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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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인 자신을 친딸처럼 키워준 엄마를 사랑하는 희경은 엄마가 병으로 그 해를 넘기지 못 할 거란 걸 알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결심함. 결혼 상대자는 희경이 집안에서 보여주지 않는 본 모습을 우연찮게 모두 보게 된 민혁. 민혁은 첫사랑인 수빈을 돕 기 우해 서둘러 결혼을 결심하는데, 희경와 만남을 거듭하며 자신은 깨닫지 못하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다. 드디어 약혼식 날이 되는데 희경의 출생과 생모에 대 해 알게된 민혁의 어머니가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과거에 어머니의 반대로 수빈과 힘없이 헤어지고 말았던 민혁은 이번에는 희경과의 결혼을 단 호하게 추진해 나간다. 이에 민혁의 어머니는 수빈에게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해서 민혁과 희경, 수빈의 관계를 복잡하게 갈등하게 만들어버린다. 제 1장 민혁은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는 회유, 협박에 못 이겨 원하지 않는 맞선 자리에 억지로 나온 자신에게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올해 안에 그를 결혼시켜, 내년에 손자를 보겠다는 장대한 계획을 짜놓으셨다. 그 덕에 그는 이름 꽤나 있는 집안의 여식들과 순번까지 정해 놓고 선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민혁은 자신이 남들이 인정할만한 잘난 마스크와 멋진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재벌가의 후계자라는 배경이 따라붙지 않아도 달라붙는 여자는 넘칠 만큼 많았다. 여자가 부족한 적은 있어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이 기에 그의 어머니가 결혼시키기로 작정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그의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와 어떻게든 엮여,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려고 달려드는 여자들 때문에 말이다. ‘이번엔 진짜 심하군.’ 민혁은 어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집안 교육이 완벽한 여자라고, 감탄하고 또 감탄한 여자 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우아한 실내 장식을 한 고급 음식점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무척이 나 잘 어울렸다.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소리라는 것이 거의 나지 않게 음식을 삼켰다. 수저와 젓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도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또한 살짝 입을 가리고 웃는 폼부터 나직나직 대답하는 목소리 톤 까지, 수십 번 반복해 연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머리는 미용실에서 손본 것이 분명한 한점 흐트러짐 없이 말아 올려져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 이지만 전문가의 솜씨가 확실한 화장으로 단장한 얼굴은 제법 봐줄만한 했다. 고급 맞춤복에 감싸인 균형이 잘 잡힌 몸,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매너 를 몸에 익히고 있는 그의 맞선 상대. 그녀는 빚 없고 재무 구조 튼튼한 대성 그룹의 셋째 딸 이라는 훌륭한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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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인 자신을 친딸처럼 키워준 엄마를 사랑하는 희경은 엄마가 병으로 그 해를 넘기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결심함. 결혼 상대자는 희경이 집안에서 보여주지 않는 본 모습을 우연찮게 모두 보게 된 민혁. 민혁은 첫사랑인 수빈을 돕기 우해 서둘러 결혼을 결심하는데, 희경와 만남을 거듭하며 자신은 깨닫지 못하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다. 드디어 약혼식 날이 되는데 희경의 출생과 생모에 대해 알게된 민혁의 어머니가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과거에 어머니의 반대로 수빈과 힘없이 헤어지고 말았던 민혁은 이번에는 희경과의 결혼을 단호하게 추진해 나간다. 이에 민혁의 어머니는 수빈에게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해서 민혁과 희경, 수빈의 관계를 복잡하게 갈등하게 만들어버린다.

제 1장

민혁은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는 회유, 협박에 못 이겨 원하지 않는 맞선 자리에 억지로 나온 자신에게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올해 안에 그를 결혼시켜, 내년에 손자를 보겠다는 장대한 계획을 짜놓으셨다. 그 덕에 그는 이름 꽤나 있는 집안의 여식들과 순번까지 정해 놓고 선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민혁은 자신이 남들이 인정할만한 잘난 마스크와 멋진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재벌가의 후계자라는 배경이 따라붙지 않아도 달라붙는 여자는 넘칠 만큼 많았다. 여자가 부족한 적은 있어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그의 어머니가 결혼시키기로 작정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그의 수난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와 어떻게든 엮여,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려고 달려드는 여자들 때문에 말이다.

‘이번엔 진짜 심하군.’

민혁은 어머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집안 교육이 완벽한 여자라고, 감탄하고 또 감탄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우아한 실내 장식을 한 고급 음식점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소리라는 것이 거의 나지 않게 음식을 삼켰다. 수저와 젓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도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또한 살짝 입을 가리고 웃는 폼부터 나직나직 대답하는 목소리 톤까지, 수십 번 반복해 연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미용실에서 손본 것이 분명한 한점 흐트러짐 없이 말아 올려져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전문가의 솜씨가 확실한 화장으로 단장한 얼굴은 제법 봐줄만한 했다. 고급 맞춤복에 감싸인 균형이 잘 잡힌 몸,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매너를 몸에 익히고 있는 그의 맞선 상대. 그녀는 빚 없고 재무 구조 튼튼한 대성 그룹의 셋째 딸이라는 훌륭한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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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놈들이 결혼상대로 가장 원하는 조건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여자를 마누라로 앉혀 놓고 자식 낳아 키우게 하고, 쭉쭉 잘 빠지고, 허리 아래를 흥분시키는 여자를 정부로 들어앉힌다. 그것이 친구 놈들의 이상적인 결혼관이었다. 하지만 민혁은 아니었다. 지루한 여자는 딱 질색이었다. 눈에 콩깍지 씌었다, 한눈에 반했다 등등 드라마나 영화 속에나 나오는 진부한 사랑 타령을 할 생각은 없지만, 결혼 상대자라면 최소한 죽고 싶을 만큼 지루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민혁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안도를 했다. 이제 드디어 1시간이 지났다. 60분 초로 따지자면 3600초! 그 동안 민혁은 지루함에 목 졸려 죽는 줄 알았다.

“바쁘신가봐요?”

조용하게 묻는 소리에 민혁은 조금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1시간 동안 최소 10번 이상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예, 조금.”

그러나 변명은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만 일어날까요.”

속마음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던 그는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고 내심 놀라고 말았다. 언제나 그와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들뿐이었다. 그가 데려다 주겠다는데 고개를 젓는 여자는 정말 처음이었다. 예상 밖의 거절에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그들이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입가에 짓고 있던 우아한 미소를 계속 띠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한 그는 그녀의 차를 보고 또 한번 작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 안전함을 자랑하는 외제 차나 국내 고급 승용차를 상상했던 그였다. 만약 스포츠카였어도 과시용이려니 하고 수긍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차장에 뻔뻔스럽게 서있는 차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지프였다.

민혁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녀에게 차가 세워진 곳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을 때 한사코 사양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매너 있게 모른 체 해주며, 민혁은 웃음을 삼켰다. 처음엔 그녀의 거부에, 자신이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나보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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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루함으로 그의 목을 조르던 그녀가 그 앞에서 고개를 젓는 순간부터 그의 호기심이 싹트게 하더니 이젠 그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거절이란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 결론을 지었다. 민혁은 그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예상 밖의 장소에서 아주 예상 밖의 모습으로 다시 그를 놀라게 했다.

제 2 장

민혁의 고등학교 동창 중엔 땅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집의 막내아들 박정태란 놈이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민혁에게 이상하리만치 경쟁심을 느끼며, 어떻게든 민혁보다 튀어보려고 애쓰던 그 친구에게 좀 전에 연락이 왔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돈의 일부를 미리 떼어 받아 카페를 짓는데 한번 찾아오라는 거였다. 분명 많은 돈을 들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집에서 다음 맞선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촌 동생의 연락을 받고 마음을 바꾸었다. IT 산업 확장으로 정신없이 바쁜 회사 사정으로 맞선 스케줄이 어긋나자, 어머니는 집에까지 맞선 장소를 확장시킨 것이다. 친구와 그 딸의 방문이라는 자연스런 명목으로.......

며칠 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밤을 새워 피곤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그였다. 눈을 내리깔고 ‘네’라는 대답뿐이 못하는 여자를 참아줄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가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카페를 찾아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 친구의 과시욕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많았지만, 그 친구 때문에 심심치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낸 것도 사실이었다.

‘흠 여긴가?’

그 자식의 취향으로는 좀 의외다 싶게 작지만 우아한 간판이 그를 맞이했다. 눈에 확 뛰게 크고, 화려할 거라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널따란 주차장은 아직 카페를 오픈하기 전이어서 그런지 비어있었다. 차를 세우던 민혁은 낯익은 지프를 발견했다.

‘누구 차더라.’

차 주인을 떠올리며, 카페 안을 들어서던 민혁은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사가 끝나지 않은 카페 안에서 아르마니 양복을 좍 빼입은 정태가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를 마구 질러대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지금 한 말 다시 해봐.”

정태의 맞은편에 선 여자도 그의 고함 소리에 지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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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모자를 눌러쓰고, 페인트 자국이 여기저기 묻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다리로 바닥을 쿵쿵 거렸다. 손으론 거칠게 설계도면을 둘둘 말았다. 온 몸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좋아. 얼마든지 해주지. 머리에 똥이 가득 찬 바보를 위해서는 일 못하겠다고 했다. 왜?”“뭐…….뭐라고? 이년이.”

주변의 일꾼들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디자인의 ‘디’자와 담을 쌌으면 주제 맞게 가만히 있어야지. 머리 나쁜 거 티내며 왜 사사건건 간섭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아주 추잡하고, 조잡스러워진다고? 알겠어? 이해 안 되면 알기 쉽게 풀어 써서 보충 자료 첨부해 파일로 보내줄까?”

민혁은 흥미롭게 구경하다, 이죽거리는 그 여자의 말에 얼굴이 시뻘게진 친구 놈이 손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 여자 말대로 무식하고 센스도 없는 놈이지만 운동으로 단련되어 손 하나는 무척 매섭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기도 전에 그 여자의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정태의 면상에 일격을 가했다.

“아악!”

정태는 얼굴을 움켜진 채 바닥을 굴렀다. 움켜진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분명 코가 작살난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친구가 휘두르는 손을 한 팔로 막아내며 위로 시원스럽게 다리를 쭉쭉 뻗어 경쾌하게 정태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막힘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멋진 방어와 공격이었다.

“휘익!”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찬탄하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돌아본 여자가 민혁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당황하며 얼굴을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급히 인부들을 불러 모아 카페 안을 빠져나갔다. 그 여자가 카페를 빠져나갈 때까지 민혁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였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는 것 같았다.

귀에 거북한 욕지거리에 그의 관심이 친구에게 돌려졌다.

“괜찮냐?”“으.....너 같으면 괜찮겠냐? 아구구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아. 내 이 쌍년을 폭행죄로 고소해서 콩밥 먹게 할 테니 두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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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가 기세등등하게 핸드폰을 부여잡고 전화를 해대자 민혁의 관심이 통유리로 내다 보이는 여자에게 쏠렸다. 인부들과 함께 지프에 올라타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설마......’

주차장에서 낯익은 차라고 느꼈던 지프! 그리고 그 차 주인! 민혁은 친구를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며 친구를 한방에 날려버린 여자와 맞선 장소에서 만난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았던 여자를 동시에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훗, 그럴 리가 없지. 말도 안돼.’

지프가 신호를 무시한 채 사거리를 내달렸다. 신호를 지키며 사거리를 통과하려던 차들은 급정거를 하고 클락션을 시끄럽게 ‘빵빵’거렸지만 희경은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급커브를 휙 돌았다.

“으으으”

지프 뒷좌석에 앉은 인부들은 고정되어 있는 뭔가를 죽기 살기로 움켜쥔 채, 아무런 불평도 하지 못하고 난폭한 희경의 운전에 떨고만 있었다. 희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제기랄 제기랄.’

되는 일이 없이 일이 자꾸 꼬였다. 처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그런 놈의 일은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선배가 하도 사정을 해서 맡았더니 기분만 아주 더러웠다. 거기에 하필 그 자식까지 나타나서…….

희경은 몇 달 전 일을 생각했다. 맞선 장소에서 예의라고는 콧속의 코딱지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놈! 지만 지루했나? 나도 지루해 죽을 뻔 했다.

희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언니들처럼 짝을 찾아주려고 굳게 마음먹은 엄마 때문에 희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경의 엄마는 본인처럼 세 딸을 요조숙녀로 현모양처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두 언니는 훌륭하게 자랐고, 좋은 신랑감들을 만나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희경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엄마의 뜻대로 자라질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바라는 딸이 되기 위한 행동을 할수록 마치 자신이 연극 무대에 선 배우라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나에게 엄마 피가 흐르고 있다면 달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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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또다시 그 충격 적인 비밀이 밝혀진 후부터 해온 생각을 또 했다.

제 3장

고급 주택가에 주택을 개조한 카페와 레스토랑의 간판의 조명 불빛이 밤의 어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빛을 자아낸다. 희경이 다니는 인테리어 사무실도 2층 집을 개조해 사무실과 작업실, 개인 주거 공간을 나누었는데, 독특한 구조와 인테리어가 주변의 화제가 되며 일거리가 쏟아졌다. 주변의 주택들이 하나 둘씩 카페나, 레스토랑, 고급 의상실 등으로 바뀌고 있어서 사무실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많이 들어와 마음에 드는 일을 골라가면서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인테리어 사무실이 밀집되어 있는 빌딩들 중 한곳에 사무실을 내려는 선배에게 주택을 개조해 사무실을 만들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희경이었다. 사무실을 오픈하고 일거리가 끊없이 들어오자, 그녀는 선배가 잔소리를 할 기색만 보이면 그 일을 들먹이며 선배의 성질을 박박 긁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주차가 문제였다. 사무실 직원들 차는 충분히 수용하게 만들었지만 주변에 카페나 레스토랑이 마구 늘어나면서 사무실 주차장에 살짝 차를 세우는 얌체 주차족들이 문제였다. 또한 주차장 입구를 차로 막아 세우고도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는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간들도 많았다.

“젠장!”

희경은 주차장 앞을 뻔뻔하게 막고 선 차 덕에 주변을 한참 돌다 사무실에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겨우 차를 세웠다. 무게가 꽤 나가는 도면을 한가득 안고 낑낑대며 걸어가자니 팔도 아프고, 열이 뻗쳐 죽을 것만 같았다. 괜한 트집이란 걸 알면서도 희경은 그 재수 없는 자식을 만난 뒤부터 일이 꼬이기만 한다고 투덜거렸다.

몇 달 전 희경에게 성진 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서민혁과의 맞선이 들어왔을 때, 희경은 아주 불쾌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작은 어머니가 달려와 나중에 성진 쪽에서 사실을 알게 되면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더니, 미경을 맞선 자리에 내보내자고 선심 쓰듯 말을 했다. 작은 엄마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집을 빠져나가려던 희경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떠벌리는 작은 엄마에게 화도 나도 오기도 생겼다. 사실 희경은 결혼에 뜻이 없기 때문에 영국의 황태자비를 제의 받아도 콧방귀도 뀌고 싶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희경이 영원히 가슴에 묻어두고 싶을 일을 끄집어내는 작은 엄마 때문에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희경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을 때 다른 사람들은 신사임당, 퀴리 부인, 나이팅게일을 이야기했지만 희경은 당당하게 엄마라고 대답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말도 해보지 못했는데 책 속에 있는 위인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희경은 이해되지 않았다. 희경은 엄마를 꼭 닮은 사람이 되어 엄마를 정말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중학교 2학년 때 무참히 깨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절대로 엄마를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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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희경에게 상속한 재산에 작은 엄마는 길길이 날뛰었다. 금쪽같은 자신의 딸과 희경의 상속 재산이 똑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때 희경은 자신이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 듣고 말았다.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희경을 끌어안고 엄마는 단호하게 사람들에게 한마디를 하셨다. 희경은 자신의 딸이라고. 엄마는 미소를 얼굴에서 지운 적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항상 웃는 얼굴을 대했지만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계셨다. 그런 엄마를 잘 아는 친척들은 그 후로 그 일을 떠벌리지 않았지만 작은 엄마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녀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못하게 했다.

희경은 아버지의 외국 출장 중에 일어난 하룻밤의 불장난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다. 결혼 생활 중 유일한 실수였고, 희경의 친모가 핏덩이를 집 앞에 던져두고 가 버릴 때까지 아버지는 희경의 존재를 꿈에도 알지 못하셨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두 언니와 엄마는 희경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희경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실수가 생각나는 듯 희경을 다른 두 딸과 똑같이 대해주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왠지 어렵고 무섭다고 생각했었지만 희경의 어린 시절은 무척 행복했다. 작은 엄마가 희경의 모든 꿈과 행복을 무참히 깨어버리기 전까지. 그 일 이후 엄마와 언니들은 더더욱 희경을 신경 쓰고 감싸주었지만 희경은 물과 기름처럼 그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기까지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그 후로 희경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꼭꼭 묻어두려 했던 자신의 본 모습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어 점점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바라는 희경의 얼굴을 한 가면을 말이다.

가면극 4장

팔이 떨어질 듯 아팠다. 희경은 한꺼번에 설계도면을 몽땅 들고 오려고 한 자신의 미련함을 주먹으로 한방 갈겨주고 싶었다. 골목만 돌면 된다는 생각에 기운을 긁어모으는데 가로등빛을 피해 어두운 담벼락에 세워둔 차가 진동에 떨리는 핸드폰처럼 요동치는 모습이 보였다.

‘쳇 요즘 것들은 아무대서나 지랄을 한다니까.’

희경은 진하게 선탠한 재규어를 꼴아보며 차 옆을 걸어갔다.

‘호텔비가 없어 보이지 않아보이는구만......’

차 옆을 두 걸음쯤 스쳐지나가던 희경은 멈칫하더니 뒷걸음으로 운전석 앞 차문 앞에 섰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창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두 손 가득 든 설계 도면으로 유리창을 내려쳤다. 유리창이 매끄럽게 열리며 고함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너 죽고 싶어? 이 차가 뭔지나 알아?”

내려진 차창으로 씩씩대며 소리치는 남자의 손에 눌린 채 꼼짝 못하는 여자가 보였다. 뒤로 완전히 제켜진 좌석에 눕다시피 한 여자는 벌어진 셔츠를 손으로 움켜지고 몸을 누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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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차문 열어.”“왜? 내 물건을 네 가랑이에도 박아주랴?”

희경은 잠시 한숨을 내쉬고 번개같이 반쯤 열린 창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죽거리는 사내놈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차벽에 세차게 부딪히는 진동이 느껴졌다. 희경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연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사내놈의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를 내뱉을 때, 더러운 물건을 던지듯 밀어버리고 손을 아래로 내려 잠겨진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문을 활짝 열고 남자를 끌어냈다. 반항하는 남자의 배에 무릎을 세차게 박아 넣어 땅바닥을 구르게 만든 후, 꼼짝도 안하고 있는 여자에게 한마디 툭 건넸다.

“이봐, 내가 방해한 거 아니라면 그만 차에서 내리시지.”

그제야 차안의 여자는 더듬더듬 차문의 잠금 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차문을 열었다. 그러나 기운 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참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꼴을 보고 희경은 차 반대쪽으로 걸어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한참을 멍하니 희경이 내민 손을 바라보다 소리를 내지 않고, 어깨를 가늘게 떨며 울기 시작했다. 희경은 금세 알아챘다. 그 여자가 서러움을 삼키며 많은 눈물을 흘려왔다는 것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여자를 부축해 사무실로 데려온 희경은 밝은 불빛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반항하다 손찌검을 당했는지, 뺨은 뻘겋게 부은 채 퉁퉁 부어있었다. 희경에게 받아든 티로 갈아입기 위해, 단추가 뜯어지고, 찢어진 셔츠를 벗자 새하얀 피부에 온통 우악스런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희경은 그 자식을 더 패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갈았다. 아직도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그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김이 나는 허브 차가 담긴 찻잔을 건네주었다.

희경은 여자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 놈과는 어울리게 안 생겼는데, 왜 그런 미친놈을 쫓아갔우?”“.........”

여자는 다시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희경은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심문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간신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오...빠....친구예요.”“친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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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오빠에게 사람 보는 눈 좀 키우라고 해야겠군. 친구란 놈이 친구의 여동생을......”

여자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티슈를 한 장 뽑아 여자에게 내밀던 희경은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빠가 약속했대요. 저를 주기로.”

여자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희경을 응시했다.

“포커 판에 저를 판돈으로 걸었대요. 처녀라는 보증까지 했다고......”“.........”

희경은 할말을 잃고 멍하니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여자를 꽉 끌어안고 마음껏 울라고 윽박질렀다. 그 여자의 오빠란 놈을 반쯤 죽여 놓는 상상을 하면서.

“에구 멍청이!”

희경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골목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슬슬 피해갔다. 희경은 짜증스럽게 엉망이 된 채 바닥에 흩어져 있는 설계도면을 바라보았다. 내팽개치고 온 설계도면을 가지러 왔을 때 차는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분풀이라도 하듯 설계 도면은 짓밟혀 있었고, 수빈이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확, 도난 신고를 해버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자면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야 했기에 참았다. 엉망이 된 도면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배가 알면 죽이려고 할 것이다.

오빠에게 팔아넘겨진 여자의 이름은 황수빈이었다. 이름만큼 마음도 고아 보이는데, 왜 그런 인간 말종 같은 오라비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오빠라고 핸드폰을 빌려 연락한 사람이 오빠라니 착한건지 멍청한 건지. 하여간 그 인간 말종의 얼굴을 보면 쓴맛을 보여줘야겠다고 희경은 전의를 다졌다.

가면극 5장

민혁은 엑셀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신호도 무시하고 차를 몰아댔다. 수빈이의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또 다시 수호와 수경의 괴롭힘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만신창이가 된 걸까? 몇 해 전 수빈이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 한 이후 괴롭힘이 덜해졌었다. 그런데 다시금 시작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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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수빈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빈에게 차를 더 권하던 희경은 요란한 타이어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인간 말종이 왔군!’

희경을 목과 팔을 흔들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인간 말종을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황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튀어들어왔다. 희경은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세차게 날렸다.

“동생을 팔아먹어?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꺄악!”

희경에게 정통으로 턱을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수빈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희경은 단단한 턱을 가격한 댓가로 주먹이 욱신거렸지만 그것을 상쇠하고 남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당신 뭐야?”

화가 나 소리치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희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서민혁!

“민혁이 오빠!”

희경에게 꽂히려던 날카로운 눈동자는 애달프게 부르는 수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향을 바꿨다. 수빈의 얼굴을 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희경은 그에게 몸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그늘진 곳에 숨듯이 서서 그의 손에 힘이 확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불끈 쥔 주먹을 보며 속으로 쫑알거렸다.

‘걸리는 놈은 죽겠군. 그러게 왜 동생을 상대로 농담을 해.’

수빈을 다정히 안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동생을 팔아먹은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동생을 팔아먹는 그런 악독한 놈하고 맞선보고 밥까지 먹었다고 생각하면 진짜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수빈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나 점점 더 검게 가라앉는 눈을 보고 그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게 친구 놈을 잘 둬야지.”

Page 11: [김성희]가면극

생각했던 말이 방정맞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갔다. 놀라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수빈과 민혁의 시선이 희경에게 돌아선 후였다.

“흐......”

희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뿐이 없었다. 제발 민혁이 몇 달 전에 잠시 보았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빌면서 말이다. 하지만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자주 보내요. 장희경씨!”

민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수빈이 놀라서

“아는 사이야?”

라고 묻자 민혁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응, 만날 때마다 나를 즐겁게 하고 있지.”“지금이 즐거워 할 때예요? 댁 때문에 동생이 어떤 꼴이 됐는지나 잘 살피시지.”

희경은 퉁명스럽게 툭 뱉었다. 민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희경을 쏘아보았다.

‘하! 똥 눈 놈이 성낸다더니, 적반하장일세.’

희경도 덩달아 민혁을 쏘아보았다. 민혁의 턱에 멍자국이 생겨가는 것을 흡족해하면서. 그러나 만족감은 1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저....민혁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민혁이 오빠는 제 친오빠가 아니라.......사...사촌이예요.”

그렇다면 나의 주먹질은 동생을 팔아먹은 인간 말종을 향한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단순 폭행? 아이고 맙소사! 희경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쪼잔한 좀생원이자 잔소리꾼인 선배의 등장이 무지하게 반가웠다.

“주차장을 막고 선 차는 뭐고? 외제차 몰면 다 저렇게 뻔뻔해도 되는 거야?”

소시민적 열등감을 팍팍 풍기며 선배가 등장하는 순간 사무실 휴게실의 분위기는 썰렁해졌지만, 희경은 그것조차 반가웠다.

희경은 차를 집 앞 주차장에 세웠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예정보다 늦어진 귀가에 그녀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차에서 내려 현관 벨을 누르며 희경은 자신의 차를 힐끗 보았다. 사무실에서 몰고 다니는 지저분한 지프와 주인이 같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중형 세단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선배의 사무실에 취직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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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분들처럼 딸에게 외제차를 사주시겠다는 엄마의 의지를 간신히 꺾고 산 차였다. 솔직하게 아무 개성도 없이 밋밋하기만 하고 짐도 제대로 실을 수 없는 이런 차 대신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 비포장도로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지프였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의 선택에 그냥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뿐이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혼만은 빼고.

현관문이 열리자 돌계단을 올라 널따란 정원으로 올라섰다. 그 재수 없는 맞선 자리에 그녀의 가면 중 일부인 저 차를 빼놓고 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때 저 차로 바꿔 타고 갈 시간만 되었어도……. 그녀는 수빈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날 때의 민혁의 눈빛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마치 사냥꾼 그물에 걸려든 사냥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려고,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늦었네.”“네.”

그녀는 집안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에게 우아한 미소로 답하며 가정교육 잘 받은 집안의 일원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썼다. 지금부터 가면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저녁은? 저녁 때, 물만두 만들었는데 조금 먹고 자겠어?”“아니에요.”

저녁도 먹지 못해 뱃속은 아우성을 치며 음식물을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희경은 아주 점잖게 사양을 했다. 자라면서 언니들이 밤참을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늦게 들어온 주제에 아줌마를 귀찮게 하며 상을 차리게 하는 것은 마음씨 곱고 예의바른 장씨 집안 딸들에게서 구경하기 힘든 일이었다. 2층으로 올라서는 계단에서 희경은 나직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10시쯤 희경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며, 전화를 하셨던 엄마는 이미 잠 속에 빠지셨을 것이다. 아침 5시면 일어나시는 엄마는 10시가 넘으시면 잠자리에 드시기 때문이다. 엄마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2층 계단을 올라가 그녀의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서재에서 나오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희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지금 들어오는 길이에요.”“많이 늦었구나.”

부녀는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희경은 마음이 우울하기만 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덜했지만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이상하게 어색하기만 했다. 언제나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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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눈을 피하시는 아버지. 그녀를 보면 25년 전의 실수가 자꾸만 생각이 나시는 갈까? 희경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아버지가 어려워도 자꾸만 말을 붙이고, 관심을 끌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출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부터는 희경은 자신을 꺼려하는 아버지에게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가끔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딸의 독립은 곧 결혼이었다. 그 외의 답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셨다. 희경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극 6장

성진 그룹 서회장의 생일 파티가 호텔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내로라하는 정제계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희경은 이 파티에 끌려나오지 않기 위해 온갖 꾀를 다 부렸지만 엄마의 웃는 얼굴에 반항 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렇게 싫어하는 드레스까지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대성 그룹 회장의 마지막 남은 미혼인 딸에게 사람들의 많은 관심이 쏠렸고, 희경은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미소를 지어대야 했다. 하늘거리는 얇은 소재의 몸의 선을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기에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커다란 가슴을 압박 브래지어로 꽉꽉 눌렀다. 그 위에 드레스를 맞추었기 때문에 희경은 숨쉬고 서 있기도 힘들었다.

‘에고고 내 팔자야. 이 따위 짐 덩어리 같은 가슴 때문에 숨 막혀 질식사 하겠다.’

언니들의 적당히 볼륨 있고 모양이 예쁜 가슴을 부러워했지만 사춘기 때 그 꿈은 포기해버렸다. 그 때 이미 언니들의 가슴을 추월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 때부터 가슴과의 전쟁이었다. 어떻게든 가슴을 작게 보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가슴은 반항이라도 하듯 자꾸만 커져갔다. 선배가 사무실에 숨겨 놓고 몰래 보던 팬트 하우스에 홀딱 벗고 나온 여자들과 비교가 되려나. 사무실에서는 풍성한 티나 셔츠에 몸을 숨기면 됐지만 이런 파티에서는 정말 곤란했다. 정말로…….

민혁은 파티가 시작된 이후 줄곧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다 못해 갇혀있었다. 성진 그룹의 후계자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 받는데다 미혼의 딸들을 민혁과 한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게 하려는 엄마들의 극성 때문이었다. 민혁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가슴은 답답함과 지루함에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때였다. 그녀가 홀을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장희경! 그녀는 오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요조숙녀란 가면을 쓰고 시종 우아한 미소를 띠우며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자신과 최대한 거리를 벌려 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를 일찌감치 눈치 챘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바대로 조금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사람들 속에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면 싶어 할수록 그는 더욱 예민하게 그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아마도 지겨운 파티에서 그나마 흥미를 자아내, 참고 있게 도와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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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어떻게든 자신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인 대성 그룹 계열사인 대성 건설 회장 딸 미경을 바라보았다. 미경은 그의 눈길이 쏠리자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로 지루함이 절로 우러나게 하는 미소였다. 사촌지간일 텐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여기 모인 여자들이 대부분 그런 연습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미소를 최대한 우아하게 짓고 있었다. 그들의 미소가 그를 질리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치 가면무도회 같군.’

민혁은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속마음과 다른 미소를 지어대는 사람들에게 아주 염증이 나있었다. 갑자기 숨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증이 치밀어 오르자, 장희경이 사라진 곳을 쫓기 시작했다. 그녀가 또 어떤 모습으로 그를 즐겁게 할지를 기대하며.

희경은 테라스에 난 정원 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나무 그늘 속으로 숨으며 곳곳에 환하게 밝혀진 불빛을 피했다. 의자에 앉아 굽이 높은 뾰족한 하이힐 덕에 압사 당하려는 발가락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 지독한 압박에서 가슴을 해방시켰다.

‘휴! 좀 살겠네.’

희경은 드레스를 밀어 올리며 부풀어 오른 가슴을 보며 심각하게 가슴 축소 수술을 생각해보았다. ‘대성 그룹 셋째딸 가슴 축소 수술 중 혼수상태 사망’이나 ‘부작용으로 고생 중’이란 기사가 실려 부모님과 결혼한 언니들을 망신시키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유방 수술 전문인 성형외과를 당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가슴을 반으로 아니 3분의 1로 줄여버리는 것이 그녀가 가장 간절이 바라는 일이었다. 차라리 밋밋한 절벽이 낫지, 젓소 부인으로 살아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양가집 규수 모드를 무장 해제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기에 희경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민감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소리를 인식하고 당황해 허둥지둥 브래지어 호크를 채우려고 하자 급한 마음과 달리 손가락이 영 딴판으로 놀며 도와주려 하지를 않았다. 제기랄, 일이 꼬여도…….

“여기 숨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지?”

민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희경은 기겁해 잠그던 후크를 놓치고 말았다. 팽팽히 당겨져 있던 브래지어 둘레 띠가 반동으로 팍 움츠러들었고, 희경의 가슴은 튀어나올 듯이 출렁했다. 희경도 그 모습을 지켜본 민혁도 얼어붙은 듯 한순간 꼼짝하지 않았다.

“큭큭 하하하하!”

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민혁의 웃음 소리였다. 민혁은 큰 소리로 웃어대더니 나중에는 허리까지 굽히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희경은 뺨이 불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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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극 7장

희경은 재빨리 두 팔을 엇갈려 가슴을 가리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너무 웃어 눈물까지 닦아내는 민혁을 죽일 듯이 째려보고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새빨개진 얼굴도 숨기고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찾기 위해서.

그래서 뒤를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열이 팍 뻗쳤다. 거기에 기름이라도 부으려는 듯, 빌어먹을 그 인간의 이죽거리는 소리는 그녀에게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는 성인의 말씀을 기억 속에서 지우게 했다.

“내가 도와주지. 곤경에 처한 숙녀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

민혁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신을 향해 벼락같이 날아오는 불끈 쥔 주먹을 보았다.

희경은 자신이 휘두른 주먹에 깐죽대며 재밌어하는 그 인간의 코뼈가 경쾌하게 부셔져 나가는 상상을 잠시 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 일을 벌이면 얼마나 시끄러워질지 알았기에 눈물을 머금고 힘을 조금 뺐다. 내일 아침이면 선글라스만 하나 필요할 정도로 에티켓 있게 말이다.

“헉!”

희경은 그 놈의 눈두덩에 박혀야 할 주먹이 그의 손안에 들어가 있자 자신도 모르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민혁은 그런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똑같은 일을 두 번 당할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표정 하나하나가 희경의 염장을 질러댔다. 희경은 그에게 잡힌 주먹을 휙 잡아 빼려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잡힌 팔이 끌려갔다. 그대로 그의 품에 끌려들어간 희경은 입술도 점령당하고 말았다. 버둥대면 버둥댈수록 그물에 조이듯 그의 팔이 더욱 강하게 조여 왔다.

‘장...장난이 아니네.’

보기보다 강한 팔의 힘에 놀라던 희경의 두뇌는 곧 회전을 멈추고 말았다. 입술과 입술의 부딪힘 정도였던 입맞춤이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려고 하는 순간 엄청난 충격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희경은 모든 몸부림을 멈추고 침입하려는 혀를 막아내기 위해 입을 꽉 다무는데 온 정신을 쏟아 부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민혁의 혀의 침입이 실패하자 희경은 의기양양해 다시 한번 전의를 다지며 조개비처럼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제풀에 꺾여 그녀를 풀어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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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몸을 움켜잡고 있어야 할 손이 희경의 턱에 압력을 가해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따뜻한 혀가 희경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으읍!”

그의 혀에 입안을 점령당한 채 그녀는 겨우 신음 비슷한 소리를 밖으로 던져냈다. 그의 혀는 희경의 입안에서 마치 제 집인양 입안을 샅샅이 훑고 탐색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지 그녀의 혀를 장난치듯 건드리더니 말기까지 하였다.

‘으으...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희경은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남의 입안을 헤집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인간이었기에 말이다.

“으악!”

그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는 모든 압박과 억압에서 풀려났다.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모양 좋게 잘 가꾸어 놓은 나무 밑에 ‘툇툇’ 침을 뱉고 손등으로 열심히 입을 닦는 일이었다.

“더....더럽게...... 어디다 혀를 넣는 거야?”“더럽다고?”“누가 네 침이 무슨 맛인지 궁금하대?”

민혁은 희경의 말에 혀가 깨물린 고통과 그로 인해 입안에 피맛이 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기가 막혔다. 그의 키스가 더럽다고 방방 뛰는 여자도, 그의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리게 한 여자도 정말 처음이었다. 그에게 키스를 받고 싶어 줄을 선 여자를 셀 수는 있어도.......

그녀는 분명 그를 욕하는 것이 분명한 소리를 연신 군시렁거리며, 입술이 피가 나도록 벅벅 문질러 댔다. 처음에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재미있기까지 했지만 민혁은 점점 기분이나 빠졌다. 키스라면 꽤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한다고 믿어왔던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박살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흔적이 남는 것도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혹사시키고 있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부아가 치솟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입술이 아닌 그녀의 손등의 압력에 의해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위로해주었다. 주인을 잘못 만난 고통을…….

가면극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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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놈 같으니…….’

희경은 마음속으로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힘들게 표정 관리를 했다. 조금만 참을 걸, 왜 정원으로 나가 숨 좀 돌리려다 발등 찧는 일을 자초했는지 성질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그 정신없는 와중에 희경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브래지어 호크를 귀신같이 채우다니……. 브래지어를 늘 착용하는 그녀보다도 더욱 능숙한 솜씨였다. 바람돌이가 따로 없었다. 분명 많은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솜씨일 테니 말이다.

‘익크!’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그녀 쪽으로 걸어오는 작은 엄마를 발견하고 몸을 돌리던 희경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민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희경은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잔뜩 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에서 비켜섰다.

‘젠장 사면초가네. 이렇게 넓은 홀에서 왜 자꾸 부딪히는 거야?’

그 때 구세주와 같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희경은 날듯이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엄마!”

희경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엄마를 살며시 불렀다.

“희경아, 인사드리렴.”

엄마는 웃으며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얼마 전에 네가 만났던 서민혁군의 어머니시다.”“안녕하세요?”

얌전히 인사하는 희경은 경악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었다.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간 느낌이랄까.

“오, 그래 아가씨가 장희경양이군요. 엄마를 닮아 정말 곱네. 우리 아이와 잘 지내도록 해요.”

경련으로 떨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진 그룹과 대성 그룹의 두 사모님들은 의기투합한 듯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희경의 작은 엄마는 못마땅한 듯 눈을 볼썽사납게 치떴다.

“아휴, 분해. 저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난데. 뻔뻔스럽게 사람들을 속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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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아, 난 희경이 년이 성진 그룹 사모님 자리 꿰차는 건 죽어도 못 본다.”

미경도 엄마 옆에 서서 희경을 죽일 듯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홀을 빠져나가는 민혁을 뒤쫓아 나갔다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꼴을 보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참고 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

홀을 빠져나가는 민혁을 발견했을 때는 그녀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여겼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민혁에게 깊이 인식시킬 기회라고 말이다. 그래서 민혁 뒤를 바로 쫓아나갔지만, 그곳엔 이미 방해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경이 눈의 가시 같았던 존재인 희경이년이. 것도 몇 년 전부터 미경이 찍어놓았던 민혁을 유혹하면서……. 민혁이 희경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이를 갈고 지켜보며 맹세했다. 내가 민혁과 짝을 이루지 못해도 희경이 년과 잘되는 꼴은 죽어도 보지 않겠다고 말이다. 흥! 두고 보라지.

민혁은 자신의 어머니가 담소를 나누는 곁에 다소곳한 표정으로 서 있는 희경 때문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간간히 대답을 하며 어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집안 교육을 잘 받은 처자로 보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평온한 겉모습과는 다르다는데 민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희경이 겉으로 가장한 평온함에 파장을 일으키겠다는 짓궂은 마음에 그쪽으로 향하려던 민혁은 홀 안으로 들어서는 고모부를 발견했다. 사람들의 주목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시선을 집중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누가 정치가 아니랄까봐……. 민혁은 한숨을 쉬며 고모부의 뒤를 쫓아 들어오는 수호와 수경의 뒤에서 수빈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수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혁은 차가운 눈으로 고모부와 수호, 수경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도 싫은 듯 커튼이 내려져 창문을 막고 있다. 수빈은 등을 켜지 않아 캄캄한 방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피로 연결되어 있지만 남보다도 못한 가족들이 출타한 집에서 수빈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수빈은 숨 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감옥처럼 자신을 옥죄는 이 집에서 탈출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이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미래에 대한 어떤 꿈도 마음에 담지 않게 된지 오래 되었다. 그래도 내일의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은 가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수빈은 부어오르고 멍이 든 뺨을 만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한동안은 꿈꾸지 못하게 되었다.

수빈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수빈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민혁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간 당할 뻔 했던 충격보다도 그녀를 도와준 장희경이라는 여자를 민혁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녀를 이유 모를 불안하게 했다. 또 그 여자를 향하는 그의 눈빛에 비친 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래서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민혁의 질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어놓지 못했다. 그녀의 떨림을 그가 눈치채고 걱정할까봐.

“집 안까지 데려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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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창백한 안색에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민혁이 물었다.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민혁이 고모부인 자신의 아버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만 아니면 되도록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이다. 수빈은 그에게 어떤 짐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면 더욱 더.

“전화할게.”“......”

수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떼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가두는 창살 안으로.

현관문을 열자 제일 먼저 그녀를 반기는 것을 얼굴을 향해 가차 없이 날아오는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윽!”

수빈은 터진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머리가 아득할 정도로 신발장에 몸을 세게 부딪쳤다.

“너...무슨 짓을 한거야.”

수빈은 현관에 쓰러진 채,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자신의 아버지란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는 생각을 포기한 듯 수빈에게 쏟아지는 말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수빈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빨리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의 공간인 자신의 방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날아온 손찌검에 다시 무릎을 꺾어야 했기에.

“윤사장의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금쪽같은 아들 네년 때문에 다 죽게 생겼다고 지금 펄펄 뛰고 있잖아.”“........”“윤사장이 누군지 알아? 이번 선거에 선거 자금 걱정하지 말라고 약조한 사람이야. 그런데, 선거 자금은 꿈도 꾸지 말고 법정에서 보자니, 이 애빌 죽일 작정이냐? 이 망할 놈의 계집애.”‘아, 그 사람!’

수빈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수호가 들어선 걸 알자마자, 네 년을 지워버렸어야 했는데…….”

이를 빠득빠득 갈아가며 구타의 손길을 늦추지 않으며 내뱉는 아비의 소리에 수빈도 수긍했다.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 뒤에서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누이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는 수호가 보며 생각했다.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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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바라보는 수경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프게 인식했다. 그들과 피가 이어져 있지만 언제까지나 자신은 이방인일 수뿐이 없다는 것을…….

‘네, 아.버.지. 그랬더라면 얼마나....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다시 위식을 찾았을 때는 굳게 닫힌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살금살금 숨어들어오고 있었다.

“깼어?”

눈을 뜨자 안쓰러 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하는 아줌마의 얼굴이 보였다.

“......”“하도 의식을 못 찾아, 의원님 뭐라 하셔도, 병원에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인데, 다행이네.” “아줌마, 저 찾는 전화 오지 않았나요?”

말을 하기가 힘겨울 정도로 입안은 심하게 찢어지고, 얼굴이 퉁퉁 부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는 그녀를 찾는 전화부터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민혁에게서 전화가 왔었을 것이기 때문에이다. 만약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를 걱정해, 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면..... 허영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흉한 몰골만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저…….죄송하지만 전화기 좀 갖다 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일주일을 보냈다. 퉁퉁 부었던 붓기가 가라앉자 보기 흉한 멍들이 온몸에 울긋불긋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수빈은 자신을 비출 햇빛도 불빛도 두려워 하루 종일 커튼을 굳게 닫고, 불도 켜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멍이 빨리 사라져주기라도 할 것처럼. 못 견디게 그가 보고 싶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자신만의 공간을 위협하는 것만 같아 수빈은 몸을 움찔 움츠렸다.

“전화 왔어. 사촌 오빠라고 하는데.”

하루 종일 수경이 감시를 받으며 전화조차 받지 못했던 수빈은 고마워하며 아줌마에게 수화기를 받았다.

“민 혁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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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감추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려와. 집 앞이야.”“.......”“내가 올라갈까?”“오빠…….나중에 만나면 안 될…….”“들어갈게.”“아…….아니야. 나갈게.”

민 혁은 수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일주일 전 수빈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며 느꼈던 불안감이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그는 문든 희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빈이 그녀를 백분의 일이라도 닮았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수빈은 약했다. 몸도 마음도....만약 그녀가 조금만 강했더라면 그와 그녀의 삶은 지금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민혁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여린 마음만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완전히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었던 것은 그 자신이었다. 철없던 한 때 성급하게 일을 저지른 것은 그였고, 그녀 혼자 그 댓가를 철저히 치러야만 했다. 마음이 여리고 강하지 못한 그녀였기에 그 상처는 치료될 수 없을 만큼 컸다. 민혁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그녀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나서면 나설수록 수빈은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을 헤매야 할 것이다.

대문이 열리며 수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그는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대문을 밝히는 그다지 밝지 않은 불빛이, 머리를 내려서 얼굴을 최대한 가리려는 그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눈에 그녀의 얼굴에 처참하게 핀 멍을 선명히 각인시켜주었다. 그는 핸들을 내리쳤고, 클락션 소리가 그의 분노를 담고 울부짖었다.

가면극 9장

“언니!”

희경은 현관에서 그녀를 반겨주는 큰언니 혜경을 보고 반가움에 큰 소리로 불렀다.

“어쩐 일이야. 형부 일 돕느라 바쁘다더니…….”“응, 엄마가 축하할 일이 있다고 오늘 모두 모이라고 해서.”“그래? 그럼 작은 언니 네도?”“좀 있으면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어.”“무슨 일이지? 아침까지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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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우리 귀염둥이는 어디 있어? “

희경은 돌이 갓 지나 마구 귀염을 떠는 조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모’라고 앙증맞게 그녀를 부를 때면 꽉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였다.

“좀 전에 잠이 들었어. 너 깨울 생각은 말아라. 진수 일어났다가는 조용히 저녁 먹을 수 없게 될 테니까.”

희경이 속마음을 들키고 아쉬워하자 헤경은 웃으며 식당을 가리켰다.

“진수 일어나면 실컷 보게 해줄게. 엄마가 오래간만에 한껏 솜씨를 발휘하셨는데.”

“그래?”

엄마의 요리 솜씨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몸이 약하셔서 아버지가 주방에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엄마가 요리 솜씨를 뽐내는 날은 아주 특별한 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뿐이다.

‘무슨 일일까?’

식사가 끝나고, 모두 함께 차를 마실 때, 희경의 궁금증은 경악의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뭐...뭐라고요? 결혼이요?”

희경은 입에 머금은 뜨거운 커피를 놀래서 경련을 일으키는 식도로 넘기고 말을 더듬으며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엄마는 놀란 얼굴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져도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늘 낮에 성진 그룹 회장 사모님께 연락이 왔었단다.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니 번거롭게 상견례 자리를 마련하지 말고, 약혼식을 서두르자 시더라.”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희경을 바라보았다.

“우리 막내도 드디어 제짝 찾아가는구나.”

“엄...엄마, 혹시 무슨 착각이.....”

“민혁군이 올해 안에 결혼을 올리고 싶다고 했다 하니 준비하려면 빠듯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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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형부들과 언니들에게 일제히 축하 인사를 받아야 했다. 모두들 흥분해서 아니라고 하는 희경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형부들은 언니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두 집안의 혼사로 대성의 앞날이 더욱 탄탄해졌다고 결혼이 가져올 득실을 부지런히 계산하며 장인 장모께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희경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말로만 들어본 기절이란 걸 하지 않나 싶었다. 아니 차라리 정신을 팍 잃고 우아하게 쓰러져 퇴장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언니들과 약혼식과 결혼식 계획에 대해 의논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엄마를 보며 희경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을 수뿐이 없었다. 희경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이 희경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조만간 깨어날 꿈이라도 엄마에게 잠깐의 기쁨을 맞보게 해드리고 싶었다. 엄마에게 무한적인 사랑을 받기만 한 그녀였기에…….그러나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그 빌어먹을 인간의 목을 닭모가지 비틀 듯 비틀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성진 그룹 본사 건물 앞쪽에 이사급 이상의 회사 간부들의 차를 주차하게 주차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곳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은 모두 외제 고급 승용차이거나 국산차 중에서 최고가를 자랑하는 차들이다. 그 차들 사이 빈 주차 선에 국산 중형차가 획 하니 주차를 하자 경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차에서 내리는 여자에게 경비원이 짜증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이봐요. 당신, 여기 표지판 안 보여요? 여긴 회사 간부 전용 주차장이잖아요. 방문자는 지하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요.”

그러나 여자는 경비의 말을 무시하고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장의 차를 발견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래, 안에 있군.”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경비는 처음과는 달리 아주 공손하게 물었다.

“사장님을 찾아오셨습니까? 그래도 여기에 차를 세우시는 건 좀…….”“잠깐이면 돼요.”

그리고 그대로 본사 건물 로비를 향해 걷던 여자는 뭔가 생각난 듯 경비를 돌아보았다.

“아,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네? 뭡니까?”“만약 제가 30분 내로 안 나오면…….”“안 나오면요…….”“119에 연락 좀 해서 응급차 좀 불러주실래요? 사장님이 급히 입원할 일이 생길지 몰라서…….”

Page 24: [김성희]가면극

“예?”

놀란 경비를 뒤에 두고 여자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밤을 뜬 눈으로 새운 희경이었다.

희경은 회전문을 지나 안내 데스크를 그대로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에야 희경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인간이 사무실이 몇 층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제기랄!’

안내 데스크에 묻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데스크 직원이 문이 닫히지 않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친절하게 희경이 원하는 답을 이야기 했다.

“사장실은 25층입니다.”“고....,고마워요.”

당황한 희경이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데스크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희경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에 도착한 희경은 문이 열리자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유능한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희경 깍듯이 인사를 하고 희경을 사장실로 안내했기 때문이다.희경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장실 문이 등 뒤로 닫히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을 뒤로 하고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황당한 사건의 주모자 서민혁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서민혁은 아주 침착하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생각보다 늦었군.”

그 말에 희경은 정신이 확 들며 열이 뻗쳤다.

“이 망할 인간 무슨 장난이야?”

성질을 못 이겨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며 소리치던 희경은 손에 전해지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튀어나온 문의 조각 장식에 손등이 찢긴 것이다. 민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손등을 누르며 혀를 찼다.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야?”“하! 그래서 어린애도 아닌 어른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쳐? 어떻게 수습하려고 못된 장난을 치는 거야?”“장난이라고?”“그래? 결혼이라니 말이 나 돼?”“나이 찬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겠다는데, 축복받을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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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내가 거품 물고 넘어가는 꼴 보지 않으려면 장난치지 말고 진지해 지시지.”“난 지금처럼 진지한 적이 없는데.”

부들부들 떠는 희경을 무시하고 민혁은 비서에게 약품 상자를 가져 오라고 지시한 후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희경은 눈앞에 펼쳐지는 어이없는 광경에 손등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후 밴드를 붙이는 민혁의 모든 행동을 인식하지 못했다. 눈앞에서는 온갖 종류의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반지, 목걸이 팔찌들이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언니들의 화려한 결혼 예물을 보았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많은 보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은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보석 전시회 팜플렛에서 본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에르메스의 작품들이었다. 보석점 주인들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희경의 선택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새로운 것이 다음 주에 들어온다니 그 때 다시 고르지. 하지만 약혼반지만은 이 중에서 고르면 좋겠는데.”“.......”“홍보실에서 우리 약혼 기사에 실을 사진을 찍고 싶다는데 커플 반지 정도는 끼고 있어야.”“농담이 아니군요.”“훗 존칭을 들으니 이상한 걸. 맞선 볼 때 이후론 처음인 것 같군.”

