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 종교로 보는 한국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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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 종교로 보는 한국건축사 건축학과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건축형태와 문화 / A. Rapoport 수강 유의사항 한국건축사; 자신의 한국건축에 대해 알아보기 (두뇌 풀기 과제) daum cloud -ylee5298, ylee2020 한건사 - 자신이름 화일에 올리기 1. 자신이 지금까지 직접 방문하여 체험한 한국의 고건축 10곳을 열거하라. 2. 자신이 열거한 고건축 10곳을 나름대로 분류하고 그 이유를 적어보라. 3.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적고 간단한 배치도로서 그 건축적 특징을 설명하라. 4. 건축학도로서 자신이 수강 중 연구하고 싶은 고건축과 주제에 대해 적어라 한국건축사; 역사학자로서 or 건축가!! 로서 보자르 건축교육 복사 - 古七現三, --- 現七古三 秋史 金正喜 翁 藝란 수백년 묵은 老松의 끝가지에 봄을 맞이하여 나는 여린 잎사귀와 같다. Banister Fletcher - 'A History of Architecture' - China, Japan(Korea) P.L.Nervi = History of World Architecture - Oriental Architecture - Korea 세계문화유산 - 중국 28건+?, 일본 11건+? 한국 9건+?(창덕궁, 수원화성,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유적-조선의 왕릉, 낙안읍성, 남한산성 추진중) 서양건축사 / 동양건축사(한국건축사) ---- 인도, 차마고도/ 동남아시아, 몽고, 중국, 한국, 일본 실크로드, 서역 -- 중국 -- 한국 -- 일본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Why 史觀 (역사해석) - E. H. Carr -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건축사 교재(이 영/편집-한국건축사) + 개인화일(유인물, 강의노트) + 발표보고서 건축유형별 강의 - 시대별 변화상 파악 목적 전반; 건축문화란? 불사건축(삼국, 고려, 조선) - 儒 , 佛, 중국, 한국, 일본건축의 비교건축사 후반; 유교건축 (조선) 중국, 한국, 일본건축의 비교건축사 결론; 한국건축의 모습 百聞而不如一見 - 건축은 직접 체험으로(답사)

Transcript of 2013-2 종교로 보는 한국건축사...

2013-2 종교로 보는 한국건축사 건축학과 이 영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건축형태와 문화 A Rapoport

수강 유의사항

한국건축사 자신의 한국건축에 대해 알아보기 (두뇌 풀기 과제)

daum cloud -ylee5298 ylee2020 한건사 - 자신이름 화일에 올리기

1 자신이 지금까지 직접 방문하여 체험한 한국의 고건축 10곳을 열거하라

2 자신이 열거한 고건축 10곳을 나름대로 분류하고 그 이유를 적어보라

3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적고 간단한 배치도로서 그 건축적 특징을 설명하라

4 건축학도로서 자신이 수강 중 연구하고 싶은 고건축과 주제에 대해 적어라

한국건축사 역사학자로서 or 건축가 로서

보자르 건축교육 복사 - 古七現三 --- 現七古三

秋史 金正喜 翁

藝란 수백년 묵은 老松의 끝가지에 봄을 맞이하여 나는 여린 잎사귀와 같다

Banister Fletcher - A History of Architecture - China Japan(Korea)

PLNervi = History of World Architecture - Oriental Architecture - Korea

세계문화유산 - 중국 28건+ 일본 11건+

한국 9건+(창덕궁 수원화성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유적-조선의 왕릉 낙안읍성 남한산성 추진중)

서양건축사 동양건축사(한국건축사) ----

인도 차마고도 동남아시아 몽고 중국 한국 일본

실크로드 서역 -- 중국 -- 한국 -- 일본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amp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왜 Why 史觀 (역사해석) - E H Carr -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건축사 교재(이 영편집-한국건축사) + 개인화일(유인물 강의노트) + 발표보고서

건축유형별 강의 - 시대별 변화상 파악 목적

전반 건축문화란 불사건축(삼국 고려 조선) - 儒 佛 仙

중국 한국 일본건축의 비교건축사

후반 유교건축 (조선)

중국 한국 일본건축의 비교건축사

결론 한국건축의 모습 百聞而不如一見 - 건축은 직접 체험으로(답사)

百見而不如一畵 그러나 보는 그리는 법 또한 배워야

百見而不如一作 simulation

한국건축답사 및 발표대상건축

불교건축

사찰- 정림사지 미륵사지

분황사 불국사

감은사지 황룡사지

봉정사 통도사

부석사 석굴암

화엄사 화암사

해인사 기림사

만복사지 수덕사

송광사 용주사

장곡사 무량사

개암사 관용사

전등사 금산사

용문사 범어사

법주사 쌍개사

쌍봉사 내소사

마곡사 선암사

미륵대원 개심사

신륵사 대흥사

운주사 운문사

청평사

유교건축

서원- 소수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돈암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무성서원

노강서원 필암서원

묘- 종묘 문묘(향교)

관묘 나주향교

강릉향교

단- 사직단 원구단 중악단

도성 한양 경주

국내성 평양

공주 부여

개성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운현궁

읍성 화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전주읍성

경주읍성 남한산성

산당산성 고창읍성

나주읍성 몽촌토성

마을 하회 양동

한개 닭실

외암 방촌

강골 월곡

반가 윤선도고댁 추사고댁

의성김씨종댁 박황씨가

맹씨행단 독락당

향단 임청각

선교장 관가정

연경당 윤증고댁

정원 안압지 소쇄원

영남루 죽서루

기타 강화성당명동성당 middot 절두산성당

부여박물관불란서대사관 세종문화회관

종교를 통해 본 한국건축사

한국종교 문화로 읽는다 -한국종교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Religions

wwwkaoasorkr

한국인의 종교 - 최준식

한국종교사상사5권(1986-1993) 한국학술정보(주)

한국종교사(민족사 1995) 그레이슨 저

한국종교문화사강의(청년사 1998) 한국종교연구회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amp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왜 Why 史觀 (역사해석) - EHCarr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 EH Carr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

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환상) = 서 긍의 고려도경

아 극돈의 奉(봉)使(사)圖(도)

B Croce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Collingwood 역사가는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판단하는 자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알고 이해하는 것

- 산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은 서로 다르나 산은 같은 산이다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침 없이 오가는 대화이다

건축사의 사실-- 건축물 자체( 건축물 가구 의상 사람 등)

문서 사진 그림(지도)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원인과 결과

역사연구는 원인들의 연구 - 왜

- 가치중립적이기 불가능 -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빛에 비추어 과거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북돋아주는

동시에 과거의 빛에 비추어 현재를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과거 - 현재 - 미래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한국문화의 기원 김원룡

역사란 무엇인가(EHCarr)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한민족과 그 예술 유 종렬

House form amp culture A Rapoport

문화란 무엇인가

東 과 西 그 의식구조의 차이

미국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에게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인사는 lsquo하이lsquo라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들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동

-서양식의 절충적 인사이다

文化의 本質

Culture 獨 Kultur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

l 밭을 갈아 경작 한다는 意味

l 자연에 노동하여 수확

l 가치를 상승시킨다(文化民族) rarr 교양 세련 의미

Tayler 人間 획득된 능력이나 습성 (생활하는 관습)

Linton 어떤 사회의 전체 生活양식

Kroeber  시행착오의 경험 가장 유리 효과적 생활양식

[연대기 歷史와의 美異] history amp precedentrarr [歷史的 産物 rarr 학습 必要(사회적 유전)]

context 형태 context 형태

현실세계

mental像

무자각한 文化 자각한 文化

implicit 감추어진 문화 overt 나타난 文化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百見而不如一畵 그러나 보는 그리는 법 또한 배워야

百見而不如一作 simulation

한국건축답사 및 발표대상건축

불교건축

사찰- 정림사지 미륵사지

분황사 불국사

감은사지 황룡사지

봉정사 통도사

부석사 석굴암

화엄사 화암사

해인사 기림사

만복사지 수덕사

송광사 용주사

장곡사 무량사

개암사 관용사

전등사 금산사

용문사 범어사

법주사 쌍개사

쌍봉사 내소사

마곡사 선암사

미륵대원 개심사

신륵사 대흥사

운주사 운문사

청평사

유교건축

서원- 소수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돈암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무성서원

노강서원 필암서원

묘- 종묘 문묘(향교)

관묘 나주향교

강릉향교

단- 사직단 원구단 중악단

도성 한양 경주

국내성 평양

공주 부여

개성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운현궁

읍성 화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전주읍성

경주읍성 남한산성

산당산성 고창읍성

나주읍성 몽촌토성

마을 하회 양동

한개 닭실

외암 방촌

강골 월곡

반가 윤선도고댁 추사고댁

의성김씨종댁 박황씨가

맹씨행단 독락당

향단 임청각

선교장 관가정

연경당 윤증고댁

정원 안압지 소쇄원

영남루 죽서루

기타 강화성당명동성당 middot 절두산성당

부여박물관불란서대사관 세종문화회관

종교를 통해 본 한국건축사

한국종교 문화로 읽는다 -한국종교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Religions

wwwkaoasorkr

한국인의 종교 - 최준식

한국종교사상사5권(1986-1993) 한국학술정보(주)

한국종교사(민족사 1995) 그레이슨 저

한국종교문화사강의(청년사 1998) 한국종교연구회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amp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왜 Why 史觀 (역사해석) - EHCarr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 EH Carr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

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환상) = 서 긍의 고려도경

아 극돈의 奉(봉)使(사)圖(도)

B Croce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Collingwood 역사가는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판단하는 자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알고 이해하는 것

- 산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은 서로 다르나 산은 같은 산이다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침 없이 오가는 대화이다

건축사의 사실-- 건축물 자체( 건축물 가구 의상 사람 등)

문서 사진 그림(지도)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원인과 결과

역사연구는 원인들의 연구 - 왜

- 가치중립적이기 불가능 -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빛에 비추어 과거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북돋아주는

동시에 과거의 빛에 비추어 현재를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과거 - 현재 - 미래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한국문화의 기원 김원룡

역사란 무엇인가(EHCarr)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한민족과 그 예술 유 종렬

House form amp culture A Rapoport

문화란 무엇인가

東 과 西 그 의식구조의 차이

미국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에게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인사는 lsquo하이lsquo라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들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동

-서양식의 절충적 인사이다

文化의 本質

Culture 獨 Kultur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

l 밭을 갈아 경작 한다는 意味

l 자연에 노동하여 수확

l 가치를 상승시킨다(文化民族) rarr 교양 세련 의미

Tayler 人間 획득된 능력이나 습성 (생활하는 관습)

Linton 어떤 사회의 전체 生活양식

Kroeber  시행착오의 경험 가장 유리 효과적 생활양식

[연대기 歷史와의 美異] history amp precedentrarr [歷史的 産物 rarr 학습 必要(사회적 유전)]

context 형태 context 형태

현실세계

mental像

무자각한 文化 자각한 文化

implicit 감추어진 문화 overt 나타난 文化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단- 사직단 원구단 중악단

