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창업 나렇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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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언론화제

신문사 창업

나렇게 성공했다 一 I영국의 인디펜던트를 중심으로

기자3명이 30개 투자사 모아 이룩한 130년만의 기적

% 東 九 /전경향신문 편집국장

MDENT

거의 4반세기에 걸쳐 신

문가를 짖눌러온 언론통

제가 풀리면서 새로운 신

문들이 나오고 있다. 일간

지 , 주간지, 또는 전문지

로 새로 나오는 신문들이

구언론질서에 대한 도전

을 시작했고 기존신문들

은 나름대로 환경변화에

따르는 응전의 자세를 가

다듬고 있다. 그과정에서

여러형태의 과도기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이런 변화

를 지켜 볼때마다 지금의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합당한 신문의 모형

이 어떤 것일까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다른나

라의 경우이지만 최근 영

국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새로나온 고급 일간지 인

디 펜던트 (Indipendent)

의 창간을 둘러싼 이야기

들이 남의 일같지 않다.

1986년 10월7일자 인디펜던트 창간호 ᅵ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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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난 6월초 영국을 잠시 여행할때였다. 동경 ᅳ런던을 직 항하는 영국 항공(British Air­

ways) 이 나리 다공항을 며나 고도를 잡자 기 내 서비스가 시작되고 스튜어 디스가 신문을 돌렸 다. 데일리 텔리 그라프 (Daily Telegraph),타 임스,데일리 미러, 선데이 옵저버 그리고 인 디펜던트였다. 2년전 영국에서 창간된 고급지 인디펜던트는 말로만 들었지 실물을 대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들 신문중 특히 인디펜던 트가 풍기는 신선한 개성에 매료되면서 두달전 이 신문의 동경특파원 엔드류 호바트를 만나던 때가 생각났다.

기적의 신문이란 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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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를 들고 환호하는 사원들. 가운데가 창업주역인 안드레아 위 탐

스미스, 그둬가 창업동료 메듀 시몬스

필자는 지난 4월 말 한국에 자주 유격취재를 오는 BBC의 동경특파원 월리엄 호슬리는 지난 4월말 저 녁식사 자리에 함께 왔다며 호바트기자를 소개했다.

총선거 취재를 끝내고 다음날 떠나는 호바트기자는 한 국신문계의 개편 움직 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 면서 그 는 창간한지 얼마안 된 인디펜던트가 2년만에 더 타 임스를 따라잡을 만큼 새로운 고급 일간지로 성공하 기까지 여러가지 배경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꼭 한번 인디펜던트를 구해보라고 권했다. 그뒤 영국에 머무

는 동안 몇차례 인디펜던트를 사보고서야 왜 이 신문 이 이토록 세계적으로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런던에서 만난 몇몇 영국인들도 이미 그동 안 보아오던 타임스를 끊고 인디펜던트를 보고 있었

다.

1980년에 들어와 미국과 영국에는 각기 기적과 신 화의 창조로 비유되는 신문이 한개씩 출현했다. “전 국지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신화를 깨고 1982

년 미국에서 창간된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5년만에 부 수 140만으로 전국 2위의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때 까지 유일한 전국지 월 스트리트 저널이 경제전문지 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일반지로서 유에스에이 투 데이는 단연 수위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그보다 4년뒤인 1986년 영국에서는 “한번도 새로운 고급지 가 성공한 예가 없다”는 131년간의 불문율을 깨 고■인디펜던트가 창간 첫년도부터 기성 4개 고급지와 같은 대열에 끼어 젊은층의 인기를 독점해 기적의 신 문이라는 찬탄을 받고 있다.

무엇이 일반의 예상을 깨고 두신문의 성공을 가능 케 했는가. 한마디로 복자들의 갈증을 정확히 파악하 여 파격적인 개성지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점 에서 두 신문은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두신문의 장업주는 모두가 절저한 기자출신이다. 유 에스에이 투데이의 아렌 노이하스(62세)는 말단 기자 로 시작해서 지금은 100개 지방지를 거느린 가네트계

열 신문재벌의 총수인 신문경영의 귀재로 불리운다.

인디펜던트의 창업동인 3명 가운데 주역인 안드레아 위탐 스미드(51세)는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경제부장 이었고 나머지 두명도 같은 신문에 근무하던 30대 경 제부기자들이 다. 기자 출신들이 었기 때문에 독자파악 이 정확했고 한 시대를 앞서가는 신문경영자로서 드 문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두 신문의 창업자들은 시장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도 TV독자라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오늘날 대

부분의 지역에서는 인구의 절반이상이 그날의 뉴스와 정보를 TV와 라디오를 통해 섭취하고■ 있다. 속보성

과 강력한 시각적 전달력을 가지고 대중을 사로잡는 전파매체의 시 청자를 무시 하고 관습적 인 신문 인구만 을 상대해 가지고서는 신문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 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었다.

다른 신문이 못하는 것 과감히 시도

[ [ ( 문에 유에스에이 투데이는보는 신문, 잡지같은신 문에 착안하여 신문의 TV화를 시도했다. 이 신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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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면은 TV에. 나간 뉴스를 반복하지 않는다. . 대신 토막으로' 처 리된ᅵ TV 주요뉴스의 지 난 24시 간과 앞으 로의 24시간을 앞뒤로 추적하여 TV가 해내지 못하고;

있는 뉴스와 정보의 종합적 인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 공하고 있다. 인디펜던트는 TV뉴스의 시청;다를 의식

; 하되 뉴스의 앞둬 종합이 아니 라 심층적 인분석과 해 설적인 기사에 역점을 둬 TV의 보완적 매체로서 신 문의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두신문은 기존신 문독자 이외에 또하나의 TV시 청자들을 신문쪽으로 끌

어들이는 새로운 시장창줄에 성공하고' 있다. .

유에스에이 투데이와 인디펜던트가 지니고■■있는ᅵ마

지막 공통적 특징은 과감할 정도로 기성지에서 볼수 없는 개성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개성 개 발에는'공통적이지만 유에스에이 투데이는.다른 신문 의 장점만을 모두 골라 취합하는 형식의 신문을 만들 고 있고 인디펜던트는 지금까지 어느 신문도 엄두를 내지 못한, 다른 신문들이 하지 못하고.있는 모험적 인 제작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이런' 현상은 전국지이면서 단순한 대중지로 출발한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미국적인 풍토와 역시 ■전국지이 면서 고급지를 의도한 인디펜던트의 영국적인 풍토가

상징하는 문화적 인 수용력의 차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철저하게 기성신문과 구별되 는 ■개성지로서 영국의 인디펜던트가 어떤 과정을 거

쳐왔는가에 집중된다.

인디펜던트는 먼저 “ 단일 기업가적 경영주의 횡포 와 투쟁적 노조로 부터의 해방”을 외치면서 기자들이

지 배하되 복수의 투자가들이 지원하는 벤처 비지나스 (Venture business) 로 출발했다. 회사의 자본은 10%

한도에서 출자한 30개 금융및 사회복지재단의 출연과 10%의 사원출자로 구성되어'단일 자본세력의 예속으 로부터 벗어났다. 그렇게 모인 자본금이 1,800만 파 운드(한화 약 230억원)였고 이 돈을 쓰는 방식이 또 한 특히했다. 우선 자본금의 36%인 500만 파운드(한 화 약 63억원)를 사치 앤드 사치광고희사에 줘 조사 연구를 전담케 했다. 광고 • 직접판매 • 홍보 • 시장조 사 등 4개 부■문으로 진행된 조사연구는 창간 1년 전 에 시작하여 창간뒤 6개월까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 고 조사 결과에 따라 모든 작업이 과학적으로 집행되

었다. 그대신 불필요한 고정투자를 피해 처음부터 자 체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싼 지역 건물을 임대하는 한

.편' 인쇄 시설읍"4개■ ■인쇄공장에 ■외주를 주면서 자•금 을 주로/두뇌 개 발과' 인력 투자에 침 중시 켰다. \신문의 성격은 제호가 ■말해주듯_ 엄정중립.이었다. '그러나 소 극적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인 중립,.중도적 '진보노선 을 .취했다. 영국신문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보통 신문크기의 절반안 타블로이드 판형의 대충지 (Popular) 가 있고 보통신문크기 의 고급지 (Quality) 가

있다. 대중지는 지역적이면서 흥미와 일상적인 정보 롤 전달하는 감각적인 신문을 말하며 고급지는 전국 적이면서 주로 각분야의 지배계층이 보는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신문들이 다. 이 고급지 4개 가운데 더 타임

■스 (47만부)는극우, 데일리 텔리그라프(12'0만부)는우 파,가디안(48만부)은 극좌 그리고 파이낸셜 ᅵ타임스 (22만부)는 경제금융지이다. 따라서 아직까자 영국의 고급지에는중도 신문이 존재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어느 정당이나 정파에 가담하지■ 않고 체제에'대한 과

감한‘ 비판을 사시로 내건 인디펜던트가 들어섰다. 정.

