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4
분열을 거듭하는 프랑크 왕국, 그 운명은? 서유럽을 통일했던 故샤를마뉴(742~814)사망하기 1, 프랑크 왕국은 형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왕국의 유일한 상속자가 루트비히 1세와 공동으로 통치되었다. 프랑 크족의 상속법에 의해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유지될 있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제로 즉위된 3만인 817, 루트비히 1프랑크족의 상속법을 무시한 자신의 큰 아들인 로타르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상속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번째 부인의 아들에게도 국가를 나누어 주려 한 루트비히 ◀ 분열된 프랑크 왕국 1세의 변덕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정에 반발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 836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감금하 였으나, 로타르가 국가를 독점하려는 것에 반발한 다른 아들들이 루트비히와 연합 하여 대항함으로써 그는 다시 복위되었다. 이윽고 큰아들 로타르 1세의 영토는 중프 랑크 왕국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아들들 사이의 영토 분쟁은 843베르됭 조약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베르됭 조약을 통해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지위와 중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셋째 아들인 독일인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고, 가장 어린 대머리를은 서프랑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분할은 여기에서 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로타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이 아니 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아들에게 려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 ,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후 중프랑크 왕국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은 맏아들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 왕국과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의 아우스트 라시아(로렌 지방), 막내아들인 카를의 왕국 ( 부르군트와 프로방스 지역) 으로 분할되었다. 3페이지에서 계속... 재미로 보는 프랑스 역사 신문 발행일 : 2015. 11. 13 La Gazette d’Agora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내 프랑스학술학회 아고라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입니다. 바쁜 일상 중에 접하기 쉽지 않은 프랑스어권의 시사 및 생활문화 소식을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정리하여 학과 내 구성원들이 간편하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발행 목적입니다. 2015년 국제지역대학 로컬리티 학술제를 맞이하여 재미로 보는 프랑스 역사 신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프랑크 왕국부터 제 5공화국까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거나 단순히 재미로 고른 주제들을 모았습니다. 읽는 동안 마치 오늘 일어난 기사를 읽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최대한 생동감 있게 쓰려고 노력했으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사 내용 중에는 실제 역사 98%와 재미를 위한 2%의 상상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들 13 배준영 10 강현정 10 류정현 12 김소연 13 정미선 14 박소희 14 이미지 14 이지영 14 최은정 15 윤이지

Transcript of 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Page 1: 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분열을 거듭하는 프랑크 왕국,그 운명은?

서유럽을 통일했던 故샤를마뉴(742~814)가사망하기 1년 전, 프랑크 왕국은 두 형의 이른죽음으로 인해 왕국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루트비히 1세와 공동으로 통치되었다. 프랑크족의 상속법에 의해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황제로 즉위된 지 3년 만인 817년, 루트비히 1세는 프랑크족의 상속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큰 아들인 로타르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상속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두 번째 부인의아들에게도 국가를 나누어 주려 한 루트비히

◀ 분열된 프랑크 왕국

1세의 변덕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한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켜 836년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감금하였으나, 로타르가 국가를 독점하려는 것에반발한 다른 아들들이 루트비히와 연합하여 대항함으로써 그는 다시 복위되었다.이윽고 큰아들 로타르 1세의 영토는 중프랑크 왕국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아들들 사이의 영토 분쟁은 843년베르됭 조약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베르됭조약을 통해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지위와중프랑크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셋째아들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왕국의 왕이 되었고, 가장 어린 ‘대머리’ 카

를은 서프랑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분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로타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물려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그의 사후 중프랑크 왕국은 황제의 지위를물려받은 맏아들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왕국과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의 아우스트라시아(로렌 지방), 막내아들인 카를의 왕국(부르군트와 프로방스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3페이지에서 계속...

재미로 보는 프랑스 역사 신문 발행일 : 2015. 11. 13

La Gazette d’Agora는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내프랑스학술학회 아고라에서 발행하는소식지입니다.바쁜 일상 중에 접하기 쉽지 않은프랑스어권의 시사 및 생활문화 소식을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정리하여 학과 내구성원들이 간편하게 접할 수 있게 하는것이 발행 목적입니다.

