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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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ㆍ한국여성노동자회 지원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ㆍ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 그리고 선·후배 연대의 밤 2016. 11. 15. Tue18 : 30 프리스타일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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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ㆍ한국여성노동자회지원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ㆍ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그리고 선·후배 연대의 밤

2016. 11. 15. Tue18:30 프리스타일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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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

상 : YH여성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열사 김경숙

민중의례

인사말 : 최순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축사

수상자 발표 :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수상자 상 : 끝나지 않은 저항

저항과 투쟁으로 삶을 잇다: 선ㆍ후배 연대의 밤

선·후배 이야기

- 권순갑 YH노동조합 부지부장

- 권옥자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장

- 이가현 아르바이트노동조합 기획팀장

축하공연 : 우리나라

■일시 : 2016년 11월 15일 (화) 18:30

■장소 : 프리스타일 스페이스

■사회 : 최광기

프로그램

The 3rd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

03 프로그램

04 인사말

06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16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일지

22 YH 노동조합 그리고 YH 사건

23 YH사건의 의의

24 YH사건 일지

25 김경숙열사 소개

27 김경숙열사 약력

28 김경숙 열사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29 김경숙 열사가 남긴

34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0203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그리고 선·후배 연대의 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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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생각했던 꿈은 이룩할 수가 없었다.’

김경숙 열사가 쓴 을 읽다 가슴에 팍 꽂힌 귀입니다.

어려운 집안형편을 위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며 초등학교 졸업 전부터

공장에 취업한 김경숙 열사. 커다란 포부로 꿈을 안고 서울로 왔으나 8년 공장생활에

남은 것은 병든 몸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철야작업, 임금체불,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

며 타향에서 느꼈을 그 좌절의 깊이를 가늠하여 봅니다. 김경숙 열사는 그 좌절을 분노

로, 동지애로 승화시켜 YH 노동조합 투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40여년이 흘 지만 여전히‘꿈’이 좌절되는 시대입니다.

37년 전의 김경숙 열사가 느끼고 경험했던 여성노동자의 현실도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

다. 취업도 어렵고 취업을 해도 단기간의 일자리, 모욕적인 폭언, 성희롱, 저임금으로 인

간다운 삶을 꿈꾸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

한 꿈조차 실현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김경숙 열사가 좌절에 주저앉거나 체념

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좌절된 우리의 꿈을 분노로, 투쟁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습니

다.

올해는 여성노동운동상 심사 명단에 단 1건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그 1건을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심사위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숱한

어려움과 폭력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공공병원의 올바른 운 과 민주노조 사수를 위

해 860일간의 투쟁 끝에 승리하 기 때문입니다. 바로 청주시 노인전문병원노동조합입

니다.

청주시노인전문병원은 청주시가 157억원의 혈세를 들여 설립한 청주시민의 재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시노인전문병원은 공공병원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벌

최순 |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공동대표임윤옥 |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제3회‘김경숙상’수상자를 선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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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이며 이윤추구에 앞장서왔습니다. 노동조합은 병원의 공공성과 더 나은 간병서비스를

위해 병원 경 진에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와 폭력, 폐업이었습니다. 노

동조합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지요. 분회장님의‘분신시도’라는 극단적인 저

항이 있은 후에야 청주시노인전문병원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정상화되기에 이르 습니

다.

권옥자 청주시노인전문병원 분회장은 공교롭게도 김경숙 열사와 같은 1958년생입니다.

김경숙 열사와 똑 같이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입니다. 권옥자 분회장은 또 다른 김경숙인

것입니다.

최근‘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면 민주주의를 짓밞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민중의 소

박한 꿈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국가권력을 농락하는 이들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YH 노동조합의

투쟁이 짓밟혔으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수상자인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노동조합을 비롯,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이 불의한 정권을 쓸어

버리고 새 세상을 열어가는 힘이 될 것을 믿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라

는 이유로 자신의 꿈이 짓밟히지 않는 세상, 모든 민중과 여성노동자의 소박한 꿈이 이

루어지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염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GM노동조합과 여성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모

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 올립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는 더 큰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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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 충북지부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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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노인전문병원분회는 결국 파업에 돌입했다. 2013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전국공공

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충북지부 분회를 설립한 뒤 단체교섭을 진행하여 총 104개의 단체

협약 조항 중 9개만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노조는 임금동결에 합의를 하면서까지 대화로

단체교섭을 마무리 지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병원 측이 일방적으로 인원 보충 없는

간병 3교대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럴 경우 한 개의 방을 책임지던 간병사 한명이 두, 세

개의 방을 맡아서 환자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간병사들이 살인적인 노동강

도를 감당해야 하며, 곧바로 환자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의

미하는 것이었다.

노조는 간병사들에게 너무 무리한 근무조건이라는 사실을 떠나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음을 들어 강력히 반대의사를 전달했다. 그러자 병원 측은 CCTV로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해 나가면 된다는 어이없는 대안을 들고 나왔다. 충북지방노동위원회

의 공익위원들도 노조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병원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분회

는 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해 합의점을 찾으려 최선을 다했으나 모든 노력이 허사 다.

