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 2015. 12. 10.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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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55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2011년 12월 Korean J Med Hist 20 ː355-394 Dec. 2011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이방원** 1. 서론 2.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설립 배경과 그 과정 3.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교육 체계 4.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인적 구성 5. 결론 1. 서론 한국 근대의료체계 확립에 있어 개항기 의료교육기관은 중요한 역할을 담 당하였다. 의료교육기관은 서구의 선진 의료지식을 한국에 전달하는 통로이 자, 한국인이 장차 의료기관의 중추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의료교 육 분야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역할을 담당하였던 간호교육에 대한 관심은 의학교육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간호교육에 관한 연구는 대한간호협회에서 출간한 간호역사서, 간호대학 에서 자신의 역사를 정리한 간호대학사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그 외 에는 의료사의 한 부분으로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 간호역 사에 관심 있는 몇몇 간호학계 연구자의 연구성과가 집적되면서 간호교육 나 355 * 이 논문은 2010년도 대한간호협회 건강정책연구소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Health Policy Research Institute at Korean Nurses Association. **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이메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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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355-394�Dec.�2011ⓒ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이방원**

    1. 서론

    2.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설립 배경과 그 과정

    3.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교육 체계

    4.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인적 구성

    5. 결론

    1. 서론

    한국 근대의료체계 확립에 있어 개항기 의료교육기관은 중요한 역할을 담

    당하였다. 의료교육기관은 서구의 선진 의료지식을 한국에 전달하는 통로이

    자, 한국인이 장차 의료기관의 중추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의료교

    육 분야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역할을 담당하였던 간호교육에

    대한 관심은 의학교육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간호교육에 관한 연구는 대한간호협회에서 출간한 간호역사서, 간호대학

    에서 자신의 역사를 정리한 간호대학사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그 외

    에는 의료사의 한 부분으로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 간호역

    사에 관심 있는 몇몇 간호학계 연구자의 연구성과가 집적되면서 간호교육 나

    355

    1)

    * 이 논문은 2010년도 대한간호협회 건강정책연구소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Health Policy Research Institute at Korean Nurses

    Association.

    **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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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간호역사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1) 기존 연구들은 근

    대간호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나, 보다 다양한 주제에 대

    한 심도 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간호역사, 나아가 의료사를 보다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연구는 한국근대 간호교육기관인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2)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한국 의료사를 풍부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서양 근대의료 지식을 기반으로 한 학문적, 전문적 간호교육의 시작은 의료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간호원양성소에서 비롯되었다. 북감리교의 여성

    해외선교회가 1903년 보구여관에 설립한 간호원양성소가 한국 최초의 간호

    교육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내용은 의료·간호사 관련 연구에 설립

    초기의 모습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있을 뿐이다. 또한 각 연구서에

    기술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관련 내용들 중 잘못 기록된 내용들도 보인다.

    본 연구자는 기존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으면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설립배경, 교육과정, 간호원양성소의 감독과 학생 각각의 활동에 대해 폐소되

    는 시기까지 좀 더 폭 넓은 사료를 제시하면서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

    1) 라비니아 닥·이사벨 스투월 저, 조정환 역, 『조선간호사』 (조선간호부회, 1933); 간호대학

    사 편찬위원회 편, 『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사』 (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 1986); 이자형,

    「한국 개화기의 간호교육에 관한 연구」, 『대한간호』 25-5, 1986; 이화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이화100년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이화여자대학교 간호과학대학, 『이화여자대

    학교 간호과학대학 45년사』 (2000); 이윤주, 「우리나라 근대간호의 도입과 정착」, 연세대학

    교 간호학과 석사논문, 2000; 이꽃메, 『한국근대간호사』 (한울, 2002); 이만열, 『한국기독교

    의료사』 (아카넷, 2003); 이꽃메, 「한신광(韓晨光) : 한국 근대의 산파이자 간호부로서의 삶」,

    『의사학』 15-1, 2006; 김성은, 「구한말 일제시기 미북감리회의 여성의료기관」, 『이화사학연

    구』 35, 2007; 김문실 외, 『개정판 간호의 역사』 (대한간호협회, 2008); 이방원, 「보구여관의

    설립과 활동」, 『의사학』 17-1, 2008;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100년사』 (

    도서출판 혜안, 2008).

    2) 여성해외선교회가 동대문으로 병원을 확장하고 보구여관의 업무를 동대문병원(Lillian

    Harris 기념병원)으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역시 1912년 동대문병원

    으로 이관하였다. 이후의 간호원양성소의 명칭을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로 계속 지칭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되기 될 수 있으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간호원양성소가 폐

    소되는 1933년까지를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로 통일하여 기술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집적되면서 논의, 결정되기를 기대한다. 간호사의 명칭은 당시 선교계 간호원

    양성소와 병원에서 사용했던 ‘간호원’으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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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한국 최초의 간호교육기관이었던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가지는 당대

    의 역할과 의료사에서 가지는 의미 등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는 북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에서 파견한 여성선교사들이 미국 본부로 매년 자신들의 활동을

    기록하여 보고한 연례보고서인 『The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다. 그러나 연례보고서의

    경우 1916년까지의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관련 기록은 상세하나 이후에는

    간호원감독의 교체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간호원양성소 자체에 대한 내

    용은 매우 간략하다. 이에 연례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후의 내용을 보

    완해 줄 수 있는 사료는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The Korea Mission Field』,

    『The American Journal of Nursing』, 『조선간호부회보』, 한말 주요일간지 등

    으로 이 사료들을 교차 분석하였다.

    2.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설립 배경과 그 과정

    1887년 북감리교 소속의 여성해외선교회에서 파견한 메타 하워드(Metta

    Howard)에 의하여 정동에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이 설립되어 한

    국 여성을 위한 진료가 시작되었다. 메타 하워드는 보구여관을 운영함에 있

    어 사라(일명 봉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는데, 사라는 감독 겸 간호원의 역

    할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3)

    1890년 보구여관에 파견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도

    착하자마자 한국어에 대한 지식 없이 환자들의 진료를 시작해야 했다. 이화학

    당에서 영어를 습득한 학생 4~5명은 하루에 5~6시간 정도 진료소에서 통역을

    3) 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 (좋은 씨앗, 2006),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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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당하면서 로제타 셔우드에게 도움을 주었다.4) 로제타 셔우드는 이들을 궁

    극적으로 정규 의료진으로 키우려는 생각으로, 생리학, 인체학, 약물학 등의

    의학이론과 약 조제, 환자들의 체온과 혈압 측정, 환자에게 음식과 약의 규칙

    적인 제공, 궤양과 종기 드레싱 등 기초적인 치료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로제

    타 셔우드의 노력으로 이들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약제실과 진료실에

    서 유용한 의료보조인5)들이 되었다.6) 이들 중 한명이 후에 한국 최초의 여의

    사가 되는 김점동, 즉 박에스더였다(이방원, 2007).

    1893년 3월 말부터 보구여관의 분원인 볼드윈진료소에서 의료활동을 하

    던 커틀러(Mary M. Cutler)는 1894년 5월 로제타 셔우드가 평양으로 파견

    되면서 보구여관을 맡게 되었다. 커틀러는 1901년 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로제타 셔우드 때부터 있었던 수잔 노, 메리 황7) 외에 메기

    (Maggie)와 그레이스(Grace) 등의 도움을 받았다. 한편 보구여관의 일반적

    인 가사 일을 돕기 위해 고용되었던 마르타(Martha)와 다른 여성들이 밤에 입

    원환자들을 돌보기도 하였다.8) 1901년부터 1903년 초까지 보구여관을 책임

    졌던 박에스더는 테레사, 베시, 그레이스의 도움을 받으며 의료 활동을 해나

    4) Rosetta S. Hall,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 (New York: Press of Eaton & Mains, 1897), p.200; 셔우드 홀, 앞 책, 115쪽.

    5) 의료선교사의 의료활동을 보조하는 이들을 연례보고서에서는 assistant, helper, nurse 등으

    로 표기하였다. 이후 간호원양성소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간호원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의료보조인’로 구분하여 지칭하였다.

    6)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WFMS로 약칭), 1891, pp.65-7;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Mission Work, Seoul, Korea,” The Gospel in All Land, 1893년 6월, p.334; Rosetta S. Hall,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 p.200. 로제타 셔우드가 일본인 한명과 한국인 네 명의 소녀들로 의료 훈련반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Zola Payne, “Medical Educational

    Work for Women,” Fifty Years of Light (Y.M.C.A. Press, 1938), p.98; Rosetta. S. Hall, “Woman's Work in the Methodist Episcopal Mission in Korea,” ibid., p.110; 셔우드 홀, 앞 책, pp.80-8}.

