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 · 2010-10-15 · 위대성에...

81
敎育學碩士學位請求論文 西隱 金基錫의 敎育思想 및 倫理思想 硏究 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Ki Suk 2006年 2月 仁荷大學校 大學院 敎育學科(敎育學專攻) 安 恩 瓊

Transcript of 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 · 2010-10-15 · 위대성에...

  • 敎育學碩士學位請求論文

    西隱 金基錫의 敎育思想 및 倫理思想 硏究

    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Ki Suk

    2006年 2月

    仁荷大學校 大學院

    敎育學科(敎育學專攻)

    安 恩 瓊

  • 敎育學碩士學位請求論文

    西隱 金基錫의 敎育思想 및 倫理思想 硏究

    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Ki Suk

    2006年 2月

    仁荷大學校 大學院

    敎育學科(敎育學專攻)

    安 恩 瓊

  • 敎育學碩士學位請求論文

    西隱 金基錫의 敎育思想 및 倫理思想 硏究

    A Study on the Educational and Ethical Thoughts of

    Seoeun Kim, Ki Suk

    2006年 2月

    指導敎授 金善陽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仁荷大學校 大學院

    敎育學科(敎育學專攻)

    安 恩 瓊

  •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認定함

    2006年 2月

    主審 ________________

    副審 ________________

    委員 ________________

  • 目 次

    Ⅰ. 緖論

    A. 硏究의 必要性 및 目的 ․․․․․․․․․․․․․․․․․․․․․․․․․․․․․․․․․․․․․․․․․․․․․․․․․․․․․․․․․․․․․․․․․ 1

    B. 硏究의 內容 및 方法 ․․․․․․․․․․․․․․․․․․․․․․․․․․․․․․․․․․․․․․․․․․․․․․․․․․․․․․․․․․․․․․․․․․․․․ 2

    Ⅱ. 西隱의 生涯와 活動

    A. 西隱의 生涯 ․․․․․․․․․․․․․․․․․․․․․․․․․․․․․․․․․․․․․․․․․․․․․․․․․․․․․․․․․․․․․․․․․․․․․․․․․․․․․․․․․․․․․․․ 4

    B. 西隱의 活動 ․․․․․․․․․․․․․․․․․․․․․․․․․․․․․․․․․․․․․․․․․․․․․․․․․․․․․․․․․․․․․․․․․․․․․․․․․․․․․․․․․․․․․․․ 8

    Ⅲ. 西隱의 敎育思想

    A. 西隱의 敎育思想의 形成背景 ․․․․․․․․․․․․․․․․․․․․․․․․․․․․․․․․․․․․․․․․․․․․․․․․․․․․․ 16

    B. 西隱의 敎育思想의 構造 ․․․․․․․․․․․․․․․․․․․․․․․․․․․․․․․․․․․․․․․․․․․․․․․․․․․․․․․․․․․․․․ 20

    Ⅳ. 西隱의 倫理思想

    A. 새로운 倫理의 意味 ․․․․․․․․․․․․․․․․․․․․․․․․․․․․․․․․․․․․․․․․․․․․․․․․․․․․․․․․․․․․․․․․․․․․․ 29

    B. 西隱의 義의 倫理思想 ․․․․․․․․․․․․․․․․․․․․․․․․․․․․․․․․․․․․․․․․․․․․․․․․․․․․․․․․․․․․․․․․․ 39

    C. 西隱의 義의 倫理思想의 具顯 ․․․․․․․․․․․․․․․․․․․․․․․․․․․․․․․․․․․․․․․․․․․․․․․․․․․ 43

    D. 西隱의 愛國, 愛族, 永久平和의 理念 ․․․․․․․․․․․․․․․․․․․․․․․․․․․․․․․․․․․․․․ 55

  • Ⅴ. 要約 및 結論

    A. 要約 ․․․․․․․․․․․․․․․․․․․․․․․․․․․․․․․․․․․․․․․․․․․․․․․․․․․․․․․․․․․․․․․․․․․․․․․․․․․․․․․․․․․․․․․․․․․․․․․․․․․․ 58

    B. 結論 ․․․․․․․․․․․․․․․․․․․․․․․․․․․․․․․․․․․․․․․․․․․․․․․․․․․․․․․․․․․․․․․․․․․․․․․․․․․․․․․․․․․․․․․․․․․․․․․․․․․․ 61

    參考文獻 ․․․․․․․․․․․․․․․․․․․․․․․․․․․․․․․․․․․․․․․․․․․․․․․․․․․․․․․․․․․․․․․․․․․․․․․․․․․․․․․․․․․․․․․․․․․․․․․․․․․․․ 64

    附 錄 ․․․․․․․․․․․․․․․․․․․․․․․․․․․․․․․․․․․․․․․․․․․․․․․․․․․․․․․․․․․․․․․․․․․․․․․․․․․․․․․․․․․․․․․․․․․․․․․․․․․․․ 67

    國文要約 ․․․․․․․․․․․․․․․․․․․․․․․․․․․․․․․․․․․․․․․․․․․․․․․․․․․․․․․․․․․․․․․․․․․․․․․․․․․․․․․․․․․․․․․․․․․․․․․․․․․․․ 69

    英文抄錄 ․․․․․․․․․․․․․․․․․․․․․․․․․․․․․․․․․․․․․․․․․․․․․․․․․․․․․․․․․․․․․․․․․․․․․․․․․․․․․․․․․․․․․․․․․․․․․․․․․․․․․ 72

  • - 1 -

    Ⅰ. 緖 論

    A. 硏究의 必要性과 目的

    敎育의 目的은 人間의 바람직한 成長과 變化라고 할 수 있다. 人間의 바람직한

    變化를 위하여 敎育者는 바른 價値觀을 提示하며 좇아갈 수 있는 模範을 보여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敎育의 世紀라고 規定한다면 우리 民族의 未來는 偉大한 敎

    育者의 獻身的 貢獻에 의해서 可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韓國 敎育界의 元老

    이며 西隱의 直弟子인 韓基彦은 西隱 金基錫을 가리켜 ‘敎師의 敎師’라는 한마디

    로 그의 삶을 표현하였다.1) 이는 西隱이 살아온 삶의 모습과 그의 자취를 잘 나타

    내주는 말이다.

    西隱 金基錫(1905~1974)은 우리 民族의 격동의 시기인 朝鮮朝 末期와 日帝의

    强占時期를 거쳐 解放과 6.25의 戰亂을 겪었던 敎育者로서, 哲學者로서 이 민족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가르치고 方向을 提示한 先覺者요, 敎育哲學者요, 社會改革

    者이다. 또한 그는 이 民族의 受難의 時期와 함께 하며 이 民族의 살 길은 民族

    한사람 한사람이 깨어나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一念으로 人間敎育을 위해

    獻身한 國民倫理運動의 先驅者요 倫理學者이기도 하다.

    西隱은 東西洋의 學問과 宗敎, 哲學을 고루 涉獵하여 該博한 知識과 가르침으

    로 민족의 높은 理想을 實現해 나가고자 ‘새로운 東洋’, ‘새로운 歷史’, ‘새로운 義’

    라는 높은 旗幟을 가지고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온 정성과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일찍이 五山中學校에 입학하여 南岡 李昇薰과 島山 安昌浩의 높은 人格과

    民族精神을 이어받아 民族敎育을 위해 자신을 獻身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를 실현

    하기 위해 哲學을 공부하며 倫理學, 敎育學의 基盤을 定立하였으며 ‘敎育하는 哲

    學者’요, ‘哲學하는 敎育者’로서의 높은 뜻을 실현하는데 전 生涯를 바쳤다.

    西隱은 個個人이 서로 맑은 가슴을 지니고 키우면서 동시에 理性者로서의 존엄

    성에 대해서 존경을 표하면서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고 나아가 인류 永

    1) 韓基彦, 敎育의 歷史哲學的 基礎(서울 : 實學社, 1975), pp.1010-1011.

  • - 2 -

    久平和의 理念을 具顯해 가는 것을 인류전체의 구원할 소망으로 삼았다. 아울러

    理性者의 限界를 自覺하고 이를 초월해서 究竟의 絶對者의 秩序에로 겸허하게 歸

    依할 것을 가르쳤다.

    西隱의 思想은 한마디로 ‘東西思想의 韓國化’라고 말할 수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義’의 倫理를 주창하였다. 그리고 西隱의 愛國․愛族의 精神은 偏狹

    한 民族主義에 그치지 아니하고, 이 지상에서 하나하나의 民族이 自由와 自主性이

    보장된 獨立을 기반으로 하여, 侵略과 壓迫, 被侵略과 被壓迫이 사라진 人類의 永

    久平和를 希求하였다. 그는 東洋의 現代를 내다보면서 이를 위해 새로운 시대가

    가져야 할 새로운 倫理를 제시하고, 過去 韓國의 傳統主義와 그릇된 利他主義를

    벗어나서 義로 거듭난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敎育의 가장 중요한 課題는 다음世代를 담당할 사람을 올바로 키우는

    참다운 敎育者일 것이다. 韓基彦은 現代 敎育思想家를 거론할 때 대표적으로 네

    가지 유형으로 꼽았다. 첫째는 女性敎育者로 趙東植, 金活蘭, 둘째는 敎育學 定礎

    의 雙璧으로 吳天錫, 李寅, 셋째는 敎師의 敎師로 張利郁, 金基錫, 넷째는 信仰에서

    의 敎師로 崔鉉培, 白樂濬을 薦擧하였다.2)

    이런 점에서 韓國敎育의 開拓者요 先覺者요, 敎育思想家로서 倫理運動을 이 땅

    에 펼치기 위해 혼신을 다하였던 西隱 金基錫의 生涯와 그의 敎育思想 및 倫理思

    想을 考察해 보는 것은 意味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본 硏究의 目的은 西隱의 生涯와 活動을 돌아보고 그가 提唱한 새로운 敎育思

    想과 倫理思想을 考察해 봄으로 敎育的으로 倫理的으로 腐敗해져가는 이 시대에

    건강한 敎育者像과 敎育의 方向을 摸索하고 倫理敎育을 위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자 한다.

    그 具體的인 目的은 다음과 같다.

