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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발 간 사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세계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적의 공격 을 방어하기 위한 성채,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건축물, 권력자의 사후 세계를 보장받기 위한 거대한 무덤 등이 있습 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팔만대장경은 그런 문화유 산들과는 격(格)을 달리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나열한 많 은 문화유산들이 오로지 권력자 개인을 위한 것이거나 물리 폭력에 대항하는 무장(武裝)의 하나로 존재했고, 수많은 인력의 강제 동원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반해 우리의 팔만대 장경은 역사상 세계 최대의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강 력한 군사력에 저항하는 문화적․정신적인 유산이며 많은 민 중을 살리는 종교적 활력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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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 간 사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세계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적의 공격

    을 방어하기 위한 성채,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건축물,

    권력자의 사후 세계를 보장받기 위한 거대한 무덤 등이 있습

    니다. 이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팔만대장경은 그런 문화유

    산들과는 격(格)을 달리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나열한 많

    은 문화유산들이 오로지 권력자 개인을 위한 것이거나 물리

    적 폭력에 대항하는 무장(武裝)의 하나로 존재했고, 수많은

    인력의 강제 동원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반해 우리의 팔만대

    장경은 역사상 세계 최대의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강

    력한 군사력에 저항하는 문화적․정신적인 유산이며 많은 민

    중을 살리는 종교적 활력이기도 했습니다.

  • 발 간 사 /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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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거대한 역사(役事)가 단순히 불교를 흥왕(興旺)

    시키려는 목적보다는 문화국으로서의 자존심과 위력을 이웃

    나라에 널리 알리고, 불력(佛力)으로 민족을 단결시켜 국난을

    타개하려는호국(護國)의 이념이 발현된 총체라고 생각합니다.

    팔만대장경은 거란의 내침(1011년 현종 2)으로 시작되어 몽골

    의 침입 시기(1251년고종38)에 이르기까지 200여년의 장대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위대한 역사적 유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은 동북아는 물론 유럽에 이르

    는 전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한 몽골의 공격 속에서도 송(宋)의

    개보판(開寶板)․거란본(契丹本)은 물론 종래부터 전해 내려

    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고, 문종 임금의

    4번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까지 중국에서 각종 불경을 모아

    오는 등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온 민족이 장구한 시간과 피땀을 흘려 완성한 팔만

    대장경이 오직 인천 강화에서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

    다. 대장경 목판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승려, 학자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며 전국에서 가장 좋은 목재를 골라 경판을

    만들기 위해 보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우리 인천 강화가 그 중심이 되었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가「팔만대장경과 강화도」라는 주제로 심포지

    엄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펴내는 까닭

    은 관련 연구기관이나 많은 분들의 격려와 자료요청에 부응

    하고 오늘을 반성하는 거울로 삼기 위함입니다.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논문발표와 토론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과 현장

  • 발 간 사 /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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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등 많은 편의를 마련해 주신 김선홍 강화군수님, 그리고

    인천문화재 위원회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자료집이 팔만대

    장경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2001. 12.

    재단법인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

  • 발 간 사 /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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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 사

    구국의 교두보, 강화 팔만대장경

    국내 저명 학자와 시민들께서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개최

    된「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학술회의 자료집 발간을 진

    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바쁘신 중에도 학술회의를 개최해 주시고 자료집을

    발간하는데도 앞장서 주신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학술회의를 위해 인천을 방문해 주시고 좋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해 주신 학자여러분께도 시민을 대신하여 다

    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21세기를 흔히 지식과 정보가 주도하는 문화의 세기라고

    합니다.

  • 발 간 사 / 민족의 보배,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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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러한 시대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면서 21세기

    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새 시대에 맞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존․전승하면서,

    우리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여 올바

    로 정립하고 그 속에서 교훈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낸 선

    조들의 지혜를 배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 축 사 / 구국의 교두보, 강화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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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연 개화의 관문이자 위기

    로부터 나라를 구한 구국의 교두보라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

    습니다.

    특히 강화군은 고려 때 몽고의 침입을 비롯하여 근대 제국

    주의 열강의 침탈에 이르기까지 이에 항거하여 나라와 민족

    의 자존심을 지켜낸 호국의 성지이자,

    단군 성조의 참성단을 비롯하여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근

    대 국방 유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는 문화

    유산의 보고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시는 물론 관내 대학과 민간단체에서

    도 시민들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 할 수 있도

    록 역사를 발국하고 재조명하는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습

    니다.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학술회의를 개최하고 그 성

    과를 담은 자료집을 간행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사와 축하를 드립니다.

    끝으로 이번 학술회의에서 이루어진 심도 있는 발표와 토

    론들이 세계문화사에 빛나는 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의 조판

    과 관련한 그동안의 의문들을 해소함으로써 한국불교사 연구

    와 역사학계 발전에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01. 12.

    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남기명

  • 축 사 / 구국의 교두보, 강화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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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조연설

    高麗 八萬大藏經과 江華京

    千 惠 鳳

    목 차

    1. 高麗 大藏經의 이해

    2. 江華의 대장경 彫板

    3. 南海의 대장경 彫板과 江華 板堂에의 奉安

    4. 大藏都監과 大藏經 板堂의 位置比定 문제

  • 축 사 / 구국의 교두보, 강화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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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조연설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천 혜 봉

    (前 성균관대학교 교수)

    1. 고려 대장경의 이해

    고려에서 대장경 彫板이 두 차례 이루어졌다. 첫 번째의

    조판을 高麗初彫大藏經(이하 初彫板으로 약칭함)이라 하고,

    두번째의 조판을 高麗再彫大藏經(이하 再彫板으로 약칭함)이

    라 이른다.

    이들 대장경의 彫板 動機에 있어서, 초조판은 1011년 開京

    에 대거 침입해 온 契丹軍을 대장경 조판에 의한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護國佛敎的 측면과 아울러 동양최초로 開板

    한 北宋 開寶勅板 대장경의 다음으로 우리가 기필코 그 대장

    경을 開板하여 文化國으로서의 位相을 오랑캐 나라에 과시하

    겠다는 측면이 함축되어 있다. 재조판은 1231년의 蒙古軍 침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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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으로 잃은 대장경을 다시 개판하여 불력으로 國難을 타개

    하고자 한 점에서 그 동기는 위의 초조판과 서로 같다 하겠

    으나, 한 편 이에는 庚寅․癸巳의 亂 이후 武人에 대한 반감,

    특히 僧侶들의 독재정치에 대한 거센 반발과 내분을 무마수

    습하고 그 意識을 對蒙抗爭으로 이끌어 團結蹶起케 하여 武

    臣政權을 維持해 나가려는 의도가 짙게 함축되어 있음이 그

    차이점이라 하겠다.

    대장경 彫板의 形式面에 있어서는 한 板의 行字數가 대체

    로 첫 판이 22항14자, 그 이하의 판이 23항14자인 점에서 초

    조판과 재조판이 공통하지만, 대장경의 앞에 수록된 만은 초조판이 첫 판은 24항14자, 그 이하의 판

    은 25항14자로 되어 있어 재조판과는 각 판의 글자 위치가

    서로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은 晉本을 비롯

    한 周本 貞元本의 재조판이 초조판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한

    板 24항17자의 國內傳本 그리고은 한 板 25항

    16자의 國內傳本을 각각 바탕으로 새겨 대체 하였으며, 은 한 板 23항17자의 契丹本을 飜刻하여 대체를 한

    것이 그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그 중 화엄경은 초조판의 진본

    이 50권본으로 되어 있어 60권본으로 바꾸게 되자 나머지 주

    본과 정원본 그리고 화엄경론까지 함께 국내전본을 교정하여

    교체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은 초조판의

    판각에서 빠뜨린 것을 재조판의 판각시에 거란본에 의거 번

    각하여 새로 편입시킨 것이다.

    刊記 表示는 초조판이 당시 미묘했던 국제관계로 年號 사

    용이 곤란하여 연호가 들어가는 간기를 일체 생략하였는데,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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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조판은 그 연호를 干支로 교묘하게 바꾸어 모두 표시한 것

    이 또한 그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가 된다.

    板刻의 精粗度는 초조판이 北宋 開寶칙판의 매항 14자 형

    식에 준거하여 避諱缺劃의 글자 일부와 誤字 脫字를 바로잡

    고 板題와 卷張次 그리고 函次를 새로 표시한 것 이외에는

    그 본문을 충실하게 板書하여 처음으로 새겨냈고, 또한 매항

    17자의 거란본과 국내전본에 의한 경우는 매항14자 형식의

    板書本으로 고쳐 써서 새겨냈는데, 그 板刻技法이 재조판에

    비해 精巧하고 글자체가 정연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에 대하

    여 재조판은 본문의 補充이 많고 缺落과 錯寫가 심한 것은

    새로 補寫하거나 板書하여 새겨낸 것이 적지 않지만, 대부분

    은 초조판에서 찍은 板本의 본문에 오자를 바로잡고 탈자를

    써 넣은 다음, 뒤집어 붙이고 刻하였기 때문에 조판의 정교도

    는 초조판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本文의 校正에 있어서는 재조판이 守其법사의 지

    휘아래 여러 校正僧들이 초조판을 비롯한 北宋板 契丹板 宋

    新譯板 대장경과의 對校는 물론, 각종의 中國歷代佛典目錄까

    지 두루 참고해서 본문의 誤字 脫字 錯寫 異譯등을 고증하여

    校正 補修하고 翻刻하거나 새로 板刻해냈기 때문에 동양의

    역대 대장경 중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가장 잘 교정 보수되

    어 우수하다 함은 국내외 학계에 의한 정평이다. 守其법사가

    그 문도들과 함께 교정한 것을 함께 모아 엮은 제1~30권이 재조판 대장경에 편입되어 있으

    며, 여기에 미수된 것은 각 경의 권말에 '校正後序'로 붙어

    있다.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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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본문의 교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에서는 일찍부터 간단없이 수입하여 불교 傳播와 硏究의 礎

    典으로 삼아 왔다. 그들이 1613년에 최초로 간행을 시도한 大

    藏經이 바로 우리의 재조판 板式을 그대로 따랐으며, 그 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간행한 과 이 우리의 재조판 대장경의 본문을 定本으로 삼

    고 宋․元․明板 대장경으로 校合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우리

    의 것을 바탕으로 한 을 또한 역수입하여 바탕

    으로 삼고 1911년에 을 출판하였다.

