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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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린의 사랑 1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정부가 되고 당신은 그 동안 날 보살펴 주겠다는 거로군요. 내 말이 맞나요?" 그녀는 너무도 쉽고 명료하게 기나긴 토론의 결론을 내렸다. "그렇소" 굵고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그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감색 슈트속의 넓은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 있음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좋아요" 갑자기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의 표정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웃음이다. "그렇다면," "난 우리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실 상호간의 완전한 합의는 항상 날 유쾌하게 하지. 샴페인 들겠소?" 슈트를 벗어 가볍게 의자에 걸어놓고 이어 흰색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요. 트래비스 난 아직 얘기를 끝내지 않았어요 당신의 그 '완전한 합의'라는 말은 아직 이른 것 같군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차가운 냉정함이 떠오르자 그녀는 급히 말을 이었다. "오 트래비스 난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우리의 앞으로의 관계에 있어 다소의 규칙이 필요하리라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에요." "규칙?" 그는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근데 이 여자가 감히....' "음 당신 기분이 어떤지 제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죠. 지금까지의 당신 정부들이 어쨌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요 멋진 아파트와 차 그리고 값비싼 옷과 보석에 대한 대가로 당신의 침대에 열정적으로 보답했으리라 생각돼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그의 목소리는 험상궂은 얼굴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선 남자를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190센티미터의 키와 그녀의 두 배나 됨직한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지닌 그는 짙은 윤기 나는 검은머리와 더불어 아주 위험스런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젊은 여자를 매혹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캐쳐스 트래비스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캐쳐스 인스트루먼트 그룹의 총수인 것이다. 그는 전세계에 수십 개의 별장과 몇몇의 섬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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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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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린의 사랑

1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정부가 되고 당신은 그 동안 날 보살펴 주겠다는

거로군요. 내 말이 맞나요?"

그녀는 너무도 쉽고 명료하게 기나긴 토론의 결론을 내렸다.

"그렇소"

굵고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그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감색 슈트속의 넓은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 있음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좋아요"

갑자기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의 표정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웃음이다.

"그렇다면,"

"난 우리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실 상호간의

완전한 합의는 항상 날 유쾌하게 하지. 샴페인 들겠소?"

슈트를 벗어 가볍게 의자에 걸어놓고 이어 흰색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요. 트래비스 난 아직 얘기를 끝내지 않았어요 당신의 그

'완전한 합의'라는 말은 아직 이른 것 같군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차가운 냉정함이 떠오르자 그녀는 급히

말을 이었다.

"오 트래비스 난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우리의

앞으로의 관계에 있어 다소의 규칙이 필요하리라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에요."

"규칙?"

그는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근데 이 여자가 감히....'

"음 당신 기분이 어떤지 제가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죠. 지금까지의 당신 정부들이 어쨌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요 멋진 아파트와 차 그리고 값비싼 옷과 보석에 대한 대가로

당신의 침대에 열정적으로 보답했으리라 생각돼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그의 목소리는 험상궂은 얼굴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선 남자를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190센티미터의 키와

그녀의 두 배나 됨직한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지닌 그는

짙은 윤기 나는 검은머리와 더불어 아주 위험스런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젊은 여자를 매혹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캐쳐스 트래비스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캐쳐스 인스트루먼트 그룹의 총수인

것이다. 그는 전세계에 수십 개의 별장과 몇몇의 섬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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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전용 비행기와 개인 요트도 가지고 있는 손꼽히는 거부중의

하나이다.

항상 그의 곁에는 세계적인 모델이나 할리우드의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맴돌고 있었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음 트래비스 좀 앉는 게 좋겠군요. 당신은 오늘 알제리에서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잖아요. 피곤하겠군요"

그러나 그녀의 말은 무시되어졌다.

"내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하지 마시오 빨리 그 빌어먹을 규칙이라는 걸

말해 보시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성큼성큼 걸어와 위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힘겹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일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거대한 위협에 지금 무릎을 꿇는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힘겹게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쳐할 수도 있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좋아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스스로의 일에 힘을 쏟듯이 나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거죠.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듯

저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한 걸음 더 그녀 앞에 섰다. 이제 그의 가슴이

그녀의 이마에 닿을 듯이 가깝다. 그에게서 소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신선한 향기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물론이요. 해리엇 난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멍청이라고는 보지 않소.

도대체 당신이 말하려는 그 규칙이란게 정확하게 뭐요?

그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조금 전부터

씩씩거리며 급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 결국 제 말은 당신의 공식적인 정부 역할은 사양하겠다는 거예요.

공식 석상에서 곁에 얌전히 앉아 당신을 빛내주는 그런 약세사리로 날

취급한다면 참을 수 없을 거예요 즉 당신이 날 존중해 주길 바래요."

그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급히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 남자는 대단해.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처럼 설득이 힘겹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심지어 가장 냉혹하면서도 완고한 아버지에게서도......

"물론이요. 도대체 당신은 날 어떻게 보는 거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요. 당신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있음을 이미 인정했잖소. 그리고 난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존중해 왔소. 난 공식석상에서의 정부를 원하는게 아니오. 이게 당신의

요구에 대한 내 대답이요."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지만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도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음을 알 수 있었다.

"트래비스 난 당신을 한 번도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맹세해요.

단지 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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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은 계속될 수가 없었다. 그가 성급하게 그녀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살짝 스쳤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져 버렸다. 오. 맙소사

그의 입술은 너무 단단하고 또 너무 부드러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성급하게 그의 혀가 미끌어져

들어왔다. 그의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마치 그의 권리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당당히 그녀의 입속을 유린해 들어왔다. 그녀의 허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어 그의 입술이 거칠고도 부드럽게 그녀의 목선을

따라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의 셔츠 깃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단단한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오, 해리엇. 당신은 너무 부드러워."

감탄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더욱 흥분시켰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완벽한 소유를 원하는 무언의

명령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키스와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성급히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브래지어의

훅을 열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이 말할

수 없는 환희에 몸을 떨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의 입술은 재빨리 가슴

골짜기를 향한 탐험을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활처럼 굽어지고 그의

품안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동물과도 같은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속 어디선가 희미한 이성의 경고가

이었지만 그가 그녀의 유두를 살며시 깨물어버리자 사라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를 살짝 스쳤다.

그녀는 전율했다. 아무 생각도,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내리고 다시 키스하길 원할 뿐이고 또한 행동으로 옮겼다.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 일이다. 그의 깊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와 키스하는 거야말로 아주 당연한 일이며 그 외는 어떤

일도 중요치 않다는 듯이. 그녀는 급했다.

'이런 느낌이야 이걸 원했어. 오 하느님'

그는 느낌이 너무 좋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압박이 좋았고

그의 혀가 주는 느낌이 그녀를 마비시켰다. 언제부터인지 서로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주는 느낌은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그의 입술이 귓볼을

살짝 깨물고는 흰 목을 타고 내려와 그녀의 가슴 골짜기에 닿은 때까지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오직 그가 주는 느낌에서 살아남을 수 있길 기도하며 그의 어깨를

꽉 움켜질 뿐이었다.

갑자기 날카롭게 전화벨이 실내를 울려 퍼졌다. 몇 번이나 울렸는지

모르지만 매우 재촉하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숨을 너무 가쁘게 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을 때 이미 그는 냉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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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진정하려 애쓰고 있었다.

'내가 정말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걸까?'

그의 정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수십 번도 넘게 생각을 해왔다. 사실 그녀는

그가 알제리에 가기 전에 넌지시 그런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그러한 제안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한 상황이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그러한 결정에 자신을 가졌었다. 하지만 ...

3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그녀는 스스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실행해

왔다. 물론 아버지도 내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 그러나 경제계에서 '검은

여우'라 불리던 아버지는 뉴욕의 아이스- 홀트 은행의 은행장으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도 항상 외로움과 싸워가며 지금의

독립된 생활을 이루게 된 셈이다. 옥스퍼드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과로로 쓰러져서는 그대로 어머니의 곁으로 가셨다. 가끔은 뉴욕 근교의

수영장이 딸린 아담한 이층집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26살의 여성이

험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감상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겨진 약간의 신탁 자금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금은 경영 컨설턴트 과정의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요"

"음 별거 아니에요. 근데 무슨 전화죠?"

그녀는 조금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음 유감스런 소식이요 지금 당장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하오, 급한 일이

생겼소 이런, 이런.... 그렇게 찌푸리지 마시오. 뉴욕의 우리 집에서 봅시다.

주소는 저번에 적어둔 그대로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당분간은 바쁘지 않다고 했잖아요."

"갑자기 일이 생겼소 누군가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고

있다고 하는군. 퓨쳐스의 짓인 것 같아. 경영권에 위협을 줄만큼은 아니지만

퓨쳐스가 몇몇 주주들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군. 뿐만 아니라 이런

시기에 긴급 이사회를 요청하는 주주가 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 같지만은

않아."

"또 퓨쳐스인가요? 도대체 그는 당신을 어떻게 하려는 거죠? 그와 당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최근은 아니게 확실해요. 그랬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죠. 이해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당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멸시키려는데에 절대 주저하지 않으리라는걸

확신해요."

"해리엇 지금은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소."

성큼성큼 그녀의 앞에 다가와 두손으로 얼굴을 잡고 가볍게 키스하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뉴욕의 내집에 가면 우린 확실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요. 물론 침대에서... 자 이제 가야 하오."

다시 한 번 짧게 키스하고 그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침대 위에 앉아 무릎을 껴앉고 해리엇은 생각에 잠겼다.

'트래비스 캐쳐스'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힘이 좋다. 사실 처음

신문에서 그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끌렸었다. 잘생긴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선이 굵은 얼굴과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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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그는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재계에서 '다크 새도우'로

불리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는 결코 냉정해지고, 야비하지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11시가 훨씬 넘었다. 짐을 싸고 비행기 시간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기대가 좌절된 탓인지 힘이 없다.

트래비스에 관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어떨까,

거칠고 정열적인 연인일까 아니면 부드러운 연인일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만해야겠다. 이러다간 오늘 하루를 또 할 일 없이 멍청하게 보낼 것이다.

샤워를 하고 짐을 샀다. 옷은 별로 없지만 노트북 컴퓨터와 전공 서적 몇

권이 들어 있어 꽤 무거웠다.

자! 이제 출발이다.

2

택시에서 내려 집 앞의 벨을 눌렀다. 높지 않은 울타리에 넓은 정원이

보였다. 연한 녹색의 잔디가 있고 벚나무가 가지런히 울타리를 따라 심어져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늙고 무뚝뚝한 집사가 나왔다. 집사라니,

21세계를 눈앞에 두고 16세기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집사가 여기

있다니...

"해리엇 콘디어스에요"

"예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쳇! 주인만큼이나 감정 없는 사람이군. 그를 따라 오솔길처럼 보이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집현관에 뚱뚱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휴, 어서 오세요. 제 이름은 제시에요. 이 집의 가정부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제 오실 줄 알았는데...."

"안녕, 제시?"

"집이 참 좋군요."

그녀는 급히 말을 잘랐다. 이런 타입의 사람을 알고 있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적어도 집에 한 명씩은 이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제 짐이 도착했나요? 어제 비행기편으로 보냈을텐데요?"

집안으로 들어가며 너무 차갑지 않게 집사에게 물었다.

"네. 이층 주인님 옆 침실에 짐을 정리해 두었어요. 주인님이 이 집에 여자

분을 모셔오긴 처음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전 주인님이 처음 말을 꺼낼실

때 굉장히 놀랐답니다. 사실 주인님은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 여자분들을

초대....."

"날 그리 안내해 주겠어요? 몹시 피곤하군요. 비행기 여행이란게 어떤 건지

아시죠? 좀 쉬고 싶어요."

젠장 정말 저 여자는 주책없이 주절대는군. 내가 트래비스의 연인인 걸 뻔히

알면서 최소한 내 앞에서 예전의 그의 연인들이 어땠는지를 말하지는

말아야지.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절 따라오세요. 급히 방을 꾸미느라

서둘러서... 맘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젊은 여자분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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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건 처음이라... 여기에요."

문을 열자 맞은편의 열린 창을 통해 너무도 신선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방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늑했다. 오른쪽에 침대가 있고 왼쪽에 화장대와

옷장이 있었다. 엷은 블루와 핑크 빛의 색조만으로 가구를 구입한 모양이다.

쯪쯪 내 스타일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이런 저런

트집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없다. 샤워하고 깊은 잠속에 빠지고 싶다.

"전망이 참 좋죠? 오른쪽이 욕실이구요, 왼쪽 문은 주인님 방과 연결돼 있는

문이에요. 점심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를 먼저... 참, 내 정신좀 봐. 목욕물을

준비해 드리죠."

"저... 체리, 아아니... 음... 제시, 그대로 둬요. 내가 할테니. 식사는 나중에

하죠. 따뜻한 우유 한 잔 줘요. 혼자 있고 싶어요."

"어휴, 아가씨 안돼요. 몸이 비쩍 말랐군요. 뭘 좀 먹어야 돼요.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게 섹시하다느니 어쩌니 하니, 제가 특별 요리를 준비했어요. 버터를

살짝 얹은 소보루와 땅콩 쿠키를 구웠어요. 그건 특히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거죠. 그리고 버섯을 얹은..."

"제시."

손사래를 쳐가며 열심히 자신의 요리를 설명하는 그녀에게 다소 화가난

투로 말했다.

"제시, 다시 한 번 말하겠어요. 따뜻한 우유 한잔, 그리고 날 내버려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맹세코 단언하건대 난 트래비스의 집사와 가정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수다장이 가정부는 날 짜증나게 했다. 조그마한 수리로

대답하고 물러가는 제시에게 일순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걸

표현하면 수다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생각에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받았다. 온통 흰빛으로 도배되어 있는 샤워실

벽에 3개의 큰 거울이 있었다.

너무 피곤했다.

트래비스가 3일전 뉴욕으로 떠난 후 포틀랜드 시내를 구경하다 우연히 본

신문에 트래비스와 퓨쳐스의 기사가 실린걸 보게 되었다. "트래비스의

위기"라는 제목의 1면기사는 퓨쳐스의 레이더에 걸린 트래비스가 과연

퓨쳐스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퓨쳐스가 몇몇 주주들을 설득해 임시 총회를 요청한 것으로 쓰고 있었다.

트래비스는 모로코의 이웃나라인 알제리에 캐쳐스 인스트루먼트를 통해

거대한 투자단을 형성해 컴퓨터 침 제조회사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했다.

퓨쳐스는 이를 잘못된 결정으로 지적하고 알제리보다 모로코가 더

투자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투자단의 몇몇을 포섭하고 있었고 이는 곧

트래비스의 경영권의 위협을 의미한다. 그걸 본 해리엇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시내 호텔에 방을 잡아 꼬박 48시간동안 컴퓨터와 전화기에

매달려야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트래비스에겐 시내를 구경하다 비행기를 놓쳤다고 할 것이다. 짐은 호텔에

이미 비행기로 부쳐달라고 요청해 좋은 상황이였으니까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너무 좋다. 온몸의 뼈가 이완되고

있다. 마디마디가 이틀간의 긴장에서 벗어나 숨을 쉬는 느낌이다.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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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았다.

조금만 있다 침대로 들어가야지.

이틀전 트래비스의 말이 생각나자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군요. 이번엔 정말 아찔했어요. 퓨쳐스가 모든 힘을

동원해 온 것 같았어요. 사장님이 빨리 오셔서 수습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네. 젠슨, 피곤하군. 자네도

피곤해 보여.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게. 정말 수고했네."

트래비스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더벅머리 젊은이를 향해 피곤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재킷은 이미 벗고 있었고 느슨한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친 모습이 3일간의 밤샘 작업에도 불구하고 야성적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사장님이 고생하셨죠. 그리고 로즈마린두요."

로즈마린이란 이름이 나오자 트래비스는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트래비스의 위기를 도와준 인물이다. 그는

재계에서 로즈마린이란 이름으로 통한다. 얼굴이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영향이나은능력 면에서 트래비스만큼이나 재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언제 그가 처음 등장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재력이 얼마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이가 몇인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신문에 그의 이름이

등장할 때면 재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뿐이다. 이번이 두 번째로

트래비스를 은밀히 도왔다. 위기에 처한 트래비스를 이러한 방식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목적이 뭘까'하는 경계와 함께 그의 신비를 벗겨내고자 하는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 현재로선 그가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전 그럼 가봐야 겠군요 제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요"

더벅머리 젠슨은 이제 23세이다. 그는 2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결혼했는데 그의 아내 말에 꼼짝도 못하는 애처가로 소문나 있다. 머리가

좋고 컴퓨터를 다루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젊은이지만 진득하게

한곳에 붙어있질 못하는 성격이다. 물론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서...

"젠슨, 어서 가보게. 캐서린에게 안부 전해주게. 자네의 궈여운 딸에게도...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고했네."

아기가 태어날려면 아직 5개월이 남았음에도 미리 딸로 규정짓고

즐거워하는 그를 보며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컴퓨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던 그는 무려 1년 동안에 13군데나 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빈둥거린 경력이 있었다. 트래비스는 1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추천장도

없이 13군데에 취직한다는게 가능할 지 의문을 가졌었지만, 그를 한번

만나보고 나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채용했다. 그에게 이사대우와 특별직이란

명목 하에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년에 13군데에서나

밀려났던 경력에다 컴퓨터 외에는 자격증조차 갖추지 못한 그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믿으려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만큼의 보상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 사실 이번에도 트래비스는 그 대가를 수십 배로 되돌려 받았다. 그는

Page 8: 로즈마린의 사랑

전세계 통신망을 네크워크화한 자신만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해 어느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아마도 FBI나 CIA에서 본다면

스카웃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그의 대한

평가는 뛰어나다. 그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완벽함과

기민성을 갖춘 인물이다.

"사장님 지금 퇴근하실 건가요 처리하실 내부 서류가 쌓였는데요."

인터폰을 통해 비서인 메리의 음성이 넓은 사무실을 울려 퍼졌다.