그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손짓으로 사람들을 내보내고, 희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성과 성진 사이에 혼사말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주식이 들썩이고 경제적 파급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 그룹을 운영해갈 내가 그런 일을 장난으로 할 것 같아? 당신의 입장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왜.....나죠?”“글쎄, 그건 나도 의아해 하는 중이어서. 그건 아마도.....”“........”“당신이라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일지도.”

민혁의 말에 눈앞에 펼쳐진 보석들 때문에 새하얘졌던 희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붉어져 벌떡 일어섰다.

“내가 당신 장난감이야? 당신을 지루하게 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나에게 결혼을 하라는 거야? 이 망할 인간이.....”

희경은 줄줄이 뱉어내려던 험한 말들을 도로 삼켜야 했다. 민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무릎에 앉히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면극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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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별게 다 면역이 생기는군.’

제 물건인양 입술을 마음대로 헤집는 그의 입술과, 제 집인양 입안을 자유롭게 휘젓는 그의 혀를 느끼며,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처음 억지로 키스를 당할 때 그의 혀과 함께 입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타액에 그녀는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었다. 집에서도 찌개를 먹을 때 수저를 섞지 않고 앞접시에 덜어 먹는 집안에서 자란 희경으로서는 다른 사람과 침이 섞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친구라 부르는 인간들이 프렌치 키스가 어쩌고 딥키스가 어쩌고 하며 자신들의 경험담을 떠들 때 희경은 호기심 대신 역겨움을 느꼈었다. 연애도 결혼도 뜻이 없던 희경은 그런 일들과 담 쌓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삼 세 번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닌 듯 세 번 만에 타액을 서로 나누는 키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말았다. 적응한 정도가 아니라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으로 번져가는 이상야릇한 떨림까지 느끼고 있는 실정이었다.

민혁은 희경이 반응을 감지한 듯 더욱 편한 자세를 취하며 제자리를 못 찾고 방황하는 희경의 두 팔을 자신의 목에 감기게 했다. 희경이 키스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처음 입술을 대본 순간 짐작을 했고, 더럽다며 입술을 문질러댈 때 확신했다. 자신과의 키스를 즐기기는커녕 더럽다고 투덜거리는 그녀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평소 키스에 능숙하다고 생각해왔던 그였기에, 자존심에 팍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 소리 없이 번져가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기 위해 버둥대는 그녀에게 두 번째 키스를 퍼부었었다.

세 번째 키스는 환상적이었다. 그녀의 서툰 키스에 그의 온몸은 흥분으로 달구어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저 그녀를 더욱 깊이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갑갑한 옷에서 그녀의 가슴을 해방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때처럼 풍만한 가슴에 밀착되는 느낌을 만끽하고 싶었다. 재킷을 풀어헤친 손은 셔츠마저도 밀어내고 가슴을 짓누르며 혹사시키고 있는 브래지어로부터 풍만한 가슴을 해방시켰다.

“으흑”

포도 알처럼 탐스러운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유혹하는 유두를 입에 물고 굴리며 물어뜯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녀의 입술이 점점 달콤해지면 그녀에게서 입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는 손 안에 잡히지 않는 풍성한 가슴을 꽉 움켜잡으며, 그녀를 먹어치울 것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유혹의 정점으로 입술을 가져가려는 순간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컥 열렸다.

“사장님!”

민혁은 생애 처음 부하 직원 앞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풀어놓은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몸으로 그녀를 감추며, 조금은 벌게진 얼굴로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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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저...저....그게.......119 사람들이......”

항상 침착하고 유능하게 행동했던 여비서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입사 후 처음으로 할말을 잃고 얼굴이 빨개져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 본 민혁이야 말로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온갖 장비를 갖춘 119 대원들과 경비원, 비서진들이 활짝 열린 사장실 앞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경은 그녀 답지 않게 민혁의 품에 얼굴을 묻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런 난감한 상황 속으로 밀어 넣은 민혁을 욕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못했지만…….

“민...민혁 오빠가...결혼한다....고?”

“그래.”

수영은 자신이 전해준 소식에 충격을 받은 듯한 수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외삼촌댁에 용돈이나 얻으려고 갔다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외숙모가 민혁 오빠를 결혼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결혼을 서두르지 않아 외숙모가 애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갑작스럽게 결혼이라니...... 수영에게는 별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아빠와 오빠가 기대하고 있듯이 민혁 오빠가 결혼을 안 하면, 그녀와 오빠에게 상속될 재산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녀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외숙모에게 말로는 축하를 했지만 마음은 그다지 좋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요 계집애에게 전하는 것만은 정말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듯 창백해져 휘청거리는 꼴을 보니.......

수영은 수빈이 초등학교 때 갑자기 언니랍시고 나타날 때부터 죽도록 싫었다. 집안을 시끄럽게 만들고 엄마를 쓰러지게 만든 데다 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빼앗아갔다. 어릴 때부터 눈에 띄게 커다란 눈과 가늘고 긴 팔과 다리로 가녀린 척 사람들을 꼬드기며, 그녀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알게 해 주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남자들은 수빈을 보기만 하면 넋을 잃고 그녀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녀는 사생아 따위에게 밀리는 수모에 분노를 삼켜야 했다. 정말로 눈물을 흘리며 방방 뛰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수빈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며, 그녀를 심술궂은 팥쥐로 만들어버렸다. 팥쥐가 될 바에야 철저하게 팥쥐가 되자고 결심한 그녀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수빈을 괴롭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래서 민혁과 수빈 사이에 묘한 감정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제일 먼저 눈치 채고 외숙모에게 알린 것도 그녀였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수영은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수빈을 보며 아니꼬운 듯 중얼댔다.

“흥, 지 주제를 모른다니까....민혁 오빠와 결혼이라도 해서 성진의 안방마님이라도 될 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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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나? 어림없지.”

수빈은 방으로 들어와 문에 힘없이 기대어 섰다.

‘민...혁...오빠가 결혼을...’

각오를 한 일이었다. 그 어느 여름 쏟아 붓는 비를 맞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일 때부터 그녀는 각오를 했었다. 그를 떠나보내게 될 날을……. 그러나 현실로 나타나자 그녀는 깊은 나락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희경은 손가락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티파니의 반지를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이 반지가 손에 끼어졌는지 알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민혁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처럼 당황해 하던 그는 금세 너무나 뻔뻔하고 당당하게 행동해, 대신 그녀가 두 배로 창피해 하고 두 배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숫자 판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에게 민혁은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119 구조대라니, 호흡 곤란으로 산소호흡기가 필요할 정도로 그런 강한 키스를 받고 싶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이렇게 이죽거리는 그에게, 그녀는

“목을 비틀어 놔도 산소호흡기로 소생 될라나?”

라는 말로 대꾸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녀의 뒤를 쫓는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가면극11장

“앞으로 바빠질 텐데, 조금이라도 여유 있을 때 얼렁얼렁 들어가 쉬라고,”

선배의 말에 몽상 속에서 빠져 나온 희경은 머리 속에서 맴도는 생각을 쫓으려는 듯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니야, 현장에 나가봐야지.”“너 대신 이대리 내보냈어.”“뭐? 왜?”“왜긴 왜야.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네가 맡았던 일 모두 이대리에게 넘겼다.”

Page 29: [김성희]가면극

“무슨 소리야 그게.”

희경은 벌떡 일어나 소리를 꽥 질렀다. 선배는 희경의 손을 덥석 잡고, 마구 흔들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희경아, 네 덕에 우리 회사는 탄탄대로로 쭉 뻗은 고속도로만 달리게 생겼다. 고맙다 고마워.”“......?”

실내 장식이 고급스러운 카페 안은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며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직원들은 손님들이 안락하고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수빈 앞에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하고 투명한 물 잔이 소리 없이 조용히 놓여졌다. 그리고 주문을 받기 위해 웨이트레스가 테이블 옆에 섰으나 그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 테이블엔 부푼 배 때문에 불편한 아내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 애쓰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산달이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은 여자는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였지만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에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저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면......’

고운 선을 그리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출생은 축복받지 못했다. 아니 엄마의 자궁에 자리를 잡고 심장박동을 시작할 때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수빈! 그녀의 아버지 한정철은 30초반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성진그룹의 외동딸과의 결혼으로 든든한 후원자를 얻으며, 남부러울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시샘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식 문제였다. 그의 아내는 결혼 후 7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고, 그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들이 다 있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남들에게 마치 자신이 무능한 것처럼 보여지는 것만 같았고, 아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뿐이지 엄청났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대리모를 통해 자식을 갖는데 합의하게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인공수정을 계속해도 실망만을 맞보아야 했던 아내는 그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승낙을 했다. 그는 비밀리에 여자를 알아보았고, 갑작스런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어 돈이 다급한 수빈의 엄마를 찾아냈다. 그녀는 병환 중인 엄마의 수술비를 위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팔았고 인공수정을 통해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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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다. 그러나 지독한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녀가 임신을 확인했을 때, 7년 동안 필사적인 노력에도 임신을 하지 못했던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한 것이다. 그의 아내는 당당하게 대리모를 유산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50%의 확률에 확신할 수 없었던 그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출산할 때까지 숨겨두었다. 그의 아내는 9개월 만에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들을 낳았다. 비록 4주나 빠른 출산이었지만 3kg이 넘는 튼튼한 아이였다. 그 순간부터 수빈의 엄마는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녀의 엄마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처녀의 몸으로 대리모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하여 죽음을 석택했다. 수빈의 엄마는 수빈을 뱃속에 품은 채 쓸쓸한 장례식을 홀로 치렀다. 그리고 누구의 축복도 없이 혼자서 고통스러운 출산을 마쳤다. 아이의 아비는 그녀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도 내밀지 않고 비서관을 보내 그녀와의 모든 인연을 끓겠다고 통보했다. 그렇게 수빈의 엄마와 수빈의 세상살이는 시작되었다.

엄마가 숨을 거두기 전에 힘들게 털어놓던 말들이 생생히 귓가에 맴돌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행복한 임산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그제야 옆에 앉은 민혁을 발견했다. 언제 온 걸까?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눈물을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곤 하는데.그녀는 그에게, 있는 힘을 다해 웃어보였다.

“오빠, 결혼 소식 들었어. 축하해.”

마음과는 다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며 가볍게 떨렸다. 그가 결혼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질까봐 두려웠다. 몇 해 전 자신의 선택을 죽을 만큼 후회한다고 그에게 매달릴까봐 무서웠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꽉 움켜잡고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학…….준비해. 수속이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날 수 있게.”‘감옥 문이 열린 거야?’“고모부에게는 어머니가 말씀드릴 거야. 아무 걱정 안 해도 돼.”‘오빠 결혼을 담보로?’“수빈아!”“......”“난....네가....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오빠! 내가 오빠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수빈은 말간 눈으로 민혁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녀를...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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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오빠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결혼하는 건 싫어.”“글쎄, 이렇게 담담한 마음을 사랑이라 할 수 없겠지?”“오빠 결혼이 나 때문이라면.......”“지금 사랑하지는 않아.”“그럼....”“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지 않아.”“.......”

가면극 12장

집 앞에 차를 세우며 희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결혼이란 광풍에 휩쓸려 꼭두각시 마냥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모든 걸 제멋대로 하는 그 인간만 생각하면 화병이란 것이 절로 생길 것 같았다. 선배에게까지 손을 쓰다니, 그 치밀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배가 문 미끼는 성진 그룹 계열사인 성진 건설에서 짓는 모델 하우스의 실내장식을 모두 선배 회사가 맡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도 너무 했지, 후배를 팔아 돈을 벌겠다니.... 결혼 얘기가 깨져도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버린 선배의 등살에 사표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내가 거기 아니면 일할 데 없을 줄 알고?

희경은 대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결혼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제일 큰 관문인 엄마를 설득해야만 했다. 올해 들어 이상하게 결혼을 재촉하고, 재고 정리하려는 듯 서두르기만 하는 엄마를 설득하는 일만 성공하면, 상황은 금방 종료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언제나 진심으로 희경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였었고, 이번에도 그러리라 의심치 않았다. 정말 이렇게 희경을 몰아붙이는 것은 엄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현관을 들어선 희경은 집안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을 금방 눈치 챘다. 거실을 치우던 아줌마는 아상하다는 듯 희경을 보았다.

“오늘이 그날이잖아.”

아, 그랬다. 오늘은 엄마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는 날이었다. 어릴 적에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 적이 있었는데, 희경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엄마도 이 일만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셔서 한참을 울었던 일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우는 희경을 다정하게 안아주시며 언젠가는 꼭 데려가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희경아!”

회상에 잠겨있던 희경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아버지가 희경을 보며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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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하듯 어느새 희경도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불편해하는 것을 배우고 말았다. 희경의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시며 희경을 따라 들어오라 하셨다. 희경보다도 아버지가 희경과 다 둘이 있는 공간을 피하졌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희경에게 불길한 예감을 갖게 했다.

아버지는 희경과 마주 앉아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하셨다. 희경은 다소곳하게 앉아 아버지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지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피하는 아버지에게 씁쓸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내 달쯤 약혼식을 하고, 올해 안에 결혼을 해라.”“........”

희경의 일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던 아버지가 그녀의 약혼과 결혼을 사업 계획을 발표하듯 말하자 그녀는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쏘아보았다.“전 결혼하지 않아요.”

그녀는 한마디 똑똑 부러지게 말을 했다. 그제야 아버지는 희경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습니다.”“.........”“전 제 몸속에 흐르는 피를 누구에게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쏘아보는 희경을 물끄러미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나를 원망하니?”

희경은 미동도 않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원망스럽겠지.”

아버지는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정원을 응시했다. 서재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도 희경은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흔들림 없이 앉아있었다. 희경이 서서히 지쳐갈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어머니는....올해를 넘기시지 못할 거다.”

희경은 처음에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올해를 넘기시지 못하신다니....... 희경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빛에서 자신의 귀에 들린 말이 환청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 하나님! 희경은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듯한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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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빠져들었다.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카페 인테리어가 꽤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운걸.”“그래, 공간도 답답하지도 않고 여유롭게 잘 꾸몄네.”“하하하, 인부들이 내 취향 좀 맞추느라 고생 좀 했지.”

민혁은 정태의 잘난 척에 마시던 칵테일을 쏟을 뻔했다. 정태의 한심한 취향에 진저리를 치며 성질을 부려대던 희경이 끝내는 발차기로 멋지게 날렸던 일이 이리도 생생히 기억하는 민혁이었다. 그 앞에서 카페 구속구석까지 자신의 손길이 안 닿은데가 없다고 허풍을 떠는 정태의 모습이 웃음을 터지게 했다. 갑자기 정태의 아이큐가 몇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지기도 했다.

“오늘은 내가 오픈 기념으로 쏜다. 마음껏 즐겨.”

친구들에게 인심을 팍팍 쓰는 정태에게 민혁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코는 괜찮냐?”“?”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정태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분명 희경에게 코뼈가 부러질 뻔한 일이 생각난 게 분명했다. 민혁은 쿡쿡 대며 다시 웃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자꾸만 웃게 되는 자신에게 의아해 하면서....

“저....민혁 오빠!”

잠시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져 있던 민혁은 망설이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자신이 나타나는 자리에 꼭 얼굴을 내미는 장미경이었다. 장미경! 대성 건설 회장 딸이니, 희경과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 만난 후 처음으로 지루함을 지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의 싹싹한 사교적인 미소에 그녀가 흥분한 듯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곧 민혁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모여지는 것에 만족한 듯 주변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그에게 허리를 굽혀 귓속말로 속삭였다.

“오빠에게 할말이 있는데.....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그는 둘만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른 사람에게 은밀한 상상의 여운이라도 남기려는 듯 그녀는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몸을 밀착시켰다. 그는 미경에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룸의 소파에 기대앉는 그의 옆에 앉아 미경은 가슴 굴곡의 다 들여다보이는 칵테일 드레스 상체를 숙여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봐 달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치함에 따분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명품의 맛을 이미 아는데, 식염수로 부풀린 가짜 가슴에 감동할리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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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은가? 그녀는 분명 그녀의 사촌이 얼마나 풍만하고 아름다운 가슴을 지녔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볼 때마다 감추고 죄고 덮어써서 숨기고 있으니.......

“할말이라는 게 뭐지?”

미경은 자신의 유혹에 반응은커녕 지루해 하는 표정을 발견하고 자존심이 상해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자신의 말에 격분할 민혁의 모습을 상상하며 서둘러 말을 꺼냈다.

“저....이건 소문이겠지만 오빠와 희경이가 결혼한다는 말이 있는데.......”“사실이야.”

민혁이 망설임 없이 사실을 인정하자 미경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정말 결혼한다는 거예요?”“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하려고 하는데.”“오빠는 속고 있어요.”“뭐?”“교활한 희경이에게 속고 있다고요.”“무슨 말이지?”

민혁은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 희경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말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민혁은 미경이 희경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무척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희경에 대한 비방을 듣고 싶지 않았다.

민혁의 불쾌해 하는 표정에 미경은 쾌재를 불렀다.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떳떳하지 못하게 속인다는 사실은 분명 불쾌한 일인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희경이 갠 사생아예요. 큰엄마가 바보처럼 친딸처럼 키웠지만, 희경인 큰아빠가 출장 중에 만난 여자와 하룻밤 불장난으로 생긴 아이라고요. 근본이 떳떳하지도 못하면서, 그걸 숨기고 결혼하려고 한다니까요. 뻔뻔하게.......”

가면극 13장

민혁의 여비서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계속 울려대는 전화 때문에 머리 속에서도 전호 벨소리가 윙윙 울려대는 것 같았다. 여비서는 닫힌 사장실의 문을 힐끔 보았다. 신문사 방송사 할 것 없이 결혼의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몸살 내며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터뷰할 기회를 노리며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보면서도, 사장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회의를 주도하고 업무 보고를 받고, 거래처 사람과 면담을 하는 등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오전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 냉정함과 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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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미함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하지만 여비서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직원들 앞에서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만을 보여주던 사장이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만 것이다.

약혼녀의 몸을 사정없이 더듬고, 그 보다 더한 것을 하던 중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포즈로 사장실을 들이 닥친 사람들을 맞이해야 했다니…….큭큭큭 그 때 일을 떠올리면 사장님이 아무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쩌랴. 그 때 전화벨이 또 울리자 여비서는 인상을 쓰며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사장실입니다.”“서민혁 사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지금은 전화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세요.”“......장희경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해주세요. 핸드폰 번호는....”

여비서는 이름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잠..잠깐만요.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여비서는 허둥지둥 사장실로 전화를 연결하고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한번 본 사람은 얼굴과 목소리를 잊어버리지 않는게 자신이 내세우는 장점 중의 하나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던 여비서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사장실 쪽을 보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뭐야? 서로 핸드폰 번호도 모른단 말이야?”

민혁은 다짜고짜 할말만을 던지고 끊겨버린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에 남에게 명령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민혁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그러지가 않았다. 오히려 약속한 시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다. 민혁은 이 낯선 감정을 새로운 장난감에 들떠 있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남은 시간을 업무에 몰두하기로 결정했다.

점심때가 되자 음식점들마다 사람들로 넘쳐 나고 밖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희경은 쌈밥집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시계를 보았다. 그녀의 일방적인 약속이긴 했지만 매너 없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인간을 위해 1분도 기다려주지 않을 작정이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30분이나 먼저 와서 자리를 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쌈밥 집은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하루 전에 예약하거나 일찌감치 와서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쌈 재료들이 풍성함을 자랑하며 수북이 쌓여있었고, 이 집만의 특별 비법으로 만든 장은 구수한 냄새를 술술 풍기며 입맛을 자극하고 있었다. 흥! 늦으면 누가 손해인데. 희경은 불에 달궈진 솥뚜껑 위에 삼겹살을 척척 올려놓았다. 삼겹살이 기름을 쪽 빼고 쌈 위에 올려지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때 서민혁 그 인간이 거만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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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기자들을 따돌리고 오느라고....”

희경은 푸른 야채를 몇 겹 겹쳐 놓은 뒤에, 잘 익은 돼지고기를 척 얹고, 쌈장을 듬뿍 발라 입을 크기 벌려 한 입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민혁을 무시한 채 맛나게 우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민혁은 40분이나 늦은 죄로 박대하는 희경의 반응에 서운해 하는 기색도 없이 자리에 척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이 집을 알고 있었네. 나도 좋아하는 곳인데. 여긴 해초 쌈이 별미지.”

민혁이 젓가락을 집어 야채 위에 구워진 돼지고기를 얹으려고 하자 희경이 손등을 탁 치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뭐라고?”

희경은 입 안 가득 찬 쌈을 힘겹게 삼키고는 짜증을 냈다.

“자기 건 자기가 구워먹으라고. 이건 다 내가 침 발라 놓은 거야.”“서로 침도 맛본 사이에 무슨......그리고 음식은 나눠 먹어야 제 맛이지.”

민혁은 쌈을 싸서 재빨리 입에 넣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민혁을 째려보던 희경도 바쁘게 손을 놀려 쌈을 싸먹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볼이 미어지게 쌈을 입에 밀어 넣으며, 손을 쉬지 않는 희경에게 질세라 민혁도 연신 쌈을 싸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들이 손을 멈춘 건 시끄럽던 음식점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고개를 든 두 사람은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자신들에게 쏠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순간 음식을 씹지 못할 정도로 쌈을 입에 밀어 넣었던 희경이 캑캑거리며 고통스러워하자 침묵이 깨지며 음식점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괜찮아? 그러게 음식 갖고, 그런 미련한 짓을 왜 해?”

민혁은 희경의 등을 두드려 주며 잔소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당신은 안 했어?”“나야 타고난 매너로 같이 식사하는 사람과 보조를 맞추었을 뿐이지. 자신을 학대하진 않지.”

희경은 위가 좁다고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오고 싶어 하는 음식물을 간신히 막으며, 잘난체하는 저 인간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특대 사이즈로 맞춘 해머로 말이다.

희경은 민혁의 차를 타고 나와 강가에 잠시 세워두고 있었다. 평일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고 한가했다. 희경은 체하려는지 답답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민혁을 만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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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목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항상 이 인간만 만나면 원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했다.

“이봐요 서민혁씨, 당신에게 할말이.....”

희경은 말을 꺼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혁의 손이 거침없이 희경의 티셔츠를 올리고 브래지어 끈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뭐하는 짓이야?”

민혁의 손을 밀어내려는 희경의 의도를 철저히 무시하고, 민혁은 브래지어를 풀러 손에 들고 혀를 찼다. 어깨가 아파 끈 없는 브래지어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걸로 누르고 죄어대며 고문하니, 체하지. 여자들이란......”“이리 내놔.”희경은 얼굴이 새빨개져 이를 갈며 그의 손에서 브래지어를 되찾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손에 진 전리품을 자세히 관찰하며 의아해 했다.

“이건 수학적으로 맞지 않는데? 내 손으로 재어 본 질량감으로 보아선 이 안에 다 들어갈 수가 없는데…….”“서...서민혁!”

희경은 소리를 빽 질렀다. 하지만 갑자기 위로 들려진 티셔츠 자락을 내리는데 더 안간힘을 쏟아야 했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 눌러댔으니, 이런 자국들이 나지? 멍청한 거야? 학대가 취미인거야?”

희경에 가슴에 선명하게 난 붉은 자국들을 보며 민혁이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내자 희경은 더 이상 화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혁이 붉은 자국을 지우겠다고 가슴을 문질러대자 희경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봐 할 얘기가 있단 말이야.”“얼마든지.”

민혁은 희경을 끌어당겨 목에 입을 가져다 대며, 희경의 말을 재촉했다.

“나랑 정말 결혼할 생각이야?”

희경은 그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려 애쓰며 말을 잇는다.

“빠른 시일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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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녀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잡고, 입술을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기며, 입술 쪽으로 옮겨가자 그녀는 점점 익숙해지는 감정에 몸을 떨었다. 그의 입이 그녀의 입을 덮으려고 할 때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사생아인데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거친 숨으로 들썩이고, 그녀의 입에서 가쁜 숨을 내쉴 때,

“그래서?”

라고 되물었다. 너무 담담한 반응에 희경은 괜히 짜증이 났다.

“난 우리 엄마 친 딸이 아니야. 아버지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생긴 애물덩어리가 바로 나란 말이야.”

자신도 모르게 희경의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길 원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그래도 결혼 할 거냐고?”“물론!”

그의 단호한 말에 의식하지 못했던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그에게 기운 없이 기대는 꼴이 되었다.

가면극 14장

그에게 정신없이 키스를 받던 희경은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흠칫하며 억지로 입술을 떼어냈다.

“당…….당신...알고 있었지? 내 출생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그녀의 출생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답을 얻었다. 너무나 담담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인 그의 태도가 그제야 납득이 갔다. 그를 만나 이야기하기로 결심하고, 긴장하고 마음 졸였던 일이 갑자기 억울하고 화까지 났다.

민혁은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희경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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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집중 해주면 안 될까?”“어떻게 알았지?”“어휴, 내 자존심을 팍팍 구기는 군. 내가 키스 중에 딴 생각을 하게 할 만큼 한심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누가 알려준 거야?”“난 3시에 꼭 참석해야 할 회의가 있어.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않게 잠시 입 좀 다물어 주겠어?”

민혁은 그녀의 입이 더 이상 떠들어 대지 못하게 단단하게 막았다. 그 때 아주 잠시 악의가 가득한 얼굴로 희경에 대해 떠들어대던 미경이란 여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신문에 큼지막하게 성진과 대성이 사돈이 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미경은 신문은 찢으며 신경질을 냈다. 아침에 배달되어 사람들이 봐주기를 기대했던 신문은 1면에 실린 기사 때문에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긴 채 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경의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희경이 희경이 희경이, 온통 희경이야!”“미경아, 진정해라. 응,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흥분하면 몸에 안 좋아.”“엄마, 희경이가 정말 민혁씨랑 결혼하면 어떻게 해. 그 꼴을 어떻게 보냐고.”“걱정 마. 그런 일을 없을 테니까.”“이렇게 약혼식 날짜까지 신문에 났잖아.”“실컷 떠들라고 해. 약혼식장에 누가 서냐가 문제니까.”“.......”

엄마는 의미심장한 소리 미경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정말?”“그래, 엄마만 믿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아이, 엄마, 정말이지? 그럼 약혼 드레스 맞춰놔도 돼지?”“그럼.”

미경의 엄마는 그녀의 태도가 애교스럽게 변하자 마냥 예쁘다는 듯 손을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미경이 눈빛이 심술궂게 번뜩였다.

‘흥, 희경이년 두고 봐라. 누가 약혼식장에 서게 될지.’

세련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유명 디자이너 숍 앞에 민혁의 차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희경은 똥 씹은 표정으로 뚱하니 내릴 생각도 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앉아있다. 민혁은 참을성 있게 희경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고, 차문까지 열어주었다. 그래도 희경은 못마땅 얼굴로 앞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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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고 있다.

“내려.”“.....”“안고 갈까?”

희경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고 가려고 손을 뻗는 민혁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 신음을 내뱉으며 그에게 사정을 한다.

“나 혼자 가면 안돼?”“안돼.”

민혁이 한 마디로 자르며, 희경의 손을 잡아당겼다. 희경은 성질을 못 이기며, 대뜸 민혁의 다리를 한방 걷어찼다.

“아이고!”

과장스럽게 절뚝거리며 쫓아오는 그를 무시하고 그녀는 씩씩거리며 디자이너 숍으로 들어갔다. 뭐든지 멋대로야. 조카 진우가 아파 약혼 드레스 맞추는 날짜를 미루려는 엄마를 겨우 설득해 혼자 올 수 있게 되었다 했더니, 혹덩이가 하나 달라붙고 말았다. 아니 내가 입을 옷 내가 맞추는데, 왜 감내라 배내라 하겠다는 거야?

희경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까지 생각나 더욱 더 성질이 났다. 그녀는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납치라도 당하듯 민혁에서 이상한 곳으로 끌려갔다. 여자 속옷만 잔뜩 쌓인 곳으로 들어간 희경은 잠시 이 남자가 변태가 아닐까 걱정을 했다. 그 곳은 말로만 듣던 속옷 맞춤 매장이었다. 사방에 거울로 장식되어 있고, 넓은 홀은 순식간에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는 팔등신 미녀들의 속옷 패션쇼장으로 바뀌었다. 고객은 단 둘 민혁과 희경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속옷의 물결에 눈이 어지러워 정신이 없는 희경에 비해 민혁은 아주 익숙한 폼으로 능숙하게 척척 주문을 해댔다. 점원에게 끌려가 룸에서 옷이 몽땅 벗겨져 사이즈를 잴 때야, 희경은 겨우 정신을 차렸고,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 때 맞춘 속옷들이 어제 산더미처럼 배달되었고, 아침에 그 속옷을 입고 갖추어 입으라는 명령까지 받아야 했다. 포장을 풀고 그녀는 엄청난 컵 크기의 브래지어에 입이 벌어졌는데, 황당한 건 그것에 몸에 딱 맞고 편하다는 사실이었다.

드레스를 겨우 선택하고 사이즈를 재는데, 몸을 움츠려 가슴을 작게 줄이려는 그녀의 의도는 팍팍 무시하고 그는 등을 똑바로 세우고 가슴까지 내밀게 해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가슴을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다. 숍 직원들 때문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다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약혼식장에 젖소부인을 데려가 구경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풋, 젖소 부인이 되기엔 섹시함이 부족하지 않을까? 남들은 수술로 가슴을 키우고 싶어 안달인데 천연산 가슴을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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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싫어. 무조건 싫다고. 날 낳아준 여자와 빼다 박은 듯 닮은 이 가슴이 미치도록 싫단 말이야.”

희경은 소리를 지르다 목이 메어오자 창밖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민혁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을 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희경은 그의 가슴을 팍 밀어젖히며 그를 똑바로 보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가늘게 떨리고 있는 어깨만이 그녀의 울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친엄마를 만났었군.”“나에게 엄마는 한 분 뿐이야. 그 여자는 나에게 그 잘난 유전자를 남겼을 뿐이라고.”

그랬다. 희경은 친엄마라고 굳게 믿었던 분이 자신을 낳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중학교 2학년 겨울에 통장을 털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LA 공항에 도착해서 그녀가 없어져 발칵 뒤집힌 집에 전화를 걸어 핏덩이 그녀를 집 앞에 던져버리고 사라진 여자의 주소를 요구했다. 꼭 만나야겠냐고 몇 번을 물으시던 엄마는 희경의 의지를 존중해 그 여자의 주소를 가르쳐주셨다.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은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파트였다. 희경은 그 여자가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버린 것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도 높아만 갔다. 엄마가 알려준 아파트 호수 앞에 서서 그녀는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긴장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벨을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문이 열리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었다.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그 여자는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묵직한 가슴이 거의 드러나 보이는 이브닝드레스 차림이었다. 길고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는 한쪽 어깨로 모아져 흘러내렸고, 목엔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희경을 위 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너구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함이 없었다. 희경은 직감적으로 엄마가 미리 전화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작스런 방문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너 때문에 파티에 늦게 되었잖아.”“......”

희경은 기가 막혔다. 15년 만에 보는 딸을 보고 말로라도 반가워하는 척 하기는커녕 파티에 늦게 생겼다고 불평이라니……. 자신이 이 여자의 배를 빌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정말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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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지 않았다. 긴장으로 떨리던 몸이 떨림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맹렬히 치솟는 분노가 차지했다.

가면극 15장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냉정하게 등을 보이는 여자를 따라 희경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누워서 뒹굴어도 될 정도로 커다란 소파에 편히 앉은 남자가 희경의 등장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술잔을 손에 들고 있는 그 남자는 벌써 꽤 마신듯 듯 눈에 붉은 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10분 정도 시간을 주지. 더 이상은 안돼.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야기 해봐.”“........”

희경을 낳아다는 여자는 시계를 보며 귀찮은 듯 말을 꺼냈다. 너무나 차갑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질문에 희경이 LA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생각했던 질문들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고, 희경은 선고가 미루어진 사람처럼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자꾸 위축되려는 자신에게 힘을 내라고 위로하고 있는데, 자신을 훑는 끈끈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리자 그 남자가 느끼한 미소를 입에 걸며 술잔을 들어 보였다. 희경은 속이 울렁거리는 불쾌감을 느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아파트 안을 구경했다. 화려한 가구와 장식품들로 꾸며진 실내는 따듯함보다는 차가운 냉기를 느끼게 했다. 왠지 아파트의 주인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빠져있던 희경은 어깨를 짚는 손에 흠칫해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 남자가 희경의 뒤에 바짝 붙어 서있었다. 희경은 그 남자이손에서 빠져나오고자 뒷걸음쳤지만 등을 가로막는 벽에 의해 막히자 자신의 선택이 오히려 그 남자에게 갇히는 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벽을 짚으며 희경을 꼼짝 못하게 했다.

“몇 살이지? 열둘? 열셋?”“......”

입은 딱 달라붙은 듯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희경은 그저 그 여자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남자는 희경을 불안하게 만드는 눈초리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흠…….얼굴은 어려 보이는데…….몸은 남자를 유혹하려고 안달이 난 여자군.”

남자는 느릿하게 말을 늘이다가 갑자기 희경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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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기겁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남자는 희경의 몸부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마구 주물러댔다. 코를 역하게 하는 술 냄새와 손의 완력에 고통스런 몸, 그리고 공포에 희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손에서 풀려 난 것은 화가 난 그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무슨 짓이야.”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장난이었어.” “죽고 싶어?”

그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는 그 여자를 바라보는 희경의 경직된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희경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고이 돌려보내지 않으면 한 푼도 받을 수 없어. 내 은행 잔고가 비는 꼴을 보고 싶어?”

남자는 성질을 내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끌어안고 이브닝 드레스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주물러 대며 여자의 몸을 흉측스럽게 긴 혀로 핥아댔다. 그러나 그 남자의 시선은 희경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희경은 자신을 낳았다는 여자와 그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벌이는 수작을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지켜보았다. 하나님 이 여자가 정말 절 낳은 여자입니까? 낯간지러운 신음을 뱉으며 몸을 틀던 여자의 욕망에 흐릿해진 눈이 희경과 마주쳤다. 그 순간 냉기가 눈을 휘감더니 희경을 향해 차갑게 한 마디를 했다.

“건방지게. 내 남자를 꼬시려고 해? 젖비린내 나는 주제에.”

희경은 어떻게 아파트를 빠져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밖으로 빠져나와 끝없이 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 때 느낀 절망감은 그 혐오스런 여자의 피가 자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온 몸의 피를 몽땅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 여자의 흔적을 몸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맹세했다. 그 여자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그러나 그 여자와 똑같은 흉측한 가슴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낳은 것이 누구인가를 떠올리게 했다.

희경이 싫은 기억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차가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희경이 지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민혁이 희경의 손목을 잡았다. 희경이 돌아보자 민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비하는 내가 아는 희경이 답지 않은 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 세상에 나올 수는 없어. 하지만 희경은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자랐고, 그것을 만나는 매 순간 느낄 수 있어. 친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아. 난 희경이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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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리고 희경이 자신을 비하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장모님이 슬퍼하실 거라고 생각해.”

민혁은 희경을 끌어당겨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기운을 내라고. 축 처진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그리고 씩 웃어 보이며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금의 바디라인에 무척 만족하고 있는데. 그리고 날 부러워할 놈들이 많을 거라는데 돈을 걸 수 도 있고.”“뭐…….뭐라고?”

희경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자 민혁은 희죽 웃으며 입술에 꾹 도장을 찍고 희경의 불끈 쥔 주먹을 피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차를 향해 주먹을 마구 휘두르던 희경은 마음 한 곳이 따뜻해지는 것에 당황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쪽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에서 해방이 되었다.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돌아서던 희경은 자신에게 쏠려있는 시선을 느꼈다. 사무실 창가마다 사람들이 얼굴을 길게 빼고 희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희경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소리를 빽 질렀다.

“구경났어?”

가면극16장

어학원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외국인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다. 사람들과 좀 떨어져 걷고 있는 수빈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수빈은 미안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강 학생들과 거리가 멀어지자 간신히 걸려있던 미소도 사막처럼 메말라버렸다.

수빈은 유학을 위해 어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수업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지만 강사의 강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은 민혁의 약혼에 맴돌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신문에 난 약혼 소식은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인식시켰다. 이제는 그저 해바라기마냥 옆에서 바라보는 일도 지나친 욕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그의 선택을 고마워해야 하는데, 왜 이리 원망스런 마음이 드는지…….

그녀는 며칠 전에 민혁 오빠의 어머니께 불려갔다. 뻣뻣하게 얼어붙어있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물으시며, 유학 가고 싶은 나라를 말해보라 하셨다. 그녀는 웃음 뒤에 감추고 있는 진심을 알았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떠나게 해, 그녀와의 모든 인연을 철저하게 끝내고 싶어했다. 또 다시 귀하고 귀한 아들에게 혹이 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민혁 오빠의 어머니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귀한 아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도 자신이 자식을 위해 옳다고 믿는 바를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는 힘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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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5년 전 그녀는 그 힘에 겁을 먹었고, 도망을 쳤다. 그 댓가로 그녀는 민혁 오빠를 잃었다. 그리고 날개가 꺾인 채 철저히 새장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드디어 그 새장의 문이 열리는데, 마음은 무겁기만 하고 기쁘지 않았다.

운전을 하는 희경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더니 또르르 흘러내렸다. 병원 주차장에서 한낮의 태양에 뜨겁게 달구어진 차에 타면서 희경은 그 열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차 유리창은 꼭꼭 닫혀있고, 에어컨은 켜지 않아 차 안은 사우나장을 방불케 했다. 솟아나는 땀방울이 흘러내리며 눈물과 섞였다. 희경은 울고 있었다.

희경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엄마는 병에 걸려있었다. 아빠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시다는 말을 듣고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이 한눈에 느껴졌다. 쉽게 피곤해하시고, 외출은 드물고, 되도록 여러 가지 핑계로 가족들이 다 모일 기회를 만들고……. 왜 몰랐을까? 무신경했던 자신이 한심하고 미웠다.

엄마의 자궁에 혹이 생겨 수술을 하였었다. 희경은 그것으로 모두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는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몇 번을 더 수술하셨고, 그 수술은 완치가 목적이 아니라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엄마의 생명의 빛은 10개월이란 시간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엄마 담당 선생님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서 엄마의 상태를 완전히 알게 되니 혹시나 하는 희망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희경은 엄마에게 민혁과 약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순식간에 기쁨이 번져가는 엄마를 보며 희경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요?”“그럼, 우리 희경이가 엄마 마음에 딱 드는 짝을 만났는데.”“인심 쓸게요. 또 바라는 거 있으면 말만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해줄 테니.”“음, 희경이가 나은 예쁜 손녀 안는 거. 희경아, 딸 낳아라. 엄만 정말 예쁜 손녀딸 갖고 싶다. 희경이 꼭 닮은 예쁜 아이.”“조금만 기다려요. 열심히 노력해서 엄마를 예쁜 할머니 말 들어 만들어 줄게.”

웃으며 말했지만 희경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희경은 웃는 엄마의 얼굴을 눈이 아프게 바라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놓으려는 듯이…….

눈물을 떨어내려 눈을 깜박이다 빨간 신호를 놓치고 말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행단보도를 조금 미끄러져 차가 멈췄다. 희경은 미미하지만 차에 무언가가 부딪혔다는 것을 알았다. 재빨리 차문을 열고 나가보니, 한 여자가 쓰러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네.”“어머 수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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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경은 몸을 일으키는 여자가 수빈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걱정과 반가움이 섞인 소리를 내었다. 수빈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희경은 자신이 그 때와는 달리 깔끔한 정장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씩 웃어보였다.

“우리 지난번에 민혁씨와 함께 만났었잖아요. 제가 민혁씨 턱을 한방 먹여서 수빈씨가 놀라고…….”“아…….”“이제 기억나요? 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빨리 병원에 가요.”“아니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데…….”

수빈은 병원 진찰대에서 내려오면서 막무가내로 자신을 병원으로 데려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여자. 장희경! 그녀가 바로 민혁 오빠의 약혼자였다. 그녀는 오빠가 왜 그녀에게 끌렸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부러움과 함께 질투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그녀에게…….

“민혁씨에게 전화했어요. 사촌동생에게 제가 흠집이라도 냈을까 아주 노심초사네요. 곧 온데요.”“연락하지 않으셔도 되는데…….”“굳이 오겠다는데 말릴 필요 없죠 뭐.”

희경은 민혁이 오겠다며 전화를 끊을 때 양심이 조금 켕기는 것을 느꼈다. 전화를 건 것은 수빈이 사고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때문에 마음이 휘청거려서인지 이상하게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래서 그녀가 전한 소식에 수빈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민혁은 병원에 들어서며 수빈을 찾아 시선을 움직였다. 그를 보고 일어서는 수빈을 날카롭게 살피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수빈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르는 아이를 밖에 내 놓은 것처럼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옆에서 지켜줘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의 시작은 그래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수빈을 살피느라 민혁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다 슬그머니 손을 내리는 희경의 몸짓을 눈치 채지 못했다. 희경의 얼굴에 서리는 의문도…….

빨대로 들이마시는 것이 성이 차지 않아 희경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잔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병원에서 민혁을 본 이후로 원인 모를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음물을 마시고 차가운 아이스티를 다 마셔도 이상하게 갈증은 더해만 갔다.

“놀랄 거 없어. 이 정도로 놀라면, 희경이가 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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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 희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민혁은 씨익 웃으며 희경을 바라보았다.

“만날 때마다 날 놀라게 하는 게 희경의 취미거든. 정말 독특한 취미를 즐기고 있지.”“뭐라고…….요?”“화 내지 말라고. 이건 칭찬이니까. 그게 다른 사람과 당신이 차별되는 개성인걸. 날 즐겁게 하는......”

이죽거리며 계속 희경을 놀리는 민혁을 째려보며, 희경은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이에 바스러지는 것이 얼음이 아니라 그이기를 바라며 말이다.

“오빠.....”

수빈은 민혁의 태도에 당황되는지 그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때서야 수빈은 마음속에서 계속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앞에 앉은 성질 긁는 인간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고 앉아있고, 그의 사촌인 수빈이 그와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그녀가 끼지 말아야 할 장소에 앉아있는 이방인 같았다.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얹어지는 수빈의 손도, 수빈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민혁도 그림처럼 어울렸다. 불안이 사각사각 조금씩 그녀의 심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멎고 침묵이 흐르자 서로를 향해 있던 민혁과 수빈의 시선이 일제히 희경에게 쏠렸다. 민혁 의아하게 희경을 바라보았다. 그 때까지 민혁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푸는 수빈은 죄책감으로 보이는 빛을 숨기려는 듯 희경의 시선을 피했다. 희경은 수빈이 소유권을 주장하듯 잡고 있었던 민혁의 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은 많은 생각이 정신없이 뒤엉키고 있었다.

가면극17장

“예쁘구나, 우리 딸!”

엄마의 행복한 미소가 희경의 눈에 쿡쿡 쑤시는 아픔을 주었다. 희경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눈에 힘을 주고, 엄마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딸을 약혼시키면서 우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수척해진 모습을 숨기지는 못했다. 희경은 마음이 아팠다.

시간에 정신없이 휘둘리다 약혼식 날이 되었다. 수빈과 함께 차를 마신 날 이후로, 홍보부에서 언론사에 돌릴 약혼 사진을 찍을 때 빼고는 약혼자의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했다. 약혼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둘만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희경은 답답함을 느꼈었다.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은데, 희경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한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릴 뿐이었다.

“서서방은?”“엄마는…….서서방이 뭐예요?”

Page 48: [김성희]가면극

“서서방이지. 이제 결혼식만 남았는데.”

엄마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희경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는 못했어도 민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를 해 이것저것 거의 명령 수준의 말을 늘어나서 희경을 열 받게 했었다. 어제도 너무 잠을 자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나지 말라는 이죽거림도 잊지 않았는데……. 약혼식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의 이죽거림을 받아칠 만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시부모가 될 어른들의 모습도 보이자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뭔가 순탄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미경은 대기실에서 출입구 쪽을 자꾸 쳐다보는 희경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경은 약혼자가 누구인지 착각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모양을 내었다. 약혼식장에 들어서는 사라들이 의아한 듯 미경을 쳐다보았지만 미경은 오히려 그들에게 당당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자신의 약혼식 장소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미경은 룸에서 나오는 엄마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엄마, 어떻게 됐어?”“훗 잘 될 거야.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냥 없던 일로 하겠니? 그 분이 얼마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그럼, 내가 희경이 대신 하게 되는 거야?”“쉿, 조용히 해. 지금 사모님이 서민혁군과 이야기 하는 중이니까 곧 알게 될 거야.”“아이, 엄마!”

미경은 엄마에게 매달려 어리광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 시간 있을 때 얼른 밑에 내려가 머리 손질 좀 다시 하자. 조금 흐트러진 것 같은데…….”“응, 알았어, 엄마.”

미경은 환하게 웃었고, 엄마는 그런 딸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민 혁은 굳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보았다. 희경을 조금은 닮은 듯이 보이는 여자가 몸을 거의 드러낸 옷차림으로 남자에게 매달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민혁의 어머니는 소파에 앉은 채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고, 화가 나는 듯 중얼거렸다.

“하나님 맙소사. 창녀의 딸을 며느리로 맞을 뻔 했다니…….약혼식을 하기 전에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지.”“그녀를 낳았을 뿐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민혁이 입을 열었다.

Page 49: [김성희]가면극

“그래서? 몸속에 흐르는 피는? 지금 우리 집안에 창녀의 피를 섞겠다는 말이냐?”

그의 어머니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밖에서 낳아온 딸이란 걸 알면서도 이 일을 추진하신 것은 어머님입니다.”“..........”“어머니는 알고 계셨죠?”“그래, 그래도 창녀의 피가 흐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친어미의 행실을 조사한 보고서 좀 봐라. 화려하더구나. 유부남이든 총각이든 가리지 않고 돈 많은 남자에게 꼬리치고, 돈 뜯어내고……. 딸을 담보로 26년간 돈을 뜯어내는 그런 어미를 둔 여자를 며느리로 절 대 못 받아들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어머니가 선택하신 일입니다.”“사생아로도 어엿하게 호적에 올라있고, 그 위 두 언니들의 사위가 대성의 경영과 무관하다는 것이 솔직하게 마음에 들었다. 너와 그 애가 결혼하면 장차 성진과 대성이 하나로 묶이는 그림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에 결혼을 추진했지만 이제 아니야.”“훗, 그럼 홀에 가득 모인 사람들에게 약혼 취소를 발표하시려고요?”“아니, 다른 약혼녀를 세우면 돼.”“뭐라고요?”“대성 건설 장미경! 성에는 안 차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

민혁은 어머니의 이기심에 다시 한번 질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든 말든 자신의 집안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자식의 결혼도 집안의 명예나 이득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판단하자 당사자인 자식의 의견은 전혀 고려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민혁은 갑자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지금 5년 전 여름처럼 그가 맥없이 자신의 말에 따를 수뿐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가 그 때와 얼마나 변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랬다. 그는 그 여름의 상처에서 피를 콸콸 흘리며 성장했다.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이다.

“어머니, 저는 희경과 약혼식을 합니다.”“뭐라고?”“그 장소에 억지로 나오라고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약혼식에 참석할지 이대로 집으로 가실지 어머니가 결정하세요. 하지만 약혼식도 결혼식도 있을 겁니다.”“민혁아!”

민혁은 소리쳐 부르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룸을 빠져 나왔다. 그 곳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약혼녀를 찾으러 갔다. 그녀의 약혼녀가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강하기를 바라며…….그가 전하는 소식이 그녀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Page 50: [김성희]가면극

가면극 18장

희경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지우고 싶어 했던 상처가 세상에 낱낱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신을 잃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꺾이려는 무릎에 단단히 힘을 주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고 턱을 쳐든 채 민혁에게 오만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약혼식을 깨고 싶다는 건가요?”“아니, 당신에게 경고하는 거야.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어머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인정사정을 두지 않아. 그 목표물이 된다는 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수 있어.”“제가 그 희생물이 된다는 말인가요?”“그래. 약혼식을 없던 일로 하고 물러나던지, 싸우던지 그 결정은 당신이 해야 해.”“........”“어머니는 당신 대역까지 결정하셨더군.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장미경?”“정답이야.”“흥! 내 출생에 대한 일로 뒤에서 한방 먹일 인간은 작은 엄마뿐이 없으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미경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갈가리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사람이란 건 진작 알았으니까.”“결정은 내렸어?”“물론이죠.”

희경은 단호하게 대답하고 민혁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자 약혼자, 약혼녀를 에스코트하시죠.”

희경은 전투에 나가는 병사처럼 결의에 찬 얼굴로 한걸음 내딛었다. 민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감탄을 했다. 가늘게 전해지는 떨림이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전해주고 있지만 그녀는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앞을 똑바로 보며 걷고 있었다. 그녀라면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고나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의 불쾌한 대화로 딱딱하게 뭉쳐있던 근육들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팔위에 얹어진 희경의 손을 잡았다. 희경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용기를 주려는 듯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많은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희경의 떨림을 서서히 진정시켰고,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었다. 희경은 생각했다. 그래 부딪혀 보는 거야.

“축하해요 희경씨.”“정말 잘 어울리네요. 샘 날 정도로.”“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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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하며 화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홀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시선이 계속 쫓아다니는 것을 느꼈다.

약혼식 중에 장차 시부모가 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할 때 시어머니 될 분의 냉기가 흐르는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고 말았다. 그래도 그녀는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당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를 키워주신 엄마는 어떤 장소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그녀는 그것을 실천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시어머니가 될 분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약혼식이 끝날 때까지 침착함을 가장하며 사람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격려의 눈빛을 보내주는 약혼자 덕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그와 떨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은 그를 찾아 움직였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들려오자 희경은 한숨을 쉬며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섰다. 미경이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뜨고 희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나 미경아!”

희경은 미경의 한껏 공을 들여 올리고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부터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까지 쭉 훑어보며 감탄을 하였다.

“너무 예쁘다.”“흥!”“그런데 약혼자는 어디 있어?”“뭐?”“오늘 약혼식 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하도 차려입었기에 약혼식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너 지금 날 놀리는 거야?”“놀리긴…….얼마나 약혼을 하고 싶었으면 다른 사람의 약혼식 자리까지 넘보나 궁금해서…….”

사람들이 쿡쿡대며 웃자, 미경은 얼굴이 빨개졌다.