    이들 대장경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 보급 이용되고 있으니,

    우리 재조판 대장경의 본문의 우수성이 새삼 돋보인다. 8萬의

    經板이 오늘에 고이 간직되고 있어 世界人類文化遺産으로 지

    정되고 있지만, 거기에 담겨진 本文의 優秀性이야말로 그 이

    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2. 江華의 대장경 彫板

    재조판 대장경의 彫成過程, 運營 및 財政, 場所에 대하여는

    어느 하나도 당시의 사정을 제대로 전해 주는 기록이 없다.

    재조판 대장경의 彫板 시작과 그 마무리에 관하여는 李奎

    報 지음의 과 高宗世家의

    기록을 아울러 상고할 때, 1236년에 착수하여 16년 걸려 1251

    년에 마치고, 그 해 9월 城 西門 밖의 大藏經板堂에 봉안하고

    百官들이 행향 경축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 고작이다.

    필자는 대장경의 제일 앞에 수록된 6백권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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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多經>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다. 착수한 이듬 해인 1237년에

    새겨낸 것은 '丁酉歲'의 刊記 표시가 있는 90권과 落張으로

    간기 표시의 책장을 잃었으나 '정유세'에 판각한 앞 부분에

    있는 2권 그리고 간기 표시가 없는 9권 중 역시 '정유세'에

    판각한 앞부분에 있는 7권을 합치면 99권이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수록된 20권 에는 '정유세'에 판

    각한 18권이 들어 있어 이를 합치면 총 117권에 이른다. 그

    판각실적을 다른 해와 견주어 보면 약 3․4분의 1에 해당하므

    로 판각준비 작업을 마치고 '정유세'의 하반중기 이후에 착수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거창한 大藏經 刻板事業을 주

    도한 武人政府의 제1인자 崔怡(첫이름 : 瑀)가 대장경의 조판

    착수를 慶讚함과 아울러 督勵하기 위해 그 해 말에 거국적

    대염원인 "이웃 군사의 침입이 그치고 國運이 復興되길" 각별

    히 念願하며 特大의 楷字로 정성껏 板書하여 늠름하고 정교

    하게 새겨낸 이 전해지고 있어 여실히

    뒷받침된다.

    이상이 대장경의 초기 조성에 관하여 알려주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彫板史的인 시각에서 대장경의 初

    期彫成過程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崔怡는 1232년 6월 임금을 위협까지 하며 江華遷都를 단행

    하고, 두 領軍과 여러도의 民丁을 징발하여 강화에 宮闕과 官

    司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1234년 정월에 營造되고, 그

    천도의 공로로 그에게 그 해 10월 晉陽侯를 封하고 府를 세

    우려하니 百官이 모두 그의 집에 나아가 하례하였다고 에 적혀 있다. 임금이 그에게 晉陽侯를 봉하려한 것은 본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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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1221년이었으나, 사양하다가 이때에 받은 것인데, 그에 따

    라 晉陽이 또한 그의 食邑地가 되었다. 진양은 이에 앞서 그

    의 선친인 崔忠獻이 일찍이 晉康君開國侯로 봉되고 食邑 3천

    호와 食實封 3백호를 받은 바 있으며 崔忠獻 墓誌에 의하면

    또한 이미 식읍 1만호 식설봉 2천호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식읍은 계속 늘어났다. 이러한 晉州지방 일원의

    祿轉 稅布 徭貢등이 모두 그에게 직납되니, 막대한 경제적 특

    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위치에 이르자 최이는 大藏經 刻板 업무를 담당하는

    句當官司를 설치하고 護國의 精神的 支柱인 大藏經을 다시

    조성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그것이 분에 넘게 받은 食封에

    대하여 내세울 수 있는 名分이 될 뿐만 아니라, 흩어진 民心

    을 收拾하여 對蒙抗爭으로 이끌며 무인정부를 유지해 나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해 大藏都監의 설치를

    명하는 한편, 우선 板刻用 木材를 자신의 경제특구인 南海地

    方에 자생하는 喬木인 후박나무를 비롯한 가래나무 박달나무,

    산벗나무 등을 벌목하여 배로 실어오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그 운송된 원목은 바닷가에 內湖와 같이 형성된 곳에 오

    래 담가 우선 나무결을 삭혀야 했다.

    그리고 그 工程을 단축하기 위해 1년여에 걸쳐 바다물에

    서 결을 삭게한 다음, 板木의 두께로 켜서 密閉된 곳에 넣고

    소금물로 쩌서 汁液을 완전히 빼는 동시에 殺蟲작업을 하여

    야 했다. 그런 다음 넓은 공간의 응지에 펴서 충분히 말려 板

    이 뒤틀리거나 빠개지지 않게 하였다. 이것을 鍊板處理라 하

    는데, 그 작업이 잘 되었기 때문에 재조판 대장경 板木이 7백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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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빠개지거나 썩거나 벌레가 먹

    지 않고 原形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연판

    처리 한 목판을 곱게 대패질하고 또한 양쪽 가에 마구리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板刻用 淨書本(이하 板書本으

    로 약칭함)을 마련하기 위하여 엷은 닥종이를 다량 준비하고

    판각하고자 하는 크기의 板式으로 만든 罫板에서 용지를 밀

    어내며 또한 판서본을 정사하는데 필요한 먹도 다량 만들어

    놓아야 했다.

    한편, 실로 중요한 작업은 본문을 교정하는 일이었다. 이것

    은 실은 대장도감 설치와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교정의 책임을 맡은 이는 開泰寺 僧統이요 五敎都僧統인 華

    嚴宗界의 고승 守其법사였다. 그 법사 아래 수십여명의 校正

    僧이 동원되어 거질 대장경의 본문을 일일이 논증하여 오자

    탈문 착사 이역 등을 교정 보수하였다. 그 교정 보수는 어느

    경을 막론하고 卷次單位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이 완료되는 대

    로 판각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同一한 경이지만 권차

    대로 판각되지 않아 板刻年의 先後에 드나듦이 심하게 나타

    난다. 그리고 한 경의 교정이 짧고 간단한 것은 1년 이내이지

    만 까다로운 것은 그 이상 걸리고 그리고 본문 내용이 긴 것

    은 3․4년에 걸쳐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그토록 재조판 대장

    경은 본문의 교정에 신중을 기한 것이 일대 특징이다.

    이러한 일련의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작업 과정을 거쳐 조

    판이 시작되어 이후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그것의 年度別 板

    刻 實績을 파악하기 위해 종래 발표한 통계를 참고해 보았다.

    연도별 판각한 경의 종수와 권수의 조사에 참고는 되지만, 그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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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나 하나의 경을 판각함에 있어서 2년이상 걸리는 것이 적

    지 않고 본문이 아주 길고 교감이 까다로운 것은 3~4년에

    미치고 있음에 전체의 실종수 파악이 어려우며, 또한 권수에

    있어서도 경 한 권의 본문이 짧은 것은 1판으로 그치지만 긴

    것은 賢聖集音義 제5의 경우와 같이 165판에 이르고 있어 여

    기서도 또한 큰 차이가 있음에 객관적인 板刻實績을 파악할

    수 없음이 큰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정확한 彫板의 實績을 파

    악하기 위해서는 각 경의 권수가 아니라, 卷次別 板數가 기준

    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高麗大藏經影印版에 全帙에 걸쳐 年度別

    板刻 種數․卷數 및 板數의집계를 의뢰하여 다음과같이 입

    수하였다.

    대장경의 연도별 판각 종․권․판수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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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 도 별 판각 종․권․판수 년 도 별 판각 종․권․판수

    고종 24 정유년

    (1237)2종 117권 3,139판

    고종 30 계묘년

    (1243)474종 1,331권 32,413판

    고종 25 무술년

    (1238)42종 511권 12,762판

    고종 31 갑진년

    (1244)286종 1,852권 42,325판

    고종 26 기해년

    (1239)103종 305권 6,481판

    고종 32년 을사년

    (1245)282종 776권 15,773판

    고종 27년 경자년

    (1240)73종 290권 7,221판

    고종 33년 병오년

    (1246) 169종 484권 10,970판

    고종28년 신축년

    (1241)107종 298권 7,146판

    고종 34년 정미년

    (1247)34종 222권 7,016판

    고종 29 임인년

    (1242)176종 382권 8,926판

    고종 35 무신년

    (1248)1종 3권 124판

    소 계 503종 1,903권 45,675판 1,246종 4,668권 108,621판

    총 계 1,749종 6,571권 154,296판

    위 표에 의하면 강화경에서 판각에 착수한 다음해인 고종

    24정유년(1237)부터 동왕29임인년(1242)까지 6개년간에 새겨

    낸 정장은 503종 1,903권 45,675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鄭晏이 南海의 분사대장도감

    에서 고종30계묘년(1243)부터 동왕35 무신년(1248)까지 사이에

    판각한 정장은 1,246종 4,668권 108,621판으로 집계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板數는 대체로 한 板의 兩面에 새겨진 것의

    숫자이나, 개중에는 한 板의 一面에 새겨진 것도 있음을 참고

    하기 바란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江華京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7

    년간 彫成한 正臟은 전체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하겠다.

