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선교사의 입국과 복음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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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하기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F. Verbiest)가 제작(1674년)한지로도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重刊)되었다. 8폭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405*173.3cm [스크랩] 한국교회사(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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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F. Verbiest)가 제작(1674년)한지로도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重刊)되었다. 8폭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405*173.3cm

[스크랩] 한국교회사(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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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1871년 신미양요때 세웠다가 1882년에 철거된 척화비는 바로 교회의 박해 상징이기도 했다.

2

이수정의 개종

1882년 신사유림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성서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기독교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사(25)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⑥ 이수정의 죽음

귀국 후 이수정의 신상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인데, 이것은 일본교회문서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루

미스 역시 이수정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

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

를 토막내 처형당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문은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들이 처형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 6

명 중 유형준, 김한기, 박영우, 유송목 등과 뒤따라 귀국한 장은규, 박영빈 등 6명은 귀국 후 김옥균 잔당으로 몰려 처형

되었다. 이때 이수정은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때 귀국한 8명이 모두 처

형된 것으로 보도되었고, 박영빈과 함께 귀국한 이은종도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동경에서는 이수정의 추

모회까지 열렸던 것이다. 이은종의 처형 소식을 접한 일치영화학교(명치학원의 전신) 학생이었던 미야치 겐기치(宮地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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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의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나도 이모라는 최연소의 조선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6월 말일 경에 그는 선배 이주필 군의 권계를 물리치고 당시 조

선 정부에서 지금 돌아온다면 어떤 국사범의 큰 죄라도 용서한다는 통지를 굳게 믿고 근일 중으로 귀국한다 하면서 학교

에서 퇴학하였다. 나는 그가 근일 중으로 자기 부모들과 만나게 된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던 모습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수십 명을 싣고 가는 배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붙잡아 다 죽여 버렸다. 이 슬픈 소식이 그해 가

을에 축지 일치 영화학교에 들려왔을 때 다 비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이수정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형은 사실이 아닌 풍설이라는 주장이다. 이수정과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

왔던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은 1886년 7월 14일자 조선에서 동경으로 보낸 통신에“오랫동안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이

수정 씨는 귀국 후 일본에 있을 때 얻었던 지병도 근일에는 점점 쾌차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어 가며 국왕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고 우대하며 소중하게 여겨 근일에는 특별히 쌀과 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오윤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처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

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수정의 배교설이다. 이것은 백낙준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그는“이씨는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

서 이탈하였다.”라고 하면서 파슨(Ellen C. Parson)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이수정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문필로 널리 공적을 세웠고 미국에서는 그의 사진이 지상에 실렸다. 그는 마게도니

아인처럼 나타났으나, 가련한 이수정은 좋지 못한 영향에 빠져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잖게 불러일으켰지만 그 문을 박차

버렸다. 자기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한국에 보내어질 첫번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기회까지 던져버렸다.”

위의 견해에 대해 이만열은“과연 이수정은 배교함으로써 ‘잃어버린 지도자’가 되었으며, ‘일반 사회의 시각에서 사라졌

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시각에서도 사라졌고’그에게서는‘순교자적인 기독교 영웅의 삶’을 찾아볼 수 없으며, ‘초기 빛

나는 선교 활동에 비해 그의 종말은 대조적으로 침울’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우리는 일단 앞

에서 이수정이 귀국하기 전에 루미스를 만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귀국하기 전에 기독교 신

앙을 이탈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박용규 역시도“만일 이수정이 기독교 신앙을 정말 버렸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귀국

전 그 주변에 벌어진 정치적인 정황 때문에 잠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에 따르면 동생이 다녀

가고 오래지 않아 이수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는 책략에 점점 더 관심

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주의력이 자연히 성경연구나 번역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미

스는 이것이 곧 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박용규는“그가 수구파에 의해 처형을 당했든 아니면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

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에 바쳐진 그의 길지않은 생애 자체가 일종의 순교적 희생,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

이다.”라고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이만열도“우리는 그를 불타지 않은 등잔 심지 혹은 잃어버린 지도자로 보기 전에 인간의 연약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

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불러 사용하였는가를 살필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땅 한반도가 암흑에

잠겨있던 한 시대에 복음의 빛을 주시기 위해 택함을 받은 도구였던 이수정은, 한국 선교와 한글 성경 번역의 개척자 역

할을 감당하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가 소원했던‘성경을 조선에게’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

서 점차 구현되어 갔다.”고 하였다.

(4)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

① 한국 선교는 성경 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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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의주 젊은이들과 더불어 성경 번역을 하고 있던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 번역이 진행

되고 있었다. 해서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국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했으며, 선교사 입국

시 그 성경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다.

② 한국 선교는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의주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고향에 복음이 전해졌고,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소래교회가 먼저 세워졌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예수를 믿은 후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는 점 역시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③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시기 위해 깊이 개입하시고 섭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칠 수

있었으며, 지극히 세속적인 임오군란의 사건으로 그것도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만주에서 만주인들을 위해 활동하겠다고 입국한 로스와 맥킨타이

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한국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할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과거에

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로 운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을 전개하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

다.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 운동을 전도(선교)를 통해 현실화시킨다. 그 전도 곧선교의 현장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

의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하여 그 말씀을 받은 자들

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또 다시 교회 운동을 전개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위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결과 한국교회는 성경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었으며, 120여 년 전 복음의 불모

지요 세계에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21세기 세계 선교의 대명을 받고 움직이는 선교 대국

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사(2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3) 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

외국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선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

라의 문을 굳게 닫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高宗)이 집권하면서 한국의 정세는 바뀌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통상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정치·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서라도 문호개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세가 이렇게 변하자 선교에 대한 형편도 변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미국 교회 내에서는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으며,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시작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 선교사 유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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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계기로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한미수호조약을 시작으로 1883년 11

월 26일에는 영국 및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1884년 7월에는 러시아와 그리고 1886년 6월 4일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해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감추어진 은둔의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우호 및 통상을 내용으로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으

로 미국은 학자를 이 나라에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남미 칠레 공사와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을 역임한 푸트(General Lucius H. Foote, 福德, 1826-

1913)가 미국 초대공사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온 푸트는 1883년 5월 20일 고종을 알현하고 비준을 받아 업무를 시작하

였다. 미국에 공사를 파송할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을 감지한 푸트가 조정에 건의해, 정부는 민영익을 특명전권대사로

한 11명의 견미사절단을 미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1883년 7월 15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 아라비

스(The S. S.Arabis)호를 타고 일본을 떠난 견미사절단 일행은 오랜 항해 끝에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

했다. 비단이나 무명으로 만든 전통적인 한국 양식의 희고 느슨한 두루마기를 입은 민영익과 홍영식, 서광범 일행은 세

계적으로 유명한 미항인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항만시

설, 즐비하게 늘어선 기선들, 항구도시에 세워진 수십 층의 고층빌딩들, 그 속에서 반사되는 야밤의 휘황찬란한 전깃불,

6척의 미 서부 남성들, 정돈된 도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비옥한 평원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동양의 문물, 기껏해야 청나라를 통해 앞선 문물을 전하고 쇄국정책을

견지해야 한다고 외쳤던 수구파의 거장들은 서양문명의 발전 앞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들 일행은 아더(Chester

D. Arthur, 1830-1886) 대통령을 예방하고,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여정에서 한국 선교에 지

대한 공헌을 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윌리엄 그리피스와 가우처 학장을 만난 것이다.

① 견미사절단과 윌리엄 그리피스와의 만남

1883년 11월 27일 저녁‘조선: 은둔의 나라’의 저자 그리피스는 빅토리아 호텔에서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민영익과 서광

범을 만났다. 당시 그리피스는 한국에 대한 두 번째 작품, ‘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접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했지만 민영익과 서광범은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

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② 견미사절단과 가우처와의 만남

시카고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들 일행을 태운 기차가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톤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그 기차 안에는 한

국선교를 애타게 기다리던 미국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가 타고 있었다. 이미 출판된

하멜표류기, 몇 종의 조선 항해기, 그리고 1882년에 출판된 그리피스의‘조선: 은둔의 나라’등을 통해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견미사절단을 만나 3일 동안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1년 전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우처 목사는 견미사절단의 일행으

로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 가능성을 확인하고, 1883년 11월 6일 감리교 해외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Bishop C. H.

Fowler)에게“만일 은둔국인 한국에 선교사업의 정책을 세울 수 있다면 한국에서의 선교는 영구히 확립될 것이다.”라며

한국선교를 위해 2,000불을 동봉한 긴 편지를 보냈고, 후에 3,000불을 더 추가하여 한

국선교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1885년 그리피스가‘한국, 국내외’에서 지적한 대로“1883년 가을에

뉴욕의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선교를 착수하기 위해 5,000달러의 선교비를 전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가우처

목사는 그 당시로서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듣고 1884년 1월 31일 다시 자신의 지우 일본주재 미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

이(Robert S. Maclay, 1824-1907)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토록 요청했다.

“당신은 한국을 여행해 그 나라를 답사하고 선교부를 설치할 만한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교도 땅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그 영예스러운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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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것이며, 당신이 그 사역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교회에서 지금껏 해온 봉사에 걸맞는 보탬이 될

것입니다.”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 선교사 부부는 이것을‘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1884년 6월 24

일 제물포항에 입국했다.

맥클레이 목사는 중국 선교 초기(1847년)에 그가 거주하고 있던 푸쵸우(Foochow) 시의 거리에서, 중국인 선원들에게

구조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한국의 난파선 선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낯선 의상과 서 있는 모

습, 민첩한 동작 등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언젠가 한국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외국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생각을 접었었는데, 가우처가 한국선교를 타진해 달라

는 부탁을 하자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한국방문 목적인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해 서울주재 해외 공관들의 협력을 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을 아

끼지 아니 하던 중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맥클레이 내외와 좋은 친분을 맺

은바 있었는데, 귀국하여 외무부 외위문 주사로 있었으며,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자신의

한국선교에 대한 청원의 글을 왕에게 올렸는데 즉시 면담이 허락되어 7월 3일, 청원 3일 만에 고종으로부터 병원 선교와

교육을 허용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선교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맥클레이는 7월 8일 한국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외무부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는 해도 된다는 답을 얻어 낸 맥클레이는 이 소

식을 가우처에게 전달했고, 가우처는 다시 감리교 선교부에 알렸다. 이렇게해서 1884년 북감리교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이교의 나라 한국에서‘복음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숨기지 않은 채 교육 및 의료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

다. 맥클레이 자신의 고백처럼 “이 같은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치 강물처

럼 왕의 마음이 주의 손”에 달려 있어“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곳 어디로든지 왕의 마음을 돌리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고종의 윤허까지 받은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비교적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2) 선교사 파송 결정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아직 한국의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해외선교부 위원들의 의

견을 일축하고, 한국선교는 지금 시작할 때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이런 엘린우드

의 노력의 결과는“우리나라 혹은 그밖의 지역에 교육 사업 및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나 어떤 선한 사업을 고무하거

나 지원하는 목적”으로 맥 윌리엄스가 기부한 6천 불의 헌금을 포함하여 한국선교 개시를 위해 모여진 1만 불의 헌금으

로 나타났다(당시 두 사람의 선교사가 2년간 사역하는데 필요한 선교비는 5천불이었음).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던 맥 윌리엄스는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선교지에서 읽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간 신

문은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한국 공사를 대통령 아더(Arthur)가 뉴욕과 워싱톤에서 영접하는

기사를 게재해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또한 일본 주재 조지 낙스 선교사의 즉각적인 한국선교 개시 요청

과 중국주재 길버트 리드 선교사의 한국선교에 대한 강력한 요청, 이수정이 보낸 선교 요청 등이 선교지에 실림으로써

미국 각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선교를 지

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한국 선교열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의 많은 성도들에게는 선교헌금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선교비의 지원을 받은 엘린우드는 구체적으로 한국선교 후보생을 물색하기 시작해 1884년 4월 목사의 아들로 테네시대

학 의대를 졸업한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 존 헤론(John W. Heron)을 북장로교 파송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임명하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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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언더우드 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는 한편, 중국 남경에 있던 호레이스 알렌(Horaace N Allen) 박사를 한국으로 전임

시켰다. 이 명령을 받은 알렌이 1884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알렌은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미 감리교 선교부는 맥클레이의 편지를 받고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들을 감리교 선교지‘가스펠 인 올 랜드’(The

Gospel in All Lands)에 실었다. 선교지에 실린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고 한국선교를 위해 선교헌금이 각지에서

답지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진전되자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더 이상 한국선교를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의료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출신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2-1909), 그리고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를 선교 후보생으로 내정하고 한국선교를 가속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사(2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외국에서 복음을 접한 이들의 적극적인 복음 전파와 선교 청원에 힘입어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가 가속화되었다.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으며,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

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J. W. Heron)이 입국하여 미 북장로교 선교

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하였다.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1) 알렌의 조선 입국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은 1858년 4월 23일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의 후손으로 태어나

1881년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1883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세계 선교의 붐을 타고 1883년 봄 알렌은 북장로교 선교부에 중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

했고, 곧바로 그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 해, 갓 결혼한 아내 패니와 함께 중국에 파송되었다.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한 그는 상해를 거점으로 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알렌에게는 25살의

젊음, 2차 대부흥운동에서 체험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 미지에 대한 담대함이 있었으나, 선교 경험의 미숙, 어린 나이,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 아내의 건강 악화로 인해 첫 1년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알렌은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은 데

다 중국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선교지를 옮길 생각을 했다.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와 몇몇 다른 상해 의료 선교사들이 알렌 선교사에게 한국행을 권면하자, 마침 한국에 관심

이 있던 알렌은 함께 묵고 있는 윌리엄 홀트(William S.Holt) 선교사와 상의한 후, 1884년 6월 6일 한국세관(the Korean

Customs Service)의 요셉 하스(Joseph Hass)에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시 3일 후인

9일에 뉴욕 북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에게“한국의 여러 외국 공관들과 세관에서 의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

다.…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그곳에 가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일해 보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을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해 줄 수 있는지 전보로 알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7월 22일 알렌은 선교부로

부터 한국 입국을 허락하는 전보를 받았다.

아내가 출산을 한 후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그 해 9월 14일 남경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한 알렌은 9월 20일 제물포항

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상해에서 같이 온 중국인 어학 선생과 함께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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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에 입성했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공관의 공관의였고, 후에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공관 의료를 담

당했다.