2014년 3월 29일 노조는 파업을 선언했다. 860일 간 계속되었던 투쟁의 시작이었다. 의

사 포함 전체 162명 직원 중에 조합원이 100여명이었다. 더 이상 환자들을 담보로 사리사

욕을 채우려는 병원장의 행태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분노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는 결기로 가득했다. 당장 경찰차 13대가 병원 마당을 가득 메웠다. 상황이 급변하자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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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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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 대체 인력을 투입하 고, 동원된 용역 깡패들은 몽둥이를 차고 병원을 돌아다니며 살

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서의 노숙, 그러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청주시노인전문병원은 2009년 청주시가 조례를 통해 만들고 157억원의 혈세를 들여세운

청주시민의 재산이다. 그해 효성병원에 위탁하면서‘운 자가 이득금을 사용할 수 없고 사

회로 환원’하도록 정해져있는 공공병원임을 조례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효성병원이

유효기간이 지난 의약품과 유통기한이 지난 식자재를 쓰고 병원 노동자 임금체불 및 부당

해고 사태를 일으키자 운 권을 CNC 재활병원에 넘긴다. 하지만‘전국 최고의 환자 중심

병원’과‘여성친화기업’을 만들겠다’호언장담을 했던 한수환 병원장 역시 다종다양한 불

법 편법을 동원하며 효성병원에 한 수 더 뜨는 행태를 보 다. 의료행위를 간호조무사, 간

병사에게 떠넘기고 응급상황에 대비한 야간당직도 준비하지 않았다. 구급약품, 임상검사

시약을 CNC 병원에 빼돌리고, 미신고식품업자로부터 식자재를 납품하고, 유령직원에게 월

급을 지급하고, 임금을 체불하고,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조합원을

해고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위탁업체가 바뀌면서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청주시노인전문병원의 문제는 결국 청주시의 관리감독이 전무한데서 온

결과 다. 이에 노조는 청주시의 직무유기를 시정하고 위탁병원을 교체할 것을 강력히 요

구하 다.

4월 15일 병원 측이 노동부의 중재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청주시가 시청 공

무원들과 전투경찰을 동원하여 40·50대 여성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천막 등 집

회물품을 강탈하는 만행을 저질 다. 이에 처절히 저항하며 노조는 노숙 농성을 시작하

다.

그러던 4월 30일, 노조가 청주시의 중재로 청주시청 앞 노숙농성을 자진해산하고 현장으

로 복귀한지 열흘 만에, 병원 측은 정년을 내세우며 조합원 11명에 대한 해고를 통지하

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올해 만 65세인 48년 생, 만 64세인 49년 생 등으로 청주시와 씨

앤씨병원이 청주시노인전문병원 위수탁 계약을 체결하던 2012년에 이미 만 60세를 경과

하여 근무를 해온 터라 이제 와서 60세 취업규칙을 운운하며 조합원들만 계약해지하는 것

은 명백한 부당노동행위 다. 이에 노조는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을 다짐하 고, 규탄 집회와

기자회견, 서명운동, 결의대회 등을 가열차게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한수환 병원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파괴 브로커인 김동기를 행정부원장에 앉히며 노조의

투쟁에 강경 대응하 다.

지난한 투쟁은 계속되었고 병원 측의 방해공작으로 조합원들의 이탈이 하나, 둘 늘어가기

만 했다. 분회장 권옥자는 이런 식으로 성과 없는 투쟁이 계속되는 것에 분노가 일었다. 10

월 2일 분회장은 총력투쟁을 다짐하며 조합원들 앞에서 삭발을 하고 무기한 노숙단식농성

에 돌입하 다. 조합원들은 여자로서는 최후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삭발을 하고 있는 분회

장의 모습을 보며 오열을 터트리고 안타까움에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분회장은 이를 악

물었다.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병원 측의 비아냥거림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분회장의 흔들림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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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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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에 더 강하게 뭉쳐갔다. 일주일 뒤에 있었던 시청 앞 촛불 집회에서 조합원들은‘그래

도 우리를 지지해주는 많은 시민들과 동지들이 있다’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고 큰 힘을

얻었다.

사태가 확산되자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가 실시되고 중앙노동위원회에 심판회의가 열렸

으며 보건복지부의 실사도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병원 전면 파업이 진행되고 시청 마당에

300~400명의 민주노총 연대 집회장에서는 함성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흔들림 없는 투쟁은 11월 1일 해고자 전원 복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병원측과의 단체

교섭은 결렬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찬 하루를 시작해야할 2015년 새해

아침에 분회장을 포함한 총 10명의 조합원이 또 다시 해고 통지를 받고 말았다. 안하무인

식의 한수환 병원장의 태도에 충북지방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임을 인정하고 병원 측에 시

정을 요구하 다. 그러자 어처구니없게도 한수환은 위탁운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

런데 더 큰 문제는 청주시의 태도 다. 당시 170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는 상태 는데도 다

른 운 기관을 선정하지 않고 병원을 폐원시킨 것이었다.