    첫째, 韓國 現代敎育史에 자취를 남긴 西隱의 生涯와 活動을 살펴보고,

    둘째, 敎育者로서 西隱의 敎育思想을 考察하며

    셋째, 倫理運動의 先驅者로서 西隱의 倫理思想을 밝히고자 한다.

    2) 韓基彦, 敎師의 哲學(서울 : 양서원, 1994), p.320.

  • - 3 -

    B. 硏究의 內容 및 方法

    본 硏究의 目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硏究 內容을 設定하였다.

    첫째, 韓國 現代敎育史에 자취를 남긴 西隱의 生涯와 活動은 어떠한가? 이를

    위하여 첫째로 西隱의 幼年時節, 靑年時期, 社會活動時期를 살펴보고, 둘째로 西

    隱의 敎育活動, 著述活動을 살펴본다.

    둘째, 敎育者로서의 西隱의 敎育思想은 어떠한가? 이를 위하여 첫째로 西隱의

    敎育思想의 形成背景, 둘째로 西隱의 敎育思想의 構造를 살펴본다.

    셋째, 倫理運動의 先驅者로서 西隱의 倫理思想은 어떠한가? 이를 위하여 첫째

    로 새로운 倫理의 意味, 둘째로 義의 倫理思想과 具顯, 셋째로 愛國․愛族․永久

    平和의 理念을 살펴본다.

    본 論文은 주로 西隱 金基錫의 著書와 論文, 그리고 그의 弟子들의 硏究論文과

    西隱 金基錫에 관한 記錄, 그리고 直弟子의 口述을 통한 文獻 硏究에 의존하였다.

  • - 4 -

    Ⅱ. 西隱의 生涯와 活動

    A. 西隱의 生涯

    西隱 金基錫((1905~1974)은 1926년 五山中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日本 와세다

    (早稻田)大學 高等師範部에 입학하여 英語敎育을 전공하였다. 1930년 대학을 졸업

    하고 歸國하여 母校인 五山中學校에서 敎師(敎諭)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日本으로 가서 1941년 日本 東北大學 法文學部에서 哲學을 專攻하였다. 西隱이 哲

    學을 硏究하게 된 것은 英文學을 공부할 당시 獨逸語에도 남달리 관심을 가지고

    독일 哲學書籍을 탐독하였고, 특히 Kant 철학에 心醉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

    西隱은 1941년 大學을 졸업한 후 五山中學校에서 勤務하다가 解放되던 해인

    1945년 까지 定州中學校에서 校長으로 在任하였다. 그 이듬해인 1946년 越南하여

    잠시 서울중학교에서 勤務하다가 1947년 9월 서울大學校 師範大學의 敎授로 출발

    하여 1960년 중반까지 師範大學長을 역임하였고, 1953년 4월 韓國敎育學會가 창설

    되면서 初代會長으로 취임하였다. 이어서 다시 會長으로 추대되어 連任하는 등 우

    리나라 敎育學의 學問的인 定礎를 다지는 일에 盡力하며 敎育學界와 敎育界에 지

    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1년 마산에 있는 慶南大學의 學長과 大學院長을 歷任할

    때까지 大學 이외에 敎育, 文化, 社會 各界의 公共機關의 주요한 職責을 맡아 獻身

    的으로 貢獻해 오다가 1974년 11월 21일 새벽 1시 정각에 “너희는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생활을 하라”는 遺言을 남기고 他界하였다.

    1. 幼年時期

    西隱 金基錫은 1905년 廣州 金氏 水踰公派 二十二代 孫으로 아버지 金承澤과

    어머니 白麟圭 사이의 四男妹 중 次男으로 태어났다. 형은 基萬, 누님은 基道, 누

    이동생은 基姐였다. 西隱이 태어난 곳은 平安北道 龍川으로 鴨綠江口 三角洲에 위

    치한 이곳은 東界二十里 北界十五里, 鐵山郡 境界 北二十里 西海岸 北端에 연하여

    3) 朱鳳魯, “西隱 金基錫의 生涯와 社會敎育思想”, 西隱 金基錫先生 誕辰100周年記念講演集

    (2005), p.3.

  • - 5 -

    중국 만주를 시야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물질문명의 利器인 電信,

    電話, 電氣施設이 완비되었고 天惠的으로 海陸物産이 풍부하여 關西地方의 유일한

    寶庫였고 살기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는 乙巳條約이 체결되던 1905년에 태어나

    1910년 韓日合邦 당시 5세였다. 그는 龍川普通學校를 거쳐 龍岩浦小學校를 다녔

    다. 家庭에서는 父親을 통해서 小學, 孟子, 古文眞寶後集과 四書五經 등을 배웠다.

    아버지 어머니는 중국에 가서 크게 농사를 지어 家勢는 隆盛한 편이었다. 金善陽

    은 西隱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西隱은 어릴 때 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聰明하고 지혜로워 부친과 이웃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났다. 그의 聰明함을 귀히 여긴 부친은 西隱을 각별히 사랑하여 注目

    하고 그의 미래를 기대하였다. 五山中學校 시절에는 優秀한 학생으로 모범이 되었으며

    단정한 모습으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는 학생이었다.4)

    西隱은 普通學校를 마치고 定州郡 五山에 와서 五山中學校에 입학하여 그곳에

    서 現代的인 學問을 접하게 되었다. 집에서는 孟子의 「王道說」과 「大學」의 三

    綱領, 栗谷의 「擊蒙要訣」 등에 접하였고, 학교에서는 現代的인 교과와 특히 梁

    啓超의 「飮氷室文集」과 존 번연의 「天路歷程」등에 심취하였다. 西隱은 특히

    梁啓超5)의 思想에 큰 영향을 받았다.

    西隱은 梁啓超와 접하면서, 梁啓超가 中國에 대하여 矜持를 가지게 된 것처럼

    이를 韓國民族에 적용하여 韓國民族의 우월성을 발견하여 우리 民族의 장래에 대

    한 비전을 보았고, 또한 西隱이 西歐羅巴 歷史, 哲學者들의 著書를 통하여, 간접적

    으로는 西歐羅巴를 직접 체험한 梁啓超의 삶과 西洋文物에 대한 觀點의 영향을

    받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4) 西隱 金基錫의 長男인 金善陽의 口述에 의하여 記錄하였음(2005년 10월 20일).

    5) 梁啓超는 중국 淸末 中華民國 初의 啓蒙思想家이자 文學家로서 啓蒙的인 雜誌를 발간하여 西

    洋의 新思想을 소개하고 舊思想을 배격하며 愛國主義를 고취하여 中國開化에 공헌하였다. 하

    지만 1918년 말 유럽을 방문하면서 유럽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병리현상을 직접 둘러보게 되

    어 귀국 후 西洋 文明이 이미 破散하였음을 宣言하였다. 梁啓超가 유럽에 체류하고 있던 1919

    년에 O.Spengler의「Untergang des Abendlandes(서구의 몰락)」가 가장 많이 팔렸는데, 이러

    한 경향을 접하게 된 그는 서구는 중국문명에 의해 구원될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고, 베르그송

    과 그의 스승 Boutre 등과 교류하면서 모든 문명은 자기문명을 긴요히 하고 다른 문명특질들

    과 화합해 제삼의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중국문명에 대한

    위대성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中國文化의 優越性에 대해 새삼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李昇遠, "梁啓超의 新民敎育思想 硏究", 博士學位論文, 高麗大學校, 1995, p.22).

  • - 6 -

    2. 靑年時期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되자 國權回復을 목표로 하여 全國 規模의 새로운 단체

    가 설립되었는데 그 중에 중요한 단체가 新民會(1907~1911)6)였다. 이 단체에서

    國權回復을 위한 新敎育의 필요성을 민중에게 啓蒙하고 각 처에 학교를 設立하고

    자 計劃하고 우선적으로 두 學校를 設立하게 되었다. 그 하나가 平壤의 大成學校

    이고, 다른 하나가 定州의 五山學校였다.

    西隱은 五山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金泰泳은 이 시기 西隱의 학교 생활을 다

    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五山學校는 南岡 李昇薰과 島山 安昌浩의 높은 인격과 民族精神이 살아 움직이는 곳

    이었다. 西隱은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南岡 李昇薰과 島山 安昌浩의 높은 人格과 民族精

    神에 감화되어 일찍부터 民族敎育의 일군이 되겠다는 決意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敎

    師가 되기 위한 出發이 시작되었다. 西隱은 이십세에 五山中學校를 졸업하고 큰 뜻을

    품고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早稻田)大學 高等師範部에 입학하여 英語를 익혔다. 그

    는 英語를 통하여 세계의 문화와 국제정세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거기서 그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롱펠로우의 「에반젤린」, 휘트먼의 「풀잎의 노래」등을 감동있

    게 읽었다.7)

    西隱은 4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1930년 母校인 五山中學校에서 교사로서 영어

    를 가르쳤다. 일제말기로 오면서 영어과목이 없어지게 되어 修身(倫理)敎科를 가

    르쳤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수난생활을 당하면서 약 8년 동안 굳건하게 교사생활

    을 계속하였다. 五山中學校에서의 8년여의 교사생활은 西隱에게 敎育者로서의 成

    熟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 후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한 家庭의 家長임에도 불

    구하고 다시 새로운 勉學의 길을 걸어 日本 東北地方에 있는 東北大學 法學部 哲

    學科에 입학하여 哲學을 전공했다. 여기에서 東西倫理學에 대한 넓고 깊은 涉獵을

    하게 되었다. 희랍哲學, 특히 플라톤, 獨逸哲學, 특히 칸트를 비롯해서 印度哲學,

    基督敎思想, 儒敎哲學 등, 그리고 蘇․獨․산크리스트어 등 言語에 대한 鍊磨에

    더욱 精進하였다. 그는 獨逸 理想主義 哲學을 연구하기 위하여 獨逸語에도 힘썼

    다. 哲學者로서 기본적 條件을 고루 갖춘 셈이다. 이로서 그의 倫理學者․哲學

    者․敎育者로서의 基盤이 定立되었다. 1941년 東北大學을 졸업하고 다시 母校인

    6) 新民會는 1907년에 島山 安昌浩와 南岡 李昇薰 등이 설립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設立目的은 민

    중계몽과 국권회복, 실력양성이었고,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동아원색백과사전, 1982).