"아니오, 메리. 지금 바로 퇴근할 거요. 서류는 내일 보지. 당신도 며칠간

수고했소. 먼저 퇴근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비서 메리는 늙그수레한 외모에 깔끔한 일솜씨로 10년간 같이 일해온, 그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다.

어둑해지는 시내를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일어나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집

생각을 했다. 집에 해리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전에 도착했다는

집사의 전화가 있었다. 몹시 피곤했지만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막 샤워를

끝내고 난 뒤의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언제나처럼 늙은 집사가 현관문에 마중을 나왔다. 트래비스는 기대감과

비슷한 낯선 감정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쯤 해리엇이 나올 법도

한데....

"집사, 해리엇은 어디 있소?"

나직이 물었다.

"예, 주인님. 오늘 오전에 도착하셔서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니, 지금까지 말이오? 9시가 넘었는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해리엇은 절대 하루 반나절

이상을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보낼 여자가 아니었다.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착하셨을 때부터 몹시 피곤해 보였습니다.

제시가 간간이 들어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오시자 마자 침대에 들어가셔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알겠소. 저녁은 먹었소. 그만 가보게. 수고했네."

그는 천천히 2층으로 발을 옮겼다. 웃음이 떠올랐다.

뭘 기대한 걸까?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는 그에게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환영해 주길

바란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다릴 수 있다. 천천히 그녀를 변화시킬 것이다.

3

"트래비스!"

헉하고 숨을 들이키는 해리엇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뒤이어 침묵이 흘러들었다. 거친 열정의 흥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Page 9: 로즈마린의 사랑

것이다.

"젠장, 해리엇!"

트래비스는 숨이 막혀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분명 여자와 사랑을 나누려는 순간에 적당한 말은 아닐 것임을 그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트래비스는 속으로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오, 트래비스 기분이 이상해요. 이건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해리엇. 지금 이 순간 당신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인내심이 내겐 없으니까."

"저... 트래비스, 당신 화가 난 것 같군요."

그의 밑에 깔린 채 힘겹게 숨을 쉬고 있던 해리엇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트래비스는 윗몸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 곁에 팔꿈치를 세우고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몸을 살짝 움직였다. 해리엇의 갑작스런 비명과 함께

그녀의 손톱이 그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아앗! 트래비스 아파요. 제발 움직이지 말아요. 지금 난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란 말이에요."

"젠장, 난 그렇지 않은 것 같소? 해리엇 당신은 미리 이런 상황을

얘기했어야 했소. 세상에! 처녀라니! 믿을 수가 없군!"

그의 일부분만이 그녀의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는 지금 최대한의 자제력을

짜내어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그녀를 쳐다봤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선 조금 전까지의 흥분에 들뜬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직 공포의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긴장을 풀어요, 해리엇. 난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요. 날 믿어요. 날

봐요, 해리엇."

고개를 돌리려는 그녀의 턱을 쥐고 그를 마주보게 돌렸다.

"해리엇 긴장을 풀어요."

살짝 입술을 스치는 키스와 부드러운 속삭임이 그녀의 긴장은 녹이기

시작했다. 트래비스는 숨막힐 듯한 흥분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자제력을

짜내야만 했다. 그는 수없이 키스를 되풀이하며 귓볼을 살짝 깨물고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의 어깨부터 가슴을 향해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해리엇, 당신 입술은 마치 날 위해 준비되어진 것 같군. 너무 부드럽고

매끈해 날 미치게 하는군."

"트래비스, 이젠 괜찮아요. 아픈 순간은 지나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녀의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며 서서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날 꽉 잡아요, 해리엇."

그 말과 함께 참아왔던 트래비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순간적인 해리엇의

저항을 뚫고 그녀의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그는 천천히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트래비스 이젠 전혀 아프지 않아요. 굉장히... 좋은 느낌이에요. 헉...."

마지막 그녀의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흥분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팔꿈치에 최대한의 힘을 싣고 이번에는 단 한번에

Page 10: 로즈마린의 사랑

어떠한 멈춤도 없이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녀의 몸은 이젠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와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에 트래비스는 충분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다리를 내 허리에 감아요, 해리엇."

그녀는 그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복종했다. 오직 이 세상에 그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그의 몸에 팔과 다리를 두르고 매달렸다."

"그래 그거요, 해리엇. 내 귀염둥이."

그녀의 얼굴에서 흥분이 더해 감을 바라보며 그는 움직임을 좀더 빨리 했다.

"트래비스, 이건 정말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에요. 이건...."

그녀의 말은 계속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그녀 깊숙이 몸을 밀어

넣으며 급히 그녀의 입술을 요구한 것이다. 그녀의 말이 기분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트래비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에 아래 짖눌려진 채

깔려있던 그녀가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순간 아찔한

감각이 트래비스를 스쳤다.

'아직... 아직은 안돼. 조금 더 기다려야 돼.'라고 생각하던 그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거친 숨소리와 그녀의 몸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와 함께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이미 그녀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깊숙히 그녀 안으로 들어가며 자제력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환상적인 느낌이야.'

나른한 만족감이 온몸에 퍼졌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째빨리 사라졌다.

그가 그녀의 처녀막을 뚫고 들어왔을 때의 그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그는

당장에 누구라도 죽일 듯한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그에게 먼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음을 떠올랐다.

오늘 오전에 도착해서 극도의 피곤함으로 저녁 늦게 까지 꿈속을 해매이고

있었던 그녀는 그가 집에 온 것도 몰랐던 것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짓눌려진 채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키스와

손놀림은 그녀에게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을 기회를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첫 경험이 굉장히 만족스러웠음에 그녀는 안도함의 웃음을 떠올렸다.

"단언하건대, 해리엇, 그 웃음의 의미가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만족감의

표현이기를 바라오. 이제 우리 서로가 약간의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의 차분한 말소리에 그녀의 웃음이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후의 만족감으로 잠시 긴장이 풀어져 방심했나보다.

"음... 트래비스, 그래요. 내가 당신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한 가지

사실로 인해 당신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는 걸 인정해요."

갑자기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그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약간의 충격? 맙소사! 해리엇, 당신은 조금 전의 나의 기분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요? 약간의 충격이라니...! 당신의 그 뻔뻔스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겠소. 충격이라! 그 말이 맞긴 할거요. 하지만 약간은 아니요. 난 지금

Page 11: 로즈마린의 사랑

당장 미국이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다고 해도 이보다 놀라지는 않을 거요.

당신은 날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군. 그래 이 일에 대한 당신의

변명은 뭐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난 들을 준비가 충분해 돼 있소."

그의 말에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그가 정말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이지만 목소리에서 섞여 나오는 음절마다의 끊어짐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저 트래비스 사실 오늘 오전에 여기 도착한 이래로 아무 것도 먹질

못했어요. 그런데다가 조금 전의 일로 전 굉장해 배가 고프군요. 뭘 좀 먹지

않겠어요? 그런 후에 차분히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우선 그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품안에서 벗어나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섣불리 말을 꺼내다가는 그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녀도 뒤따라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샤워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나와 가운을 입었다.

"목욕물을 받아 놨소. 10분 주겠소. 주방에서 봅시다."

그 말과 함께 그는 그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멍하니 그가

사라져간 문을 쳐다보다 그의 말이 뒤늦게 생각이 나 그녀는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빌어먹을!'

맹세코 이런 말은 그와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사용할 만한 단어는

아니다. 오히려 해리엇이 평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자주 애용하고

있는 말이다.

그녀가 처녀였음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가 즐겼던 여자들은

침대에서 능숙한 애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의 재력과 지위만으로 그의

침대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적어도 게임의 규칙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며 철저히 기브 앤 테이크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물론

가끔 깊은 감상에 빠져 그를 피곤하게 했던 여자도 있었지만 최소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처녀는 없었다. 대부분이 경험 많은 여자들이었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숨기지 않았었다.

젠장, 여자들이란....

해리엇은 정말 특별했다.

포틀랜드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하버리라는 이름의 항구 도시에 있는 그의

요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케쳐스의 친구인

해리 본이 살고 있는 곳이다. 제임스에게서 물려받은 요트가 2척 있다. 그는

일년에 한 두 번씩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곳은 자신만의

공간이고 가끔 복잡한 도시 생활에 싫증이 날 때쯤이면 들르곤 했다. 해리

본이 그의 요트 한 척에 살면서 두 척의 요트를 관리해 주고 있다.

며칠 전 새벽에 이탈리아서 날아온 그는 그의 요트에 낯선 여자가 반라의

차림으로 선실 안의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옥스퍼드의

대학원을 진학하고 있다고 했고 휴가를 왔다가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호텔 예약이 취소되어 버렸다고 했다. 사실 그런 일은 마땅히 시민 단체에

Page 12: 로즈마린의 사랑

고발해야 할만큼의 큰 일이지만 그곳은 뉴욕이 아니다. 조그만 항구

도시에서 대도시의 공항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난처한

처지에 빠져버린 그녀에게 해리 본이 주인이 비어있는 트래비스의 요트를

당분간이라며 빌려준 것이다.

물론 해리 본은 트래비스가 하필이면 그날 그곳에 오게 되리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정신이 나가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태연하게 그 상황을 넘기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눈은 떼지 못했다.

처음 선실 안에서 그녀가 그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눈 속에 떠오른

경악과 낯선 남자가 그녀의 침실 -적어도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그날만큼은

그녀의 침실이었다-에 나타났음에도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가벼운 소동 끝에 그녀는 굉장히 피곤한 모습이었고 정말 휴식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이를 악물며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녀가 다른 숙박시설을 찾지 못하자 할 수 없이 나머지 기간동안을 해리

본과 함께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 시기는 휴가 시즌이라 남은 숙박

시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을 그녀와 함께 지내며 그는 그녀의 특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활기와 삶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너무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그러한 느낌에 대해 집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녀도 또한 그에게 끌리고 있음을 남성적인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트래비스, 음... 제가 처녀였다는게 앞으로의 우리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는 다소 망설이는 듯한 음성으로 조심스레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젠장 해리엇 이해 할 수가 없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소. 단지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그게 나였느냐는 거요. 당신은 26살이오. 그 전에 당신에게 의미

있는 남자가 한 번도 없었소?"

말을 꺼낸 순간 그녀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뒤엉켜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별로 맘에 드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신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고나 있소? 당신은 지금 내 정부란

말이오? 세상에 26살짜리 처녀라니...."

"트래비스."

그녀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물론 요즘은 10대가 되면 여자아이들이 자기가 처녀로 남는다는데 대해

아주 끔찍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 그게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첫 경험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그녀의 10대는 처녀성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생존의 문제가... 하지만 지금 그걸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서도 안되겠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해리엇 농담하는 거요? 지금까지 당신에게 믿을 수

있는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오? 지금 그 말도 안돼는 소리를

Page 13: 로즈마린의 사랑

믿으라는 거요?"

"트래비스 그렇게 비꼬지 말아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기보다

믿을 수 있으면서 당신처럼 멋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에요. 당신은

근사해요. 멋지고요. 침대에 기꺼이 함께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든

사람은 결단코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맹세라도 하듯 한 손을 펴고 쳐들었다.

"당신의 찬사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그가 빈정거리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배가 고프군요 뭘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당신의

가정부를 깨우고 싶지는 않군요"

"그녀의 이름은 제시요. 그리고 밤늦게 깨운다고 해서 크게 불평을 하지는

않을 꺼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과 단 둘만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내가

뭘 좀 찾아보지."

그리고는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아마 이 순간의 그를 본다면 놀라자빠질 것이다. 자정이 다된

시간에 자신의 정부를 위해 가운만을 걸치고 냉장고를 뒤지는 모습은

재계의 거물로서는 어울리는 모습은 아닐 테니까.

"닭고기가 좀 있군 빵은 있지만 샌드위치를 만들 재료가 없군. 아,

마멀레이드가 있소. 우유도 있고. 잠시 기다려요. 샐러드를 준비할 테니."

그녀는 그가 바쁘게 주방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흐뭇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의외로 요리를 잘했다. 하버리에 있는 그의 요트에서도 거의 모든

요리를 그가 담당했었다. 가끔은 호텔에서 주문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요리솜씨가 훨씬 좋았다.

잠시 후에 전자 레인지에 데워 따뜻한 멕시칸 소스가 얹힌 닭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빵과 마멀레이드가 식탁에 놓여졌다. 그녀는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다. 사실 이틀 동안 호텔에 쳐박혀 컴퓨터만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었고 오늘 역시 첫 식사라고 할 수

있다. 손으로 닭을 쥐고 먹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접시에 닭을 슬며시 놓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난 주로 닭고기는 손으로 먹어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와 안지는 얼마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엄격한 부유층의 예절 교육을

받고 자랐음을 잡지를 통해 읽었던 기억이 났다. 배가 고파 무심코 먹다보니

평소의 버릇이 나온 것이다.

"괜찮소 당신 먹는 모습은 정말 귀엽군. 사랑스러워."

말을 하며 그는 그녀 앞에 놓인 쟁반에 닭고기를 집어들고 그녀 옆에 앉아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그가 씨익 웃자 그녀도 웃으며 맛있게 닭을 한입

베어 물었다. 이어 그가 빵에 마멀레이드를 듬뿍 묻혀 그녀의 입에 대주었다.

그녀는 이 새롭고도 낯선 경험에 흥분하며 또 한입을 베어 물었다. 그의

손에 흘러내린 마멀레이드를 그녀가 혀로 핣아내리자 그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영원이라고 느꼈지만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키스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치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끌어내리며 그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그의 입술이 주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움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Page 14: 로즈마린의 사랑

그의 입술은 겉으로 단단해 보이지만 그 감촉이란 실크보다도 좋았다.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구인지도 모를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녀인 것 같았다. 놀라움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잠시 주춤거리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그에게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허스키한 웃음소리를 냈다.

"해리엇, 참을 수 없군. 당신은 정말 부드러워. 매끄럽기도 하고. 당신이

지금 죽을 정도로 배가 고픈 게 아니라면 이만 침대로 갑시다."

그는 그녀의 답을 구하지 않았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힘차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가슴과 목에 끊임없이 키스하고

어루만지기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입술을 떼지도 않은 채 그대로 그녀를 안고 이

층의 계단을 올랐다.

4

해리엇은 오후의 나른한 잠 속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반쯤

열어 제껴진 아이보리색을 띤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제시가 창을 열어놨을 것이다.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녀는 오른 팔을 이마에 대고 침대에 누운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예상했었던 것보다 정부라는 것도 멋진 일인 것 같다.

트래비스는 멋진 연인이다. 실제로 밤에 잠을 자는 시간은 서너 시간뿐이다.

그는 굉장히 정력적이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그녀를 애무해

주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을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익스프레스 패밀리 카드와 운전사가 딸린 메르세데스를

주었다.

멋진 나날이다. 맘대로 쇼핑할 수도 있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것.

내가 번 돈이 아닌 남의 돈을 가지고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본래의 심성이 그러한지는 몰라도 사실 그녀는 사치스러울

수 없었다.

가끔 파리에서 열리는 크리스천 디올이나 지방시의 컬렉션에 가보기도

했지만 저녁식사를 위해 입을 만한 드레스 몇 벌 이외에는 구입한 게

없었다. 그를 두고 트래비스가 신기해했었지만 사실 해리엇은 그런 일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그녀로서도 그럴 만한 능력은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몸에 밴 습관을

떨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디너 파티에 초대받은 적도

있었고 직접 여주인 역할도 했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이 주어진다면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있다고 생각했다. '검은 여우'라고 불리던 아버지는

재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냉정하면서도 아주 교활했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아주 뛰어난 사업가였다.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경제인으로서도 그녀는 그를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이면의

모습에 상처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의 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의 상대였던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어머니 앨리사는 아름답고 지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 외에는 혼자였다.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오랜 기간 아버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Page 15: 로즈마린의 사랑

사랑! 웃기는 일이다.

어릴 적 밤늦게 서재를 통해 복도에 불빛이 흘러나와 그녀는 아버지를 몰래

살펴보려 살금살금 다가갔다. 추운 겨울 서재의 벽난로 앞에 있는 앨리사가

좋아하던 의자에 반쯤 비워진 브랜디 잔을 들고 계신 아버지의 표정을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건 단순한 고독이 아니었다. 처절한 고통의 표정이었다.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앨리사의 사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그러한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내가 점차 커가면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닮아 가는

내 모습 속에서 아픔을 느끼고 있음을 그의 눈 속에 드러난 상처를 통해

알게 되었다. 때문에 그녀는 대학을 핑계로 집을 나왔다. 크고 텅빈 집에

아버지를 두고서 말이다. 그의 눈 속에 어리는 추억 속의 아픔들은 10대의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과거를 향한 회상은 항상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가볍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키에 절대

글래머는 될 수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맘에 드는 건 벌꿀색 머리카락, 이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작고

동그란 눈과 긴 속눈썹이 있어 화장을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은 금발의 글래머이기를 소망했었던 적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머리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도 성적 매력이 듬뿍 다긴 그런

여자이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자, 일만 오천까지 나왔습니다. 일만 칠천! 일만 칠천 없습니까....좋습니다.

왼쪽에 계신 중절모를 쓰신 신사 분에게 낙찰됐습니다."

웅성거림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런

소란스러움이 좋았다. 경매 중개인의 마이크 소리가 귀에 멍멍할

지경이었지만 느긋하게 옆에 앉은 아버지가 아주 권위적으로 경매가를 높여

부르곤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녀는 오늘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아직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오질 않았다. 이어 새로운 물건이 중개인 옆의

탁자에 놓여졌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골동품임을 알

수 있었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보습이지만 왠지 끌리는 물건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쌍그네였다. 어떤 칠도 하지 않은 처음의 나무 재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 이건 19세기 초 캘리포니아 해안의 앉은뱅이 조각가가 만든 작품입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려져 있는 이 문서는 감정가들에 의해 발부된

증명서입니다. 이 조각가가 이 작품을 할 당시 3일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 작품에 몰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원래는

캘리포니아의 크작 후작의 거실을 장식했었던 조각인데 그 가문이 몰락한

이후 행방을 감췄다가 몇 해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조각의

재료는...."

