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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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지만 학생들은 단순한 피교육자가 아니다. 학생들 은 대학의 주체로서 학교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갈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학생회는 이 러한 학생들의 학내 자치를 책임지는 대표적인 조직이다. 서울대생들도 그동안 학과, 단대, 전교 단위에서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학생회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해 학생회는 존폐를 반복했고 학생회 조직과 운영 과정에 서 학교 당국과 많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때 학내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학생 운 동의 중심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최근 학생회는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60년간 학생회의 변천 과정을 기존 교사와 학보『대학신 문』 , 교지『관악』 , 학생잡지『서울대저널』 , 기록관 구술 자료, 학생회 문건, 일간지, 연구 성과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2장 학생회의 변천 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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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지만 학생들은 단순한 피교육자가 아니다. 학생들

은 학의 주체로서 학교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갈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학생회는 이

러한 학생들의 학내 자치를 책임지는 표적인 조직이다. 서울 생들도 그동안 학과,

단 , 전교 단위에서 학생회를 조직하 다. 그러나 학생회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해 학생회는 존폐를 반복했고 학생회 조직과 운 과정에

서 학교 당국과 많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때 학내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학생 운

동의 중심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최근 학생회는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에서는 지난 60년간 학생회의 변천 과정을 기존 교사와 학보『 학신

문』, 교지『관악』, 학생잡지『서울 저널』, 기록관구술자료, 학생회문건, 일간지, 연구

성과등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제2장 학생회의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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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학도호국단 창설과 학생 동원(1946~1960년)

1) 건설학생회 결성과 학도호국단 창설

1946년 국립서울 학교를 처음 설립하기 전부터 서울 학교로 통합될 학과 전문

학교 학생들은 8 15 해방과‘신탁 통치 파동’등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좌익과 우익

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좌우 학생 립은 학생 조직의 결성에도 향을 주

었다. 먼저 1946년 1월 7일 우익을 표하는 학생들이 반탁전국학생연맹(이하 반탁학

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반탁 운동과 반공 운동을 전개하 다. 이에 항하여 좌익

을 표하는 학생들은 1월 9일 재경학생행동통일촉성회(이하 학통)라는 조직을 결성하

고 모스크바 3상 회담 지지 운동을 벌 다. 반탁학련과 학통은 모두 각 학교 표자가

모여 만든 연합 조직이었고 중앙 조직을 먼저 만든 후 각 학교로 조직을 확 하 다. 그

러나경성 학의일부우익학생은반탁학련중앙집행부에불만을품고 1946년 4월경

성 학동지회라는 학내 자치 조직을 별도로 결성하 다. ‘국립서울 학교설립안’(이하

국 안)을 발표한 직후인 1946년 7월 31일 반탁학련과 경성 학동지회 등이 통합하여

전국학생총연맹(이하 전국학련)을 결성하지만, 새로 설립한 서울 학교의 우익 학생들

은 전국학련의 결성 과정에서 벌어진 일부 주도 세력들의 패권적이고 분파적인 행동에

반발하면서적극적으로참여하지않았다.

1946년 7월 13일 국 안을 발표하자 좌익 학생들의 연합 조직인 학통은 7월 22일 국

안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8월부터 각 학교별로 국 안반 투쟁위원회를 조직

하여 본격적인 국 안 반 운동에 나섰다.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국 안 반

운동은 학통에 속한 좌익 학생이 주도하 고 서울 로 통합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

른 학교 학생들도 다수 참여하 다. 학생들의 주된 운동 방법은 동맹 휴업이었다. 학통

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국 안 반 운동과 동맹 휴업에 맞서 서울 로 통합되는 우익

학생들도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1947년 2월 9일 각 단과 학을 표하는 우익 학생

50여 명이 모여‘국립서울 학교 건설학생회’(이하 서울 건설학생회)라는 교내 자치

조직을 결성하고 동맹 휴업을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 다. 서울 건설학생회에는 좌

익 학생 조직인 학통에 항하고 기존 우익 학생 조직인 전국학련의 독단적 운 에 반

하는 서울 학교 우익 학생들이 총집결하 다. 서울 건설학생회는 좌익 학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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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휴업을 반 하 지만 국 안을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았다. 서울 건설학생회는

결성과 함께 발표한 결의문에서, 국립서울 학교의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 문

리과 학, 상과 학, 법과 학 등 3개 단과 학의 휴교 명령을 철회하며, 교수진과 학

교 설비를 확충할 것을 요구하 다. 이후 건설학생회는 동맹휴업이 벌어지는 다른 학교

들에서도 속속 결성하 고, 2월 28일 각 학교에서 결성한 건설학생회들이 연합한 전국

건설학생총연맹(이하건설학련)을결성하 다.

서울 건설학생회는 서울 내의 학통 학생들과 립하 다. 1947년 3∙1절에 좌익

과 우익은 따로 기념행사를 가졌고, 서울 생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각각의 행사

에 참여하 다. 그 과정에서 서울운동장에 모인 건설학생회 중심의 우익 학생들과 남산

에 모인 학통 중심의 좌익 학생들 사이에서 서울 학교 교기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지

기도 했다. 또한 건설학련은 같은 우익 학생 조직인 전국학련과 립했다. 건설학련에

는 한민당(한국민주당)과 이승만에 착한 전국학련 지도부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

은 학생이 다수 참여하 다. 때문에 두 조직의 갈등이 심했고 물리적 충돌도 심심치 않

게 일어났다. 심지어 건설학련 학생들이 전국학련 사무실로 몰려 가는 과정에서 총격

사건이일어나기도했다.

1947년 3월 국 안 수정안이 나오고 한국인 총장을 임명하면서‘국 안 파동’은 점

차 진정되었다. 그리고 8월 미등록 학생 약 3,500명이 복교하여 국 안 파동은 마무리

되고 학교는 안정을 찾았다. 반면 학통은 불법화되고 약 1천 명 정도의 학통 소속 좌익

학생들이 자퇴 및 미복학 형식으로 학교를 떠났다. 서울 건설학생회가 학통 학생들과

벌인 립에서승리한것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남한만의단독정부를수립하면

서 서울 건설학생회도 해산했다. 반공을 국시(國 )로 정한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좌익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사상 통제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

건설학생회를 비롯한 기존 우익 학생 조직도 모두 해산시켰다. 신 국가가 학생 조직

을직접통제하기위해군 식편제를갖춘학도호국단을창설하 다.

학도호국단 창설은 1948년 10월부터 초 문교부 장관 안호상이 본격 추진하 다.

1948년 11월 문교부는 중학생 이상의 학도호국 를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겠다

는 방침을 발표하 고 12월에‘학도호국단 준비 및 지도 요강’을 작성하 다. 1949년 1

월에는‘학도호국단 조직 요강’을 발표하 다. 이에 따라 1월 말까지 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 고, 2월에시군학도호국단, 3월에각도및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을 결성하 다. 서울 학교를 비롯한 각 학 학도호국단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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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학도호국단 직속으로 4월 20일까지 조직을 완료하 다. 4월 22일에는 서울운동장에

서 한민국 학도호국단 총재 이승만 통령과 단장 안호상 문교부 장관을 비롯하여 전

국의학생 표가참석한가운데중앙학도호국단결성식을가졌다.

창단당시 조직 체계를보면 중등학생이상모든 학생과교직원은학도호국단단원이

었다. 총재는 통령이, 중앙학도호국단 단장과 부단장은 문교부 장관과 차관이, 각 도

및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 단장은 도지사, 시장, 교육감이, 각 학교 학도호국단 단장은

교장, 학장, 총장이 맡았다. 학생 간부는 학도부장 또는 장으로 임명하 다. 이렇듯

학도호국단은그 조직 체제가 통령-문교부-총장 학장 교장으로된 전형적인관변 조

직이었다. <표 5-2-1>에서볼수있듯이, 서울 학교도 9개단과 학에각단과 학학

도호국단을 결성하고 그 연합체로서‘서울 학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 다. 그리고

각 단과 학 학장이 단과 학 학도호국단 단장을 맡았고, 총장은 서울 학교 학도호국

단장을 맡았다. 학생운 위원장은 단장이 임명하 다. 학생운 위원회 산하에는 훈련

부, 체육부, UN학생부, 후생부, 학예부, 공작부 등 6개 부서와 함께 -중 -소 로

이루어진학도호국 가있었다.

학도호국단의 취지를 보면, “우리나라는 국토의 양단( )과 사상의 분열로 인하여

794 제5부 학생

<표 5-2-1> 서울 학교학도호국단조직도

각단과 학학도호국단

서울 학교학도호국단

출전: 서울 학교, 1996 서울 학교 20년사』

단장

부단장

학도 의원

지도위원회

훈련부 체육부 UN 후생부 학예부 공작부

학생부

중 장

소 장

학도호국학생운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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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문화적 혼란을 일으키어 동족상쟁( )의 비애를 초래하여 바야흐로 민족존

망( )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이 정기를 앙양하여 민족 본연

의 자태로 돌아가서 사상을 순화∙통일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 )하여야 하겠다.

이에는 민족의 핵심체이며 추진체인 학도층의 사상통일과 유기적 조직단체적 훈련을

강화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여 학원을 수호하며 향토를 방위하고 나아가

서는 국가를 위하여 헌신∙봉사하는 실천력을 함양하고자 학도호국단을 조직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학도호국단을 결성한 목적은 학교 내 좌익 학생들을 제거하

고 학내에 생길지 모를 좌익 사상을 근절하기 위해 군 식 집단 훈련과 반공 사상 교육

을 시켜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초기의 학

도호국단 간부진의 85%는 반공 사상이 투철한 전국학련 출신 학생으로 채웠고, 서울

학교의경우기존건설학생회출신학생들이학도호국단의주축을이루었다.

학생들이 학도호국단과 같은 준군사 조직으로 편제되면서 학생들의 학문적, 사상적

자유와 자치 활동은 크게 제약받았다. 학생들의 자유와 자치를 가로막는 학도호국단 창

설에 해 국회는 물론 그 동안 우익 학생 조직의 표 역할을 하던 전국학련까지 크게

반발했다. 독일나치가조직한학생조직‘유겐트(Jugend)’와같이악용될수있다는우

려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1949년 9월 27일, 학도호국단 이외의 학생 단체는 존재할

수 없고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통해서만 활동해야 한다는‘ 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

을 만들어 통령령으로 공포하 다. 조직 해체에 반발해 오던 전국학련도 정부의 방침

에 따라 1949년 11월 자진 해산하고 학도호국단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후 학도호국

단은 이승만 정권의 학생 통제∙동원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을 매개로 여러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학생 자치를 가로막는 학도호국단의 해체를 주장

했다.

2) 학도호국단의 활동과 학생 동원

1949년 학도호국단을 창설하 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학생들이 흩어지자

학도호국단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신 각지로 흩어진 학도호국단 간부는 국방

부 정훈국의 지원 하에 한학도의용 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전하 다. 한학도의용

를 통해 국방부가 학생 조직에 향을 끼치자, 이에 반발한 문교부는 195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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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국학도호국단개정안’을공포하여학도호국단을정부주도의준군사조직에서개별

학교 중심의 학생 자치 조직으로 개편하 다. 이는 이전부터 제기한 학도호국단의 파시

즘적성격에 한비판과학생들의자치조직에 한요구를반 한조치이기도했다.

이에 따라 서울 학교에서도 학도호국단 학생운 위원장을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기

시작하고 각 단과 학마다 집행 기구인 운 위원회를 감시하기 위해 의원회를 조직

하 다. 학도호국단 운 위원장 선출은 1953년 사범 학에서 처음 실시하 고 1954년

부터 각 단과 학에서 직선 또는 간선으로 실시하 다. 법과 학, 사범 학, 수의과

학의 운 위원장은 직선으로 선출하 고 나머지 단과 학은 의원회에서 선출하 다.

그중 공과 학과 문리과 학은 1956년부터, 미술 학과 농과 학은 1957년부터 직선

제로선출하 다. 의원회는각학과에서선출한 의원으로구성하여운 위원회의간

부선임을추인하고예산과결산을심의하며단과 학에따라운 위원장도선출하 다.

서울 학교 학도호국단에는 단과 학 운 위원장으로 구성하는 운 위원회가 있었

다. 서울 학교 학도호국단 운 위원장은 단과 학 운 위원장들이 순번제로 맡았다.

그리고 심의기관인‘서울 학교 의원회’(이하 총 의원회)를 1955년 조직하 다. 총

의원회는 각 단과 학에서 500명당 1명씩 선임하는 의원 38명으로 구성하 다. 총

의원회는 의장 1명, 부의장 2명을 두고 임기는 6개월이었다. 총 의원회는 총운 위

원장 및 부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당시 학생 자치 활동이 부분 단

과 학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곧 폐지되었다가 1959년

부활하 다.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초기에 규율부가 가장 활발하 다. 문예부에서는 학보 발간 및

웅변 회 개최를 주도하 다. UN학생부에서는 어 웅변 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 교

류 활동을 맡았다. 서울 학교 학도호국단은 학교를 표하여 외 행사도 주관하 다.

학내 활동으로는 종합 예술제, 장기 회, 교내 웅변 회, 종합체육 회 등을 개최하

다. 당시 학생 활동은 서울 학교 학도호국단보다는 각 단과 학 학도호국단이 더욱 활

발히 전개하 다. 각 단과 학의 학도호국단은 매년 신입생 환 회, 졸업생 환송회, 체

육 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 으며 단과 학별 학내 신문과 학보를 발간하 다. 각 단

과 학 학도호국단의 운 위원장 선거도 중요한 학내 행사 중의 하나 다. 단과 학 운

위원장 선거는 농과 학, 문리과 학, 미술 학, 상과 학, 약학 학, 의과 학, 치과

학에서 5월에 실시하 고, 공과 학, 법과 학, 사범 학, 수의과 학에서는 10월에

실시하 다. 선거 때마다 열기는 단하 다. 선거 열기는 학생들의 민주적인 의사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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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란 점에서 바람직한 면도 있었으나, 선거전이 과열되면서 금전 수수와 폭력 행사

등의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 다. 1950년 에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확산한 배

경에는이러한선거부작용도큰부분을차지했다.