2015년 국제지역대학 로컬리티 학술제를 맞이하여 재미로 보는프랑스 역사 신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프랑크 왕국부터 제 5공화국까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 중중요하다고 생각되거나 단순히 재미로 고른 주제들을 모았습니다.읽는 동안 마치 오늘 일어난 기사를 읽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최대한 생동감 있게 쓰려고 노력했으니 조금 부족하더라도 재밌게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기사 내용 중에는 실제 역사 98%와 재미를 위한 2%의 상상력이들어가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들

13 배준영10 강현정10 류정현12 김소연13 정미선14 박소희14 이미지14 이지영14 최은정15 윤이지

Page 2: 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이렇게 세분할이 되어버린 중프랑크왕국은 로타르 2세와 카를의 이른 죽음으로 다시 한 번 분할과 통합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870년, 로타르1세의 유일한 상속자로 남게된 루트비히 2세가 삼촌인 ‘독일인’ 루트비히2세, 그리고 ‘대머리’ 카를과 메르센조약을 맺으면서 로트링겐 지방이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상속에 따른 영토 분쟁은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를물려받은 루트비히 2세가 875년에자신의 왕국을 물려줄 아들이 없이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카를이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황제의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형제간의 오랜영토 분쟁은 ‘독일인’ 루트비히의 사후그의 영토가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고, 877년에 ‘대머리’ 카를마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말더듬이’ 루트비히2세가 왕국을 상속함으로써 잦아드는듯하였다. 그러나 왕국의 국경선은 ‘말더듬이’ 루트비히의 사망을 계기로다시 한 번 분쟁 속에 휘말리게 되고,이러한 분쟁은 2차 베르됭 조약과 리베몽 조약으로 일단락된다. 이로써 샤를마뉴에 의해 완성된 거대한 프랑크 왕국은 동 · 서프랑크 왕국과 중부의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상 · 하부르군트의 다섯 개 왕국으로나뉘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독일인' 루트비히의 막내아들인 '뚱보' 카를 3세에 의해 하부르군트를 제외한전 지역이 재통합되었으나, 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카를 3세가 노르만족과 사라센, 슬라브족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자 조카인 아르눌프가 동프랑크왕국의 통치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 피를 이어받은 카롤링거왕조는 여섯 살에 즉위한 루트비히4세가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대가 끊기고 만다. 샤를마뉴의 대가끊기고 북쪽의 노르만족의 침입으로황폐해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바이에른, 프랑켄, 작센, 슈바벤, 로렌,프리젠의 통치자들이 모여 게르만족의전통에 따라 선출한 프랑켄 공 콘라트가 계승하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에서 제후들이 왕을 선출하고 이러한전통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동안,서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마지막 후계자인 루이 5세의 사후에도왕조적 정통성에 따라 왕위가 계승되었다. 이와 같이, 911년에 프랑켄 공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다른 역사적 발전 단계를 밟게 된다.

911년 바이킹족에게 땅을 빼앗겼던 과거는이제 지나갔다. 샤를 3세가 접전 끝에 바이킹과의 조약 체결을 이끌어내었다. 900년대부터 바이킹족들에게 끝없이 서프랑크 대국을 침략할 때마다 샤를 3세는 말을이끌고 대부분의 전투에 참가했으나,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롤로의지휘 아래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군대에게루앙과 파리, 샤르트르를 잇따라 빼앗겼다.이런 상황에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농민들이크게 반발하며 여론이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지난 8월 26일, 샤를 대군이 이끄는군대가 샤르트르를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치열한 접전 끝에 값진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샤를 3세는 생 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을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바이킹족의 노르망디 지역을 얻어내었다. 또한, 바이킹족의 종교를 로마 가톨릭으로바꾸고 봉신으로 만드는 쾌거를 이루었다. 값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수많은 전투로 황폐해진 영토를 다시 복구하는 데 힘을기울여야 할 것이다.

샤를 3세, 바이킹 격퇴!

샤르트르 지역에서 격퇴...