간병사와 심정적으로 더 가까운 환자들이라 할지라도 병원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일 수 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에 대한 악선전을 물론이고 조만간 물도 불도 끊는다는 말에 하나 둘 퇴

원 수속을 밟고야 말았다. 그래도 친한 환자 가족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절대로 퇴원을 안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병원 측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일터로 전화해서 환자를 데려

가라고 독촉을 해대니 환자를 퇴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할아버지는

가족이 없어서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했었고 오갈 데가 없으니 안 나가겠다고 끝까지 버티

고 있었지만 병원 측은 결국 밥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인간 이하의 행동에 분노한 조

합원들은 할아버지가 나가시기 전에 따뜻한 밥을 챙겨드린 후 다른 병원으로 옮기도록 도

왔다.

2015년 6월6일자로 폐업은 현실화되었고 전 조합원이 해고상태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

다. 60명의 조합원들은 노숙농성으로 폐업에 맞서 떡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어가며 희망을

잃지 않고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천막을 치는 건 불법이라 하여 다 뜯어가 버리니 그저 노

숙 농성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 투쟁에 함께 한 남성노동자나 단체 활동가들과 찬

기가 올라오는 바닥에서 잠을 청하곤 했던 분회장 권옥자는 치료사인 23세 조합원도 67세

인 조합원도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그 길바닥에서 자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어린 여성노

동자들에게는 위험천만한 노숙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내 동생 같고 내 엄마

같은 존재들이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짠하고 애처로운 내 피붙이 같은….

분신 시도에도 바로 잡히지 않는, 차디찬 현실 앞에서

김경숙상을 수상하게 된 청주노인전문병원 분회장 권옥자는 공교롭게도 김경숙 열사와 같

은 1958년생이었다. 경북 주에서 태어나 봉화에서 자랐으며 부모님이 헤어지는 바람에

위로 두 오빠와 여동생 둘과 함께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딱 중간

에 끼어있던 그이는 어머니의 집안 살림을 돕고 동생들 챙기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리

고 그 당시 누이들이 그렇듯 오빠들 학비에 보태느라 정작 자신은 초등학교까지가 최종학

력이었다. 오빠들은 자신을 보고 희생을 했다 하지만 그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권옥자의 꿈은 친구들처럼 서울에 올라가 구로공단에 취직을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고

향에 내려와 공장 얘기며 기숙사 얘기를 할 때마다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권옥자가 20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고생하는 딸이

보기 안타까워 사업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다.

하지만 권옥자의 고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업에 재능이 없었던 남편은 자꾸 빈손이 되어 나

앉기만 했다. 그래서 살길을 찾아 떠난 곳이 작은

집이 있는 사북이었고 그이는 거기서 제2의 사북사

태를 겪으며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다. 그

곳에서 5년을 거칠게 살아남으며 세상살이에 밝아

질 수밖에 없었고 성격도 활발하고 할 말 다하는

딱 부러진 아줌마가 되어갔다.

그렇게 5년이 지난 뒤 다시 새 보금자리를 찾아들

어간 곳이 청주 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공장에 들어가게 된다. 남편의 벌이가

안정적이지 않아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일이라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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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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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게 몇 개의 회사를 거친 뒤 1995년 청주에서 최고라는 얘기를 듣고 들어간 곳이

AMK 다.

늘 젊은 여성노동자를 뽑던 그 회사가 처음으로 주부사원을 모집해 권옥자도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자업체 던 AMK에는 이제 막 민주노조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 노

동조합이 있었다. 그이는 이곳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 고 2000년 자본철

수 투쟁을 거쳐 투사로 거듭난다.

AMK 투쟁은 승리로 마무리 되었지만 회사는 결국 인도네시아로 철수하고 말았다. 권옥자

는 투쟁하는 동안 나빠진 건강을 추스르며 취직할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투쟁에

지친 탓인지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우연히

국가자격증이니 이걸 따놓으면 투쟁할 일은 없겠다 싶어 공부한 게 요양보호사 자격증이었

다. 처음 실습을 나갈 때는 환자들의 똥, 오줌을 받아낼 일과 환자를 상대하며 스트레스 받

는 것만 상상하며 힘들겠다 싶었는데 전혀 반전의 상황을 경험한다. 내 말한 마디에 나에

게 의지하고 매달리며 행복해하는 노인 환자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들과 소통하며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체질에 딱 맞았다. 그렇게 실습 3일 만에 직업으로 요양보호사를 선택해

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던 곳이 청주시노인전문

병원이었다. 그때가 2010년 10월 7일이었다. 병마와 싸우는 노인들을 도우며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그곳은 어이없게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결국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오지랖 넓은 그이는 분회장으로 거듭나며 투쟁의 전선에 서

게 되었다.