1951년 이후 학도호국단의 성격이 준군사적 학생 통제∙동원 기구에서 학생 자치 기

구로 변모하 지만, 위에서 조직한 학도호국단 체제는 여전히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동

원하면서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제약했다. 학도호국단 하부는 학생 자치 기구로 조직하

지만 상부는 행정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는 문교부 장관이 중앙의 단장을 맡았다.

비록 학도호국단 운 에서 학교의 책임과 권한을 강화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학

도호국단은 정부의 하부 조직이기 때문에 정부의 요구에 따라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동

원하는일은 1950년 내내있었다. 학생들은관료적인학도호국단체제때문에원하지

않는 행사에도 동원되어야 했다. 1950년 에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동원된

행사는다음과같다.

1. 학생출정계몽선전운동및전시학도궐기 회(1953년 2월)

2. 북진통일학도총궐기 회(부산: 1953년 4월 22일)

3. 휴전회담반 데모(1953년 6월 12일)

4. 미군철수반 국민총궐기 회(1954년 9월 26일)

5. ∙加타협안반 국민총궐기 회(1954년 11월 8일)

6. 한민국주권옹호학도총궐기 회(1954년 11월 18일)

7. 적성휴전감위축출국민 회(1955년 8월 6일, 학생동원 4개월)

8. 이박사 통령재출마요청데모(1956년 3월 10일)

9. 한학도반공궐기 회(1956년 10월 20일)

10. 신의주학생의거사건기념 회(1956년 11월 23일)

11. 감군반 데모(1957년 9월 24일)

12. 인도네시아반공혁명군지원궐기 회(1958년 5월 24일)

13. 재일교포북송반 데모(1959년 2월 13일, 학생동원 6개월)

14. 아시아반공민족 표환 및반공총궐기 회학도참가시가행진(1959년 6월)

특히 위의 7과 13의 경우 무려 4~6개월 간 학생을 동원하여 정상 수업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 다. 일상적인 동원에 시달리던 학생들은 학생 자치 기구라기보다 실질적

인 학생 동원 기구이던 학도호국단에 불만이 컸다. 학도호국단은 점차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위 로 전락했다. 게다가 일부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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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출세를위해정권에충성하 다. 1960년‘3∙15 부정선거’직전일부학도호국

단 간부는 구국학생총연맹이라는 어용 단체를 구성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의 지지 운동

을하 다. 이에일상적인학생동원과학도호국단의횡포에시달리던학생들은 1950년

내내학도호국단의해체를요구하 다.

3) 학도호국단 해체론의 확산

학도호국단에 한 학생들의 반발과 해체 요구는 이미 1950년 전반기부터 있었다.

학생들의 학도호국단 비판은 크게 두 가지 다. 하나는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감투 싸움

과 과도한 학생 규제 및 동원에 한 비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제

기한 내부 비판과 학도호국단 해체 논의 다. 전자와 관련하여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간

부들이 마치 규율 부장처럼 군림하면서 월권 행위를 일삼는다고 꼬집었다. 반( )학생,

반( )정치인인 학도호국단 간부가 학생들을 원치 않는 정치 시위에 동원하면서, 기성

정치인 비슷하게 권모술수를 부리거나 예산 낭비만 일삼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후자와

관련하여 1953년 10월에 열린 학도호국단 중앙학생위원회에서 서울 학교 문리과 학

과 고려 학교의 공동 제안으로“학도호국단은 업적이 미미하고 관료적이므로 해산해

야 한다.”는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두되어 격론 끝에 표결한 결과 32 7로 부결되었

다.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부결되자 서울 학교 법과 학의 제의로 학도호국단의 재정

권 및 집행권 이양을 중앙지도위원회에 요구하 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비록 관철하

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이 서울 생들 사이에서는 학도호국단 해체에 한 목소리가 높

았다.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두할 당시『 학신문』에서 학도호국단에 한 좌담을 마

련했다. 여기서문리과 학의한학생은“학도호국단의공적이있다면행정부가기획하

고 있는 행사에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순응 복종케 하던 것뿐”이라고 질타하면서, 학도

호국단은학생의운동체가아니라관료의운동체에불과하며“학생들은그들의결정지

시에수동적으로응할의무가있을뿐”이라며학도호국단해체를주장하 다.

1954년과 1955년에 서울 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도호국단 간부가 학도호국단의 제

반 시책이나 운 방책, 예산 편성이나 집행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각종 정치 행사

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폐단을 시정하려 하 다. 그러나 현실에서 학생 동원의 폐단은

전혀 시정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계속 두되었지만 언제나 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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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1956년 3 정∙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학도호국단을 통한

학생들의 정치 도구화 문제가 다시금 비판의 상이 되었다. 이때는 학도호국단 해체론

과 더불어 더 현실적인‘개편론’도 제기하 다. 당시 학도호국단 해체론의 근거는 첫

째, 호국단은 이제는 그 사명을 다했다, 둘째, 학도호국단은 학생 자치 활동의 암적 존

재다, 셋째, 교내 학생 활동은 점차로 학도호국단과 관계가 없어지고 있다 등이었다.

1956년 당시 서울 학교 학도호국단 운 위원장이 주장하던 개편론은, 중앙 집권적이

며 행정 체계적인 체제를 오직 학생만으로 조직하는 체제로 개편하여 학도호국단이 각

학교단위로학생자치활동에치중하자는내용이었다.

1957년 서울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폐지 문제를 학문의 자유와 독립과 직결한 문

제로 파악하고 학도호국단 폐지를 위해 더 조직적으로 움직 다. 우선 학도호국단 해체

를 위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여론을 조직하 다. 다음으

로 추진위원회는 충혼탑 제막식을 계기로 각 학교 운 위원장 60여 명과 회의를 갖고,

학도호국단 해체의 전 단계로서 학도호국단 중앙학생위원회와 중앙학생상임위원회를

부활시키고 침체한 학생 자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로 합의하 다. 그러나 이 합

의안은 학도호국단 중앙지도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이 결과 이후 학생들 내부에서 간

간이 학도호국단 해체론이 제기되었지만 진전된 행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0년 중반 이후 학도호국단 운 위원장 선거 때면 학도호국단 해체라는 공약이 자

주 등장하 고, 1959년 말부터 일부 학도호국단 간부는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호소

하면서 1960년 2월 공명선거추진학생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렇듯 1950년 내

내 해체론에 시달리던 학도호국단은 결국 1960년 4∙19 혁명으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학생자치기구로‘학생회’가건설되었다. 학생자치를위한 1950년 서울

생들의지속적인모색과노력이드디어결실을맺은것이다.

제2절 학생회 건설과 단과 학 학생회의 활성화(1960~1975년)

1) 학도호국단 해체와 학생회 건설

4∙19 혁명 이후 사회 전반에 쇄신 움직임이 일어나자 학에서는 어용적인 학도호

제2장 학생회의 변천 799

Page 10: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국단을 해체하고 실질적인 학생 자치 기구로서 학생회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높

아졌다. 1960년 4월 30일 열린 공과 학과 상과 학의 학생 총회에서 학도호국단 해체

를 결의하 으며, 같은 날 열린 문리과 학과 법과 학의 교수회도 학도호국단의 해체

를요구하 다. 이와같은 학의여론을따라당시과도정부(수반: 허정)는 5월 3일 국

무회의 결의를 거쳐 학도호국단을 해체하 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한 후 학생들은 어

용∙무능 교수를 배척하는 학원 숙정 운동을 펴면서 자치적으로 학생회를 조직하기 시

작했다. 먼저 각 단과 학별로 학생회장을 선출하고 학생회칙을 제정하 다. 문리과

학을 제외한 단과 학의 학생회장은 직선으로 선출하고, 문리과 학은 각 과에서 학생

30명당 1명의비율로 의원을뽑아 의원회에서학생회장을선출하 다.

이러한단과 학별학생회구성과동시에, 5월 5일에열린학장회의에서총학생회구

성을 골자로 하는「학생 자치 기구 조직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총장 명의로 각 단과

학에 시달하 다. 5월 23일 12개 단과 학 학생회장들은 전문 3장 27조의‘서울 학

교학생회헌장’을성안하여제1 서울 학교총학생회를출범시켰다. 6월 3일에는각

단과 학 여학생 표들이 모여‘여학생회’를 따로 구성하 다. ‘서울 학교 학생회 헌

장’의 규정에 따라 총학생회는 12개 단과 학 학생회장과 여학생 표 1명으로 구성하

다. 총학생회에는 정∙부의장을 각 1명씩 두고 단과 학 학생회장들이 한 달에 한 번

씩 윤번제( )로 돌아가면서 맡았다. 총학생회 의장은 일반적으로 총학생회장으로

불렸다. 총학생회는매월 1회정기모임을하고여기에서예산, 결산, 예비비지출및

외 표 파견 등 중요 안건을 의결했다. 당시 건설한 총학생회는 1960년 2학기 등록금

중 후원 회비를 국가가 부담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여 관철했고, ‘서울 학교 국민계몽

’를구성하여농촌계몽활동을추진하고‘새생활운동’도벌 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은 각 학교에서 건설한 학생회들을‘재건학생

회’라는 이름으로 개편하려 했지만 학도호국단의 재판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여 계획을

포기했다. 신 서울 는 총학생회에 의결 기관이 없던 제도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

여 1961년 11월 각 단과 학 의원회 의장들로 구성하는‘서울 학교 의원회’를 만

들었다. 그러나 의원회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단과 학 학생회장들이 한 달

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총학생회장을 맡는 제도도 총학생회의 합리적인 운 을 저해했

다. 총학생회장 윤번제는 당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캠퍼스 사정과 서울 학교의 연

립 학적 성격을 반 한 제도 지만, 이로 인해 총학생회의 일관되고 책임 있는 운

과 총학생회 내부의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1962년 7월 학생회 회칙을 개

800 제5부 학생

Page 11: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정하여 총학생회장의 임기를 6개월로 변경하고 단과 학 학생회장 회의와는 별도로

‘집행위원회’를 설치했다. 1963년 3월에는 단과 학 학생회장들이 구성하는 기존의 총

학생회를 의결권을 가진‘본부회의’와 집행권을 가진‘운 위원회’로 나누어 이원화하

다. 총학생회가 이원화하면서 명목상 총학생회장제는 사라졌지만, 본부회의 의장이

총학생회를 표하게 되어 일반적으로 본부회의 의장을 총학생회장이라고 불 다. 하

지만 이러한 이원적 운 체제 역시 의견 일치가 어려워 총학생회의 원활한 운 에 도

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총학생회는 1963년 11월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이화여

자 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는‘5천 쌍 카니발’을 주도하여 학교 안팎의 큰 비판을 받

았다.

총학생회주관행사의 목적은주로 단과 학간 유 를 강화하고서울 생전체의 친

목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중요한 행사로는‘종합 학제’, ‘종합체육 회’, ‘총장기 쟁

탈 종합 마라톤 회’등이 있었고, 그 밖에 각종 봉사 활동, 파월 장병 위문 등의 행사

를전개하 다. 총학생회는 1965년학원풍토의새로운전기를마련하고자각단과 학

의 축제를 통합하여 새로이 제1회‘종합 학제’를 마련하 다. 이 행사에서는 학술 강

연회, 음악회, 좌담회 등이 열렸는데, 학술 강연회는 정치, 경제, 법률,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교수들이 강연하 다. 좌담회의 주제는‘학원의 어제와 오늘’이었다. 제

1회 종합 학제를 계기로 총학생회의 활동은 사회 활동과 문화 활동 이외에 학술 활동

으로 확 하 다. 1966년 제2회 종합 학제는 진리를 지향한 내면적 학구열을 고취한

다는 취지 아래 음악 경연 회, 장기 회, 포크 댄스 파티, 가든파티 등의 행사를 마련

하 다. 그 후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축제는 학가의 혼란과 총학생회 활동의 부진으로

오랫동안 열리지 못했다. 1970년과 1973년에‘ 학 축전’이라는 행사가 잠시 열렸을

뿐이다. 1973년‘ 학 축전’에서는 마라톤 회, 등반 회와 함께‘독도와 한∙일 관

계’를주제로강연회가열렸다.

종합체육 회는 1963년까지 총학생회와 학생처의 공동 주최로 개최했는데, 1964년

이후로 학생2과에서 주관하 다. 종합체육 회는 단과 학의 학생 규모에 따라 공과

학, 농과 학, 문리과 학, 사범 학, 상과 학, 교양학부의 A조와 의과 학, 약학 학,

치과 학, 음악 학, 미술 학, 법과 학, 가정 학의 B조로 나누어 진행하 다. 이

회는 1971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었으나 그 뒤 1974년까지 중단했다가 이후 재

개하여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다. 총학생회가 주관하는‘총장기 쟁탈 종합 마라톤

회’는 1967년 6월 제1회 회를 연 이래 꾸준히 계속되었다. 희망자는 누구나 참가할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01

Page 12: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수 있었으며 매년 2백~3백 명의 학생이 참가하 다. 마라톤 회 참가 학생들은 동숭

동 문리과 학 앞-종로 5가-신설동-고려 학교 앞-미아리 3거리-돈암동-혜화동-문

리과 학정문으로이어지는 14km 코스를달렸다.