    3. 南海의 대장경 彫板과 江華 板堂에의 奉安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20 -

    대장경을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조판하기 시작한 것은

    최이의 처남인 鄭晏(첫이름 : 奮)이 江華京에서 國子祭酒로

    있다가 그만두고 南海로 낙향한 이후가 될 것이다. 정안의 가

    문은 조부 鄭世裕와 아버지 鄭叔瞻이 일찍부터 벼슬을 살았

    다. 특히 숙첨은 崔忠獻과의 인연으로 그의 아들 崔怡를 사위

    로 삼은 뒤 뇌물로 치부하여 河東지방에서 그의 경제적 기반

    을 튼튼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정안은 성품이 총

    명하고 어려서 及第하였으며, 陰陽 醫業 音律에도 정통하였

    다. 일찍부터 자형 최이를 따르며 큰 뜻을 품었는데, 그에게

    시집간 누님이 1231년에 죽자 실망한 나머지 한 때 河東으로

    돌아와 모친을 봉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다시 강화경으로 와서 대장경 彫板 준비가 한창 이루어

    지고 있던 1236년 12월에 자형 崔怡를 위해 작은자 을 간행하여 "이웃군사의 침입이 와해하고 나라를 다스

    리는 首長의 토대가 永遠할것"을 기원하였다. 최이는 그의 재

    능과 충성심을 갸륵하게 여겨 주청하여 國子祭酒로 삼았다.

    그리하여 1241년 4월에는 參知政事 宋恂이 知貢擧가 되고, 國

    子祭酒 鄭晏이 同知貢擧가 되어 進士를 뽑는데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뒤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崔怡

    의 권한 부리는 것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자기의 큰뜻을 버

    리고 害를 멀리 하기 위해 南海로 물러났다. 그 해가 1241년

    말기가 아니면 1242년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 뒤 한 때

    名山勝景을 편력하기도 하였지만, 독실한 好佛者인 까닭에 여

    생을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 私財를 喜捨, 현재 진행중에 있는

    대장경을 半分하여 판각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國家와 약속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 21 -

    하였다. 여기서 국가라는 것은 武人政府의 首腦者인 자형 崔

    怡를 지칭함은 물론일 것이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또한 자

    기의 일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

    겨진다. 그 결과 대장경의 조판작업이 1243년부터 南海의 分

    司大藏都監에서 수행되었다. 그것은 정안이 그 해 가을 斷俗

    寺의 주지 萬宗이 아버지 최이의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부탁한 제1~30권을 南海分司大藏都監에서 판

    각하고 붙인 그의 발문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제문제로 대장경을 조사해 볼 때 1243(계묘)년부터 분사대

    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점에서도 또한

    여실히 뒷받침된다 하겠다.

    재조판 대장경의 板式은 머리에 수록된 에서 정해진 일정한 판식에 따라 板書者가 그대로 정서하

    고 또한 刻手도 그대로 충실하게 새겨 왔는데, 1243(계묘)년

    부터 별첨의 도1․2․3․4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의

    刊記 형식인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를 그대로 답습

    한 것도 있지만, 그 일부를 오려내고 그 공간에 맞도록 작은

    글자로 '分司' 또는 '分司大藏' 또는 '分司大藏都監'등을 써서

    붙이고 고쳐 새겨냈다. 그 과정에서 고쳐 쓴 것을 삐뚜로 붙

    이고 새긴것이 있는가 하면, 새로 고쳐 쓴것을 거꾸로 붙이

    고 새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오려내기만 하고 새로 써서 메

    우지 않아 공백으로 된 것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刊記의 고침은 1243(계묘)년과 1244(갑진)년에 다

    량으로 나타나며, 그뒤 1245(을사)년부터 1247(정미)년까지에

    는 본래의 간기 형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짙으면서도 그 가운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22 -

    데 분사대장도감의 간기로 고친 것이 혼입되고 있어 분사대

    장도감에서 판각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245

    (을사)년 이후에는 도5․6․7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分

    司大藏都監彫造' 또는 '開板'을 이전과 달리 작은 글자로 그

    전체를 완전히 고쳐 써서 새기고 있다.

    분사대장도감이 校正하여 開板한 것 중 특기할 것은 三本

    이다. 그 중 초조판 晉本 華嚴經은 현재까

    지 발굴된 바로는 北宋 開寶勅板의 50권본을 바탕으로 간행

    한 것이 여러 종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30여년간 초

    조판 60권 진본을 찾아내려고 애써보았으나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필자는 守其법사가 14자 초조판의 50권본 화엄경을

    버리고 도8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7자 國內寺刹 전래의

    6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교정하여 간행한 까닭을 여기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60권 國內傳本을 1244(갑진)년에

    교정하기 시작하여 3년 걸려 1246(병오)년에 마치고 판각해

    냈다. 40권 정원본 화엄경도 17자 국내전본을 바탕으로 1244

    (갑진)년부터 1245(을사)년까지 교정하여 판각해 냈고, 80권

    주본 화엄경도 역시 17자 국내전본을 바탕으로 1245(을사)년

    부터 1246(병오)년까지 2년간 교정하여 판각해 냈다. 그것뿐

    만이 아니다. 李通玄 撰의 제1~40권도 14자

    초조판을 버리고 도5와 같이 16자 국내전본을 바탕으로

    1245(을사)년에서 1246(병오)년까지 교정 판각하여 대치했다.

    화엄경은 그 경론을 완전히 국내전본으로 바꾸어 교정 판각

    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분사대장도감에서는 또한 북송의 延壽가 大乘敎의 經論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 23 -

    60여종과 인도 중국의 聖賢들의 저서에서 인용하여 엮은 1~100권을 正藏에 편입시키기 위해 祿에서 茂에 이르

    는 函次를 매겨 1246(병오)년부터 1248(무신)년까지 3년에 걸

    쳐 판각해 냈다. 정장의 함차와 중복이 생겨 편입시키지 못했

    지만, 그 중 제27권에는 1247(정미)년에 南海에 위치한 분사

    대장도감이 개판한 것임을 또렷하게 표시해주고 있다. 이것은

    분사대장도감이 南海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

    료라 하겠다.

    그런데 위 간기의 예에서 보았듯이, 분사대장도감의 개판

    이 처음에 정한 간기의 형식으로 통일하기 위해 그대로 채택

    하면서도, 간간이 분사대장도감의 개판임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고 本司와 分司에서 각각 나누어 새긴 것이라 주장

    하며 이의를 제기한 이도 없지 않았다. 이것은 각수를 조사해

    볼 때, 동일한 각수가 원형으로 표시한 간기와 분사도감으로

    고쳐 표시한 간기에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그렇지 않음이 입

    증된다. 필자가 조사한 中一․天訓․士同․李文의 각수들이

    모두 원형으로 표시한 간기와 분사도감으로 고쳐 표시한 간

    기에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 중 中一 각수의 경우를 볼

    때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가 표시된 권

    32의 6장과 '癸卯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가 표시된

    권28의 2장 그리고 같은 해에 분사대장도감에서

    개판한 권14의 10장에도 아울러 표시되고 있다.

    한 각수가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차례차례로 경판을 새겼음

    이 여실히 뒷받침된다 하겠다.

    彫板 業務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校正者 板書者 印出者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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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手 刻手등이 한 장소에서 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分業作

    業이다. 校正者가 하나의 경을 卷次別로 맡아 교감하면, 板書

    者가 이를 淨書하고, 校正者는 다시 誤字 脫字의 유무를 조사

    한다. 그런 다음 刻手가 새기며 그 판각이 끝나면, 印出者가

    찍어 校正者에게 돌려 다시 교정을 보게한다. 만일 誤刻이 있

    으면 刻手는 그것을 도려내고 상감하며, 板書者는 해당 글자

    를 써서 그 곳에 붙인다. 刻手가 그 글자를 다시 새긴 다음,

    印本을 찍어내면 校正者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그 판각작업

    을 끝맺는다. 이러한 有機的인 分業作業임을 고려할 때, 그것

    이 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분사대장도감에서는 正藏 이외에도 1251년 江華京의 板堂

    으로 經板이 奉安되기까지의 사이에 다른 章疏類 僧傳類 文

    集類등을 開板하였다. 1244(갑자)년에는 ,, 1245(을사)년에는․․․․․

    , 1246(병오)년에는,

    1248(무신)년에는, 1251(신해)년에

    는 을 각각 차례로 개판하였다. 그리고 경판

    봉안후에도 1254(갑인)년에 ․․이그板刻施設에서 간행되어 그傳本이 오늘에 전해지

    고있다.