해리엇은 중개인의 말에 트래비스가 떠올랐다. 외로움, 그에게 끌렸던 건

어쩌면 의식 저 이면에 있는 본원적인 외로움의 갈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도

역시 그녀와는 동류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건 그를 만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이다. 단지 그는 당당히 세상을 향해 맞서고 있고 그녀는 그

세계의 이면에 숨어 내 존재를 알리려고 보이지 않는 몸부림을 쳐왔던

Page 16: 로즈마린의 사랑

것이다.

어쩌면 난 그가 미치도록 부러운 지도 모른다. 무섭지 않느냐고, 두렵지

않느냐고, 겁이 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 더 올리실 분 안계십니까 9천 9백까지 올랐습니다. 자, 셋을 세겠습니다.

하나 둘... 오, 여기 여자분 1만 2천입니다. 예 역시 작품을 보는 눈이

굉장하시군요. 자, 일만 이천 더 없습니까? ... 하나 둘 셋! 네 저기 아름다운

여자분께 낙찰됐습니다."

포장지에 쌓인 쌍그네를 고이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브래던이 운전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트래비스의 생각에 잠겨있다.

나에게 그는 어떤 의미일가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녀를

고갤 흔들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상관이 없다. 단지 그녀가 문제가 될

뿐이다. 무언가 변하고 있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가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처음 그의 정부가 되고자 했던 때의 내 생각처럼은 아닌 것 같다. 분명 그

이상의 감정이 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너무 관대하다. 그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해리엇, 전화에요."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을 열며 제시가 말했다.

"제시 나중에 다시 하라고 해줘요. 지금은 전화 받을 기분이 아니에요."

"어, 저 굉장히 급해 보였습니다. 파리라고 하면 안다던돼요"

파리라는 말에 옷장을 열던 그녀의 손이 멈춰졌다.

무슨 일일까?

"알았어요 그이의 서재에서 받겠어요."

1층으로 내려가며 그녀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졌다.

"여보세요."

"해리엇, 어때 요즘 잘 지내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목소리다.

"피터팬, 무슨 일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트래비스의 정부라니, 너다운 발상이구나"

이름이 피터라서 피터팬으로 불리는 친구이다.

"음... 그래."

그의 음성이 평소와 다르다. 이럴 때는 무슨 일이냐고 애써 물어서는 안된다.

기다려야 한다.

"너 잠시 쉰다더니 왜 캐쳐스 트래비스의 곁에 있는 거지? 그리고 정부라니...

이건 너의 스타일이 아니야 무슨 일인지 말해줘.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말해."

그는 대단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냐, 피터 그런 일이 아냐.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 난 지금 일을 하는

게 아냐. 그리고 그의 정부가 된건 순전히 나의 선택이야."

"뭐 원해서라구? 너 미쳤어?"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밖에까지 들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네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아. 다만 이 일은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개인적인 일이야. 난 트래비스를 잘

알아. 그리고 그가 좋아."

"하지만, 해리엇, 이건 너무 워험해. 네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것 아냐?

하고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 캐쳐스 트래비스냐구. 그는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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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알아. 그가 위험하다는 거. 그래서 잠시 일을 쉬겠다고 한 거야.

피터... 날 이해해 줄 수 있겠니? 나도 잠시동안만이라도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어."

그는 침묵했다. 그게 항의의 의미인지 이해의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좋아, 하지만 명심해. 그는 위험스러운 남자야. 니가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아."

"고마워, 피터. 날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어. 걱정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그를 선택한 거니?"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에게 끌렸어. 이유는 나도 몰라. 이게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야."

그는 또 말이 없다.

"근데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난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이상한데."

"휴, 해리엇 갑자기 왜 그렇게 멍청해진거야! 트래비스 같은 거물에게는

사생활이란 게 있을 리가 없지. 모르긴 해도 웬만한 삶들을 다 알고 있을

걸? 그가 요즘 파티나 모임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는 건 이미 소문도

아니야. 너의 얼굴을 모른다 뿐이지 너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어. 다만 난

나만의 루트를 통해 알게 된 거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널 찾아내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야. 아무튼 잘 있어. 그리고 조심해."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다. 몇 년 동안 함께 생사 고락을

겪어온 친구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컴퓨터의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었던 건 아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타깃이 된 회사에 파트타임으로

잠입해서 일하기도 했고 정부기관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피터는 옥스퍼드에

교환 학생으로 왔었다. 그러나 졸업 후 우연히 해리엇이 아르바이트하던 모

회사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녀는

뉴욕에서 함께 일해 온 것이고 누구보다 그녀의 신상을 걱정해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의 그녀의 상황에 경고해 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5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제시가 1층 서재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시?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제시는 그녀를 보고 뭔가 잘못을 들킨 표정으로

급히 주방으로 들어가며 약간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해리엇. 날씨가 참 좋군요. 커피 드시겠어요?"

순간 누군가가 현관문을 꽝하고 닫으며 들어왔다.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살짝 웨이브진 금발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170센티미터의 키에 전형적인 글래머의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긴 다리를

실크 스타킹이 감싸고 있었고 부드러운 원피스 드레스는 앞가슴이 깊게

Page 18: 로즈마린의 사랑

파인 섹시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곧 해리엇을 발견하고는 옆에 있는

가정부를 노려보더니 거실을 가로질러왔다. 뒤이어 현관문을 열고 집사와

브래던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해리엇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죠?"

해리엇은 영문을 몰라하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갑자기 입이 굳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에 평소 말이 없던 브래던이 그 섹시한 여자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으며 말했다.

"맥시, 여긴 당신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빨리 나갑시다. 해리엇,

죄송합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맥시라고 불린 여자의 손이 브래던의 빰을

때렸다. 모두들 놀랐다. 그리고 그녀는 브래던을 무시하고는 해리엇을

쳐다보았다.

"흥! 이제보니 당신이군요.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트래비스의 시선을

끈 거죠? 난 맥시 브라이트에요. 모델이죠. 그리고 트래비스의 친구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굉장히 가까웠어요. 당신을 한 번 보고 싶었어요.

내게서 그를 뺏어간 여자가 누군지 굉장히 궁금하더군요."

아까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웃음을 띈 얼굴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눈빛 또한 해리엇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해리엇은 맥시가 이전의 트래비스의 수많은 연인들 중의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먼저 이

여자부터 처리해야 겠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브라이트양? 만나서 반가워요. 맥시라 불러도 되겠죠? 당신을

알게 되서 기쁘군요. 차라도 함께 해요. 집사, 맥시를 응접실로 안내해줘요."

집사와 가정부 그리고 브래던이 흥미로운 시선에서 경악의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체 했다.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다.

"맥시, 잠시만 기다려줘요. 손님을 대접해 본 지가 오래돼서요. 집사 어서

응접실로 모셔요."

그리고 해리엇은 뒤돌아 당당히 침실로 올라갔다. 계단 하나 하나를 힘주어

밟으면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무릎까지 덮이는 검은 색 원피스 드레스를

걸치고 응접실에 내려오니 제시가 이미 차를 내놓고 있었다.

맥시는 마치 자기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해리엇을 한번 훑어보고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지만 무시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트래비스를 사이에

두고 소리 없이 전쟁을 치르는 연적의 게임에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비참하군' 속으로 트래비스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현재의 그의 연인이면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해 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이상한 아픔 같은 게

느껴졌지만 과감히 무시해 버렸다.

"좋아요, 맥시. 트래비스의 친구라고 했는데 이 시간에 그를 만나려면 회사로

가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미 그녀의 목적이 해리엇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살며시 떠보았다.

무심한 척 해도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Page 19: 로즈마린의 사랑

"알아요. 난 그보다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어요.

와보니 내가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던 것 같군요."

다분히 모욕적인 언사이지만 듣지 못한 척 해버렸다.

"이봐요, 해리엇. 다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뗄 필요 없어요. 그와 난 아주

친한 사이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녀는 당당한 말투로 내뱉었지만 불안한 그림자가 눈 속을 스쳐가고

있음이 보였다.

"당신이 그를 유혹했겠군요. 당신이 불쌍해요.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난 그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한때 결혼 얘기가 오갈 정도로.

물론 아직도 그래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이라고요.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요."

트래비스의 파혼 소식이 잡지에 실렸던 기억이 났다.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선택함으로서 트래비스를 한때 '비운의 남성'으로 불려지게 한 장본인이

바로 맥시였던 것이다.

"바보 같은 트래비스. 한때의 내 실수로 우린 파혼을 했었죠. 물론 내

어리석음 때문이었어요. 그의 사랑을 의심하다니! 그는 그 일로 아직 내게

화가 풀리지 않은 거예요. 그는 내게 상처 주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난 그가 더 이상 비뚤어진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이런 일로 상처받는 건 결국 그예요.

그는 내게 돌아올 거예요. 난 한때의 내 실수로 그에게 용서를 빌었고 그는

모두 지나간 일이니 잊자고 했어요. 하지만 완전히 풀어진 건 아니죠. 그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서 내게 상처 주려 하는 거예요."

'완전 신파조로군.'

내가 자신의 말을 믿을 거라 여기는 걸까 트래비스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난 그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해 연구하고 신중히 판단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비즈니스에는 냉혹하지만 개인적인 면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맥시가 말하는 트래비스는 내가 알고 있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다. 트래비스는 절대 그와 같은

미련스러운 멍청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맥시, 당신의 얘기는 잘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더 이상 맥시의 신파조를 듣고 있을 인내심이 없다.

그녀는 그녀의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굳었다. 좀 전의

불쌍한 표정은 연기임에 틀림이 없다.

"이봐요, 해리엇. 당신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군요? 직접적으로 말해

트래비스는 내 남자에요. 앞으로 나와 결혼할 사람이죠. 당신이 빨리

그에게서 떨어질수록 당신이 상처를 덜 입게 될 거에요. 난 당신에게 경고해

주러 왔어요."

말을 꺼내며 그녀는 지갑에서 수표를 꺼냈다. 흘낏 보니 만만찮은 액수임을

알 수 있었다.

"떠나세요. 난 당신이 걱정되는군요. 당분간은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트래비스는 멋진 사람이죠. 하지만 당신이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상처받길

원치 않아요.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몸을 던지죠.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Page 20: 로즈마린의 사랑

게임의 규칙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트래비스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순수하다고, 난 당신이 정말 걱정돼요."

'순수하다고' 그 말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갑자기 처음 그와 함께 보낸

밤이 떠올랐다. 아울러 그의 충격 받은 표정이 뇌리를 스쳤다. 순간 분노의

불길이 솟았다.

"당신의 넋두리는 잘 들었어요. 트래비스에게 당신의 방문을 전하겠어요.

그만 가보시는게 좋겠군요, 집사."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하며 말했다.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는 해리엇을 재대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꽤 날카롭게

응접실을 울렸기 때문에 그녀가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리엇, 당신 정말 바보로군요."

맥시가 히스테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은...."

그녀의 말은 계속될 수가 없었다. 해리엇은 급히 나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 맥시를 현관으로 안내해 드려요. 가실 거예요."

명백한 거절의 말이다. 집사는 뒤따라온 맥시에게 정중해 고개를 숙이고

안내했다. 그러나 맥시는 집사를 무시하며 해리엇에게 소리쳤다.

"해리엇, 당신은 지금 착각하고 있어요. 트래비스는 당신을 진지하게

생각하질 않아요. 그를 스쳐간 수많은 여자들이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버림받았죠. 기억해야 할 거예요."

집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리엇을 보고는 맥시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가정부도. 브래던도.

"흥! 이제보니 지금 당신들도 모두 한 패로군요. 분명히 경고해 두겠는데

당신들은 지금 착각하... 아악! 뭐야! 이거 놔! 왜 이래!"

해리엇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현관문으로 끌고 갔다. 그녀가 해리엇보다 몸집이 커서

물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순간 너무 놀랬기 때문에 반항도

없었다. 현관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가 그녀 앞에서 문을 꽝하고 닫아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이였기에 집사와 가정부뿐만 아니라 평소에

표정이라고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뿐이던 브래던 마저도 입을 벌리고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뭐하고 있어요. 손님이 나갔으니 이제 할 일들 해요. 그리고 제시

배가 고프군요. 식사는 서재로 가지고 와요."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2층 서재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도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허둥지둥 움직였다.

서재로 들어가 책상이 있는 곳까지 겨우 걸어 들어갔다.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커튼을 확 제치고 창문을 열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트래비스에게 화가 났고 나 스스로에게도 화가났다.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부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처음 그의 정부가 되고자 했을 때 몇 가지 조건을 걸어두었었다. 절대

공식적인 파티나 저녁식사에는 나가지 않는다는 것과 그의 연인들을

확실하게 정리해 두기 등이다. 그를 두고 연적과 다툰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일뿐더러 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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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어났다. 물론 맥시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믿을 만큼 내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녀의 말을 믿기에는 해리엇이 트래비스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정부를 둘 타입이 아니다. 적어도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오히려 영원한 약속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할 것이다.

'영원'

조용히 되뇌어 본다. 그 단어만큼 어처구니없는 말도 없으리라.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사랑 역시도. 그건 허약한 심성을 가진 인간의 내면적 동요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사랑이나 영원히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훨씬 중요하다.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사랑했음에도 결국 반평생을 엄마가 없는 괴로움으로, 사랑의 상실로

고통스러워했는가 말이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진실로 아버지는

외로워하셨고 죽는 순간까지 상처로 힘들어 하셨다. 나를 볼 때마다 그의

눈에서 어머니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난 너무도 자주 그의 눈 속에

드러나는 당신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시간은

불과 몇 년이었지만 그 이후의 수십 년 동안을 죽음으로 상처 주었던

것이다.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노크 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해리엇 괜찮소? 맥시가 왔단 소리를 들었소."

트래비스의 성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녀가 뒤돌아 섰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들어오자마자 수다장이

제시에게서 상황설명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이에요, 트래비스. 내가 괜찮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식사 쟁반을 얹어 놓고 그녀에게로 다가온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짧게 키스하려 했을 때 그녀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배가 고프군요 당신은요? 점심식사는 했나요?"

의자에 앉아 도전적인 시선으로 쟁반에 담긴 음식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그녀 옆에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았다. 따뜻한 프랑스식

패스트리, 신선해 보이는 딸기가 큼직하게 보이는 샐러드와 매운 인도식

소스로 간을 맞춘 연어구이와 커피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패스트리를 손으로 뜯어 입어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순간 가장 부적당한 일이 있다면 그건

음식을 먹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배가 고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당연하게 식사를 했다. 곁에서 그가 포크로 부드러운 연어살에

향기로운 소스를 듬뿍 묻혀 그녀의 입가에 가져왔다.

거부할까 하는 생가가도 들었지만 그건 너무 어린아이 같은 짓이다. 이

상황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해리엇, 우선 당신에게 먼저 다짐해 둘게 있소. 맹세컨대 맥스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오. 한때 그녀와 약혼한 적은 있지만 그건 오래 전 일이오.

개인적으로 그런 여자를 싫어해. 한때는 그녀의 겉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건 20대의 성급한 열정에 휩쓸렸던 때였소. 그녀를 마주치고

싶진 않지만 그녀의 집안이 상류층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가끔

Page 22: 로즈마린의 사랑

파티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절대 그 이상은 아니오. 믿어 줄 수 있겠소?"

듣고 싶지 않았다.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담담한 그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고 말았다.

"믿어요. 내가 화가 난 건 그게 아니에요. 난 당신이 그런 여자와 아직까지

사랑에 빠져 있다고 믿을 만큼의 바보는 아니에요. 단지 오늘의 소동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어떻게 그녀가 그토록이나 당당하게 이 집에 들어와

내게 당신을 요구할 수 있죠? 또한 내게 돈을 내밀 수 있냐고요? 트래비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에요. 당신은 이런 상황을 미리 차단했어야 했어요."

그녀는 이성적으로 얘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눈물이 글썽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돈을 줬다고? 맙소사! 또 무슨 일이 있었소? 제시에 의하면 당신이 맥시를

무슨 말처럼 현관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 하던데?"

"그녀가 당신과 결혼하겠다는군요. 그리고 내가 불쌍하다구요."

의자의 팔걸이에 놓인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기대었다.

"해리엇, 우선 날 믿어 줘서 고맙소. 그녀의 말은 거짓이오. 그녀는 버릇없는

부잣집 망나니일 뿐이오. 어릴 적부터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외동딸이어서 그런지 모두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지.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여자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트래비스. 난 당신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예요. 사실 오늘 일만 아니었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생활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물론이오."

그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하지만 말을 해야겠소.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오. 내가 그녀와 약혼했을

당시는 내가 재계에서 막 주목받을 시기였소. 모든 매스컴이 나에게

집중되었던 때였지. 당시 난 사업으로 굉장히 바빠 주위의 문제에 신경 쓸

틈이 없었소. 여유가 없었을 때였지. 어느 파티에서 투자단 중의 하나인

코다인 브라이트 -당신도 알 거요. 영국에서 건너온 사업가지. 그의

할아버지가 백작의 작위를 가졌다고 하더군. 그 사람의 딸이 바로 맥시요.

당신도 알겠지만 맥시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요. 겉모습만 보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내게 집중되었던 스포트라이트를 원한 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고 매스컴이

물러나자 그녀는 따분한 나를 두고 새로운 스타를 찾기 시작했소. 그리고

그녀가 떠난 거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그녀가 아름다운 여자라서 약혼을 한 건가요?"

관심없어하던 처음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그녀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든 그녀가 물었다.

"아니오. 그때의 나는 아주 오만했소. 자신감에 차 있었소. 원하는 건 노력만

하면 내 손에 떨어졌으니까. 난 그때 결혼을 일종의 사업 계약 같은 걸로

여겼소. 그녀의 배경과 나의 재력이 완벽한 결합으로 생각됐었소. 그녀가

떠나고 나자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심지어는 우정조차도 없었음을

알고 다행스러워 했었소. 그리고는 좀더 영구적인 관계에 대해 신중히

Page 23: 로즈마린의 사랑

생각해 보기 시작했소."

