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인생, 생각보다 길다’는 대사‥ 한의사가 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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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제151호 22 문화·연예 사고로 성대를 다쳐 몸짓과 눈빛만으 로 의사를 표현하던 ‘순천댁’이 한 소녀 를 바라보며 목을 쥐어짜듯 힘겹게 말 을 이어간다. “아무도‥ 안 구해줘…. 니가‥ 너 를‥ 구해야 돼…. 인생은‥ 니 생각보 다‥ 길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외딴 섬에 갇힌 소녀에게 이 말 한마디는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몰아치 던 밤, 외딴 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 만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과, 범 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던 세진의 실 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형사 ‘현수’, 그리고 세진을 마 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의 ‘보이지 않 는 연대’를 담아낸 작품이다.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서로 의 상처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배우 이정은은 ‘무언의 목 격자’ 순천댁으로 분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세진 역을 연기한 배우 노정의가 그 대목에서 “선배님을 바라만봐도 품에 꼭 안기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연기 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 갔다”고 말할 정도로 이정은의 연기는 압도적이었 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이 세 진을 위해 한 음절씩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 하게 만든다. “사실 위험 부담이 좀 있었어요. 어 떤 소리가 나느냐에 따라 신뢰가 떨어 질 수도 있거든요. 원래 저는 한 마디 정도는 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그 대사들의 ‘가치’를 꼭 영상 으로 구현하고 싶어하셨어요. 목소리 가 안 나오는 사람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며 언어로 정확히 전달했을 때 오 는 울림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 ‘옥자’에서 옥자 목소리 역을 맡 기 전 하루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보 며 연구했던 것처럼 이정은은 이번에 도 각종 의료 다큐멘터리를 돌려보며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 를 공부했다. “제가 본 다큐멘터리는 주로 기관삽 입으로 목소리를 잃으신 분들이었는데 요. 극 중 순천댁은 농약을 마시고 목이 타들어간 상태라 좀 달랐어요. 다른 상 상이 필요했죠. 사실 목소리가 한 마디 도 안 나오는 상태였는지도 몰라요. 하 지만 어렵게 내는 파열음 속에서 나오는 순천댁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최대한 감정을 유지한 상태로 말하려 했어요.” 원래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이정은은 연극을 하면서 성대 를 다쳐 오랫동안 성대결절을 앓았다. 목소리가 생명인 배우에게 성대결절로 생긴 ‘탁성’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 히 정갈하게 대사를 할 때는 이런 목소 리가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색 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이정은의 목소 리는 오히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 가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봉준호 감독님이 고운 소리보다 마 찰음이 갖는 질감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좋다는 소리 는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역을 맡을 때 과연 도움이 될까 아 니면 마이너스가 될까 종종 고민을 하 곤 합니다.” 2009년 영화 ‘마더’에 이정 은을 단역으로 캐스팅했던 봉준호 감 독은 2017년 넷플릭스 영화 ‘옥자’를 준비할 때 이정은이 출연했던 뮤지컬 ‘빨래’를 떠올리고, 이정은을 옥자의 목 소리 역으로 캐스팅했다. 이정은의 완 벽한 돼지 소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봉 감독은 옥자 시사회 직후 “재밌고 이상 한 영화를 해보자”며 세 번째 러브콜을 보냈다. 그게 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 상을 받은 ‘기생충’이다. “인생이 생각보다 길다” “자기가 자 기를 구해야 한다”는 순천댁의 대사는 사실 이정은에게도 지분이 있다. 이정 은이 10여년 전, 건강 악화로 몸과 마음 이 피폐해졌을 때 “인생은 정말 길다” “나아질 수 있다”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위로를 건네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 있었다. “제가 다니던 한의원 선생님께서 그 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건강을 잃 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보다 나이도 어리신 선생님께서 인생은 길 다며 충분히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위로를 해주셨어요.” 다시는 공연을 못할 수도 있다는 절 망감이 컸던 그에게 한의원 의사의 조 언은 큰 힘이 됐다. ‘자기가 자기를 구 제해야 한다’는 말에 이정은은 일주일 에 3번씩 병원을 다니며 스스로 일어나 고자 애썼다. 이때부터 누구에게 기댈 생각은 버렸다. 결혼도 안 한 그가 병원 에 혼자 가는 것은 숙명. 이정은은 이를 악물고 병마와 싸웠다. “아무도 구해주 지 않는다. 네가 네 자신을 구해야 된 다”는 순천댁의 묵직한 대사는 이미 이 때부터 이정은을 휘감고 있었다. “병이 나아지니 정신도 맑아지더라고 요. 