    위의 板本중 1248년에 개판된

    의 慶尙晉安東道按察副使 全光宰가 쓴 後識를 보면 그가 그

    해 卞韓道인 慶尙晉安東道의 안찰부사로서 分司大藏都監을

    兼任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한편, 1251년에 奉勅板刻한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 25 -

    의 跋尾를 보면 그가 다행히도 이웃 군인 晉

    州牧의 副使로 부임하게되어 분사대장도감의 刊役 告完 餘暇

    를 이용하여 이 文集을 간행 유통시킨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분사남해대장도감이 晉州牧의 管轄이 아니고, 慶尙

    晉安東道의 관할 아래 있었음을 밝혀주는 점에서 매우 중요

    한 자료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 분사대장도감에서의 彫板業務는 鄭

    晏의 喜財로 1243년부터 줄기차게 이루어져 6년 뒤인 1248년

    에 正藏의 彫板이 완료되었는데, 그 規模는 전체의 약 3분의

    2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도 正藏 彫成의 規模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각경의 卷次別 板數를 기준으로 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1249년에 崔怡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萬全이 還俗하여

    崔沆으로 개명하고 정권을 이어 받았는데, 그이도 大藏經 板

    刻을 施財督役하여 완료하고 慶讚會를 거행하였다고 기록되

    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이어 받은 1249년부터 江華京의

    板堂으로 경판이 移運 奉安되기까지의 사이에는 분사대장도

    감의 판각 시설을 이용한 여업으로 을 奉勅

    板刻한것 뿐이므로 그것을 施財督役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

    고 그간 조판한 장경을 1251년에 江華城 西門 밖의 大藏經板

    堂으로 옮겨 봉안하는 慶讚會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奉行도 실은 崔沆이 정권을 이어 받자 鄭晏을 江

    華京으로 불러 올려 知門下省의 參知政事로 임명하였으니 필

    시는 그에게 主管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마침내 沆에게 猜忌되어 집까지 몰수되고 白翎島로 유배되어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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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버려지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생전에 기우하였듯이

    결국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4. 大藏都監과 大藏經板堂의 位置比定 문제

    끝으로 그간 논란이 되어온 禪源寺의 대장도감과 대장경

    판당의 위치비정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 중

    대장도감에 관하여는 1314(충숙왕1)년 3월 典農司의 租稅중에

    서 大藏都監과 禪源寺에 미곡 3백석을 내려주었으며, 조선 태

    조 때에는 江華 禪源寺에서 옮겨온 大藏經을 보러 龍山江에

    행차하였다는 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종래 大藏都監과 大藏經

    板堂이 禪源寺의 境內에 있던 것으로 발표해 왔으며, 일반들

    도 또한 으레 그렇게 여겨 왔다. 그리고 그러한 通念아래 선

    원사의 위치를 현재 다음과 같이 비정하고 있다.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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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仙源面 智山里 속칭 신지동 일대

    이것은 동국대학교가 1976년 조사한 것에 근거하여 1977

    년 정부가 사적 제259호 禪源寺址로 지정한 것이며, 현재 동

    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한편, 이 지

    역은 신니동 假闕터로 발표된 바이고 또한 그 기록이 세가 元宗 5년(1264) 6월조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으므

    로, 이것이 禪源寺址임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宮闕과 다른 寺

    刹 特有의 造營遺物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장도감

    이 함께 위치하고 있었음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彫板에 사용

    된 道具와 조판하다 버린 板木片등의 유물이 아울러 발굴되

    어야 할 것이다.

    2) 仙源面 仙杏里 忠烈祠 뒤 또는 앞쪽 일대.

    이것은 ․․등에

    서 府 南門에서 8리 위치인 掌苑果園 또는 上林院 일대가 선

    원사지 였다고 한 점과 李穡의 에 의거하여 禪源寺

    경내에 李嵒(1297~1364)이 海雲堂을 짓고 작은 배로 왕래 하

    였다는 점, 그리고 그의 호인 '杏村'이 지금의 '仙杏里'와 부

    합된다는 점등을 들어 비정하고 있다. 그 중 이색의

    에 나타나는 기록은 고려 말기의 것으로 가장 신빙성을 제시

    해 준다. 그러나 그 사지를 발굴하여 실증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江華 西門 밖 大藏經板堂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는

    (1) 金映遂의 발표에 의할 때 城 西門 밖 3~4리에 있던 龍藏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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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寺址로 비정하였으며, (2) 文暻鉉은 城 西門 밖을 바로 中城

    西門 밖으로 보고 그 대장경 판당을 禪源寺의 境內로 비정하

    였다. 선원사의 위치 비정문제에 대하여는 위 두 곳의 발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발굴의 결과에 따르는 것

    이 수순이거니와, 여기서는 다만 大藏都監과 大藏經板堂의 위

    치 비정에 참고가 되는 사견 몇 마디를 언급해두고자 한다.

    첫째, 大藏都監은 대장경의 彫板業務를 맡아 보는 官司로

    서 1236년에 설치된 것이고, 禪源寺는 崔怡의 願刹로서 1245

    년에 開創된 寺刹이므로, 양자가 반드시 같은 경내에 위치하

    였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대장도감은 다량으

    로 소요되는 판각용 목재를 남해지방에서 배로 실어왔으므로

    선창가 가까운 곳이 작업상 적합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것을 오래 담가 둘 수 있는 내호에서 가까운 곳이 또한 작업

    상 편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목재를 밀폐된 곳에서 쪄

    서 즙액을 빼고 살충한 다음, 펴 널어 건조시킬 수 있는 응지

    의 공간이 있는 곳이 필수적 요건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런 곳을 우선 두루 답사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도감의 建

    造物址는 업무관리실 본문교정실 판서실 인출실 목공작업실

    각수작업실 목판보관실 목재저장고 등이 마련된 면적의 평범

    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조물이 있었던 곳이

    라면 조판작업에서 사용하다 버린 조각칼이라든가, 각종 쇠붙

    이 고구라든가 목판 또는 마구리의 조각이라든가, 먹물용 기

    구 등의 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大藏經板堂은 8만의 經板을 소중하게 간직해온 保存

    庫라는 점을 고려하면, 바다 가까운 곳의 습기 있는 지역을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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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하고 보존관리에 적합한 산기슭의 높은 지대를 택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세 차례 서문 밖에서 高麗山 洪陵

    쪽 방향과, 南山 기슭을 따라 전에 '용장고개'로 일컬었던 '

    시루미고개'를 넘어 露積山 기슭쪽 방향으로 각각 답사해 보

    았다. 이 두 답사 코스 중 이송해온 선창가에서의 경판의 운

    반 거리로 보거나, 개창 이후 관리해온 선원사에서의 거리로

    보거나, 禪源寺의 末寺로 龍藏寺를 세워 板堂의 관리를 맡게

    한 점등을 아울러 고려하면, 시루미고개 건너편 쪽의 지대에

    서 우선 龍藏寺址를 찾아내는 것이 선행되어야할 일이 아닌

    가 생각해 보았다. 이후 답사를 거듭하여 그 寺址가 발견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도1 : 1243(계묘)년에 분사대장도감이 본래의 간기형식으로 판각한 것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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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2 : 1243(계묘)년에 분사대장도감이 본래 간기의 일부를 오려내고

    그 공간에 맞도록 작은 글자로 고쳐 쓰고 판각한 것

    도3 : 1243(계묘)년에 분사대장도감이 본래 간기의 일부를 오려내고

    새로 써서 메우지 않아 공백으로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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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4 : 1244(갑진)년에 분사대장도감이 본래 간기의 일부를 오려내고

    새로 고친 것을 거꾸로 붙이고 판각한 것

    도5 : 1245(을사)년에 분사대장도감이 14자 초조판본을 버리고

    16자 국내전본을 교정하여 간기를 새로 써서 판각한 것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경 / 기조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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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6 : 1246(병오)년에 분사대장도감이 간기를 새로 써서 판각한 것

    도7 : 1247(정미)년에 분사남해대장도감이 간기를 새로 써서 판각한 것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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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8 : 1245(을사)년에 분사대장도감이 14자 초조판본을 버리고

    17자 국내전본을 교정 판각하여 대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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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주제 발표

    大藏都監版 大藏經를 조성한 배경과 사상

    한국정신문화원 교수

    허 흥 식

    1. 머 리 말

    2. 彫成한 動機와 場所

    4. 正版과 補板의 범위상 차이

    5. 正版의 保守性과 補板의 現實性

    6. 正版과 補板의 보존상 차이

    7. 맺 음 말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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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주제 - 발표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허 흥 식

    (한국정신문화원 교수)

    1. 머 리 말

    국보 32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海印寺大藏經版”은 高麗 高

    宗 時의 官版大藏經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1) 大藏都監에서

    1) 필자는 제목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줄여서 “大藏都監版大藏經”이라 부르

    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板木의 수효를 의미하는『八萬大藏經』이라 불리

    지만 정확히 8만판은 아니고, 補版의 범위와 손실된 분량을 알 수 없으

    므로,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없다. 또한 『高麗大藏經』이란 명칭으로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축소․영인하여 널리 보급한 바 있으나, 고려에

    서 조성된 대장경은 이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현

    존하는 인본도 많다. 이러한 명칭에 대한 문제는 다음에서 종합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朴相國,「海印寺 大藏經版에 대한 考察――그 名稱과 板刻內容을 中心으

    로――」,『韓國學報』33, 一志社, 1984.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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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彫成되었다. 현재 다량의 正版과 소량의 補版이 합쳐져 있다.

    앞서 고려전기에도 여러 차례 대장경을 부분적으로 조성하여

    이른바 初彫大藏經을 완비하였었다. 초조대장경은 여러 사원

    에서 분담하여 조성하였으나, 고종 시의 대장경은 대장도감에

    서 총괄한 점이 전과 달랐다.