2015년 12월 24일, 청주시는 그동안 공고를 통해 새로 위탁기관을 찾아 나선 끝에‘의명

의료재단’을 선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의 고용승계에 있었다. 청주시는 고용

승계를 위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거짓말로 60여명 여성노동자의 복직문제를 외면하 다.

분회장 권옥자는 죽기를 각오한 아사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물론 그걸 무서워할 인간들이

아니었다. 단식 30일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눈 하나 끔적하지 않았다. 그 사이 청주시는 법

제처에 질의를 해 고용승계의 의무가 있다는 걸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탁자 공고 시 그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합원들은 분노에 치를 떨며 겨울 찬바람

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지만 청주시는 모

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분회장은 청주시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시장은 만나주지

않았다. 그때 그런 결론을 내렸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지 않고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구나! 단식도 삭발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이는 집에 사다놓은 휘발유를 떠올렸

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자신을 활활 태워서라도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다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았다. 조합원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비 리에 결행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우리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시청 마당에서 농성이 이어지던 날 권옥자 분회장은 조합원들에게 다른 곳 상황을 알아보

라고 시킨 뒤 자신의 몸에 한말이나 되는 휘발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비명소리가 났고 조

합원들이 뛰쳐나왔다. 모두들 대성통곡하며 그러지 말라고 외쳤고 권옥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고함을 질 다. 아마도‘고용승계 보장하라!’‘청주시장 나와라’를 외

쳤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리려 달려들자 그이는 라이터를 당겼다. 다행이 휘발유에 담뿍 젖

은 라이터는 켜지지 않았고 조합원들은 대성통곡하며 달려가 그이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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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경이나 난 듯 쳐다보던 시청 직원들은 다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 자리를 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는 일말

의 측은지심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더욱 분개할 일은 분회장이 병원에 실려 간 그날

시청 직원이 찾아와 농성장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하고 갔다는 점이다.

분신 시도가 있은 뒤, 눈길도 안 주던 언론이 분회장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

도 눈에 띄게 노동자의 편에 서있었다. 그리고 2016년 5월 4일 청주시는 청주병원을 위탁

기관으로 선정하고 협약을 체결하 다. 문제는 고용승계 다. 6월 23일 청주노인전문병원

분회는 민주노총과 함께 전원 복직 총 궐기대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청주시에 있는 모든

단체와 노동조합들이 총 동원된 집회 다. 보통 때는 한두 개 있던 플래카드도 무려 15개

를 만들어 집회 장소 던 병원 입구를 뒤덮었다. 여기서 끝장을 보자는 심산이었다. 고용승

계 없이 병원이 개원하고 정상적으로 운 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 다.

마침내 찾아온 승리의 봄!

그로부터 한 달 뒤, 7월 22일 청주병원에서 교섭을 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3일에

걸친 협상 끝에 남아있는 조합원 23명 전원 복직 결정이 내려졌다. 끝내 청주시는 나오지

않았고 타결이 되는 날 청주병원은 쉽게 합의가 된 것을 비 로 해달라고 했다. 합의사항

도 문서 없이, 배석했던 연대회의 대표 김태정 목사와 서지안 시의원이 증인이 되어 양쪽

이 녹취를 하는 것으로 대신할 정도 다. 병원 측은 우선 노조간부 3명부터 복직을 시키겠

다고 했으나 분회장은 모든 조합원들이 복직되면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환자가 생기는 대로 조합원과 비조합원 그리고 일반인을 번갈아가며 투입하여 합의사

항을 이행하고 있다.

농성장을 정리하고 해단식이 있던 날, 끝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23명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시간들. 경찰들에게 목 졸리고, 용역 깡패들에게 폭력을 당하던 일들,

버스비 한 푼이 아쉬워 전전긍긍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마냥 다 이

뤘다는 승리감에 취해있을 수만은 없다. 분회장 권옥자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찢

기고 상처투성이인 노동조합을 제대로 세우는 일과 병원과의 협상으로 조직된‘병원 운

위원회’를 지켜내는 일도 중요하다. 충북시민사회단체에서 추천하는 1인도 포함되는 운

위원회는 병원의 운 을 관리 감독할 수 있다. 이로써‘공공병원의 역할을 강화’하고‘노동

자들이 행복한 병원’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해낼 것이다.

숱한 어려움과 폭력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공공병원의 올바른 운 과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860일간의 투쟁을 진행해온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가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김경

숙상’을 받게 되었다. 1979년 군부독재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투

쟁했던 YH 여성노동자들의 정신이 2016년 현재 청주시 돌봄노동자들에게로 이어져가고

있음을 확신한다. 김경숙 열사가 살아있다면 권옥자 분회장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 박민나 (‘가시철망위의 넝쿨장미’저자)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

1415

Page 9: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일지

1617

노동자의 고용보장을 위해 분회를 설립하다!