    7) 황메리는 보구여관의 중요한 의료보조인 중의 한사람으로, 오랫동안 전도부인이자 ‘수간호

    원’으로서 활동하였다. WFMS, 1895, p.72; WFMS, 1896, p.81; Mary. M. Cutler, “PO KU NYO KWAN,” The Annual Meeting of the Woman's Conference of the M.E.C. in Korea(이하 KWC로 약칭), 1899, p.27; WFMS, 1901, p.190.

    8) Mary. M. Cutler, ibid.,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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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수 있었다.9)

    1887년 보구여관 설립부터 1903년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기 이

    전까지 의료 선교사들은 대체로 평균 3명 정도의 의료보조인과 함께 의료 활

    동을 펼친 것을 알 수 있다. 여의사들은 보구여관 설립 초기부터 효율적인 진

    료를 위하여 병원 일을 도와주는 한국인 의료보조인들에게 간호에 필요한 기

    초지식을 가르쳤으며, 의료보조인들은 진료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보구여관

    의 구성원이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는 한국 여성들을 의료보조인으로 훈련시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로제타 셔우드는 자신이 젊은 여성을 훈련시키면 이들

    은 더 나은 방법으로 그들의 다음 세대를 가르치게 될 것이고, 점차 그들의 영

    향력은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0) 커틀러는 병원의 바쁜 일정으로 의료

    보조인들에게 간호 교육을 규칙적으로 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

    서, 의료보조인들을 적절한 기관에서 정규적이고 체계적으로 훈련시켜야 한

    다고 생각하였다.11) 커틀러는 기독교인으로 전문적인 간호원이 될 수 있는 유

    능한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

    다고 보고하였다.12) 또한 보구여관의 지점인 볼드윈진료소의 여의사 해리스

    (Lillian Harris) 역시 교육받은 간호원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기록하였다.13) 감

    리교 여성선교사들의 대모였던 스크랜튼 대부인(M. F. Scranton)은 의료선

    교사들의 이상의 의견을 모아 한국에 간호교육기관을 설립할 것을 여성해외

    선교회에 요구하였다.14) 이러한 여성선교사들의 지속적인 상황보고로 여성

    해외선교회는 한국에 간호교육기관 설립을 결정하였다.

    9) Esther K. Pak, “Chong Dong Dispensary, Seoul,” KWC, 1903, p.13.10)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Mission Work, Seoul, Korea,” ibid., p.335.11) Mary. M. Cutler, “PO KU NYO KWAN,” KWC, 1899, pp.26-8. 12) WFMS, 1899, p.90.13) Lillian Harris, M.D., “Baldwin Dispensary,” KWC, 1899, p.30.14) WFMS, 1900,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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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닥터 홀과 커틀러의 귀환과 에드먼즈(Magaret J.

    Edmunds)의 파견을 환영하고, 앞으로 한국인 간호교육과 새로운

    기계를 갖춘 병원을 기대한다.15)

    위의 내용은 1902년 전반기에 작성된 것으로 여성해외선교회는 에드먼즈

    가 한국에 도착하기 이미 약 1년 전에 한국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할 것을 결

    정하고 에드먼즈를 그 담당자로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에드먼즈는 미시간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한 뒤 9년간의 임상경험을 갖고 있어 간호원양성소 설립

    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었고,16) 간호원양성소 창설의 임무를 띠고 한국

    에 파견되었다.17) 에드먼즈는 1903년 3월,18) 보구여관에 도착하자마자 간호

    원양성소의 수장으로서, 그 설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관계자들은 간호

    교육에 대한 모든 전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19)

    간호원양성소 학생 모집은 규중유거풍(여성이 집안에만 머무는 풍습), 교

    육 받은 여자의 희소성, 간호사업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부족 등으로 많은 지

    장을 받았으며, 간호원 양성에 필요한 한국어로 된 교과서 등의 제반 환경

    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20) 에드먼즈는 이화학당의 페인(Josephin O.

    Paine)21)의 도움을 받아 불편한 한복을 대체할 고유의 간호복을 제작하였

    15) Emma Ernsberger, “Baldwin dispensary and Chaple, East Gate,” KWC, 1902, p.18.16) “Training School for Nurses,” the Korea Methodist 1-8, 1905, p.97. 17) 조정환 역, 『조선간호사』 (조선간호부회, 1933), 286쪽.

    18) 에드먼즈의 한국 귀국 연도에 대해 1903년을 1902년으로 잘못 기재된 글들이 보인다{조정

    환 역, 앞 책; Fifty Years of Light; 대한간호협회, 『개정판 간호의 역사』 (2008) 등}. 이는 여성해외선교회가 1902년 에드먼즈를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결정한 것을 한국 귀국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19) Mary M. Cutler, KWC, 1903, p.15.20) 조정환 역, 앞 책, 286쪽.

    21) 페인(Josephin Ophellia Paine)은 1892년 미북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3년부터 1907

    년까지 15년간 이화학당 당장으로 봉직하였다. 봉직기관 동안 성경, 영어 강의, 체조를 교

    과과정에 도입하였으며, 1904년에는 중학과를 설치하였다, 을사조약 때에는 학교에서 기도

    회로 신앙을 통한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퇴임 이후에는 지방순회전도와 기독교학교들을

    관리하였다. 1909년 해주지방 순회 중 콜레라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한국기독

    교역사연구소,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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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국 신사의 도움을 받아 학생들의 임무와 관련된 일련의 규정인 ‘규칙책

    (kyu chik chak)’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nurse’를 한자의 뜻을 포함한 새로

    운 명칭인 ‘간호원(看護員)’으로 번역하였다. 간(看)은 ‘책임지다, 돌보다’, 호

    (護)는 ‘보호하고 인도하다’, 원(員)은 ‘구성원’이라는 뜻을 가져, 간호원은 아

    픈 사람을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을 뜻했다.22) 에드먼즈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

    복과 양장을 복합하여 개조한 간호복은 한국 최초의 간호제복이었으며, 간호

    규정, 간호원이라는 용어도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한국 최초로

    만들어졌다.

    에드먼즈는 교육과정을 준비하는데 북장로교 소속 간호원인 브라운(Mary

    E. Brown, 1871~1907)과 쉴즈(Esther L. Shields, 1969~1941)의 도움을 받았

    고, 북장로교 소속 에비슨 부인과 북감리교 소속의 의사 언스버거, 맥길, 박에

    스더 등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유일한 6년 과정의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

    였다.23) 간호원양성소는 이상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03년 12월 하순이 되어

    서야 공식적으로 개교할 수 있었다.24)

    3.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교육 체계

    1)�교육과정�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입학 자격 기준은 1908년 에드먼즈의 연례보고

    서에 입학생의 적절한 나이는 21세에서 31세이고, 입학하기 위해서는 부모

    의 동의서, 의사의 건강 인증서, 교회의 추천서, 약간의 입학금 등과 학교의

    22) Rosetta S. Hall, “Pioneer Medical Missionary Work in Korea,” Within the Gate, 1934, pp.103-5; Mary. M. Cutler, M. J. Edmunds, “Po Ku Nyo Koan,” KWC, 1904, p.10; “Training School for Nurses,” 앞 책, p.98.

    23) Mary M. Cutler, M. J. Edmunds, “Po Ku Nyo Koan,” 앞 책, p.11.

    24)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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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정에 절대적으로 따를 것이라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25) 이러

    한 입학규정표는 등사하여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

    람들에게 보내주었다.26)

    모든 학생들은 2개월간의 견습 기간을 갖고, 양성소와 학생 양측은 모두 간

    호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였다. 입학이 확정되면 학생

    들은 입학서류에 서명하고, 그 시간부터 간호원양성소의 정식 학생이 되어 양

    성소에서 제공하는 간호복을 입고 교육에 임할 수 있었다. 식사, 기숙사, 간호

    복, 연료와 책들은 학교에서 제공되었다.27)

    이렇게 교육과정이 시작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당시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었다. 제국신문은 “정동 보구여관이란 병원은 설시한 지 여러 해에 여

    의원 커들러씨의 성심구호함으로 부인소아치료도 많이 하였거니와 그 안에

    병인간호부 양성학교를 만들어 병구완하는 실지를 견습케 하더니…”라는 내

    용을 게재하였다.28) 이는 한국 사회에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최초의 기사이다. 1906년 발간된 여성잡지인 『가뎡잡지』는 「보구여관과 그

    안에 있는 간호원양성학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구여관 간호원양성

    소를 소개하고 당시 수업내용을 설명하며 독자들에게 간호교육을 권하였다.

    서울 대정동에 있는 보구여관이라는 여병원이 있는데 각색 병

    든 여인들을 지성껏 잘 보아주며 또 그 병원 안에 합설한 간호원양

    성학교가 있으니 이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와 같이 지리, 역사 같은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총민한 여자를 뽑아 각색 병 치료하

    는 법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행하여 시시로 배우게 하며

    병 종류를 나누고 일 등분을 분별하여 열심히 가르치며 그 외에도

    여러 고명한 의원과 선생을 청하여 좋은 공부를 많이 시키더라.29)

    25) M.E.H., “Training Nurses in Chosen,” The Korea Mission Field(이하 KMF로 약칭) 12-1, 1916, p.26; KWC, 1908, pp.14-5; 조정환 역, 앞 책, 287쪽.