“이 곳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말해줄래? 까치처럼 오작교를 놓아줄게. 너의 견우가 되려면 간이 많이 부어야 하겠지만…….잘 찾아봐.”“너…….너.......”

부들부들 떠는 미경을 뒤로하고 희경은 자리를 떴다. 어느새 다가온 민혁이 그녀를 한쪽 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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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쌌다. 그녀는 민혁의 품에서 엄마에게 눈물을 보이며 투정하는 미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골탕 먹일 때 느꼈던 만족감은 사라지고 씁쓸한 마음이 자리했다. 그런 그녀 마음을 아는 듯 그 후로 약혼식이 끝날 때까지 민혁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면극 19장

“사모님, 점심은 어떻게 할까요?”“생각 없어요. 편두통 약이나 갖다 줘요.”"예, 사모님. “

민혁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한쪽 머리를 쪼아대는 편두통에 고통 받고 있었다. 이렇게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없었기에, 꺾이지 않는 자식의 반항도, 말도 섞고 싶지 않은 미래 며느리도 그녀의 편두통을 부채질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약혼식에 참석했다. 약혼식을 깨서, 사람들의 호기심거리가 되어, 도마 위에서 난자당하느니, 약혼식은 치루고, 그럴듯한 핑계로 약혼식을 취소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약혼식이 끝나고 자식 놈을 아무리 설득하고 협박해도, 고집을 피울 뿐이었다. 어미가 몸져누워도, 오히려 괜한 억지 쓰지 말고, 어머니가 포기하는 게 좋은 거라고 위협까지 해댔다. 생각할수록 그 계집이 자식 놈을 나쁘게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뿐이 안 들었다.

사람을 시켜 복잡한 남자관계라도 찾아낼까 은밀히 뒷조사해 보니, 의외로 남자관계는 결벽증 수준이었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이중적이란 걸 찾아냈다. 요조숙녀인척, 양가집 규수인척 했지만 말도 행동도 다 거친 계집이었다. 지금껏 그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못된 것 같으니! 민혁이 그 놈도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 마음을 바꿔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리는 어미를 자식 놈은 재미있어하며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그 계집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답답했다. 내 절대로 결혼식을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혁의 어머니는 일하는 아줌마가 가져다주는 약을 삼키며 끊임없이 다짐을 하였다.

“엄마, 이렇게 돌아다닐 필요 없어요. 딸이 인테리어 전공인데…….내가 알아서 할게요.”“아니 이 엄마 즐거움을 빼앗겠단 말이야. 딸 시집보내는 엄마의 특권이야.”“그럼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요.”

희경은 엄마의 팔을 잡아당겨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입안에 상큼함이 느껴지는 과일로 만든 다양한 음료와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희경은 엄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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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지 않아요?”“피곤하긴…….”

말은 아니라 했지만 희경은 엄마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희경과 엄마는 혼수 준비를 위한 쇼핑 중이었다. 신혼집을 꾸밀 가구를 고르는 중인 것이다. 희경은 간단하게 자신이 원하는 가구들을 자주 거래하는 거래처에서 팜플랫을 보고 결정하려 했지만 엄마는 희경과 함께 다니며 일일이 가구를 고르기를 원하셨다. 엄마에게 무리가 될까봐 초조한 희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고집을 피우시며 수많은 가구점들로 희경을 끌고 다니고 계셨다.

“토마토와 키위쥬스 주세요.”

희경은 주문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생과일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엄마, 여기 키위 주스가 맛있어요.”“그래?”“뭐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주시는 것만은 못하지만......”

희경은 차가운 얼음물을 입으로 가져가다 엄마가 희경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이상한 듯 물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희경아!”“네.”“후회하지 않겠니?”“무슨?”“결혼 말이다. 엄마가 너무 밀어붙여서 네가 결정을 내린 건 아닌지 마음에 걸려서…….”“아니에요. 제가 민혁씨를 선택한 걸요.”“쉽진 않을 거다. 네 시어머니 될 분이…….”“.........”“조금이라도 망설여지거나 불안하면 하지 마라. 난 네가 제 짝을 빨리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꾸미며 살기를 바라지, 마음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아. 아버지에게도 얘기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널 파혼시키겠다고…….”“엄마…….”“조금 시끄러울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는 법이야. 잘 생각해 보렴.”

희경은 엄마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녀를 걱정하고,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희경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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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아, 남들이 뭐라 해도 넌 엄마의 딸이야. 엄마가 옆에 있든 없던 그걸 잊으면 안돼. 항상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사람들을 대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알겠지 희경아.”

희경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목이 꽉 메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키위 주스와 토마토 주스 나왔습니다. 키위 주스는 어느 분이…….”

서빙하는 사람이 예쁜 색감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주스가 담긴 투명하고 맑은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서빙하는 사람이 주슨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엄마는 희경에게 활기차게 말했다.

“자, 빨리 마시고 오늘 계획했던 곳을 마저 둘러보자.”“네, 하지만 피곤하시면 그만 두셔야 해요.”“알았어.”

엄마는 주스를 마시는 희경을 바라보며 며칠 전 사돈 될 여자와의 불쾌한 만남을 떠올렸다. 마치 그녀 집안에서 엄청난 속임수를 썼다는 듯 차갑고 냉랭하게 따지는 성진의 사모님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희경의 그녀의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것을 알고도 맞선을 추진한 것은 그쪽이었다. 이제 와서 친어미가 문제가 된다니…….

희경은 그녀의 딸이었다. 그녀가 직접 낳은 두 딸과 똑같은……. 그녀는 성진 사모님 웃는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냉혹함과 이기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혼사를 추진한 것은 남자에게 냉담하고 관심이 없던 희경이 그에게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마음이 급했다. 자신 손으로 희경의 결혼을 준비하고 싶었다. 희경이 낳은 자식까지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희경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껴줄 사위를 맞고 싶었다. 그가 서민혁이었다. 그런데 그 어미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희경의 옆에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불안했다. 그녀는 희경을 바라보던 사위의 시선에 희망을 걸자고 생각했다. 희경을 쫓는 사위의 시선에서 희경을 걱정하고 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가면극 20장

민혁은 희경의 집 앞에 차를 세우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시간보다 10분 정도 빨리 도착해, 그는 10분간의 여유를 갖기로 했다. 담배를 물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자리 펴고 누운 정도로 결혼 반대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뭔가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도 한 때는 모든 게 귀찮아 어머니

Page 55: [김성희]가면극

가 흡족해할 신붓감을 받아들일 생각하고, 어머니가 주선한 맞선을 끊임없이 보았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목이 졸릴 것 같은 지루함이었다. 그런 상대와 결혼해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고문이라고 생각했을 때 희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도 처음엔 다른 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이 거듭되고 의도된 만남으로 변해가면서 그의 마음속에 희경이 차지한 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랑의 열병을 앓았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감정이라고 확신하기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희경이 서있었다. 앞단추가 촘촘하게 달린 하얀 민소매 원피스 차림인 그녀는 무척 시원해 보였다. 그러나 창문을 내리자 뜨거운 김에 흠뻑 적신 것 같은 공기가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요?”“아니.”

희경이 차에 올라타자 민혁은 액셀을 밟아, 달리고 싶어 으르렁대는 차의 욕구를 풀어주었다. 희경은 정면을 응시한 채 말이 없었다.

“피곤해?”

희경은 고개를 저었다.

“뭘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그냥 간단하게 먹었으면 좋겠는데…….”“그래?”

차가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희경은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내 오피스텔이야. 회사에서 가까워 일로 집에 못 들어갈 때나,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곳이지.”“개인적인 일?”

희경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자 민혁이 피식 웃는다.

“여자를 데려온 적은 없으니까 의심하지 말라고. 여자를 데려온 것은 당신이 처음이니까.”“저녁 먹자면서 여기는 왜?”“근처에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중국 음식점이 있어. 맛이 괜찮아. 지친 것 같은데, 사람 시선 신경 써야 하는 음식점보단 여기서 편하게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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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리는데 희경의 배에서 ‘꾸르륵’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쿡, 위장은 전혀 지친 것 같지 않군. 오히려 원기 왕성한걸.”“민혁씨 지갑이 꽤 가벼워질 거라는 경고음이에요.”

새침한 희경의 대꾸에 민혁이 ‘쿡쿡’ 대며 계속 웃었고, 희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엘리베이터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희경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어주는 주차장의 불빛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학원을 나오던 수빈은 도로변에 세워진 차를 보고 흠칫 놀랐다. 차 옆에 서있던 운전기사가 수빈을 발견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수빈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아주 천천히 차로 다가갔다. 차 유리창이 스르르 내려지며 민혁의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수빈은 민혁 어머니의 무언의 경고대로 민혁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그에게 오는 전화도 피하며 지내고 있었다. 민혁의 약혼식 사진이 실린 기사를 손에서 떼지 못한 채 며칠 밤을 눈물을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쑥불쑥 민혁 오빠에게 전화를 해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욕심이 치밀어 올라도 수빈은 참았다. 그래서 민혁의 어머니의 등장이 그녀에게 의외였고, 의외의 상황에 그녀의 몸은 떨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라.”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민혁의 어머니는 희빈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수빈은 어떤 반항의 몸짓도 보여주지 않고 순순히 차에 올랐다. 차문이 닫히고, 부드러운 엔진 소리가 들리며 미끄러지듯 차가 출발했다. 민혁의 어머니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고, 수빈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독특한 향과 색감으로 젓가락을 유혹하는 카레탕수육, 입안에서 바삭한 식감을 즐기게 해주려 대기하는 춘권, 갖은 재료가 어우러져 풍성해 보이는 양장피 잡채, 새우와 해파리 양상추가 함께 버무려져 입맛을 돋게 하는 샐러드 등등 식탁이 비좁다는 듯 가득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민혁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다 젓가락만 깔짝거리며 제대로 먹지 않는 희경을 바라보았다. 배달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릴 때만 해도 희경은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점점 생각에 빠져들며 희경의 젓가락은 목표를 잃은 듯 그릇 위만 헤매고 있었다.

민혁은 샐러드 그릇에서 새우와 양상추를 집어 희경의 입에 가져갔다. 희경은 아무런 의식 없이 생각에 잠긴 채 그것을 받아먹었다. 민혁은 차례차례 카레, 춘권, 양장피 잡채를 희경에게 먹였고, 희경은 그저 받아먹기만 했다. 민혁은 웃음이 나왔다. 꽤 많은 양의 음식이 희경의 입속으로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는데, 본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중에도 그녀의 젓가락은 점점 비어가는 접시 위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부족하면 더 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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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의 말에 희경은 그제야 몰두해 있던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됐어요. 생각보다 입맛이 없네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던 희경은 깨끗하게 비운 접시들을 놀랜 듯이 바라보았다.

“뭐야? 이걸 언제 다 먹은 거야? 날 위해 인심 쓰는 척 주문하더니 혼자 다 먹었네.......요.”“이제야 희경이 다운걸. 얌전하게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니 내가 다 이상하다. 그냥 편하게 말해.”

민혁은 재미있다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희경의 말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커피 마실래? 녹차도 있는데.”“너무 배가 불러서 차가 들어갈 공간도 없겠어. 이상하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배가 부르다니…….”“얼마 안 먹었다고? 하! 잘도 들어가던데……. 결혼하면 먹여 살리는 일도 꽤 버겁겠는걸.”“?”

민혁은 커피메이커에서 갓 뽑은 향이 좋은 커피가 담긴 잔을 희경에게 건네주며 진지하게 물었다. 희경은 커피 잔을 건네받고 소파에 기댄 채 그윽한 커피향이 밴 김이 공중으로 퍼져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경 옆에 앉는 민혁의 표정이 어둡다.

“무슨 일이야? 혹 우리 어머니가…….”“아니야, 어머닌 너무 반응이 없어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돈걸.”“그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한거야?” “.........”“말해보라니까.”“우리 빨리 결혼해.”“.......”“최대한 빨리 결혼해. 그래서 아기도 빨리 갖고.”

희경은 민혁을 바라보지도 않고 커피 잔만 빙빙 돌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동안 대답이 없어 희경의 어깨가 점점 굳어지기 시작할 때, 민혁이 희경의 손에 들린 커피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희경을 번쩍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놀라는 희경에게 민혁이 히죽 웃어 보였다.

“흠흠, 날 안고 싶다는 소리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 여자는 처음인걸. 그런 거라면 결혼식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뭐…….뭐야. 이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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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의 입술이 희경의 목선을 더듬고, 손은 부지런히 원피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희경은 한손으론 민혁의 얼굴을 밀어내고, 다른 손으론 원피스의 단추가 풀리지 않게 눌러대기 바빴다.“이제야 좀 혈색이 도는군.”“?”

버둥대며 민혁을 한방 치려고 하던 희경은 그의 말에 동작을 멈추었다. 민혁은 희경의 볼을 톡톡 치며,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계속 안색이 안 좋던데, 장모님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야?”“그걸 어떻게.....”“뵐 때마다 안색이 수척해지시니까.”“........”“그리고 당신이 결혼하겠다고 결심하는데 장모님의 병환이 큰 이유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완강하게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마음을 바꾸고 최대한 빨리 결혼을 하자는 걸 보니, 그 만큼 상태가 안 좋다는 말 같군.”“......”희경은 목이 메어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걱정을 함께 느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치솟아 오르는 흐느낌을 참기 위해 침을 억지로 삼키기를 여러 번 했다. 민혁은 그런 희경을 부드럽게 안아주며 속삭였다.

“참지 말고 울어. 실컷 울고 기운을 차려. 장모님께 병과 싸울 힘을 드리려면 당신이 기운을 내야 해. 당신도 잘 알 거야.”

희경은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며 마음껏 울었다.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울지 못했던 희경이었다. 자신을 단단하게 감싼 팔 안에서 안심하고 희경은 울었다. 민혁의 와이셔츠를 눈물과 콧물로 엉망으로 만들면서……. 그래도 민혁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희경의 울음소리가 잦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패엔”

희경은 민혁이 내민 티슈 통에서 휴지를 뽑아 코를 시원하게 풀었다. 너무 울어 눈도 코도 빨갰지만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답답함이 사라졌다.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고개를 든 희경은 와이셔츠를 벗어 맨몸을 드러낸 민혁을 발견하고 기겁해 벌떡 일어섰다.

“뭐...뭐하는 수작이야?”

가면극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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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나치게 깔끔한 편은 아니지만, 축축한 옷은 질색이라서.”

민혁은 눈물과 콧물로 축축해진 와이셔츠를 들어보였다. 옷 안에 감추어졌던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인 몸이 민혁의 움직임에 따라 아름다운 물결을 그렸다. 희경은 경악하면서도 민혁의 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과 어찌 저리도 다른지…….

“내 몸이 마음에 드는가 보지? 다행인데. 나도 마찬가지니까.”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를 놀리는 소리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희경은 씩씩거리며 옷장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빨...빨리 옷이나 입어...요. 설마 여기에 몸에 걸친 옷 하나 없다는 얘기는 아니겠지?”“후.....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것도 귀여웠는데.”“뭐라구?”

손에 잡히는 옷을 잡아채 돌아선 희경은 어느새 뒤로 다가온 민혁을 발견했다. 놀라 한걸음 뒤로 몰러서는 희경의 허리를 민혁의 팔이 휘감으며 그녀를 옷장에 밀어붙였다. 그의 입술이 입가에 닿는 순간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몸과 몸이 닿은 순간 확 타오르는 듯한 불길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걸까? 약혼식 이후로 민혁의 장난스런 지분거림이 사라졌다. 그것을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내심은 아니었나보다. 묘한 초조감이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온몸이 열기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획 잡아당겨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생각했다. 중독이야.

그는 그녀의 입을 탐욕스럽게 취하고, 단추를 순식간에 풀어버린 원피스를 어깨에서 끌어내렸다. 브래지어도 사라진 가슴을 양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이 꼿꼿하게 일어선 유두를 입에 머금자 희경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그를 꽉 움켜잡았다. 그의 혀가 유도를 부드럽게 감싸 말았다가 다음 순간 이빨이 날을 세우며 잘근거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어느새 그녀는 옷장 옆에 놓인 침대에 누워서 그에게 진한 키스를 받고 있었다. 여자를 잘 아는 남자의 능숙한 키스를......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폐는 공기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겨우 그의 입술에서 헤어나 숨을 할딱이며 그녀는 그녀의 몸을 눌러대는 그의 단단한 남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으으음....이러기 위해 데려온 건 아니야.”

심술 사납게 고개를 들며 욕심을 채우려는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민혁은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곧 희경의 두 팔에 의해 가슴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학학....다시....시작하면 이젠.....멈출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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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도 산소가 부족하다는 듯 가쁜 숨을 쉬며 희경에게 경고의 말을 전했다. 희경은 민혁의 얼굴을 들어 눈을 똑바로 보고 또박또박 한마디를 했다.

“누.가. 멈.추.고. 싶.다.했.는.데?”

그리고는 민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로 점령하며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자신의 대범함에 스스로 놀라면서.....

“흐음....”

처음엔 놀라 희경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았던 민혁이 주도권을 재빨리 되찾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불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열기 속에 빠져들며 희경은 생각했다. 이 남자 품에서 여자가 되고 싶다고. 그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희경의 원피스 치맛자락이 허리 위로 말아 올려지고, 팬티가 침대 밑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그녀 자신조차 잘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그의 손에 의해 샅샅이 탐사되기 시작했다. 침범에 두려움을 느낀 듯 재빨리 허벅지가 오므려지며 방어를 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손을 허벅지 안에 가둔 셈이 되었고, 뻔뻔스러움으로 무장한 손가락들은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만지고 수색하고, 더듬었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끝임 없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고, 눈을 꼭 감은 채, 끝나기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자신도 모르는 달콤한 고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으로 부딪혀오는 이물질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밑으로 준 희경은 너무 놀라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말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절대로 그녀는 그의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여자가 되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몸을 꼼지락거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소리쳤다.

“잠…잠깐만.....”“이젠 늦었다고 했을 텐데…….”

민혁은 그녀의 몸을 침대에 강하게 누르며, 온몸을 문질러댔다.

“그건....우리의 신체 밸런스를 몰랐을 때지.”“신체 밸런스?”“당...당신 몸....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커다란 게 어떻게…….”“쿡쿡쿡”그녀의 몸 위에서 그의 몸이 떨렸다. 남은 심각한데, 웃고 있다니..... 성질이 나서 확 밀치려는데, 그의 손에 가슴이 움켜잡혔다. 그의 커다란 손에 넘치는 가슴을 잡아당겨 격렬하게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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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작했다.

“으으음....”

둔해만 보였던 가슴이 이렇게 예민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녀는 가슴 끝에서 온몸으로 번져가는 쾌감에 넋을 잃어 그의 손에 의해 다리가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그의 일부가 그녀의 동굴에 과감히 침입해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는데, 곧 그 소리도 그의 입에 막히고 말았다.

이글거리는 불에 태워지는 것 같은 고통에 눈에 눈물이 고이려 했지만 그녀는 눈물을 참았다. 두고 보자고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는데, 그의 몸이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그녀 스스로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였다. 경련이 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고통과는 또 다른 묘한 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도 그런 그녀의 반응을 감지했는지 더 대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를 완벽하게 감싸고 조여 대는 그녀의 동굴에서 정신을 잃은 채 헤매기 직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자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감싸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음을 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 비해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격렬하다고 생각했다. 고통과 함께 찾아온 처음 겪어보는 경련에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그가 힘껏 밀고 들어오며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함께 환하게 타오르는 열꽃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들의 의식을 깨운 것은 지치지 않고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였다. 그녀는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축 늘어져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핸드폰 소리에 지쳤는지 몸을 일으켰다.

“으음....”

그의 따뜻한 팔 안에서 풀려나는 것이 왠지 서운하고 화가 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남녀가 하룻밤 사이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던가? 그녀는 옷을 벗고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으러 가는 민 혁의 모습을 보며 눈을 흘겼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벌거벗은 몸으로 있는 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여유가 얄미웠다. 그러나 핸드폰 폴더를 연 민혁의 중얼거림에 그녀의 신경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수빈아?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수빈이란 이름이 이 때처럼 거슬린 적이 없었다. 까닭 모를 불쾌감과 불안감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오빠, 집 앞에 있는 라리야. 오빠에게 할 말이 있어.”

민혁은 수빈의 밝은 목소리에 놀라움을 느꼈다. 이렇게 밝은 수빈의 목소리를 들어본지가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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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오래 되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혁은 시트로 몸을 감춘 채 주섬주섬 옷을 움켜쥐고 슬금슬금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는 희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곤란한데.”“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오빠를 만나서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민혁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밝다 못해 생동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일까? 그리고 이상하리 만치 밝은 수빈의 목소리가 기쁜 한편 불안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빈은 커피 향이 그윽한 라리에 앉아 행복하게 커피를 마셨다. 몇 날 며칠이라도 행복하게 민혁 오빠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오빠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행복하기는 오빠의 사랑을 확인할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웃음을 활짝 지었다.

가면극 22장

민혁의 차가 희경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던 희경은 민혁의 손짓에 움직임을 멈췄다.

“......?”

차에서 내린 민혁이 조수석으로 가서 차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괜한 쑥스러움을 느끼며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괜찮아?”

걱정이 섞인 소리에 희경은 손목시계를 얼른 보았다. 그리고 안심한 듯 웃었다.

“이제 11시 넘었는데 뭐. 엄마에게 12시 안으로 들어온다고 미리 말해두었으니까.....”

민혁이 희경의 둔함에 픽 하고 실소를 했다. 그제야 민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발견한 희경은 피가 얼굴로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인간이…….”

희경은 발로 민혁의 다리를 팍 차고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몸 깊은 곳이 생채기가 났을 때처럼 화끈거리고 쑤시는 것을 느끼며...... 갑자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희경이 팔을 잡혀 몸이 획 돌려졌다. 민혁은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따뜻한 마음과 배려가 느껴지는 키스에 희경은 마음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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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들어오니?”“네. 엄마 아직 안 주무셨어요?”“아니 잠들었다 좀 전에 깼단다.”

희경은 민혁의 차가 사라질 때가지 지켜보다가 조용히 열쇠로 대문과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3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싶었던 희경이었다. 겉모습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집을 나설 때와는 왠지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엄마와 딱 마주친 것이다. 희경은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런 딸의 태도가 걱정이 되셨는지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진 사모님이 뭐라 하셨대든?”“아...아니야, 엄마. 민혁씨도 그렇고 엄마도 지나치게 걱정이 많아.”“그럼 다행이지.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라.”“네. 안녕히 주무세요.”

희경은 종종거리며 계단을 올라갔고, 희경의 엄마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셨다.

‘그냥 있을 양반이 아닌데. 무슨 일을 꾸미려고 뜸을 들이는 걸까?’

수빈은 세잔 째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라리에서 민혁을 가다린지 벌써 3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새하얀 크림이 듬뿍 얹어진 크림치즈 케이크가 커다란 접시에 모양 좋게 놓여있었다. 조금 전에 웨이터가 11시를 넘기면 숙녀 분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라며 갖다 준 케이크이었다. 3시간이나 혼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녀를 라리의 직원들이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수빈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물 컵에 물이 조금만 비어도 그녀의 입으로 삼켜지는 커피가 조금만 식어도 라리의 직원들은 재빨리 물질을 채웠고, 뜨거운 커피를 리필 해주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가녀린 여자를 바람맞히는 못된 남자를 욕하면서…….그러나 수빈은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혁이 아무리 늦더라도 자신에게 올 거라는 것을…….그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민혁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빠!”

수빈은 점점 다가오는 민혁을 반기려는 듯 일어서서 그를 기다렸다. 커다랗게 뜬 수빈의 눈동자는 기쁨으로 생기 있게 반짝였다. 입가는 번져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라리의 직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름답지만 험한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가녀린 여자와 그 여자를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해보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호기심은 점점 부러움으로 바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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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 많이 기다렸니?”

수빈은 민혁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두 팔로 민혁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오빠!”

민혁은 수빈답지 않은 대범한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무슨 일일까? 이렇게까지 흥분한 수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민혁 앞에 커피 잔이 놓이고 서빙하는 사람이 물러났을 때 민혁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오빠...허락을 받았어.”“허락?”“응”

수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았기에 다시 눈물이 고이고 민혁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우리 사이를 인정받은 거야.”“........”“오빠 어머니가 저녁에 학원 앞으로 날 찾아오셨어. 그리고 우리 사이를 인정하겠다고 하시는 거야. 오빠 믿을 수 있겠어?”

수빈은 민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기쁨의 눈물이 모든 것을 뿌옇게 흐려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나를 자식이 없는 친구 분의 양녀로 호적에 올리시겠데. 그리고 1년 후 쯤 결혼을 생각하라고……. 오빠, 그 때 아버지가 나를 호적에 올리지 않아 정말 다행이지? 그러면 일이 아주 복잡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수빈아!”“오빠, 난 정말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어. 오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동안 바보처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어.”“수빈아!”“말씀이 다 끝나고 일어서려 하는데, 다리가 저려서 막 아픈 거야. 그 고통이 얼마나 기쁜지…….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걸 알려주잖아.”

민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수빈은 행복한 재잘거림을 쏟아냈다. 민혁이 수빈의 턱을 엄지와 검지로 꽉 잡아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했을 때야 수빈의 재잘거림이 멈추었다.

Page 65: [김성희]가면극

“수빈아, 내 말 똑똑히 들어.”“응.”“난 약혼을 했고, 빠른 시간 안에 결혼할 거야.”“..........”“결혼을 한단 말이야. 장희경이란 여자와.”

수빈은 잠시 말을 잃고 민혁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니, 오빠는 그 여자와 결혼 안 해.”“......”“오빠는 나를 사랑하니까.”

수빈은 단호하게 말을 하고 민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의 품에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오빠는 나를 사랑해.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면극 23장

라리의 문이 열리며 두 여자가 들어왔다. 미경과 그녀의 친구였다. 그들은 안쪽 자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카운터 옆에 놓인 케이크 코너에서 케이크를 골랐다. 더욱 예쁘고 먹음직하게 보이게 하는 조명을 받으며 다양한 케이크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꼭 여기 시폰 케이크를 먹어야겠어?”“말 시키지 마. 그런 놈에게 폭탄 취급당하고 내가 제 정신이겠어? 시폰 케이크라도 실컷 먹고 스트레스 풀어야지. 돈은 네가 내야 돼.”

미경은 짜증스런 얼굴로 케이크를 고르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눈이 높아 자신을 선택하는데 어떻게 하라는 건지. 미경은 스트레스 쌓일 때마다 케이크를 먹어대 점점 두루뭉실해지는 친구의 허리를 보며, 만족감을 삼켰다. 그녀에게 케이크 맛을 들인 장본인은 바로 미경이었다. 성형으로 얼굴을 싹 뜯어고치고 지방 흡입까지 한 친구는 주제도 모르고 남자와 있는 자리에서 미경보다 튀어보려고 건방지게 굴었다. 당하고는 못 사는 그녀였다. 흥! 2~3인치만 더 늘어나면 맞는 옷도 없을걸.

지갑을 꺼내 케이크 값을 치르려던 미경은 흠칫 놀라 눈을 깜박였다. 자신의 눈에 비친 한 쌍, 매달리는 여자를 안아주는 남자는 바로 서민혁이었다. 그녀를 우스운 꼴로 만들고 사생아 계집을 선택한 서민혁! 여자가 민혁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미경은 목을 길게 빼었다. 어디에선가 본 여자였다. 분명 낯이 익은데…….

Page 66: [김성희]가면극

“미경아, 가자.”“알았어.”“뭘 그렇게 보는 거야?”

미경의 친구는 재촉을 하면서 그녀가 바라보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어머, 재 수빈이잖아?”“수빈이? 너 저 여자 알아?”“그럼, 너도 알잖아. 수영이 먼 친척. 고아라고 하던가? 하여간 수영이네 집에서 신세지고 있잖아. 수영이가 저 여자 때문에 열 받아 죽겠다고 만날 때마다 투덜거리는데…….”

수빈! 그래 5년 전 유명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을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성진의 후계자가 고아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해서 발칵 뒤집혀졌던 사건이니까. 그게 수영이 사촌이고 게다가 함께 살기까지 하다니. 수영과 민혁이 사촌지간이니 그렇다면 저 여자와 그 후로도 계속 마주쳤다는 말인데..... 다정함 품새가 아직도 특별한 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경의 입가가 사악하게 벌어졌고 음모를 꾸미듯 눈은 기분 나쁘게 번득였다.

희경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욕조 가득 받은 뜨거운 물에 허브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바스를 풀고 몸을 담그고 있는 동안에도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 소리에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전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화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자꾸만 생겨났기 때문이다. 울릴 생각을 하지 않는 핸드폰을 보며 한숨을 쉬고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몸을 움직이자 뜨거운 목욕으로 풀렸던 근육들이 다시 욱신거렸다. 내일 아침엔 걷기가 더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욱신거리는 불편함도 과히 싫지 않았다. 그녀와 민혁과의 특별한 순간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아고고, 그나저나 다 뻥 아냐?’

그녀가 읽었던 책이나 영화의 러브신을 보면 여자들이 몸을 비틀며 황홀한 쾌락 속에 빠진다고 나왔있는데, 그녀의 경험으로는 황홀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몽둥이를 쑤셔대는데, 황홀하다니…….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그 느낌은 정말 좋았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단단한 결속력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스르르 눈이 감기려 할 때 갑작스럽게 벨소리가 울려댔다. 희경은 재빨리 핸드폰을 집었다. 그러나 핸드폰에 뜬 전화번호를 보고 크게 실망하며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미경의 끈질긴 성격으로 보아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가는 밤새 울려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경이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던 희경은 속사포 같이 쏟아져 내리는 미경의 말에 점점 눈이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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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너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네 약혼자잖아?”

미경은 담배를 입에 물며 새침하게 웃었다. 알겠다고 말하는 희경의 목소리에서 가는 떨림을 캐치하고 쾌재를 불렀다. 어울리지도 않는 자존심을 세우는 희경이 이 일로 약혼을 깨기라도 하면 더 바랄게 없었다. 설혹 깨지지 않아도 시작하기도 전에 삐거덕거릴 테니, 그 꼴을 구경해주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심보에서였다.

‘계집애. 내가 니 행복한 꼴을 봐줄 것 같아? 흥 어림없는 소리지.’

미경은 엑셀을 밟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를 출발시켰다. 불신을 심어주었으니 그것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기대되어 참고 기다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가면극 24장

민혁은 현관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예상대로 어머니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었구나.”“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창녀의 딸보다는 수빈이가 나을 것 같았다. 그 어미의 집안을 조사해보니, 비록 친구에게 속아 사업에 실패는 했지만 존경받는 집안이었더구나. 수빈이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벗들이 수빈이 모녀를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고 하더라. 수빈이 어미가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수빈이를 키웠어. 그것을 보면 꽤나 자존심도 강했던 것 같아 마음에 든다.”“어머니!” “나도 한걸음 양보했으니, 너도 고집을 조금 꺽어야 하지 않겠니?”

민혁은 질린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이기심과 독단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냉혹한 사령관으로 모든 이들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끌고 가야 직성이 풀렸다. 그녀의 뜻을 거슬리거나 거역을 하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 붙이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성진을 위해서, 집안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 모든 행동들이 본인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라는 것을 죽는 한이 있어도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민혁은 획 몸을 돌려 현관문쪽으로 걸어갔다. 더 있다가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지도 모를 것 같았다. 그런 민혁의 뒤에서 침착하고 흐트러짐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성에 파혼 통보를 하마.”

민혁이 우뚝 멈춰섰다. 그는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Page 68: [김성희]가면극

“어머니 하시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하지만 제 결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민혁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민혁의 어머니는 거실 창으로 민혁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서씨 집안에 창녀의 자식을 며느리로 들일 순 없어. 없고 말고.”

민혁의 자동차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감시 카메라가 번득이며 사진을 찍어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질풍처럼 달려오는 민혁의 차에 겁을 먹은 차들이 앞을 비켜주어 거리낄 것도 없었다.

민혁의 자동차가 멈춘 곳은 청평 별장 앞이었다. 5년만에 처음 찾아온 곳이었다. 별장 입구 가로등이 어둠을 벗겨내고 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5년 전에 이 곳에서 수빈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를 위해 고른 반지가 담긴 상자를 양복 상의 주머니에 넣고, 그녀와 별장으로 달려올 때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고모부의 먼 친척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이모부가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무심히 흘려 들은지 1년이 지난 후였다. 수호의 중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파티가 고모네 정원에서 열렸다. 그 곳에서 그 아이는 음식을 나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가늘고 긴 팔다리를 가진 그 아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 몸을 움츠리고 다녔지만 묘하게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수영인 그것이 못마땅한 듯 그 아이에게 이유없이 심술을 부렸다. 그 아이는 실수를 할 때마다 고모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 때 민혁은 고모 눈에 새겨진 미움을 보고 깜작 놀라고 말았다. 그 아이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고모의 눈초리에 핏기 없이 창백해진 그 아이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모의 차가운 시선을 막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그 아이와 고모 사이에 섰다. 그래도 그 아이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아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수호 녀석이 고의적이라는 의도를 전혀 감추지 않은 채 그 아이에게 스프 그릇을 뒤집어 엎었다. 스프를 뒤집어 쓴 채 어떤 항의나 불만도 내색하지 않고 체념한 듯 서있는 그녀를 보니 수호 녀석에게 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호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사과해.”“왜 그래 형, 내가 왜 이런 거지같은 아이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데.”

수호가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 전혀 없이 버둥거리며 그에게 잡힌 팔을 빼려고 애를 썼다. 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민혁은 수호를 한 대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자신의 팔을 움켜잡는 팔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 아이는 민혁의 팔을 꽉 움켜잡은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에 그는 억지로 화를 참고 수호를 잡았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화를 참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얼마 후 그 아이의 빨갛게 부은 뺨을 보고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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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고모 뒤를 쫓아 주방으로 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 아이가 계속 신경이 쓰여 결국 찾아 나서고 말았다. 그리고 계단 밑의 좁은 공간에 몸을 숨긴 채 흐느낌을 속으로 삼키며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발자국 소리에 놀라 흠칫 고개를 든 그 아이의 뺨은 빨갛게 부어있다. 그는 자신의 괜한 참견이 오히려 그 아이를 고통받게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손등으로 열심히 눈물을 닦는 그 아이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에 망설임이 뚜렷히 보였다. 선뜻 손을 내밀기가 두려운 것 같았다. 그는 손수건을 내민 채 한참 기다리다가, 그 아이 옆에 주저 앉았다.

“바...바지 더러워져요.”

그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동화 속에 등장해야 어울릴 것처럼 가녀린 그 아이가 처음 한 말이 너무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픽 웃고, 손수건으로 그 아이의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이름은?”“.....수빈”

민혁은 그 이름이 그 아이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맑고 청명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다.

“몇 살이니?”“열넷이에요.”“열넷 그러면.....어 그럼 너도 중학교에 입학했니?”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그제서야 그아이가 고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모의 차가운 눈빛을 보니, 이 아이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이와 수호처럼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마음껏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야 할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다 갑자기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자랐지만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워본 적도, 사랑받는다는 확신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그런 자신이 수빈을 동정하고 애처로워한다는 것은 주제 넘은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거대한 공룡과 같은 회사를 이끌어 가느라 그와 얼굴을 마주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그룹의 후계자로 키워내는 것이 삶의 목표인양 그를 철저하게 자신의 기대치에 맞추어 교육을 시켰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옷 매무시나 구김에 신경쓰지 않고, 어머니가 그를 두 팔로 꽉 안아준 일은 한번도 없었다. 일찌감치 민혁은 자신의 어머니가 친구들의 어머니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차갑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어머니의 눈은 그를 어머니에게 다가서게 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었다.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지만 수빈이처럼 누군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감정을 생생히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민혁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풀어 수빈의 가는 손목에 채워주었다.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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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빼려는 수빈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꽉 잡고 씨익 웃어보였다.

“중학생이 된 축하 선물이야. 뭐 스포츠 시계라 모양은 없지만 시간은 아주 정확하니까. 손목에 차기 꺼려지면 가방에 넣고다녀. 공부하는 학생에겐 시계는 필수품이니까.”“고...고마워요.”

간신히 귀에 들릴 정도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수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행복한 미소를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고 그 아이를 다시 만난 것은 7년이 지난 어느 해 겨울이었다. 여인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있었다.

가면극 25장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대학 동기에게 끌려 가장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던 대학가에 가게 되었다. 젊음을 발산하는 학생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부러움 반 시기하는 감정 반으로 바라보았다. 자식이라고 전혀 감싸줄 생각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는 철저하게 밑바닥부터 몸을 굴리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감시자들 사이에서 일을 하나하나 배워나간다는 것은 어떤 땐 긴장으로 피가 말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의해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떤 억압이나 굴레도 없이 생생한 젊음을 누리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 자신이 몇 년 사이에 얼마나 변했나를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는 순수했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아련한 안타까움도 갖게 했다.

친구에게 끌려간 곳은 고급스런 바였다. 학교 앞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촌 동생 녀석 쫓아 한 달 전에 이곳에 왔다가 여기서 내가 꿈꾸던 이상향을 만났다는 거 아니냐.”“그런 여자가 한둘이었어야지.”“아, 이번엔 진짜라니까. 사슴처럼 순수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면 심장이 부서지는 느낌이 든다니까. 필이 팍 꼽히며 내가 드디어 나의 운명을 만났구나 하는.....”“훗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늘 하는 레파토리 아니었냐?”“이 자식, 회사 일이 힘들긴 힘든가보구나.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게.”

그에게 혀를 차대는 친구를 보며, 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대학 동창 중엔 그가 성진의 후계자란 걸 아는 친구가 없었다. 특별 대우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친구들의 눈에 미래에 대한 투자처로 보여지는 것도 싫었다. 회사 내에서도 그에게 일을 가르치고 이끄는 몇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가 회장의 아들인지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성진의 후계자가 아닌 그 자신만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너의 운명은 어디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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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주위를 둘러보던 친구는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가 걸어왔다.

“너, 설마 저 젓비린내 나는 아이를.....”“젓비린내라니, 어허 대학교 2학년이면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인정하는 당당한 성인이라구.”

그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기 위해 기다렸다. 이리저리 말을 붙여보려고 애쓰는 친구에게 ‘네’. ‘아니요’라고만 대답하는 여자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어서 사슴같은 눈망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연악한 분위기가 웬지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분명 어디선가 한번 만났으면 쉬이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감인데...... 그의 시선이 그녀의 팔목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가녀린 팔둑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다란 시계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획 고개를 들다 놀라 커다래진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서 주문판이 툭 떨어졌다.

“........!”“수빈이?”“어 뭐야, 서로 아는 사이였어?”

수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모네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하고 있었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그 집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그 아이가 이렇게 커서 아름다운 숙녀가 된 것도, 독립해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지도 몰랐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두 번 째 만남은 그의 심장을 조금씩 빠르게 뛰게 만들고 있었다.

친구의 원망섞인 눈총을 받으며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사코 자신이 그 일을 떠맡겠다 우겨대는 친구를 억지로 보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빈이를 그 친구와 단 둘이 남겨두기가 싫었다. 자신이 그녀를 보호해주고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지치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녀는 예전처럼 절절한 슬픔과 고통을 간직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외로움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은 그의 관심에,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괜히 마음을 싸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산다고?”“네, 늦었지만 차라도 드시고 가실래요?”

민혁은 옥탑방의 자물쇠에 열쇠를 밀어넣는 수빈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화를 참기 위해서였다. 그는 수빈이 독립을 했다는 말에 고모부가 거처를 마련해준 줄 았았다. 그런데 비나 겨우 가려줄 것 같은 이곳을 보니, 생활비도 학비도 모두 그녀가 벌어 해결하고 있는 눈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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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초라하고 궁색한 겉모습과 달리 안은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번듯한 가구 하나 제대로 없었지만 좁은 그 방은 그 방 주인을 닮아 깨끗하고, 정갈해 보였다.

가면극 26장

민혁은 차를 한잔 마시고 수빈의 방에서 나왔다. 그 곳에 수빈을 두고 나오는 것이 정말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 불편한 마음이 그들의 특별한 운명의 시작이라고는 그 때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민혁은 틈이 날 때마다 수빈을 찾았다. 수빈은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존재를 환영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지 민혁은 수빈을 통해 배워나갔다. 그녀는 그가 모든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꿈과 열정 속 깊은 곳의 마음까지 모두 보여주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거듭될 수록 그의 육체는 이기적인 욕망으로 괴로워했지만 그녀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참았다. 외로움에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그녀의 눈빛이 행복과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기쁨과 만족감을 주었다.

그는 소중한 보물을 지키듯 그녀를 보호하고 아꼈다.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녀를 당당하게 안을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며 무섭게 타오르는 욕망을 눌렀다. 그랬기에 청평 별장에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며 반지를 끼워주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부모에게 그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3년 동안 그룹 안에서 그의 입지는 단단해졌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성진의 후계자라는 것을 그의 출생이 아닌 그의 능력으로 입증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손가락에 그의 마음이 담긴 반지를 끼워줄 때 당당한 자신감에 차있었고, 어떤 반대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자만을 했다. 그녀가 예상했던 반대와 압력에 그리 쉽게 무너질 줄은 상상하지 못하고.......

민혁은 과거의 시간에서 돌아와 쓴 웃음을 지었다. 5년 전 그의 모든 것이었던 공주님은 그녀의 기사를 믿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지켜줄 거라는, 험난한 시간을 반드시 이겨낼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 부족했다. 그는 지칠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그것을 절감했다. 그 때 그는 그녀와의 사랑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마음이 아픈지, 그녀의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이 더 마음이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느끼는 거라곤, 온몸을 힘차게 돌던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뼈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냉기에 심장까지 얼어간다는 거였다.

그는 과거를 뒤로하고 차를 돌렸다. 굉움을 내며 청평 별장에서 멀어지는 그의 차는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더 과거의 시간 속을 헤메이다가는 자신이 원치 않아도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끌려갈 것만 같아 초조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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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 속을 점령하려는 수빈의 눈동자를 몰아냈다.

‘모든 것을 던져버릴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희경은 창문을 열고 밤이 되어 열기가 식은 바람을 맞았다. 수빈과 민혁이 함께 있는 모습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생각이 났다. 그 때 느꼈던 불안감은 바로 이 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걸까?

희경은 머리 속은 복잡했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빠른 시간 안에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그도 빠른 시간 안에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일치했기에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따지고 원망할 자격이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욱씬거리고 아팠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그녀와 결혼하면 결혼 생활에 충실할 것이라고 말이다. 머리가 정리가 되자 이번엔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숨을 쉬기가 답답하고 힘들어졌다. 그녀는 창문에 몸을 기댄 채, 어둠이 쫓아내고 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다.

가면극 27장

수빈은 화장대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뭔가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려는 듯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폴더를 열던 그녀는 잠시 자신을 향해 밝게 웃던 희경의 얼굴이 눈 앞에 떠올라 눈을 감았다. 죄책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러나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강한 결의에 차있었다. 민혁 오빠를 잃은 채 지낸 5년 동안 그녀는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모른다.

자신이 손을 놓아버린 민혁 오빤 바로 유학을 떠나 3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 다정함에 그녀는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눈물을 흘렸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하고, 믿음을 배신한 그녀를 용서한 오빠에게 고마워하며 말이다. 그리고 오빠 옆에서 함께 늙어가진 못해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쪽을 택한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위안하려 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오빠가 얼마나 철저하게 마음을 닫아버렸는지를.... 자신의 배신이 오빠에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오빠를 보며 자신의 손으로 파괴해 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오 하나님! 그녀에게 남아있는 감정이 동정심뿐이 아니기를...... 그녀는 생각했다. 오빠에게 예전의 모습을 찾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고. 당장 성진을 이끌어도 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오빠는 항상 지루해하고 권태로워했다.

그녀는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렸지만 그녀의 입매는 굳은 각오를 반증이라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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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처럼 야무지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래, 내가 예전의 오빠 모습을 되찾아줄 거야.

“엄마, 다녀올게요.”“그래, 오늘 늦지 않을 거지?”“그럼요. 언니들에게 결혼 전에 자매들끼리 밀담을 나눠야 한다고 오늘 꼭 시간 비워두라고 협박 받았는데. 결혼 생활 중에 신랑을 잡고 흔들 노하우도 전수해주겠다나요.”“후훗 그러니?”

현관문을 열고 나온 희경은 억지로 웃음 짓느라 고통스러워하는 입가를 웃음에서 해방시켜주었다. 한숨이 나왔다. 잠을 못 자서인지 몸이 무겁고 눈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하루 뿐이 지나지 않았는데, 민혁과 함께 했던 순간이 까마득하게 먼 일처럼 느껴졌다.

차문을 연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헨드폰 액정에 뜬 번호에 희경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밝게 빛났다.

“좋은 아침!”“얼어죽을 무슨 좋은 아침이에요. 잠을 못 자 삭신이 쑤시는데.”

마음과는 달리 툴툴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쿡쿡, 뭉친 근육을 풀어주어야겠는데. 지금 회사로 오겠어? 그럼 내가 그곳을 확실하게 풀어줄 텐데.”“됐네요. 밝히는 변태 영감아!”

그의 은근한 목소리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빽 소리치고 전화를 끊었다. 폴더를 닫으며 희경은 미소를 지었다. 밤새 무거운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던 희경은 다시 울려대는 벨소리에 더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폴더를 열며 대뜸 소리쳤다.

“아무리 꼬셔도 안되겠네요. 밝힘증 환자님.”“........”“민혁씨?”

희경은 침묵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희경씨? 저 수빈이에요.”

희경은 폴더를 닫아버리고 싶은 유혹을 참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머 수빈씨, 웬일이에요. 아침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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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희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빈이 그녀를 찾는 이유를....

민혁의 어머니에게 민혁과의 사이를 허락 받은 수빈은 희경을 만나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나 희경은 그 말을 민혁에게 말하라고 한다. 그리고 희경은 민혁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그녀와 수빈 둘 중에 그가 진정 원하는 사람을 석택할 기회를 준다. 민혁은 그렇게 당당한 희경의 매력에 빠져들어가지만 수빈과의 관계를 냉정하게 정리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희경은 그녀를 시기하는 미경의 음모에 의해 난투극에 휘말리고 희경은 영준의 도움을 받게 된다. 자신의 우유뷰단함이 희경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민혁은 괴로워하지만 민혁의 어머니와 수빈은 더욱 더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준은 세 사람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희경의 힘이 되어주는 존재로 좀재감을 키워간다. 그런데 수빈의 마음을 돌리려던 민혁이 희경을 사랑하냐는 수빈의 다구침에 대답을 못하고 그것을 들은 희경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 때, 희경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녀는 홀로 설 결심을 한다. 하지만 민혁은 그녀를 떠나보낼 수가 없다.

깔끔한 실내 장식이 돋보이는 파스타 전문점에서 커다란 앞치마를 맵시 있게 돌려 입은 직원들이 손님들을 맞고 자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파스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빈 테이블이 많지 않았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 잡은 수빈은 물 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물을 들이켰다. 벌써 몇 잔 째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있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입안은 더욱 바짝바짝 타왔다. 물 잔을 내려놓다 그녀는 손이 떨려 물을 엎지를 뻔했다. 유리창으로 희경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유 있는 몸짓으로 차에서 내렸다. 유리창 너머로 수빈과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음식점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좀 늦었네요.”

희경은 활짝 웃어 보이며 수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점원에게 메뉴판을 받아들며, 수빈에게 파스타를 추천했다.

“여긴 해물 파스타가 맛있어요. 다른 곳보다 해물이 아주 싱싱하거든요. 매일 신선한 해산물을 주방장이 직접 구입해서 요리를 한대요.”“전....전 그냥 차만 마시겠어요.”“그래요? 저는 접시라도 씹어 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픈데. 그럼 샐러드라도 들래요?”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희경은 그녀에게 아쉽다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전 해물 파스타하고 그린 샐러드 주세요. 음! 음료는 아이스티로 주세요. 시럽은 빼고.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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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쪽은…….”

희경이 주문을 하다 자신을 바라보자 수빈은 황급히 대답을 했다.

“저...저는 커피 주세요.”

희경은 직원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상이에요. 아, 마늘 빵도 좀 넉넉히 주세요.”“네, 알겠습니다.”

희경은 수빈을 향해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엄청난 위장이라고 놀리지 말아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서 채워 넣어야 하거든요. 민혁씨가 결혼식을 서두르자고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어머님이 저를 싫어하시며 결혼을 반대하시니......”“그...그걸 알고 있었나요?”“쿡, 어떻게 모르겠어요. 노골적으로 표현하시는데요.”

직원이 파스타 접시, 샐러드 접시, 마늘 빵이 담긴 바구니까지 묘기를 부리 듯 양팔에 포개 담아가지고 왔다. 직원이 테이블에 접시를 세팅을 하는 동안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티가 담긴 잔과 향긋한 커피 향을 피워 올리는 커피 잔도 테이블에 올려졌다.

“조금이라도 먹어 봐요. 맛은 장담할 테니까.”“아니에요.”“그럼 염치 불구하고 혼자 먹을 게요.”

수빈은 희경이 맛이게 파스타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크에 돌돌 말린 파스타 면도,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마늘 빵도 소스가 얹어져 희경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너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끼고 수빈은 깜짝 놀라 침을 삼켰다. 그렇게 희경을 바라보던 수빈은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나요? 민혁 오빠 어머님이 결혼을 반대하시는데......”

수빈은 민혁 오빠의 프러포즈를 받은 다음날 오빠의 어머니에게 끌려갔다.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과 말투에 담겨 있는 미움에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날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며 그녀는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았다. 그런데 희경은 그녀보다 너무나 씩씩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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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니까요. 내가 결혼하는 사람은 서민혁이란 사람이지 그의 어머니가 아니잖아요.”“하지만 민혁 오빠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세요. 결혼을 반대한다면 결코 하지 못하게 하실 거예요.”

희경은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이 커피 잔을 잡은 수빈의 손을 떨리게 했다.

“전 민혁씨를 믿거든요. 훗 민혁씨도 수빈씨처럼 저에게 경고를 하더군요. 어머니가 결코 쉬운 분이 아니라고.... 그리고 저에게 전택을 하라고 했어요. 도망갈 것인지 싸울 것인지…….”

수빈은 커피를 조금 쏟고 말았다. 희경의 말이 그녀를 사정없이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희경과 똑같은 상항에서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었다.

“후훗, 앞으로 만만치 않을 거라 각오하고 있어요. 민혁씨가 함께 싸워줄 거라고 믿으니까 힘을 내야죠.”