도성 한양 경주

국내성 평양

공주 부여

개성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운현궁

읍성 화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전주읍성

경주읍성 남한산성

산당산성 고창읍성

나주읍성 몽촌토성

마을 하회 양동

한개 닭실

외암 방촌

강골 월곡

반가 윤선도고댁 추사고댁

의성김씨종댁 박황씨가

맹씨행단 독락당

향단 임청각

선교장 관가정

연경당 윤증고댁

정원 안압지 소쇄원

영남루 죽서루

기타 강화성당명동성당 middot 절두산성당

부여박물관불란서대사관 세종문화회관

종교를 통해 본 한국건축사

한국종교 문화로 읽는다 -한국종교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Religions

wwwkaoasorkr

한국인의 종교 - 최준식

한국종교사상사5권(1986-1993) 한국학술정보(주)

한국종교사(민족사 1995) 그레이슨 저

한국종교문화사강의(청년사 1998) 한국종교연구회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amp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왜 Why 史觀 (역사해석) - EHCarr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 EH Carr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

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환상) = 서 긍의 고려도경

아 극돈의 奉(봉)使(사)圖(도)

B Croce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Collingwood 역사가는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판단하는 자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알고 이해하는 것

- 산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은 서로 다르나 산은 같은 산이다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침 없이 오가는 대화이다

건축사의 사실-- 건축물 자체( 건축물 가구 의상 사람 등)

문서 사진 그림(지도)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원인과 결과

역사연구는 원인들의 연구 - 왜

- 가치중립적이기 불가능 -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빛에 비추어 과거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북돋아주는

동시에 과거의 빛에 비추어 현재를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과거 - 현재 - 미래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한국문화의 기원 김원룡

역사란 무엇인가(EHCarr)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한민족과 그 예술 유 종렬

House form amp culture A Rapoport

문화란 무엇인가

東 과 西 그 의식구조의 차이

미국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에게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인사는 lsquo하이lsquo라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들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동

-서양식의 절충적 인사이다

文化의 本質

Culture 獨 Kultur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

l 밭을 갈아 경작 한다는 意味

l 자연에 노동하여 수확

l 가치를 상승시킨다(文化民族) rarr 교양 세련 의미

Tayler 人間 획득된 능력이나 습성 (생활하는 관습)

Linton 어떤 사회의 전체 生活양식

Kroeber  시행착오의 경험 가장 유리 효과적 생활양식

[연대기 歷史와의 美異] history amp precedentrarr [歷史的 産物 rarr 학습 必要(사회적 유전)]

context 형태 context 형태

현실세계

mental像

무자각한 文化 자각한 文化

implicit 감추어진 문화 overt 나타난 文化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종교를 통해 본 한국건축사

한국종교 문화로 읽는다 -한국종교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Religions

wwwkaoasorkr

한국인의 종교 - 최준식

한국종교사상사5권(1986-1993) 한국학술정보(주)

한국종교사(민족사 1995) 그레이슨 저

한국종교문화사강의(청년사 1998) 한국종교연구회

역사의 서술 요소

누가 Who 人物 (계획과 시공주체) 기획자 amp 건축가

언제 When 時間 (고고학적 검증) 1차사료(역사적 사실)

어디서 Where 場所 (부지선정의도) 실증주의(문서)

무엇을 What 建造物 (원형의 확인) 원형 복원

어떻게 How 構築方式 (과학기술) + 미학 - 비평 - 건축이론

왜 Why 史觀 (역사해석) - EHCarr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 EH Carr

1 역사가와 그의 사실 2 사회와 개인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5 진보로서의 역사 6 지평선의 확대

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과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환상) = 서 긍의 고려도경

아 극돈의 奉(봉)使(사)圖(도)

B Croce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Collingwood 역사가는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판단하는 자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알고 이해하는 것

- 산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은 서로 다르나 산은 같은 산이다

--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침 없이 오가는 대화이다

건축사의 사실-- 건축물 자체( 건축물 가구 의상 사람 등)

문서 사진 그림(지도)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 원인과 결과

역사연구는 원인들의 연구 - 왜

- 가치중립적이기 불가능 -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빛에 비추어 과거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북돋아주는

동시에 과거의 빛에 비추어 현재를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과거 - 현재 - 미래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한국문화의 기원 김원룡

역사란 무엇인가(EHCarr)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한민족과 그 예술 유 종렬

House form amp culture A Rapoport

문화란 무엇인가

東 과 西 그 의식구조의 차이

미국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에게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인사는 lsquo하이lsquo라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들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동

-서양식의 절충적 인사이다

文化의 本質

Culture 獨 Kultur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

l 밭을 갈아 경작 한다는 意味

l 자연에 노동하여 수확

l 가치를 상승시킨다(文化民族) rarr 교양 세련 의미

Tayler 人間 획득된 능력이나 습성 (생활하는 관습)

Linton 어떤 사회의 전체 生活양식

Kroeber  시행착오의 경험 가장 유리 효과적 생활양식

[연대기 歷史와의 美異] history amp precedentrarr [歷史的 産物 rarr 학습 必要(사회적 유전)]

context 형태 context 형태

현실세계

mental像

무자각한 文化 자각한 文化

implicit 감추어진 문화 overt 나타난 文化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과거 - 현재 - 미래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건축문화란 무엇인가 한국문화의 기원 김원룡

역사란 무엇인가(EHCarr)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한민족과 그 예술 유 종렬

House form amp culture A Rapoport

문화란 무엇인가

東 과 西 그 의식구조의 차이

미국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에게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인사는 lsquo하이lsquo라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들면서 고개를 꾸뻑 숙이는 동

-서양식의 절충적 인사이다

文化의 本質

Culture 獨 Kultur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

l 밭을 갈아 경작 한다는 意味

l 자연에 노동하여 수확

l 가치를 상승시킨다(文化民族) rarr 교양 세련 의미

Tayler 人間 획득된 능력이나 습성 (생활하는 관습)

Linton 어떤 사회의 전체 生活양식

Kroeber  시행착오의 경험 가장 유리 효과적 생활양식

[연대기 歷史와의 美異] history amp precedentrarr [歷史的 産物 rarr 학습 必要(사회적 유전)]

context 형태 context 형태

현실세계

mental像

무자각한 文化 자각한 文化

implicit 감추어진 문화 overt 나타난 文化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체계 rarr 中心 ( core ) - 행위 유형 체계화

文化영역은 국경과 경계가 같지 않다

文化中心 rarr Marginal Area (주변영역)

darr

文化圈 - 世界的 視野

1 자아

2 의식

3 개인 무의식

4 집단 무의식

5집단 무의식

가운데 결코

의식 될 수

없는 부분

Ⅰ 고립된 여러 국가

Ⅱ와 Ⅲ 여러 집단의 국가

A 개인 B 가족 C 종족 D 국민

E 인종집단 F 원시적 인간 조상

G 동물조상 H 중심 에너지

종교란 무엇인가 건축과의 연관은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한국건축사 연구주제

I 한국건축사 통합연구 주제

역사란 무엇인가 세계사 동양사 중국사 한국사 한국건축사-동양건축사

문화론으로 본 건축사 ndash 라포포르트 문화이론

宗敎建築으로 본 東洋(한국)의 方位觀(우주관 천문관)

고대중국인의 우주관과 28수의 성립 - 2010석논 기원전 서양과 동양의 천문관 - 2008 석논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ilokhjistorygokr 한국인의 사생관 - 시간공간건축(인간)

건축물 배치기법 - 군사적 기문둔갑 지리체계

풍수에서 명당이란 어떤 場所인가 지형과의 경관적 실존적 시각적 관계 -생태적 해석

실존 공간 건축 建築空間과 老子思想 -고인돌 솟대 정자목 광개토대왕비

한국건축배치에서의 대칭과 비대칭

정조형 사찰 - 감은사 불국사

산조형 사찰 - 통도사 해인사 금산사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적용은 어떤 형식인가

- 주례고공기 井田法 바둑(최대축소 최소확대)

한국건축에 적용된 하이테크 건축기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친환경기법 가구법 구축법)

석굴암 해인사 석빙고 운주사

목탑(황룡사 법륭사 목탑 -지진)

한국 전통건축에서 정면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시대별 유형별 분석)-20122 대학원

합각지붕 모임지붕

문학(현판 對聯)을 통한 건축공간과 장소 연구

현판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II 사찰건축 연구주제

정조형 사찰에서 대칭과 비대칭은 어떤 사례가 있으며 그 해석(건축적 교리적)은 무엇인가

감은사지 불국사 법륭사 법기사 만복사지 등

산조 직교형 사찰의 배치적 특징은 어떠하며 해석(교리적 지리체계적)은 무엇인가

법주사 금산사 화엄사 보림사

사찰과 지형과의 연계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례는 (지리체계)

분황사 부석사 통도사 미륵대원 운주사

戒壇이 가지는 사찰 배치위계상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교리와 영역)

통도사 금산사 불일사

III 유교건축 연구주제

유교적 질서의 영향은 건축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문묘 향교 서원 용주사

유교 풍수 해석은 사찰 풍수와 어떻게 다른가

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도동서원

조선원찰 - 용주사 봉원사

IV 도성 읍성 마을 연구주제

동양건축과 도시에서 격자의 의미

- 井田法 바둑 - 최대의 축소 최소의 확대

한양과 송악 부여와 경주 국내성 평양의 도성적 동질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경복궁과 창덕궁의 건축적 동일성과 차이성은 무엇인가

아래 읍성들은 구성상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

전주 화성 남한산성 낙안

마을 구성요소에는 무엇이 있으며 위치적 관계는 어떠한가

각 반가의 위치적 특성과 지리체계적 해석은 어떻게 평면에서 적용되어 있는가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양동과 하회 닭실 외암리

V 반가 연구주제

間으로 본 한국반가 (구축성)

房으로 본 한국반가 (영역성)

도산서당 양진당 충효당 관가정 향단 독락당

외부생산공간 구성과의 연계로 해석한 반가(풍수)-생태적 해석

윤선도 고댁 선교장

VI 외래 종교건축의 이입과정 연구주제

서양 종교건축(건축형식-프로그램)과 한국 토양(대지)과의 연계성(향-방위)은

강도 - 강화성당 전주 - 전동성당 한양 -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의 일본신사건축과 기존 읍성과의 배치 관계

VII 건축형태에서의 한국성(전통성 표현 방법)

배치의 질서 (정면성)

부여박물관 절두산성당 세종문화회관 올림픽기념비 경상북도 도청사

지붕의 형상 가구(기둥 보)의 형상 비례와 양식

유엔참전 기념비 - 정문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황남대총 (KBS 역사스페셜 I) - 고신라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 무덤양식의 시대적 변화로 시대 고증 출토물로 본 역사적 해석

Q 우리는 누구였으며 누구이며 누가 될 것 인가

4-5세기 신라금관 = 시베리아 묘제와의 비교

왜 묘제의 비교인가

고구려 백제의 적석총과 다르다

- 어디에도 금관은 없다 고구려 안악고분 - 비단모자

71년 발굴 무령왕릉 - 금관 없음

중국 수문제 - 비단 모자

황남대총 - 73년7월 발굴 -적석목곽분

남분 - 왕 동쪽에서 左上()

북분 - 왕비

朴 - 昔 - 金 = 황금

능의 주인 - 삼국사기로 확인(내물왕보반부인 - 김씨왕세습 전용묘역

일본서기 - 신라(금채색화려)

북분출토물 금관 - 三木 - 사슴뿔

神木 - 하늘로 통하는 길(시베리아 샤먼 사슴뿔모자 - 미국 인디언)