총학생회 경비는 학생 수혜 경비 중 일부로 충당하 다. 1971년도 총학생회 경비를

보면, 단과 학의 수혜 경비에서 1인당 20원씩 계산하여 총학생회의 경비로 갹출하

는데, 그 총액은 한 학기당 1만 원 안팎에 불과하 다. 그나마 회의비와 연례적인 위문

행사비를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총학생회를 제 로 운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총학생회가 강력한 집행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총학생회장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총학생회 예산을 폭 늘어나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캠퍼스가

분산해 있고 연립 학적이며 예산이 빈약한 점은 종합화 이전 총학생회가 갖고 있던

근본적인 한계 다. 여기에 학생 운동과 관련한 정치적인 탄압까지 더해져 총학생회는

조직과활동에큰어려움을겪었다.

2) 학생회 조직과 활동의 어려움

서울 학교 학생회의 역사는 학생 운동의 역사와 접한 연관이 있고, 학생 운동의

역사는 한국 정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학생회가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자

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학생 운동과 관련한 외부 압력과 정치적 탄압은 학생

회조직과활동에직접 향을끼쳤다.

우선 1964년과 1965년 한일 회담 반 운동 과정에서 학교 당국이 학생회 간부들을

처벌하고 학생회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아 총학생회의 활동이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그 이후로도 1967년‘6∙8 부정 선거’규탄 운동과‘삼성 수’규탄 운동의 여파로 총

학생회는 오랫동안 구성조차 순조롭지 못하 다. 1968년에 와서야 회칙을 개정하면서

체질 개선과 방향 전환을 꾀하 다. 1968년 4월에 개정한 회칙은, 이전까지 의결 기관

인 본부회의와 집행 기관인 운 위원회의 이원적 운 체제로 말미암아 총학생회가 강

력한 활동을 추진하지 못하던 점을 시정하기 위해 본부회의 의장인 총학생회장에게 권

한을 집중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 다. 즉 종전의 운 위원회를 없애고 사업을 계

획하여 상정하는 기획위원회와 예산 집행을 관장하는 총무위원회를 두어 사무를 분담

하게 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운 하게 했다. 또한 총학생회장은 이전까지 운 위원회 산

802 제5부 학생

Page 13: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하에 있던 각 부서를 직접 관할하면서 각 위원회의 의결 사항에 해 독자적인 인준권

과거부권을가졌다.

시위와 처벌이 잦아 1968년 2학기가 될 때까지 총학생회를 조직하지 못해 1학기에

선출한회장이유임하는경우가많았다. 그러나 1968년 9월총학생회역사상첫번째로

총학생회장이 2학기에 선출되어 6개월의 임기를 마쳤다. 1969년‘3선 개헌 반 운동’

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 단과 학 학생회는 처벌 학생 구제 운동을 벌 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70년 문리과 학에서는 처벌 학생을 구제하는 데 실패한 책임을 물

어 의원회가학생회장불신임안을내는사태가벌어지기도했다.

1971년 정부가 학의 교련 교육을 폭 강화하는 방안을 발표하자 총학생회는 교련

철폐 운동에 앞장섰다. 이렇게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교련 철폐 운동을 계속하자 정부

는 학생회와 학생 활동에 관한 폭적인 규제 방안을 마련했다. 서울 학교 개교기념일

이던 1971년 10월 15일 정부는 서울 지역에‘위수령’을 발동했다. 10월 18일 문교부는

학원 소요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학생 활동을 폭 규제하는 학칙 개정안을 전국

각 학에 시달하 다. 그중 학생회에 관한 규제를 살펴보면, 학생회와 의원회의 회

칙은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임원으로 선출된 자는 총∙학장의 인준을 받아야 했

다. 총장은 학생회 및 그 산하 단체의 활동이 목적에 어긋났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

체하거나 임원 개선을 명할 수 있었다. 그 해 12월 학교 당국은 이 학칙 개정안에 따라

각 단과 학 학생회의 집행부와 의원회 조직, 학생 총회와 임원 선거 절차, 각 기구의

집회 및 의결 정족수 등 구체적인 사안에 해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 다. 단과 학별

특성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 운 하던 단과 학 학생회들은 큰 변화를 맞이했

다. 기존 학생회는 이 원칙에 의거한 새로운 학생회를 구성할 때까지 활동을 정지했고

이에 따라 모든 학생 활동이 극도로 침체했다. 이때부터 학생들 사이에 패배주의적 경

향이나타났고‘마이티’와같은현실도피적카드놀이가등장했다.

1972년이 되자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1학기 중으로 각 단과 학 학생회를 구성하

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원칙에 따른 학생회 구성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학생들 사이에 개정 학칙과 새로운 원칙에 한 반발심과 무관심의 기운이 팽배하 다.

의원회 정족수 미달로 선거관리위원회조차 구성하지 못한 단과 학도 있었고, 어렵

게 선거관리위원회를 구성한 단과 학도 학생들의 입후보 기피 현상으로 회장 선출이

어려웠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단과 학 부분은 학생회장 선거를 마쳤으나 문

리과 학과법과 학의경우는끝내학생회를조직하지못한채그해를넘기고말았다.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03

Page 14: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당시 총학생회는 1972년 3월 제정한‘서울 학교 총학생회 회칙 준칙’(이하 학생회

준칙)에따라새롭게구성했다. 집행부로는정부회장각 1명아래에총무부, 학예부, 기

획부, 체육부, 여학생부를 두었다. 정∙부회장은 운 회의에서 선출하 으며 임기는 한

학기 다. 단과 학 학생회장들로 구성한 운 회의는 사업 계획 및 예산∙결산의 승인,

회계 및 사무 감사 등의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각 단과 학 학생회를 순조롭게 조직하

지 못하자 단과 학 학생회장으로 구성하는 총학생회 역시 제 로 조직하지 못했다. 학

생회 조직이 어려움을 겪자 학생 활동도 부진해졌다. 학생회를 조직하지 못한 단과 학

은 체육 회 등의 학생 행사를 학생과가 주최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그때까지 학생

회와 별도로 독립적인 활동을 벌여 오던 각 서클과 단체도 학생회를 구성해야만 등록을

할수있다는개정학칙의조항때문에활동이자유롭지못했다.

학생회에 한 제약이 여전한 가운데서도 1973년부터 학생들은 학생회 조직에 적극

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바‘10월 유신’이후 더욱 암담해진 정치 상황에서

학생회를 통해 최소한의 학생 활동이나마 벌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 4

월 26일 법과 학 선거를 마지막으로 모든 단과 학에서 학생회장을 선출하고 학생회

를조직했다. 총학생회도 5월에다시조직했다. 비교적순조롭게조직한 1973년학생회

역시 정상적으로 운 하지는 못했다. 10월 유신 이후 1973년부터 시작된 유신 반 시

위와 학생 처벌의 악순환 속에서 10월 4일 법과 학 학생회가 자진 해산하 고, 문리과

학, 의과 학 ,상과 학, 사범 학도 학생회를 해체하거나 학생회 간부들이 구속되었

다. 총학생회와단과 학학생회 부분은다시기능이마비되었다.

1974년에는‘긴급조치’와학생자치활동억제정책속에서도학생회활성화와학원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당시 총학생회 조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전교

차원의 의결 기구인 총 의원회가 없다는 점이었다. 1973년 6월부터 시작한 총학생회

회칙개정작업을이어받아 1974년 9월에총학생회회의에서총 의원회를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총학생회가 추진하던‘구속 학생 석방을 위한 서명 운동’이 좌

절된 후 총 의원회 구성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1975년 1월 관악 캠퍼스 이전을 앞

두고 총학생회는 학생 자치 활동의 침체를 탈피하기 위한 7개항의 요구를 총장에게 건

의했다. 학생회의 민주적 운 에 관한 건의와 더불어 분출하던 학내 전반의 민주화 요

구는 1975년 3월 24일 관악 캠퍼스에서 연 비상 학생 총회와, 3월 26일 공과 학 비상

학생 총회, 28일 농과 학 비상 학생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 다. 학생들이 학원 민주화

요구를 하 지만 1975년 5월 13일‘긴급 조치 9호’선포 후 학생회는 전면 해체되었다.

804 제5부 학생

Page 15: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그리고 4∙19 혁명으로해체한학도호국단이학생회를 신하여다시부활한다.

3) 단과 학 학생회와 여학생회의 활동

종합화 이전 캠퍼스가 분산하고 연립 학적 성격이 강했던 시기에는 총학생회보다

단과 학 학생회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 다. 학생 자치 활동도 주로 단과 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단과 학 학생회는 총학생회와는 별개의 독자 체계로 운 했

다. 단과 학 학생회는 필요에 따라 집행위원회 또는 운 위원회, 의원회를 두었으며

공과 학과 같이‘자매부락 사업위원회’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집행부의 조직도 단과

학의 특성에 따라 구성했으므로 서로 차이가 있었다. 단과 학 학생회 집행부는 개

학생회장, 부회장, 총무부, 학예부, 체육부, 섭외부 등을 두었다. 여학생들의 수가 적은

단과 학은‘여학생부’를따로두었다. 단과 학별로공과 학의‘공작부’, 미술 학의

‘CR부’, 의과 학 치과 학의‘진료부’와 같이 다른 단과 학에는 없는 부서를 설치하

다. ‘총여학생회’와‘교양과정부학생회’도단과 학학생회와비슷한체제 다.

단과 학 학생회의 학내 활동 중 큰 행사는 축제, 신입생 환 회, 체육 회, 학생회

장 선거, 학보 발행 등과 수시로 개최하는 강연회, 음악 감상회 등이었다. 신입생 환

회는 개 음악과 재담, 각종 흥겨운 오락 행사로 엮었는데, 재학생과 신입생의 유 를

돈독히 하는 한편 신입생에게 단과 학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았다. 체육 회는 부분

단과 학에서 1년에 1번씩개최하 다. 체육 회에서는각학과들사이의친목을도모

하기 위해 학과 항 구기 및 육상 경기를 열었다. 축제는 단과 학 학생회의 가장 큰

행사 다. 축제는 각 단과 학 학생회의 주관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열었고 학생은 물론

가족및교직원이참가한가운데각종행사를진행하 다.

단과 학학생회가활성화하면서학생회장선출을위한 선거 열기 또한 뜨거웠다. 하

지만 종종 그 열기가 도를 넘어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매 학년도 초 혹은 2학기 말에

는 단과 학마다 학생회장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했다. 1960년 에는 학생 자치 활동

의 경험이 별로 없어서 학생회장 선거 때마다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선거에 얽힌 잡음

은 소수의 단과 학 학생회장들이 참여한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도 들려왔지만, 학생들

의 직선으로 실시하는 단과 학 학생회장 선거의 경우가 더 심했다. 당시『 학신문』의

표현을 빌리면“선거를 위한 학생회인지 학생회를 위한 선거인지를 종잡을 수 없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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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6: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큼 출신 고교별로, 지방별로 파벌을 형성하고 심지어는 수십만 환을 선거자금으로 낭비

하”는일이있었다. 기성정치인의선거풍습을모방한과도한방법도동원하 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선거 과열과 잡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 다. ‘6∙8 부정 선거’규탄 운동

이한창진행중이던 1967년문리과 학학생회장선거에서는문리과 학선거사상처

음으로 선거관리위원회와 입후보자가 함께한 자리에서 입후보자가 깨끗한 선거를 약속

하는 선서식을 가졌다. 1969년에는 상과 학도 선거 공동 관리제를 채택하 다. 선거

질서를 확립하려는 학생들의 노력으로 1970년 부터는 학생회장 선거에서 과열과 잡

음이많이사라졌다.

한편 서울 학교 여학생들은 학생 구성에서 남학생들에 비해 수가 매우 적고, 학생

활동이 부분 남학생 중심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여

학생들은기존학생회와별도로‘여학생회’를조직하여활동하 다. 여학생회역시 4∙

19 혁명 이후 학생회의 부활과 함께 탄생하 다. 먼저 각 단과 학별로 여학생회를 조

직하고 각 단과 학의 여학생 표들이 모여‘총여학생회’를 구성하 다. 그리고 총여

학생회의 표는 단과 학 학생회장들과 더불어 총학생회에 참여하 다. 이후 여학생

회는 1972년 개정한‘학생회 준칙’에 따라 재편하면서 총여학생회라는 명칭을‘총여학

생부’로 바꾸고 위상도 조금 낮췄지만 조직 체계는 큰 변화 없이 계속 유지했다. 4∙19

혁명이후여학생회를조직하기는하 지만활동은그리활발하지못했다. 1960년 학

생회장 선거를 치열한 선거전 속에서 치를 때도, 여학생회 임원은 선거라는 명칭이 무

색할정도로관심을못받으며선출할때가많았다.

당시 총여학생회의 활동 중 중요한 것으로는 여학생회관의 운 , 신입 여학생 환

페스티벌, 하기 봉사 활동, ROTC 방문, 양로원 방문, 축제‘여울제’개최, 그리고 회지

『여울』간행 등이 있었다. 여학생회관은 1966년 4월에 개관하 으며 동숭동 문리과

학 캠퍼스 옆에 있었다. 백 평 정도의 면적에 마치 가정집같이 꾸민 이 회관에서 여학생

들은 단체 활동을 벌이고 개인적으로 비품을 사용하거나 휴식을 취하 다. 매년 개관일

에는 총장을 비롯하여 학∙처장과 남학생들을 초청하여 오픈 하우스 행사를 했다. 학생

회와 마찬가지로 총여학생회도 매년 여름 방학에 농촌 봉사 활동을 하 다. 경기도 용

문군 다문2리, 광주군 광지원리, 전북 임실군 지장리 등으로 떠났는데 봉사 활동 이후

에는「결과 보고서」와「농촌 실태 조사 보고서」를 발간하 다. 총여학생회는 여학생 축

제인 여울제를 개최하 고 여울제는 1974년까지 3번 열었다. 여기서는 페스티벌, 단과

학별 장기 회, 행운권 추첨, 학술 토론회 등을 열었는데, 학술 토론회의 주제는‘민

806 제5부 학생

Page 17: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족 주체성의 입장에서 본 여성의 자세’, ‘현 사회와 인간 소외’등이었다. 여학생회의

회지인『여울』은 교수 및 여학생의 연구 논문, 시, 수필 등을 실었고 1968년부터 1974

년까지여섯차례간행했다.

