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농활 기행문pharm.khu.ac.kr/home/khpharm/www/bbs/upload/file/%BC%B1...학창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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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선율 소통과 공유 그리고 화합 동문소식 06 선율 소통과 공유 그리고 화합 학부 소식 1. 지금 하고계신일은 어떤 분야인가요?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저는 위해정보과에 근무하고 있으며, 제외국에서 발 생한 의약품 관련 위해정보가 국내에도 해당하는지를 분석·공유하여 국내 위해요소 사전차단에 기 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어요. 2. 학창시절 기억에남는 일화나 활동이있으신가요? 제게 잊지 못할 즐거움과 더 넓은 시야를 선물해준‘세계문화교육기행’이에요. 대학교 2학년 때 경 희대학교에서 주관하는‘세계문화교육기행’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적지와 북경을 다녀왔어요. 이 경 험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나와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과내 생활에만 익숙하던 제가 전혀 다른 과의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미처 생각 못 했던 많은 분야들을 접할 수가 있었어요. 이후‘금강산기행단’ , ‘캐나다 유학박람회 홍보팀-경희대’ 등 활동을 하며 즐겁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몇가지의 예를 말한 것이지만, 대학생들을 위한 경험의 기회는 주변에 정말 많아요. ‘해외봉사단’ , ‘국토대장정’등 다른 종류의 경험도 많기에 대학생이 아니면 갖질 못하는 이런 특권들을 많이 누리 길 바라고요. (특히, 2~3학년때) 언젠가 멋진 아이템으로‘LG글로버챌린저’와 같은 큰 공모전에서도 우리 후배들이 활약하길 기대할게요. 3. 한약사의 진로와 진로 결정할 때 무엇을 중요시하게 봐야하나요? 개인마다 다르지만, 저는 한약학과가 한방 의약분업을 위해서 한약사 제도가 법제화 되면서 설립되었 기 때문에 한약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로는 한약국 개국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한약국 개국을 기본적 인 진로로 생각하되, 개인이 나아갈 진로에 대해서는 벽을 두지 않았으면 해요. 사회에서 한약사는 수 는 그리 많지 않지만, 현재까지 사회에 진출해 있는 여러 선후배분들이 이미 많은 분야에서 잘 해나가 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체적으로 한약국 개국을 하신 분들도 많이 있으며, 저와 같이 공직에 근무 하는 분들, 그리고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활약하고 계신 분들, 한약과 관련하여 개인 사업을 하시는 분 들 등 한약국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한약사들이 활약하고 있어요. 향후 진로를 결정할 때 입학할 때부터 진로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좋겠으나 대부분은 해 당되지는 않을 것 같구요. 다음으로 직접 경험하며 느껴 보면 도움이 될 것이지만, 분야도 많고 학창시 설에는 이런 경험을 하기에는 제한이 조금 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관심있는 분야에 먼저 나가있는 선 배들에게 상담하거나 방문해서 많이 여쭤보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전에 개인적으 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어떤 부분이 궁금한지를 정리한 다음 방문한다면 더 도움이 될 거에요. 4. 군미필 남자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약학대학내 남학생들은 타단과대학에 비해 군대에 대한 고민이 적은 것 같아요. 주변에는 무심코 시간을 보냈다가 뒤늦게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늦은 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마도 다른 단과 대학 보다 여러가지 선택사항이 있어서겠지요. 제 동기들을 보았을 때, 보통 사병(일반병사, 의무병 등), 장교(ROTC, 학사장교 등), 석사 후 병역특례 등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어요. 병역의무에 대한 선 택이 본인의 진로와도 긍정적으로 연관이 될 수 있기에 각 선택별로 장단점을 고려하여, 가능하면 일 찍 고민하길 바랍니다. 선배님께서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셨다. ※ 장단점 간단정리 사병 장교 병역특례 장점 최단기간 1년9개월, 전역 후 복학가능 인맥, 경제적인 부분, 경험, ROTC 2년4개월, 학사장교 3년 군복무 없이 학업수행 가능. 연구소등 취업시 큰도움, 경제적인 부분 단점 가장 적은 경험 긴 복무기간(ROTC 2년4개월, 학 사장교 3년, 졸업 후 입대 석사2년, 병특 3년 추가필요. 개인 진로에 따라 불필요 할 수 도 있음. 병특 자리가 생각보다 적음. 5.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말씀 남겨주세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학창시절이 참으로 그립네요. 지금 생각해보 면 왜 그때 학창시절을 더 즐기지 못했나 안타까워요. 대학생은 주변 모든 것을 본인의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기에요. 대학교와 사회의 많은 기업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당시 저의 시야는 그보다 좁아서 더 많고 폭넓은 경험을 못해본 것이 조금 아쉬워요. 1학년 때는 학과 생활에 정말 충실하고, 2학년 이후는 과를 벗어나 다른 활동도 많이 하길 추천드려요. 물론 학과 활 동에는 다 적극적으로 참석하시구요. 만약 학창시절 중 혼자하는 해외여행이나 어 학연수, 워킹홀리데이 등 장기간의 경험에 도전 한다면, 부모님 도움없이(또는 최대한 적게) 본 인의 힘으로 꼭 한번 해보는 것을 추천해요. 