고종은 알렌의 도착 후 푸트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자리에서 그가 이전에 선교사였는지, 또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했

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이때 푸트는“그는 미국 공관의이다.”라며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피해 나갔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교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양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예배를

드리며 자신을 이곳 조선으로 보내 주신 주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2) 갑신정변(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대원군의 실각 뒤에도 계속 개화정책 구현이 미흡하고 오히려 수구파가 정권을 주도하는 것을 본 개화파는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찬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민영익과 서광범 등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에 입국했던 상당수의 수구파 지도자들은 비록 3개월의 짧은 미국체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동양보다 수세기를 앞선 미국의 문화와 문명을 목도한 후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해야 한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 기류로 인해 민영익과 서광범의 동반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금이 가고 말았다. 민

영익은 서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원했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진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던 서광범과의 사이에 갈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불란서의 압력을 받고 있는 청국이 한국 주둔군의 반을

철수하면서 기회는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일본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화를 꾀하는 한국 내의 친일 세력의 개

화파들과 결탁해서 물리적으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하고,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 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각국 공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개

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에 동원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으로

국왕을 호위케 한 후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무기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박문국에 고용된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주선을 통해 일본에서 수입하여

조달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일본 공사 타케조이가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직접 행동할 사람들도 김옥균이 골라 일본

에 파견했던 유학생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거사에 참여한 개화파들은 저들이 원했든 원치 아니했든 간에 일제침

략지반의 앞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인 낭인 4인을 배치하고 일본

군 30명을 창덕궁과 경우궁

사이에 배치해 두었다. 12월 4일 저녁에 개최하기로 계획된 만찬회는 예정대로 일본영사를 제외한 서울주재 각국 외교

관들과 척족일파가 참석한 가운

데 진행되었다. 자객들을 연회장 가까운 곳에 숨겨 두었고, 안국동 별궁의 방화가 실패하자 연회장에 인접한 가옥을 방

화함으로 거사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수구파 지도자들이 외국 공사들과 함께 급히 밖으로 도피하자 숨어 있던 개

화파 자들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개화파 일당은 거사 후 급히 창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지금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속이고 고종을 통해 일본군의 호

위를 요청케 하는 한편,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겼다.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 안은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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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개화당은 각국의 공사, 영사들에게 신 정권의 성립을 통고하고 혁신정강(革新政綱)도 마련하여 발표하였다.

그들이 마련한 혁신정강은‘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관제의 개혁과 용관(冗官)의 혁파, 전세제(田稅制)의 개혁

과 재정의 일원화, 군제의 통합과 순사 제도의 신설, 고관회의에 의한 정책 심의 그리고 형정(刑政)의 시정’등이었다.

일본 군대가 12월 5일과 6일 왕궁을 지키는 동안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왕의 조서를 만들어 6명의 대신들을

왕궁으로 소환시켜서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12월 6일 아침 6시에 일본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외침이 들렸고, 그날 오후에 3,000명의 한국인의 지원을 받는

600명의 중국정예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훗날 그리피스가 말한‘유혈의 거리 전투’(a bloody

street battle)가 발생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일본 군대는 즉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갑신정변은 삼 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새로 건립한 우정국과 일본 외교부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일본 민간인이 살해되었으며, 권좌를 버리기를

거부한 홍영식은 중국 군대에 체포되어 중국군 캠프로 끌려가 거기서 처형되었으며, 갑신정변에 연루된 11명도 비참하

게 처형당했다.

청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갑신정변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12월 30일 청국 대사가 3,000명의 청군을 대동하고 한국

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일본대사 이노우에가 2,500명의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수개월 동안 조선 정국은 매

우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85년 4월 18일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협상이 이루

어져 양국 군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1885년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개화파들은 한국 선교의 장을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85년에는 박영효가, 1888년

에는 김옥균이 그리고 1895년에는 유길준이 서구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의 수용을 상소와 보

도 형식으로 주창한 것 등이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2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1. 한국의 첫 선교사 알렌

3) 알렌의 광혜원 설립

갑신정변 때 뜻하지 않은 화재로 왕궁으로 가기 위해 우정국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던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

도자인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나 찔려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마침 한국 정부 세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an Mollendorf)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민영익을 식당으로 급히 옮겨 응급조

치하고 한 시간 후 다시 세관본부로 사용하는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알렌 의사를 황급히 불렀다.

알렌 선교사가 도착하자 14명이나 되는 한의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칼에 맞아 찢어

진 상처와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의사들은 알렌의 치료를 극구 반대하였다.

저들은 ‘고귀하신 민대감의 몸에 서양 오랑캐가 감히 손

을 대고 치료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의 생명이 점점 위독하여지고 자신들

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반대할 수 없어 알렌을 부르게 되었다. 알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신유의 은사를 내리시사 민대감을 살려냄으로 선교의 길이 열리게 하옵소서.”라고 간절

히 기도하고, 치료에 임하였다. 알렌은 민영익의 깊은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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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이나 치료해 주었다. 비록 노련한 의사는 아니었지만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고, 민

영익의 외상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었다.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알렌에게 현금 10만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

하는 참관 벼슬까지 하사했다. 후에 민영익이 알렌의 은혜에 감사해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위해 하늘

에서 내려왔다." 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와 함께 알렌이 고백한 대로 민영익의 회복은 이 은둔의 나라 한국

의 지도자들에게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알렌이 민영익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

고 후에 직접선교의 길을 열어 준 최초의 서양병원 광혜원의 설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다. 알렌은

1885년 1월 한국주재 미국 공관 폴크를 통해서 한국에 서양병원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1885년 봄, 조선 정부

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냄으로써 그해 4월 10일 한국에 침대 40개를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인

광혜원이 개설될 수 있었다. 광혜원은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며, 갑신

정변 때 죽임을 당한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4월 26일 개설된 지 16일 만에 광혜원은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원되기 5일 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거점

으로 삼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1885년 6월 21일에 입국한 장로교 의료 선교사 존 헤론(John Heron), 같은 해 5월1일

에 입국한 학문과 경건과 복음의 열정을 균형 있게 겸비한 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 1896년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앨러스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

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오늘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이 되

었다.

알렌은 1887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다. 1889년 선

교본부로부터 재임명을 받았으나 1890년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서울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7년에는 총영사, 1901년에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했다. 이런 변천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은 알렌의 소명과 그의 모난 성품을 들어 제발 다시는 선교사로 임명해 주지 말 것을 미국 선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얼

마 후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에비슨 선교사가 도착해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알렌을 대신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알렌은 1884년에 한국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과 의료 활동을

통해서 선교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사(2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I.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식 선교사의 입국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입국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

러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1) 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1) 출생 및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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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영국의 런던에서 태

어났다.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고, 그

의 증조부인 토마스 언더우드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토마스의 아내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알렉산더 와우

박사(Dr. Alexander Waugh)의 딸인데, 박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서 능력 있

는 설교자였으며,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지닌 분이었다. 언더우드와 알렉산더 와우 박사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는데, 관대한 마음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을 들 수 있다.

언더우드는 이런 신앙의 계보를 가진 가정에서 신앙적 유산을 받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는 주의 재림에 대한 갈

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해서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시대에 영광

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몇년 후 재혼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프랑스의 불로뉴 슈메르(Boulogne Sur Mer)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가톨릭계 학교라 해서 소년들을 개종시키려 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소년들은 영국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흔들림 없이 개신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

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당시 세속화되어가던 가톨릭계 학교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

하지 않았다. 이에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

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여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 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해

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2)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

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

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

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주일 오후의 대부분을 자녀들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주일에는,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에 호러스는 언제나 설교자 역을 맡았다. 그는 의

자 위에 올라서서 정식 예배와 똑같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청중과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설교를 하곤 하였다. 프레드

는 가장 성자답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존은 장남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둘 중 한 사람이 설교

를 담당하는 것이 제격일 수도 있었는데, 설교자의 역할은 언제나 호러스가 맡곤 했다.

훗날 실제로 설교단에 서서 청중들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던 그 재능 그리고 한국의 이야기를 그렇게 힘차게 설파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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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상당 부분이 이 당시에

이미 발견되고 발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이 호러스에게 맡겨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미국에서의 소년 시절 동안, 소년들은 많은 복음사업에 관여하였다. 교회와 주일학교에서의 서너 번의 정규 예배 외에도

이들은 선교학교에 참여하였으며, 유니온 힐(Union Hill)의 암흑가에 종교서적을 배포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한 번은

술집에서 전도하던 중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나가라고 거칠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소년들

은 예의바르게 절을 하고 물러났지만, 난폭한 행동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 주에 침착하게 다

시 방문하였다. 소년들은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열 살 때에도 그 소란스러웠던 기숙사에서 기도할 수 있

었던 이들인지라, 이제 열여섯, 열일곱이 된 나이에 한두 명의 문지기가 저지한다고 해서 단념할 리가 없었다. 결국 술집

사람들은 옛날의 프랑스 학생들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굴복하였고, 이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어린 복음전파자들과 친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시절에 호러스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로브 교회에서 봉사하던 메이번 목사(Rev. Mabon)였다. 호러

스는 그의 밑에서 자라면서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하게되었고, 학자처럼 탐구하는 자세로 책에 몰두하여, 여섯 달이 지

나자 대학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헬라어를 모두 배우게 되었다. 메이번 목사는 호러스가 브룬스윅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

교에 입학했을 때, 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3) 청년기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

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

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1년 자신이 속한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

개혁교회(RCA) 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호러스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

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

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를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

라. 그는 수업이 시작되는 첫날 뉴 부룬스윅의 신학교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어떤 이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물

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

다.”고 하였다.

호러스는 말씀 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가

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과 복

음 사역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호러스가 신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거의 매일 그가 무슨 종교적인 일로 뉴 브룬스윅의 어떤 거리를 외투자락을 휘날

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의 급우 중 한 사람은 이야기 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이 학업에 지장을 주리라고 믿는 교수들은 그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러스의 활

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또

13

그가 하는 행동들이 학급에서 그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거나, 5시간의 수면과 19시간의 학업과 일을 강

철과 같이 견뎌내는 그의 몸에도 무리를 가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뉴 브룬스윅의 가장 큰 화란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이스튼 박사는 호러스와 마음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영

혼에 대한 정열로 불타오르던 그 목사는 이전에는 변화가 없고 냉랭했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계속적인 부흥, 놀라운 회

심들, 새벽기도와 저녁기도, 예배 후의 모임 등으로 넘쳐

나게 된 이 교회는 모든 이웃 교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호러스는 부목사가 감당해야 할 만

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주일 하루 내내 일곱 여덟 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열정적인 활동을 감당했다.

출처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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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스크랩] 한국교회사/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2)

1

옹천포구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귀츨라프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사(3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2)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준비

언더우드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네 살 때였다. 언더우드는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가 될

2

결심을 했었는데,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오

지의 선교부에서 일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는 데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학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뉴욕대학교에서의 4년 그리고 뉴 브룬스윅신학교에서 3년간 그가 경험한 배고픔과 어려움, 고학과 면학, 근면과 성실은

후에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훈련과정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관해 처음 접한

것은 신학교 2학년 때인 1882-1883년 겨울이었다. 그의 급우 가운데 한 사람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가 뉴

브룬스윅신학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200만 내지 1,300

만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어 이곳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 대한 선교를 촉구한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에 대한 윌리엄 그리피스의 도전을 통해서였다. 1882년, 언더우드의

뉴 브룬스윅신학교 10년 선배인 그리피스는 그 유명한‘조선: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를 출판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과 예리한 필치가 조화를 이룬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당

시로서는 한국에 관한 가장 무게 있는 서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고, 달레의‘한국교회사’나 로스의‘한국의 역사, 고대

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와 더불어 한국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관한 역사, 문화, 사회는 물론 한국의 대 외국교류관계, 그리고 선교 전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그

러면서도 국제 정세와 선교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술했다. 당시 세계무대의 뒤안에 가리어져 있던 은둔의 나라 한국

을 역사의 장으로 끌어낸 작품이었다.

또한 신학교에서 마지막 3학년을 보내던 1883년과 1884년 사이 뉴 브룬스윅신학교 학생들 앞에서 행한 복음주의운동의

대변자 피어선(A. T. Pierson)의 강연은 언더우드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다. 뉴 브룬스윅에 재학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점

점 더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준비한 터였기 때문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신학교의 마지막 학년인 1883년의 여름 동안, 언더우드는 뉴저지주 폼프돈의 한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선교의 명분

을 강조하여 줄기차게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당회는 만일 외국 선교지에 너무 많은 돈을 내어 놓는

다면 그의 보수도 지급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는“걱정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보수를 받지 않

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답했고, 이렇게 되어 선교에 할당되는 예산은 엄청나게 증가하였고(4배), 그도 목회를 마칠 무렵

에는 두 배의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1884년 11월에는 뉴브룬스윅 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즈음 그는 비록

인도에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한국과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올린 선교 제25주년 기념식 연설(문)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882년과 1883년에 걸치는 겨울, 지금은 토오쿄오의 명치학원에 계시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이었던 엘트먼 목사(Rev.

Dr. Altman)가 뉴 브룬스윅의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 한 보고서를 읽어주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조약에 의해 서양

세계에 마침내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은둔의 나라에 관한 것으로, 그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천이백만 내지 천삼

백만의 사

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교회가 문호개방을 위해 기도했고, 결국 1882년 슈펠트 제독을 통해 맺은 조약에 의

해 미국에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활동도

없이 일 년여를 보냈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

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하에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일 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온 터였습니다. 때문에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

을 물색해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일 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

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하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

신이 가지 않느냐?’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인도가 필요로 하는

3

것, 인도에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저의 믿음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해 각별히 준비해 오던 일들이 떠올라 제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는 개혁교회 선교부(The Reformed Board)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으나 그들은 새

로운 사업을 시작할 자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에도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

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에 남아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

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교회

의 요청을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막 우체통에 넣으려는 찰나,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언더우드는 서신을 보내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재차 장로교 선교부에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 막 문을 나서는 우체부를 지나쳤다. 엘린우드 박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사는 방금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선교부가 원래 파송하려 했던 사람이 사정상 갈 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수일 내에

임명을

받게 될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이 무렵 브루클린(Brooklyn)의 라파예트 장로교회의 맥윌리엄(Mr. McWilliam)씨는 미국 선교부의 위원 한 사람이 한국

의 문호는 아직 개방된 것이 아니라고 쓴 글을 읽고, 엘린우드 박사에게 한국의 상황을 문의하였고, 엘린우드 박사는 맥

윌리엄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맥윌리엄은 한국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데

써 달라고 그 자리에서 6천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주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미지의 나라였다. 해서 언더우드의 형제들은 만일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르는 저 어두운 지역으로 꼭 가야 하겠다면, 최소한 영국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

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884년 여름, 언더우드는 대서양을 건너 삼촌, 숙모, 사촌들을 짧은 기간 동안 방문하였

다. 언더우드는 런던 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직을 맡고 있던 삼촌인 에드워드 존스 목사(Rev.

Edward Jones)를 방문하여 그곳에서‘거의 20년 전에 우리도 그곳으로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 후론 소식을 못 들었

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 25일에 일

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많은 돈을 가지고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손수 커다란 카메라와 타자기

그리고 가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짐의 화물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써버렸다. 그

나마 남아 있던 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호텔 비용으로 다 나가버렸기 때문에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빈털터리

상태였다.