2013. 10. 20. 의료연대본부 충북지부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설립

2013. 11. 25. 청주시노인전문병원 교섭 요구 및 단체교섭 시작

전면파업 (5일)

2014. 03. 인력충원 없는 3교대 전환 일방 통보

2014. 03. 28. 최종 교섭 및 조정 결렬

2014. 03. 29. 08시 기점으로 파업 돌입, 22시 용역깡패 및 대체인력 투입

2014. 03. 31. 14시 청주시청 집회 도중 연행시도

2014. 04. 01. 현장관리자 출근저지, 개인 간병사 투입저지, 시청사 연좌농성 등

2014. 04. 02. 노동부 중재로 교섭 개최

2014. 04. 03. ‘한시적 업무복귀 선언 기자회견’개최 후 현장복귀

시청 노숙농성

2014. 04.15. 천막설치 도중 경찰 및 공무원 침탈, 노숙농성 시작

2014. 04. 21. 대전지방노동청 특별근로감독 시작, 향후 투쟁계획 발표 기자회견

농성장 해산

해고자 투쟁 및 현장투쟁, 법률투쟁

2014. 04. 30. 정년을 사유로 한 해고자 11명 발생, 쟁의대책위원회

2014. 05. 01. 김동기 행정부원장 부임, 해고자 간담회

부당해고 및 노조파괴브로커 규탄 기자회견, 노동절 집회

2014. 05. 02. 해고자 청주시청 앞 선전전 시작

2014. 05. 20.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결과 기자회견

2014. 05. 22. 병원관리소홀 흥덕 보건소 규탄집회

2014. 06. 09. 간병사 근무제 일방 변경 (격일제 → 2교대제)

2014. 06. 12. 청주시청 결의대회

2014. 07. 10. 위탁해지 촉구 기자회견, 불법사업주 엄중처벌 노동부 결의대회

노동부 청주지청장 면담

2014. 07. 21. 위탁해지 촉구 대시민 서명운동

2014. 07. 31. 보건소장 면담, 청주시노인전문병원 사태해결 촉구 결의대회

2014. 08. 21. 청주시노인전문병원 사태해결촉구 충북지노위/ 노동부 규탄 결의대회

분회장 삭발 및 단식농성

2014. 10. 02. 청주시청 총력투쟁 집회, 권옥자 분회장 삭발

2014. 10. 06. 노숙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

2014. 10. 14. 시청 촛불집회

2014. 10. 20.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

(청주시장 이승훈, 병원장 한수환, 분회장 권옥자 출석)

2014. 10. 21. 중앙노동위원회 심판회의(11명) - 부당해고 및 징계

2014. 10. 22. 보건복지부 병원 실사

Page 10: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청주시노인전문병원 투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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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9. 단식 24일차에 분회장 비롯한 조합원들이 시장실 면담요구

병원 전면파업 돌입, 시청 마당에 300~400여명 연대 대오 운집

9시 이승훈 청주시장 면담 해고자 복귀 약속/연행자 석방·농성장 해단

2014. 11. 01-02. 해고자 복직

2차 해고자 투쟁

2015. 01. 01. 정년(60세)을 사유로 분회장 포함 총 18명 해고

2015. 01. 06. 노동부 면담

2015. 01. 12.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병원 폐업에 맞서 복직투쟁을 전개하다!

2015. 01. 01. 권옥자 분회장 포함 조합원 10명 무더기 해고

2015. 02. 27. 충북지방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인정

2015. 03. 18. 한수환 병원장 위탁운 포기서 청주시 서원구 보건소에 제출

2015. 05. 07. 청주시청 앞 노숙농성 돌입

2015. 06. 06. 청주시노인전문병원 폐원. 조합원 전원 해고

2015. 12. 24. ‘의명의료재단’이 수탁기관으로 선정됨

2016. 01. 06. 분회장 아사단식농성 돌입

2016. 02. 02. 분회장 분신시도 (투쟁 675일, 천막농성 271일, 단식28일차)

2016. 02. 03. 100인 동조단식

2016. 02. 05. 농성장 행정대집행

2016. 02. 16. ‘의명의료재단’입장발표 기자회견 (고용승계 거부)

2016. 02. 17. 수탁 중단 촉구 기자회견

2016. 02. 25. 위탁해지 촉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기자회견

2016. 03. 05. 3.8여성의 날 투쟁주간 청주시노인전문병원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공개방송>

2016. 03. 17. 의명의료재단 수탁협약 포기 선언 /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기자회견

2016. 04. 19. 4차 공모 접수 마감(청주병원과 인애원복지법인 접수)

2016. 05. 04. 청주병원과 협약 체결

2016. 06. 15. 청주시청-청주병원 본 협약 체결

2016. 06. 23. 전원복직 촉구 결의대회

2016. 07. 25. 전원복직 최종합의 (조합원 23명) (455일째 청주시청 앞 천막농성)

2016. 08. 04. 청주시청 앞 농성장 해단식

Page 11: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청주시노인전문병원분회 투쟁일지

2021

Page 12: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YH사건은 60년대 이후 누적되어 온 비민주적 사회상황과 사회경제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

로 폭로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신민당사에서의 농성과 경찰의 폭력적 진압행위는 경제투쟁

선상에서 출발한 YH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시켰으며,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정국

이 경색되고 마침내는 부마 민중항쟁과 이에 이은 유신정권의 몰락이 초래되었다.