제가 전체적으로 전공공부와는 먼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지금까지 제가 해드린 이야기도 좋지만, 대학 생활 간 이런 부분도 있으니 다른 경험을 더 많이 해보라는 의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전문지식을 갖춘 한약사가 되기 위한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 록 하면서, 같이 이뤄져야 정말 도움이 될 것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어요. 1. 선배님께서는 식약청에서 어떤 계기로 일하게 되셨나요? 저는 82년 7월 1일 식약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4학년때, 국립보건원 2주간 실습한 경험을 통해서 진로를 정할 수 있 었죠. 약대 졸업 후 국립보건원에서 무보수로 5~6개월 일하 다가 7월 1일에 정식으로 발령 받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있 던 국립보건원이 국립독성연구원과 합쳐져서 98년에 식약청 이 되었어요. 2. 식약청에서 약사를 어떻게 뽑나요? 식약청에서 일하는 약사를 크게 약무직과 연구직으로 두 가지로 나눌수 있어요. 약무직은 행정업무를 하는데, 허가와 사후관리 같은 업무가 주를 이루는 반면 연구직은 연구활동 을 하고, 또한 허가 받기위해 제출된 서류를 심사하는 업무 를 해요. 3. 선배님께서는 식약청에서 어떠한 업무를 맡아 오셨나요? 저는 처음에는 연구직으로 들어왔다가 93년도에는 약무직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약사로서 약무행 정이 크기 때문에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 보건복지부나 국립의료 원같은 곳에서도 일을 할 수 있었죠. 국립의료원에 있을 때, 조제 뿐만 아니라 약무행정에 대한 업무를 주로 했어요. 약구입이나 보관 같 은 것이에요. 특히 병원에 새로운 약이 들어오려면, DC(drug committee, 약제위원회)를 통과해야 한 약이 병원에서 사용될 수 있는데 그 DC를 여는 부서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식약청에서는 대구청에서 감시과에 과장으로 일했고, 보건복지부에서 약무정책과 2년일하기도 했 죠. 그리고 다시 식약청에와서 GMP과장, 지금은 서울청 의료제품안전과장을 맡고 있어요. 4. 지금 계신 의료제품안전과에서 하는 일은? 앞서, 식약청은 본청과 지방청으로 나뉘고 지방청은 신고, 사후관리를 관할하고, 오송에 있는 본청 에서는 의약품정책과 품목 허가(안전성 유효성 검토)를 주로 관할 해요. 서울 지청에 있는 의료제품안전과는 의약품, 의약외품, 의료기기, 화장품을 모두 관할해요. 이 제 품에 대한 신고와 사후관리를 업무를 해요. 그러므로 현장으로 2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감시를 가 고, 제보를 받으면 수시로 감시를 가요. 5. 식약청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GMP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품목별사전 GMP를 직접 도입했던 거에요. 품목별사전 GMP 는 품목허가 받기 전에 GMP인증된 시설에서 허가전에 제품을 3 Lot(의약품제조번호) 제조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한 거에요. 이것은 허가 받고 난 후에도 Lot 간에 균질하게 제조할 수 있도록 보증하는 시스템이에요. 문제가 생기면, 해당 제조번호를 추적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안전성유효성문제와는 다른 문제로 제조과정중 에 문제가 생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에요. 이 사전품목 GMP와 이전 GMP와 차이점은 몇가지가 있는데요. 예전에는 안전성, 유효성 심사, 기 준및시험방법 제도만 있었어요. 그 당시 제조과정을 관리해야 더 효율적으로 의약품의 생산을 관리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면, 고혈압약이 Lot가 바뀌었다고 유효성분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환자에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잖아요. Lot간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제도가 사전품목 GMP에요. 옛날에는 제조지시서와 제조기록서만을 관리했다면, 이제는 직접 이 제조지시서와 제조기록서를 가 지고 3 Lot를 생산해서 허가이후에도 똑같은 제조관리시스템으로 원료약품의 양을 정해서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 제도는 2008년 1월부터 도입이 되었고요. 우리나라에 94년에 GMP를 도입할 당시는 시설을 갖춘 공장과 같이 하드웨어적으로 신경을 썼다 면, 2008년도 부터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6. 식약청 외에 약사가 공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식약청(제조, 안전성, 유효성을 담당)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의약품 유통 업무와 건강보험정책)에서 일할 수 있고요. 그리고 시군구 지역에서는 보건소에 또한 약사가 근무해요. 약무직은 대부분 특채형태로 채용이 되요. 예를 들면, 식약청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참사로 근무 하다가, 식약청 특채에 지원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약무직은 7급부터 시작해요. 뿐만 아니라 제약 회사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면 심사관, 제약회사 공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면 GMP조사관 등으 로 경력을 쌓아서, 식약청에 들어오기도 해요. 또한 정부기관에서 다 관할하기 어려운 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관리공단과 같은 공공 기관에서 맡아 하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도 약사가 필요해요. 7. 식약청에서 근무하시면서 힘든점과 좋은점은? 공직은 적은 인력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되니 야근이 항상 있다는 점이 힘든점이에요. 