    동아시아의 중세에 여러 차례 결집된 대장경은2) 여러가지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 크게 나누면 목판과 그 印本, 그리고

    寫本 등이 있다. 이 밖에도 石經과 活字로 조성된 약간의 예

    도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이로써 대장경 전부를 조성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목판과 인본이 함께 남은 경우에는 인본보다 목

    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판도 차츰 마멸되게

    마련이므로 조성된 초기의 인본은 후기의 그것에 비하여 중

    요성을 가진다. 사본인 경우에 墨書本이 많으나 특수한 재료,

    예를 들면 金泊이나 銀泊을 써서 특수한 종이나 비단에 쓴

    극히 사치스러운 예술적 작품도 많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대

    장경에서도 위와 같은 여러 사례를 모두 찾을 수 있다.

    木板은 인쇄소와 책의 未分化狀態인 셈인데, 잘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海印寺에는 高麗 高宗 時에 조성된 판목이 남아

    있고, 이것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보기 어려운 다량

    2) 大藏經의 개념과 범위는 經․律․論을 합친 三藏(Tripitake)에서 비롯되

    었지만, 三藏 이외에도 衆經․海藏․大藏․一切經 등으로 시대마다 다르

    게 표현되기도 하였다.

    朴華,「大藏의 名稱由來와 그 通攝」.

    徐首生,「伽倻山 海印寺 八萬大藏經硏究」,『慶北大論文集』12, 1976.

    李箕永,「高麗大藏經, 그 歷曆史와 意義」,『高麗大藏經 總目錄』,民族佛

    敎硏究所, 1985.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37 -

    에 속한다. 초판은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 조성되었고 이후에

    도 부분적으로 계속되었으나, 대부분 불타거나 없어지고 극히

    일부가 남아있다.3) 그러나 목판은없어졌더라도 印本은보관이

    쉽고 여러차례 이루어질 수 있으며 목판보다 좀 더 많이 남

    아 있으므로,4) 이를 이용하여 없어진 初彫大藏經의 전모를

    복원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5)

    이 논문에서는 여러 차례 조성되었던 고려대장경의 전부

    를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고려대장경 가운데 가장 충실하게

    版本으로 현존하고 있는 大藏都監版大藏經의 철저한 이해를

    부분적으로 돕기위하여, 그가운데 補版에6) 한정시키려 한다.

    3) 고려에서 대장경이 조성된 回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대체로 顯宗 時 彫成된 初彫大藏經과 高宗 時의 再彫大藏經을 보완하였

    으나, 초조대장경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池內宏,「高麗祖の大藏經」,『東洋學報』, 14~1, 1924(『滿鮮史硏究』中

    世篇 2, 吉川弘文館, 1937).

    末松保和,「南禪寺大藏經の瞥見」,『朝鮮』, 191, 1931(『靑丘史草』2, 笠

    井出版社 9, 1966)

    千惠鳳,「初彫大藏經의 現存本과 그 特性」,『大東文化硏究』

    11, 1976.

    4) 初彫大藏經의 印本은 적지 않게 현존하고 있으나 版木은 극히 적다. 해

    인사에는 初彫本 가운데서 壽昌年間의 華嚴經版本이 현존하고 있다.

    5) 金斗鍾,「高麗中期의大藏經彫造」,『韓國古代印刷技術史』, 探求堂, 1974.

    千惠鳳,前偈論文.

    千惠鳳,『韓國典籍印刷史』, 汎友社, 1990.

    6) 補版이란 명칭은 補遺版이라고도 불리지만, 고려시대의 版本이나 어느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1865년 (조선 高宗 2년 )에 印出과정에

    서 正版目錄에 실리지 않은 版本의 목록을 새기면서 “舊錄漏者 已補某

    部版頭 惟書某冊幾張 而不書某字可欠也”라 한데서 補(版)란 용어가 처

    음 쓰이지 않았는가 한다. 補版目錄과 위의 글은 다음을 참조할 것.

    『高麗大藏經』47, 民族佛敎硏究所, 1985, p. 819.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38 -

    대장도감의 주관으로 이를 조성한 13세기 전반은 고려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혁의 시기였

    다. 고려․金․宋으로 동아시아의 세발솥을 이루었던 세력 균

    형은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몽고족의 팽창으로 금이 굴복하면

    서 깨지기 시작하였고, 남송과 고려는 다같이 북방으로부터

    위협에 대치하여 二大戰線을 형성하면서 금을 정복한 몽고에

    저항하였다. 고려와 남송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던 공

    통점을 가진 국가로서, 유목민족인 몽고군의 騎兵戰術을 守城

    戰과 水戰으로 저지하면서 持久戰으로 버티었다. 이러한 상황

    에 일치하여 무신의 실권이 강화되고 있었다.7)

    고려는 12세기 후반부터 무신집권에 의하여 文臣門閥이 위축

    된 틈을 타서 각 신분계층과 각 지역의 욕구가 분출되는 격

    동기를 겪었다.8) 13세기 전반에 강력한 통치력을 확보한 崔

    氏政權은 무신집권시대의 절정기를 이루면서 남침하는 몽고

    에 대항하고 있었다.9) 이와 같이 국제간의 긴장 관계를 무릅

    7) 몽고의 전술은 기병전․기습전․平地戰․陸戰이었고, 이에 대하여 고려

    와 남송은 守城戰(특히 山城戰)․水戰․遊擊戰․持久戰으로 대항하였다.

    8) 무신집권 이후의 혼란과 동요는 어려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대체로

    정치세력간의 갈등에 집중된 경향이 있고, 북한에서는 계급의 대립만을

    강조하여 파악되어 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향은 모두 극복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1세기 간이나 계속된 무신집권 기간 전반기의 사회동요

    만 보더라도 문무반의 지배층 내부에서 폭발하여 무신과 승도와의 갈등,

    무신과 私奴와의 대립으로 본격적인 신분대결이 나타나, 무신과 집단천

    민의 본격적인 계급대결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점차 지역세력으로 집단

    화되었고, 계층과 신분적 대결은 후삼국의 부흥운동이란 확대된 세력에

    의하여 稀釋되었다.

    9) 몽고와의 항전이 장기간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은 교과서적

    인 정설을 제외하고도 남송이 고려보다 좀 더 오래 몽고에 버티어 주었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39 -

    쓰고 이루어진 문화사업인 대장경의 조판은 당시의 정치사와

    사회사의 측면에서도 깊이 주목될 소재라고 생각된다. 이 대

    장경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사에서 특기할 문화로서 세계적인 애착

    과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10)

    그러나 거대한 이 대장경의 조성과정․참여자․장소․移轉

    (移運)에 대해서는 초조대장경과 마찬가지로 충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체로 거의 모든 官撰史書는 불교관계에 대

    하여 매우 소략하였다. 따라서 擧國的인 사업이었지만 극히

    단편으로 남은 기록들을 종합하면서 이를 확대하거나 정치와

    시대 상황의 상관성을 강조하면서 체계화할 수 있을 뿐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전기의 初彫大藏經은 玄化寺碑와 『東國李

    相國集』에서, 그리고 續藏經11)은 大覺國師碑와 『高麗史』에

    서 그 조성경위를 살필 수 있다. 현존하는 고종시의 대장경도

    조성경위를 밝히기 어려운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당시

    기록의 부족함을 무릅쓰고 학계에서는 현존대장경의 중요성

    에 비추어 이에 대한 연구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10) 현존 고종관판대장경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南아시아와 東

    아시아의 종합된 문화유산이란 점에서 보편성과 국제성이 크다. 동아

    시아의 문화가 일찌기 이와 같이 다른 문화와 깊이 있게 응집된 예가

    드물다.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이처럼 두 문화권의

    유산이 응집된 사례는 흔하지 않다.

    11) 속장경이란 용어는 의천의『新編諸宗敎藏總錄』에 실린章疏를 가리키

    고 經律論을 의미하지 아니한다는 주장이 있다.

    千惠鳳,『羅麗印刷術의 硏究』,景仁文化社,1980.

    朴相國,앞의 논문.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40 -

    이 논문에서는 조성경위와 참여자․장소․동기 등을 당시

    의 불교계의 경향이나 종파와 연결시키면서 대장경에 나타난

    사상적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正版과 補版의 사상이

    판이하게 다른 까닭을 알아보고, 정판을 체계화하여 조성하도

    록 계획했던 고승은 조성보다 훨씬 앞선 義天에 소급될수 있

    음을 제시하면서 대장경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41 -

    2. 彫成한 動機와 場所

    현존하는 대장경판을 조성하게 된 동기는 李奎報의 「大

    藏刻版君臣祈告文」에서 찾을 수 있다.12) 이는 판각을 착수하

    면서 君臣이 告諭한 글이므로 지금까지 개설서에서까지 이를

    반드시 제시하면서 여기서 그 동기를 찾으려했던 착안에 대

    해 반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같은 문집 속에 그보다 6년 앞

    서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고 江華로 遷都할 때에 군신이

    몽고를 규탄한 글이 실려 있으며,13) 내용이 서로 이어진다.

    한결같이 몽고의 침입은 불교를 모르는 야만족의 소행이

    라 지적하면서, 종교를 이용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폭발시키

    고, 온 나라의 호응을 꾀함으로써 국가를 지키려는 의도가 반

    영되고 있다.14) 그것은 이 무렵 위기에 몰린 국가가 외세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써 單一한 國敎를 받들던 민중을 동원하

    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강화로 천도한 뒤에, 燒失된 불교문화재를 복구하는 구체적

    인 사업의 하나로 현존대장경을 조성하도록 선택되고 있었다.