    7) 金泰泳, “西隱 金基錫의 生涯와 思想”, 韓國敎育學會敎育哲學硏究會, 敎育哲學 第6號(1968), p.40.

  • - 7 -

    五山中學校에 돌아와 敎師生活과 敎務主任(校監)을 계속하다가 解放을 맞이하였

    다.

    3. 社會活動時期

    西隱은 해방이 되면서 잠시 定州中學校에서 校長으로 재임하였다가 초창기 金

    日成大學 哲學科 主任敎授로 在職한 때가 있었다. 당시 日本帝國大學을 졸업한 人

    才들을 강제로 金日成大學에 發令하여 가르치도록 하였다.8) 西隱은 여러가지로

    思想이 북쪽 政權과 맞지 않아서 越南하여 高麗大, 서울大 등에서 講師를 역임하

    다가 1947년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社會敎育科 敎授로 출발하여 1960년 7월까지

    약 14년간 敎授, 學科長, 學長 등을 역임하였다. 이 時期에 韓國 敎育界의 많은 인

    재들이 그의 영향력 안에서 성장하여 그들이 韓國의 敎育界 및 敎育學界의 重鎭

    내지 中堅人物로서 활약하였다.

    政府 避難時節인 1953년 부산에서 韓國敎育學會가 창립되었는데 西隱은 初代會

    長을 역임하였다. 西隱은 學術院 初期 發起委員과 學術院 終身會員을 겸하면서 주

    로 國民道義敎育에 힘썼다. 그후 그는 學校 뿐 아니라 많은 社會團體에 참여하여

    道義國家의 建設에 盡力하였다.

    8) 西隱 金基錫의 直弟子 金善陽의 口述에 의하여 記錄(2005년 10월 20일).

  • - 8 -

    B. 西隱의 活動

    1. 敎育活動

    西隱의 敎育活動은 크게 五山中學校에서의 敎師時節과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時

    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西隱은 1차 일본 유학을 마치던 1930년 4월부터 母校인

    五山中學校에서 8년 동안 敎師로서 활동하였다. 이 후 다시 2차 일본 유학을 마친

    후에 五山中學校와 定州中學校, 그리고 서울中學校에서 敎師로 在職하다가 서울大

    學校 師範大學 敎授로서 後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西隱의 生涯에 있어서 가장 보람찬 活動을 보인 時期는 1947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학교 師範大學 敎授로서, 學長으로서 지내던 14년 동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敎育者로서, 哲學者로서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學長으로 在職 時에도 敎授로서 변함없이 講義를 쉬

    지 아니하고 가르치기에 전념하였다.

    西隱의 불타는 學問과 學究熱이 학생들에게 傳導되어 崇田大學校 總長을 지낸

    바 있는 高範瑞는 당시 학생으로서 나중에는 조교로서 西隱의 硏究室 한 모퉁이

    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주야로 그의 學問的 薰陶를 받았다. 그리고 硏究室을 자

    주 찾던 학생 중의 하나였으며 學部는 물론 大學院 時節 講義를 受講하였던 西隱

    의 直弟子인 韓基彦은 특히 西隱이 부산 避難時節에 서울師大學長으로서 가장 눈

    부신 活躍을 하던 시기였다며 당시 創刊된 大學新聞에 ‘哲學界의 重鎭 金基錫敎授’

    라는 題目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선생은 哲學하는 敎育者이며 동시에 敎育하는 哲學者이기도 하다. 敎育者가 되려면

    一曰 印象이 좋고 二曰 該博한 知識이 있고 三曰 偉大한 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師

    範大學의 長이 된 뒤부터 선생이 더욱 高調하는 모토이다. 이것은 西隱의 자신의 생활

    이요 思想이요 行動이었다.9)

    좋은 인상은 講義時間에 나타났는데, 微笑가 없는 강의시간이 없었고, 該博한

    지식은 그의 著書에서 나타났는데 西隱과 같이 많은 원고를 쓰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偉大한 꿈은 거리를 거닐 때 꾸었는데, 西隱이 거리에 나올 때 모자

    9) 韓基彦, 敎師의 哲學(서울 : 良書院, 1994), p.322.

  • - 9 -

    를 눈에 안보일 정도로 깊숙이 쓴 품이 잠을 자며 길을 가는 모양 같았다고 회상

    하였다.10)

    대부분 講義의 초점은 民族精神을 自覺시키고 民族的 矜持를 일으키는데 있었

    고 敎育者의 態度와 使命을 고취시키는데 있었다. 西隱은 民族의 矜持를 심어주

    고, 民族의 장래를 낙관하고, 韓國이 장래 世界文化의 中心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東洋이 자기를 現代라고 일컬을 때가 돌아왔다. 功利主義와 唯物論과 自然科學과 産

    業主義 文明으로 대표되는 歐羅巴 精神을 가지고는, 오늘날 구라파와 결별하려고 하는

    現代史의 理性과 그 정열을 마침내 이끌지 못할 것이다. 1880년대 이후의 東洋史는 새

    로운 東洋의 創世記라고 할 수 있다. 苦難의 땅 韓土, 오랫동안의 隱深性을 벗어버리고

    이제 일어나 歷史를 바로 嚮導할 때가 돌아왔다고 宣言하는 것이다.11)

    이러한 생각과 주장은 학생들에게 希望과 矜持와 勇氣를 갖게 하는 契機가 되

    었다. 西隱은 難解한 講義를 풍요로운 諧謔과 機智로 보다 높은 세계로 조용히, 그

    러면서도 힘차게 이끌어 주었던 哲學하는 敎育者였다. 西隱의 豊饒한 諧謔의 한

    예를 들어보면 사람이 눈을 높고 맑게 하는 길은 첫째로 ‘韓國의 맑은 가을하늘을

    보라’, 둘째로 ‘韓國의 들꽃을 보라’, 셋째로 ‘韓國의 아름다운 女性을 보라 그 다음

    은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여 듣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西隱은 同時에 敎

    育하는 哲學者요, 칸트가 哲人政治를 주장했듯이 西隱은 哲人敎育을 理想으로 삼

    은 敎育哲學者이기도 하였다. 西隱은 이러한 敎師로서의 思想과 哲學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敎育은 歷史의 脈搏과 力動속에서 歷史에 不斷히 새로운 方向을 주는 定向

    (orientation)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역사의 미끄러지는 호수물을 타고 썩은 사회의 풍

    조 속에서 출세와 영화에 꾸역꾸역하는 것은 敎育이 아닌 것이며, 세상이 잠들었건만

    외롭게 맑게 남아 검푸른 창공을 향하여 역사의 축을 높이 던져 새로운 歷史의 方向을

    여는 자가 敎育 및 敎育者인 것이다.12)

    西隱은 그의 著書인 「現代精神史」에서 西洋의 쇄락과 새로운 東洋이 맞이할

    現代史를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그 제자들은 모임에서 언제나 西隱 金基錫

    敎授로부터 많은 感銘, 感化를 받았음을 回想한다. 金泰泳에 의하면 西隱의 講義

    를 聽講한 학생들은 그의 명강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東西洋의 該博한 지

    10) 韓基彦, “西隱 金基錫의 生涯와 思想”, 韓國社會科敎育學會, 社會와 敎育, 第 8輯(1984), p.2.

    11) 金基錫, 現代精神史(서울 : 한국학술정보(주), 2005), 서문.

    12) 韓基彦, 前揭書, p.8.

  • - 10 -

    식도 지식이려니와 놀라운 記憶力과 能辯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3․1독립선언서를

    한귀절 빠짐없이 기억하였으며 그 풀이도 聽講生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다. 西隱의

    대부분의 강의의 초점은 民族精神의 自覺과 民族的 矜持를 고취하는데 두었다고

    볼 수 있다.13)

    그리고 西隱이 항상 힘주어 외친 말이 있는데, 그것은 韓國이 태평양 시대의

    主役으로서의 비전이었다. 西隱은 다음과 같이 외치곤 하였다.

    하늘이 太平洋 동녘 기슭에 우리 겨레 韓民族을 4천년동안 고요하게 간직해 온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겨레의 命脈이 끊길락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거니와 이 때마다

    용하게 새로운 형세가 트이고 겨레의 義가, 보존되어 굵지는 못할망정 뚜렷한 한줄기

    줄을 그어 오늘에 이른 것이니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오래 동안 우리겨레를 보호한 函

    畜한 뜻에 돌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역사의 英勇스러운 시대인 새로운 太平洋時

    代가 우리 앞에 왔고 또 오고 있다.14)

    西隱은 韓國이 歷史的으로 人種의 特性上, 또한 國土環境의 地理的 與件과 苦

    難의 연단을 통하여 태평양 시대의 主役이 될 수 있는 民族으로 형성되어 왔음을

    주장하였다.

    韓基彦은 民族의 고난의 시기인 6.25 피난 시절의 西隱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피난시절 학생들의 부담이 좀 과하긴 했지만 假校舍라 하더라도 硏究室 寄宿舍, 圖書

    室, 實驗室, 그리고 敎授陣, 학생과외활동의 指導 등이 타대학에 비해 先驅的이었다. 배

    우고 가르침에 있어서 西隱같이 부지런한 이가 없었다. 西隱의 該博한 知識을 보면 敎

    育, 哲學, 心理, 심지어는 英語, 獨語 등 語學까지도 時間을 맡고 부산 송도에 있던 中央

    大學校까지 나가 타 講義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6․25 전란 중에 어려웠던 학생들을

    위해 날마다 아침에 일찌기 나와서 걸레로 학생들의 책상을 닦아 주었다. 학장이면서도

    많은 강의를 맡았고 또 아침에 일찍이 YMCA에서, 또한 후에는 師大假校舍 敎室에서

    獨逸語特講을 하기도 하였고, 여학생을 위하여 기숙사와 도서실, 실험실 등을 마련하여

    학문연구에 중단없기를 기하였다.15)

    西隱의 敎育活動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동방아카데미(Oriental Academy)

    에도 잘 나타난다. 동방아카데미(Oriental Academy)는 西隱이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시절에 평소에 플라톤을 흠모하여 개설한 대학원 수준의 特別敎育活動을 위

    13) 金泰泳, 前揭書, p.41.