여학생회의 활동도 총여학생회보다 각 단과 학 여학생회에서 더 다양하게 벌 다.

전교생이 여학생인 가정 학의 경우에는 미용 강좌, 교내 환경 미화 등의 활동이 유명

했고, 미술 학은 꽃씨 뿌리기, 가면 제작, 파라핀 염색 강습, 라자로마을 방문 등의 활

동을 했다. 당시 총여학생회와 단과 학 여학생회의 활동은 부분‘여성적인 것’을 주

내용으로 하 다. 이는 이후 1980년 여학생들이 의식적으로 남학생들과 동일한 활동

을 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총학생회, 단과 학 학생회, 여학생회에서 벌인

각종학생활동은 1975년학생회가해체되고학도호국단이부활하면서크게위축된다.

제3절 학도호국단 부활과 학생들의 반발(1975~1984년)

1) 학도호국단 부활과 학생 활동의 위축

1975년 3월 관악 캠퍼스 이전을 앞두고 총학생회는 학생 활동의 새로운 활성화 방안

을모색하 다. 이러한움직임의일환으로 1975년 1월 28일학생회는학원분위기의진

작과 학생 자치 및 과외 활동의 활성화를 요청하는 건의문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 다.

동시에 총학생회 회칙의 개정 방안도 마련하여 학교 당국에 건의했다. 학생들은 학칙의

민주적 개정과 함께 학생 활동에 한 규제 완화, 상설편집장회의와 총 의원회 설치를

요구하 다. 그러나 학교 당국이 마련한 개정 학칙 시안은 학생들의 요구를 거의 반

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1975년 3월 24일 관악 캠퍼스에서 비상 학생 총회

를 열고 학칙의 민주적인 개정과 유신 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 후 석방된 학생들

의 조속한 복학을 촉구하 다. 비상 학생 총회는 3월 26일 공과 학 캠퍼스, 28일 농과

학 캠퍼스로 이어졌다. 4월 이후 학생들의 학원 민주화 요구는 더욱 가열되었고 연일

시위를계속했다. 계속된시위로인해학교는 4월 8일부터임시휴교에들어갔다.

1975년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급박한 시기 다.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학생과 시

민의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자 박정희 정권은 안보 의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07

Page 18: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식 강화로 유신체제를 더 공고히 하고자 했다. 정부 방침에 따라 전국적으로 연일 안보

궐기 회가 열렸다. 안보 궐기 회에 나선 연사들은 베트남 다음으로 안보를 위협받

을 곳은 한국이며 따라서 국론 통일이 시급하다고 선전하 다. 서울 학교도 5월 9일,

교수와 학생 약 7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안보 궐기 회를 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

에서정부는 5월 13일그동안발동된긴급조치들을모두포괄하는긴급조치 9호를발

동하 다.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강경책이었다. 긴급 조치 9호는“국민들의 안

보 의식을 높이고 총력 안보 태세와 국민 총화를 굳건히 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헌법

개정 철폐 주장”, “유언비어의 유포”, “학생들의 불법 집회”, “시위와 정치 관여 행위”

등을 엄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국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부정

하는행위 다. 긴급조치 9호발동이후사회전반의분위기는극도로침체하 다.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한 직후인 5월 15일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개강 직전 학장

회의의 이름으로 학생들의 자중자애( )와 면학 분위기 진작을 호소하는 담화문

을 발표했다. 학생 활동을 점점 더 강하게 규제하는 가운데 정부는 5월 20일 전국의 98

개 학 총장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학과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설치할 것과 학

에서 군사 교육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 다. 이날 오후 국무회의는‘학도호국단설치령’

을 의결하 고, 6월 28일 문교부는‘학도호국단설치령 시행 세칙’을 발표하 다. 이에

따라 각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서울 학교도 6월 30일 학도호국단

발 식을 개최했다. 9월 26일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을 열었다.

정부 수립 직후에 창설한 학도호국단이 1960년 4∙19 혁명으로 해산했다가 15년 만에

다시부활한것이다.

부활한 학도호국단은 총장을 단장으로, 학생처장과 학생군사교육단장을 부단장으로

하여 중앙에 지도위원회를 두고 그 밑에 학생제 ( ) 및 운 위원회를 두었다.

학생 제 는 일종의 군사 조직으로 사단, 연 , , 중 , 소 , 분 단위로 편성하

고, 이상의 경우 산하에 총무부, 훈련부, 문예부, 새마을부, 체육부, 지도부, 여학

생부등을두었다.

학도호국단의 성격은 이전 학생회와 전혀 달랐다. 아래에서 살펴볼 학도호국단 운

규정에서 확실히 알 수 있듯이 학도호국단과 학생회는 존재 목적이 달랐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자치 활동을 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학도호국단은 국가 안보 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 다. 한마디로

학도호국단은준( )전시조직이었다. 학도호국단운 규정의제2조(운 방침)에나오

808 제5부 학생

Page 19: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는“단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지도체제를 확립한다.”, “학도호국단의 기본 정신에

배치되는 단체의 파생을 억제한다.”, “학생 군사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여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처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한다.”등의 조항과, 제3

조(임무)에 나오는“국가 안보에 관한 정신 교육 실시”, “학생 군사 훈련의 실시”, “작전

지역에서의 군사 지원 협조 또는 지역 방위 분담“ 등의 조항은 학도호국단의 존재 이유

를 잘 보여 준다. “일사분란한 지도 체제”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학도호국단은 유

신체제를 학에서까지 실현하기 위한 기구 다. 이에 따라 학도호국단은 상명하복(

)을 강조했고, 학도호국단 간부 인선도 상부가 일방적으로 임명했다. 학도호국단

설치령 제10조는“중 장 이상의 제 장(부제 장을 포함)은 일정한 임명 기준에 해당

하는 자 중에서 학생처(과)장인 부단장의 추천으로 단장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었다.

간부의 기준 역시“5학기 이상을 등록하고 품행이 방정하고 사상이 건전한 학생 중 지

도통솔력이있으며이수한성적의평점이 B-(2.7) 이상인자”로한정하 다.

학도호국단 부활 이후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우선 모든

학생 활동은 학도호국단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당시 학칙 제76조의“학도호국단

에 소속되지 아니한 학생 단체를 조직하고자 할 때는 학도호국단지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문교부장관의승인을받아야한다.”라는규정에서알수있듯이, 학도호국단바깥

의 학생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 서클 활동의 경우 등록 과정에서부터 제약이 많

았다. 서클을 조직하려면 매 학년도 개시 25일 전까지 단체 승인 신청서를 작성하고 지

도 위원 취임 승락서, 회칙, 임원과 회원 명단, 사업 계획 및 예산서, 활동 실적 보고서,

종합 단체 결성 동의서 등을 첨부하여 각 단과 학을 거쳐 운 위원장에게 제출하여야

했다. 서클 신청서를 제출하더라도 운 위원장이 분과지도위원회의 심사를 거친 뒤 단

장에게 승인 신청하고, 단장이 지도위원회의 심사를 거친 뒤 승인해야만 서클을 구성할

수있었다. 또회원이 15명이상이고지도교수가 1명이있어야하며반드시“건전한서

클”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어 자유로운 서클 조직과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 다.

특히‘이념 서클’을 만들 경우 지도 교수를 두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서클 지도 교수는

학생들의‘감시자’역할을 해야 했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문책을 당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맡으려는교수는거의없었다.

이 때문에 복잡한 등록 절차를 마쳐도 뚜렷한 이유 없이 승인을 받지 못하는 서클이

많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서클로서 승인을 받았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행사를 하고자 할 경우 일시와 장소를 명시하고 지도 교수의 동의서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09

Page 20: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를 첨부한 계획서를 제출하여 단장이나 분과지도위원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여기

에는 반드시 지도 교수가 참석하여야 했다. 특히 농악, 탈춤 등의 민속 행사나 연극 공

연과 같이 비판적인 성향이 농후한 활동은, 비좁은 장소에 학생이 너무 많이 몰린다는

이유 등으로 승인을 거부하 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학생 활동은 위축할 수밖에 없

었다.

부활한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에게서 1인당 5천 원씩 단비를 강제로 거두어 활동 경비

로 사용하 다. 5천 원 중 2천 원은 체육 진흥비로 책정하 고, 3천 원은 서클 지원비로

책정하 다. 그런데 1979년의 경우 서클 지원비 가운데 실제로 서클에 지원한 액수는

미미하 으며, 행사 지원비의 3배에 가까운 돈을 학도호국단 간부 수련 회비로 사용하

다. 또한 학도호국단이 주관한 축제와 같은 행사 가운데 심포지엄, 강연회 등 학생들

에게 비판 의식과 문제의식을 길러줄 수 있는 행사는 거의 없었고, 오직 체육 행사만 활

발하게 진행했다. 또한 탈춤이나 연극 공연과 같은 행사는 의도적으로 예산 지원을 적

게 해 주거나 제재를 가하 다. 학도호국단의 일방적인 예산 운용은 학생들에게 획일적

인 군 식 사고방식을 유도하 다. 이에 따라 학생들 사이에서는“호국단 시절 동안 잃

은것은비판의식이요, 얻은것은현실과타협하는무사안일주의다.”라는자조적인말

이나오기도했다. 학도호국단에 한학생들의비판과반발은점차거세졌다.

학도호국단이학생들의외면을 받으면서비공식 기구인과회장회의가학생들의 변

자 역할을 하 다. 1977년 4월 말에는‘학생회 부활’을 요구하는 시위도 일어났다. 학

도호국단 간부진 내부에서도 학생들과 유리된 학도호국단 활동에 한 자성의 목소리

가 나왔고 간부 임명제를 선출제(간선제)로 개편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

다. 학도호국단에 한 개혁 움직임은 1977년 2학기에 더 구체화했다. 그 해 10월 정부

는“학도호국단 간부의 임명제는 학원 질서 확립과 전시 비 등을 고려한 것으로서 국

가 안보상 위험이 없어질 때까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선출제 개혁을 일단 거부하

다. 신 11월 30일 학교 당국을 통해 학도호국단 편제를 학과 단위 중심으로 하고, 교

수와 학생이 함께 학도호국단에 참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선책을 제시하 다. 개편

안의 내용은“종래 교련 시간 중심으로 조직된 횡적인 학도호국단 편성을 각 학과 단위

의 종적인 조직으로 바꾼다. 따라서 단과 학은 학과 연락 학생을 학과의 규모에 따라

소 장, 중 장, 장으로 임명한다. 한편 학도호국단 요원의 추천 방법은 학과 요원

의 경우 각 학과에서 당해 학과 학생들의 의견을 집약하여 소∙중∙ 장 요원 및 학

년별 요원을 각 2인 이상으로 하며, 학과 교수회의의 심의를 거쳐 학장에게 추천하도록

810 제5부 학생

Page 21: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한다.”고 되어 있다. 이 개선책은 학생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반 하 지만, 여전히 선

출제 요구를 거부하고 임명제를 고수하 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로 박

정희정권이무너질때까지학도호국단문제는근본적인해결책을찾을수없었다.

2) 10∙26 사태 이후 학생회 재건 시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통령이 피살되자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 동안 긴급

조치의 억압 속에서 자치 활동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학생들은 먼저 학내 민주주의의 구

현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학도호국단 해산

과학생회재건이었다.

10∙26 사태이후전국의각 학은비상계엄령으로휴교했다가 11월 16일개강하

다. 개강직후인 11월 22일서울 과회장들, 편집장들, 서클장들은각각성명서를발표

하여 학원을 조속히 민주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하 다. 특히 이날 열린 8개 단과

학 37개 과회장 연석 회의에서는 과회장, 서클장, 편집장을 중심으로 하는‘학생회부활

추진위원회’(이하 학추위) 결성을 결의하 다. 이에 따라 11월 27일 학생회관 라운지에

서 7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학추위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학추위는 구체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단과 학 표 각 1명, 서클장 표 2명, 편집장 표 1명, 학신문사

표 1명 등으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 다. 집행위원회는 학 자치를 위한 학생회의

부활을 기본 목표로 활동했고 학내 문제 전반에 관해 학생들의 의견을 집약하여 표하

다. 아울러 학내 문제별로 학생활동소위원회, 학내언론소위원회, 학칙개정소위원회

를 구성하여 각각의 문제를 연구, 검토하 고 학생회 구성 문제는 전체 위원이 함께 연

구, 검토하 다.

학추위 집행위원회는 12월 28일 학내 문제에 한 시안을 확정하고, 다음 해인 1980

년 1월 8일그동안의논의결과를집약하여서울 학교총학생회회칙시안을만들었다.

1월 11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9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 이

후 2월 초까지는 단과 학 학생회 구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 다. 2월 5일 인문 학

학생 총회를 시작으로 각 단과 학 학생 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단과 학 학생회

칙을 검토하고 단과 학 학생회 구성에 관해 논의했으며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회 부

활의 당위성을 확인하 다. 그 결과 단과 학 학생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준비위원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11

Page 22: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들을 위촉했다. 2월 12일 모든 서울 생들의 의사를 모으기 위해‘제1차 서울 학생

총회’가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1천2백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각 단과

학 학생 총회에서 논의한 의견을 모은「학원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가 그 자리

에서채택되었다.