    26) 조정환 역, 앞 책, 286쪽

    27) KWC, 1908, pp.14-5; M.E.H., “Training Nurses in Chosen,” KMF 12-1, 1916, p.26; 조정환 역, 앞 책, 287쪽.

    28) 「誠心普救」, 『제국신문』, 1904년 11월 24일.

    29) 『가뎡잡지』 1-4, 1906년 9월,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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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63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교육과정을 6년으로 정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

    은 이유였다.

    충분한 교육을 받은 한국인 여성들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렵

    다. 이는 감리교 직원(Staff)들이 간호원 교육과정을 6년으로 정한

    이유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신실한 기독교적 인성과 수업에 맞는

    적절한 연령대의 학생이 거의 없음으로, 간호 교육과정을 3년보다

    5~6년 이상으로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표어는 ‘천천히

    가자! 확실히 하자!’이다.30)

    즉, 간호교육을 받기 위한 기본 지식, 인성 등이 부족하기에 기본 소양을

    갖출 시간까지 정규 교육기간에 포함시킨 것이다. 또한 교육기간이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함으로써 단축될 것31)이라는 기대 섞인 보고 내용에서, 당시 서

    양인이 한국인에게 간호교육을 하는 데 언어적 제약도 적지 않았을 것이며,

    한국어로 번역된 교과서가 없는 상태에서 수업의 진행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시간 개념, 청결, 순종 등에 대한 인식이 달

    랐고, 관습의 차이 또한 교육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주었다(간호대학

    사 편찬위원회, 1986: 30).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입학한 학생들은 하루 12시간 체제로 병동 실습

    에 참여하였다. 낮번간호원의 하루 일과는 아침 7시에 밤번간호원이 건네주

    는 ‘야간간호보고서’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간호원은 병동 환자들에게 아

    침 식사를 건네주고, 8시에 환자, 고용인들을 모아 아침기도 시간을 갖은 후

    영어수업을 하였다. 오전에 환자들에게 약을 준 후 10시에는 특별한 식이요

    법, 수술 드레싱, 전기요법, 맛사지, 찜질, 새로운 환자의 입원 준비, 환자의

    침대 준비 등 환자들을 간호하였다. 그 사이 새로운 견습생이 있으면 이들을

    교육시켜야했다. 오후에 감독에 의하여 정해진 예정표에 따라 간호원들은 한

    30) M.E.H., “Training Nurses in Chosen,” KMF 12-1, 1916, p.25.31) Louisa C. Rothweiler, “Our Work in Korea,” KMF 5-10, 1909,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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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64

    시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저녁 식사를 환자들에게 배급하고, 오후 5시에

    저녁 드레싱, 연고 도포, 침대 정리, 밤번간호원을 위한 보고서 작성을 마치

    면 10시간 동안의 낮 근무는 마무리 된다. 만약 수업과 강의가 공고되면, 간

    호원들은 수업 준비를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임해야 했다. 수업이 있는 날에

    는 취침시간 10시까지 여유시간 없이 간호실습과 이론 강의를 받는 힘든 일

    정을 소화해야 했다.32)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간호업무는 초반에 12시간 체제로 시작되었지

    만, 의료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시간을 확보해 주고자 8시간 체

    제로 조정하기를 원했다. 1909년 당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을 맡고

    있던 모리슨(A. I. Morrison)의 기록에 의하면 8시간 체제로 변경,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3)

    초창기 간호교육은 교사의 수가 적고 교과서가 부족하며 언어장애로 인하

    여 주로 침상 수업(bedside instruction)과 흑판을 사용하여 진행되었고, 동반

    한 선교사들이 이를 보조하였다.34)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들은 1905년

    부터 1916년까지의 연례보고서에 수업을 맡아준 의료선교사들과 담당 수업

    내용을 거의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다(간호대학사 편찬위원회, 1986: 34-6).35)

    간호 이론 교육은 간호원론, 약리학, 해부학, 생리학, 혈액순환, 위생학, 자

    양학, 응급의학, 산과학, 외과, 이비인후과학, 치과학, 중독과 해독법, 열성병

    32)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6, pp.19-20.33)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년 7월, p.108.34)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2.35)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2;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6, pp.17-8; Margaret J. Edmunds,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07, pp.21-2;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년 7월, p.108;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4; Mary M. Cutler,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11, pp.30-1; Naomi A. Anderson, “Report of Nurses' Training school at Seoul, Korea,” KWC, 1913, p.52; M.E.H., “Training Nurses in Chosen,” KMF 12-1, 1916, p.26; 조정환 역, 앞 책,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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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65

    (熱性病), 전염병, 간호사례 등이 포함되었고, 실습 교육으로는 병실·진찰

    소·수술실 실습, 개인간호법, 붕대학, 목욕법, 안마술, 전기학, 약조제, 식이

    음식 요리법, 연고 도포법, 중환자 간호법, 간호복 제작 등이었다. 교육과정

    은 간호와 관련되어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졌고, 간호원의 자질, 나이팅게일

    의 삶, 미국의 젊은 기독교 여성들, 기독교인의 삶 등의 수업을 통해 바람직한

    간호원의 자질 등을 배워 나갔고, 음악, 요리, 산수, 한국어 작문, 중국어, 성

    경 등 기본 지식과 교양에 해당하는 수업도 진행되었다.

    교육과정 중 강의 시간과 강의 수까지 자세하게 기록된 1905년 10월부터

    1906년 5월에 이루어졌던 내용을 살펴보면,36) 수업을 하지 않은 2월을 제외하

    고는 7개월간 30번의 수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간호원양성소 설립

    초기에는 한 달에 평균 4번 이상의 이론 수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부터 1916년까지 간호원양성소에서 수업을 맡은 교사진들은 보

    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 이외에 북감리교 의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폴웰(Douglas E. Follwell), 북감리교 여의사 언스버거(Emma

    F. Ernsberger)와 커틀러, 북감리교 선교사 루이스(Ella A. Lewis), 북장로

    교 의사 에비슨(Oliver R. Avison)과 게일, 북장로교 간호사 쉴즈(Esther L.

    36)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6, pp.17-8.

    날 짜 시 간 강의 수 강 사 주 제

    10월 pm 7:30 2 Dr. Scranton 응급의학(Emergencies)

    10월 pm 7:30 1 Dr. Slade 치과(Teeth)

    10/12/1월 pm 4:00 10 Mrs. Reynolds 영양학(식이요법-dietetics)

    11/12/1월 pm 7:30 10 Dr. Ernsberger 산과학(obstetrics)

    11월 pm 7:30 1 Miss Gillett 미국의 젊은 기독교 여성들

    12/3월 pm 7:30 2 Dr. Gale 1. 해부학 복습

    2. Florence Nightingale 회상

    4월 pm 7:30 1 Mr. Lee 러시아 병원에서의 경험들

    4/5월 pm 7:30 3 Dr. Cutler

    Dr. Avison

    실습

    약리학

    30 9명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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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66

    Shields)와 버피(Ella B. Burpee) 등의 선교사들,37)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

    한 김필순 등이었고,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졸업생과 재학생의 도움도 받

    았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초기의 교과서로는 이화학당의 선생인 페인과 프

    레이(Lulu E. Frey)가 한역한 생리학이 유일하였다(간호대학사 편찬위원회

    편, 1986: 29). 에드먼즈는 이익채의 도움으로 2권의 간호교과서를 한글로 번

    역하였다38)는 기록은 있으나, 2권의 간호교과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

    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906년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가 개교하면

    서 1906~1909년의 교육과정에서 사용한 다이아나 킴버의 『간호부를 위한 해

    부학과 생리학』, 왁스웰 포프의 『간호실무』, 에드먼즈가 번역한 『간호편람』39)

    등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가 서로 교육활동

    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교재도 함께 공유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특

    히 『간호편람』은 이익채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2권의 책 중 하나로 보인다.

    2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인 모리슨(Morrison)은 고열환자간호, 식

    이요법(환자식)과 관련된 강의 내용을 하씨 부인(Mrs. Hahr)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여 소책자의 형태로 프린트하였으며, 의료선교사의 강의를 받은 후 다

    음 수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간호학과 관련

    된 클라라(Clara Week)의 『간호학』을 번역, 간행하여 점차 간호 교육과정의

    37) 한국기독교역사역구소, 『내한선교사총람(1884-1984)』 (1994).

    38) 조정환 역, 앞 책, 288쪽.