생 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 체결

충격, 루이 5세 사냥 중 사망

루이 5세가 오늘 오후 피카르디 지방 콩피에뉴숲에서 사냥을 하던 도중 낙마 사고로 사망해프랑스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지난해 986년 왕위에 오른 그는 겨우 1년만에 왕위를 놓게 되었다. 루이 5세는 부왕에게 반항했던 랭스(Reims)대주교 아달베롱(Adalberon)에 대한 재판을시행하기 위해 귀족회의를 소집한 바 있으나회의를 하루 앞둔 오늘 변을 당해 왕의 죽음이사고가 아닐수도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있다. 한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왕위를 계승할후손조차 남기지 못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왕위 계승의 문제로 돌아오는 6월 1일, 대의회가 열릴 예정인데 가장 유력한후보로는 샤를마뉴 대제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Hugues Capet)가 거론되고 있다. 위그 카페의 최측근인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이 세습보다는 선출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만큼 이 주장이 받아 들여지면 서프랑크 왕국의 시대는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위그 카페가 새로운 카페(Capet) 왕조의 초대 왕으로 등극할지는 아직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성인(聖人) 왕 루이 9세 승하 … 숭고했던 그의 삶

이국땅 튀니지에서 숨져 안타까움 더해

그의 생애 업적이 뒤늦게 조명 받고 있어...

마지막 유언은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 프란체스코가 왕관을 쓴 듯한 왕이라고도 불리는 루이9세가 승하했다. 형 샤를의 조언에 따라 튀니지의 태수를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마지막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개종에도 실패하고 그 곳에서 열병까지 얻어 숨지고 말았다. 한편 그의 생애 업적이 알려지면서 이 죽음이 안타까움을더하고 있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9세는 귀족의 반란을 진압해 왕권을 강화하고 어수선했던 행정 조직을 확립하였다. 또한 그는검소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으며,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쳤다. 또한 교황과 친밀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분쟁에서는 공정하게 중립을지켜 일처리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정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성인(聖人)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든 일은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248년 그는 이집트로 십자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카이로 진격 작전을 수행하던 중 고립되어 몸이 쇠약해졌다. 거짓 왕명이 작성 되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었던 루이 9세는왕비와 함께 시리아의 아크레에서 십자군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했다. 결국 1270년 튀니지에 다시 진격하지만 무더위로 열병에걸려 무기조차 들지 못하고 그렇게 그의 꿈은 막을 내렸다. 성지 회복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신을 위해 끝없이 진격했던 왕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초라했다. 백성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십자군 전쟁 중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의 허리는 굽었고 머리는 모두 빠졌다. 그의 외모는 이렇게 볼품없어진 채로 세상을 떠났으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은영원히 남을 것이다.

루이14세, 태양과 같은 권위와황금보다 빛나는 문화를 구축하다 루이 14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그를 오래토록 기억하게 한다.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재상 마자랭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정치 기반을 다졌으나 귀족들이 부르봉 왕조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켜 왕실이 피난을 가는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반란을 3개월 만에 진압하며 그는 오히려부르봉 왕조의 절대왕권 확립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 재상과 함께 프랑스의 경제력을 강화하고 프랑스를 유럽 최대의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정치, 경제 뿐 아니라 문화에도 관심이 상당했던 루이 14세는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 당대의 뛰어난 시인과 예술가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한 바 있으며 낡은 궁전 수리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병원 신축 등 건축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 건축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해 구설수에 올랐으나 화려한 궁전에서의 삶을 일반 귀족들에게도 공개하겠다고밝혀 화제가 되었다. 금으로 덮인 아름다운 궁전 외형 뿐 아니라 궁전 내에서 즐기는 오페라, 발레, 무도회 등 왕의 고품격 취미를 궁금해 한 국내귀족들과 외국 귀빈들은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베르사유 궁전과그의 생활을 동경한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귀족들은 후에 베르사유궁전이 유럽의 그 어떤 건물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후대에도 루이14세를 상징하는 건물이 될 것이라고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죄를 많이 지으셨나요?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구요?

천만에요!

단돈 900프랑에

면죄부를 만나보세요!

당신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분실시 재발급은 불가합니다.