치적으로 완벽한 중립을 주장하는 이 신문의 개성은 거의 독보적 이 다. 무엇보다. 기사를 해설적으로 구성 .

■ 하되 길게 쓰지■ 않는다. 겨간에■쫓기며 사는 현대인'

들의 속도께 맞추어 짧은 시간에 깊게 알•리자는 뜻이 다. .1면 왼쪽에는 그날 뉴스의 주요 골자와 각 면의 기 사 색 인.이 소개된다. 하부 32면을 발행하는 지 면은 국내 정치 • 외신 • 경제 • 예술 • 스포츠에 고르게 할애 하면서 변칙적인 편집과 디자인을 도입하고 있다. 창 간호부터 그런 개성이 풍기고 있다. 1986년 10월7일

자 1면의 톱기사는 보수당 전국대회 에 관한 기사였다.

그러나 기사는 머리쪽에 가지 않고 약간 내려와 있다.

머 리쪽에는 가로 길게 소련잠수함이 침몰했다는 외신 기사가 조그닿게 자리잡고 있다. 대회 첫날이라 회의 의 알맹이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도 다 른 신문들처럼 대처수상이나 대회장의 요란한 분위기 에 관한 것이 아니 라 옆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관총 을 겨누고 철통같은 감시의 눈을 부릅뜬 경비경찰관 의 기이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인다펜던트가 창간 2년도 안되어 고정부수 40만을 넘어서 가독율 100

만을 매일 기록하고 있다.

30개 회사서 출자, 경영은 기자출신이

. ᅀ 미 드 가 신문창간을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친 구의 우연한 전화 한통이 었다. 신문재벌 에디 사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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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이드 컬러판 고급지 투데이를 막 창간한 뒤였다.

1985년 3월이 었다. 이 신문을 보고 비즈니스 위크잡 지에 있는 동료기자가 스미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투데이 신문의 창간을 어떻게 보며 이 신문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스미드는 한마디로 어림

도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놓는 순간 그에 게 새로운 충동이 일어났다. 나라고 신문 한번 못해

보란 법이 있을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 보겠 다는 꿈을 남몰래 키워왔다. 그가 일하고 있는 데일 리 텔리그■라프의 사세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부 수는 계속 떨어졌다. 회사안에 위기와 불안의 분위기 가 질게 깔■린지 오래였다. 그는 신문이 다른 기업가 의 손에 넘 어 가는 바극을 막기 위해 묘안을 짜기도 했 다.

그럴수록 신문을 이지경까지 몰아온 사주에 대한 분 노가 치밀어 의욕을 잃었다. 데일리 텔리그라프 사주 하트웰경은 생각이 보수적이고 경영이 편파적인 인물 이었다. 사주 한 사람의 일방적인 채찍밑에 일한다는 것이 스미드에게는 고역이었다. 능력이 뛰어난 스미 드는 사실상 회사내에서 노령의 편집국장 월리엄 디 데스 (기세) 의 ■뒤 를 이 어 받을 후계자로 지목되 어 온 터 였다. 스스로 신문을 만들겠다고 작심한 스미드는 즉 시 메모지에 가상 설계를 시작했다. 신문은 전국독자

'롤 상대로 하는 고급지여야 한다. 독자는 대중지 데

일리 메일등과 고급지 더 타임스와 데일리 텔리그라 프 등이 지니고 있는 고정시장을 겨눈다. 신문은 젊 은 세대에 강력한 호소력을 지녀야 하며 신문의 방향 은 진보적이어야 한다. 편집진은 35세에서 50세를 넘

지 않는 경험과 패기를 겸비한층으로 구성한다. 제작 과정은 첨단 기술을 도입한다. 기자는 직접 기사를 컴 퓨터에 입력하고 편집자는 막바로 터미널 스크린으로 지 면을 짠다. 사원도 주식을 공유하고 제작과 경 영 전 반을 기자들이 관장한다.

신문의 사시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선언하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 다. 신문의 방향이 설정되자 스미드는 구체적인 창办일정을 세웠다. 6개월뒤인 1985년 9월 까지 기금을 모집하고 1986년 4월까지는 신문사의 조 직을 완료한다. 창간은 1986년 10월로 잡는다. 구상 에서 부터 6개월단위로 3단계 창간전략이 이렇게 짜 여졌다.

구상의 다음 .단계로 스미드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 위 를 자랑하는 광고기 획 회사인 사치 앤드 사치 사를 찾 았다.' 신문설계의 시공과 감리를 전문적 인 홍보선전 집 단에 맡기자는 생 각에서 였다. 사치 앤드 사치 광고 회사는 영국의 20대 젊은 형제 둘이서 벤처 비지니스 로 회사를 설립하여,비범한 창의력으로 단시일에 국 제기업으로 자리굳힌 기적의 광고 두뇌조직이다. 사

치형제는 특히 대처수상의 첫 선거정치광고를 맡아 크 게 성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미드의 요청을 받은 사치희사는 매체담당책임자 인 페리스를 전담시켰다. 그러나 광고회사측은 보수

적 인 광고주들의 성향과 한정된 독자시장때문에 고급 지의 새로운 출현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치의 비관 론에도 불구하고 스미드는 모금한 창업 비 1,800만 파 운드 가운데 500파운드를 시장조사 용역비로 내놓았 다.

진보적 중립, 자본의 36%를 연구조사비에

^느미드는 다음 단계로 장업동료를 물색했다. 것번째 대상은 같은 신문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경제부기자인 신예 매듀 시몬스(31 세) 였다. 스미드와 신문스는 지

난 몇달등안 경 영주의 부탁으로 신문경 영의 쇄신에 관 한 정책을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개선책을 건 의했지만 회사측의 무능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던 터 였다. 회사 분위기를 덮고 있는 그런 무력감 때문인 지 시몬스도 기꺼이 스미드의 창간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7개월뒤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드디어 57년 의 하트웰 가족경영으로 부터 캐나다 기업인 콘라드 블랙에게 넘어갔다.

창업동료로 등장한 시몬스는 다시 신문경영에 경험'

이 풍부한 미러 신문그룹의 전무인 더글러스 롱을 포 섭해 영업관리쪽을 맡긴다. 마지막으로 제3의 기자동 료 스테픈 글로버가 가세했다. 그는 데일리 텔리그라 프의 특집부장이 었다. 시 몬스와는 옥스포드대 학 동창 으로 파이낸셜타임스에 있다가 시몬스와 함께 1981년 데일리 텔리그■라프로 옮겨왔다. 이렇게 해서 신문기 자 3명과 신문경 영 인 1명 모두 4명의 창간 주역 이 확 정 됐다.