학교당국도학생회문제에관한학생들의입장에동의하 다. 2월 1일교수회관에서

학추위 집행위원회 학생들과 학사조정위원회 교수들이 만나 학생회 부활에 한 서로

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 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학생처와 접

촉하여 상호 의사를 교환하고 학생처에서 학생 총회 등 모임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정부는학원민주화를위한 학구성원들의노력을외면했다. 1980년 2월 16일

정부는 학도호국단을 그 로 둔 채 운 방법만을 바꾸는‘학도호국단개정령’을 확정,

발표하 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러한 외부 압력에 관계없이 총학생회 및 단과 학 학생

회 구성 작업을 가속화하 다. 또한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회 부활 등의 당면 과제는

비단 서울 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학원 민주화를 추진하던 다른 학교들과 협력

도 모색하 다. 그리고 2월 22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8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제2

차 서울 학생 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교수님께 보내는 건의문」과 함께 서울 ,

고려 등 5개 학공동명의의「학원민주화를위한공동성명서」를발표했다. 동시에

학도호국단 구성을 저지하고 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등록 기간 중

징수해 오던 학도호국단비의 납부를 거부하고 학생회비를 각 학과에서 자율적으로 수

납하기로결정하 다.

1980년 3월 신학기를 시작하자 3월 3일에서 8일 사이 각 단과 학 학생 총회를 다시

개최하 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문제점을 성토하고 학생회 부활의 당위성을 역설

하면서 새로운 학생회칙을 제정하 다. 부분의 단과 학 학생회칙에 학생 저항권을

명기하 고, 나아가 여학생회 신설, 의원회 권한 확 , 감사권 도입, 학생 언론 편집

권 보장 등을 회칙으로 정했다. 3월 17일부터 각 단과 학에서 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

거를 시작하여 25일에 각 단과 학 학생회 재건을 완료했다. 단과 학 학생회와 함께

총학생회도재건했다. 3월 15일 26동에서열린임시총 의원 회에서학생회칙을확

정하 고, 3월 28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연 총 의원 회의에서 총학생회장을 선출하

다. 총학생회를 재건한 후 그 동안 학생회 재건에 앞장선 학추위는 구성한 지 120일

만에해체하 다.

새로 마련한 회칙에 따라 총학생회는 산하에 총 의원회, 운 위원회, 학생활동위원

812 제5부 학생

Page 23: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회,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총 의원회는 총학생회의 최고 의결 기구로서 각 과회장과

각 계열 표로 구성하며, 총학생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고 사업, 예산, 결산 등을

심의하는 기능과 학칙 개정을 건의하는 권한을 가졌다. 운 위원회는 총학생회장, 부회

장, 단과 학 학생회장, 총여학생회장 등으로 구성하여 총학생회 운 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을 맡고 그 집행을 담당하는 실질적인 업무 기구 다. 운 위원회 산하에는 총무

부, 문예부, 사회부, 체육부 등 집행부가 있었다. 학생활동위원회는 학술 분과와 언론

분과를산하에두고학생활동의자율성을보장하기위한제반업무를수행하 다.

1980년에재건한학생회는 1975년해체될당시의학생회에비해규모를확 하고기

능도 강화하 다. 분산되어 있던 단과 학들이 부분 관악 캠퍼스로 모 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다. 이는 또한 10∙26 사태 이후 사회 전반에 고양된 민주화의 열기를 반

하 다. 재건한 학생회는 곧바로 여러 가지 활동을 개시하 다. 먼저 학생 활동의 방향

을제시하고학생운동의근거를마련하기위한노력으로 1980년 4월모두 24개조항으

로 된‘학생 권리 헌장’시안을 발표하 다. 학생 권리 헌장은 크게 학문의 자유, 학생

활동의 자유, 학생 신분의 보호, 학생의 사회 참여 등을 강조하 다. 학교 당국 역시 총

학생회 활동을 지원하 다. 4월 3일 학장회의는 학도호국단과 지도 교수제 폐지, 학생

자치 기구 인정을 골자로 하는 학칙 개정안을 의결하 다. 문교부에 제출한 이 개정안

은 학생회를 학생 자치 기구로 인정하 다. 또 학생 활동의 사전 심의를 없애며 학생들

의 간행물 발간에 한 규제를 폭 완화하 다. 이러한 학칙 개정안은 당시 학생들뿐

만 아니라 교수들 사이에서도 학원 자유화에 한 열망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학원생들 사이에서도 자치 조직 구성을 위한 논의가 일어났다. 인문 학과 사회과학

학 학원생들을 중심으로 4월 11일‘인문 ∙사회 학원자치협의회’를 구성하여

그 아래 상임위원회와 의원회를 두었다. 학원자치협의회는 학문 상호 간의 긴 한

유 를 위하여 공동 연구 모임을 결성하고 학원 자체의 언로를 확보하기 위해 회보

발간을 추진하 다. 학내 구성원 다수의 지지 속에 출범한 학생회는 기존의 학도호국단

체제에서는 불가능했던 4∙19 기념제를 거행하는 등 학원과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활

발한 활동을 전개하 다. 바야흐로 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서울의

봄’이찾아왔다.

그러나 재건한 학생회는 불투명한 정치 상황 속에서 문교부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학장회의에서 잠정적인 승인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5∙17 쿠데타로 각 학에 휴

교령이 내려지면서 어렵게 재건한 학생회는 다시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이 계속 실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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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인학생 표기구로남았다. 이로써 10∙26 사태이후활발하게전개한학생회재건시

도는일시적으로성공하는듯보 으나결국한순간에좌절되고말았다.

3) 학도호국단의 민주화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군부의 실세가 정치 전면

에 등장하면서 학생회 부활 시도는 좌절되었다. 학생회 부활의 실패는 학도호국단 체제

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국의 각 학이 휴교 상태이던 1980년 7월 문교부는 새

로운‘학도호국단 규칙 준칙’을 각 학에 시달하고 학도호국단의 재조직을 지시하

다. 이에 따라 서울 도 학도호국단을 재구성하 다. 재구성한 학도호국단은 이전의 틀

을 그 로 둔 채 일부 부서의 명칭만 바꿨다. 1980년 이전 학도호국단은 교직원도 포함

하는 조직이었던 데 반해 새로운 학도호국단은 학생들만의 조직이었다. 학년 단위 편성

을 학과 단위 편성으로 바꿨고, 사단, 연 와 같은 편제 명칭을 최고제 (전체), 중간제

(단과 학별), 단위제 (학과별) 등으로 고쳤다. 또 임원 명칭도 과거의 사단장, 연

장 등 군 식 명칭에서 총학생장, 단과 학 학생장, 과학생장 등으로 바꿨다. 모든 임원

을 총장이 임명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과학생장은 학과장의 추천을 받아 총장이 임명

하고, 단과 학 학생장은 과학생장들 가운데서 호선( )하여 학장이 승인하고, 총학

생장은단과 학과과학생장들이호선하여총장의승인을받는방식을택하 다.

1982년부터 과학생장은 학과장의 책임 아래 학과 구성원들의 직접 비 투표로 선출

하 다. 과학생장 선거는 보통 11월 말에 진행했고, 여기서 뽑힌 과학생장들이 모여 12

월 초에 단과 학 학생장을 뽑았다. 그리고 12월 중순 총학생장에 한 간접 선거를 실

시하 다. 이를 통해 선출된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다음 연도의 학도호국단 활동을 이끌

었다. 학생장 후보 자격을 살펴보면, 과학생장은 현재 2∙3학년 학생으로 4학기 이상

등록한 자(단, 의∙치예과는 1학년 2학기 이상 등록), 평점 평균이 2.7이상으로 근신 이

상의 징계를 받은 사실이 없는 자, 사상이 건전하며 지휘∙통솔력이 있는 자로 되어 있

고, 단과 학 학생장은 과학생장인 자, 총학생장은 각급 학생장인 자로 되어 있었다. 과

학생장 선거 절차의 경우, 먼저 입후보자는 선거 5일 전까지 학과 학생 추천서(5명 이

상)와 입후보자 등록 신청서를 학과에 제출했다. 선거 운동은 1회에 한하여 합동 소견

발표회를 할 수 있었으며 개별 선거 운동도 가능하 다. 또 선거관리위원을 선정하여

814 제5부 학생

Page 25: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투개표를관리하도록했다.

학생들이학도호국단간부 선출에 참여하면서학도호국단은조금씩 민주화하기시작

했다. 1981년 2학기 축제를 둘러싸고 학생들과 큰 갈등을 일으켰던 학도호국단은 1982

년도에 학생 참여를 통해 새로운 간부진을 구성한 후 학생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변

하기 위해 노력했다. 2학기에는 처음으로 집회를 주도하 다. 이때 학도호국단 집회는

이전의 집회와 많이 달랐다. 학도호국단은 집회를 열면서 마당극, 노래 공연과 같은 문

화 행사를 함께 주최하여 이전의 집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또한 이전의 집

회와 시위는 한 사람의 주동자가 시작하고 소수가 합류하는 산발적인 방식이었는데, 학

도호국단이 주도하는 집회는 많은 학생이 한꺼번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학도호국단 간부

들은 학도호국단을 이용하여 더 많은 학생들을 집회와 시위에 끌어 모으려 했다. 학도

호국단 집회에서 문화 행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시위로 발전하 다. 학도호국단은 점

차 학생 운동 중심 세력들이 주도하는 학생 자치 조직으로 변하 다. 학내에서 학도호

국단 간부가 이끄는 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주동 학생은 처벌을 받고 강제로 군 에

징집되었다.

1980년 전반기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표 5-2-2>의 학도호국단 예∙결산 내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학도호국단비는 1982년까지 1인당 7천5백 원이었고 1983년부터

는 6천 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렇게 모은 학도호국단 예산은 표에서 드러나듯 부분

학∙예술 활동과 체육 활동에 사용했다. 이는 주로 축제와 관련하여 서클에 지원한 경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15

<표 5-2-2> 서울 학교학도호국단예∙결산내역(1982년) (단위: 천원)

주요항목 세입액 결산액 잔액

행정관리 85,435 46,803 28,632

학예술활동 127,712 98,902 28,810

체육활동 96,552 81,843 14,709

취미및레크레이션활동 350 2,006 -1,656

학풍쇄신및호국단질서확립 28,939 21,844 7,095

새마을사업및봉사활동 12,216 1,610 10,606

각종수련활동강화 4,304 4,084 220

예비비 1,459 1,459

기타 1,190 1,727 -537

계 331,157 258,819 72,338

출전: 『 학신문』1983년 3월 28일

Page 26: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비 으며, 1983년부터는 각 학과에도 배분했다. 반면 봉사 활동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3년과 1984년 예산 역시 같은 양상을 보이는데, 단 학∙예술 활동 예산은 큰 폭의

증가를 보이는 한편 체육활동 예산은 소폭 감소하 다. 이러한 변화는 학 문화에

한 관심이 고조하고 서클 활동이 점차 활성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으며, 학도호국

단의 민주화 경향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민주화한 학도호국단은 이후 학생 운동 발

전과학생회재건의토 가된다.

제4절 학생회 재건과 중화(1984~2006년)

1) 학원 자율화 조치와 학생회 재건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격해지던 1983년 말, 정부는 일련의‘학원 자율화’조치를

취하 다. 1983년 12월 21일 구속 학생 석방, 제적 학생 복교, 해직 교수 복직 등으로

시작한 학원 자율화 조치는 이듬해 캠퍼스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을 철수하면서 더욱 구

체화하 다. 그 동안 강경 일변도의 학원 정책을 고수하던 전두환 정권이 이렇게 입장

을 바꾼 이유는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올라섰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

러나 정부의 학원 자율화 조치는 학원 자율의 실질적이고 핵심적 관건인 학생 자치 조

직에 한 규제를 해제하지 않았고 학칙의 민주적인 개정도 수반하지 않았다. 이 조치

는 전두환 정권이 학생 운동을 근본적으로 탄압할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후

퇴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한마디로 억압을 표면적으로 잠시 풀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학생들은오랜만에찾아온‘유화국면’을최 한이용하고자했다.

교내에 주둔하던 경찰 병력이 철수한 후 캠퍼스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강요한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명실상부한 학생 자치 조직으로서 학생회를 다

시 재건하고자 했다. 특히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은 학생회를 단순한 학생 자치

조직을 넘어 학생 운동의 힘을 중적으로 결집하는 기구로 만들기 원했다. 선도적인

소수 학생들만의 운동을 넘어 학생들의 중적인 힘을 결집하는 데 학생회는 가장 적절

한기구 다.

먼저 학생들은 학원 자율화 조치의 허구성을 지적, 성토하 다. 1984년 3월 6일 도서

816 제5부 학생

Page 27: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관 앞 아크로폴리스(이하 아크로)에서 학도호국단 주최로 약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학원 자율화 조치에 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서 학내의 비민주적인 문제점들에

한 지적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체제를 신할 새로운 학생

자치조직의재건논의로이어졌다. 이어 3월 8일에그동안학생운동으로제적된학생

들로 구성한 서울 복교 책위원회의 주최로‘서울 제적 학생 3차 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제적 학생들은「학원 문제 백서」를 발표하 다. 제적 학생들은「학원 문

제백서」에서학내문제점으로비민주적학칙, 비판이허용되지않는학내언론, 자율성

이 보장되지 않는 학생 활동, 비민주적인 학생 자치 조직 등을 지적하고, 지도 휴학과

강제 징집 폐지, 학원 사찰 중지를 요구하 다. 3월 9일에는 학도호국단 주최로 700여

명이 아크로에 모인 가운데 공개운 위원회를 열었고 학생들은 이 자리에서‘학원자율

화추진위원회’(이하 학자추) 구성을 결의하 다. 또 3월 5일과 9일에는 서클 표자회의

와 편집장회의를 각각 열어 학내 언론 활동에 한 학 당국의 규제 조치 철폐를 주장

하 다.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학원 자율화 조치는 학생들이 그 동안 박탈당했던 학생

자치와학원민주화에 한열망을분출하는기폭제가되었다.