수빈이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을 보며 희경은 양심이 찔렸다. 지금 그녀는 선제공격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를 핑계 대면 굳이 민혁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약혼식장에서 민혁이 내민 손을 잡았을 때, 그의 믿음을 깨드리고 싶지 않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감정은 이름을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을 했고, 그를 믿겠다고 했으니까. 그녀가 대답하기 전 잠시지만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던 불신이 누구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다시는 그런 아픈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턱이 부드러움을 잃고 경직되어 있었다.

“희경씨,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네, 그러리라 짐작이 되더군요.”“저는 민혁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라요.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오빠에게 물었었어요. 당신을 사랑 하냐고?”“........”“아니라고 하더군요.”

수빈은 의도적으로 민혁이 한 말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희경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재빨리 말을 마저 이었다.

“저는 오빠가 왜 결혼을 서둘러 결정을 했는지 알아요. 저 때문이니까요. 오빠 어머니가 오빠가 결혼할 때까지 저를 지금 있는 집에 가두어 놓겠다고 하셨어요. 쇠창살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에겐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철저하게 저를 그 집에 묶어두셨죠. 그 집에서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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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가치는 민혁 오빠 엄마가 해마다 대주는 정치 후원금이죠. 오빠는 그 집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했어요. 아마도 희경씨가 저를 도와주셨을 때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희경씨도 눈치 채셨겠죠? 저는 오빠를 사랑해요. 그래서 자유가 된다는 기쁨보다 이 나라를 떠나 오빠와 멀어진다는 것이 더 괴로웠어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더군요.”“?”“민혁 오빠 어머니가 저와 오빠 사이를 허락하신 거예요.”“그래서요?”

희경은 너무나 태연하게 물었다.

“오빠와 결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단 말이에요.”“수빈씨는 민혁씨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게 아니잖아요. 결혼은 민혁씨가 할 거예요. 그렇다면 당사자의 의견이 우선 아닌가요?”“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그건 5년 전 일이겠지요.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죠. 과거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아요. 당신들도 5년 전의 민혁씨와 수빈씨가 아니에요.”“아니에요. 우린 사랑해요. 변한 건 없어요.”

희경은 가방과 계산서를 챙겨 들었다.

“그것을 저한테 확신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민혁씨의 선택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결혼을 취소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 이만 실례할게요.”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희경을 수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이 차올라왔다. 희경이 한 말이 머리 속에 뱅뱅 울리며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사랑하는데, 오빠의 마음이 변할 리가 없어.’

눈물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파스타 집을 나온 희경은 옆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수빈 앞에서 허세를 부리며 먹어댔던 음식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토해냈다. 희경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허예져 있었고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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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세워질 합작 회사 설립 진행 상황을 좀 더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표기해 보고서를 올려주세요.”“예 알겠습니다.”

민혁은 다른 결재 서류를 살피려다가 비서실장이 사장실을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습니까?”

비서실장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예, 사장님. 재무담당이사의 움직임이 수상하답니다. 중국진출을 위한 투자 금이 다른 쪽으로 유용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다른 쪽이라면.......”“예, 주식 시장 쪽입니다.”“알겠습니다. 알아보죠.”

비서실장이 사장실을 나가자 민혁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재무담당이사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으로 어머니의 입김으로 회사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독단으로 어떤 일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어머니께서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는 건가?

“사장님, 로비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인터폰으로 비서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희경씨가 회사 앞에 와 계시 답니다.”“안으로 안내해줘요.”“저...그게, 주차장에 1시간 전부터 차를 세워두신 채, 운전석에서 꼼짝 않고 계신다는데요. 혹 사장님과 약속이 있으신지 알아봐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경비원은 안절부절못하며 사장님의 약혼녀 차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았다. 사장님 약혼녀는 뭐가 그리 생각할 것이 많은지 생각에 푹 빠져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119 대원들과 사장실로 뛰어 들어갔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아찔했다.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듣고, 119에 신고를 했으니……. 그렇지만 그 때 사장님 약혼녀의 표정이 장난 아니게 진지했었다. 그가 한 짓을 듣고 배를 잡고 웃어댄 인간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자신처럼 진담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 쫓겨날 줄 알았는데, 천만 다행으로 아무 얘기가 없었다. 죽은 듯이 사장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지내고 있는데, 다시 사장 약혼녀가 간부들 전용 주차장에 떡하니 나타나 1시간 째 꼼짝 않고 있는 것이다. 또 괜히 나선 거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그룹 본사 건물을 힐끗거리는데, 회전문으로 사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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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하는데, 사장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제 약혼녀와 인연이 많으시네요.”

경비원이 놀라 고개를 들자 사장이 씨익 웃어 보이고 약혼녀의 차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비원은 안도감에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고 잘리지는 않겠구나.

‘내가 잘한 걸까?’

희경은 수빈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약한 수빈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희경은 화풀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잡고 마구 잡아당겼다. 아아, 모르겠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진 본사 건물 앞에 와있었다. 민혁씨의 얼굴은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정리 된 다음에 보려 했는데, 감정이란 놈이 힘들게 생각하고 결정한 일들을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제 멋대로 하고 있었다. 민혁씨를 보면 뭐라 말해야 할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던 희경을 ‘꽥’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민혁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약혼자를 보고 꽥이 뭐야? 민혁씨~~~ 하고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지 못할망정.”“뭐라고요? 흥 바랄 걸 바라시지. 그런 닭살 돋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니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팔에 돋은 닭살을 없애려는 듯 팔을 연신 문질러대는 희경을 보며 민혁은 쿡쿡대며 웃었다. 갑자기 희경의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소리쳤다.

“그런데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죠?”“당신이 이 근처에 등장하면 레이다망이 일제히 가동하는 걸 모르는군.”“왜요?”“성진의 미래 안주인 등장이잖아.”“사람일이야 알 수 없죠.”“무슨 의미지?”

희경은 민혁의 시선을 피해 앞쪽을 쳐다보았다. 민혁은 희경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이 약혼식장에서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기회를 주죠.”“?”“수빈씨를 만났어요.”

수빈을 만났다는데도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민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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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데요. 아니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했어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불행해지는 것이 싫다더군요.”“그래서 뭐라고 말했지?”“그것은 당신이 결정할 일이라고 했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아니.”“자 당신의 선택은 뭐죠? 난 당신이 원하지 않는데, 나와의 약속 때문에 억지로 결혼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나와 수빈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

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안하군.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듣게 해서. 내가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마음의 결정은 내린 건가요?”“물론.”

민혁은 단호하게 대답하고 희경의 양 볼을 두 손으로 부드럽지만 단단히 잡았다.

“이게 내 대답이야.”

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희경에게 키스를 했다. 놀라 멍하니 있던 희경은 그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자 기겁을 하며 몸부림을 쳤다. 민혁이 의아한 듯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자 희경이 얼굴이 빨개져 중얼거린다.

“토....토하고 양치질도 안 했는데…….”“쿡쿡쿡”

민혁은 어깨를 들썩이고 웃다가 희경의 몸을 더욱 바짝 끌어당기며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에 관능적인 키스를 퍼부어댔다.

수빈은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녀의 의식의 흐름은 희경과의 대화 속에 맴돌다가 끊임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민혁 오빠가 보는 사람까지 흥분시키고 행복하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웃는가를.....그리고 언제부터 그 웃음이 자취를 감추고, 그 공간을 세상을 초월한 듯한 무의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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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채워졌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었기에. 오빠의 웃음을 되찾아 줄 사람은 자신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오만일까?

그녀는 처음 만난 후, 다시 만날 때까지 7년 동안 한번도 그를 잊지 않았다. 모진 구박과 비웃음, 천대를 받으면서 그 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행여 오빠를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의 희망 때문이었다.

엄마도 그녀를 사랑해주셨지만 항상 거리를 두셨다. 그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엄마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자신에게 쏠린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재빨리 시선을 피하시던 엄마! 그 순간 엄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괴로워하셨는지 그녀는 엄마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알았다. 자신의 탄생이 저주 받았고, 엄마를 고통과 불행 속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참았다. 자신에게 유전자를 나눠주고 수정을 시켜 엄마 뱃속에 악착같이 달라붙게 만들었던 남자의 집에 들어가 외로움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엄마가 받은 고통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는 길이라 생각하면서. 그래서였을까? 민혁 오빠가 보여줬던 관심과 따듯함은 차갑게 식어가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었고, 그녀를 해바라기로 만들어버렸다. 정을 갈망하는 해바라기로…….

그에게 받은 남자에게나 어울리는 투박한 시계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한 장도 남지 않은 엄마의 사진을 대신해서.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가방을 샅샅이 조사당하고 한 장도 남긴 없이 찢겨지고 한줌도 안 되는 재가 돼 버린 엄마의 사진! 찢겨진 사진 조각들을 품에 안은 채 소리도 못 내고 우는 수빈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아비라는 작자는 비서관을 시켜 작은 조각까지 철저히 태워버릴 것을 명했다. 비서관은 감정이 없는 듯 로봇처럼 상관의 명령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꽉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을 거칠게 펴고 아주 작은 조각까지도 털어냈다. 그녀는 엄마의 흔적들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그저 힘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소중한 것을 철저하게 빼앗겨버린 그녀는 그 시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감춰두었다. 그녀가 조금만 애착을 갖거나 관심을 가져도 부서 버리고 싶어 하는 수호와 수영의 잔혹한 성격을 철저히 실감했기 때문이다.

정에 굶주렸던 수빈은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고양이에게조차도 마음을 의지했었다. 자신이 먹이를 주는 시간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고양이에게 정을 붙이던 그녀는 그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지 몰랐었다. 그리고 먹이를 주는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 고양이를 걱정하며 넓은 정원을 기웃거리다 입에 거품을 문 채 죽어있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망연자실했을 때, 그녀를 비웃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고양이를 안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그녀는 보며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는 수호와 수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녀는 고양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았다. 그녀에게 또 다시 소중한 것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빼앗거나 부서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만 깊이 숨겨 놓은 시계를 꺼내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안했다. 그리고 그 집을 나올 때,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것이 그 시계였고, 그 후로 몸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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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을 떠나보내고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지내야 했던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민혁이 한국을 떠나있는 3년이란 시간을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몽유병 환자처럼 지냈다. 그녀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민혁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민혁 오빠가 어제 돌아왔데. 설마 또 주제도 모르고 설치려는 건 아니겠지?”

수영이 한껏 비앙냥 거리며 수빈에게 민혁 오빠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수빈은 눈앞을 캄캄하게 가로막고 있는 무거운 장막이 거치며 빛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시계를 꺼내어 들고 민혁 오빠를 생각했다. 3년간 얼마나 변했을까, 그녀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었을까? 깊이 생각에 빠져있던 수빈은 수영이 언제 방에 들어왔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서 그녀의 마지막 생명 줄과도 같은 시계를 낚아채기 전까지 말이다.

“뭐야, 이 낡아빠진 시계는?”“도...돌려줘.”

시계를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수빈의 몸짓에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해 하던 수영은 점차 악의를 숨기지 않고 히죽거렸다.

“후훗, 꼴에 남자에게 선물 받은 건가 보지? 얌전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어디서 그렇게 꼬리를 치고 다니는 거야?”“돌려줘.”“그렇게 원한다면 가져가시지?”

수영은 열린 창문으로 획하니 시계를 던져버렸다. 시계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나뭇가지에 걸렸다. 수빈은 망설이지 않고 창가로 달려갔고, 창틀을 한손으로 잡은 채 시계를 잡게 위해 온몸을 공중으로 내밀었다.

“미...미친년 뭐하는 거야?”

사색이 된 수영이 팔짝팔짝 뒤며 소리쳤지만 어떤 소리도 수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시계를 되찾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겨우 잡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균형을 잃고 몸이 낙화할 때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보다 시계를 잡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그녀가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는 며칠이 흐른 뒤였다. 수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민혁을 발견하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그녀가 늘 꾸어왔던 환상이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녀의 사고는 자살 기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녀도 수영도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사라져버린 시계의 행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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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수영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 한동안 마주치는 것도 겁내었다.

수빈은 민혁 오빠와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는 없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이 진행되며,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추악한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그를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고,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울부짖어대는 욕심 사납고 독점욕에 몸을 떠는 또 하나의 자신과 말이다.

그런데 민혁 오빠 어머니가 둘 사이를 인정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녀에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오빠도 자신처럼 행복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오빠가 자신에게는 약혼한 여자가 있고, 그녀와 결혼할 거라 말했을 때, 땅이 갈라져 그녀를 삼킬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희경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미안해 오빠가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희경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는데, 그녀의 당당함이 오히려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다. 오빠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은 끈이 연결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빵빵”

요란한 클렉션 소리에 수빈이 현실로 돌아왔다. 수빈 옆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이게 누구신가?”

차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며 수빈은 안색이 파래지며 뒷걸음을 쳤다. 아버지가 그리도 신경을 쓰고 비위를 맞추려는 윤사장의 망나니 아들 윤재구였다. 자신을 차안에서 강제로 취하려 했던 그 남자.

“미처 몰라봐서 죄송한데 아주 든든한 빽을 뒤에 두셨더군.”“..........”“황송하옵게도 대성의 후계자님이 직접 왕림하셔서 이 몸을 위협하시더라니까. 그 자식이 네 년과 결혼하겠다고 난리쳤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지?”

윤재구가 거리를 좁혀올 수록 수빈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리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으려는 듯 힘을 잃었다. 수빈은 휙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윤재구의 손이 매섭게 수빈의 팔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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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 대단한 놈을 꼬셨는지 궁금한걸. 그 때도 순진한척 하며, 그 놈을 후렸나?”“놔...놔요.”“히야, 그래도 배짱은 알아줄만 한걸. 내세울 건 반반한 얼굴뿐이 없으면서 대성의 안방을 차지하려 했었다니, 마음에 들었어. 나도 그 요상한 재주 구경 좀 해보자.”

수빈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팔을 힘껏 휘둘러 윤재구의 뺨을 올려쳤다. 그의 뺨에 수빈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예상치 못한 수빈의 반항이 놀랐는지,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곧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수빈을 움켜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마구 흔들어댔다.

“이년이 미쳤나. 너 죽고 싶어?”“그래 미쳤어.”

수빈은 숨이 끊어질 듯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둘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그리고 험악한 시선으로 윤재구를 쏘아보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당신 뭐야?”“유괴범 아니야? 누구 경찰 좀 불러요.”

윤재구는 적대적인 표정을 드러낸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 당황해 슬며시 수빈을 잡을 팔을 놓고 뒷걸음쳤다.

“뭐...뭐야 이 자식들! 죽고 싶어?”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험상궂어지자 윤재구는 재빨리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재규어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지자, 수빈은 무릎이 꺾이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보며 걱정하는 소리를 한마디씩 했지만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다.

‘내가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아니야 5년 전과 난 달라졌어. 오빠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깨달았을까.’

사람들이 내미는 손을 밀어내고 비틀거리며 혼자 일어서는 수빈에게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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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희경의 두 언니의 집중 포화 사격과 같은 질문을 소화해내면서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결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두 처형들에게서 희경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경이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희경의 강함은 그런 사랑을 자양분으로 자랐기 때문일까?

민혁은 회사 주차장에서 자신이 있는 장소도 망각하고 키스에 열중해 있다가 장래의 처형들에게 호출을 당했다. 장모와 두 처형 그리고 그의 약혼녀! 이렇게 여자들 사이에 끼어 음식을 먹는 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예절 교육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것 같았지만 금세 두 처형들이 하는 말이 이중 삼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저하게 그를 탐색하고 탐문하고 있었다. 희경은 두 처형과 장모가 요조숙녀의 화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지만 민혁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그들은 예절과 예의란 두 자루의 검을 적절하게 휘둘렀다.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원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얻어내는 진정한 고수들이었다. 그가 제일 질색하는 여자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참, 어머님이 사회적으로 무~척 존경 받는 분인데, 우리 희경이가 며느리 도리를 잘 하며 사~랑 받고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인거 있죠. 우리 희경이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성진의 안주인 자리를 장차 넘겨주어야할 며느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겠죠?”

화제가 시어머니 자리로 넘어가자 웃는 얼굴로 말을 하고 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희경은 안절부절 했지만, 민혁은 아주 느긋했다.

“같이 살 여자까지 어머니가 골라주시는 대로 따를 정도로 제가 효자가 아니라서요. 희경이와 같이 살 사람은 저니까 어머니가 저의 선택을 받아들이시겠지요.”“희경이를 사랑하나요?”“민...민혁씨 내 방 구경하고 싶다고 했죠? 빨리...올라가요.”

희경은 작은 언니가 불쑥 끄집어낸 말에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민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3층까지 서둘러 올라온 희경은 방문을 닫고서야 안심을 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심문당하라고 데려온 건 아닌.....읍”

희경은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이 막히고 말았다. 민혁은 그녀를 문에 기대게 한 채 탐욕스럽게 입을 탐했다. 재빨리 그녀의 입안으로 숨어들어간 그의 혀는 밀크티 맛이 남아있는 입안을 철저히 탐색하며 그녀의 심장박동수를 늘려갔다. 허리를 배회하던 손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당당하게 셔츠 밑을 파고들어 가슴을 움켜잡았다. 부드럽지 않은 손놀림에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유두는 바짝 고개를 곤추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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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셔츠가 위로 밀쳐지고, 브래지어 위로 그녀의 유두가 꽉 깨물리자 그녀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다른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 팬티 선을 더듬자 희경은 기겁해 민혁을 밀쳐냈다.

“뭐...뭐하는 거야 지금!”

민혁은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여기서 이런....엄마와 언니들이......”“훗 난 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기에 당연히 이걸 바라는지 알았지. 흠 그쪽도 그렇다는군.”

욕구불만이라는 듯 셔츠 위로 볼록 튀어나온 유두를 눈으로 가리키며 민혁이 히죽거리며 웃자 희경은 팔로 가슴을 가리며 민혁을 발로 찼다.

“누.....가.....이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일 뿐이라고…….”

그 순간 문이 덜컥 열리며 두 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니?”

희경과 민혁은 놀라 동시에 두 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희경이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를 빽 질렀다.

“언니!”

미경은 이를 빠드득 갈며 멍청하게 웃어대고 있는 희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희경이 약혼식장에서 엄마가 벌인 일로 아빠의 심기가 아직까지도 좋지 않아, 비위 좀 맞춰주려는 차원에서 심부름을 자청한 그녀였다. 하지만 이런 열 받는 광경까지 봐야할 줄은 정말 몰랐다.

미경이 담 밑에 차를 세우는 순간 대문이 열리며 희경과 민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빈의 일이 둘 사이를 삐꺽거리게 만들기를 내심 기대했었던 그녀로서는 그 둘이 함께 그것도 희경의 집에서 나온다는 것에 실망감부터 맛보아야 했다. 그 실망감도 약과였다. 민혁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희경을 끌어안자 열이 확 뻗쳐왔다. 민혁을 쫓아다니며 관심을 끌려고 그렇게 애를 써 보았지만 그녀가 본 거라고는 그의 눈에 무심이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과 한쪽 입 꼬리가 비틀리며 웃음과 비슷한 형상을 그려낸 것이 전부였다. 그의 눈을 조금이라도 끌기 위해, 그에게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기 위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까지 신경 썼다. 거울을 보며 수없이 웃는 얼굴을 연습하고, 그의 취향을 알아내려고 아는 사람들을 다 동원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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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경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큰집 호적에 올라있다는 이유만으로 민혁의 맞선 상대로 지명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미경은 아빠가 둘째로 태어난 것을 마구 원망했다.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엄마를 뿌리치고 그녀는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마구 집어던지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모든 것이 자신보다 열등한 희경이 민혁과 당당하게 맞선을 보는 것은 단지 대성 그룹 회장의 딸이란 이유뿐이었다. 성질을 못 이기고 마구 울어대는 그녀에게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희경이 민혁의 눈에 찰 리가 있겠냐고. 엄마의 말에 미경도 동감했었다. 민혁의 마음을 낚아채려고 수많은 여자들이 몸을 던지고, 음모를 꾸몄지만 모두 실패했었다. 그녀도 하지 못한 일을 희경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맞선을 보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얼마나 마음껏 희경을 비웃고 굴러 들어온 기회도 잡지 못하는 머저리라고 흉을 보았었는데…….하지만 성진 그룹의 회장 생일 파티 장면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민혁과 희경의 약혼식이 치러졌다. 그녀는 그 날 이후 한쪽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해대는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선 민혁이 갑자기 희경을 끌어당기며,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경은 가슴이 콱 막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희경이 차지하고 있는 꼴도, 마지못해 희경을 품에서 풀어주는 민혁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차에 올라타려던 민혁이 뭔가 생각이 난 듯 돌아서 희경을 빤히 바라봤다.

“왜.....요?”“장모님 음식 솜씨가 굉장하시던데, 나도 결혼하면 매일 그런 음식들을 먹게 되는 건가?”“위장은 튼튼해요?”“위장? 위장은 왜?”“우리 세 자매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요리를 배웠는데…….”“그래? 정말 기대가 되는걸.”“큰언니는 모양과 맛내는 법 모두를 완벽히 전수받았거든요. 그리고 작은언니는 맛내는 법을, 그리고 저는 모양내는 법을 완벽히 익혔죠.”“?”

희경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간이 필요한 민혁을 위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민혁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지자 희경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내가 만든 음식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하고 호텔 주방장이 뺨 맞고 울고 갈 정도로 모양이 훌륭하죠. 그런데......”“그런데 튼튼한 위장과 약효가 뛰어난 위장약이 필수품처럼 필요하다는 말이군.”“딩동댕! 훗훗 우리 집에서는 나를 저~얼대로 조리 과정에 참여시키지 않아요. 다만 저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신뢰하며 음식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차리는 것만 맡기지.”“쿡쿡 무늬만이란 건 처음 만날 때부터 감 잡았지.”“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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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민혁이 피식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아니야. 결혼하기 전에 요리 솜씨 좋은 아줌마 면접부터 봐야겠는데. 우리 둘의 위장의 안녕을 위해.”

시동을 건 민혁은 차문으로 몸을 내밀고 희경의 팔을 잡아당겨 허리를 숙이게 했다. 재빨리 희경의 입에 키스를 한 후 턱을 타고 내려가 목을 강하게 빨며 이를 세웠다. 그리고 놀란 희경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흔적이 사라지가 전에 다시 보자구. 약혼녀양.”

희경은 키스 마크가 남은 목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민혁의 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도 입도 자연스럽게 웃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날아온 서류 봉투를 간신히 받아든 희경은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는 미경과 눈이 마주쳤다. 차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미경의 눈에서 섬뜩하다 싶을 정도의 미움이 느껴졌다.

“미경아!”“큰아버지에게 갖다드리래.”

차갑게 할말을 한 미경은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미경의 차가 급출발을 했다.

“어마!”

희경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놓치며 급히 몸을 뒤로 피했다. 미경의 차가 아슬아슬하게 희경을 스치며 달려갔다. 서류 봉투엔 선명한 바퀴 자국이 남아있었다. 서류 봉투를 집어 드는 희경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서류 봉투 위에 남은 바퀴 자국이 미경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미경이 그런 눈빛을 할 때는 항상 뭔가 큰일을 저질렀다. 그녀를 힘들게 할 어떤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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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카페 안은 평소보다 더욱 북적거렸다. 박정태는 만족스런 얼굴로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독특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젊은이들에겐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카페 안은 한껏 멋을 낸 사람들로 빈 좌석 하나 없이 꽉 차 있었다. 카페 한쪽에 마련된 작은 스테이지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려는 듯 아주 요염한 춤을 추는 여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흐흐, 물 좋군.’

헤죽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정태의 눈을 유난히 사로잡는 여자가 있었다. 스테이지에서 요염하다 못해 선정적인 춤을 추는 한 여자의 몸짓이 그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주변의 남자들도 그 여자에게 침을 흘리며 접근을 시도해보지만 번번이 무안만 당하며 퇴짜를 맞고 있었다. 정태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여자가 스테이지를 내려와 바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칵테일이 그녀 앞에 척 놓였다. 여자는 어떤 의문이나 의아심도 갖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칵테일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한잔 더?”정태가 옆자리에 앉아 씩 웃어보였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태는 바텐더에게 눈짓을 했다.

“미경아,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왜? 말 하면 해결해 줄 거야?”

그는 그녀의 어깨에 슬며시 팔을 올리며 음흉스럽게 속삭였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그의 손이 가는 어깨 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도 미경은 태연히 바텐더가 내미는 칵테일을 받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정태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슬며시 움켜잡을 때야 미경이 그의 손을 눌렀다.

“손 좀 봐주고 싶은 애가 있어. 해줄 거야?”“얼마든지.”

이제 정태는 노골적으로 미경을 끌어안고 가슴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정태에게 안긴 미경은 칵테일을 마시며 기분 나쁘게 눈을 번득였다.

‘맘껏 행복에 취해 있어보라구. 내가 끄집어내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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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뒷덜미를 잡혀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못내 서운한지 여름 햇볕이 거리를 뜨겁게 달구며 자신이 건재함을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희경은 여름의 오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하고 시원해보였다. 오랜만에 마음까지 느긋하게 만드는 편안한 청바지에 티셔츠를 받쳐 입고 캡모자까지 쓰고 나온 그녀였다. 성진 그룹 본사 건물 앞을 지나고 있지만 올 때마다 마주치는 경비원도 그녀가 민혁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나 편안한 캐주얼 복장으로 건물 안에 들어서는 그녀를 조금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선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며 서고 말았다. 수빈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가녀린 그녀의 몸에 잘 어울리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층을 가리키는 숫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녀는 다른 때보다 더욱 아름답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희경은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어떤 소리도 입 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희경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빈이 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민혁이 바쁘게 보고 받은 서류를 다 훑어보고, 결제 사인을 하는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 사장님…….”“안으로 모셔요.”

민혁은 비서가 당황하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서류를 덮으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말 약속 시간 하나는 정확한 희경이었다. 남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에티켓으로 생각하는 여자들도 많은데 말이다. 민혁은 자신이 불쑥불쑥 그녀 생각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는 일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척 한다고, 투덜거릴 희경의 불평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민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건 희경의 반짝이는 생동감 넘치는 눈동자가 아니라 맑지만 슬픔이 고인 듯한 수빈의 눈동자였다.

“오빠, 많이 바쁜가봐.”“수빈아!”“응, 오전에 학원 수업 받고, 오빠에게 점심 사달라고 하려고…….”“수빈아, 난…….”“오빠,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 오빠하고 함께 밥 먹은 지도 정말 오래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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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애처로워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오고 있을 희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약이 있어.”“희...경..씨랑?”“그래.”

수빈은 입술을 살짝 떨며 민혁의 팔을 잡고 조르듯이 살짝 흔들었다.

“오빠, 1시간만...1시간도 안돼? 희경씨에게 약속 시간을 한 시간만 늦추자고 해줘.”

그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도 이렇게 필사적인 눈빛을 한 적이 없는 수빈이었다. 그 절박한 말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희경은 로비의 의자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가 사람들의 마음을 여유롭고 느긋하게 만드는지, 뙤약볕이 쏟아지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경쾌해 보였다. 먹구름이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는 희경의 마음과는 달리 말이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희경은 액정에 뜨는 번호를 보지 않아도, 누구의 전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고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폴더를 열고 최대한 경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민혁씨, 미안.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약속 시간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아. 저녁에 만나면 안될까?”

희경은 민혁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그래? 잘됐군. 나도 일이 생겼는데.”“우연의 일치네. 그런데 급한 일?”“아니, 잠깐 만날 사람이 생겨서 그래.”“알았어요. 저녁에 봐요.”

희경은 폴더를 덮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콕콕 쑤시며 아파왔다. 뭐, 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오히려 내가 거짓말을 한 거지. 그녀는 민혁이 선택의 상황에서 갈등하는 것이 싫어 먼저 선수를 쳤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회전문을 나와 크게 심호흡을 해 보았지만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희경은 모자를 벗어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휘저으며 헝클어트렸다. 이상한 쪽으로 자꾸만 헤매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비듬을 털면 어떻게 해. 여긴 성진의 얼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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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희경이 고개를 들자 경비원 아저씨가 못마땅해 하며 희경을 쏘아 보았다.

“아저씬, 전 비듬 없어요. 이건 두피 운동이라고요, 두피를 건강하게 해주고 잡생각도 사라지게 해준다고요.”

희경이 머리를 경비원의 얼굴에 들이대며 말한다.

“자 봐요. 제 머리에 비듬이 어디 있어요.”“아...아니 이 아가씨가...”

경비원이 들이미는 희경의 머리를 손으로 밀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

“잉? 아가씬.....”“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오늘은 무단 주차 안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희경은 씨익 웃어보이고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경비원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눈을 몇 번이나 비빈 후, 희경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캐주얼한 복장을 위 아래로 살폈다.

‘사....장님.....약혼녀?’

사장실에서 나오는 민혁을 보자 자리에 앉아있던 비서가 재빨리 일어섰다.

“지금 퇴근하니까, 아영씨도 퇴근하세요.”“예 사장님.”

비서는 다소곳한 얼굴로 사장이 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사장의 뒤를 따라 나가는 수빈을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회사까지 여자가 찾아온 여자는 약혼녀 장희경씨가 처음이었는데,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민혁의 비서는 재벌가의 딸답지 않게 밝고 싹싹한 사장님의 약혼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사장님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저 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저 미모 때문일 것이다. 아휴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좀 예쁘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자들에겐 꼼짝도 못한다니까. 비서는 심통이 난 듯 가방을 챙기며, 제발 저 여자가 사장님의 결혼에 어떤 분란도 일으키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장희경씨와 약혼하고 결혼 날짜를 잡으면서 사장님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출중하게 유능해 혼자서 서너 명의 일을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해내는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평소의 냉소적인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가끔 혼자서 소리를 죽이며 웃는 일도 있었다. 분명 장희경씨의 영향일 것이다. 사장님과 부딪치는 사람들은 모두 사장님의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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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다만 사장님 본인도 느끼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경비원은 사장님의 차 먼지를 닦다가 낯선 여자와 다가오는 사장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아...아니 저럴 수가.....’

순간 전과 다른 복장을 한 채, 모자까지 눌러쓰고 나타났던, 사장님 약혼녀의 심상치 않은 모습이 떠올랐다.

‘흠, 미행 중이었군. 사장님의 바람을 눈치 채고.’

경비원은 잠시 심한 갈등을 느꼈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할지, 모른 채 눈감아주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사장이 차에 올라타는 순간 경비원은 주위를 살피며, 차 유리창을 두드렸다. 민혁이 의아한 얼굴로 차 유리창을 내리자 작게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미행당하시는 중입니다.”“무슨?”“좀 전에 약혼녀께서 변장을 하시고 회사에 나타나셨습니다.”“변장이요?”“예,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거리는 셔츠를 입고 모자까지 눌러쓰셨다니까요. 제가 워낙 눈썰미가 있어서 금방 알아보았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변장이었습니다.”

민혁은 생각에 깊이 잠겨 운전을 하고 있었다. 희경이가 회사까지 왔다가 그냥 가다니……. 그래, 그녀가 약속시간을 어길 리가 없었다. 수빈을 본 것이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다니. 그녀는 내가 수빈과 단둘이 만나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걸까? 이제까지 만났던 독점욕 많은 여자들과 희경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수빈은 희경이 자신 때문에 일부러 피해준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민혁 오빠가 운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점점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이다 말을 걸려는데 갑자기 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오빠!”“미안, 하하하”

민혁은 한동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어댔다. 미행이라니....아마도 수경은 인테리어 사무실이 들렀다 온 것 같았다. 분명 거추장스러운 정장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겠지? 얼마나 심한 변화이기에 변장했다는 말까지 들었을까?

“어디 가서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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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우리가 예전에 자주 갔었던 우동집. 그 곳 우동 국물 오빠가 아주 좋아했었잖아. 우리 거기 가.”

수빈은 그의 기분이 밝아진 것이 기뻐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녀처럼.

희경은 양손에 가득 든 쇼핑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친 듯이 쇼핑을 했더니, 남는 건 후회와 화끈거리는 발, 떨어질 것만 같은 두 팔의 고통뿐이었다.

‘아이구 바보 멍청이, 차도 안 가지고 오고선.’

차를 사무실에 세워두고 온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며, 희경은 비틀거리며 택시 승차장으로 걸어갔다. 민혁과 결혼해서 살 빌라를 보러가기 헤서 일부로 차를 두고 갔었다. 마음 같아서는 산 물건들을 다 반품하고 홀가분하게 걸어가고 싶었지만, 일일이 매장을 돌며 반품하는 것도 큰일이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희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세 남자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그녀를 쫓고 있었다. 택시가 멈춰서고 희경이 올라타자 세 남자가 그녀의 뒤를 따라 택시에 올라탔다. 한 남자는 앞좌석에 타며 택시 운전사에게 협박처럼 들리게 인상을 쓰며 말을 했다.

“합승 좀 합시다.”

두 남자는 희경의 몸을 안으로 밀어붙이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희경을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휴,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희경은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택시 운전사는 벌벌 떨며 남자들이 말하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희경이 끌려간 곳은 사람들이 다 퇴근한 빌딩 공사 현장이었다. 세 남자는 그녀에게 공포감을 주려는지 잔뜩 얼굴을 구기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설픈 것이 프로로 보이진 않는데.”

희경이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하자 오히려 세 남자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이라면 돈이 좀 들더라도 완벽한 프로를 썼을 테니, 이런 일을 꾸민 건 아마도 미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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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군. 혼자 저지르긴 좀 뭐하니, 남자 친구 도움을 받았나?”“이년이?”“난 저녁에 약속이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 빨리 끝내자고.”

남자들이 잔뜩 성이 나 공격해오자 희경은 날쌘 몸놀림으로 날아오는 손과 발을 피하며 생각했다. 고생 좀 하겠다고. 시간이 흐르자 희경의 얼굴은 조금씩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정통으로 얻어맞진 않았지만 남자의 주먹인지라 스쳐지나간 자리도 상처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도 그들에게 충분한 흔적을 남겨주었다. 고자가 될 것을 염려하며 떼굴떼굴 구르면서 울부짖고 있는 한 놈과 그녀의 발차기에 코뼈가 부러진 듯 피를 흘리고 있는 놈 하나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남은 한 놈이 문제였다. 꽤 싸워본 가락이 있는지 그녀의 사정거리 안을 잘도 빠져나가는데다 제법 머리도 돌아 그녀가 지칠 때를 여유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죽기까지 하진 않겠지만 이젠 그녀에겐 팔을 휘두를 힘도 다리를 움직여 피할 여유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날아오는 주먹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고 자신에게 쏟아질 발길질과 주먹질을 견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 서.”

호루라기 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통증으로 울려대는 가슴을 누르고 눈을 뜬 희경은 경찰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희경과 싸우던 남자는 잽싸게 반대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경찰이 걱정하며 희경을 일으켜 세웠다. 희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물었다.

“어떻게…….”“신고를 받았습니다.”“누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쓰러진 남자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침착하게 질문을 했다.

“119에도 신고를 했는데, 왜 이리 늦는 거죠? 여기 코뼈가 부러진 남자는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당신이 신고를 했나요?”

희경이 물음에 그 남자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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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사장 한쪽 구석에 서있는 자동차를 가리켰다.

“내 차요.”“그...그럼 싸움을 저 차 안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천만에.”

기가 차서 말을 잘 잇지도 못하는 희경에게 그 남자는 아주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

“구경만 하지 않고 경찰과 119에 신고를 했소.”“하!”“난 싸움도 못하는데,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내 생명과 같은 손을 다칠 수는 없잖소.”“당신 피아니스트에요?”“잘못 짚었소. 난 의사요.”“의사!”“손이 생명인 외과 의사요.”

희경은 기가 막혀 남자가 하는 꼴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솟구치는 화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도 몰랐다. 남자는 뒤늦게 달려온 119 구급대원들에게 두 남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를 힘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저 얄미운 남자를 두들겨 패주었을 것이다. 그녀의 험악한 시선을 받던 남자가 희경에게 다가오더니 핸드폰을 던졌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흥분이 걷히면 몸이 심하게 떨려오고 맞은 데가 부어오를 거요. 지켜본 바로는 심각한 부상은 없어 보이지만 혹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봅시다. 보호자가 될만한 사람에게 전화해요.”

소리를 지르려던 희경은 남자 말대로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떨림이 점차 온몸으로 퍼져가자 화를 내려던 것을 포기하고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희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다.

수빈은 아늑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만족스런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함께 잘 가던 우동 집 주인은 둘을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북적거리는 우동집 작은 테이블에서 얼굴이 닿을 듯이 마주 앉아 우동을 먹고 있으니, 5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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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동을 먹고, 그들이 즐겨 찾던 카페가 있는 자리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민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빈은 희경에게 온 전화라는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민혁 오빠와 단 둘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데 방해받기가 싫었다. 수빈은 화장실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망설이다가 핸드폰의 폴더를 살짝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전원을 껐다. 수빈은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쳤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오빠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심장의 요란한 박동을 숨겼다.

희경은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를 들으며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핸드폰 폴더를 덮어버렸다. 감정적으로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희경은 자신이 부상을 입힌 남자들이 탄 구급차에 오르는 대신 의사라고 주장하는 뻔뻔한 남자의 차에 올라 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 할 때까지 그녀의 머리 속에선 민혁의 컬러링 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영원히 받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영준은 응급 치료가 끝난 두 남자를 잡아가는 경찰에게 참을성 있게 자신이 본 일들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듯 하나하나 설명을 했다. 병실에 안정제를 맞고 누워있는 여자에게도 몇 번이나 똑같은 것을 물어보았으면서도 이리 궁금한 게 많은지. 장희경이라고 했던가? 그는 씩씩하고 배짱이 있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손가락의 반지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참을성이 바닥이 나기 전에 간신히 경찰 조사가 끝났다. 회진을 돌려는데, 병원내 수다쟁이로 유명한 김간호사가 영준을 발견하고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박선생님, 그 환자분 잠이 드셨어요.”“그래요?”

단호하게 말을 끊는 영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간호사는 연신 그에게 수다를 떨어댔다.

“경찰이 잡아간 남자들, 그 환자분이 다 때려눕힌 거라면서요? 정말 대단해요. 저 같이 연약한 여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호호호...개인 보디가드로 일하는 여잔가 보죠?”“.......”“매 맞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봐요. 호호호 그렇게 힘이 센 여자들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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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니 말이에요.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생명 보험을 많이 들어놔야 할 거예요. 호호호”

환자의 차트를 살피던 영준은 고개를 들고 차갑게 대꾸를 했다.

“김 간호사, 보험회사에 원하지 않는 수다 들어주느라 스트레스 받을 때 보상해주는 보험 상품은 없는지 알아봐 주겠어요? 그리고 있으면 김 간호사가 내 이름으로 하나 들어주시죠.”“.....!”

김간호사 얼굴이 순식간에 빨 게지더니 몸을 획 돌려 걸어갔다. 지나가던 동료 의사가 영준의 어깨를 탁 치며 키득거렸다.

“킥킥킥, 저 수다의 여왕 입을 막다니, 자네도 대단하군. 하지만 저 여자 집요한 데가 있으니까 조심하라구. 오늘로 자네 이름이 호감 가는 결혼 상대 명단에서 싹 빠지고, 원수 명단 제일 윗자리에 오를 테니.”“맘대로 하라죠.”

지난밤에 낮에 갔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차를 두고 왔었다.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차를 가지러 갔다가 귀찮은 일에 얽히긴 되었다. 하지만 저 수다쟁이 김 간호사와 얽히는 것보단 몇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김간호사는 간호사로 근무한지 7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간호사로서의 능력보다는 남의 사생활만 캐고 다니며 소문을 퍼트리는 것으로 더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 여자였다.

회진을 영준은 장희경이란 여자의 병실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신경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오후 일도 영향이 있지만 그 보다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영준은 대낮의 격투씬을 떠올리며 그런 일로 충격을 받지 않을 정도라면 대체 이 여자는 어떤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여자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피멍이 든 곳은 없지만 여기저기 가벼운 멍자국이 잡혀있었다. 대부분의 여자라면 거울을 보고 기겁해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왠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을 나오는데 사물함 위에 놓인 가방이 보였다. 그는 아무란 망설임 없이 가방 안을 휘휘 뒤져 핸드폰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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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수빈을 데려다 주기 위해 차를 몰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 궁뱅이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붉게 물든 석양이 모습을 지우는 것을 보며 초조하고 불쾌한 감정을 한껏 느끼는 중이었다. 희경에게서 전화가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것이 이유였다. 그 때였다. 민혁의 핸드폰 벨이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차안의 정적을 순식간에 깨버렸다. 누구에게 걸려온 것인지 확인한 민혁의 입가에 그제서야 만족스런 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음악을 들으며 점점 화려해지는 야경을 구경하고 있던 수빈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수빈은 불안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는 민혁을 바라보았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욕심에 핸드폰의 전원을 꺼 놓았다가 카페를 나오기 전에 살짝 다시 켜놓았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애써 망각하고 있던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받는 민혁을 보자 가슴이 심하게 떨려왔다.

민혁이 핸드폰 폴더를 열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혁의 신경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당신 누구지?”“그녀는 당신이야 말로 이 핸드폰 주인과 어떤 관계지?”

상대방은 너무나 당당하게 희경과의 관계를 묻고 있었다. 민혁은 그 당당함이 괜히 화가 났다. 왜 희경의 핸드폰을 갖고 있을까?

“난 약혼잔데.”“약혼자라면 언제든 약혼녀 전화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무슨?”“내가 이 번호로 전화를 한 게 벌써 세 번째거든. 계속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만 나오더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걸었는데, 그런 소리 할만하지 않은가?”“그럴 리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던 민혁은 얼굴을 외면하는 수빈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상황을 순식간에 짐작했다. 민혁은 화를 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성진 의료원으로 자네 물건 찾으러 오라구. 아직까지도 의식이 없으니.”“뭐라고?”

놀라 소리치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끊겨진 전화를 노려보던 민혁은 수빈을 바라보았다. 수빈은 떨리는 손으로 민혁의 팔을 잡고 사정하는 눈빛으로 보냈다.

“오빠, 미안해. 그냥 방해받지 않고 오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클렉션을 울려대는 다른 차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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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타고 가라.”“오빠 미안해.” “내려.”“오빠.”

수빈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수빈의 눈물이 민혁의 목의 죄어대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수빈아, 내려.”“미안해. 미안해 오빠.”

수빈은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로 흐려진 그녀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눈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전...화.....할게.”

그는 간신이 전화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차문을 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 행동이 그 때만큼은 참을 수 없게 느껴져, 민혁은 초조하게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수빈이 내리고 차문을 닫자마자 민혁은 꽉 막힌 차들 사이를 억지로 밀어붙이며 달렸다. 차들이 울려대는 시끄러운 클렉션 소리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소리도,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희경은 눈을 뜨고 처음에 무척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경찰의 끝없이 이어졌던 질문과 그 일이 끝나자마자 병실로 끌려와 진정제를 맞고 누웠던 일이 생각났다. 푹 잠을 자고 나서 그런지 머리는 개운한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녀는 심한 갈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더 이상의 노동은 할 수 없다며 파업을 선언하는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려는데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깼군.”“당신은…….”“당신이 아니라 내 이름은 박영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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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은 이온 음료 캔을 따서 빨대를 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음료를 황급히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에게 영중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했다.

“천천히 마셔. 급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입원할 환자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괜히 이 병실 탐내지 말라구.”

희경이 성질 긁는 소리에 열 받아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희경이 좀 더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게 침대 위쪽을 위로 올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거칠고 퉁명스러워도 환자를 편하게 해주려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영준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나타날 시간이 되었는데. 토요일 저녁이라 교통은 만만치 않겠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거친 숨을 내쉬는 민혁이 문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뒤로 원무과장, 병원장, 수간호사가 줄지어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영준은 휘파람을 불더니 희경에게 중얼거렸다.

“당신 임자가 상당한 거물인가보군.”

민혁은 성큼성큼 희경에게 걸어갔다. 희경은 이온 음료를 마시던 빨대를 문 채 멍하니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확 구겼다. 병원장과 희경을 치료했던 의사가 민혁에게 다가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험험, 보이는 것만큼 심하지 않습니다. 부러지거나 출혈이 일어난 곳은 없고…….”“입 닥쳐.”“네?”“아가리 다물라고.”

의사는 험악한 민혁의 말에 놀라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희경은 당황한 듯 민혁의 뒤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뭐하는 거예요. 사람들을 저리 끌고 와서…….”“내 약혼녀의 상태에 대해 물었을 뿐이야.”“난 구경거리 되고 싶지 않다고요.”“들었나?”

민혁이 뒤도 돌아보지 낮게 내뱉자 사람들이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갔다.

“훗 한강에서 뺨 맞고 괜한 곳에서 시비군.”“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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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이 험악한 민혁의 시선을 받으며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 그런가? 그렇게 대단한 약혼녀라면 본인이 잘 챙겼어야지.”

희경은 민혁과 영준이라는 의사가 만들어낸 살벌한 분위기를 못 참고 꽥 소리를 질렀다.

“뭐하자는 거야? 얻어맞은 것도 나고, 지금 배가 고파 돌아가시겠는 것도 나라고.”

희경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배가 동조를 하며 ‘꾸르륵’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황당해하며 그녀를 쳐다보는 두 남자에게 희경이 눈꼬리를 한껏 치켜세웠다.

“점심부터 내리 굶고 육탄전까지 벌였는데, 그럼 배가 안 고프겠어?”

병실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다. 병원장과 원무과장은 불안한 얼굴로 무언가를 숙덕이고, 간호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

“사주 아들이라고?”“그래. 성진의 후계자니 한마디로 미래의 성진 회장님이지.”“얼마 전 대성 그룹의 막내딸과 약혼하지 않았나?”“그러게. 뭐 재벌가야 결혼이 정략적 제휴나 합병 같은 거라잖아. 저 여잔 분명 정부일 거야.”“뭐 폭력 조직과 연관된 여잔가?”"약혼자라는 것 같던데.""에이, 설마 깡패와 주먹질하는 여자가 약혼자라고? 말이 되냐?"

원무과장이 떠들어대는 간호사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며 말을 꺼냈다.

“여러분, 오늘 여기서 본 것은 모두 잊어주세요. 만약 오늘 있었던 일이 언론사 쪽으로 새나가면 강력하게 조치를 취하겠다고 합니다. 모두 아시겠습니까?”

김간호사가 혈압 측정계를 팔에 끼고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왔다.

“비켜 주세요.”

김간호사 몰려 서있는 간호사들을 비웃으며 힐끗 보고는 당당하게 병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간호사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혈압을 재야하거든요.”

김간호사는 혈압 측정계를 들어 보이며 침대의 환자에게 걸어갔지만, 그녀의 눈은 미래의 성진의 주인을 향해 있었다. 조금이라도 민혁과 눈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김간호사를 보며 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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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피식 웃고 말았다.

“혈압 정상, 맥박 정상, 이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마어마한 위를 채워줄 음식뿐인데.”

영준은 덥석 희경의 손목을 잡고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며, 김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민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제가 정확히 재야....”“꺼져.”“예?”“꺼지라고.”

민혁은 당황한 김간호사를 철저히 무시하며 그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영준을 쏘아보았다. 김간호사 얼굴이 굳어져 몸을 획 돌려 병실을 나갔다.

“브라보. 역시 대기업 사장 정도 되면 박력이 다르군.”

민혁은 희경의 손목을 여전히 잡고 있는 영준을 노려보았다.

“남의 약혼녀 손은 그만 좀 놓으시지.”“이런 깜빡했군.”

영준은 민혁의 성질을 돋우려는 듯 아주 천천히 희경의 손을 놓았다. 희경은 두 사람의 유치한 신경전이 피곤하다는 듯 ‘끄응’거리는 소리를 연발하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싸움꾼 아가씨, 다음에 또 보자구.”“뭐...뭐라구요?”

영준의 말에 눈을 번쩍 뜬 희경이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기만 했다.

“담당 의사가 쫓겨났으니, 나라도 설명을 해야겠군. 오늘 밤 혹 의식을 잃을지 모르니까 옆에서 보호자가 지켜보게 하고, 갑작스런 구토가 나거나, 어지럼증이 심하면 당장 병원으로 오도록. 얼굴의 붓기를 가라앉히고 싶으면 차가운 냉찜질을 하고, 뭐 약은 굳이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을 하는 거예요?”“흠 난 철이 안 든 인간들에게는 경칭을 쓰지 않아. 그 나이에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데, 철들었다고 할 순 없잖아?”“이...이......”

영준은 희경이 성질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민혁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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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쳐 가면서 비웃으며 한마디 했다.

“적어도 약혼녀에게 올 땐 다른 여자 냄새는 지우고 와야 소위 말하는 에티켓 아닌가?”

영준의 말에 민혁과 희경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영준은 자신이 만들어낸 긴장된 공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병실을 빠져나간다. 한동안 병실을 침묵이 감쌌다. 희경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민혁의 얼굴을 외면했다. 민혁은 희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혹시 어머니…….”

민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내자, 희경이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참내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말아요. 민혁씨가 상상하는 일이 벌어졌으면 난 뼈도 못 추렸을걸.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프로 아니면 상대조차 안하실 것 같은데.”“그럼....”“나한테 원한 품은 인간들이 많은가 보지 뭐. 배고파서 말할 기운도 없으니까 말 좀 그만 시키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영양제라도 맞아야 하지 않을까.”“내 위가 파업 일으키기 직전이라니까.”“음식은 원하는 만큼 배달시켜 줄게.”

민혁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희경의 얼굴 양쪽에 손으로 감싸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희경은 조금 무안하고 당황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왜...왜?”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을 들어 희경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부어오른 뺨을 안쓰러운 듯 부드럽게 만지다가 그의 손가락은 눈가를 더듬다 이마로 옮겨갔다. 다시 뺨을 타고 내려와 턱을 배회하다가 희경이 잘근잘근 물어 빨갛게 된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엄지손가락으로 희경의 입술을 가볍게 문지르는 민혁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민...민혁씨가 잘못한게 뭐 있......”