구입 문의는 가까운 성당을 이용하세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비의 땅 인도로 떠나는 여행132박 133일 동안의 크루즈 여행!누보몽드 여행사와 함께 떠나세요!- 크루즈 내 호화 객실 제공 (오션 뷰 300프랑 추가)- 갑판 위 체험 행사 (악천후 시 실내 행사로 대체)- 응급 상비약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Page 3: 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백여년 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간후, 역병의 원인이 목욕을 할 때 발생하는 뜨거운 수증기를 통해 병균이 쉽게몸에 침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져많은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지만 목욕을꺼려한다. 이로 인해 로마 시대부터 사랑받아왔던대중탕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자취를 감췄고 이웃나라 영국은최근 개인 목욕까지도 금지시켰다. 목욕을 하지 않는 대신 사람들은 흰색아마포 옷을 매일 갈아입고 향수를 뿌리는 등 몸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방법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아마도 루이 14세는 다른 사람

“인간은 불행에 처해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제 동생이 쓴 편지에 이렇게 써있더군요.” 라고 前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입을 뗐다. 언젠가부터 불어온 혁명의바람에 자신의 동생을 비롯한 애꿎은 왕족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그녀는 한탄한다. 오스트리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호화스러운 쇤브룬 궁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프랑스, 오스트리아 간의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프랑스로 시집을 갔다는 그녀의 동생.타국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지냈고, 우아한 왕비에서 왜 한순간에 프랑스국민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덕한 여인으로 전락했을까? 카롤리나는 회상한다. “기억나요... 그 애가 15살 때,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을 하게 됐죠. 그리고 4년 후, 스무살도 채 되기전에 남편이 왕위에 올라그 애는 왕비가 되었어요.” 베르사유 궁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느 왕실 여자들과 마찬가지로패션과 화장, 사교를 즐기며 지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였지만 여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는 일 외에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회적, 역사적 의무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 카롤리나는 결혼 후 몇 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태양왕’루이 14세의 비밀 …‘악취왕’?

보다 조금 덜 부지런했나 보다. 익명을요구한 한 궁정 관리인은 루이 14세가세상을 떠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됐다며 루이 14세의악취를 폭로했다. 옷을 매일 갈아입을 형편이 되지 못하는 백성들은 땀을 최소한으로 내기위해 움직임을 조심히 하지만 원하면언제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왕족들과 귀족들은 땀을 흘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펜싱과 같은 운동을 즐겼다고 궁정 관리인은 말했다. “루이 14세는 펜싱이나 무용 등 격렬한 움직임 이후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도 옷을 재빨리 갈아입지 않고 향수

뿌리기도 게을리 했다” 고 그는 밝히며 왕의 악취가 지독해 참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특히 루이 14세는 주치의로부터발치를 권유받아 거의 치아가 없었으며 입에는 늘 피고름이 흐르고 고약한 입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로인해 그는 체취(體臭) 뿐만 아니라구취(口臭)로도 궁정 관리인들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았다고한다. 루이 14세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참아야만 했던 그의 주변 사람들은자신의 몸에 향수를 잔뜩 뿌려 왕의냄새 ‘공격’을 방어했다고 한다.

이 달의 칼럼 : 내 동생 앙투아네트는 억울하다

막중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남편인 루이 16세의 성기능에 문제가 있어 번번이 합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왕비로서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루이 16세가마리 앙투아네트를 임신시키는데 성공하기까지는 무려 7년 반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첫 아이를 낳은 후 결국에는 총네 명의 아이를 낳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동생을 생각하면 카롤리나는 마음이 아프다. 타지에 시집 가서 이제 겨우 프랑스 생활에 적응했나 싶었는데 비보가 들려왔다.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왕실을 끌어내렸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기요틴’이라는 괴상한 기계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죽은 이후에도동생은 계속 욕을 먹고 있다고 카롤리나는 말한다.

“다른 왕비에 비해 특별히 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평범한 제 동생이 어느 날 졸지에 민중의 적이 되어 버렸어요.”

실제로 민중들 사이에서 ‘나라를 말아 먹은 여자’, ‘오스트리아의 창녀’, ‘빚투성이 왕비’ 등의 비방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빵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요”라고 했다는 소문 역시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던 민중들에게 그녀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녀의 언니 말대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정말 잘못이 없을지 모른다. 황제의 딸로 태어나 평생 궁 밖의 생활을 몰랐던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재수 없게도 인류 역사의 기나긴 계급 사회 흐름 속에서 하필 인간의 평등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뿐일 것이다.

