俗学」[15]

李 相賢(安東大學校)「ドイツ民俗学と日常研究―ドイツテュービンゲン大学民俗学研究所の村に

ついての日常研究を中心に」[35]

集合住宅/普通の暮らしの今昔

篠原聡子(日本女子大学)「東京のマンションの展開と暮らし」[46]

南 根祐(東国大學校)「ソウル高層集合住宅の展開とアパート暮らし」[56]

王 傑文(中国伝媒大学)「北京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と生活世界の変容」[67]

コメント―普通の暮らしの捉え方

大月敏雄(東京大学)「住み方調査と " 建築計画学 "」[80]

丁 秀珍(東国大學校)「韓国のサルリムサリ研究の展開」[85]

高 丙中(北京大学)「中国民俗学の新時代―公民の日常生活を研究する文化科学へ」[89]

戸 暁輝(中国社会科学院)「民俗学における『生活世界』概念の『当たり前』についての再考」[100]

重信幸彦(国立歴史民俗博物館)「世相史の可能性」[109]

【中国語】

提出问题——民俗学和理所当然

岩本通弥(东京大学) “理所当然”与“生活疑问”与“日常”[113]

周  星(爱知大学) 平民・生活・文学——从周作人的民俗学谈起[125]

李 相贤(安东大学校) 德国民俗学与日常研究——以德国蒂宾根大学民俗研究所对乡村的日常研究为

     中心[139]

集合住宅/普通生活的过去和现在

篠原聪子(日本女子大学) 东京住宅楼的变迁与生活[148] 

南 根祐(东国大学校) 首尔高层集合住宅的发展和公寓生活[157]

王 杰文(中国传媒大学) 北京市高层集合住宅的生活及生活世界的变迁[166]

评论——把握普通生活

大月敏雄(东京大学) 居住方法的调查与“建筑计划学”[177]

丁 秀珍(东国大学校) 韩国“日常生活研究”的发展[182]

高 丙中(北京大学) 中国民俗学的新时代——开创公民日常生活的文化科学[185]

戸 晓辉(中国社会科学院) 再问民俗学“生活世界”概念的理所当然[194]

重信幸彦(国立历史民俗博物馆) 世相史的可能性[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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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民俗学会2014国際シンポジウム「“当たり前”を問う!―日中韓・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方とその生活世界―」は、下記の団体および科学研究費助成金によって挙行された。

日時:2014年10月4日(日)10:30~17:40 開催会場:成城大学3号館003教室

主催:日本民俗学会

共催:科研基盤A「東アジア〈日常学としての民俗学〉の構築に向けて」(研究代表者・岩本通弥)

科研基盤B「地域生活記憶集積メカニズムの解明とアーカイブ施設の社会実験及びその運営手

法の構築」(研究代表者・大月敏雄)

科研基盤B「市民的教養としての歴史学―国際比較研究」(研究代表者・外村大)

後援:成城大学・日本建築学会

協賛:公益信託澁澤民族学振興基金・公益財団法人平和中島財団アジア地域重点学術研究

実行委員岩本通弥(東京大学/実行委員長)、及川祥平(成城大学)、門田岳久(立教大学/事務局長)

川松あかり(東京大学)、小島孝夫(成城大学/開催校責任者)、重信幸彦(国立歴史民俗博物館)

島村恭則(関西学院大学)、周星(愛知大学)、鈴木洋平(東京都市大学/事務局)、田村和彦(福岡大学)

目 次

【韓国語】문제 제기ー민속학과 ' 당연 '

이와모토 미치야(도쿄대학) 「‘당연 ,’ ‘생활의문 ,’ ‘일상’」[206]

쪼 우싱(아이치대학) 「평민 생활 문학 : 쩌우쭤런(周作人)의 민속학을 기점으로」[219]

이 상현(안동대학) 「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ー독일 Tübingen 대학 민속학연구소의 마을에 대한

    일상연구를 중심으로」[236]

집합주택 / 일상생활의 과거와 현재

시노하라 사토코(니혼 여자대학) 「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246]

남 근우(동국대학교) 「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255]

왕 지에원(중국전매대학) 「‘당연함’ 에 대한 재조명」[264]

토론ー일상생활의 연구 방법

오쓰키 도시오(도쿄대학) 「주거방식 조사와 ‘건축계획학’」[280]

정 수진(동국대학교) 「한국 살림살이 연구의 전개」[285]

가오 빙중(북경대학) 「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공민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문화과학」[288]

후 시아오후이(중국사회과학원) 「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 에 대한 재고」[299]

시게노부 유키히코(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세상사(世相史)의 가능성」[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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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일상’

이와모토 미치야 ( 岩本通弥 )

도쿄대학

( 번역 : 김현정 )

1. 평준화되어 가는 동아시아의 도시경관

먼저 이 심포지엄의 코디네이터로서 개최 취지와 전체 구성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 이번에 일본・중국・한국이 공유하는 문제설정이라는 의미에서 공통된 대상을 정하고 이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과제를 설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대상을 고층집합주택에서의 생활방식으로 정한 까닭은 우리에게 ‘당연’ 한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위함에 있고 또 그 ‘생활세계’ 에 초점을 맞춘 것은 민속학의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재고해 보고자 생각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당연’ 한 것이란 무엇일까 ? 나는 시타마치 ( 下町 ) 라 불리는 도쿄의 전통적인 동네에서 3 세대에 걸쳐 내려온 땅에 단독주택을 짓고 살고 있다 . 도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거주형태별 ( 건축방식별 ) 주민구성에서 집합주택 ( 공동주택 ) 세대가 70% 에 이르게 되어 ( 그림 1) 도쿄에서는 내가 소수에 해당되지만 사실 이를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1 게다가 아래의 사진 1 과 2 에서 볼 수 있듯히 예를 들어 우리집 주변에만도 요 10 년 사이에 14 ~15 층 높이의 고층맨션이 들어서서 거리의 경관은 격변했다 . 고층맨션이 4 채의 단독주택 ( 점포 겸 주택의 2 층집에서 내화건축규제로 인해 3 층집이 됨 ) 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겨우 십수 년전의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 1990 년대 후반까지는 목조모르타르 2 층 건물이 줄지어 있었던 시타마치의 경관은 이제는 큰길에서뿐만 아니라 여염집이 모여있는 뒷골목에서조차 거의 사라지고 있다 .

지난 2014 년 7 월 29 일에 5 년마다 실시되는 「2013 년 주택・토지통계조사 ( 속보집계결과 )」가

(그림1) 각 도도부현(都道府県)의 주택건축방식별 비율http://www.stat.go.jp/jyutaku_2013/about/ja/what/current-stat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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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07

(사진1) 고토구 기타스나 3쵸메 (사진2) 아리오 기타스나점

발표되었다 . 여기에서도 일본의 주택건축방식을 보면 단독주택이 5 년 전과 비교하여 115 만 세대 늘어나 4.4% 증가하였고 전국적으로는 54.9% 를 점한 반면 (2008 년에는 55.4%), 공동주택은 141 세대 (6.8%)

증가하여 42.4% 로 늘어났고 특히 고층화의 현저한 진전이 그 경향으로 지적되었다 .2 이러한 경관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집 비스듬한 앞쪽에 2010 년 6 월 초대형 슈퍼마켓 (+ 쇼핑몰 ) ARIO

( 아리오 기타스나점 ) 가 오픈했을 때에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3 ARIO 와 피트니스 클럽을 연결하는 육교 위에서 집 방향을 바라본 적이 있는데 이때 나는 어딘가로 순간이동한듯한 그리고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 예전에 살았던 쓰쿠바 ( 筑波 ) 연구학원도시 혹은 마치다 ( 町田 ) 인지 , 아니면 견학하러 갔던 다마 ( 多摩 ) 뉴타운 어딘가의 광경인지 요리조리 생각해봤지만 그 어디도 아니었다 . 그리고 이 슈퍼마켓의 넓은 매장 ‘분위기’ 가 가져오는 감각적인 기억 [Lehmann 2010] 이 1993 년에 방문했던 한국 서울시 북동쪽 주변부에 위치한 상계동 주위의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재개발지역에서의 경험과 겹쳐진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

한국인 가족과 함께 대량구매를 목적으로 차를 타고 갔었던 초대형 슈퍼에서 문득 떠오른 ‘근미래’ 라는 단어와 함께 그 때의 정경이 되살아났다 . 근미래라는 단어는 약간 부적절할 수도 있겠으나 , 어렸을 적 우주소년 아톰을 볼 때와 같은 순간에 찾아왔던 어딘가 무국적적이고 무기질한 정경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ARIO 에서 본 광경은 여태껏 경험했던 도시화나 근대화 (modernization) 와는 질적으로 상당히 다른 , 지구 규모로 진행되는 거대한 구조변동 앞에 홀로 맞서고 있는 듯한 압박감과 전율 , 동시에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적요한 ‘기분’ 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Lehmann 2010]. 이후 4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당시의

거부감은 없어지고 차츰 ‘당연’ 한 풍경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완전히 익숙해지진 못했다 .4

2.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보통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삶

만안지구 ( 고토구 ) 에 즐비하게 늘어선 타워 맨션군이 만들어내는 경관과 서울 , 상하이 ( 上海 ) 의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나로서는 구분지어 말하기가 어렵고 국적없는 도시경관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 경관만이 아니다 . 지금 우리들의 생활은 여러 장면에서 전지구적인 규모로 전개되는 획일화의 다이너미즘 (dynamism) 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가고 있다 .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경제의 글로벌화 , 고도정보화사회의 도래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 획일적인 프로토콜로 연결된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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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네트워크의 동일화는 개별적인 지역이나 국경을 넘어서 지극히 유사한 변용을 ( 사람들의 생활세계에 )

가져오고 있다 . 결과적으로 모종의 ‘평준화’5가 진행되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앞에 둔 인간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 나아가서는 정치체제의 차이를 넘어 중국인까지도 별반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 과학기술의 진전이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침투하여 전자미디어 네트워크가 전세계를 뒤덮으면서 사람 , 물질 , 정보의 대량적이고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졌다 . 1990 년대 후반 이후 특히 지금 이 세기에 들어서 가속화된 글로벌화라는 일련의 움직임 속에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과 위가 존재한다 . 먼저 이를 직시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

나는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의 가족 · 친족현상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6 한일의 가족・친족을 둘러싼 상황은 처음 방한했던 1980 년대 말과 비교해 제도나 사회시스템 등에서 매우 비슷해졌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인류학적 친족론에 의거해 비교연구를 해왔는데 , 그 모범으로 삼아온 인류학자 시미즈 아키토시 ( 清水昭俊 ) 는 1998 년에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

“과거 서구국가들의 식민지와 같았던 비서구지역의 변화와 서구사회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는 구조적으로 연속되어 있다 . 양쪽 모두 서구 기원의 정치 , 사회 , 문화제도가 지구 규모로 확대되는 운동의 일환이기 때문” 이며 “이러한 상황은 사회과학에도 반 ” 되고 있다고 하 다 . “서구근대를 대상으로 삼아온” 사회학은 “서구근대적인 이론을 장착함으로써 비서구사회에서 관찰되는 친족현상의 많은 부분들이 이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워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며 사회학 역의 확장을 예견했었다 [ 시미즈 1998: 36 ~ 37].

저출산고령화 ( 초고령사회 ) 를 비롯해 가족의 원자 (atom) 화 ( 친족적 유대의 약화와 개인화 , 독거노인세대의 증가 , 가 족 역으로의 시장경제개입 등 ) ,여성의 사회진출 , 성별역할분업의 변화 ( 남녀공동참여 ) 등과 이에 대응한 복지・사회보장제도의 정비 또한 확충되어 한일 간에 유사한 현상과 장면이 병행되어 나타나고 있다 . 양국 모두에서 사회학・사회복지학 연구가 양적으로 늘어남과 동시에 질적으로도 정교하고 치밀해지고 있다 . 여기에 흠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 한편으로 일종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이 또한 어딘가 무국적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지역이나 나라 이름을 바꾸어 넣어도 통하는 상호전환이 가능한 일반이론을 지향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7 한국에서도 민속학자는 사회학자보다 지역적인 다양성과 통시적인 변화과정에 주목하여 초점화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 주 2007], 민속학은 일반법칙보다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 언뜻 보기에는 하찮은 보통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실천을 흔한 물건이나 일어나는 사건 , 평범한 행동이나 상호행위에 주목해서 그 구성단위를 관찰・기록・서술하는 수법을 민속학은 취해왔다 . 특히 연행이론이 발전한 미국의 민속학은 민족지적인 기록이나 서술에서 눈에 띄게 진보하 고 이것이 학문적 특징을 이루어왔다 [ 고나가야・히라야마 2012]. 일상연구를 내세우는 독일 민속학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아시아의 민속학에서도 현실은 여전히 괴리되었다 하더라도 ‘당연’ 한 것에 착안하는 자세는 적어도 그 편린만큼은 살아있다 .

글로벌화의 거대한 물결은 분명 우리들의 생활방식과 본연의 모습을 크게 규정짓는다 . 하지만 그 한편에서 보통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흔하디 흔한 삶의 모습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온 민속학자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실천이 쌓이고 쌓여 예를 들어 가까이에 있는 작은 문제의 해결에서부터 나아가서는 환경오염 , 빈곤 , 빈부격차의 문제 등과 같은 전지구적인 과제와도 조응하며 파급된다고 인식한다 . 또 전지구적인 규모에서 진행되는 다이너미즘 속에서 획일적이고 평판화된 경관이나 삶에 수렴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차이의 관리’ 가 적절히 운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 무뇨스 2013]. 축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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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09

역사적 경험이나 상이한 경제・정치체제 등을 어떻게 활용해 왔으며 글로벌화를 어떻게 익숙한 것으로 길들여 가는지 그 일상화의 과정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보통 사람들의 일상소통적인 (vernacular) 실천 [Baumann 2008] 에 우리 민속학자들은 국가의 차이를 넘어서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3. 생활・범인(평민)・일상

민속학이란 무엇인가 ?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國男 ) 는 『민간전승론』(1934) 에서 “사상 ( 事象 ) 그 자체를 현상으로서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알고 있다 ,’ ‘당연하다’ 고 설명되는 그 안의 진리를 통찰하는 것” [ 야나기타 1990:328] 이라고 정의하 다 . 신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고 흔한 일들 (=사상 [ 事象 ]) 에 대한 착안과 이를 자명시하지 않고 깨닫는 것 , “생활의문” [ 야나기타 1970:401 등 ] 을 품는 것이 스스로의 생활개선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출발점이라 하 다 . 이 때 생활외형 / 생활해설 / 생활의식이라는 3 부 분류를 제시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심어는 바로 ‘생활’ 이었다. 같은 시대의 중국과 한국에서도 당시의 평민이나 범인 8 의 현재 생활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이를 개량하는 것이 민속학의 목적이라 여겨졌다 .

이 심포지엄에서 중국의 조우 싱 ( 周星 ) 씨는 저우 쭤런이 주창한 민속학의 기저사상을 재조명하여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민속학의 출발점이었음을 재확인하 다 .9 한국에서는 내용의 반복 10 을 피하기 위해 현대 독일민속학에서 핵심개념이 된 ‘일상 (Alltag)’ 에 대해 민속학 개혁의 봉화를 올린 튀빙겐 대학에서 장기간 유학하 던 이상현 씨가 그 특징을 소묘해 주었다 . 개혁의 이행 과정을 목격한 이상현 씨는 특히 일상연구를 주창한 예글레 (Jeggle) 의 키빙겐 마을조사에 대해 상술하면서 그 선행연구로 헤르만 바우징거 등의 이주지역연구를 지적한다 . 바우징거 등의 저작은 일본에서는 고노 신 ( 河野眞 ) 씨에 의해 ‘새로운 이주단지’ 라는 이름으로 초역되었다 [ 바우징거 외 1991~93]. 이것은 적층형 집합주택은 아니지만 이주자만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어떻게 페라인 (Verein, 협회 ) 이나 집단이 조직되고 커뮤니티화되는지 또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나 일상생활이 주변의 재래지역과 비교해 무엇이 같고 어떻게 다른지 등을 1970 년대부터 명확히 밝힌 일상연구의 선구적 연구가 되었다 .

아울러 여기서 ‘일상’ 을 내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정리해 두자면 다음과 같다 . 일상화란 일상에 ‘화’ 를 덧붙여서 ‘당연한 것이 되는 것 ,’ ‘당연해지는 것’ 을 뜻하게 되는데 , 이는 다양한 문화 이전 ( 移転 ), 오로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문화요소가 그 생활세계에서 ‘당연’ 한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내포한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 규정된 코드만을 유 ( 領有 ) 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실천은 그러한 기존 코드를 이용하여 새로운 환경을 창의적으로 궁리해내는 수동적 능동성을 발휘한다 . 바우징거가 말한 “과학기술세계” 란 과학기술이 도구로서 일반화된 “생활세계” 를 일컫는데 자동차 , 전화 , 텔레비전 , 컴퓨터 , 스마트폰 등이 당연한 생활환경으로 변해가는 위상이며 , 처음에는 그 이질성 때문에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었던 물건이나 일들이 언제부터인가 자명한 것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행동규범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개념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 레만 2005:156-157, Gerndt 1997, Kaschuba 1989:181]. 가까이에 있는 비근한 일상생활의 자명성에 의문을 갖고 차이화해야만 비로소 자기세계는 객체화되고 대상화 가능한 것이 된다 .

4. 고층집합주택이라는 장소의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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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이번 심포지엄에서 고층집합주택이라는 장소를 설정한 이유는 동아시아 민속학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연속성’ 이라는 관념을 잠시 접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 건축설계자에 의해 규격화된 공간이면서 지역에 전해져 내려온 문화전통이라는 단순한 설명은 통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문맥의 다층성에 입각한 현실을 응시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 농업이 기간산업이었던 산업구조에서 벗어나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는 속에서 도시의 근로자 가족이 생활하는 그릇으로 규정지어진 거주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상황’ 에 맞춰서 일상소통적인 문화를 창조해가는지 , 유사한 ‘상황’ 을 놓고 다시금 ‘문화’ 에 의한 ‘구속성’ 11 의 문제를 물어 밝혀보고자 한다 .

글로벌화로 인한 평준화가 확대되는 속에서도 한중일 사이에 그 어떤 차이가 인정된다면 현재 사람들의 생활을 구속하고 있는 ‘상황’ 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전개의 산물로서 ‘문화’ 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 “세상의 흔한 사실” 을 서술하고자 했던 야나기타의 『명치대정사 세상편』은 근대 (modernization) 에 이르러 새로운 세태로 재편되어 갔던 생활의 체계적인 변천사=문화사의 시도 다고 필자는 평가하고 있다 . 하지만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설명” [ 야나기타 1993:6]12 하는 작업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이 책의 기술법은 후대 사람으로서 보자면 아쉽게도 현실상황 분석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 그 당시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자명성조차도 시시각각 불분명한 것으로 변해간다 .

이와는 대극적인 방법을 고안한 것이 고현 ( 考現 ) 학 (Modernologio) 의 곤 와지로 ( 今和次郎 ) 이다 . 민가조사의 선구자로 와세다 ( 早稲田 ) 대학 건축학과 교수 던 곤은 1925 년 여름에 첫 고현학 조사 ‘도쿄 긴자거리 풍속기록’ 을 수행했다 . 그리고 ‘하숙생의 소지품조사’ (1925) 와 ‘신가정의 물품조사’ (1926) 등 방안에 있는 가재도구부터 자잘한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지품을 스케치와 함께 관찰・기록하 다 . “보통 상식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는 물건까지도 주의 깊은 태도로 기입” 하고 “그 어떤 우연한 것도 놓치지 말고 모두 기입” [ 곤 1987:225] 한 결과는 오늘날 귀중한 것이 되었다 . 토론에서 야나기타의 세상사 ( 世相史 ) 에 관해서는 시게노부 유키히코 ( 重信幸彦 ) 씨가 , 곤 와지로의 조사법과 그 계보를 잇는 니시야마 우조 ( 西山夘三 ) 의 주거방식 조사 및 요시타케 야스미 ( 吉武泰水 ) 의 사용방식 조사 등에 대해서는 오쓰키 도시오 ( 大月敏雄 ) 씨가 각각 소개하 다 .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이 조사법은 그 중요성은 인식되면서도 좀처럼 실시되기 어려웠다 . 하지만 일본에서는 씽크탱크인 CDI 가 상품과학연구소와 1975 년부터 약 10 년을 주기로 3 번에 걸쳐 “생활재생태학” 이라 는 이름 아래 일본 가정이 보유하 는 생활재에 대한 대규모 조사 를 수행하 다 [ 상품과학연구소 +CDI 1980]. CDI 의 조사는 1992 년에 이르러 중지되었으나 2002 년에 오사카 ( 大阪 ) 의 국립민족학박물관 ( 이하 , ‘오사카 민박’ ) 이 한국의 고층아파트에 사는 가족의 생활을 거의 그대로 전시하는 ‘2002 년 서울스타일 : 이선생님댁의 살림살이를 있는 그대로’ 라는 특별전을 개최하 다 .13 한국에서는 이 전시의 공동개최를 거치면서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를 조직적으로 인계받아 발전시켰고 ‘살림살이’ 조사라 명명하며 관련 자료를 축적하고 있음은 특필할 만하다 .

토론자인 정수진 씨의 발표제목에서 살림살이를 처음에는 생활재생태학으로 번역하 는데 , 일본어 표준어로 직역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 살림살이는 생활재나 가재도구와 같은 물질문화를 지칭함과 동시에 ‘살림살이가 좋다 ,’ ‘나쁘다’ 와 같이 쓰이면서 가세나 가계를 꾸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 내면적인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식까지 포함한 어휘인 것이다 . 살림살이가 외재화하여 표현된 것이 일상생활이나 생활재 전체인 것이며 실존적인 ‘생활세계’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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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11

5. 살림살이와 생활세계

파악하기 어려운 살림살이=생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외재적인 생활재 모두를 기록하는 생활재생태학의 수법이 적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조사가 2005 년에 충청북도 현 세종시의 농촌에서 이루어진 후 2006 년부터는 ‘지역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매년 3 곳에서 살림살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현재 19 곳의 조사보고서가 국립민속박물관의 홈페이지에 아카이브화되어 공개되고 있다 .

유감스럽게도 한글판 홈페이지에서만 이 자료를 열람할 수 있지만 , 2020 년에는 41 개 지역 41 가정의 살림살이 조사자료가 축적될 예정이라고 한다 . 농어촌의 살림살이가 많았지만 , 2007 년부터는 도시민속지의 형태로 대도시 조사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고층집합주택의 경우 오사카 민박의 이씨 일가의 사례까지 포함시키면 3 가지 사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확보할 수 있다 . 예를 들어 울산의 아파트 사례는 다음 URL 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http://efw.nfm.go.kr/service/book/salim/110/오사카 민박의 조사를 주도한 사토 고지 씨는 ‘사회의 이미지에서 개인의 현실 (real) 로’ 라는 표현을 통해

CDI 에 의한 생활재생태학의 목표가 다수의 샘플링조사 14 에 기초하여 계층이나 지역에 따른 일본사회의 평균적인 이미지를 추출하는데 있었지만 , 이미 세계는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계속해서 이행하고 있고 이러한 시점에서 ‘2002 년 서울스타일’ 전시에서는 철저히 개인 , 개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자 하 음을 밝힌 바 있다 [ 사토 2002a:104 ~105].15

대표성과 전형성을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 도시계획이나 건축가들의 설계 비전이라는 큰 틀에 규정된 소여의 공간 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배열하고 스스로의 생활세계를 연출하고 있는지 , 즉 “하나의 ‘문화’ 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조작의 조합

4 4 4 4 4

을 밝혀내는 것” [ 드 세르토 1987:12, 방점은 일본어 번역본 원문과 같음 ] 을 통해 소비자라는 우회적인 이름이 주어지고 감추어진 피지배의

위치나 장소를 “헤테로토피아” [ 푸코 2013:36, 일본어로는 ‘異在郷’ 으로 번역 ] 로 전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6

당연한 것은 너무 자명하기에 평소에는 의문을 던지기 어렵다 . 이것은 2011 년 동일본대지진 이후에 자주 들었던 ,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한 것’ 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 가까운 이웃나라의 유사한 일상이나 일상생활과 중첩시켜 보는 것은 스스로의 자명한 세계 (world-taken-for-granted) 에 ‘이화 ( 異化 )’ 의 시선을 드리우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 깨닫게 된 ‘생활의문’ 을 차례로 등록하고 축적해가는 것 외에 지금 내게 좋은 지혜는 떠오르지 않는다 . 생활재생태학이나 살림살이조사는 사토 씨의 조사에서는 총 40 일 , 살림살이 조사에는 2 명의 조사원과 사진가 1 명이 11 개월이라는 방대한 시간과 노력 , 비용이 투입되었다 .17 같은 방법을 일본과 중국에서 시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민간문학으로부터 발전하여 구술성 (orality) 연구의 전개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주창된 중국의 ‘생활세계’ 연구를 비롯해 일본의 세상사 ( 世相史 ) 연구 , 생활개선운동 연구의 축적 [ 다나카 편 2011] 등 방법적으로도 동아시아의 민속학이 각각의 특성을 살피고 조합시켜 협업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전술 또한 닦여질 것이다 . 토론에서는 내러티브・구술을 통한 생활세계 연구에서 이미 많은 연구를 축적해온 중국의 까오 삥종 ( 高丙中 ) 씨와 후 샤오훼이 ( 戸暁輝 ) 씨가 각각의 의견과 전망을 피력하 다 .

특히 후 샤오훼이 씨는 생활세계와 일상세계를 엄밀히 변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즉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되며 생활세계는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의 의미에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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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것이다 . 현상태에서 한국의 살림살이 연구는 일상생활의 물질연구 범위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겠지만 , 정수진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연구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상학적인 실존이해이다 . 물질은 민속학적 지각에 있어 외면적인 실마리이자 그 기능과 생활사적 연관 속에서 개별적으로 관찰・파악되어야 한다 [Gerndt 1997:129]. 뿐만 아니라 추억이 담긴 관광지의 토산물 등에 대한 물건이야기 ( モノ語り )[ 하시모토 2005] 나 이들을 꾸미고 포장하는 방법과 같은 일상소통적이고 조형적이며 창의적인 고안 등 민속학적 수법과 축적을 활용할 수 있는 국면은 넓게 펼쳐져 있다 .

6. 비교대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마지막으로 이번 심포지엄의 주요 과제에 대해 소개하겠다 . 도쿄・서울・베이징의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생활에 대해서는 시노하라 사토코 ( 篠原聡子 ) 씨 , 남근우 씨 , 왕 지에원 ( 王傑文 ) 씨가 발표하 다 .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여 논점 또한 다양하지만 , 여기서는 필자인 내 관점에 비추어 약간의 ‘생활의문’ 을 접객 ( 손님접대 ) 공간과 방에 대해 제기해 보겠다 .

시노하라 씨는 일본 집합주택의 공동현관 부분에 자동잠금장치가 도입되기 전과 후에 공용공간 설치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 예전의 일본 가옥에는 엔가와 ( 縁側 ) 라 불리는 툇마루가 있었고 혼례나 장례식 때에는 이마 ( 居間 ) 라는 방과 불단이 놓여있는 부쓰마 ( 仏間 ) 라는 방을 개방하는 “타자에게 열린 집” [ 시노하라 2008:17] 이었다 . 하지만 일본의 주택은 “특히 집합주택의 세대 ( 住戸 ) 라고 하는 밀실공간이 궁극적인 사적 역에 속하게 되어 외부와의 접점을 갖지 않는 것” [66] 으로 변화했으나 여기에 자동잠금장치가 도입됨으로써 세대 내에 있었던 일식방의 접객기능이 게스트룸이라는 형태로 공용공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 집합주택에 설치된 철제문의 잠금장치로 인해 자유로운 외출이

(사진3)공급 중인 납골당 (사진4)사진으로 꾸며진 납골당

(사진5)고인과 함께 한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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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13

가능한 안전한 주택형태가 되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한국에서도 이미 분석된 바 있다 [ 전 2014:297]. 한국과 중국에서는 철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는 먼저 거실과 객청 ( 客庁 ) 이라 불리는 넓은 리빙룸이 있어서 대가족 등이 모일 수 있는 개방적이고 정돈된 공간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 한국에서는 거실을 둘러싼 형태로 각 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18 제사 등과 같은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의 접객 기능을 지금까지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일본처럼 이마에 물건이 넘쳐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남근우 씨가 지적한 것처럼 소파가 있어도 온돌바닥에 앉는 좌식생활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식탁 ( 다이닝 테이블 ) 이 도입된 이후 다타미 ( 畳 ) 도 줄어들어 바닥에서 의자에 앉는 좌식생활로 일상적 행동거지의 대부분이 바뀌어버린 일본과는 크게 대조적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

살림살이 아카이브에 수록된 한국의 집안을 연출하는 가족사진들을 보더라도 그 사진들 중에 고인의 유 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 여기서는 고인의 사진을 상시 걸어두거나 놓아두지 않는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 평소에는 창고나 장롱에 보관하는 유 은 제사 때에만 방안에 놓이게 된다 . 사람이 죽으면 고인 개인의 침구 19 를 폐기하는 관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완물상지’ ( 쓸 데 없는 물건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본래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일 )20 의 의식도 작용해서인지 현대 한국의 집에는 결혼식을 비롯한 다양한 가족사진은 장식해도 고인의 사진은 배제되어서 집은 ‘산자의 공간’ 으로만 존재한다고 일본인인 내 눈에는 비친다 . 한국에서는 1990 년대 말부터 화장이 급속히 진행되어 납골당 형태의 묘지가 늘어났는데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진 3・4・5 에서 볼 수 있듯이 고인과 함께한 가족사진으로 점차 장식되면서 산자와 죽은자 사이의 공간분리는 한층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에서도 사십구재까지는 거실의 한 곳에 유 을 모시고 고인에게도 음식을 올리지만 이 때가 지나면 유 은 치워지게 된다 . 애착의 마음에서 사진을 그대로 모셔두었다가 찾아온 친척이나 지인들로부터 주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

한편 , 일본의 독거노인 등의 집에서는 거실을 장식하는 배우자의 유 이 차지하는 비율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광경을 때때로 목격하게 된다 . 제단처럼 고인의 사진을 모셔두고 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최근에는 ‘곁에서 드리는 공양 ( 手元供養 )’ 이나 ‘자택공양 ( 自宅供養 )’ 이라 하여 유골이나 재를 집에 보관하거나 펜던트로 만드는 등 위령의 장소를 가까운 곳에 두는 현상도 늘어나고 있다 . 사십구재에 절 ( 묘지 ) 에 안치할 때까지 화장한 유골을 일단 집에 모시는 풍습도 토장 ( 매장 ) 위주 던 근세시대에는 없었고 도쿄 ( 東京 ) 라는 근대도시의 생활세태 속에서 생성된 것이었는데 ,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구분이 모호해져 가고 있다 . 모리 겐지 ( 森謙二 ) 는 2004 ~ 5 년 무렵부터 가족의 사체를 매장하지 않고 자택에 방치해두는 사체방치사건이 빈발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 모리 2014:44]. 매장이라는 합의가 무너져버린 이러한 현 상의 배경에는 ‘돈이 없어서 장례를 치룰 수 없었다’ 든지 아들이나 친척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연락하지 않았다’ 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설명된다 . 하지만 주변 지인들과의 접촉을 스스로 끊어버린 자기방임자 (self-neglector) 로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체력적으로도 주변을 치울 수 없어서 쓰레기집으로 변해버린 난잡한 ‘일상’ 과 ‘생활의식’ 21 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찾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

사소한 비교대조일지라도 ‘생활의문’ 을 쌓아감으로써 스스로의 생활세계의 자명성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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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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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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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ウジンガー, ヘルマン 2005『科学技術世界のなかの民俗文化』文楫堂(河野眞訳)[헤르만 바우징거. 2005. 『과학기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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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ーコー,ミシェル 2013『ユートピア的身体 /ヘテロトピア』水声社(佐藤嘉幸訳 )[미셀 푸코 . 2013. 『유토피아적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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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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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http://efw.nfm.go.kr/ebook/ecatalog.jsp?Dir=15 (검색일: 상동).

국립민속박물관. 2010. 도시민속조사보고서06. 『울산 달동 유정수 박은경 가족의 살림살이』.

URL: http://efw.nfm.go.kr/service/book/salim/110/ (검색일: 2014.08.25)

EBook: http://efw.nfm.go.kr/ebook/ecatalog.jsp?Dir=82 (검색일: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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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주 하. 2007. “두 가지의 민속학과 의식주 연구: 한복・한식・한옥에서 복식・음식・주거로.”『민속학연구』20. 국립민속박물관.

(영어 및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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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ndt, Helge. 1997. Studienskript Volkskunde. Waxmann.

Kaschuba, Wolfgang. 1989. “Popular Culture and Workers’ Culture as Symbolic Orders: Comments on the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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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hmann, Albrecht. 2010. “Stimmungen und Atmosphären: Ihre Wirkung auf das Erinnern und Erzählen 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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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気分と雰囲気―意識分析のコンクストにおける記憶と語りに及ぼす影響〕.” 관서학원대학 심포지엄 『‘구술’연구의 최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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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öller, Maike. 2009. DIE GRINDELHOCHHÄUSER.

Ein Film von Maike Mölle: http://www.grindelflm.de/index.html (검색일: 2014.08.25).

1  초등학교 3 학년 향토학습에 쓰이는 사회과 부독본 『우리들의 고토구 ( わたしたちの江東区 )』( 고토구 교육위원회 ) 중 1956 년에 태어난 필자가 사용했던 1964 년판에서 고토구는 “큰 공장이 많은 고장” 이라고 기술되었다 . 1965 년생인 동생이 사용한 1973 년판에서는 “큰 주택지가 많은” 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 큰 공장부지에 1970 년도 전후부터 공단이나 도쿄도 ( 東京都 ) 가 운 하는 주택단지가 다수 건설되었다는 것은 1973 년 당시부터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 중소 규모의 민간 맨션

이 차츰 증가하여 단독주택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은 실감할 수 없었다 . 2  2008 년에 비해 “1・2 층건물” 은 3.2%, “3 ~ 5 층건물” 은 1.5%, “6 층이상건물” 은 16.3% 각각 증가하여 “6 층이상건물”

이 공동주택 전체증가율 6.8% 를 크게 웃돌고 있다 . “6 층이상건물” 의 내역을 살펴보면 “11 층이상건물” 이 22.8%, “15 층

이상건물” 은 47.5% 각각 증가하여 층수가 높아질수록 증가율도 높아지고 있으며 “공동주택의 고층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현저히 보여주고 있다”〔총무성통계국 2014〕.

3  소부 ( 総武 ) 본선 엣추지마 ( 越中島 ) 지선 일본화물철도 (JR 화물 ) 의 오나기가와 ( 小名木川 ) 화물역이 업무를 스미다가

와 ( 隅田川 ) 역에 이관하면서 재개발되었다 . 이토요카도 (イトーヨーカドー ) 와 119 개의 전용상점가 건물 ( 제 2 구역 ), 피트

니스 클럽 ( 제 1 구역 ) 을 합친 연면적 약 12 만㎡에 이르는 대형상업시설을 기축으로 하여 남쪽 제 3 구역에는 4 개동의 고층

맨션군 ( 도쿄 스위트 레지던스 ) 과 개호노인보건시설 ( 아오이노소노〔葵の園〕・고토구 ) 가 개설되었다 . 4  고토구의 실태조사보고에 따른 맨션건설 시기구분 ( 권말자료 1) 에서는 1975 년부터 86 년까지를 「민간맨션 융성기」라 하

고 있지만 [ 고토구 2009], 나는 이 시기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다 . 이후에도 만안지구의 임해지역 개발이 진행되어 고토구 인구는 현재 거의 50 만 명에 육박한다 . 또 그림 1 에서 보듯이 도도부현으로 구분된 건축방식별 비율에서 도쿄도가 돌출되어 있는데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

5  이 글에서 ‘평준화’ 란 프란세스 무뇨스가 urbanization + bana( 평범하고 속된 ) 로 만든 조어 urbanalization( 원어는 스페인어 ), 일본어로는 ‘속도시화 ( 俗都市化 )’ 로 번역된 개념을 의식해서 쓰 다 [ 무뇨스 2013]. 이 용어의 함의는 흔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

6  다이쇼 말년 이후에 갑자기 빈발하게 된 이른바 친자동반자살 ( 親子心中 ) 을 한일 비교의 시점에서 파악하고자 하 다 [ 이

와모토 1993, 2006 등 ]. 최근에는 일본에서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간병살인 ( 介護殺人 )’ 이나 ‘고령자동반자살 ( 老老心中 )’에 대해 한국의 유사한 현상과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 일본에서는 간병살인을 뜻하는 ‘개호살인’ 이라는 표현이 1985 년에는 등장했지만 , 부모살해가 절대악으로 받아들여졌던 한국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 하지만 2014 년 1 월

에 발생한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의 아버지 (57 세 ) 가 조부 (84 세 ), 조모 (79 세 ) 와 함께 “동반자살” 한 사건은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여론을 환기시켰고 이 절대적인 규범은 그 이후에도 흔들리고 있다 .

7  학문 역의 구별을 따지는 것이 그다지 상책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 사회학에서도 생활사 ( 라이

프 히스토리 ) 를 구사하는 기시 마사히코 ( 岸政彦 ) 가 특히 “보통 인생의 기록” 을 주장한 『거리의 인생』은 제명에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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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17

공상으로 그려보는 세계보다 숨겨진 현실이 훨씬 깊이가 있다” 고 한 야나기타 ( 柳田 ) 의 『산의 인생』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 기시 2014]. 매우 뛰어난 작품이지만 , 구술 ( 語り ) 을 “인생의 단편집” 으로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 ( 物語 )” 로 파악

했다는 점에서 민속학과의 미묘한 관점의 차이가 엿보인다 . 하지만 여기서 쓰인 “보통 인생” 과 마찬가지로 사토 고지 (2002b)의 저작에도 “보통 생활” 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는데 이 글에서 사용하는 ‘보통 사람들’ 도 표준적 , 대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

8  이토 노리야 ( 伊藤徳也 ) 는 저우 쭤런 ( 周作人 ) 의 특징이 ‘생활예술’ 의 주체로서 ‘범인 ( 凡人 )’ 을 발견한 데 있다고 파악

하 다 [2012]. 9  이하에서 중국의 인명 및 지명은 관례적인 일본어 읽기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적용되고 있는 현지어에 가까운 ‘발

음표기’ 로 한다 . 중국어 사성을 무시한 표기법이지만 , 일본어 읽기로는 중국 인명의 성 ( 姓 ) 인 高 , 戸 , 黄 , 洪 , 孔 , 江 등은 모두 ‘코우 (コウ )’ 가 되기 때문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 앞으로의 국제교류를 고려할 때 이러한 혼동은 피할 필요가 있으

므로 원어발음에 가깝게 표기하기로 한다 . 10  남근우에 따르면 예를 들어 송석하는 1938 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속에서 풍속으로」에서 “과거의 잔존물” 인 민속

에 대해 “풍속이란…현대의 호흡할 만한 현대의 것” 이라고 하며 새로운 풍속으로 재생시킬 만한 “건전한 오락” 을 부활시켜 “국민의 정서적 만족을 채워주” 고 “情操的 함양을 꾀하” 자고 주장했다 [ 남 2013:102].

11  도로시 노이즈 (Dorothy Noyes) 는 오늘날 세대계승적인 ‘문화’ 보다도 ‘상황’ 에 의한 구속이 새로운 문화창조를 이끌어낸

다고 논하 는데 , 이번 심포지엄의 과제설정에는 이에 대한 재검증의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 노이즈 2011:8]. 12  이 문장의 뒤를 이어 야나기타는 “이 점이 향후에 어떻게든 고민되어야 할 문제” 라고 하면서 과제로 남겼다 [ 야나기타

1993:6]. 13  일본에서는 이후 1980 년부터는 파루코 ( パルコ ) 의 씽크탱크인 ‘ACROSS’ 편집실이 , 1992 년부터는 하쿠호도 ( 博報堂 )

의 생활종합연구소가 마케팅의 관점에서 ‘생활정점조사 ( 生活定点調査 )’ 를 이어오고 있다 . 14  1975 년 첫 번째 조사에서는 140 가정에 조사표를 배포하고 88 가정에서 사진촬 을 하 다 . 이 외에도 국 ( 런던 ), 프랑

스 ( 파리 ), 독일 ( 뒤셀도르프 ) 의 각 5 세대와의 국제비교도 이루어졌으며 계층 등에 따른 평균적인 이미지 ( 像 ) 추출이 그 목적이었다 .

15  또 사토 씨는 “이미 공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있습니다 . 주택은 사회의 코스몰로지 (cosmology) 가 반 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 .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기껏해야 물건을 통해 자신다움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때문에 조사에서는 공간이라는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물건에 주목했습니다 . 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에게 삶의 보람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라고도 설명하 다 [ 사토 2002b:1].

16  푸코는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 일본어로는 ‘非在郷’ ) 에 대해 권력으로 질서지어진 현실공간을 보다 나은 이상 ( 理想 )으로 바꾸어 만드는 사람들의 실천을 헤테로토피아라 명명했다 . 이에 관해서는 졸고 [ 이와모토 2013] 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

17  초기부터 살림살이 조사를 주도했던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천진기 씨는 이 조사가 오사카 민박의 서울스타일 특별전뿐만 아니라 다니엘 밀러 [Miller (ed.) 1998] 등에 의한 새로운 인류학적 물질문화연구의 향 또한 많이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구상된 것임을 강조하 다 (2014 년 5 월 7 일 인터뷰 ).

18  심포지엄 토론에서는 일본의 세대공간 설계에서 최근 맨션의 경우에도 ‘속복도 ( 中廊下 )’ 가 당연한 것으로 취급된다는 언급이 있었다 . 이러한 당연시되는 의문을 오쓰키 씨가 예로 든 것이었는데 , 가족이 모이는 리빙룸을 거치지 않고 속복도를 통해 직접 각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는 가족의 ‘일상’ 또한 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가족에게조차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의식의 발생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

19  ‘원앙금침’ 이라 하여 부부가 같은 이불과 베개를 쓰고 동침하는 관행이 있던 한국에서는 지금도 당연한 습관처럼 부부가 더블베드를 쓰는 것이 자명시된다 . 일본에서는 조사 수치의 차이는 있으나 ‘부부별침’ 과 ‘이실이상 ( 異室異床 )’ 이 과반수를 이뤄 화제가 된 바 있다 . 50 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된 시니어컴의 국제비교 (2004) 에 따르면 부부별침은 일본 40% 에 대해 한국도 19% 를 기록 [ 고바야시 2013:18] 하여 한국에도 여러 규범코드가 병존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 실제로 2002 년 서울스타일에 등장했던 아파트 사례에서는 거실의 피아노 위쪽 벽에 암갈색으로 변한 할아버지 사진이 , 텔레비전 오른쪽 위 벽에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큰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 국립민족학박물관 2002:35]. 단 주의해야 할 것은 피아노 위쪽의 사진

은 유 이라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 사진 속 인물이 모자를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사진은 장식적 요소가 강한 인물사진이

라 여겨진다 . 또 텔레비전 쪽 가족사진과의 대조를 통해 이 사례 역시 산자와 죽은자의 공간분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20  한국에서는 하찮은 것에 구애되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이나 학문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도 경계하는 경향이 강하다 . 중국의 왕 지에원 씨의 발표에서는 베란다를 점령한 불필요한 물건과 주부의 미덕 사이의 관계가 지적되었다 .

21  아루가 기자에몬 ( 有賀喜左衛門 ) 이 논하는 생활론의 핵심은 “생활의식” 에 있는데 , 예를들어 아루가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이는 기아 ( 捨子 ), 고용살이 , 매신 , 아살해 (まびくこと ), 수양자녀 ( 里子 ) 등과 같은 일들이 그 당사자의 생활의식을 찾아 올라가보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 아루가 1969:347] 고 말하면서 그 인식을 밝힌 바 있다 . 간병중의 동반자살의 경우에도 평소의 일상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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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생활의문,’ ‘일상’(이와모토)

시대구분 민간맨션 융성기 주택공급 침체기 초고층맨션 융성기 임해지역 본격개발기

경제정세 · 제 1차 오일쇼크 (1974)

· 제 2차 오일쇼크 (1979)

· 플라자합의 (1985) 로 인한

거품경기와 그 붕괴

·경제불황과 경제의 글로벌화 ,

산업구조재편의 가속

·금융구조개혁에 따른 경기회복 ,

부동산투자가열 ·경기의 급변

주택정책

동향

· 거주수준 , 주환경 수준의

도입

·대도시지역에서 양질의 주

택공급

·성장기 가족세대용 공공임대

주택의 공급

·도심거주촉진(규제완화)

· 주택성능 도입 , 기존주택의

내진화 촉진

·분양맨션의 관리 , 재건축 대책

· 저출산고령사회를 뒷받침할 거

주환경정책

고토구 인

구동향

· 도쿄도 내에서의 핵가족세

대 전입초과로 인한 인구증

·다른 현으로의 성장기 가족

세대 전출초과로 인한 인구

감소

·젊은 단신세대 , 성장기 가족

세대 전입초과로 인한 인구증

·젊은 단신세대 , 핵가족세대 전입

초과로 인한 인구증가

고토구 주

택건설동

· 민간분양맨션의 건설증가

·본인소유집을 중심으로 한

세대공간 규모의 확대

·지가 등의 급등 ·급락

·사무실 ·점포 등의 건설증가

와 분양맨션공급의 침체

·임대주택공급의 점유율 확대

· 초고층맨션의 건설증가 ·개

발규모의 대형화

·대규모 공공임대주택의 재건

축 시작

·지가하락 멈춤

·임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고층

맨션 개발의 본격화

· 원룸 맨션의 공급확대

(주) 이 조사에서 '성장기 가족세대'는 '18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핵가족세대,' '성숙기 가족세대'는 '18세 이상의 자녀가 있는 핵가족세대'를 뜻한다.

출전) 고토구. 2009. 『고토구 맨션 실태조사(개요판)』. 고토구 도시정비부, 2쪽.

(권말자료1) 고토구 맨션건설의 변화

1. 1970 년대 이후 맨션건설의 변화

인구총수 및 연간 인구증감수의 추이

【인구총수】(

명)

【인구증감수】(

명)

1970 1975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인구총수 인구증감수자료: 「주민기본대장에 따른 도쿄도의 세대와 인구」도쿄도

「도쿄도의 통계(외국인등록수)」도쿄도

고토구 내 건축물의 착공 바닥면적과 평균지가 공시가격의 추이

1970 1975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연간착공

바닥면적】(

㎡)

【평균지가

공시가격】(

만엔/㎡)

주택바닥면적 주택 외 건축물의 바닥면적

공시가격(주택지 평균) 공시가격(상업지 평균)

자료: 「건축통계연보」도쿄도

「지가공시」국토교통성

민간맨션 융성기 주택공급 침체기 초고층맨션

융성기임해지역 본격개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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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19

평민 생활 문학: 쩌우쭤런(周作人)의 민속학을 기점으로

쪼 우싱 ( 周星 ) 아이치대학

( 번역 : 이종미 )

중국민속학은 근년 ‘비물질문화유산 (무형문화유산 ) 보호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사 이래의 번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 그러나 일부 민속학자들은 한 분과학문으로서 민속학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그 전도를 우려하기도 한다 . 물론 이 위기감은 단순히 세계 각국의 민속학으로부터 전염된 게 아니다 . 무형문화유산 보호운동 과정에서 중국민속학이 지향한 포부와 실제 능력의 괴리와 같은 , 현실을 직시한 결과 생겨난 것이다 . 또한 그것은 민속학이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 , 문화연구 (컬츄럴 스터디즈 ) 등과 경계가 날로 모호해지고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 중국 민속학자들이 같은 학술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초래된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위기감의 존재는 , 가령 지금 어떤 특정 주제와 지역의 민속 연구가 날로 발전해가고 있다 해도 , 또

민속학이 인기 있는 학문으로서 주목과 각광을 받고 있다 해도 , 중국의 민속학자들로 하여금 다시 학문의 원점으로 돌아가 민속학의 기본 문제들과 마주하기를 요구한다 . 이에 , 이 글에서는 중국민속학의 원점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안내로서 쩌우쭤런 ( 周作人 )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 학사적 관점에서 금일의 중국민속학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도해보겠다 . 주지하다시피 쩌우쭤런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민속학을 제창한 인물로 여명기의 중국민속학을 선도한

중심인물로 일컬어진다 .1 그의 연구가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는 여명기 중국민속학의 가능성과 한계이며 , 그가 직면한 문제 역시 당시 중국민속학이 직면했던 혹은 지금도 직면하고 있는 기본적인 과제라고 생각된다 .

1. 격변의 시대와 동서양에 통달한 쩌우쭤런 쩌우쭤런 (1885년 1월 16일 -1967년 5월 6일 )이 태어나기 45년 전인 1840년 , 중국은 아편전쟁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이른바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로 돌입했다 . 그 후 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참패하고 세습제의 청 왕조는 비바람 속에 요동치게 되었다 . 그리하여 각종 구국 활동 및 혁신적인 주장과 시도가 줄줄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민족국가의 탄생이 합창되고 있었다 . 이처럼 연달아 서양과 동양에 정복당한 중국은 양자로부터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받으며 점차 문화적으로 자신감을 잃어갔다 . 이게 청조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그와 같은 세대의 ‘지식인’이 처했던 격변의 시대 배경이다 .