쏘련 에르미따주 박물관 금관-스키타이문화(나무와 사슴숭배)한반도 유입

단검 각배 - 스키토시베리아문화 거쳐 한반도 유입

유리잔 유리병 타출문은제잔 상감팔찌 - 사이프러스 한반도 유입

유라시아 평원 기마민족 - 스키타이 훈투르크 몽고

남분출토물 마구류 (비단벌레 날개장식-변산반도)

출토된 말뼈(순장) 천마도(자작나무)

적석목곽분 - 기마민족-신라 === 고구려백제 피라미드형 묘제

유우라시아대륙 우코크평원 우랄알타이산맥일대 무덤구조일치

적석목곽 木棺東寢 봉토원형무덤 둘레 護石 - 일단의 주민들이 이동해옴

러시아알타이공화국 민두루사콘마을 - 훈족 4-5세기---동진 한반도 이동

곡옥 오리 솟대 흉노 - 서진 헝가리 아틸라왕국

법흥왕 - 개혁시작 중국식 율령 --- 대릉원 평원에서 산으로 이동

무덤형식 횡혈식 석분으로 - 말에서 내리다

-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건축문화의 계통 -한국문화의 기원

Q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 단일민족 東夷

고고학(archaeology) - 발굴로 유사성 확인 (후지노끼고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 - 민족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언어학 - 언어연구로 이동 연구(천년에 19 정도변화-한국어일본어)

민속학 - 종교신화 유사성 연구

유목퉁구스 농경퉁구스

유목민(이주) 농민(정착)

급한 성질 온순 인내심 강

독립성 협동심

동양의 역사는 북방의 非漢族과 남방의 漢族 사이의 대결사이다

중국 신화 - 황제족 치우 구려족=동이족 ( 탁록전투 패함)

단군신화 ( 곰호랑이 - 하바로프스크불라디보스톡)

문화란 - 문화의 이식(acculturation)

문화의 전수현상은 상호간의 영향

세계관(world view) - 종교관 - 생활관습 - 건축관

가치관 직업 주거관

형이상학적 metaphsical 물리적 physical

숨은 문화 드러난 문화

Culture Changes too rapid

culture core(근간문화major) culture periphery(주변문화minor)

하나의 문화가 지속성을 지니게 하는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 건축문화의 constancy(항상성) change(변화성)

주생활 - 방바닥에 앉는다(좌식입식)

신을 벗는다

남향 정면경관

문과 창(앞 뒤 마당)

안방사랑방

안밖 구조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동양건축-한국건축의 특성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한 중 일 건축의 특성 문화인류학 고고학

한국건축사 윤장섭

한국건축구조 형식의 특징

- 중국계 건축구조형식 계통 목구조의 가구형식 + 석재 기단 및 주초 + 기와지붕

조적식 구조(아치볼트) - 고대 석조(고구려)와 전축분묘 석탑

기단위 주초 - 정평주초 덤벙주초(그렝이질) 방식

기둥 - 배흘림 미흘림 공포 - 첨차와 소로 주심포식 -- 다포식으로 발전

목재의 원형 최대로 유지하여 치목 - 외관 소박하고 자연스러움

바닥구조 - 좌식생활 - 마루 + 온돌

지붕 - 팔작(합각) 우진각(모임) 맞배 지붕 처마곡선 - 수평면 후림 수직면 조로

한국 건축의장 계획의 특성

친근한 크기 개념 - 장대하지 않은 규모로 외관의 중압감 적다 -인간적 척도

자연과의 어울림 - 위치선택부터 자연 존중 지세에 적응조화 배려하여 자연의 세를 역행하지 않음

풍수적 해석 - 자연지세와 환경분석 활용 인간복리 도모의 기본원리

처마곡선 평고대 원목 자연형상대로 사용 무기교의 자연미

조형적 특징

- 기둥 배흘림 고대는 물론 석탑에도 적용 귀기둥의 솟음 귀기둥 큰부재

- 지붕의 처마 곡선미 선의 형태와 아름다움 한국 - 선 중국 - 형 일본 - 색

공간구성의 특징 - 고대로부터 비대칭적(고구려 삼실총 벽화-건축도 당시 도성 비대칭)

한양 - 주례고공기적 배치이나 겨자식 기하학적인 형상이 아님

주택 - 주요부분외는 지형에 따르는 비대칭적 배치

장식 및 색채적 특징 - 중국의 천변만화 일본의 가볍고 다순과 달리 중용의 미

청초한 색감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표현 중국- 강렬한 색채

건축미의 특징 - 단아한 아름다움과 순박한 큰 멋

한국의 자연 지리적 환경에 연유 큐모가 크지않아도 큰 멋 지님

한국민들의 순박하고 순호한 생활태도+ 자연에 순응하는 무기교 = 아름다움

세부에 집착치 않고 전체적인 미적 구성에 더 관심

한민족과 그 예술 유종열 - 현세에 집착하지않는 적료한 아름다움 - 적조미로 표현한 야나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미를 애조로 인식한 것은 시대적 인식의 오류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한국사학의 반성 천관우

절실한 요구에서 쓰인 역사

역사는 서술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방대한 양의 역사를 쓴대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사실을 모조리 담을 수는 없는 이상 무슨 기준이든 간에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

각하는 사실만을 골라서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을 골라 쓰는가 그 선택의 기준 해석의 원리 쓰는

이의 입장과 가치관 여기에 더하여 개성이 얼마든지 들어설 공간이 있다(사관 역사의식)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

역사는 왜 읽고 쓰나 사물을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이해시키기 우해서 다시 말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그 시간적

경과 그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현재의 나와 우리가 어디에 와 서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사실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현하느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실에서 무엇을 찾

아내는가에 뜻이 있다

나와 우리의 입장 현재의 입장이 투철한 역사(역사의식)가 더욱 일반화되어야 하겠다

미시적 고증과 함께 거시적 통찰을

역사학은 사료의 수집 비판에서 시작되어 해석 선택을 거쳐 서술에서 일단락이 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한 출실한 규명이 역사체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결의 기초인 것은 명백하나 종합

적 대국적인 통찰의 노력이 없이 실증만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증적 태도의 한계)

역사적 태도

Ⅰ 실증적(實證的 practical) 언제 누가 무엇을 어디서 지표조사 발굴조사 金石學

一次史料 三國史記(1145) 三國遺事(1300) 考證學

日本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실증주의(positivism) 東國輿地勝覽 寺誌 邑誌 地圖類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考證

Ⅱ 역사적(歷史的 historical) 왜 思想 政治 社會 經濟 敎理

사관적 해석(解釋interpretation) - 시대사관

역사(history)

Ⅲ 미학적(美學的 aesthetic) 어떻게 양식적 공간적 의장적

미학적 비평(aesthetic criticism)

建築理論(architectural theory) --- 건축설계이론(전통의 계승)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한국건축사학사

이 계(宋) - 營造法式 주례고공기

1904년 天照俊 - 고적조사 조선기행(1934)

1910년대 關野 貞 - 한국건축조사보고(1911 동경대)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1920)

조선미술사(1923) 조선의 건축과

예술

柳宗悦 - 조선과 그 예술(1922)

1930년대 藤島亥次郞 - 조선건축사론(1930) 韓의 建築

米田美代治 - 朝鮮時代의 建築에 관한 연구

(1933)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

高 裕燮 - 송도의 고적 한국미술문화사논총

한국탑파의 연구(1933)

衫山信三 - 조선건축잡신(1936) 日鮮比較建築史論

1940년-1950년대

1960년대 양식론(樣式論) H Wofflin

신 영훈 N Pervsner

윤 일주(한국양식건축 80년사1966) G Giedion

1970년대 윤 장섭(한국건축사1973) A Rapoport

정 인국(한국건축양식론1974) B Zevi

공간론(空間論) 신 영훈(한국고건축단장상1975)

김 동현한국고건축단장하1975)

주 남철(한국건축意匠1979)

1980년대 장소론(場所論) 김 정기(한국목조건축1980)

비교건축론 안 영배(한국건축의 외부공간요시노부 아시하라)

경관론(풍수) 최 창조 최 종현 N Schulz

박 언곤(한국건축사강좌1985)

리 화선(조선건축사1989)

1990년대 韓國性 김 홍식(한국의 민가)

장 경호(한국의 전통건축1992)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김 동욱(한국건축 공장사연구1993 한국건축의 역사 1997)

lt傳統韓屋 建築施工順序gt-송광사 목우헌 (KBS 역사스페셜 II)건축 구조형식의장계획적 특성

재료준비 - 석비례 三華土 春陽木

터 잡기 - 좌향(座向)

주초 놓기 - 間잡기 淸明(청명)보기

나무 깍기(治木) 연장 갈기 - 자귀질(배깍기)

기둥다듬기 - 주초 그랭이 뜨기

立柱 - 다림 보기 귀솟음(귀기둥 오금법)

창방 꽂기

立柱式

비계목 설치

柱頭 얹기

들보 올리기 - 물레

도리 얹기 - 굴도리 납도리

마루도리 얹기 - 지붕물매(5치 물매 6치 물매)

上樑式

추녀 올리기 - 추녀 그랭이 뜨기

서까래 얹기 - 서까래 잣기(번호 매김)

평고대 앉히기 - 맥이 잡기(조로 후림)

갈모산방 - 선자서까래받기

회첨서까래걸기

부연 얹기 - 겹처마집

이매기잡기

착고 맥이

부연개판

합각 만들기 - 박공붙이기

지붕 잇기 - 산자 엮기

기와 덮기

수장들이기 - 벽선 그랭이 뜨기

문 만들기

우물마루 짜기

대문 만들기

담쌓기

불씨 들이기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종교와 건축형식(고인돌-건축의 기원) 문화인류학 고고학

1 종교건축과 원형적 표상의 의미

종교건축의 원형적 표상의 가치는 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건축은 이미지의 언어를 지닌다

종교건축을 관망함으로써 나타나는 종교적 감흥 rarr 종교건축이 지닌 이미지의 가치성

감정 rarr 원형적 표상을 통하여 이마고(Imago)를 형성

원형(무의식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 + 종교건축 rarr 원형적 표상이란 하나의 개체 형성

원형(종교건축)으로 인하여 lsquo누멘rsquo이라는 감정이 형성 이것이 종교건축이 원형적 표상으로써 갖게 되는 의미

2 종교건축의 이미지와 원형적 표상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에 감정적 사고를 유발

종교건축의 이미지는 원형으로 인한 특정한 성질의 표상을 드러냄

➀ 아니마의 표상

아니마는 특정한 여성적 성질의 형태는 지님

여성적 성질의 이미지 (어머니 여성 신 대지의 신 물 바다 성애 대상인 창

부)

아니마의 성질을 종교와 신화에서 찾는다면 그리스의 비너스

여성적 아름다움의 곡선 여성을 강조하는 색 형태는 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여성적 특성을 의미

➁아니무스의 표상

아니무스는 남성적 성질을 지닌 아버지 태양 빛 신 불 왕 등의 원형의 에

너지를 나타낸다

아니무스의 성질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과 과장된 에너지의 의미

종교건축에서 아니무스의 성질 (강한 힘과 에너지로 표상되는 상징적 요소의

형태 색체 의미론)