    12)『東國李相國集』卷 25 , 大藏刻版君臣祈告文(『高麗名賢集』1, p. 272).

    13)『東國李相國集』卷25, 辛卯十二月日君臣祈告文(『高麗名賢集』1, p. 272).

    14) 이 점은 오늘날까지 불교의 국가에 대한 기능을 말할 때마다 호국적

    기능이란 용어로 표현되었다. 호국이란 유교의 忠誠과 다름이 없으며,

    학술용어로 사용하기에는 진부한 느낌마저 생긴다. 어느 사상이나 학

    문, 그리고 종교가 국가를 위하지 않고 해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설령 사회적으로 역기능을 나타낸 종교도 표현상으로는 국가를 위한다

    고 말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도 의병을 일으키고 불교계의 승병과 다

    름 없는 역할을 했으나 충성성리학이라 부르지 않는다. 필자는 호국불

    교란 용어를 사용하면 비학술적 불교용어가 될까 해서 의도적으로 피

    하고자 한다.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42 -

    이로써 국민의 신앙심을 고취시켜 장기적으로 항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저항심을 고조시켰으므로, 경제적 손실에 못지 않

    게 국가를 지키기 위한 지속적인 항전을 가능하게 만든 의미

    가 크다고 하겠다.

    대륙에 비하여 국력이 약한 그 주변의 민족들은 국력의 약

    세를 민족의 지속성으로 만회하였다. 또한 종교의 보수적 기

    능을 이용하면서 침략으로 인한 파괴를 회복하는 꾸준한 반

    작용을 통하여 민족적 각성을 강화시키곤 하였으며, 이 대장

    경의 조성 동기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찾아질 수 있다. 고려

    가 국교인 불교를 내세워 통치자에 대한 피지배자와의 동질

    성을 호소한 예는 거란의 1차 침입 때에도 경험한 바 있다.

    당시 成宗은 고려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불교를 억제하고

    불교 제전을 통한 집단의식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燃燈

    會와 八關會를 폐지하였으나, 거란이 침입해오자 국민의 호응

    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존의 불교와 그 제전에 대한 정책 방

    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선례를 남기고 있었다.15)

    이 대장경의 판각은 초조대장경의 조성과 마찬가지로, 국

    교였던 불교와 피지배자와 연결을 추구한 국가적 차원의 효

    용성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국적으로

    내세운 표면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이고 근

    본적인 경위는 당시 조판에 협력한 종파의 배경과 조성의 담

    당자, 경비의 조달방법, 그리고 조성장소 등과 관련지어 보아

    15))『高麗史』卷94, 列傳, 徐熙.

    『高麗史』卷4, 世家, 顯宗 1년 閏 2월 甲子.

    『高麗史』卷4, 世家, 顯宗 1년 10월 庚寅.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43 -

    도 적지 않게 발견되리라 생각된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이므로 禪宗보다 敎宗과 밀접한 관련

    을 가지는 속성이 있게 마련이다. 초조대장경은 玄化寺를 중

    심으로 조성되었는데16) 이 사원은 고려 초에 확립된 3대 종

    파 가운데 교종에 속한 瑜伽宗寺院으로서, 왕실의 후원을 받

    은 眞殿寺院으로 부상하였다. 앞서 화엄종파가 광종 후기부터

    융성하였고, 신라 말부터 광종 초기까지 주도적 불교세력이었

    던 조계종(선종)은 남중국에서 유행한 法眼宗의 영향을 받아,

    선종과 교학을 절충한 天台學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선종보다 교종이 우세해지는 불교계의 변화와 더불어서 초조

    대장경이 간행된 점은 宗派史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사상적

    연관성이 있다.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3대 종파는 안정과 더불어 폐쇄

    성이 강해진 사회 기반에서 각각의 고착된 계층을 대변하면

    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가 불교계에서도 대립된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일반관료와 연결된

    화엄종, 왕실 외척과 연결된 귀족세력을 기반으로 한 유가종,

    그리고 지방 토호 및 무신과 연결된 조계종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미래의 갈등을 일찍부터 우려하였던 大覺

    國師 義天은 학파불교로 돌아가 이를 이론적으로 융섭함으로

    써 종파불교를 극복하려 했던 보편주의와 국제주의의 사상가

    였다.

    그는 기존 불교 종파의 국수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단계

    16))開豐玄化寺碑,『韓國金石全文』, pp. 445 ~ 446.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44 -

    적인 교학의 완성을 내세우면서 원효의 和諍思想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화엄종의 興王寺를 중심으로 많은 대장경을 간

    행하여 초조대장경을 보충하였다. 또한 그가 수집하여 간행한

    敎藏의 章疏는 초조대장경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송과 거란의

    대장경을 참조하여 동아시아의 완벽한 대장경을 가지려는 그

    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17) 초조대

    장경은 유가종에서 중심이 되어 조성되었다면,18) 문종 시의

    속장경은 義天이 속한 화엄종에서 주도해서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입적과 더불어 章疏의 간행만

    끝내고, 대장경은 조성되지 못한 채 대장도감판대장경의 중요

    한 기반이 되었다고 풀이된다.19)

    의천의 입적과 더불어 대장경뿐 아니라 종파를 극복하려

    던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그의 이상을 추종한 선승들에 의하

    여 천태종이 형성됨으로써 4대종파의 시대를 맞았다. 무신집

    권 직전부터 불교계는 조계종의 등장이 두드러졌고, 무신집권

    초에 있었던 僧徒의 저항은 주로 왕실이나 왕실 외척과 연결

    되어 있던 화엄종이나 유가종과 같은 교종측에서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승도의 난이 좌절되었음은 곧 이들 교종의 약화를

    의미하였다.

    무신들은 일찍부터 조계종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무신집권

    의 절정기를 이룬 최씨 집권은 공공연하게 조계종을 지원하

    17))趙明基,『高麗大覺國師天台思想』, 東國文化社, 1964.

    18))岡本敬二,「高麗大藏經版の刻成――玄化寺創建と開彫の途――」,『歷

    史學硏究』 特輯號, 朝鮮史の諸問題, 1953.

    19) 許興植,「高麗中期 華嚴宗派의 繼承――元景王師를 중심으로――」,

    『韓國史硏究』35, 1981.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45 -

    였다.20) 崔忠獻은 廣明寺․普濟寺․昌福寺 등을 3대 선종사찰

    로 삼아 談禪法會를 지원하였고,21) 그 가운데 창복사는 死後

    에 그의 願刹이 되었다.22)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

    하기 전 崔怡는 집권 초에 국민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동안 소외되었던 교종에 대해서도 후원할 필요가 있었다.

    화엄종 승려인 覺訓이『海東高僧傳』을 官撰으로 완성한 시

    기도 천도 이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무신난 후에 살아남은 잔존문벌로 교종

    승들에게 다소 복고적 회상에 잠기게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에 편승하여 교종승 가운데서도 특히 화엄종승의 활동이 되

    살아나고 있었으나, 유가종에서는 이때에도 활동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때의 불교종파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이 순서로

    번영을 누렸고 유가종은 가장 침체해 있었다.

    이 무렵 실권자인 무신세력은 선종인 조계종과 가장 밀착

    하였지만23) 경전은 교종과 좀더 밀접한 속성을 가졌으므로,

    오로지 조계종의 힘만으로는 대장경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비록 정치세력의 후원을 받던 조계종에서 조판을

    주관하기는 하였으나, 경전판각의 이론적인 면은 守其를 비롯

    한 화엄종승의 협력을 받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초조대장경이 교종의 하나인 유가종 현화사승의 주도로

    20) 閔賢九,「月南寺址 眞覺國師碑陰記에 대한 ――考察」,『震檀學報』

    35, 1973.

    21)『東國李相國集』卷25, 昌福寺談禪會榜.

    22)『高麗史』卷129, 列傳, 崔忠獻, “王命移崔忠獻眞于昌福寺".

    23) 閔賢九,「月南寺址 眞覺國師碑陰記에 대한 ――考察」,『震檀學報』

    35, 1973.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46 -

    조성되고, 속장경도 교종의 하나인 화엄종의 흥왕사 승의 힘

    으로 이루어졌듯이, 대장도감판대장경도 그 이론은 교종의 하

    나인 화엄종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같은 교종에서 주

    관하였다는 사실이 서로 상통한다. 다만 고종 관판 대장경의

    조판이 앞의 대장경 조성사업과 다른 점은 조계종의 정치적

    배경과 경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조계종이 무신집권과 밀착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크다

    고 할 수 있다.

    무신집권자들은 단순하고 실천적인 禪宗에 좀더 흥미를

    느끼는 속성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주관적이고 행동지침을

    바탕으로 하여 풍미한 看話禪은 무신집권자들의 취향과 일치

    하였다고 추측된다. 최충헌으로부터 최이에 이르는 50여 년의

    무신집권 절정기에 조계종이 극성기를 이룬 까닭은 우연이

    아니었다.