그 말과 함께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어떤 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서둘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저 무언가 할 일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리고

지금은 당황스러움에 그녀는 그에게 어떤 권유의 말도 하지 못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부담스러움에 음식을 급히 먹다가 목이

막혔다. 눈물을 쏟으며 기침을 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는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소?"

그의 목소리는 처음 이 서재에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은근한 목소리였다.

"물론이에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쟁반을 옆으로 밀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 시간에 이렇게 일찍 웬일이에요?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음... 브래던이 전화했었소. 맥시가 있다고 하더군. 당신이 걱정됐었소. 그

여자는 이기적인 여자요. 그 여자에게 상처받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당신은 그 여자를 잘 처리했더군."

그의 말을 들으며 문득 아까 맥시가 했던 말이 생각이나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혹시... 맥스에게 내가 순진하다는 말을 한 적 있나요?"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아니, 그런 말은 한 적

없소. 왜 그러오?"라며 물었다.

그녀는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트래비스가

해리엇이 순수하다고 했다는 얘길 했었는데 그녀가 잘못 들은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흰 목의

뒷부분을 서서히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생각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6

트래비스는 회사로 가는 리무진 안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15분

동안 한 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알제리의 수도 근교에 컴퓨터 칩 제조 회사를 설립 할 계획서는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알제리는 지역 여건상 지중해에 닿아있어 유럽

전역에 컴퓨터 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인텔이나 모토롤라와

같은 거대 기업은 지금 아시아 지역을 거점으로 해서 빠른 속도로 세계

컴퓨터 시장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다. 이에 트래비스는 유럽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이점을 지닌 알제리를 선택했다. 그들 거대 컴퓨터 회사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아프리카는

중국이나 소련만큼이나 거대 수요가 발생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트래비스는 본능적인 직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건 캐쳐스

인스트루먼트를 지금의 거대 기업으로 만들어온 그만의 독특한

사업감각이다.

사실 표면적인 이유는 유럽이지만 아프리카는 무시 할 수 없는 잠재력을

Page 24: 로즈마린의 사랑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모로코를 염두에 두었었다. 그러나 모로코

왕국의 둘째 왕자인 퓨쳐스가 방해했었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투자단을

만들어 운영할 욕심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얼마전의 위기는 제대로

넘겼지만 호시탐탐 나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녀석이다. 최근 정보에 의하면

무언가를 준비중이라는데.... 다음 번에는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해리엇!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그녀가 정부를 제의했을 때 의외로 놀랐었다.

그녀는 절대 그런 타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트래비스의 주위를 서성이던 여자들과는 달랐다. 조그맣고

약해 보이지만 그녀는 강한 여성이다. 그는 그녀에게 빠져 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밤에는 열정적인 요부였다가 아침이면 새침한 귀부인처럼 아침 식탁에 앉아

그와 함께 식사한다. 그녀는 항상 그와 함께 일찍 일어난다. 단 몇 시간만을

자고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그가 출근할 때까지 옆에 있어준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가끔은 그녀의 경영학 서적들에 질투를 느낄

때도 있다.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요즈음의 그는

많이 변해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브래던이 그녀의 뒷조사를 하고

난 후 대학 이전의 과거 행적에 대해 찾을 수가 없었다며 수상해 했지만

그는 그녀가 그에게 절대 해를 끼칠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사업을 할 때면 가끔씩 느끼게 되는 본능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브래던에게 있어서는 최초의 좌절일 것이다. 전직 CIA

요원이자 트래비스의 고교 동창이기도 한 그의 보디가드는 재계의 인물들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기도 하다. 아니 트래비스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추적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는 그 분야에 있어

최고인 것이다. 해리엇이 신비의 인물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트래비스는

그녀를 믿고 있다. 본능적인 직감으로 그녀를 판단할 수 있었다. 세심한

브래던은 그녀가 퓨쳐스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비친 적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그의 생각을 단호히 부정해 버렸던 것이다. 해리엇

그녀를 영원히 내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안타까게도 오늘 그가 살짝 그런

뜻을 보였을때 그녀는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녀는 테라스에 앉아 해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트래비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그에게나 나에게 섣부른 기대를 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끝까지 그가 모를 수도 있지만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신 오늘은 유난히 아름답군. 특히 그 드레스는 내 맘에 꼭 들어."

리무진에서 내리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가 재빨리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냉혹한 사업가의 모습 외에 또 다른

부드럽고 정열적인 연인의 모습이 가끔은 그녀를 당황하게 할 때도 있다.

"고마워요, 트래비스. 당신 맘에 든다니 저도 기뻐요. 그리고 당신도 역시

멋져 보이는데요."

그녀는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살며시 그의 볼에 키스했다. 온통 흰 색

Page 25: 로즈마린의 사랑

벽돌로만 치장한 포르투칼식 레스토랑의 문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며 그녀는

다시 한번 트래비스의 정부가 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어서 오십시오, 캐쳐스씨."

나이든 지배인이 그들 쪽으로 인사하며 돌아섰다.

"안녕하시오, 피터? 이쪽은 내 친구 해리엇이오."

피터란 이름의 지배인은 정중하게 고갤 숙여 인사하고는 그들을 예약된

테이블로 인도했다. 이층의 창가 자리는 신선한 바람과 함께 넓은 정원의

신비로움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멋진 곳이군요, 트래비스."

자리에 앉으며 그녀는 말했다. 트래비스는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피터가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샴페인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밖에서 우리가 식사한지 꽤 오래된 것 같군. 기분이 좋아 보여. 해리엇,

오늘은 뭘 했소?"

"글쎄요? 뭐 평소와 다를 게 없었어요. 아! 오늘 쇼핑을 했어요. 그리고

애덤스 박물관에서 열렸던 경매에 갔었어요. 거기서 멋진 걸 발견했어요.

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이번 경매는 박물관을 2층으로 증축하기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열린 거였죠.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그래서...."

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에 열중했다. 하지만 곧 그가 그녀의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오, 트래비스 당신에게는 좀 지루할 지도 몰라요. 저에게는 사실 굉장히

재미있는 하루였지만...."

그녀가 자신 없게 말했다.

"아니오, 해리엇. 당신의 어떤 부분도 절대 날 지루하게 하지 않소. 즐거운

하루였다니 다행이군."

그녀가 뒤이어 말을 하려 했지만 웨이터가 왔다.

"뭘 먹겠소? 여기 음식은 다 괜찮지만 해물요리를 추천하겠소. 특히 해물과

함께 나오는 소스가 굉장해 독특한 맛이오. 후회하지 않을 거요."

"글쎄요... 난 잘 모르겠군요. 좋아요, 당신이 추천해 준 요리를 한 번

먹어보죠."

그녀는 메뉴 판을 덮고는 말했다.

이 레스토랑은 뉴욕 시내에서도 꽤 먼 곳이다. 트래비스가 워낙

유명인물이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취재진이

도사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해리엇이 거부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그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켜주는 편이었다.

"여기 자주 왔었나요, 트래비스?"

"가끔씩 오곤 했었소. 물론 여자친구와는 아니었소. 당신이 묻는 의미가 그런

거라면...."

그는 정중히 대답했다. 오늘 저녁 갑자기 집으로 전화해서 외출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리고는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해리엇 어떻소? 내 정부 생활이 맘에 드는 거요?"

"물론이에요, 트래비스. 아주 좋아요.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에게 잘해주고

있어요. 전 항상 당신에게 감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Page 26: 로즈마린의 사랑

"흠, 다행이군. 당신이 만족스럽다니 말이오. 오늘 경매장에 갔었던 얘길 해

보시오."

그녀는 평소처럼 그녀의 하루 일정과 느낌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넓은

리무진과 경매장에서 원하는 상품을 돈 걱정 없이 구입했던 순간의

짜릿함과 경매장안에 모여든 사람들의 제각각의 반응 등을 늘어 놓았다.

"그래서 너무 즐거웠어요. 트래비스 내 얘기 듣고 있나요?"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왠지 생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평소의

그와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무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피곤한 모양이군요. 오늘 외출하지 말걸 그랬어요. 당신 요즘 잠도

별로 자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 말끝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 그가 요즘 굉장히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잠을 별로 자지 못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오. 해리엇,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피곤하지는 않소. 사실 모든 남자가

침대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여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건

아니니까 말이오."

마지막 그 말에 그녀는 얼른 주위에 누가 듣지 않았을까 둘러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를 고르고 있는 동안 웨이터가

식사를 가져왔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후에는 유쾌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얼음 위에 놓여져 그대로 나온

신선한 굴과 인테리어에서 느껴지는 포르투칼식 분위기에 맞게

포르투칼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톡 소는 듯한 붉은 소스가 별미였다. 이어

석쇠 위에 구워진 새우와 연한 게살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는

음식만큼이나 그녀를 즐겁게 한 건 그의 유쾌한 유머와 그와 함께 있음으로

느껴지는 편안함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커피도 거절하고 바로 나왔다.

다소 서두르는 듯한 감이 있다고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믿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녀의 한 손을

그의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정중하게 그녀를 그녀의 침실 앞에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7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무리 기다려도 트래비스는 오지

않았다. 그는 매일 저녁 식사 후에 그녀의 방에 그대로 들어와 같이

샤워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방에서 샤워한 후 그녀에게 와서 서로가

열정적인 사랑에 지칠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의

방은 아주 조용했다.

살며시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옷을 벗은

흔적도 없고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복도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집사 트래비스가 다시 나갔나요?"

2층으로 올라오던 집사와 마주친 그녀가 물었다.

Page 27: 로즈마린의 사랑

"아닙니다.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 아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고마워요, 집사. 지금 바로 가보도록 하죠."

그녀는 트래비스가 서재에서 그녀를 불렀다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1층으로 내려가 서재를 노크했다. 이어 '들어와요'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래비스, 무슨 일이에요? 날 찾았다고 하더군요."

문을 열고 들어가며 그녀가 물었다.

"아, 해리엇 잠시 앉으시오."

벽난로의 불빛과 희미한 스탠드만이 거대한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왠지

그는 오늘 좀 이상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앞에 있는 책상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트래비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오, 해리엇. 특별한 문제는 없소. 단지 당신과 얘길 해보고 싶었소."

"무슨 얘기요?"

그녀는 폐에서부터 불쾌하게 일어나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그는

오늘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해리엇, 당신은 당신의 정부 생활이 굉장히 만족스럽다고 했었소. 나도

마찬가지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소. 우리가 처음 이 관계에 합의했을 때

일정 기간을 논의하지 않았었지만 이쯤에서 난 이런 관계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소."

"회의... 라뇨? 트래비스...."

"그렇소. 뿐만 아니라 이런 관계를 파기하자는 제의를 하고 싶은 바요."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기라뇨, 트래비스? 우리 관계에서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발견한 건가요?"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오, 해리엇. 잘못된 것 없소. 그렇게 충격 받은 표정은 짓지 마시오. 난

요즘 우리 생활에 아주 흡족해 하고 있소. 단지 이런 관계를 일시적 혹은

일정 기간으로 하는 것보다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에게 말하는 거요."

"그 말은... 제게 프로포즈하는 건가요, 트래비스?"

"결과적으로... 그렇소."

그녀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세상에! 트래비스가 내게 청혼을 하다니...!

"트래비스, 도대체 뭐가 문제죠? 우린 서로 이러한 관계에 만족해하고

있었잖아요? 영구적이라뇨? 그건 불가능해요."

"아니오, 해리엇.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요. 아니, 해리엇, 내 말을

들을시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어떤 결정에 확신을 가져 본 적은

없소. 우린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요. 난 과거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지만

적어도 당신과 같은 느낌을 준 여자는 처음이오.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특별하다고 할 수 있소.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 같소."

"트래비스, 아니에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래요 아마 내가 특별해 보일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당신이 만났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니까.

Page 28: 로즈마린의 사랑

아마도 새로운 느낌이겠죠.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해선 안돼요, 트래비스."

"해리엇, 진정해요, 제발. 너무 흥분하는군."

그는 급히 책상 옆 진열장에 가서 브랜디를 한잔 따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급히 한 모금을 마시고 그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브랜디의 불평을

삼켜버렸다. 눈물이 날 만큼 목이 따끔거렸지만 한 모금을 더 마셨다.

"해리엇, 나와의 결혼이 그렇게 끔찍한 일이오? 아니면 요즘 젊은

여성들처럼 결혼 자체에 대한 거부감인 거요? 정부를 선택한 당신의

판단으로 미루어 후자라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거요."

"트래비스, 난 당신과의 결혼이 끔찍하다고 생각지 않을뿐더러 결혼에 대한

거부감도 또한 없어요. 이건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예요. 우리는 지금의

생활에 둘다 만족하고 있어요. 그런데 굳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 느낌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이다.

"오,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아니, 난 그렇게 생각지 않소. 난 당신과의

관계를 당당하게 내세우고 싶소.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내

여자임을 자랑하며 다니고 싶소. 집에서만이나 아니면 다른 은밀한 곳에서

뿐만이 아닌 공식석상에서 당신과 함께 정당한 관계로서 떳떳이 우리를

보여주고 싶소."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사실 그녀가 그의 정부가 된 후부터 그의

공식석상에서의 파트너 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파티나 리셉션과 같은

공식석상에서는 다른 여자를 대동할 것을 권유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던 것이다.

"흠, 저 그렇다면... 당신은 공식석상에서의 파트너를 위해 나와의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연인으로는 매스컴의 노출을 꺼려할 까봐?"

"아니오, 젠장! 그런 뜻은 아니오. 지금 이 순간의 청혼은 순수한 한

남자로서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요."

그의 격한 외침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도 요즘 특별함을

느끼고 있다. 단지 좋은 감정이라거나 혹은 열정적인 사랑을 통한 성적

친밀감을 넘어서 어떤 느낌이 가끔 그녀를 가슴아프게 할 때가 있었다. 그녀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지만.

처음 예상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그를 대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은, 물론 다시 이혼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 헤어짐이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와 증오만을 준다는 건 상류층에서는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싫증나도 좋은 친구로서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다. 또한 지금의 감정이 무엇이든지 간에 오랜 시간동안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해리엇, 내 말 듣고 있는 거요?"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제자리로 돌아와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냈다.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오. 시간을 주겠소. 당신 생각이 결정되면

알려줘요. 하지만 한 가지 미리 분명하게 말해줄 게 있소. 지금까지 어떤

여자에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청혼한 적은 없었소."

그 말과 함께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큰 책상을 앞에

Page 29: 로즈마린의 사랑

두고 시종 일관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서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결코 쉽게 이런 얘기를 꺼낸 건 아니란 것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만히 앉아 있자 그가 책상을 동아와 그의 의자에 손을

얹고 서서 그녀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해리엇, 괜찮소? 내 청혼이 평소 당신의 발랄함을 빼앗아 가버릴 만큼

그렇게 충격을 준거요?"

"아니에요, 트래비스. 내게 청혼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당신처럼 진심으로 제게 청혼해 준 사람은 없었어요. 난 당신을 좋아해요.

아주 많이...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녀가 입을 열자 그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입술에 웃음을

담은 채 그녀에게 키스했다. 길게... 그리고 입술을 떼지도 안은 채 말했다.

"해리엇. 생각할 시간은 많을 거요. 난 기다릴 거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소? 당신도 분명 좋아할 거요. 충분히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소."

그의 키스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무력화시켰다. 그의 혀가 입술 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동안 그녀의 손은 그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오래도록 그는

키스만을 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의자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과 귓볼과 이마, 눈 등에 차례로 키스만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마치 그녀의 온몸을 애무한 것처럼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그들은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주인님,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집사가 문 밖에 서 있었다. 트래비스는 문을

열고 그에게 그만 가서 자라고 인사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트래비스 밤이 깊었어요. 당신,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 하잖아요. 그만

2층으로 올라가요."

"해리엇."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두 볼을 손에 감싸며 말했다.

"당신이 생각할 시간을 갖는 동안 현재의 우리 관계에 변화가 필요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지 알고 싶소."

그는 키스할 듯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아뇨, 트래비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우리 관계는 똑같을 거예요. 달라질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역시 당신은 내 생각만큼이나 똑똑하군. 나도 그럴 거라 예상했었소."

그 말과 동시에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책상에 걸터앉게 했다.

'트래비스' 그녀의 낮은 외침 소리는 그의 키스에 묻혀 버렸다. 그의 한 손은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이 말려 올라간 가운 속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책상 끝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가

재빨리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그의 눈 속에서 빛나는 성적 기대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기꺼이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는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고 가슴에 난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의식을 치르면서도 그녀는 그의 느낌이 기가 막히도록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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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단단한 어깨에서부터 군살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탄탄한 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딱딱하고

뾰족한 그의 거무스름한 유두에 혀를 갖다댔다. 그의 낯선 신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그의 손이 빨라졌다. 핑크빛 가운은 이미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끈 달린 잠옷의 레이스를 거칠게 어깨너머로

밀어버렸다. 한 손은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벽난로 앞에서 검붉게

보이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가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심장 소리와 거친 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천천히, 감질나게 애무했다.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유두 끝에 느껴지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을 양손에 움켜쥐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허스키한 웃음소리만을 남기며 양쪽 가슴의 봉우리에 가볍게 스치듯

키스만을 할뿐이었다.

"트래비스 제발 좀더... 트래비스 제발...."

드디어 그녀에게서 안타까운 애원이 시작됐다. 매일 밤 침대에서 그는

무서운 자제력을 보였었다. 그녀의 입에서 비굴하리만큼 달콤한 애원과

욕설이 다할 때까지 그녀를 몰아갔다.

"트래비스, 난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힘차게

얇은 잠옷을 완벽하게 둘로 찢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성급했다. 그의 옷을

벗기려 손을 들었다. 그러나 재빠른 그의 저지로 멈추게 되었다.

"아니, 해리엇 기다려. 이제 시작일 뿐이오. 온 밤이 다 우리 둘만의 것이오.

