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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tas 거울(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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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tas̀거울̀ 5̀

가톨릭 사회복지 영성의 뿌리, 예수님의 사랑

‘부자 되세요!’, ‘승리하세요!’, ‘돈 많이 버세요!’몇 해 전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귀가 따갑게 들은 익숙한 표현들이다. 방송에서만이 아니라 세기를 두고 외쳐온 말

이 아닐까? 옛 문헌에서도 힘 있고 성공한 자에 대한 찬양이 계속 있었다. 영웅담,

왕들의 이야기, 부자가 된 성공담, 전쟁의 역사, 힘 있는 자의 비법 등. 도대체 약하

고 힘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 그나마 세상의 베스트셀러 성경에서

는 그들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

지만 구약성경의 유다인들이 바라보는 가난한 자들 역시 빈곤한 자, 배고픈 자 등

탐탁치 않게 표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난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풍요롭

고 축복받은 세상을 자신들의 게으름이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해 발생한 삶의

결과로 여겨졌다.

과연 그럴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살도록 부르셨다. 그런데도 고

통 속에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을 받고 살

Caritas 거울(鏡) .....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해설 Ⅳ

- 제1부를 중심으로 ③ -

예수님의 사랑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 대전교구 사제, 1989년 사제품을 받았다. 대전교구 금산본당 주임과 사목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아가는 이웃의 권리를 빼앗은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죄악의 결과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굶주리고, 위로가 없기 때문에 울고, 배

려가 없기 때문에 오해받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제 진실로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

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보자.

특별히 한국의 가톨릭 사회복지 시설에서 사랑의 직무인 복지와 봉사를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복지 사상이 바로 예수

님의 기쁜소식(복음)을 바탕으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의

첫 교황 회칙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사회복지 영성의 뿌리는 바로 강생

하신 하느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 사고

방식, 행동방식, 사람중심의 그리스도론적 적용이 지금의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 현

장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강생되어야 할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제1부에서 구세사 안

에 나타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증거하도록

안내한다. 제2부에서는 삼위일체 신앙과 교회 그리고 사회 안에서 실천할 구체적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필자가 집필하는 4편의 해설은 이 회칙의 제1부를 중심

으로 하고 있다.

첫회‘사랑의 진실’에서는 1항부터 8항까지의 회칙 내용에 대해 아가페 사랑이

에로스의 육적인 사랑까지 유연하게 포함하고 있음을 소개하였고, 지난 두번째‘하

느님의 사랑’에서는 9~11항까지의 내용을 구약 성경에서 나타난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겨보았다.

이제 세번째 부분인‘예수님의 사랑’에서는 12항에서 15항까지의 회칙이 말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특별히 구약의 하느님다운 모습을‘사랑으로 현존하

는 분’, ‘사랑으로 체험될 수 있는 분’, ‘사랑을 촉구하시는 분’으로 살핀 다음, 예수

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요구를(12항) 진술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와 복음의 비유들을 통해서 사랑의 본질을 만날 것이다.

현존하는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에“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하느님은 늘‘가까이’오

시는 사랑이‘많으신’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은 다른 분이 아니

라 구약의 백성들이 믿는 한 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백성들을 앞장서

나아가고 미래를 약속하며 우리와 함께 순례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존재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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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늘‘현재’이며 백성과 함께‘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항

상 지금 우리와 함께‘존재’하시는‘관계’로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미래를

지시하는‘역사의 신’이 아니라 현재를 주님으로서 규정하며 여기서부터 과거와 미

래가 서로 맞닿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의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현재가 하느님을 규

정한다. 하느님은 늘 현재적 실재이다.

체험될 수 있는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사된 힘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해

방된 자유를 특별하게 체험하도록 초대하였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

YHWH)을 물었

으나 그는 하나의 동사를 받게 된다. 야훼의 어원은‘hjh(hajah)’이다. 이 말은‘그가

저기에 있다’또는‘저기에 있는 그’를 의미하는데, 그 뜻은 하느님(YHWH)은‘휴식

하는 존재가 아니라’‘돌입하는 것’, ‘떨어지는 것’, 간단히 말해서‘발생’이 기본적

인 의미이다. 하느님은 현존하며 본질적으로 체험하는 분이다. 무엇을 체험하는가?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것은 모세가 홀로 있지 않다는 것, 자신의 사업을 고독하게 시

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체험된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모세의 무능이 결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분명히 한다. 모세의 인간적

인 행위 속에서 하느님이 나타날 것이고 현존하기 때문이다.