지난 1853년 3월 8일에 공포된 나폴레옹 3세 황제의칙령에 의해 오늘 1855년 5월 15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개최 행사는 오늘 오후 1시 경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산업관(Palais de l'industrie)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와4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개최식에서는 나폴레옹 왕자와 나폴레옹 황제의 연설이이어졌다. 만국 박람회는 1851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으로, 이번 파리 만국 박람회는 세계에서 두 번째,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진행되는 행사이다. 이 박람회는 크게 두 섹터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예술 분야, 다른 하나는 산업, 농업 분야이다. 예술 분야에서는 유진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와 같은 화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세공, 석판술, 건축, 회화 등 예술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

1855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

그리고 산업, 농업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배수법, 관개법, 개량법 등을 소개할 예정이여서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박람회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황제가 무역, 산업, 농업 등 각 산업에서 뛰어난 실적이나 발전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메달을수여한다는 것이다. 비록 발트해에서는 프랑스 해군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고크림 전쟁 또한 진행 중이지만 이번 박람회는 국가들 간의경제적인 협력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리가이번 박람회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가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박람회는 11월 15일까지 총 6개월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모습

Page 4: La Gazette d'Agora 2015년 학술제 특별호

국부(國父) 페탱, 종신형 선고 받다

한 때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았던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Pétain)이 어제인 15일, 3주 동안의재판 끝에 형법 제 75조, 적과의 내통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 5월7일과 8일, 양일 동안 독일이 미국과서유럽, 그리고 소련에 차례로 항복을 선언한 후, 임시정부를 수립한샤를 드 골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정부는 전쟁 중 나치에 협력하는 등국가 배반 행위를 일삼은 부역자들을색출, 숙청 작업에 착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국가 원수였던페탱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고 페탱을 처벌하기 위해 7월 23일시작된 재판은 레지스탕스 출신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절반씩 배심원을맡고, 앙드레 모르네가 검사, 쟈크이조르니가 변호인, 폴 몬지보가 주재판사를 맡았다. 검사 측은 1940년 6월의 항복(독일과 휴전)과 7월의 비시정부 수립이모두 불법이었다고 공격했고, 변호인측은 모두가 기존 헌법과 법률 절차에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모르네

검사는 페탱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권력 장악을 위해 전쟁 전부터 이미공화정에 반대하는 극우조직과 긴밀한관계를 가졌고 휴정협정 체결과 전권위임 투표 모두 페탱이 벌인 음모의결과이며 페탱은 오랜 기간 반역을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페탱은 1940년 7월에 자신의권력이 국회의 동의를받아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임을 강조했다. 이 논쟁은 확인하기가 어려워 결국 주된 쟁점은 비시정부가 점령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로 옮겨졌다. 페탱 측은독일과 휴전함으로써 수많은 젊은 프랑스인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프랑스 국토와 북아프리카식민지가 보전되었다고 주장했으나검사 측은 비시정부가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공격하고 히틀러에 넘긴 사실을 지적했다. 8월 14일, 50여 명의 증언과 검사의논고, 변호인의 변론에 이어 피고인페탱의 최후 진술이 있었고 배심원단과 재판부는 무려 7시간이 넘는 열띤토의 끝에 1945년 8월 15일 찬성 14표

와 반대 13표, 단 1표 차로 사형선고를 결정했다. 그러나 피고의 고령(89세)을 참작하여재판부는 사형 집행을 유예하고 피고가 되 섬(l’île d’Yeu)에서 종신형을 복역하는 것으로최종 판결을 내렸다.

1945년 7월~8월 진행된 ‘페탱 재판’

알제리, 132년의 투쟁 끝에 마침내 독립 쟁취

1830년, 당시 프랑스 황제 샤를 10세가 알제리를 병합한지꼭 132년만의 일이다. 지난 3일 오전 10시 38분, 파리에서샤를 드 골 대통령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알제리전역에서 청백색의 알제리기가 시민들의 환호성 속에 게양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 열강들이 잇달아 식민지들을독립시키는 분위기에서, 프랑스도 모로코와 튀니지 등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서는 유독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알제리는 자원이 풍부한 요충지였고그 어느 식민지보다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