하지만 기 혼 여성의 출산 후 육아휴직을 쉽게 쓸 수 있는 점, 초봉이 작지만 근속연수에 따라 연봉이 오른다는 점, 퇴직후 연금제도는 좋은점이에요. 8.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할 조언은? 먼저 평균 수명이 100세정도 되는 장수사회를 염두에 두시고, 미래를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 아가길 바라요. 졸업 후 모든 분야에서 자기전공 보다는 외국어가 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도구가 되므로 외국어 공 부는 꼭 해야해요. 전공공부도 하면서, 관심있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과 교류도 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네요. 한편 졸업 후, 어떤 분야에 진출하든 해당 업무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정보를 접하 고, 항상 공부해야합니다. "아침 10시까지 진로마트로 와주세요." 기말고사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이었지만 대원들은 반쯤 감긴 눈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고 첫날 장보기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여름농활의 시작이었다. 농활의 꽃이 라는 명성에 걸맞게 봄, 가을보다 두 배는 더 긴 9박 10일의 여름농활. 늘 가던 고향 내려가듯 가벼운 발걸 음의 선배들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교 첫 여름방학의 시작을 여름농활 행으로 함께하게 된 새내기들, 그리고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농활대장까지 일곱명의 약대 농활대원들은 각 단과대학, 과, 동아리 등으 로 결성된 200여 명의 경희대 농활대의 일원으로 경상북도 상주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약대 농활대의 마을은 상주시 모동면 신천1리. 한동안 우리가 지낼 마을회관에 짐을 풀고 청소도 하고 미리 짜온 식단표도 부엌에 크게 써서 붙이고 나니 좀 정리가 됐다. 아침, 점심, 저녁, 야식을 매일 식사 당번이 손수 요리하니 9박 10일이면 웬만한 요리는 눈으로라도 익는다. 벌레 잡는 벌레주체, 청소하는 청 소주체, 아침에 기상시간 맞춰 깨워주는 기상주체 등 각자가 하나씩 역할을 맡고 있으니 집안이 잘 안 굴 러갈 일이 없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부엌에서는 밥한다고 북적대고, 거실에선 또 파리채 들고 뛰어다 니는 애한테 벌레 떨어진다고 잔소리 해댄다. 문밖에 수돗가에선 빨래하느라 바쁘고 누군 신발장에 누워 자고 있고, 하루 이틀만 지나면 이 마을회관을 나도 모르게 집이라고 부르니 이렇게 정신없이 잘 굴러가 는 집안을 농활이 끝나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여름의 포도밭은 봄과 달랐다. 봄농활 때 우리가 깔아놓은 바닥비닐과 덮어놓은 비가림 사이로 포도나 무에 파란 잎들이 무성히 자라고 포도가 파랗게 크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두번째 농활인 새내기 친구가 이 포도밭 비닐은 자기가 다 씌웠다며 으스대는 모습이 꼭 작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밭 주인 어머님 도 우릴 기억하시고 또 왔냐며 너무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나를 기억하고 계신 분 이 있다니 내 손길이 낯설지 않은 밭이 있다니 매번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이 여기에 있다. 농활, 농민학 생연대활동. 학생들은 농촌을 알고 농민들은 대학생의 현실을 안다는 연대의 의미가 농활책자에도 여러 장 걸쳐 설명되어 있지만 직접 보고 만나는 것만큼 느끼는게 클까 싶다. 아버님 없이 혼자 4천 평의 포도밭을 일구시는 어머님은 수줍게 꺼낸 자식 얘기에 어느새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으셨다. 서울시립대에 다닌다는 큰딸도 유학 준비를 하고 있다는 아들도 우리 또래의 대학생이 었다. 사진으로나마 만나본 미모가 출중한 따님과 우리 늦깎이 새내기 농활대원의 일방적인 러브라인은 뒷풀이 자리에서도 또 하나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엄한 인상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영달아버님도 사실은 마을 최고의 센스쟁이셨다. 하루는 저녁에 전을 부쳐서 댁으로 찾아뵈었는데 우리가 낮에 밭에서 작업하면서 핸드폰 쓰는 법 알려드리러 가겠다고 약속했 던 걸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어설픈 솜씨로 부친 전을 그 자리에서 혼자 다 드시고, 핸드폰 으로 영상통화 하는 법, 문자 메시지 확인하는 법,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몇 번을 복습하시면서 굉장한 학구열을 보이셨다. 다음날 찾아뵈었더니 밤새 누워서 연습했다며 정말 훌륭히 해내셨다. 그리고 농활 홍보 영상 출연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어머님과 다정하게 보여야 한다며 새 옷까지 꺼내 입고 십 년 만에 어머님 어깨에 손을 두르신다는 아버님은 정말 신나 보이셨다. 덕분에 이번 여름농활 목표 중 하 나였던 농활 홍보 영상 만들기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가을에 와서 핸드폰 잘 쓰시는지 또 검 사하겠다는 당부에 역시 영달아버님답게 쿨하게 손을 흔드셨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날 다같이 모여 영 달아버님께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연결에 실패했고 영상통화법은 가을에 가서 다시 알려드리기로 했다. 마을 어머님 아버님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후발대까지 포함하여 20명이 조금 안되는 우리 약대 여름 농활대원들의 화합은 최고였다. 9박 10일을 24시간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하니 친밀함은 당연한 것이 고, 주로 해가 지고 나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서로를 더 알아가고 단합하는 시간을 가졌다. 