    14) 金基錫, 새로운 倫理(高等學校用)(서울 : 修文閣, 1954, 序文.

    15) 韓基彦, 前揭書, p.3.

  • - 11 -

    해 설립한 것이다. 동방아카데미는 1961년경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64년에 개설

    되었는데, 각대학의 俊才들을 모아 특강을 실시하였다. 대부분 西隱이 직접 강의

    를 하였고 때로는 명사들을 초청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는 韓景職목사와 李靑潭

    스님도 있었다. 동방아카데미에는 民族獨立志士室을 비롯하여 南岡室, 島山室, 페

    스탈로찌室과 같이 방마다 고유한 이름을 붙여지고 그들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었

    다. 그리고 西隱이 가지고 있던 서적들을 각 방에 맞게 分類 備置하여 많은 학생

    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西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여든 대학

    원생급 이상의 俊才들이 밤늦게까지 講義와 討論에 몰두하였다.16)

    이상에서 살펴본 西隱의 敎育活動에서 나타난 特徵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

    다.

    첫째, 西隱은 敎師로서의 模範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西隱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의 기록을 볼 때 그는 敎師로서의 밝은 인상과 微笑, 불타는 學究熱과 該博

    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명강의로 빼어난 지식을 학생들에게 傳達하는 能力을 가

    진 敎師였다. 그의 풍요로운 諧謔과 機智로 강의를 즐겁게 이끌어 나갔으며 어려

    운 학문을 즐겁게 공부해 나가도록 動機를 심어주었다. 이는 지식을 傳達하고 動

    機를 誘發하여 공부하도록 돕는 학습자로서의 敎師로서 훌륭한 資質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西隱은 民族의 苦難의 時期에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교사였다. 西隱의 대

    부분의 강의의 내용은 학생들에게 지식과 함께 韓民族의 矜持와 希望과 勇氣를

    심으며, 미래의 主役이 될 이들이 장차 太平洋 時代에 주역으로 성장하게 될 비전

    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世界觀을 넓혀주고 韓國人의 矜持를 가질 뿐 아니라 나

    아가 世界의 歷史 속에서 자신의 位置를 肯定的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로운 價

    値觀을 심어주는 데 전력하였다. 이는 韓國이 解放이후 敎育의 目的이 오직 一流

    大學에 入學하여 立身揚名하는 것이 되어버림으로 서양의 功利主義의 영향으로

    功利主義적 人間像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西隱은 단순한 지식을 넘

    어서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歷史的 位置를 自覺하고 스스로 時代的인 使命感을 가

    지고 奉事하도록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6) 韓基彦, 敎師의 哲學(서울 : 良書院 1994), p.334.

  • - 12 -

    셋째, 그의 人格的인 弟子 사랑의 敎育이다. 西隱은 자주 그의 제자들과 대화하

    며 가까이서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연구실에 드나들면서

    그의 인격과 삶에 직접 영향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각계각층에서 중요한 인물들

    로 성장했으며 韓國 敎育界의 중진들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동방아카데

    미는 西隱의 인재양성의 꿈을 실현해 나가고자 했던 그의 敎育熱이 맺은 結實이

    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비인격적인 敎育의 후유증이 심각하여지고 있는데 西隱

    의 제자와 함께하는 敎育方法이 오늘날 敎育方法에 도입할 수 있는 理想的인 方

    法으로 보여진다.

    2. 著述活動

    西隱의 著述活動을 단행본과 간행물, 그리고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행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哲學槪論」이다. 「哲學槪論」의 내용을 보면 哲學 및 哲學史, 形而上

    學, 認識論, 辨證法, 世界觀, 實踐哲學, 美學, 宗敎哲學, 歷史와 哲學 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普遍性을 띄어서 一般人들도 哲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면 누구나 入門할 수 있도록 構成된 것이 그 特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現代精神史」이다. 現代精神史는 1956년 西隱의 50대 초반에 펴낸 대표

    적인 著作으로 著者의 精神世界와 敎育思想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現代精神과

    倫理意識에 관한 내용을 방대한 지식과 경륜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이 책의 序文

    에서 東洋이 자기를 現代라고 일컬을 때가 돌아왔다고 하면서 구시대의 유물인

    侵略主義, 强權主義로부터 자기를 解放시키는 現代精神의 호흡과 장한 脈搏이 다

    름아닌 現代精神史라고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現代精神의 特徵, 現代의 思想史

    的 狀況, 1919年의 理念, 韓國戰爭의 歷史的 性格, 東洋 復興의 論理, 칸트의 倫理

    思想, 新世代의 道德, 觀念辨證法과 唯物辨證法에 관하여 그의 해박한 지식을 바

    탕으로 先見者的인 眼目과 비전을 가지고 現代精神史를 조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韓國의 三一運動과 韓國戰爭의 歷史的 性格을 歷史的 義를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現代精神史 중 ‘新世代의 道德’에는 그의 仁義思想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

    가 주장하는 새 時代의 倫理思想을 읽을 수 있다.

  • - 13 -

    셋째, 「倫理全書Ⅰ」이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한 倫理德目의 나열이 아니라

    학생이나 국민들의 입장에서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편집한 倫理百科事典的

    인 책이다. 백낙준이 西隱과 협력하여 道義敎育의 건설을 기획하여 밀어주고 西隱

    은 이를 위해 활동하였다. 西隱이 앞서서 활동한 國民倫理運動은 6․25 戰亂 勃發

    이전에 이미 「倫理全書Ⅰ」라는 책자로 나왔고, 그 구성을 보면, 韓國革命과 道

    德, 제 1장 내고장, 제 2장 가정, 제 3장 학원, 제 4장 사회, 제 5장 직장, 제 6장

    간부, 제 7장 국토의 보위, 제 8장 당 및 단체, 제 9장 집회와 공중, 제 10장 교양,

    그리고 後記로 되어 있다. 西隱의 倫理敎育의 基本的 態度는 일찍이 새로운 倫理

    4권으로 된 중․고교용 교과서인 「倫理」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아

    이디어만 제시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교과서를 통하여 제시하였던 것이다. 과

    거의 倫理運動은 德目運動인데 반해, 西隱은 직접 일상생활과 연결되어 전개되기

    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넷째, 「南岡 李昇薰」이다. 西隱은 南岡 李昇薰을 일생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南岡 李昇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조명함으로 민족 지도자이자 敎

    育者인 南岡의 삶을 펴내어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다. 西隱은 南岡 李昇薰의 年代

    表까지 뒷장에 달아놓아 그의 一代記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다.

    다섯째, 「倫理綱領」이다. 倫理綱領은 1958년 4월에 栗谷의 「擊蒙要訣」, 茶

    山의 「牧民心書」를 본받아 모든 사람들의 질박강건한 기풍을 일으키는데 도움

    이 될 수 있는 실천조항을 모아 倫理運動의 지침으로 발간하였다. 全 9章으로 된

    이 책은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항들을 소상하게 조목조목 나열

    한 實踐指針書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獨立宣言書解義」이다. 西隱은 1919년의 三一獨立宣言의 정신을 올바

    로 일깨우기에 盡力했고, 그 宣言文의 올바른 解釋에 힘썼으며, 그 宣言의 참다운

    정신을 후대에 올바로 전수하기 위해서 그 宣言文을 現代語로 고쳐 써서 出版을

    했고, 다시 이를 음반에 녹음을 해서 자신의 肉聲으로 오늘에 전하여, 우리들의 지

    성적 인식을 再整頓시키고 감성적 감격을 새롭게 하며 의지적 실천을 굳세게 하

    고 나아가서 민족의 얼이 玲瓏하게 빛나도록 하는데 힘썼다.

    17) 金基錫, 倫理Ⅰ,Ⅱ,Ⅲ,Ⅳ,Ⅴ,Ⅵ(서울 : 敎友社, 1955).

  • - 14 -

    일곱째, 淸鄕記와 續淸鄕記는 載東文化社에서 내기로 조판, 지형까지 뜬 「西窓

    記」의 改題였는데 그 후에 이 原稿가 소실되었다.

    여덟째, 金基錫, 梁元達, 崔應祥 共著의 「十三月」이 있다.

    刊行物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理性」이다. 西隱은 순수한 敎育과 倫理에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

    「理性」이라는 개인잡지를 1956년부터 1966년까지 11년 동안 自費로 發刊하였다.

    발간취지는 a. 독립협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노선과 개화주의를 견지한다. b.

    어려운 학술논문을 싣지 않는다. c. 인생관과 역사관에 관한 중정한 견해를 전파

    한다. d. 맑은 사색과 부드러운 표현을 존중한다는 네가지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

    이 기본적인 편집방향을 내세웠다. 첫째, 겨레의 思想史的 狀況에 비추어 歷史觀

    및 人生觀, 倫理觀, 宗敎觀에 관한 論文을 중요하게 다룬다. 둘째, 東西의 經書古典

    에서 讀章을 발취하여 마음의 영원한 양식으로 삼도록 한다. 셋째, 平明하고 부드

    러운 표현을 존중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만인에게 領納될 수 있도록 힘쓴다는 것

    이다.18)

    그는 「理性」의 後記에서 이 책자가 겨레를 근심하는 人士들에게 알려지고 良

    識있는 젊은이들 손에 다투어 들리어지게 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徐載弼 博士가

    主宰하던 獨立新聞과 같이 글자가 안보일 때까지 여러 사람들 손에 옮겨가면서

    읽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理性」誌는 색다른 學說이나 敎理를 讀者에게 强要

    하지 않거니와 휘몰아치는 濁流에 향하여 祖國과 歷史를 防衛하는 제 3전선이 되

    기를 바랐으며 이 조그만 책자로 인하여 靑年倫理運動이 우리사이에 장하게 일어

    나는 기연이 된다면 나라를 위하여 이 이상 다행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둘째, 「自由」이다. 西隱은 月刊誌 「自由」를 創刊하여 1968년 5월 4일 등록

    하고 編輯, 發行하였다.