1901년의 17세에 쩌우쭤런은 난징 ( 南京 )의 강남수사학당 ( 江南水師學堂 )에 입학했다 . 그곳에서 신식의 외국어와 중국어 과목을 이수했고 , 해군 관련 지식과 일반 과학 지식을 배웠으며 , 또 영어를 배워 서양 사상과 접촉했다 .2 그리고 1906년 국비유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 건너가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 하지만 그의 개인적 흥미는 시종일관 문학을 향하고 있었다 . 서양 문학의 연구를 위해선 그 입문 단계에서 최소한의 고전적 지식이 필요한 까닭에 , 그는 먼저 신화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 이어 서양과 일본의 신화와 동화 및 그것들과 관련한 학설과 이론을 적극적으로 번역 , 소개함으로써 눈 깜짝할 사이에 중국의 지식계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 또 인류학의 신화 해석법을 익히고 나서 그는 민간문학에 대해 강한 의욕을 갖기 시작했다 . 동시에 당시 세상을 석권하고 있던 문학혁명이나 백화문운동 ( 白話文運動 ), 5·4 신문화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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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대한 반항이나 사상혁명의 주창과 같은 면에서 그는 확실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 이처럼 그의 문학적 지향과 민속학적 지향은 서로 연동하기 때문에 , 이하에서는 그의 번역 작업과 저술 활동을 광의의 ‘민속학’ 범주에 넣어 정리해보겠다 .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쩌우쭤런은 랭 (Andrew Lang)의 신화 연구를 접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 그의 초기 학술 활동은 주로 당시 서양의 최신 이론이었던 인류학의 진화주의 신화 연구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그 중심이 놓여 있었다 . 그는 랭의 관습과 신화 나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의 황금가지 등에서 민속학의 방법을 익혔는데 , 다음과 같은 진술이 좋은 보기다 . “가령 어떤 나라에서 누가 봐도 황당한 기습 ( 奇習 )을 보았다면 , 장소를 바꿔 이와 비슷한 습관이 기괴하다고 인식되기는커녕 당지의 예절 사상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라를 찾아내야 한다 .” 또 “대개 현대 문명국의 민속은 그 대부분이 바로 고대 야만적인 풍속의 잔존 , 즉 야만적 풍속이 변형된 것”으로 , “문명의 의관을 걸친 사람들의 마음속 역시 여전히 야만인”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 , 그는 이것들은 “문명의 야만”이라고 불렀다 .3 훗날 중징원 ( 鍾敬文 )이 지적했듯이 ,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민속학의 경우 서양 이론에 대한 소개는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절차였다 .4 단 쩌우쭤런은 서양에 유학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 서양의 인류학과 민속학을 소개할 경우 직접 서양의 원저를 번역하는 것 이외에 ,5 일부는 일본 학자들의 중개와 소화 ( 消化 )를 참고하기도 했다 . 그 과정에서 그가 서양에서 얻은 것은 “지 ( 知 )”이고 동양에서 얻은 것은 “정 ( 情 )”이며 , 중국의 “의 ( 意 )”를 표준으로 삼아 “타국의 영향을 수용”했다고 한다 .6 그는 당시 동서양 학술에 정통한 소수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 그리고 비교적 우수한 국학의 기초와 중국 본토의 문화지식을 겸비하고 있었다 . 이러한 지식 구조와 교육 배경은 당시 격동하는 중국이란 나라에서 그의 활약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 위처럼 쩌우쭤런의 학문적 배경은 국내의 여타 지식인의 경우와 상당히 달라 , 그의 초창기 견해는 당시의

중국에서 언제나 선진적이었다 . 그는 유럽민속학과 일본민속학을 가장 일찍 접촉한 중국인이었다 . 1913년 이후 동화와 동요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한바 , 가령 1913년의 「동화 약론」 에서 “동화 연구는 민속학을 근거로 삼아 그 원류를 탐구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 중국에서 맨 처음 ‘민속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보기다 .7 또 1914년 1월에 발표한 「동요의 연구」 에서도 이 ‘민속학’이란 용어를 언급했으며 , 같은 해 7월에 발표한 「옛 동화 풀이 ( 古童話釋義 )」에서는 중국 고대 ‘동화’와 유럽 , 일본 , 그리고 당시 중국 민간에서 유행하던 ‘동화’를 서로 비교하기도 했다 . 중국민속학 여명기의 중요한 학술성과가 아닐 수 없겠다 .쩌우쭤런에 따르면 , 당시의 인류학파 민속학은 “지금의 것으로 옛 것을 증명하는” 학문 , 곧 동화 속에 남아있는

‘유류물 ( 遺留物 )’의 문화사적 가치를 제시하는 학문이었다 . 그는 이와 관련한 국외의 이론을 소개했을 뿐 아니라 중국 고적 ( 古籍 )에 산견되는 자국의 동화를 발굴 정리했다 . 그리고 이 중국 고대 동화와 자신의 고향에서 전승되는 동화들 (예를 들면 이류구혼담이나 신데렐라형 설화와 같은 )을 고르게 자신의 연구 시야에 포섭했는데 , 당시의 수준에 비춰볼 때 그릐 연구 수준은 매우 높았다고 보인다 .8 고대 전적 ( 典籍 )과 향토사회에 대해 비교적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 단지 서양이나 일본의 학술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 고유의 학술자료들과 함께 사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쩌우쭤런은 전형적인 ‘家鄕 (향토 ) 민속학자’이기도 하다 . 중국민속학의 초기 발전사에서 볼 때 , 자신의 고향에서 민요 수집에 종사하는 것은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9 1911년 가을 일본에서 귀국한 27세의 쩌우쭤런은 고향 사오싱 ( 紹興 )에서 교편을 잡고 현지의 동요와 동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0 이듬해 1912년에 그는 위에중 동요집 ( 越中兒歌集 ) 을 편찬하고 , 2년 후인 1914년 1월에는 자신이 회장을 맡은 사오싱 현 교육회 월간 ( 紹興縣敎育會月刊 ) 에 동요 , 동화 수집 공고를 게재했다 . 그리고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 곧 “위에궈 ( 越國 ) 풍토색을 보존하고 민속연구 , 아동교육의 양식으로 삼기” 위해 , 또 “어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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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21

읽혀 자연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11 당시 이러한 실천은 전례가 없던 일로 비록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지라도 , 선각자로서의 그의 고독함은 후세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야 할 것이다 .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줄곧 젊은 시절 고향에서 수집한 동요에 집착하여 , 그것을 정리한 사오싱 동요집 ( 紹興兒歌集 ) 을 정식 출판하려고 애를 썼다 . 이 동요집에서 그는 자신의 유년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생활 속의 동요를 중시하고 , 아동들이 실제 어떤 노래들을 불렀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12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 쩌우쭤런의 고향 의식은 그의 타향살이 이후에 차츰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 고향을 떠난 후 가령 검은 색 덮개가 있는 배 ( 乌篷船 )나 돌 판을 깐 길 ( 石板路 ), 고향의 먹을거리 등과 같은 고향의 풍물 , 풍속을 제재로 한 여러 글들을 발표하고 그것들을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했는데 , 그중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도 적지 않다 . 또 “어떤 곳의 풍속을 보면 그게 고향의 것을 닮았건 닮지 않았건 감명을 받는다 . 서로 다르면 비교의 재료가 되고 , 같으면 격별히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13이라고 지적한바 , 이로부터 그의 향토 민속학과 비교 민속연구는 하나의 사상 ( 事象 )에 대한 두 측면에 불과함을 알 수 있겠다 . 아울러 그는 저둥 ( 浙東 ), 난징 ( 南京 ), 도쿄 ( 東京 ), 베이징 ( 北京 )을 고향으로 부른 적이 있는데 ,14 그 ‘고향 관념’은 그다지 제한적이지 않고 다의적이다 . 곧 첫째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 둘째는 자기가 비교적 장기간 거주하며 생활한 적이 있는 곳이다 . 셋째는 이 양자의 기초 위에 추상화된 ‘고향’이다 . 이 각각의 고향에 대한 주목은 바로 이러한 향토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다 .

2. 가요운동의 ‘두 가지 목적’ 1917년 9월 , 쩌우쭤런은 베이징대학 문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 그리고 1918년 2월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엔페이 ( 蔡元培 )의 지지 아래 학내에 가요채집소 ( 歌謠採集所 )가 신설되어 사회적으로 널리 가요를 수집하게 되었다 . 동료인 리우반눙 ( 劉半農 )이 작성한 「베이징대학이 전국적으로 근세 가요를 수집하는 안내문 ( 北京大學徵集全國近世歌謠簡章 )」 이 베이징대학 일간 ( 北京大學日刊 ) 에 발표된 지 오래지 않아 , 쩌우쭤런도 거기에 참여하여 리우반눙과 함께 가요에 관한 논문을 집필하고 번역하는 업무를 맡았다 . 그 후 1920년 2월 3일자 베이징대학 일간 에는 리우반눙의 유럽 유학에 따른 출국으로 쩌우쭤런이 모든 사무를 인수 , 관할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같은 해 12월 15일 이 일간지에 쩌우쭤런은 선지엔스 ( 沈兼士 ), 치엔쉬앤퉁 ( 錢玄同 )과 연명으로 ‘가요 연구회 수집위원 발족 ( 發起歌謠硏究會徵集委員 )’ 공고를 내었고 , 이윽고 12월 19일에 가요연구회가 결성되어 선지엔스와 쩌우쭤런은 주임이 되었다 . 1922년에 베이징대 연구소 국학문 ( 北京大學硏究所國學門 )이 설립되고 , 그 주임에 선지엔스가 취임함으로써 가요연구회의 업무는 쩌우쭤런이 도맡게 되었다 .

1922년 말 쩌우쭤런은 베이징대학 일간에 가요연구회의 「규정」 을 발표했는데 , 앞의 「요강」 과는 사뭇 달라 주목을 요한다 . 곧 「요강」 에는 모집하는 가요에 “음란하고 외설적인 내용을 넣지 말고 자연스럽게 정취를 이룬 것”이라는 그 채집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 이 「규정」 에서는 “노래의 성질에는 제한이 없다 . 미신이나 외설적인 내용에 저촉된 것에도 연구 가치가 있다 .”고 그 제한 조건을 풀어 가요운동의 장애를 제거했다 .15 쩌우쭤런은 나중에 「외설적 가요」 란 글에서도 이 점을 언급했는데 , 그것들을 통해 그의 학술 사상은 도학에 구속되지 않고 혁신적이었다는 점 , 그리고 늘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와 열린 시야를 겸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 또 1923년에는 가요 주간 제 31호에 「가요와 방언조사」 라는 글을 기고하여 가요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 쩌우쭤런이 가요 주간을 주재하는 동안 민요의 민속학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가 강조되었다 . 더불어 민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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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교육의 보조 자료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창되었다 . 당시 리우반눙과 선인모 ( 錢玄同 )를 비롯한 문인들 대부분은 민요의 문학적 가치만을 중시했다 . 민요 채집은 어디까지나 ‘가요 속에도 좋은 문장이 있기 때문에’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 와중에 , 가요운동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명언한 쩌우쭤런의 학술 사상은 분명 그들과는 다른 선진성이 있었다 . 그 두 목적과 관련하여 가요 주간의 발간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

본회가 가요를 수집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 하나는 학술적인 것이고 , 또 하나는 문예적인 것이다 . 우리는 민속학의 연구가 현재의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 … 민요는 민속학에서 중요한 자료이며 , 그것을 수집 기록하는 제일의 목적은 전문적인 연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 그래서 우리는 투고자가 스스로 선별함이 없이 가능한 있는 그대로 보내줄 것을 희망한다 . 왜냐하면 학술에서는 그것이 외설적이건 조야하건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 한편 , 문예적 목적이란 민요에서 중국 시가의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려는 것과 관련한다 . 곧 “세속의 노래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품격과 기법이 많이 있다 .”는 인식에 기초하여 , 특히 문학적 정취가 뛰어난 각 지방의 민요를 모아 그 선집을 편찬하고 , 그것을 관상용 혹은 시작 ( 詩作 )의 재료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 그의 표현을 빌리면 , “이 학술적 자료를 가지고 문예비평의 시각으로 취사선택을 하여 국민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의 선집을 엮는” 것이다 . “이런 업무는 지금땅속에 묻혀 있는 빛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 마땅히 도래해야 할 민족의 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16

이 두 가지 목적은 당시 가요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사이에 널리 보급 , 공유되었다 . 그리고 훗날 중국민속학사 연구에서는 이를 비교적 높이 평가했다 . 그러한 이 두 가지 목적에 비춰 쩌우쭤런의 연구를 되돌아보면 , 그는 양자의 어딘가에 편중되는 것을 지양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 가령 신화와 동화 속의 환상적인 형상 ( 形象 )을 보기로 들어보면 , 그는 그것을 맹신하지도 않고 또 배척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요컨대 신화나 동화와 같은 구비문학에 대해 인류학의 관점에서 “학술적인 고찰을 가해 문화사 속에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 그것들을 “고대문학으로 간주하여 역사 비평과 예술 감상의 시선을 쏟는”17 작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 사실 가요 주간의 발간사 이전에도 쩌우쭤런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 예를 들면 키드슨 (Frank

Kidson)의 민요 정의를 소개한 후 , 민요의 특질은 결코 멋들어진 기교나 사상에 있지 않고 , 참되게 민간의 심정을 표현해 낼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순수한 민요”라고 지적했다 . 이어 민요를 연구하는 목적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 하나는 문예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 후자의 역사적 목적이란 “대개 민속학에 속한 것으로 , 곧 민요로부터 국민의 사상이나 풍속 , 미신 등을 고찰하는 것이며 , 또 언어 면에서도 많은 참고자료를 얻을 수 있다 .” 그리고 전자의 문예적 시각으로 보면 , 민요는 “시의 변천 연구나 새로운 시 창작에도 참고가 된다 .”18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 목적론은 때때로 세 가지로 부연 설명되기도 한다 . 즉 교육의 목적 한 가지를 더 보태는 것이다 . 쩌우쭤런은 1923년에 발표한 「 그림 동요 대관 ( 繪圖童謠大觀 ) 을 읽음」 이란 글에서 동요 연구의 3대 유파로 민속학적인 것 , 교육적인 것 , 문예적인 것이 있다고 지적한바 ,19 이 견해는 이후 관련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927년 루허웨이 ( 如何畏 )가 신생 ( 新生 ) 이라는 잡지의 ‘민간문학 특집호’에 쓴 권두언에서도 , 또 이듬해 둥쭤빈 ( 董作賓 )이 민간문예 에 기고한 「독자들에게 삼가 아룀」 이란 글에서도 , 그리고 1936년 후스 ( 胡適 )가 가요 주간에 쓴 복간사 ( 復刊詞 )에서도 그 순서와 중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학술적 , 문학적 그리고 교육적 목적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목적을 두 개 혹은 세 개 내건 가요운동이었지만 , 훗날 자주 비판을 받은 것처럼 참가자 대다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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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나 시인들이어서인지 운동의 한계 역시 뚜렷했다 . 가령 왕원바오 ( 王文寶 )의 연구에 따르면 , 구통진 ( 古通今 )은 1936년 11월 14일자 티엔진 ( 天津 ) 대공보 ( 大公報 ) 에 「민속 복간호 제 1권 제 1기 : 우리나라 민속학운동을 평함 ( 民俗復刊號第一卷第一期 :兼評我國民俗學運動 )」 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애당초 “민간문학을 위주로 하고 , 사회 풍속은 그 다음에 자리매김 되어” 그것에 대한 조사 연구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 “이 운동의 선도자 대부분이 문학자나 사학자인 까닭에 민속학 , 인류학 , 민족학 , 사회학의 이론적 기초가 없을 뿐더러 시야가 좁고 , 그 결과 역시 사실을 집적할 뿐 이론적인 사고가 결핍되어 있으며 , 개개의 자질구레한 재료는 많지만 그것을 비교 연구를 할 수 있는 자는 적다 .”20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수의 목적으로 말미암아 이 운동의 참가자들은 일치된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 운동으로서의

일관성은 크게 훼손되고 있었다 . 위의 두 목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흔들리는 자가 많아 , 문학의 목적과 학술의 목적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와중에서 민간문학과 민속학의 관계 역시 모호함을 더해가게 되었다 . 당시 학술의 목적도 진화론의 해석 (쩌우쭤런은 늘 신화나 동화 속에서 원시사상의 잔류물을 발견하는 데 심취해 있었다 .)에 얽매인 까닭에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실현시킬 수 없는 상황이 야기되었다 .21 아무튼 이 “반 ( 半 ) 계몽 반 학술”22의 가요채집운동은 점차 하나의 분과학문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 그 ‘분과학문’은 이후에도 민간문학과 민속학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 . 그 결과 , 현재까지도 양자 사이엔 학문적 이론의 혼동이나 개념의 뒤섞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시 문학과 학술 사이에서 흔들리는 문인들 속에서 쩌우쭤런은 가요운동에서 출발하여 민속학의 창설을

지향한 소수의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 그는 민속학 창설에 애정을 기울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몇 번이고 그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 가령 1923년 5월 14일 베이징대학 연구소 국학문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 학회 명칭이 창후이 ( 常惠 )가 주장한 ‘민속학회’가 아니라 장징성 ( 張競生 )이 주장한 ‘풍속조사회’로 정해졌고 , 후자가 제시한 풍속조사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23 그로부터 10일 후 풍속조사회가 창립되었고 , 이 모임은 나중에 저 유명한 미아오펑산 조사 ( 妙峰山調查 )를 행했다 .24 이듬해인 1924년 1월 30일 쩌우쭤런은 가요연구회 정기 모임에서 산수 , 풍토 , 영웅 , 인물 , 귀신 등에 관한 전설과 동화를 지금 채집하지 않으면 금후 그것들을 입수하기 곤란하다고 호소했다 . 그리고 가요 주간에 민요 이외의 것도 대상화한 자료집을 덧붙이기 위해서라도 학회의 명칭을 민속학회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 결국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 채집 범위의 확대에 대해선 동의가 이루어져 조사 연구의 대상이 방언 , 고사 , 신화 , 풍속 등에까지 확장되었다 . 이런 좌절의 경험 때문인지 쩌우쭤런은 그 후 가요연구회에서 차츰 멀어져 갔고 , 같은 해 12월 어사 ( 語絲 ) 의 창간을 주도하고 집필 활동의 거점을 이 잡지로 옮겨 , 민속학과 관련된 많은 글들을 발표했다 . 그리고 1930년에 쩌우쭤런은 천바이니엔 ( 陳百年 ), 지앙사오위앤 ( 江紹原 ), 자오징선 ( 趙景深 ) 등과 함께 민속학회의 설립을 협의하기도 했다 .쩌우쭤런의 민속학에 대한 집착은 일본 유학 시절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國男 )의 ‘향토연구’에 강한 흥미를 가졌던 것과 관련이 있다 .25 실제 쩌우쭤런은 1931년 11월에 「 도노 이야기 ( 遠野物語 ) 」 란 글을 발표하여 “민속학의 풍요로운 흥취”를 계시해준 야나기타의 도노 이야기 를 높이 평가했고 , 그의 초기 향토연구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했다 . 쩌우쭤런의 눈에 비췬 야나기타의 연구는 쓰보이 쇼고로 ( 坪井正五郎 )의 인류학과 다르고 다카기 도시오 ( 高木敏雄 )의 신화학과도 다르며 , 그가 추구한 “국민 생활의 역사적 연구”는 미나카타 쿠마구스 ( 南方熊楠 )의 ‘구 ( 舊 ) 민속학’과도 같지 않았다 .26 쩌우쭤런은 , 야나기타의 연구가 “문헌상의 대조나 추측에 머물지 않고 , 실제의 민중생활로부터 착수”함으로써 참신하고 활력이 넘쳐난다고 상찬했다 . 게다가 쩌우쭤런은 하든 (A. C. Haddon)의 인류학사 를 원용하여 , 문인의 문화 연구는 지나치게 문헌을 신뢰하는 까닭에 실증적 경험과 과학적 훈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 야나기타가 추구한 향토연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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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기도 했다 . 또 1933년 12월에 쓴 글에서는 , 야나기타가 도노 ( 遠野 ) 출신의 사사키 기젠 ( 佐佐木喜善 )에 부친 평가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했다 . 즉 옛날이야기의 주관적인 취사선택 (예를 들면 이야기 중 천박한 부분을 삭제하는 것 )과 과도한 문식 ( 文飾 )을 자제하고 , 현지의 옛날이야기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에 찬동했다 . 이를 바탕으로 쩌우쭤런은 비판의 표적을 중국의 민간문학 채집으로 향한바 , “자신의 재기에 의지하여 수식을

덧붙임으로써 과학의 존엄이 훼손되고 , 문예창작으로서의 독창성도 잃게 된다 . 마치 옛 비석을 파내어 끌로 쪼아대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정말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7고 비판했다 . 실제 가요운동이 잦아들자 거기에 참가한 개인이나 기관이나 모두 고독을 견뎌내지 못하고 민속학의 분야에서 발을 빼게 되고 , 결과적으로 민속자료의 수집에 십년을 하루같이 성실히 몰두하는 이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 이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당시의 실정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 중국민속학의 현재 상황에 적용해도 타당하다고 보인다 . 쩌우쭤런은 , 민속학은 본디 민간의 학문으로 관학 ( 官學 )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까닭에 민간학자가 중심이

되어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현대 영국 민속과 민속학 의 서문에 부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이런 학문을 얘기하기 위해선 첫 번째 학식이 있어야 하고 , 두 번째 식견이 있어야만 한다 . 그리고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 풍속 연구는 본래 민속학의 일부분으로 민속학은 사회인류학이라고 칭하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 이와 같이 민속학과 광의의 문화인류학을 동일화하려는 관점은 당시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신문화운동에서 비롯된 가요운동이 지향한 학술적 목적은 시아먼 ( 厦門 )대학 풍속조사회 , 중산 ( 中山 )대학 민속학회 , 항저우 ( 杭州 ) 중국민속학회의 창립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 물론 쩌우쭤런은 이 학회들의 창립 멤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고 , 생애 전체를 통해 민속학 연구에 전념한 것도 아니다 . 또 그의 탁견 속에는 사회진화론적 해석을 고집하는 경향도 보인다 . “민속학에서 예의와 풍속을 연구하는 것은 기문 ( 奇聞 )을 나열하여 이야기의 종자로 쓰기 위해서도 아니고 , 단지 기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 지금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그 변천을 밝히고 , 국내외의 비교를 통해 같고 다름을 고찰하여 예절과 풍속의 진의를 찾기 위해서다 .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황당무계하고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이나 전설 등을 정확히 이해하여 인류의 문화 발전과 그 잔존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28 천리엔산 ( 陳連山 )이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인식은 , 민속이 후진적이고 미신적인 민중이 전승하는 야만시대의 잔존이라는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 민중의 새로운 문화를 구축할 힘이 되어야 할 민속이 오히려 민중이나 그들의 문화를 비판하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29 바로 이 점이 쩌우쭤런의 한계이며 여명기 중국민속학의 한계이기도 했다 . 하지만 이제 막 탄생한 중국민속학에 서양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독자들에게 민속학을 추장 ( 推獎 )하고 , 구비문학과 민속자료 수집을 재촉한 그의 공적은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

3. 평민/민중: 국민문화의 기반인가? 청나라 말부터 중화민국 시대의 초기를 살았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국민국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 이

국민국가 건설에 즈음하여 초미의 과제가 되었던 게 국민문화의 건설이었다 . 가요운동의 모태가 되었던 신문화운동 역시 본래는 국어나 ‘민족 시’ , 백화문 등의 새로운 국민문화 건설을 지향한 활동이었다 . 이 운동은 중국에서 ‘국민’의 개념 정의에 크게 관여했고 또 국민성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 물론 그러한 동향은 모두 국민국가의 문화 건설과 국민의 정체성 형성을 목표로 출현한 것이었다 . 루쉰은 1913년 12월에 발표한 「미술의 전파 선포에 관한 의견서」에서 , “국민문술연구회 (國民文術硏究會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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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25

설립하여 각지의 노래 , 속담 , 전설 , 동화 등을 정리”하고 “그 의의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교육을 뒷받침하는 양식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 루쉰의 주장은 그 후에 펼쳐진 가요운동의 의도와 상통하는바 , 창후이는 이를 가요운동을 추동한 간접적인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 1918년 가요운동에 참가한 쩌우쭤런은 같은 해 12월 문학혁명의 슬로건이 된 「인간의 문학 ( 人的文學 )」 을 발표하고 , 전통이 인간에게 가하는 억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 이후에도 그는 인간의 진리 발견이라는 사상의 연장선에서 부녀자와 아동을 연달아 ‘발견해’ 갔다 .30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탄생한 중국민속학 역시 그 여명기부터 국민성 개조의 탐색 움직임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보이는데 , 쩌우쭤런의 목적은 바로 이 국민의 개성 있는 발전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찾는 데 있었다 .31 당연한 일이지만 , 국민 개념을 형성하려고 하면 중국사회의 각 계층과 ‘평민’을 어떻게 직시 , 이해할까라는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 1919년 1월 쩌우쭤런은 「평민문학」 이란 글에서 보통의 민중과 그 문화를 미래 국민문화의 기초로 간주하고 , “중국은 이제 민국 ( 民國 )이 되었으니 모두가 다 한결같이 공민 ( 公民 )”이라고 주장했다 . 그리고 평민문학을 “평민생활 , 인간의 생활을 연구하는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 그 목적은 “인류의 사상이나 취미를 억눌러 평민과 같아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 평민의 생활을 향상시켜 그에 걸맞는 지위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또 “평민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일반의 생활을 어떻게 정당한 방향으로 인도할까를 연구하는 것에 가깝”고 ,32 그 정당한 방향은 바로 “평민의 귀족화 곧 범인 ( 凡人 )의 초인화 ( 超人化 )”33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인간의 문학’이 되었건 ‘평민문학’이 되었건 , 요컨대 대다수 사람들의 문학이나 혹은 민중들의 성정 ( 性情 )과 생활을 표현한 문학을 강조한 것이다 . 이처럼 전례를 보기 힘든 , 평민에 대한 중시의 자세는 시대를 앞질러 가는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있겠다 . 쩌우쭤런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평민주의의 실천을 중시하고 평민 교육을 지향한 ‘평민주의 대학’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는바 , 이는 가요운동이 내세운 교육의 목적과도 호응하고 있었다 . 덧붙여 , 쩌우쭤런은 ‘ 민속’ 을 통해 평민의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가령 1934 년에 쓴

「창디엔 ( 廠甸 )」 이란 글에서는 쓸데없이 노동을 방해하고 시간과 돈을 낭비만 한다고 비판받아 온 구정을 보기로 들어 , 그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대의견을 펼쳤다 . “사실 누구보다도 구정을 즐기는 건 중국에서 가장 근면한 사람들 , 곧 농민과 노동자와 상인들이다 . 그들은 관리나 교원 , 학생들처럼 매주 휴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 년 내내 땀 흘려 일하고 있다 . 연말연시 며칠간 놀기로서니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 또 잡상인이 이에 편승하여 한철 장사를 하는 건 바로 그때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 “음력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가 양력과 부합되지 않는 것을 빼고는 그 어떤 문제도 없으며 , 만민의 조그마한 즐거움과 생활의 정취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구정은 존속되어야 한다 .”34 또 같은 해에 발표한 「물건 파는 소리 ( 一歲貨聲 )」 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소리에서 “고향의 소리를 듣고 , 괴로움을 이해하고 , 풍토를 기록하며 , 절기 ( 節氣 )를 보존” 할 수가 있으며 , 동시에 “민간 생활의 마땅함을 느낄 수 있다 .”고 주장했다 . 그리고 “평민생활은 물론 순란하고 호화로움은 없으나 ,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고 풍성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35음을 체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주장에는 ‘만민 ( 萬民 )’에 대한 동정과 함께 다소 낭만주의적 이해가 혼재하고 있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 쩌우쭤런은 민중 사상의 보편적 양태에 대해 주목했고 민요를 민중 현실생활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 그리고

그런 민요로부터 국민의 사상이나 풍속 , 미신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에 따르면 , 민요의 가치는 ‘사회의 기둥’으로서 민중의 심정을 알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36. 그것은 민족의 심정을 대표하기 때문에 민족의 문학인 것이며 ,37 “한 민족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마음의 표현”38이다 . 그리고 ‘민간’이란 “본래 문자를 모르는 많은 민중을 가리키며 , 민요 속의 정서와 사실은 바로 이 민중이 느꼈던 정서와 그들이 알고 있던 사실”39이다 . 이러한 주장에 대해 중국민속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이루어졌다 . 곧 가요운동의 두 가지 목적 설정은 , 당시 문인들의 국민 혹은 국민문화에 대한 상상 ,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 그 어느 쪽이 되었건 민족국가의 건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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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기여하는 것이었다 .40 하지만 가요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 두 가지 목적은 실제 민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41 왜냐하면 이 가요운동의 사상적 기초는 자유와 민주 , 그리고 평등의식이었기 때문이다 . 지난날 멸시를 받았던 ‘노동자’가 지식인이 묘사하는 ‘국민’이 됨으로써 , 민요가 전해주는 게 바로 ‘국민의 목소리’가 된 것이다 . 또 가요운동의 최종 목적은 민생 , 곧 민간생활에서 민중에 적합한 미학적 감정을 발견하여 민중의 건강을 살찌우고 , 또 그 자연스럽고 소박한 성질에 걸맞는 발전 경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 이도 있다 .42 아무튼 민요로부터 “민중이 느끼는 정서”나 “그들이 아는 바의 사실”을 발견하려 한 쩌우쭤런은 일반적 국민 사상에 깃든 참모습을 줄곧 추구했다고 보인다 . 그리고 그 참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선 일반 민중의 “총수와 평균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 그가 말하는 국민 개념과 평민 , 민중과 같은 개념 사이에는 상호 치환성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 “중국문화를 연구할 때 대표적인 최고의 성과를 응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 전체의 평균적인 성과를 가지고 보면 더욱 참모습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43 “노자 , 장자 , 공자 , 맹자 등은 중국 사상의 높이를 대표하는 데 불과하며 , 중국 민중사상의 총량과 평균치를 대표할 수는 없다 .”44 이처럼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엘리트나 귀족 , 상층계급보다도 국민 전체의 문화 정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음과 같이 또 지적했다 . “국민의 문화 정도는 동렬로 놓일 수 있는 게 아니라 피라미드와 같이 쌓아올려진 것이다 . 문화의 정점은 최상층의 소수 지식계급을 기준으로 측량하고 , 그 추락의 정도는 하층의 다수 우민을 기준으로 산출해야 한다 .”45 이와 같은 인식이 있었던 까닭에 , 그는 문화의 밑변을 이루는 민중의 생활 정경과 풍습을 중시하고 , 국민문화의 건설에 “낮고 넓은 면에서 착수하는” 것을 바랐던 것이다 . “문학작품을 읽던 시절부터 조정을 떠나 세사 ( 世事 )에 주의를 기울이고 , 때때로 농민들과 접촉하며 민간 생활사 연구에 종사했다 . 비록 적막한 학문이기는 하나 , 중국에서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46 쩌우쭤런은 과거 민중의 신앙과 사상을 “천년 불변의 해저 심층수”로 비유했다 . 그리고 민간의 상여 행렬을 보기로 들어 , 야만적인 사상이 얼마나 많이 현대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설파하고 , 문명사회에서 야만인이 차지하는 비율로 그 문화도를 잰다면 중국은 과연 어떤 위치에 있을까를 묻는다 . 나아가 쩌우쭤런은 중국 국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도교와 샤머니즘이고 유교와 불교의 요소도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47 그리고 민중의 신앙에 깃든 도교와 샤머니즘의 요소나 민간 도덕의 퇴폐를 우려했다 . 그런 퇴폐를 불식하는 데 , 선교 방식과 같은 과학운동이 별 큰 효과를 낼 수 없다고 본 그는 , 교육의 보급에 의해 “국민의 이성에 호소하는”48 방식을 주장했다 . 이 대목에서 지식이 교육을 통해서만 획득되고 , 그 지식은 대부분 사회의 상층에서 서서히 하층으로 도달한다는 인식은 , 그가 하층 민중을 감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심지어 그는 현대 국민이 구비해야 될 ‘상식’ 목록조차 작성한 적이 있으며 ,49 결과적으로 국민의 상식이 “전체와 융합하는 일반적 지식”을 형성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 쩌우쭤런의 민중에 대한 관점은 모순을 잉태한 것이었다 . 그는 중국의 향토에 대해 낭만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민중의 순박함을 상찬하는 한편 , 민중 /평민 /국민에 대해 실망도 했다 . 또 5 4운동이 ‘국민의 각성’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군중운동이 사람들의 개성을 매몰시켜버리는 것을 우려했다 . 그리고 민족주의나 민족주의적 국민교육에 대해서도 의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 “교육의 희망은 아동을 ‘올바른’ 사람으로 길러내는 데 있는데 , 지금의 교육은 도리어 양순한 국민으로 만들려 하는 것으로 이는 엄청난 잘못”50이라고 지적했다 . 또 ‘국민문학’에 대해서도 “국민문학을 추장함과 동시에 개인주의 역시 제창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 “고국의 것은 반드시 좋고 타국의 것은 반드시 나쁘다”라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려고도 애썼다 .51

때때로 민중의 나쁜 근성을 격렬히 비난한 것으로 알려진 쩌우쭤런이지만 ,52 그러한 비판은 당시 중국에서 거세게 일어난 국민성 비판의 풍조와 같은 문맥에서 발화된 것이다 . 1921년 발표한 「새로운 그리스와 중국」 은 그 전형으로 , 서양이라는 ‘타자 ( 他者 )’를 빌려 중국의 국민성에 비판의 메스를 가한 시도였다 . 그는 “개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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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합체인 국민성” , 곧 “특수한 개성과 공통된 국민성은 서로 함께 공존해야 한다 .”고 보고 , “유전적 국민성”의 바탕 위에 다종다양한 외래문화의 영양을 흡수하여 서로 융합하고 계속 변화해 나감으로써 “항구적이며 늘 새로운 국민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3

4. 생활: 민중의 일상과 예술적 상상 위처럼 민중의 생활에 커다란 흥미를 가진 쩌우쭤런이었지만 , 그는 ‘생활’ 자체를 개념 정의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을 설명이 필요치 않는 자명의 존재로 간주했다 . 이를테면 그는 고대의 유물을 “생활의 전통’”이라 불렀고 , 「아동의 문학」 을 논할 때는 아이들의 “독립된 생활”을 강조했으며 , “자연에 순응하여 탄생에서 성장 , 성숙 , 노쇠 , 사망에 이르는 각각의 시기를 살아가는 것은 모두 진정한 생활”54이라고 주장했다 . 또 “음란하고 외설적 가요”를 풀이할 때도 “생활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 그가 말하는 ‘인간의 문학’은 “인간의 내면적 생활”이나 “육체와 정신의 이중생활” , “인간의 정당한 생활” , “인간의 이상적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며 , 거기에는 “물질적 생활” , “도덕적 생활” , 인간 “생활을 바꾸는 힘”이 포함된다고 한다 .55 쩌우쭤런에게 있어 민속학이란 주로 평범하고 세속적인 민간생활로부터 여러 가지 미적 감각이나 친근감 ,

정취 등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한데 , 그것들은 모두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발전시키고 누려야 할 생활이었다 . 관련하여 , 1924년에 창간한 잡지 어사 ( 語絲 ) 의 발간사에는 “자유로운 사상 , 독립된 판단 , 화목한 생활을 제창한다 .”는 대목이 보인다 . 그는 일상적인 생활양식 곧 크게는 탄생이나 사망과 같은 인생의례 , 작게는 식사나 음주와 같은 일상의 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민속적 의의가 있으며 , 다름 아닌 민중의 일상생활이 다양한 민속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56 그의 표현을 빌리면 , “생활에는 대체로 음식 , 연애 , 생육 , 노사 (老死 )와 같은 일들이 포함되는데 , 그것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임의대로 추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중략 ) 나는 결코 사람이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차와 술로 밥을 갈음해도 좋다고는 보지 않지만 , 잠을 자거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것도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57 “우리가 세시와 풍속에 왜 흥미를 느끼는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 그것들은 우리의 평범한 생활 속의 조그마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 인민의 역사는 본래 날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사의 연속인데 , 천문 지리와 계절의 추이가 이 인간사에 영향을 끼쳐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직조해 간다 .”58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와 생활 속에 언제나 그 흔적을 새겨 넣는다 . 어떤 것은 우아하고 어떤 것은 소박하지만 , 그 어떤 것이건 세련되어 있다 .”59고 한다 . 또 생활의 오락에 대해 논할 때도 다른 민속학자들처럼 용선 ( 龍船 ) 경연이나 옛날이야기와 같은 전통적 사상 ( 事象 )만을 주목하는 게 아니라 , 찻집에 앉아 있거나 처마 밑에 서 있거나 , 혹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것 등과 같이 ,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생활상의 작은 휴식이 되는 행위도 모두 똑같이 시야 속에 넣었다 . 이러한 이념에 기초하여 쩌우쭤런은 사실상 민속을 인간의 일종의 생활 상태로 보았다 . 그리고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즐겨 문학 작품의 소재를 찾고 , 늘 똑같은 나날의 생활 속에 넘쳐나는 일상적 사상에서 민속의 재미와 흥취를 발견했다 . 그에게 있어 사람들의 일상적 음식 , 초목과 곤충 , 물고기 , 그리고 지방의 풍토와 인심을 기술하는 건 인생의 목적이 되기조차 했다 . 그렇기 때문에 “왜 모두가 사회생활이나 자연 , 명물을 기록하고 싶어 하지 않고 , 봉건적인 유교만을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다 .”60고도 지적한 것이다 . 이처럼 쩌우쭤런은 민속의 재미 , 곧 생활의 정취를 중시하고 상찬했다 . 그것은 가요운동에 몰두한 초기보다도 어사 ( 語絲 ) 시기의 작품 쪽에 뚜렷이 드러난다 . 이 시기에 쓴 소품에서는 음식문화 같은 일상적인 물질생활에 특별히 관심이 쏠렸다 . 그에게 먹을거리는 한 지방의 생활을 특징짓는 대단히 중요한 것의 하나로 , 일상의 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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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죽뿐 아니라 한식 ( 閑食 )과 간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향토 음식을 소개할 때도 그 제조 공정과 판매 활동뿐 아니라 , 관련된 음식 습관과 풍속의 정경까지 섬세하게 묘사하고 , 나아가 그 유래와 의미도 추적했다 . 일상생활에 관심을 잦고 더불어 각지에서 풍부한 생활 체험이 있는 그였기에 , 그가 쓴 음식문화의 소품은 매우 산뜻하면서도 친근함이 있었다 . 중국 남북 지방의 ‘점심’에 대한 비교 , ‘베이핑의 봄날 ( 北平的春天 )’에 대한 기술 등이 그 좋은 보기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생활’에 대해 쩌우쭤런은 이상주의적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 특히 일상생활의

미적 감각을 힘써 추구하고 생활의 고유한 맛을 느끼기 위해 애를 썼다 . 1924년에 발표한 「생활의 예술」 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활”를 제창하고 , 일상생활 속의 미적 감각을 추구했다 . “우리가 일용하는 필수품 외에 별 쓸모없는 유희와 즐거움이 있는 까닭에 생활은 흥미롭다 . 우리가 석양을 바라보고 , 가을 강의 수면을 응시하고 , 꽃을 사랑하고 ,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 향기를 즐기고 , 해갈을 풀 생각 없이 술을 마시고 , 그리고 포만감을 느낄 생각도 없이 점식을 먹는바 , 이 모든 게 생활에선 필요한 것이다 . 비록 쓸모없는 장식일지라도 , 세련되면 될수록 좋은 법이다 .”61 그에게 ‘미 ( 美 )’는 생활의 키워드이며 , 따라서 그가 “일상용품 , 집단적 공예에서 미를 추구하는” 야나기 무네요시 ( 柳宗悅 )의 민예운동를 주목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62 예전에 그는 「향토연구와 민예」 를 거론하면서 63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國男 )와 야나기 무네요시를 함께 중시했는데 , 이는 일본학계 상황을 잘 아는 현재의 중국민속학자들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경향이다 . 쩌우쭤런은 민속학을 통해 사람들이 일상에서 생활에 대한 정열을 배양하고 , 진정한 의미에서 한 ‘인간’으로 생활하는 것을 돕고 싶어 했다 .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를 고찰하여 , 사람들의 주관적 발전에 걸맞는 합리적 , 이상적인 생활 방식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64 그렇기 때문에 문학혁명에 ‘인간의 문학’이란 이념을 바치고 , 동시에 민속학이 사람을 목표로 삼아 민중 생활에서 가치를 발견하기를 촉구했다 . 예전에 쩌우쭤런은 중국인의 생활에 대한 태도가 “타협적이고 순종적이며 생활에 대해 강렬한 애착이 없고 진지한 항변도 하지 않는다 .”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 “중국인들은 생활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며 , 생활과 습관을 뒤섞는다 . 그들은 마치 극단적인 현세주의를 숭배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 실제론 하루라도 진지하고 정열적으로 생활한 적이 없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65 이어 중국인의 양 극단적인 생활방식 (금욕과 향락 )을 비판하고 나서 이른바 ‘생활의 예술’을 제창했다 . ‘생활의 예술’이란 금용과 향락이라는 대극적 생활방식의 조화이며 중용으로 , 자유롭고 절도 있는 생활을 말한다 .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양자를 절묘하게 혼합하여 취사선택하는 것”66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 일반적으로 중국인은 생활과 사상에서 적절히 처신하는 것을 중시한다 . 이에 대해 , 쩌우쭤런은 섬세하고 미의식을 가진 예술적 생활의 처신 방식을 제시했다 .67 이런 그의 생활에 대한 미의식의 추구는 부분적으로는 그리스와 중국의 문화 비교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 곧 그리스 문명에 보이는 미에 대한 추구가 중국에는 결핍되어 있다는 인식과 관련이 있겠다 . 아무튼 쩌우쭤런에게는 ‘생활’을 개선 , 향상시키려는 사상이 있었으며 , 그가 주장한 ‘생활의 예술’에는 그러한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보인다 . 그런데 ‘생활의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 다시 말해 자유와 절도의 새로운 균형을 실현하려면 , 금욕주의의 비인도적인 억압을 벗어나 예절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 그는 이 예절을 ‘본래의 예절’이라 불렀는데 , 그것은 중국 고대에 실재한 구체적인 ‘예의 ( 禮儀 )’나 ‘예교 ( 禮敎 )’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 중국에 본디 존재하고 있던 일종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을 말한다 . 쩌우쭤런은 이상적인 자유와 절도는 이 ‘본래의 예절’에 의해 규정된다고 믿고 , 민중의 의례 행위에 관한 분석을 통해 ‘본래 예절’의 부흥이나 , ‘새로운 예절’의 형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가 말하는 ‘본래의 예절’이란 rite(의례 )가 아닌 art(예술 )로 , 추상적인 생활의 예술로서 예전부터 존재했고 현대인들 역시 이용 가능한 것이었다 . 당시의 중국은 새 시대에 걸맞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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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29

문명을 건설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새로운 자유와 절도가 시급히 요구된바 , 천 년 전에 있었던 ‘본래의 예절’을 부활시키거나 혹은 새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예절’을 구축해야만 했다 . 그의 이러한 설명 방식에 아득한 옛날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이 내포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 이 예절과 관련된 풍습에 대해 , 1924 년 11 월 이후 잡지 어사 ( 語絲 ) 와 진보부간 ( 晨報副刊 ) ,

경보부간 ( 京報副刊 ) 등에 「예부문건 ( 禮部文件 )」 이란 제목의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 글쓴이는 쩌우쭤런과 지앙사위앤 ( 江紹原 )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예부총장 ( 禮部總長 )’과 ‘차장 ( 次長 )’이라고 부르며 , 토론을 통해 예절에 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 쩌우쭤런이 ‘본래의 예절’을 이상화하고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앞서 언급했는데 , 지앙사위엔의 반박에 밀려 , 결국 그는 ‘본래의 예절’이란 “공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당위적 예절”에 불과하며 , 자기가 주장한 ‘생활의 예술’은 대체로 의례 그 자체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68 그리고 지앙사위엔과의 토론을 통해 상상 속의 이상적 생활방식을 ‘새로운 예절’로 정리하는 한편 , 그 ‘새로운 예절’의 구축에 구체적인 의례제도를 반드시 마련할 필요는 없으며 , 사람들의 건전한 상식과 사상의 육성을 촉진하여 원래 있는 ‘야만적 사상’을 타파함으로써 예절에 부합된 생활 , 곧 ‘예술적 생활’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주장에 대해선 , 쩌우쭤런이 ‘생활의 예술’을 통해 접근하려고 한 것은 ‘본래의 예절’이나 ‘새로운 예절’이기보다는 일종의 ‘사대부 의식’에 불과하다는 비판 69도 존재한다 . 한편 지앙사위앤의 경우 , 건전한 사상의 수립을 통해 상상 속의 ‘생활의 예술’을 실현하고자 한 쩌우쭤런과는 대조적이었다 . 그는 고적 ( 古籍 )을 정리하여 ‘본래의 예절’를 실증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 그에게 예절이란 어디가지나 실천 가능한 의식으로 , 고대 중국에는 분명히 그런 전통적인 예절이 존재했다 . 따라서 그 고대의 의식을 정리하여 본디 예절의 모습을 논증하려고 했다 . 쩌우쭤런과의 토론을 계기로 시작된 그의 고대 의례 연구는 그 후 중국민속학의 독창적 연구 성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이처럼 쩌우쭤런과 지앙사위앤의 예절에 관한 이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만 , 양자의 논의는 “새로운 예절의

구축”70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둘러싸고 펼쳐진 것이다 . 그들이 지향한 ‘새로운 예절’이란 가령 문명이나 종교 , 과학 , 위생 , 예술 , 도덕 등과 같은 현대의 이념을 통해 고대 의례 혹은 ‘본래의 예절’을 현대화 , 구체화함으로써 현대인의 쓰임새에 부합하도록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71 양자는 각각의 입장에서 국민문화 건설이라는 긴박한 중화민국 시대의 과제에 답을 제시하려고 했다 . 그렇기 때문에 쩌우쭤런은 지앙사오위앤의 두발 , 수염 , 손발톱 ( 發須爪 ) 에 부친 서문에서 그의 예절을 둘러싼 풍습 연구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 곧 “중국 예교 ( 禮敎 )에 보이는 여러 가지 미신의 기원을 밝혀 학문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 청년들에게 중대한 계시를 주어 열린 두뇌를 양성함으로써 현대의 복고와 같은 반동에 저항하는 현실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72고 평가했다 .

5. 문학: ‘소품문’을 중심으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민속학의 여명기에 활약한 인사 중 다수는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라고 하기보다는 ,

오히려 개인의 문학적 재능을 표현하거나 문학평론의 집필을 하는 문인들로 , 그들의 문학적 흥미는 학술적 흥미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 그런 문인들이 ‘선각자’로서 가요운동을 추진한 것은 거기에 분명히 ‘학술적’ , ‘문예적’ , 그리고 ‘교육적’인 기대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문화적 계몽이었으며 , 또 그 최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상과 문학의 혁명이었다 . 따라서 그들은 중국사회에 계몽적 의식이 침투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민요 채집이나 민속학 연구와 같은 적막한 작업에 집착하지 않고 멀어져 갔다 . 물론 그중에는 민요나 민속 사상에 계속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을 문학 창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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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소재나 도구로 보기 일쑤였다 . 그러한 문학적 취미는 , 그들이 가요운동이나 민속조사를 마지막까지 완수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가요운동이 문인 취향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예를 들어 가요운동의 발단이 된 「베이징대학 전국 근세 민요가요 수집 요강」 을 보면 , 민요 채집에 즈음한 ‘자격항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곧 “하나의 지방 , 하나의 사회 혹은 어떤 시대의 인정 , 풍습 , 정치 , 종교의 변용에 관한 것” 이외에도 “음란하고 외설적인 내용에 저촉되치 않은 것” , “자연스런 정취가 있는 것” , “깊은 우의 ( 寓意 )가 있는 것” , “천연의 울림을 가지고 있는 것” 등과 같은 문인 취미에 맞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 또 학술과 문학의 두 가지 목적에 대해서도 가령 후스 ( 胡適 ) 등은 민속연구나 방언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 더욱 위대하고 근본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문학에 있으며 민요는 중국문학의 “범위를 확장하고 본보기를 늘려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쩌우쭤런 역시 중국민속학의 여명기를 지탱한 그러한 문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 이탈리아인 비탈레 남작 (Baron Guido Vitale)의 말을 인용하며 , “이런 민요에 기초하여 , 그리고 인민의 진정한 감정에 기초하여 새로운 ‘민족의 시’가 창작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 한 그는 민요를 방언적인 시로 간주하고 , 방언의 어휘로 중국어 문장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73 동시에 민요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평민문학의 미적 기준으로 간주하고 , 민속연구의 목적을 국민문학의 구축이라는 이상과 결합하려고도 했다 . 그의 말을 빌리면 , “만약 중국에서 국민문학을 구축하고 대다수 민중의 성질과 심정 및 생활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본토의 민속연구가 필요하다 . 그것은 인류학의 범위에 속하는 학문이지만 문학과도 극히 중요한 관계에 있다 .”74는 것이다 . 분명 쩌우쭤런은 당시의 문인 중에서는 드물게도 현대적인 민속학 이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 하지만 루쉰 ( 魯迅 )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과 지명도가 주로 문학자로서의 성과에 의한 것 75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 쩌우쭤런의 문학적 지향 역시 민속학적 지향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 5 4운동 이후 쩌우쭤런은 의기소침하여 은둔과 한거 ( 閑居 )를 좇기 시작하고 이른바 ‘정취문학’에 힘을 쏟게 되는데 , 그것은 그의 “개인주의적인 인간 본위주의”76 인생관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그에게 있어 정취의 원칙은 결코 학술의 원칙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쩌우쭤런이란 인간의 풍격 그 자체였다 77고 보인다 . 심지어 그의 이른바 “민속학에 대한 편애”78조차도 그러한 정취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 그에게 정취의 가장 큰 대상은 민속학이 아닌 문학이었다 . 신화나 동화 (민간고사 ), 동요 , 민요 , 나아가 산문이나 시 , 소품문에 이르기까지 그는 문학적 입장에서 그것들을 주목하고 , 도중 민속학에 강하게 이끌리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문학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 그 점에서 , 향토문화에 대한 강렬한 감정에 기초하여 민속학이란 사업에 전력을 기울인 야나기타와는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쩌우쭤런의 문학적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여기선 그의 소품문이 갖고 있는 민속학적 가치만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 그의 소품문은 현대 중국문학의 산문이나 잡문 창작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79 그 최대의 특색은 다종다양한 민속 사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에 있다 . 그가 남긴 소품문은 방대한 양에 달한다 . 게다가 각지의 민정풍속 기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까닭에 , 당시의 민속자료들을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다 . 중국에는 이렇게 그의 소품문을 높이 평가하는 민속학자가 많다 . 실제 그의 소품문을 보면 당시로서는 드물게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 . 오히려 정서적 감성이 넘쳐나는 생활의 경지를 추구해 그런지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밑으로 향한다 . 당연한 일상의 평민생활이나 신변의 작은 사안들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 그리하여 생활과 관련된 사상들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뿐만 아니라 , 때로 주관적인 인상을 보태기도 하고 서양 이론에 기초한 해설을 덧붙이기도 한다 . 소품문이란 이름의 “개인의 정원”에서 표현된 건 미묘한 인간의 맛과 멋이며 민정풍속에 녹아든 인간성의 미학이다 . 그러한 특색을 가진 까닭에 그의 소품문은 문학적 성공을 이루었고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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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31

인간에 대한 관심은 쩌우쭤런의 소품문과 민속학 연구를 결합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잡학’이라 불렀듯이 그의 독서 범위는 매우 광대했다 . 그는 늘 각종 기록이나 잡서들로부터 제재를 찾아 81 그것들을 바탕으로 지방의 풍물이나 역사 전통 , 민간신앙 , 민간문학을 수없이 묘사했는데 특히 세시나 풍토 , 물산에 관한 역대의 잡서들이 대량으로 인용되었다 . 그러한 소품문은 훗날의 민속학자들이 문헌자료를 검색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했다 . 또 폭넓고 고도한 학문적 소양을 가지고 명 , 청 시대의 수기와 서양 서적 , 나아가 일본의 예증 등도 종종 끌어들인바 , 그의 소품문은 어떤 의미에서 일국 문화론을 뛰어넘는 비교론적 특색을 구비하고 있었다고도 보인다 . 당시 비교민속학의 입장에서 민정풍속이나 세상의 도리 등을 응시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민속’은 이상적인 활연 ( 豁然 )한 현대인이 갖춰야 할 정당하고도 필요한 지식으로 간주되었다 .덧붙여 , 문헌을 대량으로 인용하는 쩌우쭤런의 소품문은 ‘서화 ( 書畵 )’ , 곧 고서의 소개 혹은 발췌로 폄하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 때론 그 기술 스타일로 말미암아 ‘문초공 ( 文抄公 )’이라 야유를 받기조차 한다 . 하지만 그것은 , 그의 작품이 잡기 ( 雜記 )의 전통적인 형식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며 , 또 심층적인 민속연구를 펼칠 만한 지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의 소품문은 기본적으로 민속자료의 소개와 비평에 머무르고 있어 , 때로 본질을 꿰뚫은 탁견을 내포하고 있지만 결코 학술적인 것은 아니다 .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 “극히 개인화된 취미 및 그 기호 주변의 일상이 쩌우쭤런을 민간문화와 그 연구로 자연스레 나아가게 했다 .”82는 사실이다 .