YH사건은 유신정권의 대표적 말기현상인 분배구조 왜곡과 권력과 재벌 및 자본가와의 유

착이 낳은 필연적 사건이라는 게 사회학자들의 일반적 평가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유신정

권의 민주, 민권운동과 노동자 생존투쟁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져 김 삼 총재 제명, 부

마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10.26이라는 권력의 말로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의 상징

성은 더욱 두렷해 진다.

민주노조가 강고한 단결력을 기초로 전개한 투쟁은 개별사업주에 대한 위협을 넘어 때로는

국가권력에도 타격을 가할 수 있다. YH무역 노동조합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개별 민주노

조의 투쟁이 정권의 운명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투쟁의 차원

은 비록 직장폐쇄에 항의하는 경제적 차원이었지만 그 성과는 유신체제의 몰락에 대한 커

다란 기여로 나타났다.

YH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획을 긋는다. 그것은 일제자본에 의

한 노동의 절대적 종속이 강요되고 식민지적 착취가 강행되던 그 암흑기로부터 분연히 일

어났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투쟁의 형태이든 경제적 지의향상 및 생

존권을 위한 투쟁이든 결과적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라는 시각에서 YH야말로

민주화의 한 상징인 것이다.

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YH 노동조합 그리고 YH 사건 YH사건의 의의

2223

손마디에 피멍이 들도록 열심히 일하며 회사에 큰 이익을 남게 해준 노동자들을 단지 회사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거리에 내쫓아도 괜찮다는 법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법에

보장된 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갖은 술수를 부려 노동자들을

내쫓고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직장에 찾아가는 노동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 살길을 막는 것

이 기업인의 할 일이란 말입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이처럼 마구 짓밟혀도 좋은 것입니까?

YH노동조합사 중에서

Page 13: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김 경 숙(1958. 06. 05 ~ 1979. 08. 11)

김경숙(1979년, 당시 21세)은 상무집행위원으로 의지가 강한 동료 다. 기숙사에서 농성을

할 때는 혈서를 쓰며 회사의 정상화를 요구했고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을 때

는 그의 뜨거운 가슴의 열기가 동료 노동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김경숙 열사는 광주 남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71년부터 무허가 장갑공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72년 서울로 올라온 김경숙은

양동의 제품공장과 한풍섬유, 태신산업, 이천물산 등의 공장을 전전하다 76년 8월 YH무역

에 입사했다. 그녀는 75년부터 3개월 마다 5~6만원을 모아 동생의 학비로 보내며 행상하

는 어머니를 도와 실질적인 가장노릇을 해왔다.

2425

1979. 03. 29. YH사측에서 4월말 폐업한다는 공고를 냄

1979. 04. 02. 무책임한 기업의 작태와 비인간적인 폐업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청북부지방사무소를 찾아갔으나 소득 없이 돌아옴

1979. 04. 06. 긴급대의원대회를 통해 정상조업을 위한 대책과 타업체에서의 인수 및 고용승계대책협의

1979. 04. 13. 조합원총회를 열고 농성을 시작 - 생존권과 노동권의 보장, 폐업공고 철회, 고용승계,임금청산 등을 요구

1979. 04. 17. 회사 측은 노동청 박창규 차장과 관계기관, 태릉경찰서 담당자들이 입회한 가운데 폐업공고를 철회하고 회사를 정상화시킬 것을 약속.

노동청에서도 임금체불이 없도록 노동청이 책임지겠다고 함. 이에 노동자들은 다음날부터 생산에 참여했으나 약속된 사항들은 실행되지 않음.

1979. 07. 19. 노동청과 면담했으나 약속은 상황이 바뀌어 이행될 수 없으며 해결방법도 없다고 답변함. 사장도정상화방법이없으며, 이대로나가면월급, 퇴직금을줄수없다고발뺌함.

1979. 07. 25.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30일까지 정상화 해결이 되지 않으면 조합원총회를 열기로결의함. 이에 태릉경찰에서에는 진상해명서를 배포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며 회사정상화에 대한 회의를 30일에 열겠다고 제안함.

1979. 07. 30. 회의는 성사되지 않고, 조합원총회를 열어 농성에 들어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12시까지 농성을 계속함.

1979. 08. 06.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공고를 냄

1979. 08. 07. 기숙사, 식당 폐쇄, 퇴직금, 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미수령시는 법원에 공탁한다는공고를 냄.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함.