당신은 가만히 내가 주는 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녀가 항의할 거라는 걸 미리 알아챈 듯 그녀의 입을 키스로 막아버렸다.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추 몇 개가 풀어진 것 외에는 완벽하게

외출복을 입고 있는 그와는 반대로 알몸으로 다리를 벌리고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되자 그런 에로틱한 상상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아마도 내 몸은 사과보다도 더 선명하게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가늘고 긴 휜 목에서 서서히 아래로의 키스를 이어나갔다. 마치

집어삼킬 듯이 강한 듯하다가 애를 태우듯 스치는 그의 뜨거운 입술에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책상 위에 불안한 포즈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느라 책상 모서리를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두 손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르느라 그녀의 균형에는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넓고 어둠침침한 서재에 거친 호흡의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거칠게 그가 그녀를 책상 위에 뉘였다. 그녀의 두

다리는 여전히 책상 끝에서 위태하게 대롱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책상의

냉기가 그녀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하지만 뒤이어 허벅지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숨소리에 아연함과 동시에 공포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입술이 음모로 뒤덮여진

허벅지 사이의 깊은 곳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무얼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던 것이다.

"트래비스, 그러지 말아요. 그건 싫어요... 제발... 오, 트래비스... 헉!"

이런 그가 싫다. 아니 미치도록 좋다. 사실 그녀는 이러한 낯선 애무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의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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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답게 섹스에 있어서의 이런 애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이미

가지고 있음을 인정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는 것과 내가 직접

체험해보는 것과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걸 판단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에 직면해 있다. 그의

입술은 이미 활짝 피어난 그녀의 욕망의 봉우리를 찾아 부드럽게

키스해대기 시작했다.

"트래비스, 오... 제발... 그래요. 네... 헉! 좀더... 그래요. 그렇게...."

항의의 외침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가 주는 이 새로운 느낌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녀는 이미 더욱 간절히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온몸을 뒤틀며 엉덩이를

들어올리자 그는 탐험을 일시 중단하고 일어나 그녀를 끌어당겨 깊게

키스했다.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손에 잡히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거친 숨소리로 그를 요구할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의

바지 지퍼를 열고 그녀의 엉덩이에 두 손을 가져가 단 한번에 그녀를

소유했다.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엉덩이에 놓인 그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며 다시 한번 그가 힘차게 돌진했다. 그녀는 허리를 살짝

비틀고는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의 대단한 자제력에 대한 분노와 그녀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불충분함 속에서 미친 듯이 그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래, 좀더... 그래 그렇게... 빌어먹을! 바로 그거야!"

그녀를 욕망의 늪으로 인도하며 그는 거칠게 속삭였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그녀는 그에 맞추어 함께 이 의식의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허니, 그래! 한 번 더! 으음... 당신은 날 미치게 하는 마녀야!"

계속된 그의 이러한 속삭임도 이미 그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진 못했다.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 버린 것이다. 딱딱한 책상이 주는

아픔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거친 공격을 모두 받아냈다.

내일이면 그녀의 엉덩이에는 멍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가 다시 한번 그녀 깊숙이 밀고 들어오자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밤이 주는 적막 속에서 산들바람이 온몸을 쓸어 내려가는 느낌을 음미하며

2층의 침실 베란다에 선 트래비스는 생각에 잠겼다.

해리엇!

그의 아래에서 온몸을 비틀며 거친 욕설과 애원을 퍼부으며 그에게

매달렸었다. 아직 그녀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건 없다.

옥스퍼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아버지가 남긴 다소 넉넉한

신탁자금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지금은 그의 청혼을 받은 여자.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여자. 그러면서도 세상에 홀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여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여성이고 헛된 감상 속에

자기를 내던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도 않을 만큼의 현명함도 지니고 있는

여성이다.

트래비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지킬 거라고 생각했다. 30대 중반의

세상 물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남자는 사랑만으로 결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 그러한 행운이 찾아왔음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를 부르는 해리엇의 음성이 들렸다. 시트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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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르고 그의 뒤로 돌아온 그녀는 청초한 달빛의 여신처럼 보였다.

"뭐하고 있어요, 트래비스?"

"아 생각할 게 좀 있소. 내가 잠을 깨운 모양이군."

"무슨 생각요?"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묻는 그녀의 입술이 매혹적이다. 이미 오늘밤에도

두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의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아직

그의 몸은 만족스럽지 못함이 틀림없다고 아니 해리엇의 곁에 있는 한

만족이란 영원히 없을 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퓨쳐스 생각을 하고 있었소. 저번의 일이 있은 후 너무 조용하기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가만히 있지는 않을 위인인데...."

"음, 그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트래비스?"

그녀는 조금 전의 풀어진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소. 적어도 알제리의 컴퓨터 침 제조 회사 건으로 다시 일을

저지르리라고 믿소. 모로코 왕국에서의 그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로 보건대

아직 계획 단계인데 벌써 포기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트래비스 당신과 퓨쳐스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는

없나요?"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다시 정원을 향해 옮겨갔다.

"대학 시절에 그와 난 한 여자를 두고 대적한 적이 있소. 럭비 팀에 함께

있었는데 그와 난 들다 공격수였지. 대학 연맹전에서 우리 팀은 본선에

진출했었소. 그때 난 우리 대학 응원 팀 단장이었던 줄리엣이란 여자를

만났었소. 날 쭉 지켜보고 있었다더군. 싫지 않았소. 그래서 우린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했었소. 문제는... 그녀가 나와 사귀기 전에 퓨쳐스를 알고 지낸

거였소. 그 녀석은 꽤 심각했던 모양이오. 모로코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약혼반지까지 준비했더랬소. 어느 날 그녀의 아파트에서

침대에 함께 누워있던 우리를 그 녀석이 발견한 거지. 예전에 그녀가 그에게

아파트 열쇠를 줬었는데 우연히 그날 함께 마주친 거였소. 그는 우릴 보고는

그대로 떠나버렸소. 게임이 한창 일 때였는데 그는 그렇게 귀국해 버렸소.

별로 유쾌한 얘긴 아니오."

"트래비스, 이해할 수 없어요. 단지 대학 시절에 짝사랑한 여자 때문에 아직

당신을 미워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적어도 그는 일국의 왕자이고,

게다가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그렇소. 그 뿐만은 아닐 거요. 대학시절에 우린 지독한 라이벌이었소.

개인적으로 그에게 악한 감정은 없소. 그도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지.

가끔은 그가 내게 도전하는 일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해본

적도 있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도전에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을

없지. 그는 일에 있어서만은 지독히도 냉정한 인간이오."

"그렇군요."

조그맣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갑자기 그는 로즈마린이 떠올랐다.

"로즈마린을 알고 있소?"

그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졌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어 그녀는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로즈마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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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당신도 알겠군. 현재 재계의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의 최고의

정보 라인을 가동시켜 찾는 인물이지 그가 누군 지를 밝혀내고 그와 손잡는

다면 어떤 분야에서든지 세계를 지배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말이오."

"당신도 그를 찾고 있나요?"

"물론이오. 난 사실 그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소. 두 번씩이나 날

도와주었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어떻게 로즈마린이라 불리는지 알고 있소? 사실 그의 정체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가 일을 나쁜 방향으로 몰아간 적이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소.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그는 기업을 팔거나 분해해서 산산 조각나게

내버려두지 않은 거요. 그래서 그의 닉네임이 여성적인 로즈마린이 된 거요"

"계속 그가 당신을 도울까요?"

조심스레 그녀가 물었다.

"그건 알 수 없소. 지금까지 그가 일을 나쁘게 몰아간 적은 없지만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소. 사실 퓨쳐스보다 로즈마린이 더 신경

쓰인다고 할 수 있소.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적'이니까"

"그렇군요."

"자, 그만 잡시다. 너무 늦었소."

그와 함께 침대로 들어가서도 그녀는 한동안 천장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8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로즈마린은 현재 어떤

활동도 자제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브래던의 무뚝뚝한 음성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한 트래비스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느껴지는 초조함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

"퓨쳐스 쪽은?"

"모종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로선 퓨쳐스 그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칩거 상태라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흠 그가 가만히 있는데도 모종의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 보는 이유는?"

"우선은 그의 활동이 너무 제한되어져 있다는 거죠. 그의 곁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그게 더욱 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잇다는 겁니다. 그가 가만히 있어도 밑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제 3자의 개입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로즈마린

같은..."

"그렇다면 그가 로즈마린과 손잡았을 확률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우선 로즈마린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

도 있지만 최근까지 그의 활동에 비추어 독자노선을 추구해 왔었기 때문에

더더욱 확률적 예상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흠 알겠네. 수고했네. 브래던 계속 퓨쳐스 쪽을 감시하고 특히 최대한의

라인을 가동시켜 로즈마린의 정체를 찾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짧게 고갤 숙이고 나가는 브래던을 보며 트래비스는 밀려오는 피곤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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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을 떨치려 천장으로 고갤 들었다.

'로즈마린!'

그의 이름이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현재로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주 평온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건 강한 태풍을 예고하는 침묵의

전조일 뿐이다. 힘겨운 싸움이 일어날 것이란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로즈마린, 그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 쪽이 피를 흘리며

무너지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현재로선 어떤 판단도 금물이에요. 아마도 퓨쳐스도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는 도전하지 않을 거예요. 트래비스의 사업능력에 회의를 품던 몇몇

주주들도 저번 일로 완전히 그의 편으로 돌아선 거죠. 때문에 퓨쳐스

쪽에서는 아마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뒤통수를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예상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현재 트래비스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요?"

"그래요, 해리엇. 물론 퓨쳐스 쪽에 세심한 감시를 계속하고 있겠지만 일이

터질 때까지 먼저 어떻게 손쓸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할 수 있죠."

"흠 파멜라 고마워요 더 말할 사항이 있나요?"

"저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에요. 근데 다시 로즈마린을 뒤쫓고 있는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수화기의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던 해리엇의 손길이 일순 긴장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담담했다.

"파멜라 항상 누군가가 로즈마린에 대해 궁금해하고 뒤를 쫓고 있어요. 신경

쓸게 못돼요"

"아니에요, 해리엇. 이번은 특별해요. 재계의 누군가가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추적자의 신원을 밝혀내는게 굉장히 쉬웠는데 지금 이 사람은 전혀 알 수

없어요. 신경 쓰이는 건 그가 아주 특이한 방법을 쓴다는 거죠."

"특이한 방법? 그게 뭐죠? 파멜라"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발을 아래로 내려 의자에 바로 앉은 해리엇은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부쳤다.

"오래 전부터 추적해 왔어요. 우리가 그의 활동을 차단하려는 시도를 하면

금새 사라져버려요.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면 다시 나타나죠. 하지만

그에게선 묘한 긴장감이 느껴져요. 뿐만 아니라 그가 사라질 땐 어김없이

바이러스를 퍼뜨려요. 그것도 매번 이름이 다른 바이러스를요. 별로 심각한

피해는 없지만 그 순간 날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한동안 해리엇에게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파멜라, 최대한 빨리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세요. 기분이 좋질 않아요."

"알겠습니다."

누구일까. 로즈마린을 그토록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

사실 어쩌면 별일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요즘 트래비스의 프로포즈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트래비스.

그를 생각하니 온 몸이 뜨거워진다. 아직도 그녀의 몸에서는 사랑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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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다. 한 밤에 보여주는 트래비스의 모습은 정열의 화신이다.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에게 주고 싶어하게 만든다. 실제 그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의식이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열정에 찬 여성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서야 만족한다. 그 외에도 모든 면에서 그는 멋진 연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유했었던 그런 사랑은 없어도 행복을 느낀다.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보지 않았던 기대고픈 마음을 들게

한다. 그래서 두려워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빠져들고픈 유혹을

느낀다.

자 그만 하자

일에 몰두해야 한다. 컴퓨터에 나타나는 숫자들에게 집중하며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피터, 해리엇이에요"

잠에서 깬 듯한 부스스한 목소리로 피터가 전화를 받았다. 하긴 오전

11시란 시간은 그에게 초저녁이란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불만 섞인 그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퓨쳐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알아 봐줘요 요즘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해요"

미지근한 물살을 헤치며 홀로 수영장을 독차지하는 사치는 그녀에게 크게

웃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집에 딸려 있던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몰두하고픈 일이 있을 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몸의 움직임만으로 완벽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제시 "

아쉬운 듯 수영을 뒤로한 채 타월로 머릴 감싸며 물었다.

"인테리어 장식가가 도착했어요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어요 금방 가죠"

샤워 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삐죽 묻어 났다. 며칠 전 몇 시간

동안의 설득 끝에 트래비스에게서 허락을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2층에

그녀만의 개인 서재를 만들 계획이다. 돈 많은 남자의 정부 역할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하고자 하는 일에 돈에 구애됨이 없이 즉각적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점잖아 보이는 고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로

들어가니 인테리어 회사에서온 직원이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세라 코스토비치인가요?"

"네 마담 집이 아주 멋지군요 특히 전망이 훌륭한데요 누군지 모르지만

지금의 이 장식들도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여요 서재를 꾸밀 실

생각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차를 한잔 먼저 하시겠어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선 방을 보고 스케치를 해보고 싶어요"

"좋아요 절 따라오세요"

2층 그녀의 침실 맞은 편에 있는 방을 서재로 꾸밀 생각이다. 이전에

손님방이었다고 제시가 말해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라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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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보세요 여긴 아주 넓어요 저 침대를 치우고 창문 앞에 아주 큰 책상을 두고

싶어요"

"멋지군요 하지만 마담이 쓰실 서재라면 좀더 여성적인 아담한 분위기가

어떨까요? 중간 크기의 책상과 그 앞에 여러 개의 소파가 놓여진다면 아주

어울릴 겁니다. 친구 분들이 오셔서 함께 얘기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녀는 이미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 매료된 듯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세라 난 여성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소파는 아주

간소하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주 사무적으로 보여졌으면 좋겠군요 "

좀 강한 어조로 해리엇이 덧붙였다.

"특히 자질구레한 장식은 정말 싫어요"

장식 가는 의외인 듯한 표정을 떠올렸지만 재빨리 감추었다. 사실 이만한

상류층의 인테리어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 구태여 전문적 식견 입네

어쩌네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을 만큼의 눈치는 있어 보였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소란스럽지 않게 말이에요."

9

"저 트래비스 잠시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일에 몰두해 있던 트래비스는 서재 문에 얼굴만을 내놓은 해리엇을 본 후

웃음이 나오는 걸 재빨리 숨겼다. 가끔 그녀는 저런 어린 아이 같은

장난으로 그를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사실 그 주위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절 바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굳어있는 경우가 많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지나치게 아양을 떠는 여자들도 있다.

"들어오시오, 해리엇."

"바쁠 텐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잠옷 위에 껴입은 가운 자락을 팔랑거리며 쪼르르 들어와 책상 맞은 편의

의자에 않았다.

"아니요 해리엇 당신과 마주하는 일은 절대 내겐 방해하는 게 아니오 그래

무슨 일이오?"

"저 당신이 얼마 전에 말한 영구적 관계에 대해서 말인데요."

웃는 얼굴은 그대로지만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의 청혼이

있은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혹시 그녀가 그 일을 잊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그래 해리엇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소? 난 당신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결혼이라는 법률적

관계에 대해 아주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정부와 같은 방법이 아니라도 그녀는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또한 똑똑한 여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그걸

부정하고 있다는 것에 한 재산 걸 용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원했다.

바로 그녀에게서.

"저 트래비스, 난 당신을 원해요. 이제까지 제가 아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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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을 만큼 당신은 내게 특별해요. 하지만, 음 ...글쎄요 꼭 결혼이라는 게

우리 사이에 필요하다고 보진 않아요."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거절이오?" 길게 한숨을 쉬며 그녀는 어떻게 그를 설득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트래비스, 난 당신을 거절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결혼에 대해서 만이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새로운 한가지를 제한하려고 해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젠장 정말 어렵군'

"제안! 제안이라니 그게 뭐요? 명백한 결혼 거부 의사에 따르는 제안이라..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군."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빈정거림을 찾아보려 했지만 너무도 담담한 톤으로

말하고 있었기에 그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트래비스 제발 당신이 기분 나빠하지 않기를 바래요. 난 당신이 프로포즈할

때의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봤었어요. 특히 파티나 공식적인 저녁 식사에

초대된 자리에서의 당신의 파트너 역할을 거부한 부분에 대해서요. 아니

잠시만요, 트래비스 내 얘길 끝까지 들어줘요. 난 당신이 단순히 파트너

얘길 한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단지 처음 우리의 관계에 대해 합의했을

때의 조건 중에서 공식적인 노출이 싫다고 했던 부분에 대해 다소 유동적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해리엇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줄 수 있겠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됐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공식적인 연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이전의 당신의

정부들처럼요."

"해리엇 당신이 나와의 관계를 승낙했을 때 제일 처음 요구한 게 그런

문제였지 않소? 나의 이전 정부들과는 당신이 다르다는 것 말이요 근데

어떻게 생각이 바뀐 거요?"

"난 저...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미 실질적인 정부관계이면서 그런 표면적인

노출을 거부한다는 게 왠지 어리석어 보였어요."

"호오 놀랍군 당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말이오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원인이 바로 나의 청혼이였다고 믿어도 되겠소?"

그는 놀라움에 대한 어떠한 자제도 보여주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의

즐거워하는 어조에 화가 치밀었다. 그가 너무 즐거워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우선 이 문제를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요"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인정했다.

"그럼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언론에 의한 당신의 노출이 두렵지 않은 거요 ?"

"트래비스 난 두려워한 게 아니라 단지 귀찮아서 그런 거예요."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귀찮은 게 이유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당신이 내 제안에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당신은 왜 결혼이 싫은 거요?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사실 내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건 사실이잖소. 오만하게 들릴

지는 모르겠지만 날 거부할 수 있는 여자가 별로 많지는 않을 거요."