모세와 백성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체험한다. 백성은 자신의

모든 비참 속에서도 풍성히 받은 선물을 체험하고 있다. 간택된 백성은 하느님을 통

해서 진정한 자신을 체험한다. 이는 하느님이 백성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완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백성은 갖가지 불행 속에서 행복하

리라는 약속을 체험한다.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되었고 수락되었으며 은혜를

받았고, 이러한 자유가 모든 인간의 역운과 운명 속에서도 그에게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지니고 있다.

촉구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수락한 백성에게 동일한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각자 능력에 상응한 행동을 하라는 촉구를 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체험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리 자신에게 좋은 사랑이라도 항상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배려가 내포되어 있다.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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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 실존에 상응할 때 미래를 위해서도 계속 하느님의 간택과 해방의 약속을 가지

게 된다.

하지만 백성이 하느님과 관련을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이 백성은

무신적이다. 그러므로 무신적 행동의 불행한 결과가 당연히 뒤따르게 마련인 것이

다. 그 사례가 선악과의 낙원설화이며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이다. 이 사례가 전

하는 메시지는 모두 인간중심의 사고와 행동은 반드시 인간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

든다는 것이다. 낙원설화는 인간인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할 때

발생하는 불행을 예고하고, 금송아지 우상숭배는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상이며 그렇

지 않은 인간 이외의 것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경고이다. 인간들은‘하느님

의 모상’에 유의하고 집중할 때에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관건이 되는 것은‘제물’이 아니다. 제물은 언급된 우상숭배로 인간들

을 그릇되게 인도하고, 하느님을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무관하게 그저 홀로 고고히

세상 밖에 존재하는‘즉자적으로’묘사하는 상으로 그리려고 한다.

그 때문에 성경 안에서는 즉자적인 하느님에 관한 아무런 진술들도 발견되지 않

는다. 하느님은 인간이 사랑받고 해방을 추구하는 충동이 계속되는 데서 현존한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호세 6, 6). 하느님에게는 우상과는 다

른 기본 개념인 은혜에서 언어화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것은 은혜이

다. 하느님은 이 은혜 자신이다. 하느님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속에서 은혜로 발생한

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만남이나 교제‘이면에서’, 또는‘전면에서’가 아니라 바로

은혜 받고 있는 삶 한가운데서, 즉 사랑 한가운데서 체험될 수 있다.

사랑 자체가‘파스카’, ‘하느님의 지나쳐 감’, 그의 현존을 구원으로 증거한다. 금

세기 신학자 한스 우르 폰 발타살은“믿을 만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래서 사랑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 절대적 사랑이 존재한다는 신앙,

그리고 이 사랑이 궁극적인 실재이고 그 이상의 또 다른 실재란 없다는 신앙. 실존

체험의 모든 개연성을 거슬러… 모든‘이성적인’신 개념을 거슬러서… 절대적 사

랑이 바로 존재 자체임을 드러내 보인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하느님, 용서하시는 분

12.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구약 성경의 하느님에 대하여 언급해 왔지만, 그리스도

교 신앙의 유일한 경전인 두 성경이 서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졌

다. 신약 성경의 실질적인 새로움은 새로운 개념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

념들에 살과 피를 부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에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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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길 잃은 양’, 고통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실 때 극단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전적으로 구약성경의 개념들과 부합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본질, 계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역사의 하느님은 인류와 가

까이 존재하시고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그 백성의 사건들에 참여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는데,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당신 백성

을 해방시키시고 계약을 맺으신 분이시다.

구약에서 결정적으로 강조된 것은 하느님이 전적으로 개입한 무상성이다. 당시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은 분명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이였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오직 의로운 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분임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았다. 다시 말해 죄인들에게는 가차 없이 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는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이를 구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쇄신 곧

회개를 수반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

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무엇보다 하느님 심판의 절박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무상으로 구원의 행위

를 시작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고 있다. 곧 하느님의 구원은 무상적으로 부여된 구

원으로서 미리 회개하도록 전제되지 않는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은총의 하느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율법 규정 등을“상관 관계화”로 적용하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의 핵심에는 형식화된 규정과 율법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은 형식적인 예배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고 내면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관심은 무언가를“준수하는”것에 한

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설교는 이같이 구약성경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 반영이란 오직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구약성경은 이

웃사랑을 기초한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데, 이 사랑의 대상이 원수들이나 이

방인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이란 그들 고유의 민족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 구약에서 원수를 증오한다는 것은 법적으

로 정당한 것이었으며 개인적인 원수는 사랑의 의무에서 제외되는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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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모호성을 배제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

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

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

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 43-45). 이같이 하느님의 사랑은 전혀 국경이 없는

것처럼 신자들의 사랑도 그래야만 한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느님은 새로운 하느님이 아닌 바로 구약 속에

나타나는 계약의 하느님 그분이시다. 그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새로

운 관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님의 하느님은 계약의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이 아

니면서도 다른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하느님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은총의 하느님이시면서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그렇지

만 예수님의 동시대에 훌륭하다는 하느님 전달자들이 도저히 찾아내지 못한 하느님

의 다른 면, 곧 하느님다운 하느님의 본질을 예수님은 보실 줄 알았으며 이러한 하

느님에 대한 선조들의 신앙을 재발견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은‘나자렛

예언자’의 메시지를 거부하였다.