학생 자치와 학원 민주화를향한 학생들의노력은 계속되었다. 각 학과와 단과 학에

서 학자추를 속속 구성하 다. 3월 14일 아크로에서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학원자

율화추진위원회 1차 총회’를 열었고, 이어 3월 16일 위원장을 선출함으로써 학자추 구

성을 마쳤다. 이어 학원 자율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

개하 다. 학내 언론 기관의 협의 기구인 언론협의체와 서클들의 연 기구인 서클연합

회를 각각 구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학자추는 기관지『아크로폴리스』를 창

간하 고언론협의체에서는『자유언론』을발행하 다. 2동, 8동, 12동, 학생회관등학

생들이많이모이는장소에는이른바‘자유의벽’을설치하여각종 자보( )와성

명서, 소식지 등을 게시하 다. 이를 제거하려는 학교 당국과 그에 맞선 학생들 사이에

서 마찰이 있었지만, 이는 1980년 중반 이후 학가를 풍미한‘ 자보 문화’의 출발

점이 되었고 학생 자치와 사회 민주화를 주제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3일에는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교수와 학생의 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생처장은 학자추를 학도호국단의 자문 기구로 인정하면서 기타 학칙 개

정 문제 등을 점진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학자추를 공식적인 학생

자치 조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학교 당국의 소극적 태도에 반발하 다. 4월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17

Page 28: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2일 학도호국단과 학자추 표 12명은 학자추를 공식 기구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면

서 단식 농성을 했다. 학생들은 4월 3일 교수들에게 공개 간담회를 요구했고, 4월 6일

아크로집회와 4월 10~12일‘민주화총회’를열었다. 학생들은이후발표한「학원민주

선언」에서 학원 자율화의 전제가 사회 민주화이기 때문에 앞으로 사회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의했다. 실질적인 학원 자율화는 학내 운동만으로 달성할 수

없으며, 결국 정권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민주화 문제와 연결된다는 논리 다. 학생들

의 이러한 인식은 학교 당국, 나아가서 전두환 정권과 학생들의 첨예한 갈등을 예고하

다.

1984년 여름 방학 기간에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학생 자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학생 표기구개선협의회’를 결성했다. 학도호국단, 학자추, 언론

협의체, 서클협의회의 표들이 참가한 이 기구는 치열한 내부 논의를 거쳐 학생회 재

건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학생 표기구개선협의회는 9월 1일 학생회칙 시안을 만들

어 공표하 고 9월 6일에는 명칭을‘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로 바꾸었다. 9월 14일에는

학생총회를거쳐새로운학생회칙을통과시켰는데이미 1980년‘서울의봄’당시마련

한 학생회 회칙을 상당 부분 그 로 원용하 다. 9월 19일부터는 총학생회장 선출을 위

해입후보자합동유세를시작하는등학생회의재건을위한노력은절정에이르 다.

학생회 재건에는 많은 어려움도 따랐다. 9월 17일 경찰과 정보 기관을 위해 학교에서

정보를 수집한다는 혐의로 학생들이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서울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학생회 재건을 주도하던 일부 학생들은 구속과 제적을

당했다.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거부했고 학교 당국은 경찰력 투입으로 맞섰다. 9월 21일

학생회장 선거 유세 도중 학교 당국은 아크로에 설치한 앰프의 전원을 차단하 다. 이

에 격분한 학생들이 본부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에게 항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9월 25일과 26일의 투표를 통해 이정우(공법학과 4학

년)을총학생회장으로선출하여 23 총학생회를구성했다. 총학생회구성과동시에학

도호국단 간부들은 사퇴하고 해체를 선언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은 자신들

의힘으로학생회를재건하 다.

1984년도 총학생회장 선출 방식은 1975년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 1975년 이전의 총

학생회장은 단과 학 학생회장들이 모여 그들 중에서 선출하 다. 좁은 의미에서 당시

총학생회장은 단과 학 학생회장들의 표 다. 그러나 1984년부터 총학생회장은 단

과 학 학생회장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직접 투표를 통해 선출하 다. 이것은 당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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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9: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생 운동이 지향하던‘학생 운동의 중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 다. 학생회

재건을 계기로 학생 자치가 구현되고 학생 운동도 중화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중

적’학생운동의기반이놓 다.

2) 학교 당국의 학생회 인정

학생회를재건하고학도호국단을해체했지만문교부와학교당국은 학도호국단이외

의 단체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 다. 1984년에 재건한 학생회 회장단은 곧바로

‘프락치 사건’과‘민한당사 농성 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제적당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생회 사수”라는 슬로건 아래 수업 거부, 시험 거부로 저항했고 결국 교내에 경찰이

다시 투입되었다. 나아가 학생회를 불법적인 임의 단체로 규정하면서 학교 당국이 예산

을 지원하지 않아 학생회 활동은 난관에 부딪혔다. 학생들은 학생회비의 자체 수납과,

서적할인판매, 일용품판매등의비상 책을마련하여예산을확보하고자했다.

하지만 학생회 재건에 한 학생들의 열망을 정부가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다. 1985

년 1월 문교부는 호국단의 폐지와 학생회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것은 학

교육협의회의‘학도호국단개편 및 학생자치기구신설을 위한 건의안’을 받아들이는 형

식이었다. 당시 문교부는 학생회 재건의 전제 조건으로 이른바‘문교부 5원칙’을 제시

하 다. 문교부 5원칙은 학생회 회칙 속에 학생들의 정치 활동 금지, 지도위원회 설치,

학생회비 집행의 감독, 학생 표의 자격 제한, 학생 표의 교수회의 참석 금지 등의

조항을 반드시 삽입해야 한다는 요구 다. 이는 당시 자율적인 학생회 구성을 염원하던

다수 학생들의 의사와 거리가 있었다. 학생들은 문교부의 원칙이 자유로운 학생회 활

동을근본적으로제약한다고비판하 다.

학생들은 1985년 2월 19일‘총학생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 다. 3월 4일 개강을 맞

아 자체적으로 학생회칙 시안을 마련하고 학교 당국과 조정 작업을 벌 다. 그러나 학

생들과학교당국은문교부 5원칙의적용문제를놓고의견이맞서합의를하지못했다.

이후 학교 당국이 방관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단과 학 학생회 구성을 마치고 총학생회

구성에착수했다.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총학생회장을뽑기위한합동유세를열었

다. 연일 수천 명의 학생이 아크로에 운집한 가운데 선거 열기가 절정에 이르 다. 당시

각 후보자들은 선거 공약과 연설에서 학내 문제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 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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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0: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직선제로의 개헌”, “광주 항쟁의 진상 조사”, “민주 령 추모 회 개최”등 전두환 정

권이 금기하던 민감한 문제들을 거론하면서 정권의 도덕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사회

민주화를 강조하는 등 정치적 쟁점이 종을 이루었다. 같은 해 2월 12일 총선을 계기

로 분출하기 시작한 민주화에 한 전 국민적 열망은 총학생회 선거에 그 로 반 되었

다. 유세를 마친 후 4월 3일에 끝난 투표에서 김민석(사회학과 4학년), 강 근(산업공학

과 4학년)이 각각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또 같은 날 끝난 총여학

생회장 선거에서 이진순(사회학과 4학년)을 선출하여 총여학생회도 구성하 다. 새로

이출범한총학생회는산하에총무부, 사회부, 문화부, 체육부등의부서와‘민중민주와

민족자주를 위한 투쟁위원회’,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 ‘광주항쟁계승위원회’등의

위원회를설치하 다.

이후 학생회는 활동의 중심을 사회 민주화 실현에 두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 다. 자연히 학생회와 정부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학교 당국이 학생

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학생회비의 지출 등 예산 지원을 차단하여 학생

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경찰은 학생 운동 관련 혐의로 학생회 간부들을 연행,

구속하 다. 총학생회장 김민석을 5월‘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태’로 구속한 것이 표

적인 사례 다. 이후 학생회장의 당선이 곧바로 수배, 도피, 구속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을 계속하 다. 1985년 9월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김용철과 손 진이 당선되었지만 김

용철은당선이전에이미구속된상태 다. 1986년 1학기총학생회장김지룡도유세도

중 수배되었다. 또한 일부 후보들의 공약을 빌미로 학내에 경찰이 투입되면서 선거가

난항을 거듭하기도 했다. 1986년 2학기에는 총학생회장을 비롯하여 사회부장, 여학생

회장 등 집행부 부분이 구속되어 학생회 기능이 마비되었다. 1987년 1학기 선거에도

기호 1번최정규후보와기호 2번이남주후보모두경찰의수배를받았다. 이선거에서

이남주가당선되었지만 8월 12일결국구속당했다.

학생회장과 학생회 간부가 구속, 수배당하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정식

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 다. 그런데 당시에는 어렵게 총학생회가 출범하더

라도 학교 당국이 승인하지 않아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없었다. 1985년 이후 징수한 학

생회비는 졸업생들에게 그 로 돌려 주었다. 학생회의 원활한 운 을 위해서는 학교 당

국의학생회인정과예산지원이무엇보다시급한과제 다. 1987년 6∙10 항쟁으로사

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6∙10 항쟁의 주역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총

학생회 인정을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 1987년 8월 28일 총학생회 운 위원회에서는 총

820 제5부 학생

Page 31: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학생회 회칙의 개정 시안을 마련하 다. 그 후 9월 8일에 열린‘전체학생 표자회의’

(약칭 전학 회)에서 총학생회 회칙을 결정하고 학교 당국과 협상에 임했다. 학교 당국

과협상하는과정에서문제가된것은이른바‘문교부 5원칙’가운데‘학생의정치활동

금지’조항의 총학생회 회칙 반 여부 다. 학생들은 회칙에“총학생회는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며 학의 자치를 완전히 실현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문구를 명

시했지만학교당국은이문구의수정을요구했다. 결국협의과정에서이문구를“사회

의봉사에능동적으로기여한다.”라는완곡한표현으로수정하 다. 이로써총학생회는

학교당국으로부터공식적인인정을받았다.

학교 당국이 총학생회를 인정한 후 개정한 회칙에 따라 총학생회 선거를 다시 치

다. 선거 결과 박홍순과 이종일이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으로 당선하 다. 새로 구

성한 총학생회는 9월 29일 학생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1984년 이후 처음으로공식 출

범식을 가졌다. 학교 당국도 1987년 2학기 학생회 예산으로 7,400만 원을 책정하고 그

배분 비율을 45(총학생회): 5(서클): 50(단과 학 학생회)으로 정하는 한편, 각 단과 학

학생회에등록생의인원과등록비율에따라배분하기로결정하 다. 1975년정부가강

제로학도호국단을설치하면서해산된총학생회는이후 12년만에공식인정을받았다.

1984년 재건하고 1987년 인정받은 총학생회는 지금까지 큰 틀의 변화 없이 서울 를

표하는학생자치조직으로계속이어지고있다.

3) 학생회론과 학생회 선거

1984년 학생회 재건 이후 학생 운동과 학생회는 매우 접한 관련을 맺었다. 학생 운

동의 중화를 모색하는 가운데서 학생회를 재건했고 재건한 학생회는 학생 운동의

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학생회의 역사가 곧 학생 운동사가 되었다. 그러나 재건

당시 학생회는 아직 학생 운동의 중심이 아니었다. 1980년 중반 학생 운동의 중심은

‘삼민투’, ‘민민투’, ‘자민투’등투쟁조직들이었다. 이당시학생회의위치는“학생운

동의 질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인 선도체인‘삼민투’가 학생회 운동의 방향을

지도해야 하며 학생회는 삼민투를 위한 보조적 중 자치 기구이다.”라는 학생회에

한‘삼민투’의 정식화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학생회라는 학생 자치 조직을 통해 학

생 운동이 활성화하는 계기는 마련했으나, 학생회는 학생 운동의 외피로서 도구 역할만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21

Page 32: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을하는조직에머물 다.

하지만 1987년 6∙10 항쟁 과정에서 학생회는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확실히 자리매

김하 다. 학생회는 광범위한 학생들을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운동의 열에 결집

시켰다. 또한 학생회는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의지를 담는 유일한 그릇이었다. 더 이

상 이전의 협소한 선도적 학생 운동 조직으로는 다수 학생들의 의지를 담을 수 없었다.

6∙10 항쟁은 규모 학생 운동을 할 수 있는 틀을 필요로 했다. 학교에서는 총학생회

가, 전국에서는‘전국 학생 표자협의회’(약칭 전 협)같은 학생회 연 조직이 그 역

할을했다. 이때부터학생회를통한 중적학생운동이본격적으로전개되었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학생 운동에서 학생회가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이 높아지면

서 한국 사회의 변혁 방법과 지향을 둘러싸고 입장을 달리하던 학생 운동 세력들, 즉 학

생 운동 정파들은 학생회를 자신들의 노선에 따라 운 하기 위해 학생회 선거에 적극적

으로 나섰다. 각 학생 운동 정파들은 학생회의 위상과 역할에 해 다양한 입장을 내놨

고, 이러한 입장은 학생회 선거 때마다‘학생회론’이라는 이름으로 쟁점이 되었다. 먼

저제기된학생회론은 1987년당시학생운동을주도한‘NL(민족해방) 진 ’의‘전투적

학생회론’이었다. 전투적 학생회론은 학생회의 중요성에 새롭게 착목하 다. NL 진

의 전투적 학생회론은 학생회가 가장 광범위하게 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조직, 중

의식화와조직화의가장유용한공간이라고여겼다. 이는이미 1987년 6∙10 항쟁과정

에서 직접 경험한 내용이었다. 전투적 학생회론은 학생회의 위상을 전체 학생들이 자주

적으로 참여하는 자치 조직으로 규정하 다. 또 학생회 간부를 유능한 학생들로 구성하

여 학생회 간부의 헌신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까지의 비합법적,

선도적 학생 운동에서 학생회를 통해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는 중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취지 다.