언더우드는 하나같이 한국선교를 염원하고 후원하던 헵번(J. C. Hepburn)을 비롯, 그곳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환

영을 받았다. 동양에서는 어디서든 선교사끼리 만나면 그들은 곧 형제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사람의 집, 지

갑, 시간 등 모든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선교사 신임장을 갖고 있

기만 하면

누구든 얼마만큼의 돈이라도 빌려주는 것이 통례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교사는 그 돈을 갚아줄 수 있는 미국의 커다

란 선교부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은 오래된 동양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정직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뒤

흔들 수 없는 확고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외떨어진 곳에 가는 증기선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언더우드는 배 위에서 그리고

선원들의 집에서 특별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인 이수정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으로 전령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그와 함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한국에 들어갈 때 그가 번역한 신약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

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웬만한 예인선보다 별로 클 것이 없는 증기선이 한국으로 출항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언

더우드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에서 며칠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일본말도 모른 채 낯선 집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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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어느 날 밤, 아주 경이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을 때, 일본말로 불려지는‘만세

반석’(Rock of Ages)의 부드러운 곡조가 한밤의 정적을 타고 은은하게 흘러나왔고, 뒤를 이어 엄숙한 기도 소리가 들어

왔던 것이다. 뜻밖에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흐뭇한 희열을 느끼며 언더우드는 소지품을 지

키려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었다. 로마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라든가, 한국인의 야만성이라든

가, 한 그루의 나무도 없고 지저귀는 새도 없으며 한 포기의 꽃도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서울에서 일어난 무

시무시한 폭동(갑신정변) 때에는 일단의 혁명가들과 일본인들이 간신히 항구로 도망쳐 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등

이었다. 그럼에

도 언더우드는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한국행을 단행하

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사(3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3) 언더우드의 입국과 활동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아내가 임신 중에 있

었기때문에 입국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미국 공관 폴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일주일 후 아내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갔

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피스가 말한 바,“ 이 땅에 상주한 첫 안수받은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4월 7일 서울

에 도착해 4월 10일부터 광혜원에‘약제사’로 들어가 의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일에 심

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가복음의 번역과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후 장로교 선교회의 헤론

(Heron) 의사 부부가 6월에 도착하였고, 에니 엘러스(Annie Ellers)는 국립학교 교사들과 함께 1886년 6월에 도착하였

다.

(1) 교육 사역

언더우드는 처음에 수술을 집도하는 알렌을 도우려고 했으나 피를 보고 두 번이나 기절해 할 수 없이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동시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John D. Wells School)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

였다. 독립 운동가이며 해방 후 입법의원 원장을 지낸 김규식이 부모를 잃고 가난에 굶주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를 만난

것이 바로 경신학교에서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양반으로서 관직에 있었는데 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양을 갔고,

모친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삼촌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이 아이를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건립된 고아원

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아이는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내

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 경우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사들과 선교사들의 반대

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결국 그 어린 생명은 정상으로 회복되었

다. 이 아이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혔으며, 마침내 한국 그리스도인 교역자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되

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회나 YMCA(1900년 설립)에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몇 년 동안 언

더우드의 비서로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2) 성경번역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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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사업 외에 1887년에는 성서번역을 추진하기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1890년에는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했다. 성서번역은 언더우드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

교사들이 성서번역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만 특히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아펜젤러, 스크랜톤의 노력은 대단했다.

한국에 도착한지 일 년 남짓 되어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공동 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하였다. 그는 처

음부터 성경을 번역·출판·보급하는 데 열심이어서, 아주 빠른 시기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산하의 번역위원회를 통

하여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였으며, 성서공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인쇄와 출판을 지도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번역위원회 소속이었으며, 언더우드는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와 언

더우드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기까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주님이나 한국을 위해 일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

으며, 둘 다 이 일에 값비싼 희생을 지불했다. 아펜젤러는 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익사하였으며, 언더우

드는 1915년 여름 휴가 때, 가을과 겨울에 닥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해 두었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번역 일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성경 번역을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사람의 수중에 있는 성경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한국을 누비며 많은 성경을 배포, 판매하였을 뿐 아니

라, 한국인 권서인들과 여자 권서인들을 지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고, 성심으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번역자들이 정확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중국어로 된 성경과 영

어 개역 성경을 참고서로 사용했다고 언더우드는‘코리언 미션 필드’(The Korean Mission Field)에서 밝힌바 있다. 또한

언더우드는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도착한 지 4 반세기도 안 되어 성경 전체가 한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

었다는 것은 결코 늦은 일이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택해 보내 주시고,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지도하신 위대하신 조력자와 교사셨던 주님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

을 것이다. 큰 은사를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하였다.

(3) 전도사역

언더우드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세례를 베푼 인물이다. 언더우드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은 노춘경이다. 그

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한국의 양반으로, 특히 외국 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종

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의 많은 동포들이 신앙

을 고백하

여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체 하면서, 언제나 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기회

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의 책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언더우드는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면서“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마치 그를 뒤따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한국에 동이 틀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한 사람의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만

드시려고 작정하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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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춘경은 1886년 7월 11일 비 리에 세례를 받았으며, 다음해 봄에는 또 3명이 세례를 받아, 이로부터 첫 교회가 조직

되었다. 1887년 12월 언더우드의 집에서는 7명의 세례교인만이 참석한 한국 최초의 성찬 예배가 드려졌다.

그 외에도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회의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며, 연합 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서’, ‘편집가로서’, ‘여행가로서’, ‘정

치가로서’그리고‘평화의 사도로서’그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한국선교의 계획 이면에 언더우드의 신앙과 이상과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이 반영되어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 양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생애에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화란개혁교회 교단과 뉴 브룬스윅신

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19세기 부흥운동의 전통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한국교회사(3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2. 언더우드의 입국

4) 언더우드 뒤를 이어 입국한 북장로교 개척 선교사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6월 20일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던 스크랜톤 어머니, 스

크랜톤 아내,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하고 이어 훈련된 간호사 앤니 앨러스(Annie Ellers)와 후에 언더우드의 아내가 된 의

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Lilias Horton)이 입국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론은 14살 때 부친을 따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로 이주해 메리빌(Maryville) 대

학과 테네시대학교(University of Tennesse)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교수 요원으로 남아 달라는 테

네시 의과대학의 요청을 뒤로 한 채 1885년 6월에 입국하여 그 달 21일에 제중원 의사로 임명받았고, 1887년 9월 알렌

이 선교사직을 사임한 뒤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사무엘 마펫이‘이상적인 의료 선교사’,‘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던 헤론은 언더우드와 스크랜톤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에도 임명되었던‘가장 성공적인 의사 및 외과의사일 뿐만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깊은 책임 의식을 갖고 있었던’의사였다.

1897년 12월‘코리안 리파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 헤론의 사랑하는 동료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

는, 헤론은 어느 누구보다도 맡겨진 의료 선교사역에 충실했던 양식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왕으로부터 가난한 옹

기장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국인은 숙련된 그의 손길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외과 의사였던 그가 휘두

르는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였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그의 헌신적인 치료와 정성을 잊

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치료가 단순히 숙련된 의술을 통한 치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겸손히 쓰임 받겠다는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형제, 그것은 바로 헤론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가난한 민중에서부터 여러 공관들과 왕의 충실한 시의였던 북장로교 선교사 헤론은 5년 만인

1890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하던 그가, 하루

이틀을 병석에 누워있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해진 것이었다. 둘러앉은 한국인과 여러 동료 선교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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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희미한 의식을 가다듬으며“예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가 함께 있

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의 시신을 묻을 만한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서울 가까이의 양화진에 매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언더우드와 헤론의 조사들이 거주하는 선교회 소속 집 뒤뜰에 임시 매장하려는 것도 허용되지 않

았다. 제물포에 외국인 묘지가 있었으나 한여름에 3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까지 시체를 옮겨 매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

다. 할 수 없이 그의 유해는 미국 공관안에 임시 매장되었다가 다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장되

어 고이 잠들어 있다.

헤론을 잃은 것은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전후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때 한국 땅을 밟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① 길모어(G. W. Gilmore, 吉毛, 1857-?)

길모어는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1886년 한국에 왔다가, 서울

의 유력자들의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설립된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업에 열의가 없는 모

습을 보고 실망한 뒤 귀국하였으며, 1894년엔 이 학원도 폐교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길모어는 전체 15장으로 구성

된‘서울풍물지’를 기록하여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길모어는 국토, 정부, 서울의 모습, 언어, 국

민, 가정생활, 복식과 장식, 여성의 생활, 놀이, 종교, 자원, 문명화로의 진보, 외교관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생활, 선교사업 등에 관해 보고, 느낀 바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② 기퍼드(D. L. Gifford, 奇普, ?-1900)와 헤이든(M. E. Hayden, 1857-1900)

1888년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기퍼드는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890년에는 정동여학당 학장 헤이든

(M. E. Hayden)과 결혼했다. 그는 1892년에 창간한 The Korean Repository에 한국 선교의 활동 및 한국문화에 대한 많

은 글을 기고했다. 언더우드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1900년 4월 10일 경기 남부지방의 선교 순회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헤이든은 1857년 미국에서 태어나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9월 29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서울 정동여

학당 2대 당장에 취임하였으며, 1890년 기퍼드와 결혼하였다. 기퍼드와 함께 여성 선교 사업에 주력하다 1900년 남편이

죽자 한 달 뒤에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③ 게일(J. S. Gale, 奇一, 1863-1937)

1888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게일은 그 해 YMCA선교사로 내한하여 조선성교문서회의 창립위원이 되었으며, 성

서공회 전임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 YMCA선교부 해체로 북장로교 선교부에 소속되었

다. 1900년부터 연동교회 담임선교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듬해 조선성교문서회 3대 회장에 선출되어 적극적

인 문서전도활동을 펼쳤다. 1903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위원과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1908년에는 조선예수교장

로회 독노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후에는 주로 성경번역과 찬송가 개편에 힘써 1925년

에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글과 저작들을 남겼다.

④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마펫은 1890년 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예수교

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펼쳤으며, 이 무렵 그는 모두 3차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본격적

으로 설치하였으며,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양신학교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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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부터 1924년

까지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 그는 숭

실학교 학교장으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업을 총괄한 서북기독

교의 대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⑤ 베어드(W. M. Baird, 裵偉良, 1862-1931)

미국 하노버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1890년 아담스(A. L. Adams Baird, 安愛理, 1864-1916)와 결혼하

고 1891년 3월 25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으며, 1895년 12월에는 대구로 선교구

역을 이전하여 활동했다. 1896년에는 서울 예수교학당과 곤당골 사립학교 교사를 겸직했으며, 1897년에는 평양지역 선

교회로 이전했다. 이전하자마자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하였다. 이 학당은 1906년 합성 숭실대학으로 발

전했다. 1916년 숭실대학장직을 사임하고, 이후 공과교재 집필 및 편집과 기독교서회 편찬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

으로 주로 문서사업과 성서번역작업분야에서 활동했다. 베어드 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송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여성사

업, 문서전도,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의 번역, 찬송가번역 등을 하는 한편, 문학소설을 저술할 정

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⑥ 빈턴(C. C. Vinton, 賓頓, 1856-1936)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1년 4월에 내한한 빈턴은 서울 국립병원 제중원 의사로 활동하다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직하고 개인진료소에서 치료, 복음전도에 전념했는데, 평양, 의주, 만주 등지에 이르는 전도여행

을 했다. 조선성교문서회의 창설에도 관여했으며, The Christian News, The Korea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등

을 발간하는 데 실제적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1904년에는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⑦ 스왈른(W. L. Swallen, 蘇安論, 1865-1954)

1892년 1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스왈른은 관서지방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평양지방 선교사업의 개시 및 평

양주재 선교사로 위임받았다. 한 때 함남 원산선교부로 파송되기도 했으며, 1899년 숭실학당 관리책임자가 되기도 했

다. 그 후 그는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1903년 마펫, 베어드 등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발족

하고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⑧ 그레이험 리(Graham Lee, 李吉咸, 1861-1916)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이듬해 관서지방 개척선교사로 임명

되었으나 형편상 서울로 돌아와 연동교회 설립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 1895년 한국인 조사 한석진을 대동하고 평양에

서 개척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1907년 1월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사경회

를 개최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⑨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1860-1956)

에비슨은 1890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 6월 미북장로교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그 해

11월부터 제중원 의사로 활동했다. 제중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890년대 이후 제중원을 실질적으

로 관리하는 역할을 하던 그는 1904년 세브란스의 기금으로 병원을 준공,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1913년 병원장을 사임

한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1934년까지 일하다가 은퇴 후 귀국했다.

⑩ 러(F. S. Miller, 閔老雅, 1866-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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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러는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이듬해 그는 예수교

학당(이후 경신학교가 됨)의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켰다. 1895년에

는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0년부터는 충청도 전도사업에 종사했는데, 이후 청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을 복

음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문서활동을 통한 기독교선교를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위와 같은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인해 복음 전도가 활기를 뜀으로써 북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선교단체가

되었다.

한국교회사(3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는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합법적으

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제물포에 도착한 직후 본국의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펜젤러는 자신이 외친 이 기원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해서 그리피스는 그에게‘한국 복음의 개척자’,‘ 한

국인의 사도’라는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1) 아펜젤러의 성장 및 교육 배경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 소더톤에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메노나이트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속에서 신

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

큼 독실한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1872년 11월 12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피터 피셔(Peter S. Fisher) 목사에게 세

례를 받고 개혁파 전통을 준수하는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러다 18세 때인 1876년 10월 1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며칠 후인 10월 11일부터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다 감리교로 이적했다.

1879년 경에 그의 교회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랭카스터에 있을 때

그는 감리교도들과 많은 교제를 하면서 여러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4월 5일자 일기가 증명하듯이, 이때 그는 한동안

정신적 불안상태에 빠져 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불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보다 풍부한 체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제일감리교회에서의 기도 모임과 조모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

의록을 검토하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택한 교회가 하고 있는 선한 사업은 나에게 기쁨을 준

다.”또 그 다음 주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오늘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 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

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 보

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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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1879년 4월 20일 스미드 목사가 목회를 하던 랭카스터 소재 제일감리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감리교도가

되었다.

아펜젤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위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봉사를 의미했다. 그는 고귀한 영혼

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지 소극적으로 선하다는 데 자족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였다. 신약을 읽으면서 그는 주님

이, 유혹에 넘어간 자나 버림받은 자, 혹은 소위‘죄인’들을 경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체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것

도 하지 않는 자나 선한 사마리아인과는 정 반대 되는 사람, 즉 자기가 정통임을 주장하는 게으름뱅이들을 당장 꾸짖으

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아펜젤러는 행동과 유리된 지식이란 질병이나 죄악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

령은 주후 33년 경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후 1870년에 바로 그의 면전에서 하신 말씀인 것처럼 그에게 실감나게 들려

왔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신 인자되신 주님의 말씀은 거

룩하고 위엄 있어, 그 자신에게 들려오는 절대적인 명령과도 같았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영혼의

목자와 설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해 랭카스터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음악적 재능을 포함한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예리한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농담의 요점을 재빠르게 파악하며 사물의 즐거운 측면을 판별해 냄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흥

겹게하여 많은 짐들을 가볍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가 후에 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준비

아펜젤러는 지방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랭카스터의 개혁교회 계통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을 마친 후, 뉴저지 주에 있는 두루신학교(Drew Seminary)에 갔다. 아펜젤러는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박사, 크룩스(G. R. Crooks) 박사, 업햄(S. F. Upham) 박사, 커목크(R. L. Cummock) 박사, 윌리(J. Wiley)박

사, 실버맨(J. P Silverman) 박사 그리고 1912년까지 학장직을 맡았던 헨리 부츠(H. R. Butz) 박사 등 영향력 있는 교수

들 밑에서 신앙과 지적인 훈련을 쌓는 한편, 당시 미국 신학생들에게 일고 있던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에는 일본에, 다음에는 한국에 복음선교사로 갈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신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펜젤러는 1883년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대회(The

Americal Inter-seminary Alliance)에 참석해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다짐했고, 그곳에서 장차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

을 불태울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만났다.