대표적인 예 그리스의 도리아식 주도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➂ 모성의 표상

어머니를 나타내는 모성은 자애로움을 대표하는 정신적 숭고함

- 돌보는 것 유지하는 것 성장하게 하고 풍요로움 영양을 공급하는 제공자의 의미

모성은 종교건축에서 대지를 품고 아우르는 배치의 형상으로 나타남

-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 낮은 계단 등의 형태 원을 중심으로 모으는 형태 마리

아의 성화상(icon)의 형태

➃ 어린이의 표상

어린이 원형(과거의 회상 미래의 희망 안정 기대를 나타냄)은 대극을 융합하고 하나

의 중제자 구제자를 의미

예)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어린이는 꽃받침 속이나 황금알 혹은 만다라의 중심점에서

모습을 드러냄

미래적인 의미- 아기예수의 모습 어린천사 동자승 등

➄ 원(圓)의 표상

원(다각적 다면적인 마음을 의미) = 인간의 통일된 마음의 상징

원에 대한 상징은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패턴이나 형상을 나

타냄

rarr 복잡다단한 마음의 내용이 한가지로 통일되고 정리됨을 의미

예) 고딕건축에서의 원화창 (다양한 칼라와 형태들이 어떤 일정한 모습을 갖고 통일된

형상)

➅ 신성과 초원의 표상

종교건축에서 신성이나 초월은 건축의 한 형태로 나타남 rarr 정신적 내용물과 통합을

이루고 정신을 반영

예) 다리 계단 탑 타워

➆ 이니시에이션의 표상

이니시에이션은 하나의 위계적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종교건축에서 위계적 영역은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으로 구분됨

예) 문(門) 문설주 영역의 다리 계단 경계선 문턱

4 소결

건축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함께 어떠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언어로서 역할

종교건축은 감성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많다 상징의 저변에 놓여있는 것은 원형으로서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의 원형은 이 상징과 관계를 갖는다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1탑식(황용사식)

山地

平地

2탑식 (사천황사

식)

山地

平地

자유식

山地

平地

1단계 2단계

불사건축의 원형 - 초기 탑파건축과 석굴건축

伽藍의 起源(Sangarama - 僧伽籃摩승가람마)

중국의 공자(BC552-486)와 같은 시기에 인도 북부의 고타마 싯탈타(BC565-486 463년생설)가 80 평

생을 禪과 大衆을 위해 說法함으로 석가족의 성인으로 추앙되고 釋迦牟尼라 칭하여 佛敎(Buddhism)

를 형성하였다

인도에 정착하여 동남아를 통하여 중국에 전수되고(後漢 AD1세기경) 한반도에 이른 시기는 석가가

入滅한지 800여년이 지난 AD4세기 중기였다(기독교 공인 AD 313) 중국에서는 그전인 AD2세기 후

반 궁중에는 물론 민가에도 널리 포교되어 塔과 法堂이 지어져 동양의 漢文化式 伽藍이 형성되었다

사리와 불상

불교사찰은 승가람마이며 가람은 석가의 무덤에서 비롯된다 석가 입멸 후에 주변의 나라들이 모여

舍利를 8개소에 배치하면서 그 것을 담았던 그릇이나 火葬에 사용하였던 숯까지 모두 10등분하여

인도의 10종족지역에 보관하기위해 스투파(stupa)를 만든 것이 佛敎寺刹의 효시가 된 것이다 그 후

BC 3세기에 아쇼카왕이 적어도 7군데의 스투파를 발굴하여 불사리를 84000 등분하여 그 수를 크게

늘렸다한다

인도의 스투파 중에서

불사건축의 유형 1(인 중 한 일)

황룡사 (KBS 역사스페셜 III) - 고적복원에 대한 논의와 방법적 한계 (건축가 - 김석철)

정조형 사찰 - 원형(유형연구) 신라고도 경주의 도성경관

韓國寺刹의 分類

Ⅰ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類型分類

ldquo한국의 불사건축의 가람배치(伽藍配置)에 관한 유형분류의 시

도는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의 lsquo조선건축사론rsquo에서부터 시작되

었다 이 유형분류는 최근까지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형분류는 1단계로 탑파(塔婆)를 기준으로한 공간구성방식

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이루어졌고 2단계로 사찰의 지형적

위치에 따라 분류하였다

1탑식 그리고 2탑식으로 구분한 것은 일본과의 비교에 유리하

다고 생각되며 平地와 山地로 구분한 것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공간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등도해치랑의 분류는 한국사찰건축을 분류하기

에 다소 문제점이 나타난다

1) 탑파의 有無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유형을 구분하다는 점에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평지형

평지1탑병렬형

평지2탑병렬형

평지직교형

구릉형

구릉1탑병렬형

구릉2탑병렬형

구릉직교형

산지형

산지1탑형

산지무탑형

1단계 2단계

병렬형=중심축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식

興輪寺(527) 皇龍寺(553)

弥勒寺(600) 芬皇寺

甘山寺(719)

산지1탑식 金山寺(599) 海印寺(802)

평지2탑식四天王寺(679) 感恩寺(682)

望德寺(684) 皇林寺

산지2탑식華嚴寺(544) 通度寺(646)

梵魚寺(835)

무 탑 식 松廣寺(1187)

자 유 식 柏票寺

서 오류가 있다 왜나하면 탑파의 가람배치와의 관계 즉

탑파가 배치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경우와 탑파가 가람배

치에서 부차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에서 각각 건축적 배

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건축적 질서를 탑파로서만 파

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 산지와 평지와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변지

형을 중심으로한 분류인지 아니면 대지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분류인지를 파악하기에 매우 애매한 용어로 생각된다

3) 자유식이라는 분류자체가 탑파로 구성되지않은 사찰을 포함

하는데 이는 각각 다른 배치를 가지고 있는 다수의 한국사

찰건축을 분류하기에는 포괄적이며 분류의 정의가 광범위

하다 생각된다

Ⅱ 정인국(鄭寅國)의 유형분류

이 유형분류는 등도해치랑의 분류를 기준으로 하여 수정 보완

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유형분류이다

정인국 유형분류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가람배치의 연속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탑파가 가람중

심이 되었던 시기와 중요구조물로 취급받던 시기 그리고

그후 부차적 요소로 변하게 된 시기로 구분함을 기본분류

로 한다

2) 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의 변천을 의도하기 위하여 구릉형

(丘陵型)을 추가한다

3) 등도안의 탑파 분류에서 단순한 1탑식 2탑식 무탑식을 각

지형의 유형에 추가한다

4) 축선성질(軸線性質)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자유형 등을

구분한다

이 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등도의 안에서 탑파를 기본기준으로 적용한 것에 비해 지형

적 위치에 기본기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이 안이 좀더 가람

배치의 유형을 분류하기에 좀더 효과적이다

2) 무탑식을 추가하여 탑파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축선성질

에 따라 중심축형 직교형 그리고 자유형을 구분하여 공간

구성의 특성을 표현함으로써 좀더 세부적으로 유형이 분류

되었다

변천과정

類 型 佛 寺 實 例

평지1탑

병 렬 형

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法住寺(553)無量寺(高麗初)

평지2탑 四天王寺(679)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整 調 형

(前期)

1탑 구심축

형탑 파 중

1탑 중축형

금당+탑

파 중심1탑 교축형

2탑 교축형

散 調 형

(後期)

산조 중축형주불전

중심산조 교축형

그러나 이 안에서도 명확한 사찰의 분류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다

1) 1단계 유형분류의 기준이 가람배치의 변천과정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시대적 가람

배치의 변화를 조사해 보면 산지형 또는 구릉형 사찰의 일

부가 평지형 가람배치의 창건시기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것

이 있다 그 예로 부석사와 관룡사 화엄사 등이다

2) 2단계의 구릉 산지의 분류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구릉형

사찰과 산지형 사찰의 입지 또는 지형이 명확이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미확실하기 때문이다

3) 2단계의 분류에서 탑파의 개수와 축선성질이 이원적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이는 좀 더 세분화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축선성질과 탑파가 같은 성향을 취하는 것도 있지만 축선

성질이 건축물에 오히려 좀더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

러한 측면에서도 보다 자세히 유형분류에 포함시켜야 한다

Ⅲ 안영배(安瑛培)의 유형분류

이 안은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의 문제점에 기반하여

좀더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안영배 유형분류의 기본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사건축공간 구성형식의 변천과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

2) 공간구성의 조영개념과 가시적인 구성패턴이 표현되어야 한

3) 특정형에 대한 과대 또는 과소 평가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

아야 한다

이 안의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1단계 구분이 한국사찰건축의 공간구성의 변천과정을 중심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인국 가람배치유형분류는

공간구성 변천과정을 지형적 위치의 변천과정으로 보았으나

이 안은 탑파가 공간구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와 탑파와 불

당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정조형식으로 그리고 탑파

보다 불당의 비중이 커진 시기를 산조형식으로 보았다 건축

적 질서가 구심적이고 정연한 조화를 이루며 내부중심적인

것을 정조형식 반면에 건축적 질서가 유동적이고 흩어진 조

화를 가지며 외부공간적인 것을 산조형식으로 구분한 점이

보다 유형분류에 체계가 부여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건축적

구성의 관점에서 다원적으로 설명이 타당한 분류라 볼 수 있

2) 2단계 분류에서 축선중심의 분석이 상당히 타당하다 볼 수

형식분류

유형분류(일반적호칭)

佛 寺 實 例

1탑구심축형平 淸 里寺址日本飛鳥寺

1탑중축형皇龍寺(553) 芬皇寺(634)扶餘軍需里寺址

1탑교축형萬福寺址 川原寺(日本)

法隆寺(日本)

병 렬 형

慶州干軍里寺址(8세기말)

實林寺 實相寺(828)

望德寺(684)

평지직교형萬福寺址 金山寺(599)

通度寺(646)

구릉 1탑

병 렬 형

浮石寺(676) 修德寺

鳳停寺(672)

雙峰寺(867) 道岫寺(1457)

無爲寺(916)

구릉 2탑

병 렬 형

末方里寺址(8世紀末)

佛國寺(751)

感恩寺(682) 興王寺(1056)

구릉직교형 華嚴寺(544)

산지형

산지1탑형海印寺(802) 梵魚寺(835)

雙磎寺(未詳) 開心寺(651)

산지무탑형

傳燈寺(1259) 觀龍寺(353)

龍門寺(1670) 銀海寺

松廣寺(1187) 長谷寺(809)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있다 탑파가 중심적으로 가람이 형성된 배치는 축선분석이

탑파를 중심으로 한 공간구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

되어 비교적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은 좀더 세분할 경우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정조형식의 경우 축선성질과 탑파를 중심으로 분류가 가능

하지만 산조형식의 경우 배치형식이 유동적 유기적으로 구

성되어지며 외부공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축선성질

로 이를 분류하기는 부적절하다 판단되나

2) 등도해치랑과 정인국의 유형분류에서 사용된 지형적 위치관

계에 대한 분류가 이 안에서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지나친 건

축적 질서로서만 구분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사찰의 대부분이 산조형식에 포함되는데 이를 좀더 구체적으

로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Ⅳ 기타의 유형분류

사찰 구성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

위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유형분류에 대한 비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각각의 유형분류 기준이 거의 대부분 탑파를 중심으

로 입지조건 축선성질 금당수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분류기준의 비중도 이에 따라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2) 탑파의 유형분류는 거의 분류형이나 의미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3) 입지조건의 경우 가람의 위치형식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분류기준이 사용자마다 용