1945. 08. 16. 木

1962. 07. 05. 木

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우파 세력들은 알제리를 포기하지않으려 했다. 반면 사회당과 공산당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지지하며 알제리 독립을 주장했다. 식민 통치가 시작된 1830년 이래로 알제리 영토 내에는 프랑스인보다 알제리인이 절대 다수였지만 알제리 사람들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통치 과정에서 알제리사람들에 대한 핍박과 부조리가 계속 되었다. 따라서 식민통치가 강화되면 될수록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저항도그만큼 거세졌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권에 불어온 민족주의 바람은 알제리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더욱 강하게 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알제리를 포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정세를 살펴보면, 주요 원인은본국 내 정치 대립과 알제리 전쟁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1954년 11월 1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최초로 봉기를일으킨 이후 8년 동안 프랑스는 알제리 내부 안정을 위해 싸웠지만 본국 내 의견이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오히려 프랑스내부의 안정을 위협하는 꼴이 되었다. 또 1954년 일어난무장 봉기가 알제리 전역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이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군대를 파병해야 했으며8년 동안 1만 2천 명 가량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전쟁의 여파로 제 4공화국도 무너져 이와 같은 이유로프랑스 정부는 결국 알제리를 식민지로 갖고 있음으로서

얻는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4년 전인 1958년, 은퇴했던 샤를 드 골은 알제리 사태를 해결하고 프랑스 정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계로 복귀했다. 새로운 헌법과 함께 등장한 제 5공화국의 수반이 된 드 골대통령은 3월 19일 에비앙-레-뱅(Évian-les-Bains)에서 알제리측과 ‘에비앙 합의’를 체결하여 알제리와의 전쟁을 멈추고알제리에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드 골 대통령은 특히 지난 협정을 통해 세 가지 ‘실상’이 충족 되었다고 밝혔다. 알제리인들의 자치에 대한 열망, 알제리 내 프랑스인과 프랑스 내 알제리인의 존재 사실, 그리고 양국 간의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1일 알제리는 약 6백만 명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찬성 597만 5,581표, 반대 1만 6,534표,무효표 2만 5,565표로 독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99.72%가독립에 찬성한 것으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알제리 국민이얼마나 독립을 갈구해왔는지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투표결과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이틀 뒤인 3일, 알제리의 독립을공식 선언하였다. 실제 독립일은 1962년 7월 3일이지만 알제리 정부는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된 1830년 7월 5일을 기점으로132주년이 되는 오늘을 공식 독립기념일로 채택했다. 강한 민족정신과 이를 지키기 위한 많은 희생으로얻어진 알제리의 독립은 향후 아프리카 대륙 내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역사적 계기로 평가될 것이다.

독립을 기뻐하는 알제리 시민들

올랑드 대통령, 동거녀 두고 외도 ?

現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9년 동안 만난 동거녀를 두고 유명 여배우와 밀회를 가진 것으로 드러나 화제다. 연예 전문 주간지 클로저는 작년 1월올랑드 대통령이 여배우 줄리 가예와 잦은 밀회를 즐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클로저는 올랑드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헬멧을쓴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파리 시내를가로질러 이 여성의 집을 찾았다며 올랑드 대통령이 한 명의 경호원만 데리고가예의 집으로 이동하는 사진들을 제시했다. 이에 올랑드와 결혼하지는 않았으나 대내외적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있는 올랑드의 기존 애인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는 올랑드의 외도 소식에 격분해그의 집무실에 있던 화병과 시계, 가구 등44억 원 상당의 골동품을 내던져 파손시키는 등 거센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졌다. 이후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올랑드는 그녀가 입원한지 6일만에 병문안을 해 눈길을 끌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염문설과 관련해이렇다 할 입장을 내보이지는 않았지만 줄리 가예와 저녁 식사를 하는 등두 사람이 계속 만나는 모습이 언론을통해 전해졌다. 올랑드와 그의 새 여자친구가 다소조용히 기다리는 반면 기존의 여자친구 트리에르 바일레는 올랑드 대통령의 본모습을 폭로하겠다며 인터뷰에응하고 이 사건과 관련해 회고록을 쓰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여론조사기관 IFOP가 대통령의

염문설이 제기 된 직후 프랑스 성인 1천25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프랑스국민의 77%가 "사생활은 사생활일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은 대통령의 염문설 제기 후 오히려 지지율이 더 올랐다고 주장했다. 현재 올랑드 대통령은 트리에르바일레와 공식적으로 결별한 상태이다.

왼쪽부터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프랑수아 올랑드, 줄리 가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