    39)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의 1906~1909년 교과과정 및 담당교수(김문실 외, 2008: 218)

    교 수 명 담 당 과 목 교 재

    간호사 맥스웰 기본간호술 및 실습

    다이아나 킴버 저, 김필슨 역,

    『간호부를 위한 해부학과 생리학』

    왁스웰 포프 저, 김배세 역, 『간호실무』

    에드먼즈 역, 『간호편람』

    간호사 포프 기본간호술 및 실습

    의사 김필순 해부와 생리

    의사 홍청이 증후관찰사와 식이공급

    의사 홍석은 안과질환

    의사 안희영 약물학

    의사 신 몸무게 측정, 현미경을 통한 미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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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67

    내용들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40)

    1906년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가 개교하면서 각 간호원양성소의 감

    독인 에드먼즈와 쉴즈(Esther L. Shields)의 합의로 수업, 강의, 수술실 실습,

    그 외의 교육에 대해 상호 협조하였다.41) 실제 보구여관 간호원들은 좋은 수

    술실과 장비를 갖추고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와 관련하여 도움을 요청

    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이는 간호학생들에게 좋은 실습의 기회가 되

    었다.42) 양 간호원양성소의 상호협조 체제는 이후 모리슨 감독 때에도 계속

    되었다.43)

    192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선교계 간호원양성소는 수업연한과 입학자

    격조건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는데, 1926년 조선간호부회와 재선서양인졸업

    간호부회를 통합할 때, 통합조건의 하나로 각 선교계 간호원양성소의 입학자

    격과 수업 연한의 개선이 논의되었다. 입학 자격은 중등학교 2학년 교육을 수

    료한자로 결정되었고, 수업과정 역시 일정한 과정과 시험과목까지 일치시키

    려는 표준화 노력이 진행되었다(이윤주, 2000: 65-6). 이러한 표준화 노력으

    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1928년 신입생 3명을 보면 고등보통학교 졸업생

    1명, 3학년 마친 학생 1명, 그 외는 1학년을 수업한 사람으로,44) 고등과 수업

    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을 선택적으로 입학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입학자격이

    표준화되어 보통학교 6학년 졸업생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수업 정도

    이어야만 입학을 허가하여 국공립양성소의 수준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45)

    『조선간호부회보』에 실린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보고를 통해 1920년대

    말의 교육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928년 교수과정은 해부, 생리, 약물학, 간

    호학, 실지간호, 산과, 위생학, 전염병, 소아과, 붕대학, 영어, 일어, 한문, 성경

    40)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4.41) Esther. L. Shield, “Co-operation in Training Nurses,” KMF 3-1, 1907, p.11; Mary M.

    Cutler, “Po Ku Nyo Koan,” KWC, 1907, p.14.42) M.E.H., “Training Nurses in Chosen,” KMF 12-1, 1916, p.25; 조정환 역, 앞 책, 288쪽.43)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44) 『조선간호부회보』 9, 1928, 18쪽.

    45) 『조선간호부회보』 11, 1928,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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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68

    으로, 2학년은 1주간 13시간, 1학년은 27시간을 수업하였다. 교수진은 의사 3

    명, 약제사, 간호원장, 수간호원, 이화전문을 마친 선생님과 일어 선생님이었

    다.46) 1929년에는 총독부 병원의 산과 전문경험이 있는 교사에게 매주일에 4

    시간씩 교수하여 학생들 산파시험에 대비하였다.47) 1920년대 말이 되면 각 종

    파의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병원 소속의 의료진과

    이화학당 전문부 졸업생 등이 수업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업시수

    도 초기보다 현격히 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론 수업을 좀 더 체계적으

    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환경이 정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과서도 간호교육제도 개선 차원에서 조선간호부회에서 편찬하였다. 조

    정환의 『간호사』에는 조선간호부회에서 맥스웰과 포프의 공저 『실용간호학』

    과 가드너 저 『공중위생간호학』과 닥크와 스투워트의 공저 『간호사』 등 3권

    의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8) 그러나 1932년 『조선간호부회

    보』에 기록된 ‘조선간호부회 지정 출판서적’은 총 22권으로 책 제목과 저술 또

    는 번역한 의료선교사, 간호선교사, 한국인 간호원 등의 이름이 함께 정리되

    어 있다.

    간호교과서(徐舒平), 실용간호학(徐舒平), 간호사綱要(徐舒平),

    아동위생(桂日魯), 簡易衛生法(徐舒平), 콩젖만드는법(魯仙福),

    영양과 건강(李金田), 응급치료법(山杜逸), 임산부보건위생대요(

    扶宇樂), 영아양육(潘福奇), 健康(潘福奇夫人), 健康生活(潘福奇),

    身體三害論(潘福奇), 靑年의 生殖器衛生, 生理學(빼야드), 아기 아

    머니에게(모리시), 結核病과 其治療(悶山海), 공창의 해독(홉컥),

    여자육체변화기론(魯仙福), 처녀비밀론, 애기열병전염예방, 폐결

    핵체료의 비결(에.쥐.풀냇처)49)

    46) 『조선간호부회보』 9, 1928, 18쪽; 『조선간호부회보』 11, 1928, 7쪽.

    47) 『조선간호부회보』 13, 1929, 20쪽.

    48) 조정환 역, 앞 책, 298쪽.

    49) 『조선간호부회보』 24, 1932, 97-8쪽; 徐舒平(Elisabeth J. Shepping), 桂日魯(Edith F.

    Gaylord), 魯仙福(Elma T. Rosenberger), 山杜逸(Ada Sandell), 扶宇樂(Berneta Block), 潘

    福奇(James D. Van Buskirk), 悶山海(Stanley H. Martin)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내한선

    교사총람, 1884-198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참고.

  • 이방원 :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69

    조선간호부회에서 체계적인 간호교육의 표준화를 실시하고자 발행한 위

    의 책들은 간호교육에 활용되고, 간호교육의 표준화에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

    이다.

    2)�가관식과�졸업식�

    (1) 가관식

    1903년 12월에 개교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입학생들을 받아 일정

    한 교육과정을 수료했다고 인정되는 간호학생들을 대상으로 가관식을 거행

    하였다. 가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 다음의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간호원 등분을 말하면 다섯 가지 분간이 있으니, 一 학습원이오,

    二 후진간호원이오, 三 선진간호원이오, 四 위임간호원이오, 五 간

    호원장이니라 … (중략) … 그 공부과정은 여러 말 할 수 없거니와

    그 대강인즉, 학습 한이 두 달인데, 그 동안 성경과 규칙과 여러 가

    지 재주를 배우다가 후진간호원 반열(班列)로 승차하여 이에서 삼

    년 공부할 것이라. 이때에 비로소 간호원 복색(服色)을 할 것이다.

    삼 년 공부를 마친즉 선진 반열로 승차하여 또 삼 년 공부 할지라,

    만일 선진 반열에서 공부를 성취하면 졸업하고 졸업장과 간호원

    표를 받아 전권간호원(全權看護員)이 될지라50)

    위의 설명에서 간호원을 5단계로 나누어 학습원, 후진간호원, 선진간호원,

    위임간호원, 간호원장으로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습원은 견습생을 말

    하고 것이고, 정규 간호학생을 크게 후진과 선진의 두 단계로 나누고 그 교육

    기간을 각각 3년으로 잡고 있다. 간호학생들은 3단계의 과정과 의식, 즉 2개

    월 견습기간 이후 간호복 착용, 후진간호원으로서 3년간의 교육을 받은 후에

    가관식, 다시 선진간호원으로서 3년간의 교육을 받은 후에 졸업식을 거쳐 완

    전한 전권간호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간호학생들은 성취

    50) 조비 하버 존슨, 「간호원 예모식」, 『신학월보』 5-1, 1907, 38쪽.

  • LEE Bang-weon : The Management of Nurses' Training School of PO KU NYO KWAN (1903~1933)

    │ 醫史學370

    감, 자부심, 책임감을 아울러 가지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제1회 가관식이자 한국 최초의 가관식은 1906년

    1월 25일 거행되었는데, 보구여관 의료선교사인 커틀러와 에드먼즈는 1906

    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캡을 쓴 간호원의 등장이라고 평가하였다. 보구여

    관 진료소 대기실을 가관식장으로 꾸미고, 몇몇 외국인과 한국 여성들을 초

    대하였다. 당시 감리교 여성선교사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스크랜튼 대부인

    과 보구여관 의료선교사들, 그리고 그동안 강의를 도와준 많은 의료선교사들

    이 가관식에 참석하여, 가관식 주인공인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를 축하하고

    격려하였다.51)

    1903년 12월 하순에 개교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3년이 되지 않은 2년

    2개월 만에 가관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은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의 경우,

    간호원양성소가 개교하기 이전 김마르타는 약 8년, 이그레이스는 약 6년 동

    안 보구여관에서 지내면서 다년간 의료보조인으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

    경력을 인정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회 가관식은 1907년 1월 30일 거행되었고, 2명의 간호학생인 김엘렌과 정

    매티에게 캡을 씌어주고, 간호의 상징인 뱃지를 달아주었다.52) 2회 가관식은

    약 300명의 한국인과 외국인 손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 제일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제일교회의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교회와 관련된 한국 청년과

    세브란스병원의 의학생들은 안내를 맡았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축가를 불렀

    으며, 한국 인사들과 의료선교사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캡을 씌워주는

    기념행사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인 에드먼즈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양성소 감독인 쉴즈가 거행하였다.53) 이후 연례보고서에서 가관식에 관한 기

    51)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6, p.22.52) 몇몇 저서와 논문(김문실 외, 앞 책: 이자형, 앞 글) 에서 1907년 2회 가관식은 정동교회에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와 세브란스간호원양성소 두 학교가 함께 실시하였다고 잘못 서술

    되어 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는 1908년 6월 12일 5명 대상으로 1회 가관식을 거

    행하였다(조정환 역, 앞 책, 288쪽).