그동안 왜 누구에게 기댈 생각만 했 을까. ‘자기가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비로소 실감이 났어요. 이때부터 ‘나는 왜 돌봐줄 사람이 없지’ 라고 신세 한탄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에게 기댈 생각 말고 스스로 일어날 각오부터 하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도움 을 주고 싶어도, 본인에게 일어날 의지 가 없으면 도움을 줄 수가 없거든요.” 이정은이 ‘내가 죽던 날’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든 건 드라마 지난해 ‘동백꽃 필 무렵’ 촬영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정은은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 하는 역할이라 고민이 좀 됐지만 혜수 씨가 캐스팅 됐다는 말에 바로 하겠다고 했다”며 “혜수 씨와 함께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혜수란 배우를 ‘여배우’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그냥 ‘원톱’으로 나와도 되는 배우로, 그런 분이 참여하 면 힘을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 끝에 있는 경계의 인물을 내가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기할 때 혜수 씨 표정을 보면서 제가 감동을 받는 순간이 많았어요. 나 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죠. 친구 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런 점들이 너 무 큰 파동으로 다가왔어요.” 이정은과 김혜수가 손꼽는 영화 속 명장면은 영화 후반, 순천댁과 현수(김 혜수 분)가 부둣가에서 마주치는 장면 이다. 세진의 행방을 추적하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현수는 차를 끌고 순천댁이 있는 외딴 섬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다시 조우한 두 사람. 실제로 몇 마디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리허설이었는데 제가 노동을 마치 고 리어커를 끌고 가고 있었어요. 그때 까지는 울지 않았어요. 그때 혜수 씨가 도착했는데 눈빛이 저를 탐문하러 온 눈이 아니더라고요. 순간 제 마음이 들 킨 것처럼 느껴졌죠.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충돌하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둘 다 그 신이 주는 의미가 뭔지 잘 알 고 있으니 격한 감정이 생겼어요. 그렇 게 혜수 씨와 손을 맞잡고 울었죠. 그 때 감독님이 ‘그만하시고 작품 찍읍시 다’라고 하셔서 원위치로 돌아갔어요. (웃음)” 두 사람이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2000년대 초반 연극 ‘타임 플라이즈’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처 음 알게 됐다. 당시 이정은이 출연하던 ‘타임 플라 이즈’에 김혜수의 지인이 출연했고, 어 느날 그 지인을 보러 김혜수가 연습장 을 방문했다. 그때 김혜수는 자신이 외국에서 모았 던 각종 소품과 의상들을 연극팀에 기증 했다. 이후에도 김혜수는 뮤지컬 ‘빨래’ 등 이정은이 출연한 작품 현장을 종종 찾 아와, 다른 배우들을 추천해주기도 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인재등용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라 고나 할까요? 영화만큼 연극도 좋아하 는 것 같고. 어느새부턴가 나이가 들수 록 얼굴이 점점 더 좋아지더라고요. 이 번에는 정말 꽃을 피운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개인적인 얘기는 거 의 못해봤는데요. 그런데 알겠더라고 요. 말로 하지 않아도 얼마나 연기를 심 도있게 생각하고, 영화 작업을 존중하 고, 동료 배우를 사랑하는지를 요.” 이정은은 “말을 못하는 역할이라 감 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런 김혜수 같은 멋진 동료들 과 연기하면서 완화된 것 같다”며 “이 번 영화를 통해 좋은 또래 배우들을 만 났고, 좋은 후배(노정의)가 하나 생겼 고, 박지완 감독의 데뷔작을 함께 해서 더욱 좋았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평소 동경하는 배 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건 정말 재미있 는 일이죠. 그럴 때면 뭔가 지나갔던 제 인생이 인정받고 보상받는 느낌이 들 어요. 누군가 ‘잘 살았어 친구야’ 이렇 게 위로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연기의 달인’이라 불러도 손 색이 없을 그에게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일각에선 ‘이정은은 평범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거의 없다’ 며 벌써부터 선입견을 갖고 그의 연기 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평범한 연기라는 건 사실 없습니다. 어떤 평범한 것도 없어요. ‘기생충’ 전 에 나왔던 드라마에서는 ‘재봉틀 트는 아줌마는 누구니?’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제가 출연한 줄도 몰 랐어요. 그러다가 눈에 띄는 배우가 됐 죠. 일전에 어떤 감독님께서 ‘연기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편 안한 느낌을 주는 배우가 되라는 뜻이 었어요.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작품 속 에 더 들어가라는 얘기죠.” 이정은은 “김혜수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거나, 대사없이 연기한 이정은 이 궁금하거나, 노정의의 파릇파릇한 얼굴이 궁금하시다면 산책로를 바꿔 잠깐 극장에 들러달라”며 “외롭거나 조금 지쳐있는 분들에게 분명 힘이 되 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광형 기자 [email protected] 신간 서적 숭례문은 왜 국보 1호일까. 한 시대 의 정점에서 탄생한 국보. 수많은 역사의 진실과 비밀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주는 책이 나 왔다. 