짝데이트를 통해 서로의 꿈을 돌아보고 추억을 곱씹어보는 시간도 가지고(물론 무작위로 짝을 정해 스물다섯 고학 번 선배와 스물다섯 늦깍이 새내기가 남남 짝이 되는 매우 즐거운 일도 있었다), 옆 마을 농활대와 냇가 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마을회관에 둘러앉아 함께 영화도 봤다. 일과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은 늦은 밤 이 루어지는 평가 시간이었다. 야식에 간단하게 술을 기울이며 오늘 하루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모습을 되 돌아보고 일과를 평가하는 시간이었다. 한 학기 학과 생활을 같이 하며 이미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농촌에서 하루 24시간을 부대끼며 고된 일과를 함께 하다 보니 저마다 어제 보여준 모습과 오늘 보여주는 모습이 달랐다. 늦은 새벽까지 이루어지는 이 평가시간만큼은 자기 자신과 이 가 족들에 몰두하고 서로 몰랐던 모습마저 발견하게 되는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사람 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농활이 아니라면 쉽게 찾지 못했을 기회였다. 즐겁고 신나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는 마을에서 놀부라고 불리우는 형님의 오이밭에 갔다. 고된 작업이라고 하여 일단 선배들 위주로 가서 체험(?) 해보기로 하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오이하우스로 갔다. 오이 수확은 전에 이미 다 끝난 밭에 남아있는 줄기와 비닐, 호스를 다 걷어내고 밭을 새로 일구 는 작업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뒤덮어버린 흙과 먼지, 썩은 오이냄새와 덥고 습한 하우스 안 의 공기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황놀부형님의 태도였다. 작업하는게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말투, 재촉하 는 모습과 우리를 일꾼 부리듯 대하시는 태도에 우리도 점점 입을 닫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고된 작업에 몸은 지쳐버리고 형님에게서 받은 섭섭함과 서운함은 우리를 더욱 기운 빠지게 했다. 그날부터 삼일 동안 그 오이밭에서의 작업이 계속되었는데, 오전 작업을 마치고 마을회관에 돌아와서는 서러워서 눈물을 보 이는 친구도 있었다. 화도 나고 미안한 마음에 애들 보기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날 밤, 황놀부형 님은 우리가 걷어낸 비닐을 내다 판 돈으로 삼겹살을 사오셨다. 너희들이 일한 값이니 너희들 몫이다, 어 렸을 때 힘든 일도 해봐야 한다, 여전히 농담 반 욕을 섞어 가시며 형님은 우리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셨 다. 그렇게 마을 형님들과 우리 농활대원 모두가 저수지 옆에서 삼겹살에 술을 기울이며, 모든 회포를 다 풀었다면 거짓말이고, 황놀부형님과는 애증의 관계로 미운정이 들어버린 밤이었다. 여러 해 전에 다녀간 농활대에게 깊은 인상을 가지고 계신 형님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성격의 우리를 대하는 방 식에서 마찰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대원들과 생각해보았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는 애들도 있고, 아직 썩은 오이 냄새가 다 가시지 않아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애들도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오이는 절대 남기면 안된다고 우스갯소리인지 얘기하는 걸 보면, 그 눈물 섞인 썩 은 오이밭이 좋게든 나쁘게든 모두의 머릿속에 깊게 박힌 것 같다. 얼마 전엔 황놀부형님이 농활대원들 사진에 보고싶다고 댓글을 다셨는데, 글쎄 대원들 반응은 가을농활 가서 다시 봐야할 것 같다. 뭉친 근 육이 풀리면 즐거웠던 느낌만 남는 것이 농활의 매력이니만큼, 오이밭이 없었으면 여름농활이 조금 시시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러 모로 이 9박 10일을 잊지 못하게 해주는 치명적인 사건들이었다. 2012년 나에겐 다섯 번째 농활이었던 이번 여름농활은 여러 모로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다른 농활 대에 비해 약대 농활의 역사는 3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우린 우리만의 방식대로 우리 약대 농활의 색깔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이 여름의 목표였던 ‘다시 오고 싶은 농활 만들기’ . 우린 상주시 모동면 신천1리 마을에 우리의 모습을 많이 남겨두었고, 우리의 추억을 담은 스케치영상을 만들었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가족과 같았던 우리 농활대의 이름을 지었다. ‘패밀리 농약대’ . 선배들은 깃대가 되고 새내기들 은 깃발이 되어 마음껏 펄럭였다. 그렇게 우린 가족이 되었다. 지금 포도밭이 아닌 서울 도심에서도 여전 히 패밀리 농약대가 삼삼오오 모여 여름을 추억하고 가을을 기다리는 걸 보면, 이번 여름농활의 목표는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 같다. 송웅재 [email protected] 여름농활 기행문 이나라 [email protected] 이은진 [email protected]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라요" 약학과 78학번 이승훈 선배님 한약학과 03학번 김민수 선배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여 폭넓은 경험을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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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하고계신일은 어떤 분야인가요?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저는 위해정보과에 근무하고 있으며, 제외국에서 발