    53) Rev. G. H. Jones, “The Capping of the Nurses,” KMF 3-4, 1907, p.49; 이방원, 「보구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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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71

    록을 찾을 수 없으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관식은 간호학생이 간호 능력을 인정받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기념식

    이었다. 먼저, 기독교가 들어올 때까지 일반 가정의 여성들은 사회활동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간호원양성소의 설립과 간호학생들의 증가는 전체 사회

    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될 만하였다. 또한 한국 여성에게 가관식

    은 특별할 의미를 가진다. 관은 한국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신성시 되었다. 한

    국 남성에게 관례는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 간호학생이 관을 쓴다는 것은 사

    회적으로 그 지위와 역할을 인정받는다는 상징이 되었다.54)

    (2) 졸업식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제1회 졸업식은 1908년 11월 5일에 거행되었고 2

    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55) 1회 졸업생은 1회 가관식을 치른 김마르타와 이

    그레이스였다. 이에 대해 1933년에 출간된 『조선간호사』에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정리하였다.

    졸업생 2명의 수는 적지만 장래 그들의 다수 자매들이 그들의 뒤

    를 쫓아 봉사의 새 영역에 투신할 것에 대한 예고로 보아 의미심장

    하다. 조선간호부 선발대가 수천 년 전통적 구습의 강한 성벽을 용

    감히 쳐 부시고 사회로 뛰쳐나와 봉사의 입장 뿐 아니라 근대여성

    운동의 견지로도 매우 중요한 새 직업에 헌신한 그 점에 대하여 우

    리는 그들에게 흠앙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56)

    제2회 졸업식은 1909년 12월 3일에 거행되었다(간호대학사 편찬위원회

    편, 1986: 31). 2회 졸업식은 김엘렌만 하게 되었는데, 이는 함께 가관식을 한

    의 설립과 활동」, 『의사학』 17-1, 2008에서 1907년 1월 30일 제2회 가관식을 1회 졸업식으

    로 잘못 서술(51-2쪽)하여 정정한다.

    54) Rev. G. H. Jones, “The Capping of the Nurses,” KMF 3-4, 1907, p.49.55) 「간호부졸업식」, 『황성신문』, 1908년 11월 7일;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56) 조정환 역, 앞 책,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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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72

    정매티가 가관식 이후 4개월 만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간

    호원양성소 감독이었던 에드먼즈는 헌신적이고 장래성 있는 정매티의 죽음

    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57) 김엘렌의 졸업식은 정동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스크랜튼이 사회를 보았고, 해리스 감독(Bishop Harris)이 치사를 하고 이화

    학생과 호가드(D. Hoggard)의 축가가 있었으며, 간호원의 간호시범과 졸업

    식 등이 거행되었다.58) 1회 졸업식 이틀 전인 1908년 11월 3일에도 간호시범

    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59) 졸업식에 있어 하나의 과정으로 그동안

    익힌 간호에 대한 실제 상황을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3회 졸업식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으나, 평양에서 거행되었던 간호원양

    성소 4회 졸업식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졸업식 과정을 알 수 있다. 보

    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서 평양에 있는 광혜여원으로 파견된 간호학생 이희

    망의 졸업식이 1913년 3월 7일 저녁 8시 광혜여원의 찬조 아래 거행되었다.

    평양에 있는 남산 감리교 교회의 전체는 도시와 지방에서 온 장로교와 감리

    교의 기독교 여성들로 채워졌고, 뒤편의 넓은 방들은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외국인 남자들로 채워졌다. 강단에는 졸업간호원, 간호학생, 간호견습생들이

    흥미롭고 교육적인 졸업식에 참여하였다.60)

    평양 광혜여원으로 파견나간 간호학생 한명을 위한 졸업식이 성대하게 치

    러졌다. 졸업간호원 이그레이스는 당시 광혜여원의 수간호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김마르타는 이희망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왔으며, 졸

    업식에서 이그레이스와 김마르타는 졸업간호원으로서 연설을 하였다. 한명

    의 졸업생을 위해 교회에 졸업식장을 준비하고, 평양 시내외의 기독교 여성들

    57) Margaret J. Edmunds,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07, p.20; WFMS, 1907, pp.163-4.

    58) 간호대학사 편찬위원회 편, 『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사』 (1986), 31쪽의 D. Hoggard는

    1909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였던 구세군 소속의 Robert Hoggard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59) 「간호부실지연습」, 『제국신문』, 1908년 11월 5일.

    60) Rosetta S. Hall, “Graduating Exercises of the Methodist Training School for Nurses at the

    Pyeng Yang,” KMF 9-5, 1913, pp.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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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73

    과 간호 관련 모든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는 내용은 당대 관련 사람들이 간호

    원양성소 졸업식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5회 졸업식은 1914년 5월 28일에 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61) 이후 졸

    업식에 대한 내용은 없고 다만 몇 월에 몇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는 기록

    만이 연례보고서에 보인다. 졸업식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때 매년 정해진

    기간에 졸업식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간호원양성소 감독이 졸

    업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는 학생들을 졸업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18년 4월 30일에는 장데이지의 졸업식이 이희망의 경우와 같이 평양에서

    거행되었다62)는 기록을 통해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간호학생이 평양의 광혜

    여원으로 파견되었고, 평양에서 활동하는 동안 교육과정이 끝나면 경우에 따

    라 광혜여원에서 졸업식을 주관하여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인적 구성

    1)�간호원양성소�감독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교육을 담당하며 간호원으로 활동한

    선교사들은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 모리슨(Alta I. Morrison), 앤더

    슨(Naomi A. Anderson), 로버츠(E. S. Roberts), 로저스(M. M. Rogers), 로

    젠버거(E. T. Rosenberger)의 6명이고, 모리슨 이후 앤더슨이 간호원양성소

    감독으로 파견되기 이전까지 보구여관 의료선교사인 커틀러가 간호원양성소

    감독까지 겸임하였다(재임기간은 참조). 각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 재직 당시의 특정 사안에 대해 정리하여, 그들이 간호원양성소 운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61) Naomi Anderson,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The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4, p.79.62) Mary M. Cutler, M.D., “Woman's Hospital of Extended Grace and Medical Education for

    Korean Women,” KWC,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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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74

    간호선교사 에드먼즈는 1903년 3월 보구여관에 도착하자마자 간호원양성

    소 설립을 위해 규칙 제정, ‘nurse’를 한국어인 간호원로 번역, 간호원복 제

    작,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마련하는 등 제반 노력을 하였다.63) 에드먼즈는 간

    호원양성소를 운영하면서 과학적인 간호를 ‘노예에 의하여 행해지는 천한

    일(고역)’과 다를 것 없다는 당시 사람들의 편견 역시 극복해 나갔다.64) 또

    한 한국의 간호교육 사업을 위해 1908년 3월 20일 4명의 간호선교사 홀먼

    (Sarah Hallman), 라이스(Maud Rice), 모리슨(Inez Morrison), 쉴즈(Esther

    L. Shields)와 함께 재조선졸업간호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65) 에드먼즈는

    한국에 최초의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한 선구자이며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

    소를 설립한 쉴즈와 함께 한국 간호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2대 감독인 모리슨은 1908년 에드먼즈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1910년 5월

    7일까지 활동하였다.66) 모리슨은 1908년 11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1

    회 졸업식을 거행했으며, 12시간 체제의 간호학생들의 병원실습을 8시간 체

    제로 바꾸었다. 또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와의 협조 체제도 계속 유

    지하여,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학생들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의 모

    든 강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세브란스병원의 수술에 참관할 수 있도록 하였

    다.67) 모리슨은 간호원양성소의 강의에서 통역을 맡기도 하였고, 강의를 한

    내용 정리하여 소책자로 만들었으며, 간호학과 관련된 교재를 만들기도 하였

    다.68) 모리슨은 더 나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모리슨이 그만 둔 후 간호원양성소를 책임질 간호선교사가 파견되지 않자

    63) KWC, 1904, pp.10-1.64) “Medical Work, Seoul,” KWC, 1919, p.11.65) 조정환 역, 앞 책, 297쪽.

    66) WFMS, 1908, p.159; 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 Mary M. Cutler, “Po Ku Nyo Koan,” KWC, 1910, p.20.