저자는 다수의 역사서와 고문헌을 집약하여 간판급 국보 47점을 둘러싼 숨겨진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놓는 다. 국보가 제작됐던 당시의 뒷이야 기부터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 사라질 뻔한 아찔한 수난사, 무심코 흘려보 낸 국보 속 한·중·일 문명 교류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종횡무진하며 상 세히 풀어낸 역사적 현장과 함께 국보 의 진면목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도대체 약사 삼촌이 (왜) 이런 끔찍 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책 은 카페시우스를 중심으로 아우슈비 츠에서 벌어진 만행과 종전 뒤 전범재 판의 문제점을 다뤘다. 그는 독가스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생체실험의 조수 였다. 심지어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시 체 더미에서 뽑은 금니를 가방에 가득 싣고 도망친 장본인이었다. 저자는 남 편이자 작가인 제럴드 포즈너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전범 자들의 행적을 추적해왔다. 특히 카페 시우스는 평범한 소시민을 자처했다 는 점에서 놀랍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 황금기로 불 린다. 17세기 에도(도쿄), 오사카, 교 토 같은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급증하 고 경제와 문화, 학문이 꽃피웠다. 하 지만 일본 국민이 처한 실상은 달랐다. 지방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과 잦은 자 연재해로 고통받았다. 책은 일본의 4 세기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아우 르는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시리즈 저작 중 두 번째 출간물이다. 지난해 말 선보였던 ‘일본인이야기 1’ 에서 16세기 일본사를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봤다면 이번에 는 에도시대를 살던 백성의 삶에 대해 심층 탐구한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 약은 많은 것을 바꿨다. 인류의 평 균수명을 수십 년 늘렸고, 고령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여성의 사회 적·전문적 선택권을 확장했고, 우리 의 인생관, 법적 태도, 국제관계를 바 꿨다. 미국화학회가 최고의 과학저술 에 수여하는 메달과 미국국립과학·의 학·공학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커뮤니 케이션상을 받은 토머스 헤이거가 쓴 ‘텐 드럭스’에서는 모르핀, 비아그라, 피임약 등 약의 탄생과 진화, 그 약으 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두루 담 았다.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북트리거 펴냄 388쪽 17,000원 미래의 집은 단순히 사물이 인터넷 에 연결되거나 연결된 기기들을 원격 으로 명령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측한다. 스스로 알아서 사용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기 기를 조절해 줄 것이라며 이를 ‘퓨처 홈’이라 부른다. 퓨처홈은 어떤 모습일지 5대 트렌 드와 8가지 유형의 사고방식을 사례 를 통해 소개하고, 비즈니스 전략 및 핵심 역량도 제시한다. 새로운 시장 이 만드는 엄청난 규모의 비즈니스 기 회를 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파는사람들 제퍼슨 왕·조지 나치·보리스 마우러·아몰 파드케 지음 미래의창 펴냄 256쪽 16,000원 일본인 이야기2 김시덕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452쪽 20,000원 텐 드럭스 토머스 헤이거 지음 동아시아 펴냄 380쪽 17,000원 과거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바라본 포 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 금융 변화 를 살핀 도서가 출간됐다. 1부 ‘전쟁과 금융’, 2부 ‘글로벌 경제와 금융’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워털루 전투, 1·2 차 세계대전 등 7개 전쟁이 금융산업 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살펴본다. 전 쟁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세금만 으로는 전비를 충당할 수 없다. 화폐 발행·국내외 차입이 필요하고 필연적 으로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이 개입한 다. 2부에서는 근대 글로벌 경제와 금 융의 역할 등을 살펴본다. 저자는 역 사적으로, 위기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낳아왔다고 말한다. 넥스트 넷플릭스 임석봉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280쪽 16,800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368쪽 17,000원 “’인생, 생각보다 길다’는 대사‥ 한의사가 해준 말” 영화 ‘내가 죽던 날’서 목소리 잃은 ‘순천댁’으로 김혜수와 ‘인생 연기’ 외딴 섬 절벽 끝에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그곳으로 향한 형사 ‘현수’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 ‘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연대’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 상처·고통 마주하며 구원에 이르러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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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22 “’인생, 생각보다 길다’는 대사‥ 한의사가 해준 말”pdf.meconomynews.com/151/15122.pdf · 2020. 12. 10. · 22 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제151호 문화·연예