Page 38: 로즈마린의 사랑

굳이 자랑이라는 기색도 없이 그저 담담히 그가 말했다. 사실 그의 주위를

서성이며 그에게 결혼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려 안달하는 여자가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트래비스, 난...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머닌 내가 3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진 홀로 절 키웠죠. 내 부모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셨어요.

하지만 그 사랑으로 아버진 남은 평생동안 어떤 여자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했어요. 오직 날 바라보며 엄마와의 사랑을 간직하고 사셨어요.

모르겠어요.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당신 말은 맞아요.

하지만 부모님의 가슴 아픈 결혼 생활이 내겐 큰 충격을 주었었죠. 서로가

영원을 약속하며 신성한 제단에서 사랑의 약속을 했지만 결국 아버진

평생을 어머니와의 추억만을 가지고 가슴 아파하며 사셨던 거죠. 난 그런

관계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과 그 시간들에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요. 굳이 그런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

따위는 없이 말이에요."

그녀는 말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지 않았었던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두었던 마음이다. 책상을 돌아와 그녀 앞에 앉은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해리엇"

그는 그녀를 가슴에 앉았다. 이 순간 아무런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는 그녀의 말속에서 무언의 갈망을 읽었다. 그녀는 상처받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철저한 사랑의 외면에서 그는 무자비하리 만치 간절한 사랑의 바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거부하는 만큼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녀에겐 오랜 시간 동안의 믿음과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그가 이제부터 그녀에게 주어야 할 많은 것들 중 우선적인 것들이다.

"재미있는 얘긴 아니죠?"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그의 키스에 묻혀버렸다.

"아니요, 해리엇.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얘기 중에서 가장 슬픈 얘기였소. 난

당신을 동정하진 않겠소. 하지만 당신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소."

10

일요일 아침 그들은 침대에서 미적거리며 일어날 생각을 전혀 않고 있었다.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들 때쯤 호들갑스러운 제시의 음성과 노크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요 제시, 맙소사! 잠시 기다려요"

트래비스는 급히 옷을 집어 입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성질 급한 제시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침대 위에 함께 있는 해리엇을

보고는 얼른 뒤돌아 섰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전혀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제시, 일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요? 미합중국 대통령이 여길 방문하기라도

했소?"

해리엇은 겨우 침대 시트로 가슴을 부여잡고 그의 불평하는 얼굴을 보며

Page 39: 로즈마린의 사랑

웃음이 터져나와 손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나이든 노부인들의 음성에 그 성급한 웃음은 재빨리 사라졌다.

"트래비스! 고모가 왔다. 어째 환영인사가 좀 묘하구나."

맙소사!

트래비스의 두 고모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집을 들이닥친 것이다.

"그래 트래비스를 알게 된지는 얼마나 된 거유?"

두 고모중 블래어라 불리우는 트래비스의 고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1년이 안돼요 사실 전 그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는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그럼 부모님은 어디에 살고 계시지?"

이번에 브릿지 고모가 물었다.

"저 어머니는 제가 3살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진 제가 대학 4학년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저런 불쌍하기도 해라. 사실 트래비스도 부모님이 둘 다 일찍 돌아가셨지.

굉장히 슬펐겠구나."

블래어는 정말 눈물이 글썽이는 듯 손수건을 들고 호들갑스럽게 두 눈을

누르며 과장되게 말했다.

"아니에요 다 지나간 일인 걸요 그리고 아버진 어머니 곁에 갈 수 있다고

오히려 행복해 하셨어요."

그때 트래비스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구원의 천사를 만난 기분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블래어, 브릿지 고모 해리엇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그는 이런 상황이 아주 즐거운 듯이 눈을 빛내며 두 고모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괴롭히다니, 우린 그저 얘길 좀 한 것뿐이다. 니가 그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어정쩡하게 니 주위를 맴도는 머리 빈 여자들하고 놀아나는 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한 것뿐이다. 그래 넌 어떠니?"

브릿지는 말도 안돼는 소리라며 그의 말을 일축하고 장난스레 물었다.

"잘 지내고 있었어요. 일요일 아침 일찍 수다장이 고모 두 분을 맞이하는

일을 빼구요. 그래 여행은 어떠셨어요?"

"흠 좋았다. 잘 생긴 남자들이 세상엔 참 많더구나. 너의 말 그대로

이탈리아는 정말 멋진 곳이더구나. 특히 남자들이 아주 친절해. 우릴 마치

여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접해 주더구나."

트래비스의 말에 의하면 2년 전 브릿지의 남편이 죽은 후 두 사람은 세계

일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블래어는 40살에 남편이 죽은 이후에는 재혼은

않고 가끔 데이트만 하고 있는 정도라고 했다.

"건강은 어떠세요?"

"좋아, 아주 좋아. 사실 우린 니가 걱정이구나. 너도 이젠 어엿한 가정을

가지고 안정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니니.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

그 말은 트래비스를 향한 것이었지만 블래어의 눈은 해리엇을 보고 있었다.

난처한 상황을 제시가 구해주었다.

"점심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두 고모와 함께 식탁에 앉은 해리엇은 다소 불편했다. 침대에 벌거벗은 채로

둘이 함께 있는 걸 들킨 게 거북스럽기도 했지만 두 고모의 눈빛이

Page 40: 로즈마린의 사랑

예사롭지 않아서이다. 그들은 식사를 하며 두 고모의 여행지에서 있었던

얘기에 재미있어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두 고모는 피곤하다며 커피도

사양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재밌는 분들이에요. 특히 당신을 굉장히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렇소 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 곁에서 날 지켜주신 분들이오."

"당신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죠?"

"27살이었소. 그 이전까지는 사실 사업을 할 생각이 없었소. 빈둥거리며

보통 다른 부유한 집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소.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지. 내게 주어진 유산을 지켜야 했으니까."

"당신은 그 유산이 부담스럽지 않았었나요? 거부하고 싶을 때가 없었나요?"

그녀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진지함이 이상했던지 그는 잠시 틈을

두고 대답했다.

"물론 두려워 하긴 했었소. 하지만 싫진 않았소. 사실 어릴 때부터 내가

짊어져야 할 많은 부분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소. 때문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젊은 시절에 놀러다니면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항상 깨어있었던 거요. 그래서 난 내 자신의 마지막

한 부분만은 지켜낼 수가 있었소."

"그렇군요."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세상이 무서워 스스로를 숨겨버렸다. 남이 나의

정체를 모른다면 날 파괴할 수도, 빼앗아 갈수도 없을 테니까.

"무슨 일이오? 고모들이 오셔서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걱정마시오.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

"알아요. 단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그녀는 웃으려 노력했다.

11

"해리엇 뭘 하고 있니?"

서재의 문을 열고 블래어와 브릿지가 외출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와! 멋지구나! 아주 차분하고 세련된 느낌이.야 트래비스가 이렇게 해주었나

보구나. 좋아 굉장해."

그들은 마치 무슨 큰 대발견이나 한듯이 서로 마주보며 고갤 끄덕이고는

찬사를 연발했다. 검토할 자료가 많았지만 트래비스의 고모들이니

냉정하게만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앉으세요 차 드시겠어요?"

"오 그래 마침 목이 마르구나 몇 개월 동안 뉴욕시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

건물은 그대론데 포장이 달라졌어 이젠 우리같이 늙은 것들이 다녀 볼 만한

곳이 별로 없더구나 모두 젊은이들 위주로 변해버렸어."

슬프다는 듯이 브릿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쇼핑은 어떠셨어요 살만 한 게 있던가요?"

써야 될 논문이 있다는 핑계로 오전에는 그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오후에까지 그런 행운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그런

그녀를 보고 트래비스는 호탕한 웃음소리만을 남기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Page 41: 로즈마린의 사랑

"얘야, 너도 같이 갈걸 그랬구나."

"아니에요, 전 쇼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성급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사실 그녀는 옷가게에 앉아 한 두 시간동안을

그렇게 허비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물론 가끔은 하루종일 트래비스의

카드를 들고 기쁘게 시내를 누비고 다니기도 하지만 별로 많진 않았다.

솔직히 그녀는 그런 옷 나부랭이들보다는 경매나 혹은 박물관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 그렇구나 참 오늘 시내에서 쇼핑하다 트래비스의 회사에 들렀구나

오늘 저녁은 외식하자고 했다. 너도 예쁘게 차려 입으렴 어휴 뉴욕 시내에서

저녁을 먹어 본지가 하도 오랫만이라 가슴이 다 떨리는 구나"

단언하건데 브릿지의 연기솜씨는 일품이다. 오스카상에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리무진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지독한 사진 세례가 쏟아졌다. 사실 처음에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었다. 하지만

곧이어 트래비스의 세심한 배려로 이젠 제법 익숙해져 있다. 단단한 그의

팔이 허리에 놓여져 있음을 확인하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놈의 기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트래비스에게 달려든다. 저녁식사 한끼가

뭐가 그리 큰 뉴스거리가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트래비스의 곁에 선 묘령의 여인에 대한

신상명세서가 확실하게 공개 될 때까지 그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특히 그가 몇 개월간의 솔로 끝에 만난 여자인데다 그 관계가 제법

오래가니 말이다.

웨이터에게 인도된 레스토랑의 전망이 좋은 자리에 앉자 샴페인이 나왔다.

"고모 두 분이 오늘 따라 무척 아름다우신데요."

"저런 저런, 그렇게 아부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은 해리엇에게나 해주도록

해라. 아가 오늘 저녁엔 정말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두 분도 멋져 보이세요"

그녀는 명랑하게 대꾸했다. 가끔 날카로운 구석이 없진 않지만 트래비스에겐

정말 멋진 가족으로 보인다. 건배를 하고 샴페인을 마셨다. 이어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들은 주문을 했다.

오후 시간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여행얘기와 트래비스의 어린 시절의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지독한 반항과 말썽꾸러기였던 꼬마.

가끔 트래비스와의 관계에 대해 넌지시 암시 같은걸 던졌지만 특별히

간섭할 생각은 없노라고 두명의 고모가 얘기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달링?"

그녀의 빈잔에 샴페인을 따르며 그가 물었다.

"특별한 건 아니에요. 아까 오후에 고모들과 함께 당신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했었죠. 당신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재미있더군요."

"얘야, 지금에서야 재미있었지만 그 당시엔 정말 저 애의 장난으로 우리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참 근데 너도 뉴욕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어디였니?"

난감한 질문이다.

"근교에요. 아버지의 직장이 시내에 있었지만 아버진 번거러운 도시 생활이

피곤하셨던가 봐요. 그래서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는 곳에 집을 장만

Page 42: 로즈마린의 사랑

하셨더랬어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트래비스가 갑자기 질문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소? 당신도 지독한 장난 꾸러기였을 것 같은데."

'지독한'이라 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아까 그녀가 그에게 한 말에 맘이

상했나보다. 하지만 눈빛은 유쾌했다.

"글쎄요. 전 7살 때부터 일을 해야만 했어요."

"저런 집이 가난했었나 보구나. 하지만 얘야 부끄러워하진 마라. 우린 그런

일에 대해 전혀 민감해 하지 않는다. "

블래어가 측은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은 아니구요. 사실 집은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어요.

아버진 제게 항상 최고의 것만을 사주셨었죠. 단지 아버진 어릴 때부터 제가

남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동전 한푼의 소중함이랄까? 제게

독립심을 심어주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 집에서 아버질 도와드리며 제

용돈을 벌었죠. 제가 10대가 되자 집밖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사실 제 친구들이 주말 파티에 가기 위해 쇼핑을 하는 동안 전

베이비시터나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어요. 그땐 그런 일이

불만스러웠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게 아주 다행스러운 경험이었던것

같아요."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트래비스는 신중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에게서 아픔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런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그러한 것들을 극복해낸 것이다.

강한 여성.

그는 더욱 더 그녀에게 매료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모들을 초대한 것은

잘된 선택인 것 같다 일요일 아침 그런 갑작스런 출현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지만 그만큼의 성과가 있는 것 같다.

"트래비스, 얘야, 해리엇의 얼굴이 뚫어지겠구나. 음식을 먹는 일에도 신경을

좀 쓰려무나."

블래어 고모의 새침한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 그가 말대꾸할 수고를 덜어주었다.

"어머 트래비스 여기서 당신을 보다니 정말 뜻밖이군요."

해리엇은 문제의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얼굴을 돌릴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몇 개월 전 그녀에게서 머리카락을 붙잡힌 채 트래비스의 집에서 쫓겨난

적인 있는 맥시밀리언이란 여자다.

"안녕하시오 맥시 그 동안 잘 지냈소?"

트래비스는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바르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의 시선이 트래비스를 향했다가 두 고모를 거쳐 해리엇과 부딪히자

굳어버렸다. 그 냉랭한 차가움에 해리엇은 한기를 느꼈다.

"이쪽은 블래어 브릿지 고모요. 그리고.... 해리엇이오 해리엇과는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몇 개월전 당신이 내 집을 방문했을 때 말이오."

잠시 뜸을 들이며 해리엇을 소개한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가서는 약간의

경고조로 변했다. 그녀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내고는 트래비스에게 살며시

기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트래비스 당신 아직 저런 여자와 함께 있군요. 당신은 많은 사람의

Page 43: 로즈마린의 사랑

시선을 받고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당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파트너조차도 가려서 동행해야 한다는 걸 잊었나요?"

다분히 시비조의 말투이다 . 트래비스에게 기대 속삭이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대상은 해리엇 자신임을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지만

그녀는 무시해버렸다.

식사 중 다른 사람을 소개받은 경우 잠시 식사를 중단해야 할 정도의

에티켓이 요구되는 곳이건만 해리엇은 철저히 무시하며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가서 꼭꼭 씹었다. 물론 맥시를 향한 웃음도 잊질 않았다.

"트래비스 어서 식사하세요. 여기 음식은 정말 맛이 좋군요"

그녀는 두 고모에게도 눈짓을 보내며 그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두 고모들은

잠시 의아해 하다 금방 그녀의 사인을 알아채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그도 웃는 그녀의 얼굴과는 다른 그녀의 눈빛에서 경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맥시 만나서 즐거웠소. 다음에 또 봅시다."

명백한 거절에 맥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테이블을

한동안 노려보더니 작별인사도 없이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동행에게로

걸어가 버렸다.

"자 이게 무슨 일 인지 설명해 주겠니. 맥시밀리언의 집안이 어떤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곳에서 그녀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꺼야 누가 설명을 해주겠니?"

트래비스의 신음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무시하고는 샐러드 속에 있던

큼직한 감자를 포크로 힘껏 찍어 입어 넣고는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돌아오는 리무진 안에서는 두 고모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앞에서

그녀의 얼굴은 붉그락 푸르락 거렸고 트래비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재미있어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그녀는 잠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에 대해서 그녀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왔다. 물론 다소의 수정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뭔가 달라지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생애 처음으로 그녀의

인생이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났음에도 전혀 무섭다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이다.

"지금 당신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주제가 나였으면 좋겠군."

언제 들어왔는지 트래비스가 그녀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 해도 절대 그걸 인정하지는 않을 거에요. 당신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자만심에 날개를 붙여주는 것밖엔 안될 테니까요."

가운을 벗고 그녀 곁으로 다가온 그를 보며 그녀는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기 시작했다.

"하루동안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은 당신이 차지하고 있어요."

12

"오늘은 뭘 할 계획이세요?"

두 고모를 쳐다보며 해리엇이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의외로

친해졌다. 트래비스라는 공통 분모로 인해.

Page 44: 로즈마린의 사랑

"글쎄다 오늘은 라뎅스 거리의 미술관을 구경할 생각이다.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곳이라더구나 거길 가볼까 싶다"

"어머 그래요? 저도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요즘 마이클 코펠스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한쪽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트래비스가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마이클이란 작자를 아는 가보군? 처음 들어보는데..."

그의 강한 어조에 해리엇의 눈썹이 의외라는 듯 치켜올라갔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 대학 때 친구의 남편이에요. 만약 지금 결혼을 했다면 말이죠. 사실

그들은 꽤 유명했었죠. 너무 가난해서 매일 참치 통조림과 땅콩만으로

버텼어요. 난 그들을 지켜보며 놀랐었던 기억이 있어요. 사실 제 친구의

집은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었요. 평범한 중산층 수준이었죠. 근데

마이클이란 남자가 지독히도 가난했었던 거죠. 고아였었거든요. 제 친구는

집에서 받은 용돈을 마이클의 화구를 구입하는 데 모조리 써버리는 거죠.

그리고는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같이 생활하는 거죠. 난 그들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버터 낼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그게 사랑이란다. 얘야."

브릿지가 또 감정이 벅차 오르는지 손수건을 찾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브릿지 고모 진정하세요."

해리엇은 트래비스의 고모들의 낭만에 대한 비난의 신음 소리를 애써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정말 캐쳐스 집안 식구들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연대의식은 가히 놀랄 만한 수준이다.

"참치 통조림과 땅콩으로 살면서요?"

그녀도 모르게 강한 불만이 불쑥 튀어나왔다. 수습하려 했을 때는 이미

블래어에 의해 늦어졌다.

"물질적 풍요는 중요하지 않아 얘야 중요한 건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 가지.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다 하는 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사랑만

있다면."

"블래어 고모, 해리엇은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오, 그래 미안하구나. 하지만 정말 사랑은 중요하지."

오후 2시쯤 그들은 라뎅스 거리의 미술관에 와 있었다. 트래비스도 조금

늦게 합류했다. 그림은 다소 초자연적인 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중개인의

설명에 의하면 새로운 세기에 대한 작가적 반향이 이 시대의 기계문화에

대한 경멸과 포용으로 드러났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나서 다소 주저했다. 예전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였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이런 해리엇 잘 지냈소?"

뒤돌아 서니 마이클이 서 있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구두와 돈이 많이

들였음직한 고급 양복 차림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마이클? 그림이 참 좋군요."

왠지 무언가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의 마이클에게선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예지력과 창조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눈빛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 눈빛이 흐릿해진 것 같다. 아마

Page 45: 로즈마린의 사랑

샴폐인을 좀 많이 마셔서 그런거겠지.