그들은 1주일에 한두번씩 모여 본격적으로 창간을 준비했다. 그사이 사치광고회사의 폐리스가 이들과 합 류하여 광고와 판매전략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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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들어서 면서 편집의 방향을 짜기 시작했다. 먼 저 뉴스의 분석에 집중하고 예술과 여가생활 활용에

신문의 역점을 두기로 했다.

신문의 판형은 전지 표준형 (broadsheetᅳ보통 신문 크기) 으로 정했다. 독자층은 25세에서 45세까지 교육.

받은 중산층이상과 전문직인구를 대상으로 했다. 제 작과정은 최대한으로 첨단 기계화하기로 했다. 컬러 8페이지를 포함하여 앞으로 32면을 발행할때의 손익 분기점을 32만부로 보았다. 독자창출은 데일리 텔리 그■라프의 고정독자의 15%롤, 데일리 메일, 데일리 익 스프 레 스 (이상 대중지),더 타임스, 더 가디안(이상 고급지) 등의 4개 신문 독자의 10%를 확보한다. 창 업 총자본은 2천만 파운드로 예상했다.

사치화사도 창간계획이 진전됨에 따라 사업의 성격 에 매료되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 돈을 안받는다”

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적극 가담했다. 창업주역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 거침없이 일을 진행했다.

첫 조사결과가 나왔다. 1,000명을 전화로 인터뷰하 여 25~45세 독자들이 기존 신문에 대해 어떤 생각들 을 가지고 있는지 측정했다. 그 주요 골자를 보면 다

음과 같다.

①고급신문 구독자 가운데 15%가 현재신문에 만족 하지 않고 있고 11%는 신문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

고 있다.

②신문 구독습관을 바꾼 독자가운데 30%는 보던 신 문을 끊지 않고 다른 신문을 추가 구독했다.

③면담자의 80%는 어느 정 당에도 치우치 지 않는 신 문을 보고 싶어 한다. 그중 49%는 전국 고급지들이 하나같이 보도의 공평 성音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문 제가 있을때 객관적 이기 보다는 특정 정당노선에 맞 추어 해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④20%는 전국 고급지들이 더 많이 출현하여 선택 의 폭이 넓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⑤35%는 신문이 너무 광범위한 독자층을 상대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중 20%는 “ 나와 같은 연

령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함께 종사하고 있는 사람 들”을 직접적으로 목표하는 전국지가 나와주기를 절

실하게 바라고 있다.

⑥43%는 신문이 지금보다 더 많은 논평과 해설을 통해 TV와 라디오 뉴스를 효과적으로 보완해주어 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⑦29%는 “국민의 관심사를 많이 다루며 뉴스를 고 르게 분석해주는 완벽한 신문” 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 있다.

⑧38%는 전국지들도 지역뉴스와 사건을 보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84%는 현재 어떤 전국일간 지도 그런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결과 뉴스와 해설 그리고 실용적인 정보f" 종 '합적 으로 제공하는 전국지 에 '대한 독자들의 욕구가 강 열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때부터 스미드는 자금연출에,시몬스와 글로버는

인쇄,사옥,조직등을 분담하여 구체적인 실천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누구도 창간계획을'눈치채지 못했 다. 세 기자의 부인들과 스미드의 여비서 린다 태너 양만이 이들의 꿈과 모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뒷 바라지 했다. 특히 스미드의 여비서 린다양은 자료모 집의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신비의 여성으로 등장 한다.

인쇄소와 사옥 포기, 인력에 집중투자

人1]양에서는 모금행사가 파티를 통해서 시작되고 파 티에서 끝이 난다. 정치인의 선거자금이나 사회적으 로 공익성이 짙은 자금일 수록 모금 파티를 열어 자 연스럽게 출자자를 찾는 것이 관례다.

인디펜던트의 자금은 창업자 스미드의 여비서 린다 양 집의 저녁 파티로 부터 시작했다. 1985년 8월 25

일이었다. 손님중에는 린다가 평소 가깝게 지내온 톰 아트우드가 끼어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조그마한 금 용자문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린다는 그에게 스미드 창간계획을 귀띰했다. 다른 손님들 때문에 자세한 내 용은 피하고 사홀뒤 따로 점심을 약속했다. 다시 만 난 아트우드는 창간취지에 동의하고 장본인을 만나겠 다는 뜻을 비쳤다. 2주일 뒤 스미드와 아트우드가 만 나 사업계획서를 검토했다. 아트우드는.자금은 은행 돈을 주선하는 것보다 투하자본(Venture capital) 으

로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창업자본의 성격을 벤춰 비즈니스로 합의한 두사람은 1단계 신문

. 여론조사를 의뢰한 사치광고 회사를 잦았다. _ 투자자 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첫 조사결과가 중요하기 때 문이었다.

스미드는 창간자본의 규모를 2,000만 파운드로 잡 았다. 출자와 지원을 약속한 아트우드는 본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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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하기 위해 두가지 작업을 건의했 다. 스미 드의 창간취 지 와 사치 광고회 사 의 시 장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완벽 한 사

업계획서를 만들어야 하며, 투자자는 금융업자 중심이 합당하다는 것, 그리 고 이런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는 경영자문과 회계에 익숙한 전문가를 동원해 야 한다는 것이 었다. 영국에서는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업계획서의 진실성을 요구하는 법률적 인 장치를 마 련해놓고 있다. 만약 나중에 사업계획 서의 법률적인 하자나 거짓 사실이 들 어나면 최고 징역 7년의 형사처벌을 받

는다. 이 작업을 맡기 위해 전문 경영 상담역으로 아더 엔더슨이 추천되었다,

영국 ■신문역사상 이제까지 새로운 신문을 만들때 자 본을 모금한 전례가 없다. 신문자체가 모험이듯 기금 을 모집하는것 역시 영국 금융시장의 모험이었다.

. 자금의 원천으로 은행을 생각한 것과는 달리 투자 금융시장에 접근함에 따라 금융중재인이 필요했다. 아 트우드가 소개 한 금융중재 인은 신문창간을 위 한 모금 에 처음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스미드의 사업 취지 특히 제작과 인쇄를 분리해서 불필요한 고정투 자를 피해 인쇄는 기존공장에 맡기고 사옥도 자체건 물을 사들이는 대신 싼 지역의 건물을 빌어 쓰는 등 합리적인 발상에 감명을 받고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자금 조성은 2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단계는 사옥을 임대하고 편집기재를 발주하는데 필요한 기본 경비다. 2단계로 창간에 필요한 모든 계획이 완성된 뒤 나머지 액수를 모금한다. 모든 과정은'고도의 경 영전문가들과 아마추어 사업주 기자3인의 혼합형태로 진행되었다. 기자들은 1년간의 편집국 운행경비를 산 줄하고 직원들의 임금수준을 정하는 등 상식적인 선 의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경영자문팀은 5개년도별 초기자금, 월별 투입액,총자본과 경비 그리고 손익 계산점까지를 예측하는 자금계획을 편성했다.

1985년 9월말 세부계획 이 마련되면서 창간부수를 40

만부로 잡았다. 비 교적 적 은 부수로 시 작하는 만큼 구 독료가 차지하는 세수비율이 적 어 광고수입 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주와 사원들도 1 0 % 주식 보유

기자들의 급료와 경비 그리고 인원수는 데일리 텔리 그■라프와 데일리 미러 신문의 수준을 기초로 해서 높

은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 부분은 상품의 질을 결정 짖는 원자재와 같기 때문에 인색할 수가 없었다. 11

월에 들어서자 모금이 진척되기 시작했다. 벤춰기업 에 투자경 력 이 있는 상업은행 차터 하우스가 투자를 결 정했다. 자본계획은 이미 구체화되었다. 초기자본은 200만 파운드였다. 건물 임대와 컴퓨터 기계 발주에 필요한 경비 였다. 그 다음 단계는 1,600만 파운드,따 라서 '총 자본은 1,800만 파운드로 결정되었다. 투자 자 물색은 계속되어 2개월 뒤인 1986년 1월 5개 금융 및 벤춰 투자희사들이 합세했다. 영국기업사상 전례 가 없는 속도였다.