    셋째, 「敎育」이다.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在任時節에 「敎育」誌를 發刊하였

    다.

    18) 「理性」第四輯, “理性刊行의 辭”(1957年 4月).

  • - 15 -

    論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西隱은 建國大學校 學術誌인 建國學術硏究院(1964)에 “民族性의 形成에 關하

    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내용은 歷史와 民族性, 民族性과 人種, 民

    族性과 國土, 民族性과 政治로 구성되어 있다. 西隱은 이 論文에서 歷史의 産物인

    民族에 대하여 韓民族이 形成되기 까지의 과정을 歷史興亡의 論理를 根據로 하여,

    人種學的으로, 地理的 環境을 통해서, 政治史的으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韓民

    族의 형성과정의 연구를 통해서 西歐羅巴 이후의 東洋의 世紀를 감당할 主役으로

    서의 韓民族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觀望하였다.

    그 외에 共産主義에 관한 평론과 共産主義 批判論文이 있다.

    그리고 4.19 직후 연합신문, 수복이후 조선일보에 투고한 1,2편 論文이 있고,

    1947년 「自由」와「新思潮」에, 1947년 「世代」또는 「政治硏究」에도 論文이

    수록되었다.

    西隱은 ‘倫理運動의 提唱’이라는 글을 日刊紙에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지난 백

    년간의 우리 민족의 倫理的 반성과 아울러 새로운 대책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를 行政, 藝術, 敎育 등 다방면에 걸쳐 논급하고 있다. 또 「敎育評論誌(1960)」에

    ‘學園倫理運動의 提唱’이라는 主論을 게재하였고, 韓國敎總에서 發刊한 새한신문19)

    의 主筆로서 글을 자주 썼는데 글 가운데서 ‘새로운’이란 말을 많이 썼다. 西隱이

    자주 쓰던 단어는 ‘새로운 東洋’, ‘새로운 歷史’ ‘새로운 民族’, ‘새로운 義’, ‘새로운

    太平洋時代’ 등이다. 여기에서 西隱이 우리 民族에 대한 豫見的 智慧를 지니고 있

    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 金基錫은 「새한신문」의 題字를 짓고 初代主筆로서 많은 글을 썼다.

  • - 16 -

    Ⅲ. 西隱의 敎育思想

    A. 西隱의 敎育思想의 形成背景

    西隱의 敎育思想 形成에 影響을 미친 要因은 크게 五山中學校에서의 南岡의 영

    향과 東西洋의 哲學思想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 五山學校에서의 南岡의 影響

    西隱이 南岡으로부터 받은 影響을 살펴보면 두가지로 보인다. 그 하나가 南岡

    의 新民族主義요, 다른 하나는 南岡의 基督敎 信仰이라고 볼 수 있다. 西隱은 五

    山中學校에서 少年期를 보냈다. 五山中學校는 南岡 李昇薰의 높은 人格과 民族精

    神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西隱이 재학했던 五山中學校 初創期(1907~1926)의 분위

    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五山學校의 특징은 선생과 학생이 하나의 同志意識에 이끌리어 있는 데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높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立身出世를 목적으로 하여 모인

    것이 아니고 높은 뜻이 있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모인 것

    이었다. 그들은 初創期에 南岡을 받들어 五山學校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五山學校를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근원지로 이룩하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20)

    五山의 校訓은 사랑(愛), 정성(誠), 존경(敬)으로 南岡의 뜻이 지금도 면면히 이

    어져 가고 있다.21)

    西隱은 南岡의 直弟子로 南岡의 각별한 기대와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4년 西隱은 그의 스승인 南岡 李昇薰을 추모하여 「南岡 李昇

    薰」을 저술하였으며 南岡 추모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만큼 南岡 李昇薰을 흠모

    하는 情이 지극하였다.

    南岡은 1910년 9월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講明義塾과 五山中學校를 세웠다. 南岡은 五山中學校를 세우

    던 당시부터 기독교 복음을 五山中學校에 전파하였다. 선비들이 모여 經書를 읽

    20) 五山七十年史編纂委員會 偏, 五山八十年史(1987), pp.122~123.

    21) 金善陽, 南岡 李昇薰의 敎育思想(南岡文化財團出版部, 2005).

  • - 17 -

    던 경의재 자리에 찬송과 기도소리가 울려나갔으며 五山의 학생들은 자연히 基督

    敎 信仰에 접하게 되었다. 五山中學校의 뒷산과 언덕길에서는 주를 찬양하는 소

    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柳永模의 역할이 컸다. 五

    山中學校는 작은 교회를 겸하여 그들의 모임은 경건한 신앙으로 불타오르게 되었

    다. 당시 세워진 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개화주의과 함께 민중들 사이에 뻗

    어나가고 있었다. 南岡은 예배를 드릴 아담한 예배당을 짓고 이곳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마음에 쉼을 얻고 이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이 예

    배당은 五山學生들의 영혼의 보금자리였다.

    五山에는 敎育의 불길과 함께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으며 이 두가지 불길은 南

    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하는 동안에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이 승화하여 그의 마음에 높은 곳으로부터 불길이 임하여 五山學校

    학생들에게 이르게 되었다. 그 불길이 올라간 자리에서 보면 南岡 자신의 가슴이

    높은 곳으로부터 이것을 받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 높은 곳이 敎育의 경우는

    민족이고 신앙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성령이었다.

    1915년 南岡은 감옥에서 나온 후 정기정 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위해 일

    하기 위해서는 敎理와 聖書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그 해 봄, 그의 나이 52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聖書를 공부하면서 그는 기독교가 가난한 자의

    종교인데 마음이 끌렸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이 우리 겨레의 당한 고난을

    방불케 한다고 생각되었다. 저기에도 왕조와 분쟁이 있었고 여기에도 왕조의 분쟁이

    있었다. 저기에도 바빌로니아 포수가 있었고 여기에도 바빌로니아 포수가 있었다. 저기

    도 귀족과 부자들의 전횡이 있었고 여기도 귀족과 부자들의 전횡이 있었다. 그런데 저

    기에 있는 것 한 가지가 여기에 없었다. 저기에는 왕조와 백성들의 불의를 날카롭게

    고발한 예언자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없었다.22)

    南岡은 이 예언자의 음성을 살피고 그들의 역할이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을 알고

    자 구약시간에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자세히 들었다. 南岡의 신학교 시절의 별명은

    ‘감사선생’이었는데 이는 그가 무슨 일이 있든지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항상 ‘감사

    합니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南岡의 삶이 민족의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면서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고 그의 제자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찾을 수 있다. 西隱은 南岡의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

    고 있다.

    22) 金基錫, 南岡 李昇薰(서울 : 한국학술정보 2005), p.338.

  • - 18 -

    南岡은 신학교에 있으면서 舊約聖書를 통해 義를 배웠다. 기독교는 義의 종교, 여호와

    는 義의 신이라는 생각이 났다. 南岡에게는 여호와의 세계의 창조와 지배와 심판이 모

    두 그의 義에 이끌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심도 義, 만물을 만드심도

    義, 나중으로 사람을 만들어 만물 위에 두심도 義, 아담과 해와를 동산에서 쫓아내심도

    義, 노아홍수도 義,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義, 바로왕 때 내린 재앙도 義,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심도 義, 예언자를 보내심도 義, 나중에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러

    오심도 義로서, 만물은 이 여호와의 義에서 좇아왔고 義로 말미암고 義 속에 있다가

    義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南岡은 다시 생각하였다. 모세의 율법이 義였다. 예언자의 행

    함과 가르침이 義였다. 거짓은 義가 못된다. 도적질은 義가 못된다. 간음은 義가 못된

    다. 이웃을 괴롭힘은 義가 못된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 잘 살려는 것은 義가 못된다.

    義속에서 살리라, 義속에서 살리라.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듣

    고 토론하고 방에 돌아와 성서를 읽고 기도를 올리고 하였다.23)

    西隱은 그가 著述한 「南岡 李昇薰」에서 그가 받아들인 聖書의 義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南岡이 聖書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은 舊約聖書에서 창

    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였고, 新約聖書로는 복음서를 비롯

    하여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였다. 南岡의 神學校 時節에 舊

    約聖書를 통해 받아들인 이 ‘義의 思想’이 후일에 그의 弟子인 西隱의 義의 敎育思

    想으로 그 맥을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2. 西隱에게 影響을 미친 思想家들

    五山中學校에서의 조용한 敎鞭生活과 日本의 센다이(仙台)에서 3년 동안의 西

    隱은 주로 哲學과 宗敎書籍을 읽었다. 플라톤,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칸트,

    킬케골, 럿셀, 論語, 聖書, 莊子, 栗谷, 法句經, 佛陀行讚, 般若心經, 華嚴經十地品,

    孟子, 中庸, 東洋哲學史, 印度哲學史 등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책들이 자신을 움직

    인 티끌이 아니고 자신 위에 내린 다시 없는 恩寵이라고 여겼다. 위의 讀書記에서

    볼 때 그의 思想的 형성과정에 東西洋의 思想家들의 영향을 고루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책을 읽었다고 하여 그 책의 글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들을 통해 지난 역사를 꿰뚫어 보고 先進들의 思想을 오늘에 적용하여 새로운 思

    想으로 빚어가는 지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西隱의 이러한 지식과 높은

    知性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著書 「現代精神史」에 잘 나타나 있다. 수많은

    書籍들 안에 숨겨져 있는 깊은 哲學과 先賢의 교훈들이 西隱이라는 옥토에 단비

    23) 上揭書, p.339.

  • - 19 -

    로 내려서 새롭게 싹이 나고 자라서 오늘날에 새로운 풍성함으로 살아나게 하였

    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西隱의 敎育思想은 南岡의 新民族主義와 基督敎 信仰, 그리고

    東西洋의 哲學과 宗敎와 思想의 讀書 背景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西隱이

    東方의 哲人이요, 東西哲學을 圓融會通하고 英才敎育을 통하여 이 나라에 새로운

    倫理를 確立하고 韓國이 東方의 등불나라가 되게 해보려고 몸부림친 것은 플라톤

    과 페스탈로찌의 꿈과 情熱 그리고 칸트의 理性이 栗谷과 南岡의 理想과 信仰이

    함께 灼熱하여 後學들을 가르쳐 이 나라의 수많은 일군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이런 깊은 세계에서 길어올린 사색생활을 그가 발간한 잡지 「理性」과 여러 저

    서를 통해 東西文化의 韓國化를 이루어 나갔음을 볼 수 있다.