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제151호22 문화·연예

사고로 성대를 다쳐 몸짓과 눈빛만으

로 의사를 표현하던 ‘순천댁’이 한 소녀

를 바라보며 목을 쥐어짜듯 힘겹게 말

을 이어간다.

“아무도‥ 안 구해줘…. 니가‥ 너

를‥ 구해야 돼…. 인생은‥ 니 생각보

다‥ 길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외딴 섬에

갇힌 소녀에게 이 말 한마디는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몰아치

던 밤, 외딴 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

만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과, 범

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던 세진의 실

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형사 ‘현수’, 그리고 세진을 마

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의 ‘보이지 않

는 연대’를 담아낸 작품이다.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서로

의 상처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배우 이정은은 ‘무언의 목

격자’ 순천댁으로 분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세진 역을 연기한 배우 노정의가 그

대목에서 “선배님을 바라만봐도 품에

꼭 안기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연기

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 갔다”고 말할

정도로 이정은의 연기는 압도적이었

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이 세

진을 위해 한 음절씩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

하게 만든다.

“사실 위험 부담이 좀 있었어요. 어

떤 소리가 나느냐에 따라 신뢰가 떨어

질 수도 있거든요. 원래 저는 한 마디

정도는 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그 대사들의 ‘가치’를 꼭 영상

으로 구현하고 싶어하셨어요. 목소리

가 안 나오는 사람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며 언어로 정확히 전달했을 때 오

는 울림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 ‘옥자’에서 옥자 목소리 역을 맡

기 전 하루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보

며 연구했던 것처럼 이정은은 이번에

도 각종 의료 다큐멘터리를 돌려보며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

를 공부했다.

“제가 본 다큐멘터리는 주로 기관삽

입으로 목소리를 잃으신 분들이었는데

요. 극 중 순천댁은 농약을 마시고 목이

타들어간 상태라 좀 달랐어요. 다른 상

상이 필요했죠. 사실 목소리가 한 마디

도 안 나오는 상태였는지도 몰라요. 하

지만 어렵게 내는 파열음 속에서 나오는

순천댁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최대한

감정을 유지한 상태로 말하려 했어요.”