6. 토론: 중국민속학의 행방 여명기의 중국민속학에 대한 쩌우쭤런의 공적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는 1922년에 가요 주간의 방침을 수정 , 보강했다 . 곧 채집한 민요의 “방언이나 숙어를 해설할” 것 , “가사가 세속적일지라도 수식을 가해서는 안 되며 속자 ( 俗字 )나 속어 역시 공적인 말로 바꾸지 말” 것 , 그리고 “민요가 유통되는 어떤 사회의 시대배경”에 대해 주석을 붙일 것 등을 요구했다 . 이러한 요구가 가요운동의 레벨과 품질을 향상시켰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 또 『가요』 주간의 창간사가 보여주듯이 그는 가요운동에서 민속학을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 단지 “소박한 곡조와 우아한 가사”를 찾던 기왕의 문학적 가요운동과는 다른 ,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 실제 그 영향 아래 민요의 채용 기준에 문학적 제한이 풀려 많은 민요들이 채집될 수 있었다 . 또 외설적 가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집착 역시 강하게 드러나는바 ,83 그것은 그의 민속학적 입장을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중국민속학은 가요운동에서 시작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그 연구 범위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민요와 민간문학에서 방언이나 민간신앙 , 풍습 등으로 확장되었다 . 그 결과 민속문화나 민속생활 , 일상의 생활세계로 눈길이 향하게 되었다 . 그런 중국민속학의 초기 단계에서 쩌우쭤런은 민간문학을 민속학 연구의 궤도에 올리려 진력했고 ,84 가요운동이 민속학의 총체적 연구로 발전하는 흐름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핵심인물이었다 .85 오늘의 입장에서 선학을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겠지만 , 지금의 중국민속학에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라도 여명기의 중국민속학을 선도한 그의 사상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하 현대 중국민속학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갈음하겠다 .

1) 민간문학과 민속학의 관계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민속학의 역사는 대체로 민요나 신화와 같은 민간 구비문학의 수집과 정리에서 출발하여 , 삼라만상을 망라할 듯한 ‘민속’이나 ‘민간문화’로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해 왔다 . 민속학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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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이 “부단히 확장된 분과학문 의식”86을 집대성한 게 1998년에 발간된 중징원의 민속학개론 이다 . 하지만 분과학문으로서의 방법론이든 아니면 자료론이든 , 혹은 기본적 개념 체계이든 , 종래의 민속학은 늘 민간문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 수많은 민속학자들이 민간문학을 기점으로 민속문화나 민속생활을 둘러싼 논의에 참여해 온 까닭에 이론적 힘이 부족한 건 부정할 수 없겠다 . 또 일부 학자들은 임기응변의 책략으로 민간문학과 민속학 사이에서 ‘재주 좋게’ 줄타기도 한다 . 곧 민간문학 전반이나 혹은 신화 , 서사시 등과 같은 특정 장르를 민속학의 핵심적 과제로 내세우며 민간문학을 민속학 속에서도 특히 가치 있는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하는가 하면 , 어느새 표변하여 민간문화나 민족전통 , 무형문화유산 등을 부르대며 탁상의 공론을 되풀이한다 . 그런 것들을 거론하는 데 마치 전문적인 연구의 기초는 아무 필요도 없는 것처럼 날뛰고 있는 것이다 .

2) 채집과 필드 워크의 관계에 대해

베이징대학의 가요운동 이후 민간에서는 구비문학 자료를 찾으려는 기운이 고양되었다 . 종래 문헌자료를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중국 학술계에서 보면 , 이는 분명히 하나의 혁명이었다 . 그러나 현대 민속학이 요구하는 기준에서 보자면 당시 행해진 것은 이른바 ‘샘플 채취’였으며 , 필드 워크에 필요한 수준까지는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 게다가 운동을 주도한 문인들은 민간문학이나 민속학의 고찰을 행하도록 주위를 계몽하고 교육 , 고무하기는 했지만 , 학문을 목적으로 하는 조사연구를 스스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 민요의 학술적 가치에 일찍 눈을 떠 민속학에 애착이 많았던 쩌우쭤런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는 조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개인이나 학회 조직이 나서 현장을 조사하기를 호소하는 문장을 적지 않게 썼지만 , 초년에 고향에서 약간의 동요 수집을 해 본 것 이외에 일생을 마칠 때까지 진정한 의미의 필드 워크를 행한 적이 없었다 . 훗날 높게 평가받고 있는 미아오펑산 ( 妙峰山 ) 조사에도 참가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평가하는 문장 하나 남기지 않았다 . 지앙사오위앤 ( 江紹原 )의 ‘예절’에 관한 실증적 연구와는 대조적으로 , 그는 관련 사상을 계시하는 데만 만족하고 그 실증 연구는 사상가 자신이 행하는 게 아니라고 인식한 듯하다 .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민속학을 서재 속에 혹은 ‘자신의 정원’87에 가두었던 것이다 . 이는 지금도 일부 중국민속학자들 사이에 보이는 두드러진 경향이기도 하다 .

3) 잡문, 산문, 소품문을 포함한 ‘문장’과 학술적 논저의 관계에 대해

현대 민속학이 생산하는 지식의 기본적인 표현양식은 민속학이란 전문성을 가진 학술 논문이 아닐 수 없다 . 그것은 선학들의 학술성과에 대한 존중과 정리를 전제로 민속 사상과 관련 자료에 대한 실증적 조사와 분석에 기초하여 , 논거가 되는 참고문헌이나 자신의 본론을 보완하는 세밀한 주석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 이 학술 논문은 체제와 분량 , 문체 등의 여러 방면에서 ‘문장’과는 큰 차이가 있겠다 . 그 기준에서 보면 , 여명기의 민속학자나 문인들의 작품은 귀중한 민속자료와 그 단서를 기록하고 있고 , 또 일부 민속 사상에 대해선 날카로운 통찰력과 풍요로운 감성을 제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엄격한 의미의 학술 논문과 동렬로 놓고 논할 수는 없겠다 . 어떤 작품이 논문인가 ‘문장’인가를 기준으로 그 작자가 학자인가 문인인가를 구분한다면 , 여명기 민속학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은 쩌우쭤런을 비롯해 대부분이 문인이었다 . 그들은 어디까지나 문인으로서 민속학 분야를 향해 발화한 것이지 , 민속학자로서 진지하게 연구에 몰두해 성과를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민속학의 아버지로 불이는 중징원조차도 일생에 남긴 ‘문장’ 수가 그 ‘논문’의 수보다 훨씬 많은데 ,88 이를 통해서도 중국민속학에는 양자가 혼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겠다 . 그 배경의 하나로 , 민속학이 인문학에 속하는지 아니면 사회과학에 속하는지 , 이에 대해 아직 일치된 인식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결국 중국민속학에서 ‘문장’과 ‘논문’의 혼재가 아직도 허용되고 있는 것은 , 민속학이 ‘과학’을 앞세울 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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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33

객관성뿐만 아니라 실증하기 어려운 인문학적 성격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덧붙여 중국의 경우 이러한 인식의 불일치가 학술 영역에 국한되지 않아 문제다 . 가령 민속학의 전문적 논문을 발표한 적이 없는 자칭 ‘민속 전문가’들이 근년에 민속학의 그 인문학적 성격을 이용하여 , 공적인 자리에서 문화 문제를 거론하고 또 여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비록 그들의 문화론이 학술적 검증을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닐지라도 민속학에 그들을 비판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

4) 물질문화 연구의 결여에 대해

쩌우쭤런은 장난감이나 문방구 , 농기구 , 고기잡이 도구 , 그리고 음식문화 등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보였는데 , 당시 그처럼 물질문화에 주목한 이는 아주 적었다 . 다른 문인들은 ‘문이재도 ( 文以載道 )’를 과신한 까닭에 ‘물이재도 ( 物以載道 )’의 가능성을 매우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 중국민속학자는 누구나 다 민속문화나 민속생활 전반에 흥미가 있다는 포즈를 취하면서도 , 대부분의 경우 물질문화의 조사 연구에 잘 나서지 않고 있는데 그 점 일본민속학과 큰 차이가 있다 . 민속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젊은 세대들조차 물질문화 연구를 회피하면서 그 물질이 넘쳐나는 일상세계를 마주하려고 한다 . 게다가 무형문화유산 개념의 유행과 그것이 초래한 오해로 말미암아 물질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있다 .

5) ‘민속’ 연구와 ‘생활세계’ 연구의 관계에 대해

현재 중국민속학은 민간문학만을 대상으로 하던 과거의 인식 틀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 비록 민간문학 연구로 민속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시야를 민간문학에 한정하는 것은 어렵다 . 중국민속학은 , 민속학이라는 학문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학 s현대의 중국민속학이 다시 그 초심으로 돌아가 민중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이해하고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 문인의 낭만주의적 상상에 빠지지 말고 현대 사회의 일상을 직시하는 게 불가결하다 . 이러한 낡고도 새로운 이념을 칠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과거의 민속학 개념이나 패러다임을 극복할 필요가 있겠다 . 그저 단순히 ‘민속생활’이나 ‘생활세계’와 같은 서구 유래의 개념을 중국민속학에 도입하면 좋은 게 아니다 . 학술사의 단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그러한 개념을 도입하기 89 전에 선학들이 일상생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했는지 , 진득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 곧 그들이 어떠한 생활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 가요나 민간문학과 사회생활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 그리고 민속문화의 전통이나 무형문화유산과 현대인의 일상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포착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 이를테면 중징원의 경우 민속학은 “인민의 생활문화 현상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설명하는”90 학문분야라고 봤는데 , 이러한 견해에 대한 검토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인다 .현재 중국민속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민속학자가 직면하는 현대 중국사회의 현실과 호응하고 있다 .

그리고 그 현실은 쩌우쭤런의 시대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 민속의 ‘민’에 관한 논의가 하층설 , 계급론 (노동 인민설 ), 민족 ·지역론을 거쳐 근년 국민 , 시민 , 공민 개념으로 다시 재연되고 있다는 게 그것을 뒷받침한다 .91 그 재론 중에서 가령 가오빙중 ( 高丙中 )은 무형문화유산 정책에 대한 협력을 통해 지금까지 봉건시대의 유물로서 배제되어 온 민속문화를 국가로부터 공인된 공민문화로 자리매김하려 진력하고 있다 .92 요컨대 쩌우쭤런 등이 직면했던 국민문화의 건설이란 과제는 결코 케케묵은 주제가 아니라 , 중국민속학이 바로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과제 그 자체인 것이다 .이 글에서 거론한 쩌우쭤런의 사상과 실천은 과거의 한계만이 아니라 금후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고 보인다 . 물론 중국이 동서 제국들과 싸우고 또 내전에 휩싸여 민중들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간 그 시절에 , ‘생활의 예술’을 읊조리며 ‘개성주의적 인간 본위주의’를 추구한 쩌우쭤런는 상당히 ‘별난 놈’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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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생활 문학(쪼)

모르겠다 . 하지만 1934년부터 ‘신생활운동’이라 불리는 공민교육이 추진되었을 때 , ‘생활의 예술’은 발표된 지 10년을 지나 하나의 선견지명으로 재평가되고 있었다 .93 ‘생활의 예술’이 되었건 ‘개성주의적 인간 본위주의’기 되었건 , 현재에 이르러 그것들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 인류학자 페이시아오퉁 ( 費孝通 )이 만년에 예측했듯이 중국이 소강 ( 小康 ) 상태의 사회를 실현하고 나서 도래하는 것은 생활의 질과 예술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풍요사회가 불러일으키는 ‘생활혁명’은 중국의 민속학자들에게 다시금 ‘민속생활’이나 ‘현대적 일상’ , 그리고 ‘생활세계’와 같은 범주가 갖는 의미를 숙고할 것을 재촉하고 있다 .

1 王文寶 , 中國民俗硏究史 , 黑龍江人民出版社,2003, 46-50쪽과 67쪽 . 王强 편 , 中國現代民間文藝學家 ,中央民族學院出

版社 , 1988, 58-66쪽 .2 周作人 , 知堂回想錄 ( 上 ) ,河北敎育出版社,2002, 108-110쪽 .3 周作人 , 「我的雜學 : 代序」,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39쪽 .4 鍾敬文 , 建立中國民俗學派 ,黑龍江敎育出版社,1999, 17쪽 .5 쩌우쭤런은 일본 유학 기간에 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 , 그리스어 ,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 倪墨炎 , 苦雨齋主人周作人 ,上海人民

出版社,2003, 34-36쪽 . 6 周作人 , 「我的雜學 : 代序」,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39쪽 .7 周作人 , 「童話略論」, 周作人民俗學論集 , 上海文藝出版社,1999, 39-45쪽 .8 陳子艾 , 「我國現代民間文藝學的開端」,苑利 편 , 二十世紀中國民俗學經典·學術史卷 ,社會科學文獻出版社,2002, 48-68쪽 ;

郝蘇民 ·王宏剛 ·曹保明 , 「周作人與早期中國民俗學」,苑利 편 , 二十世紀中國民俗學經典 · 學術史卷 ,社會科學文獻出版

社,2002, 178-187쪽 .9 安德明 , 「家鄕 : 中國現代民俗學的一個起点和支点」, 民族藝術 , 2004년 제 2기 .10 周啓明 , 「一点回憶」, 民間文學 , 1962년 제 2기 .11 周作人 , 「采集兒歌童話啓」,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503-504쪽 .12 陳泳超 , 「周作人 紹興兒歌集 考述」, 民間文學論壇 , 2012년 제 6기 . 쩌우쭤런이 집록하여 주를 단 童謠硏究手稿 ,福建敎育

出版社,2004 참조 . 13 周作人 , 淸嘉錄 ,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310-314쪽 ; 周作人 , 「與友人論懷鄕書」,鍾叔河 편 , 周作

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12-13쪽 .14 周作人 , 「故鄕的野菜」,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④ 人與虫:自然 · 科敎 · 文明 ,湖南文藝出版社,1998, 12-14쪽 .15 周啓明 , 「一点回憶」, 民間文學 , 1962년 제 2기 .16 周作人 , 「 歌謠 周刊發刊詞」,원래 가요 주간 제 1호에 등재되었다 . 1922년 12월 17일 . 위 인용문은 周作人民俗學論集 , 上

海文藝出版社,1999, 97-98쪽에서 인용했다 . 일반적으로 이 발간사는 쩌우쭤런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한 학자도 있다 . 자세한 것은 施愛東 , 「 歌謠 週刊發刊詞作者辨」 , 民間文化論壇 , 2005년 제 2기 참조 .

17 周作人 , 「神話與傳說」,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177-180쪽 .18 周作人 , 「歌謠」,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04-107쪽 .19 周作人 , 「讀 繪圖童謠大觀 」,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42-147쪽 .20 王文寶 , 中國民俗硏究史 ,黑龍江人民出版社,2003, 113-114쪽 .21 陳連山 , 「重新審視現代民俗學的命運」, 民俗硏究 , 2012년 제 1기 .22 施愛東 , 中國現代民俗學檢討 ,社會科學文獻出版社,2010, 17쪽 .23 王文寶 , 中國民俗學史 ,巴蜀書社,1995, 203쪽 .24 鍾敬文 , 鍾敬文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8, 329쪽 .25 루쉰 , 쩌우쭤런과 야나기타의 관계에 관해서는 今村與志雄 , 「魯迅、周作人與柳田國男」 , 孫郁 · 黃喬生 편 , 回望周作人硏究述

評 ,河南大學出版社,2004, 163-172쪽 참조 .26 周作人 , 「遠野物語」,周作人 , 夜讀抄 ,河北敎育出版社,2002, 7-13쪽 .27 周作人 , 「 聽耳草紙 」,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382-384쪽 .28 周作人 , 「鴉片祭竈考」,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27-226쪽 .29 陣連山 , 「重新審視現代民俗學的命運」 , 民俗硏究 , 2012년 제 1기 .30 錢理群 , 周作人傳 ,北京十月文藝出版社,1990, 234-236쪽 .31 吳平 , 「編后記」,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410-423쪽 .32 周作人 , 「平民文學」,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78-281쪽 .33 周作人 , 「貴族的與平民的」,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87-289쪽,

34 周作人 , 「廠甸」,周作人 , 苦口甘口 ,河南大學出版社,2004, 151-154쪽 .35 周作人 , 「一歲貨聲」,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 湖南文藝出版社,1998, 17-20쪽 .36 周作人 , 「中國民歌的價値」,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01-103쪽 .37 周作人 , 「 海外民歌譯 序」,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569-571쪽 .38 周作人 , 「 潮州畲歌集 序」,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567-5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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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35

39 周作人 , 「中國民歌的價値」,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01-103쪽 .40 呂微 , 「民間文學需要統一的學術目的」, 民間文學論壇 , 2012년 제 6기 .41 高有鵬 , 「民間文學學科的現代意識 : 歌謠硏究者的民衆立場與國家意識」, 民間文學論壇 , 2012년 제 6기 . 42 周玉蓉 , 「關注民衆 貼近民生 : 周作人民俗硏究目的解讀」, 民俗學刊 제 2집,澳門出版社,2002, 23-28쪽 .43 周作人 , 「擁護 達生篇 等」,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⑤ 上下身 : 性學 · 兒童 · 婦女 ,湖南文藝出版社,1998, 111-112쪽 .44 周作人 , 「關于通俗文學」,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305-309쪽 .45 周作人 , 「拜脚商兌」,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82-85쪽 .46 周作人 , 「關于竹枝詞」,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45-249쪽 .47 周作人 , 「擁護 達生篇 等」,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⑤ 上下身 : 性學 · 兒童 · 婦女 ,湖南文藝出版社,1998, 111-112쪽 .48 周作人 , 「鄕村與道敎思想」,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98-203쪽 .49 周作人 , 「常識」,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④ 人與虫 : 自然 · 科敎 · 文明 ,湖南文藝出版社,1998, 381-387쪽 .50 周作人 , 「關于兒童的書」, 知堂書話 ,岳麓書社,1986, 135-138쪽 .51 周作人 , 「與友人論國民文學書」,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③ 本色 : 文學 · 文章 · 文化 ,湖南文藝出版社,1998, 94-96쪽 .52 李景彬 , 周作人評傳 ,陝西人民出版社,1986, 180-184쪽 .53 周作人 , 「國粹與歐化」,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① 中國氣味 : 思想 · 社會 · 時事 ,湖南文藝出版社,1998, 185-187쪽 .54 周作人 , 「兒童的文學」,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1-28쪽 .55 周作人 , 「人的文學」,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69-277쪽 .56 毛曉平 , 「周作人的民俗觀和美文觀」, 民間文學論壇 , 2012년 제 6기 .57 周作人 , 「上下身」,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⑤ 上下身 : 性學 · 兒童 · 婦女 ,湖南文藝出版社,1998, 40-42쪽 .58 周作人 , 「 淸嘉錄 」,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310-314쪽 .59 周作人 , 「蘇州的回憶」,周作人 , 苦口甘口 ,河北敎育出版社,2002, 113-117쪽 .60 周作人 , 「說鬼」,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15-218쪽 .61 周作人 , 「北京的茶食」, 揷圖珍藏版 周作人散文 ,人民文學出版社,2005, 8-9쪽 .62 周作人 , 「我的雜學 : 代序」,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1-39쪽 .63 周作人 , 知堂回想錄 ( 下 ) ,河北敎育出版社,2002, 776-778쪽 .64 錢理群 , 「周作人的民俗學硏究與國民性考察」, 北京大學學報 , 1988년 제 5기 .65 周作人 , 「民衆的詩歌」,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99-100쪽 .66 周作人 , 「生活之藝術」,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24-226쪽 .67 周作人 , 「生活之藝術」,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24-226쪽 .68 江紹原 ·周作人 , 「禮的問題」, 語絲 1924년 제 3기 .69 伊藤德也 , 「藝術的本義 : 周作人“生活的藝術”的構造」,孫郁 · 黃喬生 편 , 回望周作人硏究述評 ,河南大學出版社,

2004, 173-187쪽 .70 程天舒 , 「建設之難 : 論 語絲 時期周作人與就江紹原的禮俗硏究」, 近現代社會變遷與中國民俗學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

山東大學 , 文化部民族民間文藝發展中心,2010, 251-259쪽 .71 江紹原 · 周作人 , 「禮的問題」, 語絲 1924년 제 3기 .72 周作人 , 「 發須爪 序」,鍾叔河 편 , 周作人文類編⑥ 花煞 : 鄕土 · 民俗 · 鬼神 ,湖南文藝出版社,1998, 213-215쪽 .73 周作人 , 「 歌謠 週刊發刊詞」,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97-98쪽 .74 周作人 , 「在希腊諸島」,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348-349쪽 .75 趙世瑜 , 「黃石與中國現代早期民俗學」, 北京師範大學學報 ( 社會科學版 ) , 1997년 제 6기 .76 周作人 , 「人的文學」, 周作人民俗學論集 ,上海文藝出版社,1999, 269-277쪽 .77 陳泳超 , 中國民間文學硏究的現代軌轍 ,北京大學出版社,2005, 76쪽 .78 蘇雪林 , 「周作人先生硏究」,陶明志 편 , 周作人論 ,北新書局,1934, 210-238쪽 .( 上海書店 1987년 영인본 ).79 康嗣群 , 「周作人先生」,陶明志 編 , 周作人論 ,北新書局,1934, 1-11쪽 .( 上海書店 1987년 영인본 ). 阿英:「周作人的小

品文」,陶明志 편 , 周作人論 ,北新書局,1934, 102-106쪽 .( 上海書店 1987 영인본 ).80 魏星 , 「試論周作人小品文的民俗因子」, 民俗學刊 , 2002년 제 3기 , 澳門出版社,79-87쪽 .81 程天舒 , 「建設之難 : 論 語絲 時期周作人與就江紹原的禮俗硏究」, 近現代社會變遷與中國民俗學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

山東大學 , 文化部民族民間文藝發展中心,2010, 251-259쪽 .82 陳泳超 , 中國民間文學硏究的現代軌轍 ,北京大學出版社,2005, 65쪽 .83 飯倉照平 , 「周作人とフォークロア ( 硏究回顧 )」 . 伊藤德也 편 , 「周作人と日中文化史」 , アジア遊學 164, 勉誠出版 ,

2013, 87- 94쪽 .84 趙世瑜 , 眼光向下的革命 : 中國現代民俗學思想史論 (1918-1937) ,北京師范大學出版社,1999, 94-96쪽 .85 王文寶 , 中國民俗硏究史 ,黑龍江人民出版社,2003, 53쪽 .86 陳泳超 , 中國民間文學硏究的現代軌轍 ,北京大學出版社,2005, 222-226쪽 .87 趙世瑜 , 眼光向下的革命 : 中國現代民俗學思想史論 (1918-1937) ,北京師范大學出版社,1999, 98쪽 .88 施愛東 , 中國現代民俗學檢討 ,社會科學文獻出版社,2010, 15쪽 .89 戶曉輝 , 「民俗與生活世界」, 文化遺産 , 2008년 제 1기 .90 鍾敬文 , 「 民俗學入門 序」,(일본 ) 后藤興善: 民俗學入門 ( 王汝瀾 역 ),中國民間文藝出版社 , 1984.91 戶曉輝 , 「從民到公民:中國民俗學硏究“對象”的結構轉換」, 民俗硏究 , 2013년 제 3기 .92 高丙中 , 日常生活的文化與政治 : 見證公民性的成長 ,社會科學文獻出版社,2012.93 許杰 , 「周作人論」,張菊香 , 張鐵榮 편 , 周作人硏究資料 ( 上 ) ,天津人民出版社,1986, 336-35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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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 독일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의 마을에 대한 일상연구를 중심으로-

이 상 현

안동대학

1. 들어가며 1970년부터 몇 년 동안 ,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에서는 마을의 일상생활 연구를 위 하여 인근의 평범한 농촌마을인 Kiebingen마을 1

을 조사 연구하였다 . 일상 (Alltag)연구는 단순히 반복되는 일상의 연구가 아닌 ,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일상에 대한 연구이며 , 일반적으로 E. Husserl의 ‘생활세계’ 혹은 ‘삶의 세계’ (Lebenswelt)에 관한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 이러한 이유로 일상연구는 주로 일상생활 연구 혹은 일상생활세계 연구라고 칭하면서 다양한 학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일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현상학적으로 생활세계 연구를 지향하였던 A. Schütz에 의해 시작되었다 . 이후 여러 분과학문에서 다양한 이유로 일상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 민속학이나 인류학과 같은 문화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에서도 , 문화의 형성과 변화에 있어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를 분석하기 위하여 일상연구를 진행 하였다 . 일상연구는 독일민속학의 여러 분야 연구에 영향을 주었지만 크게 생애사 연구 , 물질문화 연구 , 노동자문화연구 , 민중문화사 , 마을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2 특히 기존 민속학에서 마을연구는 주로 마을을 공동체로 인식하여 , 그곳에 살고 있는 개별 주민들의 생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 따라서 마을연구에 있어 일상연구의 도입과 활용은 독일민속학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 본 발표는 우선 독일민속학의 일상연구 , 특히 마을 일상연구의 대표적 연구 업적으로 평가받는 Kiebingen마을

조사와 연구의 배경과 과정을 분석하고 , 이를 바탕으로 독일민속학의 일상연구의 특징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 이를 위하여 본 발표에서는 1960 ∼ 70 년대 Bausinger 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Tƒübingen 대학 민속학연구소의 연구 경향과 특징을 기술하겠다 . 먼저 , 이 연구소의 연구 성과 중에서 1950년대 H. Bausinger 주도 하에 진행된 이주지역 연구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할 생각이다 . Kiebingen마을 조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Jeggle가 이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고 , 또한 Kiebingen마을 조사 역시 Bausinger의 이주지역 조사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Kiebingen마을 조사 연구의 과정과 특징을 분석할 생각이다 . 원래 이 조사는 마을주민들의 생활과 민속에 관한 주제였으나 ,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상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본 발표는 이 과정을 기술하고 분석할 계획이다 . 독일민속학의 일상 연구 중에서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 , 특히 Jeggle교수의 일상 연구를 분석하려는 이유는 본 발표자가 공부하였던 연구소이기 때문에 , 따라서 연구소의 연구 경향과 특징을 상대적으로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연구소의 연구소장을 오랫 동안 역임한 Bausinger교수의 여러 연구 업적이 이미 일본어로 번역 , 소개되어 있어 , 일본 민속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독일 대학의 다른 민속학연구소보다 이해의 폭이 넓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Jeggle교수는 연구소의 연구진 중에서 가장 먼저 일상 연구에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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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37

갖고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한 까닭에 , 본 발표에서는 Jeggle가 실행한 Kiebingen마을의 조사와 연구를 중점적으로 고찰해보겠다 .

2.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의 이주지역 연구: 마을의 사회학적 연구

終戦 직후인 1945년 ,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는 동구권에 거주하다 종전에 서독으로 이주한 , 이른바 ‘고향에서 추방당한 독일사람들 (Heimatvertriben)’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 당시 독일의 여러 연구소에서는 독일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하기 전에 공유했던 언어와 민속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 사업을 진행했는데 , 이 조사도 그러한 사업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그러나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이 사업의 내용과 방법을 바꾸어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 새로운 사업 방향 설정과 추진은 이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H. Bausinger가 중심이 되어 다른 두 명의 연구원과 함께 진행하였다 .5 조사 대상은 전후 ( 戦後 )에 조성된 Baden-Württemberg 州 21개 이주 지역으로 , 이 지역에는 동구권에서 이주한 독일계 주민 , 통일되기 이전 동독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 , 그리고 서독의 다른 지역에 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

21개의 이주 지역은 지형상의 위치 , 그리고 거주 인구의 규모와 특성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 일정한 형식을 바탕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 하지만 이주 지역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섯 항목은 필수적으로 조사 기술하였다 . 첫째로 이주 지역의 역사 특히 戦後 이주 지역의 역사 , 두 번째로 지형적 지리적 특징 , 세 번째로 인구 구성의 특징 , 네 번째로 사회 및 종교 생활의 특징 , 마지막으로 이주 지역의 여러 문제점 등이었다 . 이 다섯 가지 기술 항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우선 , 이주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개발의 역사

및 건설 주체를 주로 기술하였다 . 지형적 , 지리적 특징으로는 이주 지역의 생태학적 환경 그리고 주변 지역과의 관계 등을 기술하였다 . 인구 구성의 특징으로 , 이주 지역 주민들의 출신 지역과 직업 등을 기술하고 분석하였다 . 사회생활의 특징으로는 가족 및 친족 생활 그리고 이웃 주민들과의 관계를 기술하였고 , 지역 내 여러 동호회 활동 , 예를 들어 스포츠 동호회 활동 등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 종교 생활의 특징으로 . 지역 주민들의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활동과 그 특징을 언급하였다 . 문제점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특징이 고려되지 않은 문화 시설의 문제 , 출신 지역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이 웃 간의 문제 , 이주 지역의 새로운 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가족 간의 문제 등을 기술하였다 . 본 연구의 제 2부에서는 21개 이주 지역의 조사 내용을 분석하였다 . 분석 대상은 크게 이주 지역에서 조직

운영되는 모임과 사회조직 , 새로운 이주 생활에 활용되는 민속 , 마지막으로 고향에 대한 인식 등이었다 . 이주 지역으로 온 주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다양한 사회 모임과 조직을 운영하였다 . 연구진들은

이주 지역의 사회 모임과 조직을 이주민들의 출신 지역 , 세대 , 거주 위치 등에 따라 구별하여 기술하고 , 조직과 모임의 기능과 역할도 분석하였다 . 새로운 이주 지역 연구의 두 번째 분석 대상은 문화적 자산이다 .6 이주 지역은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주 이전 지역에서 전승되고 배운 문화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그들의 문화적 자산에 관해서는 이미 기존의 민속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분야였지만 , 이주 지역의 연구진들은 이주 지역에서 새롭게 변형된 문화자산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변화된 형태의 새로운 의미 , 그리고 변화의 주체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 다음 분석 대상은 이주 지역의 계획 수립과 운영으로 , 주로 이주 지역 설계에 참여한 회사의 이주 지역 계획

수립의 특징과 전개 과정을 분석하였다 . 특히 이주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과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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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이)

해결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을 기술하였고 , 이와 관련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 마지막으로 이주 지역 주민들의 고향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였다 . 고향에 대한 인식은 주로 시간적 , 공간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는데 , 특히 과거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과 회상이 고향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 동구권에서 이주한 이주민의 경우에는 고향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위와 같은 조사의 연구진들은 이주 지역 주민들의 고향 인식의 단계와 각 단계별 문화적 자산의 활용 방법 , 출신

지역에 따른 고향 인식의 차이점 , 그리고 정착 시기별 고향 인식의 변화 등을 분석하였다 . 일반적으로 그들의 고향 인식은 정착 초창기의 심리적 불안감 증대 , 같은 고향 사람과 접촉하면서 향우회와 같은 사회조직의 결성 , 다양한 방법으로 고향에 대한 관심 표명 등과 같은 , 3단계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 다만 이러한 고향 인식 및 활동 단계 그리고 활용된 문화적 자산의 종류는 이주민의 출신지별 , 세대별 그리고 거주 기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연구진들은 고향에 대한 이주민들의 인식상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민속학 연구의 핵심 용어 중 하나인 ‘部族 (Stamm)’에 대하여 논하였다 . 특정 지역에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의미하는 部族은 , 자기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타 지역 주민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때 활용되는데 , 이러한 모습은 조사 대상인 이주 지역에서도 목격되었다 . 연구진들은 이 용어가 민속학 연구에서 객관적 사실로 통용되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 한편 , 이 조사연구는 민속학적 ·사회학적 조사라는 副題가 붙을 정도를 사회적 맥락을 중요시했다 . 또한

이 연구는 기존 민속학의 마을조사처럼 특정 민속이 지속되는 현장으로서의 마을 ,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의 마을이 아니라 戦後 독일의 변화된 마을 사회 의 특성을 반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을 평가받고 있다 .7

Bausinger는 이 이주 지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Folklorismus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였고 , 이외 문화산업과 관광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 였다 8. 그리고 민속학의 기본 개념들 , 이를테면 連続性 , 共同体 , 部族 , 規範 등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 그가 1959년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의 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연구소의 연구 방향도 변화했는데 , 설화 대신에 통속문학 연구 , 민요 대신에 가요 연구 , 잔존물의 역사적 유래보다는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 , 방언의 언어학적 연구 대신에 언어사회학적 연구를 지향하였다 .9

1960년대까지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는 기존 민속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주를 이루었고 1970년대 특히 Falkenstein 학술모임 이후부터는 민속학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

3.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의 명칭 변경과 Kiebingen연구: 마을의 일상문화 연구

‘68학생혁명’이 서부 유럽과 미국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1969년 , 독일 Detmold에서 독일민속학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 이 학술대회에서는 독일민속학의 정치 사회적 입장 , 민속학적 이론 그리고 민족 ·민중을 의미하는 ‘Volk’라는 용어의 지속적 사용 여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 그리고 1년 후 Falkenstein에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을 기획하였다 .

이 특별학술대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민속학은 대상과 주체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문화적 가치에 대한 전달을 분석하는 학문이라는 것’ , 그리고 ‘사회 문화적 문제 해결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는 것에 대해 합의했다 . 합의 이후 독일 대학의 민속학 연구소들은 문화와 ‘Volk’에 대한 각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연구소의 명칭을 유지 혹은 개명하거나 새로운 연구 활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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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39

이 학술대회 이후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는 명칭을 Ludwig-Uhland-Institut fu�r Empirische Kulturwissenschaft(이하 EKW연구소 )로 변경하였다 . 연구소 명칭 변경에는 Falkenstein 학술대회 논의뿐 아니라 1970년대 독일대학교육개혁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 당시 대학교육개혁은 독일의 州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 전공 분야에 따라 단과대학을 세분하고 대학생들이 여러 개의 전공을 이수하도록 했으며 , 연구소 운영 규정을 연구소 교수에게 일임하도록 했다 .

1969 년 , EKW 연구소에서 ‘Württemberg 지역의 유대인 마을들’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Jeggle(당시 연구원 )은 1970년부터 몇 년에 걸쳐 Kiebingen과 인접 마을을 조사하였다 . 조사 결과는 학술대회에 발표하거나 잡지에 기고하였고 ,10 단행본으로도 출간하였다 .11

Kiebingen 마을에 대한 조사는 원래 Bausinger의 이주지역 조사처럼 특정 마을의 変化像을 조사하고 , 민속의 변화된 의미를 분석할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 조사팀은 마을 주민과 라포 (Rapport)를 형성하기 위하여 민속과 관련된 다양한 마을 행사를 주관하였는데 , 이러한 조사팀의 활동은 지역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었고 , 덕분에 조사도 원만히 진행되었다 . 다만 특정 민속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 마을 내 특정 인물의 영향력 혹은 기타 정치 ·사회 영역에서의 영향력 등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명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 조사팀은 마을 주민들이 이러한 정보를 마을 외부사람에게 공개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는데 , 그 과정에서 Kiebigen마을 주민이자 Tübingen 대학의 학생인 Albert Ilien를 만나게 되었다 . 그는 마을 내부의 동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조사팀처럼 마을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 게다가 그의 부인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여서 마을주민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 그는 조사팀에 참여하였고 , 조사팀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마을주민들에게 전달하고 , 수집된 정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 그가 조사팀에 합류하면서 ‘조사 지역과 사람들의 일상세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성격’12(eigensinnigen

Charakter der untersuchten empirischen Welt)으로 , 즉 마을 주민의 독 특한 일상세계에 대한 연구로 그 조사연구의 목적도 변경되었다 .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독특한 생각과 행동이 어디서 출발했으며 어떻게 변화했는지 , 그 과정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었다 . 이를 위해 현재 마을에 대한 조사뿐 아니라 역사적 자료의 수집 ·정리도 이뤄졌다 . 조사팀은 Kiebingen마을 주민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징으로 마을 주민 상호간의 불신 , 재산에 대한 강한 집착 , 일관성 없는 가정교육 , 깨끗함에 대한 집착 등을 꼽았다 . 또한 마을 주민들의 가난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 均等相続과 多産에 있지만 , 이것들이 이웃에 대한 不信 , 형제자매 간의 葛藤 , 遺産相続 과정에서의 詐欺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를 유발했다고 분석했다 . 조사팀은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문화적 특징이 , 19세기 이 마을이 농촌마을에서 노동자마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 이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 .

Kiebingen마을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1790년 이후 현재까지 지역 아카이브에 빠짐없이 축적되어 있었는데 , 조사팀은 특히 1820년대부터 1890년대 후반까지 마을의 変化像을 분석하기 위해 당시 마을 주민들의 토지 소유 관계 , 마을 내의 위상 등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 위 연구에서는 역사적 자료를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누고 , Kiebingen마을 주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당시 마을 주민들의 생활세계를 분석하였다 . 우선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Kiebingen마을이 산업화 , 근대화되는 과정의 중요한 특징을 정리하였다 . 구체적으로 마을 내 수도원의 매각과 마을 주민의 구입 , Neckar 江 정비 과정 중에 발생한 官과 주민들의 갈등 및 협동 , 행정 체계의 변화 , 교회의 역할 변화 등을 기술하였다 .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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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이)

1823년 작성된 마을 지도에 나타난 집과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였다 . 위 연구의 두 번째 분석 대상은 마을 주민들 , 특히 농민들과 그 노동의 특징이다 . 즉 , 농경지 활용의 특징 , 농산물의 종류와 변화 그리고 생산량의 변화를 기술하였고 , 행정 단위인 ‘Gemeinde’가 농사를 위한 協議体로 변화하는 과정을 언급하였다 . 더불어 의식주 생활의 특징 , 家事 노동에 있어 남녀노소의 역할 분담 그리고 가족 재산의 분배 및 통합의 양상을 기술하였다 . 다음으로 출생 기록과 불륜으로 인한 출생 문제의 기록을 토대로 마을 주민들의 성 생활을 분석하였다 . 당시는 여성들의 고된 노동으로 인해 유아사망률이 높았고 , 하위 계층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 사생아의 수도 많았다 . 1970년대 조사 당시 , 아이들에 대한 주민들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 마지막으로는 19세기 마을축제에 관하여 분석했는데 , 노동의 강도 ,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가정과 마을의 존속을 위해 마을 축제가 지속되었다고 보았다 . 세 번째 연구 대상인 마을 주민의 재산 유지와 활용에 관한 논의에서는 재산의 보유 형태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상류층 , 중류층 , 하위층 등 세 계층으로 구분하고 1823년부터 1897년 사이 각 계층의 재산 변화 과정을 조사하였다 . 또한 재산의 흐름을 분석하기 위하여 여성 배우자의 계층과 소속 , 출신 지역을 조사하였고 , 재산 분배 과정도 추적하였다 . 이를 바탕으로 당시 친족 개념이 강화되는 과정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제시하였고 , 각 계층별 사례를 통해 부에 대한 마을 주민의 의식도 분석하였다 . 네 번째 주제는 마을 주민들의 인지 체계의 특성으로 , 본인과 본인이 포함된 집단 , 타인 , 사물 (집 , 농토 , 가축 등 ), 자연 등으로 나누어 이들에 대한 주민의 인식 특성을 기술하고 분석하였다 . 마을 주민들은 전반적으로 가족 및 친족 간에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고 타인에 대해서는 불신감이 강했다 . 사물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해서는 위협적이고도 制御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인식했다 . 마을 주민의 인지 체계에 대한 분석은 이전의 조사 내용들을 주민들의 입장에서 정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 주민들의 주관적 생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 본 연구의 마지막 연구 대상은 마을의 역동적인 변화상이다 . 구체적으로 새로운 농작물의 재배와 농기계 도입

등으로 대표되는 농업경제의 특성 , 마을 내 수공업의 변화 과정과 특성을 기술하였다 . 또한 개인 회사의 형성 배경과 그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마지막으로 저소득층이 지속적으로 프로레타리화 (Proletarisierung)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 마을 변화의 역동적 요인에 대한 분석은 산업화와 근대화 혹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마을 주민의 대응을 살펴보기 위해 실행되었다 . 특히 Jeggle는 19세기 Kiebingen마을의 변화상을 주목했는데 , 그는 노동과 소유 관계의 변화를 토대로 사회 , 정치 , 종교 생활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

Kiebingen의 조사연구는 기존의 민속학과 달리 마을을 주민들의 생존 공간 , 다른 주민들과의 공존의 현장으로 전제하고 분석했다 . 그리고 마을을 공동체로 인식하던 기존의 연구와 다르게 마을을 계층 , 성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분해서 분석하였다 . 특히 마을 주민들의 생각과 행동을 중심으로 그 집단들의 생존 방식 , 자산 획득과 유지를 위한 노력 , 기본적 본능의 충족 방법과 사회적 制裁 등을 분석하였다 . 또한 이 조사연구는 주민 생활의 淵源과 그 변화 과정을 기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마을 주민의 일상생활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다 .13 마을 주민의 역사적 경험이 고려된 일상생활 연구는 Jeggle의 일상에 대한 인식에서 명확하게 들어나는 데 , 그는 ‘일상이란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생활하는 특별한 세계로서 , 개인 혹은 집단의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특정 대상에 대한 그들의 인식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14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Kiebigen사람들이 토지 , 자동차 , 가축 등의 재산 , 아이들 , 친척 혹은 이웃 사람에 대하여 민속학자 혹은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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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41

하였다 . Jeggle와 조사원들은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일상생활을 분석하면서 , 여타의 민속학 , 인류 학자들처럼 개별 구성원들이 타인들과 생활하면서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문화를 주목했다 . 특히 노동과 생산방식을 토대로 문화가 형성된다는 마르크스적인 문화 개념을 바탕으로 이 마을의 19세기 일상생활을 분석하였다 . 이러한 문화 개념은 비단 Jeggle뿐만 아니라 EKW 대부분의 교수진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 예를 들어

Jeggle의 일상생활에 관한 논문이 수록된 민속학개론서에서 문화 분야를 기술한 G. Korff는 문화는 ‘사회 -생태적 카테고리로서 삶의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 구체적으로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물질적 환경이 검토되어야 하며 동시에 개별 시대와 공간에 유통되고 있는 규범 , 가치 , 태도 등도 이와 관련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5

마르크스적인 문화 개념은 同時代 동독의 민속학자들이 수행한 ‘문화와 삶의 세계’(Kultur und Lebensweise)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 유효성이 입증되었다 . Falkenstein의 특별학술대회에서 계층에 따른 문화 연구 , 특히 피지배층인 여성 , 노동자 등에 대한 연구를 주장한 Tübigen대학 민속학연구소 연구원들은 동독민속학의 문화 개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Jeggle 또한 일상생활에 대한 민속학적 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경제적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상생활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 , Henry Lefebvre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원용하였다 .16 그러나 Jeggle의 Kiebigen마을 연구에 대해서는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성보다 계층에 따른 생활 연구가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 특히 마을의 상류층에 대한 분석에서는 다른 계층보다 그 내용이 적을뿐더러 부정적으로 기술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19세기부터 1970년대까지 Kiebingen마을의 역사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 예를 들어 , 나치 정권 당시 이 마을의 상류층과 하류층의 관계가 이전과 동일하게 지속되었는지 , 아닌지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

4. 그 이후 독일민속학의 일상 연구

Jeggle의 Kiebingen 마을의 일상연구 이후 독일민속학에서는 다양한 일상 연구가 진행되었다 . 먼저 일상사 ( 日常史 ) 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 Jeggle 의 Kiebigen 마을 조사 작업에 참여한 Wolfgang Kaschuba와 Carola Lipp은 Kiebigne마을을 연구하면서 연구 대상과 시기 그리고 연구 방법을 Jeggle와 달리하여 마을의 역사 특히 일상사 연구를 추진하였다 .17

우선 연구 대상 시기를 산업화 시기에 접어들기 이전인 18세기 중반부터 나치시대까지로 약 150여년간으로 설정하였다 . 연구 목적은 산업화시대로 변해가는 마을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기존 마을의 생활의 지속과 변화에 대한 분석이었다 . 구체적으로 변화하기 이전의 마을의 경제 ,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균형이 산업화 시대로 변화되면서 일부는 파괴되나 마을 주민의 생존을 위하여 기존 요소들의 균형이 새롭게 재통합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하여 본 연구가 실행되었다 . 연구 대상으로는 가족 및 친족 그 외의 사회 조직 그리고 마을 내의 여러 직업군을 선정하였다 . 본 연구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마을주민들의 역사적 경험을 주요 개념으로 활용하여 ,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 이전

시기에 마을의 불평등 구조 속에 형성된 경험이 산업화 과정에 표현되는 방식을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 예를 들어 , 가족 혹은 그 외의 사회 생활에서 도덕 혹은 행동 규범의 지속과 변화 요소를 기술하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기본적 특성을 마을 주민의 역사적 경험으로 간주하여 연구하였다 .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분석은 영국 역사학자 E. P. Thompson이 영국 노동자들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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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이)

개념이고 이를 두 연구자들은 Kiebingen마을 주민들의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근거를 분석하는데 이 개념을 활용하였다 . 두 연구자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 150년간 Kiebingen마을 주민들의 사회적 변화 속에 일상생활의 규칙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 두 연구자의 Kiebingen마을 연구는 이전 Jeggle의 연구와 연구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일정 부분 차이가 있지만 , 마을이라는 미시적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많은 개인과 집단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였다는 측면에서 Jeggle의 마을 연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 . 또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Jeggle가 마을의 일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 , 정치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불평 등의 측면을 강조한 Lefebvre 일상연구의 이론을 연구에 활용하였다 . 그의 이론을 연구에 활용한 경우에 일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게 되며 따라서 그의 마을 연구는 독일민속학의 일상사 연구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다 .18

또한 Kaschuba의 경우 , 마을의 일상사 연구를 바탕으로 노동자 문화 연구를 진행하였다 . 구체적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농촌 지역에서 이주하였고 이들 역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주 이전에 농어촌 지역의 경험을 활용하였다는 점에 관심을 갖고 노동자 문화를 연구하였다 .19

노동자 문화연구는 기존 민속학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던 분야였고 그의 연구 이후 민속학에서 노동자 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 다만 그의 연구는 독일 민속학계보다는 독일 역사학계 특히 일상사 연구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 독일민속학의 일상사 연구에서는 연구 대상 , 예를 들어 마을의 경우 마을주민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역사적 문서를 새롭게 읽고 재해석한다 . 또한 Jeggle처럼 현재 마을의 일상을 과거의 생활의 연속에서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민속학자는 역사적 자료 이외에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현지조사 자료에도 관심을 갖고 수집한다 . 수집된 자료를 조사대상자의 특징 그리고 연구자의 연구 목적에 맞게 정리하고 해석 연구를 하며 ,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현지조사의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

Jeggle는 Kiebingen마을 조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 대상의 일상생활이 고려된 현지조사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착수하였고 , 독일민속학에서는 최초로 현지조사에 관한 연구서를 동일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연구자와 함께 공저 ( 共著 )로 출판하였다 .20 그는 이 책에서 독일민속학 현지조사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였고 일상 연구를 위한 조사방법론을 제시하였다 . 또한 다른 연구자들은 일상 연구를 위한 현지조사 전략과 방법 그리고 근본적 한계 등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 독일민속학에서 일상사 혹은 일상문화 등의 일상에 관한 연구 그리고 현지조사 방법론의 구축은 Jeggle의

Kiebingen의 연구의 직접적 영향 혹은 EKW연구소의 연구의 영향만으로 볼 수는 없다 . 사회학 , 역사학 등의 민속학의 인접 분야의 일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독일민속학의 일상 연구에 대한 관심과 발전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 . 우선 독일 역사학계는 1970년대부터 ‘맨발의 역사가’(Barfußhistoriker)를 자처하는 역사학계에 비주류 젊은 지식인들의 ‘역사 공방 ( 工房 )’(Geschichtswerkstatt) 운동에서 일상사 연구가 시도되었다 . 이들은 기존 독일역사학계는 근대화 산업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통계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한 역사적 사회과학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 이들은 서민 (kleine Leute)의 의식주 , 노동과 여가 생활 , 가족 및 이웃 관계 등에 일상적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 이들의 연구는 독일민속학계의 일상사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 예를 들어 , 전통적으로 독일 민속학의 물질문화 연구는 주로 외형적 특징 , 주택 양식 , 의상 형태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 그러나 일상사에 관심 있는 독일민속학자는 일상사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활용하여 주택의 외형에 대한 연구보다는 특정 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주거 문화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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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43

본 발표는 기본적으로 EKW연구소의 일상연구에만 주목하였고 다른 대학의 민속학연구소의 일상 연구를 소개하지 않은 상태로 독일민속학의 일상연구의 시작과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문제점을 지적 받을 수 있다 . 예를 들어 , 독일민속학에서 가장 먼저 일상연구를 표방하였고 1970년대 Falkenstein특별학술회의 이후 연구소 명칭을 문화인류학으로 명칭 변경을 시도한 Gereverus의 일상연구에 대한 소개를 하지 못했다 . 이로 인하여 독일민속학의 일상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 본 글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독일민속학 그리고 인접 분야의 일상연구에 대한 관련 학계의

비판을 간략하게 제시하겠다 . 일상연구는 특정 시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을 문화 개념으로 분석하는 연구이다 . 또한 연구 대상이 다르지만 역사적 변화 과정에 따라 연구 대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 혹은 변화시킨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1990년 이후 일상 연구 특히 일상사에 대한 연구의 한계 및 문제점이 지적되기 시작하였다 . 우선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나치시대 연구 특히 이 시대의 생애사에 관한 연구에 있어 ,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이 시대에 대한 기억은 극단적으로 구분되어 이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 이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일상사 연구에 대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여성에 대한 연구는 주로 기존 역사학

연구에서는 별로 진행되지 못하였으나 일상사 연구에서는 상대적으로 활발히 연구되었다 . 그러나 특정 시기의 여성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 있어 , 당시 가족 혹은 여성 문화와 관련하여 분석하지 않고 현재 여성들의 생각을 투영하여 연구하거나 당시 여성의 입장만을 중심으로 연구하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 일상 연구의 이러한 문제점은 기본적으로 일상 연구자들이 특정 새로운 생활과 행동을 문화의 관점으로만 연구

대상을 해석하는 경향과 관계가 있다 . 예를 들어 , 유럽 여러 국가에서 외국인 혐오증의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 , 이를 문화적인 경계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동원되는 요소들 혹은 사회적 문제 등을 바탕으로 이러한 행동의 특성을 분석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는 분명 불순한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객관적 이해에 앞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 일상과 문화 연구는 여러 분과학문에서 연구된 것처럼 다양한 이론 그리고 방법론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한 연구 분야이다 . 그러나 일상 연구는 현재 혹은 역사 속에서도 주류 세력은 아니지만 특정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그러나 인종문제 , 다양한 정치적 투쟁 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행동이 등장하는 이 시대에 있어 일상 연구가 인간 이해라는 학술적 연구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22

이외에도 일상 연구는 학술적 실천 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 예를 들어 , 일상 연구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박물관에서 특정 시기의 일상 문화에 대하여 전시하였으나 , 대중적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연구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 실패의 원인으로 전시 대상 및 기법의 문제 혹은 일상문화의 효과적 전시를 위한 대상 선정의 원칙이 제시되지 못한 점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 이는 박물관 전시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 연구의 대상 선정과 방법에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여 주는 예로 보여진다 .23

독일민속학의 일상 연구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구 배경과 과정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지만 , 1990년 독일민속학을 비롯하여 일상 연구를 진행한 분과학문에서 제기된 일상 연구의 문제점도 함께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더구나 독일민속학의 일상 연구 방법과 이론을 활용하여 민속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목소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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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민속학과 日常 연구(이)

1  Kiebingen, 마을은 독일 남서부의 Baden-Württemberg주 ( 州 )에 속해 있으며 독일 남부 지역 가톨릭 행정 본부 가 있는 Rot-

tenburg시 그리고 교육 도시인 Tübingen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 이 마을에 관한 최초 기록은 1204년에 등장하며 당시에는 Ho-

henberg귀족의 영토였고 1381년에 오스트리아에 팔렸고 1806년 Württemberg왕의 영토로 귀속된다 . 20세기 들어 행정적으로

Rottenburg시에 속해 있다 전후 ( 戦後 )에 Tübingen시 그리고 1971년에 다시 Rottenburg시에 속하게 된다 .