전투적 학생회론은 학생회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남아 있는 전

학 회, 운 위원회 등 학생회 기구들은 바로 전투적 학생회론에 입각한 사업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1987년 총학생회와 단과 학 학생회의 경우 집행국이 사실상의 운 ∙집

행 기구 지만, 1988년 2학기에는 총학생회 운 위원회가 상임 의결 기구로 자리 잡으

면서 표 기구와 집행 기구의 위상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이어서 전학 회와 과 학

생회의 역할을 강화하 으며, 한편 부문 계열 운동의 활성화, 과 학회, 과 운 위원회의

안정화등의결체계의하향적확 를적극적으로시도하 다. 또한 1988년 1학기에구

성한 30 총학생회가‘6∙24 총장실 점거 사건’과 관련한 학생회 운 실패의 책임을

822 제5부 학생

Page 33: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지고총사퇴하자, 이를계기로학생회혁신에 해본격적으로고민했다. 1989년 1학기

에구성한 32 총학생회는최초로 1년단위로사업을벌 고 11월선거에서다음해를

책임질 33 총학생회장을 선출하 다. 이때부터 총학생회는 1년 단위의 활동과 11월

선거라는 안정적인 재생산 구조를 확립하 다. 이와 같이 전투적 학생회론은 학생 운동

의 중화와학생회의조직강화에큰역할을했다.

1990년 에 들어서면서 다양해지는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학생회를 단

순한 정치 도구로 보는 전투적 학생회론이 비판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NL 진 내부에

서전투적학생회론을 신하여‘자주적학생회론’이새롭게등장하 다. NL 진 은전

투적 학생회 노선의 정치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학생들과 더욱 긴 하

게 결합해야 한다고 느꼈다. 자주적 학생회론은 학생회 하부 조직을 활성화하여 일반

학생들을 폭넓게 참여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분임 토의’의 활성화와‘총회 투쟁’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자주적 학생회론의 문제의식은 전체 학생을 표하는 자치 기구

인 학생회에 학생들 스스로 일상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학생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요

구를 학생회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회는 학생들의‘자주성’에 기초해

서튼튼하게서고움직여야했다. 자주적학생회론의단초는이미 1988년 2학기에총학

생회 산하에 구성한‘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이하 학자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자추

는 학생들의 자주적 권리를 되찾기 위해 학교 당국에 기성회비의 사용 내역 공개, 소비

조합 운 의 비민주적 요소 제거, 동아리연합회의 자치 공간 확보 등을 요구하 다.

1989년도 1학기 총학생회장에 당선한 문광명 역시“학생회란 학생 중의 이해와 요구

에 근거한 자주적 중 조직이다.”라고 주장하 다. 그러나 자주적 학생회론에 입각한

일상적 사업은 사실상 곁가지에 불과하 다. 학생회는 여전히 정치 사업을 더 우선시

했다.

1990년 33 총학생회를 새롭게 등장한‘PD(민중민주) 진 ’에 내준 NL 진 은

1990년 가을에 치른 34 총학생회 선거 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주적 학생회론을 제기하

다. 선거 당시 NL 진 의 이철상, 조형곤 후보는“학생회는 학생들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하는 조직”이라는 자주적 학생회론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이에 PD 진 에서는 학

생회가 무조건 학생들의 이해관계와 요구에 근거하는 것은“ 중 추수주의”에 불과하

다고 비판하 다. 선거 결과 NL 진 이 승리하 지만, 1991년도 34 총학생회 역시

당시 긴박하게 진행된‘1991년 5월 운동’에 전력을 기울 고 일상적 사업 중 실제로 추

진한 것은 식당 관련 사업 정도밖에 없었다. 1991년 가을에 치른 35 총학생회 선거에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23

Page 34: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서는 학생회론 자체가 선거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PD 진 은‘민주적 학생회론’을 제

시하고 학생회에서 민주주의를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 동안 학생회

를 주도하던 NL 진 에 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NL 진 의 태재준, 송욱 후보는 자주

적 학생회론을 다시 강조하 다. 이들은 학생회가 생활 속의 민주주의를 담는 그릇이자

진보적 삶을 담는 넓은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 결과 NL 진 이 다시 승

리하 다. 하지만 1992년 35 총학생회 역시 총선과 선이라는 정치 일정에 적극적

으로개입하여이전학생회와별다른차이를보여주지못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1993년은 학생회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해 다. 우선

1993년 가을에 치른 37 총학생회 선거에 유례없이 5개의 선거 운동 본부(이하 선본)

가 후보를 출마시켰다. 많은 선본의 난립은 학생 운동 세력들이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현상으로이후선거에서도계속이어졌다. 1990년 이후서울 총학생회선거

에 많은 선본이 출마하는 현상은 다양한 학생 운동 세력이 다른 학교보다 먼저 분화하

고경쟁하며공존하는서울 만의독특한모습과도 접한관련이있다.

또한 1993년 36 총학생회를 맡은 NL 진 은 1992년 가을 36 총학생회 선거 때

부터 자주적 학생회론을 더 심화한‘생활 학생회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생활 학생회론

은 1990년 학생들의 가치관과 생활 양태의 급격한 변화에 발맞춰 제기되었다. 즉, 정

치 운동 중심이던 과거 학생회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반 학생이 중심인 새로운 공

동체 운동을 개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학생회의 중심 이동을 통한 생활 진보의 구

현”은 이후 NL 진 , 특히 서울 를 중심으로 한‘NL 좌파(비주사 NL)’의 기본 입장으

로 자리 잡았다. 1993년 36 총학생회가 단과 학 및 과 학생회 사업의 상 적 자율성

을 보장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 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힌 것이나, 투쟁국을 정치국으

로 전환하고 학원개혁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집행국 체제를 바꾼 것도, 학생회의 중심

이동이라는생활학생회론의구체적인실천사례 다.

1993년 36 총학생회의 생활 학생회론은 1994년 37 총학생회의‘네트워크 학생

회론’으로 더욱 구체화하 다. NL 좌파와 PD 진 의 일부 정파가 결합하여 조직한‘21

세기진보학생연합’은 37 총학생회 선거에서 네트워크 학생회론을 내세워 당선되었

다. 37 총학생회는 학생회 강화라는 주장이 협소한 사고에서 비롯했다는 반성 하에,

다양한 주체가 활동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확 하고 중 생활공간에서 학생들의 참여

를 넓히고자 했다. 네트워크 학생회론도 이런 문제의식에 출발하 다. 네트워크 학생회

론은 총학생회가 교육 개혁, 문예, 언론, 사회 연 등 학생 활동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824 제5부 학생

Page 35: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네트워크를제공해야한다는주장이었다.

생활 학생회론과 네트워크 학생회론은 실천에서 많은 비판에 직면하 다. 생활 학생

회론을 주창한 36 총학생회는 중심 사업을 학원 개혁 사업에만 국한해 기존의 정치

사업을 지나치게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네트워크 학생회론을 주창한 37 총학생

회는 총학생회의 역량 부재로 다양한 학생 활동을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관 짓고 원

활하게소통함이없이파편적으로진행하 다는비판을받았다. 그결과 1994년가을에

치른 38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지난 2년 동안의 생활 학생회론과 네트워크 학생회론

을 어떻게 평가할지, 즉 학생회 위상을 어떻게 재정립할지가 최 쟁점이 되었다. PD

진 의 후보들은 네트워크 학생회론을“단말기 없는 네트워크”라고 비판하고“네트워

크에서센터네트로전환”등을 안으로제시했지만, 네트워크학생회론의강화를주장

한 21세기진보학생연합이 다시 선거에서 승리하 다. 1995년 38 총학생회는 출범식

에 최초로 총장이 참석하고 학교 당국과‘학사행정개선논의모임’을 수시로 갖는 등 적

극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네트워크로 묶을 자

치 역이축소되었다는지적도받았다.

1995년 가을 39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학생회론이 부각되지 않았다. 1995년 광주

학살자 처벌 운동의 열기에 자극받은 각 학생 운동 세력들은 선거 기간 동안 공허하고

추상적인 학생회론 신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중에

서도자신의선본이름을“좌파”라고명명한 PD 진 의다수파(‘ 장정학생연합’주도)

는“주류 질서의 전복”이라는 급진적 슬로건을 앞세워 장기간 총학생회를 장악해 온 21

세기진보학생연합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급진적 슬로건과 선도적 문제 제기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과 학생회 운 계획이 부재하여 1996년 39 총학생회의

활동은 중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많았다. 이후 학생회 선거에서도 학생회론은 더

이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론으로서의 학생회론과 실제로 진행하는 학생회 활

동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1990년 후반 이후 학생회가 학생들의

무관심속에서크게약해졌기때문이었다.

4) 학생회 약화와 비운동권 학생회의 등장

학생 운동 세력은 학생회론을 펼 정도로 학생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1990년 에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25

Page 36: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도 여전히 학생회를 유용한 학생 운동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각 학생 운동

정파는 자파의 주장을 중화하기 위해 학생회를 장악하려 했다. 학생회 선거에 출마하

는 후보들은 부분 특정 학생 정치 조직을 표하 지만, 선거 운동 기간 중 자신의 정

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학생들에게서 표를 얻기 위해 세련되고 모호한

이미지로 자신을 어필하고 지키기 어려운 복지 공약을 남발하 다. 그리고 자파의 조직

역량을 총동원하여 소위“조직표”의 확보에 열을 올렸다. 표면적으로 각 선본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았고 말꼬리 잡기 식의 상호 비방이 난무했다. 학생 운동 세력들끼리의

경쟁은 갈수록 뜨거워졌으나 학생들은 이미지 선거, 조직 선거에 염증을 느꼈다. 여기

에학생들의정치적무관심과보수화까지겹쳐학생회는점차학생들로부터멀어졌다.

그 결과 선거 투표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1992년 65.6%, 1993년 63.7%를 기록한 투

표율은 1994년 가을 38 총학생회 선거에서 55%로 떨어졌고, 급기야 1995년 가을에

치른 39 총학생회 선거 때는 50%를 넘지 못하여(48%) 사상 최초로 연장 투표를 실시

했다. 1996년 가을 40 총학생회 선거에서 54.5%로 투표율이 조금 상승하 으나,

1997년 가을 41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50.3%로 간신히 50%를 넘었고, 1998년 가을

42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50% 밑으로 떨어져(47.4%) 연장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

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견보다는 학생 정치 조직의 입장에 따라 일방적으로 운 되는

학생회의 비민주성에 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당선된 학생 정치 조직의 차이에 따라

총학생회와 각 단과 학 학생회가 불협화음을 빚는 경우가 많았고, 전학 회에서는 총

학생회의 총노선에 한 학생 정치 조직들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학생회 선거

나 학생회 운 은 학생들과 유리된 학생 정치 조직들만의 전유물이 되었고 이 때문에

학생회의 중성은점차약화했다.

동시에 1990년 후반 학교 안팎의 상황은 학생회의 원활한 운 을 어렵게 만들었

다. 내적으로 1995년부터본격화한‘학부제’로학생회체계의기초인과학생회가해체

되었다. 개 과 학생회는 3학년이 표를 맡고 2학년이 중심이 되며 1학년이 기초가

되는 구조 다. 그러나 학부제 또는 모집단위 광역화를 실시하면서 과에서 1, 2학년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학생들은 과 학생회의 안으로 1, 2학년들을 임의로 나누어 묶은

‘반 학생회’를 꾸렸지만, 과거 과 학생회처럼 결속력을 갖고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

다. 외적으로는 1996년 발생한‘한총련 사태’가 학생회의 골간을 흔들었다. 한총련 사

태 이후‘한국 학총학생회연합’(전 협을 계승하여 1993년 조직, 이하 한총련)이 크게

와해하면서 한총련-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총학생회-단과 학 학생회로 이

826 제5부 학생

Page 37: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어지는 학생회의 기본 구조도 같이 흔들렸다. 더 이상 강력한 학생회 연합체는 만들어

지지 않았으며 각 학생 정치 조직별로 소규모 학생회 연합체를 만들어 각개 약진할 뿐

이었다. 또한 이전까지 자동으로 한총련에 속하던 학생회장들이 한총련 불법화로 당선

직후 곧바로 수배, 구속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학생회를 제 로 운 할 수 없었다. 결국

1990년 후반에 들어와 학생회는 학생들의 무관심과 비판의 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

라, 위∙아래를엮어주던고리가다끊기면서위기를맞이하 다.

학생회가 위기에 처해 있긴 했지만 1990년 후반기에는 이전과 비슷한 경향으로 학

생회 선거가 진행되었다. 학생 정치 조직 가운데 조직력에서 우세하던 21세기진보학생

연합과 장정학생연합은 1997년 40 총학생회, 1998년 41 총학생회, 1999년 42

총학생회를 번갈아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1999년 가을 43 총학생회 선거에

서완전히바뀌었다.