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다

4) 축선성질에 대한 분류는 탑파에 연관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공통적이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유형분류가 다원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탑파의 형식 입지조건 축선성질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분류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각각의 조건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과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에 타당성이 적다고 보여진다

2) 입지선정의 경우에서 입지조건이 단순한 가람의 위치

선정에 대한 분류로 그치기 때문에 지형과 가람배치와

의 분석이 부재하며 따라서 가람배치의 근본적인 배

치원리를 분석하기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2탑교축형

四天王寺(679) 佛國寺(751)

慶州干軍里寺址

感恩寺(682) 末方里寺址興王寺(1056)

산조중축형

海印寺 雙磎寺 浮石寺

鳳停寺(672) 修德寺

法住寺(553)

산조교축형華嚴寺(544) 通度寺(646)

金山寺(599) 法住寺(553)

분류

기준塔制 立地條件 軸線性質 金堂數 기타

藤島單塔植

雙塔植

平地

山地自由式

鄭寅國

1塔植

2塔植

無塔植

平地式

山地式

山地式

中心軸型

直交型

自由型

尹張1塔植

2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禪宗伽

藍型式

朴萬植

單塔植

雙塔植

無塔植

中心軸型

直交型

不整型

複數金堂制

單數金堂制

金正秀

塔堂軸

性의 혼

합분류

金東賢

1塔植

雙塔植

無塔植

平地伽藍

山地伽藍 自由式

安瑛培1塔

2塔

中軸型

交軸型

전기

整調型式

후기

散調型式

趙昌翰

整型的

非整型

文明大

1塔

2塔

無塔

1金堂制

多佛殿型

塔院-僧

院-金堂

阮의 관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신라사찰의 형식변화단계 및 특성

구분 출현시기형식

대상사찰입지 공간구성

1段階 544 ~ 7C 중반 王京中心部(平地) 1塔 廻廊式 興輪寺 皇龍寺 芬皇寺

2段階 7C 중반 ~ 7C 후반 地方(山中) 1탑 無廻廊式 通度寺 鳳停寺 浮石寺

3段階 7C 후반 ~ 8C 중반 王京外廓部(山麓) 2탑 廻廊式 四天王寺 感恩寺 望德寺 佛國寺

4段階 8C 중반 ~ 9C 후반 地方(山中) 12탑 無廻廊式實林寺 桐華寺 海印寺 實相寺

梵魚寺 道岫寺 雙磎寺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시기국가형성기

(544~7C중반)

삼국통일전후

(7C중반~7C후반)

통일신라전기

(7C후반~8C중반)

통일신라후기

(8C중반~9C후반)

시대적전제왕권

미확립

사회불안정

삼국 쟁패

정치 경제 사회

번영기

교학불교번영

密敎도입

정치 사회 불안정

육두품 호족세력

등장

禪佛敎 등장

작용인자

왕권강화

통치기반조성

포교

三寶中心信仰

윤회전생설

전국토의 불교화

佛國土思想

화엄사상

화엄십계개창

교리

내세적 신앙 유행

禪宗

구산선문개창

호족세력의 거점화

厭世 逃避的

신앙 유행

성격 王室寺刹 護國寺刹 王室貴族寺刹 巷間寺刹

변화구조

고구려

인도 중국

백제

적응 조절 소멸

조절고려 조선

유형분류 유형 A 유형 B 유형 C

신라사찰형식의 중층적 변화구조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불사건축의 발전

불사건축의 유형 2( 중 한 일)

석굴암(KBS 역사스페셜 IV)-건축적 기원과 전통건축의 축조방식을 통한 과학기술적 적용 사례

High Tech-Engineering in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1 구조 및 시공 기술

구조적 기술(기초 석조 목조 조적조)

시공적 기술(배수 거중기 수평수직보기 시공과정계획)

2 공간환경 기술

빛의 도입 온도의 유지 습도의 조절 소리의 차단

3 도면작성의 기술(미학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

기하학과 비례 지각의 응용 수학의 건축계획적 적용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부처에 대하여

부처의 4聖地

佛誕 成道 初轉法輪 般涅槃

룸비니 부다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탄생불 고행상 항마상 성법상 열반상

32相 82種好

불상머리 - 肉髻(육계) -깨달음과 지혜의 상징

이마 - 白毫 -수정보석 - 지혜의 빛 상징

손 발 - 차륜 문양

손짓언어 - 手話

手印 + 印栔 - 佛 敎

오른손 왼손

| |

(天) 부처의세계 중생계 (地)

불상의 수인 - 부처의 생애 중 사건을 상징 설명하는 언어

Mudra Veda시대 무용과 연극에서 비롯

통인 - 선정인 여원인middot 시무외인

별인 -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아미타불 - 구품인

(상중하 3등급-총9등급)

아미타정인

비로자나불 - 지권인

미륵불 - 용화수인

약사불 - 약기인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다 보 부 처 ( 前 身 ) - 석가모니부처(現世) - 미륵부처(未來)

如來

過去 七佛 大雄殿 降魔觸地印 彌勒殿(용화전)

칠보대탑-다보탑 석가탑

挾侍菩薩 - 文殊(지혜) 普賢(미륵) - 중생위해 부처되기 거부 菩薩

삼존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如來

大寂光殿(화엄경) 無量壽殿(법화경) 藥師殿(왼손약병오른손바닥)

권지인 광명 西方極樂淨土 施無畏印

관세음보살 세지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菩薩

(觀音殿)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지장보살(신라왕자 김교각) 지옥중생구제

地藏殿(인도의 지신신앙) 冥府殿 十王殿(지장전좌우)

범천제석천사천왕(천왕문)팔부중인왕 明王 天王

불법수호성인

힌두교 신

16나한500나한(나한전) 羅漢

석가의 제자

상단 중단 하단 - 토착신 33신 - 104 위

神衆壇 - 인도계 중국계 토착계

고려때 왕권과 불법의 수호신으로 크게 숭상되기도 하였고 조선불교가 민간불교화함에 따라

인도 중국계의 신중각은 퇴조하고 토속계열의 전각이 크게 유행함

大雄殿 - 법화신앙 석가모니불(대웅세존)

화엄계(문수 보현보살 협시불) 법화 천태계(제화할나 미륵보살 협시불)

삼세존(보현 대세지 관음 문수보살 협시 - 총 7구 불상)

極樂殿 - 아미타불(서방정토 주관) - 아미타전 무량수전(아미타여래)

無量壽殿 - 한없는 수명 광명 무량광불(법화경)

안양전 - 극락세계 평안하고 풍부한 안양세계

연화전 - 사후 극락왕생할 때 연꽃에서 피어남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대광명전(대적광전) - 화엄경 비로자나불 봉안

비로전 - 부불전으로 봉안될 경우 - 비로자나불

보광(명)전 -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전 - 현세구복 좌우 일광월광 협시보살 - 동향

약왕전 - 부불전 도교의 12지신과 결합

미륵전 - 미륵삼부경 미륵삼존 - 용화세계

용화전 - 유가종과 법상종 계열 주불전

원통전 - 주불전 유일 보살인 관세음보살 봉안(周圓融通) - 남순동자해상용왕

관음전 - 부불전 - 관세음보살

문수전 - 석가불의 협시로만 등장 단독 존상 거의 없음

冥府殿 - 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명부시왕 협시

地藏殿 - 인도의 지신신앙 - 지장강조 때

십왕전 - 지장전 좌우

靈山殿 - 석가 설법장 靈山會上 유래 - 八相圖 봉안- 석가모니 주불

八相殿 - 조선후기 대웅전과 함께 중요 축선에 위치 - 팔상 사방에 배치

羅漢殿(응진전) - 16나한 유마경의 10대 제자 - 석가모니주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않고 이 세상의 불법수호를 위임받은 자

七星閣 - 도교의 불교화로 나타난 神衆閣 -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도교)

재해를 물리치고 아들을 얻는다는 주존 - 북극성(칠성광여래당)

獨聖閣 - 부처이전시대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독각불 미륵을 기다림(단군신앙 불교적 전개)

天臺閣 - (단군 + 부처)

山神閣 - 한국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화해서 영지신앙과 함께 가람수호 산신 + 호랑이

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은 총체적 토속민간신앙

三寶寺刹(佛寶-통도사 法寶-해인사 僧寶-송광사)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도들은 사찰을 짓는데 만족치 않고 국토전체를 부처의 나라로 형성

하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이는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중 하나인 佛國土說을 자신들의 실제 영토에

재현하고 불교와의 인연을 강조하려 노력하였다

청정한 영토란 뜻에서 정토라고도 부르며 정토 불국토의 구현은 한국의 사찰건축이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특히 山岳 靈山信仰과 前佛伽藍說 또는 淨土說의 결합은 성

지를 가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한국 특유의 立地觀이 되었고 사찰건립을 정토재현과

동일시하는 사찰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극락세계의 추상적인 개념은 화려한 광명세계 장엄한 청정도장으로 요약되어 사찰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1통시대적 변화와 흐름의 감지

2양식사적 흐름 변화 중첩성을 내포(목조양식사)

3재료와 형식간의 갈등과 만남(物性추구의 전개과정)

4문화적 운동성 이입과 수용과정(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5목조건축사의 한계극복(99가 조선후기건축물-예외가 전형으로 인정)

인도의 高塔(Sikhara) 塔頭部(相輪 覆鉢)-불교 Stupa(Dagaba Cylon)

(문 Thoronas패루홍전문도리) + 塔身部(屋蓋石 屋身)-중국의 Pagoda-軍事用望樓

基壇部(상하대갑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인도Stupa-------중국의 Pagoda--------南朝(木塔)-----고구려(팔각목탑 - )

| 누각형식 Stupa상징 | |

| | 백제(木塔)---모목석탑

| | |

| |---北朝(塼塔)----신라(塼塔)--모전석탑

| |

|---남방불교(조적조)---------------------|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선행존재 목탑 전탑 팔각목탑 불교도입

시원기 모목석탑 모전석탑 고대국가 완성

(미륵사탑) (분황사탑)

형성기 목탑계석탑 전탑계석탑 삼국경쟁 및 협력

(정림사탑) (의성탑리)

전형기 전형의 완성 변형의 시작 국제화시기

(감은사탑 석가탑)

매너리즘기 비례율의 해체 법화계 선종도입

이형탑-다보탑 사사자탑 정혜사탑

크기 작아짐 옥개석받침 5-4

기단 높아짐 장식유행 후삼국

복고기 백제계석탑 전형의 유존 팔각석탑 출현 호족세력확대

(전형백제탑) 목탑 원 송 요

절충백제탑

형성기 고려탑의 전형

신라전형의 해체 종파불교화

다층화(비례고준)

족벌정치와

옥개석 얇게됨 불교의 야합

형식의 간략화(크기 소)

물성의 획득(민중화)

새로운 모색(청석탑 등)

외래도입기 라마탑의 이입과 수용 원의 침략

(약화기) 경천사탑 백탑 (이입)

마곡사탑 (수용)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소멸기 조선초기의 모색 왕실불교

(고려의 다양한 형식의 반복)

지리인식과 불사건축

우리 傳統 地理觀

旅庵 申景濬(1712-1781)의 山經表(전국토의 지리골격을 문자로 정리한 책)

숙종 38년 순창 태생 영조 댸 실학자(국어학지리학)