원래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졌던 이정은은 연극을 하면서 성대

를 다쳐 오랫동안 성대결절을 앓았다.

목소리가 생명인 배우에게 성대결절로

생긴 ‘탁성’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

히 정갈하게 대사를 할 때는 이런 목소

리가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색

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이정은의 목소

리는 오히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

가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봉준호 감독님이 고운 소리보다 마

찰음이 갖는 질감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좋다는 소리

는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역을 맡을 때 과연 도움이 될까 아

니면 마이너스가 될까 종종 고민을 하

곤 합니다.” 2009년 영화 ‘마더’에 이정

은을 단역으로 캐스팅했던 봉준호 감

독은 2017년 넷플릭스 영화 ‘옥자’를

준비할 때 이정은이 출연했던 뮤지컬

‘빨래’를 떠올리고, 이정은을 옥자의 목

소리 역으로 캐스팅했다. 이정은의 완

벽한 돼지 소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봉

감독은 옥자 시사회 직후 “재밌고 이상

한 영화를 해보자”며 세 번째 러브콜을

보냈다. 그게 바로 칸영화제 황금종려

상을 받은 ‘기생충’이다.

“인생이 생각보다 길다” “자기가 자

기를 구해야 한다”는 순천댁의 대사는

사실 이정은에게도 지분이 있다. 이정

은이 10여년 전, 건강 악화로 몸과 마음

이 피폐해졌을 때 “인생은 정말 길다”

“나아질 수 있다”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위로를 건네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 있었다.

“제가 다니던 한의원 선생님께서 그

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건강을 잃

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보다

나이도 어리신 선생님께서 인생은 길

다며 충분히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위로를 해주셨어요.”

다시는 공연을 못할 수도 있다는 절

망감이 컸던 그에게 한의원 의사의 조

언은 큰 힘이 됐다. ‘자기가 자기를 구

제해야 한다’는 말에 이정은은 일주일

에 3번씩 병원을 다니며 스스로 일어나

고자 애썼다. 이때부터 누구에게 기댈

생각은 버렸다. 결혼도 안 한 그가 병원

에 혼자 가는 것은 숙명. 이정은은 이를

악물고 병마와 싸웠다. “아무도 구해주

지 않는다. 네가 네 자신을 구해야 된

다”는 순천댁의 묵직한 대사는 이미 이

때부터 이정은을 휘감고 있었다.

“병이 나아지니 정신도 맑아지더라고

요. 그동안 왜 누구에게 기댈 생각만 했

을까. ‘자기가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비로소 실감이 났어요.

이때부터 ‘나는 왜 돌봐줄 사람이 없지’

라고 신세 한탄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에게 기댈 생각 말고 스스로 일어날

각오부터 하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도움

을 주고 싶어도, 본인에게 일어날 의지

가 없으면 도움을 줄 수가 없거든요.”

이정은이 ‘내가 죽던 날’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든 건 드라마 지난해 ‘동백꽃

필 무렵’ 촬영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정은은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

하는 역할이라 고민이 좀 됐지만 혜수

씨가 캐스팅 됐다는 말에 바로 하겠다고

했다”며 “혜수 씨와 함께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혜수란 배우를 ‘여배우’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그냥 ‘원톱’으로

나와도 되는 배우로, 그런 분이 참여하

면 힘을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

끝에 있는 경계의 인물을 내가 맡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기할 때 혜수 씨 표정을 보면서

제가 감동을 받는 순간이 많았어요. 나

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죠. 친구

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그런 점들이 너

무 큰 파동으로 다가왔어요.”