"어떻게 지내고 있소? 그래 결혼은 했소?"

그녀를 훑어보는 그의 눈빛이 뭔가를 감정하는 듯한 느낌이였지만 애써

불쾌감을 감추었다.

"전 그냥 계속 공부를 하고 있어요. 아! 트래비스 소개할께요. 제 친구에요.

이쪽은 이 그림들의 주인공 마이클 코펠스톤이구요, 이쪽은 트래비스

캐쳐스에요."

"안녕하시요."

"안녕하시요, 캐쳐스 씨?"

마이클의 눈빛이 트래비스를 한번 훑어보고는 빛이 났다.

"아참, 근데 멜리사는 어디에 있죠? 아직 그녀를 보지 못했어요."

"누구? 멜리슨? 그녀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요?"

"마이클, 멜리사말에요 대학 때 당신과 매일 함께 지냈었잖아요. 당신들은

결혼했나요?"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다.

"아, 그 멜리사 말이군. 우린 헤어졌소. 졸업하고 얼마 후에. 그런 지난 얘긴

그만 하고... 아 그래 잠시만 지금 가봐야 겠소. 떠나기 전에 나한테

왔다가요. 할 얘기도 있고."

누군가가 그를 부르자 그는 트래비스에게 짧게 인사하고 뒤돌아서 갔다.

트래비스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어요 헤어졌다니."

트래비스도 아침에 식탁에서 그의 고모들과 함께 한 대화를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나는 아니오, 해리엇. 난 그러지 않을 거요."

인사를 하려고 마이클을 찾았지만 그는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대학 시절 비참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들의 사랑이 생각났다. 사실 아침에 블래어의 얘기들 중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그녀도 동의했다.

사랑!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가, 정말 마이클과 멜리사에겐 아주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그녀는 말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신뢰. 헌신. 사랑.

이런 단어들에서 잠시나마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세상엔 수많은 사랑이

존재하고 또한 환희만큼이나 이별과 상처와 증오가 존재한다. 인간 존재

증명으로서의 알리바이는 그러한 수많은 감정들의 나열로서 쌓여 가는

것이다.

무감각, 거부, 불신의 벽 속에선 살아감에 대한 참다운 진실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해야한다.

그녀는 뒤돌아섰다. 왠지 마이클의 웃음이 가식으로 느껴졌다. 정말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까.

"해리엇 벌써 가는 거요"

마이클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마주보며 섰다.

"네 트래비스의 고모 두 분과 같이 왔어요. 피곤하신가 봐요. 내일 뉴욕을

떠나시기 때문에 좀 일찍 가야될 것 같아요."

Page 46: 로즈마린의 사랑

"그렇군. 근데 트래비스 캐쳐스와는 어떤 관계요? 대단하군. 당신 거물을

잡았어."

분명한 빈정거림에 그녀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의지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들렸다.

"이런 그렇게 발끈하니 더 귀엽군. 그거 알고 있소? 사실 난 대학 시절에

당신도 꽤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더랬소. 당신이 트래비스와 친하다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좀 도와줘요. 사실 이런 예술계에선 그런 사람을

많이 알수록 도움이 되지 알고 보면 꽤 냉정한 곳이거든."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금방 알아챘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을 때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순서를 빼았겼다.

"해리엇 돌아갈 시간이오."

트래비스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에스코트해 나갔다. 마이클의

이야기를 굳이 트래비스이 고모들에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안녕히 가세요. 보고 싶을 거에요."

며칠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트래비스의 두 고모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임을

아는 데는 충분했다.

"사실 우린 처음엔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어. 그 이전의 트래비스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아양만 떠는 여자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해리엇을 직접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어. 넌 특별해."

"그래 맞아. 트래비스와 넌 잘 어울려. 해리엇, 남자들은 원래 사랑엔

무감각한 편이지. 하지만 그가 널 세상에서 누구보다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

그에게 잘해 줘."

그들은 진심인 것 같았다.

"물론이에요. 최선을 다할 께요."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수 있을까? 그건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다. 그걸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13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 해리엇은 컴퓨터의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러난 수치상의 상황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건 직감적인 본능이다. 누군가가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주식을 아주 교묘하게 흔들고 있다. 대주주들의

소유분포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이전이나 양도 형식으로서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동요되는 듯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도 은밀하게

말이다.

뭔가 불안하다. 아니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일을 예상했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계속 주시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에 해리엇은 화들짝 놀랐다.

이 시간에 웬 전화지.

"여보세요."

Page 47: 로즈마린의 사랑

"해리엇 무슨 일 있소?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 같은데."

긴장된 트래비스의 음성이 날카롭게 서재를 울렸다.

"아무 일도 없어요 트래비스 이 시간에 당신은 어쩐 일이죠?"

"오늘 저녁 베이젼 호텔에서 파티가 있을 거요. 며칠 전에 말했었는데

기억할지 모르겠군. 알제리 투자단과의 계약 조인을 끝내고 축하파티가 있을

거요. 당신과 함께 갔으면 좋겠소. 그리고 너무 예쁘게 하고 나오진 말아요.

파티장내의 모든 남자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으니... 농담이요. 예쁘게 하고

나와요."

"오, 트래비스 축하해요. 미리 축하해 주지 않으면 나중에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당신은 굳이 파티장에서 축하해 줄 필요 없소. 우리들만의 은밀한

공간이 있지 않소. 근데 정말로 별일 없는 거요?"

"그렇다니까요 트래비스 몇 시에 올 거죠?"

"7시쯤 데리러 갈거요."

"아니 바쁠 텐데 브래던을 보내요."

"절대 바쁘지 않소.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집 앞에서부터 당신을

에스코트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좋아요 트래비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겠군요."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고 그녀는 한동안 웃고 있었다. 그의 유쾌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정말 대단한 남자인 것 같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본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문제지.

세부적으로 들어갈 볼까 얼핏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됐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되는데.

그래 내일 보자 오늘은 트래비스를 위한 날이다. 그를 위해 이 일을 몇 시간

정도 보류해야겠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트래비스와 해리엇은 활짝 웃었다. 이젠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트래비스와 함께 잠시

포즈를 취하고는 얼른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재계의 모든 사람이 초대되어 진 것 같았다.

그녀는 허리에 놓인 트래비스의 강한 팔을 의식하며 토닉 워터가 든 잔을

샴페인 인양 거만하게 홀짝거렸다. 그가 국내외의 기업가들과 인사하는 동안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백치인 양 웃음 지었지만 실은 하나하나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벌써 지겨운 거요, 해리엇?"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던 해리엇은 갑작스런 트래비스의 목소리에

유혹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트래비스. 오늘은 당신을 위한 날이잖아요. 오늘 밤 내내 이런

파티가 계속된다 해도 난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트래비스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렷다.

"근데 알제리의 투자단은 보이지 않는군요. 아직 오지 않은 건가요?"

"나도 아까부터 찾고 있었소. 좀 늦어지는 모양이군. 좀전에 사람을

보냈소."

"정말 사람들이 많기도 하군요.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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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죠?"

"글쎄,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나도 적잖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더랬소. 하지만 당신도 알겠지만 이 세계는 승자에겐 아주 관용스럽지.

패자에겐 냉정하게 등을 돌려 버리지만. 난 대부분 승자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이 자리를 차지한 거요."

웃으며 다정스럽게 얘기하는 트래비스를 보며 해리엇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에게 진정한 두려움은

무엇일까 그를 겁줄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할까 아니 없을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트래비스 오랜만이군."

액센트가 강한 외국인의 음성에 둘은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해리엇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공교롭게도 퓨쳐스였던 것이다. 모로코의 둘째

왕자이자 그 나라의 대표적 기업가로서 현재 트래비스를 위협하고 있는

적군 제1호이다.

"잘 있었소. 퓨쳐스, 오랜만이요. 이쪽은 내 친구 해리엇이요."

"안녕하시오, 해리엇?"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녀의 발끝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훑어 올랐다. 그는

전혀 의외인 듯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트래비스를 향해 물었다.

"트래비스 자네의 취향이 좀 변한 것 같은데. 이 아가씨는 자네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오, 미안해요, 해리엇. 당신을 모욕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요.

단지 당신이 좀... 음... 뭐랄까,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요."

그의 장황한 말에 해리엇의 허리에 놓인 트래비스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녀는 재빨리 퓨쳐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퓨쳐스, 안녕하세요? 트래비스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당신도 음... 뭐랄까

굉장히 독특한 면이 있군요. 아, 물론 매력적이란 말이에요. 트래비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트래비스가 듣기엔 충분했다.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웃음이 사라진 퓨쳐스를 향해 말을

꺼냈다.

"퓨쳐스 당신이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특히 오늘 같은 날 말이요 날 축하해

주러 온건 아닐텐데"

"축하! 축하라니... 오늘 이 파티가 축하 파틴지는 몰랐는데 의외로군 뭘

축하하는 자린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요.

참고로 이건... 트래비스, 자네가 한때 내 친구였었다는 우정으로

말해주겠는데... 알제리인들을 빨리 찾아 보는 게 좋을 거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그는 뒤돌아서 갔다. 두어 발자국 가다 다시

뒤돌아선 그가 해리엇을 향해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소, 해리엇."

해리엇은 퓨쳐스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알제리인을 빨리 찾아보라니...

설마!

낮에 서재에 있었던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해리엇."

"트래비스."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Page 49: 로즈마린의 사랑

"해리엇,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 내가 나가봐야겠소. 아무래도 이상해.

지금쯤이면 알제리에서 온 대표가 도착해야 하는데... 혼자서 괜찮겠소?"

그의 음성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눈빛에 초조함이 스쳤다.

"난 괜찮아요, 트래비스. 가보세요."

그녀의 입가에 살짝 키스한 후 그는 사람들의 무리를 헤집고 사라졌다. 키가

작은 그녀는 트래비스가 사라져간 방향을 쳐다보다 이내 그를 찾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트래비스가 정말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퓨쳐스의 목소리다. 급히 뒤돌아서다 그와 살짝 부딪혔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둘렀다.

"조심하시오. 트래비스가 잠깐 없다고 그리 허둥대다니... 아까와는 상당히

다르군. 설마 입이 얼어붙어 버린 건 아니겠지?"

"물론이에요.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지는 말아요. 몰래 살그머니

다가와 사람을 놀래키다니 그게 당신의 방식인가요?"

허리에 놓인 그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그녀가 톡 쏘아 부쳤다

"호, 대단하군. 바로 그 톡 쏘는 매력에 트래비스가 빠진 거군, 그렇지

않소?"

"당신 같은 사람에게서는 아무리 매력 있다는 소릴 들어도 반갑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죠. 근데 아까 알제리인이 오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이죠?"

오늘은 1년 동안이나 끌어온 알제리의 컴퓨터 칩 제조회사의 최종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이다. 근데 알제리의 기업 대표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알제리 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난 오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당신은 뭔가 알고 있군요, 그렇죠?"

"꽤 날카롭군. 생각보다. 당신은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어."

"말 돌리지 말아요. 이번에도 분명히 당신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걸요?"

"귀여운 아가씨. 매력적인 여성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가슴이

아프군. 자세한 상황은 트래비스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나보다 휠씬 잘

알고 있을 거요. 사실 이번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오. 잘 있으시오."

그 말을 뒤로 한 채 그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트래비스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무슨..?"

입을 열기도 전에 트래비스와 부딪혔다.

"트래비스"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역시 아까 낮부터 이어져 온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집에 갑시다, 해리엇."

그녀는 급히 그의 말을 따랐다. 지금은 괜히 서투른 반항을 하거나 꼬치꼬치

물음을 던질 때가 아니다 많은 시선과 웅성거림이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엇다. 파티장 입구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슬금슬금 피해버렸다. 마치 그가 죽음을 부르는

Page 50: 로즈마린의 사랑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트래비스는 표정없는 얼굴로 그녀를

데리고 리무진으로 이끌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오히려 너무 조용하다는 게 이상한 점입니다."

"아직 확인된 바는 없지만 퓨쳐스 쪽에서 인텔이나 모토로라와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일부 우리 쪽 투자단이 그쪽에 포섭된 것 같다는 결론입니다만

이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브래던과 젠슨은 열심히 현재의 상황을 번갈아 가며 브리핑하고 있었다.

트래비스는 파티복 그대로 서재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14

그녀가 조용히 2층의 자신의 서재로 올라가려 하자 그가 붙잡았다. 이미

브래던과 젠슨이 서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되는 상황 시나리오는?"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주주들이

이번 사업 실패를 이유로 최고 경영자의 퇴진을 요구하고 조기 수습을

원하는 쪽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퓨쳐스와의 정면 대결입니다. 이 경우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은행이나 채권단들의 거센 항의와 일부

불안한 주식시장의 움직임이 표면적으로 드러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파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녀는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이는 샴페인 탓이 아니다. 트래비스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에게 캐쳐스 인스트루먼트가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원지는 영국입니다. 우리가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집중해 있는

동안 그들은 영국시장에서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해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식시장에서도 제3자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는 그

제3자가 로즈마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예상해야 할 것입니다."

브래던의 마지막 말에 해리엇은 얼굴이 하예졌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건 좀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젠슨의 목소리다.

"이건 그의 방식이 아니에요. 비록 그가 퓨쳐스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왠지 이번 일엔 로즈마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일을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아 계속 상황을 살피고 지켜보세. 잠시 나가주겠나? 해리엇과 할 얘기가

있네."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가에 서서 어두운 밖을

응시하며 미동조차 없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 후에 그가 뒤돌아서 그녀를

보았다.

Page 51: 로즈마린의 사랑

"해리엇."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 있는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녀는 그를 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이 그녀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해리엇은 직감적으로 그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할 것이라는 걸 느꼈다.

"해리엇, 당신도 방금 브래던과 젠슨의 말을 들었을 거요. 난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소. 아까 파티 장에서 당신을 남겨두고 전화를 하러

가면서부터 이미 난 최악의 경우를 예상했었소. 아니, 해리엇 계속 들어요."

그녀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그가 재빨리 막았다.

"난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소. 최악의 경우 파산할 수도 있소. 그러한

생각이 들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당신이었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금 선택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택하든지 아니면 떠나라는 의미일 것이다.

"트래비스 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가득 고인 말들이 많았지만 무언가

그녀의 목구멍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듯 소리내어 말할 수 없었다.

"해리엇, 난 당신을 사랑해.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것 같소. 난 오래 전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 왔소. 지금까지 이

말도 안돼는 감정을 부정해 보려고도 했었지만 오늘 저녁 난 내 가슴속의

진실을 보게 된 거요. 내가 가진 모든 걸 잃게 될 지금에 와서야 난 진실을

직면하게 된 거요. 어쩌면 얼마전 내가 당신에게 청혼했을 때 그때 당신을

억지로라도 내곁에 묶어두었더라면... 지금 이처럼 불안하진 않을 거요.

하지만 지금 나에겐 당신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조차 없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내 말은 진심이오. 이제 와서 당신이 날 떠난다고 해도

당신을 비난하진 않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무너질 거예요.'

이 말은 다행히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는 그의 가슴에 안겨 그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울어버렸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난 당신을 좋아할 거예요. 당신의 돈이 많든

적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해리엇, 난 어쩌면 파산할 지도 모르오. 그러면 매일 참치와

땅콩만을 먹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을 그걸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잖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지금 당신을 놓아주어야 할 때인 것

같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참치와 땅콩이 끔찍한 건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난 보기보다 아주

강해요."

"아! 해리엇,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원해 본

적이 없소. 당신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돼 버린 거요. 내가....

당당히 당신을 요구한다면 받아들일 거요?"

조용히 그가 물었다.

"트래비스,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파산

Page 52: 로즈마린의 사랑

가능성 때문에 내게 이렇게 주저하는 건가요. 그런가요?"

그는 말이 없었다.

"트래비스, 아니에요.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이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파산하게 된단 해도 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게 진짜 사랑인

거예요. 만약 당신이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내게 주저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건 날 모욕하는 거예요, 트래비스."

"해리엇."

그 말이 그에게 구원이라도 되는 양 그는 거칠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녀의 키스를 요구했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처럼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힐 듯한 그의 포옹과

키스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접촉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영혼과 영혼의 결합인 것이다. 그의 진실과 그녀의 진실이 순간

결합했다. 이 순간은 어떤 거짓도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완벽함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 사랑은 이런 것이다. 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브래던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그들의 결합을 방해했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녀는 브래던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급히 2층의 서재로 올라갔다.

"우리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인텔과 모토로라 그리고 모로코의

퓨쳐스가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합작회사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누구의

생각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퓨쳐스 왕자일 거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그가 아닌게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미국 컴퓨터

메이져 회사 쪽이 훨씬 유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퓨쳐스 쪽에서는

이번만큼은 왠지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래던의 최종 보고가 끝난 후 트래비스는 사무실의 창 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정말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그 날의 파티 이후

어느 누구도 트래비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게 냉정한 비즈니스 계의

생리인 것이다.

해리엇은 뭘하고 있을까, 그날 밤 서재에서의 대화 이후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볼 기회도 거의 없었다. 오늘 새벽 집에 갔을 때 해리엇은 그들의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왠지 깨우고 싶지 않아서 한참을 들여다 보다 나와

버렸다. 아직 캐쳐스 인스트루먼트는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비록

그녀가 그날 밤 그를 선택한다고 했었지만 그는 완전히 안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그날 밤 그녀의 약해진 감정을 이용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파산 위기로 충격을 받은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그만큼 절실했었다. 지금쯤 그녀는

자신의 성급함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그의 맘속엔 한줄기

한기가 흘러들었다.

15

Page 53: 로즈마린의 사랑

"간단해요 해결책은 한 가지 뿐입니다. 적어도 주주들에게는요. 트래비스를

퇴진시키고 퓨쳐스나 아니면 그 쪽에서 요구라는 인물을 내세워서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이죠. 그럴 경우 트래비스는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소액 주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이게 가장 탁월한

방법이죠."

파멜라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차갑게 들린다.