영조 45년(1769) 여지편람 내 산경표 乾冊 거경정리표 坤冊

영조 46년(1770)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관선지리지 편찬

일제시대 최남선의 조선광문회 - 산경표 영인 - 토끼반도(호랑이반도)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표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 오직 申

景濬이 撰한 「興地考」의 「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

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며 사람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

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山

徑表」는 山徑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山徑表는 바탕으로 삼은 山徑을 일목요연하

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 하다

「山徑表」의 표기 방식은 族譜에서 始祖와 支派의 구성등 家系의 흐름을 표기하는

방식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면서 白頭大幹∙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正脈으로 우리나

라 산줄기의 주요 골격을 분류하고 중요한 산의 흐름을 기술하여 우리나라 산수의

계보를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한반도 지리의 근간이 되는 골겨을 lsquo大幹rsquo 산

줄기를 중심으로 할때는 lsquo正幹rsquo 江과 연관되어 수계를 이루는 산줄기(分水脈)일 때

에는 lsquo正幹rsquo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지도화 한 것이

山經圖 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 이르러 방향을 틀어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르는 한반도 산수의 지리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다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강의 發源은 모두 이 백두 대간에서 비롯

된다

長白正幹 백두대간의 豆流山에서 갈라져 西流하는 줄기로 함경북도 서

북쪽 두만강 남단 山勢의 근간이 된다

洛南正脈 輿地使覽의 「山徑表」에는 洛南正幹으로 조선광화문회본의

「山徑表」에는 洛南正脈으로 명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끝 인 지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리산에서 동남으로 이어져 낙동정맥과 함께 낙동강 하 구의 水口를

이룬다

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압록강의 水

界를 남으로는 청천강의 水界를 이룬다

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middot낭림산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청천강의 수

계를 남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이루며 평양 大同江 河口까지 이어진다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비롯되어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長山

串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북으로는 대동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예성강의 수계 를 이

룬다 대동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되는 줄기가 된다

臨津北禮成南正脈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갈라져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

는 줄기로 북으로는 예성강을 남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이루는 분 수산맥

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분수령에서 갈라져 한양의 북한산(삼각산)

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임진강의 수계를 남으로는 한강의 수계를 이룬다

북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유별나게 북상하여 칠현산까지 이

르는 산줄기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남한강 남으로

는 부여 공주 금강의 수계를 이루는 分水脈이다

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져 한양의 朝山인

관악산에 이르는 줄기로 강화도 앞의 문수산까지 이어져 개성의 朝山 이 되기

도 한다 북으로는 한강 남으로는 대진강(안성천)의 수계를 이 루며 한북정맥

과 함께 한강의 水口를 이룬다

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태안반도의 변

산에 이르는 줄기로 북으로는 대진강 남으로는 금강 하류의 수계를 이룬다

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 장안산에서 갈라져 서북쪽 주화

산까지 이어진 짧은 正脈으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근원이 된다 북 으로는

금강의 水源을 이룬다

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라져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曲流

하는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에서 南으로 이어져 호남의 모든 산의 근간을 이

루는 산줄기로 東으로는 섬진강의 수계를 西로는 영산강의 수계를 이 루며 호

남을 동서로 크게 가른다

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비롯되어 동해안을 타고 남행하여 부

산의 낙동강 하구에까지 이르는 산줄기로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과 내륙을 가르고

있다 태백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 그리고 낙남정맥과 함 께 낙동강의 水

局을 이루며 慶尙左道 모든 산의 근원이 된다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古山子 金正浩(1804-1866) 大東輿地圖 1861

산경표 지도방식

이름난 산(名山)과 갈려나온 산(支山)은 산의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연이

어 솟아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經川)와 갈려나온 흐름(支流)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산줄기(山經)와 물줄기(水經)가 地面에 연결되어 물이 깊이 파인 곳이 뽀족이 서서 산이 되는 법이

므로 水原이 서로 갈라진 곳을 따라 산줄기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물줄기의 시작과 이들이

모이고 합한 것을 헤아려 정하여 봉우리와 기슭의 갈라진 것을 분별할 것이니

-白頭山에서 智異山까지의 산줄기가 한반도의 중추적 골격

고려말 공민왕 6년 (1357) 司天少監 干必與의 上書 玉龍記(도선국사)

태종2년(1402) 가장 오랜 한국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영조27년(1751) 李重煥의 擇里志

山水交會-산이 물을 만나는 곳에 氣가 모인다 水口와 朝山朝水는 山水交會하는 곳

에서 성립된다 水口가 조인 듯 견실해야하고 이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산이 마주

대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水口關鎭)

한양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이루어내는 형국 이 국내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

로 모여 흘러나가는 정맥줄기 끝이 수구다 즉 삼각산과 관악산이 조인 듯 마주 서

서 水口關鎭의 형세를 이룬다

물흐름이 연속적이듯 산흐름도 연속적 산흐름의 전후좌우 관계정립후 입지선정

都城 邑城 마을 寺刹 書院 樓 亭 - 正脈에서 支脈으로

일본인의 왜곡

전통적 지리인식이 산을 보고 물을 헤아리는 水界중심방식인데 반해 이 방식은 地下의 지

질구조를 대상으로 한 구조선 중심의 개념이다

1903년 고또분지로의 지질구조선 조사 후 朝鮮의 山岳論

1904년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 韓國의 地理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 교과서 수록 - 현재 수정

지질구조 중심임으로 하천을 종횡으로 횡단하여 명칭을 정함

관악산 - 한강 건너 광주산맥의 맥으로 지칭

수계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관점 역사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전통적 지리인식이 실질적 가시적 - 일제 지리인식은 비가시적 비체계적

생활문화의 합리성(전통과 관습) - 지하의 지질구조적 합리성(수탈의 대상)

風水(韓國의 風水思想 - 최창조)

지리학 역사학 철학 건축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환경학 한국학 등

제 분야와의 통섭적 연구 필요

연구목표 理論 = 實例(陽宅 陰宅) - 解釋(地理觀) - 현대적 이론(건축물배치이론)

(탁옥부 葬書 名山論 호순신) - 산수도 읍지 대동여지도(고지도)

西歐人의 종속적 자연관 東洋人의 일체적 자연관

풍수개요 요체는 陰陽(균형-balance)

葬書 - 得水의 땅 그 다음 藏風되는 땅 설심부 - 坐向과 方位

山法典書 - 龍 穴 砂 水의 四法

정의 陰陽五行論과 周易的 사상을 논리의 기반으로 한 일종의 方術로서 기본구성요소는

山 水 方位이며 실체로서는 龍穴砂水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국적 사유체계 追吉避凶을

목적으로 삼는 相地技術學 일종의 地理觀 土地觀 자연해석방법

感 -- 말로 표현 -- 誤解(莊子 손가락 달의 비유 -- 언어적 한계)

용어 Poongsoo(한) Feng-Sui(중) Geomancy(유럽) Funerary Geography(Eliade)

the Science of Wind and Water

구성 山 水 方位 人(사람)

풍수의 역사 거주지역의 풍토적응을 위한 지리적 사고의 변화

屍體의 처리풍습(머리안치방향-東寢 南寢후 中 北寢)과 풍수발생

중국풍수 춘추전국시대 풍수적 관념발생 - 周代 相地 相宅(관상 지상)

漢 陰陽說 도입 - 풍수원리 정리(청오경)

동진 풍수 삼사 청오자 장자미 곽박-장서 산해경

남북조 발전 - 소길(댁경장경) 양기풍수 후 음댁풍수-묘지선정

삼국초기 설화 -- 지기(석굴무덤)

사신사 벽화 - 풍수적 사고관념 산악국-도처유명당

당 일행선사()-중국풍수이론 도입(도선 827-898 선종 구산파 동리산파)

신라말 도선국사- 중국풍수 체계화 - 국토재편성의 안목

일행 - 형세설명 실증적으로 전환 - 전남 구례 남해안 지방

불교 - 풍수설(대중 교화상의 방편)

고려 도참사상 - 訓要十條 - 사원 남건금지(지덕보존) 호족세력억압

금강이남 산세지형이 역행(반란의 땅)-정치적 의도(후백제인경계)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세종조의 주산 풍수논쟁(유학자의 풍수배척) - 민간신앙화 장묘술법으로 전락

실학자 풍수폐해 공격 - 정다산 박제가

개화기 계몽파 풍수설 비난

현대풍수사상에 대한 연구경향

1미신으로서의 술사적 접근 2나말여초의 정치사상적 해석

3역을 근본으로 음양오행 이기 십간 등 설의 본질이해추구

4건축학 환경학 등 공간구성의 형태적 공간인식적 접근

5민속학 국문학 등 미분화 상태의 해석 시도

6지리학의 합리성이나 입지론적 타당성 해석적 접근

風水說의 原理

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形局論 看龍法 藏風法 得水法 定穴法 坐向論

1風水原則과 陰陽五行說

陰陽五行說

발생초기에는 따로 발전 - 풍수설 확립후 가장 큰 사상적 기초로 됨 - 풍수용어

음양오행설-고대 중국인 우주만상적 세계관

陰陽 - 중국적 변증법-유기적 상관관계 속에 대응 유지되는 거대한 우주변화

五行論 - 일상생활의 소재론 民用五材 - 水火 木金 土

十干 十二支 + 점성술

風水說의 기본원리-풍수의 논리

氣感應的 認識體系 -同氣感應論 氣(陰陽) 四柱名利論 養生論

-所主吉凶論 積善者(四柱八字) 十干 十二支 擇日

- 形局論(형태심리학) 사람 짐승 조류 파충류 기타 물체에

비유(昭應파악-외형에는 그 형상과 상응한 기상과 기운이 내재)

砂城의 형세를 人身이나 禽獸의 모양에 類感시켜 發福 결정

經驗科學的 論理體系 - 看龍法 땅속의 생기가 머문 곳을 찾는 원리

생기가 있는 眞穴은 眞龍을 찾아야 하는데 眞龍의 출발은 崑崙山

(음)산(곤륜산 백두산 용맥)의 형세

龍脈의 흐름을 찾는 방법-생사강약순역진퇴복병겁살(용세12격)

- 藏風法 穴處를 둘러싸는 砂城이 장풍하는 형국

明堂주변의 지세이론(기 간수) 砂의 吉凶 판단

四神砂(청룡백호주작현무) 전술상 방어

- 得水法 생기의 聚止 목적의 하천

(양)수(태극 하회) 산수-사람 형체ㅡ혈맥

主山의 吉方來兇方去 裨補(사찰위치)

- 定穴法 砂城에 둘러싸인 明堂내의 혈처 찾는 법

인체의 經穴(침) 지하수맥(동기감응론)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 坐向論 주건물이나 시신을 눕히는 방향결정 방법

羅經(방위) 北 來龍 등지고 南 案山(前開後閉)

絶對向(시간상관념) - 相對向(지세시계 실존성)

형국론(形局論)

1 형국의 설정

지세를 전반적으로 槪觀하는 술법 - 지세개관은 가지각색

풍수이론(개념) --- 산천 따로 존재(實地勢) - 山自山 書自書

山川地勢를 人物禽獸의 形象에 類推 - 地勢大觀과 吉凶 판단

外形物體에 그 形象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內在해 있다는 觀念 - 原理

術士의 主觀 문제() - 본질적인 체계구조에는 안 나타남

物勢形狀이 사람의 吉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원시시대 類物信仰

풍수논리가 음양오행설에서 깊이 영향받음

만물의 차이-氣의 차이-氣의 象이 形으로 - 形으로 物의 元氣를 확인

2 형국의 종류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상응하는 精氣가 그 땅에 응축되어 있다고 간주