    67)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68)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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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75

    여의사 커틀러가 감독의 일을 맡게 되었다.69) 커틀러는 의사, 간호원양성소

    감독, 보구여관 전체의 관리자가 되어 3분야의 일을 관장하면서, 여성해외선

    교회에 훌륭한 자격을 갖춘 간호원, 즉 간호원양성소를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간호원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70) 커틀러는 1911년 설날 간호학생

    들과 함께 교회에 있는 부인과 어린이 중 극빈자를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대접

    함으로써71) 간호교육뿐 아니라 간호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1912년 1월 간호선교사 앤더슨이 파견되었다. 앤더슨은 동대문의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일명 동대문병원, 이후에는 동대문병원으로 기재)이

    완공할 때까지 평양에서 언어를 공부하고 광혜여원의 진료를 도왔다. 앤더슨

    은 동대문병원이 거의 완공되어가자 새 병원의 시설을 갖추고, 1912년 9월 20

    일 간호원양성소를 동대문병원으로 이관하여 교육을 계속 하였으며, 1914년

    5월 28일 3명의 졸업간호원을 배출하였다.72) 앤더슨은 동대문병원에서 간호

    교육과 의료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1914년 12월, 졸업간호원들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간호부 면허시험을 치러 조선총독부로부터 간

    호실습에 관한 승인을 받았다. 이 시험에 같이 시험을 치룬 이희망과 이경선

    역시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73)

    69) Mary. M. Cutler, “Po Ku Nyo Koan,” KWC, 1910, pp.19-20; WFMS, 1910, p.176. 70) Mary. M. Cutler, “Po Ku Nyo Koan,” KWC, 1911, p.31; WFMS, 1911, p.186. 71) Mary. M. Cutler, “Po Ku Nyo Koan,” KWC, 1911, p.32.72) Mary S. Stewart, M.D.,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Baldwin Dispensary," KWC,

    1912, p.53; N. A. Anderson, “Report of Nurses' Training school at Seoul, Korea,” KWC, 1913, pp.51-3; Naomi Anderson,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The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4, p.79. 여성 환자들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여성해외선교회는 현대화된 시설의 규모가 큰 병원의 설립을 결정하고, 그 위치는 동대문으로 정해졌다.

    1912년 10월 10일 준공식을 가졌으며, 병원 이름은 볼드윈 진료소에서 진료하다 평양으로

    옮겨 활동하던 중 1902년 사망한 여의사 릴리안 해리스를 기념하여 명명하였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1912년 평양으로 이전되었고, 이 모체로부터 평양부인병원 내에, 다른 하

    나는 경성동대문부인병원 내에 성립되었다(조정환 역, 앞 책, 288쪽).”라는 서술은 잘못 된

    것으로 본다. 보구여관은 1912년 동대문에 신설된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모든 의료

    사업을 이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간호원양성소도 옮기게 되었고 간호선교사 앤더슨에 의

    하여 중단 없이 계속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73) Mary Stewart·Naomi Anderson, “Memorial Report of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KWC, 1915, p.52; WFMS Report, 1915,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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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76

    1915년의 연례보고서를 보면 동대문병원이 산과와 소아과 업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분만을 하기 위해 동대문병원

    을 찾아왔으며, 소아 치료의 수가 급증하였다. 급증하는 환자 수효에 의해 간

    호학생의 업무량은 더욱 증가되자,74) 앤더슨의 휴가는 계속 연기되었고 1916

    년 5월 하순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75)

    앤더슨이 휴가를 떠난 이후 후임 로버츠는 1916년 여름 몇 달 동안 여의사

    스튜어트(Mary S. Stewart)와 함께 “영아복지(Baby Welfare)”를 수행하였다.

    수백 명의 아기들을 목욕시키고 무료로 돌봐주었는데,76) 이는 동대문병원에

    서 소아를 위한 의료복지를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로버츠는 1917년 10월

    앤더슨이 돌아올 때까지 간호원양성소 감독을 역임하다가, 이후 영아복지사

    업에 전념하였다.77)

    앤더슨은 1919년 3·1운동으로 보구여관의 업무가 급증하던 시기 간호원

    양성소 감독직을 그만 두었다. 로버츠는 1차 세계대전 시에 미국 적십자사 시

    베리아(西伯利亞) 사업부의 초청으로 6개월간(1918.10~1919.4) 봉사하고 4

    월이 되어 돌아왔고, 6월이 되어서야 간호원양성소 감독으로서의 업무를 시

    작할 수 있었다.78)

    로버츠는 1922년 보구여관을 떠났고, 그 자리를 로젠버거와 로저스가 대신

    하였다. 1922년에는 로젠버거가 간호원양성소를 맡았고, 로저스는 어학공부

    를 하였으며,79) 1923년에는 로젠버거가 어학을 공부하고 로저스가 1923년부

    터 1925년까지 간호원양성소를 책임졌다.80) 로젠버거는 1923년 1월 태화여

    74) WFMS, 1915, p.202.75) WFMS, 1916, p.188.76) Mary S. Stewart·Elizabeth S. Roberts, “Medical Work, at East Gate Hospital, Seoul,”

    KWC, 1917, p.86.77) Naomi A. Anderson·Elizabeth S. Roberts, “Seoul Medical Report,” KWC, 1918.78) 조정환 역, 앞 책, 296쪽; WFMS, 1919, p.90; WFMS, 1921, p.76; “Medical Report,” KWC,

    1922, p.19.

    79) “Medical Report,” KWC, 1922, p.19; WFMS, 1922, p.76.80) WFMS, 1923, p.83; Mayme Rogers, “Eight Babies a Day,” KWC, 1924, p.52; WFMS, 1924,

    p.84; Mayme M. Rogers, “Report of the Training school for Nurses, East Gate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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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77

    자관에서 영아보건사업을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과 졸업간호원 한신광과 함

    께 시작하였다.81)

    1926년 1월 17일 간호학생 홍선희가 입원한 어린이를 잘못 간호하였다는

    이유로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간호원양성소 감독 로저스에게 출학 명령을 받

    자, 이를 분하게 생각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동대문

    병원 간호원들이 결속하여 동맹휴업을 하는 동시에 직원회에서는 로저스 감

    독의 파직을 요청했다. 결국 이사회에서도 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여 로저스의

    무기 휴직을 결정하였고, 이후 로저스는 결국 사직하게 되었다.82) 이 사건 이

    후 로버츠가 다시 간호원양성소 감독을 맡게 되었다.83)

    1927년의 동대문병원은 세브란스병원의 반 버스커크(James D. Van

    Buskirk)가 감독을 맡고 있었고 로버츠가 간호원양성소를 담당하고 있었으

    나, 그 외에는 모두 한국인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버츠는 간호학생들

    이 열정적으로 학습하고 있으나, 거의 산과와 관련된 교육을 받고 있다는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와 결합하는 문제를 추진하

    였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협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고무적으로 생각하였고,

    로버츠는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를 희망한다고 연례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84) 그러나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와의 결합

    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29년에도 신입생을 받았다.85) 결국 이 문제는 진전

    되지 않았으나, 초반기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와의 상호협조 경험은 이

    후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6월 로버츠는 휴가를 떠났다가 1930년 여름에 돌아왔다.86) 이후 로

    KWC, 1925, p.54; WFMS, 1925, p.84.81) 조정환 역, 앞 책, 290-1쪽.

    82) 『동아일보』, 1926년 1월 28일; 1월 29일; 1월 31일; 4월 21일.

    83) WFMS, 1926, p.88; E. Roberts, “East Gate Hospital and Nurses Training School Report for 1926,” KWC, 1927, p.63.

    84) Elizabeth S. Roberts, “1927 Report-East Gate Hospital,” KWC, 1928, p.55.85) N. Berneta Block and Elizabeth S. Roberts, “East Gate Hospital,” KWC, 1929, p.55.86) N. Berneta Block, “East Gate Hospital,” KWC, 1930, p.42; WFMS, 1931,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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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78

    버츠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폐소될 때까지 계속 동대문병원에서 근무

    하였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폐지 시기의 경우, 여성해외선교회 연례보고

    서에는 1930년에 중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7) 그러나 1932년 발행된 『조

    선간호부회보』에 ‘동대문병원 간호원양성소’에 대한 보고가 있어, 조정환의 『

    조선간호사』에 1933년에 폐교되었다88)는 기록이 신빙성을 가진다. 이상의 보

    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들은 한국 최초의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간호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교수진을 섭외하며 간호실습

    을 위한 다양한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 간

    호를 담당하는 전문인력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2)�간호원양성소�간호학생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에 대한 기존의 기

    록은 1회 졸업생인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에 집중되어 있고 그 외의 졸업생

    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누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입

    학하여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전문인이 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연례보

    고서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기록을 찾아 학생 현황표( 참조)를 작성하

    고, 주요 인물을 각각 정리하고자 한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학생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게 되면서는 평균적으로 10-20명의 학생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기록에 남아 있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간호학생들에 대해 간단히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첫 입학생은 6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명은 간

    호원양성소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지 못하여 포기하였으며, 4명이 계속 교육

    받으며 학교의 자랑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6명으로 추산해볼 수 있다.89)

    87) WFMS, 1938, p.60.88) 조정환 역, 앞 책, 289쪽.