인사 업무관리가 사업의 열쇠 인 만큼 미 러그룹 신 문의 더글러스 롱이 영업 담당 전무로, 포트무즈 신문 계열의 크리스토퍼 바톤이 경리담당■이사로 임명됐다.

그때까지 장막에 가려 있던 창간계획 이 12월에 들어 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먼저 선데이 타임스가 “ 이름을 알 수 없는 소수의 기자들과 신문경영 관리 자들이 3,000만 파운드를 모금해 전국일간지”를 만들 려 한다는 기 사를 터 뜨렸 다. 닷새뒤 인 12월 27일엔 파 인낸설 타임스가 기자들의 아름까지 밝히면서 자세한 내용을 공개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튿날 스미드,시몬스, 글로버 세기자들은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사주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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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를 제줄했다.

그들은 12월 30일 런던 시 내 임시 사무실을 차려놓 고 공개적으로 창간작업에 착수했다. 해가 바뀐 1월 7일 첫 투자자들인 6개 회사대표와 창업주간에 회의 가 소집되 었다. 각 투자회사는 40만 파운드씩을 출연 키로 했다. 샴페인이 터지고 인디펜던트의 산고가 서 서히 시작됐다.

숨돌릴 틈도 없이 1,600만 파운드의 .2차 모금에 들 어갔다. 2차 모금에 실패하면 1차'투자자들이 내논 돈 은 찾을 길이 없고 스미드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2월 중순까지 1차 사업계획서를 정밀분석하여 보완 했다. 이 작업을 위해 2명의 전문변호사를 동원했다.

2차 모금형 태는 1차의 경우와는 달랐다. 주식투자 뿐 아니라 사채 차입 (loan stock) 을 병행했다. 전체 비율 은 투자주식 1,000만 파운드에 차입자본 800만 파운 드였다. 그가운데 100만 파운드의 주식을 창업주역들 에게 할애했다. 총주식의 10%였다. 1차 투자자들이 내는 200만 파운드는 200만 보통주로, 창업주들이 투 자한 13만 파운드 가운데 10만 파운드는 100만 보통 주로, 3만 파운드는 300만 전환주로. 처리되었다. 창 업주들이 투자한 13만 파운드에서 40%는 스미 드가 출 자했다. 그사이 TV타임스에 있던 아드리안 오닐이 광 고국장으로 들어왔다.

2차 모금에서는 모두 100명의 투자예상자들을 상대 로 60회의 설명회를 가졌다. 그중 30개사가 투자를 결 정했다. 신문사가 단일 투자가에 의해 지배되는 사태 를 막기 위해 최대 주식보유 한도를 10%로 제한했다.

4월 중순 금융투자회 사, 보험 회 사등 본격 적 인 기 업 체로 부터 우체국 연금공단 지방군위원회에 이르는 사

회복지단체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신문발행 취지 하나 만 믿고 30개 투자자들이 목표자금을 채워줬다. 불과 몇개월 사이에 단일 신종사업체가 거둬들인 최고액수 의 벤춰 자본금이었다. 4월 17일 투자자들의 수표가 입금 완료되는 것과 더불어 인디펜던트의 출산작업이

시작되었다.

제호는 젊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뜻 가져

ᅀ j 문의 제호는 태어 나는 아기의 이름보다 훨씬 중요 하다. 상품의 이미지를 선도하기 때문이다. 창업주 스 미드가 창간 구상 초기 혼자서 메모지에 적어놓은 신 문의 이 름 은 「Independent newspaper」였다. 신문의

편집 방향을 상평 하면서 새로운 신문으로 강력 한 호소 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시장성이 있고 매 력이 있으며 다른 신문에서 사용한 적 이 없어야 한다

는 것이 작명을 위해 그가 세운 원칙이었다. 제호선 정을 놓고. 창업동료들로 부터 많은 이름들이 제시되

자 1986년 1월 그중 여섯개 제호를 후보로 뽑아 사치 광고사에 넘겼다. 시장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호 의 후보로는「The Examinerj「The Chroniclej「The

Independent」 「The Arena j 「The Nation」 그리고 「24 Hours」였다. 조사는 500명의 예상독자를 상대로 6개 후보 제호를 준뒤 좋아하는 순위를 ;메기도록 했 다. 상위 3개 는 rThe Examiner」(10르명 ) , 「The

Chronicle j (102명) , 「The Independent」(1이 명) 의 순

이었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제호를 지적하 는 부문에서는 좋은 쪽 에 「Independent」가 64%로 1

위,그 다음이「Examiner」(63%) rChroniclej (59%)

r24 Hours」(59% )「Nation」(57%) 그리 고 「Amea」 - (51%) 순이었다.

이름에 따라 어떤 연상을 하느냐는 항목에서 응답 자들은 인디펜던트의 경우 “ 젊고 꽤 좌경한것 같지만 균형을 잃지는 않는다. 상당히 개방적 이고 계급적 편 견이 없으며 직업이나 전문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남성에. 치우치되 독신자나 기혼자에 모두 호감이 가 고 현대적인 감각이 강하며 지역적으로 소외된 계층

에 호소력이 크다”는 반응이었다.

최종 단계에 인디펜던트와 이그제미 너 두후보가 경 쟁했으나 이그제미너는 나이든 세대와 우파적 냄새가 강하다는 이유로 탈락되었다.

제호가 결정된 뒤 제호옆에 신문을 상징하는 심볼 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회사 심볼로는 런

던의 고층시가 모습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런던시의 . 모습은 영국의 남부를 상징하기 때문에 지역적인 편

견을■ 준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등 장한 것이 자유를 상징하는 독수리였다. 독수리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제 제격의 독수리를 찾는 작업이 시 작됐다. 독수리를 전문적으로 그리고 화가들을■ 전국 적으로 찾아헤댔다. 정교하고 사실적인 독수리 그림

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신문사가 내건 정선에 들어맞지 않았다. 스미드는 “사납고 힘이 센 독수리를 찾자 발톱도 힘차게 움직이는 독수리가 필 요하다”고 다구쳤다. 개 인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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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언론화제

라픽미술가 아담스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드디어 날 개를 활짝 펴고 힘 차게 나르는 독수리가 편집국에 날 아들었다. 확대를 해보고 축소도 해보았지만 박력있 는 모습에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날카로운 발 톱으로 신문을 움겨쥔 자유의 독수리가 인디펜던트의 상징으로 탄생했다.

제작은 최첨단 기술과 자동전산화로 혁신

A|J로운 신문을 구상하면서 스미드 일행이 풀어야 했

던 또 하나의 고비가 편집과 제작공정의 기술적인 선 택이었다. 재래식으로 가느냐 재래식과 현대식을 절 충하느냐 아니면 완전 첨 단기술화에 모험을 거느냐는

세가지 방향을 놓고 고민이 시작되 었다. 취재하고 기 사를 쓰고 편집하는 일에만 익숙한 스미드는 1985년 10월 인쇄 제작 및 신문기술 혁신의 전문가인 빌 라 이트슨을 기술자문으로 초빙했다. 그는 최초로 영국

신문의 컴퓨터사식,웨브 • 옵세트 컬 러 인쇄기 술과 장 치를 개발한 인물이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모든 제 작과정을 최첨단 전산화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여기 서 인디펜던트 신문은 신문기술의 새로운 신화를 창 조했다. 기자가 기사를 컴퓨터에 직접 입 력하고 컴퓨 터 스크린으로 지면을 등시에 일괄 편집하며 팩시밀 리 전송망을 통해 4개 인쇄소에서 일제히 인쇄하는 3

위 일체공정이 다. 지금까지는 기자가 타자기에 기사 를 쳐서 넘기면 테스크가 검토한뒤 기사 비중을 표시 해 편집자에 넘기고 편집자는 기사의 제목을 달아 겔 리조판을 한뒤 지면을 구상한다. 이 과정이 VDT

(Visual Display Terminal) 컴퓨터에서 한꺼 번에 처

리된다. 기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단말기에는 조사 부에서 보관수록한 각종 자료및 정보 그리고 AP, UPI,

로이터 등의 국제 통신사들이 보내오는 통신기사들이 모두 입력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동료기자들이 쓴 기 사도 찾아 참고할 수 있다.