2  Carola Lipp, ‘Alltagsforschung im Grenzbereich von Volkskunde, Soziologie und Geschichte’ , Zeitschrift für Volk-skunde 88, 1993, pp.12∼ 19.

3  참고로 본 발표를 준비하면서 일상연구 특히 독일의 일상연구에 관한 일본민속학의 연구는 法橋 量 , 2010, 「現代ドイツ民俗学のプルーラリズムー越境する文化科学への展開ー」, 『日本民俗学』263 号을 참고하였음 .

4  이에 대한 연구를 독일민속학자들은 이른바 Sprachinselforschung(고림된 언어연구 )로 표현하였고 연구 내용은 즉 동구권에서 다른 민족과 함께 거주하였던 독일인들의 독일어 연구였다 . 이에 관한 연구는 점차로 민족 교류 (Interethnik)연구로 변화된다 , 이에 관해서는 Ingeborg Weber_Kellermann/Andreas C. Bimmer, Einführung in die Volkskunde/Europäische Ethnologie, Stutt-gart, 1985, p.131∼ 133.

5  이 조사는 다음과 같은 책으로 출판되었다 . Hermann Bausinger, Markus Braun, Herbert Schwedt, Neue Siedlungen, Volkskundlich-soziologischen Untersuchungen des Ludwig-Uhland-Instut Tübingen, Stuttgart, 1958.

6  인용한 책에서는 특정 재산 혹은 소유물을 의미하는 Gu�ter라는 제목으로 이 항목을 기술하고 분석하였으나 , 대부분 분석 대상이 방언 , 격언 등의 언어민속 , 전통의상 , 향토음식 등의 물질민속 그리고 민간신앙 등의 종교 민속이어서 본 발표에서는 이 용어를 문화적 자산이라고 번역하였다 .

7  Ingeborg Weber-Kelermann/Andreas C. Bimmer, Einführung in die Volkskunde/Europäische Ethnologie, Stuutgart, 1985, p.130. 본 개론서에서 또 다른 연구 업적으로는 Wilheim Brepohl, Industrievolk im Wandel von der agraren zur indus-triellen Daseinsform, dargestellt am Ruhrgebiet, 1957을 들었다 .

8  Hermann Bausinger, Volkskunde. Von der Altertumsforschung zur Kulturanalyse, Berlin, 1971, p.141∼ 209.

9  Hermann Bausinger, ‘Zur Entwicklung des Ludewig-Uhland-Institutes’ , Attempto, Heft 49/50, 1974, pp.60∼ 67.

10  Kiebingen에 관한 최초의 글은 Utz Jeggle, ‘Urbanisierung ländlicher Entscheidungsstrukturen’ . Gerhard Kaufmann(Hrsg.), Stadt-Land-Beziehung. Verhandlungen des 19. Deutschen Volkskunde-Kongresses in Hamburg vom 1. bis 7. Oktober 1973, Göttingen 1975, pp. 65∼ 80이다 . 이 글은 당시 독일민속학에서 도시와 관한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다 . 이외에 Kiebingen관한 다른 글로는 Albert Illen und Utz Jeggle, ‘Zum Recht der kleinen Leute auf wissschaftli-ches Verstandenwerden, am Beispiel Hausens, einer Gemeinde im Urbanisierungsprozeß’ , Konrad Köstlin und Kai Detlev Sievers, Das Recht der kleinen Leute, Berlin, 1976, pp.88∼97, Utz Jeggel, Albert Ilien, Willi Schelwies, ‘Verwandschaft und Verein. Zum Verhältnis zweier Organisationsformen des dörf ichen Lebens’. Forschungen und Berichte zur Volkskunde in Baden-Württemberg. Bd.3, 1977, pp.95∼ 104.

11  Utz Jeggle, Kiebingen - eine Heimatgeschichte, Tübingen, 1977, Albert Illen, Prestige im dörf icher Lebenswelt, Tübingen, 1977, Albert Illen und Utz Jeggle, Leben auf dem Dorf. Zur Sozialgeschichte des Dorfes und Sozialpsychologie seiner Bewohner, Köln und Oplanden, 1978.

12  Herbert Blumer, ‘Der methodologische Standort des symbolischen Interaktionismus’ , Arbeitsgruppe Bielefelder Soziologien(Hg.), Alltagswissen, Interaktionismus und Ethnomethodologie, Hamburg 1973, pp.104. Utz Jeggle, Kiebin-gen - eine Heimatgeschichte, 앞의 책 , 278쪽에 재인용하였고 이 글은 Jeggle의 Kiebingen조사와 관련된 여러 글에서 인용되었음 . 그리고 인용된 글은 ‘조사된 경험적 세계의 고유 한 성격’을 번역할 수 있으나 본 발표문에서는 의역하였다 .

13  Utz Jeggle, Kiebingen - Eine Heimatgeschichte, p. 280.

14  Utz Jeggle, ‘Alltag’ , Hermann Bausinger 외 , Grundzüge der Volkskunde, Darmstadt, 1978, pp.125

15  Gottfride Gorff, ‘Kultur’ , Hermann Bausinger 외 , 앞의 책 , pp.62.

16  Utz Jeggle, ‘Alltag’ , Hermann Bausinger 외 , 앞의 책 , pp.103∼ 104.

17  Wolfgang Kaschuba/Carola Lipp, Döf iches Überleben. Zur Geschichte materieller und sozialer Reproduktion ländlicher Gesellschaft im 19. und frühen 20. Jahrhundert, 1992, Tüb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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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45

18  Wolfgang Kaschuba, Einführung in die Europäische Ethnologie, München, 2003, p.127.

19  Wolfgang Kaschuba, ‘Volkskultur und Ar beiterkultur als symbolische Ordnungen. Einige volkskundliche An-merkungen zur Debatte um die Alltags- und Kulturgeschichte’ , Alf Lüdtke(Hrsg.), Alltagsgeschichte. Zur Rekonstru-tion histrorischer Erfahrungen und Lebensweisen, Frankfurt 1989, pp.119∼ 223.

20  Utz Jeggle(Hrsg.), Feldforschung. Qualitative Methoden in der Kulturanalyse, Tübingen, 1984.

21  Projekt Gruppe, ‘Geschlechtsspezif sche Muster der Raum- und Dinganeingung’. Gestaltungs- spielräume. 4. Tagung der Kommission Frauenforschung in der Volkskunde, Tübingen, 1992.

22  Wolfgang Kaschuba, ‘Kulturalismus: Vom Verschwinden des Sozialen im gesellschaftlichen Diskurs’ Zeitschrift für Volkskunde 91, 1995, pp.27∼ 46.

23  Carola Lipp, 앞의 글 , pp.26∼ 27.

参考文献

Bausinger, Hermann/Braun, Markus/ Schwedt, Herbert, 1958, Neue Siedlungen, Volkskundlich-soziologischen

Untersuchungen des Ludwig-Uhland-Instut Tübingen, Stuttgart.

Bausinger, Hermann, 1971, Volkskunde. Von der Altertumsforschung zur Kulturanalyse, Berlin.

Bausinger, Hermann/Jeggle, Utz/Korff, Gottfried/Scharfe, Martin, 1978, Grundzüge der Volkskunde, Darmstadt, .

Blumer, Herbert, 1973, 'Der methodologische Standort des symbolischen Interaktionismus', Arbeitsgruppe Bielefelder

Soziologien(Hg.), Alltagswissen, Interaktionismus und Ethnomethodologie, Hamburg.

Illen, Albert, 1977, Prestige im dörf icher Lebenswelt, Tübingen.

Illen, Albert und Jeggle, Utz, 1978, Leben auf dem Dorf. Zur Sozialgeschichte des Dorfes und Sozialpsychologie seiner

Bewohner, Köln und Oplanden.

Jeggle, Utz, 'Urbanisierung ländlicher Entscheidungsstrukturen'. Gerhard Kaufmann(Hrsg.), 1975, Stadt-Land-

Beziehung. Verhandlungen des 19. Deutschen Volkskunde-Kongresses in Hamburg vom 1. bis 7. Oktober 1973, Göttingen.

Jeggel, Utz/ Ilien, Albert/Schelwies, Willi, 1977, 'Verwandschaft und Verein. Zum Verhältnis zweier Organisationsformen

des dörfichen Lebens'. Forschungen und Berichte zur Volkskunde in Baden-Württemberg. Bd.3.

Jeggle, Utz, 1977, Kiebingen - eine Heimatgeschichte, Tübingen.

Kaschuba, Wolfgang/Lipp, Carola, 1992, Döfliches Überleben. Zur Geschichte materieller und sozialer Reproduktion

ländlicher Gesellschaft im 19. und frühen 20. Jahrhundert, Tübingen.

Kaschuba, Wolfgang, 1995, 'Kulturalismus: Vom Verschwinden des Sozialen im gesellschaftlichen Diskurs', Zeitschrift für

Volkskunde 91.

Kaschuba, Wolfgang, 2003, Einführung in die Europäische Ethnologie, München.

Lipp, Carola, 1993, 'Alltagsforschung im Grenzbereich von Volkskunde, Soziologie und Geschichte', Zeitschrift für

Volkskunde 88.

Lüdtke, Alf(Hrsg.), 1989, Alltagsgeschichte. Zur Rekonstrution histrorischer Erfahrungen und Lebensweisen, Frankfurt.

Weber_Kellermann, Ingeborg/C. Bimmer, Andreas, 1985, Einführung in die Volkskunde/Europäische Ethnologie, Stutt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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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

시노하라 사토코 ( 篠原聡子 )

니혼 여자대학

( 번역 : 김현정 )

일본 최초의 ‘민간분양형 집합주택’ (이하 ‘민간분양맨션’)이 공급되기 시작한 지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지금은 일본 도시지역에서 일반적인 거주 선택대상의 하나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 . 시대와 함께 그 위상은 달라져 왔으며 민간 개발업자들은 시대 흐름에 맞추어 시장이 요구하는 분양맨션을 모색해왔다 . 이 발표에서는 도쿄를 중심으로 민간분양맨션의 공급 사례를 통시적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그 변용과 입주자 생활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 참고로 본 발표는 니혼여자대학 ( 日本女子大学 ) 대학원 시노하라 연구실과 노무라 ( 野村 ) 부동산 주식회사의 공동연구 성과 1

를 바탕으로 한다 . 조사대상 사례로서는 민간 개발업체인 노무라 부동산이 1964년부터 2010년까지 수도권 (도쿄〔東京〕・사이

타마〔埼玉〕・치바〔千葉〕・가나가와〔神奈川〕)에 공급한 660건을 대상으로 하여 평면구성의 변천을 판매 당시의 팸플릿 및 도면집을 통해 아래 3가지 사항에 주목하여 통시적으로 고찰해 보겠다 . 분양맨션 세대평면의 변천분양맨션 공용공간의 변천분양맨션 세대평면의 변천과 공용공간

1. 분양맨션 세대평면의 변천

2LDK에서 3LDK로: 방 3개 배치의 변천

공급초기의 세대에서는 2LDK(2 개의 방과 Living, Dining, Kitchen) 가 반 이상을 차지하였지만 , 1970년대에 들어서자 공급초기에 전체의 30% 정도였던 3LDK가 증가했고 특히 공급 세대수가 늘어난 1970년대 후반에는 3LDK가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림 1). 3LDK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방이 하나 더 늘어나면서 다양한 레이아웃이 검토되었다 . (그림 2)

(a) 2LDK: 공급초기주채광 쪽에 거실과 일식방 ( 和室 ), 개방복도 쪽에 일식방 하나를 배치한 구성으로 거의 통일되어 있었다 .

(b) 3LDK: 개방복도 측면에 2개 방을 배치한 구성주채광 쪽에 LD와 방 (주로 일식방 )을 배치한다 .

(c) 3LDK: 주채광 측면에 LD와 2개의 방을 병치한 구성방 3개를 병치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폭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교외 지역에서 계획된다 .

(d) 3DK: LD를 분할한 구성폭을 넓게 확보할 수 없는 도시지역에서 많이 계획된다 . LD를 칸막이로 나누어 주채광 측면에 방을 늘려서

LD가 집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 또 , 분할로 인해 LD가 작아지고 D만이 남는 구조도 나타난다 . 주채광 측면 2개 방은 대체적으로 일반방 ( 洋室 )과 일식방이다 . 일식방 입구는 LD 쪽에 만들어지는데 붙박이장이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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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47

(그림2) 세대 구조의 변천 (준공년/소재지/폭/면적)

(a) 1968년/신주쿠

구/5,500/64.98

(b) 1973년/후나바시

시/6,300/69.93

(c) 1973년/후나바시

시/9,600/73.72

(d)1978년/호야

시/5,600/61.60

(e) 1979년/가쓰시카

구/6,000/63

(f) 1995년/이타바시

구/5,900/68.04

(그림1) 공급세대 형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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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시노하라)

때문에 한쪽 미닫이 문만이 개폐되며 , 다른 구조에서 볼 수 있는 LD와의 연속성은 사라진다 . (e) 3LDK: 방 3개를 세로로 배치한 구성건물 양끝에 위치한 세대가 아닐 경우 , 중앙의 방은 연결공간이 된다 . 공급초기의 (a) 이후 , 대개는 (b) ~ (e)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 (d)를 제외한 구성 모두에서 LD가 주채광 쪽에 배치되어 있다 . 1988년에는 (d)가 보이지 않게 되고 LD를 주채광 쪽에 배치하는 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

주방과 LD의 변천

공급초기의 주방은 LDK의 일부로 벽 쪽에 배치되었지만 (그림 2(a)), 1973년 경부터 독립적으로 계획되게 되었다 . (그림 2(b))의 팸플릿을 보면 “(주부이신 ) 사모님이 가장 좋아하실 설계가 아닐까요 ?” “주방은 주부에게 내 방과 같은 곳” 등의 선전문구가 게재되어 있다 . 주방의 독립은 근린 3현 (도쿄 주변의 사이타마 , 치바 , 가나가와 현 )에서 시작되어 도쿄 도내의 건물에서는 1978년 경부터 ‘약간 안쪽에 위치한 주방공간’이 계획되었다 (그림 2(d)). 또 주방의 독립성이 높아지면서 복도와 LD로 출입할 있는 투웨이 (two way) 동선이 계획된다 . 1986년에는 ‘미세스 코너’라는 유틸리티 스페이스 (다목적 공간 )가 주방에 인접해 만들어짐으로써 주방으로부터의 동선은 세면・유틸리티・서비스 발코니 등으로 이어지게 되고 가사 동선에 대한 배려가 나타났다 .

1984년에는 대면식 주방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 주방에 있으면서 LD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 (그림 2(f))의 팸플릿에서는 “카운터 키친이니까 식구끼리의 대화도 활기를 띱니다”라는 표현으로 LD와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 ‘주부의 방’으로 일단 독립성이 높아진 주방은 약 10년 만에 LD와의 연속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완전한 독립형은 적고 독립되더라도 카운터를 설치하는 등 LD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

텔레비전 단자의 위치 변화

텔레비전 단자는 먼저 LD에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 다음에 설치된 곳은 개방복도 쪽 방 (방이 2개일 경우 거주성이 높은 곳 )이다 . 개방복도 쪽 방은 독립성이 높고 주침실이나 서재로서의 사용이 전제되었다고 보여진다 . 단 , 앞의 (그림 2(d))에서는 주채광 쪽 일식방에 설치되었다 . 이 구성에서는 LDK가 집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채광 쪽 일식방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

1989년 이후에는 모든 방에 텔레비전 단자가 설치되었고 1994년 이후에는 LD 두 곳에 설치되었다 . 주로 가족이 시청하던 텔레비전을 개인이 소유하여 각자가 시청하는 것으로 변화함으로써 LD에서 공간을 공용하더라도 따로 시간을 보내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석된다 .

세대면적의 변화

1980년 이후 각 동 건물의 대표 세대 (세대수가 가장 많은 3LDK형 세대 ) 면적의 5년간의 평균치를 비교해 보았다 (그림 3). 세대면적은 입지에 따른 영향이 크기 때문에 도쿄 도내의 건물만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 2000년에 75㎡에 가까워지자 면적의 증가는 완만해지면서 2005년 이후에는 미미하게나마 감소하고 있다 . 같은 대상에 대해 LD와 방 3개 합계 면적의 변화를 5년간의 평균치로 비교하였다 (그림 4). 1980년에는 LD 면적이 방 전체 합계의 약 반 정도였던데 반해 2010년에는 약 4분의 3으로까지 증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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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49

최근까지 세대면적은 넓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각 방이 아니라 LD가 확장되고 있다 . 세대면적의 증가를 볼 수 없게 된 2000년 이후에는 방 면적이 감소하는 한편 , LD 면적은 증가함으로써 방보다도 LD를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음을 알 수 있다 .

개별화와 일체감의 강화

각 방보다도 LDK가 중시되게 된 것은 세대 내 거실 면적 비율의 변화와 주채광 쪽 거실의 변천에서도 읽을 수 있다 . 텔레비전 단자가 각 방에 설치되는 등 방의 개별화가 진행되는 한편 , LD는 주방과의 연속성이 강해지고 접객 등의 사회적인 행위보다도 가족간의 일체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쪽으로 마련되고 있다 .

2. 분양맨션 공용공간의 변천

공동현관 자동잠금장치 도입 이전의 공용공간

일본의 집합주택은 집합주택 입구 부분에 현관문 자동잠금장치가 설치되기 전후로 각 동 건물의 배치계획 및 공용공간 마련에 변화가 생겼다 . 먼저 자동잠금장치가 도입되기 이전의 맨션에서 공용공간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 공급이 시작된 60년대에서 8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공용공간은 주로 관리실 앞이나 엘리베이터 앞에 마련된 작은 집합장소 정도였다 . 그러나 100세대를 넘어서면서 집회실이 설치되었고 200세대 이상이 되자 집회실이 2곳 있는 사례도 생겨났다 . 집회실의 배치는 별동으로 독립된 사례에서부터 입구 부근에 관리사무실과 인접하거나 (그림 5), 일체된 사례까지 보이지만 , 모두 다 관리조합의 모임을 여는 등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이용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고 보여진다 . 외부구조물에서 도면에 기재된 것은 놀이터 정도이다 . 80년대 중반에는 내부정원도 등장했지만 사례는 많지 않다 .

(그림3) 세대면적의 변화

(그림 4) LD와 방 합계 면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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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시노하라)

한 편 , 여 러 동 으 로 구 성 된 대 규 모 주거건물에서는 각 동 사이의 넓은 부지를 이용하여 야외운동장 , 조수보호구역 , 테니스코트 등을 설치하여 지역주민들도 이용하는 공원 안에 주거건물이 세워진듯한 사례도 볼 수 있다 .

공동현관 자동잠금장치 도입 이후의

공용공간(옥내)

1985 년에 시나가와 구 사례에서 공동현관 자동잠금장치가 도입된 이래 보안라인 (security line)이라는 개념이 영향을 주면서 공용공간에도 변화가 생겼다 . 도입 이후 1990 년 전반에 걸쳐서 칸막이가 없는 집합장소가 출현한다 . 도면에서도 “출입구 라운지 ,” “로비 겸 집회실 공간” 등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 집회실에 대한 의식은 여전히 안쪽을 향해 있어서 외부구조물과 접하여 창문이 있는 등의 사례는 적으나 , 이러한 공간들 중에는 외부구조물을 도입한 사례도 있다 . (그림 6)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방이 아니라 , 일상적으로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장소가 공용공간에 등장한다 .

2000년 이후의 공용공간(옥내)

2000년에 들어서자 아이들을 의식한 테라스가 달린 집회실이나 라운지를 통해 내부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키즈 스페이스 (kids space) 등 , 옥외와 연동하여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 또 이 즈음부터 칸막이가 없는 집합공간의 위상이 높아진다 . 현관홀과 동선상 분절된 사례 , 턱을 둔 사례 ,

또는 현관과 분리된 사례도 출현하였다 . 내부 정원을 향한 가든라운지 , 앞면 정원을 즐길 수 있는 비스타 (vista) 라운지 , 예술작품을 장식한 갤러리 라운지 등 , 그 특징을 나타내는 명칭이 붙은 사례뿐만 아니라 도서실이나 카페 등의 기능을 갖춘 라운지까지 등장한다 . 즉 ,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의 확대와 정비가 공용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한 요소로 인식되게 되었다 .

2000년에는 300세대 이상의 대규모 매물이 공급되면서 공용부분도 더욱 다양해졌다 . 게스트룸 , 헬스장 , 간이편의점 , 보육시설 등과 같은 도시기능이 포함되었다 . 또한 세족대나 그루밍 룸 (grooming room)과 같은 애완동물 관련시설도 등장하였다 . 맨션 안에서 완결되는 편리함이 더욱 추구되었다 .

(그림5) 49세대/1979년 준공/오타 구,

관리실을 경유하여 출입하는 집회실

(그림6) 137세대/1996년 준공/마치다 시,

외부구조물에 면한 포레스트 라운지 (forest lou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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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51

공동현관 자동잠금장치 도입 이후의

공용공간(옥외)

자동잠금장치는 외부구조물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 사이에 회랑에서 바라보는 입주자만을 위한 내부 정원이 등장했다 . 많지는 않으나 놀이터 등을 보안공간 안에 설치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 (그림 7) 또 2층 이상에 있는 공중정원 , 주차장 위를 이용한 옥상정원 등도 볼 수 있게 된다 .

2000년 이후에는 벤치가 있는 내부 정원 , 향기를 즐길 수 있는 허브 가든 , 산책로 등 , 옥외에서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다수 등장하였다 . 도면에서도 각 공간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명칭의 기재가 늘어났다 .

서비스 창구의 변천

1980년대까지는 거주근무 형태의 관리인이 존재하였고 관리사무소나 접수처와는 따로 관리인용 주거공간이 있는 사례도 있었지만 , 90년대 자동잠금장치의 도입과 함께 사라졌다 .

90 년대 이후 도심의 사례에서는 현관에 접수나 프론트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카운터가 설치된다 . (그림 8)1997년에는 관리인과는 별도로 거주자의 창구업무를 전담하는 안내담당자가 상주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 2000년 이후에는 안내담당자가 간이편의점이나 카페 업무도 담당하는 대규모 주거건물도 출현하여 현관에서 떨어진 공용동이 사람이나 정보의 집적지로 이용되는 사례가 출현하게 되었다 .

공용공간의 체류장소화와 맨션의 커뮤니티화

1980년대까지 이용목적이 명확한 집회실만이 존재했으나 80년대 후반에는 자동잠금장치가 도입되면서 맨션 내부라는 경계가 확실히 의식되어 모임 목적의 집회실 뿐이었던 공용공간에 변화가 생겼다 . 90년대 전후에는 일상적으로 이용 가능한 라운지와 같은 공간이 출현하였고 그 차경으로 건물 안팎의 연계가 진행되었다 . 2000년

(그림 7) 167세대/2001년 준공/야마토 시

프라이빗 가든 (private garden)

 

(그림 8) 237세대/2004년 준공/신주쿠 구

카운터가 설치되어 있는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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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시노하라)

이후에는 라운지의 위상이 높아졌고 옥외에도 특징적인 공간이나 체류장소 ( 居場所 )가 만들어지는 등 , 옥내 옥외 상관없이 부지 내에 입주자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여기저기에 배치하는 계획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 이 때부터 대규모 매물을 중심으로 공용공간이 더욱 다양해지고 맨션 안에서 완결되는 편리함도 한층 도모되었다 . 이처럼 공용공간의 역할은 공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곳에서 맨션이라는 영역 내의 사적인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변하였고 하나의 맨션이 하나의 커뮤니티로 여겨지게 되었다 . 체류장소가 부지 안에 여기저기 생겨나면서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되고 입주자 개개인의 귀속감을 낳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한편 맨션 주변에 대해서는 문이나 담을 쌓아서 폐쇄적인 내부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

3. 분양맨션의 세대평면 변천과 공용공간의 관계

세대 내 일식방의 변천과 게스트 룸(guest room)의 출현

세대평면 중에서도 방의 전용성이 높고 때에 따라서 위치나 기대되는 기능이 달라지는 일식방에 주목해 보겠다 . 공급 초기의 2LDK 중 2 개의 방은 모두 일식방이었고 이것이 방의 주류를 이뤘다 . 1974년 , (그림 9)와 같이 교외형이면서 비교적 면적이 넓은 3LDK 사례 (g) 에서는 LD 에 접해 있고 주침실로 상정되는 일식방 외에 8첩 (일식방에 깔리는 다타미 자리 1첩은 일식방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로 쓰임 ) 넓이의 일식방이 하나 더 보인다 . 이 팸플릿에는 “사는 건 바로 우리 일본사람 . 일식방은 가능한 넓으면 좋겠죠 .” 또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접객용 , 노부부용 , 남편의 서재 , 주부가 꽃꽃이를 즐길 수 있는 방”이라고 적혀 있다 . 여기에서는 일식방이 여유로움의 공간이면서 특히 손님접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1985년 2DK의 사례에서는 주채광측 일식방에 “손님접대 , 부부침실”이라고 되어 있어 LD와 이어진 일식방이 주침실과 접객을 겸하는 전용성이 기대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는 손님접대 공간으로서의 비중이 낮아졌다 .

1970년대 후반 이후 3LDK가 자주 출현하게 되면서 2일식방 + 1(양식 )방 (대개는 개방복도 쪽에 배치 )의 구성을 이룬다 . 1980년에 들어서면서 3LDK의 3개 방은 1일식방 + 2(양식 )방이 주류가 되고 일식방은 주채광 쪽 혹은 LDK와 연결되는 방으로 배치되었다 . 한편 , 개방통로 쪽 방의 한편에는 붙박이장이 설치되고 주침실로서의 쓰임이 확정되었다 . 그리고 적어도 계획 당시에는 LD와 이어지는 일식방이 주침실로 표기되는 일은 사라졌다 . 2000년도의 사례 (h) (그림 10)에서는 팸플릿에 “소중한 손님을 맞이할 독립된 공간 , 또는 맹장지 문 (후스마 )을 열면 거실과의 일체감이 느껴지는 탁트인 공간으로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아 접객 공간임과 동시에 거실과의 일체감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사례 (h)에서는 일식방을 갖추지 않은 세대유형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 또 이번 조사사례 중에서는 이 사례가

(그림 9) 사례(g) 1974년 사쿠라 시 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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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53

최초로 공용부분에 게스트 룸 (하우스 )을 설치한 것이기도 하다 . “게스트 룸 (다목적실 )”이라고 적혀 있고 이 방에 대해 “차를 마시는 모임 등과 같은 서클 활동에도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실은 친구나 지인분들이 숙박하실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 세대 안에 있었던 일식방의 손님접대 기능이 게스트 룸이라는 형태로 공용부분에 이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

일식방의 부실(附室)화와 체류장소로서의 공용공간일식방이 없는 세대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 남아 있는 일식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LD와 이어지는 방의 형태이고 6첩이 주류를 이루었다 . 그러나 2010년 사례 (i) (그림 11)과 같이 직접 발코니에 접하지 않는 4.5첩 밖에 되지 않는 일식방도 등장하면서 독립된 기능을 갖춘 방이라기 보다는 LD의 부실 (LD에 딸려있는 방 )이라는 위상이 명확해지고 있다 .

3LDK에서 3개 방의 독립성이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세대원 수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 1970년에는 3.99명이었던 도쿄의 세대구성원 수는 2010년에는 2.01명이 되었다 . 그 내용도 단신세대 약 32.3%와 부부세대 19.7%로 과반수를 넘어서 3개의 방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은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 그러나 실제로는 (그림 4)에서 본 것처럼 방의 면적은 늘지 않았으며 그 위치를 보더라도 거주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 가족구성원의 수가 줄었다 하더라도 성인가족에서는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식방을 일부화함으로써 거주성을 향상시킨 LD이기는 하지만 그 일실성 ( 一室性 )은 성인가족이 각자의 시간을 향유하는데 적합한 구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 라운지에 이어 2000년 이후 200세대 이상의 대형 주거건축물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공부방이나 도서실은 세대

안에 있던 개인공간을 대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

(그림 10) 사례(h) 2000 고가네이 시

71.85㎡

( 그림 11) 사례 (i) 2010 치바 시 8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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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맨션의 전개와 생활(시노하라)

4. 정리―맨션이라는 커뮤니티의 성숙과 변용―

세대평면의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공용공간을 살펴보면 세대 안에서 이루어지던 손님접대 등의 사회적 행위가 장소를 바꾸어 집회실과 같은 보편적인 공간이 일식방이나 게스트 룸과 같은 보다 사적인 행위에도 대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기능화하여 세대의 기능을 보완했다고 볼 수 있다 . 한편 육아기의 가족이 과반수 이하가 되고 부부세대를 중심으로 한 성인가족이 늘어나면서 충분한 개인 활동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세대 안에서 공용공간으로 장소를 바꾸어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일을 하는 등 개인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공용공간의 편재에 박차가 가해졌다고 하겠다 . 공용공간의 변천은 세대평면의 변용과 함께 공동현관의 자동잠금화와 집합주택의 대형화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구분소유법이라는 소유형태와도 관련된다 . 이번에 이루어진 일련의 조사를 통해 세대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생활이 점차 맨션 전체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맨션이 하나의 빌딩 유형에서 커뮤니티로 변화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단신세대의 증가 등 더욱 가속화될 세대구성원 수의 감소와도 연동된 세대의 다양화가 예상되며 세대와 공용공간 사이의 보다 적극적인 연계 모색이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는 일본의 긴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

1  이 발표는 주로 이하의 일본건축학회 2013년도 대회 학술발표를 기초로 구성되었다 .

이시하라 나오코 (노무라 부동산 주식회사 ) 「민간분양맨션 공용공간의 변천―분양형 집합주택의 평면구성 연구 (Ⅰ )―」

다케우치 미쓰코 (니혼 여자대학 학술연구원 ) 「민간분양맨션 세대평면의 변천―분양형 집합주택의 평면구성 연구 (Ⅱ )―」

시노하라 사토코 (니혼 여자대학 교수 ) 「민간분양맨션 세대평면의 변천과 공용공간―분양형 집합주택의 평면구성 연구 (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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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55

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남근우 ( 南 根祐 )

동국대학교

1.머리말

한국에서는 積層의 집합주택을 흔히 ‘아파트’라고 부른다 . 일본의 ‘맨션’이나 중국의 ‘公寓 (콩위 )’에 해당하는 말로 , 대개는 5, 6층 이상의 공동주택을 일컫는다 . 이 고층집합주택과 그 집합지구인 ‘아파트団地’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서울에는 적지 않다 . 아파트에서 태어나 , 団地 내의 어린이놀이터와 학교에서 幼

年期를 보낸 이가 많기 때문이다 . 이어 , 어른이 되어서도 아파트에 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 , 이윽고 늙어 죽어가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今年 봄 서울역사박물관이 「아파트人生」이란 기획전을 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다 . 그 展示資料에 따르면 , 2014년 3월 현재 , 서울시의 모든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58.9%이며 ,1 금후 구입을 희망하는 주택 중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71.6%나 된다 . 人生의 희노애락을 아파트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이가 大半을 훌쩍 넘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아파트人生’을 살아가는 건 물론 서울 사람들만이 아니다 . 한국에서 아파트 보급률이 가장 높은 도시는 光州이며 , 그 다음이 蔚山 , 大田 , 大邱 , 釜山 , 仁川 순으로 , 서울은 7대 대도시 중에서 맨 꼴찌다 .

最近에는 도시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에서도 아파트 거주인구가 부쩍 늘고 있다 . 웬만한 邑面의 소재지 치고 고층아파트 몇 棟 들어서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 이른바 ‘논두렁 아파트’나 ‘밭두렁 아파트’라고 불리는 것들로 , 주변의 外観이나 風光을 해치는 殺風景을 만들어내기 일쑤다 .

그러면 , 한국은 어떻게 고층집합주택 투성이인 ‘아파트의 나라’가 된 것일까 ? 서구와는 다르게 , 한국사회에서는 왜 중산층은 물론 상류층까지도 아파트살이를 좋아하는 것일까 ? 서울시민의 7할 이상이 아파트 생활을 꿈꾸고 , 더 넓고 좋은 고층집합주택를 욕망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 그리고 아파트란 삶터에서 실제 일상의 살림살이는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 것일까 ? 그것은 종래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어떠한 연속 혹은 불연속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 이번 報告에서는 이 몇 가지 물음을 풀어보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과제 연구를 갈음하고자 한다 . 단 ,

지금까지 한국의 민속학연구는 주위에 널려있는 고층집합주택과 日常의 아파트살이를 対象化한 적이 없었던

까닭에 , 以下에서는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들을 援用하면서 ,2이제 막 시작한 약간의 아파트 조사와 20여년에 이르는 나 자신의 아파트살이 경험을 살려 , 本論을 펼쳐나가고 싶다 .

2. ‘아파트공화국’의 탄생

한국 사람들이 고층집합주택 (아파트 )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의 후반 무렵이다 . 일반적으로는

1958년에 大韓住宅営団이 서울시 城北区 鐘岩洞에 세운 鐘岩 (종암 )아파트 3개동이 그 효시로 알려져 있다 . 이후 수십 년간 온 나라를 아파트로 메워온 한국사회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아파트공화국 (The Republic of

Apartments)’3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 형성 과정을 개관하면 , 우선 고층집합주택 (아파트 )의 画期的 転機는 60년대 초에 마련되었다 .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 정부가 ‘経済開発五箇年計画’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 慢性的인 住宅難解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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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南)

‘경제개발’의 일환으로 간주하며 주택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 그 담당주체는 대한주택영단을 확대 개편한 大韓住宅公社였다 . 한국의 경우 , 서구와 같은 社会住宅 혹은 영구적인 賃貸住宅 공급이 어렵다고 판단한 군사정권은 , 국가가 企業的인 방식으로 주택건설사업을 추진할 목적으로 公社를 설립했다 . 한국의 주택정책이

社会福祉 차원이 아니라 建設産業의 일환으로 시작된 까닭이다 [ 林瑞煥 2005:40-43].이 대한주택공사가 야심차게 내놓은 첫 작품이 麻浦 (마포 )아파트다 . 한국 최초의 団地型 아파트로 ,

주거문화의 근대화를 기대하며 1962년 麻浦区 桃花洞에 세워진 10개동의 공동주택이었다 . 당시 준공식에 참가한 朴 (박 ) 대통령은 “旧来의 姑息的이고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 脱皮하여 현대적인 집단 생활양식을 취”할 수 있는 , “생활혁명의 상징이 바로 麻浦아파트”[대한주택공사 2002:38]라고 그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 실제 麻浦아파트는 세대별로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난방설비와 水洗式 便所를 처음으로 갖추었고 , 立式生

活을 지향하는 서구풍의 살림살이 방식을 선보였다 . 또한 넓은 대지 위에 6층으로 세워진 이 아파트는 많은 오픈 스페이스를 확보하여 녹지 위의 고층 住居로서 풍요로운 햇살과 바람 ,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集合住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田南一 외 2008:193-195].하지만 이러한 대한주택공사의 期待와는 다르게 , 집합주택에 대한 人気가 처음부터 높았던 것은 아니다 . 麻

浦아파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 기왕의 아파트는 대개 10 坪 미만의 小型으로 貧民窟의 이미지가 강했고 , 또한 연탄가스 사고에 대한 不安이나 아파트살이의 물질적 , 기술적 여건에 대한 정서적 違和感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 게다가 5개년계획으로 1968년에 착수한 京畿道 ‘広州 (광주 ) 大団地造成事業’의 霧散과 1970년

4월 8일에 발생한 麻浦区 倉前洞 ( 現西江洞 )의 臥牛 (와우 )아파트 崩壊事故는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 이에 정부는 庶民層이 아닌 中産層 중심의 아파트단지 건설로 그 타깃과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 1971년 한강변의 東部二村洞에 세워진 漢江 (한강 )아파트는 이른바 近隣住区 (neighborhood unit) 이론에 기초한 대규모 단지로 , 10년 후 한강의 남쪽 지역에 대량으로 세워질 고층아파트 단지의 선구적인 모습이었다 . 때마침 발표된 江南 (강남 ) 開発計画은 대단지아파트 건설을 더욱 부추겨 , 盤浦 (반포 )아파트와 蚕室 (잠실 )아파트를 비롯한 超大型 아파트단지가 한강을 따라 雨後竹筍처럼 솟아났다 . 대한주택공사가 조성한 이 아파트단지들에 대한 인기가 폭발하면서 民間企業의 아파트 건설 참여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 70년대 후반 ( 株 ) 現代建設이

江南区의 鴨鴎亭洞에 지은 現代 (현대 )아파트가 그 대표적인 단지로 , 가장 작은 게 35평 , 큰 것은 60평으로 이미 중산층 아파트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70년대 중후반 이후 정부의 주택정책과 건설회사의 利益 創出 , 그리고 新興 中産層의 住宅需要 등이

맞물리면서 , 고층아파트가 강남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 그리고 서울올림픽 直後 , 盧

泰愚 (노태우 ) 政権이 추진한 주택 200 万戸 건설계획은 서울시 전체와 수도권 일대 , 나아가 전국의 지방도시를 아파트천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 그 사이 아파트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크게 달라지는데 ,

1993년을 起点으로 고층집합주택은 選好度에서 단독주택을 上廻하게 되었다[康仁鎬 外 1997: 104-105)]. 이처럼 단기간에 게다가 대규모로 고층집합주택 (아파트 )이 普及 , 拡散된 배경과 원인에 대해선 실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 예컨대 좁은 국토와 인구과밀 , 핵가족화 , 세대변화 , 여권신장 , 중산층의 성장 , 도시화와

郊外化 , 고층집합주택 중심의 주택정책 , 민간아파트 건설의 높은 収益率 등이다 . 이것들 중에는 원인과 결과가 뒤섞인 견해도 적지 않은데 , ‘아파트공화국’ 誕生의 要因을 거칠게 정리하면 , 다음의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겠다 . 하나는 供給 측면에서 고층집합주택을 大量으로 지었다는 것이고 , 또 하나는 需要 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파트단지를 선호했다는 것이다 . 우선 공급 면에서 볼 때 , 아파트 건설은 軍事政権과 文民政権을 불문하고 정부 주택정책의 根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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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57

한국의 아파트는 , ‘마치 성냥갑 같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오랫동안 가장 효율적인 주택공급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 高層化와 高密化를 통해 작은 토지 위에 주택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른바 ‘성냥갑 아파트’는 시대적으로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빠르고 값싸게 주택을 공급하려면 , 아파트를 規

格化하는 방식이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던 것이다 . 단지 조성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를 여러 건설현장에서 돌려가며 쓸 수도 있었고 , 설계를 다시 할 필요도 없어 , 당연히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이었다 . 대한주택공사는 1982년부터 소위 ‘住宅基本設計’를 매년 발간했는데 , 이에 기초하여 아파트를 문자 그대로 ‘찍어냈다 .’ 2008년 서울시가

‘디자인 서울’을 표방하면서 이른바 포디즘 (fordism) 스타일의 주택공급시대가 막을 내리고 , 성냥갑 아파트는 그 역사적 所任을 다하게 되었다[田相仁 2009:47-49].

3. 아파트団地를 選好하는 이유

아파트에 대한 비판은 지금 못지않게 예전에도 거셌다 . 그것은 市民들의 삶을 画一化하고 도시 환경을 撹

乱하는 主犯이라는 게 건축 전문가들의 공통된 主張이었다 . 하지만 이러한 主張은 서울의 住宅 現実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 7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아파트의 人気는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하늘을 치솟았고 , 아파트살이를 選好하는 사람들의 수는 爆発的으로 늘어만 갔다 . 그 주된 要因의 하나로 , 아파트団地가 갖고 있는 주거환경의 비교우위를 들 수 있겠다 . 아파트가 人

気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団地’로 개발되었기 때문이고 , 그 背後에는 한국의 都市 공간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는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 7, 80년대 수출증대와 경제성장의 総力戦에 突進한 한국의 경우 , 빠르게 증가하는 住宅需要에 부응할 만한 주택공급정책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 . 都市 환경은 劣悪한 상태로 放置되기 일쑤였고 , 주거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는 점점 높아지는 状況에서 ,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脱出口가 바로 아파트단지였다 . 도시 환경에 대한 大規模 투자 없이도 단지별로 緑地 , 어린이놀이터 , 駐車場 , 기타의 편의시설들을 갖춘 , 꽤 괜찮은 ‘동네와 집’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 단독주택 지구에 비해 아파트단지는 그야말로 別天地다 . 저녁마다 치러야 하는 ‘駐車戦争’을 피할 수 있고 , 곳곳에 녹지대와 어린이놀이터도 한두 개쯤은 다 갖추고 있다 . 最近에는 스포츠센터나 수영장 , 독서실 등 소위 커뮤니티 施設을 두루 갖춘 단지들로 進化하고 있다 . 무엇보다 고층 住居棟들의 隣棟 간격에 맞춘 폭넓은

外部空間이 일반 주거지역에서는 엄두도 못 낼 개방적 空間感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 이런 단지의 魅力이야말로 아파트가 人気를 얻게 된 核心的 要因으로 , 말하자면 아파트단지는 劣悪한 도시 公共空間 환경 속에 자리 잡은 私設의 오아시스인 셈이다[朴寅碩 2013:18-24].또 하나 , 아파트가 富의 源泉이자 ‘財테크’의 手段이었다는 점 역시 한국인이 아파트를 選好하는 중요한 要

因으로 빼놓을 수가 없겠다 . 한국은 ‘집 한 채가 財産의 전부’라고 흔히 말할 정도로 주택 소유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한 社会다 . 적어도 ‘집 한 채는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라는 정서가 澎湃한 나라가 한국이다 .

이처럼 ‘집 한 채’의 의미가 막중한 状況에서 아파트 가격이 단독주택의 그것을 월등히 上廻한다면 ,4 누구라도 아파트 所有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고 , 따라서 아파트 選好는 選択이 아니라 必須가 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 . 실제 서울올림픽 개최를 전후하여 서울시내 아파트 価格은 대폭 상승했다 . 전반적인 景気好調로 전국민의 実

質所得이 급증하여 유동성이 極大化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 그리고 1997년 IMF의 救済金融 이후에는 아파트 가격의 공간적 両極化가 深化되어 , 自家 소유층 내부의 階層分化가 대폭 확대되었다 . 같은 종류 같은 크기의 아파트라도 그 位置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자가 된 이들 중에는 아파트로 돈을 번 경우가 많았다 . 이른바 ‘不動産 不敗 神話’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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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南)

이어지면서 아파트가 가장 보편적인 財테크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 물론 정부가 수십 번에 걸쳐 다양한 不動産

対策을 쏟아냈지만 , 不동산시장의 耐性만 키운 채 대부분은 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 그 사이 사람들은 非人気 地域에서 ‘버블 세븐’5 등의 人気地域으로 , 작은 坪数에서 큰 坪数로 이른바 ‘갈아타기’를 계속하면서 財産을 불려갔던 것이다 . 아파트에서 門牌가 사라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문패의 失踪은 개인의 機密이나

사생활을 保護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 빈번한 이사에서 그 현실적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6서울 사람들에게 있어 財테크 수단의 성격이 강한 아파트는 증시의 블루칩처럼 수시로 팔고 사는 대상이기 때문이다[全相仁

2007: 91-93)].덧붙여 , 서울의 아파트는 사회적 신분의 심볼로 기능하는 傾向이 강하다 . 주지하다시피 서구에서는 単独住

宅 중심의 上流層 住居文化를 郊外에 정착시켰다 . 이와 다르게 한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은 주로 都心 내부의 아파트단지 , 서울의 경우는 특히 강남지역의 고급스러운 단지에서 자신들 나름의 住居文化를 생성 , 발전시켜 왔다 . 한국에서 ‘강남의 아파트에 산다 .’고 말할 때 , 그것은 일종의 ‘記号의 消費’이며 , 그 고가의 단지 거주는 사회적 支配階級에 의한 일종의 ‘区別짓기 (distinction)’ 行為라고도 볼 수 있다[全相仁 2009:67-

70].그러한 공간적 差異化의 과정에서 아파트의 위치와 坪数에 크게 집착하는 주택의 過消費 現象이 나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 그 하이라이트가 江南区 道谷洞의 타워팰리스로 象徵되는 최근의 브랜드 아파트의 등장이다 .

4. 고층집합주택의 土着化와 아파트살이

지구상의 모든 집은 인간의 생활을 制約하고 規定하지만 , 그 집은 모두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주거문화에 맞춰 살림살이의 터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아파트 역시 예외일 수는 없겠다 . 60여 년 전 , 유럽의 고층집합주택 모델을 들여온 아파트는 당연히 한국의 伝統的인 주거양식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大半이 ‘아파트人生’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 그 고층집합주택이 그 사이 不断히 토착화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 土着化의 모습은 우선 아파트의 平面構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 구체적으로 아래의 그림 1의 방

4개짜리 平面을 보면 , 거실을 중심으로 이를 둘러싸면서 방 4개와 주방 , 식당 , 현관 , 욕실이 配置되어 있다 . 이른바 4LDK 아파트의 典型的인 간살이다 . 방이 3개인 아파트 역시 방이 있던 한쪽 자리를 현관과 계단실이 차지했을 뿐 동일한 구성이다 . 서양이나 일본의 아파트와 비교해보면 그 特徴이 뚜렷해진다 . 서양 아파트는 가족

共用空間인 리빙룸과 다이닝룸 , 키친을 個人空間인 베드룸과 領域的으로 구분하여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다 .

그림1: 3실형과 4실형 평면(마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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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59

일본 아파트의 경우는 前面의 幅이 좁고 긴 平面 형태 속에 거실과 방이 内部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 이에 비해 한국 아파트는 대개 가족 共

用空間과 個人空間의 領域的 区分 없이 居室을 다른 공간들이 둘러싸고 있다 .