예수님의 요구, 회개와 사랑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향한 회개와 신앙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 사

랑의 지배에 대한 회개이며 신앙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

님 나라의 핵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모든 율법 규정에서 자유롭게 행

동하시고, 특별히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다. 이는 분명하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있으며 모두가 차별 없이 하느님의 친교 안으

로 불러들이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현존하고 구원이 이뤄지고 있음을 실행하였다. 죄인들과 함께한 그분의

잔치와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그분의 치유는 바로 하느님과의 친교에 예수님께서

미리 참여하심과 그 현실을 미리 선포하는 것이며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자리에 있

는 한 사람처럼 행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관계를 맺고 있

는데,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회개하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그분께 회개해야 하

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전제하신다. 누구든지 그분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마찬가지

로 하느님으로부터도 거절당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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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

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 8-9). 누구든지 예수님을 받아들

이면 실제로 그분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

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

은나를받아들이는것이아니라나를보내신분을받아들이는것이다”(마르 9, 37).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배우고 유다 랍비 가

운데 한 사람을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악신을 물

리치며 모든 힘을 다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예

수님의 모든 행동과 설교로부터 하느님 나라가“가까이 옴”은 그분께서 당신 인격

의“가까이 옴”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선포하고 실현시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서는 바로 인격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이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이 말씀하시

고 행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과 활동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길 잃은

양’, 고통 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실 때 극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방탕한 아들을 보고 달려 나

가 안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성경의 비유는 예수님의 사랑과 활동을 말해준다. 예수

님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

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 행위의 절정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말하

는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요한 19,37)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칙의 출발점으로

삼은“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거기에

서 우리는 이 진리를 바라볼 수 있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

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낸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

13. 유다인들은 출애굽을 한 다음 시나이 사막 광야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받아먹은 것이다(탈출 16장). 하느님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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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주신 만나 없이 유다인들의 광야 여정은 불가능하였다. 하느님의 이 도움은 신약

에서 하늘의 빵, 성체성사로 다시 선물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 33). 빵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성체성사는 세상

에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성사이다. 거룩한 영성체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영성체를 통해서 거룩한 성체가 하

느님의 생명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생명, 내 생명, 우리 생명이 되시는

기적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체로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영원한 힘이 생겨

나고 성장한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셔서 당신 자신을 바

치는 이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하셨다.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당신 자신, 곧 새로

운 만나(요한 6,31-33)인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

활을 예고하셨다.

고대 세계는 인간의 참된 음식, 곧 참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음식은 궁

극적으로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이 로고스가

이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셨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

치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인다. 우리는 강생하신 로고스를 단지 정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역동적인 행위 안으로 들어

간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혼인에 대한 표상은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식

으로 실현된다. 전에 그 혼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예

수님의 봉헌에 동참하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하게 된다. 우

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에 토대를 둔 성사의‘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

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모든 신비주의적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우리를 들어 높여 준다.

성체성사, 일치를 위한 사랑

14.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

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 53).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강해 보이고, 혹자들에게는 부

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곧 피에 대한 전율과 공포를 가지고 있고 피에 대한

시각이 빗나가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피 안에는 체질·성질 따위의 열성 형질(劣

性形質)이, 한 세대 또는 여러 세대를 거쳐서 후손에게 나타나는 현상 곧 격세유전(隔

世遺傳)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옛 백성들은 피 안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고 믿어왔다. 생명은 피의 확산과 함께

퍼져나간다. 그러나 피는 역시 강한 일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학연, 지연,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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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가운데 어떤 인연이 강한가?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말이 있다. 피의 결합으로

가족관계가 된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도“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현대 영성가들도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거룩한 영성체

로 우리는 실로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친족이 된다. 하느님은 우리

의 참 아버지, 마리아는 우리의 참 어머니, 이웃들은 우리의 참 형제자매가 된다. 왜

냐하면 우리 모두의 몸 안에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체성사의‘신비’는 사회 공동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성사의 친교, 곧 영

성체를 통하여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하나

가 되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일치이기도 한다.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분께 속할 수 있다. 영성체는 내가 자

신에게서 벗어나 그분을 지향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지향하도록 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실존 안에 완전히 결합된‘한 몸’이 된

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된다.