희경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그의 입술이 스치며 부드러운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자꾸만 희경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내가 옆에 있어주어야 할 때 있어주지 못한 거 앞으로 두고두고 갚아줄게.”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 배인 따뜻함에 결국 눈물 한방울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뺨을 타고 흘러가려던 눈물 방울은 그의 입술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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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포시 겹쳐지며 그녀의 한숨까지 입안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민혁은 희경이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있다는 말에 정신없이 달려왔다. 달려오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지도, 자신의 폐가 호흡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 때서야 민혁은 희경이 자신의 심장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씩씩하고 당당하고 누구보다도 용감한 희경이었다. 그런 희경이 얼굴에 상처를 입은 채 창백한 얼굴로 병원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은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게 했고, 심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는 숨을 쉬기 위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인간들을 향해 치솟는 화를 참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날 뛸 것만 같았다.

희경의 눈에서 흘어나온 눈물은 그의 가슴을 찢어지는 아픔을 주었다. 그녀의 눈물에 그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훔치며 맹세했다. 그녀의 눈에서 자신 때문에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일을 다시는 없게 하겠다고.

“어....어머 죄...죄송합니다.”

링겔병을 들고 들어온 간호사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희경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자신의 입술을 혀로 더듬으며 점점 농도가 짙어지는 키스를 해대는 민혁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민혁은 아쉽다는 기색을 역역히 표현하며 아주 천천히 희경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간호사는 희경의 팔에 링겔 바늘을 꽂으면서, 희경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민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자신의 존재는 투명인간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호사는 침대에 누워있는 희경에게 괜히 샘이 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병원 앞에 호텔 외식부 차량이 멈춰서고 호텔 직원들이 음식이 담긴 상자를 줄줄이 나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자 사람들이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으려 했다.

“히야 죽이는데.”“무슨 음식이길래 이리도 맛있는 냄새가 나냐.”“갑자기 허기져 돌아가시겠다.”“뭐야? 이렇게 병원 안으로 음식을 배달해도 되는 거야? 그럼 나도 치킨 한 마리 배달시켜 먹을 테다. 아님 짜장면!”

희경은 입이 쩌억 벌어졌다. 끝도 없이 사람들이 병실을 들락거리며, 임시 테이블을 만들고, 그 위에 온갖 종류의 음식들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 퓨전 요리까지 순식간에 수십 명의 손님을 치루어도 될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게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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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누....누구 오기로 했어요?”“배 고프다고 했잖아.”“이걸 나 먹으라고 시킨 거에요?”

민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에 음식들을 골고루 담았다. 그리고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를 못하는 희경에게 음식들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내가 배가 고프다고 했지. 내 위가 위대(大)하다고 하진 않았는데.....”

희경은 투덜거리면서도 밈혁이 입에 넣어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었다. 그녀가 체할까봐 꼼꼼히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의 식사시중을 받는 것도 과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칠리 새우 요리를 먹을 때 입가로 흐르는 소스를 냅킨이 아닌 자신의 혀로 깔끔하게 닦아주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리고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먹고 싶은 음식을 그녀의 입안에서 혀로 빼가는 것 무슨 심보인지.... 희경은 점차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온몸이 이상한 열기로 휩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희경이 참다 못해 한 팔을 그의 목에 감고 그녀의 입안을 들락거리며 음식 맛을 보는 혀를 가두었을 때였다. 그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희경은 깜짝 놀라 그의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핸드폰을 받는 민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았어. 곧 갈 테니까 계속 지키고 있어.”“무슨 일이에요.”

희경이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자 민혁이 씨익 웃어보이며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빚을 갚을 게 있어서. 두 시간 안에 돌아 올 테니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야 해. 알겠지?”“늦어진다고 집에 연락을 해야 하는데....”“내가 알아서 할게.”

희경이 가득 쌓인 음식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 음식들 병원 사람들에게 나눠줘도 되죠?”“원하는 대로.”

병실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혁이 멈춰서며 인상을 썼다.

“그 재수 없는 의사 양반은 안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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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황당해 하는 희경을 남기고 병실에서 사라졌다. 그녀은 그가 병실을 나가고 난 후 한참 후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호텔 룸, 에어컨 바람이 구석구석까지 서늘하게 온도를 낮추어 주지만 침대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두 남녀의 몸에 흐르는 땀까지 식혀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더...더...세게...”“하아하아....”“흐으으윽!”

땀으로 번질거리는 정태가 온몸을 잔뜩 경직시키며 강하게 몸을 밀어붙이고 몸을 떨었다. 정태의 몸에 낚지처럼 팔과 다리를 휘감은 미경의 몸도 경련을 일으키듯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의 몸이 맥없이 침대 위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정태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미경에게서 떨어지려데, 두 눈을 감고 있던 미경이 불만족스럽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떴다.

“왜 이리 느려.”“이봐 이봐. 이번이 벌써 세 번 째라구. 체력 보충할 시간은 줘야지.”“바보같긴, 그 인간들 왜 이리 늦냐구. 결과를 보고 해야 할 것 아냐.”“아하, 그거. 조금만 기다려 봐. 만족스런 소식을 전해줄 테니.”“확실한 사람들이야?”“당연하지. 내가 띨띨한 놈들을 썼겠냐?”“내가 요구한 대로 했겠지?”“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장에 서기 좀 힘들게만 손 보라고 했어. 그런데 대체 누구야?”

그 때 벨소리가 울렸다. 정태가 미경에게 히죽 웃어보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이제야 왔군.”

미경은 시트로 몸을 감싸며, 기대에 찬 눈으로 문으로 걸어가는 정태를 바라봤다. 문을 열며 인상을 쓰던 정태의 눈이 의아한 듯 벌어졌다.

“왜 이리 늦었..... 어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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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미경이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민혁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피가 줄줄 나는 코를 두 손으로 움켜잡은 정태가 울상을 짓고 소리쳤다.

“민혁이 너 미쳤어? 왜 이러는거야?”“미쳤냐구?”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정태의 목덜미를 잡아 획 잡아당겨 자신의 눈을 쳐다보게 한 민혁은 차가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차갑다 못해 냉혹해 보이기까지 한 눈빛에 정태는 다리가 후둘거리는 두려움을 느겼다.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간다는 불길함이 그를 덥쳤다.

“내 약혼녀에게 손을 댄 놈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약...약혼녀? 이..이봐 난 약혼식에 초대받지도 못했어. 난 네 약혼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구.”민혁이 손짓을 하자 얻어터져 엉망이 된 남자 한 명이 안으로 집어던져졌다. 쿵 쓰러진 남자를 본 정태의 눈이 커졌다. 자신 보낸 똘마니 중의 한 놈이었다. 얻어터진 곳이 퉁퉁 부어 눈도 뜨지 못하는 그 놈은 엎어진 그 폼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정태의 몸이 덜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그런...”

사색이 된 정태는 재빨리 미경을 돌아보고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경도 자신보다 더 하얗게 질린 채 정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일년, 민혁의 약혼녀에게 손을 대게 하다니.... 저 꼴을 보니, 분명 알고서 한짓이 분명했다. 아이고 난 이제 죽었다. 차라리 성질을 내는게 났지. 민혁이 저 자식은 저렇게 목소리 깔며 얘기하는게 더 무서운데.

“아이고 난 정말 몰랐어. 진짜야. 맹세할 수 있어.”

정태는 부끄러움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팽게치고 민혁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세 놈을 보냈더군.”“민...민혁아!”“일어서.”“한....한번만 봐주라.”

신음 소리와 함께 민혁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정태가 나가 떨어졌다. 민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태에게 다가갔다.

“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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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은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정태가 울상을 한 채 미경에게 소리를 쳤다.

“경...경찰에 전화해. 사람 살리라고.”

그러나 미경은 얼어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태는 욕설을 내뱉으며 전화기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손이 닿기도 전에 정태는 팔이 뒤로 꺽였고, 그는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으아아악!”“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훼방꾼이 끼는 건 좀 곤란하지.”

민혁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미경은 시트로 몸을 만 채 덜덜 떨며 화장실 안으로 숨어들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둔탁한 소음이 그녀를 섬뜩하게 하며, 온몸에 돋은 소름을 가라앉지 못하게 했다. 민혁에게서 저런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었는데. 항상 냉소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민혁이었다. 그에게 저런 원시적인 폭력성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게 희경이년 때문에 표출되었다니..... 미경은 민혁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 밖이 조용해졌다. 이젠 그녀 차례였다. 미경에게 꽂히던 시선에서 민혁이 그녀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경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폭력과 섹스라!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겠지.

민혁은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음소리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폭력적 분위기만이 좀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알게 할 뿐었다. 민혁이 문을 두드리기 위해 다시 손을 뻗는 순간 화장실문이 활짝 열렸다. 실로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경이 당당하게 자신의 나신을 드러내 보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긴 머리를 의식적으로 뒤로 쓸어넘기자 가슴이 출렁이며 풍만함이 더욱 강조되었다. 머리를 쓸어넘긴 손은 의도적으로 느릿느릿하게 도발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온 가슴선을 따라 흘러내려 휘어질 듯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쳐 허벅지에서 멈추었다.

“오빠, 설마 여자에게까지 손을 대지는 않겠죠?”

미경은 민혁에게 다가서 몸을 밀착시키며 그의 목에 한 팔을 감았다.

“그냥, 조금 장난을 친 것 뿐이에요. 화 내지 말아요. 이제 사돈간이 될 텐데, 우리 좀 더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게 어때요?”

속눈썹을 깜빡이며 유혹적으로 속삭이던 미경은 벽에 심하게 몸이 밀어붙여지자 비명을 질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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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민혁은 미경의 목을 한 손으로 누른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차갑게 말을 꺼냈다.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해도 희경의 사촌이기에 지금껏 봐주었는데, 이젠 아니야. 여자에게 손 댈 거냐고 했지? 후훗 여자라서가 아니라 너란 인간에게 손 대고 싶지 않아. 너처럼 추하고 냄새나는 인간에게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네가 한 일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할 수 있지.”

민혁의 말을 들으며 미경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톱을 세워 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이...이....나쁜.....”

미경은 손을 민혁에게 힘없이 제지당하고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진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냉소적인 비웃음을 날렸다.

“두 번 말히게 하지마. 앞으로 어떤 장난도 용납하지 않겠어. 희경에게 또 한번 장난을 쳤다가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세계에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아니 죽는게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겠어. 내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무모한 용기를 내지 않길 진심으로 빌어주지.”

말을 끝내자 민혁은 더러운 것이라도 밀어내듯 미경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뒤돌아서 성큼성큼 호텔 룸을 빠나갔다. 미경은 주저 앉은 채 이를 갈았다. 자신이 이런 수모를 받고 있는 것이 모두 희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섯부르게 행동하지 않고 다음번엔 꼭 희경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주고 말겠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으....으.......미...미경아....엠브런스...좀 불러줘.”

정태가 피투성이가 된 채 연신 신음 소리를 냈다. 미경은 인상을 확 찌푸리고, 쓰러져 있는 그를 발로 차며 성질을 냈다.

“병신같은 자식!”“아이고...너...너!"

민혁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손이 화끈거릴 정도로 정태 자식을 두르려 팼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병원에 누워있는 희경에 대한 책임이 그 자식보다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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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민혁은 수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꼭 이래야 해?”“뭘?”

민혁이 의아한 듯 중얼거리자 희경이 주위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지금 안 느껴진다는 거야?”“지나치리만치 충분히 느끼고 있어.”

민혁이 히죽거리며 희경의 목에 입술을 밀착시키자 희경은 화들짝 놀라 민혁의 귀를 꽉 잡고 잡아당겼다.

“으으윽!”“둔한 척 하지 말고 빨리 내려놔요.”“싫어.”

민혁이 희경을 양팔로 안은 채 병원 복도를 당당히 걷고 있었다. 희경은 민혁의 고집에 결국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 얌전하게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지만 뒤통수를 쿡쿡 찔러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은 병원 로비로 나오자 한꺼번에 쏠리는 시선에 온몸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민혁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여유 있는 폼으로 희경을 안고 걸었다. 마치 병원 안에 지켜보는 사람 없이 단 둘뿐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민혁의 차는 병원 출입구 바로 앞 주차 금지 구역 안에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게 세워져 있었다. 민혁은 차 문을 열고 희경을 조심스레 앉히고 꼼꼼하게 안전벨트까지 매어주었다.

“괜찮아? 불편하면 뒷좌석에 누워서 가던지.”“괜찮으니까 빨리 출발해요.”“어허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그리 서두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당장 출발 안 해요?”

희경이 도끼눈을 하자 민혁이 쿡쿡대며 차문을 닫고 한가로운 듯 운전석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곤 병원 출입문에 매달려 구경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까지 들어 보이는 여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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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다.

“아이구 제 정신인지 이 남자 뇌를 해부해봐야 한다니까.”

희경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듯 몸을 돌리고 쫑알거리다 민혁이 차에 타자 획 째려보았다.

“사람들 시선이 그렇게 좋으면 연예인이나 되지 그랬어? 내일 아침 스포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싶어요?”“걱정하지 마. 언론사 쪽은 이미 손을 다 써놨으니까.”“돈도 많네. 그 딴 데 쓸 도 있으면 나나 주지.”“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 아니니까 벌써부터 바가지 긁지 말라구.”

민혁은 골이 난 듯 뚱한 희경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차를 출발했다. 지금쯤이면 그의 변호사가 미경과 정태의 부모에게 언론사의 입을 막을 충분한 돈을 뜯어내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겠다는 서약서에도 사인을 받아내고.

희경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상처를 감춰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민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무슨 일이든지 씩씩하게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는 그녀였다. 처음엔 그런 희경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지나친 독립심이 그를 못마땅했다. 조금은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면 좋을 텐데. 그는 갑자기 치밀어 오는 씁쓸한 감정에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행동했는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고 수빈에 대한 감정을 묻던 희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담하게 그에게 후회하지 않게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한 떨림을 감지했고,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든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났었다. 그런데 또 다시…….

영준은 수술 팀들과 함께 수술실을 나오며 수술용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동료 의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처럼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회진 중 갑작스럽게 수술실로 불려가 거의 잘려나간 팔의 봉합 수술을 해야 했지만 그는 예정되어 있는 수술인양 침착하게 집도를 했다. 멍청한 놈, 술에 절어 운전을 하다 팔까지 잘릴 뻔하다니……. 다행인건 한심한 놈이 가로수를 들이박는 정도로 끝냈다는 것이다. 괜한 부상자를 만들지 않고.

“우리 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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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은 금방 수술을 끝낸 환자의 보호자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환자 보호자에게 해야 할 수술 보고를 동료 의사에게 미루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한심한 짓거리를 하다 팔이 잘릴 뻔한 환자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그 아비도 못마땅했다. 영준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환자의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원치 않는 말은 듣지 않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이라고 했던가? 수술 전 환자의 상태에 대한 차트를 들쳐보는 그 옆에서 동료 의사가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 미래의 대권 후보라 불리는 작자라고 했었지. 그래서 아들이 팔을 붙이는 봉합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면서, 만약에 수술을 실패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고 병원 원장을 협박하는 짓거리를 태연히 자행했었군. 하여간 정치가란 놈들은…….

“우리 아들의 팔은 어떻게 됐소?”“예 수술을 성공했습니다. 조금 만 늦었어도 세포의 괴사가 진행되어 절단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직전에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동료 의사가 한정철의 채근에 재빨리 대답을 했다. 그러나 한정철은 영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답을 재촉했다. 어떻게 정치가로 살아남았는지 알겠군. 그는 영준이 수술을 주도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채고 영준의 입을 통해 그의 아들의 상태를 듣기 원했다.

“또 다시 멍청한 짓만 안 하면 팔 병신은 면하겠습니다.”“이...이봐!”

동료 의사가 영준의 대답해 기겁하며 한정철의 눈치를 살폈지만, 영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재활 치료만 성실히 하면 팔은…….”

영준은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동료 의사에게 뒤를 맡기고 그냥 걸어 나가다가, 사람들에게 방해 되지 않으려고 벽 쪽에 붙어 조용히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검은 커튼과 같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고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 여자는 원치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수빈아, 김 비서관에게 아직도 연락이 안 되니?”

잘못을 채근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말투에 잠시 몸을 움찔 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한정철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연락이 됐어요. 금방 이곳으로 오신답니다.”

영준은 잠시 그 둘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부녀 사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그의 생각에 의문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영준은 더 이상의 관심을 지우고 휴게실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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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겼다. 진한 커피 한잔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그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이 내밀어졌다. 박간호사가 싱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오늘은 굉장한 날이네요. 신문이나 TV에서나 보는 유명한 사람들이 무슨 약속이나 한 듯 몰려드니……. 훗훗 뭐 좋은 일로 병원에 오진 않지만요.”

영준은 커피를 받아들고 마셨다.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좀 살 것 같았다. 수다스러운 게 흠이지만 그의 수술 팀에 자주 합류하는 박간호사는 눈치도 빠르고 사람 자체가 선해 그가 꺼려하지 않는 일부 중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 못 보셨죠? 성진의 황태자가 아까 그 여자를 품에 안고 걸어가는데 완전 한편의 영화였다니까요.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멋진 기사 같았다니까요. 아니 백마 탄 왕자였나? 하진 왕자는 왕자지. 간호사들이고 여자 의사 선생님이고 환자에 보호자까지 여자란 여자는 모두 그 여자 분을 시샘했다니까요? 무슨 관계일까요? 애인, 정부?”“약혼자!”“네? 호호 서민혁씨의 약혼녀는 대성 그룹 회장의 따님이에요. 그런 여자가 무슨 주먹질을 하겠어요.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그 여자에게 얻어맞은 남자들의 심각한 상태를…….”“내기할까? 매일 나에게 진한 커피를 대령한다는 조건?”“그럼 선생님은 뭘 해주실 건데요?”“원하는 대로.”“흠 그럼 데이트할 수 있게 선생님의 하루를 내 주세요.”“데이트?”“호호호 간호사 월급이 뻔하잖아요? 약간의 공돈이 궁하죠. 이 참에 선생님과의 데이트를 경매에 올려서 돈 좀 벌어 보려고요.”“쿡쿡쿡 마음대로.”

의사 가운을 벗던 영준은 주머니를 처지게 만드는 무게를 그제야 느꼈다. 손에 잡힌 것은 전원이 꺼져있는 핸드폰이었다. 민혁이란 작자에게 연락이 된 후 돌려준다는 게, 병원을 떠들썩하게 하는 그의 요란한 등장에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엔 수술실에 불려갔고, 수술이 끝났을 때는 핸드폰 주인은 사라진 다음이니……. 영준은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들썩이고는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필요하면 찾으러 오겠지.

깜빡 잠이 들었던 희경은 부드럽게 울리던 엔진의 진동이 사라짐을 느끼고 눈을 떴다. 민혁이 차의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고 있었다. 하품을 하던 희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지자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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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여긴…….”“기다려.”

희경의 안전벨트를 풀어준 민혁은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어떤 설명도 없이 차에서 내려 옆 좌석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여긴 왜? 그리고 그만 좀 내려놔요. 내가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짐짝도 아니고.”“이럴 땐 못이기는 채 하며 그냥 우아하게 안겨 있어주면 안될까?”

내리려고 버둥거리는 희경을 향해 민혁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빨리 왜 이리 끌고 왔는지 설명이나 해봐요.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연락도 없이 더 늦어지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라고요. 난 차도 마시기 싫고, 더 이상 쉴 필요도 없을 만큼 기운도 펄펄 나는데...빨리 집으로.......”

희경은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옮겨지며 당황스러운 듯 빠르게 입을 움직여댔다. 민혁이 자신을 오피스텔로 데려간다는 걸 깨달은 순간 갑자기 심장이 급격히 빨리 뛰기 시작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몸속 깊이 새기던 그 순간을 상기시키는 그 장소에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괜히 창피한 느낌에 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희경은 따뜻하기 보다는 뜨겁다고 해야 할 민혁의 입술에 의해 입이 막힌 다음에야 침묵했다. 민혁의 입술이 주는 열기에 정신을 빼앗긴 희경은 숨쉬는 것도 잠시 있고 있다가 입술을 압박하는 힘에 풀려난 다음에야 숨을 들이킬 수 있었다. 민혁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가쁜 숨을 내쉬는 희경을 향해 만족스런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군. 당신 입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수빈은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를 반복하는 핸든폰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빈은 그녀에게 그림자를 지우는 존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게냐?”

한정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니. 이번에는 좀 써먹을 수 있을까 했더니…….”

그는 몸을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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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서! 윤사장에게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해.”

수빈은 금쪽같은 아들의 병실로 향하는 자신의 친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통해 아들의 음주 사고 은폐를 민혁에게 부탁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녀를 쓸모없는 짐 덩어리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그의 염색체로 세상에 태어난 딸이 더 이상 그 때문에 아파할 마음도, 상처받을 마음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친부의 압력에 굴복해 민혁에게 전화를 하면서도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민혁이 자신 때문에 떳떳치 못한 일에 얽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민혁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몇 번이나 고모부가 저지른 일의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 그녀가 침묵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민혁이 그녀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다.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수빈은 손목시계가 자정 12시를 가리키자 다시 핸드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리는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야했던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였다.

‘왜 전원을 꺼 놓았을까?’

수빈은 텅 빈 병원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민혁은 핸드폰의 전원을 꺼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초조해지는 마음을 내리 눌렀다.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수빈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으악, 뭐....뭐하는 거야?”

희경이 기도 막히고 코도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오피스텔로 끌고 온 민혁은 희경의 언니에게 밤늦게 전화를 해 능청스럽게 처형이라 불러대며 희경의 외박을 정당화시켜줄 것을 뻔뻔스럽게 요구하여 그녀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몸에 두른 옷을 훌훌 벗어던지며 스트립쇼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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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여줘도 난 구경 값은 땡전 한 푼도 지불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요.”“그건 곤란한 걸. 사업가로서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는 건 자존심 문제지.”

몸을 가리는 마지막 천조각도 던져버린 민혁은 난감해하며 눈을 천정에 고정시킨 희경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희경은 그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벌리려고 뒷걸음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민혁은 그녀를 벽과 자신의 나신 사이에 가두고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희경의 옷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능숙하고 숙련된 동작으로 옷을 단숨에 벗겨버렸다. 그의 두 손은 너무 놀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희경의 손을 비웃기라도 하듯 방해의 손길을 철저히 무시하고 요리조리 잘도 움직였다.

“그......그만!”

희경이 단호하게 소리를 빽 질렀는데, 그와 동시에 그의 손 움직임이 딱 멈췄다. 안도하며 화를 내려던 그녀는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퍼렇게 멍이 든 쇄골의 아랫부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안쓰러움에서 괴로운 기색으로 바뀌자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 부분을 손으로 가리며 중얼거렸다.

“보기만큼 심하지 않아요. 그냥 멍이 좀…….”

민혁은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그녀의 머리에 턱을 올린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미안!”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다시는…….다시는 당신에게 어떤 상처도 생기지 않게 할게.”

희경은 가만히 안겨있다 머뭇거리며 두 팔을 올려 그를 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들어올려졌다. 그녀는 잠시 ‘헉’하고 숨을 들이셨지만 곧 눈을 감고 그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놓여지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전혀 빗나가고 말았다.

“악!”

샤워기에서 힘차게 내뿜는 물이 그녀에게 쏟아져 내려 그녀를 금세 물에 빠진 생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당...당신…….”“푹 자려면 개운하게 씻어야지.”

민혁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씻어내고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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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갈며 몇 번의 반항을 시도하던 그녀의 의지도 잠시 후 그의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자정을 넘겼으니, 난 생일 선물을 받고 싶은데.”“뭐라구요?”“생일 선물! 오늘이 내 생일 이잖아.”“이젠 거짓말까지?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어허 약혼녀가 자신의 의무도 망각한 채 약혼자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이거 슬픈걸.”“그...그럼 진짜?”“등본이라도 떼어다 확인시켜줄까?”“끄응”

희경은 할 말이 없었다. 민혁은 짓궂게 당장 생일 선물을 달라고 졸라댔다. 해만 뜨면 당장 생일 선물 대령하겠다고 해도 당장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고 어린애처럼 고집을 피우는 그와 겨우 타협한 게 조용히 그가 시키는 대로 함께 샤워를 하는 거였다. 그것으로 생일 선물을 대신하기로 하고 말이다. 내 생일 날 두고 보자고. 그녀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민혁은 드라이로 희경의 머리까지 꼼꼼히 말려 그녀를 침대로 데려갔다. 그에게 손을 잡혀 침대로 걸어가며 그녀는 한번의 경험이 사람을 이리도 뻔뻔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평생 남자 앞에서 옷을 홀딱 벗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인데, 지금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홀딱 벗고 오피스텔 안을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다. 끄응 이건 점점 타락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희경은 그 주모자를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머릿속의 생각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뜀박질을 하고 있는 심장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민혁의 발이 멈추자 희경도 발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침대 위에 눕혀졌고, 방안은 캄캄한 어둠 속에 빠졌다. 희경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지만 가슴은 묘한 기대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민혁이 따뜻한 나신을 겹쳐오자 그녀의 살갗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그의 접촉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긴장을 풀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팔이 몸에 감기자 그런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몸이 잔뜩 긴장되었다. 정수리에 그의 입술이 스치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그의 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잘 자.”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는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순간이 되었을 때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그가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이......망할 인간!”

희경은 한순간에 온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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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실망감인지 그녀도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의도적으로 팔꿈치로 꽉 눌렀다. 아침에 눌렀을 때 원인 모를 통증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나서야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민혁은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희경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이 싫은지 희경은 깊이 잠든 와중에도 꼼지락거리며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잠결의 행동이라도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희경의 몸을 감싼 팔에 힘이 주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밀착된 희경의 매끄러운 나신은 그의 몸의 피를 한곳으로 쏠리게 하며, 터질 듯 팽창된 욕구를 탐욕스럽게 만족시키라고 그를 부추겼다. 그 욕구를 억지로 누르고 참는 것은 뜨거운 불길에 몸을 태우는 것과 같은 고통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희경이 답답한 듯 몸을 뒤척이면 그를 고통스럽게 태우는 불길에 기름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헉!’

희경의 풍만하면서도 탄력 있는 엉덩이가 그의 사타구니에 밀어붙여지자 그는 고통스런 숨을 삼켜야했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가두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그는 하반신의 격렬한 항의를 무시하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그와 같은 향기가 나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희경은 그의 심장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심장에 굳게 문을 걸어 잠그게 했던 그 여름 이후로 그에게 이렇게 다가온 여자는 없었다.

수빈은 그에게 언제나 특별한 여자였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과 절망의 순간을 맛보게 한 여자이기에. 수빈이 그가 내민 손을 잡는 것을 포기했을 때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며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수빈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수빈의 삶이 매 순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알기에, 그녀에게 행복해져야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때는 수빈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오만이었을 뿐이었다. 행복은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손에 잡히지 않고 흘러내리는 물과 같았다. 수빈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운명이 지어준 그늘을 털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이란 놈을 가슴 속에 잡아 가두어야 했다.

민혁은 한숨을 쉬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비치는 희경을 바라보았다. 이젠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희경의 얼굴이 고운 선을 그리며 어둠 속에 싸여 있었다. 희경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그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 때는 꿈에도 희경과 이런 관계를 만들어 갈 줄은 몰랐었다. 그녀는 강하면서도 한없이 여리고 따뜻한 마음, 그리고 아픔을 이겨낸 자의 성숙함을 가졌다. 또한 그녀에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과분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에게 있는 거라곤, 회사일 외엔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집안의 명예와 체면을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어머니, 과거에 얽어놓은 실타래를 제대로 풀지 못해 한심하게 굴고 있는 자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그녀의 선택을 철저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사탕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꼬마처럼 그는 희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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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달콤함에 중독 되어가고 있었다.

어둠을 밀어내고 해가 세상에 공평하게 빛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병원 특실 창가에 서서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보는 수빈의 눈가는 피곤으로 그림자가 져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수호는 새벽까지 팔이 아프다며, 진통제를 더 놔달라고 소란을 피우며 온갖 신경질을 다 부렸다. 그녀는 간호사조차 질려버린 그를 상대하느라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녀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울리지 않는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결국 새벽이 올 때까지 민혁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녀와의 약속을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그였는데……. 그에게 제일 먼저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욕심에 몇 번이나 그의 번호를 눌러도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 안내만이 울릴 뿐이었다. 그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녀의 손은 초조함으로 떨려왔고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빠, 어디 있는 거야.’

그 순간 그녀의 소망에 대답이라도 하듯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러나 핸드폰을 든 그녀는 순간 흠칫 놀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소파 위로 떨어져 울려대는 핸드폰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수빈은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핸드폰을 받았다.

“안....안녕하세요?”“내가 너무 일찍 전화를 했구나.”

민혁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민혁과의 사이를 허락하겠다고 그녀의 손을 들어주신 분이지만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 분이었다. 하지만 곧 수빈의 눈에서 두려움이 가시었다. 놀란 듯 크게 치뜬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제가요? 장말 그래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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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눈을 감은 채 기지개를 켜다 가슴을 덮치는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괜찮아?”

그녀는 놀라 눈을 번쩍 떴고,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민혁의 눈과 딱 마주쳤다.

“!”“얼음찜질을 해야 할까?”

그는 상황판단을 하기 위해 눈을 열심히 깜빡이고 있는 그녀 곁에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후다닥 기지개를 켜기 위해 활짝 펼친 팔을 잡아당겨 가슴을 가렸다. 그제야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떠올랐다. 홀딱 벗고 함께 목욕하고 침대에 누워 몸을 밀착했던 일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이고, 맙소사!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녀에겐 영 익숙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우선 옷을 입고 나서 생각하자는 생각에 희경은 슬금슬금 침대 끝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를 가로막는 손에 의해 움직임이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는 두 팔 안에 그녀의 몸을 가두고, 가슴을 가리고 있는 팔을 풀었다. 안쓰러운 듯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손으로 밤새 더욱 선명해진 멍 자국을 부드럽게 만지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역시 무리겠지?”“뭐가?”

그의 말에 배어나는 안타까움에 그녀는 이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리를 누르는 밀착된 그의 하체의 반응에 곧 그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대고 격렬하게 키스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입술과 혀로 탐하는 것으로 모자라는지 이로 잘근거리며 자국을 남겼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난 멍 자국을 조심하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새초롬하니 고개를 들고 그의 손을 반기는 유두를 지분거리며 잔뜩 성이 난 하체를 더욱 밀어붙였다. 그리고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봐주라. 뜬 눈으로 밤을 새며 혹시 당신이 깨어나지 않을까 초조하게 기다린 이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 좀 베풀고 싶지 않아?”“하! 뜬 눈으로 밤을 샜다고? 코를 골며 먼저 잠이 든 건 누군데.”“원하는 여자를 두고 잠이 드는 남자는 없어. 당신에게 필요한 건 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발가벗은 남자에게 부둥켜 안겨 잠이 솔솔 올 정도로 내가 강심장인줄 알아?”“코도 골더니 나중엔 다 덤비라며 잠꼬대까지 하던데…….”“무....무슨…….”

얼굴이 빨개져 주먹을 휘두르려는 그녀의 몸을 안아 자신 위에 걸터앉게 한 그는 침대 머리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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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등을 기대고, 그녀의 입술을 삼킬 듯이 빨아들였다. 그녀가 내뱉으려한 험한 말도 그의 키스에 삼켜졌고, 그녀의 주먹은 힘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가 유두를 삼키고 혀로 희롱하자 그녀의 입에서 낯선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읍 헉!”

그의 한 손은 허벅지를 배회하다 검은 수풀에 가려진 동굴 탐사를 시작했다. 습한 동굴 속으로 그의 손가락이 용감히 뛰어 들어가자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도망치려했다. 그는 가슴에 이를 세우며 그녀의 저항을 저지했고, 허리를 움켜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그에게 밀착시켰다. 그리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의 분신을 그녀의 촉촉한 동굴 속으로 강하게 밀어 넣었다. 그녀는 자신을 꽉 채우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 더욱 깊이 들어오고 싶어 요동치는 그 울림에 고통과 함께 묘한 떨림을 느끼고 몸을 떨어야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움켜잡고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했다. 반복되는 마찰과 경련에 그녀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숨이 가빠져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 들어올려 그녀의 몸에서 거의 빠져나갔다가 다음 순간 그녀 몸 안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그를 깊이 받아들였다. 몸이 뜨겁게 타오르다 화려한 폭죽처럼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도 그도 쾌락으로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만족스럽게 서로를 안고 있던 그들만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한 것은 탁자 위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였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의 몸이 일순 굳었다. 눈을 감고 있던 희경이 그녀를 안은 그의 팔이 긴장으로 딱딱해지자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피스텔의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들지 않아도 누구의 전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죠?”

수화기를 들자마자 그는 자신이 짐작이 맞았음을 알았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의 오피스텔 전화번호쯤은 간단히 알아내실 수 있는 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 사람 분을 더 준비해주세요. 희경이도 함께 가겠습니다.”

간단한 통화를 끝내고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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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러 오라는군. 미역국을 끓여놓으셨다고.”

희경은 거울을 보며 신경이 쓰인다는 듯 머리카락으로 계속 목을 가리기 위해 애를 썼다. 운전을 하던 민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히죽 웃어보였다.

“예뻐. 그렇게 거울이 닳아라. 확인 안 해도.”

희경이 민혁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희경은 머리카락을 획 재껴 목을 드러냈다. 그러자 목덜미에 선명한 키스 마크 자국이 자태를 뽐내며 시선을 확 끌어 모았다.

“이런데 이렇게 요상한 걸 만들어 놓으며 어떻게 해? 누가 보기라도 하면…….”

희경이 툴툴거리며 성질을 냈지만, 민혁은 손가락으로 키스마크 자국을 톡톡 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난 마음에 드는 걸. 내 거라는 확인 도장!”

희경은 빨간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는 것을 확인한 순간 목덜미를 더듬고 있는 민혁의 손을 확 잡아챘다. 그리고 이를 날카롭게 세워 꽉 물어버렸다.

“윽!”

재빨리 손을 빼낸 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희경을 보았다. 희경은 민혁에게 씩익 웃어 보이며 손에 선명하게 난 이 자국을 눈으로 가리켰다.

“내 거라는 확인 도장!”“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 상당히 원시적이군.”“뭐라고?”

희경의 눈이 도끼눈이 되자 민혁은 양손을 들어 휴전을 청하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희경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시 한번 민혁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고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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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깔끔한 크림색 정장 차림이었다. 민혁의 전화 한통에 매장 오픈 시간 전에 끌려 나온 디자이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녀의 몸에 딱 맞는 정장을 골라주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올릴 수만 있다면 정말 여성스러우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줄 텐데……. 하긴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의 어머니 얼굴에 진심어린 미소를 띨 순 없을 것이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신의 얼굴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은 정말 마음이 편치 않는 일이었다. 민혁이 한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가 돌아보자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마주쳤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여자는 그녀라고, 좀 더 당당해도 된다고.

“어서 오세요.”

현관을 들어선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현관에서 민혁과 희경을 맞이한 사람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은 수빈이었다. 희경은 재빨리 민혁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수빈을 바라보는 그 역시 자신처럼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빈이 네가 어떻게…….”“어머님이 오빠 생일상을 차려보라고 하셔서. 희경씨 어서 올라오세요.”

수빈은 자연스럽게 손님을 접대하는 주인처럼 희경을 대했다. 희경이 거실로 들어서자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어머니가 냉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경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혁을 보고서야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이틀 후에야 입국하신다는구나. 그 때 따로 날을 잡아 파티를 하도록 하고 오늘은 수빈이가 솜씨를 발휘한 생일상을 받자구나.”

그리고는 식당으로 앞장 서 걸어갔다. 널찍한 식탁에는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있었다. 맛깔스럽게 윤이 나는 갈비찜, 보기만 해도 상큼한 맛을 느끼게 하는 해파리냉채, 꽃빵을 예쁘게 두르고 젓가락을 유혹하는 부추잡채, 화려한 멋을 자랑하는 구절판, 신선함이 가득한 샐러드, 활짝 핀 꽃처럼 예쁘게 펼쳐진 겨자채 등등

국을 푸던 아주머니가 민혁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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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왔구먼. 어서어서 앉아 들어요. 색시가 새벽부터 와서 수고 했구먼. 요즘 색시답지 않게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잘도 만들어. 간도 어찌나 입에 맞게 잘 맞추는지……. 결혼하면 신랑 잘 챙겨먹이겠다니깐.”

민혁은 식탁에 앉는 어머니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시죠?”“꿍꿍이라니, 자식 놈 생일에 미역국을 먹게 해주려는 어미의 마음을…….”

어머니는 민혁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래, 예전에도 수빈이가 손수 미역국을 끓여 생일상을 차려준 적이 있다며? 어미도 못한 일을 수빈이가 해주었다니 정말 고맙더구나. 네가 자랄 때,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챙겨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생일에도 미역국 한번 직접 끓여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자 빨리 앉아라. 미역국이 정말 맛있게 끓여졌더구나.”“수빈이도 그만 하고 앉거라.”

민혁의 어머니는 뜨거운 국을 조심스럽게 식탁에 놓는 수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셨다. 그러나 멀뚱하니 서 있는 희경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녀의 존재를 모른 체했다. 민혁이 이를 꽉 물며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희경이 재빨리 민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수빈에게 감탄의 미소를 보냈다.

“우와, 이 많은 걸 수빈씨가 다 만든 거예요? 정말 솜씨가 좋군요.”“아주머니가 많이 도와주셨는걸요.”“맛있게 먹을게요. 민혁씨 빨리 앉아요.”

민혁을 억지로 의자에 앉힌 희경은 그의 어머니에게도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희경은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민혁의 어머니 시선이 희경에게 쏠렸다.

“음, 미역국이 정말 맛있네요. 수빈씨 무슨 비법이 있나요? 좀 가르쳐 주세요. 내년 생일에는 제가 직접 미역국을 끓여주게요.”“어머니와 언니들은 음식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너는 미역국조차 끊일 줄 모르니?”

민혁의 어머니 김여사가 냉소적인 비웃음을 던졌다.

“네, 어머님. 제가 그런 쪽엔 재주가 없어서. 하지만 워낙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를 둔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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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감별하는 혀의 미각은 한없이 발달했죠.”“자랑할 일은 아니구나. 그러게 피는 속일 수 없다지 않니?”“.........”

김여사 차갑게 내뱉은 말은 썰렁한 식탁의 분위기를 더욱 냉랭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참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던 민혁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예, 요리 솜씨가 없는 것에 실망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보다 음식을 즐기는 마음이 더 소중하다시며 음식 맛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셔서요. 전 그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리고 다행인건…….”

희경은 민혁을 보며 생긋 웃었다.

“민혁씨가 위가 튼튼해서 제 엉망인 요리 솜씨를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네요.”

희경을 바라보는 민혁의 눈이 따뜻하게 빛났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불쑥 말을 꺼낸 수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언짢은 민혁의 표정에 밥과 국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빈이 고개를 똑바로 들고 희경을 바라보았다.

“희경씨,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알고 싶으셨다고 했죠?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절대로 이 맛을 똑같이 낼 수는 없을 거예요.”

처음으로 수빈의 눈빛이 도전적으로 바뀌었다. 희경을 쏘아보며 수빈은 또박또박 말을 했다.

“제가 미역국을 처음 끓인 것은 민혁 오빠를 위해서였죠. 제가 오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생일 날 누구보다도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 선물로 주고 싶었어요. 수없이 연습하며 오빠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미역국을 끊였어요. 오빠는 국물도 남기지 않고 정말 맛있게 먹어주었어요. 이 미역국엔 오빠를 위한 제 마음이 담겨있어요. 그 마음을 희경씨가 그대로 따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오빠를 알아온 시간도 오빠와 함께 나눈 시간도 희경씨보다 제가 더 많으니까요.”

수빈은 질투심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오빠가 약혼을 하고 결혼하게 될 거라 했을 때도 마음이 아프고 절망스러웠지만 이렇게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었다. 민혁 오빠와 희경이 나란히 현관에 들어설 대 그녀는 알았다. 둘에게서 같은 향이 풍긴다는 것을……. 희경이 수빈의 옆을 지나갈 때 그녀는 희경이 머리카락에서 민혁 오빠의 샴푸 향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을 억지로 한쪽으로 밀어내려할 때 그녀의 눈에 희경의 목에 난 보랏빛 그늘이 들어왔다. 그녀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민혁 오빠와 나누지 못했던 것을 희경이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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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부터 그녀의 눈에 불꽃이 튀고 희경에 대한 미안함도 지워져 버렸다. 그래. 그의 어머니가 인정하는 사람은 나야. 자신을 갖고 당당해지는 거야.

“민....민혁씨!”

희경은 민혁의 손에 끌려나오며 놀라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식탁에서 벌떡 일어선 민혁은 다짜고짜 희경의 손목을 움켜잡고 식당을 나와 버렸다. 김여사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허둥지둥 집 밖으로 끌려나온 희경은 차에 거칠게 태워졌다. 그는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가 큰 도로로 나갔다. 그리고 약국이 보이자 뒤따라오는 차들이 빵빵거리는 것을 무시해버리고 급정거를 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희경은 앞으로 몸이 쏠려 머리를 박을 뻔 했지만 민혁의 잽싼 손놀림에 이마에 혹이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는 희경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 약국으로 갔다.

“먹어.”

민혁은 무뚝뚝하게 소화제 알약과 드링크를 희경에게 내밀었다. 민혁의 짐짝 취급에 성질을 내려던 희경은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 그저 아무 말도 않고 소화제와 드링크를 마셨다. 그의 눈에 말로 표현하지 않은 미안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바래다주지 못할 것 같아. 난 정리할 일이 있어서.”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은 그에게서 단호한 결심의 빛이 느껴졌다. 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게 정리할게.”

희경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대었다. 희경은 민혁이 잡아 준 택시에 올라 타 그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녀가 탄 택시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택시 안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던 희경은 핸드폰이 보이지 않자 얼굴을 찡그렸다. 핸드폰은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지만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주소록은 큰 골칫덩이가 될 것이다. 메모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녀는 웬만한 것들은 다 핸드폰에 저장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떨어뜨렸나? 싸움판을 벌였던 공사 현장을 떠올려 보던 희경은 갑자기 영준이 생각났다. 이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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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며 그녀를 열 받게 만들었던 남자! 그래 그 자야.

“아저씨, 성진 병원으로 가 주세요.”

희경은 집을 향해 달리는 택시의 방향을 바꾸었다. 솔직히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눈치 채고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불안했다. 화장으로 감춘 얼굴에 난 상처도 엄마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숨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되도록 늦추고 싶었다.

수빈은 민혁과 희경의 급작스런 퇴장에도 흔들림 없이 김여사를 위해 차를 끓이고 과일을 준비했다. 그런 침착한 모습이 김여사에게 수빈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5년 전 수빈을 변호사 사무실로 불러 병석에 누워계시는 시아버지가 새로 작성한 유언장을 보여주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민혁과 수빈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위협을 해도 통하지 않자 김여사는 수빈을 조용히 불러 그녀가 민혁이 옆에 붙어있으면 민혁이 앞으로 상속될 재산들이 모두 사촌들에게 나누어질 것임을 보여주었다. 성진의 주식도 미국에서 공부 중인 사촌 재혁에게 모두 상속되어 민혁 대신 재혁이 성진의 주인이 된다는 거였다. 수빈에 대해 김여사에게 전해들은 시아버지는 몹시 노하셔서 유언장을 새롭게 만들고 공증까지 하셨다. 평소에 민혁을 제일 아끼시던 시아버지는 김여사에 지지 않게 미래의 성진의 안주인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 유언장은 끈질길 정도로 민혁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수빈을 떼어놔 주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아직도 수빈이 자신의 성에 차는 며느릿감은 아니지만,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김여사의 눈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흥! 그런 여자의 딸을 내 며느리로? 안될 말이지. 무덤 속의 시아버지가 튀어나오실 일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희경은 외과로 직행해서 간호사에게 박영준 의사를 찾는다고 말을 했다. 간호사는 의사의 이름을 듣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비번이라 안 나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돌아서는 그녀를 김간호사는 가재 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흥, 여자가 있다 이 말이지. 재수 없는 자식. 좀 얼굴 볼만하고 실력 인정받는다고 추켜 세워주었더니....’

김간호사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마다 무안을 주던 영준을 생각하며 이를 바드득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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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희경은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영준과 딱 마주쳤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야구 모자까지 눌러쓴 영준은 의사라기보다는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건강한 탄력이 느껴지는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

희경은 외과 의사 손을 운운하며 자신을 거들지 않고 구경만 한 영준에게 또 다시 화가 치밀어와 손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선생님!”

그 때 스포티한 운동복 차림의 박간호사가 달려왔다.

“이 간호사가 발목을 삐끗해서 못 간다고 연락이 왔어요. 어떻게 하죠? 우리끼리 가야 할까요?”“걱정하지 말아요. 대타가 있으니까.”“네?”

의아해 하는 박간호사에게 씨익 웃어 보인 영준은 희경의 팔을 잡고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탄 박간호사에게 희경의 팔을 들어보였다.

“여기 팔뚝 굵고 힘센 대타가 있으니까 이번엔 우리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겁니다.”“뭐라구요?”

희경이 확 째려보며 발길질을 했지만 영준의 여유 있게 피해 희경은 엘리베이터 벽을 발로 차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희경에게 쏠렸고, 희경은 씩씩거리며 영준을 노려보았다. 박간호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문을 닫고 나오던 수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민혁을 발견했다. 민혁은 차에 기대 선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혁과 수빈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였다.

“수빈아,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그의 단호한 표정에 수빈은 잠시 움찔했지만 턱을 치켜들고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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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준의 차가 멈춰 선 곳은 ‘기쁨의 집’이란 간판이 붙은 곳이었다. 김포로 들어서 제방도로를 달리다 샛길로 빠져나와 시멘트로 포장한 길을 조금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 영준은 희경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아 그녀의 성질을 더욱 돋웠다.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린 희경은 차문을 요란하게 닫으며 소리쳤다.

“빨랑 내 핸드폰이나 내놔요. 난 돌아갈 테니까.”

그리고 획 돌아선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제일 머리가 굵어 보이는 놈이 차에서 내리는 영준에게 불만스럽다는 듯 쫑알댔다.

“이 아줌마야, 비장의 무기가?”“그래.”

영준의 대답에 그 아이는 무척 실망한 듯 한숨을 내셨다.

“제길 이번에도 지겠네. 저렇게 둔하게 생겼는데, 방망이를 휘두르긴 커녕 제대로 뛸 수나 있겠어?”“호호호 뭐라고 꼬마야?”

희경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불평해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다시 한번 말해 볼래?”“뭐하는 거예요 아줌마. 으윽!”

희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던 아이는 손 힘에 눌려 꼼짝을 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난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니까 누나라 불러줄래?”“아줌마 힘 대빵이다.”“아줌마 아니란…….”“야호, 정호야 한판 붙자.”“어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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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아이의 손에 잡혀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이힐을 신은 발이 몸을 쫓아가지 못해 기우뚱하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턱이 화끈거려 눈물이 핑 도는 희경을 보며, 아이가 이마에 인상을 썼다.

“뭐야? 힘만 세고 둔한 아줌마 아냐?”“뭐라고? 이 자식이!”

서로 지지 않고 노려보며, 눈싸움을 하는 희경과 아이를 향해, 영준이 소리쳤다.

“이봐들 야구는 몸으로 하는 거지 눈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태수야 어서 와서 들어.”

희경은 영준이 차에서 배트와 야구 글러브가 담긴 가방을 꺼내 어깨에 턱 걸치는 모습을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았다.

두 잔의 음료수 유리컵이 놓인 탁자 위에 봉투가 놓여졌다. 수빈이 민혁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끼지 않은 채 물었다.

“뭐예요 오빠?”“어학연수 코스와 그 뒤 네가 다닐 학교에 필요한 서류들이야. 미국 비자가 나오는 대로 떠날 수 있게 해두었다. 그 곳에 가면 네가 묵게 될 집과 그곳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 도와줄 사람도 수배해 두었어. 그러니 별 불편함이 없을 거야.”“........”“수빈아, 난 네가 새로 시작했으면 좋겠다.”“오빠, 난 지금 새로 시작하려고 하고 있어.”“아니, 넌 여전히 과거에 연연하고 있어.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실수하고 있는 것은 오빠야. 오빠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거야. 오빠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과 예전에 내가 저지른 짓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거야. 그래서 결혼을 강행하려는 거 아냐? 오빤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수빈아…….”“아니 오빠가 내 말을 들어줘.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야. 오빠가 나에게 한 말이었잖아. 난 그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왜 희경씨까지 힘들게 하는 거야? 어머님에 대해 잘 아시잖아. 희경씨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너 혹…….”“그래. 어머님에게 들었어. 희경씨 어머니에 대해. 집안을 소중히 생각하시는 어머님이야. 어머님이 백번 양보하려 한다 해도 희경씨는 안돼. 오빠가 잘 알잖아. 희경씨만 더 힘들어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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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기분, 그걸 희경씨에게 느끼게 하고 싶은 거야?”“희경인 그렇게 약하지 않아.”

민혁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수빈의 눈을 응시했다.

“너와 난 외로웠어. 넌 어머니를 잃고 세상에 마음 의지할 사람을 찾지 못해 외로움에 고통 받았고, 난 가족 속에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 굶주려 있었어. 성진의 후계자가 아닌 나 서민혁에게 쏟아줄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했어.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끌렸던 거라 생각한다. 서로 외로움을 감지하고 그것을 보듬어 주었던 거야. 만약 그 때 우리가 결혼을 했더라도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어. 외로움을 서로가 감싸주는 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아니야. 우린 사랑을 했어. 서로를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하며. 내가 오빠와 헤어지기를 결심한 것도 오빠를 위해서였는데…….”

고집스럽게 말하는 수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왔다. 민혁은 답답한 시선으로 수빈을 바라봤다.

“이젠 너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어. 수빈아,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아니라 가슴을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를 만나라.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어. 나는 아니야.”

수빈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민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에겐 오빠뿐이야.”“미안하다.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어. 너의 힘으로.”

민혁은 고집스런 표정을 지은 수빈을 한참 바라보다 일어섰다. 수빈은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카페를 나온 민혁은 담배를 찾아 물었다. 수빈을 만날 때마다 담배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민혁은 담뱃불을 붙이려다 갑자기 희경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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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야구배트를 던져버린 희경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희경이 세차게 받아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다음 타자로 대기하고 있던 태수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소리쳤다.

“끝내준다, 아줌마!”“자식 누나라니깐!”