생한 의약품 관련 위해정보가 국내에도 해당하는지를 분석·공유하여 국내 위해요소 사전차단에 기

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어요.

2. 학창시절 기억에남는 일화나 활동이있으신가요?

제게 잊지 못할 즐거움과 더 넓은 시야를 선물해준‘세계문화교육기행’이에요. 대학교 2학년 때 경

희대학교에서 주관하는‘세계문화교육기행’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적지와 북경을 다녀왔어요. 이 경

험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나와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과내 생활에만 익숙하던

제가 전혀 다른 과의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미처 생각 못

했던 많은 분야들을 접할 수가 있었어요. 이후‘금강산기행단’,‘캐나다 유학박람회 홍보팀-경희대’

등 활동을 하며 즐겁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몇가지의 예를 말한 것이지만, 대학생들을 위한 경험의 기회는 주변에 정말 많아요.‘해외봉사단’,

‘국토대장정’등 다른 종류의 경험도 많기에 대학생이 아니면 갖질 못하는 이런 특권들을 많이 누리

길 바라고요. (특히, 2~3학년때) 언젠가 멋진 아이템으로‘LG글로버챌린저’와 같은 큰 공모전에서도

우리 후배들이 활약하길 기대할게요.

3. 한약사의 진로와 진로 결정할 때 무엇을 중요시하게 봐야하나요?

개인마다 다르지만, 저는 한약학과가 한방 의약분업을 위해서 한약사 제도가 법제화 되면서 설립되었

기 때문에 한약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로는 한약국 개국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한약국 개국을 기본적

인 진로로 생각하되, 개인이 나아갈 진로에 대해서는 벽을 두지 않았으면 해요. 사회에서 한약사는 수

는 그리 많지 않지만, 현재까지 사회에 진출해 있는 여러 선후배분들이 이미 많은 분야에서 잘 해나가

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체적으로 한약국 개국을 하신 분들도 많이 있으며, 저와 같이 공직에 근무

하는 분들, 그리고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활약하고 계신 분들, 한약과 관련하여 개인 사업을 하시는 분

들 등 한약국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한약사들이 활약하고 있어요.

향후 진로를 결정할 때 입학할 때부터 진로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좋겠으나 대부분은 해

당되지는 않을 것 같구요. 다음으로 직접 경험하며 느껴 보면 도움이 될 것이지만, 분야도 많고 학창시

설에는 이런 경험을 하기에는 제한이 조금 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관심있는 분야에 먼저 나가있는 선

배들에게 상담하거나 방문해서 많이 여쭤보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전에 개인적으

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어떤 부분이 궁금한지를 정리한 다음 방문한다면 더 도움이 될 거에요.

4. 군미필 남자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약학대학내 남학생들은 타단과대학에 비해 군대에 대한 고민이 적은 것 같아요. 주변에는 무심코

시간을 보냈다가 뒤늦게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늦은 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마도 다른 단과

대학 보다 여러가지 선택사항이 있어서겠지요. 제 동기들을 보았을 때, 보통 사병(일반병사, 의무병

등), 장교(ROTC, 학사장교 등), 석사 후 병역특례 등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어요. 병역의무에 대한 선

택이 본인의 진로와도 긍정적으로 연관이 될 수 있기에 각 선택별로 장단점을 고려하여, 가능하면 일

찍 고민하길 바랍니다.

선배님께서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셨다.

※ 장단점 간단정리

사병 장교 병역특례

장점최단기간 1년9개월, 전역 후 복학가능

인맥, 경제적인 부분, 경험, ROTC 2년4개월, 학사장교 3년

군복무 없이 학업수행 가능. 연구소등 취업시 큰도움, 경제적인 부분

단점 가장 적은 경험긴 복무기간(ROTC 2년4개월, 학

사장교 3년, 졸업 후 입대

석사2년, 병특 3년 추가필요.개인 진로에 따라 불필요 할 수 도 있음.

병특 자리가 생각보다 적음.

5.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말씀 남겨주세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학창시절이 참으로 그립네요. 지금 생각해보

면 왜 그때 학창시절을 더 즐기지 못했나 안타까워요. 대학생은 주변 모든 것을 본인의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기에요. 대학교와 사회의 많은 기업에서 대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당시 저의 시야는 그보다 좁아서 더 많고 폭넓은 경험을 못해본 것이 조금 아쉬워요. 1학년 때는 학과

생활에 정말 충실하고, 2학년 이후는 과를 벗어나 다른 활동도 많이 하길 추천드려요. 물론 학과 활

동에는 다 적극적으로 참석하시구요.

만약 학창시절 중 혼자하는 해외여행이나 어

학연수, 워킹홀리데이 등 장기간의 경험에 도전

한다면, 부모님 도움없이(또는 최대한 적게) 본

인의 힘으로 꼭 한번 해보는 것을 추천해요.