비렌즈(A. F. Behrends), 뉴톤(Richard Newton), 핫지(A. A. Hodge), 타운센드(L. T. Townsend), 고든(A. J. Gordon)

등 신학과 선교 분야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대거 하트포드 선교 대회의 강사들로 참여했다. 그리피

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은“모두가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었고 여러 교단들을 대표하는”“영감어린 강사진

들”이었다. 이

미 이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10월 22일 친구 워즈워드(J. S. Wadsworth)와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선

교를 결심했던 차였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전에 없는 선교 열에 불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아펜젤러에게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어넣었다. 본래 아펜젤러가 가려던 선교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나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친구를 대신하여 한국선교를 결심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odge)와 결혼식을 올렸다. 닷지란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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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미국인들은 그 대부분이 영국의 체스터(Chester)에서 1629년에 배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살렘으로 건너온 청교도

윌리엄 닷지(William Dodge)의 후손들이다. 이 가문 출신의 엘라 닷지 역시 가문의 이름에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

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와 동반자가 되어 그를 땅 끝까지라도 쫓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해외로 갈 준비가 되어 있던 여인이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결혼 후 곧바로 수더튼의 오랜 농가를 방문하

였다. 이곳 고향에서 크리스마스 주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그의 한국 선교가 확정되었으며 곧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집을 떠나기까지 한 달 밖에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아펜젤러는‘교회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순종하였다.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아펜젤러 부부의 한국행을 축하하는‘대단히 감동적인 파송예배’를 드렸

고, 거의 전 신학교 교수와 학생이 역까지 나와 이들의 한국행을 축복해 주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 젊은 학생들은

그가 먼 이국땅에서 자신들을 대표하여 그리스도의 사신의 직무를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며‘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

귐은’과‘우리 그 강에서 만날까’라는 찬송을 불렀다.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Bishop Fowler)에게 안수받은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그 다

음날인 3일, 이미 1884년에 미 감리교 선교사 후보생으로 지명된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내

외,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

1831-1929)과 함께‘아라빅’(S. S. Arabic) 호에 몸을 싣고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명문 예일대학과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스크랜톤은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오하이오 주에서 개업하다 아펜젤

러보다 앞서 1884년 12월 북감리교 한국선교 후보생으로 내정을 받고 같이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1885년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3월 5일,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제1회 한국 선교사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열린 야오야마 에이와 학원(英和學院, Anglo

Japanese College) 구내에 있는 맥클레이 집에는 맥클레이 부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톤 부부, 메리 스크랜톤 등 7명

의 선교사와 박영효와 이수정 등 2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감리교

한국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으며, 아펜젤러 일행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

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

드 일행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1885년 3월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 지도자들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던 기간이

었다. 자연히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 일행 중 스크랜톤은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피신해 와 있던 박영효를 만나 그로

부터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맥클레이 선교사도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망명해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 유

사한 말을 전해

들었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아펜젤러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박영효로부터 한국어도 배웠다.

한국선교는, 한국선교의 때가 무르익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해 한국인들로 하여금 선교를 요구하게 하시

고,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불타게 하시며, 모국 선교부와 교회들 또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아니

하게 하셔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게 하셨다.

한국교회사(3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3) 아펜젤러의 한국 입국

1885년 3월 31일 아펜젤러는 미스비시사의 트세리오(Tserio)호를 타고 한국을 향해 떠났다. 같이 여행한 승객 중에는

언더우드, 스커더(Scudder),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와 조선 왕의 고문인 묄렌도르프(von Molendorf), 지난 12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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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및 폭동(갑신정변으로 인한)에 대해 사과하러 서울로부터 토쿄에 파견되었던 한국 사절단들이 있었다.

1885년 4월 2일 오전 8시 15분, 항도 부산이 시야에 들어왔고, 얼마 후 그들을 태운 배는 부산항에 도착해 잠시 체류하

였다. 아펜젤러에게 부산에 대한 첫 인상은‘덥수룩하고 거칠며 헐벗고 쭈글쭈글하며 닳아빠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난

그 자체를 보는 것’같았다. 그럼에도 아펜젤러는 부산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다시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 주

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의 입국을 축하라도 해주는 듯 그날 봄을 재촉하는 4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서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3개월 전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국내 정치는 수없이 불안정했고, 기득권을 장악하려는 청·일간의 정치, 군사적 대

립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로 인해 서울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한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가 미혼인 언더우드만 입국을 허락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아펜젤러 내외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

다. 제물포의 한 호텔(Harry''s Hotel)에 머물면서 공식적인 입국허락을 기다리던 아펜젤러는 얼마 후 폴크로부터“한국

의 실정이 외국 여자가 들어와 살기에는 아직 때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은 잠시 일본에 돌아가 그곳에 있다 오

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4월 13일 국내 입국 약 일주일 만에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아펜젤러는 4월 18일 미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마 일 년 동안은 일본에 숙소를 정할 것 같다고 써 보

내면서 “한국에는 복음 선교사보다 의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체류하는 동안에 그는 인력거

를 타고 히고를 거쳐 쿠마모토까지 여행하였다.

이 열성적인 선교사는 황국(皇國)의 해변에 오래 살게 되지는 않았다. 곧 한국의 지평선에는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의 기

운은 장밋빛 고요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국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열정적인 순례자들을 초대할 수 있는 고

요한 아침으로 돌아갔다. 스크랜튼 박사는 5월 1일 서울에서 진료에 임하고 있었고, 4월 5일에 도착했던 언더우드는 그

땅에 거주

하는 최초의 복음 사역 선교사로 있었다.

6월 16일 아펜젤러 부부는 헤론(John W. Heron) 의사 부부, 스크랜톤 박사의 모친 및 처자와 함께 전과 같은 기선을 타

고 일본을 떠나 다시 바다를 건넜다. 오랜 옛날 중국의 선원 시인들이 처음으로 시를 지은 이래 이 바다는 폭풍우의 바다

로 유명하였다. 이 오랜 명성에 어울리게 파도가 높이 솟아 배는 심신을 혼란하게 할 정도로 흔들렸다. 그 사람이 가득

들어찬 배에서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박사의 아기뿐이었다. 6월 20일 배는 제물포에 도착하였

다.

아펜젤러 부부는 수도에 선교사 거주지가 마련되는 동안 7월 29일까지 제물포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그들은 항구

에 있는 집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의 상황을 아펜젤러의 전기 작가인 그리피스는 아주 재미있게 묘사하였

다. ‘그곳은 가게에서 구입한 포장지로 (벽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만 집이라는 구실을 해주는 것뿐 아니라 읽을거리까

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 부인은 벽에서 여러 상업상의 암호나 부호뿐만 아니라, 사업자의 주소 혹은 “건조한 곳에 보관

하시오”라든가 “고리를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까지 읽을 수 있었다. 때는 우기였는데, 지붕은 그물처럼 비가 샜기

때문에 다만 침대라도 젖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서울을 향해 떠났다.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남자들이 어깨에 짊어지는 가마를 탔다. 숨을 헐떡이며 옛

날이야기와 우스개 소리를 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가마꾼들은 길가는 데 힘드는 것을 잊었다. 한국은 전설의 나라

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하는 노동은 대개 노래나 이야기로 흥겨워지며 사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다행스럽

게도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여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그들은 스크랜튼 박사의

환영을 받았으며 알렌의 집에 임시숙소를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에 집을 사서 깨끗이 수리하고 청소하여 선교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피스는 당시의 상황을 ‘한국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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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은 일본의 것보다 훨씬 튼튼하고 따뜻하며 중국의 것보다 훨씬 안락할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온 보통의 근대적 크리

스천이 세내어 사는 것도 간편했다. 공간이나 목욕탕, 벽난로 등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들과 같은 부수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산소

나 산소와 수소의 복합체(물을 가리킴)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풍요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한다

면’한국에서의 생활은 꽤 견딜만한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미국 사절로서 서울을 다녀온 한 외교관이 워싱턴에서 다음 발령을 기다리며 유럽지역 요직으로는 발령이 나지 않

으리란 것을 알고 “교수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사이암(태국의 옛 이름)에 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한국에 다시 가는 것보

다는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에 대해 처음으로 한국에 온 사람은 공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나

라에서

사랑스런 사람들과 오래 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처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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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배재학당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스크랩] 한국교회사/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3)

1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경산학당 교사와 학생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2

고종의 선교윤허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인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한국교회사(3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4) 아펜젤러의 활동

정동에 자리 잡은 아펜젤러는 8월 3일 이겸라, 고영필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학교를 설립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그 후

19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아펜젤러가 한국선교에 이룩한 업적은 연합선교, 성경 번

역, 학교 설립, 신학 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다.

(1) 교육 사역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이며(4명의 학생을 가르침), 미국 공사관

의 폴크를 통해 고종의 허락을 받은 후 1886년 6월 8일에 학교를 시작하여 7월 2일에 첫 학기를 끝냈으며, 1887년 2월

에는 국왕으로부터‘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았다. 아펜젤러는 1887년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 지하실을 갖춘 교사를 지었다. 아펜젤러가 산업부를 둔 것은 한국인들이 육체

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3

아펜젤러는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 최고 출석수가 40명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 날까지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 나오게 된 것을 매우 고무

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펜젤러는 교육 사업의 초기부터 가능한 한 자조를 도입하려고 했다. 자조정책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대가를 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새 교사가 생기면서 구 교사는 기숙사로 사

용하였으며, 산업부를 두어서 근로 장학생들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조훈련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의

하나였다. 아펜젤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자조·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되어 나가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조하는 정신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헌신해야 할 숭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지도코자 하였다.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

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는 말씀을 교육을 통하여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해서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欲爲

大者 當爲人役’즉‘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

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였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을 통역관이나 교환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박학한 교양인으로 양성

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찾

아 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둔 것이다.

교육 사역을 통해 아펜젤러는 1887년 박중상, 한용경 두 학생을 개종시켜 예비 교인으로 만들었으며, 1888년 종교의 자

유가 없어 신학부를 시작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학생들 중에는 정규시간 외에 교사들을 만나는 말씀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8명의 학생들이 생겼으며, 1890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종교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성과를 올렸다. 1890년

대에 들어서서 아펜젤러는 신앙교육을 한층 강화하였다. 아직 국내에서의 신약성경 완역출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배재

학당에서는 한문신약성경을 교과과정의 일부로 삼았다. 교과과정의 일부로 했다는 것은 입학한 전원에게 기독교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몇 가지 현저한 변화가 유도되었다.

첫째,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증가된 영적 분위기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두드러졌고 격려의 원인이 되었다.

둘째,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배재학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 일반교사를 예비하

고 크리스천 사역자 즉 지방의 전임교역자를 훈련시키는 숭고한 기회와 숭고한 사업을 갖게 된 것이었다.

셋째, 위의 교역자 양성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896년 2월에 신학부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학부 개설은 1개월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것은 아펜젤러의 교육의 방향과 배재학당의 선교학교로서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펜젤러가 지도하는 신앙훈련은 학교의 분위기를 신앙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1890년대 후반

에 가서는, 크리스마스 때에 불신학생까지도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내린 축복에 대해서 증거하게 되었다. 이

렇게 학교는 완전히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해 있게 되었고, 복음적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힘 있고 진취적인 기구가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교과과정만 밟고 학교를 마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수는 아펜젤러의 교육이념과 신앙훈련에

큰 영향을 받아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때로는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한 주간씩 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성경

공부반이 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개인의 삶이 변화되자 그 변화된 삶은 누룩과도

같이 사회에 퍼져 들어갔다.

아펜젤러와 함께 교육 사역에 동역한 이들로는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 외에 벙커(D. A. Bunker), 노블(W. A. Noble)

등이 있다.

4

한국교회사(3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3. 아펜젤러의 입국

4) 아펜젤러의 활동

(2) 전도 사역

아펜젤러는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맥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바에 따라서 복음 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널리 전파하느냐 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

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고 확실히 믿었다.

①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던 초기에는 자유롭게 한국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교육 사역을 먼저 시

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5년 겨울부터는 주한 외국인에게 전도하여 1886년 4월 초에는 3명의 일본인이 주일 오

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그 가운데 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1886년 가을에는 일본 영

사의 집으로 옮겨서 모이게 되었고, 참석자도 12명으로 늘어났다.

② 한국인에 대한 전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며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

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알렌의 한국어 교사인 노춘경이 몰래 훔쳐서 읽은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영접하고 자

발적으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나선 일 때문이었다. 이 일로 인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인을 향한 전도

에 큰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해서 아펜젤러는 그가 설립한 학교를 통하여 조심스럽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이 하사된 1887년 2월경에 한용경이라는 학생이 복음의 진리를 찾도록

인도했다. 한용경은 1886년 가을에 중국어 성경을 보고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887년 2월에 들어서 몇 주

간 주일 저녁에 어둠이 깃든 후 참빛을 찾아서 아펜젤러에게 찾

아오곤 했다.

또 다른 기회는 그의 제자인 박중상이라는 학생을 통해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며

귀국해서 일본 공사관의 하야가와와 교제를 나누다가 세례를 권고받게 되었고, 아펜젤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

게되었다.

이 즈음에 그는 성서번역에 종사하면서 어학선생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를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세웠다. 그 이름이

서씨인 것으로 보아서 6년 전에 만주 우장에서 맥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펜젤

러는 서씨의 노력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그의 일기에 써 놓았다.

선교사들의 의료 및 교육부문의 활동과 영향력으로 선교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갔으며, 한불조약 체결 후에는 기독교에

대한 금제(禁制)가 약화되어 한결 수월하게 복음을 전할수 있었다.