편집국의 두뇌집 산이 라 할 VDT에 앉아 모든 제작 이 이뤄진다. 도표,그림,지면의 모형은 터미널 스 크린에서 완성된다. 연필과 종이와 각종도구가 일체 필요없게 됐다. 이렇게 까지 제작을 전면전산화한 신 문은 인디펜던트가 전국 고급지로서는 유일하다.

기자가 입력한 기사를 받아 각 면 편집자는 사진과 광고등을 종합하여 지면 구성을 완성하게 되고 그 다

음 팩시밀리를 통해 인쇄소에 넘겨진다. 전산화는 종

전의 제작방식에 비 해 시간을 3분의 2 단축시 킨다. 인 원면에서는 한 페이지를 완성할때 지금까지는 20명이 달라붙었지만 불과 5명으로 충분하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분은 어 느 신문보다도 앞서서 모든 제작 및 인쇄과정을 완전 전산화한 신문으로 유명하다.

1986년 1월 스미드는 기술자문 라이트슨과 함께 파 리에 달려가 이 신문의 기술혁신과정을 참관한 뒤 그 곳 컴퓨터 및 기술책임자 두명에게 함께 일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들은 처음 주저했지만 신문의 성격을 자 세히 듣고 난 뒤 1986년 5월 한명은 공무국장오로 다 른 한명은 데이타 시스팀 책임자로 합류했다.

인디펜던트가 기록한 또 하나의 기술적인 혁신은 인

쇄방식 이다.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는 대신 그들은 전 국 4개지역에 있는 기존인쇄소와 전용계약을 맺고 편 집이 완성되는 즉시 팩시밀리로 전송하여 신문을 찍 어낸다. 여기에 사용되는 기계는 다트랙스 레이저 스 캐닝장치다. 본사에서 제작된 지면을 다트랙스 시스 팀 이 부호로 전환시 켜 영국체신성의 육로 메가스트림 랜드라인으로 보낸다. 인쇄소에 설치된 다트랙스 송

신장치는 이 신호를 받아 레이저 빔을 통해 윤전기용 특수판에 원형으로 전환시켜 복사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인쇄소라도 본사에서 전송을 받아 판형을 만 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90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첨단기술의 도입을 통해 인디펜던트는 사진과 인쇄의 선명도에서 가장 뛰어난 신문, 신문을 보고난 뒤 손에 검은 먹이 제일 덜 묻는 신문으로 환영을 받 고 있다.

4개 고급지에서 우수기자 빼내

리디펜던트의 창간 작업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가 모든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일급 인력을 확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에 따라 편집국장에 스미 드,부국장에 시몬스, 부국장대우 외신부장에 글로버 등 창업주역 3명 이 지휘 일선에 포진한 뒤 정예편집진 을 규합했다. 먼저 더 가디안의 유명한 논설위원 토 로드가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뒤를 이어 텔리그 라프에서 경제부장과 차장,타임스에서 정치부장,국

내부장, 특집부차장,외신부차장,교육부장,보건부 장,가디안에서. 체육부장 • 매체부장 • 체육부장 • 선데 이 텔리그라프에서 문화부장,BBC에서 예술부장,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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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통신에서 가정부장, 외신부차장 등 주요경쟁지의 핵심 간부급들이 데스크로 합류했다.

1986년 6월말 1차 창간 요원으로 확보한 편집국기 자 115명은 텔리그라프에서 9명, 데일리 메일에서 5

명,가디안에서 4명,파이낸셜 타임스에서 4명, 그리 고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BBC방송, 로이터 통신등 에서 옮겨왔다. 밑의 기자급까지 합쳐 모두 2,000명 이 응모했고 스미드의 말을 빌면 총인원의 80~85%

가 당초 목표한 기자로 채워졌다.

인디펜던트로 이적하려는 기자들에게는 소속 신문 사에서 월급을 올려주는 등 회유책을 썼지만 대부분 이 그런 유혹을 뿌리쳤다. 인디펜던트의 스미드가 내

건 신문의 사시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내세운 신문의 방향은 “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킨 다.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엄정 한 중도 노선에서 시비를 가린다. 그러나 경제,외교 그■리고 국내정책에서는 강력하게 자기 견해를 밝힌다”

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제작방침은 기존신문 제작태도에 환멸을 느 끼고 있는 유능한 기자들에게 대단한 매력이었다.

더욱이 이때는 기존 전국고급지에 대한 평가가 밑 바닥을 헤메고 있던 시기였다. 기자들은 데일리 텔리 그라프를 따분하고 타성에 젖어 있는 우파신문으로, 가디안을 진부하고 너무 좌파에 기울어지고 있는 신 문으로 더 타임스도 역시 타성에 젖은̂ 따분한 신문이 며 노선은 극우라고 말하고 있던 때였다. 새로운 신

문의 출현을 기다리는 패기 있는 기자들이 점차 늘어 나 참신한 신문만 나온다면 당장에라도 옮겨갈 분위 기가 팽배해 있었다.

인디펜던트가 제시한 편집원칙은 이런 욕구를 충족 시키기에 중분했다. 경제적 이슈에 관해 자유시장 이 론을 지지한다. 사회적 이슈에는 진보적인 ■노선을 취 한다. 외교 이슈에는 실용적 인 자세를 취한다. 모든

사원은 회사 주식을 소유할 수 있다. 사원들이 소유 한 주식의 가치는 처음엔 별것이 아니지만 기업이 예 상대로 성장하는 경우 4년뒤 1,000만 파운드의 재산 가치로 늘어난다.

기자들이 인디펜던트로 부터 받은 매력 가운데에는 파격적인 취재정책이 포함되었다. 인디펜던트의 정치 부기자들은 수상실에서 매일 정부의 정책과 조치에 관 해 실시 하는 정규 브리핑 에 참가하지 못한다. 집 단 브

컴퓨터로 제작한 도표와 커트의 샘플들

리핑에 참여하면 기사쓰기는 편하지만 정부정책을 절 달하거나 정부가 의도하는■홍보방향에 오도될수 있다.

그리고 관급기사률 받아먹는 획 일주의에 빠져들기 쉽 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인디펜던트의 정치 부기자들은 다른 신문사 동료기자들 보다 몇배의 노 력과 취재원을 개발해야 하며 24시간 긴장을 풀지 못 하고 있다. 그대신 다른 신문에서 쉽게 찾을수 없는

독자적인 취재와 개성을 통해 발굴해 내는 기사들을 더 많이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신문의 기자들은 또 어떤 명목으로도 정부나 기업체 그리고 모든 형태의 취재원으로 부터 물질적 인 혜택이나 무료 서비스를 받 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제받고 있다. 정치부 기자 사 회에 알게 모르게 번져온 나쁜 관행을 철저하게 배격

하자는 취지다.

창간 직전 편집국 기자수는 175명,창간 1년뒤인 1987년 11월 현재 209명으로 늘었다. 신문사의 직원 은 모두. 403명,편집국기 자들을 제외 하면 광고와 영 업에 80명,판매 22명,공무 20명,경리 및 관리 41

명,임원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성격과 제작 규모의 다른 전국 고급지들의 사원규모가 한때 수천

명에 이를만큼 방만한 것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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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언론화제

도의 적은 인원이다.