희경은 콜라 잔을 들고 승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연이어 혹사당한 몸은 불평을 해대고 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모든 골칫거리에서 해방되어 마음 편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다. 콜라를 바시던 희경은 자신의 흉한 몰골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막가파 저리 가라할 제멋대로 남자 영준에게서 빌려 입은 추리닝 바지를 최대한 졸라매 흘러내리지 않게 입고 그 위에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때려낸 역전 홈런으로 그녀는 아이들에게 영웅이 되어있었다.

“좀 드세요.”

박선주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박간호사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밀며 옆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선주씨, 이런 시합을 자주 하나요?”“네, 작년에 자원봉사 나왔던 사람 중에 외과 팀과 소아과 팀이 여기 아이들과 함께 두 달에 한번씩 야구 시합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소아과에 스포츠 만능인 의사 선생님이 한 분 계시고, 학교 다닐 때 소프트볼을 한 경험이 있는 간호사가 있어서 매번 외과 팀이 지고 있는 실정이었죠. 그래서 태수가 불만이 많았어요. 승부욕이 대단한 아이거든요. 호호 그래도 박선생님을 좋아해 항상 우리 팀에 들어오죠.”“박영준씨는 운동 좀 하실 것 같은데, 대타로만 나오고 안 뛰시데요. 외과 의사의 생명이라 떠들던 그 손 보호 때문인가요?”“아니에요, 그건…….”“그건 내가 이야기 해주지.”

선주가 망설이고 있을 때, 영준이 나타나자 그녀는 재빨리 일어서 짐을 챙기겠다고 자리를 피했다. 영준은 선주가 일어난 자리에 앉으며 접시 위에 놓인 수박을 집어 들었다.

“내 왼쪽 다리가 겉으로만 멀쩡하지 병신이거든.”“?”“자동차 사고로 박살났거든. 뛰어난 솜씨를 가진 의사를 만난 덕에 제대로 붙이긴 했지만 조금 천천히 뛰는 것 정도는 되지만 빨리 뛰는 건 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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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야구 시합도 무리일 텐데 왜?”“대타 정도는 할 수 있지. 홈런을 치면 되니까. 그러면 여유 있게 베이스를 밟으며 돌 면되잖아. 필사적으로 도는 것보다 폼도 나고 멋지잖아. 안 그래?”

수박을 먹으며 천역 덕스럽게 이야기하는 영준에게 희경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굉.장.한 자신감이네요.”“머리도 받쳐주지.”“흐......”“아, 다음번에는 좀 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나와. 그러면 홈런 몇 방은 더 터져줄 테니.”“왜요? 바지가 흘러내리려 해서 좀 불안하긴 했지만, 이렇게 입어도 별로 거치적거리지 않던데.”

영준이 하얀 밑동만 남은 수박을 내려놓으며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소아과 팀 투수, 저 놈이 꽤 여자를 밝히거든. 타석에 섰을 때 가슴과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주고 입술 몇 번 빨아주면, 날쌔던 공이 그냥 흐물거리더라구.”

희경이 인상을 팍 쓰며 쏘아댔다.

“그거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당연한 작전이라고. 이왕이면 전술이 뛰어나다고 해주겠어?”“하!”

희경의 코웃음에 피식 웃고는 영준은 희경이 마시다 놓아둔 콜라 잔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그건 내가 마시던......”“응?”“.......”

당황해 말을 더듬던 희경은 갑자기 콜라를 마시는 영준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좀 탁하지 않아요? 내가 마시다 침 흘렸는데.”

그러나 영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콜라를 다 마셔 오히려 희경이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영준은 콜라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었다.

“흠, 이제 우린 타액과 타액이 섞인 사이가 되는 건가?”“뭐...뭐라고요?”“아줌마, 아저씨랑 결혼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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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에서 튀어나온 태수가 희경을 향해 인심 쓰듯 말을 했다. 희경은 ‘끄응’하는 소리만 연발하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저씨, 아줌마처럼 배트를 잘 휘두르는 여잔 처음 봤어요. 아저씨랑 결혼해도 될 것 같아요.”“아저씨도 아줌마가 어퍼컷 날리는 솜씨 보고 알아봤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줌만 임자 있다고 도장 찍혀있다.”“에이, 진짜 아줌마잖아.”“뭐야 꼬마?”

희경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뜨자 태수가 혀를 낼름 내밀고 달려갔다.

“어머 결혼하셨어요?”

짐을 챙겨오던 선주가 궁금해 하며 묻자 희경이 손을 저어보였다.

“아니에요 아직…….”

영준이 박간호사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박간호사가 어제 봤던 영화 속의 주인공이잖아.” “네?”“재벌의 후계자가 영화를 찍는 것처럼 다친 연인을 안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사라졌다면서…….”“아...아니 그럼…….”

선주가 입이 쩍 벌어져 희경을 바라보자 희경은 인상을 쓰며 고자질을 하는 인간에게 본 떼를 보여주기 위해 팔꿈치를 들어 영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영준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아 팔꿈치의 가격을 받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싱글거려 열 받은 희경의 머리에서 스팀까지 솟게 만들었다.

“저....혹...설마....그럼 희경씨가 서민혁씨의 약혼자?”“딩동댕!”

영준이 무안해하는 희경 대신 실로폰을 울려주었다.

“박간호사 내기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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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골목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지만 희경은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시간 째 그녀의 집 앞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과 헤어진 후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희경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집에 있지도, 처형과 함께 있는 것도, 사무실에 나간 것도 아니었다. 희경의 핸드폰은 주인과 연결해주기는 커녕 짜증나는 메시지만을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었다. 자신이 원할 때 희경과 통화할 수 없는 것이,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는 것이 이렇게 짜증나는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민혁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사람을 풀어서 희경을 찾아내야겠다고 결심할 때였다. 희경의 집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본 민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희경은 자꾸만 나오는 하품을 입을 가리고 하는 것도 나중엔 귀찮아졌다. 그래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하품을 하다 영준의 시선을 느끼고 새침하게 말을 했다.

“하품은 체내 부족한 산소 공급이라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요.”

영준 차를 세우며 실소를 했다.

“풋, 지금 의대 6년에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며 사람 몸에 대해 지겹게 배운 나에게 인체에 대해 설명을 하겠단 말인가?”“칫 잘난 척은....그냥 생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뿐이에요.”

희경은 차문을 열며 인상을 긁었다.

“그리고 반말 그만해요. 나도 말 확 놔버릴 테니까. 댁한테 반말 들으면 무지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에요.”“허어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란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고맙단 인사 한 마디도 없고 반항이라.”“그...그건.”

차문을 잡은 채 미안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희경에게 영준이 다가와 쇼핑백을 내밀었다.

“박간호사가 걱정을 태산 같이 하던데. 뭐 억수로 비싼 디자이너 옷인데 찢어져서 어떻게 하냐고. 자기 월급 두 달 치는 될 거던데. 설마 손해 배상을 청구할 정도로 얼굴 두께가 두껍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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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당연히 손해배상 청구해야지. 날 멋대로 끌고 가 그렇게 된 거니 당신이 50%는 물어내야죠. 안.그.래.요? 잘.나.가.는. 외과 의사 양반! 선주씨 말로는 그쪽에서 손가락 안에 든다면서요. 뭐 다섯 손가락인지 백 손가락 안인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돈도 많이 벌 거 아니에요?”“하! 이래서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거라니까.”“흥! 누구는 돈을 그냥 찍어내는 줄 알아요?”

영준이 끝까지 지지 않고 대꾸하는 희경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희경에게 내밀었다.“계좌번호를 이 번호로 찍어 보내.”“아..아니...농담이에요 농담!”

영준은 당황한 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희경의 머리를 흩트려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나아 보이는군. 병원에서 보았을 때는 멍한 눈을 하고 있더니.”“......”“이틀 연속 몸을 혹사해서 내일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뜨거운 물에 근육을 풀고 자도록 해.”

영준은 희경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짓궂고 뻔뻔스런 태도를 풀고 다정한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영준의 옷자락을 잡았다. 영준이 돌아보자 희경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고...고마워...요.”

영준이 가만히 웃어 보이더니 희경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희경은 그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와 몸이 부딪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한 그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초조함이 극도에 다다랐을 때, 희경을 발견한 민혁은 굳어있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희경에게 다가가는 낯익은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지켜보며 민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자신만의 처녀지를 침략당한 기분이었다. 희경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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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거칠게 차문을 열던 민혁은 그가 희경의 머리를 흩트려 놓는 친밀한 모습에 짧게 성난 숨을 들이켰지만, 곧 이어 둔탁하게 심장을 강타한 충격에 그는 잠시 몸이 비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 했다. 그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고 강하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였다. 그가 그녀에게 끌렸던 것도 다른 여자들과 다른 그녀만의 독특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서는 남자의 옷자락 끝을 손으로 움켜잡는 희경에겐 그러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보호받기를 원하는 연약한 여자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 낯선 모습을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이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머 민혁씨?”

희경이 민혁 등장에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띄었다. 그러나 민혁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희경의 얼굴에서도 불안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라도…….”“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더군.”

희경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다 되어서, 병원으로 휴대폰을 찾으러 갔었어요. 훗 그랬다가 엉더결에 대타로 야구 시합에 끌려 나갔다니까요. 물론 이 몸이 역전 홈런 한방 날려 시합을 깨끗하게 마무리 해주었지만.”

희경은 코를 찡끗거리며 웃었다. 민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희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묻지 않을 건가?”“........”“수빈이와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알고 싶지 않아?”“묻길 원하나요?”“.......”

희경과 민혁은 잠시 서로의 눈을 흔들림 없이 응시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전 수빈씨가 쉽게 당신을 포기하리라 생각하지 않아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뼈아프게 느끼게 된다잖아요. 더군다나 가장 두려워하던 적이 강력한 아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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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선 이상에..... 그러나 전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고, 당신은 선택을 했어요. 그런데 흔들린다면…….”

희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에겐 미래가 없겠죠.”“그래도 당신은 괜찮아? 나와 완전한 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당신은요?”“난 괜찮지 않아.”

민혁은 이를 갈 듯 내뱉고, 희경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마치 도망치려는 사냥감을 포박하는 사냥꾼처럼 그의 거친 손길에서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벌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은 난폭하게 그녀의 입술을 유린했다. 놀란 희경이 거부의 몸짓을 보였지만 그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는 그의 난폭함에 의해 그녀의 입술은 부풀어 올라있었다. 그는 그녀의 놀란 눈빛에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녀의 몸을 대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내일 만나 이야기하자. 지금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당장 들어가 그 자식 옷 따윈 벗어버려.”

그리고 희경이 어떤 대꾸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멍하니 그런 그를 바라보던 희경은 화가 난다는 듯 소리쳤다.

“이봐요. 서민혁씨.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당신 약혼녀지 당신 종이 아니라고요. 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민혁이 획 돌아서자 희경이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들어가서 편하게 옷 갈아입고 쉬겠어. 아님 내가 함께 들어가 내 손으로 벗겨줄까.”

희경은 민혁을 째려보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대문에 몸을 기댄 희경은 아침과는 너무나 다른 그의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무슨 일일까?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희경은 그에게 생일 축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그녀를 기다린 것인지 모르는데……. 그에게 전화할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러나 어제 오늘 그녀에게 일어난 육체적 정신적 사건들을 모두 잊고, 숨을 돌릴 시간이 그녀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야 다시 싸울 힘을 얻을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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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는 민혁의 표정이 위험스런 빛을 띄었다. 희경을 안았을 때 익숙한 그녀의 향에 섞여 나던 낯선 남자의 냄새가 아직도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의 옷을 걸치고 있는 희경의 모습은 그의 분노에 불을 질러 겉잡을 수 없게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여자에게 난폭한 짓을 한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희경과 더 있다가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희경과 그 의사 놈이 어떠한 관계도 아니라는 것은 그의 이성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본능은 자신에게 향하는 희경의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그 어떤 남자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와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했던 것들이 쓸모없어졌기에.

현관을 들어서던 희경은 굳은 표정의 작은아버지와 마주쳤다. 희경은 자신의 몰골에 신경이 쓰였지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작은아버지 오셨어요?”“대체 성진의 꿍꿍이가 뭐라더냐? 민혁군이 뭐라 안 하든?”“네? 무슨…….”

희경은 작은아버지의 화가 난 말투에 당혹스러웠다. 성진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희경아, 네 방으로 올라가라. 어머니는 주무시니까.”

희경의 아버지가 표정 없는 얼굴로 희경이 3층으로 올라가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불만이라는 듯 형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건 성진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민혁군과 약혼한 희경도 당연히 알아야 할 문제잖아요.”“그만!

굳은 표정으로 형을 쏘아보던 작은아버지의 시선이 희경 쪽으로 옮겨갔다.

“미경이가 저지른 짓은 형님에게 말씀드렸다. 그 아이가 너무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용서하렴.”

마지못한 듯 이 말을 한 뒤 작은아버지는 현관을 나섰다. 희경은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와 관련된 일인가요?”“아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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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한숨을 쉰 후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성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저도 알고 싶어요. 아버지도 짐작하시겠지만 민혁씨 어머님은 저를 절대로 며느리로 맞지 않으시겠다고 공헌하셨어요. 민혁씨 말로는 민혁씨 어머님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벌일 분이라고 하더군요. 성진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건…….”“그래, 희경아, 사돈 양반이 우리를 상대로 일전을 벌이자고 선전포고를 하는구나.”

거실로 나온 어머니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리고 희경에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가만히 안았다.

“걱정하지 마라. 아버진 그런 도발에 휘청거릴 정도로 대성을 약하게 키우진 않으셨단다. 아버지를 믿으렴.”“그래도…….”“거봐 아버진 네가 이렇게 걱정하실까봐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거야.”

희경이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며, 서재로 향하셨다. 희경의 얼굴에 상처받은 기색이 떠오르자, 어머니는 희경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눈을 마주보게 했다.

“희경아, 아버진 단지 감정 표현이 서툴 뿐이란다. 너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표현하지 못하는 거야. 의심하면 안돼. 알겠지?”

희경은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괜찮은 거니? 미경이 저지른 짓에 정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더구나. 이번만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서방이 따끔하게 일을 잘 처리한 것 같아 참았다. 정말이지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지 원…….”

희경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마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 생각할 일들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아침부터 병원은 사람들로 번잡했다. 북적거리는 병원 로비를 지난 자신의 진찰실로 향하던 영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들고 걸어오는 박간호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 흠 향기가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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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마운틴이에요. 정말 저보다 몇 배나 많이 벌며 없는 자를 벗겨먹어도 되는 건가요?”“약속은 약속이니까. 흠 먼저 내기를 걸자고 한 사람이 누구였지?”“불공정 거래였어요. 증권으로 말하면 내부자 거래인 셈이잖아요.”

영준은 툴툴거리는 박간호사의 잔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의 취향대로 뽑아낸 진한 커피 맛이 혀를 자극했다. 만족스런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휴 그런 인간 팔을 왜 도로 붙여 논 거야?”“그러게 정말 상종 못할 인간 말종이라니까.”

영준이 박간호사를 쳐다보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향해 눈을 굴렸다.

“선생님이 팔 붙여 놓은 그 특실 환자 말이에요. 좀 살만한지 멀쩡한 손으로 간호사들 몸을 만져대며 못살게 구나 봐요. 좀 안 예쁜 간호사 들어가면 심하게 구박하며 인격을 모독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해대고……. 어휴, 그 예쁜 여동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를 하지만 당한 간호사들 원망이......”“그래?”

영준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책 갖다 줄까?”“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가서 플레이보이 잡지나 좀 사다줘.”“그...그건....”“쳇 순진한 척 하긴.... 자취 생활할 때 민혁 형이랑 해볼 건 다 해봤을 거 아냐. 안 그래?”

수호는 수빈을 향해 이죽거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수빈은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갇혀있으면서 그의 심술 사나운 성격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간병인도 쓰지 못하게 하고 그녀에게 그를 돌보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나쁜 평판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병원 밖으로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회진을 위해 들어왔다. 간호사가 상처 난 부위를 감은 붕대를 펴자 의사는 꼼꼼히 상처를 살폈다.

“상태가 좋군요.”“뭐가 좋다는 거야? 남은 아파 죽겠는데.”“오빠!”

의사의 말에 삐딱하게 시비를 거는 수호의 행동에 수빈은 당황하며 말리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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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진통제가 더 필요하다는데, 안된다고 했다며? 야 넌 내가 누군 줄 알아?”“알지요. 그 유명한 장래의 대권 후보의 외동 아드님 아니신가.”“알긴 아는군.”

수호가 만족스러워 하며 의사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모르핀 좀 더 처방해. 난 아픈 것은 딱 질색이니까.”“알겠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도령님.”"뭐야?”

영준은 수호의 멀쩡한 쪽 팔을 잡더니 손가락을 쫙 펴서 가볍게 비틀었다.

“으아악!”

수호가 병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고, 수빈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준은 소란 속에서도 아주 침착하게 비틀어 놓은 수호의 손가락을 살폈다.

“박간호사?”“예.”“얼음 팩 부탁해요.”“예, 알겠습니다.”

수호는 울상을 한 채 영준을 노려봤다.

“너...너!”“진통제가 더 필요하다며. 그래서 그 처방에 맞게 상태를 만들어준 것뿐이야.”“넌 모가지야 이 미친놈아.”

영준은 태연하게 수호의 목을 한손으로 꽉 눌렀다. 캑캑대며 버둥대는 수호에게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

“이 철없는 도령님아, 곧 선거라는 걸 알기나 하는 거야? 이렇게 문제를 일으킬 때가 아닐 텐데. 잘 들어. 또 한번 우리 병원 간호사들에게 치근댄다는 말이 들렸다가는 붙여 논 팔을 도로 원상 복귀시켜 팔 병신으로 평생 살아가게 할 테니 알아서 행동하라고.”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준은 수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병실을 나갔다. 박간호사는 아파서 몸부림치는 수호를 보며 고소해 하고는, 수빈에게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몇 시간 후면 붓기가 가라앉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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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문을 열고 나가던 영준은 민혁과 마주쳤다. 민혁의 턱이 경직되며 영준을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영준을 뒤따라 나오던 박간호사는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잠시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영준은 민혁을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박간호사도 종종거리며 뒤를 따라갔지만 그들을 쫓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병원 복도를 돌았을 때야 간신히 참고 있던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분 맞죠. 희경씨의 약혼자. 그런데 왠지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범치가 않은 것 같은데요.”“글쎄. 나도 이유가 궁금한데요.”

민혁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호는 그다지 밝지 않은 표정을 짓고 민혁을 바라보았다.

“형!”

민혁이 한심해 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언제 쯤 철이 들 생각이니?”“또 잔소리 해댈 거유?”“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문제를 일으키면 고모부님이 뭐라고 해도 널 해외로 보내버릴 생각이야. 시골구석에 박힌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좀 차리고 살아.”

민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수호를 보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윤재구란 놈과 어울려 다니지 마. 질이 나쁘기로 소문난 놈이던데. 환각제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설마 너까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내 친구 관계까지 왈가왈부하지 마. 아버지도 안 그러시는데.”“두 번 말하지 않겠어. 내 말을 경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민혁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민혁은 고집스런 수호의 표정을 흘낏 보고는 수빈을 바라보았다.

“계속 병원에 있는 거니?”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구나. 아줌마 보내줄 테니, 집에 가서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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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그대로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수빈은 얼른 뒤를 쫓았다.

“오...오빠 잠깐만.”

수빈이 민혁의 뒤를 따라 나가자 수호는 눈을 뜨고 인상을 썼다.

“지랄들 하네.”

수호는 핸드폰이 울리자 폴더를 열며 반색을 했다.

“야, 이 형님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얼굴도 안 내밀고. 뭐야? 너 지금 염장 지르려는 거야?”

수호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몸이 병원에 꼼짝없이 묶여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너희들끼리 모여 광란의 파티를 벌인다고 자랑해대. 난 심심해서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다.”

수호 성질을 내다 키득대며 달래는 소리에 눈이 번쩍하며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진짜? 그렇게 화끈한 동영상 파일이 있어? 그럼 당장 멜로 보내줘. 빌어먹을 그렇게 사이즈가 크단 말이야? 그럼 사람을 보낼 테니까 그 편에 보내. 자식아 누굴 보낼지가 그리 궁금하냐? 알았어. 임마. 수빈이 보낼게.”

수호는 핸드폰 폴더를 닫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재구 자식 야시한 동영상 파일 구하는 데는 귀신이라니까. 오늘 밤은 심심치 않겠군. 수호는 흘낏 문을 바라보며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하고 자빠졌는데 안 들어오는 거야?

병원 휴게실에 민혁과 수빈 두 사람만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한참 수빈을 바라보던 민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안색이 안 좋구나. 몸이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니?”

수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민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을 했다.

“오빠, 내가 아픈 건 마음이야. 오빠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수빈아.”“아니 오빠가 내 말을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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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단호한 빛을 띄었다.

영준은 병원 복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희경을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어깨를 툭 쳤다. 희경은 그를 발견한 것이 기쁜지 미소를 짓다가, 그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기분이 나쁜 기색을 띠며, 눈을 가늘게 치떴다.

“뭐예요?”“취미가 상당히 독특해서.”“무슨?”“병원을 데이트 장소로 잡으니 말이야.”“무슨 데이트요. 그리고 직업이 의사인 사람 만나러 오는데, 병원으로 와야지 어딜 가요? 자 여기 빌렸던 옷이에요. 깨끗하게 세탁하고 칼 같이 주름도 잡아놨어요.”

희경은 옷이 담긴 쇼핑 봉투를 영준에게 내밀었다.

“아, 날 만나러 온 거야? 난 또 약혼자와 데이트 약속이라도 한 줄 알았지.”“민혁씨가 병원에 왔어요?”

희경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그의 생일 날 이후 그녀는 민혁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스케줄을 보고 받으려고 작정했는지 쉬지 않고 그에게 전화가 오고 있지만 이상한 거리감이 느껴져 그녀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마음의 불편함이 몸까지 물의를 일으키게 하는지, 그녀는 요 며칠 이상하게 몸도 좋지가 않았다.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웠다. 오늘도 몸이 늘어지며 침대에서 나오기 싫은 것을 억지로 추슬러 집을 나섰다. 병원에 들른 뒤 그의 회사로 쳐들어가 뭐가 문제인지 담판을 짓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병원에 있다니, 반갑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또 다른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또 다시 담배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또 다시 비겁하게 도망치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러나 나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마라. 너만 상처 받을 뿐이야.”“오빠, 사랑은 바람과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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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전 오빠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이라 느끼고 있어요. 희경씬,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호감만으로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도 오빠도 불행해져요.”“수빈아!”

수빈은 민혁에게 한걸음 다가가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오빠, 전 오빠가 저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수빈은 고개를 들고 민혁을 맑은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희경씨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나요?”“.......”

침묵하는 민혁을 보고 수빈의 얼굴에 기쁨이 번져갔다.

‘쾅’ 부딪히는 소음에 민혁의 시선이 수빈의 얼굴을 떠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에 창백한 표정의 희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희경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을 돌렸다.

“희경아!”

민혁은 자신을 안고 있는 수빈의 몸을 떼어놓으며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희경을 쫓으려했다. 그러나 수빈이 희경을 발견하고 놀란 듯 비틀대며 쓰러지려 하자 그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영준은 희경이 넘어뜨린 휴지통을 세우며 그런 그에게 차갑게 일소를 했다.

“한심한 자식!”

영준은 성큼성큼 희경을 따라잡아 희경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희경이 놀라 쳐다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민혁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잘 들지 못하는 수빈을 휴게실 의자에 눕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영준과 희경의 뒷모습을 계속 쫓고 있었다.

영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희경의 손을 놓지 않았다. 희경도 처음에는 영준에게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완강한 그의 태도에 포기한 듯 그냥 서있었다. 새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영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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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희경을 데려간 곳은 식당이었다. 점심때가 지났지만 꽤 많은 사람들은 넓은 식당 곳곳의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영준은 사람들이 앉지 않은 빈 테이블로 희경을 데려갔다. 의자를 빼서 희경을 앉힌 영준은 메뉴가 적혀있는 냅킨 통을 내밀었다.

“뭐 먹을래?”

희경은 고개를 저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어지럼증이 돌더니 가슴까지 울렁거렸다.

“이봐. 화를 내던 싸움을 하던 힘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영준은 혀를 차며 일어섰다. 희경은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걸어가는 영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식기가 부딪치는 소음 등이 식당 안을 울리고 있었지만 희경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만둬야 할까? 자신이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더 엄청난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앞에 떠올랐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가족들! 그러나 수빈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민혁뿐이었다. 수빈의 절실함과 그녀가 싸울 수 있을까? 그의 사랑을 얻지도 못했는데도? 그녀의 입가에 공허가 미소가 맺혔다. 수빈의 물음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가슴이 조이며 아픈 걸 보니,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그녀의 심장을 차지해 버렸나보다.

“다른 음식은 그저 그렇지만 이 식당 김치 찌게는 먹을 만 해.”

탁자 위에 김치 찌게와 반찬들이 담긴 쟁반이 올려졌다. 의자에 앉던 영준은 희경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희경은 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구역질이 나는 입을 손으로 누른 채 식당을 달려 나갔다. 그는 그런 그녀를 심상치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민혁은 한사코 싫다고 하는 수빈을 수호의 옆 병실 침대에 눕혀 링거를 맞게 했다. 수빈의 몸은 휴식이 필요했다. 정신적 긴장이 건강하지 못한 그녀의 몸을 더욱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해야 했다. 수빈이 그에게 희경을 향한 마음이 자신을 사랑할 때와 같은 마음이냐고 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며칠 동안 알고자 노력했던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희경에 대한 소유욕이 점점 강해지고 있지만, 그것이 수빈을 사랑했을 때와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핏기 없는 희경의 얼굴이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식게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 순간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창백함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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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녀가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그대로 보내면 안 된다고 본능이 소리쳐댔다. 그러나 팔 안에서 비틀거리며 기운을 잃은 듯 쓰러지는 수빈을 그냥 못 본 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희경이 다른 남자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가는 모습을 두 눈을 뜬 채 그저 지켜보아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를 갈며.

수빈의 핏기 없는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행복했다. 민혁의 손을 꼭 잡고 누워있는 그녀의 마음은 모든 걸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희경의 얼굴을 떠올리면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가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민혁을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녀는 외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남자라고.

“수빈아!”

수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 민혁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곁에 있어주는 것.”“!”

수빈의 얼굴에서 밝은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안감이 대신했다.

“이젠 네가 나를 찾아도 난 오지 않을 거다.”“오빠!”“내가 이제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네가 행복해지길 마음으로 바라는 것뿐이야.”

민혁은 가만히 수빈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굳게 닫힌 줄 알았던 성이 어느새 다른 사람의 손에 열렸어. 너에게 내어줄 공간이 이젠 없다.”“안돼.”

비명을 지르며 수빈이 그녀의 볼을 감싼 그의 손을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따뜻한 입술을 대었다.

“안녕!”

그리고 민혁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수빈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리쳐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가 격하게 부풀어 오르며 산소가 부족하다고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녀는 숨을 들이쉬는 것도 내쉬는 것도 하지 못한 채 정지된 공간 속에서 하염없이 닫힌 문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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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충격에 빠져 의자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머리는 생각하기를 거부하며 멍한 상태를 고집했다.

“저 핸드폰이 울리는데요.”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희경은 지칠 줄 모르고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를 인식할 수 있었다. 폴더를 열자마자 민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야?”

침착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경은 멍하게 자신이 있는 것을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갈게.’라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희경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배가 부른 임산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눈에 눈물이 차올라 눈을 깜빡거릴 수도 없었다.

성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었다. 희경은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려는 순간 그녀는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 눈물의 감촉을 느끼며 좀 전에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했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우울증 증세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했던…….

희경은 바로 앞에서 멈추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도 눈을 뜨지 않았다. 혼란스런 마음을 추스르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치기 싫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가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고집스레 눈을 꼭 감았다.

“희경아!”

그녀의 이름을 한숨처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희미한 떨림이 그녀의 심장을 울렸다. 그녀는 자연스런 본능처럼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쏠린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후회하니?”

후회 하냐고? 희경의 눈앞에 민혁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순수하게 자신을 드러내었던 순간들……. 희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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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들 사이에 힘없이 앉아있는 희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굳게 감은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조여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 때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희경을 벼랑 끝까지 몰고 왔다는 사실을……. 그녀의 얼굴에서 읽혀지는 체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그를 놓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그녀의 손안에 놓여있는 줄도 모르고.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희경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굳게 닫힌 눈을 열지 않았다. 그의 불안한 마음이 담겨있는 부름에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장막처럼 쳐졌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며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깊이 새겨진 상처의 흔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회하니?”

그는 빤히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정지한 듯 흐름을 멈추었고, 그의 맥박도 잠시 뛰는 것을 잊은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귀에 들려오는 말에 순식간에 온몸이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희망이 없는 미래를 꿈꿀 만큼 어리석지도 않아요.”“무슨 말이지?”“난 당신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요.”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녀에게서 단호함이 엿보였다. 좀 전의 지치고 나약한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희경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일어서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거지, 세 사람이 할 수는 없잖아요.”

희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강해져야 했다. 어떤 바람에도 휘둘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희경은 팔을 움켜잡힌 채 강하게 돌려세워졌다.

“당신은 내 아이를 가졌어.”“아이를 위해서라도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을 걷어내겠어요. 내 아이를 혼란 속에 키우고 싶지 않으니까.”“수빈이 문제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희경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수빈이 숨이 붙어있는 한 그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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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민혁은 희경의 양팔을 움켜잡고 난폭하게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들리게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했다.

“잘 들어둬. 당신도 당신 몸 안의 내 아이도 내거라는 걸. 눈 똑바로 뜨고 내걸 지키지 못하는 건 한번의 경험으로도 충분했어. 다시는 그런 개 같은 경험을 할 생각이 없어. 알겠어. 장희경!”

희경과 민혁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치루지만 결혼식이 끝난 후, 수빈이 교통 사고가 나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민혁은 병원으로 가고, 희경은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수빈에게 일어난 불행, 희경 어머니의 임종은 민혁과 희경의 사이를 흔들고 만다. 민혁의 어머니는 희경 때문에 엄마가 유산을 했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들 들려주어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핏줄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그 일은 희경과 민혁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희경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유학을 떠나고, 민혁은 성진이란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만난 그들은 다시 그들이 함께 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기로 약속한다.

비서실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사장실로 들어섰다. 여비서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급히 굳게 닫힌 사장실 문을 가리켰다.

“사장님 안에 계시나?”“아니요, 외출중이신데요.”“사장님께 연락 좀 해주겠어? 급한 일이라.”“예, 잠시 기다려주세요.”

비서는 다급한 비서실장의 표정에 서둘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게 정말입니까?”

핸드폰을 받는 민혁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가락에 힘이 주어져 하얗게 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서둘러 움직여주세요.”

민혁은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업친데 덥친 격이라니.... 희경이 집안에서 혼사를 깨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실정이었다. 대성이 유통업을 인수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대성이 오랫동안 공들여서 마무리 지으려는 일을 성진이 힘 안들이고 삼켜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철저히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어머니가 시작한 일일지 모르지만, 아버지도 눈감아 주시며, 힘을 실어주셨다는 말이 된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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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에 득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버릴 위인이시니까.

민혁은 고집스레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대문 안으로 사라져버린 희경을 떠올렸다. 그는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볼모로 그녀를 협박했다. 그도 할 짓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잡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녀의 양발에 단단한 족쇄를 채우고 나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조그만 틈만 주어도 희경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불안했다. 일을 이렇게 몰아붙인 것이 자신이었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희경을 잃을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어서야 그녀의 소중함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다니. 그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바로 잡는 거야.’

아직은 그에게 기회가 있었다. 아니 있다고 믿고 싶었다. 우선 어머니 일부터 처리하는 거다.

“엄마 차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희경은 자신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을 느꼈다.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엄마가 자리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그녀의 초조함도 더욱 커져갔다.

“그래, 오래간만에 희경이가 끓인 녹차 좀 마셔볼까?”

엄마는 희경을 부드러운 빛을 띄운 미소를 지었다. 희경은 마음이 아팠다.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희경은 치밀어오는 슬픔을 억지로 삼키고 엄마를 위해 정성껏 물을 끓였다. 차 주전자에 향이 좋은 녹차 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서서히 녹차 잎이 펴지며 은은한 향이 배어났다. 희경은 엄마가 아끼는 녹차잔과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안방으로 갔다.

“향이 이젠 제법이구나. 결혼한 후에 집에 자주 들러 아버지에게 녹차를 끓여드리렴.”“아버지는 엄마가 끓여주신 녹차만 드시잖아요.”“이가 없으면 잇몸이라잖니. 네가 끓여주시는 녹차를 맛있게 드실 거다.”“엄마!”

희경은 엄마의 입에서 당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는 말이 나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마치 말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안에선 누구도 엄마의 병에 대해서, 또 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엄마는 희경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 거야. 그래도 우리 희경이 결혼식을 보고 가게 되어서 내심 안심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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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복잡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혁과의 결혼을 다시 생각하려 한다고 해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뜻을 받아주실 거라는 것을 희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편안한 엄마의 얼굴에 작은 근심을 드리워 드리기 싫었다. 희경은 그저 두 팔로 엄마를 꼭 끌어안기만 했다.

“엄만, 민혁씨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제멋대로인데다 우유부단할 때도 많은데.”“눈이 맑잖니. 그런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단다.”“엄마, 우리가 같은 사람 얘기하는 거 맞아요?”

엄마는 웃으시기만 하며 희경을 안고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셨다.

“내년부터는 엄마 대신 희경이가 절에 불공을 드려주겠니?”“!”“엄마도 그 절에 모셔달라고 할 생각이니, 일년에 한 번씩은 우리 희경이 얼굴 더 볼 수 있겠지?”

희경은 엄마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이변호사는 서류를 받아들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와는 달리 민혁은 아준 편안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민혁의 정신 건강 상태를 진단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정말 이대로 하실 겁니까?”“네, 당장 정식 서류 문서로 만들어주십시요.”“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게…….”“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회장님과 사모님도 이 사실을 아시는지요?”“이변호사님, 제가 다른 법률회사를 이용하길 바라시는 겁니까?”“아...아닙니다.”

이변호사는 황급히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반을 넘기겠다니, 시가로 계산 해봐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것을 눈도 깜짝 않고 넘기겠다니, 제정신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핏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형체도 갖추지 않은 핏덩이니 말이다. 만일 유산이라도 된다면 법적으로 얼마나 골치가 아파지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성진의 사모님이 장래 며느릿감을 탐탁치 않아한다는 말이 돌고 있던데, 잘못된 소문이었나? 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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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서슴없이 하겠어. 나야 시키는 대로 하고 수임료나 챙기면 되지.

변호사가 나간 후,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민혁은 침착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침착한 표정과는 달리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전화가 연결이 되자 간단하게 그가 원하는 말만 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낮에 어머니와 함께 모시고 들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난에 예약해두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혁은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지막 관문을 넘기 전에 먼저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민혁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찾았다.

“예 사장님!”“서울 은행장과 시간 약속을 잡아줘요.”“예, 알겠습니다.”

수영은 인상을 쓰며 병원 복도를 걸었다. 병원 냄새가 정말 못 견디게 싫었다. 그래서 오빠가 입원했을 때 잠시 얼굴을 내밀고 한번도 오지 않았었는데, 아침부터 전화로 귀찮게 해서 할 수 없이 와야만 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호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제일 먼저 그녀를 맞았다.

“왜 이리 늦은 거야? 빨리 가져오라니까.”

수영이 귀찮아하며 노트북을 내밀자, 수호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내가 왼쪽 팔 못 쓰는 거 몰라? 이 위에 올려놔.”

수영은 노트북을 수호의 무릎에 올려놓으며, 소파에 멍하게 앉아있는 수빈을 봤다.

“재 왜 저래?”“몰라, 민혁 형 왔다가 간 후부터 저런다. 넋이 나갔어. 야, 너 시간 좀 있지?”“왜?”“수빈이 심부름 시킬게 있어. 그동안 네가 있어.”“싫어. 난 병원에 있는 거 싫단 말이야.”“그럼 네가 재구한테 갖다올래? 받아올게 있는데.”

수영은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건 더 싫어. 여기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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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수호는 수빈의 이름을 불렀다. 신경질적으로 몇 번을 소리쳐 부르고 나서야 수빈이 반응을 보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너 재구네 집에 좀 갔다 와. 가면 재구가 알아서 챙겨줄 거니까 그거 들고 잽싸게 돌아와. 딴 대로 새지 말고 알았어?”

수빈은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일어서, 수호가 내미는 주소 적힌 쪽지를 받아들었다.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는 수빈을 수영이 불러 세웠다.

“재구 오빠네 집에 가면…….”

뭔가 말을 꺼내려던 수영은 수빈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니 됐어.”

수영은 새침하게 입을 다물었다. 수빈은 물끄러미 수영을 바라보다 병실을 나왔다. 머리가 텅 비어있는 것처럼 멍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병원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도 다른 세계에서 들여오는 소리인양 그녀의 귓가에서 윙윙거리기만 했다. 그녀의 몸은 수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움직이고 있었다. 줄에 매달려 조정되는 꼭두각시마냥……. 그녀의 의식은 민혁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에 정지해 있었다.

난은 단아하고 우아한 실내 장식이 돋보이는 한정식 집이었다. 철저한 교육으로 난을 찾는 손님들을 대하는 종업원들의 몸가짐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서려있었다. 민혁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미리 예약해 놓은 방으로 갔다. 부모님들이 조금 전에 먼저 도착하셨다는 종업원의 설명을 들은 뒤라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조금은 불쾌한 감정이 오고가겠지만 그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안내된 곳은 안쪽에 마련된 별채였다. 종업원이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자 어머니 아버지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민혁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늦었습니다.”“그래, 네가 우리를 밖에서 보자고 한 걸 하니 무슨 중대한 말이라도 하려는 거니?”

어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그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듯 눈이 예리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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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머니.”

민혁은 어머니 시선을 태연히 받아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희경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순간 민혁의 부모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은은하게 울리는 국악의 선율만이 침묵이 흐르는 방안을 맴돌았다.

희경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안을 둘러보았다. 안쪽에 자리를 잡은 영준이 희경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전화 받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아셨어요?”

희경은 영준의 소파에 앉으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환자의 신상 정보를 조금 빼냈지.”

영준은 메뉴판을 가져온 종업원에게 주문을 했다.

“난 커피, 이쪽은 토마토 주스!”“아니 나도 커피를…….”

영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희경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왜?”“산모라는 자각이 아직 부족하군.”“아…….”

희경은 얼굴이 붉어져 기다리고 선 종업원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토마토주스 주세요.”

종업원이 사라지자 영준은 희경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희경의 이름이 적힌 산모 수첩이었다. 희경은 눈이 커져 그것을 바라만 볼 뿐 손을 내밀어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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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다음 진찰 날짜가 적혀있어. 피검사 결과도 나왔는데, 정말 엄마 될 준비가 안 된 불량 산모더군.”“무슨 안 좋은 결과라도…….”

희경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풍진 예방접종도 안했고, B형 간염 항체도 없고, 믿어지지 않지만 빈혈까지 있으니 불량이지.”“그러면 안 좋은 건가요?”“출산 때까지 병에 걸리지 않게 특히 조심해야 돼. 풍진이나 간염에 걸리면 태아에 위험하니까. 쯧쯧, 준비도 없이 엄마가 될 생각을 하다니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간이 붓긴 부었어.”“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단 말예요.”“남녀가 만나 그 짓거리 하면서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야?”“이...이 인간이....정말?”

희경은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테이블 밑으로 영준의 다리를 걷어찼다.“으윽!”

영준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한참 동안 다리를 만지자, 희경은 문득 영준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미...미안해요. 제가 다친 다리를…….”“아니 무식하게 산모가 하이힐을 신고 다녀? 당장 신발부터 바꿔 신어. 그건 신발이아니라 무기야 무기.”“아니 댁이 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예요?”

투덜거리는 영준을 보며 희경은 다시 화가 치솟아 소리를 빽 질렀다.

“어허 세상에 처음 존재를 인정한 것도 나고, 뱃속 태아와 처음 눈도장 찍은 사람은 나라고. 철없는 엄마 아빠를 둔 아이에게 막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있단 뜻이야.”

영준의 넉살 좋은 소리에 희경은 할 말을 잃고 괜히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붉은 석양이 하늘을 삼킬 때, 고급 빌라 앞에 택시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수빈은 거대한 성마냥 외부인의 출입을 단단히 봉쇠하려고 하는 것처럼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았다. 철문은 선택된 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엔진 음을 내며 다가오는 고급 승용차를 향해 스르르 문을 열고 환영을 했다. 수빈은 안으로 사라진 차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경비실로 향했다. 경비원은 수빈이 방문하고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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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곳에 연락을 해, 그녀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출입하는 철문을 열었다. 수빈은 안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그녀의 발소리만 요란하게 들리는 고요한 침묵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홋수를 확인하고 벨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던 그녀는 갑자스레 문이 열리자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현관에 수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윤재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지.”“수호 오빠에게 전해줄 것 주세요.”“급하긴, 잠깐 들어왔다 가.”

윤재구는 수빈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아니 전....”

수빈은 윤재구에게 잡힌 손목을 잡아 빼려고 했지만 강하게 움켜잡은 손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질질 끌려가다시피 거실에 들어선 수빈은 넓은 거실을 꽤 많은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수빈의 얼굴에 순식간에 당황스런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거실에 있는 젊은 남녀들은 쌍쌍이 짝을 이룬 채 서로에게 엉켜있었다. 음악에 몸을 맡긴 듯 흐느적거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은 한 쌍은 보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서로 몸을 더듬어 댔고, 술잔을 든 채 소파에 눕다시피 하고 키득거리는 여자는 슬립 원피스의 끈이 다 내려져 옷이 흘러내리기 직전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며, 남자의 희롱을 받고 있었다. 방 안 가득 넘쳐나는 성적인 자극이 수빈을 몹시도 불편하게 했지만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들의 눈빛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상한 번득임을 보이며 빛나고 있었다.

“CD는 2층에 있어.”

윤재구가 수빈의 팔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잡아당겼다. 수빈이 저항하며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수빈의 손을 놓았다.

“흠, 관음증이 있는지 몰랐는데. 짐작했겠지만 이 인간들 곧 일을 벌일 건데 말이야. 여기 서서 구경하고 싶다면…….”

윤재구는 어깨들 들썩여 보였다.

“말리진 않겠는데, 너무 충격 받지는 말라고. 내 친구들이 워낙 화끈하기도 하지만, 약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거든.”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밀착시키던 한 쌍이 벽에 몸을 밀어붙인 채 일을 벌인 태세를 취하자 수빈은 놀라 윤재구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올라서자마자 울린 핸드폰 통화를 하던 윤재구가 서랍에서 CD 한 장을 꺼내, 방 문 앞에 서 있는 수빈에게 흔들었다. 수빈은 문 앞에서 방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그가 가져다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윤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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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침대에 걸터앉아 통화를 하느라 그녀의 존재도 잊은 것 같았다. 수빈은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초초한 듯 바라보다 머뭇머뭇 방안으로 들어가 윤재구의 손에 들린 CD를 잡았다. 그 순간 통화에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던 윤재구가 수빈의 팔을 잡고는 거칠게 침대 위로 던졌다.

“헉!”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수빈은 놀라서 잠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세운 수빈은 문을 잠그고 선 윤재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마주해야 했다.

“뭐...뭐하려는 거예요?” “쿡쿡 남녀가 침대에서 뒹굴며 할 일이 뭐 있겠어?”“나...나한테 손대면 민...민혁...오빠가 가..가만있지 않을 걸요?”

수빈은 뼈 속까지 떨려오는 두려움을 참고 허세를 부렸다. 수빈의 말에 윤재구의 눈이 심상치 않은 빛을 띠었다.

“그래? 어디 해보라 그러지.”

윤재구는 몸을 굴려 침대를 빠져나오려는 수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잡아당겼다.

“꺄아악!”

수빈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윤재구는 비웃으며 거칠게 수빈의 옷을 벗겨냈다. 옷이 찢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어 수빈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쳐보지만 윤재구의 강한 힘에는 당해내지 못하고 침대에 깊숙이 몸이 눌렸다.

“후후,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여기 쫓아올 놈은 없어. 괜히 힘 빼지 말라고.”

수빈이 휘두른 손이 윤재구의 얼굴을 거칠게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성난 소리를 지르며 수빈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년이 썅!”

윤재구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길에 나면서 핏물이 배어났다. 상처를 손으로 눌렀다가 피가 묻어나자 윤재구는 사정없이 수빈을 내리쳤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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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머리에 둔탁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민혁의 얼굴이었다.

‘오....오빠! 도...도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수빈의 얼굴엔 절망감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녀왔습......”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 희경은 소파에 떡하니 앉아있는 민혁을 발견하고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엄마의 흥분된 목소리에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꿀꺽 삼켜야 했다.

“희경아, 엄마한테 왜 말을 안 했어? 몸은 괜찮니? 입덧은 하지 않고?”“........”

희경은 입을 꽉 다문 채 민혁을 죽일 것처럼 쏘아보았다. 민혁은 만족스런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차를 마셨다. 희경의 손을 꼭 잡고 소파에 앉은 엄마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서방이 일주일 내로 결혼식을 올리자는구나. 벌써 결혼식 준비를 모두 끝냈고, 사돈어른들의 허락했단다.”엄마는 다시 희경을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구나. 희경이 결혼식도 보고 토끼 같은 희경이 아이도 보고. 우리 희경이 꼭 닮은 녀석 손에 안아볼 때까지 엄마가 건강해야겠다. 정말 기쁘구나.”

희경은 속이 다 타버릴 것처럼 화끈대며 화가 치밀어 죽을 것만 같았지만, 환한 얼굴로 기뻐하는 엄마를 보며 눈이 뿌옇게 흐려옴을 느꼈다.

“서민혁씨 저 좀 잠깐 보실까요.”

엄마가 아줌마에게 저녁식사를 준비시키기 위해 주방에 간 사이 희경은 이를 악물고 민혁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희경은 민혁이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오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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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 이야기 좀 시작해 볼까요?”“내가 바라던 봐야.”

민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남자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데 도대체 그 자식이 누구지?”“........”“그 의사 놈은 아니었겠지?”“당신.....”“내 말을 명심해. 앞으로 어떤 남자와의 만남도 금지야. 내 허락 없인 누구도 안돼.”“이 인간이 점점...”

희경은 끓어오르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냅다 발차기를 했지만 민혁이 재빨리 피하며 희경을 번쩍 안아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희경의 얼굴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대신 나도 당신만 바라보지. 어떤 여자에게건 눈길도 주지 않겠어.”

희경은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민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흥, 당신이 어떤 여자와 수작을 벌이던 나는 관심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 대신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마. 엄마까지 끌어들이다니 이건 너무 치사한 것 아냐?”

민혁은 심각한 얼굴로 희경의 배에 눈높이를 맞추며 중얼거렸다.

“흠, 아가야 이건 심각한 문제인데, 엄마가 이 아빠에게 바람둥이가 되기를 권하고 있구나. 넌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희경은 민혁의 얼굴을 확 밀며 배를 팔로 감쌌다.

“뭐...뭐하는 거야?”

방바닥에 편하게 앉은 민혁은 씩 웃으며 대꾸를 했다.

“아빠와 아들이 담소를 나누는 중이야.”“아들 좋아하시네. 난 딸을 낳을 생각이야. 나만 닮은 내 딸.”“하! 생물 공부를 다시 해야겠는데. 딸을 만들지 아들을 만들지 내 염색체에 의해 결정이 난다고.”

민혁이 얄미워 발길질을 하던 희경은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품속에 안겨있었다. 그는 버둥대는 희경을 두 팔에 단단히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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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희경의 턱을 잡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야. 결코 잊게 하지 않겠어. 당신이 내 여자라는 것을…….”

아줌마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차가운 냉수가 담긴 유리잔을 들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모님 여기 물 가져왔는데요.”

요 위에 누워있던 민혁의 어머니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도를 얼려버릴 것 같이 차가운 물을 마셔도 가슴을 태우는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민혁에게 불시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후부터 가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다더니. 그 녀석이 일을 이렇게 만들지 정말 몰랐다. 자금줄이 달리는 대성의 목을 죄고 알자배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민혁이 그 놈이 대성의 숨통을 틔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그 창녀 년의 딸 뱃속에 들어있는 핏덩이에게 자신의 주식 반을 넘겨주겠다고? 입에 거품 물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는 다 아버님 때문이었다. 유언에 피를 나눈 자식에겐 주식을 양도할 수 있다는 조건을 넣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뱃속에 있는 핏덩이도 주식을 상속받을 수 있다 명시하셨으니....... 민혁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한 냉기를 내뿜는 차가운 눈으로 빈 물질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주식 양도도 무효가 되어버릴 테니까.

수영은 짜증이 난다는 듯 차에서 내려섰다. 수빈에게도 재구 오빠에게도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호 오빠는 자꾸 닦달을 하고……. 수영은 닫힌 빌라 문을 바라보았다. 벨을 눌러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본 수영은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수영이 아냐?”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을 하고 있는 남자가 비틀거리며 수영 쪽으로 걸어왔다.

“재구 오빤?”

남자는 키득거리며 2층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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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쁠 거다. 계집애 한명 끌고 위로 올라갔거든. 처음 보는 계집애였는데, 분위기 죽이던걸.”“병신 같은 기집애.”

수영이 성질을 내며, 2층 계단을 뛰어올라가려 하자, 남자가 수영의 팔을 잡아당겨 얼굴에 입김을 휙 내뿜었다.

“재구 바쁠 거라니까. 그 자식 냅두고 나랑 놀지 않을래? 끝내주게 잘 듣는 약도 있는데.”

수영은 핸드백으로 남자의 얼굴을 한대 후려치고 계단을 올라갔다. 짜증나는 일 투성이었다. 재구 오빠가 벌이는 파티는 질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빨랑빨랑 볼일만 보고 빠져나올 것이지. 수영은 이층에 올라가서 닫힌 문을 두드렸다.

“오빠, 나 수영이야. 문 열어.”

한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수영이 발로 문을 차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수영의 표정이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일그러졌다. 잠시 후 문이 문손잡이가 돌아가더니, 머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쓴 윤재구가 모습을 나타냈다.

“뭐야?”