5

아펜젤러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사서 수리하여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교

회당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887년 10월 2일 주일 날 저녁 그는 배재학교 학생인 한용경에게 두 번째로 세례를 주었으

며, 10월 16일 주일에는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녀는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로 세례 받은 여성이 되었

다. 10월 23일에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③ 전도여행

아펜젤러는 1887년 4-5월에 걸쳐 지방 여행에 나섰다. 서울을 출발한 아펜젤러는 고양, 장단, 미력, 파주, 임진강, 송도,

금천, 통천, 평산, 서흥, 봉상, 황주, 철도 등을 거쳐 23일에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평양감사 남정철의 영접을 받

으며 평양의 풍물을 견문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아펜젤러는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만이 저들의 품위를 높여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여행은 1888년 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이 북부지방으로 약 2주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은 의약품과 책자와

소책자들을 팔면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2주일간 전도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서울 주재 미국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로부터 전도여행을 중지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한국정부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 전도 사업을 계속해야 할 지 그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정부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후에 개신교의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 사업을 위해 1,830마일이나 지방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 1889년 2월에는 공주를 그리고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 8개 도 가운데 6개 도를 방문

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았다.

서울에서의 활동과 정력적인 지방 전도여행의 결과, 아펜젤러는 1889년 27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29명을 준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889년 당시의 교인 수는 정교인이 9명, 준 교인이 36명, 준교인 중에서 2명이 사망하

고 3명이 도중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주재전도사로서 임명받은

사람이 2명이었다. 또한 4명이 권서인으로 채용되었고, 부분적으로 3개의 교회 조직체가 있게 되었다.

④ 교회설립 및 건축

1887년 10월 9일 주일에 아펜젤러가 성경공부를 위해서 매입한 집인 벧엘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선교사

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선교사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가 번갈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4명이 참석한 한국인들의 예배에서는 아펜젤러가 1887년 12월 25일에 처음으

로 권서인 최씨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설교문을 작성한 후 그것을 읽어줌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런 설교는 아펜젤

러가 한국어에 익숙해져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

셔서 벧엘교회는 점차 성장하게 되어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

긴 했지만 이 무렵 주일학교가 아펜젤러의 집에서 30분간씩 인도되었다. 또한 스크랜튼 부인(스크랜튼 선교사의 어머

니)에 의해 여성들을 위한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부인 예배로서 첫째 날에 21명이 참석했다.

1894년 정동과 이화학당 구역에서 남녀가 각각 따로 모여 예배드리는 회중을 합치면 200명이나 되었다. 해서 예배당을

신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95년 8월 7일에는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교회의 신축공사는 잘 진행되어, 1896년

6월 3일에는 거의 창 높이까지 쌓아져서 건물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교회 건축에 소요되는 경

비때문에 크게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지만, 아직도 많은 경비가 요청되었다. 그는 이 건축경비 마

련을 위해 그의 아버지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통 끝에 신축 교회당은 1897년 7월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달 8일 종강행사 때 사용되었다. 그리

고 1897년 10월 3일 주일에 남녀 교우들이 모여 이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고, 그해 12월 26일에 예배당 봉헌식

6

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새 교회당이 완공된 것은 그 이듬해인

1898년 10월이었다.

(3) 성경 번역 사역

한국에 도착했을 때 선교사들은 존 로스 목사가 번역한 신약성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서 이것이 매우

불완전하며, 보다 나은 번역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들은 성서번역상임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아

펜젤러는 그 후 수년 동안 이 위원회의 한 구성원으로 일했다. 위원들은 선교사들 가운데서 번역 작업을 확실히 할 수 있

는 사람들로 선출되었다. 아펜젤러는 처음으로 뽑힌 사람들 속에 포함되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번역반에 소속되어 일

했다. 아펜젤러는 가능한 모든 회기에 이 모임에 참석하기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 일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

또한 아펜젤러는 기독교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책들을 출판하기 위해 대한성교서

회를 설립하였으며, 주일학교연합과 감리교 선교부 문서회의 후견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올링거 목사와 함께 출판소와

제본소를 시작하여 각종 신앙 서적을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올링거 목사와 그의 아내가 1892년부터 ''코리언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발행하다가 떠난

후, 그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95년부터 4년 동안 아펜젤러는 존스 목사와 함께 이 책을 다시 발행하였다. 이

잡지의 영향력은 전 동양에 미쳤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권위지로 통했다.

5) 아펜젤러의 순교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는 작은 증기선인 쿠마가와 마루호를

타고 가던 아펜젤러는 그가 탄 배가 기소가와호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로 가던 배에는 그의 번역 조사 조한규와 아펜젤러가 동행시킨 여학생 한 명, 광산기술자 미국인 보울비 그리고 2,3

명의 일본인이 동승하고 있었다. 한밤중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항해하던 배는 마주 오던 배와 충돌하게 되었다. 곧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보울비와 아펜젤러는 갑판으로 올라왔으나, 아펜젤러는 자신의 안전보다도 동행했던 조사와 여학생

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 해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건지려다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그는 한국선교 17년 만에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세상

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17년 동안의 한국 선교를 이렇게 정리했다.

“한국에서 첫 세례 받은 사람이 생긴 지 15년이 채 안되며, 첫 지방회가 조직된 지 12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

와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와 교회 경비와 교회 건물들의 경비를 위해 1,600달러의 헌금을 했습니다. 하나님

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한국교회사(3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알렌과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의 관심이 은둔의 나라 한국에 쏠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외에 타 선교회에서도 한국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1) 영국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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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1883년 말경 얼마 동안 제

물포와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간 주중 영국 전권대사 해리 팍스(Harry Parkes) 경은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의 문호개방에

관한 편지(1884년 1월 12일자)를 받고 한국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담은 서신을 띄웠으며, 찰스 스캇(Charles Perry

Scott) 감독은 이 편지를 켄터베리(Canterbury) 대주교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가 여섯 사람의 성직자와 랜디스(E. B. Landis, 1865-1898) 등 2명

의 의사와 함께 1890년 9월 26일 부산에 도착해서 주로 제물포와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성공회는 직접 선교보다는 의료 선교, 사회복지 사업, 문서 선교에 주력했다. 1890년 10월 제물포에 성누가병원, 1891

년 정동에 성베드로병원과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개원했다. 경기도 여주와 충북 진천에도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성공회는 낙동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성교이증(聖敎理證), 성회송가(聖會頌歌) 등을 발간하여 문서

선교를 시작했다. 영국 성공회는 6년 동안 한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습득하면서 직접 전도는 삼가해 오다가 1897년

10월 30일에 한독막에게 최초의 영세를 주었으며, 다음달 7일에는 김희준과 김군명에게 각각 영세를 주었다.

2)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영국령이던 호주의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89년이다. 그해 10월, 언더우드

가 “대단히 재능이 많고, 거룩하고 열정적이며, 이제까지 한국에 왔던 가장 훌륭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

했던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가 빅토리아성

장로교회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빅토리아성 장로교회는 교인이 약 3만 5천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단이었으나

외국선교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는 1860년 조직되어 호주 본토인들과 중국 이

민자들, 뉴 헤브라이즈(섣 New Hebrides)에 선교를 해왔다. 호주 장로교회 본부가 선교 사업을 통괄하지만 실제로는 빅

토리아 성 장로교회가 선교를 직접 맡고 선교비도 조성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호주 선교회라 하지 않고, 빅토리아 장로교

회 선교회라 불렀다.

조셉 데이비스와 그의 동생 메리 데이비스는 호주의 메카트니 목사가 운영하는 한 작은 선교지에 실린 한국 선교를 촉구

하는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영국 성공회 소속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

사가 알렌의 초청으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의 선교지를 돌아본 후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호소한 것이었다.

1889년 8월 5일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데이비스는 여동생과 함께 8월 21일 한국을 향했으며, 10월 2일 부산을 거

쳐 4일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5개월을 서울 언더우드 집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

하던 데이비스는 서울과 서북 각도에서 이미 선교가 시작된 것을 확인하고 남부지역을 개척하기로 언더우드와 뜻을 모

았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그리 오래 사역하지는 못했다. 데이비스에 대해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아스는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해(1889년) 여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스 목사가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언더우드와 똑같은

열정적인 정신, 똑같은 힘, 똑같은 언어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했으므로 언더우드는

그와 같은 조언자와 조력자로부터 앞으로 큰 축복과 도움을 받기를 원하였다. 물론 이 두 사람은 모두 기도에 강한 신앙

인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사업과 그들이 구원하기를 갈망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함께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

었다. 다음 해 늦겨울 이 아름다운 영혼은 하늘로 불려갔던 것이다. 그는 내륙을 여행하는 도중 천연두에 걸려 가까스로

한국 남쪽 해안의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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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부산을 호주 장로교 선교 거점으로 삼아 경상남도 지역을 무대로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부산 지역 선교 답사를 위해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어학선생과 수행원 한 명을 대동하고 충청, 경상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장장 300리의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환전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일, 열악한 여인숙에서의 숙박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한국 음식에의 적응으로 고생했지만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리고 사람들이 성경을 구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로 대단히 격려를 받았다.

3월의 한국 날씨는 쌀쌀해 충분한 준비 없이 여행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충분한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데이비스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수원, 남원, 하동을 거쳐 부산에 도착했으나 4

월 5일 입국한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천연두에 감염된

데다 폐렴마저 겹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데이비스의 부산선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빠 데이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동생 메리는 더 이상 홀로 남아 한국 선교를 강행하기가 힘들어 고향 호주로 돌

아갔다. 이 소식이 데이비스가 소속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에 알려지자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여론과 한께 교

단적인 차원에서 한국 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데이비스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호주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와 빅토리아주 장로회 청년연합회가 맥케이(James H.

Mackay) 부부와 벨 멘지(Belle Menzies), 진 패리(Jean Parry), 파셋(M. Fawcett) 세 명의 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

들은 1891년 10월 12일에 부산에 도착해 부산 초량을 거점으로 부산, 진주, 마산 등 경남 지역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농

촌 교회와 부녀자 사업을 위해 남다른 공헌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알이 되었던 것이다.

3) 미국 남장로교회

1892년에 호주의 빅토리아 선교회에 이어 미국 남장로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미 중국, 이

탈리아, 브라질, 멕시코, 쿠바, 희랍,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한 상태였다.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재중이던 1891년 9월에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에 들러 신학생

들에게 한국 선교 상황에 대해 강연하였는데, 이때 남부 출신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해 10월 미국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한국의 언

더우드와 밴더빌드대학교에 재학 중인 윤치호가 강사로 초빙을 받아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강연을 하였다. 이 대회는 언

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참석하였던 미국 안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선교대회였다.

해외선교를 꿈꾸던 테이트, 존슨(Cameron Johnson),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李訥瑞) 등 남장로교 소속 목

사 후보생들이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후에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全緯廉)이 일행에 합류했다. 4

명의 학생은 모두 선교회의 실행위원회에 한국에 보내달라고 신청하였으나,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 방법이 명확하지 않

다.’는 대답을 들었다.

언더우드는 북미의 다른 친구들의 협력과 자신이 애써 모은 거금 3,000달러와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형프레

드에게 부탁해 2,000달러를 마련해 총 5,000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해 써 달라며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선교기금

으로 보냈다. 또한 뉴욕의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가 25,000달러를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에 보내 왔다. 이

렇게 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더 이상 한국 선교를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선교를 지망하는 전킨, 테이트,

레이놀즈, 마티 테이트(Mattie S. Tate),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팻시 볼링(Patsy Bolling), 메어리 레이번(Mary

Leyburn) 등 일곱 명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그 이듬해인 1892년 10월 18일과 11월 3일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

다.

도착 후 이들은 레이놀즈를 회장으로 한 남장로교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하고 한국 선교를 시작했으며, 1893년 1월

에 장로교 공의회 조직 때 레이놀즈가 의장에 선출되는 등 남장로교 선교회는 처음부터 한국 선교에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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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즉시 한국어 습득에 들어가 1년 정도 지나 간단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자 1893년에 레이놀즈는 강화에 가서 복

음을 전하고, 테이트는 마포삼열과 더불어 평양을 비롯한 북부지역에 선교여행을 떠났다. 1894년 2월에 열린 제2차 남

장로교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사역지를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한 전도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절

감하여 1898년 11월 3일 의료선교사 잉골드(Mattie B. Ingold)를 통해 호남 지역 최초의 의료기관인 전주예수병원을 설

립했다.

한국교회사(38)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4)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98년이지만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889년이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한국 선교에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당시 영국과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학생자

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받고 있던 토론토대학이었다. 1887년 5월 토론토대학교 낙스 칼리지

먼쓰리(The Knox College Monthly)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의 말을 인용해, “복음에 문

을 연 마지막 나라, 한국이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1,500만의 영혼들이 주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국 선교를 촉구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 1889년 12월 15일 한국어를 한국사람보다도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선교사로 알려진 게일

(James Scarth Gale, 1863-1937, 奇一)이 명문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YMCA로부터 8년간 연 500달러의 지

원을 약속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듬해 3월까지 서울에 체류하던 게일은 선교지를 답사한 후 황해도 송천(松川)으로

옮겨 3개월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선교가 여의치 않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892년 봄까지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던 게일은 토론토대학

YMCA와 관계를 끊고, 1891년부터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적하고, 부산에서 원산으로 선교 거점을 옮겨 새롭게 활동을 시

작했다. 이어 게일은 마펫과 함께 1891년 2월 27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압록강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역사

적인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매켄지

(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 목사였다. 그는 선교회의 공식 파견 선교사가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내한했던 열정의 청년이었다. 그는 캐

나다 동해안의 라브라도(Labrador)에서 개척 전도를 하다가, 졸지에 한국 선교를 착상하여, 친구들에게 기여받은 제한

된 선교비를 가지고, 1893년 12월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를 가지고 한국 선교에 임했다.