1999년 가을 43 총학생회 선거에는 예년과 달리 이른바 비운동권 선본이 둘이나

출마하 다. 그중 한 선본이 도중에 사퇴하여 홀로 남은‘광란의 10월’선본은 비운동

권의 상징으로 부각하 다. ‘광란의 10월’선본은 선본 이름만큼이나 선정적인“X같은

게 X같은 거지”라는 모토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선본은 선거 운동원도

별로 없었고 선거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관례적으로 모든 선본이 참여하는 선본 공

동 발족식과 공동 유세를“학우들과 괴리된 채 진행되는 선본원들만의 잔치”라는 이유

로 불참하고 학신문사가 주관하는 후보자 토론회에도 불참하 다. 신 개인 유세에

서 힙합 그룹의 공연을 갖고 뮤직 비디오를 상 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선정

적인 선본 이름과 모토 이외에는 특별한 정책이나 주장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모토

를 통해 학생 운동 세력들이 운 하는 기존 학생회의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선본 이름을 통해 축제 활성화와 문화 사업 강화를 공약했을 뿐이다. 하지만 투표 결과,

‘광란의 10월’선본은연장투표까지가는접전끝에 장정학생연합선본을 84표차이

로간신히물리치고당선되었다. 1984년총학생회부활이후최초로비운동권학생회가

출범하는순간이었다.

‘광란의 10월’이 운 한 2000년 43 총학생회는“문화 네트워크”와“전자 민주주

의”를 기조로 내세웠지만 그 어느 총학생회보다도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2000년 상반

기 전학 회에서 의원들의 거부로 총기조가 부결되었고 각 단과 학 학생회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총운 위원회(이하 총운위)의 견제도 심했다. 게다가 총학생회 사업은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선본 이름‘광란의 10월’이 상징하듯 총학생회가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27

Page 38: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심혈을 기울인 가을 축제의 경우, 행사 기간 동안 일어난 많은 추문으로 인해 총학생회

는 큰 타격을 입었다. ‘광란의 10월’이라는 선본 이름은 다른 학교와 연 하여 여러

학이 축제를 함께 치루겠다는 공약을 함축하 지만, 실제 가을 축제에서는 다른 학교의

춤 동아리나 밴드가 와서 공연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어떤 공연은 여성 비하적이

라는 비난도 받았다. ‘취업 박람회’의 경우 사전에 기업에서 막 한 돈을 받아 물의를

일으켰고, ‘통일 콘서트’는 보수 정치인과 10 인기 댄스 그룹을 초청했다가 학생들의

반발로 결국 무산되었다. 졸업한 동문들에게만 판매하는 총학생회 발행 신문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또 한 번 물의를 빚었다. 그밖에 총학생회장의 개인 사정으

로 총학생회의 최고 의결 기구인 총운위가 자주 열리지 못하고 그 동안 꾸준히 열린 전

학 회가 처음으로 무산되는 등 임기 말 43 총학생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한마

디로 사상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 실험은 총학생회 담당자들의 준비와 능력 부족으

로비운동권이라는상징만을남긴채실패로돌아갔다.

2000년 가을 44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21세기진보학생연합 선본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무려 7개 선본이 난립하 으며 그중에는 비운동권 선본도 1개가 있었다.

이 선본 역시‘비운동권’이라는 이미지 이외에 특별한 선거 운동이나 정책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선거 결과 3위를 차지했다. 학생들 사이에 만연한 운동권에 한 반감이 비운

동권 선본에 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2001년을 책임진 44 총학생회는 정

치 사업 신‘교육 투쟁’과‘ 학 개혁 운동’에 주력했다. 이는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

심이 커진 현실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와 학생들의 불만이 맞물리는 지점을 포착하여 이

를 매개로 학생들과 소통하려는 시도 다. 이러한 시도는 장정학생연합 선본이 당선

된 2002년 45 총학생회에서도 계속되었다. 2001년 가을 45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모두 7개선본이출마하 고비운동권선본도 2개가출마하 다. 비운동권선본은운동

권에 한 선정적 비판과 만화방 설치와 같은 복지 공약만을 제시하는 데 머물러 선거

결과 5위와 6위에 머물 다. ‘광란의 10월’이후 학생들의 반운동권 정서에 기 어 당

선을 노리는 비운동권 선본이 계속 등장하 지만, 총학생회를 책임질 만한 능력과 비전

을보여주지못한채학생회선거를희화화하 다.

그런데 2002년 가을 46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된 비운동권 선본‘서울 생, 학교

로 돌아오다’(이하‘학교로’)는 이전의 비운동권 선본과는 큰 차이를 보 다. 이들은 선

거 기간 동안 운동권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이“준비된”비운동권임을 강조하 다. 먼저

정후보와 부후보 모두 스누라이프 회장, 생활협동조합 학생위원장 등 다양한 학생 활동

828 제5부 학생

Page 39: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선거 운동원들 또한 부분 도서관자치위원회, 『서울 저널』등

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정책에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선정적이고 비현실

적인 공약보다 학생들의 학 운 참여와 자치 활동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약을

폭넓게 제시하 다. 그 결과‘학교로’선본은 2위 선본보다 무려 3배 가까운 압도적 지

지로 당선되었다. ‘학교로’선본이 꾸린 2003년 46 총학생회는 축제 활성화와 같은

중적 활동에 주력하면서도‘기성회비 반환 운동’과‘이라크 파병 반 동맹 휴업’등

정치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 다. 총학생회 활동에 한 학생들의 반응도 체로 호

의적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46 총학생회의 부총학생회장은 다음 선거에서 47 총학

생회장으로다시당선될수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먼저 2003년 가을 47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

동권 선본이 둘밖에 출마하지 않은 신, 46 총학생회와 연속성을 주장하면서‘학교

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비운동권 선본이 둘이나 출마하 다. 이 선거는 3일 간의 투

표와 2일간의연장투표에도투표율이 46.7%에그쳤다. 이로인해 1984년총학생회부

활이후최초로선거가무산되고다음해봄에재선거를했다. 1995년가을선거에서처

음으로 연장 투표에 들어간 이후 거의 매년 연장 투표를 했지만, 연장 투표에도 투표율

이 50%를넘지못한것은이번이처음이었다. 결국 2004년 4월재선거에서‘학교로, 다

시 쓰는 이야기’선본이 2위와 2배의 표차로 당선되었다. 봄에 치른 선거에 신입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표율은 3일 만에 50%가 넘었다. 재선거 끝에 구성한 47 총학

생회는 46 총학생회와 비슷한 기조로 활동하 고 특히 학생들 간의“네트워크”를 강

조하 다. 하지만 총학생회가 추진한 전문위원회 신설이 전학 회에서 부결되고 도서

관문제해결에서어려움을겪었다.

2년 간의‘학교로’총학생회 운 이후 2004년 가을에 치른 48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장정학생연합선본이‘학교로’선본을 1천표정도의차이로물리치고당선되었

다. 장정학생연합의 당선에는 21세기진보학생연합의 약화 소멸 이후 서울 에서 가

장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장정학생연합의 조직력과“학점 취소제”와 같은 교육 공약,

그리고 2000년 이후서울 학생운동의주요화두인‘여성주의’에 한적극적입장

표명이 주요한 역할을 하 다. 이 선거에서는 총학생회 역사상 최초로 여학생이 총학생

회장으로 당선해 화제가 되었다. 48 총학생회는“교육 공공성”을 기치로 등록금 인상

분 반환, 상 평가제 폐지, 학점 취소제 쟁취 등을 추진하 다. 그 결과 학교에서 등록

금 인상률을 절반 정도 하향 조정하 고, 수강 신청 취소 기간을 수업 주 수 1/2선으로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29

Page 40: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연장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학생들과 공감 를 형성하는 데 부족

했다. 48 총학생회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과 교육

개혁의 차원에서 교육 투쟁을 벌 지만, 사안의 특성상 학교 당국과의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가시적인성과를내기가쉽지않았다.

2005년 가을 49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기존의‘학교로’선본이 출마하지 않은

신, ‘서프라이즈’라는 비운동권 선본이 출마하 다. ‘서프라이즈’선본은 정후보와 부

후보 단 2명만으로 선본을 꾸렸고 선거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단지, 기존 운동권 학

생회가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공약 불이행 시 자퇴를 약속했다. 또한 축

제에서 유명 연예인 무료 섭외, 학 문화 활성화 지원금 1억 원 확보 등“절 복지 실

현”을공약했다. ‘서프라이즈’의행보는이전‘광란의 10월’과유사한면이있었다. ‘서

프라이즈’선본은 장정학생연합 선본과 각축을 벌 고 투표 결과 39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하 다. 선거 규정상 결선 투표에 들어갔으나 결선 투표의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하여 2년 만에 다시 가을 선거가 무산되었다. ‘서프라이즈’선본은 2006

년 봄 재선거에 다시 출마하 지만 장정학생연합 선본은 이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2006년 봄 재선거는 학생들의 무관심 속에서 매우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다시 무산될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총학생회 구성 실패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기 위해 많은 학생들

이 연장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간신히 50%의 투표율을 넘어섰다. 개표 결과

‘서프라이즈’선본은 2위 선본을 1천5백여 표차로 따돌리고 당선하 다. 그러나‘서프

라이즈’선본이 운 하는 49 총학생회 역시 이전‘광란의 10월’선본처럼 초기부터

많은 추문에 시달렸다. 특히 총학생회장의 부적절한 언행과 처신이 언론에 회자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탄핵 움직임이 나타났다. 총학생회장과 관련한 의혹들의 진상 규명을

위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2006년 6월 12일 임시 전학 회에서 총학생회장은 학생

회칙에 따라 탄핵을 당했다. 학생들이 총학생회장을 탄핵한 것은 총학생회 역사상 최초

로 벌어진 불행한 사태 다. 아무런 고민과 준비도 없이 오로지 학생들의 반운동권 정

서에 기 어 무책임한 활동으로 일관하는 몇몇 비운동권 학생회의 모습은 오늘날 학생

회가처한현실을그 로반 한다.

학생회는 약해졌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학생회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2005년 10월

『서울 저널』의 조사에 따르면 학생들은 여전히 학생회에 무관심하고 비판적이었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뜻을 잘 변하는가에 한 질문에 불과 11.7%만이 긍정했고, ‘보

통이다’가 44.2%, ‘별로 잘 못했다’가 35.8%, ‘전혀 못했다’가 8.7% 다. 잘 변하지

830 제5부 학생

Page 41: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못하는 까닭으로는 58.4%가‘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또 47.6%는‘학생들이무관심하기때문’이라고답했다. 학생회사업에 해서도 48.7%

가‘잘 알지 못한다’고 답했고, 15.2%는‘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나 2005년 9월

『 학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학생들의 78.3%는 총학생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단과 학학생회의필요성에공감한학생은이보다더많은 81.4%에이르 다.

물론 학생들은 더 이상 정치 사업 중심의 학생회를 원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74.1%가

총학생회의 중점 사업으로‘도서관 문제나 셔틀버스 문제 해결과 같은 학생 복지 사업’

을 꼽았다. ‘교육권 관련 사업’이라고 답한 비율도 46.0% 다. 반면‘통일 운동, 노동

운동 등 학내외 정치 사업’이라고 답한 비율은 5.5%에 그쳤다. 또한 미래의 바람직한

학생회 상을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6.2%가‘전체 학생들의 의견을 조사하고

표하는 역할‘을, 59.3%는‘학생들의 복지 문제 해결을 학 당국에 요구하는 역할‘을

선택했다. 그러나‘학생회의 정치적인 입장이나 의견을 알리고 설득하는 역할‘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10.2%에 그쳤다. 단과 학 학생회의 경우 65.5%가 학생 복지 사업에 주

력해야 한다고 답했고, ‘공동체 내 소통과 친목을 위한 활동’(45.3%)과‘ 동제나 새터

준비등문화사업’(36.8%)을해야한다는응답도높았다. 앞으로학생회는학생들과소

통할수있는방법을고민하고학생들의삶에기반을둔활동을전개해야할것이다.

학생회는시작부터많은 어려움을겪었다. 이승만 정권은 학생회 신 준군사 조직인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생들의 학문적, 사상적 자유와 자치 활동을 억압했다. 4∙19 혁

명으로 학도호국단이 해체된 후 비로소 학생회가 건설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서울 의

연립 학적 성격으로 인해 총학생회보다 단 학생회의 활동이 활발하 다. 그러나 학

생운동과 관련한 외부 압력과 정치적 탄압에 직면하여 학생회 조직과 활동은 많은 어려

움을 겪었다. 결국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학생회는 강제로 해산하고 그 자리

에 학도호국단이 부활하 다. 학도호국단 부활 이후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 활동은 위

축되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비판하면서 학도호국단 민주화와 학생회 재건을 위

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84년 학생회가 재건되었다. 재건된 학생회는 학생들의 자치 조

직이자 학생 운동의 중심 기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학생회를 도구로 사고하는 학생

운동 세력들의 과열 경쟁과, 학생들의 이해관계보다 정파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비민

주적인 학생회 운 , 학부제나 한총련 사태와 같은 내우외환, 그리고 더 이상 학생회의

깃발 아래 일치단결하지 않는 학생들의 개인주의 등으로 1990년 후반 이후 학생회의

제2장 학생회의 변천 831

Page 42: 제2장 학생회의변천 - snu.ac.kr월에는‘학도호국단조직요강’을발표하였다. 이에따라1월말까지중등학교(현재의 중학교와고등학교) 학도호국단을결성하였고,

향력은점차약화했다. 2000년이후에는비운동권총학생회가여러번구성되기도했

지만, 학생회 선거와 활동에 한 학생들의 무관심은 더욱 커졌다. 학생회가 현재의 위

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학생 운동 세력들은 학생회를 도구

로 보는 과거의 인식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하며, 학생들도 학생회가 복지만을 서비스하

는 기구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고 만들어 가야 할 자치 조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

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학생회가 학교 당국에 학생들의 의사를 반 시킬 수 있는 통

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생회와 학교 당국 사이의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을 줄

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학생들을 학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성숙한 학생회 활동과,

자치∙자유같은권리를누릴자격이있는학생들의책임감이함께필요하다.

832 제5부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