한국 아파트의 이러한 空間構成은 주로 1930년대에 지어진 都市型 韓屋 (한옥 )7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아래의 그림 2에 보이듯이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内庭

(마당 )으로 연결되고 , 거기서 안방 , 大廳 (마루 ), 건넌방 , 부엌 , 문간방 , 便所 등으로 갈 수 있는 改

良韓屋의 動線 형식이 再現된 것이다 . 중심에 있는 마당을 거실로 바꾸면 아파트 平面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서윤영 2007:115-

117]. 거실을 통해 採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 모든 방에서 거실의 넓은 開放感을 느끼는 것이나 , 거실이 모든 방을 연결하는 動線空間 (센터 )의 역할을 하는 것은 都市型 韓屋의 마당과 똑같다 .

보다 넓고 시원한 空間感에 대한 욕구가 都市型 韓屋에서 아파트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 이러한 거실 중심의 平面構成이 고층집합주택을 도입한 初期부터 一般化한 것은 아니다 . 한국의

아파트 역시 처음에는 그림 2의 「1960년대 유럽식 아파트」와 같이 居室領域과 寝室領域이 구분되도록 설계되었다 . 그러다가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70년대 중반 이후 , 거실을 寝室이 둘러싸는 방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 아파트 수요자들이 領域 分離型보다 居室 中心型 구성을 選好했기 때문이다 . 後者가 前

者보다 살림집을 넓고 밝게 보이는 効果가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 요컨대 , 한국 아파트의 가장 큰 특징은 居室 中心의 開放的 공간구성이며 , 그것은 재래의 都市型 韓屋 (한옥 )과 서양 아파트의 간살이가 서로 衝突하고 融合하여 성립한 것이다[朴寅碩 2013:196-200].한국에서는 가족 구성원들을 흔히 ‘食口’라고 말한다 .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 개개인의 私生活보다는 이 식구의 疏通과 融合을 우선시하는 게 한국의 家族主義 문화이며 , 그것이 반영된 게 위의 居室 中心型 空間構成이라고 보인다 . 가령 ,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 치고 , 어릴 적에

両親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한두 번 들어보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 “방에 있지 말고 마루로 나오라 .”거나 “마루에서 방이 좀 들여다보이면 어때서 . 뭐 못 볼 거라도 (봐서는 안 될 거라도 ) 있나 ? 그리 신경이 쓰이면 닫든가 .”와 같은 것 말이다 . 게다가 “문을 닫아도 시끄러워 공부가 안 된다고 ? 아 , 알았어 , 테레비 끄면 될 거 아니야 .” 아파트 마루에서 뉴스를 보던 아빠나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이처럼 불평을 투덜거려도 통하지가 않는다 . “애 공부가 중요하지 , 그까짓 테레비 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 이러한 가정 내의 일상적 대화 역시 , 成員들의 취미생활이나 프라이버시보다는 ,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와 같은 ‘家庭의 大

義’가 우선임을 잘 보여줄 것이다 .8 이 한국적 家族主義 문화의 背景과 原因에 대해서는 금후 精緻한 論議가 필요하겠지만 , 그 ‘열린’ 居室 (마루 )에서 食口들과 어울리기 쉬운 살림집이 한국의 아파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Center

门房

Center(客厅 )房

厨房

Center( 内庭 )房

大门

客厅

厨房

厨房

1960年代 西欧式公寓

1990年代 韓国式公寓

1930年代 改良韓屋

그림2: 아파트와 한옥의 동선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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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南)

다음 , 温突 (온돌 )의 난방장치 역시 아파트의 한국적 土着化를 보여주는 好例의 하나다 . 익히 알려진 대로 온돌난방은 아파트 도입 초기부터 큰 시빗거리였다 . 고층집합주택에 그것을 집어넣는 게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 서구의 살림살이 방식을 洗練된 生活様式으로 여기는 風潮가 강했기 때문이다 . 예컨대 , 재래의 푸세식 화장실과 아궁이 부엌은 打破의 대상이었다 . 비합리적이고 非衛生的인 살림살이의 대명사였고 , 이를 대체할 水洗式 화장실과 입식부엌이 현대적 住居生活의 표상이었다 . 그런 상황에서 아궁이 부엌과 연결된 온돌은 당연히 배척해야 할 것이었지만 , 事情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 사람들이 ‘깨끗한’ 水洗式 화장실과 입식부엌은 비교적 손쉽게 받아들이면서도 , ‘따끈따끈한’ 온돌방만은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 麻浦아파트의 경우 , 본디 온돌방 없이 中央集中式 난방으로 라디에이터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세대별 練炭보일러 방식에 , 居室에는 라디에이터를 세우고 , 방에는 温水코일을 바닥에 깔아 온돌을 설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중앙난방 시스템이 실현된 漢江아파트에서는 温突房 없이 집 전체에 라디에이터를 설치했으며 , 盤浦 1단지의 경우는 안방만 温突을 깔고 나머지 방들과 거실은 모두 라디에이터 난방으로 했다 . 하지만 거주자들이 如前히 온돌방을 선호하자 , 나중에는 중앙난방의 단지에서도 , 안방뿐 아니라 모든 침실을 온돌방으로 하고 , 나머지 부분만 라디에이터 난방을 並行하는 방식이 한동안 이어졌다 . 이러한 韓洋

折衷의 난방방식은 중대형 아파트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다가 , 80년대 후반부터는 집 전체에 温突을 까는 게 보편화했다[朴寅碩 2013:211-212].이처럼 고층집합주택에 温突을 接木한 한국 아파트살이의 独特함은 그 起居様式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 한국의 모든 아파트는 立式부엌을 갖추고 있고 , 대부분의 家口가 식탁과 책상 , 소파 , 침대 등을 사용하고 있다 . 아파트 생활자들의 起居 스타일은 더 이상 古来의 座式이 아니라 , 立式이라고 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에 立式家具들이 가득 차 있다 하여 , 좌식생활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온 食口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 그 食卓 밑을 보라 . 아마도 한두 사람은 의자 위에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거나 , 양반다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 또 식탁에서 밥을 먹고 나서 居室 바닥으로 내려와 , TV를 보며 , 食後의 다과를 단란하게 즐기는 것도 자주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 혹은 食卓을 놔두고 상을 차려 거실이나 방에서 밥을 먹는 경우나 , 손님에게 차 접대를 居室 바닥에서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아가 ,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한국의 남자들 , 특히 아저씨들의 視聴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 이삼십

분 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 따뜻한 거실 바닥에 반쯤 누워 있는 그들의 모습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 그러다가 아예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서 TV를 보는가 싶더니 , 어느새 일어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 이처럼 소파와 거실 바닥 사이에서 앉았다 누웠다를 되풀이하는 이가 한국에는 참으로 많다 .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등을 지지고 싶은’ 한국인의 習性이 은연중 발현한 것으로 , 근년 流行하는 찜질방에서의 뒹굴뒹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요컨대 , 한국의 아파트살이는 좌식생활의 持続 속에 입식생활의 便利함이 결합된 것으로 , 이 異種混淆 (하리브리드 )의 起居를 가능케 한 基盤이 온돌난방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伝統과 現代의 折衷 , 혹은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混成은 위의 두 가지 이외에도 散見된다 . 가령 , 욕실에 욕조나 사워기가 있어도 플라스틱 바가지를 사용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며 , 다용도실 9에서 세탁기와 함께 빨래판을 사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또한 안방에 딱딱한 돌침대를 놓거나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자는 사람들 , 심지어 침대를 들여놓고도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자는 경우도 없지 않다 . 그리고 베란다에 놓인 장독들과 화분들 , 옛날의 김칫독을 현대화한 김치냉장고 , 최근에는 우물 모양의 천장과 서까래 스타일의 천장에 이르기까지 , 한국적 土着化의 모습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파트의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한국의 아파트는 토착화를 追求하는 동시에 현대 한국社会의 構造変化에도 민첩하게 적응해 왔다 .

아파트 공간의 家族政治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의 한옥은 生理学的 사회질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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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61

공간적으로 再現하고 있었다 . 그리고 女性空間과 男性空間으로 대별되는 그 내부 공간에서 으뜸은 역시 사랑이었다 . 그것은 집안 전체를 관장하는 일종의 판옵티콘이자 외부로 열린 정치적 , 문화적 공간이었다[南根祐

1996:85-89].물론 , 실제 生活의 기능적인 면에서 사랑이 안채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 한옥은 젠더나 世代의 측면에서 볼 때 , 다분히 사랑의 남자 成人이 중심이었다 . 家父長的 권력구조를 재생산하는 공간이 바로

사랑으로 象徵되는 양반의 韓屋이었다[金鍾憲 2005:17].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한국의 단독주택에서는 같은 방안에서조차도 남성과 여성의 空間上의 분리가 뚜렷했다 . 6, 70년대를 背景으로 한 홈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 큰방 (안방 ) 하나가 안과 밖이라는 가상의 라인을 경계로 ‘아버지의 空間’과 ‘어머니의 空間’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 前者는 앉은뱅이 책상을 중심으로 책이나 라디오 , 신문 , 도장 등이 놓인 ‘질서공간’이었고 , 後者는 식당 , 거실 , 응접실 , 간이화장실 (요강 ) 등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万能空間’이었다 . 이러한 공간구획의 모습은 집안의 정보

수집권과 분석권 및 의사결정권 등이 아내가 아닌 남편에게 偏重되었음을 잘 보여준다[全寅権 2003:23-28].이에 비해 아파트의 内部空間은 가족성원들 사이에 보다 평등한 社会関係를 지향한다 . 그 점 , 한국의 아파트는 젠더나 世代와 관련한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비교적 능숙하게 대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 우선 눈에 띄는 게 남성 성인공간의 縮小다 . 남성의 専用空間이었던 사랑이 접대와 가족단란의 場인 마루로 흡수되었고 , 안방이 부부 공용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 그리고 한옥을 비롯한 단독주택의 좌식생활이 아파트의 입식생활로 바뀐 것도 両性平等의 시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 예전에는 사람이 붙박이고 , 밥상이나 다기와 같은 것들이 이동했다 . 그 家具들을 옮기는 일은 대개 女性의 몫으로 , 자연스레 남성이 女性의 상전이 되었다 . 하지만 아파트살이에서는 소파나 , 식탁 , 의자와 같은 ‘身体家具’가 일상화했고 , 결과적으로 이 역시 페미니즘 効果를 발휘하게 되었다 . 남성 역시 身体家具를 이용할 때 스스로 移動해야 하기 때문에 , 그 앞에서 성員 모두가 男女

老少 불문하고 상대적으로 対等해진 것이다[田南一 2002:7-9].살림집의 내부공간에서 性的 不平等의 감소를 劇的으로 드러내는 곳은 다름 아닌 부엌이다 . 한옥이나

단독주宅에서 여성이 調理하던 공간은 위치나 크기 면에서 대단히 劣勢였다 . 한옥의 부엌은 地面을 움푹 파서 만들어 , 대개 마당의 높이보다 한두 자 정도 낮았다 . 그리고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와 먼지가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했기에 , 바닥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 . 그러다가 70 年代初 , 부엌은 아파트살이에서

‘주방’으로 昇格했다 . 입식으로 설계되어 주택 내 다른 공간과 높이가 마침내 같아진 것이다 . 동시에 난방이 分離되어 주방은 炊事 전용공간이 되었고 , 汲排水가 합쳐진 싱크대도 보급되었다 . 예전 지저분했던 부엌은 실험실처럼 정리되었고 식사공간도 따로 분리되었다 . 결과적으로 부엌 역시 살림집에서 어엿한 내부공간의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咸翰姫 2005:54-60)].‘사내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지는’ 禁断의 부엌에서 , 밥을 먹으려면 그 누구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 비교적 平等한 열린 공간이 된 것이다 .

5. 맺음말

이상 , 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 과정을 간단히 개관하고 , 한국인이 그것을 選好하는 까닭을 분석해보았다 . 그리고 고층집합주택이 한국적 아파트로 土着化하는 양상과 아파트살이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 끝으로 , 이 아파트의 将来와 관련하여 , 줄레조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은 바 있다 . 특히 서울의 고급 아파트단지가 멀지않아 각종 都市問題의 온상이 되리라고 예견했다 . 도시 중산층도 아파트가 더 이상 그들의 ‘구별짓기’를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릴 것이라고 전망했다[줄레조 2004:262-263].

과연 그럴까 ? 나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의 아파트는 대부분 自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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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층집합주택의 전개와 아파트 살림살이(南)

소유형태여서 , 재산으로서의 経済的 価値가 하락하는 상황이 그냥 방치될 리 없기 때문이다 . 昨年 9월 1일 정부가 발표한 아파트대책 , 즉 ‘규제 합리화를 통한 주택시장 활력 회복 및 서민 주거안정 강화 방안’이 그 端

的인 보기다 . 또 좁은 국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의 경우 , 토지이용의 効率性을 계속 제고해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 都心의 슬럼화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등을 통해 토지이용의 리사이클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 실제 한국의 아파트 교체수명은 27 年에 불과하다 . 영국 128년 , 미국 72년 , 일본 54년

등에 비해 그 수명이 4분의 1 내지 2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日刊紙 『머니 투데이』 2014년 9월 3일]. 그리고 한국의 보통사람들은 아직도 아파트에 배가 고프다 . 그것은 경제적인 부가가치나 사회적 차원에서 이미 최고의 人気 있는 주거공간으로서 뿌리를 내린 상태다 . 수익성과 안전성 , 換金性 , 差別性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 게다가 인구의 停滞 내지 減少 , 고령화시대의 개막 , 1인 家口의 급증 , 저성장체제의 도래는 교육 , 문화 , 복지 , 교통 등의 제 측면에서 주택시장을 都心의 아파트로 집중시킬 공산이 매우 크다[全相仁 2009:172-173].이처럼 앞으로도 지속될 ‘아파트 전성시대’를 전망하며 , 아울러 冒頭에서 언급한 ‘논두렁 아파트’와

‘밭두렁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농어촌 필드의 現実을 맞이하여 , 한국의 민속학은 그 ‘普通의 살림살이’를 어떻게 묻고 , 또 그 ‘당연한’ 生活世界를 어떻게 포착해야 하는 것일까 ? 아파트라는 開閉式 日常의 微視的 現場과 共同体的 連帯의 다양한 실천과 시행착오를 어떻게 対象化할 것인지 , 이번 일본민속학회의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그 방법적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삼가 바라마지 않는다 .

1  한국의 전체 주택 가운데 아파트의 비율은 2005년에 52.7%로 , 이 해 처음으로 과반수를 넘긴다 . 서울시의 경우 , 1985년에는 26.1%였다가 20년 뒤인 2005년에는 54.2%로 倍増한다 . 자세한 것은 서울시청의 서울統計年報 참조 .

2  지금까지 고층집합주택 (아파트 )에 대한 연구는 建築学이나 都市計画学 , 消費者住居学 , 住居環境学 , 不動産学 등과 같은 応用科学이나 実用学問 쪽에서 주로 이루어져 왔다 . 그래서인지 “時代精神이나 社会意識에 대체로 무심한 채 ‘비성찰적인 경험적 연구’에 매몰되는 경향이”이 강하고 , 결과적으로 “行政의 需要나 자본의 논리에 쉽게 安住해온 측면마저 없지 않았다 .”[全相仁 2009:30] 본 報告에서는 都市景観을 중심으로 서울의 ‘아파트共和国’을 分析한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Valérie Gelézeau), ‘団地共和国’의 団地化 戦略을 考察한 朴寅碩 , 고층집합주택을 内視鏡으로 삼아 ‘아파트社会’의 住居社会学을 추구한 全相仁 , 한국 근현대의 住居社会史를 꼼꼼히 엮은 田南一 등의 연구 성과를 주로 참고했다 .

3  康俊晩 (강준만 )은 2005년 한 週刊誌 칼럼에서 韓国社会를 ‘아파트공화국’이라 命名하면서 그것을 미스터리로 보았다 . 그리고 2007년 , 발레리 줄레조의 박사학위논문이 『아파트공화국』이라는 다소 煽情的인 題名으로 翻訳 , 出刊되었다 . 異邦人의 이 아파트연구는 바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 , 이후 ‘아파트공화국’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국의 住宅問題와 都市問題를 象徵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 高層集合住宅 (아파트 )에 대한 韓国人의 憧憬과 慾望 및 嫉視와 非難 , 自嘲 등을 含蓄한 流行語가 된 것이다 .

4  統計廳의 2006년 不定期 조사 결과에 따르면 , 아파트 居住者의 平均 총 財産이 4억 88만 원으로 , 単独住宅 경우의 2억 722만 원 , 連立 및 多世帯住宅 경우의 1억 4,658만 원을 2 ~ 3배 능가하고 있다 . 자세한 것은 国家統計 포털의 ‘住宅種類別 資産現況’参照 .

5  2006년 政府가 不動産 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었다고 지목한 7개 지역 . 집값 急騰의 牽引車 역할을 한 서울시의 江南 三区 ( 江南区 , 瑞草区 , 松坡区 )와 陽川区 木洞 , 그리고 京畿道의 盆塘 , 坪村 新都市와 龍仁市를 말한다 .

6  정부의 2005년 住宅需要調査에 의하면 , 한국의 平均 居住期間은 아파트가 많은 都市地域일수록 짧은 것으로 나타난다 . 서울이 5.4년 , 京畿道가 6년 , 仁川이 6.8년인 데 비해 地方都市는 9.9년 , 郡 단위 地域은 15.7년이다 .

7  都市型 韓屋의 핵심은 内庭 (마당 )이다 . 住宅 한가운데 内庭 (마당 )이 있고 다른 모든 방들이 ㄷ字 혹은 ㅁ字 型으로 그것을 둘러싸며 , 또 그것을 향해 열려 있는 空間構成을 갖는다 . 서울의 觀光地로 有名한 北村 韓屋마을의 집들이 그 좋은 보기다 .

8  아파트 団地 内에 코뮤니티 施設로 ‘공부방’을 설치하거나 , 団地 周囲에 私設의 ‘読書室’이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9  아파트의 부엌에 딸린 자그마한 공간으로 , 洗濯機를 놓거나 그 外의 多様한 用途로 使用할 수 있다 . 大概 이 多用途室은 暖房이 되지 않고 , 室外用의 슬리퍼를 신고 나가게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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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63

参考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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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 살림과 생활세계의 변천

왕 지에원(王傑文)

중국전매대학

( 번역 : 이종미 )

잘 아는 것이 꼭 잘 아는 것은 아니다

― 헤겔 표제에 보이는 ‘고층공동주택’은 “특정 토지 위에 계획적으로 집단 건조하고 , 층을 쌓는 방식의 입체적 구성을

하여 , 여러 가정이 공공의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다층 고층 주택이다 . 단독주택과 비교하여 공동주택의 특징은 입체적 다층 구성 , 단원(單元)식 조합 , 집약형 배열 , 고용적율 등이며 , 그것이 보급된 것은 공업화와 도시화 발전의 결과다 .”1

이론적 층위인 건축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 고층공동주택의 생활세계는 최소한 주택 자체의 주거용 설계와 주택이 위치한 자연 ·인문 환경에 대한 주택단지 계획의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 우선 전자의 건축 설계 층위에서는 공용부분과 전유부분이 구분되며 , 후자의 단지 계획 층위에서는 자연 환경(일조 , 통풍 , 녹지 , 수자원 , 소음) , 사회 환경(도로 교통 , 폐기물 보관 및 운송시설 , 파이프 ·전선 ·케이블 등의 배치) , 인문 환경(오락 여가 , 체육 단련 , 문화 교육) 등의 요소가 고려된다 . 건축의 설계와 계획은 통일성과 표준성을 갖추고 있으며 , 거주 주체는 추상적인 ‘인간’으로 취급된다 . 그러나 실천적 층위 곧 대중 일상생활 연구(신 민속학)의 관점에서 보면 , 사회집단의 주거양식과 생활방식은 언제나 그 역사적 , 정치적 , 문화적 자취를 남기고 , 특정 시대의 풍속 습관과 소비 관념 및 생활 형태를 구현한다 . 고층공동주택의 생활세계에서는 주택용 설계와 주택단지 계획이 사람들의 주거양식과 생활방식을 만들어낸다 .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생활방식을 내면화하는데 , 이를 통해 주거양식과 거기서 만들어진 정신적 결과물은 ‘관습’이 된다 . 아울러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전승되어 온 문화 전통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반성적 , 창조적 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하고 생활 패턴의 규제를 타파하면서 , 모종의 ‘신생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간다 . 그런 점에서 ‘규정’과 ‘창조’는 줄곧 일상생활에 혼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21세기에 들어와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가 보편화된 결과 글로벌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 오늘날 세계의 모든 집단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와 편리한 수단으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새로운 성과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한 사회집단이 가지고 있는 주거양식의 변천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 . 사람들은 자신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 대량의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 또 타국의 주거문화에서 유입된 요소들을 수용한다 . 포스트모던의 글로벌화 시대를 맞이하여 집단의 주거양식은 동질화와 차별화라는 모순의 두 양상을 포함한 채 이전에 없었던 다양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도시 주거문화의 ‘내폭 (implosion)’은 도시 주민에게 다원화된 가치의 창출과 함께 다양한 생활에 대한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 이는 “인류의 주거를 평등하게 하고 그 거주 지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 .”2는

유엔의 목표에 부합한다 . 그러나 각기 다른 집단이 계승하고 내면화한 역사적 , 문화적 자원이 다르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 경제적 제약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 그 주거양식의 선택과 창조는 그들이 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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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65

역사와 현실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집단이 내면화한 문화 전통은 유형 , 무형의 방식으로 현대 주거양식 속에 녹아들어 ,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활방식을 형성한다 . 따라서 역사적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 전통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특정 집단의 사유방식 및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 이 글에서는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을 조사 대상으로 삼아 역사적 관점에서 거주 공간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 특히 국가 정책 및 문화 전통의 제약과 지역 주민의 창조성 사이에 보이는 상호작용을 주목할 것이다 .

1.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발전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발전사는 국가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전개되었다 . 신 중국의 성립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에 사는 일반 서민의 주택생활 수준은 매우 낮았다 . ‘거주할 수 있는’ 정도의 낮은 수준에서 근근이 유지되었다 . 1980년대 중 ·후반에 들어 베이징 시에 현대적 의미의 고층공동주택이 출현했는데 , 그것이 반(半) 매매용 주택이나 매매용 주택의 형태로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1990년 이후의 일이다 . 이러한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 발전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겠다 .

(1) 수면공간으로서의 주택 단계

제 1단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부터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로 , ‘수면형 주택 발전 단계’로 부를 수 있다 . 중국은 이 시기에 건국 초기의 경제회복기로부터 제 1차 5개년 계획 실행 ,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의 설립 , 문화대혁명을 차례대로 경험했다 . 약 30년 동안 펼쳐진 이 전국 규모의 정치운동은 국가 경제의 정상적 발전을 단절시켰다 . 중앙정부는 의식개혁 차원에서 ‘선 생산 후 생활’의 구호를 제창하고 ‘저임금 , 저소비’ 정책을 펼쳤다 . 전체 국민 경제에서 주택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았다 . 신 중국의 복지제도 아래서 주택은 이른바 ‘분배성 품목’에 해당되었고 , 국가는 각기 다른 물품에 각기 다른 주택 표준을 제정한 후 총괄적으로 분배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 당시 “주거지역의 각종 기초 설비와 공용 설비 규모는 작았고 , 수량도 적었으며 , 수준도 낮았다 . 도시 기능과 시민 생활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저 수준이었다 .”3 비록 현대적 의미에서 고층공동주택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 보통의 ‘공동주택’은 이미 이때부터 존재했다 .

베이징시 공동주택 유형과 양식 : 제 1단계 1949-1978)

시기 국가주택 정책 방향 공동주택 건축설계 공동주택 단지계획 문제점

1949-1957

(국민경제회복과 제 1차 5 개년

계획)

고 누적 저 소비 , 선 생산

후 생활 , 분배제 , 거주

가능

복지형 주택 배분 , 소련 모델과

표준

각 기업 단위의 분산 건설 , 업

무단위가 경제단위이자 생활단

단일 행렬식 배치

바둑판식 배치

지나치게 낮은 표준 , 평가표준의

주거면적 계수화 . 공공주방 , 공동

화장실 , 거실 및 수납공간 불비 ,

비좁고 막힌 공간 , 개인 사생활

노출 , 주택 기능 유형의 불분명

1958-1965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시기)

건설비 감축 , 원가 절감 합리적 세대 분할 및 공간 분

배 , 소규모 면적의 주택 발전

각 기업 단위별 분산 건설 저 품질 저 표준 , 설비 부족

1966-1976

(문화대혁명 시기)

절약이 바로 혁명이다 .

모든 것의 표준을 낮춰라

작은 사각형 거실 출현 각 기업 단위별 분산 건설 1인당 주거 면적이 최저점인 3.6

㎡까지 내려감

전체적으로 보면 , 제 1단계의 공동주택은 주로 ‘수면의 공간’으로 정의되어 1인당 주거 면적이 최저 기준에 가까웠다 . 따라서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인간의 기본 권리 , 곧 프라이버시의 보호나 평화적인 생존권 , 행복 추구권 등과 같은 것이 무시되었다 . 그리하여 여러 세대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단칸방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 그 방은 침실을 비롯한 거실 , 수납실 , 식당 , 응접실 , 작업실 등 일체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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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또 여러 가족들이 동일한 주택을 함께 사용하는 것도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 ‘공간 절약’의 논리를 바탕으로 주방과 화장실은 복도의 공용 통로에 집중 배치되었다 . 제 1단계의 ‘공동주택’은 산업단체별 부대설비였기 때문에 이웃이 모두 동료였고 서로 간의 연락도 그만큼 활발했다 .

(2) 기거공간으로서의 주택 단계

제 2단계는 1978년 개혁개방에서 1990년까지로 ‘기거형 주택 발전 단계’라고 부를 수 있다 . 이 시기 베이징 시는 고층공동주택 건설의 이념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 1985년 이후에는 고층공동주택이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계획경제 정책을 대체하면서 초기 단계의 성과를 보였고 , 베이징 시 부동산 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 국가가 노동자의 사적 소유권과 그 확장을 장려했고 , 재정과 관리 기구를 통해 소비를 자극했다 . 그 결과 도시 주민의 소비 수준과 주택 수준이 대폭 향상되었다 . 반(半) 상품화 혹은 상품화된 공동주택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그러나 베이징 시는 중국 공산당 , 정부 , 군대 수뇌기관의 소재지였던 관계로 사회 상층인사가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주택의 소유 및 점유 관계 또한 복잡했다 . 따라서 베이징 시 주택제도의 개혁도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었고 , 1992년에 이르러서야 ‘베이징 시 주택제도 개혁 실시 방안’이 공포되었다 .

베이징 시 공동주택 유형과 양식 : 제 2단계(1978-1990)

시기 국가 주택정책 방향 공동주택건축설계 공동주택주거단지 계획 문제점

1978-1990

(개혁개방 정책의

확정)

경제개발 중심의 도시

건설 및 국민경제 부문

비율에 따른 조정 발전

반 상품 주택 체제 , 한 대문에 한

세대 , 주택면적 확대

각 기업 단위별 분산 건설 고표준 주택의 대량 시공으로 고

비용 유발

1980-1990

(개혁개방 초기)

도시 주택제도 개혁 주택 거주성 , 가분성 , 안정성

의 표준화(구조재 방면과 설계

방면)

정부기관의 부동산시장 집중 관

리와 총체적 통계 및 감시의 종합

개발 정책

편리한 가전사용과 편리한 주택

공간사용 사이의 모순

20세기의 중 ·후반에 들어서면서 현대화된 가정용 전기제품(텔레비전 , 냉장고 , 선풍기 , 세탁기 , 에어컨

등)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이러한 전기제품의 출현은 주택 사용 공간의 확장 및 보조 공간의 증가를 필요로 했다 . 이로 인해 고층공동주택의 건축설계는 새로운 추세에 맞춰 조정되었다 . 한편으로는 가정용 전기제품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되었고 , 다른 한편으로는 주택 전체 공간배치의 합리성을 고려하여 주택 내부공간의 기능이 전문화 , 다원화(휴식 , 모임 , 오락 , 학습 , 업무 , 손님 접대 등)되었다 . 당시 중국 가정에서 일기 시작한 소형화 추세와 결합되어 주택의 실내 구조가 합리적으로 조정되기 시작했지만 , 이런 변화는 여전히 이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어 본격적인 실천이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

(3) 소강상태의 주택 발전 단계

제 3단계는 1990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 , ‘소강형 주택발전 단계’라고 부를 수 있다 . 정부가 발표한 ‘소강(小康) 주거 표준’4

에 따르면 , ‘사람 중심’의 기조를 유지하되 편리성 , 안락성과 조화가 그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5 국민 주택의 상품화 과정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 각기 다른 부대시설과 기능의 주택 지구가 마련되어 보다 완전한 형태의 등급을 형성했다 . 도시 주민들은 자신의 구매 능력과 수요에 따라 각기 다른 유형 , 등급의 주택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 따라서 이제 주택 지구 유형은 사회적 계층의 분할을 반영하게 되었다 . 현대적 의미의 고층공동주택이 베이징에 우뚝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일반 대중에게 고층공동주택이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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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67

관념으로 내면화되었는데 , 그런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고층공동주택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부록1 참조)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현대 부동산 회사 , 도처에 편재하는 대중 매체 , 상대적으로 느슨한 국가 주거정책 등이 현대 대중의 ‘당연’한 주택 관념을 공동으로 만들어냈다 . 즉 ① 주택은 기본적으로 고층공동주택을 가리킨다 . ② 한 채의 주택은 명확한 경계(예컨대 부동산 등기부에 기재된 구체적인 면적)가 그어진 분리 독립 세대 6

다 . ③ 주택은 그 내부에 최소한 독립된 침실 , 주방 , 식당 , 화장실 , 거실 , 저장실 등의 기본 공간을 포함한다 . ④ 주택은 공용부분과 전유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 주민은 전유부분의 유형 , 표준 , 규격 , 배치방식 등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 . ⑤ 주택 설계와 주택 단지의 부대시설 , 지역사회 환경 건설에는 빛 , 소리 , 열 , 기후 , 급수 , 난방 , 통풍 , 교통 , 녹지 , 구매 , 여가오락 , 주차 등이 포함된다 . 주택설계의 차원에서 , 고층공동주택 내부의 각 공간과 그 구체적 기능이 고려되었고 , 각 공간들 간의 관계도 조정되었다 . 예컨대 , 세대 내 공용 공간은 일반적으로 문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고 , 방은 안쪽에 , 주방과 욕실은 실내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에 배치되었다 . 전반적으로 주거용 설계는 “공(公) 사(私)의 분리 , 식사와 취침의 분리 , 거주생활과 수면의 분리 , 청결과 불결의 분리”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 이는 , 고층공동주택 설계 이념 중 ‘문명 규범’이 보통사람들의 습관이 되었고 , 또 그것이 일상사로 여겨지는 ‘주거문화’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 한편 , 베이징 주민의 빈부격차가 확연히 벌어지자 부동산 시장에서는 , 부유한 중 고급 소비층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층공동주택의 실내 공간을 한층 더 세련되고 완성도 있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 고급 주택에는 위에서 서술한 주요 공간 이외에도 객실 , 아이 방 , 서재 , 체력 단련실 , 가사도우미방 , 드레스룸 등이 부설되어 있는데 , 이런 공간은 더욱 더 세련되고 안락하며 , 편리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 그 주택단지를 둘러싼 자연 ·사회 ·인문 환경 역시도 더 안락하고 편리하게 발전했다 .

베이징시 도농 결합 지대 공동주택 유형과 양식 : 제 3단계(1985-2010)

시기 국가 주택정책 방향 공동주택 건축설계 공동주택 주거지역 계획 문제점

1990-1997 주택상품화 정책의 발전 확립 , 국가 고층공동주택

발전방향 확정

세대별 공간의 유연한 배치 :

판식(板式), 탑식(塔式),

정자형(井字型), 나비형

인정미가 넘치는 생활세계

전체적 , 조합형의 지역사회 이

고층공동주택(50%이상)

과 전통건축의 격차

1997-2010 국가의 ‘소강형 도농주택주거표준’ 의 공포 , 고층

공동주택의 증량형 발전 경제적용주택(1998)

과 저가임대주택(2001), 가격과 면적을 제한한

매매용 주택(2007 분양주택) 정책

주거안정 프로젝트

과학기술화 , 지능화 , 집약화 , 발전 중소형 보장형

주택 , 모든 사람이 적당한 주택소유

주택면적 하한선 제한과 기본

생활 수준을 보장 , 주택 유형

의 다원화 , 대상이 있는 부동

산 개발 항목 . 주택 과학기술

의 대 발전

다원화되고 , 다양한 취향의 주

택유형과 주거단지 이념 ,

화별장 , 유휴공실 , 토지 사재

기 증가 .

좁은 공간 대가족 거주 현상 ,

주택가격 폭등 , 환경악화 , 난

개발 , 사회적 불평등

그러나 주택의 상품화 이후 , 베이징 시(전 중국에 이르기까지)의 고급 고층공동주택에도 여러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예를 들면 주택 내부 구조의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졌고 , 많은 주택이 사재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 전국 단위로 주택 가격이 폭등했다 . 중 ·저소득층의 주택 구매력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 사회 전체가 불공정(부록 2, 3 참조)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자 중국정부는 주거보장 시스템 7

을 확립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중이다 . 정리하면 , 베이징 시 주택 건설의 역사에서 표준적 의미의 고층공동주택은 최근 20여년(1990-2014) 사이에 출현한 신형 주거양식이다 .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시공된 고층공동주택은 표준화된 건축모델을 따르는 것이었는데 , 주택 기능과 주거 환경의 표준이 너무 낮았고 , 현대 과학기술 제품의 폭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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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발전을 경험하게 되자 그 설계 이념은 심각하게 뒤처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 1990년대 말 이후 , 베이징의 부동산 개발회사는 국제적으로 선진적인 건축 이념 8

을 참고하기 시작했고 , 보다 주거 친화적이고 , 인간 중심적인 일군의 고층공동주택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 주민의 기본적인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고 , 주택의 다양성 , 안락성 , 지능화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낮은 주거환경의 표준을 극복하는 대 발전을 이룩했다 .

그런 점에서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생활세계는 사회 ·경제 발전의 과정 속에서 부단히 형성되고 구성되어 온 것이다 .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 무엇이 고층공동주택인지에 대해 어떤 ‘당연함’이나 ‘이러저러하다’고 일관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사회 계층을 구분하는 관점에서 보더라도(특히 계층과 연령으로 구분하면) , 고층공동주택 내의 생활과 생활세계는 일관되게 설명되지 않는다 . 그런 점에서 ‘신 민속학’은 ‘사회 기초’9

의 연관성을 세심하게 참고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당연시되는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

2.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내적 생활방식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베이징 시의 고층공동주택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서 중국 경제개혁의 영향을 받으면서 출현했다 . 그리고 고층공동주택 자체도 복지주택 , 반 매매용 주택(경제적용 주택 , 저가 임대주택 , 가격과 면적 제한 주택 , 재건축 주택 등) , 순 매매용 주택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 이러한 주택 유형은 국가가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시행한 주택정책과 상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 주거 집단의 신분 , 주택 단지의 환경 , 생활방식과도 상관이 있다 . 현재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유형은 베이징 시정부가 1994년에 반포한 ‘삼개사건(三改四建)’ 주택제도 개혁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 그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 주택건설 투자와 관련해서 국가와 직장단위가 전담하던 체제에서 국가 , 직장단위 , 개인 등 삼자가 합리적으로 부담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 각 단위에서 담당하던 주택 건설 , 분배 , 수리 , 관리 체계가 전문화된 운영 체계로 바뀌었다 . 주택의 현물복지 분배 방식이 노동에 따른 화폐임금 분배 방식으로 바뀌었다 . 중 ·저소득층 가정을 대상으로 한 사회보장 성격의 경제적용 주택 제공 체제와 고소득 가정을 대상으로 한 매매용 주택 공급 체제가 완비되었다 . 주택기금 제도도 설립했다 . 주택금융과 주택보험을 발전시켜 정책성과 상품성이 공존하는 주택대출 체계를 확립했다 . 규범화된 부동산 거래시장을 마련하고 사회화된 건물수리 및 관리 시장을 발전시켰다 .10 바꿔 말하면 ,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역사에서 초창기 입주자는 아마도 ‘복지주택’의 방식으로 입주했을

것이다 . 1990년대 전후의 입주자는 ‘반 매매용 주택’의 방식으로 입주했을 것이며 , 21세기의 거주자는 ‘순 매매용 주택’의 방식으로 입주했을 것이다 . 다른 유형의 고층공동주택에는 서로 다른 사회집단이 거주하는바 , 예컨대 현재 복지주택에 거주하는 사회집단은 대부분 나이가 70세에 이른 퇴직자들이다 . 그들의 임금 수준이 낮은 만큼 그들이 거주하는 고층공동주택은 그 건축 년대가 오래되고 , 설계 이념 또한 낡았으며 , 사회 환경도 낙후되었다 . 서로 다른 유형의 고층공동주택에 거주하는 사회 집단은 생활방식 또한 서로 다르다 . 반 매매용 주택에 거주하는 사회집단은 대부분이 막 직장에 진입한 재직 직원이다 .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을 갖고 있으며 , 저축은 적을지라도 생활 취향이 현대화된 편이어서 주택의 현대화 설비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높다 . 매매용 주택의 거주 집단은 곧 퇴직하는 직원이나 상당한 저축이 있는 중산층으로 , 그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소비능력과 생활수준을 가지고 있다 .고층공동주택으로 들어가 주민의 ‘일상생활’을 조사하는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다 . 우선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대도시 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 또 그들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아야 비로소 방문취재와 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설령 고층공동주택의 주민들이 민속학자에게 자신들의 삶의 보금자리에 들어가 조사하는 것을 승낙한다 하여도 , 민속학자가 볼 수 있는 내용은 그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에 한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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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69

그 결과를 진솔한 그들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 뿐만 아니라 , 현대 민속학이 대도시 고층공동주택에 거주하는 주민의 생활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그 문제의식과 연구방법 두 차원에서 아직 탐색과 시도 단계에 머물러 있다 . 그렇기에 경험적 관찰과 탐방을 위해 개념 및 분석도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 이는 확실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 베이징 시의 고층공동주택 중에 복지주택과 반 매매용 주택의 대부분은 제 5순환도로 외곽의 ‘도농 결합부’ 지대에 있다 . 이 고층공동주택은 1990 년대에 세워졌는데 주민은 대부분 ‘ 재건축 주택 세대(回遷戶)’(고층공동주택이 점유한 토지에 원래 주거하던 농민들)였고 , 그 외 일부는 국영기업단위의 퇴직자였다 . 그리고 주민 대부분이 1990년대 중후반에 입주한 사람들이었다 . 이 고층공동주택은 주로 탑 모양의 고층건물이고 일부는 반로우(板樓) 형태였으며 , 특정 구역에 소속되어 집중 관리되고 있었다 . 이하에서 언급할 30세대의 주택은 각각 베이징 시 차오양 구(朝陽區) , 까오뻬이띠엔 향(高碑店鄕) , 싼지엔팡 향(三間房鄕)과 또우꺼쭈앙 향(豆各莊鄕)의 다섯 개 구역에 속해 있다 . 그중 19세대의 주민은 재건축 세대에 속하고 11세대 주민은 국영기업단위의 퇴직자에 속했다 . 그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지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성원들이었는데 , 그 지구 직원(그녀들은 필자의 학생과 친구임)에 대한 신임을 바탕으로 필자의 조사와 탐방을 허락했다 . (부록 4 참조)고층공동주택에서 주민 생활세계의 진열과 배치가 이미 일상생활의 터전을 구성했고 , 동시에 일상 생활세계 그

자체였다 . 모두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층공동주택의 일상생활 공간은 주거용 설계와 주택단지 계획의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데 , 이러한 물리적 설비는 대개 ‘정해진 것’이므로 주민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극히 제한적이다 . 이는 복지주택과 반 매매용 주택이 매매용 주택과 구별되는 첫 번째의 중요한 특징이다 . 예를 들면 , 1990년대 중반 베이징 시 차오양 구 동쪽 제 5순환로 외곽에 위치한 탑식 고층공동주택은 모두

18층 이상에 두 대의 엘리베이터나 세 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건물이다 . 각 층은 8-12세대의 주택으로 다양하며 , 대부분의 가구가 방 두 칸에 거실 , 주방 , 화장실이 딸려 있는 구조였다 . 탑식 고층공동주택의 장점은 대량의 공간을 집약하여 더 많은 세대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결점도 매우 분명했는데 , 주택들 중 약 4분의 3이 채광 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 주택 내부도 설계 및 건축에 있어서 표준화된 방식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 다만 , 공용부분과 전유부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는데 , 전유부분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어서 거주자가 주택 공간을 임의적으로 설계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그것들은 모두 이미 만들어져 주어진 것으로 , 주민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 그러나 ‘이미 만들어져 주어진’ 공간은 결코 고정되어 변치 않는 것이 아니었다 . 주민들은 상당히 자유롭고도 예술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설계했다 .11 딱딱하고 일률적인 건축 설계에 대해 주민의 ‘능동성’은 주로 다음의 측면에서 실현되었다 .

(1) 주택 내부공사

주민들이 통일된 주택 배치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 개별 세대의 특수 상황에 따라 기존에 배치된 내부 공간이 조정되었다 . 예컨대 주민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전유부분의 특정 공간을 다시 구조변경 했다 . 어떤 곳은 방 한 칸을 막아 두 칸으로 했고 , 어떤 곳은 거실에서 작은 방을 분할했으며 , 어떤 곳은 주택 설계에 없던 구석에 수납공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 이런 모든 구조 변경은 기본적으로 실용적 목적에서 나왔다 . 실용적 목적이란 주택 내부의 기능 측면을 한층 더 고려했다는 뜻이다 . 대부분의 주택은 침실 , 거실 , 주방 , 화장실 등 네 가지 커다란 기능 부분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주민들의 안락하고 편리한 현대화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었다 . 특히 식당 , 수납공간 , 드레스룸이 없다는 것은 주민들로 하여금 많은 불편을 야기했으므로 ,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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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이미 있는 기능 공간을 나누어 그들만의 기능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 다른 주민들에게는 실질적인 칸막이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역을 나누는

것은 확실히 필요했다 . 그들이 절충한 방법은 동일한 기능 부분을 관념적으로 세분화하는 것이었다 . 예를 들면 그들은 거실의 특정 구석에서만 식사를 하고 또 다른 구석에는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두었다 . 즉 , 실제로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주민의 관념 속에서는 기능 구역이 엄연히 존재했다 . 주택 기간시설(물 , 전기 , 가스배선)의 개조는 주택 내부공사와 관련된 전문적인 사안이다 . 주택 설계와

건축 당시에는 아직 시대의 발전 방향과 진보의 속도를 예측할 수 없었고 , 기초 설비 또한 주민들의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 예를 들면 , 당시의 주택은 인터넷 회선이 설치되지 않았고 , 유선 텔레비전 선로도 눈에 보이도록 불합리하게 설치되었다 . 게다가 탑식 고층공동주택은 일반적으로 중앙집중난방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 그러나 전체 설비 및 설치가 불합리했기 때문에 많은 주택의 겨울철 실내 온도가 기준에 못 미쳤다 .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난방 시설을 교체했는데 , 물론 최근 시공된 고층공동주택에서는 이 시설이 전유부분으로 이전되었으므로 주민들이 충분히 자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

90년대에 입주한 베이징 시의 고층공동주택은 일반적으로 간단한 내장공사를 거친 것이었다 . 거실 , 침실의 바닥은 60㎠의 사각형 타일이 깔렸고 , 주방과 욕실은 20× 40㎝의 직사각형 타일보드가 깔려 있었다 . 그러나 주민들은 이를 목재나 다른 재질의 바닥 , 혹은 다른 스타일의 보드타일로 교체했다 . 원래 있던 창문을 바꾸기도 했으며 , 벽에 석회를 칠하고 , 노출된 파이프를 대리석이나 목재로 싸서 ‘확 달라진 면모’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 중국의 ‘새 집’이란 되도록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2) 주택 내부 단장

주택의 내부 단장은 주민의 자유 의지가 집중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 경험적 관찰에 의하면 ,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내부 단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으로 구분되었다 .

① 가구배치

새 집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주택 자체만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가구도 새로운 것이 가장 좋다 . 새 집을 위해 길이를 재고 새 가구를 짜는 것은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 주민의 습관이어서 주택과 가구는 대부분 ‘동갑’이다 . 그 주택에서 주택보다 더 오래된 가구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 오랜 가구가 버려지는 중요한 이유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다 . 첫째 , 고층공동주택의 공간 길이에 맞지 않는다 . 둘째 , 현대 주택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 셋째 , 비실용적이다 . 여기에 예외는 없다 . 다만 , 옛 집에서 가져온 등받이 없는 낮은 걸상 , 여주인이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온 옛날 궤짝은 여전히 그 주인이 간작하고 있다 . 주택의 배치에 맞춰 완전히 새로운 가구를 짜고 주민들의 개인적 기호와 재력에 맞춰 특정한 색깔과 재질의

가구를 선택하는 것은 이곳의 유행이다 . 주택의 바닥과 벽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하고 , 각 가정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가구를 조합하여 배치한다 . 대부분의 주택 방에는 2인용이나 1인용 침대 , 커다란 옷장과 침대 머리맡 수납장이 딸려 있고 , 주방에는 찬장이 놓여 있으며 , 거실에는 ‘L’자형의 소파와 티 테이블이 놓여있다 . 그 건너편에는 예외 없이 걸이형 혹은 탁자형 액정 평면 텔레비전이 있다 . 그리고 식탁도 거실에 배치되는 가구 중 하나다 . 최신의 현대화된 가구를 배치하는 것도 유행이다 . 물론 고풍의 가구를 배치하는 것은 더 고차원의 시대적

유행이며 , 특수한 취향과 신분을 과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 많은 세대주들은 자기 집에 새로 들여놓은 앤틱 가구나 공예품 때문에 매우 우쭐해 한다 . 따라서 오랜 가구를 버리는 것은 조사대상 주민들이 ‘고가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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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71

좋아하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라 , 그 고가구가 보존할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 주방의 배치도 고층주택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다 .