이정은과 김혜수가 손꼽는 영화 속

명장면은 영화 후반, 순천댁과 현수(김

혜수 분)가 부둣가에서 마주치는 장면

이다. 세진의 행방을 추적하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현수는 차를 끌고

순천댁이 있는 외딴 섬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다시 조우한 두 사람. 실제로 몇

마디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리허설이었는데 제가 노동을 마치

고 리어커를 끌고 가고 있었어요. 그때

까지는 울지 않았어요. 그때 혜수 씨가

도착했는데 눈빛이 저를 탐문하러 온

눈이 아니더라고요. 순간 제 마음이 들

킨 것처럼 느껴졌죠.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충돌하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둘 다 그 신이 주는 의미가 뭔지 잘 알

고 있으니 격한 감정이 생겼어요. 그렇

게 혜수 씨와 손을 맞잡고 울었죠. 그

때 감독님이 ‘그만하시고 작품 찍읍시

다’라고 하셔서 원위치로 돌아갔어요.

(웃음)”

두 사람이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2000년대 초반 연극 ‘타임

플라이즈’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처

음 알게 됐다.

당시 이정은이 출연하던 ‘타임 플라

이즈’에 김혜수의 지인이 출연했고, 어

느날 그 지인을 보러 김혜수가 연습장

을 방문했다.

그때 김혜수는 자신이 외국에서 모았

던 각종 소품과 의상들을 연극팀에 기증

했다. 이후에도 김혜수는 뮤지컬 ‘빨래’

등 이정은이 출연한 작품 현장을 종종 찾

아와, 다른 배우들을 추천해주기도 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인재등용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라

고나 할까요? 영화만큼 연극도 좋아하

는 것 같고. 어느새부턴가 나이가 들수

록 얼굴이 점점 더 좋아지더라고요. 이

번에는 정말 꽃을 피운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개인적인 얘기는 거

의 못해봤는데요. 그런데 알겠더라고

요. 말로 하지 않아도 얼마나 연기를 심

도있게 생각하고, 영화 작업을 존중하

고, 동료 배우를 사랑하는지를 요.”

이정은은 “말을 못하는 역할이라 감

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런 김혜수 같은 멋진 동료들

과 연기하면서 완화된 것 같다”며 “이

번 영화를 통해 좋은 또래 배우들을 만

났고, 좋은 후배(노정의)가 하나 생겼

고, 박지완 감독의 데뷔작을 함께 해서

더욱 좋았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평소 동경하는 배

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건 정말 재미있

는 일이죠. 그럴 때면 뭔가 지나갔던 제

인생이 인정받고 보상받는 느낌이 들

어요. 누군가 ‘잘 살았어 친구야’ 이렇

게 위로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연기의 달인’이라 불러도 손

색이 없을 그에게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일각에선 ‘이정은은

평범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거의 없다’

며 벌써부터 선입견을 갖고 그의 연기

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평범한 연기라는 건 사실 없습니다.

어떤 평범한 것도 없어요. ‘기생충’ 전

에 나왔던 드라마에서는 ‘재봉틀 트는

아줌마는 누구니?’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제가 출연한 줄도 몰

랐어요. 그러다가 눈에 띄는 배우가 됐

죠. 일전에 어떤 감독님께서 ‘연기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편

안한 느낌을 주는 배우가 되라는 뜻이

었어요.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작품 속

에 더 들어가라는 얘기죠.”

이정은은 “김혜수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거나, 대사없이 연기한 이정은

이 궁금하거나, 노정의의 파릇파릇한

얼굴이 궁금하시다면 산책로를 바꿔

잠깐 극장에 들러달라”며 “외롭거나

조금 지쳐있는 분들에게 분명 힘이 되

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광형 기자 [email protected]

신간 서적

숭례문은 왜 국보 1호일까. 한 시대

의 정점에서 탄생한 국보.

수많은 역사의 진실과 비밀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주는 책이 나

왔다.