수영은 윤재구를 확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수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수빈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수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떨림이 느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몸의 상처보다 수영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눈을 뜨고 있는 수빈의 공허한 눈빛이었다. 마치 죽은 자의 그것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면서도 수영은 수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희경은 또 다시 허공에 참을 인자를 새겼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허리가 너무 꽉 끼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불만스러워하며 투덜거리는 민혁을 향해 희경은 손에 든 부케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민혁은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부케를 여유 있게 잡으며 그녀를 열 받게 하는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희경은 이상하게 늘어난 아침잠을 즐기다 민혁에 의해 웨딩 숍으로 끌려나와 지금까지 10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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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넘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 사이즈에 맞춰 만들어져 있는 웨딩드레스들은 간단하게 손만 보면 당장이라도 입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희경에게는 다 괜찮아 보이는데, 민혁이 계속해서 트집을 잡고 있었다. 도대체 일주일 후에 그녀의 배가 얼마나 부른다고 허리가 넉넉해야 한다고 이 난리를 치는지. 그들이 속도위반을 했다는 것을 웨딩 숍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홍보를 해대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희경은 처음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나중에는 민혁의 뻔뻔함에 희경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았다. 희경은 치렁거리는 드레스 사이를 빠져나와 널찍하고 폭신한 소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민혁이 옆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희경을 끌어당겨 자신에게 몸을 기대게 했다.

“좀 전에 입어봤던 드레스로 하지. 허리는 2,3인치 더 늘리고.”“아예 푸대자루를 입혀서 결혼식장에 끌고 가지 그래요.”

툴툴거리는 희경을 달래려는 듯 민혁이 연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봐 웃으라고. 그렇게 투덜거리다가는 아기가 투덜이가 될지 몰라.”“배고파서 웃을 기운도 없어요.”“뭐 먹고 싶은데. 말만 해.”“오징어회!”“오징어회?”

민혁이 얼굴을 찡그렸다.

“다른 거 먹으며 안 될까?”“난 초고추장에 오징어회 찍어먹고 싶어.”

희경의 단호한 표정에 민혁이 끄응 소리를 내더니 일어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오징어 좋아해요?”

희경이 웨딩 숍의 직원들에게 살짝 묻자 모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커다란 트레일러가 웨딩 숍 앞에 멈춰서더니 깔끔한 요리사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음식 접시를 들고 줄줄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뷔페 상차림이 차려졌다. 오징어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들이 먹음직스럽게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희경은 자신이 찾던 오징어회가 보이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희경의 눈치를 살피며 민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희경아, 오징어 껍질에 기생충이 달라붙어 있대. 껍질을 깨끗이 벗겨도 혹 떨어지지 않는 게 있을지 모르니까 이렇게 살짝 데친 오징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게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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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웨딩 숍 직원들은 오징어 파티를 하고 신선한 야채와 햄이 든 샌드위치와 차가운 크림 치즈 케이크로 입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입을 즐겁게 하는 맛있는 음식들보다 더 재미난 구경거리로 눈이 즐거웠다. 카리스마 풀풀 풍기던 신랑이 신부에게 쩔쩔 매는 모습으로 상황이 역전되는 과정은 저절로 웃음을 터트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기 심장입니다. 아주 건강하게 뛰고 있군요.”

의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민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사람의 형체라 할 수 없었지만, 엄마 배속의 태아는 힘차게 심장박동을 하며, 예비 엄마, 아빠의 마음을 단 한순간에 사로잡아버렸다. 간호사가 희경의 배 위에 묻어있는 젤을 닦아주는 사이 민혁은 의사에게서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받아들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서는 희경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의 아이의 사진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자식, 엄마를 닮아 아주 강심장인걸. 아주 튼튼하게 뛰고 있어.”

희경은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웃어대는 민혁을 보며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축복받지 못한 탄생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사랑해줄 엄마와 아빠가 있는 아이의 행복을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뭘까? 이 답답하고 무겁기만 한 마음은……. 다음 순간 희경은 민혁의 뻔뻔스런 질문에 얼굴을 확 붉혀야 했다.

“성 관계를 가져도 괜찮을까요?”

희경은 민혁에게 잡힌 손을 잡아당기며 열심히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노골적인 질문들을 해댔다.

“초기에는 안정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너무 깊은 삽입만 자제하면 됩니까?”

간호사도 얼굴을 붉혔고, 의사도 헛기침을 하며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

“험험 너무 과격하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두드리며 진찰실을 빠져나온 희경은 발을 잽싸게 놀려 산부인과 병동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도 못해, 민혁에게 팔을 잡히고 말았다.

“어허 그렇게 서두르다가 넘어지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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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다리를 들어 힘껏 그의 발을 밟았다.

“으윽!”“흥,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아라. 너무 깊은 삽입만 자제하면 되냐구?”

희경은 소리를 빽 질러놓고서야,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했다. 만삭인 산모마저도 희경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고, 임신한 아내와 함께 온 남편들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희경과 민혁을 쳐다보았다. 희경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삼키며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뛰다시피 걸었다.

“쯧쯧 흥분하면 태아에게 안 좋다니까.”“그렇게 아이가 걱정되면 날 아예 꼼짝 못하게 가둬버리시지 왜?”“그거 좋은 생각인걸.”

민혁이 싱글거리며 맞장구를 치자 희경은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민혁도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경은 거칠게 민혁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난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아이를 낳으려는 게 아냐. 내 아이니까, 내가 사랑해야할 아이니까, 날 믿고 세상에 나오려하는 아이니까 낳으려는 거야.”

민혁은 자신을 쏘아보는 희경의 팔을 움켜잡고 성큼성큼 비상계단 표시가 되어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거칠게 열더니 희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쾅’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문에 기대 선 민혁은 강렬한 시선으로 희경을 쳐다보았다. 희경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민혁이 문에서 몸을 떼고, 희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오자 희경의 몸이 움찔했다. 민혁은 코끝으로 내쉬는 서로의 숨이 뒤섞일 때까지 다가와서야 멈춰 섰다.

“똑똑히 잘 들어둬. 아이? 그래 원해. 떠올리기만 해도 치솟는 소유욕에 나 자신도 놀랄 정도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이야. 당신 몸속에서 숨쉬고 있는 아이는 당신에게 내가 새겨 놓은 흔적이야. 당신이 내 것이라는 증거!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우리 아이가 특별한 이유는 당신과 내가 평생을 함께 사랑을 쏟아 부을 것이기 때문이야. 알겠어? 이 멍청한 여자야.”

민혁은 말을 끝내자마자 희경을 와락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은 강렬하고 뜨거웠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고개를 젖혀 입술과 목에 뜨거운 입맞춤을 해댔다.

“다시 한번 ‘내 아이’라고 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어. 정말로 가둬버리고 당신도 당신 뱃속의 아이도 내거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 보일 테니까.”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희경은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쉽게 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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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고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뱉어낼 때마다, 그의 손이 온 몸에 소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인정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고서,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을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관심이 온통 쏠린 아이에게 질투의 감정을 품었다. 희경은 그에게 키스를 돌려주며, 입안을 헤집는 그의 혀에 그녀의 혀를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그가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그의 손이 옆구리를 미끄러져 내려가 스웨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젖가슴을 감싸자 그녀는 목 깊숙이 신음소리를 내었다. 브래지어 위로 그의 손바닥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를 타고 올라 목을 감쌌다. 그가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그녀의 다리를 허리에 감게 했다. 치마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드러난 허벅지를 타고 그의 손이 골반으로 옮겨갔다. 그는 욕망으로 무거워진 눈으로 그녀를 보며, 발기한 남성을 그녀의 몸에 앞뒤로 문질러댔다. 노골적인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그녀의 중심이 촉촉이 젖어옴을 느꼈다. 브래지어가 밀려나고, 단단히 솟은 젖꼭지가 모습을 드러낸 가슴을 그가 탐욕스럽게 빨았고 날카롭게 이를 세웠다.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비상구를 울려댔기 때문이다.

민혁에게 손을 잡혀 병원 로비를 걸으며 희경은 그를 곁눈질로 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수였다. 비상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희경은 화들짝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민혁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침착하게 희경을 바닥에 내려서게 하고 옷매무새까지 다듬어 주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간호사들이 그들 옆을 지나쳐 갈 때 희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태연한 웃음까지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희경은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그를 째려보는데, 민혁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수영아!”“오...오빠!”

민혁을 발견한 수영은 당황해서 움찔했다.

“네가 수호를 간병하는구나. 자식 철들었네.”

민혁이 수영을 머리를 흩트려 놓으며 웃었다. 수영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민혁의 안색을 살폈다.

“오빤 어...쩐...일이야?”“희경이가 진찰 받을 일이 있어서.”

수영은 그제야 민혁 옆에 서 있는 희경을 발견하고 인사를 한다.

“아...안녕하세요.“약혼식 때 뵈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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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수호 녀석이 사고를 일으켜서 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어머 그럼 저도 병실에 들렸다 가야 하는 건 아닌가요?”“아...아니에요. 오빠가 누가 병문안 오는 거 싫어해서…….”

수영이 당황해 하며 말렸다.

“수빈이가 병실을 지키고 있니?”

수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희경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수영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아...아니. 수빈이 없....없어.”“언니라고 부르라니까.”“아....알았어.”“내일 쯤 병실에 들릴게. 수고해라.”“응”

수영은 불안한 얼굴로 민혁과 희경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들이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나 민혁이 병원 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소리쳐 불렀다.

“민혁, 오빠!”

민혁이 돌아보자, 수영은 다시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희경이 민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당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나 봐요. 가 봐요. 난 요 앞 벤치에서 기다릴 테니까.”“알았어, 금방 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려.”

희경은 따듯한 햇살을 반기며 벤치에 가서 앉았다. 나뭇잎들이 벌써 조금씩 가을빛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희경은 심호흡을 하며 기분 좋게 숨을 들이켰다. 그에게 물린 가슴 끝이 욱신거렸다.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에 고개를 든 희경은 반가움에 눈이 반짝였다. 영준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봐.”

민혁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만 보이며 망설이는 수영을 재촉했다. 수영이 원하는 것을 빨리 말하기만 한다면 뭐든지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워지지 않은 욕구에 그의 신체는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자신에게 수줍게 반응하던 희경 때문에 그는 무척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빨리 둘만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래서 수영이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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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아!”“저...오빠!”

드디어 어렵게 수영이 입을 여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놀란 얼굴로 입을 꽉 다물었다.

“민혁아, 여긴 웬일이냐. 수호 보러왔니?”

한정철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의 눈이 예리하게 그들을 살피었다. 수영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아빠!”“수영이 넌 수호 옆에 붙어있으라고 했잖아.”“오빠가 잠들어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그래?”

한정철은 민혁의 어깨를 툭 치며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와 차라도 한 잔 할 텐가?”“아닙니다.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민혁은 깍듯하지만 차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수영이에게 할말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걸어갔다. 한정철은 민혁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건방진 놈!”

한정철은 민혁에게서 수영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옮겼다.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수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희경은 침을 꼴깍 삼키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영준을 향해 투덜거렸다.

“지금 고문하는 거예요?”“칼슘을 보충해줄 우유를 마시면서, 커피향도 즐기고, 이거야 말로 1석 2조 아닌가?”

영준이 희죽 웃어보였다. 희경은 영준을 흘겨보고는 우유를 단번에 마신 후, 빈 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바라보는 영준에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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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졌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편안해 보이는데. 약혼자와 오해가 다 풀렸나보지?”“뭐...그...냥.....그럭저럭…….”

무안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희경은 영준이 자신의 뺨에 손을 대자 잠시 당황한다.

“.....?”“우유 수염이 그려졌네.”

영준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 주변에 묻은 우유 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민혁이 영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희경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민혁은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그는 다소 거칠게 희경을 일으켜 세웠다.

“당신에겐 내 약혼녀를 만질 권리가 없을 텐데.”“그럴까?”

영준은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희경의 입술을 훔친 엄지손가락에 묻은 우유를 입술로 닦아냈다. 민혁의 턱이 경직되며 움켜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에 불룩불룩 튀어나온 푸른 힘줄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영...영준씨 다음에 또 봐요.”

희경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막아보려는 듯 둘 사이를 가로막고서 영준에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민혁의 팔을 잡아당겨 걸어갔다. 영준을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으려는 민혁을 억지로 주차장으로 끌고 가던 희경은 민혁이 그녀의 손을 휙 들어올리자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성질을 냈다.

“왜 반지를 끼지 않는 거지?”“반지가 너무 튀는 것 같아서…….”

민혁의 위세에 희경은 저도 모르게 저자세가 되고 말았다.

“오늘부터 당장 반지를 끼고 다녀. 하루라도 빼놓는 걸 보게 되면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워버릴 테니까.”그리고는 희경을 잡아당겨 입술에 키스를 하며 거침없는 혀로 입 주변을 더듬어댔다. 희경이 버둥대며 몸을 떼어내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이런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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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내 영역에 누구도 함부로 들여놔선 안돼.”

민혁은 차문을 난폭하게 열며 맞받아쳤다. 하지만 희경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민혁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영준은 커피가 조금 남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희경을 태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준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모르고 있군.’

영준은 지난 밤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를 떠올렸다. 폭행에 강간까지 당한 그 여인은 의식을 잃지 않았지만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배회했다. 몸의 상태는 보기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보다도 마음이 더 심하게 상처 입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강간당한 여자들은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내는데, 그 여인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몸을 굳힌 채 누워있을 뿐이었다. 응급실 당번이었던 그는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다 본 그녀의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텅 빈 동굴과도 같은 눈이었다. 그년의 눈을 본 순간 몸이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희경의 얼굴에 그림자를 지게 만들었던 그 여인이었다. 그와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무참히 망가진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희경과 약혼자이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그들이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몸 상태가 좋아져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녀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라고 했다. 그 순간 떠오른 사람이 저 한심한 자식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희경에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희경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강한 뒤에 감추어진 연약함을 알기에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홀몸도 아닌 희경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경정신과 의사 말을 들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비겁하게 환자를 먼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병원 건물로 걸어가는 영준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병실에서 식판을 손에 들고 나오던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저었다.

“입도 대지 않아.”“여전히 어떤 반응도 안 보여?”“응.”“정말 어떤 자식인지 잡아 죽여 놔야 한다니까. 사람을 저 꼴로 만들어 놓다니…….”“그런데 경찰 조사 같은 거 안 나오나봐?”“환자 보호자가 신고는커녕 누구에게도 눈치 채지 않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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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수빈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붓고 멍든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표정도 없이 앞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는 암흑을 삼킨 듯 깊이 가라앉아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에요?”

문을 벌컥 열며 성질을 내던 희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늘 꿈꾸었던 집 안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어...어떻게....”

희경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민혁은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경은 정신없이 일주일을 훌쩍 보내고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언니들과 바디 숍에서 피부 마사지를 받으며 결혼 후 신랑 휘어잡는 법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던 희경은 그곳까지 쳐들어온 민혁에 의해 거의 납치당하다시피 끌려나왔다. 희경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들은 언니들은 여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며 민혁을 나무랐다. 그리고는 철저하게 결혼식 전까지 민혁에게 희경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민혁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여자들만 있는 바디 숍에 너무도 당당히 입장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침대에 누워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희경에게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주지 않고 번쩍 안아들고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그녀의 꿈속의 세계로 데려온 것이다.

“당신 사무실 사람들이 총 동원되어 일주일 동안 밤샘 작업을 했어.”

희경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선배는 그녀가 그려 놓은 도면을 본 것이다. 언젠가 그녀만의 집을 갖게 될 때를 위해 그려 놓은 도면이었다. 머리 속에서만 그려보았던 것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니 그저 놀랍고 흥분되었다. 그녀를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준 민혁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민혁의 손이 다정하게 눈가를 훔칠 때에야 희경은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는 걸 알았다. 민혁은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이마에서 코로 뺨으로 그의 따뜻한 입술은 얼굴의 윤곽을 더듬으며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를 음미했다. 눈을 감은 채 그의 키스에 빠져들던 희경은 목에 둘러지는 감촉에 눈을 떴다. 민혁이 아쉬운 듯 입술을 떼며 입 꼬리를 살며시 올리고 미소 지었다. 희경은 손을 올려 쇄골 부근을 무겁게 누르는 것을 만져 보았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 빛을 뿜어내는 루비가 자잘한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인 하트모양의 펜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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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희경이 놀라움에 입이 벌어져, 펜던트를 손으로 쥐고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다시 희경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희경의 벌어진 입속으로 따뜻한 혀가 밀고들 어와 입안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맛보았다. 희경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때에야 입술을 살짝 떼고 아쉬운 듯 부풀어 오른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 따뜻한 입김을 그녀의 입안으로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증표야.”“증표?”“내 심장이 당신 거라는......”

희경의 눈이 커졌다. 민혁은 희경을 두 팔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고, 새하얀 공단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그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누르며 자극적인 키스를 해댔다. 놓기가 두려운 듯 펜던트를 꼭 잡고 있는 희경의 손이 놓인 가슴이 미친 듯이 뛰더니,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민혁은 펜던트를 꽉 움켜잡고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펴더니, 그녀의 손에 그의 얼굴을 묻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도 몰라.”

그녀의 검지를 입술 사이에 물고 가볍게 이를 세웠다.

“처음에 당신에게 갖게 된 관심은 호기심 때문이었어.”

그의 혀가 육감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며, 그녀의 손가락을 에로틱하게 빨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희경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감게 한 그는 가운을 어깨에서 밀어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쇄골 아래를 입술로 눌러댔다. 희경은 점점 숨이 가빠져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그의 검은 머리카락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고 매달리듯 꽉 움켜잡았다.

“당신의 웃는 얼굴에,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난 점점 중독 되어 갔어.”

가운이 벗겨지며 그녀의 맨 가슴이 공기 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터질 듯이 풍만한 가슴에 시선이 쏠린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두른 팔을 내려 가슴을 가리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양 손목을 잡고 등 뒤로 가두었다.

“감추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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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며 그는 젖가슴 골짜기에 키스를 했다.

“아름다워.”

그녀는 등이 휘며 가슴이 더욱 도드라지게 앞으로 튀어나오자 얼굴이 빨갛게 달구어졌다.

“당신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힐 때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부푼 봉우리 주변을 입술로 감싸고 혀를 굴려 핥기 시작했다.

“난 절제력이란 놈을 최대한 끌어내야만 했어. 당신을 탐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위해.”

희경은 쾌락의 고통 때문에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몸이 침대 위로 완전히 젖혀지자 그는 그녀의 몸을 침대 위로 눕히며 한 손을 미끈한 허벅지를 따라 은밀하게 그리고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당신이 나에게 안긴 순간부터 당신의 운명은 내 여자로 결정되었어.”

그의 손이 그녀의 팬티 속으로 숨어들어가 촉촉하게 부푼 그녀의 속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가 자신 위로 올라와 따스한 몸으로 자신을 채워주기를 바라며 희경은 그의 몸을 끌어 당겼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뜨겁고 굶주린 것처럼 맛보고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난 심장을 빼앗겼지.”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나만의 감정인가?”“.......”

그의 눈빛에 묶인 듯 꼼짝하지 못하던 희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도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녀를 안은 그의 팔도 가늘게 떨려왔다. 다음 순간 그는 격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팬티가 끌어내려져 침대 밑으로 던져졌고, 그의 셔츠도 단추가 튕겨져 나가며 떨어졌다. 바지를 벗어 발로 차낸 후 그는 그녀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처음엔 천천히 몸을 움직였지만 절박함이 높아감에 따라 점점 더 빠르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에게 무리를 주지 않게 자제하려는 몸짓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그의 허리를 다리로 조이며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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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촉했다. 그는 그녀를 정점으로 몰아갔고, 그녀의 귓가엔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울려댔다. 강렬한 쾌락이 그녀를 사로잡으며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그녀의 근육이 수축하며 그를 조여 대자, 그는 굵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녀 깊숙이 몸을 묻고 떨었다.

그는 격한 호흡이 느려질 때까지 그녀의 몸을 꼭 안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기운을 소진해 늘어져 그에게 안겨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의 귓가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어대며 수줍게 속삭이는 소리가 그녀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랑해.”

한밤중이 되어서야 현관문을 여는 희경의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안방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귀염둥이 조카 녀석이 할머니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희경은 예식 전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약속도 잊어버린 채 깊은 잠에 빠져버린 자신의 한심함을 후회했다. 민혁의 커다란 티셔츠와 반바지를 빌려 입은 희경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를 붙잡고 까치발로 계단을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서 둘러댈 변명을 생각하며 방문을 연 순간 희경은 언니들의 손에 붙들려 침대 위에 앉혀졌다. 희경은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언...언니!”

언니들은 재빨리 희경의 몸에서 커다란 티셔츠를 벗겨냈다.

“어마!”

언니들은 희경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고는 서로 의미 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흐음! 그래도 생각이 없는 인간은 아니네.”“그러게.”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 옆에 앉으며 언니들이 쿡쿡댔다.

“끌려가는 폼으로 봐서 키스 마크 서너 개는 각오하고 있었거든.”

희경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희경을 두 언니가 끌어안고 키득거렸다.

“표정을 보니, 드디어 제부가 고백을 한 모양이지?”“어땠어? 낭만적이었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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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니는 희경의 목에 걸린 불꽃같은 루비 펜던트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굴렸다. 희경 이젠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맑고 쾌청한 날씨였다. 유리창으로 맑은 햇살이 병원 복도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수영은 햇살이 부담스러운지 그늘진 곳을 찾아 서 있었다. 수영은 몸에 잘 맞는 정장을 입고 손엔 앙증맞은 토드 백을 들고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고, 화장도 완벽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영은 열린 병실 문으로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수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병신 같은 년! 그깟 일로 넋이 나가다니……. 그냥 똥개에게 한번 물린 셈 쳐버릴 것인지. 수영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수영은 수빈이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시계를 가져다주면 뭔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수빈이 나무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 한 사건이 있던 날 놀라서 감추어 버렸던 시계까지 찾아다 그녀 손에 쥐어줬지만 허공을 헤매는 그녀의 눈동자엔 변화가 없었다. 오늘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민혁 오빠 결혼식 날이란 것 알기나 할까? 수영은 왠지 불안한 마음으로 수빈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래 차라리 제 정신이 아닌 게 나을지도 모르지.

“어머 오셨어요.”

간병인 아줌마가 수영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병실 비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수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예....신문 좀 사려고…….”“병실 비우지 말고 꼭 옆에 붙어있어요. 알겠죠?”“예.”

수영은 못마땅해 하며 아줌마를 흘겨본 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빈 따위에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수빈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은 아마도 아빠의 그 기분 나쁜 통화 내용을 엿들었기 때문일까?

수빈에게 그 일이 일어난 바로 그 날이었다. 그래도 수빈을 세상에 나오게 한 책임이 있는 인간이란 자가 수빈에게 거의 폭행이라 할 수 있는 저지른 놈의 아비와 흥정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넘어가 주는 대신 이번 선거에 막대한 돈을 후원하라는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수영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도 아빠가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그 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계산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에게는 오빠만 있으면 되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수빈이나 정식 호적에 당당히 올라있는 자신이나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수빈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괴로움이 그녀에게 수빈을 신경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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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는 것 같았다.

“제기랄!”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건 수영은 액셀을 꽉 밟아 차가 튕기듯이 달려 나가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텔 앞은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재계 20위 안에 드는 두 집안이 사돈을 맺는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호텔 로비도 발 딛을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로 혼잡했다.신부 대기실에서 새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의 희경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희경은 신부 대기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띠고 차분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긴장으로 입가가 굳어있었다. 민혁을 처음 만나고, 사연 많은 약혼식을 거쳐 결혼식까지, 결코 긴 시간이라 할 수 없지만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그 때문에 희경은 너무나 순탄하게 준비된 결혼식이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든 희경은 신부 대기실에 엄마와 자신만이 남은 걸 알게 되었다.

“엄마!”

엄마는 희경을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쁜 신부구나. 우리 딸!”

희경도 엄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알았지?”

희경은 목이 메어와 대답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호호 그래, 이렇게 편한 환자는 처음이야.”

간병인 아줌마는 핸드폰을 잡고 깔깔거리며 통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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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니까. 꼼짝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멍하니 있어. 시간 맞춰 화장실에 데려가고 억지로 먹을 것 좀 떠먹이고 하는 게 전부야.”

아줌마는 보조 침대에 편하게 앉아 신문을 펼쳐 놓고 통화를 하며 힐끗힐끗 수빈을 바라보았다.

“뭐 말도 못하는 것 같아. 입 벙긋 하는 것도 못 봤으니까.”

아줌마는 수다를 계속 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때 수빈이 손에 쥐고 있던 시계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신문 위로 떨어졌고, 그 때서야 수빈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시계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고 신문 위로 고정이 되었다. 그 순간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활짝 펼쳐진 신문에 민혁과 희경의 사진과 함께 결혼식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와 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던 간병인 아줌마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있어야 할 환자 침대 위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마!”

당황해 병실 문을 급히 열고, 복도를 살펴보지만, 환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메, 오메 이걸 어쩌누.”

화려하게 꾸며진 홀에 웨딩마치가 울리고 희경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통로를 걸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희경에게 쏠렸지만 희경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민혁뿐이었다. 민혁은 못 기다리겠다는 듯 몇 걸음 남겨놓지 않은 희경에게 성큼 걸어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희경의 손을 건네받았다. 그의 성급함이 홀 안의 사람들을 웃음 짓게 했지만 그의 부모님과 미경은 표정을 더욱 굳혔다.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완벽하게 손질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희경을 노려보았다. 수영은 행복한 듯 환하게 웃음 짓는 민혁을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그 때였다. 진동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이 토드백 안에서 울려대자 수영은 귀찮은 듯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그러나 곧 수영의 안색이 바뀌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장 찾아요. 빨리 병원 구석구석을 뒤져보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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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며느리의 절을 받은 민혁의 부모님은 폐백이 끝나자마자 피로연장에 얼굴도 내밀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마치 계약된 의무를 다했다는 듯한 그들의 행동에 행여 희경이 상처라도 받을까봐 민혁은 세심하게 신경을 썼지만 희경은 오히려 씩씩하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피로연이 모두 끝나고 민혁과 희경은 결혼식이 있었던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희경이 엄마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아지는 것을 걱정하자 민혁이 신혼여행을 떠나는 대신 호텔에서 지내자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주는 호텔 직원에게 넉넉한 팁을 꽂아주고 민혁은 희경을 번쩍 안아들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호텔 직원은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민혁은 희경을 안은 채 소파 위에 앉았다.

“이젠 희경인 완벽하게 내거야.”

민혁이 오만하게 중얼거리자 희경이 턱을 치켜들며 건방진 폼으로 대답을 했다.

“미안하지만 난 아직 호적상 처녀네요.”“후훗”

민혁이 수상쩍은 웃음을 짓자 희경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진다.

“설마 당신…….”“난 철저한 것을 좋아하지. 내가 당신과 결혼식을 진행한 순간 우리 변호사가 혼인 신고를 마쳤을 걸. 한마디로 당신 호적이 내 밑으로 들어와 있는 거지. 이제 알겠습니까. 부인!”

항의하려고 입을 벌린 희경의 입은 민혁에 의해 막혀졌다. 민혁은 달콤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항의를 잠재웠다. 그리고 키스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해 희경의 숨을 점점 가빠지게 만들었다. 민혁의 손이 부지런히 희경의 예복의 단추를 풀러댈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무슨 일…….”

둘만의 시간을 방해 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문을 연 민혁은 와락 달려드는 수영 때문에 놀랐다.

“오...오빠 빨리 가줘.”“수영아, 무슨 일이야? 수호에게 일이 생긴 거야?”“수빈이가 지금 수술해야 하는데, 자꾸 오빠만 찾고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수빈이? 왜?”“그 멍청한 년이 결혼식장에 오겠다고 병원을 뛰쳐나왔다가 차에 치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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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 민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줘. 그 년 제 정신이 아니야.”

민혁이 희경을 돌아보았다. 희경이 창백한 얼굴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팔을 잡아당기는 수영의 팔을 뿌리치고 민혁 희경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희경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가 새 신부의 첫날을 병원에서 시작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민혁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금방 결혼식을 마친 신부를 홀로 두고…….

1시간쯤이 지났을 때였다. 호텔 룸의 전화기가 울렸다. 희경은 민혁이 나간 후 소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전화벨이 울리지 수화기를 낚아채듯 받았다.

“민혁…….”

민혁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울음이 섞인 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희경아, 엄...엄마가 위독하셔. 빨리 집으로 와.”

희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쾌한 핸드폰 벨소리가 스위트룸에 울려 퍼지자 그녀는 잠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비틀댔다. 그러나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기에서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곽 메인 목에서 억지로 소리를 끄집어냈다.

“영...준씨!”"희경이?”

희경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민혁씨 그 병원에 있을 거예요. 좀 찾아서 연락 좀 해주세요. 저희 엄마가 위독하시다고.”

그리고 기운 없이 덧붙였다.

“부탁해요.”

동료 의사와 병원 근처의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영준은 핸드폰을 거칠게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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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먼저 가야겠어.”“야, 오늘 실연 당했다고 술 마시자고 한 게 누군데.”“더 급한 일이 생겼어.”“뭔데?”“머저리 한 명 정신 좀 차리게 패주는 거.”

영준은 험악한 얼굴로 바를 빠져나왔다. 그 날 비번이라 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연락을 받아 그도 알고 있었다. 수빈이 병원을 빠져나와 도로를 무작정 건너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고통 속에서도 민혁에게 가겠다고 몸부림치며 히스테릭 상태에 빠져 의료진들을 당황시켰다지만 생명과 직결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복숭아 뼈 절단 난 거 가지고 죽는 사람은 없었다. 병신이 될지는 몰라도. 그런데 그 머저리 같은 놈이 금방 결혼식을 마친 새신부를 내팽개쳐 두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 자식을 그냥!”

영준은 한걸음에 달려가 그 아메바보다도 못한 머리를 가진 놈의 멱살을 움켜잡고 패대기를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한쪽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마음껏 달리는 것은 사고가 난 후 포기하고 미련을 두지 않았지만 이 때만은 정말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민혁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수술중이라는 불이 켜진 수술실을 바라보는 민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 옆에 서서 민혁의 안색을 살피는 수영의 표정엔 불안함만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배회한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수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교통사고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민혁은 복사뼈가 부러지고도 수술을 받지 않겠다며 그를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는 수빈을 응급실에서 처음 봤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조용하고 연약하기만 한 수빈이 아니었다. 눈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상처 입은 맹수인양 자신을 건드리려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한껏 세우고 있었다. 그를 발견했을 때에야 모든 긴장감이 빠져버린 듯 일시에 무너져 내렸고, 수술실에 실려 가며 진정제의 효과가 듣기 시작할 때까지 그의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대기실에 앉아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며 느낀 것은 수빈에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녀의 정신세계를 파괴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

“하나도 빼지 말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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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말은 강압적이지도 분노가 담겨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그의 말투가 왠지 수영을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수영은 억지로 침을 삼키고 천천히 수빈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영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수록 민혁의 얼굴은 분노로 굳어갔다.

“고모부는 어디 있지?”“사람들을...만..나고 있어.”“수빈이 수술하는 거 알고 있니?”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의 턱이 눈에 띠게 경직되었다.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꺼지고 잠시 후 수술을 맡은 의료진들이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는 민혁과 수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은 동료 의사나 간호사, 환자들의 인사도 무시하고 곧장 수술 대기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의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민혁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꺄악!”

수영이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질러댔고,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다. 민혁은 불시에 날아온 주먹에 맞고 잠시 비틀대다가 몸을 바로 세우며, 영준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무슨 짓이지?”“무슨 짓이냐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한 놈아.”

분노에 싸여있던 민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희경에게 무슨...일이.......”“빨리 희경의 집으로 가봐. 그녀의 어머님이…….”

민혁은 영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병원 복도를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희경에게 장모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장모님이 정신을 놓지 않으시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장모님의 임종 순간에 희경 곁에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슬픔과 고통을 모두 받아 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항상 희경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녀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슬픔을 삼키며 강한 체 하고 있을 희경의 모습이 떠올라 그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저주의 말들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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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은 민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병원 복도를 응시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날뛰고 있는 것이 질투심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 곁에 당당히 있어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남자에게 휘두른 주먹에는 그런 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영준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희경의 슬픔에 대한 안타까워하고 옛연인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해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남자에게 분노하며 달려온 그였다. 그러나 그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채운 것이 질투심이라니…….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심한 남자 놈인 것이다.

희경은 동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눈에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계신 엄마와 그 옆에서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언니들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침울한 얼굴로 앉아계셨다. 희경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비틀거리며 문에 몸을 기대었다. 설...설마! 그 순간 엄마가 두 눈을 힘겹게 뜨고 희경에게 미소를 지었다. 희경은 그녀에게 내민 엄마의 손을 생명 줄이나 되는 것처럼 꽉 움켜잡았다.

"엄....마!""희경아!"

엄마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희경의 얼굴을 쓰다듬으셨다.

"엄만 널 키우며 행복했었단다. 엄마가 널 사랑했다는 걸 잊으면 안돼. 알겠지?"

희경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끼익하는 타이어의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차를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민혁은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는 멈칫하고 말았다.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실 여기저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어둡고 슬픔에 찬 표정에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었다. 처형들이 남편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애타게 찾는 희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혁을 발견한 처형은 남편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때늦은 그에게 원망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기운 없이 눈짓으로 안방을 가리켰다. 민혁은 잠시 처형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닫혀있는 안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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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문을 연 그는 가슴에 둔탁한 흉기를 얻어맞은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희경은 텅 빈 방안에서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있는 장모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민혁은 그녀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가만히 보듬어 안았다. 그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몸에서 배어나는 깊은 슬픔과 절망이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처형이 문가에서 흐느낌이 섞인 소리로 희경의 이름을 불렀지만 희경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엄마와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사람들이 두려운 듯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민혁은 희경을 두 팔로 안아주었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그녀와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 낼 때,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안고만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장모의 손을 잡고 있는 희경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처음에는 거부하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곧 포기한 듯 손에서 힘을 빼고 민혁의 뜻을 따랐다. 그녀의 뺨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장모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엄...마가 당신을...보고.....싶어 하셨어요."

민혁은 죄책감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강하게 끌어안고, 조금이라도 그녀가 그의 품에서 위안을 얻기를 바랐다.

산사에 목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는 유언대로 산사에 모셔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슬픔이 가는 빗줄기로 흘러내리며 산사를 찾은 사람들의 마음을 서러움으로 적셨다. 희경은 주지 스님의 독경을 들으며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엄마의 임종 순간부터 눈물샘이 고장이 난 듯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이 났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모든 것을 잊고, 깊은 잠 속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대고 싶은 어깨는 벌써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찰의 쪽 마루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조금이라도 기운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견딜 수 있겠니?”

혜경이 그녀의 곁에 앉으며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희경은 고개를 끄덕이다, 앞이 아득해지는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자, 억지로 눈을 뜨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잖아.”“견딜 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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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정리는 현경이와 내가 할 테니까 넌 조금 쉬어.”

희경은 고개를 저었다.

“넌 홀몸도 아니잖아. 무리하면 안돼.”

희경에게 물컵이 불쑥 내밀어졌다. 현경이었다.

“마셔. 넌 지금 수분 부족으로 위험한 상태일 거야. 탈수증이라도 일으키면 어쩔 거야?”

화를 참는 듯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런 모습에 혜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저 여잔 뭐야?”

혜경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쏟아내려는 현경을 잡아끌었다.

“왜?”“희경이 앞에서 저 여자 얘기 하지 마.”“대체 누구야?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리잖아. 저렇게 노골적으로 제부에게 시선을 박고 떼지를 않으니……. 제부가 데려온 거야?”

혜경은 한숨을 쉬었다. 혜경은 휠체어를 탄 채 산사까지 온 여자를 보는 순간 한 때 친구들 사이에서 떠들썩했던 제부의 연애 담이 떠올랐다. 그 여자와 완전히 정리를 하지 못하고 결혼식을 치렀다는 것을 깨닫자 가끔씩 희경이 얼굴에 졌던 그늘이 사돈어른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이 자리에까지 얼굴을 내밀게 하다니……. 혜경도 황당하고 화가 나서 참기가 어려웠지만 간호사가지 대동하고 나타난 그녀를 본 제부의 얼굴도 경악, 그 자체였기에 억지로 화를 내리눌렀다. 그녀를 마지못해 쫓아온 제부의 사촌 동생의 말을 빌리면 심한 일을 당해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 제부가 보이지 않으면, 거의 발작 증세를 보여 할 수 없이 끌고 왔다고 했다.

쪽마루에 앉아 물 잔을 든 채 멍하니 앉아있는 희경을 보니 마음이 아파 가슴이 욱신거렸다. 출생의 비밀을 안 후부터 일부러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애 쓰던 동생이었다. 혜경은 희경이 항상 엄마와 자신과 현경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 그리고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희경을 한번도 배 아파 난 자신들과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혜경과 현경도 마찬가지였다. 천성적으로 착하고 씩씩한 그들의 동생을 사랑하고 아꼈다. 그래서 희경이 그녀의 그늘까지 보듬어 안아 사랑해줄 남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그렇게 바랬다. 그랬는데……. 혜경은 희경이 담담하게 수빈이라는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으로 희경을 몰아넣은 제부가 너무나 미웠다. 하지만 희경이 바라는 것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엄마를 보내드리는 거란 것을 알기에 혜경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화가 나서 어찌할 줄 모르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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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달래야 했다. 마치 뭔가 일이 터져 구경거리가 생기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거친 광풍이 불어대고 있었다. 수빈이 산사에 나타났을 때 민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불행한 사건으로 수빈의 생각과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산사에 나타난 것은 도를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수빈은 자신이 당했던 일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상태였다. 의사는 수빈이 무의식적인 방어 본능으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지워버렸지만 그 때 느꼈던 불안감과 고통, 좌절이 그녀가 가장 의지하는 대상인 그에게 집착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며 발작과도 같은 흥분 상태에 빠지는 거라고…….

민혁은 쪽마루에 앉아있는 희경을 보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깨가 그에게는 그녀를 짓누르는 슬픔의 무게로 비치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녀의 거절이 두려웠다. 민혁은 수빈에게 담담하게 인사를 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희경을 본 수빈이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빈에게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팔을 잡는 그의 손길을 희경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떨쳐냈다.

그녀의 거부에 그의 몸은 장승처럼 굳어 잠시 움직이지를 못했다. 희경이에게 설명을 하고 싶었다. 그가 수빈을 야박하게 떨쳐낼 수 없는 까닭을……. 여자로서 최악의 일까지 당항 처지의 수빈을 내쳐버리면 그녀의 삶은 깨어진 거울처럼 산산 조각나버릴 것이 뻔했다. 희경은 수빈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에게 수빈은 이제 누이와 같은 존재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 정에 굶주린 남매라는 끈으로 이어진……. 그래서 그는 번번이 수빈을 피해가는 행복이라는 놈에게 화가 나고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희경에게 빠져들어 가면서 그는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도. 그것을 처음 느껴보았기에 너무나 소중했고, 수빈도 자신과 같은 행복을 찾기 바랐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에게 빛을 밝혀준 희경을 불행 속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민혁은 필사적인 심정으로 희경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한발자국도 다가서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철저한 거부에 그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예전의 그라면 그녀의 생각 따위는 젖혀 두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소중해질수록, 겁쟁이가 되어갔다. 그녀의 표정에, 그녀의 몸짓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한 발을 내딛기가 두려웠다.

갑자기 민혁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의 어머니가 산사에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성진에서 공식적인 조문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산사까지 모습을 나타내었다. 민혁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떨려옴을 느꼈다. 수빈을 산사까지 오게 한 것도 바로 어머니였다. 수영은 수빈이 그를 찾으며 발작증세를 보여 진정제를 놓으려 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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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차까지 준비해주고, 간호사까지 붙여 산사까지 올 수 있게 수배를 한 것이다. 수영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민혁은 어머니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수빈이 일으킨 파장에, 희경이 상처를 받을 거란 생각에 전전긍긍하느라, 그의 어머니에 대한 불안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있었다. 어머니가 약해져 있는 희경을 그냥 두실 리가 없다는 것을 자신이 제일 잘 알면서 말이다.

어머니를 눈으로 쫓으며,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그는 핸드폰이 계속 울려대자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이변호사님 무슨 일이죠?”“저...사장님.”

어지럼증이 가라앉자 몸을 일으키던 희경은 시어머니와 마주해야 했다.

“오셨어요.”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인사를 한 희경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가진 사람과 신경전을 벌일 여유가 그녀에겐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너는 역시 죽음의 냄새가 아주 많이 나는 아이더구나.”“!”

만족감까지 느껴지는 잔인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에 희경은 온몸이 싸늘해졌다.

“결혼식 당일 결국 사.돈.어른이 돌아가시다니…….”

말을 끌며 뜸을 들이던 시어머니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를 받아들인 날에는 대성을 이어갈 아들을 잃으셨는데 말이지.”

천청벽력 같은 소리에 희경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귀가 윙윙거리고 앞이 아늑해져, 그녀는 어둠 속에 갇혔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소리죠?”“어머 몰랐었니?”“널 낳은 창녀 년이 너를 던져주고 떠 날 때, 널 키운 어미가 임신 7개월의 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니?”

“엄마가 임신 중이었다는 말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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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시어머니는 그들을 힐끗거리는 희경의 작은 어머니와 미경을 향해 아주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노골적으로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희경을 향해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런데 안타깝게 충격 때문에 사산하고 말았다지. 사산된 아이가 남자 아이였다고 네 작은어머니가 무척 안타까워하시더구나.”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희경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머니란 여잔 사찰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또 다시 충격적인 소리를 던졌다.

“널 키운 어미는 죽은 아들에 대한 미련이 컸나 보구나. 이 절에 모셔달란 유언을 남겼다니……. 이제 어미와 자식이 한 곳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기뻐해줄 일이겠구나. 그렇지 않니?”

희경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 다리로 서 있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엄마를 부르짖을 뿐이었다. 매 년 혼자서 절을 찾으시던 엄마! 절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해가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먼저 보낸 자식을 생각하며 얼마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셨을까?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어린 시절 절에 가시는 엄마를 쫓아가겠다고 떼를 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희경은 신음처럼 삼켰다. 엄마, 왜 저를 받아들이셨어요. 그냥 내처 버리시지 그랬어요. 자신이 엄마의 소중한 자식의 생명을 빼앗아다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다는 것이 그녀의 영혼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가 점점 크게 벌어지며 끊없이 피를 토해냈다.

“희...희경아, 무슨 일이야?”

놀라서 달려온 혜경이 희경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다. 희경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언니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나 때문에 엄마가 아이를 잃었어? 나 때문에 언니들이 남동생을 잃은 거야?”

혜경이 충격으로 입만 벌린 채, 잠시 아무 말도 못하다가, 사납게 희경의 시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설...설마 당신이....”

희경의 시어머니는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고, 희경에게 경멸에 찬 눈초리를 보냈다.

“난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당신 어머니가 창녀 년의 딸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불행을 자초했다는 말은 꼭 해주고 싶군.”“이...이........”

혜경은 희경을 꽉 끌어안은 채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언니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희경이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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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 절 낳아준 엄마를 만난 적이 있으시죠? 저를 미워하시는 당신에게서 그 여자에 대한 미움이 느껴져요. 그런 건가요?”

희경의 말에 시어머니는 침착함이란 가면을 던져버렸다. 그녀는 추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죽일 듯이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혜경은 희경이 시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저주의 말을 맘속으로 퍼부었다. 정말 몸속에 얼음덩이가 떠다닐 여자였다. 저런 여자가 희경의 시어머니라니, 속상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희경아, 저 여자 말은 믿지…….”

희경을 달래려던 혜경은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희경의 하얀 치마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언니의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치마를 본 희경은 그 제야 다리 사이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희경아!”

민혁은 사색이 되어 윗옷을 벗어 희경을 감싸 안았다. 이변호사와 통화하느라 잠시 어머니에게서 눈을 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머니가 희경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불안해하던 그는 갑자기 희경이 땅바닥에 쓰러질 듯 주저앉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변호사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혼란스러워 잠시 주춤거렸던 자신의 미련함이 뼈에 사무칠 뿐이었다.

희경을 안고 정신없이 뛰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어머니의 입가서 만족스런 미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변호사가 한 말이 귓가에 생생히 울렸다. 그의 어머니가 이변호사에게 그의 주식을 희경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양도하는 법적 서류를 조금만 늦추어 달라고 했다고 했다. 지금 희경이 흘리는 피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치밀하게 꾸민 짓이었다. 희경이 가장 약해졌을 때, 정신적 충격을 주어 원치 않는 아이를 없애버리려 한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자신은 그런 여자의 아들이었다.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의식을 잃은 희경을 안은 그의 팔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의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마저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스런 불안이 그를 사정없이 조여 왔다.

혜경과 현경은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움직였다. 잠시라도 멈추면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댔다. 민혁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자신의 새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물들이고 있는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윗옷으로 희경의 몸을 감쌌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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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스며든 핏물이 와이셔츠 소매까지 시뻘건 얼룩을 만들어냈다.

민혁은 희경이 겪고 있을 고통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조차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몸서리가 쳐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희경은 출생으로 인한 그늘을 갖고 있었지만 밝고 삶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다. 그녀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내숭 떠는 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 앞에서 숨김없는 그녀 자신을 보일 때면 왠지 모를 만족감에 행복했다. 체면과 가문을 중시하며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 쓰는 부모를 보고 자라며 언제나 정에 목말라 했던 그를 채워주었던 것이 희경이었다. 한 때는 수빈에게서 그것을 갈구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동변상련의 아픔을 지닌 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은 것과 다르지 않은 거였다.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아파했었는데……. 그것을 알게 한 것이 희경이었다. 그런데 수빈은 아직도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괴로워했고 그는 그런 그녀를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희경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어머니에게 희경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준 것이다. 어머니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모두 자신이 저지른 일이고 희경이 그 대가를 대신 치르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나오자 혜경과 현경은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며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어둡기만 했다.

“아기…는…….”

의사 선생님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혜경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런 언니를 현경이 단단히 붙잡고 고집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유산된 건가요?”“출혈이 너무 심해서 어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민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의사 앞을 막아섰다.

“희경은...희경은 괜찮습니까?”“예, 몸이 많이 약해져있지만 잘 견디고 있습니다.”“희경일 볼 수 있을까요?”“곧 병실로 옮겨질 것입니다.”

의사 말이 끝나자마자 손등에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있는 희경을 간호사들이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일시에 그들의 시선이 희경에게 쏠렸다. 희경은 눈을 꼭 감고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킨 채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지 의식을 잃은 얼굴에서도 괴로움이 느껴졌다.

민혁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희경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 손을 현경이 매정하리만큼 야멸치게 쳐냈다.

“손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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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은 타오르는 분노를 담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과 당신 어머니, 그리고 저 여자! 정말 지긋지긋해. 우리 희경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 당신들 때문이야.”

민혁은 현경의 손짓에 겨우 수빈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빈은 수영에 의해 저지당한 채 대기실 복도 끝에 있었다. 수영의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수빈이 그녀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법적으로도 아직 깨끗하니, 법적까지 갈 것도 없이 끝내. 서로 끔찍한 상판 보여주지 말고 각자 살아가자고. 당신 어머니에게 전해. 우린 그 쪽에 미련이라곤 티끌만치도 없으니까 다신 희경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희경에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댔다가는, 그 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 분명히 전해.”

흥분해서 떠드는 현경의 팔을 잡아당기며, 혜경이 차분한 어조로 민혁에게 말을 했다.

“당신에게 희경인 과분해요. 희경이 당신을 용서해도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기로 해요. 다시는 당신도 당신 집안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군요.”

혜경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뻣뻣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희경을 옮기는 간호사들 뒤를 따라갔다. 현경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는 민혁을 잠시 노려보다 발걸음을 떼었다. 현경은 수영과 수빈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사나운 눈초리에 움찔하는 수영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빈을 기분 나쁘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내뱉듯이 한마디를 했다.

“같은 여자라는 게 정말 창피해.”

민혁은 한참을 굳은 듯 꼼짝 않고 서 있다가 기운 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그는 자신의 뺨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모든 감정이 몸에서 빠져나간 듯 그의 몸과 마음은 텅 비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눈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댔다.

수빈은 머리에 강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휠체어를 잡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휠체어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몸의 체중을 받치는 다리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불빛에 반짝이는 민혁의 눈물만이 보일 뿐이었다.

“뭐...뭐하는 거야? 다시 부러지고 싶어?”

수영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수빈을 앉히려고 했지만 수빈은 그 가녀린 몸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수영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비틀거리며 민혁에게 한걸음씩 다가가면서 기억 속에서 밀어내어버렸던 현실들이 하나, 둘씩 떠올렸다. 끔찍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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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그녀를 옭아매었지만 그 어떤 것도 민혁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민혁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차원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거리가 느껴졌다. 수빈은 모든 힘이 쏟아버린 수빈은 신음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느끼지를 못했다. 그를 올려다보며 수빈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졌음을 그제야 깨달은 자신의 미련함에 눈물을 흘렸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 사람은 자신뿐이 없다고 생각했었던 자신의 오만함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헤어질 때도 그는 이러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마저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자신이 그를 불행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통곡하고 싶었다.

병원 복도 바닥에서 몸부림치며 격하게 우는 수빈의 몸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영준이었다. 갑작스런 수술로 뒤늦게 희경의 어머니의 영결식을 위해 사찰을 찾은 그는 희경에게 일어난 비극을 들었다. 희경에게 일어나는 끊임없는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병원에 달려온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애통하게 흐느끼는 수빈을 봐야했다. 그녀를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환자를 보고 그저 지나칠 수는 없었다. 영준은 몸이 떨릴 정도로 격하게 흐느끼는 수빈을 휠체어에 앉혔다.

“외출을 누가 허가했습니까?”

수영은 자신을 탓하는 영준의 차가운 질문에 짜증이 난다는 듯 대꾸를 했다.

“병원장이요. 외숙모가 한마디 하니 그냥 회출 허가 내주던데요 뭘.”

영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요. 이대로 돌아다니다간 수술한 부위가 덧나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르니까.”

영준은 수빈에게 더 이상의 눈길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서럽게 울어대는 수빈에게 어떤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연약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동정심을 살지는 몰라도 그가 보기엔 그녀처럼 이기적인 사람도 없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모든 불행을 혼자 짊어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영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천지에 가슴에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로등이 묵묵히 인적이 드문 길을 비추고 있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을 번득이며 빠르게 달려오던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웅장함을 자랑하는 저택 앞에 급정거를 했다. 자동차는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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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담장에 차체 한쪽을 짓이기고서야 겨우 멈추어 섰다. 잠시 후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에 한쪽 관자놀이에선 피가 흐르는 모습이 비치었다. 민혁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육중하게 서있는 대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려댔다. 소란스러움에 잠이 깼는지 주변에서 개짓는 소리도 들려왔다. 대문이 열리며 놀란 얼굴의 관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민혁에게서 벽에 쳐 박히다시피 서 있는 차로 옮겨졌다. 관리인은 민혁이 숨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술 냄새에 놀라 소리쳤다.