  • - 20 -

    B. 西隱의 敎育思想의 構造

    西隱의 敎育思想의 흐름은 自我의 確固한 確立의 基礎 위에서 民族敎育의 발전

    을 도모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개개인의 尊嚴性을 강조하였으며 健康하고 올바

    른 自我가 確立될 때 비로소 國家의 基礎가 바로 놓인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저

    서 「倫理綱領」에서 西隱은 한사람 한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어떤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해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西隱의 이런 思想은 新民會가 國民

    倫理運動으로 主唱한 것으로, 韓基彦에 의하면 이를 新民主義思想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思想이 西隱에 의하여 敎育思想으로 確立되었다. 그리하여 개인개인이 바

    로 서는 自我의 確立이 곧 이 社會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 하였다.

    1. 自我의 確立

    西隱은 개인의 道德律을 그의 日常性의 모습에서 찾고 있다. 日帝의 統治로 부

    터의 解放은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希望과 感激을 주었다. 우리민족이 解放의 希望

    과 感激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하면 민족의 生活과 氣風에서도 위대한 維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못했다. 西隱은 「倫理全書Ⅰ」에서 당시의 狀況

    과 個人倫理의 바로 세움의 절실함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우리들은 우리 民族의 倫理를 세우는데 있어서 실패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 國民의

    상하를 휩쓰는 저 썩은 풍조는 그 淵源하는 바 자못 오래고 깊은 것으로서 성난 물결처

    럼 우리 국토를 삼키려고 하여 都城과 農村에 퍼지고 학원과 가정에 몰려들어 民族的

    生命의 根源을 결단내려는 형세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정치도 시급하고, 경제

    도 시급하고, 문화도 시급하고, 국방도 시급하고, 敎育도 시급하고, 어느 하나 시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이 겨레의 새로운 氣風을 일으키는 일이요 여

    기에 의하여 민족의 새로운 道德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

    일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 만들어진 자라는 말이 있거니와 우리들은 心情과

    生活에 있어서 전연 거듭나는 자가 되지 않아서는 안된다.24)

    西隱은 國民 한사람, 한사람의 삶에 대한 具體的인 指針을 만들어 配布하였다.

    그의 「倫理綱領」에 보면 個人이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어떻게 生活하여야 하

    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내고장; 퇴폐적인 유행가요, 사치, 음란, 도박, 방탕, 그 밖에 경박한 기풍이 내고장에

    24) 金基錫, 倫理全書Ⅰ(서울 : 新映社, 1960), pp.65~66.

  • - 21 -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가정; 얼굴, 말, 태도 같은데 자기의 감정을 가볍게 나타내

    서는 못쓰고, 조그만 일로 성을 내거나 또 그것을 사람이나 물건에 옮기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다. 學園; 교실의 출입, 복도 계단의 통행 같은 것을 조용하게 해야 한다. 校

    舍, 敎具, 備品, 施設은 언제나 아끼고 정침히 다루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디 있거나 언제나 바른 자세로 앉고 서고 또 걷고 해야 한다. 뒷짐, 호주머니에 손넣

    기, 몸기대기 같은 습관을 고쳐야 한다. 집회와 공중; 경기회나 웅변회 같은 데서 지나

    치게 자기 편을 편들거나 부러 저편을 비웃고 놀리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公共의 장소,

    시설, 集會에 대하여는 언제나 公衆道德을 잊지 말아야 한다....25)

    이상에서 볼 때 西隱은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작은 하나하나의 生活의 의로

    운 變化를 통하여 健康한 自我가 確立되기를 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理想에 치우친 運動家가 아니요, 實生活에서 百姓들을 端正하고 品位있

    고 敎養과 禮節을 갖춘 民族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2. 民族 敎育의 確立

    西隱은 少年時節 五山中學校에서 民族精神을 배웠다. 五山中學校에서 가르친

    民族敎育은 단순한 民族感情이 아니었다. 愛國心이라 하여 흥분하거나 단순한 感

    傷에 떨어지는 것을 깊이 警戒하였다. 西隱은 五山中學校에서 배운 民族精神을 다

    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오산에서 가르친 民族精神은 民族의 榮光을 바라보는 民族精神, 내 自身의 德과 智慧

    와 힘을 길러 나라에 奉仕하자는 民族精神이었다. 道德과 信仰에 연결된 歷史의 음성이

    었다.26)

    西隱은 民族精神을 겨레와 개인이 生命으로 結託되어 있어 끊을 수 없는 관계

    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民族敎育은 이러한 認識에서 出發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그는 우리 하나하나가 겨레라는 커다란 목숨 속에서 나고 죽는다는 사

    실을 自覺시키면서 그 위에 民族敎育의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겨레란 우리들의

    조그만 목숨이 흘러나오는 根源이며 거기에서 내어뻗는 줄기라고 하였다. 西隱에

    게 있어서 국민이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실상 자기 자신의 根源

    을 북돋우는 일로서 生命의 마땅한 道理요, 自然인 것이라고 했다. 西隱이 心醉했

    던 양계초는 國家를 “사적인 사랑(私愛)의 중심이며 박애의 극치이다”27)라고 하

    25) 金基錫, 倫理綱領(서울 : 錦文社, 1962), pp.6~43.

    26) 金基錫, 南岡 李昇薰(서울 : 한국학술정보, 2005), p.145.

    27) 이혜경. 천하관과 근대화론;양계초를 중심으로(서울: 문학과지성사, 2002), p.217.

  • - 22 -

    였다. 西隱은 먼저 우리가 겨레로서의 自己自身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겨레로

    서의 우리 겨레의 資質과 性品과 力量을 알아야 하고 韓民族이란 어떤 民族인가

    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西隱은 ‘民族性의 形成에 關하여’ 란 글에서 韓民族의 形成 背景과 人種的 特

    性, 資質을 깊이 硏究하였고 여기에서 韓民族의 敎育的 方向을 다음과 같이 제시

    하고 있다.

    民族의 構造는 자연적인 기반과 그 위에 작용하는 상부건축에 갈린다. 민족의 밑바닥

    을 이루는 자연적인 基盤이 人種과 風土일 것이고, 그 上層建築이 政治와 言語와 宗敎

    와 敎育일 것이다.28)

    西隱은 이 글에서 ‘民族性의 形成’의 요소중에 상층부인 네요소의 중요함을 지

    적하고 그 가운데서 敎育과 宗敎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宗敎는 民族性을 밝히

    는 祭壇이고, 敎育은 民族性을 고치는 기관이라고 했다. 敎育이 주로 기술의 전달

    에 몰두하고 있지만 敎育 본래의 使命은 人間性의 올바른 形成으로서 人間의 知

    性과 心情과 制作을 높이고 이렇게 하여 역사를 轉回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西隱

    은 한민족 전체가 하나의 學舍가 되어 배우고 익힘으로 그릇된 풍조를 쇄신하고

    올바른 人間性을 키워 德性을 북돋우고, 歷史를 일으킬 비전 가운데 民族敎育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貢獻을 하였다.

    그리고 西隱은 우리겨레의 人種的 要素의 特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첫째는 오랜 한 줄기에서 흘러내린 것이고 처음부터 異質的인 여러 갈래가 混居한 것

    이 아니다. 둘째는 이것이 단조로운 한 갈래로 한 地域안에 담겨 있은 것이 아니고, 大

    陸과 海洋을 연결하는 滿洲와 韓半島에 흘러 퍼진 것이다. 셋째는 오랜 역사를 경과하

    는 동안 거의 딴 人種的 要素인양 자기를 새롭게 形成한 것이다. 넷째는 北方的 大陸

    的 氣質을 가진 部族이 韓半島에 들어옴으로 하여 南方的 海洋的 氣質을 받아 質朴한

    要素와 纖細한 要素를 아울러 갖추게 된 것이다.29)

    韓民族의 民族性의 形成이 한 줄기이면서 오랫동안 여러 갈래로 나뉘어 연단되

    고 南北方의 肯定的인 要素들이 調和를 이루어 형성된 民族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西隱의 民族敎育은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外的인 主權回復 뿐

    28) 金基錫, “民族性의 形成에 關하여”, 建國學術硏究院, 學術志(人文社會科學編), 第5輯

    (1964), pp.121~179.

    29) 上揭書, p.149.

  • - 23 -

    아니라 더욱 民族性의 回復에 최우선적으로 중점을 두고 있다. 그의 民族敎育도

    이러한 관점에서 주장되었고 모든 敎育의 초점도 이에 맞추어 나가고 있다. 그의

    광범위한 民族性 形成의 硏究는 우리민족이 다음세대의 主體로서 이상적인 외적

    내적 연단을 받아왔음과 고난조차도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민족

    이 겪어온 苦難에 대해서 그 뜻을 깊이 살펴 보인 咸錫憲은 "이 民族이 하나님 앞

    에 가지고 갈 유일한 선물이 가난과 고난 뿐인데 이에 대하여 聖經이 가르친 眞理

    를 붙들었다. 곧 그것은 우리 民族이 겪은 苦難이야말로 韓國이 쓰는 가시면류관

    이라고 가르쳐 주었고, 그것은 세계의 歷史를 뒤집고 그 뒷면을 나타내 보이는데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고난이라고 한다면 韓國은 학대받는 계집종이 아닌 면

    류관의 여왕임을 알게 되었다."30)고 하였다. 西隱이 바라본 韓國人의 苦難의 意味

    는 苦難을 통한 미래의 歷史를 일으켜 세울 主役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咸錫憲과

    동일한 歷史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新民主義 思想

    西隱은 南岡 李昇薰과 島山 安昌浩, 그리고 梁啓超의 新民敎育思想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西隱은 그의 著書 「南岡 李昇薰」의 序文에서 南岡의 新

    民主義를 南岡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을 겸허하고 맑은 庶民精神이라고 보면서 다