파격적인 편집과 디자인

ᅀI 문의 크기와 지면의 모양을 결정하기 위해 스미드

일행은 영국의 국내신문과 외국.신문 특히 프랑스,미 국, 스페인의 고급지들을 철저히 검토했다. 전통적으 로 영국과 구라파에서는 대중지들이 타블로이드 판형 을,고급지들은 크기가 2배인 전지 형을 채 택하고 있 다. 타블로이드 탄형은 사서 읽고 접어 가지고 다니'

기가 간편하다. 광고나 사설면을 짜는데도 편집하기 가 쉽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기사를 집중 적 으로 처 리 하기 에는 지 면끼 너무 좁다. 그에 비 해 전

■ 지판형은 내용에 중점을 두는 고급자에 적 합하다. 기 사나 해설을 중점취급할 수 있을뿐 아니라 사진과 도 .

표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시원하게 같은 면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으로 보면.타블로이드판형 은 전지 핀:형의 경우에 비해 두번를 접어야 하기 때 문에 시간과 경비가.더든'다. 스미드는 타블로이드판 형보다 약간 큰 파리■의 르 몽드 판형에 한때 끌리기

도 했지만 사진과 제목 그리고 디자인을 무시하고 너 무 고답적으로 만드는 경우 대중적인 감각이 희생된

다는 약점때문에 결국 전지판형으로 결론을 내렸다.

신문디자인 전문가들과 창업주들은 마침내 새 신문 의 편집형태로 다음과 같은 4대 원칙에 합의했다.

①크기는 전지로 한다.

②1면 기4 는 각 면 속페이지로 계속시키지 않고 원 기사에서 끝을 낸다.

③따라서 다른 신문보다는 기사의 양이■길어질수도 있다.

④1면을 포함하여 각면 성격 별로 뉴스의 요약과 색 인을 소개한다.

1면 왼쪽 머 리에 박스로 그날의 뉴스를 요약하고 간 지의 각면에도 주요 뉴스와 특집을 소개하는 색인을

넣는다. 바쁜 독자들에게ᅵ 그날의 신문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읽고 싶은 기사를 쉽 게 찾을 수 있

도록 하자는 뜻이었다.

신문편집을 위해서는 큰 신문 잡지에서 발군의 능 력을 보여혼 디자이너들을 초빙했다. 보그(Vogue) 에 서 미 술부장으로 데 일 리 익 스프레 스와 더 업 저 버 에 서 컬 러 특집부장으로 일한 호키 가 그 중의 한명 이 었다.

1986년 6월 첫 시작지 (dummy page) 가 제작되 었다.

1면과 간지통면 그리고 외신면이었다. 기사의 배열과■ 모양 편집의 독창.성과 대담성 과감한 ■컬러와 사진취 급등 다른 신문과는 판이한 얼굴이었다. 몇번을 거듭 한 끝에 7월말 250부의 컬러판 시'작지와 250부의 흑 백 기사판을 인쇄하여 사치광고회사에 넘겨주어 독자 들의 시 장반응을 측정 했다. 창간일 3개 월을 앞두고 실 제 지면제작의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컬러의 사용, 제목의 활자처리, 필자표시(by-line).,

본문활자의 모양등 다른 고급 신문에서 볼 수 없는 생 동감이 넘쳤다. 편집회의에서는 출범 5주일을 앞둔.8

월말부터 실제와 똑같은 신문을 매일 제작키로 했다.

그 기간에 각부문별 수정, 보완 개선작업 이 꾸준히 계 속되 었다. 독자의 여론조사는 어느 신문보다도. “신선 하고 산뜻하며 흥미를 끈다” “현대적인 감각과 모양

이 넘찬다” “독자들을 신문전면에 걸쳐 친절하게 안 내한다” “주요기사들이 다른 신문들에 비해 명료하게

구분되어 지루하자 않다”는 고무적 인 반응이 었다.

창업주역과 그들을 믿고 몰려온 기자들은 이제 자 신■이 넘쳤다. 그러나 스미드의 욕심은 그 정도에 그 치지 않았다.

. 8월 21'일 간부회의에서 그는 편집미술팀에게 사훌 뒤로 다가선 정식 시 각지 발행을 앞두고 지면의 전면

쇄신을 한번 더 연구토록 요구했다. 이단계에서 보다 과감한 조치들이 결정되었다. 1면 사진의 '경우 타임 스 가디안, 그리고 데일리 텔리그라프 등 고급지들은

수십년동안 제일 중요한 사진을 바른쪽 꼭대기에 싣 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인디펜던트은 이 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기로 했다. 사진의 성격과 관련 기사 위치에, 따라 제일 크게 실리는 사진은 지면 한 가운데에도 올 수 있고 왼쪽 가장 자리에 놓을수도 있 고 때로는 1면 밑바닥에 깔수도 있게끔 신축성있게 옮 겨 다니기로 했다. 단순히 기계적 인 관습을 깨자는 것

이 아니라 사진은 성격과 기사에 따라 변화의 폭을 넓 게 주자는 뜻이었다.

사진위.치에■ 대한 이러한 과감한 변화는 1면에 한정 되지 않고 신문의 모든 페이지에 고루 적용되었다. 편 집과 그래픽은 컴퓨터로 처리되기 때문에 종전의 절반 인력을 가지고 3분의 1경비로 시간을 반으로 줄여 3배 의 생산능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지면의 변동과 개혁 :

은 시간에 쫓기는 신문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순발력 있게 집행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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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간 시작지 만들며 조사분석

^ 간 5주일 앞두고 시작지 (dummy pages) 를 내는 동안 스미드는 기자들을 진두 지휘하면서 다른 신문 이 손대지 못한 개성을 추구하는데 전력했다. 다른 신 문들과 동등한 조건, 동등한 기준으로는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 이 그의 확고한 철학이었다. 그 대표적 인 예 가 사진의 처 리였다. 인디펜던트는 사진와 선택기준 특히 1면의 사진처 리 기준을 뉴스성에 두지 않고 그 날 취재한 가장 좋은 사진에 두었다. ■매일 대문짝만 하게 모든 신문에 실리는 대처수상과 찰스 황태자의 사진에 독자들은 식상한지 오래다. 대처수상이 관저 에서 기업체사장들과 회담할때 대처수상과 참석자들 을 클로즈 업 시키지 않고 회의장 분위기를 나타내는

18세기 가구와 장식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상관저 의 장식이 독자의 홍미를 더 끌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취재에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지금까지는 현장사진을 신속하게 처 리하기 위해서 보조원을 딸려 보내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을 이등암실에 현상한뒤 그

것을 본사 사진부 암실에 전송했다. 그러나 인디펜던 트는.니콘 무선전송기계를 통해 현장에서 직■접 사진 부에 설치된 수신용 무선장치에 직접 보내, 소요시간 은 2분 정도로 단축했다. 그 아후 다른 신문들이 이 현장무선전송방식을 채택하여 지금은 모두들 사용하 고 있다.

이기간 시장조사와 홍보캠페인이 집중적으로 실시 되었다. 새 신문을 알리는 안내장을 300만매를 뿌렸 다. 연령과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잠재독자가 될만한 상대를 골라 선전문을 보내면서 창업자 스미드의 인 사장을 함께 배포했다. 인사장에사 스미드는 “나는 지 난 20년간 신문에 종사하면서 전국 고급지의 쇠퇴를 목격했고 당혹스러운 노사분쟁과 경영층의 부패 때문 에 .발전을 기약할 수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나 는 새로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는 공정한 보도와ᅵ 훌륭한 기사를 명예로 삼는다. 정 확성,명론성,그리고 재미있는 기사一그것이 우리가 기자들에 게 요구하고 있는 우리 신문의 권위 ” 라고 다 짐 했다.