②가전 배치

기본적으로 각 세대의 텔레비전은 거실에 놓인다 . 텔레비전 시청은 한 가족이 저녁 식사 후 함께 앉아서 교류하고 소통할 기회를 준다 .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가정은 방에 추가적으로 텔레비전을 설치했다 .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시작했고 가족 구성원들이 동시에 다른 채널을 시청해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되었다 .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와 휴대폰의 보급으로 인해 텔레비전 시청이 중 ·노년층의 반복적 일상이 된 반면 , 젊은이들은 주로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정보와 오락을 얻는다 . 컴퓨터(특히 평면 텔레비전)가 보급되었을 당시 , 주택에는 전문적인 업무공간이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이나 거실에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동시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따라서 그 방이나 거실은 휴식 , 오락 , 업무 , 손님 접대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임시적으로 겸비하는 공간이 되었다 . 이곳에서는 세탁기와 냉장고의 사용도 매우 보편적이다 . 그러나 그것들의 위치가 완전히 같지는 않아서 , 대부분의 조사 대상 주택 중 세탁기와 냉장고를 배치하는 고정된 공간을 설계한 곳은 없었다 . 일부 주민은 세탁기를 주방에 두었지만 , 그보다 많은 주민들이 세탁기를 욕실에 두었다 . 일부 주민은 냉장고를 주방에 두었고 다른 주민들은 거실에 두었다 . 최근 몇 년 동안 , 상술한 가전제품의 교체 속도는 가히 놀랄 만하다 . 그 기능과 설치는 정밀화 , 민첩화 , 대중화의 방향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 그에 비해 조사대상인 공동주택의 주민들의 경우 텔레비전은 모두 교체했지만(사용수명 때문은 아니지만) , 세탁기와 냉장고는 아무도 교체하지 않았다그 원인을 따져보면 이렇다 . 거실에 거는 텔레비전은 세대주의 ‘얼굴’과도 같아서 , 대형 슬림형 액정

텔레비전은 이 가정의 체면을 세워주는 가구가 된다 . 게다가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시청 오락의 향유는 세대주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 반대로 , 세탁기는 대부분 매우 오래되었는데 , 그것도 진열품의 일종으로서만 의미를 갖고 있었다 . 차라리 손세탁을 할지언정 세탁기 작동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 그들은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 물과 전기의 낭비를 꺼리며 , 게다가 손세탁의 효과를 더 신뢰했다 . 커다란 세탁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세탁기가 일 년 내내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 냉장고도 대부분 구식이었는데 , 세대주들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 그들에게 냉장고는 냉장보관 기능만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전기제품 이외에도 , 최근 들어 핫플레이트 쿡탑(電磁爐) , 전자레인지 , 난방기 , 전기밥솥 , 정수기 , 가습기 , 공기청정기 등 각종 크고 작은 가정용 전기제품이 일반 가정에 등장했다 . 그러나 이렇게 많은 전기제품을 모두 합당한 위치에 배치하지는 않았다 . 거의 모든 가정이 자신들의 공간 조건과 개인 습관에 따라 임의대로 이 가전제품들을 두었다 . 다만 꼭 짚고 넘어갈 것은 , 본 조사 대상인 공동주택의 집주인들에게 이 가전제품들은 실용적 기능을 담당하는 제품이라기보다 오히려 장식적 기능을 가진 가구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 그 제품들의 존재는 집주인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지 , 이런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 더 정확히 말하면 , 그들에게 필요한 경우에도 그들은 이 물건들을 거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 흥미로운 현상은 거의 모든 가정에 에어컨이 있지만 동시에 선풍기도 있었다 . 그러나 삼복더위에도 많은 가정의

에어컨은 여전히 에어컨 덮개로 꼭꼭 덮여 있었고 , 세대주는 선풍기만 사용하지 에어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 수많은 중 ·노년층은 습관이 안 되었다거나 에어컨의 찬바람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 많은 가정에서 에어컨은 결코 실용적 기능을 갖지 못한 ‘진열품’일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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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③ 인테리어 소품

가구와 가전 이외에 주민들의 생활방식과 생활 취향을 더 집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 항목은 가정 장식품이다 . 여기서 말하는 ‘가정 장식품’이란 , 주택의 내벽 , 가구 , 가전에 걸고 부착하는 작은 장식품을 가리킨다 . 주민들은 의도적으로 공간을 남겨 이들 장식품을 전시했는데 , 이것들은 주민 개인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 예를 들면 , 몇몇 주민들은 거실이나 방에 일부러 벽장을 만들고 그 안에 여러 방법으로 수집한 술병 , 신상(神像) , 로봇 피규어 , 무협서적 , 개인 트로피 , 테마 공예품 , 호두 한 쌍 등을 진열했다 . 이는 집주인(특히 남자주인)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은 정성을 들이는 공간으로 , 그 가정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 남자 주인이 이 특별한 공간을 자신의 지위를 전시하는 데 활용하는 것처럼 여주인들은 , 자신이 수놓은 십자수 수예품을 거실이나 방에 걸어 놓는 것을 좋아했다 . 결혼사진 , 가족사진 , 아이들의 사진 , 기타 집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이라도 진열하는 것을 좋아했다 . 만약 집에 어린 아이라도 있다면 , 방안의 어느 한 구석에는 그(그녀)들의 손에 닿을 만한 위치에 붙이는 종이나 어지럽게 낙서한 종이들이 어김없이 붙어 있다 . 가정 장식품에는 가장의 신앙을 담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 모든 가정에서는 설 명절 기간에 춘련(春聯)을 붙이는데 , 어떤 가정에서는 신성한 공간을 만들어 관우 , 재신(財神) , 미륵 , 백문대선(白門大仙) , 심지어 마오쩌뚱(毛澤東)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 또 1년 중 특별한 기간을 정해 집 한 구석에 조상의 영령을 모시고 , 풍수 관념에 따른 가구 배치와 장식품 진열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 도교를 신봉하는 가정에서는 부적을 붙이고 , 인터넷에서 성물을 구매하여 자신만의 ‘신비 신앙’ 부호를 만들기도 한다 .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공동주택에서는 그 부호가 깨져 있는 경우도 많아 , 그것이 이미 사소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

④ 기타 물건

중국인들은 ‘쌓아두기’를 좋아한다 . 사용한 옛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이런 경향은 앞의 내용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 새 집으로 이사할 때는 항상 완전히 새로운 것에 온 힘을 기울인다 . ‘완전히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기운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한다 .’는 춘절 기간 동안 중국인들이 갖는 심리 상태와 유사하다 . 일종의 무속적인 심리 상태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쌓아두기’를 좋아한다 . 시간이 갈수록 옛 물건들이 쌓여가고 , 주택의 제한된 공간은 이 물건들을 수납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 결국 이 물건들은 기존의 수납공간을 벗어나 다른 기능 공간으로 침투하기 일쑤다 . 그 결과는 “주택 내부공간의 기능 혼잡”이다 . 거실 , 방 , 베란다가 예외 없이 수납공간(이 주택들은 애초 수납공간이 설계되지 않았다)의 기능을 대신한다 . 우리는 모든 주택의 베란다에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아야 했다 . 여주인이 돌보지 못한 화분 , 아이가 쓰다 버린 장난감 , 남자 주인이 늘 찾아 헤매는 공구들 . 게다가 냉장고에는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를 오래된 식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고 , 옷장에는 다시는 입지 않을 예전 옷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 ‘쌓아두기’ 습관은 어느 가정에서나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 여주인들은 주택 설계의 불합리와 ‘쌓아두기’ 습관의 희생양이다 . 만일 그녀가 가정용품을 쉽사리 버린다면 ,

그녀는 ‘집안 살림을 못한다’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 ‘살다보면 언젠가는 이 잡동사니들을 다시 쓸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그것을 어디 가서 다시 찾겠는가 ?’라는 것이다 . 따라서 살림을 잘하고 검소한 여주인이라면 불시의 필요에 대비해서 이 물건들을 마땅히 다 보존해야 한다 . 그러나 그 반대로 오래된 물건들이 너무 많아 집안이 쓰레기장으로 변한다면 , 그 또한 ‘칠칠맞고 게으르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친지나 친구라도 방문해서 이 더럽고 정리되지 않은 집을 보기라도 한다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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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73

주인으로서는 ‘매우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 자연히 그의 사회적 위신은 떨어질 것이다 . 주택의 이런 모습과 여주인의 ‘부덕(婦德)’을 연결시키는 일이 매우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 주민들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 매우 흔하게 거론되는 일이다 .

⑤ 가정 애완동물

주민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 비록 주택 내부에 애완동물을 위해 미리 마련된 공간이 없어도 말이다 . 고양이 , 개와 새(비둘기 , 구관조 , 앵무새) , 이 세 가지 동물이 그들이 주로 키우는 애완동물이다 . 애완동물은 주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 주민들은 그들의

애완동물에게 애칭을 지어주고 , 하루 중 특별한 시간을 내어 애완동물을 데리고 나가 산책시킨다 . 그런 점에서 애완동물은 주민의 일상과 휴식시간을 조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 애완견의 생활습관에 맞춰 대소변을 가리기 위해 새벽부터 잠옷을 입고 나와 애완견을 산책시키는가 하면 , 여기저기서 그들의 애칭을 부르는 소리가 주택 단지 내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 주인들은 심지어 애완동물들 간의 교류를 위해 그들 간의 교류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 그러나 그들은 주택단지 관리자가 실직할 정도로 공중도덕 관념이 부족하다 . 애완동물의 대소변은 단지 내 어디서나 눈에 띠었고 , 주차된 자동차가 애완견의 소변에 젖어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 베이징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 특히 새를 기른다는 것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 새장을 들고 새를 산책시키는 것이 ‘베이징 토박이’라는 하나의 신분 상징이 되기도 한다 . 새장을 들고 나온 베이징 토박이들은 공원에 함께 모여 새 기르는 경험을 교류하면서 , 그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대부분 가정 내부에 한정되는 매우 개인적인 일인 반면 , 비둘기를 키우는 것은 이웃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 물론 호루라기를 꼬리에 맨 비둘기가 그 소리를 내면서 공중을 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

(3) 주택단지 내 생활

각 주택을 걸어 나오면 , 복도 , 각 동 건물 , 건물 사이의 통로 , 단지 내 작은 광장과 크고 작은 상점들이 모두 주민들의 일상생활 공간을 구성한다 . 이 공간은 주민들의 공공 공간이기도 하다 .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 모든 주민은 단지 내 공공사무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그러나 현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 주민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 그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 그리고 적극적으로 단지 내 생활건설에 참여하는 모습과 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들은 ‘공공’의 것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고 , 당연히 멀찌감치 몸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우선 그들은 이웃 관념이 희박하다 . 이웃에 대한 어떤 개인 정보도 모르는 이들이 허다했다 . 한 층마다

8~10세대가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알지 못했고 교류할 기회도 전혀 없었다 . 물론 입주하기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같은 회사의 동료나 동향민이 있기는 했지만 , 그들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소원해졌다 . 다음 , 일반 주민과 단지 내 부동산 관리회사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다 .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 이 회사는

기업주위원회의 외주를 받아 단지 내 공공사무를 관리하는 기업이다 . 그러나 일반 주민들은 공공사업에 참여하려는 의식이 희박했고 , 이 회사는 ‘종이 크면 주인을 깔본다’는 말이 있듯이 주택단지 내 일상생활의 ‘관리자’(공공사무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는)가 되었다 . 이를테면 , 이 회사는 주차구역을 조정한다든지 , 개인이 임의로 임시 건축물을 세운다든지 , 행상인들이 불법수입을 취한다든지 할 때 , 뿐만 아니라 단지 내 위생 청결 , 소음 , 공공 설비의 수리 등 모든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 그리하여 단지 내 벽에는 작은 광고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 통로 입구의 쓰레기는 장시간 방치되어 있었다 .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단지 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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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돌아다녔고 , 주민들의 차가 공공 통로에 세워진 경우도 다반사였다 . 주민들이 ‘이상한 일을 만나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이런 일은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 셋째 , 주민과 단지 지원센터 사이의 관계는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 지원센터는 주민의 자치조직에 속하고 그

조직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주민들의 선출로 뽑힌 사람들이다 . 그러나 그 업무는 정부와 관련되어 있어서 그들 중 일부는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을 지원 받았다 . 결국 이 센터는 사업 단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부 출자의 사회 서비스 센터가 되었다 . 이론적으로 말하면 서비스는 지원센터의 책임에 속하는바 , 이 센터는 주택단지 주민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촉진하며 , 생활환경 및 생활 분쟁을 개선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기구다 . 그러나 그 일상 업무는 정부의 필요에 더 집중했다 . 이를테면 위생체육 , 교육 과학 보급 , 가족계획 업무 등 정부가 위탁한 사무 관리와 특별한 입찰 등 상관 업무를 전담했다 . 정무 정보 , 대민봉사 정보 등 자문 봉사를 제공했고 , 문화 오락 등의 서비스 , 주민의 자조 ·협동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원은 대다수가 중 ·노년층이었고 가장 많이 참여하는 일은 문화 오락 활동이었다 . 반면에 청 ·장년층이 이 센터와 관련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넷째 , 단지들 사이의 공공장소(상점 , 거리 , 광장 , 큰길 , 인도 등)에서 시민들의 공공의식은 더욱 희박하다 . 일례로 , 베이징 시에서는 일몰 후나 일출 전 중 ·노년층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모여 ‘광장춤’을 춘다 . 요란한 음악과 시끄러운 소리는 주민들(특히 출근 , 등교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 그러나 이 또한 주민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 요컨대 , 근 20년에 걸쳐 벌어진 중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하이테크 제품의 신속한 보급 속에서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 주민들의 생활세계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 본 논문이 주목한 복리 주택과 반 매매 주택에서 , 그 시대적 ·정치적 한계는 주민들의 일상생활 공간의 기본 틀로 작용했다 . 그리고 주민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글로벌화가 만들어내는 현실적 조건의 토대 위에서 , 과거로부터 계승한 문화와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 산물 , 다른 계층으로부터 가져온 문화 전통과 산물들을 모두 뒤섞어 자기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사용했고 ,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적 정체성을 구축했다 .

3. ‘일상생활의 계몽’을 넘어서 쾨스트린은 “민속학이 지금까지 의문시하지 않았던 것과 당연시되는 영역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라면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배신할 준비를 해야 한다 . 민속학은 당연시되는 것을 주목하는 학문이기 때문 (Volkskunde is the discipline that brings the taken-for-granted into view)”12

이라고 말했다 . 그는 , 민속학이 당연시되는 것을 철저히 변화시킨 방식은 그것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 즉 , 일찍이 옳았던 것을 더 이상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생활’과 ‘민속’의 구별이다 . 쾨스트린의 이러한 민속학 정의는 이와모토 미치야(岩本通彌)가 표방한 ‘현대 민속학’의 입장이기도 하다 .

이와모토가 소개했듯이 이 현대적인 학문의 자리매김은 ‘팔켄슈타인 선언 (Falkenstein Formula)’13에서

시작되는데 , 이 ‘선언’에서 강조한 것은 바로 다음의 두 마디였다 . “민속학은 주관과 객관 형식 속에서 문화적 가치의 변화를 분석한다(그 원인과 과정을 포함해서) . 그 목적은

사회문화적 문제의 해결을 돕는 것에 있다 .”14

이 말은 헤르만 바우징거 (Herman Bausinger)가 강조했던 ‘일상생활의 계몽’을 의미한다 . 바우징거와 그 학파의 해석에 따르면 , ‘계몽’이란 전통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지속하고 , 대중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표면적인 규칙들을 직접 대면하고 재고할 수 있도록 힘써 가르치는 것이다 .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한 것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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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75

규칙들은 이제까지 주목을 끌지 못했고 게다가 사고를 유발하는 대상도 아니었다 . 베른하르트 (Bernhardt)는 “이 강연과 논문들에 의거한 계몽 작업은 청중과 독자에게 보다 폭넓은 사회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 그들이 사회 ·문화에 대해 사색하는 능력을 구비하도록 도울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계몽적인 일상생활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15

고 논평했다 . 독일민속학의 영향을 받은 이와모토 역시 일본민속학의 전통 속에서 현대 민속학의 범위를 새롭게 확정했다 .

“우리들의 생활은 매일 전부 변화한다 . 당연한 일이나 주위의 자질구레한 물건조차 모두 그 내력이 있다(의의나 기능의 변화 면에서) . 우리들 생활의 개선을 위해 , ‘난 알아 , 이것은 당연한 거야 '라는 인식에 정체되어 사고를 멈춰버리면 안 되고 , 그 변화들에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민속학의 존재 의의와 기본 이념이다 .”16

물론 바우징거가 말한 ‘계몽’은 주입을 위한 것도 아니고 , 민중을 경시해서 그들의 삶을 대충 훑어보는 것도 아니다 . 오히려 그들이 잘 아는 일상 현상의 배후에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들 17

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통찰하여 , 민중이 자각적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반성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 이와모토도 이와 매우 유사한 입장이다 . 그러나 독일민속학은 , “바우징거 이후 두 세대를 거치면서 일상생활의 계몽에만 그치는 연구 경향에 대해 불만과

우려를 표명했다 . 유럽 통합과 글로벌화 등 거시적인 사회발전 과정에 대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함으로써 시대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고 강조했다 .18 확실히 전후 독일 민속학 , 특히 튀빙겐 (Tübingen)의 ‘경험문화연구소’는 시대와 사회 변화를 따라 끊임없이 자기발명과 자기혁신을 거듭했다 .

‘일상생활 연구’에 대해 대해 말하자면 , 세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성과들이 제시되었다 . 곧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의 ‘일상생활 비판’ , 아그네스 헬러 (Agnes Heller)의 ‘일상생활의 철학적 분석’ ,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자 ,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기 드보르 (Guy Debord), 라울 바네겜 (Raoul Vaneigem)의 ‘일상생활의 혁명’ 연구 , 미셸 드 세르토 (Michel de Certeau)의 ‘일상생활의 실천’ 연구 , 노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의 ‘일상생활 비평’ , 미학자들의 ‘일상생활의 심미화’ 연구 19 등이 그것이다 . 과연 민속학은 이러한 학문적 맥락 속에 어떻게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 어떻게 민속학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기여할 것인가 ?20 ‘계몽’의 입장보다 진일보한 민속학의 성찰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 타 문화의 민속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계몽’의 태도 이외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

4. 덧붙이는 말 본 논문은 베이징 시 고층공동주택의 생활세계와 생활 스타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택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상생활의 ‘정지상태 화면’만을 주목했다 . 게다가 주택 내부의 배치와 장식 , 단지 생활의 일반적 측면 등 주민들이 봐주기를 희망하는 화면만 주목했다 . 따라서 주민의 구체적인 ‘실천’은 고려하지 않았다 . 주택 설계와 단지구획 설계 자체가 일상생활을 표현하는 환경이고 , 일상생활 자체가 민속을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본 논문은 주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재료들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표현하는지 주목하지 않았다 . 그러나 ‘실천’ 논리가 주민들의 일상생활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21 이를테면 , 우리는 고층주택 안의 가구나 가전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 겨우 알아냈지만 ,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모른다 . 많은 가정에 다기능 전자동 세탁기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버튼을 다루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 사실 많은 주민들은 그 버튼 중 일부만 다룰 줄 알고 , 다른 많은 기능 버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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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이제껏 사용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 텔레비전의 경우에도 다양한 사용 방법이 설명서에 쓰여 있지만 ,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 사용 방법을 정확히 몰랐다 . 심지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식사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도 발견했다 . 많은 주민들이 식탁이 아닌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 확실히 ‘일상’은 이런 실천 속에서 더 많이 구현되었다 . 주지하다시피 포스트모던 사회의 핵심적 특징은 고도의 ‘자기성찰성 self-refexivity)’에 있다 . 대중매체가

틈만 있으면 파고 들어오고 , 하이테크 제품이 보편적으로 침투한 상황에서 , 글로벌한 이동의 간편화와 가속화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다원화된 참고사항을 통해 자신의 일상생활을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예컨대 , 중국에서 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사회 엘리트 , 부동산 개발업자 그리고 대중매체와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무엇이 이상적인 주택인지 잘 알고 있으며 , 고층공동주택이 당연히 포함하고 있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 이런 상황에서 현대 민속학이 주목하는 ‘당연함’은 점점 더 모호하고 분명치 않은 개념이 되었다 . 현대사회 집단의 이질화는 갈수록 뚜렷해졌는데 , 가령 한 가정에서 아버지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들에게는 ‘이상한’ 일이 되기에 이르렀다 .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을 수 있겠다 . 또 글로벌화한 주택단지 내에서는 어떤 ‘당연함’이 당연한 게 아니고 오히려 ‘당연함’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일반적 지식으로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갈지도 모르겠다 . 이처럼 보편적인 ‘당연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현대 민속학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생활방식이 만들어지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즉 , 일상생활의 ‘사회적 토대’와 그 토대 위에서 일상생활이 ‘드러나는 양상’의 본질을 포착해야 한다 . 현대 도시민중의 일상생활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상적 생활세계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 현대 민속학자는 단지 역사적인 관점에서 ‘일상’의 형성 과정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 물론 그래서는 안 되고 , 또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만일 하나의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상적인 생활세계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면 , ‘실제로 그러한’ 생활세계는 이러저러한 문제들로 가득 찬 공간으로 재현될 것이고 , 따라서 민속학은 그 일생생활을 ‘혁명’ , ‘비판’ 할 만한 합리성과 합법성을 갖춰야 할 것이다 . 이를테면 , 중국의 주민들은 쓰레기를 과학적으로 분리수거하려는 의식이 없다 .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 중에는

음식 쓰레기가 가장 많은데 , 보통 주방에는 하나의 쓰레기통만 구비되어 있어서 음식 쓰레기도 다른 쓰레기와 구분되지 않은 채 거기 버려진다 . 이 쓰레기는 곧장 단지 내 하나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 신형 단지 중에는 분리수거함이 구비된 곳도 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 중국의 현대 민속학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 그들이 이러한 일상적 행위를 ‘이치상 당연하다’고 간주하고 캐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오히려 쓰레기 분리수거에 관한 한 가장 선진적인 국가인 일본의 일상생활과 그 습관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는 엘리트가 아닌 민중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현대 민속학자가 중국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비판하고 개혁하는’ 임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

注1) 胡惠琴, 「集合住宅的理論探索」 , 『建築學報』 ,2004년 제10기,13쪽.

2) 국제연합 , 「人居宣言Ⅱ . 1996. 원문에는 “사람들은 적당한 주택을 소유할 수 있으며 ,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주거 지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고 보인다 .

3) 熊燕, 「中國城市集合住宅類型學硏究(1949-2008):以北京市集合住宅類型爲例」 ,華中科技大學博士學位論文 ,1쪽 .

4) 소강(小康) 주거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 주택은 5가지 기본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 양호한 주거성 , 안락성 , 안전성 , 내구성 , 경제성이다 . 주거성은 난방성능 , 공기의 질 , 음향 환경 , 채광 환경 등을 포함하고 , 안락성은 주택의 평면기능 , 설비 배치 , 주방 욕실 설계 , 시각효과 , 면적 등을 포함한다 . 안전성은 방화 , 방범 , 미끄럼 방지 등 일상적 사고의 내용을 포함하고 , 내구성은 배치와 주택 제품의 내구성 , 방수 , 방충 등을 포함하며 , 경제성은 사용연한 비용의 분석과 평가를 포함한다 . (앞의 논문 , 6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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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77

5) 2000 年小康型城鄕住宅科技産業工程城市示範小區規劃設計導則,住宅科技,1997년 제 3기 .

6) 1987년에 이르러 중국 정부는 住宅建築設計規範 을 제정했다 . 이 규범에 따르면 “주택은 실내구조에 따라 설계해야 하고 각 세대는 반드시 한 대문을 가지며 , 방 , 주방 , 욕실과 수납공간을 배치해야 한다 .”

7) 베이징 시는 주택공급체계에 있어서 3단계의 정책을 시행했다 . ① 집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 가정에 대해 염가 임대주택제도를 시행한다 . ② 어느 정도 지불 능력이 있는 저소득 빈곤 가정에 대해 경제적용 주택을 배정 판매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 ③ 중등수입 이하 가정의 임대 주거 수요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제한이 있는 상품 주택을 제공한다 .

8) 1980년에 베이징 시는 첫 번째 부동산종합건설개발회사를 편성했는데 , 2006년에 이르러 베이징에 등록한 부동산회사는 무려 2958곳이었다 . 부동산개발투자와 판매는 고속 증가 추세를 유지했다 . 1991-1995년에 그 투자액이 5,684억을 넘어섰고 , 1996-2000년에는 19,795억을 넘어섰으며 , 2001-2005년에는 59,740억을 넘어섰다 . (齊心 , 「北京住房制度改革:曆程·成就與反思 ,

北京規劃建設』,2008년 제 9기 , 61쪽 .)

9) Dorothy Noyes, 2012, “The Social Base of Folklore” , A Companion to Folklore, Edited by Regina F.Bendix and Galit Hasan-Rokem.. Blackwell Publishing Ltd. pp.13-39.

10) 北京市人民政府貫徹國務院關於深化城鎮住房制度改革決定的通知 , 1994년 12월 .

11)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도 대중은 실천적 예술 , 즉 교묘한 저항의 책략을 써서 일상생활을 창조한다고 여겼다 . 그 책략에 힘입어 그들은 사물과 법칙을 변화시키고 자기의 방식대로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 속임수와 책략 , 사냥꾼적 기질 , 변화무쌍함 , 새로운 어휘와 서술 , 갖가지 발명은 그것들을 발명할 능력이 있는 보통 사람들이 결코 맹목적이거나 순종적이지 않고 , 소극적 , 피동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미셸 드 세르토 < 方琳琳·黃春柳 역 >,『日常生

活實踐:1·實踐的藝術』,南京大學出版社,2009,31-48쪽 .)

12) Konrad Köstlin, “On the Brink of the next Century: the Necessary Invention of the present” , Journal of Folklore Research, Vol.36, No.2/3, 1999, pp.289-298.

13) 1970년 독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에 민속학자들(그들 대부분은 튀빙겐 대학 ‘루드비히 우어란트 연구소(Ludwig-Uhland-Institut)’에서 왔다)가 모여 , 모종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선언’에 합의했다 . 이와모토는 이 선언을 “객체 및 주체로부터 표현되는 문화적 가치의 변화와 그 원인 , 그리고 그 구체적인 과정을 분석한 것”이라고 해설했다 .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객체와 주체란 다음과 같다 . 곧 문화적 가치관은 제도나 규범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표현되고’ , 태도나 견해를 서술하는(narrate) 방식으로 주관적으로 표현된다 .”고 설명했다(岩本通彌,「現代日常生活的誕生 :以昭和 37年度厚生白皮書爲中心」 참조) . 더불어 이와모토는 “객관적 역사는 , 주관적 역사가 어떻게 진술됨으로써 현실성을 갖게 되었는지 재고한다 .”고 주장했다 .

14) Dow James and Hannjost Lixfeld, Trans and Eds. German Volkskunde: A Decade of Theoretical Confrontation, Debate, and Reorientation(1967-1977) ,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886, p.2.

15) Herman Bausinger(吳秀傑 역), 『日常生活的啓蒙者』,廣西師範大學出版社,2014,68쪽 .

16) 岩本通彌,「現代日常生活的誕生 :以昭和 37年度厚生白皮書爲中心」 . 이와모토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民間傳承論 에서 독일 현대 민속학의 주장과 유사한 근거를 찾고 있다 .

17) 파네커가 논평한 것처럼 바우징거가 ‘일상생활의 계몽자’로서 나선 까닭은 , 독일 전후의 경제 , 정치 , 사회 , 문화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 필자는 , 바로 이러한 환경이 바우징거의 절충주의적이고도 지나치게 신중한 연구 성향을 제한했다고 본다 .

18) Herman Bausinger(吳秀傑 역), 日常生活的啓蒙者 ,廣西師範大學出版社,2014,7쪽 .

19) Ben Hamor ,王志宏 역 , 日常生活與文化理論導論 ,商務印書館,2008 ; Michael E. Gardiner, Critiques of Everyday Life,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2000.

20) 바우징거는 자신이 해럴드 가핑클(Harold Garfnkel)의 ‘민속방법론(Studies in Ethnomethodology)’ , 아그네스 헬러(Agnes Heller)와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생활 이론’ ,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일상생활 비평이론’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Herman Bausinger, 앞의 책,2014,101쪽 참조 ; Hermann Bausinger, “Media, technology and daily life” Media,Culture and Society, No. 6, 1984, pp. 343-351) 튀빙겐 경험문화연구소와 버밍엄 당대 문화연구센터에서 종사한 기간 중 겹치는 시기도 있었거니와 , 그는 현상학과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사회학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Herman Bausinger, 위의 책,178쪽 참조)

21) ‘실천 , 역사 , 문화와 권력’이 어떻게 1970년대 국제적 학술 사조의 키워드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Sherry B.Ortner, Anthro-pology and Social Theory : Culture, Power, and the Acting Subject,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and London, 2006. pp. 1-1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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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에 대한 재조명(왕)

항목      종류 1 2 3 4

주택형

면적별 기준 (㎡ )

사용면적 42~48 53~60 64~71 75~90

건축면적 55~65 70~80 85~95 100~120

기능공간

사용면적

기준 (㎡ )

거실 18~25

큰방 12~14

2인 침실 12~14

1 인 침실 8~10

주방 6이상

식당 8이상

화장실 4~6(화장실 두 칸으로 증축조절가능)

현관 2~3

창고 2~4(붙박이장은 주거에 불산정)

작업실 6~8

시설배치기

주방

Ⅰ형버너 (cooktop), 조리대 , 개수대 , 붙박이장 , 냉장고자리 , 주방환기구(환기구연장길이≮

2700mm)

Ⅱ형버너 (cooktop), 조리대 ,개수대 ,거치대 ,붙박이장 ,냉장고자리 ,주방환기구(환기구연장길이≮

3000mm)

화장실Ⅰ형 샤워기 ,세면대 ,좌변기 ,거울욕실장 ,세탁기자리 ,환기구

Ⅱ형 욕조(1.5m) 및 샤워기 ,세면화장대 ,화장거울 , 세탁기자리 ,좌변기(1~2대),기계식 환기구

설비기준

전기설비

전력사용량 월 80~200 KW.h

부하 1560~4000W (대형 면적은 6000KW까지 증가 가능)

전력계 5(20)A~10(40)A

콘센트

큰거실 2~3세트

작은 거실 2세트

주방 3세트

화장실 3세트

텔레비전단자 거실 침실에 각 한 개

전화 1~2대

에어컨 선 전용선 설치

급수설비 물사용량 사람 당 200~300리터• 온수기나 온수관리방식

난방통풍 방열기 냉방기(창밖 지정장소)

실내환경질

적기준

빛환경

채광 ≧ =1%(야외 하루 일광도와 실내 창으로부터 1m 높이의 자연광 비율)

조명

거실 및 일반 활동구역30~70 lux

침실 ,학습 150~300 lux

침대옆 독서 75~150 lux

식당 , 주방 50~100 lux

화장실 20~50 lux

계단 15~30 lux

소음환경공간방음 세대간 경계벽 ,층간바닥 ≧ 40~50 db충격방음 층간바닥 ≤ 75~65 db

난방환경(기

후연동식)

겨울철난방설비 구역 16~21℃

비난방설비구역 12~21℃

여름철 여름철 <28℃

부록1  도시 시범단지 주택설계 권고기준

2000년 소강형 도농주택 과학기술산업 공사 도시 시범지역 계획설계 지침

(2000年小康型城鄉住宅科技產業工程城市示範小區規劃設計導則),(住宅科技 , 1997년,제3기,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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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79

직업별연도

증가면적2000 2005

국가기관 , 당원조직 , 기업 , 사업단위경영자 25.28 31.59 6.41

전문기술자 24.00 29.21 5.21

사무직 및 관련종사자 22.77 27.25 4.48

상업 , 종업원 17.55 20.25 2.70

농업 , 임업 , 목축 , 어업 , 수리업생산종사자 23.75 26.93 3.18

생산 , 운수설비종사자 및 관련종사자 20.12 21.91 1.79

기타업종 22.36 26.10 3.74

부록3:2000-2005년 세대주의 직업별로 본 베이징시의 1인당 건축면적(단위:

㎡)(중국국가 통계국,「2005년 전국 1% 인구추출 조사」)

부록2: 2000~2005년 베이징시 1인당 주택 건축면적 변동현황(%)

근거자료: 2005년 인구1% 표본 추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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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주거방식 조사와 ‘건축계획학’오쓰키 도시오 ( 大月敏雄 )

도쿄 대학

( 번역 : 김현정 )

1. 곤 와지로의 ‘주택과 생활’ 연구

보통 생활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과제는 건축학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国男 )로부터 시작되는 민속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그 중에서도 곤 와지로 ( 今和次郎 )의 역할은 컸다 . 도쿄미술학교 (현 도쿄예술대학 ) 도안과를

1912년에 졸업한 곤은 와세다대 ( 早稲田大 ) 건축학과에 채용되어 1917년부터 민가보존연구회였던 ‘백모회 ( 白茅会 )’에 들어가 야나기타 구니오와 함께 민가 조사에 참여하여 여러 스케치를 남겼다 . 그 성과는 1922년에 『일본의 민가―전원생활자가 사는 집 ( 日本の民家―田園生活者の住家 )』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민가’라는 표현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곤의 방법론이다 . 메이지 ( 明治 ) 시대 이후에 시작된 일본 건축학이 주안을

둔 것은 새로운 건축물을 설계할 때에 이전에 실제로 세워졌던 유사 사례를 모아서 그 규모나 배치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 실학으로서의 건축학에 요청되었던 것은 설계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었던 것이다 . 때문에 근대 이후 새로이 요구된 관공서나 공공시설 등과 같은 근대적인 건축물 설계에서 구미의 실례를 참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시되었다 . 하지만 건축학과가 아닌 도안과를 졸업한 곤의 접근방식은 약간 달랐다 . 민가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현상을 스케치라는 독특한 공간구성 표현수단을 가지고 이해하며 해석한다는 방법론을 취했던 것이다 . 목적 자체가 ‘건축설계 실무에 바로 도움이 되는 지식이나 기술의 획득’이 아닌 , ‘눈 앞에 나타나는 건축을 통해 생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었다는 점에서 종래 건축학의 접근방법과는 크게 달랐다 . 또한 ‘주택과 생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도 크게 상이하였다 . 메이지 시대 이후의 건축학에서

‘주택’은 이른바 ‘건축’에 포함되지 않았다 . ‘주택’은 목수나 도편수가 담당하는 일이지 , 건축가로 불리우는 학사 출신의 엘리트 기술관료가 손댈 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당시에는 지배적이었다 . 하물며 보통 주택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와 같은 ‘생활’ 현상에 관심을 갖는 건축가는 지극히 소수였다 . 메이지 시대에는 다수의 주택 건축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목수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거나 메이지 시대 이후에 개량된 변소 , 난방기기 , 부엌관련용품을 어떻게 주택에 짜 넣어야 하는지 해설한 것이었다 . 주택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평범한 생활의 실태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정말로 요구되는 주택의 설계를 새롭게 고안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건축학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 이 시기 유럽에서는 근대건축운동의 일환으로서 국가를 형성하는 중요 요소로서 주택의 개선 및

개량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우선적으로 가장 가까운 주택부터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일본에서 많은 건축 관계자들이 주택 분야에 실제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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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81

간토 ( 関東 )대진재 전후였다 . 일본에서 ‘주택’이 주목받게 된 것은 내무성 지방국 유지가 1908년에 『전원도시』를 출판한 이후이다 . 곤이 백모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다이쇼 ( 大正 ) 시대 중엽 무렵에는 도쿄 ( 東京 )에서 차츰 ‘주택문제’가 ‘도시문제’라는 문맥 안에서 논해지게 되었으며 영국인 에버니저 하워드 (Ebenezer Howard)가 주장한 전원도시적인 주거환경에 찬동하는 추세에 있었다 . 『일본의 민가』 부제가 “전원생활자가 사는 집”이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 그러나 당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던 주택문제는 제 1차 세계대전 중의 경기 호황으로 인해 도시에 집중되던 사람들의 주택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 그리고 이를 위한 도시계획은 어떠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 속에서의 ‘주택’이었으며 이러한 주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생활’에 대해서는 생활을 구미화 (서양화 )하는 것 외에는 논해지지 않았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곤이 ‘주택과 생활’에 착안한 것은 분명 당시 건축학에서 한 발 앞선 일이었다 . 뿐만 아니라 곤은 1923년 간토대진재의 폐허 속에서 스스로 가설주택을 짓는 판잣집 거주자들의 살림에 주목하여 그 모습을 스케치에 담았다 . 그리고 바로 ‘판잣집 장식사’라는 설계사무소를 개설하여 당시까지 관찰 , 스케치 , 이해 , 해석하던 입장에서 한 발 더 들어가 복구 중인 도쿄 거리의 모습을 구성하던 상점과 주택의 실제 설계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 이를테면 연구에서 실천으로 전환하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 특히 도쿄제국대학 야나기시마 세틀먼트 ( 東京帝国大学柳島セツルメント ) 건물의 설계는 곤의 연구방법론과 실천론이 도쿄제국대학 관련시설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 이후 곤은 1925년에 ‘긴자거리 풍속 ( 銀座街風俗 )’ 조사를 실시 , 1927년에 ‘조사 (고현학 ) 전람회 ( しらべもの ( 考現学 ) 展覧会 )’를 개최하였고 1930년에는 요시다 겐키치 ( 吉田謙吉 )와 함께 『모더놀로지 (고현학 )』를 출판하여 간토대진재 복구 이후의 도쿄에서 나타난 새로운 ‘보통’을 추구하였다 . 그리고 스케치뿐만 아니라 공을 들여 자료를 수집하는 일 자체가 새로운 사회관찰법이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 하지만 고현학을 대표할 수 있는 사회관찰의 틀을 제시하거나 지속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작업을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 곤은 1922년에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한반도에서 민속조사를 수행하였고 그 성과는 1924년에 『조선부락조사특별보고 제 1책 민가 ( 朝鮮部落調査特別報告 第一冊民家 )』로 간행되었는데 이는 ‘보통을 추구’하는 것이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국가에 ‘도움’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공교롭게도 보여주고 있었다 . 곤은 1934년부터 41년까지 농림성 적설지방 농촌경제조사소에 의한 적설지방 농가가옥조사와 동윤회 ( 同潤会 )에 의한 도호쿠 ( 東北 )지방 농산어촌 주택개선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 국가와 연결된 이러한 일련의 민가연구 작업은 단순히 보통 생활의 성립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해석론뿐만 아니라 ‘실학’으로서 ‘보통 주택’을 ‘개선’과 ‘선도’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는데 특징이 있다 . 다이쇼 시대 생활개선운동의 연장이 군국주의의 침투로 인해 모든 지적 활동을 ‘개선’과 ‘선도’에 수렴시켜갔던 시대 추세에 곤 또한 휩쓸려갔다고 할 수 있겠다 .

2. 니시야마 우조의 ‘주거방식 조사’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 필자가 아직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시절에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의 후지모리 데루노부 ( 藤森照信 ) 교수와 함께 베트남 하노이의 민가조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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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방식 조사와 ‘건축계획학’(오쓰키 )

그 때 후지모리 교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 건축학 중 건축계획학을 창시한 한 사람으로 꼽히는 교토대 ( 京都大 ) 명예교수 니시야마 우조 ( 西山夘三 )는 일찍부터 곤 와지로를 동경하였고 그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다양한 조사를 수행하면서 여러 스케치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 듣고 보니 니시야마 우조의 저서에는 직접 손으로 그린 많은 스케치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배경에 곤 와지로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 니시야마 우조는 1941년에 국가가 설치한 주택영단 연구부에 소속되어 매년 갱신되는 주택영단이 건설해야 할 표준평면도를 위한 기초연구를 수행하였다 . 이 표준평면도 책정이 태평양전쟁 종전 후의 공영주택표준설계와 공단이 만든 ‘nLDK’라는 방 배치로 이어졌다 . 이를 전후하여 니시야마가 실시한 대량의 ‘주거방식 조사’를 통해 아무리 협소한 주택에서라도 서민은 먹는 공간과 자는 공간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음이 밝혀졌고 이 ‘식침 ( 食寝 )분리’를 표준평면도 작성을 위한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당시 주택영단에서는 이 ‘식침분리’론이 약간의 예외를 빼면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없었다 . 하지만 전후 공영주택과 공적주택 (국철사택 , 공무원주택 , 전전공사사택 등 )의 평면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건축계획학이란 현실사회 속에서 평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생활양식이나 습성과 같은 것을 이해하고 그 안에 숨겨진 법칙이나 인과관계를 발견하여 이를 새로운 건축설계에 피드백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니시야마 우조가 실시한 ‘주거방식 조사’는 당시까지 건축관계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서민의 보통 생활을 대량조사를 통해 밝혀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 그 누구라도 ‘듣고 보니 그러네’라고 생각할 만한 ‘보통’ 생활양식을 실학으로서의 건축설계에 반영하고자 하는 자세는 지극히 건축계획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3. 요시타케 야스미의 ‘사용방식 조사’

상술한 바와 같이 곤 와지로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니시야마 우조는 주거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건축설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생활 속의 보통’을 추구하기 위한 ‘주거방식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실학으로서의 건축계획에 새로운 길을 열어나갔다 . 한편 패전 직후 도쿄에서는 도쿄대 ( 東京大 ) 요시타케 야스미가 건축물의 ‘보통 사용법’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설계의 기초를 다지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 이는 화장실과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줄을 서는지 , 또 학교에서는 어떻게 신발을 갈아신는지 등과 같은 언뜻 보기에 누구나가 평범하게 행하고 있는 동작을 과학적으로 알아보고 이에 대한 실태조사를 거쳐 가능한 수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나가는 연구방식이었다 . 전후 시설계획학의 기초를 다진 요시타케 연구실에서는 이러한 조사를 ‘사용방식 조사’라 칭하였다 . 니시야마 연구실의 ‘주거방식 조사’와 요시타케 연구실의 ‘사용방식 조사 .’ 이러한 명칭의 차이는

그들이 눈 앞의 현상을 어떤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 ‘주거방식 조사’의 주어는 거주자이며 인간의 주체성에 착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즉 , 니시야마의 시선은 보다 사회과학적이었다 . 한편 ‘사용방식 조사’의 주어는 건물이며 사람은 건물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 요시타케의 시선은 보다 자연과학적이었다 . 이후의 니시야마 연구실의 주거공간 연구는 도시계획과 지역만들기 연구로 발전하여 사람이 주인공이자

생활무대인 환경 총체를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라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 한편 , 요시타케 연구실은 주택 , 병원 , 학교 , 박물관 , 사무실 등과 같은 건물들의 종류별 사용방식의 특성을 통한 각종 건축설계기준의 설정에 보다 무게를 둔 연구 스타일이 추구되었다 . 이를 뒤집어서 보면 전후 공급부족에 시달리던 각종 건축물들을 대량생산하는데 필수적인 건설보조금을 위한 각종 기준 마련작업이 도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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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83

건축계획연구실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4. ‘보통’을 해명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의 건축학은 싫든 좋든 실학으로서의 측면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다 .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생활’을 다양한 수법을 통해 밝혀내는 일 자체에 흥미를 갖고 사물과 현상에 대한 해석방식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는 지극히 지적인 활동을 건축학 속에서 전개한 곤 와지로의 존재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그는 간토대진재 이후의 판잣집 장식사와 전시 중의 주택개선운동과 같은 활동을 통해 때론 실학으로서 ‘보통에 관한 연구’를 원용하면서 시대 요청에 부응했다고 생각한다 . 또 곤을 사숙한 니시야마 우조가 일본 서쪽지방의 건축계획학을 대표하며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주거방식 조사’를 널리 알렸다 . 이와 달리 국가와 손을 잡고 전후 상당수 부족했을 것으로 보이는 각종 시설물들을 계획하기 위해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사용방식 조사’를 정착시킨 일본 동쪽지방의 건축계획학을 요시타케 야스미가 체계화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 이렇게 다이쇼 시대에서부터 전후 고도경제성장기에 걸쳐 전개된 일본의 건축계획학에서 ‘보통’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 그리고 ‘이해되고 해석된 보통’이 어떻게 가공·이용되었는지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함께 변화해왔지만 , 건축학의 실학적인 측면에서 발생하는 국가적인 요청 , 사회적인 요청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 오히려 국가 ,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고자 했기 때문에 ‘보통’을 명시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동기가 건축학 내부에 배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 그럼 현재 건축학에서 ‘보통’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그다지 ‘보통 생활’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 . 이는 아마도 ‘표준적’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보통’이라는 개념이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겨우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들 사회에는 ‘보통 생활’이 보통의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남편의 직장 , 거주지 , 가족구성 등만 알아도 대체로 어떤 가족인지 상당한 확률로서 추정해볼 수 있었다 . 하지만 가족의 모습이 다양화되고 있는 지금 직장 , 거주지 , 가족구성만으로는 좀처럼 그 사람의 생활방식에 도달하기 어려운 그런 세상이 된 것 같다 . 이는 건축을 계획하거나 설계하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다 . 이미 보통 가족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속에서 누가 살지 알 수 없는 집합주택의 공간배치를 생각해내야만 하는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 하지만 흥미롭게도 고도경제성장기 때 만들어진 집합주택의 표준적 형태는 지금도 건재하다 . 주택의 한 가운데에 현관문이 설치되고 속복도 ( 中廊下 )를 거쳐 남쪽 발코니에 접한 거실에 도달하는 기본형태를 없애버리면 대부분의 맨션은 잘 안 팔린다고 한다 . 유통되는 주택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분명히 ‘(표준적 행동으로서의 ) 보통’은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 그러나 일본인에겐 당연한 속복도가 한국 , 중국 , 대만의 집합주택계획에서는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다 .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왜 일본인은 속복도를 선호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 또 , 일본인은 어째서 남향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 다타미 ( 畳 ) 방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점점 사라지게 되었는지 , 일본인은 왜 현관을 버릴 수 없었는지와 같은 ‘보통’의 것과 관련된 다양한 의문들이 남게 된다 .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들은 고층주택을 선호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어째서 저층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답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또 지금은 병원에서 죽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지만 , 약 20년 전의 고층집합주택에서는 승강기 설계 시 관을 옮길 수 있도록 승강기 박스 뒤에 해치를 만들어 여차하면 관도 들어갈 수 있도록 고안했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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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방식 조사와 ‘건축계획학’(오쓰키 )

하지만 점차 집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혹은 병원에서 사망해도 유해를 일단 집으로 옮기는 일이 사라지게 되어 언제부터인가 승강기 박스의 해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 그러나 현재 일본 정부는 병원이 아닌 자택에서 사망하도록 시책을 마련 중에 있다 . 그렇다면 다시 집에서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시스템이 정비되었을 때 승강기 해치 문제는 재연될 것인가 ? 이처럼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당연한 현상들은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어서 항시

새로운 대응법을 건축설계에 요구하는 일이 많다 . 이 때 당연한 것을 잊고 설계하게 되면 거주자가 그 불편을 감당해야만 한다 . 예전에 도쿄의 전통적인 지역을 재개발한 고층주택에서 오봉 ( お盆 ) 명절 때 무카에비 ( 迎え火 )와 오쿠리비 ( 送り火 ), 즉 조상을 맞아들이고 다시 보내드리기 위해 피우는 불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 적이 있다 . 그 지역은 원래 나가야 ( 長屋 )라는 밀집된 공동주택과 골목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나가야의 주민들은 오봉이 되면 꼭 나가야 앞 골목에서 불을 피워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였다 . 일반적인 고층주택설계자는 이러한 풍습을 무시한다 . 그 결과 주민들은 베란다에서 조상을 맞아들이고 다시 돌려보내기 위한 불 , 즉 무카에비와 오쿠리비를 피우기 시작하여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 그렇다면 보통의 집합주택설계가 올바른 것인가 ? 아니면 주민들이 그동안 당연히 해오던 행위가 올바른 것인가 ? 아마 둘 다 틀리지 않을 것이다 . 따라서 항상 ‘보통’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의식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건축계획은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게 될 것이다 . 일본건축학회에서는 동일본대진재 ( 東日本大震災 )의 복구와 관련하여 어떠한 상황이 복구라 불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작년 즈음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 그 중 ‘일상생활의 회복이 복구’라는 의견이 새로이 대두되었다 . 그렇다면 일상성이란 무엇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 이러한 의문에 답하고자 건축계획 연구자들은 오늘도 또 ‘주거방식 조사’와 ‘사용방식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 보통 , 당연이라는 것에 물음을 던지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건축학의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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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85

한국 살림살이 연구의 전개 정수진 ( 丁秀珍 )

동국대학교

일본민속학회가 내건 2014년 국제심포지엄의 주제는 「당연한 것을 묻다 !」이다 . 이에 맞춰 본 토론자에게 맡겨진 과제는 ‘韓国のサルリムサリ研究’의 전개 양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 여기서는 그 소개와 함께 본 심포지엄에서 논의된 내용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는 것으로 토론을 갈음하겠다 . 한국어로 ‘살림살이’란 ‘숟가락 , 밥그릇 , 이불 따위의 살림에 쓰는 세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살림을

차려서 사는 일’ 자체를 가리킨다 . 나는 후자의 의미로 ‘살림살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하는바 , 이는 이 연구가 생활재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한국의 살림살이 연구는 사회학 , 인류학 , 건축학 , 가정학 등에서 각 학문 분과의 고유한 관심에 따라 진행되어 왔으며 , 그 학문적 성과도 많이 축적되어 있는 상황이다 . 사회학 분야만을 대상으로 보자면 , 1990년대 초 프랑스의 마페졸리 (M. Maffesoli)를 위시한 서구의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소개된 후 , 일상생활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상정하고 천착하는 일련의 학자들이 등장했다 . 물론 이미 1960년대부터 국가 차원의 ‘인구총조사’에 참여해서 계량적인 방법으로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세간을 조사하는 사회학적 작업은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 그러나 일상생활이라는 개념과 그 구체적인 방법론 및 인식론을 표방하면서 일상생활을 독자적인 연구 영역으로 구축한 연구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을 연구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민속학에서는 , 그 연구 영역이 과거

혹은 산간벽촌의 민속에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정작 현재 민중들의 일상적 삶을 그 연구 대상에서 제외시켜 왔다 . 그런 점에서 2002년 이래 한국인의 살림살이에 대한 조사를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국립민속박물관 (이하 민속박물관 )의 아카이브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 2002년 민속박물관은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과 공동으로 한일 양국의 ‘생활문화교류전’을 기획한 바 있는데 , 당시 소개된 사토 코오지 ( 佐藤浩司 )의 ‘생활재생태학’이라는 용어와 방법론이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 민속박물관의 생활재 조사는 이른바 ‘물건은 말하며 읽혀질 수 있다’는 명제 하에 물질문화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

千鎭基 현 박물관장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대’를 맞이하여 생산 ·소비되고 있는 수만 가지의 생활재들을 수집 ·기록하는 작업은 ‘대상중심적 (object-oriented)’이기보다는 ‘개념중심적 (concept-oriented)’이어야 하며 , “어느 정도의 물건이 가정에 있고 , 그것이 과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가 , 어떤가 ? 거기에 숨어 있는 인간과 물건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 물건이 놓여 있는 가정경관 ( 家庭景觀 )은 어떤 것인가 ?” ,1 즉 그 물건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민속박물관에서는 반곡리 , 울산 , 아현동 , 정릉 등 4개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이미 발간했으며 , 현재도 민박의 정규 작업인 특정 지역의 민속 조사와 통합된 형태로 생활재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 구체적인 조사 방식은 이러하다 . 우선 한 개 도의 두 개 마을을 선정하고 , 조사자 두 명 , 사진작가 한 명 등 세 명이 한 팀을 이뤄 8개월 간 거주하면서 마을지를 작성한다 . 통상 3~4개월이 지나면 그 마을에서 대표성을 띤 한 가정을 선발하고 조사자 2명을 추가 파견한 후 그 집안의 생활재를 되도록 총체적인 차원에서 조사 ·기록한다 . 그 가정의 생활재 중 기증된 물건은 전시에 활용하고 ,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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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살림살이 연구의 전개(丁)

조사한 가정에 대해 15~20년을 주기로 재조사를 수행함으로써 생활재의 변화상도 포착하겠다는 것이 그 기본 구상이다 . 현 박물관장은 이렇게 모인 자료들을 토대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 아직은 생활재의 기록 작업에 더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 문제는 , 이 자료들을 토대로 유의미한 연구가 진행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한가 ? 하는

것이며 , 과연 축적된 자료들을 통해 그 사물의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 나아가 그것이 놓인 문화적 맥락의 복원과 이해가 과연 가능한지 ? 등일 것이다 . 요컨대 생활재를 한국어의 ‘살림살이’라는 말처럼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접근할 경우 , 이 조사 작업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대상화하고 해석할 것이냐 ? 하는 고민을 여전히 남겨놓고 있다 .‘살림살이’에 대한 조사의 관점과 해석의 문제는 본 심포지엄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 이미 모두 ( 冒頭 )에서 지적했듯이 본 심포지엄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고 ,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묻고 있다 . 이 물음은 이제까지 민속학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일상을 본격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마주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질문한 적 없고 , 게다가 인식의 틀에 잡히기도 어렵고 언어화하기도 어려운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마페졸리 (M. Maffesoli)가 ‘here and now’를 외치면서 했던 말처럼 , 가장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사회적 실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타문화에 소개하고 , 타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그 차이와 유사성을 밝히는

일은 의미가 있다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 타문화와의 비교는 우리의 일상을 분별해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자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긴요한 과제는 , 우리의 일상을 주목하는 일이 기존 민속학에 어떤 비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 기존의 방법론과 차별화된 방법론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지 ? 또한 그 방법론이 민속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 등의 질문들을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일상생활의 사회학’과 관련해서 한국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 ‘일상생활의 사회학’은 새로운 연구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특수한 전공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 오히려 그것은 ‘사회학적 시각’의 새로운 정의이며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2 이 새로운 관점은 두 가지 수준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가령 언어라는 체계로서의 현실이 있는 반면 , 그것을 사용하는 문맥적 현실이 있다는 것이다 . 전자가 이론적 현실이라면 , 후자는 일상적 실천이 이뤄지는 구체적인 상황들이다 .3 후자에 속하는 우리의 일상은 이미 도처에 편재하지만 “비가시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 일상적 실천이 비가시적인 이유는 그 자체의 역설 , 즉 “보이지만 주목되지 않”기 때문이다 . 또한 일상적 실천이 이론적 합리성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비논리적 논리 (non-logical logics)”를 따라 이뤄지기 때문이다 . 일상적 실천은 어떤 시점에 우연히 주어진 것에 의해 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국지적이고 유동적이며 , “상황적인 전술”이다 . 일상적 실천은 어떤 거시적인 비전 (vision)과는 무관한 “반복적인 파편”으로 사회생활 전체에 산재해 있으며 , “항상 반복되지만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다 .” 일상적 실천을 이끄는 합리성이란 일시적인 “기회논리”에 불과하며 , 그 실천의 목적 또한 “성취의 순간에 소진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며 관점인 이유는 , 이렇듯 기존 사회학의 인식론에 매우 논쟁적인 시사점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일상생활의 사회학’에 대해서도 한 가지 의문점은 존재한다 . 께이로 (J. M. Queiroz)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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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87

일상이 비가시적이라 해서 그 속에 어떤 숨겨진 미스테리가 있다거나 외양 너머 어떤 깊은 것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론적 현실 혹은 거시적 비전과 무관한 방식으로 일상을 정의하는 데 그친다면 , 이 또한 일상에 지나치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언어의 체계와 언어의 사용이 다르듯이 이론적 현실과 일상은 두 개의 현실로 구분될 필요가 있지만 , 그렇다고 그 두 개의 현실이 무관한 채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본 심포지엄에서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상정한 까닭도 일상적 삶과 그 실천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상정한다고 해서 ,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6 전승되는 것으로 정의되어 온 기존의 민속 개념과 합치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 이를테면 , 아파두라이 (A. Appadurai)는 글로벌 시대로 일컬어지는 오늘날 개인의 일상적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주목했다 . 그는 전자매체와 대량이주가 일상화된 오늘의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개인의 삶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 (habitus)가 되기보다는 , 의식적인 선택과 합법화 , 그리고 표상의 투기장”7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 즉 , 항상적인 유동과 이동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교적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되었던 문화 재생산은 이제 지극히 복잡하고도 불안정한 것이 되었고 ,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매우 의식적이고도 의도적으로 성찰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 물론 지역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 ? 없다면 ,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상정될 수 있을까 ? 관견에는 , 이제 우리의 현재적 일상이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 , 의식조차 어려운 것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진동 ( 振動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기존 민속학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 , 나아가 현재적 일상을 ‘일상생활의 정치성’ 차원에서 주목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

1  千鎭基 , 「민속박물관과 현대생활자료」 , 『한국민속학』 45, 한국민속학회 , 300쪽 .