그는 서울에서 몇 달을 지낸 뒤 벽촌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이 겨레와 함께 생활

을 했다. 이곳에서의 그의 삶은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삶 그대로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인해 이듬해 1895년

6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익숙하지 아니한 기후, 고독, 극단의 조식(組食), 열병, 이런 것들이 그의 의지를 꺾고,

그의 신체를 병들게 하여”마침내 낯선 솔내 초가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하기로 결정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의 외로운 죽음은 숱한 사람들

의 가슴을 뜨겁게 했는데, 그 가운데 솔내 교회의 한 늙은 신자였던 서경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에

매켄지에 대한 소래 교인들의 존경과 애정, 그와 같은 목

사를 파송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 한 장을 띄웠다. 마침내 캐나다의 장로회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R. Foote) 목사, 맥레(D. M.McRae) 목사, 그리고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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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파송하게 되었다. 이것이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게 된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의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 장로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는 이때까지 도와주던 한 사람의 재한 선교

사에 대한 후원을 중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제임스 게일이었다. 게일은 1892년 북장로교 선교부로 적을 옮겼다. 그럼

에도 토론토의 후원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자체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그 후원을 중지했던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또 한 명의 선교사는 후에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리영, 1890)이다. 토론토 의대 YMCA는 1890년 봄 하디가 의대를 졸업할 때 그를 한국 의료 선교

사로 임명했다. 하디는 1890년 9월 30일 최소한 8년간의 복무보장을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본래 하디는 게일과 함께

부산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수행할 예정이어서 1891년 4월 14일 도착하여 한국인 집 하나를 세내어 사역을 시작했고,

8월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합류했다. 1892년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부산에 선교사역을 착수하자

서울로 올라와 토론토 의과대학 스승이었던 에비슨(O. R.Avison)을 도와 잠시 제중원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다 하

디는 게일과 펜윅 두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그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고, YMCA와

맺은 8년간의 복무 약속이 끝난 1898년에 남감리교 선교회로 적을 옮겨 사역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8년까지 한국에는 미 북장로교, 미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각 장로교회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

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 장로교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5) 미 남감리교 선교회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으로 시작된 북감리교 선교에 이어 1896년 남감리교도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남감

리교 선교가 시작되기까지는 중국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와 밴더빌드대학 출신 윤치호의

노력이 컸다. 리드 선교사는 1892년 2월 입국해 중국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그곳 사정을 시찰하던 중 이미 “다른

여러 선교회에서 벌써 점거”한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남감리교 교인

이자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중서학원 교수를 지낸 윤치호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6년 5월에 열린 남감리교 해외 선교부는 헨드릭스 감독이 제출한 남감리교회 상해선교연회의 한국선교구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896년 8월 14일 한국의 첫 남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받은 리드와 그의 가족이 상해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방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남감리교는 1897년 5월 중국연회에서 분리하여 한국선

교부를 조직하고 리드 목사가 초대 감리사가 되어 송도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6) 대한(동아) 기독교(침례교) 선교회

침례교의 전신 대한(동아)기독교의 한국 선교는 두 개의 역사적 기원을 가진다. 하나는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라 씽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에 의한 것이다. 하

지만 이 둘은 하나의 뿌리, 즉 영미 복음주의운동의 선구자 고든(Adoniram J. Gordon)이 담임하고 있던 보스톤의 클라

렌돈 가(街) 침례교회에서 유래되었다.

근대 복음주의운동과 해외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펜윅은 그 사경회의 지도

자들과 말씀을 공부하면서 선교사로의 소명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1887년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로 북미에서 해외선교

열을 고취시키는데 기여를 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P.Wilder)의 토론토 방문과 그의 강연을 통해 한국 선교를 결심했

다. 펜윅은 몇몇 YMCA 회원 기독교 사업가들에 의해 조직된 한국 연합 선교회(Corean Union Mission)의 지원을 받는

독립 선교사로 1889년 12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펜윅은 소래를 거쳐 원산에 정착했는데,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선교를 시작하지 않아 새로운 선교지로 전망이 밝다

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펜윅은 매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문화, 예절, 전통, 풍습 전반을 대단히 존중했다. 그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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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언어, 관습, 사람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전도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

다. 또한 펜윅은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라고 확신하여 이를 직접 실행한 선교사이기

도 했다.

펜윅이 침례교와 유대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안식년 차 귀국해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고든이 목회하고있

는 보스톤의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를 방문하면서부터이다. 펜윅은 1889년 고든이 설립한 보스톤 선교사 훈련원에서 교

육을 받은 바 있었다. 펜윅은 1894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

하고 한국 연합 선교회와 결별하였으며, 같은 해 고든과 피어선(Arthur T. Pierson)으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 본국 친구

들의 협조를 얻어 중국내지선교회의 강령과 비슷한 원칙 하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그 선교단체의 책

임자로 한국에 돌아와 원산을 거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펜윅과 별도로 클라렌돈 가 침례교회는 한국 선교를 위해 사업가였던 씽(S. D. Thing)이 자기의 외동딸 엘라 씽을 기념

하여 엘라 씽 선교회를 설립하고, 1895년 폴링(E. C.Pauling) 목사 부부, 아만다 가들린(Amanda Gardeline) 양을 파송

하고, 이어 스테드맨(F. W. Steadman) 목사 부부, 사디 액클(Sadie Ackles), 아마 엘머(Arma Ellmer) 양을 추가로 파송

했다. 이들은 부산을 거처 충청도 공주, 강계, 홍성등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재정난으로 존속이

어렵게 되어 결국 철수하게 되었고, 1900년 스테드맨은 펜윅에게 선교지 교회와 그 전 소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따라

서 펜윅은 1889년 12월에 독립 선교를 시작하였다가 1895년 시작된 침례교회를 1900년에 흡수해서 침례교 선교로 전

환하여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한국교회사(3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Ⅰ. 선교사들의 입국

4. 각 선교회의 입국

7) 동양선교회(聖潔敎)의 한국선교

동양선교회는 성결교의 전신으로 1907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성결교는 단일한 하나의 교파로 시작한 교회는 아니

었다. 초교파적인 동양 선교를 위한 단체에서 출발해 자리잡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harles E. Cowman,1867-1924) 목사와 친구 킬보른(E. A. Kilbourne) 목사는 하나님

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하고 성서적인 순복음을 동양 여러 나라에 전도하겠다는 단심 하나만으로 후원의 약속과 그 전망

이 전혀 없는 소명의 길을 떠났다. 일본 동경에서 이들은 미 북감리교 전도사로 활동하다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뚜

렷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귀국한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1870-1939)를 만나 1901년 4월에 도쿄 간다(神田)에 중앙

복음 전도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시작한 그들의 선교사역은 그들 자신도 놀랄 만큼 날마다 신장되었다. 이들

은 본래 교파 형성의 의도 없이 출발하여 감리교 본래의 방향인 성결의 복음을 만인에게 선포할 생각이었으나 기구의 조

직이 불가피할 정도로 신도수가 확장되어, 결국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을 세워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 동양 각 지역의 선교를 시작했다. 성결운

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는 중생, 성경의 은혜로 말미암는 성화, 믿음에 의한 신유,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사상에 근거한 재림 등 사중복음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르침으로 표방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1907년에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의 복음의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나카다 쥬지는 혼다 요

이치와 함께 일본 복음동맹회의 파송으로 1904년 5월 11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 목포를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

울, 송도, 평양, 선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까지 순회하면서 주로 일본병사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지

만, 여러 곳의 한국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서북지역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영적 각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들이었기 때문에 나카다는 살아 움직이는 한국교회의 현장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제

물포를 거쳐 서울에 돌아온 나카다는 수원, 공주,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약 2개월 반의 한국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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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7월 말에 제물포를 출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킬보른의 장남 E. I. 킬보른에 의하면 동경성서

학원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 정빈(鄭彬)은 나카다의 한국전도여행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비록 2개월의 짧은 한국전도여

행이지만 이 기간 동안 나카다는 후에 한국선교를 개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동양선교회

한국선교가 개시되었다.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한때 연동교회 청년 신자였던 정빈이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시작했다. 정빈은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3월 동경백목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그 해 5월 2일 가우만, 킬보른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해 같은 학교 출

신 김상준의 협력을 얻어 1907년 5월 30일 한국의 최초 성결교회인 염곡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1908년 이장하가 동

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들과 합류해 이들 세 명은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를 태동시킨 개척자들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

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5월 2일 입국한 이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여행하는 동안 부흥운동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며 선

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종로 1가인 경성 염곡에 오륙십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세 얻어 임시 전도

관을 차린 후 카우만 일행이 2주간 집회를 개최했다. 카우만 일행이 돌아간 후 정빈과 김상준이 5월 30일 이곳에 복음

전도관의 효시인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 전도관’을 설립하였다.

정빈과 김상준은 창립집회 때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구도자가 5명이나 생겨나 힘을 얻고 일주일에 8번의 집회를 열면

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부흥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장은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빈과 김상준을 비롯한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었

다.

헌신적인 전도열에 힘입어 6개월 만에 272명이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비록 이 숫자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일고있던

경성에서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얻은 수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교단 배경도 없고 선교사가 상주하는 것도 아닌 데

도 소수의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한 전도관에서 그 같은 결실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부흥운동의 열기, 카우만과 킬보른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김상준, 정빈과 같은 일본백목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이장

하의 합류로 동양선교회 한국선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 특정한 교파의식을 갖지 않고 문자 그대로 노방에서 복음을 전해 구주를 영접하게 한 후

이들을 인근의 기존의 다른 교파 교회로 인도했다. 그러다 노방전도가 비난이 일자 정빈은 카우만의 도움을 얻어 1908

년 9월 현 을지로 입구인 동현(銅峴, 구리개)에 염곡보다 더 큰 150석의 중국인 소유 기와집 한 채를 월 20불, 6개월 기

한으로 임대하고 오전에는 성서학원을 개교하고 오후에는 전도집회를 개최했다. 그 해 11월 카우만과 킬보른이 다시 내

한하여 집회를 개최하면서 동양선교회는 날로 성장을 거듭했다. 정빈, 김상준, 이장하는 전도관이 협소하여 고민하던 중

이듬해 1909년 5월에 온 카우만 일행이 다시 경성을 방문하자 이들과 함께 장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무교정에‘신 성결장막’이라 부르는 경성중앙복음 전도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들이 자리를 잡은 무교정

은 모교동 또는 모전이라 불린 상가 지역으로 여인네들의 머리 장식과 갓을 파는 장사치들로 붐비는 곳으로서 가까이 인

접한 다

정은 경성에서는 기생촌으로 유명한 환락지대였다. 때문에 지극히 세속에 물든 서민들과 민중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

할 수 있었다. 이 교회가 정식으로‘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21년의 일이었다.

8) 기타 교단의 한국 선교

① 플리머스 형제단

1896년 12월 플리머스 형제단 노리마츠(乘松雅休, 1863-1921)가 입국해 수원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해 기독동신회

를 조직, 플리머스 형제단을 한국에 전파했다. 그는 일본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역할을 했던 조합교회 와다세와는 달리

정치적 권력과 무관한 입장에서 순수하게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② 구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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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은 1907년 10월 허가트(R. Hoggart)가 내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본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전통을

따라 구세군의 한국선교 역시 이 방면에서 진행되어 초기 한국선교가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③ 러시아 정교회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이후 정치적 불안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이른바 아관파천 후 한국에 대한 러

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1899년 혹은 1900년 한로(韓露) 해빙무드를 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

했다.

④ 안식교

1904년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식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선홍조와 유은현이 하와이 이민 길에 일본에 들렸다가

재림교회 전도사 구니야로부터 침례를 받고 이민을 포기하고 6월에 국내에 들어와 선교했다. 귀국 도중 하와이 개발공

사 계몽원 임기반에게 전도하고, 8월 10일과 9월 13일에는

구니야와 일본주재 재림교회 선교사 필드(F. E. Field)를 초청하여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다 1905년 11

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

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

성 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못했다.

⑤ 여호와의 증인

역시 이단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명 여호와의 증인, 만국성경연구회도 1912년 헐리스트 선교사가 내한 서울 계동 147번

지에 사무소를 차린 후 하나님의 거문고, 정부(政府)라는 책자를 발행하면서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

들은 한국에 경성 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하여 일본 요

코하마 복음인쇄소를 통해 1913년부터 월간 만인보를 발행해 국내에 반포하기 시작했다.

5. 선교사들의 입국과 복음 전래에 대한 평가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선교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종합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거의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둘째, 그럼에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개신

교 선교를 주도했다. 셋째,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정통적인 신학과 아울러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

람들이었다.

칼빈주의 전통에 기초한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은 영미의 청교도 전통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

받은 이들이었지만 무디를 비롯한 당시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감리교 출신 선교사

들도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구원의 주관적 체험을 동시에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의 소유

자들이었기 때문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비록 교파와 교단은 달랐지만, 복음주의 기독교를 이상적인 모토로 삼고 있었다는 점

에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교파 개념이나 교파 의식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자신들의 신학

적 관점을 포기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앙과 정신을 공유하고 선교 지향적이고 복음 전도 지향적이었다는 점에서 교

파의 벽을 넘어 통일된 복음화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복음 전파는 기대 이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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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이어져 1897년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늘어났다.

출처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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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윌손신학교

캐나다장로회 여선교회에서 설립한 여자 신학교와 학생들로 원산에 있었다.

동만노회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업으로 이룩된 동만노회(간도노회) 의 임원들이 귀국하는 선교사 럽을 환송하기 위하여 모였다

[스크랩] 한국교회사/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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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Ⅱ.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장로교, 감리교, 대한기독교선교회, 동양선교회 등)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손

색이 없는 실력을 갖춘 인물들이었으며, 신학적으로는 건전하고 보수적인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1934년 미국 북장로교는 한국 선교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선교 조직의 원칙과 실제에 관한

주제 발표를 했다. 이 발표에서 찰스 클락(Charles A.Clark)은 북장로교가 한국에서 성공한 열세 가지‘비결’가운데 제일

첫째로 꼽을 수 있는 비결은 “처음부터 선교부의 일

꾼들이 신학적으로 분명한 보수주의적 견해를 견지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클라크가 예로 든 신학적 보수주의는 인간의 죄인됨,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원,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실에

대한 믿음, 유일하고 최종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 등이었다.

이것은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19세기 근대 부흥운동과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 속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입국한 남북감리교 선교사들,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같은 19세기 근대 복음주의 해외선교 운동의 영향을 받

고 입국한 대한기독교의 말콤 펜윅, 근대 부흥운동과 해외

선교의 아버지 무디와 미국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숙이 받은 동양선교회의 카우만과 킬보른 등 모두 다 근대 복음주의운

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이들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교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

만 본국의 목회자들보다는 덜 교파적이었고, 선교열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1.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또 그와같

은 입장의 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rthur J.Brown)

선교사는“한국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25년에 걸쳐 입국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청교도 풍이었다. 잉글랜

드 선조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안식일을 지켰던 것처럼 그들도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켰다. 댄스, 흡연, 카드놀이

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들이 빠져서는 안 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성경 비평학에 있어서는 강한 보수주의였으며

또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했다.”라고 지적했다.

1)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의 계승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34년 한국 선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가르친 데 있음을 재천명하였다.

“한국 선교의 복음주의 메시지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선교부 산하 선교사들 대부분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검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2

서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사 다시 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강한 확신을 지

녔다. 이 신앙 속에서 성경은 우리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 가르치는 교훈을 유일하고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난 50년간의 한국 복음화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라 불릴 만큼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전형적인 복음주의 장로교 선교

사였다.

오랫동안 개혁파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타 전통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나라 확

장을 위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복음주의 연대를 꾀했던 화란개혁교회와 뉴 브룬스윅신학교의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

은 언더우드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해서 언더우드는 장로교인이면서도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주의 연합전선을 형성

하며, 영·미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한 아더 피어선과 매우 친 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언더우드의

개혁파 복음주의 정신은 맥코믹과 프린스톤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남장로교

선교사들 그리고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 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한국 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해 왔을 뿐 아니라, 한국 장로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도 큰 기여를 하여 한국

교회를 칼빈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선 개혁파 복음주의 교회로 든든히 서게 하였다.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

신학 교육 그리고 기독교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첫 선교 25년간은‘개혁파 복음주의’정신에 철저했던 맥코믹 출신 선교

사들이 한국 장로교 신학을 주도했다. 19세기 인디애나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 신학부로 출발한 맥코믹신학교

는 교수와 학생이 하나 되어 매일 수업을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시작했으며, 주일 오전에는 교수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주일 오후에는 학장이 예배를 인도할 정도로 학문과 경건을 조화시켰던 학교였다.