제가 전체적으로 전공공부와는 먼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지금까지 제가 해드린 이야기도

좋지만, 대학 생활 간 이런 부분도 있으니 다른

경험을 더 많이 해보라는 의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전문지식을

갖춘 한약사가 되기 위한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

록 하면서, 같이 이뤄져야 정말 도움이 될 것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어요.

1. 선배님께서는 식약청에서 어떤 계기로 일하게 되셨나요?

저는 82년 7월 1일 식약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4학년때,

국립보건원 2주간 실습한 경험을 통해서 진로를 정할 수 있

었죠. 약대 졸업 후 국립보건원에서 무보수로 5~6개월 일하

다가 7월 1일에 정식으로 발령 받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있

던 국립보건원이 국립독성연구원과 합쳐져서 98년에 식약청

이 되었어요.

2. 식약청에서 약사를 어떻게 뽑나요?

식약청에서 일하는 약사를 크게 약무직과 연구직으로 두

가지로 나눌수 있어요. 약무직은 행정업무를 하는데, 허가와

사후관리 같은 업무가 주를 이루는 반면 연구직은 연구활동

을 하고, 또한 허가 받기위해 제출된 서류를 심사하는 업무

를 해요.

3. 선배님께서는 식약청에서 어떠한 업무를 맡아 오셨나요?

저는 처음에는 연구직으로 들어왔다가 93년도에는 약무직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약사로서 약무행

정이 크기 때문에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 보건복지부나 국립의료

원같은 곳에서도 일을 할 수 있었죠.

국립의료원에 있을 때, 조제 뿐만 아니라 약무행정에 대한 업무를 주로 했어요. 약구입이나 보관 같

은 것이에요. 특히 병원에 새로운 약이 들어오려면, DC(drug committee, 약제위원회)를 통과해야

한 약이 병원에서 사용될 수 있는데 그 DC를 여는 부서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식약청에서는 대구청에서 감시과에 과장으로 일했고, 보건복지부에서 약무정책과 2년일하기도 했

죠. 그리고 다시 식약청에와서 GMP과장, 지금은 서울청 의료제품안전과장을 맡고 있어요.

4. 지금 계신 의료제품안전과에서 하는 일은?

앞서, 식약청은 본청과 지방청으로 나뉘고 지방청은 신고, 사후관리를 관할하고, 오송에 있는 본청

에서는 의약품정책과 품목 허가(안전성 유효성 검토)를 주로 관할 해요.

서울 지청에 있는 의료제품안전과는 의약품, 의약외품, 의료기기, 화장품을 모두 관할해요. 이 제

품에 대한 신고와 사후관리를 업무를 해요. 그러므로 현장으로 2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감시를 가

고, 제보를 받으면 수시로 감시를 가요.

5. 식약청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GMP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품목별사전 GMP를 직접 도입했던 거에요. 품목별사전 GMP

는 품목허가 받기 전에 GMP인증된 시설에서 허가전에 제품을 3 Lot(의약품제조번호) 제조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한 거에요.

이것은 허가 받고 난 후에도 Lot 간에 균질하게 제조할 수 있도록 보증하는 시스템이에요. 문제가

생기면, 해당 제조번호를 추적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안전성유효성문제와는 다른 문제로 제조과정중

에 문제가 생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에요.

이 사전품목 GMP와 이전 GMP와 차이점은 몇가지가 있는데요. 예전에는 안전성, 유효성 심사, 기

준및시험방법 제도만 있었어요. 그 당시 제조과정을 관리해야 더 효율적으로 의약품의 생산을 관리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면, 고혈압약이 Lot가 바뀌었다고 유효성분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환자에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잖아요. Lot간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제도가 사전품목 GMP에요.

옛날에는 제조지시서와 제조기록서만을 관리했다면, 이제는 직접 이 제조지시서와 제조기록서를 가

지고 3 Lot를 생산해서 허가이후에도 똑같은 제조관리시스템으로 원료약품의 양을 정해서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 제도는 2008년 1월부터 도입이 되었고요.

우리나라에 94년에 GMP를 도입할 당시는 시설을 갖춘 공장과 같이 하드웨어적으로 신경을 썼다

면, 2008년도 부터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6. 식약청 외에 약사가 공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식약청(제조, 안전성, 유효성을 담당)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의약품 유통 업무와

건강보험정책)에서 일할 수 있고요. 그리고 시군구 지역에서는 보건소에 또한 약사가 근무해요.

약무직은 대부분 특채형태로 채용이 되요. 예를 들면, 식약청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참사로 근무

하다가, 식약청 특채에 지원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약무직은 7급부터 시작해요. 뿐만 아니라 제약

회사 근무했던 경력이 있다면 심사관, 제약회사 공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면 GMP조사관 등으

로 경력을 쌓아서, 식약청에 들어오기도 해요.

또한 정부기관에서 다 관할하기 어려운 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관리공단과 같은 공공

기관에서 맡아 하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도 약사가 필요해요.

7. 식약청에서 근무하시면서 힘든점과 좋은점은?

공직은 적은 인력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되니 야근이 항상 있다는 점이 힘든점이에요. 하지만 기

혼 여성의 출산 후 육아휴직을 쉽게 쓸 수 있는 점, 초봉이 작지만 근속연수에 따라 연봉이 오른다는

점, 퇴직후 연금제도는 좋은점이에요.