안내장은 독자들에게 하루치 신문을 보고 새 신문 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3주 구독을 신청해서 보고난 다음에 결 정을 내려 달라고 호소했다. 3주일뒤 보고 싶

지 않은 이유를 적어 신문사에 보내주면 구독료는 환 불해준다. 그러나 3주 구독을 신청했다가 취소한 독

자는 단한명 뿐이었다.

한달동안 시작지를 만든 것은■ 기자들의 취재방향, 새로 도입한 기술의 측정,인쇄와 배달의 점검 그리

고 잠재 독자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320명의 독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020%가 대단히 좋다는 평가를 보여주었다. 단순 히 좋다고 평가한 비율까지 합하면 81%가 호의적 인

반응을 보여준 셈이다. 기사와 편집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o 대부분의 독자들이 새 신문이 매력있고 즐길만하

며 편안하게 읽을수 있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o 기존 신문과 비교하여 모든 점에서 좋게 평가했

다.

' 050%이상이 지금보고 있는 기존 신문보다 다소 좋 다고 지적했다.

014%는 지금 구독하는 신문에 비해 월등하게 좋 다고 칭찬했다.

o 고급지 (Times, Telegraph, Guardian) 독자들은 기

사의 길이가 적당하다고 말한 반면 대중지 데일리 메 일과 데일리 익스프레스 독자들은 기사가 약간 긴편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인쇄의 질 특히 사진의 선명 도에 관해서는 압도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었다. 문화 계뉴스,TV소개 외신뉴스가 특히 기존신문에 비해 충 실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론조사결과를 토대로 수 없는 수정과 보완작업이 계속되었다.

창간 일주일전부터는 300만 파운드를 들여 대대적 인 선전작업 이 시작되었다. 전국에 48개 대형 포스터 가 설치되고 10초~40초짜리 丁V광고,50~60초짜리 라디오광고 그리고 전국일간지들에 전면광고가 나갔 다. 제호가 상징하듯 재정적으로 중립적이고 정치적 으로 중립적이며 정신적으로도 중립적일뿐 아니라 노

사 역시 중립적이라는 것이■홍보의 초점이었다. 창간 일부터 ᅵ15개월간의 판촉예산을 500만 파운드로 잡았 다. 여기에는 직접 판매전략물인 스티커, 포스터 그 리고 전국 4만2,000개의 신문 판매소 영업비가 포함

되어 있다.

편집국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을랐다. 기사와 편 집모양을 놓고 매일 열띤 토의가 진행되었다.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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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상대방의 기사를 놓고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시비 하고 의논했다. 부서가 다르고 맡은 일이 달라도 서 로 자기일처럼 내놓고 참견하고 도와주고 비판했다.

남을 비판한 것 만큼 자기도 비판을 받기 때문에 누 구나 부당하게 공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층층이 담을 쌓고 지내는 기존 신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창간호 6 5만부 매진

] 986년 10월 6일 밤 9시 35분 10월 7일자 창간호의 1면이 마지막으로 인쇄소에 넘겨졌다. 모두들 지쳤지

만 신생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잔뜩 긴장했다. 새 벽 12시 30분 인쇄소에서 신문이 배달되었다. 조사부 넓은 방에 마련된 축하연에 400병의 샴페인이 터졌다.

오랜 산고끝의 무통분만이었다. 기자들의 표정에 자

부심이 넘쳤다. 65만부를 찍은 창간호는 물론 매진됐

다.

모두들 창간호 2면에 실린 창업주 스미드의 창간사 를 읽었다.

“ 인디펜던트 신문을 준비하면서 새 신문은 무엇이 다르며 왜 독자들은 기존 신문을 버리고 새 신문을 보

아야 하는가 그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우리는 새ᅵ 신문을 다른 신문과는 다르게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 울였다. 그래서 타블로이드 판형이나 컬러를 많이 쓰 자는 유혹을 뿌리 치고 영국의 전통적 인 고급신문의 틀 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몸부림쳤다. 무엇보다 도 오늘날 고급지들이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 며 노조의 제약과 타성적인 신문 소유주들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편견때문에 언론의 숭고한 사명이 제대 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새 신문의 투자자들과 신 문종사자들의 신념 속에 인디펜던트는 탄생한다.

새신문의 소유권은 30개 금융회사와 종업원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어느 주주도 최고 10%이상을 소유하 지 못한다. 출자자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우리 가 그들에게 투자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 는 한 그들은 우리들의 편집방향에 간섭하지 않을 것 이다. 우리는 좌우익 어느 쪽이든 정치적인 이슈를 자 유롭게 다룰수 있고 경제적인 부정을 파헤치며 체제 를 비평할수 있다v 우리는 정치노선에 상관없이 비판 하고 칭찬할 것이며 우리가 표방하는 정치적, 지성적,

경제적 중립성은 경쟁지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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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단계에서 제작한 저i호와 ᅵ면의 각종 샘플들

실.의 브리핑제도에 참여하지 않는 최초의 신문으로서

다른 신문에서 볼 수 없는 개혁과 변화를 추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신문의 뉴스는 보통기사보다 길다.

우리는 대부분 TV와 라디오를 통해 그날 뉴스의 제 목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전문기자들을 통해 분석과 해

설을 추구한다. 동시에 항상 바뿐 독자들을 위해 1면 에 그날의 주요뉴스를 요약한다. 논설페이지에서는 필

자의 개인적인 주관을 개진하며 매주 여가생활과 일 반정보 이외에 건강,매체, 직장에 관한 특집을 다룬 다. 우리는 소비자 편에서 강력한 주장을 전개하고 부 모와 학생들의 ■입장에서 교육 문제를,환자의 입 장에 서 건강문제를 취급한다.

인디펜던트의 독자들은 평균이상으로■문화예술에 관 심이 있는 사람들이며 이를 위해 과감하게 지면을 할 애할 것이다. 체육면에서는 전통적인 스포츠 이외에 새로운 취향과 변화를 개발하며 활발하게 논쟁을 붙

인다. 지 난 한달동안 우리는 매 일 시 작지를 발행하면 서 기술적인 적응과 새로운 조직체로서 일의 조화를 시험하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성취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독자들을 갖지 못했다.

여러 독자와 우리와의 관계가 이제부터 우리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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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의 신문이 될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

1985년 3월 스미드가 처음 새 신문을 구상할때 지

녔던 원칙과 형태가 거의 변화지 않고 창간에 구현됐 다.

신문에 대한 평 가는 대체적으로 호의 적 인 것이 었다.

그뒤 며칠동안 계속 50만부 이상이 팔렸다. 당시 영 국의 전국 고급지는 37만 5,000부만 나가면 채산이 맞 아 기업으로 유지할 수.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스 미드는 타임스, 텔리그라프,그리고 가디 안 등 3개 경

쟁지에서 19만명의 독자를 빼돌린다는 계산이 었다. 그 수치는 세 기존신문의 총부수 230만부 가운데서 8%

를 차지하는 수치 였다. 결과적으로 스미드는 창간구 상 단계에서 세운 1,000개의 다리를 모두 완벽하게 건 녔다. 그 가운데 어느 한 다리에서라도 휘청했다면 오

늘의 창간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적 영국사 회에 새로운 저널리즘의 얼굴이 선을 보였다.

젊은층 독자가 5 3 % 차지

■간 일주일뒤 인디펜던트는 독자성향과 각면에 대

한 구체적 반응을 측정하기 위해 다시 여론조사를 실 시했다. 사회계층별로 새 신문을 읽은 독자를 상대로 조사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①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구독자는 경쟁지인 타임 스, 텔리그라프 그리고 가 ! ^ 언에서 넘어 왔다,

②편집의 새로운 스타일, ^ 스취급방식,인쇄의 수 준 그리고 편견없는 보도자세에 호감을 표시했다.

③외국소식,국내뉴스 그리고 TV및 문화행사 소개

란의 내용이 충실한 것으로 좋게 평가되었다.