2  J. M. Queiroz, 金文謙 역 , 「일상생활의 사회학 – 하나의 새로운 관점」(“The sociology of everyday life: a new perspective” , Current Sociology, vol.37, no.1, spring, 1989), 朴在煥 , 일상성 ·일상생활연구회 편 , 『일상생활의 사회학』 , 한울아카데미 , 1995, 97쪽 .

3  위의 글 , 100쪽 .

4  위의 책 , 99~103쪽 .

5  위의 책 , 99쪽 .

6  王傑文 , 「北京市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と生活世界の變容」, 『「当たり前」を問う - 日中韓 · 高層集合住宅の暮らし方とその生活世界』, 일본민속학회 2014년 국제심포지엄 발표집 , 2014, 49쪽 .

7  A. Appadurai, 車元鉉 외 역 , 『고삐 풀린 현대성』(Modernity at large : Cultural Dimensions of Globalization,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1996), 현실문화연구 , 2004, 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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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공민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문화과학1

가오 빙중 ( 高丙中 )

북경대학

( 번역 : 진잉지 )

민속 부흥은 중국에서 일어난 지난 30여 년간의 문화적 대사건이다 . ‘보통사람들 ( 普通公民 )’이

자기들의 생활 속에서 전통 민속의 활력을 회복할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는 5·4운동 이래 민속을 방기할 수밖에 없었던 추세와 크게 다르다 . 중국의 현대 민속학 역시 5·4운동 이후의 민속학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 그 동안 20 수년의 변화를 통해 중국민속학은 이미 이론적인 탈바꿈과 연구방법의 쇄신을 이루었고 , 그것이 속한 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적극적으로 설정하며 공민의 일상 생활문화 연구의 학문으로서 발전해 가고 있다 . 그러므로 예전의 문학적 , 역사적 문헌에 의한 유류물 ( 遺留物 ) 연구와 비교할 때 , 중국민속학은 이미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중국민속학에서 볼 수 있는 현재의 변화는 사실 이와모토 미치야 ( 岩本通彌 )가 행한 일본민속학의 성찰과 서로 호응한다 . 「‘민속’을 대상으로 하니까 민속학인가 ?」 라는 중요한 논문에서 그가 언급한 것처럼 , 일본민속학은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國男 )가 그 기초를 마련할 때에는 민속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 오히려 민속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 하지만 이러한 성격 규정과 자리매김이 훗날 변경되어 민속학은 곧 민속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버렸다 .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민속학은 각종의 사회 변화 문제와 이론적 문제에 봉착하고 있으며 , 현재의 일상생활에 관한 학문으로서 새롭게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중국과 일본의 민속학은 큰 추세에서는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학문의 경로 면에서는 각자 자기의 특징이 있다 . 예컨대 민속의 부흥과 공민의 문화 권리의 획득은 중국민속학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민속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겠다 .

  1. ‘새로운 역정(驛程)’ 2.0: 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

중징원 ( 鍾敬文 ) 선생은 1987년에 자신의 민속학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모아 새로운 역정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바 있다 .3 이때가 바로 중국민속학의 한 전환점으로 그 제명 ( 題名 ) 자체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 중국민속학 연구가 문화대혁명에 의한 중단 시기를 거쳐 부흥의 길을 걸어온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 중국민속학에 대한 그의 새로운 기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새로운 역정’이란 객관적으로 민속학이 이미 걸어온 노정 (특히 근년에 걸어온 길 )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 또한 주관적이고 열정적으로 걸어가야 할 노정 곧 ‘새로운 길’을 가자고 주창한 것이기도 했다 . 중징원 선생의 이 지적은 훗날 ‘중국민속학파를 건설하자’는 명확한 제창으로 되풀이되었다 .4 이러한 ‘새로운 역정’이 막 시작될 무렵 나는 1988년에 베이징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중징원 선생의

제자 장쯔천 ( 張紫晨 ) 선생이 지도하는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 그리고 두 선생님의 가르침 아래 1991년 민속문화와 민속생활 : 민속학의 연구 대상과 학술 방향 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5 이 논문은 중징원 선생의 ‘새로운 역정’에 대한 이론적인 서술로 , 한편으로 ‘민’과 ‘속’ 개념의 변천 과정을 통해 민속학의 학술사를 서술하였고 , 다른 한편으로 민속학은 어떤 학문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증한 것이었다 . 비록 학사의 서술이 논문의 큰 폭을 차지하긴 했지만 , 나의 진정한 뜻은 일종의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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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89

민속학을 제창하는 데 있었다 . 이후 중국민속학은 앞으로 나아가며 때때로 자신의 걸음걸이를 성찰하면서 학사에 관한 논저들을 연달아 출간했다 . 곧 장쯔천 선생과 왕원바오 ( 王文寶 ) 선생이 각각 낸 중국민속학 역사 6를 비롯하여 자오스위 ( 趙世瑜 )의 박사학위 논문 눈길을 아래로 향하는 혁명 ,7 또 리우티에리앙 ( 劉鐵梁 )이 1998년에 발표한 중국민속학 발전의 몇 가지 단계 등이다 . 이 90년대의 논저들은 학술사와 관련된 글들을 시기 별 , 단계 별로 나눠 고대부터 지금까지 중국민속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 이 시기의 학술사 회고를 거칠게 정리하면 , 주로 당시의 민속학은 스스로의 역사적 경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 또 학문 영역으로서도 누적되어 온 기본 문헌이 있고 , 주요 인물과 연구 사례 역시 이미 현재의 연구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 , 중국민속학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명하자는 것이었다 . 그러나 리우티에리앙의 논문은 비록 현대 중국민속학의 시기 구분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 결론 부분에서는 내 박사학위 논문의 제창과 호응하고 있다 . 그리고 중국민속학은 지금 “진정한 발전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보다 낙관적으로 보았다 .8 이윽고 ‘새로운 세기’에 진입하자 사람들은 비로소 새로운 안목으로 중국민속학 발전의 실적을 보게 되었다 . 이 시기에 학자들은 한편으로 민속학의 구체적인 진보를 긍정하고 ,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문제를 극복하고 중국민속학을 보다 훌륭한 학문으로 승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탐구했다 .9 그리하여 몇 가지 민속학의 개척적인 실증 연구의 성과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 그것들이 아직 중국민속학을 대표하는 새로운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

20년이라는 시간은 한 세대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성취를 완성하는 시간이다 . 곧 ‘새로운 역정’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나자 민속학자들은 잇따라 그 새로운 노정에 대해 평가했고 , 중국민속학의 여러 진보에 대해 ‘획기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특히 2008년은 중국 사회 , 중국 사람들의 심리 상태 , 그리고 중국 학문에 있어 하나의 지표가 되는 해로 , 우리는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 민속학계에서도 재빨리 일련의 학술 총괄적인 글들이 나와 , 중국민속학이 거둔 위대한 성과에 대해 역사적인 시각에서 충분히 평가해 주었다 .10 나는 2008년에 발표한 「중국민속학 30년 발전 과정」 에서 중국민속학의 두 가지 핵심적 변화의 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 곧 “지식 생산의 자리매김과 학문의 성격에서 볼 때 , 중국민속학은 연구자들의 학문 배경 , 연구 목적 , 연구 방법 등에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뒤섞인 ‘민속연구’로부터 전문화 되어 왔다 . 동시에 중국의 민속학은 문학과 역사에 비중을 뒀던 인문학으로부터 사회과학으로 탈바꿈을 했다 .11 이 두 가지의 변화와 그것들이 국가의 학문 체제 내에서 정착했다는 사실은 중국이 이미 스스로의 민속학을 성립시켰음을 증명하고 있다 . 그리고 리우시아오춘 ( 劉曉春 )의 논문 역시 학문적 패러다임의 성공적인 변화를 통해 중국민속학이 이미 하나의 ‘새로운 역정’을 완성했음을 간접적으로 지지해줬다 . 여기에 이르러 중국민속학의 역사적인 총괄은 일단락이 된 것 같다 . 그러나 중징원 선생의 ‘새로운 역정’의 이중적 함의 , 곧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비교하면 우리의 논의에는 아직 중요한 게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

2013년에 후샤오후이 ( 戶曉輝 ), 뤼웨이 ( 呂微 ), 와한청옌 ( 韓成豔 )은 민속연구 라는 잡지에서 , 민속학의 연구 대상인 ‘민’의 개념이 특수한 그룹으로부터 보편적인 공민으로 변화했다고 논했다 .12 그들은 민속학 동료들의 연구 경험 가운데서 이 변화의 흔적을 찾아냈는데 ,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러한 변화의 필연성과 중국민속학이 그로부터 도달해야 할 장래의 전망을 이론적으로 논증했다는 점이다 . ‘민’이 공민으로 인정되면 , 그 ‘민’은 현대 국가가 배척하거나 혹은 교화해야 할 이분자 ( 異分子 )가 아니라 ,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유기적 분자 (그람시가 말하는 )가 되며 , 민속학 역시 문인 호사가들의 진기 ( 珍奇 ) 탐구를 위한 학문에서 현대 국가의 경세제민을 위한 기초과학으로 전환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 ‘공민의 신분’을 가진 ‘민’이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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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가오)

현대 국가의 문화의 뿌리이자 권력의 원천이고 , 현대 국가의 성립은 바로 ‘민’이 공민으로 성립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이제 중국의 민속학은 광대한 신천지로 접어들었다 . 그리하여 또 다른 ‘새로운 역정’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중징원 선생의 명제와 구별하기 위해 나는 이것을 ‘중국민속학의 신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13

2. 중국민속학의 정성 평가: 대상과 방법

중국민속학의 평가에 대해 우리는 양적인 평가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 민속 연구 논저의 수량을 통계하지 않았고 , 민속학 논저 혹은 연구자들의 피인용 지수를 통계하지도 않았다 . 우리가 택한 것은 성질적인 평가 방법이며 , 주로 지난 30여 년간의 중요한 변화를 주목했다 .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중요한 변화’란 민속학 내부의 학술적인 변화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 특히 기본적이고 관건적인 것은 민속학 외부에 존재하는 민속 현상의 사회적 변화 , 그리고 이 민속학 내 ․외부 변화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관계다 . 민속학의 전통적 인식론에서 보면 , 민속학의 지식집단은 인식의 주체이며 민속 현상은 인식의 객체다 . 그러나 현대 중국민속학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명확한 이분법적 인식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개혁 개방 이래 중국은 민속 부흥의 과정을 겪었다 .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민속 현상은 개혁 개방 초기부터 바로 그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 점차 회복되고 생성된 것이다 . 그리고 이런 회복과 생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룩한 ‘부흥’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 공공부문 (정부나 미디어 , 지식분자 집단 )에서 끊임없이 개입한 과정이었다 . 그중에서 민속학자들 역시 전문가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 시골의 지역 사회의 레벨이 되었건 전국적인 레벨이 되었건 민속학자들은 모두 다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민속의 부흥에 참여했다 . 오늘의 민속 부흥 상태나 국면은 의심할 여지없이 민속학자들의 참여에 의해 육성된 것이다 . 가령 허베이 ( 河北 ) 성 판좡 ( 範莊 )의 룽파이회 ( 龍牌會 )는 미신으로 찍혀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던 묘회 ( 廟會 )였는데 , 지금은 당당한 용 문화 박물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 ( 省 ) 급 무형문화유산 非物質文化遺産의 대표까지 되었다 . 민속학자들은 이 묘회에 1991년부터 참가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해 왔다 . 보기를 하나 더 들면 , 중국의 주요 대도시들은 1990년대 초부터 불꽃이나 폭죽을 금지하는 조례를 잇따라 공포했다 .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새로운 조례를 만들어 시민들로 하여금 춘절 ( 春節 ) 기간에 규정에 따라 폭죽을 터뜨리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 이러한 법의 변화 역시 민속학자들이 주장한 ‘설 쇠는 분위기’의 향유나 전통 명절의 관념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그런 까닭에 , 중국민속학에 대한 평가는 그 대상을 학문 내부로 한정할 것인가 , 아니면 그것을 시대 속에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따라 두 가지 다른 방법이 존재하며 , 그 결과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 평가 대상과 평가 방법에 대한 선택은 내재적으로 관련이 있다 . 민속의 ‘민’과 민속학자 , 민속과

민속학의 관계 , 그리고 민속 (부흥 )과 시대 (변천 ), 민속의 ‘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선 두 가지 이념에 의한 서로 다른 인식이 존재할 수 있다 . 하나는 반영론 ( 反映論 )이고 , 다른 하나는 공생론 ( 共生論 )이다 . 우선 반영론은 ,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웠던 유물론적 철학으로 상부구조는 경제기초의 반영이며 사회심리는 사회현실을 반영한다는 논리다 . 반영론의 입장에서 보면 , 시대 (대사회 , 大社會 )가 변하면 민속도 반드시 변한다 . 사회가 민속을 결정하고 , 민속은 결정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 물론 이러한 철학은 우리에게 쓸 만한 방법론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 반면 공생론의 입장에서 보면 , 앞서 언급한 네 쌍의 개념 (민속의 민과 민속학자 , 민속과 민속학 , 민속 <부흥 >과 시대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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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91

민속의 민과 정부의 관계 )이 지시하는 실체는 다 주체가 될 수 있으며 , 또 모두 다 자발적이기도 하여 , 그 어떤 결과든 상호작용에 의한 공동의 결과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 따라서 단지 시대가 변화하기 때문에 민속도 변화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 바로 민속과 민속의 주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 시대도 변화한다고 말해야 타당하다 . 여기서 말하는 민속 , 민속의 ‘민’, 민속학자 , 정부 등은 모두 수동적 ,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다 . 반영론적인 인식론은 우리에게 일방통행적인 한 가지 방향의 관계와 결과만을 보여주지만 , 공생론적인

실천은 우리에게 동기 부여와 함께 복잡한 상호작용의 역동적인 과정을 보도록 이끌어준다 . 만약 각자가 모두 주체이자 적극적인 실천자라면 , 사회에는 그들의 요구와 추구에 의해 동력과 에너지가 주입되고 , 또한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각자가 차지하는 지분의 결과 (성과 )가 산출된다 .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의 목표나 원대한 목표 (주관적인 역사의식 )를 갖고 있지만 , 역사의 실제 방향은 각각에 의한 경합의 산물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에 지나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속 , 민속의 민 , 민속학자 , 민속학이라는 학문을 각각의 존재로 취급해야 한다 (그것들은 각자 다 주체다 ).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관련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들은 동시에 공생의 주체이자 , 그 밖의 주체들과 함께 존재하는 동반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

3. 중국민속학의 이론 전환

중국민속학은 1990년 이후에야 겨우 독자적인 이론 영역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 그 어떤 지식 활동도

모두 다 이론적 근거를 필요로 하는데 , 오로지 지식 활동이 전문적인 학문 영역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자체 이론을 생산할 필요가 생기며 , 또 그 조건이 갖춰지는 법이다 . 그것은 , 인류가 사물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면서부터 자각적으로 자신의 도구를 만들게 되는바 , 그러한 예가 잘 보여주는 진보와 같은 것이다 . 이론의 생산이 성행하고 , 또 그것이 학문 안에서 특정한 영역을 형성함으로써 민속학은 진정으로 하나의 ‘학’으로 확립될 수 있을 것이며 , 결과적으로 학문적 시민권의 승인과 존중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1991년에 완성한 민속문화와 민속생활 은 학문과 시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민속학의 이론

탐구서다 . 이 책이 중국민속학에서 갖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에 있기보다는 , 중국민속학이 이론을 ‘사용하는 (가져다 쓰는 )’ 것에서 이론을 ‘만드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분업을 촉진한 데 있다 . 이와 관련하여 뤼웨이 ( 呂微 )가 2000년에 발표한 「현대성 논쟁 속의 민간문학」 , 2003년의 「‘내재적’이면서 ‘외재적’인 민간문학」 , 2006년의 「민간문학 : 민속학 연구에서의 ‘성질세계’와 ‘의미세계’ , 그리고 ‘생활 세계’」 에서 역설한 것은 바로 보편주의적 논리로서 민속학 (민간문학 )을 독립 학문영역으로 구축하기 위한 내재적인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 아울러 중국민속학의 역사 문헌 속에서 그 뿌리 혹은 씨앗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14 그리고 후시아오후이 ( 戶曉輝 )가 2004년에 출간한 현대성과 민간문학 , 2010년의 사랑과 자유의 생활세계로의 귀환 15에 이르러 중국민속학은 자체의 이론 영역을 진정하게 형성하게 되었다고 봐도 좋겠다 . 왜냐하면 이 책들은 민속학의 철학적 기반과 이론적 과제에 대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 또한 민속학의 방향성과 체계성에서 볼 때 , 서양 이론을 중국화하고 철학의 민속화를 최신 , 최고의 수준에서 추구했기 때문이다 . 혹은 중국민속학이 자체 이론 영역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체 이론가를 산출하고 있다고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뤼웨이과 후시아오후이는 둘 다 중국민속학의 전업적 연구생활 속에서 성장하여 민속학 이론가가 되었다 . 민속학은 톰스가 지어낸 folk-lore라는 말에서 시작되는데 , 그의 이 우연한 발명이 현대 학문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서양의 사상과 역사 전체에서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겠다 . 뤼웨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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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가오)

후시아오후이는 장년기 때부터 서양 철학의 밑바탕에서 민속학의 기본적인 이론 문제를 탐구하려고 뜻을 세우고 , 서양철학의 고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 특히 후시아오후이의 경우 , 독일어부터 배우기로 결심하고 나아가 라틴어까지 습득하여 철학과 민속학의 독일어 문헌을 번역 , 인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다다랐다 . 중국 민속학계에는 학술 탐구를 위해선 몇 년이 걸리건 , 또 그 성과가 있건 없건 별로 개의치 않는 이들이 있는데 , 이는 민속학이 순수하게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임을 잘 보여준다 . 비록 실용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하는 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 누군가 정말로 그것을 향해 청춘을 바치는 경우가 있다 . 만일 어떤 학문영역에 정말로 이런 사람이 어느 정도 있다면 그런 학문은 독립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영역으로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즉 그 학문이 좋아서 하는 이 , 코스트를 따지지 않고 앞장서 탐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볼 때 , 중국민속학은 이미 지식이 넘쳐나는 영역이 되었다고 보인다 .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민속학계에 적지 않기 때문이다 . 학문영역에는 자체의 학풍이 존재하며 , 그것은 구체적인 인격으로 학지 ( 學知 )를 추구하는 뜻을 대표한다 . 중국민속학에는 이미 이런 학술적인 인격이 존재한다 . 다음은 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에 대해 언급하겠거니와 , 주로 몇 가지 측면에서 그것이 왜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보겠다 . 중국민속학의 이론은 학문이론으로서 식별 가능한 영역을 형성했다 . 영역의 형성은 물론 실제의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론적인 방향 전환이다 . 역사적 유류물 ( 遺留物 ) 연구로부터 일상생활의 문화 연구로 , 바로 이게 우리 많은 동료들이 이 몇 년 사이 줄곧 노력하고 추구해온 변화다 . 여기서 생활세계와 일상생활 , 이 두 가지 개념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 왜냐하면 민속은 대상 개념이자 사회문화 현상인 까닭에 , 이 대상 개념은 의의가 없어서는 안 되고 , 또 이론에 의해 도입된 것이어야 한다 . 만약 이론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학문이 될 수 없으며 , 적어도 사상이 있는 학문이 될 수 없다 . 물론 이론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연구를 하는 이도 없지 않아 있는데 , 그런 연구를 사상성이 있는 학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이론적인 대전환이 일어난 뒤 우리의 연구는 더욱 진전되어 , 관찰과 분석의 대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 민속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은 민속학의 대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 그것은 곧 연구자들 내부에서 뭐가 민속인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다 여기서 파생된 것들이며 혹은 이 문제로 제약을 받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민속의 대상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 1) 경험상 각각의 민속 현상이 하나의 총체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 2) ‘민’이란 누구인가 ? 3) 무엇을 ‘속’으로 대상화할 것인가 ?우선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 서로 다른 민속 현상을 학술상 총체적 ‘민속’으로 다루는 것은 지난

20여 년간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 하나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것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 민속학이 연구하는 것은 때로는 조상에 대한 숭배이고 , 때로는 민간의 의료적 처방이고 , 때로는 연회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며 , 때로는 성년의식이며 , 그리고 때로는 수공 뜨개질이나 베 짜기 같은 것인데 , 이런 대상들을 어떻게 서로 관련시킬 것인가 . 나의 시도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이 모든 것을 포섭하여 인식상의 한 총체로 삼는 것이다 . 또 하나의 방법은 철학적인 사유로 모든 것을 묶는 것이다 . 가령 뤼웨이는 칸트의 선험적 범주와 소쉬르의 내재성 (외재성 ) 개념을 원용하여 민속학 (민간문학 )의 모든 현상을 검토하는 보편주의적 언설 방식을 내세웠다 . 실제 민속학자들은 보편주의적 언어를 활용하여 현상적인 측면의 잡다한 민속을 연구함으로써 민속 현상의 총체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 이 방법은 예전 민담학의 성립 과정에서도 역할을 발휘한 적이 있다 . 민담은 제각각 나름의 독자성을 구비하고 있어 한 민족의 민담은 그 민족에 속한다 . 하지만 그 모티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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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93

이야기 유형의 발견 (혹은 발명 )을 통해 모든 민족의 모든 이야기 사이에 그 내재적 관련을 구축했고 , 이로써 민담학이 성립할 수 있었다 . 이로부터 파생된 방법이 민간문학에도 적용될 수 있었고 또한 민속학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 하지만 이렇게 파생된 방법을 중심적인 방법으로 삼을 수 없을 경우 민속학이 원래 가지고 있던 대상의 정리 방식은 그 효과를 상실하여 , 연구자들은 다시 이 근본적 문제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 , 중국민속학에서 민속의 ‘민’에 대한 범주는 1990년 전후 , 농민으로부터 국민 (전 민족 )으로

확대되었지만 ,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 순수 학술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 민속의 ‘민’을 국민 전체로 확대하는 건 그 범주가 너무 넓다 . 그리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보면 , 그러한 확대가 실제 사회를 전진시키는 에너지를 반드시 산출한다고도 보기 어렵고 , 또 사회 관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데 반드시 기여한다고도 보기 어렵다 . 일부 학자들은 때때로 ‘민’을 공민으로 인식하고 문화적으로 멸시를 받고 있는 보통의 민중에게 공민의 권익을 부여하자고 호소하기도 하지만 , ‘민’을 공민으로 정의하는 학술적 논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 2013년에 뤼웨이 , 후시아오후이 , 한청옌이 각각 철학 , 사상사 , 학사의 관점에서 민속의 ‘민’은 공민이라고 명확히 그리고 충분히 논술했을 때 , 민속의 정의는 비로소 중국사회의 사상과 실천면에서 그 무한한 잠재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 그리고 중국민속학에서 민속의 ‘속’은 , 일찍이 중징원 선생이 1980년대 일본민속학의 이념을 참고로 민속학은 ‘현재학’이어야 한다는 사상을 제창한 이후 점차적으로 ‘생활문화’로 대한 재 정의되었고 , 지금은 이런 정의가 민속학계의 공통된 인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 민속의 ‘속’을 고대 풍속 , 문화 잔존의 역사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게 아니라 , 일상생활이나 생활문화의 개념에 기초하여 현실 생활의 문화 전승으로 인식한 것은 중국민속학의 조사 연구 방법의 전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4. 중국민속학의 가치 전환: 일상생활의 ‘당연함’의 재발견

중국민속학의 민속 연구는 종래부터 그 연구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해 왔는데 , 시대가 바뀌면

가치에 대한 관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민속의 역사문화 가치를 긍정하는 데서부터 민속의 현실문화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의 변화 , 그리고 ‘민’으로부터 괴리된 ‘속’의 가치를 긍정하는 데서부터 ‘속’의 ‘민’에 대한 가치를 긍정하는 데로 변화한 것이다 . 중국민속학의 애초의 동기를 진술한 가요 주간의 발간사를 보면 , 학술적인 목적 (학술 연구 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가요 수집 )이 되었든 , 문예의 목적 (‘민족의 시’의 탄생을 촉진하기 위한 가요 수집 )이 되었든 , 양자 모두 그런 문화적 영양분을 가지고 있는 ‘민’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 그러나 오늘날의 민속학은 바로 현실의 ‘속’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민’을 발견하고 , 또한 ‘속’의 ‘민’에 대한 적극적 가치를 보장하는 사회적 실천 양식을 발견했다 . 적극적으로 ‘민을 보는 입장과 관점 ,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 이러한 중국민속학의 가치 전환은 일상생활 개념의 운용에 나타난 변화를 놓고 볼 때 가장 잘 드러난다 .

중국민속학이 현실의 조사 연구로 전환한 이래 , 중국인들의 일상생활은 민속학이 가장 크게 공헌하는 분야가 되었다 .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중국 사회과학에서 일상연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고 , 우리가 관련된 연구 또한 아직 제대로 된 연구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 일상생활 비평 총서가 한 세트 나오긴 했지만 , 이는 신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비판에 기반을 둔 것으로 , 비서구의 발전도상국에서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 왜냐하면 이 개도국 대중들의 다양한 전통은 현대 서양 국가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 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의 질서 속에 배치하여 , 하나의 구조 속에 집어넣기 때문이다 . 이 경우 양자의 차이는 하나는 높고 다른 하나는 낮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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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가오)

그리고 하나는 선진적이고 다른 하나는 낙후된 것으로 표상된다 . 중국민속학 역시 예전엔 이런 구조의 제약을 받아 , ‘보통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주로 위와 같은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 그러나 중국민속학은 결국 민간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초심을 방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비판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쉬웠고 , 더 이상 그러한 안이한 비판을 하지 않게 되었다 . 그리고 우리 세대 곧 1990년대에 정식으로 민속학의 학술 활동에 참가한 세대의 경우는 또 하나의 다른 태도를 배우게 되었다 . 우선 보통사람들의 생활을 비판해서는 안 되며 ,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 만약 우리가 새로운 길로 나아갈 거라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 첫째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 ,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가 변했다는 것 , 그리고 세 번째는 민속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다 . 이 세 가지 요소가 함께 변화되어야 하는데 , 우리 세대는 바로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변화한 시기를 만난 것이다 . 우리는 그 국면에서 뭔가를 추진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 또 그러한 변화들이 우리를 카멜레온 (기회주의자 )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그냥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다 . 그러면 어떻게 ‘일상생활’이란 개념을 보통사람들의 생활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꿀 것인가 ?

민속학자들이 보통사람들의 생활을 정면으로 대상화하는 데 있어 어떻게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 ? 우리는 역시 철학을 원용해야만 한다 . 일상생활에 관한 철학의 연구는 매우 중요한데 , 가령 후썰 , 슈츠 , 루크만 등의 연구는 한결같이 일상생활의 한 속성으로 ‘당연함 (taken for granted)’을 지적하고 있다 . 일상생활은 바로 상식의 세계이며 , 보통사람들이 당연한 심리상태로 몸을 부리고 ,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세계다 . 그러나 대중에 휩쓸리기 마련인 현대 사회인 까닭에 , 우리의 현대적 처지와 경우 ( 境遇 )는 당연하면

당연할수록 더 잘못되게 되어 있어 , 그 결과 사람들은 개조되어야 하며 심지어 개조를 강제당하는 경우조차 있다 . 그 정치적 기교는 바로 대중의 문화전통을 오명화 ( 汚名化 )하는 것이다 . 이런 추세를 변혁하자면 , 이론적으로 그리고 경험적 연구를 통해 일상생활에 다시 당연함의 속성을 회복시켜 지식계 , 사상계 및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당연함의 인식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 일상생활의 당연함은 ‘민’에 입장에서 보면 아주 정상적이다 . 단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은 달라질

수도 있겠다 . 당연히 우리가 예전에 살았던 작은 커뮤니티나 촌락의 지역사회에서 일상생활의 당연함은 정상적인 것이었다 . 그러나 우리들의 현재 곧 국가가 존재하고 지식분자들이 존재하는 지금 , 그들은 사회의 일정한 방향성을 추구하고 있다 . 여기서 일상생활의 당연함이라는 속성은 현대 사회라는 제한적 틀 속에서 승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가령 종족 간의 무력 투쟁이나 민며느리와 같은 민속은 물론 어떤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 현대 국가는 질서라는 걸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은 아쉬운 점도 물론 있겠지만 양보하고 타협해야만 하겠다 . 그렇지만 현대 국가의 ‘민’에게는 또한 법으로 인정된 권익도 있다 . 그 법적 절차를 통해 기왕의 제약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가능하다 . 실제 , 최근 몇 년 사이 민속 부흥이 국가로 하여금 여러 방면에서 정책과 법을 고치게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저장 ( 浙江 ) 성 원저우 ( 溫州 ) 시의 융지아 ( 永嘉 )에 있는 종족의 사당은 ‘문화 센터 ( 文化禮堂 )’란 간판을 달고 합법적으로 살아남은 좋은 보기이겠다 . 이 종족 사당에서는 종교 활동은 물론 무대도 있어 전통적인 향토 극을 연행하기도 하는데 , 바로 이게 무형문화유산 보호의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 . 종족 사당이 문화센터로 탈바꿈한 까닭에 , 마을에서 일상생활로 하는 사당에서의 활동 역시 여러 방면에서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 가령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 때는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 또 무대에서 연극을 해야 할 때는 연극을 하고 , 삼중전회 ( 三中全會 ) 정신을 선전해야 할 때도 여기서 하는데 , 이 모든 게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 예전에는 완전히 부정되었던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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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95

현재는 일정한 조건 아래 새로이 정당화 , 합법화 되어 국가와 종족이 서로 타협을 하고 있다 . 그리하여 서로 조건부의 당연함이 성립하고 , 이로써 전통사회 일상생활에서의 당연함이 현대 사회 일상생활에서의 당연함으로 그 전환이 완성된 것이다 . 물론 이러한 것들은 과거의 민속학 (오로지 사당 내의 의식 활동만 조사 )에서는 주목되지 않았고 , 또 거론되지도 않았다 . 그러나 현재의 민속학은 조상에 대한 제사만을 의식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누가 조상제사를 지내며 또 어떻게 행하는지 ,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 하고 있는지 , 현대의 젊은 민속학자들은 모두 다 각자의 필드에서 이런 현상들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회가 민속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민속론은 이미 누속론 ( 陋俗論 )에서 유산론 ( 遺産論 )으로 전환된 것이다 .‘민’은 반드시 실제 생활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주목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중국 민속의 새로운 가치와

‘민은 공민’이라는 이념을 결합함으로써 중국민속학은 새로운 방향성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속학 연구를 할 때 사람을 농민으로 봐서는 안 된다 . 그가 농민인 것은 맞겠지만 , 우리가 지금 연구하러 나설 때는 그 사람을 농민이 아닌 공민으로 봐야 한다 . 만약 우리가 여전히 농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 어떤 당연함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 중국에서 농민이라는 개념은 뒤쳐진 문화 , 뒤쳐진 사상 관념 , 뒤쳐진 생산방식을 대표한다 .16 만약 어떤 연구자가 계속 이 농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 그는 여전히 일상생활을 비판하는 옛날 방식으로 연구하는 셈이다 . 그런 까닭에 문화 유민 ( 遺民 )을 문화 공민으로 전환해야 하고 , 그러한 전환을 완성하는 게 오늘의 중국민속학이 추구할 바다 . 공민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원래 사람들은 한 가지가 아니다 . 계급이나 수입 , 교육 , 민족 , 종교 등의 면에서 다 다르다 . 다르긴 하지만 , 공민이라는 개념 아래서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 만약 이 평등함이 성립한다면 서로 다른 다양함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 ‘민’을 공민으로 볼 때 , 우리는 비록 다르긴 하지만 이제 그 높고 낮음을 논할 필요는 없으며 , 오로지 어떻게 다른가를 논하면 되는 것이다 .

5. 중국민속학의 방법 갱신

중국민속학의 이론 쇄신과 가치 전환은 반드시 새로운 연구방법의 실험과 전파를 수반한다 . 문화 유물의 연구에서는 문자 자료가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 . 고문헌에서 역사 자료를 찾아내면 되기 때문에 , 연구자들은 돈과 시간을 써가며 현실 생활에 들어가 조사할 필요가 없다 . 그러한 학문에 대해 의문이 쏟아진다고 해서 연구자들을 반드시 현지조사로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 어떤 개념이 자신들의 연구 활동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어야 비로소 민속학자들은 현실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 현지조사가 이 학문영역의 기본적인 연구 방법이 된 것은 결코 즉흥적이고 우연한 일이 아니다 . 생활세계와 생활문화가 중국민속학계에서 기본 개념이 되었을 무렵 , 생활 과정을 참여 관찰하는 현지조사는 그 기본 개념과 결합하여 대체 불가능한 방법이 되었다 . 중징원 선생이 민속학을 ‘현재학’이라고 했는데 , 어찌하여 그것은 현재학인 것일까 ? 또 어떻게 하면 현재 (현실 )를 학문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 생활세계라는 개념이 바로 그러한 학문 원리의 지지대가 되어준다 . 생활세계는 살아 있는 동태 ( 動態 )로 총체성과 과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 이것들이 연구 시각과 방법의 내재적인 제약을 구성한다 .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부터 젊은 세대의 민속학자들은 보편적으로 현지조사 방식을 채택하여 필드 워크를 행하고 민족지의 텍스트 기술 양식을 활용하여 자기들의 민속지적 연구를 수행해 왔다 . 중국민속학의 신세대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조사 방법을 시도하여 다양한 ‘민’과 ‘속의 관계에

관한 민속지 논문을 썼는데 , 한동안은 일정한 형식이 있었던 게 아니다 . 궈위화 ( 郭於華 )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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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가오)

장밍위앤 ( 張銘遠 )은 1990년과 1991년에 각각 민속학의 박사논문을 완성했는데 , 둘 다 전국 여러 성의 여러 지점에서 민속 탐방식 조사와 인터뷰로 얻은 자료들에 기초하여 상 ․장례와 생식숭배에 관한 논문을 완성했다 .17 내가 박사논문에서 민속생활의 조사 연구로 방향을 바꾸고 있을 때 , 내 선배들은 이미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 그 후 젊은 연구자들은 점차 현지조사 지점을 한 지역 , 한 마을로 집중하여 자신들이 전문으로 하는 연구 지역과 영역을 가짐으로써 , 스스로를 특정한 지역이나 영역과 결합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 안더밍 ( 安德明 ), 리우시아오춘 ( 劉曉春 ) 등은 1997 년과 1998 년에 각자 기우제 , 양재 ( 禳災 ) 습속과 종족 촌락사회에서의 생활에 관한 박사논문을 완성했는데 , 이때 이미 특정 농촌 (특정한 마을을 중심으로 )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비교적 긴 시간의 현지조사를 행했다 .18 이러한 방식은 많은 민속학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의 경험적 연구의 본보기가 되었다 . 예를 들면 왕지에원 ( 王傑文 )과 위에융이 ( 岳永逸 )는 2004년에 각각 양산 이앙가 ( 傘頭秧歌 )와 묘회 ( 廟會 )에 대한 연구를 완성했는데 , 양자 모두 대량의 현지조사를 기초로 했지만 , 한 마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조사 범위를 각각의 주제와 관련되는 지역의 여러 마을들로 확대했다 .19 이와 동시에 현지조사의 거점을 특정 지역사회로 삼는 케이스 스터디도 발흥했다 . 2000년 전후부터 중국민속학의 현지조사는 점점 규범화되었고 , ‘속’에 대한 관찰도 ‘민’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시작했다 . 니시무라 마시바 ( 西村眞志葉 )의 베이징 앤지아타 ( 燕家台 ) 마을 주민들에 대한 오랜 관찰과 라지아 ( 拉家 )의 쟝르 연구는 그중 아주 좋은 보기다 .20 이처럼 민족지 기법이 민속 사상 ( 事象 ) 의 사례연구에 관한 표준적 방법이 된 이후 , 젊은

연구자들에게 있어 무형문화유산 현상의 사례연구는 그들의 방법과 이념 및 현지조사 훈련의 가장 좋은 무대가 되었다 . 많은 무형문화유산 대표작의 민속지 텍스트가 이 시기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 예를 들면 우원거르러 ( 烏雲格日勒 )의 징기즈칸 릉에 대한 제사 연구 , 치시아오핑 ( 戚曉萍 )의 알랑산 화회 ( 二郎山花兒會 ) 연구 , 왕잉시엔 ( 王瑛嫻 )의 버드나무 청년 화가 전승 ( 楊柳青年畫傳承 ) 연구 , 왕리양 ( 王立陽 )의 보생대제 ( 保生大帝 ) 신앙 연구 , 쑹이 ( 宋奕 )의 리우린 반자회 ( 柳林盤子會 ) 연구 , 쑹훙지앤 ( 宋紅娟 )의 시허 기교절 ( 西和乞巧節 ) 연구 등이다 . 이러한 연구들은 생생하고도 잘 정돈된 케이스 스터디로 각각의 민속이 주류 사회의 주요한 가치로 형성되는 과정 및 그 구체적인 사례들의 문화 전승 상태를 잘 드러냈다 . 더불어 그들의 조사 방법 및 기술 스타일의 개척과 창의성은 바로 이 시대의 진보 , 발전을 잘 보여주었고 , 학술과 사회 사이의 적극적인 관계를 발굴 , 제시했다 .

6. 결론: 공민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문화과학으로

톰스는 민속학을 “the lore of people”이라고 정의했는데 , 번역하면 ‘인민의 지식’이 된다 . 그러면 인민은 누구인가 ? 이등 ( 二等 ) 공민으로서 뒤처진 군중을 ‘인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적합하지 않겠다 . 그러면 이 뒤처진 군중 말고 누가 인민인가 ? 공민이야말로 인민이다 . 그렇다면 누가 민속에서 말하는 ‘민’인가 ? 오늘날 우리는 집합 개념으로서 ‘인민’을 사용하고 , 개별 개념으로서 ‘공민’을 사용한다 . 이러한 ‘번역’을 거쳐 민속은 사회의 기본적인 공공문화가 된다 . 민속은 공민을 사회집단으로 한 일상생활이며 , 전문 연구자들이 가서 발굴 (조사 ), 기술 (에스노그래피의 문체로 작성된 민속지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 공민의 일상생활은 조사되고 기술되기 이전에는 생활이고 , 기술이 되면 문화다 . 생활은 공민 자신의 것이며 , 공공문화는 전문적인 지식인의 연구에 의해 발견되고 , 인지되고 , 승인된다 . 때론 정부의 개입과 인가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 그래서다 . 민속학이란 바로 공민의 일상생활 연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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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97

관한 문화과학이다 . 민속은 전통시대에는 그 사회의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공공문화였다 . 근대 이래의 인식 변화를 통해 , 민속은 현실 생활에서 혁신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고 , 그것에 대한 조사와 수집도 단지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소재 ( 素材 )로서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지난 30여 년 사회와 학술의 변혁 속에서 민속의 부흥은 다시 국민들의 생활로 진출하고 , 국가의 공공생활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 민속은 이미 대량의 공공문화를 제공하고 있다 . 최근 10여 년간 무형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한 일들도 사실 전폭적으로 국가 체제에 의거하여 일상생활 가운데서 공공문화를 발견하는 것이었다고 개괄할 수 있겠다 . 무형문화유산이 된다는 건 합법적인 공공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본디 어떤 축제나 묘회 ( 廟會 )는 마을 내부의 것들이었는데 , 지금은 고을 ( 鄉 ) 정부나 혹은 지방정부가 가령 이 축제는 우리의 축제라고 상급기관에 신고하면 , 그것은 보다 큰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가 된다 . 원래는 뭔가를 배제하는 방식 , 그러니까 민속으로 우리는 남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구별 짓기의 한 방법이었는데 , 지금에 와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 곧 민속 사상 ( 事象 )을 공공문화화 함으로써 서로 다른 집단들이 한 공동체의 유기적 구성 부분으로 묶여 모두 다 ‘우리’의 한 성원이 된다 . 모두가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민속이라도 다 ‘우리’의 공공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민속을 공공문화화 하는 회로가 활짝 열리고 나서 민속은 현대 체제의 이질적 분자에서 파트너로

전화 ( 轉化 )하고 , 체제 내의 동질적 요소가 되었다 . 원래 일상생활을 민속이라고 정의할 경우 , 그것은 현대 체제와 격리된 것들이었다 . 그런 것들이 바로 현대 체제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민속인 것이다 . 현재 민속이 공공문화로 전화한 이후 그것은 바로 현대 사회의 과학 , 예술 , 경제 분야 , 가령 기술 설계와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 인위적인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수공예는 시골의 촌스러운 것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장 세련된 것과 결합될 수도 있다 . 예를 들어 자수 ( 刺繡 )와 하이테크를 대표하는 애플 제품을 비교하면 , 종래의 분류에서는 한쪽은 고급 다른 한쪽은 저급한 것인데 , 요즈음 자수는 애플 제품의 패키지 상품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 루이비통 가방에 수제의 자수를 디자인하면 그게 특별히 유행을 하기도 하고 또 고상한 것이 되기도 한다 .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해 중국민속학이 1990년대 이전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정말로 여러 방면에서 180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 민속학의 새로운 시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 오늘의 민속학은 이념 , 방법 , 가치 등에서 하나의 새로운 학문이다 . 물론 그것은 학술적으로 예전의 지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 하지만 이 학문영역의 현재 상황과 지식의 연원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직접적인 답습의 관계가 아니다 . 중국민속학이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민속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존재하는 이상 , 그 민속학이 자리하는 이 사회 역시 새로운 시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

1 이 글의 주된 내용은 王曉葵 교수가 조직한 「作爲記憶之場的東亞」 학술대회 (華東師範大學 2014년 8월 30-31일 )

에서 발표한 것으로 , 약간의 수정과 보완을 행했다 .

2 岩本通彌 (宮島琴美 역 ), 「以“民俗”爲對象即爲民俗學嗎 ?:爲什麽民俗學疏離了“近代”」, 文化遺産 ,

2008년 제 2기 , 84-86쪽 .

3 鍾敬文 , 新的驛程 , 中國民間文藝出版社 , 1987.

4 鍾敬文 , 建立中國民俗學派 , 黑龍江敎育出版社 , 1999.

5 이 논문은 民俗文化與民俗生活 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 박사론문 문고’에 수록되어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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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속학의 새로운 시대’(가오)

1994년에 출판되었다 .

6 張紫晨 , 中國民俗學史 , 吉林文史出版社 , 1993; 王文寶 , 中國民俗學史 , 巴蜀出版社 , 1995.

7 趙世瑜 , 眼光向下的革命 :中國現代民俗學思想的早期發展 , 1918-1937 , 北京師範大學出版社 , 1999.

8 劉鐵梁 , 「中國民俗學發展的幾個階段」 , 民俗硏究 , 1998년 제 4기 , 89쪽 .

9 예를 들면 「鍾敬文 , 對中國當代民俗學一些問題的意見」, 社會科學戰線 , 2002년 제 1기 ; 楊樹喆 , 「中國民

俗學學科發展現狀芻議」 , 寶雞文理學院學報 , 2002년 제 2기 ; 劉鐵梁 , 「開拓與探索的曆程 :民俗學學科建

設的回顧與展望」 , 北京師範大學學報 , 2002년 제 5기 ; 黃澤 , 「論中國民俗學新世紀的學科發展」 , 思想戰線

, 2003년 제 1기 ; 謝國先 , 「新世界中國民俗學的發展方向」 , 雲南民族大學學報 , 2006년 제 5기 .

10 예를 들면 高丙中 , 「中國民俗學三十年的發展曆程」 , 民俗硏究 , 2008년 제 3기 ; 劉鐵梁 , 「中國民俗學思想

發展的道路」 , 民俗硏究 , 2008년 제 4기 ; 劉曉春 , 「從“民俗”到“語境中的民俗”:中國民俗學硏究的範式

轉換」 , 民俗硏究 , 2009년 제 2기 ; 葉濤 , 「新時期中國民俗學論綱」 , 江蘇社會科學 , 2000년 제 3기 ; 安

德明·楊利惠 , 「1970 年代末以來的中國民俗學 :成就 , 困境與挑戰」 , 民俗硏究 , 2012년 제 5기 .

11 高丙中 , 「中國民俗學三十年的發展曆程」 , 民俗硏究 , 2008년 제 3기 , 5쪽 .

12 戶曉輝 , 「從民到公民:中國民俗學硏究“對象”的結構轉換」 , 民俗硏究 , 2013년 제 3기 ; 呂微 , 「民俗複興

與公民社會相聯接的可能性 :古典理想與後現代思想的對話」 , 民俗硏究 , 2013년 제 3기 ; 韓成豔 , 「在“民間”

看見“公民”:非物質文化遺産保護語境下的實踐民俗學進路」 , 民俗硏究 , 2013년 제 4기 (『定位於現代社會

日常生活的民俗學』의 필담 참조 ).

13 중국민속학은 2006년에 제 6차 대표대회와 학술 토론회를 가졌는데 , 이때의 주제가 「新世紀的中國民俗學 :機遇與挑

戰」이었다 . 본 논문의 주제 역시 그 주제가 轉化된 것으로 곧 ‘중국민속학의 新世紀’에 관한 것이다 .

14 呂微 , 「現代性論爭中的民間文學」 , 文學評論 , 2000년 제 2기 ; 「“內在的”和“外在的”民間文學」 , 文學

評論 2003년 제 3기 ; 「民間文學 :民俗學硏究中的“性質世界”·“意義世界”與“生活世界”」 , 民間文化論壇

, 2006년 제 3기 .

15 戶曉輝 , 現代性與民間文學 , 社科文獻出版社 , 2004; 返回愛與自由的生活世界 :純粹民間文學關鍵詞的哲學

闡釋 , 江蘇人民出版社 , 2010.

16 Myron Cohen, “Cultural and Political Inventions in Modern China: The Case of Chinese ‘Peasant’ , in Daedalus 122, no.2(1993).

17 郭於華 , 死的困擾與生的執著 :中國民間喪葬儀禮與傳統生死觀 , 中國人民大學出版社 , 1992; 張銘遠 , 生殖

崇拜與死亡抗拒 :中國民間信仰的功能與模式 , 中國華僑出版公司 , 1991.

18 安德明 , 天人之際的非常對話 :甘肅天水地區的農事禳災硏究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2003; 劉曉春 , 儀式與

象征的秩序 , 商務印書館 , 2003.

19 嶽永逸 , 廟會的生産 :當代河北趙縣梨區廟會的田野考察 , 北京師範大學博士論文 , 2004; 王傑文 , 儀式、歌

舞與文化展演 :陝北·晉西“傘頭秧歌”硏究 , 中國傳媒大學出版社 , 2006.

20 西村眞志葉 , 日常敍事的體裁硏究 :以京西燕家台村的“拉家”爲個案 ,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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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299

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에 대한 재고

후 시아오후이 ( 戶曉輝 )

중국사회과학원

( 번역 : 진잉지 )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당연함’을 묻다 : 한중일 고층집합주택의 살림살이와 생활세계」였다 . 나는 이 글에서 민속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생활세계’란 개념의 ‘당연함’에 대해 재고하고 싶다 . 즉 우리가 연구 툴로 삼고 있는 ‘생활세계’ 개념의 전제 , 혹은 개념에 앞선 이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 우선 독일어권 민속학이 ‘생활세계’ 개념을 수용한 데 따른 득과 실을 살펴보자 .