山形判斷 - 五星法 (經-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

五星 - 五行說 기초(書經 洪範 九疇 - 水 火 木 金 土)

禮記 - 月令 - 천문 역법과 관련 相生 相剋의 원리가 산 모양과 결부

오성 -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 - 淸 濁 凶 三格

많은 종류의 類型 - 村山智順

형국이 오성으로 人 物 禽 獸로 大分 - 무수한 형국

正體 形局 取穴部分

목성 直狀 人形 心 臍 陰

화성 光狀 人形 心 臍 陰

토성 橫狀 獸形

금성 圓狀 禽形 翼 窩 冠

수성 曲狀 龍蛇形 鼻 顙 耳 腹 頭 尾

人形 - 옥녀단장형 옥녀산발형 장군대좌형

獸形 - 맹호하산형 와우형 금귀입수형 영귀하산형 노서하전형

禽形 - 금계포란형 평사하안형

龍蛇形 - 구용쟁주형

속하지 않는 형 - 행주형 연화부수형 반월형 매화낙지형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대체로 人 物 象 등의 表現主體와 形姿의 설명을 붙이는 형식

3 형국의 해석

人形의 주체 - 여인 장군 선인 승 어옹 5가지로 대분

獸形의 주체 - 잡다한 물상 - 물고기 지네 호랑이 소 거북

禽形의 주체 - 봉황 닭 학 기러기

龍蛇形의 주체 - 용 뱀

그 외의 주체 - 꽃 배 달 거문고 비녀

主體는 그에 맞는 對案의 산천형세를 구비해야 吉格

道詵踏山歌 - 伏虎形(眠犬案)- 호랑이 앞에 조는 개

玉女形(橫琴案)- 거문고를 빗겨 안은 여인

대체로 主體의 격을 맞추어 주는 대상물로 짝을 이루었을 때가 吉地形局

三國의 國都風水

해석의 意義

알려진 바로는 본격적인 중국의 풍수가 도입된 것이 신라말이며 전설적인 한국풍수의 원조는 玉

龍子 道詵으로 되어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禪僧으로 그의 풍수지리적 지식이 문인들에 의해 간접적

으로 왕건에게 전달되고 도참사상과 결부되어 麗末에는 國都의 遷都라는 데 까지 이른다 우리나라

역시 예로부터 만주의 대륙적인 공간을 석권하던 유목민족에서 북반구 중위도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농본국가가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南面山麓 背山臨水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지속적으로 발전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이유로서 그 이전 즉 삼국시대의 國都들과 중국풍수 도입 후 國都들

의 공간적 질서를 상호비교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공간인식의 변화상과 차별성를 밝혀낼 수있다

고구려 국도 - 환도산성 국내성 평양성

백제 국도 - 한성 공주 부여

신라 국도 - 경주

고려 국도 - 개성(개경-송악)

조선 국도 - 한양

국도의 입지 - 150000 125000 지형도 1250000 지세도

풍수적 입지해석 - 대동여지도 한국의 옛지도(읍지도)

관계논문

三國의 都城配置에 관한 風水的 硏究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坐向論

1 좌향의 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에 관계된 술법 -子座午向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방향을 가질 수 있으나 선호성에 의해 결정되는 좌향은 단 하나뿐이다

풍수기본요소-山 水 方位 人間

絶對向 - 천체의 움직임 태양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향 - 時間性 내포

周易의 先天方位 後天方位 장소에 대해 절대적 세속적이 아닌 宗敎的 차원

相對向 - 실존적인 향 물리적 공간이 實存的 의미를 부여받기위해 필요한 구심적 향

원심적 향 대립적인 향 향천적인 향 향저적인 향

천문지리 연구에 필수인 羅經 - 풍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이론

2 좌향방위의 구조

易과 方位

역 - 변화의 철학 - 無極 太極 兩儀로 하나의 체계

極生兩儀 四象八卦圖

乾 兌 離 震 僎 坎 艮 坤

주역 최종 易卦 - 64個의 爻

河圖와 洛書와 先後天方位는 동질의 것으로 방위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다

河圖 伏羲八卦方位 先天方位 - 洛書 文王八卦方位 先天方位

看龍法

가시적 실체-山=龍 龍脈의 흐름의 좋고 나쁨을 祖山으로부터 血場까지 살피는 일

일촌 높아도 山 일촌 낮아도 水 이므로 맥이 끊고 이은 판단은 주관적일 수

正龍(주산)과 傍龍(支龍-四神砂)

眞龍과 假龍

貴龍과 賤龍

龍의 止處 란 山地와 접촉지점

龍勢 十二格 - 生死 强弱 順逆 進退 福病 劫殺

五星論 - 하늘에는 五星(별자리)이 있고 땅에는 五行(산천)이 있다

五行論 - 金 木 水 火 土

도성과 궁궐건축

周禮考工記의 都城制

-도성 각 방향면에 3개씩 12개 門 이를 연결 구등분 간선도로 설치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궁궐 九等分 중앙 위치

-궁 전면 민가 금지

-궁 남 전면 朝廷

북 후면 宮城

궁 북 市

-左廟右社

-민가구역 東 3구 西 3구 총 6구역

도성도(三禮圖)

都城 - 왕성(궁성) 포함 京城

邑城 - 郡 懸의 행정중심도시 고려후기 조선 전기 국방용으로 북방국경지대와 서

남해안지대에 활발히 축조함 조선시대lt동국여지승람gt 33개 행정구역 중 160개 읍

성 官주도 계획의 한국도시공간 구성방식 사례

마을 - 班村 民村

傳統都市計劃 技法 三國 비교분석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성

방어 위주로 초기 都城 立地 결정 삼국시대 背山臨水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盆地와 平地에 南向 도성 부근 山城 별도 축조

전란시 피난처 이용 都城 +山城形

(낮은 구릉 이용 ldquo테뫼형rdquorarr전체 계곡 自然包谷形)

고구려 배후 山城 아래 都城 축조 자연 최대로 이용

백제 고구려양식+중국양식 한쪽 강 나머지 土城 축조

신라 초기 고구려양식 rarr 三山城의 新都市形

중국 平地城 방형 시가지 격자형(漢 長安城rarr淸 紫禁城)

樂浪 土城址(평지성형식) 대륙 도시입지방식rarr고구려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일본 중국 평지성형식 670년 天武天皇代 藤原京 신라영향

방어적 성격 보다 支配 中心的 성격

東洋古代都市의 城郭形式

都城의 立地 城郭形式 가로망체계도시공간배치

배치형 시장 사원

한국

고구려

초기-背山臨

산성(丸都城

平壤城)불규칙형

( 국내성

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箕子井田)

鮮滿式(궁성-

산성)

北魏形-장안

성후기-平地城(

長安城)

格子形

(기자정전)

백제

초기-산성(하

남위례성) 불규칙형

羅城(자연포곡

형)

地形形

鮮滿式-한성

鮮滿式+北魏

形-사비성

사원 배치후기-鮮滿式(

사비성)+중국

신라

초기-산성불규칙형

나성부재(삼산

성)

불규칙형

鮮滿式

周禮形 도성

四市

寺院후기-平地城

격자형

(4리4방)

중국 平地城

규칙형

장방형낙양성

정방형장안

외성(羅城)

北魏形-장안

낙양성

東西二市

일본 平地城

장방형등원경

정방형평성경

외성부재

格子形

(9里4坊)

北魏形-평성

등원경

東西二市

사원배치

읍성과 마을 18세기의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김동욱

읍성의 분포lt여지도서gt110개 읍성중 88개 해안선과 국경선 부근 집중분포

또한 한양으로의 주요 도로 주변에 모임 (수도방위)

읍성중 머리 - 都城 首都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읍성의 입지유형

lt여지도서gt 110개 읍성중 81개 主 山

이 중 반 鎭山이 북쪽에 위치

산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산의 맥 및

근원이 더 중요(풍수)

하천 필수적 요건 - 교통편리 (수운)

방어상 유리 경작지 들판 식수

읍성의 형태

-圓形과 方形이 대부분이나 관념적 형태 - 실제 지형에 따라 축조 부정형

-읍성내 간선도로망 I II가 전체의 34 충청 전라도 II 우세

함경 황해도 I 우세 경상평안도 I II

-격자형이 기본형 한양처럼 중앙 객사앞의 주도로와 3교차형이 선호(丁字形가로)

읍성내의 공공시설(낙안 해미 고창 읍성)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行政機關

客舍 중앙 사신 숙소 국왕상징 전비 子坐午向

衙舍 고을 수령 내아 아사 거주

동헌 감사 병사 수가 公事처리 政堂(청)

鄕廳 지방인의 수령보좌 자문기관

제사시설 - 社稷壇(西) 文廟(東) 厲壇(北) 城隍堂(鎭山 밑)

교육시설 - 鄕校(文廟) 書院

성내외 場市 - 都家

거주자 官人 鄕吏 소수일반주민 유사직능 집단거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한국 유교의 역사

공자입상 중국 북경 국자감에 세워놓은 공자 행교상의 복원상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

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 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lsquo대학(大學)rsquo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

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

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

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lsquo음사(淫祀)rsquo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

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

은 lsquo신시(神市)rsquo에서 lsquo홍익인간rsquo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

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

(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ldquo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

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rdquo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

고 있었던 예술적윤리적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

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lsquo신시적(神市的)rsquo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lsquo신시rsquo와 연

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lsquo소도(蘇塗)rsquo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

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

사한 lsquo소도rsquo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

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

상고시대에는 이러한 lsquo고신도적(古神道的)rsquo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

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

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

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

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불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lsquo대학rsquo의 교수내용은 경(經)사(史)제자백가(諸子百家)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안향(1243sim1306) 학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성균관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게 하는 등 성

리학의 보급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

송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 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

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

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

어지는 lt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 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

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

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

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

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

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

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

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 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

의 lsquo말학(末學)rsquo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lsquo근본rsquo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

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

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

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

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

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

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

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

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대성전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보물 제141호

명륜당

서울 성균관과 지방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lsquo법전편찬왕조rsquo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lsquo조종(祖宗)의 성헌

(成憲)rsquo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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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

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

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

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

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

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

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

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

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1 祭祀에 關한 槪念 諸儀式은 傳統的 死者觀과 結付되면서 儒敎의 例에 따르는 規範的 思惟와 關係를 맺는 方法이 祭祀儀禮를 通하여 嚴格하고 緻密하게 規定되고 있으니 人間의 內面的 聖을 通한 神的 存在와의 疎通을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禮에 根據를 둔 諸儀式의 觀念 때문에 葬制方式에 있어서의 火葬은 印度로 부터 佛敎와 함께 導入되었으나 널리 普及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觀念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祭祀觀에 있어서 所聖은 이미 죽어 그 魂은 空中으로 그 形魄은 地下로 各各 分散되어 흩어져 있는 父母와 魂魄이 祭祀때에 ldquo合魂魄rdquo 즉 죽기 前 生時때와 같이 서로 다시 한데 합쳐져서 祭祀 同安 이나마 一時的 更生을 얻어서 祭祀의 供物을 즐기며 먹기를 바랐던 것으로 生葬 一時的 復活 更生이 祭祀로서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것이다