2) 영미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의 영향

한국 선교가 가장 중요한 선교적 토대를 구축한 것은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이 한국

에 입국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평양을 비롯한 한국의 북부지역을 선교 거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많

은 맥코믹신학교 졸업생들이 한국을 선교지로 택할 수 있었

던 데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역할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선교지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크레이그(Craig) 박사가 한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학생들에게 심

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자원운동(The Evangelical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강

력한 활동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디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학생자원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무디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진 시카고에 위치한 맥코믹신학교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

을 어느 학교보다도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선교 첫 25년 동안 복음 전도, 신학 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

르기까지 평양, 선천, 대구 선교부를 중심으로 선교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맥

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특히 평양신학교는 설립, 운영, 교수, 건물 건축에 이르기까지 맥코믹신학교와 매우 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학교 설립 후 20여 년이 넘게 교장직을 수행한 사무엘 마펫, 두 차례 임시 교장직을 지낸

번하이셀, 신사참배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교장대행을 지낸 곽안련, 이들 모두 맥코믹신학교 출신들이었다. 맥코

믹출신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의 신학 교육을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신학사상이 평양신학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계승

되었던 것이다.

맥코믹 출신에 이어 한국 장로교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프린스톤 출신 선교사들 역시 미국의 구학파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었다. 프린스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로버트(St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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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Robert)가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평양신학교 교수에 합류한 어드만과

해 톤 모두 프린스톤의 전통을 따라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며, 이와같은 성경관

은 평양신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기초, 천년왕국 신앙의 기초, 진화론의 기초,

계 개혁주의 신앙의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해 톤은 한국에 구 프린스톤의 전통를 심어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구 프린스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철저히 변호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서 “만

일 성경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안내자가 될 수 없으며 성령

의 인도와 통제 아래 기록된 책으로 고려될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 역시 구학파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한자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출신으

로 1892년에 파송된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선교사이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구학파 전통에 있으면서도

1905년 부흥운동으로 장·감 연합운동이 무르익을때 장로교와 감리교가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복음주의자였고, 후에「신학지남」에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자세히 소개할 만큼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

은 인물이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남·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은 구학파 전통에서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영국과 북미를 휩쓸고 있

던 전천년운동, 학생자원운동, 복음주의 연합운동, 부흥운동과 사회개혁운동으로 특징되는 19세기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당시 복음주의라는 말은 전통적인 개신교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배타적

인 의미에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따라서 반대되는 사람들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의하는 경향은 주로 1940

년대 이후에 대두된 비교적 새로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캐나다 장로교 및 호주 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캐나다 출신 게일

(James S. Gale), 하디(R. A. Hardie), 펜윅(M. C. Fenwick), 에비슨(O. R. Avison) 모두 YMCA와 학생자원운동의 신학

적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 노선에 철저하게 서 있었다.

또한 첫 호주 선교사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가 보여 주듯 스코틀랜드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영·미 부흥운동과 복음주의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

은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

스터 신앙 표준서를 수납하며, 장로정치를 채용한 (한국)장로교인들은 구 프린스톤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

치 않고 받아들였다.”라고 한 허버트 블레어(Herbert E. Blair)의 말 그대로였다

한국교회사(4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Ⅱ.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2. 감리교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아펜젤러는 이미 한국에 파송

되기 전부터 전국 신학생 선교 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하면서 해외선교에 대한 열의

를 다졌고, 1876년 10월 1일에 뚜렷한 변화를 거쳐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적을 옮긴 경험의 소유자였다. 경건주의와 경

험주의를 강조하는 감리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아펜젤러는 알렌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마지막까지

매우 열렬한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인으로 활동했다.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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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의식과 함께 복음주의라는 정체성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성경, 이성, 전통, 경험 등 네 가지의 균형을 통해 감리교 신학을 구축한 웨슬리의 전통을 따라 한국에 파송된 남·북 두

감리교 선교회 선교사들은 학교 배경은 달랐지만, 성경과 전통위에 확고하게 서 있으면서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

하는 전형적인 웨슬리의 후예들이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의 출신 학교는 드루신학교, 스카릿 성경학교, 컬럼비아대학,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마운트유니언대

학, 에즈베리대학, 밴더빌드대학, 윌리스대학, 케렛신학교, 유니온신학교, 무디 성경학교 그리고 예일대학이나 미시간대

학 같은 일반대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가운데 드루신학교는 웨슬리안 복음주의 감리교 교단의 교역자들을 양성

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로서 감리교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만큼 엄격하게 신앙훈련을 시키는 신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

었다.

아펜젤러가 이곳에서 신학 훈련을 받고 있던 1880년대에, 이 학교에는 당시 미국의 저명한 감리교 복음주의 신학자 버

츠(H. A. Buttz), 스트롱(J. Strong), 마일리(J. Miley), 쿡스(G. R. Cooks), 어펌(S. F. Upham)이 교수하고 있었다. 이들

은 “미국과 해외에서 일할 사역자들을 훈련시킴에 있어‘교육받은 목회자’를 양성한다는 감리교의 신학 교육 원칙”에 충

실하여“능력 있게 말씀을 전하고 경건한 삶을 살면서도 합리주의, 물질주의, 회의론, 진화론, 고등비평 등 현대사상의 도

전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목회자를 길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펜젤러는 이 학교에 재학하면서 이

같은 드루의 전통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신학과 경건, 신앙과 체험, 학문

과 실천을 조화시키려는 분위기는 드루신학교만의 것은 아니었다. 스카릿 성경학교, 컬럼비아 대학,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 에즈베리대학, 밴더빌드대학도 신학 사상의 주류는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였다.

이와 같이 감리교 선교사들은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서 감리교인이라는 자의식을 투철하게 가지고 있

으면서도 한국 교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기꺼이 장로교와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1887년 장·감이 발족한 성경번역위원회, 1890년의 예수성교서회, 1903년 이후 진행된 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장로교 선교사들과 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하여 공동으로 선교를 추진한 일, 그리고 숭실대학과 연희전문학교의 공동 운

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저들은 웨슬리를 따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존중했다. 장로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감리교 선교사들도 처음부

터 성경 중심의 선교를 추구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이 한국에서해야 할 위대하고 유일한 사업은‘말씀, 생명의 말씀’을 충

성스럽게 전해‘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문에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일찍이 성서번역에 참여하여 한

글 성경 번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한국감리교를 성경의 토대위에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한국감리교회는 성경의 권위만 존중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이고 선명한 복음주의 신앙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이미교회 강례(美以美敎會綱例)인데, 이것은 1850년 미국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일본에

서 번역 사용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1890년 아펜젤러가 번역하여 한국의 북감리교 미이미교회에서 한국감리교 교리

로 사용했다. 여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구속, 부활, 승천, 재림, 고

등성경관, 원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 교인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 가르침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같은 전통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는 1910년에 작성된 ‘감리교 대 강령과 규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성경

의 권위,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 예수 그

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 십자가를 통해 사람의 원죄만 속하실 뿐 아니라 사람의 스스로 지은 죄도 속하신다는 대

속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육체적 부활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감리교는 신앙생활 면에서 청교도 전통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요구했던 것과 같은 생활규범(주일 준수, 음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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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노예 소유 등)을 요구했다.

장·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세우려는 이상을 가졌고, 그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켰

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했다면 감리교 선교사들은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 충실한 전형

적인 웨슬리안 후예들이었다. 확실히 이들의 신앙과 신학은 1930년대 감리교가 신학적 변천을 맞기까지 성경을 존중하

고, 그 말씀을 따라 신앙의 삶을 살도록 지도하며, 그 말씀에 나타난 대로의 성령의 역사로 인한 부흥운동을 함께 주도하

여 한국교회의 훌륭한 기초를 든든히 세운 훌륭한 동반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교회사(4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Ⅱ.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3.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동양선교회는 18세기 감리교 요한 웨슬리의 신학과 19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의 결과로

생긴 교회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미국인 카우만과 일본인 나까다 쥬지가 일본에서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일본 동경에서 선교 사역

자를 훈련하기 위해서 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이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이들은 1907년 동양

선교회 선교사인 카우만 부부와 킬보른과 함께 한국에 와서

복음 전도관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한국에 세워진 첫 번째 성결교회가 되었다.

1) 웨슬리의 영향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웨슬리가 주창했던 ‘성결의 복음전파’를 생명으로 여겼다. 19세기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을

때, 미국 감리교 내의 일부 지도자들은 웨슬리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기성의 감리교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의 교단을 형성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부분의 감리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침체되고 있었으며, 교회는 극심한 형식주의에 빠졌고, 원

래 감리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이었던 성결의 도리는 거의 망각되고, 그저 교리로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이때에 하나님께

서는 몇몇 감리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강한 부흥과 전도운동을 일으키셨다. 이는 요한 웨슬리가 외친 성결의 부흥운동

이었다. 이것이 교파를 초월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2) 4중 복음의 영향

이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신자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한

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사도행전에 있는 오순절 사건이며, 모든 신자와 교회가 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구원에 있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는 칭의를 강조하였다면, 이들은 그 후에 두 번째로 받은 은혜를 함께 주장함으로 온전한 구원과 순복음을 제창하였다.

이런 성령운동은 기사와 이적을 동반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증거하며 신유의 복음을 말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운동은 당시 교회가 말하고 있는 지상천국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확신케 되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믿어 예수님의 전 천년왕국 재림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원, 성령 세례, 신유, 재림의 네가지 테마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여 순복음의 제

하에 이 사대표제를 고조하기에 이르렀다.

3) 만국 성결교회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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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복음을 고조하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 나름대로 복음, 특히 성령 충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각각 이름을 달리하는 교파를 조직하여 갈라지게 되었는데, 1880년부터 1925년 사이에 무려 25개나 되는 성결교

단들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 1897년에 넵(Knapp)과 리스(Rees)의 지도하에 만국성결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웨슬리가 가르친 중생과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당시에

고조하고 있는 순복음도 보존하기를 원하였다.

이 단체는 1913년에 확장, 재조직되면서 그 이름을 만국 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라고

불렀다. 또 그 후 1922년에 여러 성결 단체들이 합류하여 필그림 성결교회(The Pilgrim Holiness Church)로 발전했다.

동양선교회의 창설자인 카우만과 킬보른은 바로 이 만국성결교회에 의하여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동양에 나와 이 만국 성결교회와 맥을 같이 하는 선교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엄 히 말해 동양선교회가 모토로 내걸었던 중생, 성결, 신유, 재림 가운데 중생과 성결은 웨슬리 전통에 뿌리를 두고있

고, 그들이 갖고 있는 세대주의 재림신앙은 북미 성결운동과 무디 성경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유는 오순절 운동

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과 19세기 말 미국에서 발흥한 복음주

의 성결운동, 무디 부흥운동, 세대주의의 전통 모두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동양선교회의 신앙적인 전통

장로교와 감리교와는 달리 동양선교회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고 선교를 진행했던

것은 아니다.

동양선교회가 미국의 성결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이지만, 무디의 영향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일본 동양

선교회 창설자 카우만과 킬보른, 나카다 쥬지 모두 무디 성경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무디 성경학교는 철저한 성경의 무

오성 교리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종말론에 있어서는 무디의

영향을 받아 전천년설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천년설은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종말론이

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 이교의 신앙 가운데 있는 죽어 가는 영

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었던 무디성경학교에는 당시 어느 학교보다도 선교열이 강하게 일고 있

었다. 1899년 각 대륙의 저명한 선교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무디신학교에서 진행된 대규모 선교대회를 통해 해외선

교를 결심한 카우만의 경우가 보여주듯 당시 무디 성경학교

는 해외 선교사 양성의 요람이었다. 특별히 특정 교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무디 성경학교는 졸업생들이 다양한

교단 지원 속에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거나 독립 선교사로 입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카우만은 무디 성경학교에서

열린 선교대회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 복음을 제시한 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창설자 심

슨(A. B. Simpson)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은 동양선교회의 4중 복음은 카우만과 킬보른, 나카다 쥬지를 통해 동경성서학원에서도 가르치게 되었고, 여기

에서 교육받은 정빈, 김상준에 의해 한국교회에 그대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선교회 사상은 웨슬리안 전통,

19세기 성결 운동과 오순절 전통, 무디 성경학교 전통이 어우

러져 형성된 웨슬리안 - 알미니안 - 홀리니스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4. 대한기독교(침례교)선교회의 신앙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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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의 토대를 구축한 펜윅은 근대 복음주의 운동과 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펜윅의 담임 목사였던 도날드 매킨토쉬(Donald M.McIntosh)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출신 복음주의자로서 그의 신앙과

영성은 펜윅에게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쳤다. 엄격한 주일 성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경에 대한 사랑, 성경의 권위는

이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펜윅의 복음주의 신앙이 해외 선교열로 이어진 것은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였

다. 1887년 7월 19일부터 28일까지 피어선(A. T. Pierson)을 주강사로 하여 나이아가라 호수에서 열린 나이아가라 사경

회는 성서주의, 세대주의 전천년설, 성결, 플리머스 형제단, 부

흥운동 그리고 케직 운동의 영향으로 세계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조지 말스던이 지적한 것처럼 비록 웨슬리

안 성결운동의 전통과 경건주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나이아가라 사경회는 대체로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펜윅은 1887년 7월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선교사로의 헌신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펜윅은 한국에 파송된 여타 다른 초기 캐나다 개척 선교사들인 게일, 하디, 에비슨처럼 19세기 근대

영미 복음주의운동을 특징짓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다. 펜윅은 고든, 와일더, 브룩스 그리고 피어선

과 같은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학생자원운동에 친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근대 복음주의 운동과 해외선교운

동을 특징짓는 나이아가라 사경회와 학생자원운동은 펜윅에게 해외 선교열, 전천년설 종말론, 근대 복음주의 정신을 강

하게 심어 주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해 현대주의에 대항하며 선교열을 고취하기 위한 복음주의 연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구령의 열정

과 해외 선교열, 거듭남의 체험 등 당시 북미 전역에 일고 있던 해외 선교열을 동반한 복음주의운동의 정신을 그대로 계

승한 채 한국 순회 선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감당했다.

펜윅은 한국 순회 선교회의 원리와 목적 선언서에서‘이 선교회의 성격은 초 교파적이며, 정신은 복음적이고, 방법은 진

취적이고,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의 터 위에 세우지 않으며, 오지 선교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에게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한다. …본 선교회의 교리적 표준은 배타적으로 어느 한 선교단체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개혁교회들이 포용

하고 있는 위대한 기본적 진리 바로 그것이며, 소위 복음주의 연맹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라고 하였다.