1979. 08. 09. 노동자들은 마지막으로 마포 신민당사로 찾아감. 2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 철야농성에 들어감.

1979. 08. 10. 기동경찰대가 강제해산시킨다는 풍문이 도는 가운데 긴급결사총회 개회.YH무역을 은행관리업체로 인수할 것, 정부당국에서 장용호 회장을 소환할 것, 조속한기업정상화를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강제해산시키려할때는‘최후의한사람까지모두죽음으로맞서겠다’는결의문을채택함.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경 소위‘101호 작전’개시. 천여명의 기동경찰대가 투입되어 여성노동자들을 심한 욕설과 폭력으로 강제 연행함.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 여성노동자 백여명이 부상당함.

노동조합상무집행위원이었던김경숙시신으로발견됨.

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YH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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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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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열사 약력

1958. 06. 05. 전라도 광산군 비야면에서 아버지 김용귀와 어머니 최 자의 장녀로 출생

1965. 부친 김용귀 사망으로 어머니 행상, 경숙 가사 전담으로 국민학교 입학 못함

1966. 광주 남국민학교 입학

1971. 국교 6학년 겨울방학을 계기로 광주의 누에고치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

1973. 김경숙 서울로 상경, 양동에 있는 하청 제품공장,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며 봉제공장 미싱사로 노동함

1976. 08. 30. YH무역(주) 입사

1977. 06. YH 노동조합이 설립한 녹지야학 입학

1978. 03. YH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

1978. 07. YH 노동조합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

1978. 12. 녹지야학 졸업

1979. 01. 동일교회에서 실시한 사회과학 공부 시작

1979. 03. 30. YH무역(주) 일방적 폐업공고 발표로 YH 사건 시발

1979. 04. 13. YH노조 폐업철회 공장검거 농성. 5일 동안(폐업 1차 철회함)

김경숙 동지 후생부 책임담당으로 활약

1979. 05. YH노동조합 조직부 차장으로 피선

1979. 07. 25. 회사 정상화를 위한 노조대의원 대회 때‘회사 정상화 추진위원 56명’구성

김경숙 위원으로 활약

1979. 07. 30. 회사 정상화를 위한 노동조합원 총회의 날 김경숙은 자신의 머리띠에‘단결, 투쟁’이라는 혈서를

1979. 08. 08. 노조 조합원 신민당사 진입 직전날 노조조합원 편지쓰는 시간에 김경숙은 정부고위층에 보내는 탄원서작성 (사건 발생되자 이를 소유하고 있던 김정열 조합원이 소각시켜 버렸음)

1979. 08. 09.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

1979. 08. 10. 신민당사에서 YH노동조합 종결대회 준비 임원회의 때 단호한 결사 표명

1979. 08. 11. 새벽2시 2천여명의 경찰이‘101호작전’에 의해 신민당사에 난입 강제 해산시키는과정에서 김경숙 열사 사망

2008. 03. 19. 공권력 탄압에 의한 타살로 밝혀짐

진실화해위원회는‘김경숙씨는 손등에 직경 4cm의 파이프 같은 둥근 관에 의한 상처를 입었고, 후두 정부를 모서리 진 물체로 가격당해 숨졌다’고 밝혔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기록 - 서울시의 시민당사 주변 항공사진, 국가기록원의 청와대의전일지 등 자료를 분석 및 재조사한 결과 당시 경찰 주장과 달리 시신에는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으며 추락현장에 상처를 야기할 특정한 물체가 없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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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사에 들어가기 직전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던 중에 고향의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전략- 내가거주하고있는이곳은굉장히큰회사랍니다. 그런데몇년전장용호회장이미국으로돈을외화도피시켜서저희근로자들의생활이 더욱 어려워졌어요. 저희 회사는 외국 수출품으로 인하여 대통령상까지 받게됐는데 돈 많은 회장이나 사장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저희 근로자들을 버리고 도망갔어요. 그런데현재사용주사장은도저히일을할수없다고폐업공고까지붙이게되었어요.

그렇지만저희힘이약한근로자들은힘을합하여단결하여투쟁하고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저희들의 힘이 강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위로하며 웃으면서 기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저희의 힘이 강하여 회사의 사장은수단과방법을다활용하여여러가지일을꾸 지모르니너무염려하시지말고내편지아니면믿지마시고어떠한일이있다고하여도절대믿지마십시오.

우리가힘을합치면우리의문제는곧해결된답니다. 여름의 변덕이 심한 날씨에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그 모습은 멀리 떨어졌다고 잊지는않고기억하고있습니다.

어머니, 이곳에서사직하고다른데취직하려고하여도계속적인물가상승으로인하여 판매되는 옷들이 팔리지 않아 실업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어요. 직장을 구할수도없는실정이예요. 또한이곳에일하는나이어린여러근로자들을위하여끝까지 단결하여 저희들은 꼭 승리하고 말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제 할 일은 제가알아서 다 할 겁니다. 준곤이는 끝까지 누나의 힘을 버리지 않고 도와주겠습니다.이회사문제가해결되면어머님다시찾아뵐께요.