    89) Mary M. Cutler and Margaret J. Edmund,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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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79

    커틀러의 간호원양성소 학생을 작은 도토리에서 나온 어린 잔가지에 비유

    하여 1906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조정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

    였다.

    譬喩로 말하면 우리의 양성소는 藥甁에 심은 一小橡實에서 자

    라나오는 한 軟弱한 가지와 갓다. 싹 다섯은 破滅을 當하엿스나 넷

    은 茂盛하여잇슴으로 이 新生木이 그 生存을 爲하야 奮鬪하고 잇

    슴을 可히 알수잇다.90)

    여기에 9명은 첫입학생 6명과 1904년 입학한 3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

    며 잘 자라고 있는 4개의 싹은 김마르타, 이그레이스, 정매티, 김엘렌임을 알

    수 있다. 연례보고서 등에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졸업생 중 이름을 확

    인할 수 있는 사람은 위의 4명 이외에 이희망(1913), 이경선, 이레나, 이매리

    (1914), 정델리아(1917), 장데이지(1918), 한신광(1923) 등이고, 이 외에는 몇

    명이 졸업했다는 인원수만 보고하였다.91)

    연례보고서 등의 기록에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졸업생의 수는 34명이다.

    그러나 『조선간호부회보』를 통해 1912년 9월을 기점으로 1929년 여름까지 졸

    업생 수는 38명으로 기록되어 있어,92) 이전에 졸업한 7명과 1932년 졸업한 4

    인93)을 합하면 현재 확인 가능한 간호원양성소 졸업생 수는 모두 49명임을

    알 수 있다.

    졸업생 몇몇을 제외하고는 졸업 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들의 활동

    을 자세히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다만 1928년 겨울 기록에 졸업생 중 4명은

    사망하였으며, 반수는 결혼하여 간호원으로서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있으

    나, 그 외 나머지 사람은 사회에서 봉사하며 2~3인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90) Mary M. Cutler and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6, p.17; 조정환 역, 앞 책, 287쪽.91) ( )안의 숫자는 졸업년도이다.

    92) 『조선간호부회보』 13, 1929, 20쪽.

    93) 『조선간호부회보』 24, 1932,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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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80

    기록94)으로 1928년 당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출신 약 20여명 정도가 간호

    원으로서의 전문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학생으로 그 활동을 알 수 있는 주요 인물을 중심

    으로 어떤 과정으로 간호원양성소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어떤 활동을 하였는

    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 에드먼즈가 최초의

    간호학생 4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 미국의 간호잡지인 『The American Journal

    of Nursing』 1906년 6월호에 게재되었는데, 그 주인공 4인은 김마르타, 이그

    레이스, 김엘렌, 정매티이다. 이들 4명의 이름은 1906년 8월 보구여관에 관련

    된 제국신문의 기사에도 거론되었다.95) 왼쪽에 캡을 쓴 간호학생이 이그레이

    스, 오른쪽에 캡을 쓴 간호학생이 김마르타이다. 그 외 두 간호학생은 2회 가

    관식의 주인공이 되는 김엘렌과 정매티이다.

    김마르타(KIM Martha)는 1895년에 이미 보구여관에서 의료보조인, 보조

    전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96) 마르타는 흉포한 남편에게 정신적 육체적 상

    처를 입고 자신의 아이들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환자로 보구여관을 찾아왔다.

    94) 『조선간호부회보』 11, 1928, 6쪽.

    95) 「보구여관사업」, 『제국신문』, 1906년 8월 23일.

    96) WFMS, 1895,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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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81

    마르타는 보구여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치유를 받았

    고, 보구여관에서 전도부인과 의료보조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97) 1899

    년에는 보구여관에서 일반적인 가사 일을 하기 위해 고용되었고, 밤에는 입

    원환자를 보살피는 의료보조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98) 1901년에는 북

    감리교계 여성의료선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던 볼드윈진료소에서 전도부

    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이들을 전도하였으며,99) 1903년에는 다시 보구여관으

    로 돌아왔다.100)

    김마르타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설립되기 8~9년 전에 보구여관에 와

    서 간호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설

    립되었을 때 최초의 학생이 되었고, 1906년의 1회 가관식, 1908년의 1회 졸업

    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르타는 졸업 후에도 계속 보구여관에서 수간호사의

    역할을 담당하였고,101) 1909년에는 일반간호학을, 1911년에는 초급 해부학과

    생리학 강의하는 등 후배들의 교육에도 참여하게 되었다.102)

    이그레이스(LEE Grace)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1903년 연례보고서에 보

    구여관의 여의사였던 박에스더를 성실히 도왔다는 내용이다.103) 그레이스도

    1897년 경 환자로 보구여관을 찾아왔다. 그레이스는 해방된 노예 소녀로 신

    체장애자였고, 당시 여의사였던 로제타 홀과 커틀러에 의해 수술을 받고 완

    치되었다. 그레이스는 치료를 받으며 낮에는 이화학당에서 수업을 듣고, 오

    후에는 보구여관에서 의료보조를 하였다. 이그레이스 역시 보구여관 간호원

    97) WFMS, 1902, p.163; Mary M. Cutler and Margaret J. Edmunds,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1.

    98) Marry M. Cutler, “Po Ku Nyo Kwan,” KWC, 1899, p.27.99) Emma Ernsberger, “Baldwin dispensary and Chaple, East Gate,” KWC, 1902, p.17.100) Emma. Ernsberger, “Baldwin Dispensary and Evangelistic Work East Gate, Seoul,”

    KWC, 1903, pp.29-31.101) 조정환 역, 앞 책, 287쪽.

    102)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 Mary M. Cutler,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11, p.30.

    103) Esther K. Pak, “Chong Dong Dipensary, Seoul,” KWC, 1903,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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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82

    양성소의 최초 입학생이자, 1회 가관식, 1회 졸업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간호

    원양성소 학생이었던 1905년 기록에는 병원 매니저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104)

    이그레이스는 1907년 1월 30일 2회 가관식 행사가 끝나고, 이하영(李夏榮,

    1870~1952)105)과 결혼식을 올렸다.106) 이그레이스는 전통 방식이 아닌 자신

    의 의지에 의해 결혼을 선택하였고, 결혼 전 이하영과의 약속에 따라 결혼 후

    에도 보구여관에 남아 간호교육을 마무리하고 1908년 11월 졸업하였다.107)

    졸업한 후 그레이스는 1909년 11월 평양의 광혜여원으로 가족과 함께 자

    리를 옮겨 간호원의 직무를 담당하였고,108) 그곳의 간호선교사가 떠난 후에

    는 실질적인 수간호사로서의 역할을 해냈다.109) 이그레이스는 평양 광혜여원

    간호원으로 활동하면서 자혜병원에서 산과과목을 이수한 후, 총독부로부터

    1914년 5월 27일 의생(醫生) 면허(1905번)를 받았다.110) 이후 그레이스는 작

    은 의사라 불리면서 산과와 관련된 의료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남편 이하영이 1923년부터 강릉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그

    레이스도 함께 강릉으로 옮겨 그곳에서 200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치료하였

    고 산파로서의 활동도 하였다.111) 이하영이 1931년 목회활동을 은퇴하자, 이

    그레이스는 남편과 자녀(전처 1남과 3남 2녀)와 함께 수원으로 돌아와 거북산

    104) Mary M. Cutler, Margaret J. Edmund,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WC, 1905, p.61.105) 경기도 수원의 양반유생으로서, 1902년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건

    질 인재 양성에 주력하여 1903년 교회 옆에 두 채의 초가집을 구입하고 남여 학교를 시작

    하였다. 결혼 당시 이하영은 초대 교사로 부임하여 미감리회 선교부와 지역 교인들의 후

    원을 얻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하영은 본처 김씨와 사별하여 슬하에 아들 한명이

    있었다. 이덕주, 「맨주먹을 펴고 만세를 부른 이하영 목사」, 『기독교세계』 699, 1986 참고.

    106) Rev. G. H. Jones, “The Capping of the Nurses,” KMF 3-4, 1907, p.50.107) Margaret J. Edmunds,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07, pp.20-1.108) Sarah B. Hallman, “Pyeng Yang Woman's Hospital,” KWC, 1910, p.51.109) WFMS, 1912, p.170.110) 옥성득, 『한국간호역사자료집Ⅰ』 (대한간호협회, 2011), 601쪽; 『총독부관보』, 1914년 10

    월 15일; Lura M. Smith, “Korean Nurses-Then and Now,” KMF 36-3, 1940, p.52.111) SuKyung Ahn, “Baldwin Dispensary and Extention Work at Kang Nung,” KWC, 1935,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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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83

    밑에서 산파소를 경영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이그레

    이스는 1931년 로제타 홀의 “Dr. 그레이스는 의생시험에 합격하여 수원에서

    의료사업을 하고 있으며, 산과 치료를 위해 수 마일까지 왕진을 갔다.”112)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의사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그레이스는

    자신의 능력을 계속 발전시킴으로써 한국 최초의 간호원이자 총독부의 면허

    장을 가진 최초의 여성 의료인이 될 수 있었다.