    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南岡을 페스탈로치에 비기는 분이 있거니와 南岡은 페스탈로치의 일면도 있고 마치

    니의 일면도 있고 오우엔의 일면도 있고 엘리야의 일면도 있다. 南岡을 우리역사에 나

    타난 이에 비기면 栗谷의 일면도 있고 忠武公의 일면도 있고 어떻게 보면 崔瑩의 일면

    도 있고 洪景來의 일면과 崔水雲의 일면도 있다. 그러나 南岡은 역시 19世紀의 新文明

    과 侵略主義 아래 눌리어 있는 韓半島의 民族運動者 開化主義者였다. 같은 時代의 사람

    으로는 南岡은 徐裁弼·데발레라·간디·孫文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이 한결

    같이 被壓迫 民族의 解放에 이끌린 데 반하여 南岡은 侵略主義·强權主義 아래 눌리어

    있는 백성을 이끌어내는 것 뿐 아니라 저들 한사람 한사람을 덕스럽고 밝고 힘있는 백

    성으로 만들려는 데 그의 남다른 歷史的 地位가 있었다. 南岡은 자기를 民族主義者라고

    부른 일이 더러 있었거니와 南岡의 民族主義는 예사로운 民族主義가 아니고 民族의 質

    과 型을 높이는 主義로서 그가 島山과 함께 세운 新民會의 이름에 따라 이것을 新民主

    義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31)

    30) 咸錫憲, 뜻으로본 韓國歷史(서울, 第一出版社,1965), p.78. 31) 金基錫, 南岡 李昇薰(서울 : 現代思想叢書出版社, 1964), 서문, ⅱ-ⅲ.

  • - 24 -

    南岡은 우리민족의 病이 制度, 指導者, 政府 政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밑바닥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덕스럽고 밝고 힘

    있는 사람이 되기 전에 참된 영광이 올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南岡은 民

    族의 光復만을 바란 것이 아니고 民族性의 光復을 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西隱

    의 南岡觀이 그의 思想的 基礎가 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西隱에게 영향을 미친 島山의 삶을 보면, 島山의 敎育思想도 각 개인의 自我修

    養과 愛國同志의 굳은 단결로 敎育과 산업진흥에 전략을 다하는 것이었다. 島山

    은 당시 생각하기를 힘은 없고 이름만 있는 獨立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島山은

    후에 獨立運動을 하면서 힘이 獨立의 基礎요 生命이라고 했고, 이 힘이란 우리들

    중에 德과 知識, 그리고 愛國心 있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일이라고 演說을 하곤

    했다. 島山이 주로 演說한 내용의 主題는 다음과 같다.

    지금 세계가 민족 경쟁시대라 독립한 국가가 없고는 민족이 서지 못하고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이 있지 못한다는 것과 큰 힘을 내는 길은 국민 각 개인이 각자 분발수양

    하여 도덕적으로 거짓없고 참된 인격이 되고 지식적으로 기술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러한 개인들이 국가 천년의 대계를 위하여 견고한 단결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32)

    島山의 思想과 信念은 당시의 思想界에 방향을 주고 길을 주었으니 곧 각 개인

    의 自我修養과 愛國同志의 굳은 단결로 敎育과 産業振興에 戰略을 다하는 것이었

    다. 그는 1909년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實務, 力行, 忠誠, 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

    격을 수양하고 德, 體, 知의 三育를 통화여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기하였다. 이

    운동은 五山中學校를 포함하여 全國의 中學校로 퍼져 나갔다.

    또한 西隱의 思想에 영향을 미친 梁啓超의 新民敎育思想을 보면 다음과 같다.

    敎育理想型으로 ‘新民’이란 크게 보아 다음 여섯가지로 분석하였다. 첫째, 舊思想에

    얽매이지 않고 自律的으로 판단할 수 있는 思想 自由人 둘째, 中, 西 學問에 兼通한 知

    識人 셋째, 市民意識을 具備한 公德人 넷째, 學問과 勞動을 즐기며 美的 感覺을 지닌

    예술적 人格者 다섯째, 부단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改革人 여섯째, 心力이 강한

    歷史的 人格者 등으로 나누었다.33)

    이러한 梁啓超의 新民의 개념이 西隱의 新民主義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

    다.

    32) 興士團, 島山 安昌浩(서울: 興士團出版部, 1947), p.26.

    33) 李昇遠, “梁啓超의 新民敎育思想”,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5), p.55.

  • - 25 -

    이상에서 볼 때 西隱은 南岡과 島山의 敎訓, 그리고 梁啓超의 思想을 이어받

    아 韓國民族의 새백성으로 거듭남을 위해 道義敎育哲學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

    였다. 西隱은 南岡의 新民主義는 예사로운 民族主義가 아니고 民族의 質과 型을

    높이는 主義로 그가 島山과 함께 세운 新民會의 이름을 따라 新民主義라고 불렀

    다. 新民主義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강대국의 침략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인

    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民族性의 定立이라고 여긴 島山과 南岡의

    精神으로 동일한 精神을 가진 西隱에게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個人과 社會

    人間은 社會的 存在로서 사회를 떠나서 잠시도 존재할 수 없다. 이 社會의 기

    본관계는 개인의 개인에 대한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社會에 대한 관계이

    다. 社會生活이란 이 두가지 기본관계의 표현 또는 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생활에 있어서의 基本原理는 民主主義라고 할 수 있다. 民主主義는 社會生活의 基

    本體制요, 이를 이끌어가는 原理이다. 社會는 個人에 대하여, 全體로서의 뜻을 가

    지고, 個人은 社會속에서 서로 얽매여 全體를 드러내야 하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

    계를 西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社會를 떠난 개인도 없거니와 개인을 떠난 사회도 있을 수 없다. 개인은 사회 속에

    서 개인을 만나고 또 서로 더불어 사회에 돌아옴으로 해서 뿐 개인이 될 수 있다. 사회

    에 있어서의 개인의 개인에 대한 도리, 개인의 전체에 대한 도리를 규정 또 표현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34)

    西隱은 個個人의 自我가 健康할 때 그 社會가 굳게 선다고 믿고, 自我의 確立

    을 위하여 倫理綱領을 만들었다. 그는 敎育哲學者요 敎育者이면서 동시에 國民倫

    理運動의 先覺者였다. 그의 倫理運動은 個人에서 시작하여 社會로 퍼져나가는 것

    이었다. 썪고 냄새나는 社會를 맑게 정화시키기 위해 그는 먼저 個人을 바로 세우

    는 일에 全力을 기울였다. 西隱은 그의 著書 곳곳에서 이러한 그의 생각을 강조하

    고 있다.

    개인은 겨레에 대한 충성을 게을리 해서는 못쓴다. 공무원은 자기가 겨레 또는 先任

    받은 자임을 알아 그 맡은 일에 있어서 지성으로 민중에 봉사해야 한다. 산업에 종사

    하는 개인이나 기관은 신용과 성실을 신조로 하여 생산 기술과 생산품의 향상에 힘써

    34) 金基錫, 倫理全書Ⅰ(서울 : 新映社 1960), pp.3~4.

  • - 26 -

    겨레의 산업발전에 공헌하도록 해야 한다. 언론은 언제나 겨레 및 사회의 정당한 여론

    을 존중 또 향도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요, 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일당일파의 편벽된

    소견을 민중에게 퍼뜨리려고 할 것이 아니다. 라디오, 텔레비죤의 프로는 민중의 정서

    를 순화하고 그 건전한 생활 기풍을 북돋우는데 유의해야 한다. 직장에서는 출근시간,

    집무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일에 있어서 報酬나 表賞이나 評判같은 것을 생각해서는

    못쓴다. 간부에서 간부는 謙遜해야 한다. 국토에서 國土의 保衛는 온 겨레의 신성한 義

    務다. 집회 때의 節次 및 議事의 집행은 질서정연한 한 개의 體系를 이루도록 해야 한

    다. 강연회. 음악회 같은데서 교양있는 청중으로서의 질서와 禮讓을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교통규칙, 교통도덕을 엄수해야 한다. 겨레를 좀먹는 利己主義, 享樂主義에 대하

    여 堅決히 싸워야 한다. 信義를 지켜야 한다. 노여움을 사람이나 일에 옮겨가서는 안

    된다. 옷차림이나 행실에 있어서 경박한 유행에 따라 가서는 못쓴다. 思想, 生活 및 信

    仰의 形式主義를 물리쳐야 한다.35)

    個人과 個人, 個人과 社會에 있어서 基本秩序를 지켜나가는 내적인 힘은 人間

    에게 주어진 自由라고 할 수 있다. 이 自由는 하나님으로부터 人間에게 주어진 最

    大의 膳物이며 人間에게 이 自由를 올바로 사용하여 주어진 使命을 감당해 나가

    야 할 義務가 주어져 있다. 關係는 秩序이며 秩序는 처음 創造된 自然과 人間, 社

    會의 形態가 존재되어 나가는 原動力이다. 이 秩序는 있어야 할 것이 意味있는 제

    자리에 놓여지는 것이며 이는 創造主 앞에 나아갈 때 비로소 왜 자신이 存在하고

    어떤 자리에 있으며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를 깨닫게 된다.

    물고기가 물에 있고 새는 공중에 날도록 지어져 있다. 바다는 바다의 자리가

    있어서 넘어갈 수 없는 자리가 規定되어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자리가 있고 이

    는 創世記에 기록된 대로 처음 秩序인 하나님과 인간의 秩序가 지켜짐으로 비로

    소 人間과 人間의 秩序가 지켜져 나가게 된다. 最初의 個人인 아담은 동일하게 하

    나님께로 지음받은 여자와 만나서 家庭을 이루게 된다. 처음 아담의 고백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아담과 여자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에 이둘의 관계는 깨어지고 만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키며 변명을 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

    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6)고 말하고 있다. 이 질서는 인

    간이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그 자리를 넘어서게 됨으로 오게 된 비극적인 결과라

    고 할 수 있다.

    35) 金基錫, 倫理綱領(서울 : 錦文社, 1962), pp.20~46.

    36) 舊約聖書, 創世記 3章12節.