사장이나미국에있는장용호처럼돈많은사람들은자기만잘살면돈없는자들을마름대로하나보지요. 그렇지만돈없는자들은착한마음을지니고서우리들의처지를기억하여성실하고정의롭게사는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안환경관계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다가 나이 8세가되던해아버지는갑작스런병환으로세상을떠나시게되었다.

우리집의주인이신아버지를잃었기때문에어머니는당장날품팔이를하면서생계를 이어야만 하셨다. 없는 가정에서 어렵게 어머니의 수고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되었다. 졸업하기직전겨울방학때부터공장에취직을하 을때돈에구애를받던나 자신은 이 가난한 우리 가정이 잘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되겠다고마음을굳게먹었다. 내가배우지못한공부를동생에게가르쳐서동생만은성공할수있도록하는것이나의간절한소원이었다. 그리하여고향을등지고타향에발을붙이게된것이다. 맨처음에는커다란포부로꿈을안고서울로왔으나와서보니별것이아니었다. 고향에서생각했던꿈은이룩할수가없었다.

이곳에서 내 힘닿는 데까지 힘써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여말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피곤하다보니까끊임없이코피가나는것이다. 나의몸은더욱약해지고얼굴은창백해졌다.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약 3개월치를 받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풀빵5원짜리30원어치로 취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았다. 하청공장에서는작업관계로일요일이없었다. 그리하여어쩔수없는경 부실로인해여러차례회사를옮기게되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안에서 여러 형태의 억압을받으며허리한번제대로펴지못하고살아야하는것이안타깝기만하다.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 생활하는 나 자신을볼 때 남는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올바른삶을살리라다짐한다.

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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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열사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김경숙 열사가 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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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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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투쟁과 故김경숙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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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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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는 YH 고 김경숙 열사의 넋과 뜻을 기리기 위해 YH 동우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답게 살고자 동지들과 하나 되

어 자본과 독재에 항거했던 정신. 다른 이들과 함께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려 노력했던

김경숙 열사의 삶과 국가폭력에 무참히 짓밟힌 죽음의 의미를 후대에 전하며 이 땅의

민중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길에 함께합니다.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사무국 : 한국여성노동자회

■ 연락처 : 02-325-6822

김경숙상 후원■ 신한은행 100-031-031093 한국여성노동자회

2000-2008. YH동우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중심이 되어 해마다 묘소참배 진행

2008. 07. 17. 고 YH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준비모임

2008. 08. 11. 고 YH김경숙열사 29주기 추모제 진행

2009. 09. 21. 고 YH김경숙열사 30주기 추모제

- 심포지움 :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 화시사회 : ‘꽃다운’

- 기념식 : 고 김경숙열사 30주기 기념식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발족

2010-2013.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중심이 되어 해마다 추모

제 진행

2014.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제정

2014. 08. 11. 김경숙열사 35주기 추모제 진행

2014. 09. 24. 제1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 진행

- 수상자 : 전국여성노동조합 88CC분회

2015. 08. 11. 김경숙열사 36주기 추모제 진행

2015. 09. 21. 제2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식 진행

- 수상자 : 김미숙 직지농협

2016. 08. 11. 김경숙열사 37주기 추모제 진행

1980. 05. 17. 김경숙열사 1주기 추모행사를 새문안 교회 지하실에서 비 리에 가짐.

1981. YH 동료들이 김경숙열사 2주기 추모제를 가짐.

1982. YH 동료들이 김경숙열사 3주기 추모제를 가짐.

1983. 김경숙 추모기도회를 기독교회관에서 가질 계획이었으나 원천봉쇄로 인

해 가족들만 참여하는 기도회를 가짐.

1984. ‘YH노동조합사’출판기념회 및 추모예배를 제일교회에서 가질 계획이었

으나, 원천봉쇄 됨.

1985. 김경숙열사 추모예배를 기독교회관에서 가짐.

1986. 김경숙열사 7주기 추모대회를 성문밖교회에서 가질 계획이었으나 원천

봉쇄 됨.

1987. 08. 30. 김경숙열사 추모식 및 민주화를 위한 노동자 전진대회 개최 함.

1988. 08. 21. 김경숙열사 9주기 추모기념 여성노동자 전진대회 개최 함

1989. 09. 03. 김경숙열사 10주기 추모기념 여성노동자 웅변대회 개최 함.

1989. 김경숙열사 묘비건립위원회가 기금을 모아 10주기 추모비 마련 함

1990-1998.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와 YH동우회가 중심이 되어 해마다 묘소참배

를 진행함.

1999. 08. 29. 김경숙열사 20주기 추모제를 전국여성노동조합,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

회, YH동우회 공동으로 개최함.

Page 19: 제3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수상자 : 청주시 노인전문병원 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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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한국여성노동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