“사장님, 이렇게 취하셔서 운전하셨습니까? 어디 다치신 대는…….”

걱정스레 민혁을 부축하려는 관리인의 손을 민혁이 거칠게 치워냈다. 그리고 위험하게 비틀거리며 현관문을 ‘쾅’ 소리를 내며 열어젖뜨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안방에서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술 냄새를 심하게 풍기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웬 술을 그렇게 마신 거냐?”

아버지는 술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마셔댄 아들을 못마땅해 하며 혀를 찼다. 어머니는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다쳤구나.”

어머니는 민혁의 뒤를 황급히 쫓아온 관리인을 향해 약품 상자를 서둘러 찾아오라고 시켰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민혁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민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바라보는 부모에게 민혁이 비웃는 웃음을 흘렸다.

“어머니, 제가 흘린 피는 보이시면서 당신의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죽은 당신의 핏줄이 흘린 피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민혁은 피로 얼룩이 져 있는 소매를 들어보였다.

“당신이 죽인 핏줄의 피깁니다. 세상에 얼굴 한번 내밀어 보지 못하고 할머니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당신의 핏줄이 죽으면서 흘린 피란 말입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는 민혁과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어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제 아이의 목숨을 빼앗았는지…….”

어머니는 턱을 치켜들며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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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그런 핏줄은 없다. 그런 아이를 얻을 바에야 내가 죽는 게 나아. 내가 죽어도 그런 아이를 우리 서씨 집안의 아이로 받아들일 수 없어. 민혁이 너도 정신 차리고 쓸데없는 미련 같은 거 버려라.”“미련이라고 했습니까?”

민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련 같으 거 없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오늘 당신의 손자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까지 함께 죽인 겁니다.”

민혁은 몸을 돌려 비틀거리는 몸으로 현관을 걸어 나왔다.

“민혁아!”

그의 어머니의 화가 난 외침도 그를 붙잡지는 못했다.

“제가 살아있는 한 다시는 이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의 자식은 죽었습니다.”“그런다고 내가 그 창녀 년의 딸을 인정할 것 같아?”

어머니의 독기어린 부르짖음에 민혁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어머니, 희경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저입니다. 전 이제 그녀를 잡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그녀는 제 품에서 날아가 버렸습니다.”“그런데 왜?”“이젠 제가 어머니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볼 때마다 제가 잃어버린 것들이 생각나 어머니를 증오하게 될까 제 자신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떠나려는 겁니다. 죽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세요.”“민혁아!”

민혁은 어머니의 부르짖음에도 휘청거리는 몸을 멈춰 세우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가을빛에 물든 나무들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가을 향이 깊숙이 묻어났지만 희경은 그런 것을 느끼고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한걸음 내딛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그녀는 밤낮없이 바쁘게 자신을 혹사시키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그녀는 수면제에 의지해야 겨우 잠이 들었다.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두 팔에 가득 들고 있는 설계도를 탁자 위에 집어 던지고 푹신한 소파에 몸은 던졌다. 몸을 쭉 펴며 편안한 자세를 잡던 그녀는 멈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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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난 표정 지은 혜경 언니가 허리에 양손을 얹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언니? 어떻게…….”“너 분명히 내가 오늘은 쉬라고 했을 텐데…….”“그.그게.....기한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병원에서 퇴원하고 하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있잖아. 너 이렇게 말 안 들으면 집으로 끌고 갈 거야.”

혜경의 신랄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희경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는 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언니 피곤하다.”

혜경은 지친 얼굴로 그녀에게 기대 눈을 감는 동생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넓은 빌라 안으로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병원에서 의식이 깨어난 희경에게 그녀는 일방적 통보를 했다. 서민혁이란 사람은 우리 집안과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그녀의 말에 희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민혁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혜경은 희경이도 그와의 이별을 결심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희경은 민혁이 사람을 통해 보낸 빌라의 열쇠를 받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이 넓은 빌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신혼살림을 차리기로 한 곳에서 혼자 지내며 매일 누구를 떠올릴까?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만 머물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혜경에겐 서민혁에게 대한 미련으로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를 매몰차게 내몰았던 행동이 잘못되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게 되었다. 혜경은 희경이 민혁을 잊고 좀 더 따뜻하고 넓은 마음으로 그녀를 감싸줄 사람과 새로운 출발을 하기를 바랐었다. 박영준씨처럼…….

희경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박영준씨는 틈나는 대로 찾아와 주었다. 값싼 동정을 표하는 대신 희경의 성질을 자극하며 기운을 돋우어 주었고, 때론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며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혜경은 내심 영준과 희경이 잘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병실 문이 열릴 때마다 기대로 희경의 눈빛이 기대와 실망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할 수뿐이 없었다. 수술실에서 나와 병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으며 누군가를 찾는 희경의 눈빛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자신의 고집이 후회가 될 뿐이었다.

혜경이 희경을 위해 자신의 뜻을 꺾고 민혁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성진에서도 갑작스런 사장의 부재에 동요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다만 희경이 퇴원하는 날 보낸 변호사를 통해, 신혼살림을 차릴 예정이었던 빌라와 그가 가진 현금과 부동산을 모두 그녀에게 넘긴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화도 한 통 없었고, 병원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수빈이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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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입원한 병원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혜경은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든 희경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혔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혜경은 희경의 앞머리를 끌어올렸다. 갑자기 어둡게 가라앉은 눈망울로 자신과 현경을 바라보며 묻던 말이 생각났다.

“날 동생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

희경이의 고통스런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들의 남동생이 건강하게 태어나기 힘들었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남동생을 임신한 내내 유산의 위험에 시달려 입원을 수시로 했다. 혜경과 현경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만 있는 엄마를 보며, 사실 엄마 뱃속에 있는 동생을 미워했었다. 유치원 행사에 참석한 다른 친구들 엄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는 더욱 더 그랬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돌아와 남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공포를 느껴야 했다. 자신들이 미워했기 때문에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띈 것이 소파 구석에 처박혀 누워있는 아기였다. 그들을 향해 손발을 휘저으며 웃어대는 아기는 그들의 공포는 서서히 가라앉혀주었다. 혜경과 현경은 금세 아기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들은 남동생을 잃었지만 천사처럼 예쁜 여동생을 얻은 것이다. 혜경은 얇은 이불을 가져다 희경을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널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냐고? 널 보는 순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병원 식당은 점심을 먹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준도 오래간만에 제 시간에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식판을 들고 빈 자리를 찾던 영준은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했다.

“먹는 걸 거부한단 말이지.”“그래, 겨우 링거로 숨은 붙어있는데…….”“수술한 발목은 다 나았다며. 퇴원시키지.”“그게 아무래도 퇴원하면 일을 저지를 것 같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벌써 그런 기도를 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영 진척이 없는 것 같아.”“뒤에 빵빵한 빽이 있나보지? 입원하려는 사람이 줄 서있는데 특실을 차지하고 퇴원할 생각을 안 하니....”“그러면 뭐해? 찾아오는 사람이 없던데. 가끔 사촌이라는 동생만 얼굴을 비치는데 그것도 아주 잠시뿐인가 봐.”

영준은 빈 좌석에 앉으며 테이블에 식판을 요란하게 내려놓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지만 영준의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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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 오늘 오후 비번이지. 나와 좀 바꾸지.”“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가 아닌 밤에 날벼락이란 표정으로 영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프차가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렸다. 운전을 하는 영준은 음악까지 크게 틀어놓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운전을 했다. 옆 좌석에 앉은 수빈은 영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나 영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반응이 없자 수빈은 지친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에겐 소리치는 일도 벅차고 힘들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기쁨의 집이었다. 영준의 지프가 멈춰서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저씨, 우리 집이 싹 바뀌었어요.”“식당도 새로 지었어요.”“아저씨 내 방도 생겼어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기쁨의 집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숨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태수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뽐내듯이 말을 했다.

“희경이 아줌마가요, 열심히 공부하면 우리들 대학까지 보내준대요.”

모든 일에 관심 없는 듯 차 안에서 무심히 앞만 쳐다보고 있던 수빈이 희경의 이름을 듣자 몸을 움찔 움직였다. 영준이 수빈쪽의 차문을 열었다.

“희경이도 와 있는가 보군. 서로 안면이 있을 텐데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영준은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수빈의 팔을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잡아끌며 걸어갔다.

“세상 불행을 다 짊어진 사람처럼 굴지 말아요. 누구도 동정하지 않으니까.”“당...당신이 뭘 안다고...내가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아요?”

수빈은 영준의 팔을 온 힘을 다해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난....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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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태수야!”“왜요? 어 아줌마 우네.”

영준이 부르자 한달음에 달려온 태수는 수빈이 우는 모습을 보고 놀라 쳐다보았다.“오른쪽 발 좀 보여줘라.”“왜요?”“축구화 사줄게 어때?”

태수는 재빨리 신발을 벗어던지고 양말도 잡아 뺐다. 영준은 수빈의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고 수빈의 얼굴을 돌려 태수의 발을 보게 했다. 태수의 발을 본 수빈의 입이 벌어졌다. 태수의 왼쪽 발엔 다섯 개가 있어야할 발가락 중에 하나가 모자랐다.

“됐어요?”“그래.”“축구화 잊으면 안돼요.”

양발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신발을 신고 달려가는 태수의 뒷모습을 보며 영준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태수의 발가락이 왜 네 개인줄 알아? 태수 아비라는 작자가 아들의 발가락을 잘라내고 상해 보험금을 타내렸고 했거든. 어미는 일찌감치 태수가 아기일 때 버리고 도망을 쳤다더군. 당신도 버림 받고 부모의 탐욕 때문에 몸 한구석이 병신이 됐나?”“.......”

수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준은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치며 이죽거렸다.

“내가 왜 이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됐는지 말해줄까? 내 아버지가 이혼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 분풀이로 자식과 함께 죽겠다고 날 태우고 160킬로로 달려 중앙 분리 벽을 들이 받았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데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 사람들은 내가 한 다리만 부서지고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떠들더군. 당신도 부모의 분풀이로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간 적이 있었나?”

영준은 수빈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무에 기대어 선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의 불행 속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일 뿐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부터 먼저 사랑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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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은 영준의 발밑에 주저앉아 계속 울어댔다. 영준은 수빈이 마음껏 울게 지켜보다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할 때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수빈씨?”

너무 울어 움직일 기운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을 때, 그녀를 가리는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든 순간 수빈은 희경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희경을 보며 수빈은 눈을 마주치고 있기가 괴로워 고개를 돌렸다.

“공사가 다 끝났나 보지?”

영준의 말에 희경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응, 욕심을 부리자면 부족한 것이 아직도 많지만, 내일 떠나야 하니까.”

떠난다는 소리에 수빈이 놀라 희경을 바라보았다. 희경이 수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저 내일 이태리로 떠나요.”“.....!”“훗 민혁씨가 위자료를 무진장 남겨줘서 여기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아이들에게 줄 장학금까지 마련하고도 돈이 남더라고요. 부자가 좋긴 좋아요. 그래서 공부 좀 더 해 보기로 했어요.”

희경이 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다가 희경의 손을 잡은 수빈이 몸을 일으켰다.

“잘 있어요.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요.”“......”“민혁씨와...행복하세요.”"!"

희경은 충격을 받은 수빈을 향해 웃어보였지만, 그녀의 입가가 경련을 일으키듯 가늘게 떨렸다. 희경은 수빈의 손을 놓고 다시 한번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 몸이 굳은 듯 한참을 꼼짝하지 못하던 수빈이 급하게 몸을 돌려 소리쳤다.

“오빤....민혁 오빤 희경씨를 사랑해요.”

희경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빠가 울었어요. 전 오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오빠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희경이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수빈은 절박하게 그녀에게 뭔가 말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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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지만 아이들이 희경에게 달려들어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수빈은 희경이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품에 꼭 안아주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품을 가장 오래 차지 한 것은 백일도 안돼 버려진 아기였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원장 선생님께 전해주는 희경의 얼굴은 한없이 슬퍼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수빈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수빈은 영준을 향해 중얼거렸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죠?”

영준은 수빈을 묵묵히 바라보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인천 국제공항 청사를 나오는 한 여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겨울 초입을 느끼기는 아직 이른데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새하얀 모피를 어깨에 두른 여인이 오만하게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윤곽을 지닌 그 여인은 선글라스를 쓰고, 선명하다 못해 핏빛으로 보이는 루주로 입술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유독 끄는 것은 목선이 깊이 파이고 몸에 딱 달라붙은 옷 위로 솟구친 풍만한 가슴이었다.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가슴은 유두 자국까지 선명히 드러나 보여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더욱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었다.

모범택시에 올라 탄 여자는 손바닥만한 토드 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사는 룸미러로 그 모습을 보고는 뒷좌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손님 차 안에선 금연인데요.”

여자는 주소가 적힌 쪽지와 함께 백 달러짜리 지폐를 운전기사에게 내밀었다. 백 달러짜리 지폐를 받은 기사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담배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게 창문을 조금 내린 후, 차를 출발시켰다.

이변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수빈은 벌써 1시간 째 눈물을 흘려대고 있었다.

“수빈양, 정말 난 모른다니까. 서민혁씨에게 전화로 연락이 올 뿐이야.”“오빠에게 꼭 연락을 해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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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라니까. 난 일방적으로 지시 상황을 전달받을 뿐이라고.”“희경씨가 떠난단 말이에요. 당장 연락하지 않으면 늦어요.”“글쎄 나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빈은 감정이 제어가 안 되는지, 이젠 어깨까지 떨며 흐느꼈다. 그런 수빈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이변호사는 수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아마도 법적 마무리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서민혁씨에게 연락이 올 것 같으니 꼭 전해줄게요.”“부...부탁해요.”

수빈은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는지 깨닫는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되찾아주는 것만이 자신이 저지른 일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수빈은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빌딩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왔다. 눈이 부시게 파란 가을 하늘이 그녀의 눈을 더욱 아리게 했다. 그녀는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도 그녀를 반겨줄 이가 없었다. 얼굴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그녀는 생각했다. 바람이고 싶다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것도 지나친 사치였다. 그녀는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모진 목숨 연명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녀가 세상을 등지게 되면 또 다시 민혁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어 남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걸었다. 힘없이 주저앉고 싶어 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도 곧게 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이변호사가 한숨 돌린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몸을 편히 기대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자 짜증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억지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었다. 그러나 곧 이변호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이고 그렇잖아도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무척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사항이 있을 때마다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다고 했잖습니까.-

“수빈씨가 급히 전할 말 있다며 연락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사정하다가 조금 전에가 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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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한 일 같던데, 빨리 연락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희경씨가 내일 떠나신다고 하더군요. 아마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시는 것 같습니다.”

-...........-

한동안 계속 침묵이 이어지자 이변호사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액정 화면으로 통화가 계속 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통화 시간을 가리키는 숫자는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었다. 계속 기다리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입을 벌리는 순간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왔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사..사장님!”

이변호사가 당황해서 황급히 불러보았지만 전화는 이미 끈긴 뒤였다.

어둠이 깔린 거리를 환한 가로등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희경은 도로를 빠져나와 골목 안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의 표정은 그늘이 져있었다. 조금 전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 했다. 조카 진우의 재롱에 웃음을 터트리고, 언니들과 형부 앞에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빈 자리가 그녀에겐 너무나 컸다. 엄마와 함께 한 모든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그녀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키웠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가족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때 엄마의 죽음으로 몇 년은 훌쩍 늙어버린 아버지가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잘 다녀오라고, 여기가 네 집인 걸 잊지 말라고. 그 순간 희경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슬픔에 자신의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감정이 그녀를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늙어버린 아버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희경은 언니들과 형부 그리고 조카 진우와도 일일이 포옹을 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처음엔 조금 머뭇거렸지만 아버지는 다정하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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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를 안아주셨다. 희경은 슬픔으로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빌라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을 때,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캄캄하게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할 그녀의, 아니 그들의 빌라가 환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차의 시동을 끄는 희경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베란다 창으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향해 조급하게 발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잠기지 않은 문손잡이가 소리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돌아갔다. 희경은 격렬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강렬한 향수 냄새가 그녀를 잠시 어지럽게 했다. 그 향수 냄새를 처음 맡아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의 시간을 더듬는데, 극심한 구토가 일어다. 그 여자였다.

희경은 그녀를 물건처럼 팔아치워 버린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마치 제 집에 있는 것처럼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황금빛 와인이 담긴 술잔을 희경에게 들어 보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희경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보고 웃고 말았다.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여자였다. 그녀가 오픈한 와인은 와인을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형부가 특별히 구한 샤토다겜 95였다. 현경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희경이를 위해 가져다주었는데 오픈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었다. 그녀는 그 여자가 샤토다겜 95의 맛이나 제대로 음미할줄 아는지 궁금했다. 언니의 말에 의하면 미묘하고 섬세한 향이 환상적이고 신비롭다고 하는데 말이다.

“흐음 이런 비싼 와인을 집에서 마시다니, 재벌 집에 시집갔다는 말이 사실은 사실이었구나.”

희경은 현관 장식부스 위에 차키를 던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떻게 들어왔죠?”“쿡쿡, 네 사촌 언니라고 했더니 관리실에서 열어주더라. 어렸을 때는 정말 못난이더니, 크면서 날 닮아갔나봐. 날 보더니 금방 너와 연관시키던데.”“무슨 일이죠? 당신과 다신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딸이 시집을 갔는데 당연히 축하 인사를 해야지.”“당신과 말장난 하고 싶지는 않군요. 원하는 걸 말 해봐요.”“원 애도 성미 한번 급하구나.”

와인 잔을 내려놓은 여자는 소파에 몸을 더욱 편히 기대며 희경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성진 그룹 아들과 결혼했다고? 신문에서 우연히 그 기사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당신이 왜 놀라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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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성진 그룹 사모님이 내가 너의 친어미라는 걸 알면 절대 결혼시키지 않았을 걸 아니 말이다.”

그 여자의 눈빛이 수상쩍게 번득였다.

“아마 지금이라도 알게 되면 당장 이혼시키려고 난리칠걸.”“왜죠? 내가 친딸이 아니란 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여잔 팔짱을 끼며 가슴을 더욱 도드라지게 강조를 했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요염하고 관능적이었다.

“내가 그 잘난 체 하는 여자를 한방 먹여줬었거든.”“?”“그러니까 성진 그룹 후계자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 미국 유학 왔을 때 그 여자가 좋아하던 남자를 내가 유혹해서 그 여자 보는 앞에서 일을 좀 벌여줬지. 호호호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쾌하다니까.”“.......”“파티에서 만났는데, 날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 깔고 무시하며, 내 성질을 건드리잖아. 그래서 그녀의 파트너를 유혹해 골탕 좀 먹여줬지. 훗 가슴 조금 보여줬더니 쉽게도 넘어오더라고. 그 남자 옷을 홀딱 벗겨 내 맨가슴에 얼굴을 비벼댈 때에 맞춰 그 여자를 불러줬지. 다른 관객들도 함께 말이야. 정말 끝내주는 타이밍이었지. 그 때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뽐내는 표정으로 자랑이라도 하듯 술술 이야기를 해대는 여자의 뻔뻔함에 질려서 희경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이야긴데, 그 자존심 덩어리가 그 남자를 정말 좋아했단다. 하지만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까지 본 상황이라 그녀의 자존심에 약혼을 강행할 수 없어 그 자리에서 그 남자와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던가. 훗 난 그 여자와 내가 다시 인연이 닿을 줄은 정말 꿈 에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와 그 여자 아들이 결혼을 하다니…….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희경은 신이 나서 떠드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죠?”

여자는 와인을 마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난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어 주는 대가로 작은 보상을 해줬으면 하는 거지.”

그 여자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웃음까지 지으며 돈을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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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면요.”

여자의 얼굴 표정이 굳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잔인한 눈빛으로 희경을 쏘아보았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 결혼을 끝장내 버릴 수밖에.”

희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물이 날 때까지 계속 웃어댔다.

“너 내가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넌 나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구나.”

드디어 여자가 성질을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년에게 지금 당장 전화할까?”희경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수화기를 들어 내밀었다.

“원하신다면......”“........”

희경이 너무나 태연하게 수화기를 내밀자 여자는 잠시 당황스런 눈빛을 던졌다.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신 입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거예요. 당신 말대로 그 분은 자존심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거든요.”“설....설마…….”“네, 당신이 떠벌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왜 그 분이 필사적으로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이제야 알겠군요. 그 분도 당신의 희생양인 셈이니,어쩐지 동정이 가는군요.”

여자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희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결혼을 했단 말이야?”“네, 하지만 곧 깨졌어요. 그것은 당신 때문은 아니니 죄책감 같은 것 가질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런 인간적인 마음을 가질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요.”“위자료는? 위자료는 충분히 받았겠지?”

희경은 질린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은 온통 탐욕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경은 와인 병을 들고 몇 모금을 벌컥벌컥 삼킨 후에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끊으며 어린 아이에게 설명하듯 이야기를 했다.

“네, 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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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눈이 굶주린 사람처럼 번득였다.“그래서 내 유학 비용만 남겨두고 몽땅 고아원에 기부를 했거든요.”“뭐야?”

여자는 소리를 꽥 질렀다.

“미...미친년! 뭘 했다고?”“기부했다고요. 기부란 소리 처음 들어보나요?”

희경은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여기까지 수고스런 걸음 하셨으니 돌아갈 비행기표는 제가 사드리죠. 1등석으로요. 됐나요?”

희경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가택 침입죄로 경찰에 신고하겠어요.”“이...이......”몸을 부들부들 떨던 여자는 소파에 던져져 있던 모피 코트와 토드 백을 획 낚아채 오만하게 턱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여자가 현관을 나가자 희경은 문을 잡고 말을 했다.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군요?”

여자의 한쪽 눈썹이 아치를 그렸다.

“날 버려줘서 고맙다고요.”

그리고 희경은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희경은 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희경은 그대로 현관에 주저 앉아버렸다.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났다. 하늘나라에서 자신의 손으로 키워보지 못한 아들을 만나 행복해할 엄마가 몹시도 그리웠다.

“내일 퇴원하신다면서요?”

간호사의 밝은 미소에 수빈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답했다.

“축하해요.”“고마워요.”

수빈은 병원을 퇴원할 내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녀가 집이라 부르던, 그 곳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퇴원하는 대로 며칠 호텔에서 묵으며 살 거처를 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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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히 생각할 계획이었다.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시간에 그녀를 방문할 사람이 없었기에 의아해 하며 수빈은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수빈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윤재구였다. 머뭇거리며 그가 수빈에게 다가오자, 수빈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기 시작했다.

“저....수빈아....”

수빈이 비명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리자 재구가 당황해 하며 손을 마구 저었다.

“나...난 사과하려고 온 거야. 소...소리 지르지 마.”

항상 잘난 체 하며 제멋대로 하던 재구가 기가 죽은 채 수빈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자 수빈은 억지로 비명을 삼켰다.

“저...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민혁에게 이야기 좀 해줄래.”“?”“민혁이가 우리 아버지 회사의 자금 줄을 죄어 버렸어. 분식 회계로 자본금 불린 것까지 국세청에 신고해 세무 조사 나오고 지금 난리야. 그래서 주식은 곤두박질치는데 자금줄까지 조여 놓아서 어음 결제를 할 수가 없어 부도날지 몰라. 우리 집 망하면 네 사촌 집안도 힘들어. 선거 자금 대부분을 우리 아버지가 대고 있으니까.”

윤재구가 아주 비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수빈은 그런 윤재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아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뭐...뭔데?”

그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수빈은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길 잘라버려요.”“뭐?”“잘라버리라구요.”

윤재구는 수빈의 눈길이 자신의 사타구니에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린 표정으로 펄쩍 뛰며 소리를 빽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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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애가 미쳤나.”“그런 어쩔 수 없죠.”

수빈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이 난 재구가 수빈에게 덤벼들려 하자 수빈이 아주 침착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나에게 또 손을 댔다가는 회사만으로 끝나지 않을 걸요. 회사 공금 빼돌린 것까지 토해내고 감옥에 갔다 와야 할 걸요.”“!”“당신이 날 폭행하며 떠들어댄 것 기억 안 나요? 회사 돈으로 당신 빌딩 사고 땅 투자 했다고 했건 것!”

윤재구가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를 못하자, 그런 그를 보며 수빈이 비웃었다.

“또 다시 날 귀찮게 하거나 건드리면 언론사에 모두 알려주겠어요.”“제...제기랄”

윤재구는 뒷걸음치더니 병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수빈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런 놈을 두려워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약한 자 앞에서만 기고만장하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하기만 한 인간에게…….

다시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수빈은 한숨이 나왔다. 누구인지 알았을 때는 더욱 더 그랬다. 그녀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후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저렇게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다니.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래, 내일 퇴원한다고?”“네.”“이 기사에게 널 마중하러 오라고 말해 놨다. 집에서 푹 쉬도록 해라. 병원에서 어디 편하게 쉴 수 있었겠니.”“민혁 오빠의 돈은 한 푼도 드릴 수 없어요.”

수빈은 잠시 한정철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더 늘어놓기 전에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그러나 곧 굳은 표정을 풀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슨 소리냐?”“선거 자금으로 오빠가 저에게 남겨준 돈을 쓰고 싶어 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선거 자금을 대는 회사가 휘청거리고 있으니 말이에요.”“네가 알고 있다니 긴 말을 필요하지 않겠구나. 민혁이가 너에게 준 돈이 꽤 되더구나. 그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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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 빠듯하긴 해도 선거를 치룰 수 있을 것 같구나.”“전 당신 같은 정치인이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민혁 오빠도 생각은 항상 그러했고요. 그런데 어떻게 민혁 오빠의 돈을 당신 선거 자금으로 드리죠? 차라리 몽땅 불살라 버릴 지언정 당신에게 줄 수는 없어요.”

한정철은 그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수빈이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는데, 선거 자금을 대느니 몽땅 태워버리겠다는 수빈의 말에 가식적인 친절은 걷어버리고 살벌하다 싶을 정도로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뭐라고?”“당신에겐 죽어도 돈을 줄 수 없다고요.”

한정철은 다짜고짜 수빈의 얼굴을 후려쳤다.

“다시 말해봐. 이 배은망덕한 년!”“당신 같은 정치인이 우리나라를 속까지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거예요.”“이년이 뚫린 입이라고”

한정철은 사정없이 수빈을 후려쳤다, 수빈의 얼굴은 금세 부어올랐다. 그러나 수빈은 얼굴을 꼿꼿이 들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수빈의 태도에 더욱 열 받은 그는 더욱 강하게 팔을 휘둘렀지만 누군가의 손에 팔목 움켜잡혔다. 씩씩거리며 돌아본 그와 영준의 눈이 마주쳤다.

“폭력 사건으로 경찰에 입건되고 싶다면 당장 신고해 드리죠. 그러면 이번 선거는 아무리 돈을 끌어다 대도 힘들 거라는 건 아실 테죠?”“이이…….”

한정철이 죽일 듯 영준을 노려보았지만 영준의 침착하다 못해 비웃음까지 섞인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힘겹게 영준의 손을 뿌리친 한정철의 손목엔 뻘건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손자국처럼 시뻘건 얼굴을 한 한정철은 영준에게 두고 보자는 협박성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는 병실 문을 부서져라 요란하게 닫고 사라졌다. 숨 쉬는 것도 잊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수빈은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어깨를 짚는 손길에 고개를 든 수빈은 자신을 향한 따듯한 미소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은 수빈을 향해 웃음 짓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민혁 오빠를 가슴 속에서 놓아 보낸 후 텅 비어버린 서늘한 가슴에 미약하지만 온기가 번져갔다. 그녀는 새삼 용기가 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버릴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오히려 사치였다. 그녀는 살아갈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그녀에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몰아 쳐들어왔다. 한낮은 가을의 향연을 즐기게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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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만 어두운 밤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희경은 창가에 서서 가로등 불빛만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한기마저 들었지만 그녀는 활짝 열린 창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여자의 향수 냄새가 집안을 떠도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희경은 그녀가 떠나고 빈 집으로 남아있을 그 곳에 그 여자의 어떤 흔적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문이란 문은 모두 열고 그 여자가 남기고 간 흔적이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경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꼭 움켜쥐었다.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손가락을 편 손바닥 위에는 새빨간 루비가 박힌 펜던트가 놓여있었다. 희경은 그것을 한참 쳐다 보다 기운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을 미련이라고 하는 걸까. 민혁에게 받은 물건을 모두 빌라에 남겨 두고 떠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것에는 미련이 남았다. 희경은 펜던트를 다시 손에 움켜쥐며 생각했다. 자신에겐 추억거리가 필요한 거라고. 희경은 와인 병을 들고 병째 마셨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오늘밤은 모든 것을 잊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해는 변함없이 떠올라 새벽을 깨우고 아침을 밝혔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희경은 인상을 쓰며 감은 눈을 더욱 꼭 감았다. 포근하고 따듯한 품속에서 깨어나기 싫었다. 희경은 얼굴을 비볐다. 침대에서 민혁의 향기가 났다. 희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민혁의 향이 날 리가 없었다. 며칠 전 혜경 언니가 일 사람들을 시켜 빌라 안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침구 세트들도 모두 세탁했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민혁의 향이 침대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희경은 다시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그래도 민혁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녀는 아직 꿈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비행기 시간에 늦을 거야.”

이젠 환청까지 들리고 있었다.

“희경아!”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꿈에서 깨기 싫어 몸을 움츠렸다. 뺨에 그의 손이 닿았다. 감촉까지 느껴지다니, 정말 생생한 꿈이었다. 눈을 뜨면 그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럴까? 살며시 눈을 뜬 그녀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손을 뻗어 깍지 않아 그의 턱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는 짧은 수염을 만져보았다. 까칠까칠한 수염이 손가락을 찔러댔다. 아팠다. 아프다고? 희경은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수파에 누워있었다. 아니 누워있었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어...어떻게 된 거죠?”

민혁은 희경을 빤히 바라 볼 뿐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많이 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척 초췌해 보였다.

“말랐군요. 제대로 먹기는 하는 거예요?”

Page 213: [김성희]가면극

“쿡”

민혁은 몸을 일으켜 희경 옆에 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이 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군.”“.........”

또 침묵이 찾아왔다.

“언제 왔어요.”“자정 쯤.”“난 몰랐는데…….”“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더군.”

희경은 얼굴이 빨개져 말을 더듬었다.

“그....그건 환...환기 시키면서 와인 조금 마셨는데, 그냥 잠이 들었나봐요.”“소파에 앉아 잠들었기에 침대로 옮겨줄까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그냥 두었어.”

민혁은 희경의 얼굴을 기억에 새겨 놓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희경은 그의 강렬한 시선이 불편한지 몸을 꼼지락거리다 벌떡 일어섰다.

“커...커피 마실래요? 난 한 잔 마셔야겠어요.”

민혁은 주방으로 걸어가는 희경을 보며 지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참아보려고 했다. 스스로 그녀 앞에 당당해질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다는 말에 그의 결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몇 년이 걸릴지 그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망설이다가 빌라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잠에 빠진 희경을 발견했다. 그녀에게서 향긋한 와인 냄새가 났다. 그는 차가운 공기로 싸늘히 몸이 식어버린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녀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장소였다. 그녀를 그 안으로 안고 들어가 그대로 침대 위에 놓아두고 나올 자신이 없었다. 만약 그녀를 안아버리면 그는 그녀를 보내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변화 없는 그들의 관계가 계속 되고 그녀를 상처를 입게 될 터였다. 그는 그녀를 안고 소파에 누웠다. 그의 체온으로 그녀의 차가운 몸을 서서히 덥혀 갔다. 그는 그녀를 밤새 두 팔 안에 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와인이 필요한 것은 그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맑은 정신으로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의 향기, 그녀의 감촉 모두를 몸에 기억해 두고 싶었다. 그는 두 팔로 그녀를 강하게 안으며 생각했다. 그녀가 꼭 다시 그의 품 안에 안을 것이라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그에게 내밀며 그녀는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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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손이 심하게 떨릴 것만 같았다. 커피 잔을 받아들던 민혁의 손이 그녀와 살짝 스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임이 멈추었다. 커피향이 집안 곳곳에 스며들었을 때야 민혁이 커피 잔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희경은 고개 끄덕였다. 희경은 서글펐다. 그의 태도에 그와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그는 첫 만남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녀가 당황할 정도로 너무나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수빈 때문에 그가 방황할 때도 그에게서 이런 거리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이렇게도 마음이 착잡하고 서글픈 감정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인지 모른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한참 흐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떠난다고?”“이 테리로 가서 공부 좀 더 하려고요.”“몇 년이나 가 있을 생각이지?”“공부가 언제 끝날진 저도 몰라요.”“........”“공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으려고요.”“장모님의 기일에도?”

민혁의 질문에 희경이 잠시 침묵하며 식어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네. 언니들에게 부탁했어요. 제 몫까지 엄마를 자주 찾아달라고.”“돌아올 거야?”“........”“안.....돌아 올 건가?”“올 거예요. 그게 언제일지 나도 모르지만…….”“........”

희경은 시계를 보더니 그에게 힘들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출발해야겠어요.”“.........”

희경이 그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난 성진을 떠나 내 힘으로 모든 걸 새로 시작하려고 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의 길을 버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새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게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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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이 강렬한 눈빛을 내뿜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때까지 당신 옆에 누구도 없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될까?”

희경은 목에 메어왔다. 꽉 잠긴 목은 어떤 소리를 내는 것도 거부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메마르고 건조해 보였던 그의 눈빛에 촉촉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그녀의 입술에 굶주린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눌러대며 소리를 내지 못하고 목에 잠기는 그녀의 헐떡임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그의 혀는 부드럽게 입안을 탐색하며 그녀의 내부를 폭발적인 열기로 채웠다. 그녀가 그의 넓은 어깨에 매달리는 순간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안타까움이 남는지 그녀의 입술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부풀어 오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그가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지금 안는다면 당신을 보내지 못해.”

민혁은 그녀를 소중한 보물을 감싸듯 다정하게 안았다.

“당신을 붙잡고 싶은 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야. 그러나.......”

힘겹게 그녀에게서 멈을 떼어낸 그는 그녀의 얼굴 윤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지금의 난 당신에게 지나치게 부족해.”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쓰게 웃었다.

“날 혼란스럽게 하지 마. 유혹에 져서 당신을 나에게 꽁꽁 묶어놓을지 모르니까. 난 당신에게 자유를 주려는 거야. 당신에게 나보다 나은 남자가 생긴다면 미련 없이 물러서 줄게. 그러나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만족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 때까지 당신이 혼자라면…….”

민혁은 다시 강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 땐 당신은 완전한 내 것이 될 거야. 잊지 말아.”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 빠져 한참을 꼼짝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이라 인천 국제공항은 사람들 한적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친 희경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언니들을 발견했다. 희경은 한숨을 쉬며 눈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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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지?”“언니들이 올 줄 알았어.”“이런 건방지게, 놀라는 시늉을 해야 더욱 감동적이지.”“너무 감동적이라 눈물이....흑흑”“요게.”

희경의 과장된 제스처에 현경이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혜경은 어제보다 한결 밝아 보이는 희경의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도착하자마자 전화해야 해.”“알았어.”“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 난 안 믿으니까 틈나는 대로 전화해 알았지?”“넵.”

희경은 경례를 붙이며 언니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출국대기실로 들어갔다. 현경은 갑자기 놀란 비명을 지르며 희경을 불러댔지만 희경은 사라진 후였다.

“왜 그래?”

혜경이 놀라 현경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 봤어? 희경이 목에 걸려있는 거. 그 루비 펜던트 그 자식이 줬던 거 아냐?”

혜경이 빙긋 웃었다.

“언닌 봤구나.”“희경이 표정이 어제보다 생생하게 밝아진 거 모르겠어?”“하지만....”“남녀 문제는 본인들에게 맡겨둬. 우리 그저 지켜 보며 희경이의 힘이 되어주면 되는 거야.”“쳇 난 그 우유부단한 놈 싫던데. 영준이란 의사가 백 배는 낫다. 희경이도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혜경은 끊임없이 투덜대는 현경의 팔에 팔짱을 끼며 걷기 시작했다.

병원 수술실에서 나온 영준은 수술용 장갑을 벗으며 시계를 흘낏 보았다. 뒤따라 나오던 박간호사는 안타까운 듯이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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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생님과 교대하고 공항에 나가라고 했잖아요. 아휴, 이젠 완전이 늦었네.”“됐어요. 유부녀 땜에 수술 환자까지 내팽게 칠 순 없잖아요.”“어머, 희경씨와 서민혁씨 이혼한 거 아니에요? 신문에서 혼인 신고도 안하고, 이혼했다고 크게 떠들었잖아요.”

영준이 피식 웃었다.

“서류상 미혼이면 뭐합니가. 마음이 유부년데.”“네?”

어리둥절한 표정의 박간호사를 남겨두고 영준은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눈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른 하늘을 쫓고 있었다.

베네치아 메스트레 지역은 그 날 하루도 생기 있게 시작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세계 사람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어 물의 도시의 낭만을 즐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관문인 산타루치아역 근처보다 숙소나 호텔비가 비교적 싼 메스트레 지역은 저렴하게 베네치아 여행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다른 때보다 더욱 혼잡스러웠다.

“희, 오늘도 가는 거야?”“예, 지아니 아줌마!”

희경은 위층에 사는 지아니 아줌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지아니 아줌마는 희경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벌서 3년 째,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녀는 희경이 남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독수공방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고, 이별하고 다시 사랑을 했다. 젊거나 늙었거나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희경은 남자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학교에 다닐 때는 산더미처럼 공부할 거리를 싸가지고 오더니, 방학하자 하루도 빠짐없이 산마루코 광장을 찾아 건물들 스케치를 수도없이 해대고 있었다. 그녀가 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오고 있는 사실이지만 분명 희경은 남자에게 큰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아니 아줌마는 베란다를 비질하며 생각했다. 그 놈을 만나기만 하면 빗자루로 흠씬 두들겨 패주겠다고.....

버스 정거장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무척 북적거렸다. 희경은 줄을 서며 한숨을 내셨다. 그녀는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여름이 지나면 베네치아는 원래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을 따라 올라탔다. 베네치아의 교통 수단인 버스는 다른 도시와는 다른 배였다. 배는 물살을 유유히 가르고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관객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려 했지만 희경은 모른체 하며 옆좌석의 아줌마와 유창한 이태리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 다가오려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머슥해 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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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니 아줌마는 방을 사기 위해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가다 희경의 집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도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치트고 소리 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 그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흠 도둑은 아니겠군.’

그 동양인 남자는 도저히 도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 걸친 옷들은 한눈에도 무척 값비싸 보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그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당당함이 그를 도둑으로 모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누구슈?”

투명스러운 물음에 그 남자가 소리없이 몸을 돌렸다. 꽤나 잘 생긴 얼굴이었다. 여자 꽤나 눌리고 다녔겠군.

“그 집엔 지금 아무도 없는데.”“희경이 여행중인가요?”

그 남자는 지아니 아줌마가 아무리 내려고 해도 발음되지 않는 희의 이름을 정확히 소리내어 발음하고 있었다.

“희 만나러 왔수?”“예!”

지아니 아줌마는 아주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결혼했수?”

남자는 불가사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세요. 제 마음은 했다고 ale는데, 법적으로는 아닙니다.”“무슨 대답이 그러우.”

그 남자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지아니 아줌마의 말에 그저 말없는 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런 남자의 얼굴을 반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의 얼굴이 어디서 본듯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맞아, 당신 얼마 전에 신문에 나왔지. 뭐 21세기를 이끌어 갈 주목 받는 회사의 CEO라고 했던가....그런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예, 그런 인터뷰를 한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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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태리 말을 배웠수? 꽤 하는구만.”

남자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이곳으로 누구를 마중와야 했거든요.”“희 말인가.”“예.”“......”

지아니 아줌마는 시장 바구니로 남자의 등을 냅다 때리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보슈. 희는 꼭 그 곳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석양에 물드는 아드리아 해안을 감상하니까. 뭐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이라나.”

지아니 아줌마는 방가게로 향하면서 괜히 웃음이 나오며 기분이 좋아졌다. 특제 샌드위치나 만들어줄까? 아니지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을 방해하는 것은 정말 눈치코치 없는 짓이었다. 흠흠 내일 느즈막하게 만들어다 주려면 샌드위치용 빵은 내일 사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이태리에서 유일하게 가장 부드럽고 촉촉한 ?드위치용 빵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샌드위치 맛을 보기 위해 다시 베네치아에 오고 싶을 정도로 기가막힌 샌드위치를 만들어다 줄 생각이었다. 훗훗 그 덕에 희 얼굴도 보고 잘생긴 그 남자 얼굴도 또 보고......

버스가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하자 희경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무수한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대와 고전이 공존하는 활기넘치는 베네치아 골목길은 아주 매력이 넘치는 장소였다. 집집마다 다르게 채색된 테라스며 문장, 현관문은 독특한 디자인과 아름다움으로 언제나 희경의 눈길을 끌며 그녀의 스케치북을 빽빽이 채색해 갔다. 그리고 어떤 골목길을 걷더라도 항상 만나게 되는 것이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산마르코 광장이었다. 비잔틴 양식의 돔과 황급색의 현란한 벽화와 정교한 조각들로 이루어진 산마르코 대성당과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으로 장식되어있는 광장 벽돌들까지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한군데도 없었다. 그녀는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카페를 둘러보다 가장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들어갔다. 그녀는 늘 마시는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그 날 하루 스케치한 그림들을 살폈다. 열심히 그려보지만 그녀가 눈으로 본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그려넣는 일은 항상 성에 차지 않는 불만스러운 일이 되곤 했다. 그녀는 그림을 수정하다 그녀를 가리는 그림자에 인상을 찌프렸다. 관광객이 모여도 이곳은 이태리 베네치아였다. 여자가 혼자 있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합석을 거절하기 위해 고개를 들다 손에 든 스키치북을 덜어뜨리고 말았다. 석양을 등지고 있는 그 남자에게선 너무나 그리운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민혁이었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는 희경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스키치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그녀의 옆 좌석에 앉았다. 3년이라는 시간은 그에게 더욱 당당한 자신감과 함께 신중함을 선물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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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이야.”“.........”“당신은 안 보는 사이 더 마른 것 같군.”“당신은 좋아보이네요.”

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런 소리를 냈다. 3년이었다. 3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전화 한통 엽서 한통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지나가는 인사로라도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작년에 사업차 그가 로마에 왔었던 일도 알고 있었다. 신문에서 그의 기사를 읽고 그녀는 며칠 동안 가슴을 설레이며 전화기 앞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문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에도 가슴을 떨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그녀는 언니에게서 그가 로마의 사업체와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어야 했다.

“무슨 일이죠? 베네치아까지.”

민혁은 너무나도 환하게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희경은 괜히 심술이 나고 기분이 나빠졌다.

“나와 상관 없으니 말하지 않아도 되요.”“내 걸 찾으러 왔어.”“뭘 여기에 흘리고 갔나보죠?”“당신!”

그는 그녀의 몸을 획 잡아당겨 놀라 입이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점령했다. 그녀의 무릎 밑을 붙잡고 들어올려 그의 위에 올려 놓고 그는 더욱 깊게 그녀의 입술을 탐해갔다.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안을 샅샅히 훑으며 3년 동안의 공백을 채우려 했고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꽉 움켜잡고 그녀의 몸을 타고 움직이고 싶어하는 욕심을 억지로 눌러댔다.

카푸치노를 들고 오던 웨이터는 열렬히 사랑을 표현하는 연인을 보며 웃음짓고는 악단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산마르코 광장을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름답게 울렸다. 희경과 민혁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다가 숨을 쉬기 위해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는 헐떡이며 키스를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다시 그의 입술의 포로가 되어 그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민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초조한 눈빛에서 그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소을 잡혀 끌려갔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성급히 택시를 잡아 베네치아 호텔을 부탁했다. 베네치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베네치아 호텔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뜨거움에 그녀도 온몸을 타고 열기가 번져갔다. 민혁은 후하게 팁을 주고 택시에서 운하에서 호텔 계단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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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곳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아갔다. 호텔 방은 예약이 되어있는지 그를 보자 프론트에서 룸키를 내밀었다. 그는 가볍게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한발자국 떨어져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이 주는 온기를 잃어버린 그녀는 잠시 서운함과 허전함을 느꼈지만 그의 이글거리는 눈길에 다시 열기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자마자 민혁은 희경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희경의 그의 발걸음을 쫓기 위해 종종 걸음까지 쳐야 했다. 룸키로 문을 열자마자 희경은 호텔 룸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닫힌 문에 밀어붙여졌다. 그녀는 그가 몸을 덮치기 전까지 겨우 호텔 룸이 무척이나 호화롭다는 것을 얼핏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은 신혼부부를 위한 스위트 룸 같았다. 그는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그녀의 몸을 만지며 탐욕스럽게 그녀의 혀를 그의 혀로 감싸며 빨아들였다. 그리고 잠시 그녀에게 숨 쉴 틈을 주며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우리가 놓쳐버린 허니문을 시작하는 거야.”

그녀의 묵직한 가방이 바닥에 던져졌고, 그의 재킷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약간은 쉬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얼굴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마치 그녀가 그의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리움이 가득 잠긴 눈으로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그녀의 얼굴에, 목에 귀에 키스를 퍼부었다.

“내가 보고 싶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큼 당신도 나를 그리워했을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타고 내려 가슴을 감싸자 면드레스와새틴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자잘한 키스를 흩뿌렸다. 그녀의 면 드레스 끈을 양 어깨 밑으로 밀어낸 그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쇄골 위에서 불타듯 놓여있는 새빨간 루비 팬던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눈부터 눈부신 빛을 띠우며 얼굴 전체로 행복한 웃음이 번져갔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팬던트가 놓여있던 쇄골 위를 뜨겁게 태우며 속삭였다.

“당신을 원해. 지금 당장.”

그는 그녀의 면드레스의 치마자락을 올리고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문질러댔고, 그녀는 그저 신음을 내뱉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는 그녀의 팬티를 허벅지에서 무릎 밑으로 내렸다. 새하얀 팬티가 종아리를 타고 발끝으로 떨어지자 그는 그녀를 들어올려 그녀의 다리로 그의 몸을 감게 했다. 그의 바지와 면 팬티는 어느 새 그의 발 밑으로 떨어져 그의 남성은 애타게 그녀의 몸으로 파고들기를 바라며 곳꼿히 몸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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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아!”

그는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뱉으며 그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밀고들어오는 침입에 그녀 몸은 긴장으로 잠시 뻗뻗하게 굳는 듯했지만 완벽한 결합에 그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잠시 물러섰다 다시 돌진해왔다. 리드미컬한 행위가 반복적인 리듬을 탈 수록 그는 더욱 더 깊이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그녀를 문에 밀어붙이며 공기를 폐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슴을 헐떡였다.그녀의 귓가에서는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더욱 더 크게 울려왔다. 점점 그들의 움직임은 절박해지며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강렬한 쾌감이 주는 경련에 온몸을 떨었다.

그들은 문에 몸을 기댄 채 호흡이 느려질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잠시 뒤 그녀의입에서 자시도 모르게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이 새어나가고서야 그는 그녀의 몸에서 물러났다.

“괜찮아?”

그는 미안해 하며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채 아래는 홀닥 벗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은 면드레스가 허리까지 내려져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섹스에 굶주린 사람처럼 옷도 벗지 못하고 허겁지겁 정사를 벌인 꼴을 하고 있었다.

“뭐가 우습워?”“우리 모습이 우스광스럽잖아요.”

그는 피식 웃어보이고는 넥타이를 풀어 전디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다시 청혼을 하려고 양복을 갖춰입었는데 그건 잠시 뒤로 미루어야겠어.”

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희경을 향해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의 옷을 순식간에 벗겨버렸다.

“쌓인 것부터 풀어보자구.”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몸을 관능적인 손짓으로 애무해 나가기 시작했다.

희경은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은 민혁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그녀 방문 앞에서 기다리는 지아니 아줌마와 마주쳤다.

“외박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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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안녕하세요.”

희경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지아니 아줌마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민혁과 희경을 살폈다.

“활짝 핀 것이 지난 밤이 꽤 좋았나 보구만.”“아...아줌마.”

희경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며 씨익 웃고는 지아니 아줌마는 그녀의 등을 탁 쳤다.

“그래, 이렇게 외박도 하고 그래야지.”“그건 좀 곤란한데요. 전 희경이 외박하는 것은 절대 금지하려고 하거든요.”

민혁은 뻔뻔스런 웃음을 지으며 희경을 바라보았다.

“저와 함게 하는 외박만 빼고는요.”“민혁씨!”

희경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지아니 아줌마는 재미있다는 듯이 큰 소리로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민혁의 손에 뚜껑이 덮힌 접시를 내밀었다.

“내 특제 샌드위치네. 먹고 힘을 써보라고.”“옙.”

희경은 그들에게 눈을 흘겨보이고는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베네치아 운하를 곤돌라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희경과 민혁은 손을 다정하게 잡고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했다. 사공은 그들을 위해 멋지게 산타루치아 열창했다.

“떠나기 서운해?”

민혁이 감상에 젖은 희경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희경은 피식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사랑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마도 보고 싶고...... 언니들도.....”“수빈이도 당신이 보고 싶다고 전해달라더군.”

수빈이란 말에 희경의 몸이 움찔하자 민혁은 그녀를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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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인 이제야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어. 뭔지 알면 당신도 놀랄 걸. 후훗 기쁨의 집 부원장이 되었어.”“기쁨의 집이요?”“그래,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다디더니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았어. 자신이 사랑할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하나봐. 예전의 그늘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밝아졌어. 당신이 돌아오면 꼭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수빈씨가 행복해졌다니 정말 다행이에요.”“영준이란 의사놈도 당신 소식을 궁금해 한더군. 하지만 한국에 가서 단 둘이 만날 생각은 아예 하지마. 알겠어?”

인상을 쓰는 그의얼굴이 왠지 심통난 어린아이 같아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의 행복한 웃음 소리가 베네치아 운하를 타고 아름다운 야경 속으로 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