5.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에 대한 평가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감리교, 동양선교회(성결교), 대한 기독교(침례교) 등 개신교 선교사들은 학생자원운동과 무디 부

흥운동 같은 근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개혁파 복음주의자들이거나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개혁

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교육받은 남·북감리교 선교

사들 그리고 동양선교회의 카우만이나 킬보른, 대한기독교의 펜윅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

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영혼 구령에 대한 뜨거운 선교 열정으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파별 특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학 사상 면에서 복음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할 수 있었고,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신학적 토양은 그대로 한국교회에 스며들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토양을 결

정짓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한국교회사(4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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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한국의 상황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으로 왔다고 할 수 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로마 가톨릭 신자

들과 선교사들이 핍박을 당했는데, 이제는 그때처럼 적대시 당하는 일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가 처음 시작되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의 주거환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열악하다 못해 참혹한 형

편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언더우드의 부인 L. H. 언더우드는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

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양식으로 지어진 집은 한 채도 없었고, 위생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조했으며, 미국인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은 알려진 것이 없었고, 우편물도 자주 배달되는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초기의 개척 선교

사들은 아주 심한 고독과 격리와 시련의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길은 대부분 협소했고, 우기만 되면 때때로 말의 배에

두른 안장 띠까지 흙투성이가 되어버리는 실정이어서 통행이 불가능했다. 개천에는 썩은 시궁창 물이 흐르고”있었다고

했다. “수년 동안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았는데, 지하실도 없었고 창문에는 창호지를 발랐을

뿐이었다. 가끔 호랑이와 표범이 성 내에 나타나기도 하고, 방충망이 없어서 모기와 파리 떼에 시달리기도 했다. 천연두·

이질·장티푸스·발진티푸스가 자주 발생하였고, 그러한 질병들은 여러 외국인의 목숨을 앗아갔다.”"당시에는 오랫동안

천연두가 한국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 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의 병이

완전히 낫기 전까지는 가족의 수를 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모든 외국인들도 피할 수 없이 이 병과 직면

해야 했다. 거리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업고 다니는 일도 있었으며, 우리 하인들이 자기 집에서 우리 집 부엌이나 아이

들 방으로 전염을 시키기도 하였다." ”1886년 여름에는 무시무시한 아시아 진성 콜레라 전염병이 서울과 그 근교에 퍼

졌다. 시체가 거리와 골목길 여기저기에 널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쓰러져 한 시간 안에 죽어갔다.”고 했다.

당시 환자들을 돌보았던 알렌에 의하면 7월 15일부터 9월까지 일반 사망자 940명을 포함하여 총 7,092명이 사망했는

데, 심할 때는 하루에 460구의 시체가 운반되어 나갔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환경적인 면에서만 열악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는 더욱더 열악했다.

“한국인들은 온갖 종류의 미신을 믿고 있었다. 무당들이 집안일에 깊이 관여하여, 생일을 맞았을 때나 병들었을 때 그리

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사람들은 무당을 불렀다. 무당들은 절대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힘을 가지고, 백성들뿐만

아니라 통치자들에게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귀신·도깨비·조상의 혼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운 것들에 대

한 미신이 하층민들이나 여자들뿐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이런 환경 속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언어를 배우고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이와 같은 열악한 외적 환경과 투쟁

해야만 했다. 1934년 한국선교희년 기념식에서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가 말한 것처럼 초기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 가운데“비우호적인 정부, 적대적인 민중, 교

과서, 문법서, 혹은 사전으로 정복되지 못한 언어, 인종적 장애, 미신, 편견, 악령의 역사”는 단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불과했다. 외국인이 조선의 내지를 여행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동행할 수 있는 신뢰할 만

한 내국인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으며, 더구나 신뢰할 만한 통역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낯선 이국 환경

과 생활, 이질적인 종교관, 전통과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 정부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중, 삼중의 난관과 투쟁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선교사들 중에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말한바 있는‘혐오스러운 첫 인상’을 극복하지 못하

여 한국적인 것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여 몇 년 견디

지 못하고 떠나기 마련이었다. 첫 인상을 극복하고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며 일한 선교사들은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좋아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였다. 그는 한국의 환경에 대해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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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보고서를 본 사람들은 한국을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이처럼 기쁨에 넘치는 땅으로 오게 된 것을 하나

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오랜 지병은 생각하거나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소하고도 일시적인 어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그의 부인은 회고했다.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선교사들이 입국 후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은 역시 한국의 수도 서울이었다. 당시 서울은 행정기관과 외국공관들이 위치

한데다“역사, 지리적 위치, 현재의 전략적 중요성에 있어서 놀라우리만큼 흥미 있는 도시”였으므로, 서울을 제일 먼저

선교 거점으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여섯개의 장·감 선교회 중 다섯이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갑신정변을 통해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을 개설할 수 있도록 환경을 이끌어 가신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게 누구

도 풀 수 없었던 굳게 닫힌 금교의 빗장을 여셔서 선교를 시작하게 하셨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두 명의 학생

으로 배재학당을 개설하고, 1886년에는 성경공부반을 열어 한국선교를 조용히 확장시켜 나갔고, 언더우드 역시 광혜원

에 거점을 두고 경신학교의 전신인 고아원을 열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1885년 6월

21일, 의사인 알렌 부부, 스크랜톤 여사 및 의사인 헤론 부부가 모여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외국인 연합

교회는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알렌의 일기에 의하면 1885년 10월 11일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톤 부부, 스

크랜톤 여사와 자녀, 언더우드 목사, 알렌 부인, 헨리 루미스, 방한 중인 미국 마리온 호 함장 러(M. Miller), 회계주임

트레일리치(Trailich), 의무관 크레이그(Craig) 등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에서 최초의 개신교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인 예배가 진행되면서 영국대사관 직원들도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외국인 연합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1886년 4월 25일 부활절, 스크랜톤의 딸 마리온 스트랜톤과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가 유아세례를 받

았고, 1885년 가을 일본공사관 직원으로 부임해 아펜젤러 집

에서 열린 외국인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하야가와 데츠야가 이날 아펜젤러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참석자가

늘어나면서 공간이 비좁아지자 미국 공사 파커의 배려로 1886년 11월부터는 미국공관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외국

인 연합교회는 교세가 성장함에 따라 1886년 11월 6일 토

요일 밤에 모여 아펜젤러를 담임 목사로 한 목사위원을 선출해 교회 조직을 완료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며 한민족 복음화를 꿈꾸었다.

정부는 비록 공식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담화하거나 학교나

병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또한 정부는 선교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아직 언어적 준비가 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본격적

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지양하고 간접 선교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던 것은 시의

적절한 선교 방법이었다.

1) 노춘경의 회심과 세례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는 일명 노도사라 불리는 알렌의 어학 선생 노춘경이었다. 노춘경은 알렌에게 한글을 가

르치던 어느 날 그의 책상에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복음서를 훔쳐가서 그 책을 밤새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해

서 노춘경은 자신의 이와 같은 결심을 알렌에게 알렸고, 알렌은 그를 언더우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후 노춘경은 언더

우드의 개인적인 양육을 받으며 신앙이 급속히 성장해 양육받은 지 얼마 후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복음에 대한 자신의 확

신을 고백하고 살든 죽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언더우드에게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신과 더불어

한국선교는 처음부터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는 분명한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한국 선교의 방향을 설정해준 사건이기도

했다.

1886년 7월 11일, 노춘경은 서울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비 리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는 그날 그 현장을 아펜젤러와 길모어 등 동료 선교사들이 지켜보았고, 노춘경 외에 조선인들은 한 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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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노춘경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 한국교회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

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노춘경이 세례를 받은 지 약 6개월 후인 1887년 1월 23일,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3인이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국내 세례자는 4명으로 불어났다. 그 추운 서울의 겨울 날, 세명이 세례를 받던 그 시간, 밖에서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

여 헐버트 선교사가 조심스럽게 망을 보고 있었다. 노춘경은 물론 그 후 세례를 받은 이들은 새로운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 목

숨을 내건 문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신앙을 고백할 수 없었다.

1887년 7월 24일에는 배재학당 재학생 박중상이, 그리고 10월 2일에는 배재학당 학생 한용경이 아펜젤러에 의해 세례

를 받았다.

한국교회사(4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2. 서울에서의 복음 전파

2) 새문안교회 설립

한국에 온 지 1년 여 만에 처음으로 세례를 베푼 언더우드목사는 그 후 다시 1년 여 후에 한국의 서울에 교회를 설립하였

다. 이는 소래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세워진 개신교회였다.

1887년 9월 27일에 만주에서 온 로스 목사와 광혜원의 설립자인 의사 알렌과 14명의 신자들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

방에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정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서상륜과 백홍준 두 사람을 장로로 피택하여 임직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새문안으로 장소를 옮겨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었다.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라 불리어진 이유는, 옛날 돈의문을 세워 그것을 ‘새문’이라 하고 그 안쪽을 새문안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이 교회의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전도를 통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언더우드 목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권

서인들이나 매서인들을 통해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로서 세례를 언더우드에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새문안교회 70년사는 이때 모인 14명의 신자들은 대부분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었다고 기록

하고 있다.

또한 1887년 9월 30일에 쓴 언더우드의 편지는 새문안교회의 설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밤에 우리는 이 땅에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여기 참가한 한국교인의 수는 14명이었고,

지난 주일에 또 한 사람이 등록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매일매일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사업이 일취월장함을 목

격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언더우드는 황금시기인 20대 젊은 나이에 만주 우장(심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15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존 로스 선교사를 새문안교회 설립예배에 초청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로스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890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신약성서 일로 배를 타고 서울에 갔다. 배편은 유일한 수단이었고 편했다. 도착한 날 저녁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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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킨 저녁이었다. 나를 안내한 언더우드 씨는 그날 저녁에 작은 무리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 자신의 작은 예배당

에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의 친절한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는 그와, 그의 학교 학생과 동행했다. 이미 어둠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넓은 길을 가로질러 갔는데 동양의 대부분 도시들처럼 불이 없어 어두웠다. 조그만 등을 든

한국인의 안내를 받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작고 빈 안뜰로 들어섰다. 우리가 대문을 두드리자 그 문이 열

렸다. 종이를 바른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보니 옷을 정제하고 학식 있어 보이는 남자

14명이 거기에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그날 밤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의 제일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을 장로로 선출

하는 일이었다. 이의없이 두 사람이 선출되었고, 그 다음 주일에 안수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봉천에서 온 사

람의 사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6년 전부터 신앙인이 되어 있었고, 그런 관계로 이 첫모임에 참석했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교회를 세운 세례교인 14명 중 13명이 그 사람(봉천에서 온)이나 그 뒤를 이어 봉천을 떠났던 다른 사람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사실은 그 도시에 그들과 같은 계층의 교인이 300명 이

상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언더우드가 창립예배를 드릴 때 그들이 사용한 성경은 존 로스가 막 완성한 예수성교전서였고, 그날 참석한 자들이 로스

가 양육한 서상륜과 그 동생 서경조에 의해 전도받고 주님을 영접한 이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스는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로스의 한국선교 준비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개척 선교사들이 그토록 놀랍게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887년 새문안교회가 설립된 후 신앙인들이 꾸준히 늘어났다. 새문안교회에서는 1887년 12월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

한 가운데 장로교 첫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새문안교회 창립 후 1888년 2월에는 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주간 연합기도

회를 개최했다. 새문안교회는 1894년 감리교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연지동으로 이전하고 새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몇몇 장로교회들이 계속 서울에 설립되었다. 1893년 곤당골교회가 설립되었고, 이 교회는 홍문석골교회와 연합하여

1898년 승동교회를 조직했다. 1894년에는 기포드(D. L. Gifford)의 책임 하에 연동교회 전신 연못골교회가, 1909년 11

월 21일에 남대문교회가, 이어 안동교회가 설립되어 1913년 9월에 교회봉헌식을 거행했다. 승동교회는 서울 중심에 위

치하고 있어 사경회를 개최하기에 적합하였고, 연동교회는 주변에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 등이 있어 젊은이들의 복음화

에 중요한 기여를했다. 장·감은 경쟁을 피하면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서울과 경기 지역 복음화를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을 ‘남부지구’, ‘중앙지구’, ‘동부지구’, ‘서부지구’로 대별하고 선교사들이 각 지역을 책임 맡아 순회선교를 했다.

3) 정동교회 설립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 중이었던 워른 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이라고 명명했다. 이때는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하고 꼭 2주일 후인 1887년 10월 9일이었다. 이날

창립예배에 만주에서 온 매서인 최씨와 장씨, 배재학당 학생 한용경과 박중상, 일본인 하야가와와 스기바시, 그리고 권

서인 최씨 부인 등 7명이 참석했다. 사방 8피트의 작은 방에 조선식으로 앉아 드린 이날 창립예배에 아펜젤러가 개회기

도를 드렸고, 마가복음 1장을 함께 봉독하고, 장씨가 폐회기도를 인도했다.

그 다음 주 10월 16일에는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가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고, 10월 23일에는 최성균,

장점화, 강씨, 한용경, 최성균의 아내가 참여한 가운데 감리교 첫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아펜젤러가 세례자들을 모아 놓

고 성찬식을 거행할 때 최성균의 아내도 다른 남성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했다.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로 여기던 그 시

대에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복음의 원리에 따라 남녀가 함께 동참하는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로서

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동감리교회는 주변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어 남녀 학생들에게 깊은 영적 감화를 끼치는 등 ‘전국에서

가장 큰 감화를 준 감리교회의 하나’가 되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에는 벧엘성전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12월 4일에는 배

재학당 학생 유치겸과 윤동규가 세례를 받는 등 교회는 날마다 성장을 거듭했다. 1887년 첫 성탄절 예배를 드렸고, 아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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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러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설교를 했다. 성탄절 오후 2시에 드려진 이날 예배 순서는, 김명옥의 세례, 찬송, 기도(한

글로 읽음) 스크랜톤 박사, 성경봉독(마태복음 2장) 스크랜톤 박사, 성경봉독(누가복음 2장) 스트랜톤 박사, 설교 ‘이름

을 예수라 하라’(마 1:21- ) 아펜젤러 목사, 주기도문,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축도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예배 순서에서 특이한 것은 세례식이 먼저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성경봉독이 두 번에 걸쳐 무게 있게 진행되었다는 것

이며, 설교 후에 주기도문을 드렸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기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성경말씀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후 1895년 1월에 있었던 연회에서는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정동에 건축할 것을 결의하고 이 일을 아

펜젤러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아펜젤러는 미국에 있는 랭카스터 제일 감리교회와 드류신학교의 친구들, 한국에 있는 외

국인들과 특히 한국인 신도들이 건축헌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된 새 예배당은 1897

년 6월에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첫 예배당에서 하였으며, 정동교인들이 입당한 것은 10월 3일 주일이

었으나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에 하나님께 봉헌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에는 미국의 엡윗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정동교회에 이어 1888년 12월, 현 아현교회의 전신 서문 밖 애오개교회와 상동교회가, 1890년 가을 동대문교회와 중앙

교회가 설립되면서 감리교 선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감리교 선교는 의료선교를 통해 민중의 마음

을 열고, 교육을 통해 민중의 마음을 깨우치고, 복음 전파를 통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균형 잡힌 선교를 추진하면서

더욱 활기

를 띠었다.

출처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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