祭儀式의 强化에 力點을 두기 爲해서가 아닌가 生覺

建築 配置및 石物 等의 要所들에 關한 事頂들은 山陵都監 定順王后(1521) 思陵에 詳술되어 각 配置要素 마다 그 規格을 言及 하였을 뿐만 아니라 要素들 사이의 配置 距離까지 提示하여 주고 있다

分析의 槪念을 土臺로 分析한 結果는 다음과 같다1) 墳封은 穴에 該當하는 것으로서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 주는 場所라 할 수 있다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墳封은 地形上 人間의 俗的 空間보다 垂直的으로 높은 곳에 配置하고 있는데 이는 上方 下方의 位上的 關係라 할 수 있다 lt圖-79gt2) 墳封의 形態가 原形인 것은 場所가 갖는 基本的 形態로서 求心的인 特性을 象徵하며 領域 內 가장 神聖한 中心地임을 强調하는 것이다3) 祭祀를 擧行할 때 陵區域에의 接近을 不許容으로써 陵區域을 人間이 侵害하지 못하는 空間으로 認識하게 된다 祭祀의 모든 儀式的 行爲가 丁字閣區域에서 이루어진다 4) 惟門圖를 通해 보면 丁字閣區域에서의 4個의 紅箭門이 外部空間區域과 通路로서 象徵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垂平的인 4方位(東 西 南 北)를 意味하는 것으로서 景福宮의 勤政殿의 配置圖와 類似한 形態를 띠고 있다 卽 風水地理에서의 方位 槪念이 四神砂의 槪念으로lt圖-80gt 丁字閣區域에 再顯 된 것으로 把握할 수 있다 繼續 걸어서 三列階段을 올라가면 正方形의 拜禮廳이 있고 勤政殿이 中央에 位置해 있다四神相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5) 祭儀式에서도 東에서 始作하여 還生的 意味를 띠면서 西에서 樣式을 거두는 意味로서 方位性을 가지며 碑閣 또는 東쪽에 位置하여 東이 갖는 小陽의 意味로서 還生의 槪念을 갖는다6) lt圖-84gt 死者에 對해서는 丁字閣 內 祭床 뒤의 神座까지가 領域이라 할 수 있다 丁字閣과 參祀員과의 距離를 두게하기 爲함이다7) 惟門圖에서 볼 수 있듯이 3個의 區域으로 나뉘어진 空間은 空間의 位置를 內部空間 半外部空間 外部空間으로 把握한 것처럼 空間의 內的 秩序를 附與하기 爲하여 聖스러운 空間 半俗世空間 俗世空間으로 區分한 것이 아닌가 生覺된다8) 墳封이 位置한 곳은 紅箭門에서 丁字閣으로 가는 同安에 丁字閣의 높이와 볼륨에 依하여 視界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外部空間의 階層的 秩序 속 에서 聖스러운 空間이 쉽게 視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丁字閣이 設置되었고 그 높이와 부피가 設定되지 않았나 하고 生覺된다 墳封 位置의 海拔高가 人爲的인 築山이든 아니면 自然地形에 造形된 것이든 間에 丁字閣을 지나서도 封墳의 形象이 쉽게 視線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높낮이의 差를 通한 位階의 設定으로 짐작된다

이 穴이 位置하는 墳封은 宇宙論的 原形에서 볼때 世界軸을 象徵하여 死者의 魂과 魄이 天上과 地下에로의 分離 및 合致하는 象徵的 意味를 보여주는 場所인 것이다 檀君神話이니 中國 古代 天界思想에서 높은 山은 信靈이 至極한 象徵的 存在임을 볼 때에 그것은 空間的으로 宇宙의 中心인 아득한 곳으로 부터 聖의 傳達을 山脈의 軸으로 부터 連結한다 現在 人間이 居住하는 陽宅의 氣가 平面擴散的이며 住居生存의 펼쳐진 곳은 人間世界를 俗이라 할 때에 陰宅인 穴은 來龍으로 이어온 聖과 現世의 俗이 만나는 곳이며 靈魂의 場所라고 할 수 있다

王은 魂과 魄이 合쳐진 새로운 誕生 卽 잠에서 깨어나서 玄室에서부터 나와 俗人들과 만나는 丁字閣 卽 明堂으로 나오는 象徵的 意味를 갖는다 丁字閣의 東階의 南쪽에 立하여 있으며 執事들이 北쪽 窓戶門을 열어 丁字閣 北端의 神座를 向하여 定位하게 된다 禁川橋를 두고서 守僕房區域과 연결되어 있다 陵域의 境界는 조그만 川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川을 通한 새로운 區域에서의 進入은 神聖한 空間을 더욱 象徵化시켜 준다

陰宅의 境遇 方位 判斷의 基準은 高麗時代에 있어서의 陵基의 正面은 普 通 屛風石의 第七面石(午)을 正面(南쪽)으로 하는데 드물게는(正陵 玄陵과 같이) 隅石을 正面에 오게 한다 그러나 李王陵에 있어서는 第六面石(巳) 第七面石(午)의 사이를 正面으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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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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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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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로 하는 것이 普通이다 十二支는 地氣에 屬하는 것으로서 陰 陽과 五行이 結付되어 있으며 十二支獸라고 하여 動物과 結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들 方位에 特別한 뜻이 있다는 觀念이 中國에서 傳해져 오랫동안 俗信으로 내려왔다 즉 人間의 吉凶 等 運勢가 사는 곳이나 앞으로 가야할 方向에 따라서 定하여 진다는 生覺이 그것이다

方位의 吉凶은 北東向의 鬼門과 같이 固定的인 位置와 한해 가운데 有德한 곳에 있다는 有德의 方位와 같이 每年 변하는 方位가 있다

儒敎建築 文廟와 書院

o 文廟와 鄕校

- 향교 1邑 1校 원칙에 따라 설치된 일종의 官立學校

- 지리적 관계 左廟右社 지방읍성 宗廟 대신 문묘(향교) (邑城조건)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

3

8

9

1

21

6

17

14

1

-

11

8

3

2

3

5

-

5

2

1

1

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지방직렬형

(전묘후학)

직렬형(전학후묘)병렬형 중간형 기타

전당후제 전제후당

경기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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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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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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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稷壇 읍성서쪽 우사 2-3리

厲壇 북쪽 주산 중턱 5리

城隍祠 마을 주요 진입로상 읍성경계 5리

鄕校 대개 마을 북쪽 경사면 경관에 중요

마을 서쪽의 것은 社稷에 대한 제사관리 편리이유

城內의 경우는 주민 접근성 관리적 측면고려

- 기능 文廟享祀와 敎學의 양대 기능

후 조선중기 서원의 발달기에 성리학적 차원의 敎學 기능상실

白日場 養老會 등 비일상적 행사로 지역사회여론 수렴 기강 유지기능

유교적 질서체계 재정리 후기 명륜당 風俗 敎化차원 지방민간정치핵심

- 명칭 鄕校 校宮(주) 學宮 郡學 縣學

여러차례 移建 풍수적 이유(유목민족의 무의식적소산)

- 터가 불길하여 聖廟가 안정되지 못하면 땅을 가려 옮기는 것이

옛부터의 방책이다

- 禮法(儀式) 예법에 적합성여부가 건축평가의 기준

大成殿(聖人및 스승 현인 配享) 明倫堂 (스승거처 道강론장)

東西兩齊(學人거처) 門樓 ( 선비쉬는장소)

건립순서 대성전 -gt 명륜당-gt 양제 -gt 문루

(移建 修理同一) 구성위계질서

- 構成形式 廟영역lt-gt學영역 前廟後學形 전학후묘형 lt直列形gt

左廟右學형 좌학우묘형 lt竝列形gt

전묘후학형 한양 文廟 및 나주 전주 경주 대규모 향교 각지방중심향교

중국문묘제도에 따른 관할 향교의 모범형

전학후묘형 1 前齊後堂- 廟와 學 두 영역 독립적구성 門樓

2 전당후제- 학영역이 묘영역 향하여 개방됨 外三門

유형분포 지방별 큰 차이 호남 전당후제형 영남 전제후당형 主

구성형식의 지방별 유형 분포

-직렬형과 병렬형 및 中間形

직렬형 곧은 軸보다 꺽인 축 대개 전학후묘와 전제후당형

병렬형 廟 영역이 學 영역보다 뒤쪽 左側이 大盛殿이어야 하나 고루 분포

중간형 직렬형 병렬형 중간적 형태

병렬형식발생이유 임진왜란 후 복원시 대성전이나 명륜당을

부분적 공사하면서 공사하면서 공사시의 편의나 의도에 따라 변형된 가능성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廟영역 대성전과 兩廡 직각 공자가 제자를 거느린 형식 가장 일반적

대성전과 양무 同一線上 배치도 있다 변형()

o 構成建物

- 大成殿 3times2 間이나 3times3間 일반적

2高柱5樑 1평주5량 일반적 이익공이나 3익공계

유교 사당건축은 엄숙함과 절제를 표현하는 맞배지붕

- 明倫堂 향교 우두머리 강론 -gt 봄 가을 享祀 때 祭官 대기장소

5times2 間 三間大廳 양 끝에 온돌방 팔작지붕 우세

- 兩齋 기숙사 보통 3~4 間 규모 방 2-3칸 마루 1칸 툇마루 일반

- 門樓 영남지방多 風化樓 ( 風化 지역사회 교화의미)

3times2間 風영루 春風樓 팔작지붕

- 內神門 일각문 형식

- 犧牲壇 및 부대시설

犧牲 춘추 祭享 때 제물로 쓰는 짐승(돼지 흑염소)

희생단 돌로 쌓은 4각형 낮은 단 주로 내신문 앞

정요대 관세대(대성전 동쪽 계단) 下馬碑 紅箭門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o 書院

- 조선시대 私學機關

삼국시대 사학 + 고려시대 祀廟制 = 조선시대 中宗朝(16c 中)

- 官學機關 향교 위치와 대조 사학기관 서원 隱遁思想 독립존재

剪低後高의 지형 전학후묘의 배치형식 ( 背山臨水 風水)

- 주건물 강당과 사당 부속건물 齊舍 藏版閣 典祀廳 庫舍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 전체적으로 주심포 익공 또는 민도리집 양식 구조와 의장계획 소박

- 외부공간중 祠堂과 講堂의 前庭에는 장식이 없고 과정적 공간이나 後面

경사지에 석축쌓아 樹木 花草로 造園

石物도 시각적 효과보다 祭享儀式의 도구로서 실용성에 역점

蓮池는 규모가 큰 서원에 有 위치 다양 주로 方形 假山 無

굴뚝이나 담장의장도 타건축에 비해 소박 규모 小

o 초기형식 중국 白鹿洞서원 모방 소수서원 整然性 無

중기형식 발아기 16c 34 - 18c 14

제1형식 典型 사당후면 강당 중간 東西齊 前面

제2형식 제1형식 변형 東西齊 강당 後面

후기형식 서원건축 정리기 (18c 14-20c) 祭享기능만 갖고 강당 제사 생략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전국의 사원수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12주 유교건축과 주거건축 - 사례 발표V 발표보고서

유교건축

서원- 남계서원 도동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화천서당 소수서원

향교- 강릉향교 나주향교 울산향교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주거건축

독락당 향단 선교장 윤서도 고택 윤증 고택 추사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