"우리 쪽에 유리한 상황은?"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며칠 전에 급히 뉴욕으로 날아온 피터가 대답했다.

"현재의 상황이 결과적으로는 트래비스를 희생양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돼 있어. 하지만 사실 몇몇 주주들은 트래비스의 능력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는 것 같아. 만일 트래비스가 물러난다 하더라도 과거의 그의

능력을 들춰보면 다른 기업에서 스카웃 경쟁이라도 일어날 거야. 그렇다면

캐쳐스 인스트루먼트 쪽에선 상당히 불리하지. 캐쳐스 인스트루먼트는 사실

그가 만들었고, 그만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물도 없으니까."

"피터 파멜라."

그녀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트래비스의 편에 서겠어요."

조용한 음성이다.

"승산이 없어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에요. 만약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로즈마린이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냉정한 파멜라의 목소리.

"맞아, 해리엇. 지금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아."

피터도 역시 같은 생각이다.

조용한 침묵.

"그래도 돕고 싶어."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난 이제 더 이상 두려움에

숨어버리기만 하는 겁쟁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해리엇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전세계에

퍼져 있는 로즈마린의 조직들을 생각해야 돼요. 로즈마린을 위해서 몇 년

동안 일해온 사람들을 기억해요."

파멜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에겐 경력이 없어요. 로즈마린이 지금 노출된다면 그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누가 로즈마린을 위해 일했다는 걸 믿어주겠어요? 특히

우리들은 점 조직화 되어 있어요. 그들 모두를 외면하겠다는 건가요?"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파멜라의 목소리가 지금은 한 옥타브 올라가

격렬하게 들렸다.

"해리엇, 네 생각을 좀더 알고 싶어."

신중한 피터의 음성이다. 대학 시절부터 함께 일해온 동료이자 해리엇을

가장 깊이 이해해주는 친구이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정해. 어차피 우리가 이 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수는 없어. 지금도 수많은 기업들이 로즈마린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어.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거야. 난 지금의 우리 조직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싶어. 과거의 방식을 원한다면 그대로 할 수도 있어.

하지만 핵심조직을 정비해서 떳떳하게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야 해. 어차피

Page 54: 로즈마린의 사랑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로즈마린으로 당당히 서고 싶어."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이 없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숨소리만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

피터의 수긍하는 듯한 목소리다.

"트래비스의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까지의 로즈마린의 행적을 돌아보면 의외로 치밀하게 일을 추진해

왔었다는 거야.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더 쉬웠다고는 할 수 없어.

이건 우리의 능력인 거야. 로즈마린의 조직이 의외로 그 핵심 역량에

있어서는 탄탄하다고 생각해. 때문에 이젠 표면위로 로즈마린을 노출시켜도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거야."

"D-day는 언제로 하죠?"

드리어 파멜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도 모르게 해리엇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주주총회."

"쉽지 않을 텐데요."

"나도 알아. 우선은 아직 마음을 확실하게 잡고 있지 않은 주주들을 설득해.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캐쳐스의 주식을 끌어 모으도록 해."

"잠깐" 피터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한다 해도 소득이 없을 꺼야.

트래비스 쪽에서 이미 행동을 시작했을 테니까."

"그럼 어떤 방법으로 나가지?"

"우선 인텔과 모토롤라 그리고 퓨쳐스의 포트폴리오를 분열시켜야 돼.

우리쪽 정보에 의하면 퓨쳐스 개인으로선 이번 일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아.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거지. 사실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아."

"하지만 연막 작전일 수도 있습니다."

파멜라가 다시 냉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퓨쳐스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정보야. 그 나라에서 직접 온 거니까."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파멜라?"

"트래비스의 재정적 후원자들을 모으는 일이죠."

"구체적으로 말해봐."

"첫째는 은행이나 채권단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거액을 가진 개인

투자가가 트래비스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보낸다면 우선 주주들의

의견이 분분해질 겁니다."

"맞아! 바로 그거야."

해리엇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검은 여우'의 후계자이다. 비록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거부했었지만 혈통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파멜라."

"네."

"은행과 채권단 쪽에 손을 써봐. 집중적으로."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요."

Page 55: 로즈마린의 사랑

"개인 투자자는 내가 알아볼게. 로즈마린에게 신세진 사람이 몇 명 있지.

그들에게 연락할 꺼야."

"좋은 생각이에요, 해리엇."

"피터."

"난 모로코 쪽을 좀더 살펴보지. 그리고 인텔과 모토로라와의 경쟁회사쪽에

압력을 가해볼게 필히 반응이 올 꺼야."

"좋아! 지금 당장 시작해."

전화를 끊고 난 후 해리엇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16

오늘의 긴급이사회의 소집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누구도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트래비스는 그들의

표정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는 살려야 한다.

트래비스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가 쉽게 물러난다면 대주주로서의 명목상의

이사대우는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은 치욕적인 패배일 뿐이라는 것을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피땀 흘려 이룩한 회사이다. 경영실패가 아니라 외부의 농간에 의한

파산일 경우는 더욱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던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동원해서 라도 살려낼 것이다.

"사장님 회사를 우선적으로 살려야 합니다. 아마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사장님이니까 무엇을 하셔야 하는 건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사들 중 56살의 최고 연장자인 로버트 멜베스가 입을 열었다. 항상

과묵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지만 트래비스의 최고 지지자이기도 했었다.

허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도 이젠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하려는 듯 하자 트래비스는 한 손을 들어 이를 저지시켰다.

"맞는 말입니다. 멕베스 씨의 충고는 잘 들었습니다. 저만큼 현재의 회사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또한 제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에 최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저의 모든 선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라워하는 이사들을 그대로 두고 힘차게

회의실을 걸어 나왔다. 조금 전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최선의 방법.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위기를 이겨나가야 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래비스의 성격이다. 위기 속에서 더욱 강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성격이 그의 장점이자 매력인 것이다.

강한 남자!

Page 56: 로즈마린의 사랑

진정으로 힘이 있는 남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그가 바로 트래비스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트래비스는

브래던의 굳은 얼굴과 마주쳤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느낌이 아니다 뭔가

새로운 정보를 찾아낸 게 틀림없다.

"말해보게, 브래던."

트래비스는 그의 책상 맞은 편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브래던에게 쉽게 말 할 수 없게 만드는 정보란 꽤나 충격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로즈마린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침묵.

오직 그뿐이다.

위기!

이 위기 속에서도 트래비스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되새김되는 것은

채권단의 압력이나 주주들의 횡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로즈마린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과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캐쳐스 트래비스의 능력을....

그것은 기업의 이익과는 무관한 것으로 경제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순수한 경쟁 욕구이다.

"누구지?"

의외로 자신의 목소리가 담담한데에 트래비스는 놀랐다. 강렬한 기대치의

상승과 막대한 아드레날린의 방출로 인해 트래비스의 혈관이 확장되었다.

매력과 무서움을 동시에 소유한 적을 알게 된다는 건 분명 흥분할 만한

일이다.

갑자기 부저가 울렸다. 흠칫 놀라며 트래비스는 비서에게 말했다.

"메리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을 텐데.."

"사장님 그런 말은 없으셨는데요. 그리고 지금 로즈마린이라는 분이

오셨는데요."

뭔가를 추궁하는 듯한 메리의 음성과 함께 로즈마린이란 이름이 넓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순간 트래비스와 브래던의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혔다.

"전 아닙니다."

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브래던이 옆문을 통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비서실을 통한 문으로 로즈마린이 등장했다.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트래비스는 아무 것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로즈마린을 맞이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선 그대로 한때 해리엇 콘디어스라

불리웠던 여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 생애 처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일깨워준 여자이며 생애 마지막이

어떠한 모습이든 함께 할 수 있길 간절히 원한 단 하나의 여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로즈마린이란 이름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눈빛에서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놀라움조차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Page 57: 로즈마린의 사랑

아니 그밖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해리엇"

서로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쉰 듯한 음성 속에 다소의 주저함을 느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 이였을까.

트래비스가 한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해리엇은 주저하지

않았다. 달려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으로 서로를

향한 탐색을 지연시키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키스라든가 거친 키스라든가

하는 로맨틱한 열정의 시작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저 내 앞에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가장 솔직한 욕구의 표현으로

그를 혹은 그녀를 어루만지고 맛보고 그의 신음 소리를 듣기 위해 열심히

몸을 움직일 따름인 것이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키스와

함께 사랑과 열정의 항해를 시작했다.

원초적 의미로서의 기본적 욕구 외에 인간 이성의 극치로 표현되어질

정신적 능력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사랑과의 결합!

현실 속에서의 인간이 존재함의 영역에서 극도의 희소가치를 자랑하는 단

하나의 감정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이다.

허무함이랄까 불결함에 대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트래비스는 알게 되었다. 해리엇 아니 로즈마린을 만나기 전엔

때때로 느꼈던 섹스가 끝나고 난 뒤의 후유증이 해리엇에게는 없었다. 항상

만족감과 포만감에 젖어 음미하고 싶어졌었다. 그 말할 수 없이 유쾌한

기분을...

그것이 사랑인 것이고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가 바로 자신의

여자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 난관을 잘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로즈마린이라는 장벽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무시되어질 수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수용되어져야만 하는

것 또한 아닌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대학원생이라는 건 위조된 거요?"

조금 전까지 이 소파 위에서 서로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주고받은 직후에

있음 직한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어조에서 그녀는 이 질문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과거 그녀의 행위들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해리엇은 솔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이해시킬 수 있느냐없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아니에요, 전 지금도 진짜 학생이에요."

"그건... 믿기가 좀 어렵군. 로즈마린이 이제서야 경영학에 대한 전문적인

이론 연구를 시작한다니 말이오."

"그래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 거예요."

길게 숨을 내쉬고 해리엇은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었다.

"트래비스 저의 아버지는 재계에서 '검은 여우'라 불리웠었죠. 난 어릴

때부터 자본투자나 경영의 세부적인 실무 지식을 배웠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니 아주 당연할 일이였던 거죠. 난 20살 때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난 경험이나 실무적인

지식엔 강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어요.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이라든가 투자의 적정성에 대한 직감에 있어서는 실패해 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죠.

Page 58: 로즈마린의 사랑

한계에 부딪힌 거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거에요.

대학원에 등록했어요. 하지만 로즈마린은 그땐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상태였었어요.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두려웠어요."

실제로 그녀 자신이 지금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트래비스의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 그녀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실내가 약간 춥게 느껴졌다.

"지금은...두렵지 않은 거요?"

그로서는 영원히라도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녀의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두려움이 어떠한 것인지 그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두려움 속으로 그녀가 다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그녀가 그에게만은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칫 잘못하면 재계에서

자신이 노출될 수도 있는 그러한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말이다.

"트래비스, 난 두려워요. 하지만 동시에 두렵지 않기도 해요. 글쎄요 이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해리엇, 걱정하지 마시오. 난 당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을 거요."

"고마워요 트래비스 그렇게 말해주니 좀 안정이 되는 것 같아요.

로즈마린으로 성공했어요. 사실 재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로즈마린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그의 능력에 대해 궁금해하죠. 대단하다는 얘길 하죠 하지만

사실 나 스스로에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어요. 로즈마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은 사실 나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중요한 뭔가가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죠. 그때 당신을 만난

거예요. 사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놀랐었죠. 이미 난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그 만큼이나 놀라운 사람이었어요. 난 당신에게

매력을 느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직도 이런 말을 직접 하는 게

약간은 어색한 모양이다.

"하지만 또 하나 비즈니스맨의 모습으로서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의

사업방식이나 위기 속에서 더욱 강해지는 성격 등이 제겐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당신에게선 진정한 용기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배우게

됐어요. 로즈마린이 성공 속에서도 왜 허전함을 느꼈는지 알게 된 거예요.

숨어버리는 건 비겁한 거죠 아울러 진정한 용기를 가진 비즈니스맨의

모습이 아닌 거에요. 난 아버지에게서 진정한 비즈니스맨의 참모습을

배웠어요 하지만 잊고 있었었죠. 아니 날 지켜주던 아버지라는 울타리의

상실로 그저 숨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보면서, 당신과 함께 하면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된 거에요. 난 진정한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것은..."

"그래요 로즈마린을 드러내는 거예요."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를 지울 수 있는 건 이 순간 세상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트래비스는 크게 소리내어 웃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자제력을 끌어

모았다. 그녀가 더 이상 숨지 않는 다는 것은 그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를 향한 그녀의 감정이

Page 59: 로즈마린의 사랑

자신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남자에게와는 확연히 다른 것임을

장담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해리엇,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로즈마린을 드러내는 일

말이오... 어떤 방법으로 할 거요? 일급비밀만 아니라면 알고 싶군."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녀에게서 그 답을 듣고 싶다.

"이번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주주총회요."

17

제각각의 입장에 선 정당성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면서

캐쳐스사의 주주총회는 그 핵심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각각의 결론은 자신이 소유한 주식의 가격하락에 따른 손실 부담에

관한 것이었으나 표면에서 거슬러 올라간 최종적 결론은 분명 트래비스

캐쳐스의 퇴진이다.

친트래비스파와 반트래비스파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도 고요함의 접점을

이루고 있는 이는 당사자인 트래비스일 것이다. 사실 오늘 그의 맘속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퇴진이 아니다 주주들의 주장과는

달리 트래비스는 아직 물러날 결심이 서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자 조용히 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주주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이제 현재의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최고경영자인 트래비스 캐쳐스 씨를 이

연단 위로 모시겠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캐쳐스 인스트루먼트의 미래를

결정할 아주 중요하고도 민감한 시점임을 다시 한번 주지시켜 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의 매끄러운 진행도 트래비스의 등장으로 인한 어색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캐쳐스 사를 창립하고 번성시켜온 당사자이자 최대 주주중의

한사람인 트래비스를 향해 직접적으로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 중심 가에 위치한 앰버서더 호텔 10층의 한 로열객실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로즈마린과 파멜라, 피터는 캐쳐스사의 주주총회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점검하며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트래비스가 연단에 올라갔다는 소식입니다."

전화기 옆에 대기하고 있던 파멜라가 조용히, 하지만 힘있게 침묵을

깨뜨렸다.

"좋아 이제 출발하지"

휠체어에 앉아 무릎 위에 놓아둔 노트북 컴퓨터를 가만히 두드리며 피터가

입을 열었다.

세 명 모두 최고급 정장차림이다.

여기서 회의장까지의 거리는 10여분 정도 걸릴 것이다.

호텔에서 미리 준비해 둔 리무진에 올라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파멜라가 피터의 휠체어를 밀며 회의장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그들을 제지했다.

Page 60: 로즈마린의 사랑

"우리에겐 입장할 권리가 있어요 로즈마린입니다."

처음으로 해리엇 콘디어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주주총회의 초대장을

내밀었다.

"트래비스 캐쳐스씨 물론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상황은 상황자체에서의 심각성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의 자신감은 지나친 낙관론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대주주 중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지지를 보내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각 주주들로부터의 온갖 비난과 무능력함에 대한 질시에 잘

대처해 왔다고 트래비스는 생각했다. 허나 지금의 이 질문은 바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다. 트래비스는 현재 그가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섰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많은 소액 주주들이 바로 지금 그의

대답여하에 따라 확고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사회자가 급히 연단에 뛰어올라 그에게 작은 종이 쪽지를 전달했다.

트래비스는 그 쪽지를 펴 보고는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여러분 캐쳐스 인스트루먼트는 건재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더욱 번영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 전 저의 최대의 후원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최고의 효과를 내기 위한 일시적 침묵 후에 그의 목소리가 회의장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로즈마린입니다."

웅성거림과 감탄사 속에 해리엇은 천천히 회의장을 가로질러 트래비스가 서

있는 연단 위로 올라왔다.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가는 선을 냉정한 스위트

재킷으로 감춘 그녀의 외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마린'이란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트래비스의 뇌리를 스쳤다.

그의 눈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전하는 고마움과 감사함을...

"잠깐 그녀가 로즈마린이란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소? 도저히 믿을 수사

없소 적어도 우리가 생각했던 로즈마린이란 인물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순간 장내는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트래비스는 조용히 로즈마린에게 이 순간의 주도권을 넘겼다. 그녀의

입술위로 짧은 미소가 스친 후 회의장 제일 앞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한 노신사가 일어섰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소. 내 이름은 알렉산더 세바스찬 홀릭스요"

다시 한 번 장내는 놀라움의 탄성소리로 술렁거렸다.

영국에서 건너온 홀릭스란 인물은 이미 그들에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확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백작가문에 대대로 막대한 부를

자랑하고 있는 재계의 숨은 실력자 중 한사람이다.

"그녀가 바로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로즈마린이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하겠소."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를 박수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가슴 벅찬 감회로

눈앞이 흐려진 해리엇은 트래비스가 그녀에게 다가와 긴 팔로 그녀를 감싸

Page 61: 로즈마린의 사랑

앉은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여러분 잠시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로즈마린의 정체가 여기서 이 아름다운

여자 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현하시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더불어 중요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해리엇은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몰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보고 잠시 싱긋 웃어준 뒤 그가 계속했다.

"그녀의 이름은 해리엇 콘디어스입니다. 여러분들도 재계에서 한때 '검은

여우'로 불렸던 로버트 J 콘디어스를 기억할 겁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죠."

다시 한번 놀라움의 탄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아울러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서 저의... 피앙세를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해리엇 콘디어스입니다."

더 이상 놀라움과 충격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연단을

향한 사람들의 표정은 트래비스로 하여금 적절한 만족감에 빠져들게 했다.

"약혼... 이라뇨?"

해리엇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전혀 그런 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해리엇, 사랑하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할거요. 때문에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하는 거요. 죽음이 우릴 갈라놓는 순간까지 내 사랑을 받아야 할

테니까."

해리엇은 충격과 함께 그의 자만심에 대해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는 자신의

설레임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아주 중요한 한가지 진실을.

이미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그의 얼굴을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요 사랑해요.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때문에 난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 거죠. 죽음이 우릴

갈라놓는 순간까지 당신 역시 내 사랑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