저자는 다수의 역사서와 고문헌을

집약하여 간판급 국보 47점을 둘러싼

숨겨진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놓는

다. 국보가 제작됐던 당시의 뒷이야

기부터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 사라질

뻔한 아찔한 수난사, 무심코 흘려보

낸 국보 속 한·중·일 문명 교류사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종횡무진하며 상

세히 풀어낸 역사적 현장과 함께 국보

의 진면목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도대체 약사 삼촌이 (왜) 이런 끔찍

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책

은 카페시우스를 중심으로 아우슈비

츠에서 벌어진 만행과 종전 뒤 전범재

판의 문제점을 다뤘다. 그는 독가스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생체실험의 조수

였다. 심지어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시

체 더미에서 뽑은 금니를 가방에 가득

싣고 도망친 장본인이었다. 저자는 남

편이자 작가인 제럴드 포즈너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한 전범

자들의 행적을 추적해왔다. 특히 카페

시우스는 평범한 소시민을 자처했다

는 점에서 놀랍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 황금기로 불

린다. 17세기 에도(도쿄), 오사카, 교

토 같은 대도시에서는 인구가 급증하

고 경제와 문화, 학문이 꽃피웠다. 하

지만 일본 국민이 처한 실상은 달랐다.

지방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과 잦은 자

연재해로 고통받았다. 책은 일본의 4

세기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아우

르는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시리즈 저작 중 두 번째 출간물이다.

지난해 말 선보였던 ‘일본인이야기 1’

에서 16세기 일본사를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봤다면 이번에

는 에도시대를 살던 백성의 삶에 대해

심층 탐구한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

약은 많은 것을 바꿨다. 인류의 평

균수명을 수십 년 늘렸고, 고령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여성의 사회

적·전문적 선택권을 확장했고, 우리

의 인생관, 법적 태도, 국제관계를 바

꿨다. 미국화학회가 최고의 과학저술

에 수여하는 메달과 미국국립과학·의

학·공학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커뮤니

케이션상을 받은 토머스 헤이거가 쓴

‘텐 드럭스’에서는 모르핀, 비아그라,

피임약 등 약의 탄생과 진화, 그 약으

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를 두루 담

았다.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북트리거 펴냄

388쪽 17,000원

미래의 집은 단순히 사물이 인터넷

에 연결되거나 연결된 기기들을 원격

으로 명령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측한다. 스스로

알아서 사용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기

기를 조절해 줄 것이라며 이를 ‘퓨처

홈’이라 부른다.

퓨처홈은 어떤 모습일지 5대 트렌

드와 8가지 유형의 사고방식을 사례

를 통해 소개하고, 비즈니스 전략 및

핵심 역량도 제시한다. 새로운 시장

이 만드는 엄청난 규모의 비즈니스 기

회를 잡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파는 사람들

제퍼슨 왕·조지 나치·보리스

마우러·아몰 파드케 지음

미래의창 펴냄

256쪽 16,000원

일본인 이야기2

김시덕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452쪽 20,000원

텐 드럭스

토머스 헤이거 지음

동아시아 펴냄

380쪽 17,000원

과거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바라본 포

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 금융 변화

를 살핀 도서가 출간됐다. 1부 ‘전쟁과

금융’, 2부 ‘글로벌 경제와 금융’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워털루 전투, 1·2

차 세계대전 등 7개 전쟁이 금융산업

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살펴본다. 전

쟁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세금만

으로는 전비를 충당할 수 없다. 화폐

발행·국내외 차입이 필요하고 필연적

으로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이 개입한

다. 2부에서는 근대 글로벌 경제와 금

융의 역할 등을 살펴본다. 저자는 역

사적으로, 위기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낳아왔다고 말한다.

넥스트 넷플릭스

임석봉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280쪽 16,800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368쪽 17,000원

“’인생, 생각보다 길다’는 대사‥ 한의사가 해준 말”

영화 ‘내가 죽던 날’서 목소리 잃은 ‘순천댁’으로 김혜수와 ‘인생 연기’

외딴 섬 절벽 끝에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사라진 소녀 ‘세진’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그곳으로 향한 형사 ‘현수’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 ‘세 사람의 보이지 않는 연대’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 상처·고통 마주하며 구원에 이르러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으로 열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배우 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