    김엘렌(Kim Ellen)은 2회 가관식과 2회 졸업식의 주인공으로,113) 1908년에

    간호학생임에도 해부학을 가르쳤고, 1910년에는 기초생리학을 가르쳤다.114)

    졸업한 후 김엘렌은 1910년 재학생 2명과 함께 스크랜튼이 외국인들을 위해

    설립한 요양병원에 고용되었다.115)

    김마르타, 이그레이스, 김엘렌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학생으로서의 활

    동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 학생들과 연합하여 다

    양한 활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 6월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졸업생 및 학

    생들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 졸업생 및 학생들과 함께 세브란스병원

    간호원협회를 조직하였다.116) 그 해 11월에는 세브란스병원 간호원들과 존스

    홉킨스병원 간호원양성소를 조직하고 간호발전에 공헌한 이사벨 햄턴(Isabel

    Hampton)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추모글을 작성하였다.117) 또한 이들은 1911

    년 6월 7일 조직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 동문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

    다.118)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는 이상의 간호단체 활동에서 논의하였던 ‘환자

    들 음식’에 대해 연구하여 1911~12년 사이의 겨울에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

    성소 1회 졸업생인 김배세와 함께 시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

    112) Rosetta S. Hall, “Woman's Medical Institute,” KWC, 1931, p.57.113) The American Journal of Nursing(이하 AJN 약칭) 6-9, 1906, p.635.114) Alta I.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Seoul,” KMF 5-7, 1909, p.108;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4.115)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5.116) AJN 11-4, 1911, p.284117) AJN 12-3, 1911, p.216.118) AJN 12-3, 1911, pp.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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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84

    다.119) 김마르타, 이그레이스, 김엘렌은 한국 간호원협회와 동문회를 최초로

    조직하고 간호원으로서의 능력을 배양하고,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간호

    에 있어 새로운 분야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그 일선에 있었다.

    이상의 3명 외에 연례보고서에 주요하게 기록된 이희망(YI Hope), 이경선,

    이레나(YI Lena), 이메리(YI Mary)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희망은

    1909~10년경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입학하였다.

    이 사실은 간호원양성소 감독을 고무시켰고, 더 많은 젊은 여성이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간호원양성소에 들어올 것을 희망한다고 하였다.120) 이희망의 입학

    은 기존에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입학했던 학생들과는 달리, 이화학

    당을 졸업한 것이 인정되어 3학년으로 편입되었고,121) 1911년에는 간호원양

    성소에서 동료 간호학생들에게 산수를 가르치기도 하였다.122)

    이희망은 간호교육을 받는 동안 평양 광혜여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

    서 1913년 3월 7일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의 4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마르타

    와 이그레이스는 이희망의 졸업식에 참가하여, 졸업간호원으로서 김마르타

    는 ‘학교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그레이스는 ‘학교의 간단한 역사’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123) 이 희망은 졸업 후 서울로 돌아왔으나,124) 1914년 전반기 보구

    여관을 떠났다.125) 1914년 12월 치른 조선총독부시험에 합격하여 간호원면허

    증을 받게 되었다.126)

    119) Lura M. Smith, “Korean Nurses-then and now,” KMF 36-3, 1940, p.51.120) Alta J. Morrison,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0, p.25.121) WFMS, 1910, p.176.122) Mary M. Cutler, “Po Ku Nyo Koan(Hospital, Dispensary, and Training School for

    Nurses),” KWC, 1911, p.30.123) Rosetta S. Hall, “Graduating Exercises of the Methodist Training School for Nurses at the

    Pyeng Yang,” KMF 9-5, 1913, pp.118-9.124) Naomi A. Anderson, “Report of Nurses' Training school at Seoul, Korea,” KWC, 1913,

    p.51.

    125) Naomi A. Anderson,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The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4, p.78.126) Mary Stewart, Naomi Anderson, “Memorial Report of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KWC, 1915, p.52; WFMS, 1915, p.202.

  • 이방원 :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85

    1914년 5월 28일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서 이경선, 이레나, 이메리 3명

    이 졸업을 하였다. 이경선은 보구여관에 남았으며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의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이희망과 함께 간호원면허증을 획득하였다.127) 이레

    나는 더 나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개인병원에 취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원주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졸업 당

    시 이메리는 아직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으나,128) 그녀를 원하는 곳은 많았기

    때문에 곧 자리를 잡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졸업 후 계속 보구여관에서 수간

    호원 역할을 하던 이경선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 앤더슨이 1917년 10

    월 휴가에서 돌아오자,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보구여관을 떠났다.129)

    1923년 간호원양성소를 졸업한 한신광(韓晨光)은 광제병원에서 간호원으

    로 일하면서 산파면허시험을 준비하여 6월에 합격하였다. 1924년 1월 태화

    여자관 태화진찰소 사회봉사부회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모자보건사업을 시

    작하였으며,130) 1924년 1월 26일 김금옥, 정종명 등과 함께 조선간호부협회

    를 창립하였다.131) 한신광은 이후 근우회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에 마산으

    로 내려가 산파소를 개업하는 등 사회운동과 의료사업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꽃메, 2006).

    이외의 간호학생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어 각각의 인물에 대해 살펴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의 정리를 통해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졸업생들은 한국

    근대 간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환경,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 신분적 한

    계, 어려운 교육과정 등을 극복하고 전문인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

    127) Naomi A. Anderson,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The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4, p.79; Mary Stewart and Naomi A. Anderson, “Memorial Report of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KWC, 1915, p.52; WFMS, 1915, p.202.

    128) Naomi A. Anderson, “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and The Nurses Training

    School,” KWC, 1914, p.79.129) Naomi A. Anderson and Elizabeth S. Roberts, “Seoul Medical Report,” KWC, 1918.130) 「간호부의 생활-태화진찰소 한신광양」, 『동아일보』, 1925년 3월 18일.

    131) 「조선간호부협회는 명 26일 중앙교회서 개최」, 『동아일보』, 1924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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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86

    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체 활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

    다. 이들은 단순히 간호전문인으로서만 아니라 한국 근대여성의 역할모델이

    되었으며, 한국 의료계의 중추로 활동하였다.

    5. 결론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의료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활동하면서 전문적

    인 간호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대한 요구로 1903년 북감리교의 해외

    여성선교회에서 파견한 에드먼즈에 의해 한국 최초의 간호교육기관으로 설

    립되었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기독교 타 종파의 의료선교사들의 도움

    도 받으면서 간호 관련 교육과정을 마련하였으며, 처음에는 6년 과정으로 시

    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조선간호부회에서 선교계 간호원양성소의 교

    육과정의 표준화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도 그

    기준에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일정한 학습을 이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

    관식을 하였고, 간호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게 되면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가관식과 졸업식은 대상 학생이 있을 때마다 계획을 세워 진행하였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감독은 총 7명으로, 이들은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병원에서 간호장 또는 의사로서 간호학생들의 교육을 주관하였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를 졸업생은 총 49명이 확인된다. 초기 간호학생들은 보구여관

    에서 기존에 활동하고 있던 의료보조인들이었으나, 이후 입학규정도 정해지

    고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이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간호학생들은 졸

    업 후 보구여관에서 수간호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간호원양성소의 수

    업에도 참여하거나, 다른 선교계 병원 및 기관에 취직하였다. 이후 간호부 면

    허시험을 통해 면허증을 취득하여 개인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 간호교육기관으로 한국 여성들이 전문가

    로 거듭나는 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성으로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여

  • 이방원 :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355-394, 2011년 12월 │387

    성관을 극복하고 의식을 변환시킨 공간이었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는 한

    국 의료사에 있어 전문적인 간호원을 배출하는 통로를 처음으로 마련하였

    고, 졸업한 간호원은 한국 간호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 대해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여 정리를 하였다. 그

    러나 1916년까지의 기록은 자세하나, 그 이후로 갈수록 그 내용이 점점 소략

    해져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후반기 교육과정과 학생들 개인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충분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보구여관 간호학생들의 교내외활동

    에 대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면 이 논문에서 정리한 교육활동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활용되고, 이러한 사건들이 간호원의 의식 형성에 직접적으

    로 어떻게 작용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아가 보구여관 간호

    원양성소만의 연구에서 발전되어 다양한 간호교육기관에 대한 논의가 활발

    해져야만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가 가지는 위상과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

    가 총독부에서 허가된 간호원양성소에 포함되지 못한 원인 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