    江都로 천도한 뒤의 중요한 조계종 사원으로 떠오른 禪源

    寺는 최씨 집권과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하다. 선원사는 江都

    에 창건된 선종 사원으로 대장경이 이곳을 중심으로 조성되

    고 조선 초에 海印寺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 보존되고 있었

    다고 여겨지고 있다.24) 현존하는 고종관판대장경에는 조성된

    24) 고려사에 의하면 大藏刻堂이 江都宮闕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高麗

    史』卷24, 世家, 高宗 38年9月 壬午, “幸城西門外大藏經板堂”. 이에 대

    한 반론은 文明大,「大藏都監禪源寺址의 발견과 高麗大藏經版의 由

    來」,『韓國學報』3, 1978, p. 440, 註 12). 그러나 大藏都監은 禪源寺보

    다 먼저 설치되었고 직접 관련은 없다는 다음 논문이 있다. 朴相國,

    「大藏都監의 板刻性格과 禪源寺 問題」,『韓國佛敎文化思想史』, 伽

    山 李智冠 스님 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92.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47 -

    장소는 선원사라고 적혀 있지 않으나, 주관한 官府인 大藏都

    監은 고려사에 명시되어 있다. 현종시의 속장경이 선종시까지

    흥왕사에서 조성된 후에 문종의 진전사원이 되었듯이 최이에

    의하여 창건되고 후에 그의 진전으로 쓰인 선원사에 대장도

    감이 설치되었으리라는 추측은 다른 증거가 없는 현재로서

    부정하기도 어렵다.

    선원사는 대장경의 조성을 열성적으로 지원한 최이의 뒷

    받침으로 창건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다음에 沆에 의하

    여 대장경이 완성되면서 이곳을 아비인 최이의 진전으로 삼

    아 국왕에 대한 예우와 동등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수선사의 5대 주지였던 圓悟國師 天英을 法主로 삼았

    는데,25) 법주란 주지보다 우위에 있는 祖室과 같은 위치였다.

    修禪社와 인접한 南原의 土豪出身으로 보이는 天英의 주도로

    이룩된 마무리작업은 최씨 집권이 지방세력에 의존하면서 조

    계종을 두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서울을 강화로 옮긴 동안 몽고에 대한 항전으로 재정이 고

    갈되자, 개경에 있던 국왕의 진전 사원을 새로운 수도에 복구

    하지 못하고 景靈殿으로 축소시켰다. 다만 法王寺와 奉恩寺

    등 태조와 관련된 진전이나 국가제전인 팔관회나 연등회등을

    주관한 극히 중요한 사원만을 재현하였다. 그러나 최씨집권은

    선원사를 창건하고 진전사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창복사도

    재현하여 최충헌의 진전으로 삼았다.

    25) 원오국사 천영의 비문은『曹溪宗松廣史庫』에 수록된 사본이 가장 원

    형에 가깝다.『韓國金石全文』pp. 1053 ~ 1057은 이것을 교정하여 옮긴

    것이다.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48 -

    이로 보면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한 동기로서 내세운- 국

    가를 지키기 위한- 의지는 권신인 최씨집권의 미화와 조상숭

    배의 장엄으로 바뀌고, 이들 권신의 후원을 받아 마무리지어

    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장경의 조판은 처음에 내세운

    국가적 차원의 동기와는 달리 최씨 집권자의 조상숭배를 미

    화한 점이 있지만, 이 때문에 이들의 후원을 받았으므로 전란

    으로 인한 어려운 재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완성될 수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대장경의 조판과 최씨 집권의 관계는 선원사뿐만 아니라

    대장도감의 지방 분소로 설치되었던 南海分司大藏都監을 통

    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곳은 남해안에 위치하여 몽고의 피

    해가 적었고, 최씨의 세습적인 食邑이 있는 晉州에 가까이 있

    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식읍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

    다.26) 또한 이곳 부근의 사원에 최이의 孼子인 萬全과 萬宗이

    주지로 와서 최이의 권세를 앞세워 官穀을 이용하여 경제력

    을 확보하고 있었다. 최이는 이들의 횡포에 대한 지방관의 보

    고를 받아들여 개경으로 소환하고 처벌하려 하였으나, 자신의

    계승자가 없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방향을 바꾸어 지방관을

    처벌하고 만전을 환속시켜 실권을 세습시키는 역전의 정변을

    연출하였다.27)

    이와 같이 대장경을 조판하는 실질적인 관할자와 경제적

    후원, 그리고 사원은 당시의 최씨 집권자와 조계종 그리고 이

    와 관련된 사원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26) 閔賢九,「高麗의 對蒙抗爭」,『韓國學論叢』1, 1978.

    27) 許興植,「1262年 尙書都官貼의 分析」,『韓國學報』29, 1982.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49 -

    말하면 혜심에서 天英에 이르는 수선사의 주지와 최이, 만전,

    만종 등 최씨 집권자들과 그리고 이들과 관련있는 선원사, 수

    선사, 斷俗寺, 雙峯寺 등 강화와 남부지방에 위치하여 몽고의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던 지역의 사원이 주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正版과 補版의 범위상 차이

    국보 32호로 지정된 해인사 대장경판 81,258枚에28) 포함된

    보판은 正版과 함께 국보로 정해진 이래 그 범위와 중요성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연구하여 왔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판

    은 고종시에 조성된 大藏都監版뿐만 아니라 이후에 조성된

    寺版도 합쳐져 있고, 그 일부는 조선시대까지 조성된 판본도

    포함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29) 실제로 正版은 모두 高宗 官

    版이고 극히 일부가 후에 修補되었으나30) 補版에서 몇 종의

    경전은 전체가 조선시대까지 조성되었다.

    대장도감판 대장경의 목판은 고려시대의 인쇄소와 서책이

    미분화된 그대로 현존하는 셈인데, 방대한 실물이 있는 동안

    여러 차례의 印刊이 이루어지고 목판 이외의 印本이 산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대한 실물에 반하여 고려시대에 관한 史

    書나 文集 등에는 그 조성 과정, 참여자, 장소 등에 대해서

    매우 소략하게 전해주고 있다.

    28) 文化財管理局, 『指定文化財目錄』, 啓文社, 1984.

    29) 大屋德城,「朝鮮海印寺經版攷, 大藏目錄, 特に大藏經補版並外雜版の佛敎

    文獻學的硏究」 ,『東洋學報』15 ~ 3, 1926.

    30) 徐首生,「伽山海印寺八萬大藏經硏究(上)」,『慶北大論文集』12, 1968, pp. 298~299.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50 -

    선원사에 도감이 설치되었다는 사실도 이곳에 보관되었다

    가 해인사로 옮겼다는 조선 초 실록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하

    여 유추한 것이고, 분사도감이 설치된 사실도 현존 목판의 일

    부에 조각된 刊記나 鄭晏의 列伝 등을 연결시켜 확정지은 결

    과이다.31) 守其의 교정작업에 대해서는 판본의 일부인 校正別

    禄과 약간의 문집 속에 단편적으로 실렸을 뿐이다. 그리고 최

    씨 집권의 후원도 선원사와의 관계를 통하여 알 수 있을 뿐

    이다.

    이와 같이 현존 대장경의 중요성에 견주어 조판 과정이 극

    히 소략한 까닭은 그 자체가 불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라

    고 생각된다. 물론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는 억불론자들이

    중심이 된 관찬이므로 의도적으로 불교사에 속하는 대장경의

    조판 과정에 대해서 침묵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고려사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불교행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

    편적이나마 자주 취급하고 있으므로, 전적으로 이를 수긍하기

    는 어렵다.

    현존 대장경에 관한 조성 경위가 침묵된 이유는 권신인 최

    씨 집권의 후원으로 願刹에서 조성되고, 이들이 죽은 다음 같

    은 사원의 진전에 보관됨으로써 그 장엄으로 사용되었기 때

    문일수 있다.『고려사』의 편찬자는 중요한 사항이라도 권신

    과 관련된 행사는 비록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더라도 열

    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최이가 국왕과 동등한 예우를

    받았더라도 최씨 집권의 종말과 함께 逆臣 또는 權臣으로 평

    31)『高麗史』卷100, 列傳, 鄭世裕, 晏.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51 -

    가됨으로써, 대장경도 이 때문에『高麗史』世家에는 소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이다.

    또한 조성과 보존, 이동 등에 대해서 침묵된 원인은 대장

    경의 내용과 범위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지 않은가 한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해인사대장경판이란 명칭으로 국보 32

    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고 정판과 보판으로 나누어지며, 정판보

    다 훨씬 소량인 보판에는 대장도감에서 조성되지 않은 寺版

    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正版의 범위는 大藏目錄에 명시

    되어 있고, 그 자체가 정판에 수록되어 있다.32) 정판은 續藏

    經과, 송․요 등 여러 대장경을 두루 참조하여 이룩되었고,

    당시는 물론 최근에 이루어진 대장경에서도 찾기 어려운 고

    집스런 엄격성을 찾을 수 있다. 이미 목록의 대조로서도 지적

    된 바와 같이 正版에는 禪宗에서 저술된 선적이 철저히 배제

    되었다. 예를 들면 宋版에 포함된 『宗鏡錄』,『景德傳燈錄』

    도 禪宗에 대한 서적이므로 제외되었다.33)

    이와 같이 당시 선종에서 지원하여 조성된 대장경에서 선

    종 서적이 철저히 배제된 사실은 현실성이 배제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정판에는 대장경의 교학적 전통이 지나치게 강

    조된 보수성 때문에 이후 선종이 주도적이었던 불교계에서

    조차 실용성이 적었고, 고려 말, 조선 전기에는 장식적인 용

    도로만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정판의 범위와 교정을 마지막으로 확정한 고승은 開泰寺

    32)『高麗大藏經』39, 民族佛敎硏究所, 1985.