  • - 27 -

    聖書에 나타난 첫 社會로서 個人과 個人이 함께 하는 共同體는 이렇게 그 질서

    에서 벗어나면서 불행에 이르게 된다. 개인은 그를 지은 하나님과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창조주의 관점에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선한 일

    을 위하여 ‘큰 기쁨의 대상’37)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높은 自尊感

    을 갖게 되며, 비교되지 않는 絶對的 價値를 가진 者로서의 복된 마음가짐으로

    이웃을 동일한 尊貴한 存在로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西隱의 思想은 西隱이 한때 Oxford Group이라고도 불리던 MRA운동에 관여했

    던 것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MRA운동은 개인과 사회의 도덕운동으로서 그 운동

    의 기초가 창시자인 미국의 Frank Buckman(1878~1961)38)은 기독교혁명단체로

    서 그의 사명은 생생한 기독교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MRA운동의 목적은 神의 聖

    靈의 지배아래 있는 새로운 社會秩序로, 보다 나은 人間關係를 수립하고 無私로

    운 협동을 성취하고 더럽혀지지 않는 産業, 더럽혀지지 않는 政治를 일으키고 政

    治的 産業的 人種的인 分爭과 충돌을 근절시키는 精神的 覺醒만이 오직 남은 희

    망이고, 改變된 生活의 基盤 위에서만 세계의 항구한 再造가 보장되고, 改變된 生

    活과 떠나서는 어떤 文明이고 지탱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西隱은 이 운동이 제시하는 共同生活의 模型으로 美國 미시간의 마끼노

    (Mackiac)호수 속의 한섬의 생활에 직접 참여한 후에 소감을 다음과 같이 述懷하

    였다.

    방이나 창고에 쇠라고는 채우는 일이 없고, 물건을 아무데나 놓아두고, 자기집 자기물

    건으로 알고 물건을 다루고, 누구나 같이 일하고 서로 돕고, 禮節과 親切과 사랑이 흐르

    고, 고요하고, 부드럽고, 평화롭고, 맑고 깨끗하고, 마음이 고결하고, 여자들이 통 화장이

    라고는 하지않고, 정답고, 즐겁고, 서로 아끼고 수고를 먼저하고, 근심을 같이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정답고 맑은 분위기가 어디서 온 것일까. 두터운 信仰에서, 그리고 世

    界를 바로 잡으려는 使命感에서다. 生活의 根本源泉은 아침에 고요한 시간을 갖는 일이

    37) 舊約聖書. 創世記, 1章31節와 新約聖書, 에베소서, 2장 10절 참조.

    38) 도덕재무장(MRA)운동의 창시자, 펜실베이니아주(州) 펜스버그 출생. 물렌버그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다. 1902년 루터파 목사가 되어 아시아 및 유럽에서 전도

    하였고(1916~1921), 1921년 ‘絶對正直 · 絶對無私 · 絶對純潔 ․ 絶對사랑’(absolute

    honesty, absolute unselfishness, absolute purity, absolute love)과 ‘신의 인도’에 바탕

    을 둔 ‘인생개혁에 의한 세계개혁’을 위한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옥스포드운동으

    로 불리게 되었고, 60여 국가에 퍼져, 1938년에 도덕재무장으로 발전하였다. Frank

    Buckman은 Oxford 대학의 神學敎授와 校牧을 겸하였다.

  • - 28 -

    다. 고요한 시간, 이것이 절대자로부터 듣고 또 절대자에게 접촉하고 그 뜻에 따라가는

    것이다.39)

    아침 고요한 시간을 갖는 일이 원동력이 된 Oxford Group운동이 영국에서

    1867년 시작된 성서유니온선교회의 Q.T.(Quiet Time) 교재를 통해서 130개국으로

    퍼져 나갔다고 볼 수 있고, 이 운동은 韓國 1960년대 후반의 캠퍼스 Q.T.運動으로

    이어져서 韓國의 청년들의 道德性 回復運動에 기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西隱의 個人과 社會의 道德性 回復運動을 펼치면서 個人의 변화가 社會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확고한 신념하에 個人의 基督敎 信仰의 重要性을 인식하였으

    며 그것이 基督敎 信仰을 基礎한 義의 敎育思想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西隱의 敎育思想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自我의 확립이다. 西隱은 個人의 道德律을 그의 日常性의 생활의 변화

    에 있다고 보았으며 가장 시급한 것이 겨레의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는 일이요 이

    로 말미암아 民族의 새로운 道德을 세우는 일이라고 하였다. 西隱은 이를 위하여

    道德性 回復運動에 기여하였다.

    둘째로, 民族敎育의 확립이다. 西隱은 韓民族 전체가 하나의 學舍가 되어 배우

    고 익힘으로 그릇된 풍조를 刷新하고 올바른 人間性을 키워 德性을 북돋우고, 歷

    史를 일으킬 비젼 가운데 民族敎育의 기틀 마련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셋째로, 新民主義 敎育思想이다. 西隱은 올바른 自我의 確立에 그 基礎를 두고

    있으며 올바른 自我의 確立은 個人의 日常的인 삶의 變化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올바른 自我가 確立될 때 그 社會가 秩序 안에서 굳게 세워지며 民族敎

    育이 발전되어 국가의 기초가 바로 놓인다고 주장하였다. 西隱은 개인과 社會生

    活의 基本原理를 民主主義에 두었고 그가 주장한 民主主義를 新民主義라고 하였

    다. 新民主義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강대국의 침략 속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인

    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民族性의 定立이라고 여긴 島山과 南岡의

    精神으로, 동일한 精神을 가진 西隱에게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 金基錫, 倫理全書Ⅰ(서울 : 新映社, 1960), pp.57~59.

  • - 29 -

    Ⅳ. 西隱의 倫理思想

    西隱은 우리 앞에 오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의미를 歷史的인 意味로서 설명한

    다. 西洋의 古代가 西洋中世로 바뀌었고 西洋의 中世가 西洋近世로 옮아간 것과

    같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 새로운 시대란 이같은 根本的인 轉廻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희랍이 中世의 로마로, 中世의 로마가 근세의 歐羅巴로, 古代의 터

    전인 에게해가 중세의 터전인 地中海로, 中世의 터전인 地中海가 近世의 터전인

    大西洋으로, 西洋에 있어서의 세 歷史的인 시기는 이렇게 옮아온 것이라는 것이

    다. 오늘의 現代는 歐羅巴의 낡은 現代가 지나가고 일어나는 자로서의 새로운 現

    代가 오게 됨으로 일어나는 現代로 하여금 英勇스러운 現代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의 새로운 氣風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西隱은 낡은 부대에 새술을

    담을 수 없듯이 새 時代에는 새로운 倫理가 세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民族을

    그동안 支配해 왔던 두가지 倫理 곧 儒敎의 傳統主義와 다른 하나 낡은 倫理인 그

    릇된 利他主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새時代에 있어서의 새로운

    倫理를 義의 倫理思想으로 설명하고 있다.

    A. 새로운 倫理의 意味

    西隱은 당시(1950년대)의 韓國 國民이 당면하고 있는 倫理問題의 基本性格을

    固有의 傳統思想과 西歐의 功利主義의 思想속에서 찾고 있다. 西隱은 우리 민족의

    지나친 形式主義, 지나친 利他主義, 現代의 위태로운 功利主義가 우리 생활과 의

    식 속에 깊이 박혀있어 이것이 그릇된 병폐로 자리잡고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그

    릇된 병폐로부터 벗어나와 새로운 倫理를 세우는 것이 올바른 歷史를 세워가는

    과제라고 主張한다. 西隱은 利己主義를 넘어서서 民族의 義와 歷史의 義를 세워가

    는 것을 새로운 倫理의 窮極的인 目標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새로운 倫理를 세우

    기 위해 그는 칸트의 人格主義와 플라톤과 칸트의 理想主義를 提示하였다.

  • - 30 -

    1. 우리 民族의 倫理問題

    西隱은 우리民族이 당면한 倫理問題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儒敎의 形式主義이다. 儒敎의 實踐倫理는 漢族에 의해 남겨진 遺産으로

    仁義의 情과 倫常의 利는 그 根本精神에 있어 實踐的 理性의 規範이다. 이같은

    儒敎가 漢唐의 성세에 만나 그 敎說이 집성되었으나 근원에서 멀어져 헛된 의례

    와 형식에 흐르게 되었다. 儒敎의 根本 倫理精神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고

    漢唐 이후 變質된 儒敎가 들어와 그 폐단이 생기기 시작하여 우리에게 심한 儀

    式主義로 떨어지게 되었다. 西隱은 儒敎의 本質的 價値를 理性에 의해 밝힘으로

    써 새로운 道德으로 세워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儒敎는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그 德義와 良心을 북돋운바 크거니와 한편 거기에 따

    르는 煩文 褥禮가 우리의 생활과 감정을 억누르고 짓밟은 것이 결코 적지 않았다.40)

    둘째, 民族의 寬容 淳朴에서 오는 지나친 利他主義의 폐단이다. 西隱은 우리 겨

    레는 天性이 寬仁 淳朴하며 지극히 無抵抗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남

    이 달라면 주어야 하고 남과 싸우지 말아야 하고 내가 손해가 나더라도 저편을 좋

    게 해주어야 하는 民族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릇된 利他

    主義를 버려야 하고, 利他主義의 侵略主義的 요소를 경계하여야 한다고 했다. 西

    隱은 利他主義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利他主義는 어느 의미에 있어서 거꾸로 놓은 침략주의라고 할 수 있다. 남을 이롭게

    하여야 한다면서 자기 스스로 양보해야 하고 양보하는데 의하여 저쪽으로 하여금 이

    쪽을 침략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니 침략하는 자보다 침략하게 하는 자가 더

    언짢다고 하면 利他主義는 침략주의보다 더 한층 침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利他主義는 침략주의를 자초할 것이다. 사람이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나 자신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정도로 튼튼히 서야 한다.41)

    셋째, 功利主義는 利와 快를 목표로 추구할 때 변장한 利己主義로 顚落할 수

    밖에 없다. 西隱은 功利主義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을, 행복된 개

    인에 앞서 행복된 사회를 내세우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했다. 모두가 풍성하게

    모두가 복되고 즐겁게 살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행복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