④일부 독자는 신문크기에 불만이 있고 일부는 지 면이 너무 딱딱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극히 소수의 독자는 강력한 개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다.

1986년 11월 중순 전국 독자조사소의 합동산업위원 희가 실시한 특별연구조사에서는 이 ■신문이 이미 고 급지로서의 평가를 독자들로부터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초보단계임을 보여주었다. 평균 판매 부수는 33만부, 독자총수는 100만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추 산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또 인디펜던트가 고급지 가 운데에서는 가디안 다음으로 가장 젊은.독자증을 확 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 볼때 15세〜45세의 독자가 전체의 53%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 급지로서는 초보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데일리 메일과

데일리 익스프레스 같은 대중지에 비하면 독자 수준

이 훨씬 높았다. 이들 독자중 3분의 2는 남성이었다.

이는 여성의 관심사에 관해 지면의 할애가 충분치 못 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시장분석에 의하면 데일 리 텔리그라프의 가정배.달이 전체부수의 50%인데 비 해 새 신문은 불과 12%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여성 독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분석이었다. 남편이 줄근길에 신문을 사서 사무실에서 보고 버리기 때문 이었다. .

광고면에서 는 디스플레 이 광고는 기 성 신문과 비 슷한

신탁을 올렸지만 안내광고는 부족했다. 훈련받은 광 고 영업사원을 초기에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편집과 활자체에서는 기존신문을 단연 앞섰다. 누 가 봐도 단순히 기사를 배열한 것이 아나라 무언가 읽

을 거리가 많아 보였다. 도안과 다지안은 일급이었다.

11월 13일에는 1면에 처음으로 컬러사진을 실었다.

그날은 상원에서 의회가 개원하는 날이었다. 화려하 고 장엄한 의회 개막사진은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시 각적인 충동을 높여주었다. 인쇄도 그림처럼 선명했 다. 이튿날 컬러신문을 사겠다는 요청이 쏟아져 들어 왔다. 그뒤 1년간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사 면의 컬러취급에는 신중을 기했고 컬러는 주로 광고 면에 활용되고 있다. 취미생활 페이지에서 패션4 을 독립시키자 패션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토요일의 주말 페이지는 평일 지면의 특집과는 전

혀 다른 감각으로 꾸였다. 활자의 모양,편집체제, 지 면 구획이 평소 특집란과 구별되어 전혀 다른 신문처 럼 독자의 눈을 끌었고 주말 광고가 증가했다. .

첫 1년동안 기사면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기 니스 스 캔들사건, 피터 라이트의 정보누설사건,후생성 은폐 사건등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최대한 발휘했다. 1986

년 말에는 창간에 심혈을 기울이던 더글러스 롱이 62

세로 전무직을 정년퇴직하고 창업자 스미드가 그 자

리를 겸직했다.

광고도 첫년도에 목표를 달성, 일년뒤 인 1987년 가 을에는 새 광고기획회사와 계약을 맺고 광고면의 디 자인을 전면 개혁했다. 오래전부터 신문사 광고국과 편집국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광고국 직원들은 광고틈새를 메꾸는 것이 기사이며 영업의 핵 심은 광고가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 강했다.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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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언론화제

로 편집국에는 광고는 봉급을 받아 편안한 생활을 즐 기기 위해 존재하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있다. 그러나 인디펜던트에서는 편집국과 광고국사원

간에 훨씬 가까운 유대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다.

편집상 등 각종 언론상 휩쓸어

간 첫해 새 신문의 성공을 상징해 주는 가장 두드 터 진 성과는 수없이 쏟아진 각종 상과 표창이었다. 그 해의 신문상, 그 해의 기자상(창업주 스미드)에서 부 터 그• 해의 보도매체상에 이르기까지 각 단체에서 영

국언론에 수여하는 상을 거의 독점했다. 경제기자상,

기 획 기 자상, •언론자유상, 사진저 널 리 즘상,특종사진 상,스포츠사진상, 최우수스포츠 페이지상, 정치만평 상, 보도상,여성정치인 및 공직자 취재상,최우수 사 진상,윈코트 최우수 경제면 경제기자상,글락소과학

기자상 등이 편집국에 안겨졌다. 독특한 편집에 지혜 를 짜낸 결과로서 신문디자인 상을 받은 것은 미술부

직원들의 영광일뿐 아니라 ■그 성과를 사회적으로 인 정해준 가장 자랑스러운 수확이었다.

' 1987년 9월 2일 하원의^•당에서 거행된 신문디자인 상 수여식에 참석한 창업주 스미드는 이렇게 수상소 감을 말했다.

“새로운 신문을■시장에 내놓을 때 요청되는 필수 조 건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신문 디자인이었다. 우리 가 창간일까지 제일 고통스럽게 머리를 썩힌 작업이 바로 이 문제였다. 디자인에는 화실한 모형 이 존재하 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신문기자는 디자인에 전 문적안 지식이 없다. 정치부기자건 경제부기자건 신 문디자인에 관해 모두가 한마디씩 참견해 의견을 통 일하기가 어려웠다. ”

신문 디자인상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은 인디펜던트에 상을 주기로 한 근거_를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우라는 본능적으로 모두 새 신문의 편집디자인을 좋아했다. 그런 성격의 신문이 어떤 모양을 갖춰야할

지에 관해 인디펜던트의 편집은 우리의 생각과 똑같 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정하고 믿음직하며 권위있 는 모습을 새 신문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진물의 취급은 놀랄만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문사진 이 아니 라 예술사진 이 라고 극찬하기 도 했다. ”

새 신문은 편집부분 뿐아니 라 그래 픽상, 인쇄상,그 해의 신문영업상까지 받아 영국언론사의 수없는 기록

을 세웠다.

의욕적으로 일을 벌리느라 당초 계획보다는 예산의 투입규모가 커졌다. 1987년 8월 회사는 인원을 현재

선에서 동결하고 모든 부서는 계획예산을 절저하게 준 수하는 긴죽조치를 취 했다. 투자자들에게 돈을 더 내 라고 요청할수가 없고 이제부터는 회사자체가 손익을

맞춰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돈을 별지 못하면 독립을 하지 못한다” (No Profits

No Independence) 그것 이 창업자 스미 드의 신조였 다. 그해말 창업 1년이 지난지 얼마안돼 신문은 손익

분기점을 넘어 자체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1986년 11월에서 1987년 6월까지 4개 고급지와 비 교한 인디펜던트의 독자성향이 공개되■었다.

남성 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은 파이 낸셜 타임 스가 71.

1%로 1위,그 다음이 68%인 인디펜던트였다. 타임 스는 62.7%,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53.8%, 가디안은 60.4%였다. 유피로 속칭대는.젊은 전문직 독자 분포 는 단연 인디펜던트가 48.5%로 앞섰다. 15세에서 34

세까지의 연령층을 말하는 이 분야에서 타임스는 36.

7%,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25%, 가디안은 43.80%,

파이낸설 타임스는 41.6%였다.

전문가들은 인디펜던트의 창간 2년을 되돌아 보면 서 이 신문만큼 사업적 치밀성과 기자적 우수성 그-리 고 시기적 행운이 조합되어 성공을 거둔 예를 다시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중 타이밍 (Timing)

을 새 신문의 행운으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 국의 새로운 신문가 와핑으로 옮겨간 기존 신문들이

내부 분란을 치르지 않았던들 인디펜던트에 우수한 기 자들이 많이 몰려올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마찬가 지로 기존 신문의 동요가 없었다면 그쪽 독자들이 대

거 새 신문에 그토록 빠른 속도로 옮겨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1987년 가을 영국의 증권가를 강타한 금융위 기가 일년쯤 앞서왔더라도 새 신문에 대한 자본투자 가 그렇게 순조로울수도.없었다. 인디펜던트의 출현 과 성공이 기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그때문이기도 하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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