8.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할 조언은?

먼저 평균 수명이 100세정도 되는 장수사회를 염두에 두시고, 미래를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

아가길 바라요.

졸업 후 모든 분야에서 자기전공 보다는 외국어가 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도구가 되므로 외국어 공

부는 꼭 해야해요. 전공공부도 하면서, 관심있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과 교류도 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네요.

한편 졸업 후, 어떤 분야에 진출하든 해당 업무에 대한 공부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정보를 접하

고, 항상 공부해야합니다.

"아침 10시까지 진로마트로 와주세요." 기말고사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이었지만 대원들은 반쯤 감긴

눈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고 첫날 장보기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여름농활의 시작이었다. 농활의 꽃이

라는 명성에 걸맞게 봄, 가을보다 두 배는 더 긴 9박 10일의 여름농활. 늘 가던 고향 내려가듯 가벼운 발걸

음의 선배들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교 첫 여름방학의 시작을 여름농활 행으로 함께하게 된 새내기들,

그리고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농활대장까지 일곱명의 약대 농활대원들은 각 단과대학, 과, 동아리 등으

로 결성된 200여 명의 경희대 농활대의 일원으로 경상북도 상주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약대 농활대의 마을은 상주시 모동면 신천1리. 한동안 우리가 지낼 마을회관에 짐을 풀고 청소도 하고

미리 짜온 식단표도 부엌에 크게 써서 붙이고 나니 좀 정리가 됐다. 아침, 점심, 저녁, 야식을 매일 식사

당번이 손수 요리하니 9박 10일이면 웬만한 요리는 눈으로라도 익는다. 벌레 잡는 벌레주체, 청소하는 청

소주체, 아침에 기상시간 맞춰 깨워주는 기상주체 등 각자가 하나씩 역할을 맡고 있으니 집안이 잘 안 굴

러갈 일이 없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부엌에서는 밥한다고 북적대고, 거실에선 또 파리채 들고 뛰어다

니는 애한테 벌레 떨어진다고 잔소리 해댄다. 문밖에 수돗가에선 빨래하느라 바쁘고 누군 신발장에 누워

자고 있고, 하루 이틀만 지나면 이 마을회관을 나도 모르게 집이라고 부르니 이렇게 정신없이 잘 굴러가

는 집안을 농활이 끝나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여름의 포도밭은 봄과 달랐다. 봄농활 때 우리가 깔아놓은 바닥비닐과 덮어놓은 비가림 사이로 포도나

무에 파란 잎들이 무성히 자라고 포도가 파랗게 크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두번째 농활인 새내기 친구가

이 포도밭 비닐은 자기가 다 씌웠다며 으스대는 모습이 꼭 작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밭 주인 어머님

도 우릴 기억하시고 또 왔냐며 너무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나를 기억하고 계신 분

이 있다니 내 손길이 낯설지 않은 밭이 있다니 매번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이 여기에 있다. 농활, 농민학

생연대활동. 학생들은 농촌을 알고 농민들은 대학생의 현실을 안다는 연대의 의미가 농활책자에도 여러

장 걸쳐 설명되어 있지만 직접 보고 만나는 것만큼 느끼는게 클까 싶다.

아버님 없이 혼자 4천 평의 포도밭을 일구시는 어머님은 수줍게 꺼낸 자식 얘기에 어느새 자랑하는데

정신이 없으셨다. 서울시립대에 다닌다는 큰딸도 유학 준비를 하고 있다는 아들도 우리 또래의 대학생이

었다. 사진으로나마 만나본 미모가 출중한 따님과 우리 늦깎이 새내기 농활대원의 일방적인 러브라인은

뒷풀이 자리에서도 또 하나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엄한 인상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영달아버님도 사실은 마을 최고의 센스쟁이셨다. 하루는 저녁에 전을

부쳐서 댁으로 찾아뵈었는데 우리가 낮에 밭에서 작업하면서 핸드폰 쓰는 법 알려드리러 가겠다고 약속했

던 걸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어설픈 솜씨로 부친 전을 그 자리에서 혼자 다 드시고, 핸드폰

으로 영상통화 하는 법, 문자 메시지 확인하는 법,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몇 번을 복습하시면서

굉장한 학구열을 보이셨다. 다음날 찾아뵈었더니 밤새 누워서 연습했다며 정말 훌륭히 해내셨다. 그리고

농활 홍보 영상 출연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어머님과 다정하게 보여야 한다며 새 옷까지 꺼내 입고 십

년 만에 어머님 어깨에 손을 두르신다는 아버님은 정말 신나 보이셨다. 덕분에 이번 여름농활 목표 중 하

나였던 농활 홍보 영상 만들기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가을에 와서 핸드폰 잘 쓰시는지 또 검

사하겠다는 당부에 역시 영달아버님답게 쿨하게 손을 흔드셨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날 다같이 모여 영

달아버님께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연결에 실패했고 영상통화법은 가을에 가서 다시 알려드리기로 했다.