    33) 朴泳洙,「高麗大藏經版의 硏究」,『白性郁博士頌壽記念 佛敎學論文集』,

    東國文化社, 1959.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 52 -

    僧 守其라고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정판의 목록인 大藏

    目錄과 고치고 싶은 부분을 밝혀 놓은 校正別錄에 명시되고

    있으므로 뚜렷이 알 수 있다.34) 그에 대해서는 동국이상국집

    에 같은 이름으로 실려 있으며 이규보, 兪昇旦 등 문신과 친

    교가 깊었고,35)『補閑集』에는 守眞으로36) 약간의 차이가 있

    으나 같은 인물이라 하겠다. 또한 같은 시기에는 天其는 같은

    개태사승으로 의천에 의하여 비난받은 고려 초의 화엄종승

    均如의 저술을 정리하여 전하고 있으므로37) 같은 고승이거나

    법형제일 것이다. 고종시의 天琪는 羅州鄕吏의 아들인 鄭可臣

    을 돕고 있으며 법형제라 생각된다.38)

    守其가 정판의 목록과 교정에 어느 정도 간여하였는지 가

    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적어도 대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은 확실하다. 교정별록과 대장목록에는 선종과 천태종

    이 성행하던 당시에 그들의 협력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어려

    울 만큼 의천시대의 사상을 유지하고 있다. 화엄사상에 있어

    서마저 원효를 추종한 의천의 견해를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의천에 의하여 배격된 균여의 저술이 정판에서 제외되고 같

    은 계통의 고승에 의하여 편집․정리되어 寺版으로 보판 속

    34)『高麗大藏經』38, 民族佛敎硏究所, 1985.

    35)『東國李相國集』卷 37, 祭兪丞相文(1, p. 400), 後集 卷11, 二十九日又邀

    僧統守其(『高麗名賢集』1, p. 511).

    36)『補閑集』 卷 下, 開泰寺僧統守眞 (『高麗名賢集』2, p. 142).

    37) 이러한 균여의 자료와 종합적 연구는 다음을 참조할 것.『高麗大藏經』47.

    金杜珍,『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金知見編,『均如大師華嚴學全書』,韓國傳統佛敎硏究院, 1977.38)『高麗史』卷 105, 列傳, 鄭可臣.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53 -

    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정판의 사본과 목록은 대부분 의천에 의하여 골격이 갖추

    어지지 않았는가 한다. 현존하는 속장경을 검토해 보면 모두

    章疏로서 1090 년까지 조성된 下限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가

    10년 후에 왕성하게 활동할 46세로 입적하자 그의 법형제인

    元景王師 樂眞은 그가 남긴 일을 마무리짓는 작업을 맡았다

    고 한다.39) 그 가운데 대장경도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

    라서 의천이 계획한 대장경은 그 골격이 원경왕사를 거쳐 수

    기에 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수기는 의천과 마찬가지로 화엄종에 속하였을 뿐 아니라,

    의천을 철저히 추종하여 되도록 의천이 설정한 목록을 유지

    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의천의 체계를 수정해야 할 부

    분을 고쳤으나 이를 판목에 나타내지 않고, 따로 이를 묶어서

    30권의 校正別錄을 수록할 정도로 정판은 보수성이 크며, 다

    른 면에서 보면 의천의 死後 150년 동안의 사상적 변화를 반

    영시키지 못한 셈도 된다. 이와 같이 고종 시의 관판대장경은

    의천이 추구한 동아시아 교학의 가장 완벽한 일면도 있지만,

    이후 불교사상의 변화가 무시된 교종의 철저한 보수성이 반

    영되고 있다. 이는 의천에 의하여 확립된 국제주의와 보편주

    의적 불교사상이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조성 당시의 현실성이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판은 의천이 추구했던 국제주의 경전만이 수록되고 선

    종서적이 배제되었다면, 보판에는 의천에 의하여 배척된 均如

    39) 陜川般若寺元景王師碑,『韓國金石全文』, pp. 569~570.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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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저술이 실리고, 祖堂集, 宗鏡錄, 證道歌事實, 禪門拈頌集

    등 선종 관계의 저술이 실려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조

    판을 주도한 조계종과 실무적 협력자인 화엄종승 守其의 사

    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판에 비하여 보판에서는

    유가종과 관련된 저술이 제외된 까닭도, 유가종승의 참여가

    실제로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보판에는 대장도감에서 조성된 官版뿐만 아니라, 사원에서

    조성된 寺版, 또는 雜版으로 불리는 私版이 좀더 많이 포함되

    어 있다. 이 가운데는 관판과 가까운 시기에 조성된 판본은

    물론 조선 전기에 조성된 간행본도 섞여 있으며, 조성된 장소

    와 시기를 알 수 없는 예도 있다. 이러한 잡다한 보판을 합쳐

    서 국보 32호로 지정된 기준과 경위는 보판목록이 조성된

    18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역시 범위가 뚜렷하지 않다.

    보판의 범위에 대한 의문은 정판과 같거나 조금 후까지 관

    판으로 조성된 印本이 좀더 발견되고 있으므로 더욱 커진다.

    현재까지 판목은 없이 인본만 발견된 정판 이외에도 분사대

    장도감에서 조성된 것으로 4종이 소개되었다. 일본에서 발견

    된 印本은 宗門摭英集과 重添足本禪苑淸規 등 2종으로서 모

    두 宋代 선종승의 저술이다. 두 가지는 국내에서 발견되었으

    며, 하나는 『註心賦』이다. 나머지는 天台三大部補注로 보판

    에서는 천태종 관계의 저술로서 유일하게 발견되었다. 이들

    인본은 모두 고종 시에 조성되었고, 고종관판, 또는 대장도감

    판으로 불려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조성당시의 보판목록이

    없는 오늘날 어느 정도 많은 분량의 보판이 관판으로 조성되

    었다가 없어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40)

  • 2001 학술심포지엄 /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

    - 55 -

    보판에는 관판대장경을 조성할 당시에 참여한 종파와 불

    교계의 현실이 잘 반영되고 있다. 선종 관계의 저술이 가장

    많고, 화엄종과 천태종의 순서이다. 정판과는 달리 유가종의

    저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당시 문집이나 금석문에 유

    가종승의 활동이 거의 적혀 있지 않은 점과 상통한다. 이와

    같이 보판에는 정판과 다른 당시의 현실성과 종파의 활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해인사에는 寺版 또는 雜版으로 불리는 정판과 보판 이외

    의 여러 散版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은 정판의 조성을 전후해

    서 또는 몽고압제 아래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실용성에 의하

    여 현실성을 반영한 판본이다. 이들은 보판과 사상적으로 상

    통하며, 대체로 사변적이기보다는 실천 위주이고, 이론적이기

    보다는 신비사상을 반영한 간단한 경전이며, 선종 관계의 저

    술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판본들은 마모가 심할 정도로 인본

    이 자주 행해진 반면, 정판은 극히 마모가 적으므로 인본이

    자주 행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를 보면 정판은 보판이

    나 사판보다 신앙적 장엄의 의미가 더 컸고, 당시의 사상가들

    에 의하여 이미 현실적인 관심을 상실하였다고 생각된다.

    正版의 범위는 그 자체에 포함된 大藏目錄41)에 실려 있으

    나, 補版은 본래 목록조차 없었고, 조선시대 말기에 彫成하여

    끼워 넣으면서 이때에야 판마다 陰刻으로 千字文의 函名을

    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국보 32호로 해인사대장경판이란 명칭

    40) 판목은 없고 인본만 남아 있는 이들 4종의 판본에 대해서는 자세히 후

    술한다.

    41)『高麗大藏經』39.

  • 대장도감판 대장경 조성의 동기와 사상 / 제1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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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지정된 대장경에 속한 보판에는 위와 같이 寺版이나 조

    선시대 목판까지 포함된 대신, 해인사에는 이를 제외한 많은

    고려 목판본이 더 있다. 즉 국보 206호로 지정된 28종 2,725

    枚와42) 보물 734호로 지정된 26종 110枚의 목판본이43) 그것

    이다. 해인사에는 이 밖에도 최근까지 조성된 雜版(寺版)이

    적지 않게 보존되고 있다.44) 우리나라의 중요 사찰에 목판본

    의 불경이 일부만 남아 있는 예가 적지 않지만, 국보 32호로

    지정된 목판을 제외하더라도 해인사처럼 많은 판목이 밀집되

    어 보존되고 있는 곳은 또 다시 없다.

    보판이란 국보 32호의 목판 가운데서 대장목록에 실린 정

    판을 제외한 나머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보판의 목록과

    찬자, 彫成年代, 彫成者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15종이

    다.45) ( )안에 써넣은 부분은 조성된 연대임.

    ①宗鏡錄 100卷 宋延壽述 (1246, 1247, 1248)

    ②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 3卷(1248)

    ③金剛三昧經論 3卷 元曉撰(1244)

    ④法界圖記髓錄 4卷 未詳(未詳)

    ⑤祖堂集 20卷 靜․筠撰(1245)

    ⑥大藏一覽集 10卷 宋陳實撰(조선전기)46)

    42) 文化財管理局, 前揭書.

    43) 同上.

    44) 大屋德城, 前揭論文.

    45) 이 목록의 작성은 다음을 참조하였다. 大屋德城,前揭論文.

    徐首生,「大藏經의 補遺經版硏究」,『慶北大論文集』22, 1976.

    朴相國,「海印寺大藏經版에 대한 再考察」,『韓國學報』33, 1983.

    46) 고려 고종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