100여 년 전 민속학은 민중 생활에 관한 학문으로 인식되었다 . 이에 관해선 독일민속학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정립한 릴 (Wilhelm Heinrich Riehl,1823—1897) 과 스위스 민속학의 선구자 바이스 (Richard Weiss,1907-1962)와 같은 학자들도 언급했다 .1 그러나 상당히 오랫동안 민속학이 그 핵심 과제로 주목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속 사상 ( 事象 )이지 민속 생활은 아니었다 . 1960년대 초 과거 나치즘에 이용된 역사를 청산하고 또 ‘민속학’을 긴박한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불식하기 위해 , 독일민속학의 튀빙겐 학파는 솔선수범하여 일상생활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 그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바우징거의 『과학기술세계 속의 민속문화』다 .2 그의 방향 전환은 민속학과 민간문화 연구를 눈앞 생활세계의 현실로 , 나아가 그 역사성과 역사로 해방시키려는 시도였다 .3 여기서 ‘생활세계’라는 철학 개념은 , 독일민속학이 일상생활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 중요한 계기와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 나는 예전 바우징거로부터 자신의 ‘생활세계’ 개념은 후썰과 쉬츠에게서 배운 것으로 , “생활세계란 환경 속에서 당신 자신이 창조한 그 부분”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4 그런데 아쉬운 것은 , 독일민속학이 이 ‘생활세계’라는 개념을 수용하고 이해할 때 , 그 철학적 함의

및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경시해버린 점이다 . 게다가 너무나도 안이하게 이 개념을 ‘일상세계’와 동일시하고 혹은 그것을 ‘일상생활’로 바꿔버린 점이다 . 이와 관련하여 , 튀빙겐 학파의 ‘일상생활 (Alltag)’ 개념은 쉬츠 등의 지식사회학적 의미 (즉 주체 사이에서 상식을 공유하는 )의 경험적 레벨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 오히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페브르 (Henri Lefebvre,1901-1991)의 이론에 기초한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생활을 지칭하며 , 그 핵심은 역사의 객관적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주관적 감각과 미시적 체험이라고 지적하는 이조차 있다 .5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와 독일민속학은 그것을 지역문화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regionaler Kultur)나 혹은 사회 변용에 관한 경험적 문화연구 (empirische Kulturforschung des sozialen Wandels)로 이해하게 되었다 .6

21세기 이후 독일어권 민속학은 잇달아 유럽민족학 혹은 경험문화학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 결과적으로 복수의 명칭을 가진 분과학문 (Vielnamenfach)으로 변모해 갔다 .7 경험 문화학으로서의 유럽민족학은 주로 구체적인 생활 관계에서 주체의 일상적 실천 형식을 주목하고 미시적 연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8 이와 관련하여 독일어권의 학자들은 거의 일치된 이해에 기초하여 비슷한 주장을 했다 . 가령 게른트의 경우 , 민속학이 방법론을 산출하는 능력은 그 학문의 역사 , 곧 문화 비교와 콘텍스트화 , 생활세계로의 회귀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 그리고 민속학은 일상의 생활세계를 주제로 지역과 문화 공간의 관계 범위에서 생활세계를 기술하는데 , 그 일상의 생활세계란 문화적 의미를 담당하는 것 , 곧 역사와 사회에서 인정된 의미구성물이라고 이해했다 .9 또 요나스의 경우 “민속학적 문화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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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에 대한 재고(후)

생활세계의 여러 국면에서 생활세계를 기술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고 지적했다 .10 그리고 민속학의 ‘생활세계’라는 개념 범주는 여러 지평들과 닿아 있으며 그것들의 위도는 자연적 , 시간적 , 사회적 시야에서 다른 구조와 기능영역으로 한정되거나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11 이처럼 일상생활과 생활세계를 동일시하는 관점이 민속학의 연구영역 확대로 연결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 게다가 그 과정에서 누구나 후썰이 말하는 바의 ‘생활세계’ 개념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겠다 .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자유가 민속학에 끼친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 , 민속학자들이 ‘일상생활’로 ‘생활세계’를 갈음하는 게 과연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벨터가 경종을 울렸듯이 , 후썰의 초월론적 자아 및 그 세계의 현상학은 제일의 판단중지 (Epoche)에서 이미 일상사회학이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있다 . 만약 사회학이 ‘생활세계’라는 학술용어를 수용하면서 초월론적 자아 및 그 세계가 아니라 자연적 태도에서의 자아 및 그 세계에 대해 세속적 기술을 가한다면 , 후썰의 개념을 완전히 다른 관심 영역으로 가져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 그런 방식에 대해선 상세한 해명이 마땅히 뒤따라야 한다 .12 독일어권의 많은 민속학자들은 쉬츠사회학의 관점을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민속학의 사회학화 혹은 사회과학화에 관여했는데 ,13 그들 역시 이론적인 설명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겠다 . 쉬츠는 , 사회과학이 연구하는 것은 서로 주관성이나 상호주관성의 철학적 측면이 아니라 , 인간이 자연적 태도 속에서 체험하는 생활세계의 구조이며 , 또 경험사회과학의 진정한 기초는 자연적 태도의 구성적 현상학이지 초월적인 현상학이 아니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14 이러한 그의 관점은 사실 이미 후썰에서 괴리된 것이다 . 왜냐하면 후썰에게 있어 세계는 본래 초월론적 현상이며 , 생활세계는 인간이 직접 경험하는 세계이긴 하지만 그 자연적 태도를 판단중지하지 않는 한 출현하는 일은 없으며 , 따라서 연구 테마로 대상화할 까닭도 없기 때문이다 .15 후썰은 세계의 주제화 방식을 두 가지로 언급했다 . 직접 세계를 객관적으로 주제화하는 객관적 과학의

방법과 , 주관적으로 혹은 주관에 의해 부여된 형식으로 주제화하는 정신과학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 즉 “현재 나는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반전되었다 . 현재 탄생한 정신과학은 그것에 선행하는 세계를 갖지 않고 , 또 이 세계를 늘 견지하는 것도 아니다 .”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으로’는 “주관 자체를 주제로 삼음으로써 객관적인 자연을 묻지 않는다 .”는 것을 의미한다 . 혹은 “현재 이런 방법을 가지고 우리가 주제로 삼는 것은 결코 세계가 아니다 . 그것은 변용하는 소여의 형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전에 주어진 세계에 불과하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16 후썰에게 있어 , 이 새로운 정신과학이 주관에 의해 부여된 세계를 주제로 삼는다는 건 자유로우면서도 역사적인 인간을 주제로 삼는다는 것과 같다 . 왜냐하면 주관에 의해 부여된 세계는 늘 인간의 세계이며 , 그 인간 역시 세계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내에서 인격과 인격적 태도 (die personale Einstellung)를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7 물론 인격이라 할지라도 그게 곧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적 소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은 인간이 개체로서 구비하고 있는 독특하고 빼앗길 일 없는 정신적인 것으로 ,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또한 의무로 짊어져야 하는 도덕과 자유의 능력을 말한다 . 브링크만이 지적한 것처럼 객관적인 자연과학은 자유를 발견할 수 없고 ,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은 각각 다른 대상 영역을 지향하며 또 서로 다른 인간관 (Auffasungen vom Menschen)을 가지고 있다 . 구체적으로 말하면 , 정신과학에서 언급하는 인간은 도덕적 존재자이고 책임능력과 자유능력을 가지고 있다 . 정신과학의 연구는 반드시 인간의 이 두 능력을 고려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 만약 민속학이 단지 객관적 과학의 방법으로 생활세계를 직접 주제화한다면 , 혹은 단지 자연적 태도

속의 일상생활만을 연구한다면 , 책임능력과 자유능력을 가진 인간을 그려낼 수 없다 . “성질세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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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01

구체적인 주체성 (개인이 존재하는 자유의 의미 )이 차지할 자리는 없고 , 단지 원시적인 생활세계만이 주체성의 절대적인 발생지”19

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점이 , 민속학이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을 방기한 뒤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큰 위험성이자 최대의 손실일 것이다 . 관련하여 나는 2008년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근래 ‘생활세계’ 개념이 사용되는 기회가 늘었는데 , 대부분의 민속학자들은 여전히 ‘생활세계’를 우리 주위에 실제 존재하거나 우리가 직접 생활하고 있는 객관적인 일상세계라고 이해하고 있다 . 달리 말하면 , 민간문학이나 민속학 분야에서 ‘생활세계’는 ‘일상생활’의 동의어에 불과한 것이다 . 이는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에 대한 오해를 잉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이 개념이 현대의 민간문학 연구나 민속학 연구에 가져다줄지도 모를 중요한 혁신적 작용을 은폐하는 행위인 까닭에 , 마땅히 재고되어야 한다 .20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을 둘러싼 제 문제와 이 개념이 민속학에 가져다줄 가치와 의의에 대해선 이미

졸저 『사랑과 자유의 생활세계로의 회귀 : 순수 민간문학의 키워드에 관한 철학적 해석』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 본고에서 이 개념에 대한 민속학자들의 이해의 ‘당연함’을 다시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당연시되는 것은 바로 생활세계의 철학이 제시하려는 문제이며 , 그것을 소여의 존재 곧 선험적으로 주어진 기성 ( 旣成 )의 존재로 간주해버리면 , 정말로 근원적인 문제를 건너뛰게 되어 생활세계를 인식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21 그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이하 몇 가지 점을 부연 설명하겠다 .① 객관과학은 그 이론적 활동이 원래 생활세계의 직접성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

이렇게 지적하는 후썰에게 있어 , ‘생활세계로 회귀하자’는 캐치프레이즈는 바로 ‘객관주의적 태도를 판단중지하자’는 의미가 된다 .22 만약 민속학이 이 객관주의적 태도를 판단중지하지 않은 채 단지 ‘생활세계’라는 빈껍데기의 이름만을 취한다면 , 그런 ‘생활세계’ 개념은 민속학의 일상생활 연구에서 명실이 상부하지 않게 되어 , 민속학은 객관적인 실증과학의 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 따라서 회귀 자체가 더욱 더 어렵게 된다 . 민속이 생활세계에서의 특정한 실천적 행위임을 인정한다면 , 객관적 실증과학의 방법으로 민속적 실천을 연구할 수는 없다 . 왜냐하면 객관적 실증과학의 방법은 실천하는 주체의 인격이나 정신 및 책임능력과 자유능력에 대한 경시와 은폐를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 ② 후썰의 ‘생활세계’는 공동적 의미의 기반으로 이중적 유형을 지니고 있다 . 즉 보편적 .선험적인

생활세계와 구체적 .실제적인 생활세계로 , 전자가 형식적이고 항상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내용적이고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23 홀의 구분을 따르면 인간의 정신적 , 역사적 , 공동적 생활은 세 개의 단계로 나뉜다 . 곧 직접 경험되는 일상생활과 내성 (內省 )하는 생활 (예를 들면 과학적인 생활 ), 그리고 절대적인 생활 (절대적인 내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고 , 스스로의 지향에 의해 절대적으로 그의 주변 세계를 창조하는 생활 )이 그것이다 .24 이 중에서 세 번째 단계의 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분명 민속학이 아니라 현상학의 사명이다 . 그러나 후썰에게 있어 생활의 이 세 가지 단계는 사실 통일되고 일체화된 것이다 .25 즉 각각의 서로 다른 경험적 자아는 모두 선험적 자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만약 민속학이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단계의 생활만 연구하고 세 번째 단계의 생활을 경시한다면 , 상대화 , 차이화 , 지방화 , 민족화 , 파편화한 문화의 표층에 발목을 잡혀 독립학문으로서의 통일성을 잃고 단순한 개별 사상 ( 事象 )과 사례 연구 집적이 되고 말 것이다 . 만약 거꾸로 보편적 .선험적인 생활세계의 지평을 확보한다면 , 민속학 자체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회복하고 , 이를 바탕으로 민속학의 실천이성의 원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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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에 대한 재고(후)

되돌아가 “성질 (경험 ) 세계에 앞선 의미 (선험 ) 세계 , 곧 ‘생활세계’라는 이 프레 (pre)개념의 ‘사안’ 자체로 회귀”26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다 . 민속학 연구의 실천 원칙은 바로 이 세 번째 단계의 생활 (선험적 자아 )을 기점으로 첫 번째 단계의 생활 (경험적 자아 )을 바라보는 것이지 , 단지 첫 번째 단계의 생활에 매몰되어 각양각색의 기능적 추론이나 기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

③ 후썰은 보편적 생활세계의 선험성은 보편적이고 전논리적인 선험성으로 객관적 .논리적 선험성과 다르기 때문에 , 이 양자를 원칙상 구별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27 브랜드는 , 현상학의 선험성은 처음부터 모든 경험 형식을 결정짓고 있는데 , 이러한 형식은 또한 질료적 .구체적인 선험성으로 경험 그 자체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 독립된 유형의 경험으로서 체험되는 선험성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 현상학의 관점에서 보면 , 의식은 늘 ‘…에 대한’ 의식이며 , ‘나’는 늘 세계 속에서 세계의 생활이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다 .28 다시 말해 , 선험적인 의미에서 초월론적 자아는 세계와 대립하는 양극에 자리매김 되는 것이 아니라 , 세계 속에서의 선험적 생활 자체인 것이다 . 현상학이 설파하는 선험성이란 경험된 시간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 경험의 조건에 앞서는 것을 말한다 . 그리고 생활세계는 개인이 사실로서 경험하는 대상이 아니라 , 일종의 선험 의식의 ‘대상’이다 . 이것은 , 인간에게는 상대적으로 유효한 세계이긴 하지만 , 인간의 주관적 심리에도 유효한 우연적 경험세계가 아니다 . 오히려 그것은 우연적 경험세계의 일반구조와 보편적인 본질이며 , 변화에서의 불변의 것이다 .29 후썰의 조수를 역임한 란트그레베 역시 생활세계 철학의 주제는 후썰이 말하는 “형식적 .보편적인 것 , 곧 생활세계의 모든 상대적 변화 속에서 불변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이는 각기 다른 생활세계의 모든 경험적 연구를 놓고 말하는 선험성이며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생활세계를 비교하고 구별할 수 있는 조건이다 . 따라서 철학 이외의 분과학문들 역시 이러한 의의를 가진 초월론적 원칙으로 각기 다른 생활세계에 대해 분석하고 , 기술 ,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30 이는 또한 생활세계의 의식과 자연적 태도 속의 의식이 줄곧 절대적 의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현상학적 환원은 우리에게 생활세계의 구성 원리 , 즉 절대적 의식 혹은 절대적 주관성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 생활세계의 생성은 그러한 절대적 주관성의 ‘자기 객관화 (Selbstobjektivation)’이다 .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은 사회학의 ‘일상생활’ 개념의 전신이 아니라 , 그 ‘일상생활’ 개념을 심사하는 기관 (Instanz)인 것이다 .31 덧붙여 말하면 , 절대의식 역시 또한 초월적 자아 (das transzendentale Ich)에서 유래한다 . 만약 민속학이 생활세계의 구성 원리 , 즉 절대적 의식에 이르는 길을 체념한다면 , 그것은 일상생활 연구의 척도와 기준을 방기하는 것과 같으며 , 문화 상대주의의 수렁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④ 생활세계의 ‘구성’은 단지 의식에 가져다준 존재의 현현 ( 顯現 )이 아니라 , 의식의 설정이 결실을 맺어 행하는 세계 창조 (Weltschöpfung) 혹은 존재의 창조 (Schöpfung des Seins)다 . 이러한 의식은 바로 절대적 의식 혹은 초월적 자아다 . 초월적 자아는 윤리적 자아 (das sittliche Ich), 곧 책임능력과 자유능력을 구비한 자아다 .32 그리고 이 ‘자아’는 피히테가 말한 “경험적 세계를 성립시키는 본원적 행동 (Tathandlung)”을 하는 자아 , 곧 순수 실천적인 자아다 . 이는 , 생활세계의 ‘구성’이 단순한 인식만이 아니라 , 본원적인 실천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 ‘내가 나의 세계 경험과 창조에 대해 책임을 진다 .’고 말할 때의 ‘나’는 바로 인격적인 나이며 , 모든 사람의 인격적 자아는 다 평등하다 . ‘생활세계’ 개념의 도입이 민속학에 가져다주는 중요한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생활세계’의 선험성이 민속 실천의 선험성을 창현 ( 彰顯 )하여 , 다종다양한 민속 현상 가운데서 경험적 자아를 보여줌과 동시에 초월적 자아의 인격성과 자유롭게 실천하는 능력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 만약 민속학이 이런 초월적 자아를 생활세계에서 배척해 버린다면 , 생활세계의 통일적 구조와 형식적 특징을 이야기할 방도를 잃고 , 결국 복수 ( 複數 )의 의의에서 상대적인 생활세계의 내용만 남길 수밖에 없게 된다 .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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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03

민속학이 연구하는 인간은 자유능력과 평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 그리하여 기술된 생활세계 역시 사랑과 자유가 넘쳐나는 세계일 수 없게 된다 . ⑤ ‘생활세계’ 개념의 도입은 민속학을 목전의 일상생활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 기왕의 실증민속학을

실천민속학으로 전회 ( 轉回 )할 것을 요구한다 . 민속학의 생활세계는 민속 사상 ( 事象 )으로 구성된 정지된 세계가 아니다 . 민속 실천을 통해 구축된 역동적인 세계 , 즉 민속 실천의 세계다 . 실제 생활세계의 민속 실천에서는 ‘문화’라는 개념이 이미 커다란 확장을 보이고 있고 , 협의의 습속이나 전통으로부터 혹은 교육과 특권적 의미의 정수 ( 精華 )로부터 사람들이 특정 규칙에 준거하여 행하는 광의의 사유 , 해석 , 행위 활동의 실천이 되었다 .33 문화가 사람들의 특정 규칙에 준거한 실천일 뿐만 아니라 , 문화학으로서의 민속학 역시 사실상 특정 규칙에 준거한 실천인 것이다 . 생활세계의 민속학은 본래 그렇듯이 실천민속학이어야 한다 . ⑥ 일상생활이 생활세계를 표출하는 하나의 특정 형식이라 할지라도 , 그 일상생활에서도 망각되는 게

있다 . 여기서 말하는 망각이란 어떤 사물이나 일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 생활세계에 대한 일상생활의 망각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자기 계몽이 필요한 것이다 .34 민속학의 제일의 책무는 일상생활 중의 기억 내용과 잊혀진 내용을 주어모아 보충하는 게 아니다 . 일상생활의 생활세계에 대한 망각을 극복하는 것 , 적어도 그러한 망각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 이에 대해 졸고 『민속과 생활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민간문학 혹은 민속학의 ‘생활세계’는 인간의 ‘초월론적 (선험적 ) 자아’가 구성한 결과다 . 그것은 실증과학의 경험에 앞서는 세계로 인식이나 실증주의 과학으로는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힘든 세계다 . 민간문학이나 민속학의 ‘생활세계’는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 혹은 직관되는 세계다 . 하지만 그 구조

와 특징을 통찰하려면 , 반드시 현상학적 환원 곧 객관주의적 세계관과 객관적 과학의 방법론을 판단중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은 , ‘생활세계’ 개념을 도입한다는 게 단지 민간문학과 민속학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반 ( 地盤 )’과 연구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 기왕의 객관주의적 세계관과 객관 과학적 방법론을 모두 다 개변하고 , 또 과거의 소위 ‘객관적’ 연구대상 (그게 신화 , 민요 , 서사이건 혹은 물질문화이건 간에 )을 모두 주관적인 생활세계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 생활세계는 구승 전통 혹은 민속학의 ‘세계’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 어디까지나 그것은 민간문학 혹은 민속학이 연구해야 할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35

생활세계는 민속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 생활세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 독일 낭만파가 민속학에 부여한 내재적인 목적과 실천의 의지 곧 자유의지에서 출발하여 , 인간의 본성 (인격 )과 사물의 특성 (Eigentümlichkeit)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 다시 말해 , 인간과 사물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른 민족 , 문화 및 개인을 존중하고 , 그것들의 차이 (Ungleichheit)를 보유한 동등 (gleich)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36 비록 사람들이 구축해낸 구체적인 생활세계는 각기 다르지만 , 생활세계의 통일적 구조와 선험적 형식에 내포된 초월적 자아는 동일하며 평등하다 . 민속학이 기타 학문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 이처럼 서로 같지 않은 구체적인 생활세계를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 민속학은 생활세계의 선험적 입장 , 곧 초월적 자아에서 출발하여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과 연구 ‘대상’을 유기체로 간주한다 . 다시 말해 인간을 수단으로 삼음과 동시에 목적으로 삼는데 , 이것은 결코 귀납적 추론이 아니라 (연구와 인식의 ) 무목적 ( 無目的 )의 (사물 그 자체와의 ) 합목적이다 .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속학은 생활세계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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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에 대한 재고(후)

후썰에게 있어서 생활세계는 주관상대적인 것이긴 하지만 , 그래도 여전히 초월론적인 통일적 구조와 무목적적인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다 . 후썰은 한편으로 , 생활세계가 일체의 목적에 선행하는 심미적 특질

37을 가지고 있으며 , 그것은 ‘목적구조물’이 아니라 ‘구조물’이라고 강조했다 .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활세계는 주체가 “상상하고 지향하는 관심 , 목적의 흥미 생활일지도 모르겠다 .”38고도

지적했다 .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만약 쉬츠를 추수하여 , ‘생활세계’ 개념이 후썰과 함께 발하고 있던 초월론적 색채를 지워버리고 나서 그것을 민속학 연구에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 본디 ‘생활세계’ 개념을 도입하는 것의 근본적인 가치와 의의를 거의 잃어버리는 거와 같다 .39 물론 민속학은 현상학과 동의어가 아니고 , 또 세계 그 자체를 연구할 수도 없다 .40 하지만 생활세계의 초월론적 지평을 유지하는 것은 , 독일 낭만주의가 민속학에 부여한 고전적 이상과 자유의지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중요한 길이다 . “생활세계를 안이하게 일상세계 혹은 연구 대상으로 동일시하는 난폭한 흉내를 피하”기 위해서 ,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 . 곧 “‘생활세계’는 민속학의 연구대상이 아니고 , 민속학 연구의 입각점이어야 한다 .”는 것 , 또 “‘생활세계’는 민속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사회 과학의 ‘연구’에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는 것 , 그리고 “민속학과 그 ‘연구’의 잠재적 공헌은 인간의 생활 , 생명 및 자유적 존재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탐구하는 데 있다 .”는 것이다 . “이런 방면에서 민속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학문은 없으며 , 바로 이것이야말로 민속학의 존속을 정당화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41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활세계의 선험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이론민속학을

실천민속학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생활세계’ 개념이 민속학에게 가져다준 것은 연구 영역 혹은 연구 ‘대상’의 통일성만이 아니다 .42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것은 , 통일된 실천 규칙이 주어진 것 , 곧 실천민속학에 최소한의 윤리와 실천 규율이 부여된 것이다 .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을 원용하여 민속학을 스스로의 실천적 이성의 기점으로 되돌려 실천민속학을 재건함으로써 비로소 이 파편화 , 케이스 스터디화 , 실증과학화 한 민속학 , 그 결과 많은 분과학문 사이에서 자신을 상실한 민속학을 그 근본에서부터 구해낼 수가 있을 것이다 . 끝으로 나는 동아시아 민속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 ‘생활세계’라는 철학적

개념을 민속학에 도입할 때 , 독일어권의 많은 민속학자들처럼 이 개념에서 출발을 하고 있으면서도 너무 멀리 가버려 , 왜 우리가 거기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싶다 .

1 Hengartner, Kulturwissenschaft im Zeitalter der Globalisierung. Volkskundliche Markierungen. Waxmann Verlag GmbH, Münster, 2002, S.192 참조 . 독일어권의 기타 학자들에 의한 관련 발언은 戶曉輝 , 『返回愛與自由的生活世

界 :純粹民間文學關鍵詞的哲學闡釋』,江蘇人民出版社 , 2010, 15-17쪽 참조 .

2 赫爾曼·鮑辛格 (戶曉輝 역 ), 『技術世界中的民間文化』, 廣西師範大學出版社 , 2014.

3 Thomas Hengartner, Forschungsfeld Stadt. Zur Geschichte der volkskundlichen Erforschung städtischer Lebens-formen, Dietrich Reimer Verlag, 1999, S.133 참조 .

4 戶曉輝 , 「德國民俗學者訪談錄」,『民間文化論壇』, 2006년 제 5기 .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 『走向

世界的中國文學研究』(社會科學文獻出版社,2010)에 재수록 .

5 Guido Szymanska, Zwischen Abschied und Wiederkehr: Die Volkskunde im Kulturemodell der Empirischer Kulturwissenschaft, in Tobias Schweiger und Jens Wietschorke (Hg.), Standortbestimmungen. Beiträge zur Fachdebatte in der Europäischen Ethnologie, Verlag des Instituts für Europäische Ethnologie, Wien 2008, S.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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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05

참조 .

6 Wolfgang Brückner, Geschichte der Volkskunde. Versuch einer Annäherung für Franzosen, in Isac Chiva, Utz Jeggle (Hg.), in Isac Chiva, Utz Jeggle (Hg.), Deutsche Volkskunde-Französische Ethnologie. Zwei Standort-bestimmungen, Campus Verlag GmbH, Fankfurt/Main, 1987, S.125 참조 . 이와 관련하여 王傑文도 “전후 활약한 바우징거나 카슈바와 같은독일 민속학자들에게 있어 ‘생활세계’는 특별히 철학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 나에게는 , 그들이 말하는 ‘생활세계’는 바로 우리 중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현상 레벨의 ‘현재의 일상생활’이라고 생각된다 .”(「“生活

世界”與“日常生活”:關於民俗學“元理論”的思考」,『民俗研究』 2013년 제 4기 )고 지적한 바 있다 .

7 Regina F. Bendix, From Volkskunde to the “Field of Many Names” : Folklore Studies in German-Speaking Europe Since 1945, in Regina F. Bendix and Galit Hasan-Rokem (ed.), A Companion to Folklore, Wiley-Black-well, 2012, p.364.

8 Brigitta Schmidt-Lauber, Europäische Ethnologie und Gemütlichkeit. Fragen einer Alltagskulturwissen-schaft, in Österreichische Zeitschrift für Geschichtswissenschaften, 15. Jg., Heft 4, 2004 참조 .

9 Helge Gerndt, Kulturwissenschaft im Zeitalter der Globalisierung. Volkskundliche Markierungen. Waxmann Verlag GmbH, Münster, 2002, S.263, S.240, S.245 참조 .

10 Martin Jonas, Volkskundliche Kulturwissenschaft als “Grundwissenschaft”? Nachtrag zur Studieren-dentagung 2007 in Wien, in Laura Hompesch, Martin Jonas, Judith Punz, Anna Stoffregen (Hg.), Aus dem Tagungskoffer. Ref exionen einer Studierendentagung, Verlag des Instituts für Europäische Ethnologie, Wien 2009, S.16.

11 Günter Wiegelmann, Matthias Zender, Gerhard Heilfurth, Volkskunde: Eine Einführung, Berlin: Erich Schmidt Verlag, 1977, S.231 참조 .

12 Rüdiger Welter, Der Begriff der Lebenswelt. Theorien vortheoretischer Erfahrungswelt , Wilhelm Fink Verlag, 1986, S.185 참조 .

13 Wolfgang Kaschuba, Einführung in die Europäische Ethnologie, Verlag C.H.Beck München, 2006, S.93 참조 .

14 Alfred Schutz, Husserl’s Importance for the Social Sciences, in Edmund Husserl, 1859-1959: Recueil Com-mémoratif publie a L’occasion du centenaire de la Naissance du Philosophe, Martinus Nijhoff/ La Haye, 1959 참조 . 쉬츠의 관점이 반드시 일관된 것은 아니다 , 적어도 그는 “생활세계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길이다 . 그렇기 때문에 후자가 모든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기초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러한 과학 연구의 모든 현상은 우리의 이 생활세계의 현상이다 .”(Alfred Schutz, Collected Papers, IV, Edited by Helmut Wagner and George Psathas,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6, p.107)라고 지적한 바 있다 . 쉬츠와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에 대한 비교는 Frank Welz, Kritik der Lebenswelt: eine soziologische Auseinandersetzung mit Edmund Husserl und Alfred Schütz, Westdeutscher Verlag GmbH, Opladen 1996 참조 .

15 바로 그렇기 때문에 쉬츠 역시 자연적 태도를 판단중지해야만 했는데 , 이와 관련하여 何林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 “선험적 환원의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연구한 후썰과 크게 다르게 , 그 (쉬츠 -인용자 주 )는 ‘자연적 태도의 판단중지’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논술했다 . 이런 종류의 판단중지는 후썰이 말하는 바의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다르다 . 그것은 이론적 연구 활동에서 사회과학자가 행하는 판단중지가 아니라 , 생활세계에서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판단중지다 . 그리고 그것은 회의적 태도로 행하는 판단중지가 아니라 , 보통사람들이 당연한 태도로 행하는 판단중지다 . 왜냐하면 일상생활의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 “그 (쉬츠 -인용자 주 )는 , 생활세계에서 행동하는 자가 자연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그 자연적 태도를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 생활세계 자체에 초월성과 능동성이라는 벡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있어 ,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세계 중 사전에 구성되어 있는 부분은 충분치 않다고 슈츠는 명확히 지적했다 . 그것은 개방적인 세계이며 , 따라서 자연적 태도에 의지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 “쉬츠는 일상 생활세계의 의미구조를 서술 ,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자재 (自在 )의 일상적 존재 상태를 초월하여 자유롭고 , 창조적인 개체가 되기를 바랐다 .”(何林 , 「許茨的生活世界理論及其當代意義」, 『遼寧大學學報』, 2010년 제 6기 .

16 Edmund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Eine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Martinus Nijhoff Haag, 1954, S.305, S.157 참조 .

17 Edmund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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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에서 ‘생활세계’ 개념의 ‘당연함’에 대한 재고(후)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Martinus Nijhoff Haag, 1954, S.302 참조 .

18) Heinrich Brinkmann, Lebenswelt und Wissenschaft: Vorträge und Aufsätze, Pfungstadt bei Darmstadt, 1993, S.151-153 참조 .

19 呂微 , 「民間文學 :民俗學研究中的“性質世界”, “意義世界”與“生活世界”:重讀 <歌謠 >周刊的“兩個目的”」,

『民間文化論壇』, 2006년 제 3기 .

20 戶曉輝 , 「民俗與生活世界」, 『文化遺產』, 2008년 제 1기 .

21 張祥龍 , 『胡塞爾“生活世界”學說的含義與問題』, 尹樹廣 , 黃惠珍 편 , 『生活世界理論 :現象學·日常生活

批判·實踐哲學』, 黑龍江人民出版社 , 2004, 51쪽 .

22 R.Philip Buckley, Husserl, Heidegger and the Crisis of Philosophical Responsibility,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2, p.98 참조 .

23 Hubert Hohl, Lebenswelt und Geschichte: Grundzüge der Spätphilosophie E. Husserls , Verlag Karl Alber Freiburg /München, 1962, S.32 참조 . 경험적으로 볼 경우에도 , 현재에는 동시대의 사람들도 다른 민족의 생활세계야말로 유일한 ‘인류 문화’의 변용체라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 이 점에 대해선 Helge Gerndt, Kulturwissenschaft im Zeitalter der Globalisierung. Volkskundliche Markierungen. Waxmann Verlag GmbH, Münster, 2002, S.260 참조 .

24 Hubert Hohl, Lebenswelt und Geschichte: Grundzüge der Spätphilosophie E. Husserls , Ver lag Karl Alber Freiburg /München, 1962, S.49 참조 .

25 “후썰은 생활세계 철학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생활에 관한 개념을 차용했다 , 이 개념은 그가 실제 ‘생활세계’라는 말로 지시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 만약 후썰이 논의한 변증 관계에서 ‘생활세계’가 어떤 확정된 인류의 경험적 기반을 지칭한다면 , ‘생활’은 그에게 있어 모든 가능한 생활 (생물학적 의미의 현실로부터 문화생활 , 나아가 ‘선험적 생활’까지 )을 의미한다 .”( 奧爾特 <鄧曉芒 역 >, 「“生活世界”是不可避免的幻想 :胡塞爾的“生活世界”概念及其文化政治困境」,

『哲學譯叢』, 1994년 제 5기 .

26 呂微 , 「民間文學 :民俗學研究中的“性質世界”, “意義世界”與“生活世界”:重讀『歌謠』周刊的“兩個目的”」,

『民間文化論壇』, 2006년 제 3기 .

27 Edmund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Eine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Martinus Nijhoff Haag, 1954, S.14 참조 .

28 Gerd Brand, Die Lebenswelt: Eine Philosophie des konkreten Apriori, Walter de Gruyter, 1971, S.51-52 참조 .

29 高秉江 , 『胡塞爾“生活世界”的先驗性』, 尹樹廣 , 黃惠珍 편 , 『生活世界理論 :現象學 . 日常生活批判 . 實踐哲學』, 黑龍江人民出版社 , 2004, 145쪽 .

30 Ludwig Landgrebe, Lebenswelt und Geschichtlichkeit des menschlichen Daseins, in Bernhard Waldenfels, Jan M. Broekman und Ante Pažanin (Hg.), Phänomenologie und Marxismus, Band 2: praktische Philosophie,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1977, S.29-30 참조 .

31 Manfred Sommer, Der Alltagsbegriff in der Phänomenologie und seine gegenwärtige Rezeption in den Sozi-alwissenschaften, in Dieter Lenzen (Hrsg.), Pädagogik und Alltag: Methoden und Ergebnisse alltagsorientierter Forschung in der Erziehungswissenschaft , Verlagsgemeinschaft Ernst Klett, 1980, S.35-37 참고 .

32 Ludwig Landgrebe, Der Weg der Phänomenologie. Das Problem einer ursprünglichen Erfahrung,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Gütersloh, 1963, S.147, S.196 참조 .

33 Wolfgang Kaschuba, Einführung in die Europäische Ethnologie, Verlag C.H.Beck München, 2006, S.98 참조 .

34 Bernhard Waldenfels, Lebenswelt zwischen Alltäglichem und Unalltäglichem, in Christoph Jamme und Otto Pöggeler (Hg.), Phänomenologie im Widerstreit: Zum 50. Todestag Edmund Husserls,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1989, S.107 참조 .

35 戶曉輝,「民俗與生活世界」,『文化遺產』, 2008 年 第 1期 .

36 Harm-Peer Zimmermann, Ästhetische Aufklärung. Zur Revision der Romantik in volkskundlicher Absicht, Verlag Königshausen & Neumann GmbH, Würzburg, 2001, S.502 참조 .

37 “사실 칸트가 말하는 『判斷力 批判』의 세계야말로 가장 통상적이고 진정한 세계로 , 그게 바로 후썰이 말하는 ‘생활세계’ ,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 葉秀山 , 『葉秀山學術文化隨筆』, 中國青年出版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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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07

1999, 171쪽 .

38 이러한 지적은 후썰의 ‘생활세계’ 개념의 층위성과 다의성 및 그의 목적론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 Edmund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Eine Einleitung in die Phän-omenologische Philosophie, Martinus Nijhoff Haag, 1954, S.141, S.461-462, S.466 참조 .

39 戶曉輝 , 『返回愛與自由的生活世界 :純粹民間文學關鍵詞的哲學闡釋』, 江蘇人民出版社 , 2010, 291-292쪽 , 312쪽 , 326-330쪽 .

40 일찍이 高丙中은 , “민속학이 추구하는 것은 생활세계의 문제이지만 , 실제로 총체적 생활세계 혹은 생활세계를 총체로 간주하여 연구할 수는 없다 .”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 아울러 “우리는 세계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 우리는 세계를 상상하고 , 사고하고 얘기하지만 그것을 연구할 수는 없다 .”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필자는 민속학의 직접적인 대상을 민속과 민속생활로 한정하고 , 생활세계와 생활문화를 민속학의 영역으로 삼는다 .”(『民俗文化與民俗生活』,中國社會科學出版社 ,

1994, 145-146쪽 )고 주장했다 . 나도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 “우리가 생활세계는 연구할 수 없다고 말 할 때 ,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일의적인 의미에서의 생활세계를 지칭한다 , 그러한 생활세계는 바로 선험적인 생활 시야 혹은 지평을 말한다 . 우리가 공유하는 시야 혹은 지평으로서 생활세계는 사전에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에게 주제화되는 게 아니고 따라서 인식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다 . (중략 ) 민간문학이나 민속은 생활세계의 시야나 지평에서 구축되는 현상이다 . 구체적으로 주어진 경험의 차이에 의해 서로 다른 생활세계의 현상이 창출되기 때문에 , 우리는 다의적 생활세계의 현상을 논의할 수 있다 . 민간문학이나 민속이란 바로 이러한 생활세계의 현상인 것이다 .” ( 戶曉輝 , 『返回愛與自由的生活世界 :純

粹民間文學關鍵詞的哲學闡釋』, 江蘇人民出版社 , 2010, 367쪽 )

41 邵卉芳 , 「“生活世界”再認識」, 『民俗研究』, 2012년 제 6기 .

42 ‘생활세계’라는 개념의 도입이 민속학 연구에 끼치는 작용에 대해 高丙中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 “‘생활세계’라는 완벽한 개념을 손에 넣은 민속학에서 그 연구 영역이 다시 뿔뿔이 흩어져 파편처럼 보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과거에는 이런 총체성의 파악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민속학이 그때그때 연구하는 문예나 무술 , 물질생활 , 관습법 등이 유기적 정합성이 없는 뒤죽박죽의 짬뽕이라 얘기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 하지만 현재 이 연구 대상들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 공히 완전한 생활세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民俗文化與民俗生活』,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1994, 1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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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世相史)의 가능성시게노부 유키히코 ( 重信幸彦 )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 번역 : 김현잠 )

1. 지역 문제로서의 고층집합주택

오늘 심포지엄에서 한중일 3 국의 고층집합주택 생활에 관한 연구 보고를 들으면서 단지나 도시 재개발처럼 처음부터 한 지역을 새로이 조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고층집합주택이란 기본적으로 한 건물 안에 밀폐된 공간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공용공간이 마련되어 있다해도 그 역시 거주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최근 6, 7 년 동안 후쿠오카 현 ( 福岡県 ) 후쿠오카 시 ( 福岡市 ) 하카타 구 ( 博多区 ) 의 근세 이후 이어져온 한 동네에 대해 조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 사실 이 동네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맨션이다 . 역사가 오래된 상점가가 있고 야마가사 ( 山笠 ), 돈타쿠 ( どんたく ) 등과 같은 유명한 축제를 유지해온 하카타 시내 지역 중의 한 곳인데 , 요 몇 년 사이에 결코 넓다고는 할 수 없는 동네에 원룸 맨션을 비롯한 3 채의 맨션이 세워졌다 . 이 맨션의 거주민들이 동네 자치조직이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는 그만큼 동네의 활력이 저해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

노포에 후계자가 없거나 하여 문을 닫게 되면 개발업자가 그 땅을 구입한다 . 그리고 일시적으로 유료주차장을 만든 후 주변에 일정 넓이의 땅이 확보되면 고층집합주택을 짓는다 .

예전에는 자치단체가 맨션 주민에 관한 정보를 동네 자치조직에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기초해서 각 세대별로 자치조직에의 참여를 권유하거나 설득했다고 한다 . 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된 이후부터는 자치단체로부터 일체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맨션 주민에 대한 자치조직 참여권유가 더욱 어려워졌다 .

맨션 주민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 동네에서 오랫동안 상점을 경 해온 사람들 중에는 자치조직이나 상점회가 중심이 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지금 이상의 맨션 건설에 대해 반대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현재 자치조직에서는 맨션 건설에 대한 지역설명회가 열린다고 하면 직접그곳에 가서

토착지역과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개발업자에게 호소한다고 한다 . 그러나 그 효과는 거의 없어서 동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는 거의 반 포기한 얼굴을 하며 맨션을 올려다 본다 .

분명 고층집합주택 내부는 공용공간까지 고려된 쾌적한 주거지이겠지만 , 결국 이러한 고층집합주택의 출현이 그 외부에 있는 토착지역의 생활을 메마르게 만드는 현실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문제가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떠한지 토론자로서 궁금하다 .

좀 억지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 고층집합주택을 대상으로 한 이번 심포지엄에서 대체 어째서 오로지 그 내부 생활만에 시선이 모여져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 이러한 문제설정 자체에 규명해야 할 당위성 , 즉 ‘당연’ 하다고 여겨지는 사고의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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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09

2. 일본 민속학의 역할, ‘세상해설(世相解説)’

일본 민속학에는 ‘세상해설’ 이라는 인식론이 있다 . 이것은 민속학이 눈 앞에 펼쳐지는 일상생활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방법의 문제 , 다시 말해 학문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

일본 민속학의 틀을 만든 야나기타 구니오 ( 柳田国男 ) 는 스스로 구상한 민속학의 역할에 대해 ‘세상해설’ 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야나기타 구니오는 그의 저서 『명치대정사 세상편 ( 明治大正史 世相篇 )』 (1931, 이하 『세상편』 ) 에서 일상생활의 역사를 뜻하는 ‘세상사’ 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세상해설’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 다 . 이 책은 농업경제사가이면서 동시에 농정에 관여하는 관료이기도 했던 야나기타 구니오와 이후에 민속학을 구상한 야나기타 구니오의 결절점에 해당하는 저서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세상편』 은 쇼와 공황 ( 昭和恐慌 ) 의 여파를 받아 피폐하고 궁핍해진 농촌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농촌은 어째서 궁핍한가의 원인을 메이지 ( 明治 )·다이쇼 ( 大正 ) 시대에 이르는 약 60 년 동안 지방·농촌의 일상생활의 변화 속에서 다각적으로 찾고자 하 다 . 이 글 속에서 『세상편』 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 언뜻 보기에는 하찮은 일상적인 사물과 현상들에 대한 서술만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 메이지·다이쇼 시대라는 일본의 근대를 이야기하는 역사서를 표방하면서도 예를 들어 대외전쟁이나 연이어 발생한 소작쟁의 , 노동쟁의 등은 책 속에서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 근대사의 정식무대에 출현하는 역사적인 인물의 고유명사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실은 이것이야말로 변화하는 , 분명 확실히 변화하고 있던 일상생활의 역사 , 즉 ‘세상사’ 를 통해 ‘세상해설’ 하기 위한 전략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

3. ‘세상’이라는 태도와 시선

‘세상’ 이란 이 세상의 모습을 광의적으로 뜻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일본어 단어 중 하나이다 . 그러나 야나기타 구니오는 이 ‘세상’ 을 매우 전략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상’ 이란 우리들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현재 경험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경험해온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사실” ( 야나기타 구니오 , 1931〔1998〕, 337) 에 기초해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 , 즉 방법을 의미한다 .

『세상편』 에서 야나기타는 농촌의 생활이 메이지·다이쇼 시대 약 60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어떻게 변하 는지를 규명하고자 하 다 . 이 60 년이라는 시간의 폭이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라는 점은 ‘세상’ 이라는 방법의 요건 중 하나 다고 생각한다 . 60 년이라는 기간을 현재에 비추어 보자면 대략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는 시간의 길이와 겹쳐짐을 알 수 있다 .

한 사람의 경험과 중첩될 수 있는 이 시간의 폭은 ‘실험의 역사’ 라는 또 다른 중요한 인식론과 연결된다 . 『세상편』 의 제 1 장에서 야나기타는 ‘실험의 역사’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 다 . “본인 스스로가 최근에 과거라는 범주 안에 편입된 지금까지의 상태와 직접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실” 에 기초하여 누군가에게 “지도 설명” 받지 않아도 “많은 동료들과 함께 말하지 않아도 그 경로를 이해” 할 수 있는 역사이며 그 역사의 실천은 가능한 “다수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또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들 , 즉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주 등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하 다 ( 야나기타 구니오 , 1931〔1998〕, 342). 여기서 ‘실험’ 이란 experiment 가 아닌 experience ( 경험 ) 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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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世相史)의 가능성(시게노부 )

즉 , 야나기타가 말하는 ‘실험의 역사’ 란 한 사람 한 사람이 생활 속에서 경험해온 현상 중에서 이미 과거의 경험이 되어버린 현상과 본인 스스로가 바로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상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들 자신의 삶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에서의 역사이다 .

그리고 이 ‘실험의 역사’ 라는 발상은 당시 제국대학 등에서 전문적인 지식의 기법을 습득한 전문가의 지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의 일상적인 경험을 가지고 구체화시킬 수 있는 앎의 실천으로 구상되었다는 점도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다 .

4. ‘당연’한 것을 상대화하는 것과 포기하지 않는 것

지금 눈앞의 사실로서 ‘당연하다’ 고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당연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실제 경험에 바탕하여 생활의 변화 , 즉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야나기타는 ‘세상사’ 라 하 다 .

그렇다면 이 ‘세상사’ 를 통해 어떠한 가능성이 모색되었던 것일까 ? 『세상편』 속에서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자각적으로 문제를 공유하여 단결하는 것이었다 . 서로의 사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스스로의 현재 경험과 과거 경험의 비교를 첫 번째 비교라고 한다면 , 자신의 경험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타자의 경험과의 비교라는 두 번째 비교 과정을 뜻하며 이러한 방법이 모색되었음을 의미한다 .

이렇게 ‘실험의 역사’ 로 구체화된 ‘세상사’ 는 개인 한 사람의 불행이나 불합리의 문제로서 당면하고 있는 것이 결코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며 실제로는 이 세상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

이러한 ‘세상사’ 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 야나기타가 집필한 일본 민속학 최초의 개설서 『향토생활의 연구법』(1935) 에서는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무언가 문제를 느꼈다 하더라도 그러한 문제의 원인이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종종 “그런 거 알려고 한들 알리가 있겠어 ?” 또는 “당연한 거잖아” 라든가 “세상이란 그런거야” 라며 어째서 그러한지 , 그 경위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포기해 버리는 것에 대해 경고하 다 ( 야나기타 구니오 , 1935〔1998〕, 203 ~ 204).

즉 , ‘당연’ 함이란 이러한 ‘포기’ 와 표리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 ‘세상사’ 의 목적은 먼저 문제를 안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

문제가 어째서 그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본인 스스로가 ‘당연’ 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결코 ‘당연’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 즉 당연하게 여겨지게 된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문제가 되어버린 상황을 바꾸어 나갈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5. ‘문제’의 자각과 ‘일상화’ 비판의 범위

이상에서 살펴본 ‘세상사’ 해석을 통한 ‘세상해설’ 이라는 야나기타의 발상과 오늘 심포지엄의 문제제기를 포개어 살펴보면 질문을 던져야 할 문제란 이미 우리가 떠안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 즉 의식화되어 있는 문제라는 전제에 서 있어야 하는데 , 오늘 개최된 심포지엄 ‘“당연” 을 묻는다 !’ 에서는 그러한 고민이나 문제가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질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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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문화 Vol.1(2015.3) 311

오히려 한국 , 중국 , 일본 각국에서 익숙해져 버린 고층집합주택의 생활 비교를 통해 각각의 ‘당연’ 함을 상대화하고자 하 다 . 그렇다면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한국 , 중국 , 일본의 고층집합주택의 ‘당연’ 함을 상대화한 후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현재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일상적인 모순이나 문제를 ‘자각’ 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심포지엄이라고 생각한다 . 모순이나 문제를 깨닫기 어려운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큰 문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또 이번 심포지엄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당연’ 함의 구성방식이 문제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우리 생활의 당위적인 모습이나 이상형을 끊임없이 생산해온 대중매체의 정보나 생활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근대적인 시장경제 등의 제도가 ‘당연’ 함의 이미지를 우리들 안에 주입해가는 과정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 이번 발표들이 관심을 갖었던 것은 소여의 제도나 장치 , 물건 , 도구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당연’ 함과 그 가능성이었다 .

예를 들어 이와모토 씨는 발표 속에서 ‘일상화’ 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소여의 균일한 제도나 장치를 스스로의 문맥 안에서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당연’ 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언급하 다 . 이는 남근우 씨의 발표에서 주어진 기존의 집합주택의 구조를 한국의 종래 관습에 맞추어 활용하여 ‘토착화’ 해가는 과정으로 설명되는 내용과 유사하다 . 즉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일상생활을 만들어가는 지혜와 궁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일상화 ,’ ‘토착화’ 의 과정 속에는 균일한 제도나 장치를 자신들의 문맥 안에서 활용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에 대강대강 어떻게든 꾸려나감으로써 그러한 제도나 장치로 인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불합리나 모순 등과 같은 문제를 의식화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는 측면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오늘 심포지엄이 지향해야 하는 바는 그러한 위험성을 직시하고 ‘당연’ 함 뒤에 숨겨져 있는 불합리와 문제를 재발견하여 지적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민속학이라는 길일 것이다 .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한국 , 중국 , 일본이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각각의 ‘당연’ 함을 물어 밝힘으로써 각각 어떤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

현재 필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하카타의 길거리에서 그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고층집합주택을 올려다보며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 고 중얼거리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고층집합주택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

참고문헌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1931, 『明治大正史 世相篇』(1998, 『柳田國男全集5』, 筑摩書房).

____________, 1935, 『 土生活の研究法』(1998, 『柳田國男全集8』, 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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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集後記

ここに『日常と文化』第 1 号を刊行するはこびとなりました。この創刊号では、2014 年 10 月に開催された日本民俗学会の国際シンポジウムの議論を掲載しています。高層集合住宅における生活および日常研究をめぐる各国の状況が擦りあわされるのみならず、本号には、これからの民俗学のあり得べき方向性に関する様々な可能性が示されています。読者諸賢からの忌憚なきご意見・ご感想をお寄せいただければ、望外の喜びです。

次号以降は民俗学的「日常」研究に資する個別論文・研究ノート、翻訳を掲載していく予定です。本誌が日本、中国、韓国の民俗学が連携的に議論を深化させていくアリーナとして、幾ばくかの役割を

果たせ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編集委員一同)

『日常と文化』編集委員

門田岳久/編集委員長

岩本通弥及川祥平

川松あかり金 賢貞施  尭田村和彦南 根祐

西村真志葉

日常と文化 第1号2015 年 3 月 31 日発行

編集・発行 日常と文化研究会〒 153-8902 東京都目黒区駒場 3 丁目 8 番地 1 号 東京大学 14 号館岩本研究室

印 刷  三鈴印刷株式会社 

〒 101-0051 東京都千代田区神田神保町 2 丁目 32 番地1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