마을 어머님 아버님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후발대까지 포함하여 20명이 조금 안되는 우리 약대 여름

농활대원들의 화합은 최고였다. 9박 10일을 24시간 함께 먹고 자고 일하고 하니 친밀함은 당연한 것이

고, 주로 해가 지고 나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서로를 더 알아가고 단합하는 시간을 가졌다. 짝데이트를

통해 서로의 꿈을 돌아보고 추억을 곱씹어보는 시간도 가지고(물론 무작위로 짝을 정해 스물다섯 고학

번 선배와 스물다섯 늦깍이 새내기가 남남 짝이 되는 매우 즐거운 일도 있었다), 옆 마을 농활대와 냇가

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마을회관에 둘러앉아 함께 영화도 봤다. 일과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은 늦은 밤 이

루어지는 평가 시간이었다. 야식에 간단하게 술을 기울이며 오늘 하루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모습을 되

돌아보고 일과를 평가하는 시간이었다. 한 학기 학과 생활을 같이 하며 이미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농촌에서 하루 24시간을 부대끼며 고된 일과를 함께 하다 보니 저마다 어제 보여준

모습과 오늘 보여주는 모습이 달랐다. 늦은 새벽까지 이루어지는 이 평가시간만큼은 자기 자신과 이 가

족들에 몰두하고 서로 몰랐던 모습마저 발견하게 되는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사람

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농활이 아니라면 쉽게 찾지 못했을 기회였다.

즐겁고 신나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는 마을에서 놀부라고 불리우는 형님의 오이밭에 갔다.

고된 작업이라고 하여 일단 선배들 위주로 가서 체험(?) 해보기로 하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오이하우스로

갔다. 오이 수확은 전에 이미 다 끝난 밭에 남아있는 줄기와 비닐, 호스를 다 걷어내고 밭을 새로 일구

는 작업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뒤덮어버린 흙과 먼지, 썩은 오이냄새와 덥고 습한 하우스 안

의 공기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황놀부형님의 태도였다. 작업하는게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말투, 재촉하

는 모습과 우리를 일꾼 부리듯 대하시는 태도에 우리도 점점 입을 닫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고된 작업에

몸은 지쳐버리고 형님에게서 받은 섭섭함과 서운함은 우리를 더욱 기운 빠지게 했다. 그날부터 삼일 동안

그 오이밭에서의 작업이 계속되었는데, 오전 작업을 마치고 마을회관에 돌아와서는 서러워서 눈물을 보

이는 친구도 있었다. 화도 나고 미안한 마음에 애들 보기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날 밤, 황놀부형

님은 우리가 걷어낸 비닐을 내다 판 돈으로 삼겹살을 사오셨다. 너희들이 일한 값이니 너희들 몫이다, 어

렸을 때 힘든 일도 해봐야 한다, 여전히 농담 반 욕을 섞어 가시며 형님은 우리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셨

다. 그렇게 마을 형님들과 우리 농활대원 모두가 저수지 옆에서 삼겹살에 술을 기울이며, 모든 회포를 다

풀었다면 거짓말이고, 황놀부형님과는 애증의 관계로 미운정이 들어버린 밤이었다. 여러 해 전에 다녀간

농활대에게 깊은 인상을 가지고 계신 형님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성격의 우리를 대하는 방

식에서 마찰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대원들과 생각해보았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는 애들도

있고, 아직 썩은 오이 냄새가 다 가시지 않아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는 애들도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오이는 절대 남기면 안된다고 우스갯소리인지 얘기하는 걸 보면, 그 눈물 섞인 썩

은 오이밭이 좋게든 나쁘게든 모두의 머릿속에 깊게 박힌 것 같다. 얼마 전엔 황놀부형님이 농활대원들

사진에 보고싶다고 댓글을 다셨는데, 글쎄 대원들 반응은 가을농활 가서 다시 봐야할 것 같다. 뭉친 근

육이 풀리면 즐거웠던 느낌만 남는 것이 농활의 매력이니만큼, 오이밭이 없었으면 여름농활이 조금 시시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러 모로 이 9박 10일을 잊지 못하게 해주는 치명적인 사건들이었다.

2012년 나에겐 다섯 번째 농활이었던 이번 여름농활은 여러 모로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다른 농활

대에 비해 약대 농활의 역사는 3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우린 우리만의 방식대로 우리 약대 농활의 색깔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이 여름의 목표였던 ‘다시 오고 싶은 농활 만들기’. 우린 상주시 모동면 신천1리

마을에 우리의 모습을 많이 남겨두었고, 우리의 추억을 담은 스케치영상을 만들었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가족과 같았던 우리 농활대의 이름을 지었다. ‘패밀리 농약대’. 선배들은 깃대가 되고 새내기들

은 깃발이 되어 마음껏 펄럭였다. 그렇게 우린 가족이 되었다. 지금 포도밭이 아닌 서울 도심에서도 여전

히 패밀리 농약대가 삼삼오오 모여 여름을 추억하고 가을을 기다리는 걸 보면, 이번 여름농활의 목표는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 같다.

송웅재 [email protected]

여름농활 기행문

이나라 [email protected]

이은진 [email protected]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라요"

약학과 78학번 이승훈 선배님

한약학과 03학번 김민수 선배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여 폭넓은 경험을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