성찬례에서 하느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

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부터 하

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넘어가신 것, 또 이 핵심 계명을 신앙생활

전체의 바탕으로 삼으신 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과 예배와 관습은

서로 얽혀 있는 단일한 하나의 실재이다. 그 실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인 아가페

와 만남으로써 구체화한다. 이때 예배와 윤리의 흔한 대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만다.

곧 신앙과 삶과 전례기도는 동전의 양면 혹은 손의 안팎이 된다. 성찬의 친교인‘예

배’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포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없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계명’은 가능하다. 사랑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먼저 주어지는 선

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계획과 시간을 내어준다

미국에서 유명한 연예인 지미 듀란테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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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요청을 받았다. 스케줄이 너무 바빠 단 몇 분밖에 출연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승낙

을 했다. 쇼 기획자는 그렇게라도 그를 무대에 세운다면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지미

가 무대 위로 올라가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짤막한 원맨쇼만 끝내기로 했는데, 그

는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수소리는 점점 커지고 지미는 10분, 20

분, 30분, … 계속 쇼를 진행해나갔다. 드디어 지미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기획자가 그에게 몇 분간만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

다. 지미가 대답했다. “나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내가 계속 쇼를 진행한데는 이유가

있었소. 저기 무대 맨 앞줄에 앉은 사람들 때문이오.”기획자는 무대 커튼 사이로 그

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무대 맨 앞에는 전쟁에서 팔 한 쪽씩을 잃은 두 명의 참전

용사가 그들의 나머지 왼팔과 오른 팔을 서로 부딪쳐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듀란테는 자신이 약속한 쇼의 진행 시간을 30

분 이상 늘렸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성체성사 정신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닐까? 사랑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계획을 내어주고 변경하는 것이다.

사랑의 원칙

15. 이 사랑의 원칙은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들 안에 가득 차 있다. 부자와 라자로

의 비유(루카 16,19-31)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죽은 후에 어

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 형제들이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러한 도움의 호소를 우리가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경종으로 삼으셨다

고 말할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는‘이웃’의 개념을 근본적

으로 뒤집는 것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동포와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외국인들을

이웃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곧 이웃은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으로 구성

된 긴밀한 공동체 구성원을 일컬었다. 이러한 제한이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나를 필

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이웃인 것이다. ‘이웃’의 개

념은 이제 보편화되고 구체적이 되었으며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었지만, ‘이웃’개

념이 일반적이며 추상적이고 커다란 의무를 지지 않는 사랑의 표현으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게 요구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일

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할 의무가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마태 25, 31-46)는 이 사랑의 원칙이 매우 특별하다. 이 비유에서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

그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동일시하셨다. “너희가 내

14` `가톨릭사회복지 31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

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

은 이들 안에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이기주의에 반대해서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모든 덕목들이 마치 물속에서 자신

을 위한 사랑으로 녹아버리는 것이 이기주의로 나타난다. 현자들은 종종 경고한다.

“자신을 잊고, 다른 자들을 생각하라.”복음은 매우 현실적이다. 이웃을 자신의 자

리로 옮겨와 사랑하지 말고, ‘자기 자신처럼’참으로 사랑하라고 권한다. 자신의 사

랑은 자연적 본성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 사랑은

희생 없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희생이 참 사랑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모든 예

식에서 내적인 만족이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강조하셨다. 그

렇지 못한 전례행위는 영혼 없는 몸처럼 된다. 안티오키아 지역의 시리아 영성가 치

로의 테오도레토는 자신의 책 수도생활의 역사에서 수도자들이 기둥 위에서 살고,

동굴 안에서 살아가며, 극도의 단식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정말로 이렇게 무거

운 삶을 요구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응답하기를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모든 수덕의

삶의 형태가 사랑에서 영감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수도생활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각자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엄하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

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죽음을 막을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진정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근본 자산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희망과 사랑과 행복을 사는 전

인적 자기성숙의 원리가 필요하다. 그 원리가 세상에서 최고의 베스트, 스테디셀러

인 신약성경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서로 사랑 하여라.’속에 담겨있다.

‘서로 사랑 하여라.’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살아가는 행복 메

시지의 본질이다. 이 사랑의 원리에 2천 년을 살았던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 담겨 있

다. 우리 곁을 떠나시면서 남기신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 “고맙습니다. 사랑합

니다.”도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반복하신 것이다.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

려고 태어난 존엄한 존재이다. ‘사랑하면 불가능이 없다.’사랑은 나의 능력과 너를

온전히 알아차리는 기적의 힘을 준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는 21세기를 사는 모두에

게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행복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고 있다. 지금 여기

서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행복의 원리이며, 사랑의 영성과 실천원리‘서로 사랑 하

여라.’를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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